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 :10)
녹취자 : 이시내
아마 조나단 에드워즈의 그 신학적인 공로 중에 탁월한 것 하나를 든다면 사랑에 대해서 그 엄밀성을 가지고 성경의 진리를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오늘 성경에 보면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했는데 희랍어 성경에는 정관사가 붙어서 그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고 나옵니다. 정관사 하나를 가지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성경전체의 사상을 보면 분명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의 사랑이 많기 때문에 그 사랑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랑으로 사랑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그 사랑으로 도달하는 것과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와 그리고 존재하는 방식의 모상들을 이 세상에 많이 두셨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무엇 하나 하나님의 모상이 아닌 것이 없도록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누가 한 일을 보고 이것 누가 한 가지라고 물을 수 있을 정도로 알 수 있을 정도로 사람됨과 그 사람이 행한 일이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어떤 식으로든지 그 모든 만물은 하나님을 닮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그 모든 만물이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닮아도 하나님을 완전히 보여주기에는 현저히 부족하고 그래서 우리들이 성경의 빛과 성경의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빛은 또 우리의 눈을 열어주어서 성경의 진리를 알지 못했을 때는 못 보았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상들을 이 모든 세계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의 그 속성 중 가장 탁월하고 위대한 속성이 있다면 사랑일 것입니다. 이 사랑은 모든 속성들과 담장을 쌓은 구별된 속성이 아니라 모든 속성들을 장악하고 움직이고 영향을 미치는 속성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속성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우리 모든 이 인간들과의 지성적인 피조물들 속에서 얼마나 가짜 사랑이 많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많은 사랑의 모상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또 사람들은 그런 속에서 어느 정도는 선을 이루고 자기 행복에 도달하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각기 기호와 생각이 달라도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받기를 마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이상 어떻게 하나님의 훌륭한 모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사랑이 이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기쁨을 우리에게 주는지도 우리가 알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사랑이 우리를 얼마나 슬프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지도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그 사랑의 흔적들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그 사랑이 여기에 있나니 우리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은 알고 그 사랑을 여기저기서 찾아보려고 많이 애를 쓰지만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가는 하지만 그 사랑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완전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사도는 그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에 탈이 없는 사랑 아무리 많이 사랑하고 자신을 주어도 후회하지 않으며 아무리 많은 사람으로부터 한없이 받아도 그것이 우리에게 상처나 고통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하나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가 바로 사도가 이야기 하는 그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인데 모든 것들은 그 하나님의 사랑을 본뜬 것입니다.
(예화) 한국 사람들이 중국 상해나 북경에 가면 꼭 들르는 관광명소가 하나 생겼는데 짝퉁시장입니다. 중국도 기술이 좋아져서 얼마나 유사하게 만드는지 짝퉁도 급수가 a, b, c로 나뉘는데 c는 시장에 막 돌아다닙니다. 제가 한 10년 전에 중국 갔을 때 로렉스 시계를 만원에 팔고 몽블랑 만년필 여기서 30만원 하는 것을 거기서 2만 5천원에 팝니다. 그런데 이렇게 딱 보면 짝퉁이라는 것을 금방 압니다. 전혀 다릅니다. 만원씩 부르더니 버스가 떠나려고 하니까 두 개에 만원에 주겠다고 합니다. 로렉스 시계가 지금 얼마나 갑니까? 이삼천만 원? 그 정도입니까? 한 4백만 원에서 8백만 원 정도이면 못 삽니까? 이만 오천 불? 한 사람 연봉입니다. 금방 알아봅니다. b급은 우리 같은 사람이 볼 때 아주 흡사하고 들고 다니면 멀리서 이렇게 볼 때 잘 모릅니다. 그런데 a급은 돋보기로 들여다봐도 잘 모를 정도로 그렇게 정교하게 만듭니다. 그런 가방 요만한 것 하나에 중국에서 삼사십만 원정도 받습니다. 그러면 진짜 원래 짝퉁 아닌 것은 사백만 원 이상 가는 것입니다. 모조품들은 그렇게 등급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의 모조품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 없이 쳐다보면 다 그게 그거 같은데 그런데 사실은 생각을 가지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속임수가 있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우리를 참된 사랑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꼼꼼히 보는 사람들 tv에서 잠깐 보니까 짝퉁 감정사가 있습니다. 그 사람은 거의 달인 수준입니다. 가방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것의 짝퉁을 알아내는 사람입니다. 비행기나 항공기 그런 거 말고 갖고 다니는 거 정도. 그런데 거기에 가지고 와서 대부분이 10명이면 10명 다 선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짝퉁인지 알고 싶은데 70%가 짝퉁입니다. 그러면서 짝퉁인 증거를 하나씩 하나씩 다 보여주는데 그런 프로그램 왜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준 사람을 얼마나 미워하겠습니까? 아마 안준 사람보다 더 미워할 것입니다. tv에 얼굴까지 팔렸으니까 전국적인 망신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절대 그런 거 선물하지 마십시오. 형편이 없으면 그냥 후진 거를 진품으로 하지 절대 그렇게 허영에 하지 마십시오. 어쨌든지 간에 보여주는데 기가 막히게 감정을 해냅니다. 조금만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특히 성경의 진리의 빛을 가지고 보면 그런 것들을 사유해냅니다.
그런 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18세기에 사랑짝퉁감정사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천지창조의 목적이나 참된 미덕의 본질 같은데서 감정을 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주 왔던 콜린대총장이 바이오에틱스 전공자인데 윤리학을 하면서 그 논문을 정말 최고의 논문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러면서 극구 칭찬하는 것을 들으면서 느낌을 서로 생각을 주고받았습니다. 아무튼 그러면 진리의 빛이 그것을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에 깊이 빠지면 빠질수록 이상하게 그 사랑의 놀라운 특성은 우리를 하나님과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놀라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아마 한번쯤은 하나님 사랑 앞에서 사람을 향한 사랑을 떼어놓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자식을 향한 과도한 집착, 부부간에 과도한 사랑 그것도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다 짝퉁입니다. 결국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자유롭게 사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자기 사랑은 두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 참된 사랑의 특성은 무엇인가 오늘 성경본문에 비추어서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로 오는 일방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기원만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높은 곳이고 우리는 낮은데 있다면 이 사랑은 물같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 사랑을 받기 전까지는 진정한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게끔 움직이는 모든 질서와 그리고 아름다운 작용들이 거기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언제한번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물과 로마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상식을 깹니다. 책에서 봤는지 다큐멘터리에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어쨌든 오래전일인데 그것을 보면서 저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야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정말 로마다운 생각이구나.’ 그랬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한 15도 내지는 20도 정도 경사가 지는 약간의 언덕을 택해서 계단식으로 공장을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장이 단지처럼 쭉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장은 뭘 생산해내고 공무를 빻기도 하고 막 여러 가지 공장이 있는데 공장에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동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동력을 어떻게 조달하느냐 하면 수로를 놓아가지고 로마 제국은 수로가 굉장히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로를 놓아서 그 수로가 도시를 휘돌면서 물이 흐릅니다. 그것이 높낮이를 얼마나 수학적으로 계산해서 만들었겠습니까? 모터로 돌리는 것이 아니니까 그런데 저 산위로 엄청난 물이 지나갑니다. 그 물이 가면서 산업단지로 위에서부터 아래로 물길을 만듭니다. 그래서 가던 물이 각기 그 아래로 물을 흘려주는 것입니다. 그 흘려 내려오는 물을 계단식으로 서 있는 공장 그 옆에 모두 물레방아가 있습니다. 그래서 물이 내려가면서 물레방아를 돌리고 물레방아를 돌린 그 물이 다시 밑에 공장에 내려가면서 물레방아를 돌리면서 계속 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이 있는데 우리가 물레방아 하나 매달면 하나하고 물을 가버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없는 물레방아를 쭉 계단식으로 만들어서 위에서 물이 내려오면서 어마어마한 동력들을 생산해 내는 것입니다. 제가 보면서 우리가 만약에 갈 수 없으니까 그렇지 로마시대로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돌아간다면 아마 어마어마한 것을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에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였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일들은 너무너무 많고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그 사랑이 동력이 되어서 흘러감으로써 어떤 공장에서는 그것을 사용해서 곡식을 빻기도 하고 어느 공장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가죽제품을 만들기도 하고 어느 공장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벽돌을 찧기도 하고 하면서 그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로마제국 전체가 말하자면 유지되었던 것처럼 사랑은 위로부터 아래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사랑입니다. 우리들이 고등학교 다닐 때 아가페사랑이 무엇이냐 그러면 우리는 맹목적 사랑이라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거짓말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해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맹목적 사랑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이기심을 만족시키지 않는 그런 말하자면 이타적 사랑이었다는 것은 말이 됩니다. 그런 사랑이 아가페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아주 위대한 경륜을 보여주는 것인데 누구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난 다음에 자신의 힘으로 사랑했다고 말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적어도 하나님은 이 사랑을 당신께로부터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신 있게 나는 뭘 사랑했다 나는 내 일을 사랑했다고 말할 때는 대부분 그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자기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한 자신이 기억에 남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먼저 하신 사랑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을 때에도 그 사랑이 필요한줄 알고 하나님이 먼저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오히려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관계를 회복합니다. 왜냐 햐면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가 그런 선도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별로 없는 사람들은 맺힌 것을 가슴에 품고도 넉넉히 살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맺힌 것을 품고는 살 수가 없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못 견디는 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입니다.
세 번째 이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은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화목제물로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화목제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 드리는 제사이고 그것은 이제 속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 번째 하나님과의 화목을 향하는 사랑인데 그 사랑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 아닌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기의 사랑과 다른 사랑의 사람을 만났을 때 가장 격렬하게 부딪히는 것입니다. 한국을 국수주의적으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일본을 열렬하게 사랑하는 사람 두 사람이 만나면 싸움밖에 할 게 더 있겠습니까? 뭐가 중립이 있겠습니까? 두 국수주의자들이 만나서 독도에 대해서 토론할 때 마지막에 싸움밖에 할 게 뭐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진하고 깊으면 깊을수록 그 싸움은 치열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화해를 꿈꾸는 사랑입니다. 그 얘기에 100% 동의 할 수는 없지만 칼바르트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기가 믿는 바에만 온전히 충실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는 좋은 카톨릭 신자 좋은 루터파 신자 좋은 개혁파 교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생각에 좋은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이야기를 어떤 문맥에서는 우리가 적용할 수 있고 어떤 문맥에서는 적용할 수 없겠지만 어쨌든 그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발언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은 이렇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랑이 아닌 사람들을 대적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들을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눈곱만큼 복음을 전하다가 그들이 안 받아들인다고 쉽게 분노하고 마음속에 저주를 퍼붓는 것 같은 그런 태도들은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의 발로가 아닙니다. 설령 그들이 그리 아니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네 번째는 그 사랑은 희생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피 흘림이 있고서야 죄 사함이 있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희생 없이는 죄 사함이 없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 철저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데는 아무런 희생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 측 희생은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위해 이미 죽으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위로부터 오는 사랑을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받고나서 그 사랑이 내려가기 위해서는 언제나 희생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공로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위로부터 내려온 사랑을 우리들이 생각하면 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희생 없이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아래로 흘려보낼 때 당하게 되는 고통과 많은 아픔들을 그 위에로부터 사랑이 내려올 때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참으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랑이 말하자면은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희생을 필요로 하고 하나님은 아우구스티누스나 칼빈 같은 사람에 의하면 안 그러셔도 되셨는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굳이 우리에게 당신도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희생하셨으니 너희도 내 사랑을 받아서 흘려 내려 보내는데 있어서 희생이 요구될 때에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에게 사랑의 모본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에 설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고난과 남겨주신 고난에 대해 교리를 발견하고 여러분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은 아닙니다. 나 자신의 신학과 묵상에서 나온 것인데 이루신 그 고난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치르신 희생이라면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채워지는 남은 고난은 받은 그 사랑을 가지고 흘려보내는 사랑인데 그 속에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교회를 섬기는 삶속에서 재현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에 참여하고 죽는 자마다 예수의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사랑 그 자체가 사실 하나님의 죽음을 이기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인의 최고의 영적인 특성이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것을 우리들이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네 가지 특성을 보여줄 수 있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보태자면 가장 귀한 것을 주는 사랑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이라고 말합니다.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음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아들보다 더 소중한 것이 없으셨는데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보내심으로써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온전히 구속하고 회복하시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런 점에서 볼 때 어떤 의미에서는 아들은 아들보다 더 큰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그런 사랑을 이 세상에 베풀며 산다고 할 때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가장 최고로 자기에게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또 형제를 위해 주지 않은 그 사랑은 참다운 의미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까지도 드린 사랑이 참된 사랑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