조나단 에드워즈 신앙부흥
오늘 강의의 방향과 한계에 대해 말씀 드리고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처음에 제가 우리 세미나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에 관해 발표를 하겠다고 했는데, 사실은 이제 조사를 하다 보니까 조다단 에드워즈 이전에 이미 여러 번의 부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기에는 그냥 캄캄했던 시대에 조나단 에드워즈 한 사람에 의해 부흥이 일어난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전에도 이미 크고 작은 다양한 부흥들이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부흥들을 살피다 보니, 에드워즈 부흥 자체보다 그 부흥이 일어나게 된 맥락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 자신의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따로 한번 발표를 하도록 하고, 오늘 이 시간에는 에드워드 이전의 부흥, 그리고 에드워즈가 노샘프턴에서 부흥을 보고 윗필드와 함께 사역을 할 때에 일어날 일들의 개관을 살피면서, 부흥을 통해서 지금 우리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는가 하는 점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1페이지를 펴십시오. 교회는 세상가운데 있으며, 그 세상에 영향을 주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점에 있어서, 교회의 역사는 세상의 역사는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신앙이 부흥할 때는 반드시 세상이 사회의 도덕적인 수준이나 윤리적인 변혁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수많은 크고 작은 부흥들을 통해서 기독교의 본질을 간직하고 또 전수해 왔습니다. 오늘날 부흥에 관한 오해 중의 하나는 교회가 이 신앙부흥을 개인적인 영적요구의 만족이나, 교회 자체의 성장을 위한 방편으로 오해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여기서 사용하는, 그리고 제가 설교시간에도 표현하는 부흥이라는 말 그 자체는,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그런 개념의 부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 주십시오.
그러면 부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살펴보겠습니다. 그 밑에를 보아 주십시오.
부흥이란 교회가 신적인 개입으로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심으로, 교회 자체의 원래 모습을 급격히 회복하여, 신약성경에 제시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부흥에 대한 정의를 다양하게 내리지만, 저는 그렇게 내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부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놀라운 신적 개입으로 말미암아 아주 빠른 속도로 교회가 신약성경에 계시된 그런 모습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부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부흥은 이제껏 까지 구현하지 못한 그런 별다른 교회의 모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런 교회의 모습으로, 가까이 그것도 신적인 개입으로 아주 빠른 속도로 돌아가는 것, 돌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 그것이 부흥입니다. 그렇게 돌아간 모습이 부흥된 모습입니다.
오늘날 성령운동과 부흥의 추구는 단지 성령의 역사하시는 수준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니라, 아, 그 위에 빠졌네요. 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인격을 체험하게 되며, 부흥에서 중요한 것은 ‘체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선택하실 때 의도하셨던 그런 관계로 돌아가서 그런 관계를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령운동과 부흥의 추구는 단지 성령의 역사하시는 수준에 있어서의 차이가 아니라, 물론 수준도 차이가 나요 그러나 성령운동은 은사와 이적을 추구하는 데 비하여 부흥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인격의 탁월성을 추구하며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흥은 죽은 자와 방불한 교회에 나타나서, 하나님이 홀로 만유의 주인이시며 다스리시는 이이시며 심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말하기를 이 시대의 가장 커다란 죄악이 둘이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미루어보면 알 수 있지만, 어떤 시각에서 보면 뒤편 강의에서 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각을 가지고 여러분이 보냐하면 여기는 이제 다양하게 부흥의 시대에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했던 것이 나오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성령을 체험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그러한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얘기하는 성령운동을 통해 맛보는 은혜의 체험과 부흥을 통해 맛보는 은혜의 체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중에 하나가 뭔가 하면 사람들이 성령은 굉장히 많이 받았는데, 성령을 받을 때 일어나는 인식의 변화 쉽게 말하면, 성경이 열리는, 즉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거룩한 역사에 대한 전망 그런 것이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희귀하게 우리에게는 그런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를 경험해도 인식의 변화는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그 당시에 헬라 철학이라든지, 유대주의라든지, 헬레니즘이라든지 다양한 사상의 물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통적인 유대인이었고, 철저한 유대교의 가르침을 통해서 성경을 배웠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그 사람이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다메섹에서의 예수님과의 만남 사건이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제일 먼저 죽은 자를 살리는 위대한 능력을 받은 것, 그것이 먼저가 아니라, 우선 그에게 일어난 것은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를 그리스도요, 주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그 한순간에 구약에서 배운 그 수많은 사상, 그 혼돈된 그 수많은 사상들이 일시에 정돈되면서, 그 구약의 모든 역사가 그리스도 한분을 보며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신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기독론과 구원론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누군가 하는 문제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 것인가 하는 문제, 그 문제가 그리스도 예수를 체험하면서, 개인적인 부흥을 경험하면서 단숨에 풀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설교하게 되었을 때 이전에는 생각해 낼 수 없었던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교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이 볼 때에는 미친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정말 구약을 제대로 풀어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한 사람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했다고 하는데, 도무지 이런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기이한 의문을 가지고 봐야할 문제입니다.
또 한 번 봅시다. 교회의 부흥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구원과 사회변혁에 커다란 영향을 가져옵니다. 이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으므로 부흥이라는 주제자체가 개혁주의와 청교도의 신앙에 전통을 떠나 논의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조지 마즈던(George M. Marsden) 같은 학자가 18세기의 신앙부흥의 뿌리를 경건주의와 연관 지어 설명하려 한 것도 이런 영향이었습니다. 물론 경건주의와 18세기에 일어났던 부흥이 밀접한 영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나중에 보면, 알지만 미국에서 18세기에 가장 먼저 부흥을 경험했다고 하겠습니까? 역사적 자료에서 초기에 부흥을 경험한 사람으로 나오는 프렐리 하이젠(Theodore J. Frelinghuysen)이라고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이미 경건주의에 깊이 뿌리를 둔 사람입니다.
그러면 경건주의(Pietismus, Pietism)는 어떻게 됐냐? 경건주의는 17세기 초반부터 시작해서 18세기 중반까지 뻗어난 독일에서 일어난, 경건운동입니다. 그 뿌리가 어디에 닿느냐 하면 퓨리턴에 닿는 것입니다. 퓨리턴은 벌써 16세기에 형성된 걸로 보잖습니까? 최초의 청교도를 막스라고 봅니다. 거기에서부터 벌써 뿌리가 닿습니다. 경건주의의 시초가 그 1세대에 속한 사람들이 탐독한 책이 청교도에 대한 책입니다. 청교도 사상이 그들에게 들어오고 또 그들은 그 나름대로 엄격한 칼빈주의의 교리들을 수용하는 대신 청교도 사상을 많이 받아들이면서도, 죽어가는 교회를 향해 어떻게 하면 이 교회들이 살아나는가하는 교회의 부패상들을 알리고 민족의 역사 앞에 교회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운동들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유명한 책이 필립 야콥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의 『피아 데지데리아(Pia Desideria)』 라는 책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미 『경건한 소원』 이라는 책으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이건 교회개혁을 향한 비전입니다. 아니면 이런 책 『황폐한 시온에서의 외침』 뭐 이런 책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경건주의가 일어나게 되었는데, 경건주의와 퓨리턴이 어떻게 다른가 하면, 청교도 주의는 굉장히 포괄적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역사적 사명, 유신론적인 교회의 사명,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사회 구석구석을 침투해 사회 자체를 거룩한 공동체로 만들려는 역사를 향한 소명, 집념 같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경건주의로 들어오면서 그런 것들이 약화되면서 개인적인 회심 개인적인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 성결한 삶 그런 것들이 굉장히 강조가 되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두 흐름은 상당한 차이가 있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웨슬리 브레디(J. Wesley Bready)의 작품이 하나 나오는데 “England : Before and After Wesley”입니다. 웨슬리 이전의 영국과 웨슬리 이후의 영국을 비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웨슬리 이전의 사회가 얼마나 도덕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었는데, 웨슬리의 신앙부흥이 그렇게 소망 없는 사회를 어떻게 변혁시켰는가 하는 문제를 부흥의 사회 변혁적인 효과라는 측면에서 다룬 책입니다. 이 책이 나온 것이 1929년이니까 상당히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교회의 부흥이 단순히 개인의 영혼의 구원이 아니라 사회 변혁에 필연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 것을 이제 변론한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신앙부흥이 사회변혁에 미치는 영향에 관심을 갖게 했다는 것에서 바람직한 논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이제 1차 대각성 운동을 이야기하기 전에 영국의 상황을 이야기해야겠습니다. 여기서 1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1774년 이전이기 때문에 아직도 뉴잉글랜드 시절이었습니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1차 대각성이 끝난 것이 1744년 이라고 보니까 이미 1차 대각성 운동은 여기 미국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것은 뉴잉글랜드 시절에 끝난 이야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과는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영국 상황을 보겠습니다.
브레디에 의해 보도된 18세기 웨슬리와 윗필드 신앙부흥 이전의 영국은 매우 타락하고 부패한 상태였습니다. 유흥을 위한 심한 동물 학대, 가령 무슨 투견이랄지, 닭싸움이랄지 하는 것들, 서민들의 알코올 중독, 아프리카 흑인들에 대한 노예사냥 및 매매가 있었습니다. 그때 막 산업부흥이 일어나면서, 외국으로부터 동력을 공급해 주는 계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렇게 체결된 노동력을 가지고 그 사냥터로 나간 것이 누군가하면 영국 사람들입니다. 아프리카 가서 토인들을 잡아다 노예 선에 태워 파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지은 찬송가가 하나 있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그 찬양 지은 사람이 그 노예 상이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을 납치해 인신매매, 빈민가 어린이의 높은 사망률, 노름, 잔혹한 감옥의 규칙과 피비린내 나는 형벌, 극장의 퇴폐적인 운영, 무법한 무정부상태, 외설적인 사회 분위기 , 정치의 부패, 공직자의 뇌물 수수, 성직자의 오만과 횡포, 이신론 유행(하나님이 세상을 만들긴 했지만, 지금 이 세상에 간섭하여 다스리지는 않는다, 라는 견해. 세상을 시계태엽처럼 만들어 놓으니 그 다음엔 자동적으로 굴러간다는 사상을 말함) 철학과 기독교 신앙의 합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철학적인 존재자로 떨어지게 되고, 매일 매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며 살아가야 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디트리히 본회퍼 같은 사람들은 이것을 성숙한 사회의 개념으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세상의 역사가 미개하였을 때에는 하나님이 간섭하여 다스리고 통치하고 섭리했지만, 이제는 세상의 역사가 성숙했으므로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하늘에 계시고 인간 역사는 인간역사대로 움직인다. 그런 이신론들이 이제 유행하는 것입니다. 자연신교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리고 위선과 타락 등이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한 어떤 설명이 될 수 있는데, 형법이 얼마나 참혹한지, 그 당시 2실링(얼마나 당시에 큰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 돈을 훔친다든지 하면 사형이었습니다. 자기 얼굴에 시커먼 칠을 하고 다녀서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면 사형, 그랬습니다. 그때 유명한 게 ‘행잉 쇼(hanging show)’ 라고 했는데, 공로상에서 많은 사람을 모아놓은 가운데 이 사형수들을 목매달아 죽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걸 즐긴 것입니다.
부패한 사회를 막기 위해서 법을 엄격하게 하는데 세상은 더 타락하는 양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매우 타락한 상황이 되었고, 당시 영국 공직자들의 부패는 매우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국의 모든 사람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집 지하에 반드시 술집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춤을 출수 있는 홀을 갖춘 것입니다. 그런 삶을 영국이 영위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소망이 없는 그런 상태였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 사가들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에 두 갈래의 커다란 복음주의적인 부흥을 교회사가 경험했다고 봅니다. 이것이 두 개인데 뭐냐 하면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18세기의 영적 대각성과 복음주의 운동입니다. 이것은 19세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2차 대각성 운동이라고도 불러요. 이렇게 미국에서 두 차례에 걸쳐 영적 대각성이 일어나는데, 18세기에 1차 대각성 19세기에는 2차 대각성 이렇게 나뉘었습니다. 1차는 조나단 에드워즈로 대표되는 영적 각성이었고, 2차는 다시 두 개로 나누어 져요. 1기와 2기로 나뉘는 이 때 활동했던 사람이 찰스 피니입니다. 그래서 다시 22년까지와, 다시 22-44년 까지 이렇게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18세기에 일어났던 1차 대각성 운동과 2차 대각성 운동의 차이는 뭐냐 하면, 1차 대각성에는 대단히 순수했습니다. 2차 대각성에 와서는 이것이 evangelastic campaign 형태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전도 운동의 스타일로 바뀌었습니다. 이 운동을 주도했던 찰스 피니 자체가 펠라기안(pelagian)적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펠라기안은 구원에 있어 신인협력을 말하는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전적 타락 등을 믿기는 했지만, 정통적인 구원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제든 인간이 하나님이 원하는 조건을 갖추게 되면 부흥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순수한 부흥을 말하던 18세기와 비교해 볼 때 사뭇 다른 양상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가지로 구별하는데 1차 대각성 운동, 2차 복음주의 부흥운동 이렇게 나뉩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최초로 건너온 사람들이 두 부류입니다. 맨 처음 우리들이 학교 사회시간에 배운 필그림 파터(philgrim father) 이 사람들은 퓨리턴들이 아니라, 회중교회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1620년에 이 사람들이 바로 플리머스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 뒤를 이어서 바로, 온 사람들이 퓨리턴들이었는데, 1628년에 매사추세츠만으로 입하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사상적으로 계몽주의 영향 하에 있었습니다. 18세기에 합리주의가 일어나게 되면서,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과학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합리주의 사상이 계몽주의 영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신앙이 합리적인 사고로 대치되었고, 신앙적으로는 이신론이 유행하여 사람들은 신앙에 무관심하게 되었고, 열렬한 신앙생활은 말하자면 전근대적인 어리석은 사상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고가 팽배하게 되었습니다.
신대륙의 건너온 이 사람들의 이상은 예배였습니다. 예배. 이들은 국가의 간섭 없이 예배를 드리고자 했던 이 사람들은 교회를 세우고 궁극적으로는 성경적이고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는 교회와 세상이 구별되지 않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상 그대로 세상에 나가 생활하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결국 어떤 일이 있었어야 하냐면, 교회의 회원이 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해야 했습니다. 가짜가 들어오면 그 가짜 때문에 공동체의 질이 떨어지니까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 후손들이 선조들의 신앙을 그대로 계승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에 건너온 사람들은 두부류였는데, 신앙 때문에 건너온 사람들과, 경제적 이익 때문에 건너온 사람 두 부류였는데, 이 경제저기 이유로 건너온 사람들은 더 빨리 타락했습니다. 자기 시대부터 타락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이유로 온 사람들은 1세대까지는 그런 신앙이 유지되는데, 2세대부터는 잘 유지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벌써 건너온 지 50년이 채 되지 않아 목사들이 개탄하리만큼 세상이 바뀌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금 캐는 문제, 서부 개척사 보면 나오잖습니까? 재물, 부동산 취득 등에 혈안이 되어 자기 신앙을 팔아먹고 자꾸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뭐가 일어나면 하프웨이 카비넌트(Halfway covenant) 라고 하는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건 우리말로 번역하면, 반쪽 언약 이다 이렇게 번역해야 하는데, 무슨 얘기냐 하면 교회에서 그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이니까 유아세례를 받았을 거 아닙니까? 일단 세례를 받았는데, 이 사람들이 다 성찬에 참석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회심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 자녀답지 않은 사람에게 성찬을 허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세대가 지나고 2세대가 되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거기서 가려내가지고 진실한 표징을 가지고 있는 진실한 신자(명목상 신자가 아니라)에게만 성찬을 준다면 성찬을 받을 사람이 몇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찬을 못 받게 되는 사람들은 교회 앞에서 명목상의 신자일 뿐 진짜 신실한 신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이 그러니까 분명히 교회는 아닌 걸 알면서도 타협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교회는 끊임없는 회심과 참회의 역사가 계속 영적 삶 속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기본적으로 교회가 교회다워 질 수 있는 그 규칙을 유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안 되는 걸 어떻게 합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집사나 장로쯤 되면 주일날 빠지면 안 됩니다. 그런데 빠집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자꾸 타협의 여지를 주는 것입니다. 교회 선생 아무나 세우면 안 되잖습니까? 그런 높은 자격,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자격에 맞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어떡해 기준이 자꾸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고등학생 데려다가 라도 시키는 거지. 어떡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자꾸 내려가는 것입니다. 이런 걸 이미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할아버지로 제가 기억되는데, 솔로몬 스토다드라고 아주 유명한 영적 목사님이었는데, 그 목사님이 그 논쟁에 말려들면서 회의를 하게 되는데 이 솔로몬 스토다드 목사님이 솔선해서 하프 카비넌트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찬을 주어야 된다는 결론을 이끄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갈등은 해결이 됐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내 갈등은 해결이 되었지만, 반쪽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교회 내에서 인정을 해주게 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 전 같으면, 하나님 자녀답게 안 살고 악을 행하면 성찬을 못 받는다. 이렇게 자극을 주었는데, 이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까 길을 열어줘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에서 이루기를 원했던 교회의 모습으로부터 자연히 멀어져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중생의 체험이 없더라도 타락하지만 않았다면, 명목상의 신자라도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 라는 현실 타협안을 교회 내에서 공식 입장으로 내세워 청교도의 원래 모습에서 멀어지고 형식적인 신자들의 내용 없는 신앙생활을 정당화하는 혼란을 야기 시켰습니다. 교인들이 이같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며 영적인 기류가 급랭하고 있을 때 성직자들도 같은 문제를 안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돌보아서 변화시킬 생각은 안 하고 맨 여우 사냥이나 다니고 대 농장 지주들이 열어 놓은 연회에 초대 받아 사교나 즐기고, 그런 성직자의 문사 안일주의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각성하고 변혁을 갈망하는 마음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찬과 예배에 대한 거룩한 존중은 사라지고, 예배시간에 조는 시간이 많았으며, 가정에서 자녀들에 대한 교리교육, 성경 읽기 등의 경건한 삶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야비하고 조잡한 언행이 교인들 가운데서 일상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 한 인용문이 나오는데, 첫 번째 나오는 게 조나단 에드워즈 전집에 보면 “The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 이라고 해서 놀라운 회심에 관한 기사가 있습니다. 매우 유명한 기록인데, 이 부분들을 번역해 실어 놓은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제 개탄하는 것입니다. 그가 노스햄턴에 세 번째 목사로 부임하는 것입니다. 첫째 목사님 후임으로 스토다드 목사님이 오고, 그 다음이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갑니다. “나의 할아버지(스토다드 목사님) 돌아가신 후 그때는 신앙에 극도로 무심한 시기로 보였습니다. 도시의 청년들은 매우 방종하게 행동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은 밤거리를 싸돌아다니며 술에 취해 방탕했으면, 일부 사람들은 매우 심하게 타락해 버렸습니다. 남녀가 함께 모여 밤 새우며 희희낙락하면서도 가정을 돌보지 않기 일쑤였습니다. 그들에게 가정이 있다는 사실 조차도 그들의 방종을 막는데 조금도 도움 되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와 살았더라면 마을이 그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토레이라고 하는 목사님의 증언이 나오는데 “뉴잉글랜드의 정신은 변했고 시대는 죄악상으로 부패해 있었습니다. 교만과 세상 중심의 사고, 감정을 따라 사는 것, 위선 형식주의 순결을 잃어버린 생활, 그리고 타락한 예배 등이 만연한 세상이었습니다. 1679년, 그러니까 청교도들이 건너온 지 정확하게 딱 50년 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 어떤 문제가 벌어지게 되었냐면 정부 자체가 세상이 왜 이렇게 흘러갈까 하는 우려를 할 정도였고 이렇게 흘러가다간 큰일 나겠다 하는 마음의 각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의 목사님을 불러 두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그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가운데 있는 죄악을 찾아 달라,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런 것들을 고치겠는가? 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메드라고 하는 목사님이 1680 년경에 설교 중에 개탄한 내용이 나옵니다. “스러져가는 경건의 능력이 회복되기를 거절하는 여러 가지 그릇된 경향은 연속적인 재앙으로 징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을 떠나는 변절자는 감소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가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올바로 걸어가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하게 썩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 뉴잉글랜드에 옛 정신들은 눈에 띄게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특히 옛 성도들이 우리 속에서 사라져 버렸듯이. 오히려 그 정신을 대신해서 엄격한 경건의 정신을 무시하는 한탄할 만한 시대정신들이 파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 자녀들 속에 부모가 경험했던 같은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 신앙 자체가 그대로 기계적으로 전승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여호수아 시대에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1세대들이 죽으면서, 그 후손들이 그 신앙이 조잡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니까 이런 부흥이 시대를 지나면서 매번 경험이 되어야지 경건이 유지 된다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한탄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사라진 교회의 영광을 지적하며 예언자적으로 외쳤던 사람이 나와요. 많이 나오는데, 인크리즈 메더(Increase Mather)를 제가 인용하면서 대단히 마음이 저미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 자료에서 한두 가지씩만 살펴봅니다.
“우리는 뉴잉글랜드에서 선한 옛 청교도 비국교도의 후예로서 엄격하고 거룩한 사람들이다. 대륙에서 하나님을 따랐던 사람들이 우리 조상들이다. 아, 뉴잉글랜드 뉴잉글랜드 그대로부터 영광이 떠나지 않았는지 보아라. 이제 그 영광은 떠나기 시작하였도다. 아 떨리는구나. 영광이 있다손 치더라도. 우리가 감사드려야 할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손 치더라도, 많은 것들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나이 든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반세기전, 뉴\잉글랜드가 어떠하였는지 기억하는가? 초창기의 영광 가운데 있던 교회들을 모욕하였도다. 오늘날 많은 모임에서 온전한 회개가 드물지 않는가? 그리고 설교단을 보라”
그러니까 여기서도 결국 문제가 뭔가 하면, 회심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회개가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옛 선조들의 신앙이 자손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영광이 거기 있었는지 보라. 거기에는 학식이 뛰어난 선생들과 거룩한 인물들과 목회자들이 있었다. 보스턴이 언제나 카튼과 노턴같은 인물들을 만나보게 될 것인가? 우리 뉴잉글랜드가 언제 다시 후커나 세퍼드 미첼같은 거룩한 말씀의 종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란 말인가? 이 리차드 후커나 쉐퍼드 이런 사람들은 이미 미국으로 건너오기 이전에 영국에서 굉장히 수준 높은 신학자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신앙 고백서가 만들어 지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 청교도 신앙이 파수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목사 그러면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영적인 아버지였습니다. 지적인 면에서나 인격적 면에서나 탁월한 거목들이었습니다. 그 거목들 아래서 청교도들이 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신학교 때 늘 그런 말 했습니다. 여러분이나 내가 200년만 뒤로 돌아 가면은 청교도 시대의 교회에 가서는 아마 유년부 선생님도 못할 거라고 그랬습니다. 아주 영적인 거인들이었습니다. 그 거인들이 무릎을 꿇고 감화를 받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영광 위해 사는 그런 것들을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지는 것입니다. 부흥이 사라지면 영적 거목들도 함께 사라져요. 교회에 어른이 없는 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혼란이 오는 길로 가습니다. 백성이 왕이 없으니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산다는 그런 예언이 맞아가게 되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인크리즈 마더(Increase Mother)라는 사람이 “The early piety”라고 번역하자면 『초창기 이주민들의 경건』 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대단히 감동적입니다. “뉴잉글랜드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사람이거나 적어도 한 때는 그러했습니다. 우리의 선조들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황량한 신대륙의 벌판으로 들어왔습니까? 그것은 지금 우리처럼 부동산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자녀들이 진정으로 믿음의 사람 되기를 바라며 세상을 뜨셨습니다. 지금부터 70여 년 전에 이 세상에 가장 많은 회중 앞에서 설교하시던 유명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라에서 7년을 살았지만, 사람들이 세속적인 농담을 하거나 술 취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초창기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왔을 때의 사회였습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교회가 가장 신약성경에 다가갔던 때를 두 번을 들었습니다. 그게 언제냐 하면 종교개혁 시대와 청교도 시대입니다. 한번 그 사회를 상상해 보십시오. 7년 동안 이 사람이 신대륙에 와서 살았는데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일상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데 아무도 상스런 욕을 하거나 술 취해 비틀거나 남을 헐뜯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늘나라와 방불한 삶을 살아 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정도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어디인 줄 아십니까? 바로 뉴잉글랜드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뉴잉글랜드는 타락해 버렸고 여러분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어떻게 해서 그 전에는 들어도 볼 수 없던 죄악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공공연한 것이 되었습니까?”
그리고 이제 대각성이 준비되게 되어 가는데, 조나단 에드워즈를 통한 영적 각성과 부흥이 있기 전에 이미 이런 큰일들에 대한 조짐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설교 사역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는 1차 대각성의 도구로 쓰임 받기 이전부터 그 사람보다 앞선 선구자들을 세우셨고, 여러 증거들을 보이셨는데, 그게 더치 리바이벌하고 스카치 아이리시 리바이벌입니다. 하나는 화란계 교회서 일어났고, 하나는 영어를 사용하는 스코트 아일랜드 교회에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교회에 나타났던 현상과 거의 똑같은 동질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1720년-30년 사이에 일어나는데, 이때 쓰인 사람이 데오도르 프릴링하이젠(Theodore J. Frelinghuysen)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1720년에 미국에 건너와 목회를 시작했으니까 1720-30년 사이에 부흥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건너와 화란계 이민들을 목회하다 에드워즈 시대에 일어난 것과 동질의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부흥은 다시 26년을 기점으로 영어권 이주민들에게까지 번져가게 됩니다. 그래서 스코트랜드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에게 까지 번지게 되는데, 이때 영어권 이주민을 목회하기 위한 사명을 가지고 오게 된 사람이 길버트 텐넌트(Gilbert Tennent, 1703∼1764)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1차 대각성 운동에서 기억해둘 만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뉴 브론즈비크에서 식민시대의 신대륙 장로교의 효시로 봅니다. 그러니까 장로교 최초로 여기서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면 윌리엄 텐넌트(William Tennent)입니다. 이 사람은 영국에서 건너와서 그 원래 이 사람이 아일랜드 감독교회의 사제였는데, 신대륙에 건너와서 장로교와 손잡게 됩니다. 오자마자 신학교를 하나 세웁니다. 그게 로그 칼리지(Log college) 인데 번역하면 통나무 신학교입니다. 여기서 처음에 19명 신학생으로 학교를 세웠는데, 그 중 4명이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4명 중 하나가 길버트 텐넌트이었습니다. 거기서 철저한 신학교육,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논리학 이런 신학교육을 철저히 시키면서 그 위에 열정적인 복음주의 정신을 불어넣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곳에서 태어난 통나무 신학교 설계자들이 1차 대각성 운동에서 대단히 강력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이 학교 나온 사람이 바로 길버트 텐넌트이었습니다. 이 로그 칼리지가 나중에 발전하고 발전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초대학장으로 취임한 지금의 프린스턴 대학이 됩니다. 그래서 이 텐넌트 목사의 설교를 윗필드가 한번 영국에 건너와서 듣게 됩니다. 그리고 뭐라고 평가했는가 하면 “그는 사람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우레의 아들이다. 그의 설교 앞에서 위선자는 회개하든지, 설교하는 텐넌트에게 분통을 터뜨리든지 둘 중 하나를 하고야 말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은 적중하게 됩니다.
에드워즈와 함꼐 1차 대각성 운동의 아주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캄캄한 역사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 다음이 이제 텀턴과 노스햄턴 이 노스 햄턴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목회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윔던에서의 부흥이 있습니다. 텀턴입니다. 1705년 2월에서 3월 경 텀턴에서는 마을의 젊은이와 여성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신비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교회를 감동시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무감각한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의 영적인 상태에 대해 근심하기 시작했으며, 사교를 위해서 만나던 모임이 기도 모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규칙을 제정하며 준수하고 기도했습니다. 특히 가정에서의 기도모임이 진행되면서, 거리를 배회하며 무질서하던 행동들이 급격히 감소하게 됩니다.
이때 사용되었던 목사님이 누군가 하면 섀무얼 댄포스(Samuel Danforth) 라는 목사님이었습니다. 이때 일어난 일들은 언약 갱신의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은혜 받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생활의 규칙을 교회서 선포합니다. “주일은 거룩히 지키겠다. 야비한 말을 하지 않겠다. 다른 사람을 헐뜯는 일을 삼가겠다.” 쭉 목록을 작성해서 그것을 읽을 때에 의식의 절차를 거쳐 아멘하고 거기 서명함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겠다는 서약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즈 때에 나오게 되는데, 에드워즈 이전에도 이미 이런 서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언약 체결의식을 새롭게 가지며 섀무얼 댄포스가 보여준 증언입니다.
“3월1일은 가장 편안한 날이었습니다. 전에 말한 개혁 언약을 갱신하는 예식을 가진 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게으름과 유흥업소의 출입, 예배시간에 걸맞지 않는 행동, 가정 기도 소홀히 함, 남을 욕하고 그 얼굴에 먹칠하는 명예훼손 행위 같은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일에 동참하기로 언약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가정에서는 질서를 회복하고, 정부의 하는 일에 복종하기로 했습니다.” 가정 질서가 깨어졌던 것들이 이렇게 회복되기 시작하는 거였습니다.
“오전에는 형제자매들 앞에서 읽었고, 마음으로 이 같은 언약에 동의하는 표시로 그들은 기립하여 있었습니다. 오후에는 나머지 사람들 앞에서 읽었는데, 역시 모든 사람들이 종이에 쓰인 것을 들고 서서 상자에 집어넣어 교회 기록에 남기도록 했습니다. 오전의 성경 구절은 히브리서 12장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모두 죄와 더불어 철저히 싸워야 함을 강조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성경구절은 역대하 29장이었는데, ‘이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그 맹렬한 노로 우리에게서 떠나게 할 마음이 내게 있노니’ 이었습니다. 우리는 16세 이상 된 모든 남녀에게 자유를 주어 이 같은 일들을 위한 우리 활동에 함께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죄에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싸울 300명의 이름이 제출되었습니다. 돌 같이 굳은 마음을 누그러뜨리듯이 애정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이렇게 언약식에 자기네 이름을 적어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광경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얼마나 감격적이었겠습니까? 망나니로 살아가던 자식이 언약서에 스스로 서명하며, 내가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며 그걸 이름을 적어 교회 통에다 집어넣는 그 광경을 부모들이 감격해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노스햄턴에 부임하기 전에 이미 노스햄턴이 부흥을 체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명의 전임자가 목회하는데 한 분은 에버네즈 매더라고 하는 분이었고, 에드워즈가 이 교회를 담임하기 전에 이미 스토다드가 5번의 괄목할 만한 영혼의 부흥이 있었는데, 이것을 에드워즈는 영혼의 추수기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와 같은 축복은 1679년 1683년 1696년 1712년에 일어났습니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이렇게 술회합니다.
“솔로몬 스토다드 선생님이 (왜 선생님이라고 표현 하냐면 안수를 늦게 받으셨습니다) 에버네즈 목사님이 작고하신 후 11월에 이곳에 오셨습니다만, 72년 11월까지는 안수를 받지 않으셨고, 1729년 2월11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이곳에 오셔서 약 60년 정도 목회를 하셨는데, 그분의 재능과 관대함이 뛰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목회사역에서 1683년 1696년 1712년의 열매는 첫 번째와 마지막보다 훨씬 더 큰 것이었습니다. 제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바로는 매 경우마다 마을의 청년들이 자신들의 구원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미 에드워즈 이전에 노스햄턴에서 부흥을 체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이제 윈덤에서 1721년에서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쓰인 사람이 누구냐 하면 사무엘 휘칭 목사입니다. 짧은 동안에 도시가 완전히 신앙으로 변화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많은 교인들이 구태의연한 신앙에서 새로운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때 목격한 사람이 아담스 목사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할까하고 아주 진지하게 물을 정도로 깨어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영혼의 변화의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었지만, 모여 주를 찾기 시작해 6개월 내에 가담한 사람이 약 80명 되었습니다. 이런 서울 같은 데가 아니라 시골의 작은 마을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의 사역을 부흥케 하시어 성령을 더욱 풍요롭게 목회자와 교인들 위에 부어주실 때에 목회자는 더욱 분명하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이사야 51장 9절 “여호와의 팔이여 깨소서 깨소서 능력을 베푸소서 옛날 옛 시대에 깨신 것 같이 하소서 라합을 저미시고 용을 찌르신 이가 어찌 주가 아니시며” 이사야 예언자의 기도로 부르짖자! 나는 이제 이 지역사람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기 위해 떠납니다. 최근에 하나님은 여러분들 가운데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만약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각성되고 확신을 가지고 가정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가장들이 변화가 되었습니다. 가장이 변화가 되어야 가정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시대 청교도나 대각성의 시대에는 목회를 어떻게 했냐하면 남성 중심의 목회를 했습니다. 남자를 목회해서 자녀들도 인도하고, 남성을 통해 부인들도 제대로 예수 믿고 하는데, 요즘은 거꾸로 되었습니다. 여성을 통해서 하는데 잘 안 됩니다. 뭐 바쁘니까. 밥 벌어 먹어야 하니까, 하면서. 밥 벌어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부흥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 가운데 행하신 최근의 위대한 일들을 보면서, 여러분의 길을 더욱 견고히 하십시오. 여러분이 이미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어느 것도 여러분의 확신을 쉽사리 무너뜨리지 못하리라 확신합니다. 아, 주님이 일어나셔서 시온의 자비를 베푸소서. 그것을 원하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주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으로 전 세계가 뒤덮이는 영광의 시간 말입니다.” 이런 전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부흥에 대한 얘기하고는 너무도 다릅니다.
그리고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1727년 10월29일 하필이면 주일 다음날입니다. 엄청난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몇 명이나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 전역을 뒤흔드는 대규모의 지진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이 큰 충격을 주어서 어떤 지역에서는, 이게 바로 우리가 주일을 하나님 앞에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다, 하면서 통회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중 한 도시가 보스턴이었습니다. 교회가 가득차고, 사람들이 목회자의 선포를 들으며 회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지역에서 일어난 일련의 영적 각성과 신앙부흥의 사건들은 거기서 설교하던 프린스 목사 (유명한 사람입니다) 스웰 웹, 쿠퍼 목사 등의 글에서 나타납니다.
프리홀드 지방에서는 1730년과 그 이후 3년 동안 이미 괄목한 만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것 같은 비탄에 가득 찬 행동 이후에, 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울부짖게 되는 성령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무시무시한 영적인 압박에서 끌어 내사 당신의 도움의 빛 안으로 이끌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마음을 기쁨으로 채워 주셨고, 그들의 입을 찬양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철저한 무지에서, (줄쳐 보십시오) 이 부흥과 각성은 어떤 사람들을 거의 철저한 무지에서 매우 분명한 복음의 빛으로 변화시킬 뿐 아니라, 카톨릭 신자나 크리커 교도들과 같이 타락한 신앙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을 확실한 진리의 인식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이게 윌리엄 트넌트의 증언입니다. 이런 일들이 안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아도. 그러니까 옛사고 방식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인격도 거의 안 변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성령의 역사는 참으로 기이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았다고 막 그러는데 생각이 안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중심, 그리고 복음의 진리를 따르겠다는 이 당시에 쓰여 졌던 설교집이 어떤 거냐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런 책들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제가 요즘 다시 보고 있는데, 한번 보십시오. 진력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를 들으면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수준이 높아지는 거야. 한번 읽어봐요. 열 페이지 못 봐요. 철학적으로 쭉 깊이 들어가요. 성경을 강론해서 교리를 먼저 찾아낸 다음에 그 교리로부터 쭉 이끌어 나가는 것입니다. 한편의 설교가 2시간 가까이 진행되는 장시간 설교입니다. 그런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들은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놀라운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니까 더 깊은 복음을 아는 지식을 원하는 요구들이 사람들 마음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기 부응하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설교들이 선포되어야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오늘 날에 일어나는 부흥하고는 매우 다릅니다. 지금 줄친 부분입니다. 드디어 이제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역이 나오는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 사역가운데 동일한 부흥을 경험한 것은 이제 훨씬 후습니다. 그래서 프렐린 허이젠의 영적 각성과 부흥이 시작된 지 10년 정도 지난 1734 년경의 일이었습니다. 초창기 에드워즈의 설교는 칼빈주의에 교리에 근거하는 ‘이신칭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원래는 알미니안 주의였습니다. 알미니안 주의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전적인 타락이라든지 하는 것 보다는 인간의 가능성을 많이 말하는 교훈이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천재니까. 6살인가에 벌써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9살 경에 유물론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 밝히고, 13살에 히브리어 헬라어와 라틴어까지 마스터 했습니다. 그 헬라어도 우리가 신학교서 배우는 헬라어가 아니라, 아틱 헬라어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소크라테스나 아리스토텔레스, 유클리드의 기하학 뭐 이런 것들을 읽을 수 있는 아주 어려운 헬라어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예일대학을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길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시 1년 만에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19살에 그 대학 교수가 된 것입니다. 19살에. 여러분 19살에 뭐했습니까? 전자오락실에서 뿅뿅이 하던 나이 아니입니까? 대단했습니다. 그런 지성인에게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게 어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해가 안 가는 것입니다. 칼빈주의자가 아니었는데, 한번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체험은 여기 실려 있습니다. 원문에서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한번 보십시오.
“한번은 내가 건강을 위하여 숲속으로 말을 타고 들어간 일이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아마 대학원 과정에서 있었던 일인데 “내가 늘 하던 습관대로 나는 한적한 곳에서 말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하고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 나는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나에게는 매우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계신 중보자로서의 하나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는데 이것이 디모데 전서 1장 17절입니다. 한번 펴보십시오. 이 구절이 이 사람을 바꾸어 놓는 구절이 됩니다.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난 그 책을 읽고 나서 아무리 17절을 들여다보아도 뭐 그렇게 무슨 황홀한 경험이 안 일어나는데, 이 사람은 이 경험을 통해 무엇을 보았냐하면 절대자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 그 앞에 드러난 인간의 비참함, 그리고 그 사이에 계신 중보자 그리스도의 탁월함. 그러면서 완전히 선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로 하자면 로마서 1장이나 시편31편이나 갈라디아서 같이 그렇게 위대한 역사를 일으킨 그런 구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체험을 보면서 나는 누구를 생각 하냐면 이사야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6장의 영광의 체험을 하게 됨으로써, 그 신학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을 가지게 도비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만 영광 받으셔야 한다는 철저한 신앙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만 영광 받아야 된다, 이것이 죽을 때까지 그의 철저한 모토입니다. “나뿐만 아니라 너도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된다. 네가 영광 못 돌리면 나쁘다.” 이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안하는 일이라도 나는 한다, 이것이 이 사람의 신앙철학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때 나는 이상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내게는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중보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놀랍고 위대하고, 충만하고 순결하고 달콤한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함과 사랑 겸손함의 이상이었습니다. 조용하고 달콤하게.....”
이 스위트니스(sweetness) 라고 하는 단어가 에드워즈에게서 수없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달콤함’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 위의 위대한 것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비할 데 없이 뛰어난 성품이 드러났고” 여기 줄 치세요. 이게 바로 부흥이거든요. 그 다음에 “ 그 뛰어나심은 인간의 모든 관념들을 삼켜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이같은 이상에 대한 체험은 내가 생각하기로는 한시간 가량 계속되었습니다.”
체험이 참 기이하잖아요. 부흥의 시기에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격 자체를 체험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편견과 사상들이 그 하나님 은혜에 삼켜지는 체험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 아무리 잘못된 신학이나 잘못된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체험한 그 인격의 고매함 앞에 모두 삼켜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신학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성령의 체험하고는 사뭇 다르잖아요. 이런 것들이 부흥시대의 독특한 체험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시간을 흐느껴 울며 폭포수와 같이 쏟아지는 눈물로 시간을 보내게 하였습니다. 나는 내 영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달리는 어찌 말할 수 없습니다. 내 자신이 티끌 속에 누워 있었고, 그리스도 홀로 온 땅에 가득하심을 느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그 분을 공경하고 싶었습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같은 체험을 했지만, 그때마다 내게는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후에 어떻게 변하냐면,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에서도 잠깐 인용을 했는데 “그 후로 나는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읽거나, 그리스도에 관한 성품에 관한 한 단어라도 발견하면 나의 마음이 녹는 것 같았습니다.”
이 사람에게서 있어선 느끼지 못하는 신앙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거는 가장 악한 종류의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가 인격적으로 깊이 느끼는, 그리고 정서의 덩어리ㅡ 그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지식을 무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느끼지 못하는 지식, 체험하지 못한 진리는 참된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백성답게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체험이 결핍된 오늘 날의 신앙들은 많은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정말 뜨겁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전에 얼마나 차가운 사람이었냐 하면, 이 사람의 차가움을 보여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올라가기만 하면 칼 같이 설교하니까, 왜? 신방을 해보았는데 체질에 잘 안 맞습니다. 그렇게 침체되어 있던 시대에 목회자에게 원하는 것은 뭔지 훤히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걸 포기하고, 하루에 열세 시간 이상씩 매달려서 성경을 연구와 기도로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면 올라가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체험이 이미 이런 결심을 가지고 목회 했으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한다, 하는 주의입니다. 6년 동안 지옥에 관해 설교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이 사람 설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지금 이 설교가, 이 백성에게 하나님이 들려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냥 믿음의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로부터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이 백성들에게 나를 통해서 들려주고 계시다는 확신입니다. 그래서 그 확신과 속에 있는 체험과 영적인 능력 이것들이 함께 역사하면서 불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쓰여 나갔는데, 그렇게 타락한 시대에 듣기 좋은 설교를 하나님이 보내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옥에 관한 설교를 6년이나 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한 청년이 나가서 목 매 자살해 버립니다. 예배드리고 있던 사람이 교회에서 또 치는 종이 한 번 떨어진 일도 있었습니다. 교인 들이 수군댑니다. 왜 또 종이 떨어졌는지 아십니까? 그 줄을 에드워드 목사가 한참 째려봤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날카로웠는지 알겠습니다. 사진 보십시오. 얼마나 날카롭습니까? 칼빈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코가 칼 같습니다. 지성인들에게 배어있는 예리함 있잖습니까? 그게 있었습니다. 세 가지가 있는데 또 하나는 지금 생각이 잘 안 나는데 그거 읽고 나서 내가 혀를 내둘렀는데 그에게 딸이 있었습니다. 그 딸이 도회지에 나가서 대학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몸이 아프다고 편지가 왔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답장을 썼습니다. “내가 이렇게 너를 위해 편지하는 것은 네가 아프기 때문이 아니다. 네가 아프다는 핑계 하나를 가지고 신앙생활에 게을리 할까봐 편지 쓴다. 아파도 신앙생활 열심히 해라.” 아주 칼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나만이 아니라, 내 모든 사람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것에 있어서는 아주 타협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다 안 해도 이것이 옳은 일이면 나는 한다. 그런 순교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쓰실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후로도 여러 번 그런 체험을 하는데, 그 때 마다 같은 일이 일어나고, 설교 자체가 말하자면, 자기 체험이 깊이 녹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 체험 후에 그가 후일에 고백하기를 꼭 쓰고 싶은 책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뭐냐 하면 “History of redemption”입니다. 그러니까 뭔가 하면 『구속의 역사』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다는 완성을 못하고 일부를 완성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저술의 욕망을 가졌느냐 하면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니까 성경을 쭉 보면서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흘러가는 장엄한 구속의 물줄기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다메섹 체험과 똑같은 효과를 가져왔다고 나는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다시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역사를 체험한 것입니다. 다는 아니지만, 꽤 많이 완성을 해 놓고 죽습니다. 쓰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날 이야기하는 영력 있는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분명히 영력이 있는 것은 사실인데, 우리 같은 사람은 그런 것도 없지만, 설교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왕년에 영력 있었던 그런 사람들의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설교는 막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부흥에 관한 견해를 가지면서 가장 큰 갈등이 그것이었습니다. 똑같은 성령의 역산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해결의 실마리를 본 것이 마태복음 10장에서의 성령 체험과 사도행전 2장에서의 사도들의 성령 체험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알고 싶으시면, “신앙과 은혜체험” 속에 마태복음 10장과 사도행전 2장을 비교해서 두주에 걸쳐 다룬 테이프가 있습니다. 그걸 들으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에서도 귀신이 쫓기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권능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는데,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죽으셔야 하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부활할 것이라는 것은 더 모르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와 구약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구약은 구약대로, 예수님의 생애는 생애대로 감동은 감동대로, 은혜는 은혜대로 다 쪼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장의 체험을 통해서 다 열린 것입니다. 열리니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드로 헛소리 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랬습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래놓고 뭐라 그랬습니까? 아우, 죽으시면 안 되십니다. 하다가 사단이 뒤로 물러가라는 말까지 들은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뭔가 다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가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가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그 말만 남기고 가셨습니다. 남기신 것은 성령이 오리니 그가 너희를 진리 가운데 인도하리라는 말을 하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니, 베드로가 제일 먼저 뛰어나가 하기 된 것이 뭐냐 하면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을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뭐냐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가, 바로 주가, 그리스도셨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믿으라 그러면 성령을 너희가 받으리라” 그러면서 구속의 전망이 생겨난 것입니다. 구약을 새롭게 해석하는 일들이 가능해 진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데반을 비롯해서 바울 등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종류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갈등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는 해결을 봤습니다. 여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작가 중에 존 오웬이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는 번연 시대 사람입니다. 그 존 오웬의 저서에 보면 ‘성령의 조명’이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오늘 날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울 때의 ‘성령의 조명’ 이라는 개념하고 엄청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는 우리가 성경을 보거나 뭘 볼 때 성령이 오셔서 깨닫게 해주시는 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웬의 경우에는 이 성령의 조명에 대한 개념이 훨씬 높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더 이상 성경이 알 수 없는 사상의 뭉치거나, 혼자 접근하기에는 너무 난삽하거나, 교훈이 쪼가리로 돌아다니는 그런 잡동사니의 덩어리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경이 어느 한 순간 조리에 맞게끔 기가 막히게 꿰어진 한 가닥의 역사를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부흥을 경험한 시대의 모든 설교자들, 심지어는 평신도들 까지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언 1장 1절서부터 3장 18절 까지 설교를 뭐 18년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드는 것입니다. 앉아서. 그렇게 따지면, 로이드 존스가 13년 동안 로마서 10몇 편까지 나간 거는,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우스운 게 되는 것입니다. 깨알 같은 글씨로 6000천 페이지, 4000 페이지.....어느 부분을 보아도 그냥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그렇고 보면, 성경 한 구절을 폈는데, 성경 전체를 달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전망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설교 자체가 어느 부분을 펴든지 장엄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어떻게 보면 잘 안 팔립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목회자들이 사가지고 가서 이렇게 펼쳐서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저녁에 어떻게 한번 써볼까 하면, 이게 할 게 없습니다. 통나무처럼 길게 매달려 어느 한 부분 가지고, 자기가 딱 떼어서는 자기 신앙 상식으로는 어떻게 요리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목사님의 설교 같은 경우는 한 챕터 쭉 일고 죽 찢어 올라가면 한 회 설교가 가능한데, 로이드 존스의 설교는 그런 식으로 안 됩니다. 그러니 급한 사람이 쓸 수가 없고, 그래서 잘 안 팔립니다. 사다만 놓지 잘 안 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설교를 읽어보면 특징은 뭐냐 하면, 한 페이지만 봐도 드는 인상이 ‘깊다’라는 것입니다.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어쨌든 ‘깊다’라는 인상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가 모든 청교도,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흥을 경험했던 사람들의 공통적인 말씀 체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경우는, 철저한 원고주의 설교자였지만, 그러나 성경 전체를 내대보는 장엄한 신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신학생들 10명에게 주어도 2명이나 읽을까 나머지는 지겨워서 못 읽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당시의 청교도들은 작은 신학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열심 하나, 예수 내 구주 하나, 그런 눈물 가지고 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커다란 유신론적인 신학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수준의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니, 설교자가 어떤 수준이어야 했는지 한번 생각해 봐요. 단순한 열정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보십시오. “노스햄턴의 영적 각성과 부흥”
1733년 말에 와서 노스햄턴의 젊은이들의 에드워즈의 신앙적인 권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후 계속된 영적 각성과 부흥에는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에 인생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인간의 처지를 인식하게 만드셨는데, 이때 이 동네가 파스코먹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한창나이의 젊은이가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죽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급성 늑막염에 걸려서 헛소리를 하다가 이틀 만에 죽었는데, 이것은 에드워즈의 설교와 함께 큰 각성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에드워즈 자신의 증언입니다. “그 후 젊은 새댁의 죽음이 뒤따랐는데, 그녀는 죽기 전에 자신의 영혼이 구원에 관해 상당히 마음을 썼으며, 그녀가 죽기 전에 하나님은 그녀를 구원하시는 놀라운 자비의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녀는 매우 위로를 받고, 열정적이고 감동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경고하고 상담해 주며 죽어갔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의 생활의 방탕함 때문에 마음이 굳어져서 신앙을 비난할 기회로 삼을 것이라고 성급하게 결론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은 그 온도시의 젊은이들의 가슴에 거의 번개처럼 번쩍 거렸습니다.”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캄캄하고, 누가 도대체 그 말씀을 듣고 변화될 것인가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 절망적으로 하고 있지만,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깨어나 있는, 혹은 깨어날 시점에 와 있는 그런 사람들을 반드시 예비하고 계세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강력하게 전하면 그런 사람들이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요즘 제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설교가 조금 강도가 높은 설교입니다. 초창기 설교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제 설교를 들은 지방의 한 목회자가 전화가 왔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든지 쭉 나오는데, 전화를 받으니 그 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냐?” 그렇다고 하니까 그 목사님 질문이 그 교회 몇 명이나 모이냐구 그게 제일 궁금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2년 만에 아무 아무개 명 모인다구 했더니, 기이한 느낌이었나 봅니다. “아니 서울인데...” 서울 사람은 더 약으니까, 시골 사람들은 그냥 꾹 참고 듣고라도 있어주는데, 서울 사람들을 공부도 많이 한 사람들인데 서울서 그런 설교를 하는데, 그걸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건 단견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성경 속에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에 관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캄캄한 밤에도 곧 깨어나고 싶어 몸부림 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요소요소에 숨겨놓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겉모습은 물론 똑같이 타락하고, 똑같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각성시키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기 분명한 메시지가 있으면, 사람들이 신속히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한꺼번에 일어날 때 그것이 대각성입니다. 대부흥입니다.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과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생활을 완전히 팽개치고 전적으로 기도하고 성경 읽는 데만 시간을 쏟고 있는 것처럼 잘못 전해졌습니다.” 이건 이제 부흥을 경험하지 못한 다른 마을 사람들이 비난을 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신앙이 지대한 관심사였고 세상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영원한 천국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이 나이를 많거나 적거나를 불문하고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영광스러운 일이 일어나자, 참다운 그리스도의 숫자는 배나 되어서 도시 안에서 영광스런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1735년 봄과 여름에도,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노스햄턴에서 부흥을 경험한 것을 지금 쭉 적는 것입니다. 여름에도 도시는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찬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때만큼 그렇게 도시는 사랑과 기쁨이 가득차고 절망이 사라진 때는 없었습니다. 거의 모든 집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의 표징이 보였습니다. 구원의 존재가 그들에게 찾아왔으므로 가정에는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날(주일)은 기쁨이요, 그 교회는 아름다웠습니다. 회중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깨어있었고, 모든 사람들은 공적예배에 열성적이었습니다. 그 다음 줄 쳐 보십시오. “모든 회중은 목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흘러나오자마자 그걸 들이마시기를 갈망했습니다.” 이런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이런 부흥 비슷한 것을 깊이 경험했는데, 강력한 변화가 한번 일어나고 나니까 고등학생들까지도 엄청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집에서 식구들이 나를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데 고민이 된대요. 만날 가정 예배시간에 도망 다니고 그러던 애가, 가족들이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그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위해서 두 시간 반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기도하고 언제 공부 하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좀 그 기도를 그치게 할 수 없느냐는 게 부모의 항변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엄청나게 생애 적으로 변화를 받으니까 그 다음에 놀라운 변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입니다. 아주 놀랍습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그런 회중에게 설교를 못 해 봤습니다. 그 이후로는......
나는 이 말이 100퍼센트 이해가 갑니다. 말씀이 이렇게 전해질 때 훅~빨려 나갑니다. 어린 학생들이 180분 씩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세 시간입니다. 세 시간. 쭉 빨려들어가면서...그러니까 신앙이 엄청나게 단단해 지는 것입니다.
(예화) 개가 새끼를 낳습니다. 한 번에 여러 마리. 그런데 젖이 하나 둘 셋 넷 다섯.....쭉 있는데 이 위쪽과 아래쪽은 작습니다. 가운데가 아주 젖이 많은데 신기한 게 강아지가 딱 태어나면 벌써 자기 젖이 있습니다. 그런데 삼사일만 흘러가도, 딴 놈이 와서 그걸 먹으려고 하면 그 놈이 그걸 안 놔줍니다. 그래서 실한 젖 먹은 놈과 아닌 놈은 아주 체중이 많이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할머니 하고 나하고 그 놈들을 떼어놓습니다. 좋은 걸 물고 있는 놈들 감춰놓고 변변치 못한 놈들 물리는 데 만날 쳐집니다. 젖 먹을 때도 한번 밀면 나가떨어집니다.
신앙생활 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빨아들이니까 엄청난 신앙의 성장이 오는 것입니다. 그 엄청난 영적요구를 웬만한 거 가지고선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설교자와 훌륭한 회중이 만나면 두 사람 다 발전하는 것입니다. 시골교회에 가면 퇴보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설교 준비 하나 안 하나 졸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5년간 책 한권 가지고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는 건 뭐냐 했더니 닭 기르는 거하고 호박 기르는 거 하고
“교인들은 설교를 듣고 때로 우울함에 잠겼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과 탄식으로 눈물을 흘렸고, 어떤 사람은 기쁨과 사랑으로 그리하였습니다. 우리의 회중들은 내가 전에 알고 있던 어떤 회중들보다 자신들의 신앙의 의무를 행함에 있어 훌륭했습니다. 사람들이 만나 하는 모든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에 관해 대화하는 것이 들렸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만날 때 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자기를 내어주신 고결한 사랑에 대하여, 구원에 이르는 영광의 길에 대하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은혜에 관하여, 죄 가운데 있는 영혼을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역사에 관하여......”
이게 무슨 소린가 하면 이런 거를 소재로 사람들이 대화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진실함과 확실함, 그리고 주님의 완전하신 성품을 묵상하는 행복, 이것에 대해 이해하는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결혼식에서조차 사람들은 신랑과 신부에는 관심이 없고, 신앙에 대해 나누기를 좋아했으며, 영적인 환희 외에는 아무런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날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의 의논하고, 논의하는 것과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 성령 받으니 운수대통하고 사업에 성공했다는 그런 말들.....마지막에는 성령충만 운수대통 이렇게 가기가 일쑤인데, 이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하는 신자의 놀라운 행동. 그리고 구원의 완전함을 누리고 살아가는 성도의 진정한 기쁨, 그리스도께서 뛰어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영혼의 유익,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참다운 행복....”
그러니까 얼마나 차원 높은 요구를 코미디 같은 설교로 만족시킬 수 있겠습니까? 장엄한 설교.....뭔가 다르잖습니까? 같이 성령을 체험했다고 하는데 누리게 되는 영적인 변화가 너무 차이가 납니다. 다음 보겠습니다. 더 재미있는 얘기가 하나 나옵니다.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 겨울에 주변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비웃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회개를 전염병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조차도 우리 가운데 일어난 변화를 보고 변화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인근 마을의 사람들이 공개 사경회에 오기도 했습니다. 도시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때론 양심에 찔려 각성하고, 깨어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이제 또 다른 곳에서도 나타난 역사입니다.
“이런 각성과 신앙의 불길이 사우스 하들리, 수필드 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이 지역은 매우 넓은 지역이었는데, 전 도시가 부흥을 맛보는 경험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1734년 3월의 일이니까 에드워드의 부흥과 거의 같은 때이었습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덜랜드, 디어 필드, 그린 리버, 핫필드, 동쪽 남쪽 지역인 힐 웨스트스프링필드, 롱 매도우 등에서도 일어났는데,” 힐에서는 이 과장하기를 싫어하는 에드워즈의 표현임에도 굉장한 역사였다고 하니까 아마 엄청난 일이 일어난 거였을 것입니다. 이게 1734년 4월의 일이니까 이런 부흥의 불길이 에드워즈를 통해서 일어났냐면 각자 따로 따로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이한 것입니다. 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동시적으로 많은 사람을 깨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많은 사람들에게 동시에 체험하게 하시는 데 그게 거의 동질의 체험입니다. 같은 성격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는데, 같은 각성의 역사가 한 사람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주장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런 부흥의 역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런 부흥의 불길이 에드워즈의 영향력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거의 같은 시기에 여기저기서 부흥을 맛보게 하셨는데 그 한 예가 컴네티커스에 있는 윈저 지역에 부어진 하나님의 부흥입니다. 이 윈저 지역에서 누가 목회하고 있었냐하면, 에드워즈의 아버님이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이스트 윈저에서. 그래서 하나님이 부흥입니다. 보겠습니다.
“성령의 은혜가 이 지역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 전해졌을 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머무르지 않고 다른 지역에도 같은 자비가 내렸습니다. 예를 들면 윈저의 첫 교회 신자들은 마시 목사의 목회아래 노스햄튼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는 양쪽 지역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와는 상관없이 또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께서 부흥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곳에서도 수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아버님이 계신 이스트 윈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맥칸 목사가 시무하던 코벤트리에서 가장 악랄하고 무례한 사람들이 회심한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젊은 목사 휠록이 목회하던 한 리바논의 한 지역인 클랑크에서도 같은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이외에 에드워즈가『The narrative of surprising conversion』에서 언급한 지역과 그곳에서 도구로 쓰임 받았던 목회자들을 더 소개하면 더 햄스텐, 스트리트 포드 1구역 스트리트 립톤 뉴헤븐, 길포드의 일부지역 이런 곳에서 이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다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게 되는데, 34년에 와서 이제 에드워드의 설교사역이 회중의 큰 반응을 얻기 시작합니다. 그 도시에서 약 반 년 동안에 300여 명의 회심자를 만들어 내며 부흥의 물결은 컴네티컷까지 확산되어 갔습니다. 그런데 이 300이라는 숫자를 오늘 날 우리들 수천 명 모이는 교회와 비교하면 안 됩니다. 그곳은 시골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주해 와서 살고 있던 사람은 제 기억으로는 삼십만 명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현재 노스햄튼의 인구가 얼마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온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성령체험을 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회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시대에 회개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분명히 회개의 표징이 뚜렷한데, 에드워즈는 일 년 간 세례를 안 줍니다. 두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 년 후 보면 대부분 그 사람들이 남아 세례를 받아요. 부흥 시대에 일어나는 회심이 얼마나 깊고 뚜렷한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경우와 종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증언은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구원받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숫자 면에서 매우 특이하게 나타났습니다. 620 명의 성도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거의 모든 어른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마을의 거의 모든 어른이 포함된 것입니다. 전의 교회는 컸지만, 사람들은 특별한 시기에 그런 것처럼 몰려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찬을 8 주 만에 행했는데, 한차례의 성찬에서 100명의 신자들이 회중의 수에 가입되었습니다. 이중 80명이 한 번에 성례를 받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을 규모에 비하면 이건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시골, 중소도시가 아니라, 완전한 시골 토박이, 제주도나 아니면 우리나라 토속신앙 강한 곳에 가 보면 사도행전에 일어난 역사가 동일하게 일어나지 않고는 이 마을은 하나님께로 안돌아 오겠구나 하는 절망감 같은 것들이 확연하게 느껴집니다.
여러분 가족들 중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전해도 완전히 캄캄한 절벽 같은 사람들, 더군다나 미신이. 막 창궐하는 그런 지역....뭐라 그러는 줄 아십니까? 경상남도 가서 전도 하는데, “할머니. 예수 믿으십시오.” “그게 뭐냐?” 그래서 “예수 믿으면 천국하고 안 믿으면 지옥 갑니다.”라고. “우리 시어머니 안 믿었는데 어떻게 하냐고?” “그 분은 지금 지옥에 계시다.” 그러면 자기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떻게 시어머니가 지옥에서 울부짖고 계시는 데 내가 천국에 가겠냐?” 그런데 이걸 웃으며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심각한 신앙고백입니다. 그 연을 무엇으로 끊을 수 있겠습니다. 정말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딸내미 시집 갈 때 살아있는 뱀을 비단 보자기에 싸서 보낸다고 합니다. 그런 토템 사상이 유행하는 곳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제주도에 있는 목회자들 만나면 고백합니다. 제주에서 믿는 사람들은 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지 지금도 토박이 제주도 인을 전도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 사람이 교회 나오려면, 그야말로 아내와 가족과 유산까지도 버리고 떠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 부흥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구원을 받아서 어린 시절에 놀라운 영적인 변화를 받게 된 것은 이상한 일로 여겨졌다.” 그러니까 어린 아이들 속에서도 부흥의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가 추측하는 바로는 10세에서 14세 까지 변화 받은 아이들이 삼십 명이고, 9세-10세 까지가 2명, 4 살짜리가 한 명인데 이 아이에 대해서는 특별히 설명을 해야 하겠다” 얘기 누구냐 하면 한번 예화를 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아이가 한번은 집에 오더니 엄마를 붙잡고 하는 얘기가 “엄마, 나 구원 받았어?” 묻는 것입니다. 4살짜리가. 엄마가 대답합니다. “응 받았지.” “엄마 나 지옥에 갈 거 같아.” “네가 왜 지옥을 가니? 엄마 아빠가 이렇게 잘 믿고 넌 유아세례도 받았고 이렇게 착한데....” 엄마가 그렇게 얼렁뚱땅 넘어갔습니다. 엄마의 이 말에 아이가 위로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방에 들어가서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러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나이로는 한 다섯 살 정도 된 아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슬이 만한 아이였습니다. 이런 애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아이가 얼만가 시간이 흘렀는데, 광에서 이 조그마한 아이가 막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막 울며 통성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와서 엄마를 딱 만나 환하게 웃는 것입니다. “Forgive me!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어. 이제 나는 구원을 받았어.” 아이가 단어가 제한적이니까 간단간단한 말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과 그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성령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변화가 일어나는데, 만날 물어보는 것입니다. “엄마 교회 가려면 몇 밤 더 자야 돼?” “어저께 갔다 왔으니까 여섯 밤 더 자야지.” 매일 밤 또 물어보는 것입니다. “몇 밤 더 자야 돼?” 엄마가 물었습니다. “왜 그러니? 교회 가면 뭐 좋은 일 있니?” “아니. 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웃음)”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읽다가 자는 그 설교.....“에드워즈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싶어.”
아는 목사님이 그 부분을 읽고 웃다가 나중에는 눈물이 쏟아져 나오더랍니다. “야, 다섯 살짜리가 이러는데 나는 뭔가.” 회개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 아이가 관심이 완전히 바뀌는데, 어린아이가 노는 유치한 놀이에 대한 관심이 모두 사라진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죄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를 알고 싶어 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골목에 나가서 친구......(*이 부분이 1권의 마지막입니다)
복음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는 사실과, 하나님을 만나야 된다는 사실과, 주님은 그렇게 자기에게 나 온 사람들에게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침이 마르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교회역사에서 보면 카트라이트(Hugh M. Cartwright)라고 하는 설교자가 있는데, 4살 때 벌써 전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오늘 아침에 기도했니?” “아니.‘ ’너 같은 나쁜 애하고는 오늘 놀 수 없어.” 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책에서 간증을 하나 했습니다. 몸이 아파서 6개월 동안 설교를 못 했습니다. 그때 로이드 존스 목사님 어떻게 설교했겠습니까? 로마서 강해 책처럼 했을 것입니다. 그게 설교를 그대로 풀은 책이니까. 아홉 살 먹은 초등학생이 편지를 한 것입니다. “목사님 빨리 퇴원하십시오. 그리고 다시 웨스트민스터 채플로 돌아와서 설교해 주세요. 왜냐면 목사님 할아버지 한 분 만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아 듣게 설교하는 유일한 목사님이니까요.” 다른 부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은 무슨 말인 지 못 알아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읽다가 지루해서 집어던지는 그 설교입니다. 초등학교 9 살짜리가 메모하며 앉아서 쭉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4살이나 9살짜리가 우리보다 하나님에 대해서 훨씬 많이 알습니다.
더 재미있는 건, 스코트랜드의 부흥사를 보면 하나님이 완전히 치매 병에 걸리기 전에 있는 백발의 노인들을 한번 만지고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노인들이 각성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정말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말 모르는 것입니다. 각성시키는 것입니다. 그 노인네들을. 머린 하얀 노인네들이 어린 아이처럼 각성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분을 우리가 숙명으로 돌리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에 “특별히 선덜랜드와 사우스 하들리에서 어린 영혼에 대한 역사는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는 4월 초에 이 도시에서 최고조에 달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 사람이 하루에 네 명, 일주일에 삼십 명 이상의 다른 사람을 전도하여 4주 6주 정도 교회에 출석시킨 것으로 기억됩니다. 우리가 보통 받았던 축복으로는 한 해 동안에 행해졌을 일들이 하루나 이틀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이게 로이드 존스가 부흥에서 누누이 강조하는, 부흥이 일어나면, 수십 년을 통해 이루어질까 말까한 업적을 한 주 동안에 이루고 만다, 라고 하는 그 강력한 주장이 이런 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1735년에 와서 잠시 부흥의 열기가 식는가 하더니, 1740년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지금의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시골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세워진 지 50년 됐는데, 동네 사람들이 아직 90퍼센트 정도 예수 안 믿고 있는데, 총 인원은 삼십 명이 안 넘는 교회 많습니다. 시골에서의 복음 전파는 정말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의 표징을 보기 전에는 예수께 안 돌아옵니다. 힘듭니다. 그런데 한 마을이 통째로 하나님 앞에 근본적인 회심을 경험하면서, 청교도의 후예들이 다시 태어나는 변화를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닙니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1735년에 와서 잠시 부흥의 열기가 식는 듯하더니 1740년부터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 그가 바로 엔필드에서 집회를 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남긴 설교가 뭔가 하면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하는 설교였습니다. 신명기 32장 25절 딱 한 구절로 설교 했는데 무척 깁니다. 이 사람이 지독한 근시안이라서 설교원고를 이렇게(눈 가까이) 들고, 횃불을 이렇게 들고 설교하는 데 그 때 폭탄과 같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뒤에 있는 목사님이 와 가지고 에드워즈 목사님의 바지자락을 붙잡으며, 너무 무섭다고,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그러면서 애원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엔필드의 마을 전체가 완전히 새로운 마을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윗필드가 등장합니다. 윗필드는 어떤 관계에 있느냐하면, 조나단 에드워즈와 윗필드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윗필드는 비교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윗필드는 설교의 기초 자체가, 물론 그 분의 설교지만은, 매튜 헨리의 주석을 기초로 설교했습니다. 그 사람이 평생에 걸쳐 매튜헨리의 주석을 총 4번 읽었습니다. 아마 그거 4번 읽는 일이 보통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게 한 발이 되거든요. 40권 몇 권이 넘으니까. 쫙 펼쳐도 이 손 안에 다 안 들어올 정도로 많은 분량인데, 4번을 정독을 했습니다. 마지막 4번째 읽을 때는 무릎을 꿇고 읽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매츄 헨리의 주석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주석이 아주 뛰어난 영적 주석입니다. 그래서 다행히 윗필드의 설교가 단지 뜨거운 것이 아니라, 탁월한 열정과 깊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천부적 설교가 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일들을 했냐하면 이렇게 부분적으로 일어난 부흥의 역사들을 통합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싹 쓸어가지고 미국 전역에 한 번 불붙도록 이렇게 했습니다. 7차례에 걸쳐서 1738년부터 1770년 까지였습니다. 그러니까 1차 대각성이 막 일어나고 있을 때 윗필드가 건너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협력을 하면서 1차 대각성이 사라지고 난 이후에 약 15년 간 더 설교를 합니다. 그러면서, 미국 전역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럴 수 있었던 것은 교파에 얽매이지 않고 누구하고도 손을 잡았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준 요소는, 그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고 나니까 교파는 달라도 에드워즈 목사나 통나무 신학교 출신 설교자들, 아니면 윌리엄 텐넌트 같은 사람들을 봤는데, 거의 같은 체험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 속에서 동질적인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놀랍게 한 마음을 품고 협력하는 역사들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은 이런 교제를 만들어주었습니다. 진정한 형제 됨의 교제를 만들어 줍니다. 여러분, 서로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하고 교제하는 것은 고문입니다. 엉뚱한 얘기 펑펑하는 사람하고 마주앉아 교제하는 것은 정말 고문입니다. 정말 돈 받고도 못 할 노릇입니다. 정말 고문입니다. 뭐가 얘기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
이제 부흥이 끝납니다. 뭐 당연합니다. 이런 격렬한 부흥이 반대에 부딪쳤던 건 당연했습니다. 부흥은 언제나 강력하고 말하자면 격렬히 일어나기 때문에, 그 속에 동화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정신병원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강력한 반대가. 그들의 주장은 그것입니다. 설교를 듣다가 사람들이 쓰러지거나 울부짖고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니까, 예배가 엄숙하지 못하다. 비정상적이다. 이러면서 정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결국 두 파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데, 새빛파(New Light), 옛 빛파(Old Light) 이렇게 갈라지는 것입니다. 새빛파는 워즈워드를 비롯해서 부흥운동에 가담하는 사람들이고, 옛 빛파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런 신앙 부흥에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사람들. 아주 철저하게 반대합니다. 그래서 목사회의에서 이 같은 부흥을 저지합니다. 그리고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이런 사람들에게 강단을 내어주지 말도록 개교회에 지시까지 해서, 강단을 폐쇄하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부흥은 식어갔고, 이상한 일이 44년까지 부흥이 그렇게 일어나다가 44년에서 45년 까지는 단 한 명의 회심자도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흥의 불길은 막을 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부흥을 끝낸 것입니다.
“찬반의 뜨거운 논쟁 속에서 역사적인 신대륙에 일어났던 부흥의 때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대륙의 1차 대각성 부흥의 때는 이렇게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그 얘기입니다.
우선 첫째는, 참된 부흥과 거짓된 부흥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부흥과 거짓된 부흥의 차이는, 거짓된 부흥은 인간에 의해 조작된 부흥입니다. 그건 참 된 부흥이 아니습니다. 그리고 이 참되지 못한 부흥은 부흥을 기대하는 동기 자체가 너무 세속적입니다. 큰 교회, 많은 사람, 많은 헌금, 아니면 어떤 세력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 된 부흥을 갈망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오셔서 이 땅을 고쳐주시옵소서, 그런 대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 주시옵소서. 벌써 동기 자체가 그렇게 다르고, 그리고 참된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부흥은 인간이 조건을 갖추면, 하나님께서 부흥을 주신다고 하는 인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참된 부흥과 다릅니다.
참된 부흥은, 아까 말씀 드린 것과 같이 말씀에 대한 심오한 각성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열리는 이런 체험들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신학을 갖게 되는 동기를 마련해 줬습니다. 그러나 거짓 부흥들에서는 말씀에 대한 체험을 거의 볼 수가 없게 된다, 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한참 논란이 되었던 빈야드 집회를 봐도 그것입니다. 한 학생이 저에게 전화를 했는데 “목사님 저 이 교회에서 떠나야 됩니까? 어떻게 됩니까?” 목사님이 교인들 불러 놓고 하나씩 일어나라 그래 가지구, “성령이여, 오소서. 쓰러뜨려 주시옵소서” 어느 집사님은 계속 안 쓰러지니까 미안해가지구 일부러 쓰러졌대요. 말씀에 대한 어떤 놀라운 변화, 이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2번.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계획을 배우며 가난한 마음을 갖게 된다. 무슨 계획을 배우게 됩니다. 교회라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피난 와서, 세상에서 받았던 상처들을 위로받고, 신앙과 세속주의 사이에서 느꼈던 갈등 들을 하소연하며, 동병상련하는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교회는 역사와 세상 속에 영향을 미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런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탁월한 인식을 가지고 말씀대로 살기를 결심하는 역사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가난한 마음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우리 교회하고 비교를 하면서, 야 우리는 도대체 뭐하고 있는 건가, 맨날 뭐 이렇게 기저귀나 갈아 채워주고 이렇게 해서 되겠는가? 영적인 이런 힘으로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신 변혁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 자신 속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부흥만이 가져올 수가 있다.
이러면서 이제, 가난한 마음만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자기만족에 빠지면 안 되겠구나.....일 년 동안에 몇 십 명 늘어났는데, 그들 중에 몇 사람이 이렇게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하는 체험을 하며 교회 속에 들어 왔던가......그러면서 뭐냐면 가난한 마음으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안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회복 되어야 할 수많은 부분을 보며 하나님 앞에 겸비해 진다 이 말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와, 그 백성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우리를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분 만이 자신의 백성들을 그 분의 백성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 어두운 세상을 불꽃같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모든 지름길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 자신이 교회 속에 와 주시고, 하나님 자신이 그 영혼들을 만져주시는 그 때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백성답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원하는 시기에 일을 시작하시고, 하나님이 원하는 시기에 그 일을 끝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44년에 부흥을 끝내시는 것이, 뭐 백성들의 죄, 반대 등에 부딪친다고 해서 그 불길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반대 불길 때문에 더 부흥이 강력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죄가 아니라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그냥 끝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었습니다. 주시기도 하고 거두어 가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부흥을 원하시면 인간의 처지와 상관없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세상에 변화를 끼치지 않는 참된 부흥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예에서도 알 수 있잖아요. 1907년에 평양에 대 부흥이 일어났을 때, 놀라운 변화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에서도 언급했는데, 어떤 일이 일어나야하면, 자기의 죄를 다 회개한 다음에 각자 돌아갔는데, 쌀가게에서, 우리도 쌀가게에서 됫박 속이는 집에서 쌀 사본 적 있습니다. 이상하게 저 집에서 한 됫박을 사면 쌀독에 입구까지 차는데, 이 집에서 사면 꼭 한 10센티 쯤 내려갑니다. 그러다가 보니 쌀 말 밑에 판자때기 하나 더 댄 것입니다. 그걸 계속 퍼내다 보니 얼마나 많은 차이가 생기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속여먹던 사람들이 쌀 집 앞에다 공고를 붙이는 것입니다. “내가 00부터 부정한 용기를 가지고 쌀 됫박을 속였는데, 그동안 우리 집에서 사 간 사람들 오시오. 내가 돌려주겠소. 사람들은 눈물 흘리면서 옛날에 떼먹은 빚을 갚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가서 화해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부흥은 반드시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타락해가는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답은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교회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방법을 찾아다니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다닌 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떡하면 교회에 생명을 불어 넣을까? 어떡하면 교인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제 누가 와서 그랬습니다. 자기네 교회는 설교 시간에 다섯 번씩 곁의 사람을 껴안아야 설교가 끝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삽시다.’ 그러면서 그런다고 사랑이 됩니까? 응? 그런다고 사랑이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방법을 찾기 위해서 그렇게 목 매달리는 것처럼 하나님을 찾기에 갈망했으면 부흥이 일어나고도 남는 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 다음, 교회의 역사는 잠자는 다수가 아니라 깨어있는 소수를 도구로 소생한다. 다수가 잠자고 있어도, 그 다수보다도 소수의 깨어남이 강력하면 교회는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다윗 한사람으로 블레셋과의 전세를 뒤바꾸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믿음의 힘, 깨어있는 소수의 기도,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지렛대란 말입니다. 그 다음에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의 교제와 박해를 동시에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윗필드나 조나단 에드워즈의......그러니까 윗필드가 노스헴튼 교회엘 가게 됩니다. 세기의 설교자가 세기의 신학자의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그때 에드워즈는 솔직히 말해 윗필드 하고 비교가 안 될 정도였습니다. 학식에 있어서는. 그러나 당시에 지명도로 말하자면 에드워즈가 윗필드에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근데 이제 윗필드가 가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무슨 학문적 수준도 다르고, 다 다른데도, 윗필드가 가서 설교할 때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은혜 받는 모습을 윗필드가 일기에 썼습니다. 뭐라 했냐 하면 선한 에드워즈 목사는 나의 설교를 들으며 어린아이같이 한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윗필드의 설교를 듣고 에드워즈가 회심하거나 은혜를 받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각기 다르게 하나님을 만났는데, 와서 전하니까 동시에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위대한 사상가가 윗필드가 가서 헛소리나 하고 있었다면 거기 가서 눈물 흘리고 있겠느냐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미 깊이 체험하고, 성경이 열기는 것을 경험한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었겠느냐 말입니다. 깊이 받아들이면서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교리가 엄격하게 지켜지고 교회가 생명력이 있던 시대에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차고 넘쳤습니다. 그것이 부흥이 일어나던 시대에 일어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박해를 동시에 받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변화를 받고 새사람이 딱 되고 나면, 변화되지 못한 사람을 볼 때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니까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극단적으로 튀어서 적대적으로 나타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나 말씀 전하는 것은 그런 식으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맬랑히톤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 설교 듣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모습 때문에 화가 나든지, 당신에게 화를 내든지 화를 내든지 하나를 해야 그것이 설교지, 그랬나보다 너는 너 나는 나 그건 안 된다는 거지.” 갈라낼 사람들을 갈라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순결하게 하게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팔 번, 말씀에 대한 단호한 태도와 그들의 깊은 영성을 배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태도와 그들의 깊은 영성을 배운다.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죽어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생명을 걸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이 까다로운 것이 그것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양보를 못하니까, 작은 것 까지도 꼬치꼬치 따지고 들어가 결국은 결단을 해서 싸워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진리를 파수하려고 하는 몸부림이 이 청교도들의 몸부림입니다.
부흥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렇게나 해석하거나, 아무렇게나 지키지 않고 살아가는 이런 삶, 용납할 수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기울여져 가고 있을 때, 이렇게 예언자적으로 이렇게 살아야 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이 나왔던 것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예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서 말해야 합니다. 누나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해서는 큰일 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자신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설교 사역의 중요성을 배웁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이러한 일들은 모두 누구에게서 일어났냐하면 먼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필연적으로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거의 설교자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물론 부흥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이 설교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설교자를 세우십시오. 그들로 하여금 회중들이 보지 못했던 하나님을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알지 못했던 진리를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을 벗겨서 그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가 무엇이고 오늘 날 우리로 하여금 살아가는 이 삶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서 각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닫지 못하는 곳에서는 각성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늘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조국교회를 위한 최대의 선교는 국민소득 3만 불이나 대륙붕 석유 펑펑이 아닙니다. 뭐 누가 그랬습니다. 대륙붕이 석유가 쏟아져 나오면 선교의 자금이 마련된다. 다 헛소리입니다. 헛소리. 지금 말입니다. 일천만이 예수 믿는다, 그러는데 껌 값만큼도 선교헌금 안 합니다. 제가 껌을 많이 씹는데, 일주일에 세통 정도 씹습니다. 계산해보면 한 달에 한 2400원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한 달에 2400원 씩 선교하면 어떻게 되나 계산해 보면 2800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만. 미국은 어떻겠습니까? 상상할 수 있습니까? 안 합니다. 대륙붕 아니라 동해바다가 석유로 변한다 해도 안 합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과 각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각성이 일어남으로 말미암아서 미국이 최초로 선교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역사는 각성의 역사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선교에 대해 눈을 뜬 근대 선교의 아버지가 윌리엄 케리라고 있습니다. 18세기 사람입니다. 그런데 1620년에 이미 그 뭡니까? 성경연구 모임이 독일에서 만들어지면서 경건주의 운동이 태동이 되었을 때 그는 벌써 근대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윌리엄 케리에 의해 선교가 부르짖어지기 일백 년 전에 선교에 대한 논의에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영적인 각성을 통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영적인 각성과 부흥의 최종적인 목표는 교회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변화된 그 교회가 뭘 합니까? 결국은 복음을 듣지 못한 종족에게로 복음으로 들고 가는 선교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기는 운동으로 번져나가는 것입니다. 견딜 수가 없어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안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복음화의 불을 댕기는 것이고 마지막 날을 앞당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 사역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역 중에 뛰어난 사역은, 모든 기도제목보다 가장 뛰어난 기도 제목은 이 땅에 이런 설교자들을, 각성의 도구로 사용하실 수 있는 설교자들을,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기도 제목 보다 가장 뛰어난 기도 제목입니다.
마지막 10번 위대한 영적 각성과 참된 부흥에 대하여.
“소망을 품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전 시대에 이런 일들을 행하신 하나님이 우리 시대에도 이런 일들을 얼마든지 행하실 수 있다. 그 기대를 품고 그리고 우리의 힘으로 능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교회에 주신 사명들을 감당할 수 있는 시대에 대한 사모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명이 과거의 유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오늘 날 우리가 새롭게 누려야 할 분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제 강의는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질문 있으신 분 하십시오.
질문자: (잘 안 들림. 아마도 에드워즈 저서의 번역 여부에 관한 질문인 듯)
답 : 에드워즈의 저서는 거의 번역이 안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와 있는 책이 겨우 『신앙과 정서』 『성령의 열매』 성령의 열매는 요약본이라서 크게 도움이 안 되고. 신앙과 정서는 번역이 제대로 안 되어서 생명의 말씀사에서 원서가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 번역되었는데, 에드워즈가 써놓은 전작 전집이 제가 계산해 보니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책으로 40권 정도 나올 수 있는 방대한 전집인데 아직 전혀 번역이 안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영어가 available 하신 분이면 생명의 말씀사 가시면 원서가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일부의 자료들이 번역이 된 것이 뭐냐 하면 번역한 18세기 위대한 신앙부흥 3권, 중권 거기 웨슬리의 부흥과 함께 요나단 에드워즈 부흥의 일부가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 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얘기였습니다. 그러니까 회심이 종류는 같아도 깊이가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가다 탁 긁혔습니다. 피가 납니다. 강도를 만나 칼에 찔려도 피가 납니다. 피가 난다는 사실은 같지만, 못에 긁혀 나는 피는 세월 지나면 잊혀 지고 표가 안 납니다. 그런데 강도에게 찔린 그 곳은 상처가 너덜너덜할 정도라서 수십 년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의 흔적을 내가 가졌노라” 하는 말처럼 그 흔적이 남게 되는데 회심이 깊이 일어날 수도 있고, 엷게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교회 나와서 울면서 기도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잖아요. 자매들, 형제들. 그렇습니까? 그런데 어떤 때에는 그 눈물을 흘리는 마음의 깊이가 다를 때 있습니다. 그건 뭐냐면, 기도할 때 기도한 건 한번 이었는데, 그 기도할 때에 깨달았던 어떤 사실, 신앙의 어떤 원칙이라든지, 때에 따라서는 성경이 알려주는 어떤 진리라든지, 하나님의 사랑이라든지 하는 것들이 가슴에 남아가지고 내 삶을 주관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린 지 이해가 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될 때 그 부분, 그 기억으로 돌아가면 다시 이렇게 끌려 들어오는 우리도 그런 깊이가 다른 것을 경험할 때가 있잖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변화되어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심의 역사도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정도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하는 강도가 각각 다른 것이) 무엇 때문이냐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다 예를 들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이 요소가 세 가지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그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드러내는 아주 예리한 설교, 즉 진리의 요소가 있고 그 다음에 또 하나는 그 진리를 깨닫고 순복하려는 마음, 그 다음에 이러한 설교와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강력한 능력 그 세 가지에 의해서 그 심도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각성이 일어나던 시기에 설교의 주제는 무엇이었겠습니까? 죄를 떠나서는 설교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끔찍할 정도로 소름끼칠 정도로 자기가 발견하지 못했던 눈을 열어서 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게 만들고 그 다음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침이 마르도록 말함으로 말미암아, 죄인의 비참한 운명 앞에 하나님 이외에는 피난처가 없다, 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주권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 세 가지 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인간의 아주 복잡한 작용들, 그것들을 가려내면서, 그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유혹을 받고 죄 가운데로 빨려 들어가는 가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성경을 통해서 보여주어야 해. 이걸 위해서 기도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그 다음엔 마음입니다. 마음. 마음이 수시로 하나님을 향해 수시로 닫히니까. 솔직히 여러분들 최근에 후~~ 하나님의 말씀을 마시고 싶어 하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만 하면 그것을 빨아들이고 싶은 영적인 갈망을 느껴본 적이 언제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무지몰각한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여러분들의 영혼 속으로 빨려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이 뭐라고 합니까?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난다는 것입니다. 왜? 이 마음 하나에 따라서 하나님께로 갈 수도 있고 사탄에게로 갈 수도 있고, 거룩한 삶을 찾을 수도 있고, 죄의 유혹을 따라갈 수도 있으니까. 결국 그 마음을 지키는 것은 여러분의 책임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는 얘기가 영적인 변화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뜻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뜻을 세우라고. 왜? 마음은 우리의 원하는 삶을 다 못 쫓아갈 때가 많습니다. 뜻을 세우고 그 뜻을 붙잡고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강력한 역사는 우리가 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런 능력의 역사를 체험하길 원한다고 간절히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지 않겠느냐 약속하셨잖아요.
질문2: (죄에 관한 질문인 듯)
답 : 아주 좋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죄에 대해 설교해야지 변화가 오는 데 왜 죄에 대해 설교하지 않는가? 어느 대학에 있는 교수님입니다. 장로님인데 대화를 하다가 회개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정색을 하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김교수님. 저는 강단에서 진지하게 회개하라고 외치는 마지막 설교를 들은 것이 30년 전입니다.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러는 거냐? 사람들은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습니다. 뭐 교회 성장학에서는 심지어 죄에 대해 설교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과 행복에 대해서 말하십시오. 부정적인 개념을 붙들고 교회 성장을 기대하는 것은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하지 말라는 말 보다는 하라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죄보다는 의에 대해서 더 많이,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보다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십시오. 그런 교회 성장학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은 무엇의 문제냐 하면 설교자의 체험의 문제예요. 죄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설교자는 결국 자기가 체험한 것들을 토해 놓게 마련입니다. 설교자만이 아니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뭘 가장 말하고 싶습니다. 가장 말하고 싶은 게 무엇입니까? 그건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되어 있습니다. 그건 가장 많이 느끼는 걸 가장 많이 하고 싶은 것입니다. 교회 나와서 성경 찬송 끼고 거룩한 성도들과 만나도, 어제 영화 본 게 가장 신나고 그게 가슴에 꽉 차 있으면, 설교는 빨리 안 끝나고, 어제 영화 본 얘기 하고 싶어 죽겠는데, 설교가 빨리 안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끝나자마자 말 마려워, 하며 토해 놓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어제 영화를 갔었는데, 브래드 피트가 어떻고 저렇고. 하면서 얘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 느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자아내는가 하는 것들을 자신이 깨달을 때에 그것을 말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 각성 시대에 쓰임을 받았던 설교자치고 개인적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체험하지 못한 설교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체험하고, 복음의 진수를 체험하고, 죄의 문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진노를 사고, 그 앞에서 그 문제의 해결이 없이는 인간이 결코 아무런 변화도 소망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뼛속 깊이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골수에 사무친 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해 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선지자들의 마음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또 하나 무엇입니까?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내가 죄 가운데 아무 의식 없이 죄로부터 받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죄를 빨리 벗어버려야 한다고 어떻게 설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그걸 (무의식적으로) 입고 살아가는데.... 그건 철저히 설교자의 체험입니다. 그래서 설교자가 변하면 설교자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게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라고 하는 책 첫 장에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소쩍새 우는 한’ 이 그거 아니입니까? 국화꽃이 핀 건 소쩍새가 죽으니까 국화꽃이 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깨뜨려지면 다른 설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몇 해 전에 기도원에서 하는 설교가 대부분이 그렇잖아요. 그날도 아무 기대를 안 하고 올라갔는데 이건 완전히 불의 사자 한 사람이 왔어. 사람들이 너저분하게 그냥 기도원에 놀러오는 거 반, 기도하는 거 반 그렇게 와서 앉아있는데 설교자는 뭐 젊고 새파랗습니다. 스물 대여섯 밖에 안 되었겠다는 것입니다. 탁 올라가더니 하는 말이 여러분, 하나님이 여기서 은혜 주시면 당신들 가서 뭐할 거냐? 이것입니다. 성령 달라, 성령 받으면 뭐할 거냐? 이것입니다. 은혜 달라, 은혜 받으면 뭐할 거냐? 하나님 무슨 문제 해결해 주세요. 해결해 주면 뭐할 거냐? 이것입니다. 이러면서 밀어붙이는데 본문이 뭐냐 하면 사도행전 2장입니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 그러면서 회개에 관해 막 설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뭐라 그러냐 하면, 화장실에 와서 볼 일 보면서 뭐라 하는가 하면, 와 오늘 설교는 충격적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설교자가 우리나라에서는 꽤나 자유적이기로 유명한 신학교 출신입니다. 학부 다닐 때 만날 데모하고 그러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기 개인적인 간증을 하는데 자기 대학원 2학년 때 학생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왔는데 솔직히 놀러왔었다는 거지. 그 기도원은 밥을 거저 줍니다. 애들 데리고 놀러왔었는데, 혼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변화 받은 것입니다. 기도하고 나니까 벌써 손에서, 손을 딱 펴보니까 십자가로 피가 흐르더랍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사건을 새롭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교에서 선생이 가르쳤던 수많은 자유주의신학이 한 번의 기도에 다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 입에서 기도가 나올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저도 목사지만, 목사가 회개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어느 날 천국에서 방송이 들리더랍니다. 천국에 있는 신구약 성도들은 출입구 쪽으로 다 모이시오. 신구약 성도들이 아벨부터 시작해서 최근에 소천한 박장로님까지 전부 모였습니다. 출구에 문을 딱 여는데 도대체 뭔 일인데 모이라는 거야 하고 모였는데, 뚜껑을 탁 여니까 다 같이 우리 기립박수 칩시다. 하는데 저 아래서 목사 한 사람이 회개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만 그럽니까? 여러분 한 사람만 회개하면, 천국에서 그래도 일중대 병력은 일어나야 할지도 모릅니다. (웃음) 기이한 일이 방배동에서 일어났다고 박수를 칠 것입니다. 설교자를 깨우는 일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의 많은 설교자들이 설교를 하면서도 뭔가 이게 아닌데. 라는 생각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이 책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나가고 있습니다. 만 육천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식 그러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막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오늘 나왔나 모르겠는데, 어저께 전화 왔습니다.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을 읽었는데, 자기는 이 교회 와야겠다는 것입니다. 자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최대한 이런 시대의 유산들을 캐내어서 하나님의 말씀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고, 이것에 교회의 생명이 달렸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팸플릿을 매달 만들어서, 무료로 각 신학대에 배포하는 것이 꿈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가 없어서 못합니다. 하나는 돈이 없고, 하나는 그 일을 위해 헌신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이 두 가지가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어쨌든 이렇게 깨어나는 일들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보면, 피니의 간증에 의하면,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답답하게 자기의 영혼을 눌러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 다섯이서 매일 지하실에 들어가서, 기도하는데, 기도 제목이 우리 목사님을 뒤집어 주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는데, 정말 뒤집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에 의해서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아브라함 카이퍼 이야기 아니입니까? 개혁파 신학자이었습니다. 3대 칼빈주의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맨날 설교 시간에 세상 좋은 얘기, 돌아가는 이야기나 했었는데, 이 사람이 어느 날 끝나고 나올 적마다 사진을 하나 들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노파가 사진을 들고 꼬부리고 앉아서 “목사님, 참 잘 하셨습니다. 다음 주에는 십자가를 하십시오.” 매주 그러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 한 사람이 성경 가죽 껍데기만 들고 자꾸 교회를 오더랍니다. 이게 뭡니까? 물었더니 창세기는 고대의 설화라서 빼버리고, 시편은 믿을 수 없어서,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은 문서니까 빼고, 다 빼고 나니 껍데기밖에 안 남았다는 것입니다. 한 주가 아니라 그 할머니가 매주 서서 그러고 있으니까 그러면 내가 한번 해야지 하고 십자가 설교를 하다가 하나님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뒤집어 져서 3대 칼빈주의자로 변합니다. 그게 아브라함 카이퍼의 체험입니다. 대 신학자가 이미 되어 있었는데 그 신학을 모두 버리고 회심한 것입니다. 정말 목사 한 사람이 회개 하거나 신학자 한 사람이 회개하는 건, 이건 신구약 성도 가지고도 모자라고, 지상 성도까지 다 일어 나야 됩니다. 이런 놀라운 일, 그 변화만이 놀라운 일을 가능케 합니다. 어쩔 수 없는 한계입니다. 누구든지 이 한계 안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질문3: (거의 안들림)
답: 명쾌하게 해석 해 주겠습니다. 지금 세 부류의 사람들을 이야기 했는데, 한 부류의 사람들은 뭔지 모르고 막 고민하며 살아가다가 형제가 말한 것처럼, 그런 영적인 순례를 이야기 하면서 결국은 이런 장엄한 신앙의 세계가 있다고 말해주니까, 아 그렇구나 하나 깨어나는 사람들 첫째 부류, 두 번째는, 아 그런 삶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는 보존하지 못하고 참 좋겠구나. 아 좋구나 하고 머무르는 사람들, 그리고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런 게 무슨 문제냐, 그런 거는 잘못된 신앙이라고 까지 얘기 하거나, 그것도 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런 정도의 것들로는 안 된다, 이렇게 적대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세 부류로 분류됩니다. 그런데 설교를 해 봐도 똑같이 그런 반응이 나옵니다. 뭐냐 하면, 설교를 할 때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뭐냐 하면, 뭔가 한 순간에 큰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충격이었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임해서 충격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들을 때 여태껏 내가 알던 신앙 지식하고는 어떻게 접맥을 시킬 수 없는, 새로운 성경의 렌즈를 나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교 속에 들어 있는 신학이라고 말하는 건데, 그걸 보면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까 말한 대로 한 순간 하나님에 대한 체험으로 자신의 대부분의 모든 신학을 포기하게 되는 것처럼, 이제껏 중구난방 들어왔던 많은 신앙에 대한 선입관념들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너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성경의 인식을 조성해 주는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 가슴 깊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라다 보면, 옛날에 흔하게 접했던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는, 자기 욕구를 채울 수 없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커다란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저는 각성한 사람들로 봅니다. 그 사람들이 옛 삶으로 돌아가서 옛날에 안일하게 살던 신앙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큰 고통을 가져옵니다. 인식이 크면 클수록 그 인식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커다란 궁핍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은 커다란 영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나가서 즐거운 얘기 듣고 서로 위로하고 이런 것으로는 만족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아까 얘기한 세 가지 요소 중에서 마음의 결단을 못 내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까딱 잘못하면 람보 식의 신앙생활을 하기 쉽습니다. 람보식이라기 보다는 대리만족적인 신앙생활.......말하자면 순교자들의 삶을 보면서 아, 멋있어. 너무 멋있어, 그렇게 감탄은 하는데, 자기는 절대 안 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보면서 군대를 안 갔다 온 사람들이 람보 좋아하거든요. 그 사람은 특공대 출신이니까. 대리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빠지기 쉽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떠벌리고 다니는 걸 좋아합니다. 나는 너와 수준이 다르다던지.....나는 적어도 이런 청교도 적인 설교를 즐기고 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극단적인 반대론자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미 다른 과정 운운하고 있지만, 사실은 대단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뭐 냐하면 아집의 신앙화입니다. 말하자면 뽑히기 싫어하는 몸부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걸 성경에서는 강퍅하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건 뭐 각자 자기 가는 데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부류에 속한 사람인지도 확인 하지 않으며 신앙생활 하니까 이건 더 큰 문제였습니다. 확인되기 위해서는 시금석에 갈아 보아야 합니다. 진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의 진리를 강력하게 선포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 부류로 쫙 갈라지는 것입니다. 옥석을 가려내는 것입니다. 대단합니다. 강력한 회개가 있는 곳에는 정반대의 뭐가 있습니까? 강력한 반발의 역사도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런 걸 통해서 설교자들의 고난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질문4:
답: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것과 겸손한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러니까 로이드 존스가 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른다고 말하지 말라. 뭘 물어보기만 하면 몰라요, 생각 안 해봤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신앙을 어떻게 생각하지 않고 모른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것입니다. 그럼 우선 참다운 부흥인가 아닌가? 부흥이라기보다도 부흥에 대한 올바른 추구인가? 잘못된 추구인가? 하는 그런 문제일 것입니다. 아마. 그럴 때는 제일 먼저 자신이 거기(부흥에 대한 잘못된 추구에)가담하면 안 됩니다. 바르지 않은데 거기 가담하면 되겠습니까? 문제는 사람들이 거짓된 방법으로, 혹은 잘못되고 비뚤어진 동기로 부흥이라는 걸 추구해 가는데, 물론 그 사람이 말하는 부흥과 우리가 말하는 부흥은 다르지만, 그때는 사람도 역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고 막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지난번에 오셨던 백금산 목사님도 옛날에 그런 얘기 하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제가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장본인이니까. 사모님이 많이 아프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뭐 돌아가셨지만, 그런 상황인데, 그때 이 목사님이 그 교회에 가서, 나하고 대화하면서 부흥에 대한 개념을 받고, 로이드 존스를 하루에 두 권씩 읽었답니다. 육백 권씩의 책을......하여간 위대합니다. 난 도저히 넘기지도 못하겠는데.....하여튼 천재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여간 읽으면서 변화되니까 계속 부흥에 대해서 설교하는데 한 자매에게 영적인 현상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집에만 들어가면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나타난 현상을 몸으로 표현하심) 자기가 원해서가 아닌데 하여간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에서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입술에서......그런데 뭐냐 하면 사모를 찾아가라. 그래서 사모를 만났는데, 같이 사모님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싶다고 그러니까 몸이 약한 사모가 얼마나 힘이 났겠습니다. 지체가 와서 기도해 주니까. 그런데 막 와서 뭐라 그러냐 하면, 너는 어찌하여 의심하느냐. 내가 너를 고쳐줄 것이고, 남편을 위대한 설교자로 삼아 줄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해 죽지 않았느냐,,,,,그런 식으로 계속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야, 뭔가가 일어났구나 ! 그런데 가면 갈수록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붙잡고 물어보니까, 계속 이런 몸짓이 일어나는데 자기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데, 어떤 힘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흥의 역사 속에서 볼 수 있는 성령의 역사하고는 사뭇 다른 현상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미혹시키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걸 증거라고 붙드는 것입니다. 빈야드 가 보십시오. 정말 이러면 쓰러져요. 그게 뭐 쓰러지려고 하면서 갔는데 쓰러지는 것입니다. 꽈당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뭐 쓰러졌다 일어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런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걸 보면서 잘못된 확신들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혼에 유익이 없습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에 나아가야 합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무지한 것을 겸손으로 포장해서는 안 됩니다. 무지가 죄악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알기를 매우 힘써야 합니다. 지금은 너무 좋은 세상입니다. 지금은 정말 알기를 원하기만 하면 정말 알 수 있습니다. 책들 있습니다. 테이프도 있습니다. 어디가든지 바른 길을 지도 받기만 하면 바른 것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춰봐야 하는 것입니다. 또 질문 있습니까?
질문5:
답: 좋은 질문입니다. 부흥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는 방향이 맞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방향이 맞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깨달은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면 그 기도가 진정한 부흥을 위해서 하는 기도가 될 수 없습니다. 제일 시시하고 이루어질 실제적 가망성 없는 기도가 뭐냐 하면, 하나님 우리나라 교회 축복해 주시옵소서. 뭘 축복해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 교회를 지켜주시옵소서. 뭘 어떻게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교회를 어떻게 해 주랴? 모릅니다. 하여간 잘 만 해 주십시오. 이런 기도는 다 쓸데없는 기도들이예요. 말하자면 천국에서 인쇄물(?) 취급을 받는 기도들입니다. 그러니까 깨달은 마음 없는 사람들은 기도도 그 수준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오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통해서 뭐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은 기도했습니다. 구체적인 기도의 제목들이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역사를 볼 수 있는 공정하고 바른 눈을 갖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언약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서 편견 없는 이해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깨우치심 앞에 얼마나 완악하고 무거운가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모든 사람들 마음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면서 그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변화되기를 우리는 기도합니다. 수없는 기도 제목들을 우리는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시시한 기도가 부흥을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부흥을 구하기 전에 구체적인 어떤 일들이 준비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열망과 지식도 없이 무조건 부흥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린 아이가 칼 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의미가 없고 생명이 없는 기도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히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약속하시는 약속과, 교회를 판단하시는 평가에 대해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흥 시대에 느꼈던 말씀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거기서 발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온 삶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의 삶은 기도로 집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 주시옵소서. 하늘을 가르고 이 땅에 강림하시옵소서. 나를 도구로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나 자신을 다 드리겠습니다. 그런 몸부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이) 네 마치겠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한번 같이 기도할 때에 하나님 이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부흥에 대한 소망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상하신 주님의 그 머리, 상하신 그 발, 일생을 우리가 주님을 위해 살도록, 하나님의 교회를 교회답게 회복시켜주시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게 하옵소서.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들어 감당할 수 없는 위대한 계획들을 보이시고, 하나님의 그 빛나는 계획아래 서 있는 오늘 날 교회의 초라한 모습은 하나님,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연약하게 말라붙은 뼈다귀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백성들을 향한 언약의 신실하심을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피페한 교회를 바라보며, 하나님의 생명이 필요함과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요함들을 우리 가운데 부어 주셔야 할 절박한 필요를 우리는 느끼게 됩니다. 혼란과 변천하는 인간의 사상들이 우리의 맑은 눈들을 어지럽히고, 우리 심령의 수많은 그 잘못된 신학들을 뿌려놓고 있는데 이 혼돈과 오류가 난무한 세상 가운데 참 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밝히 보이시고 이 어두운 시대에 진리가 없어서 이렇게 살아가는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 저희로 하여금 바르게 진리를 분별하며, 우리가 무엇을 믿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으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무엇을 믿으며 일생 가도록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 살아야 될 지에 대한 분명하고 정확한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여호와여,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주의 사랑하는 종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이처럼 사모하여 역사를 상고하였사오니 이런 모임들이 앞으로도 자주 있어 지도록 축복해 주시고, 역사를 통해 성경을 새롭게 보는 혜안들을 갖고, 오늘 우리 시대를 조명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의 종이 고귀하게 쓰이도록 붙들어 주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하시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교회를 회복시키시길 원하고, 땅을 고치시길 원하시는 그 뜨겁고 목 매이는 사랑과, 교회를 살아나게 하시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오늘 머리 숙여 기도하는 종들, 하나님의 이 위대한 부흥과 각성의 때를 사모하며, 어찌하든지 비천한 목숨이 이 영광스러운 일들을 위해 도구가 되기를 소원하는 주의 종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무궁토록 함께 있어 지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