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을 찾아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계 2:2-5上)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을 요한 사도를 통해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미래의 위대한 일들을 보여주시기 전 예수님께서는 일곱 교회를 등장시켜 그들을 평가하시는 장면이 먼저 실려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맨 처음 에베소교회부터 마지막에 나오는 라오디게아 교회까지가 전 세대를 일곱으로 나누어 각 세대의 교회를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이렇게 되면 에베소교회는 당대에 있던 초대 교회의 모습을 가리키고, 마지막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신학적으로 올바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일곱 교회는 당시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 교회를 등장시켜 각각 주님의 평가를 받게 하심으로써 온 세상의 교회가 시대에 불구하고 추구하여야 할 덕과 빠지기 쉬운 오류와 잘못을 보여주어 그들을 경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또한 격려하시기 위함입니다. 요한 계시록에서 그리고 있는 이 세상과 교회는 거대한 영적 전쟁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교회의 원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을 악한 데로 몰고 가려고 하는 하늘의 악령의 세력들이 이 교회를 이 세상에 영향을 끼치고 있고 그리스도와 성령께서 이에 맞서 교회와 함께 하시며 진리의 전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II.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
오늘 우리가 관심을 갖는 첫 번째 교회는 에베소교회입니다. 일곱 교회 중 두 교회는 칭찬만, 두 교회는 책망만, 나머지 세 교회는 책망과 칭찬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에베소교회는 바로 그 세 번째 유형에 속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에베소는 당시 로마 시대에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그 유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유적만 봐도 당시의 에베소시가 얼마나 크고 웅장한 도시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지역이었고, 또 동서 사방의 교역의 교통로가 바로 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었기 때문에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의 무역이 행해지고 새로운 사상이 출몰하는 곳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사도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세워졌습니다. 여러분도 기억나실지 모르지만 사도행전 19장에서 성령을 몰랐던 아볼로에게 바울이 와서 성령을 받았느냐고 묻는 것을 시작으로 커다란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을 체험하고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마귀의 역사가 꺾이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 신기한 역사를 보면서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이렇게 귀신을 내어 쫓는 일을 하였습니다. 악귀 들린 사람이 뛰어올라 그들을 억압하며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행 19:15)라고 하며 큰 봉변을 주었습니다. 이때 희랍어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두려움이 에베소 사람들 위에 뚝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영적인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능력으로 모든 허무한 신들을 꾸짖고 부숴버리시는 성령의 능력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마술이 성행하던 도시에서 수많은 마술사들과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마술에 대해서 가르치는 수많은 책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이교의 화형식을 거행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기록자는 그때 쌓아올렸던 책들이 약 은 오만쯤이나 되는 엄청난 금액일 것이라고 환산합니다. 이렇게 큰 부흥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에베소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이 에베소교회는 다른 교회들이 따라오지 못할 만큼 아주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A. 에베소교회의 탁월성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교훈을 주시기 전에 먼저 에베소교회의 탁월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제일 먼저 주님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계 2: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은 흔히 머리로만 예수를 믿지 희생이 따르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가볍게 위안만 받을 뿐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지만 이 교회는 그 행위들을 주님이 기억하실 정도로 뛰어난 교회였습니다. 더욱이 이 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인내하고 참고 견뎠다는 이야기가 예수님의 칭찬 속에 세 번이나 등장을 합니다. 에베소교회가 이교문화가 판치던 세속적인 도시에서 얼마나 큰 핍박과 시련을 당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인내하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않는 교회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윤리적으로 올바로 서 있고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악이 교회에 오염되는 것을 막았던 순결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더욱더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칭찬입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계 2:2)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아직 신약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너도 나도 예수님이 세우신 사도라고 사칭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에베소교회는 그런 사람들을 일단 정중하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전하는 것과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그리스도의 교훈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었으니 그들은 첫째로 아주 성경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소유한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거짓 선지자들, 거짓 사도들은 거짓 영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정통 교회의 설교자처럼 말해도 그들에게는 두 번째로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짓 영에 속한 줄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런 것들을 구별해 내고, 그런 교훈을 전하지 못하도록 조용히 타일러서 보낸 것이 아니라 온 교회에 그가 거짓 사도인 것을 밝히고,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가 이것에 해를 입지 않도록 공포까지 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진리를 위한 참된 용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의 칭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또 내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교회는 많은 시련을 참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서 모진 핍박을 견뎠습니다. 이렇게 많은 어려움이 엄습하고 고통을 받게 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위축돼서 더 이상 부지런히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에 또 다른 칭찬을 한 마디 더 보태십니다.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 2:3) 이 교회는 그런 많은 시련과 역경을 거치면서도 결코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겼던 섬김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이런 교회를 우리가 찾을 수 있을까요? 어려서부터 교회 다닌 일에 지금까지 나는 수많은 교회를 방문하였으나 이런 교회를 본 적이 없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큰 뜻을 품고 개척한 여러분들이 모인 이 교회도 이런 정도의 교회는 되지 못합니다.
B. 처음 사랑을 잃어버림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을 칭찬하신 후에 오직 한 마디의 말씀으로 이 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모든 아름다운 덕이 열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고 말입니다. ‘그러나’라는 한 마디의 말이 이어지는 두 개도 아니고 딱 하나의 잘못이 앞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상쇄해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커다란 오류였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석가들은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첫째, 처음 사랑은 에베소교회가 맨 처음 은혜 받았을 때 그리스도를 향해 가지고 있던 교회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이 사랑은 맨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 에베소교회 교인들이 지체들을 서로 사랑하던 사랑이었다는 해석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적으로 보나 우리의 경험으로 보나 이것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할 사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모든 교회를 끌어안고 다시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모든 사랑하는 것들이 그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교회는 반드시 성도들 간에 뜨거운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마련입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하늘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곳에는 형제들이 있고,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그 형제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니 이 두 사랑은 사실상 하나의 사랑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두 사랑은 결코 나뉠 수 없는 모두 하나의 사랑입니다.
에베소교회는 바로 이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렸을 때 여전히 그들의 의무를 행하였으나 지체들 간의 뜨거운 사랑은 싸늘하게 식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사랑과 의무의 관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얼핏 보면 주님은 이들의 행위, 수고, 인내, 이 모든 덕들을 예수님은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한 교인이 의무를 인식하고, 그것을 열심히 실천하는 것은 은혜를 보호하는 껍질과 같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고 귀한 물건을 특별한 그릇에 보호하듯이 우리의 의무와 의무의 실천은 바로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사랑과 경건을 보호하는 껍데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껍질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그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주님의 사랑이 사라져 버리면 이 의무의 실천은 주님께 받아들여지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실천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열매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의 사랑이 그 모든 의무의 실천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으로부터 떠나서 냉랭해졌습니다. 그 사랑은 결코 순식간에 사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복음에 감격하고 은혜에 사로잡혀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으나 서서히 말씀의 빛과 은혜의 열기에서 멀어짐으로써 그들은 차갑게 식은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참고 견디고 부지런히 일하고, 도덕적인 순결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그 동기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되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은혜 없이 차가운 의무들의 실천만이 남게 되었고, 그렇게 할 때 이 의무의 실천은 때로는 자기 의가 되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움으로 주님을 갈망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신앙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비웃지는 말아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할 때도 교회에 나오고, 미끄러졌을 때도 주일이 되면 교회에 옵니다. 기쁨이 있을 때도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지만 기쁨이 없을 때도 이것이 여러분들의 당연한 의무인 것처럼 생각하며 교회에 옵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을 향한 은혜가 마음에서 좀 식어졌다고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고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면, 위는 기분 내킬 때 교회 오고, 기분 안 내키면 교회를 떠나다가 결국은 영영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의무를 실천한 이것도 결코 소홀히 여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종종 사도들도 예수님처럼 외적인 의무의 실천을 비판하시는데 이것은 단지 그 의무를 벗어버리게 함이 아니라 그 외적인 의무의 실천에 만족하지 말고, 그에 합당한 내적인 사랑을 다시 회복하라는 뜻에서 그렇게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자기 의로 여기지 말고, 자신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고 돌이키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렇게 에베소교회처럼 사랑이 식어져서 차가운 의무의 실천만 남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베소교회를 향해 주님께서는 처방을 내려주십니다. 그것은 처음 사랑으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첫 사랑은 대부분 처음 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서 이야기할 때 이 처음 사랑은 그냥 시간적으로만 처음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가장 뜨겁게 깊이 체험한 것이 처음 사랑입니다. 어떤 여성이 이 세상에서 살다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됩니다. 그는 남자를 전혀 모르고 그 남편이 처음 사랑일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그녀는 이런 남자도 만나 교제해 보고, 저런 사람도 만나 사귀어 봅니다. 그러나 처음 만난 그 사랑이 아주 깊고 잊히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그야말로 시간과 정도에 있어서도 처음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그 후에 자신의 인생을 가를 정말 깊고 위대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면 그 사람이 처음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III. 첫 사랑으로 돌아오는 길
저도 회심하고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난 기억이 훨씬 더 깊고 뚜렷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처음 만난 그 사람만 처음 사랑이 아닌 것으로 나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랑이 바로 처음 사랑이니 오늘 여러분들이 언제 은혜를 받았는지 그렇게 뜨겁게 주님을 만난 사실상 처음 사랑에서 여러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에 오고 주님을 섬기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처음 사랑에서 미끄러졌을 때 다시 돌아오는 세 가지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A. 생각하라
첫째는 ‘생각하라’입니다. ‘뉴에몬뉴에(mnemoneue)’라고 되어 있는 희랍어 단어는 원래 ‘회상하라’, ‘회고하라’ 혹은 ‘기억하라’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King James Version 영어번역에서는 이 단어를 ‘remember’라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기억하는 것’,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서 현재를 비교하는 것이 진정한 기억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에 넘어진 그 지점을 한번 더듬어 보라는 말씀입니다. 깊은 영적인 침체도 작은 결절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위로 크게 넘어져 죄 짓고, 악을 행한 그 지점이 아니라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마음의 넘어진 지점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려운 것은 바로 건강할 때나 약할 때나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돌아가거나 그렇지 않을 때에도 한결 같이 경건의 결을 내 마음속에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한번 생각해봅시다. 기억해 봅시다. 잊어버린 처음 사랑의 때, 주님을 감격적으로 만나고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우리에게 예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때도 예배를 드리다 나왔고, 지금도 주일이면 자동으로 우리는 교회에 옵니다. 그러나 그 처음 사랑의 때를 비춰보면 오늘날의 예배 생활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예배에 나아와 하나님을 자유롭게 경배하고 누구의 억압도 없이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예배는 항상 감격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말씀의 찬란한 빛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비추고 그 진리를 빨아들이기에 열심이었으니 그때 여러분들은 지각하는 적도 없었고 조는 적도 없었고, 더욱이 예배를 드리면서 다른 생각을 하는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더욱이 몸은 교회에 나왔지만 마음은 침대에서 뒹굴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질력이 나는 얼굴로 예배를 드린 적도 없었습니다. 엄마의 음성을 듣고 그 품에서 즐거워하는 어린 아이처럼, 신랑의 음성을 듣고 가슴이 뛰며 즐거워하던 신부처럼,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우리 마음에는 놀라운 지혜와 분별력이 있었고, 그래서 세상의 말과 진리의 말씀을 놀랍게 분간해 내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우리 마음의 빛을 비추면 우리는 그 말씀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배 시간마다 앉았던 자리를 눈물로 적시고 그때 찬송을 부르며 흘렀던 눈물이 지금도 성경책 갈피갈피에 흔적으로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드린 여러분들은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여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언제나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제 이 세상의 쓸모없는 것들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모으고 부자가 되고 권력을 획득해서 많은 사람을 여러분들의 발 아래 두느냐,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고 사람들에게 존중히 여김을 받느냐 하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러분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미워했습니다. 주일날 그렇게 강물처럼 넘치는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그 다음 예배를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넘치는 말씀의 은혜가 한 주간동안 감독하는 사람도 채근하는 사람도 없는데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눈물의 기도를 드리며 경건의 삶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꿀보다 더 달고 그 말씀은 읽고 공부할 때마다 언제나 마음에 힘을 주었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이런 마음이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찌하든지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보탬이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모퉁이에서 묵묵히 섬기며 오늘도 사랑으로 자신을 보듬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언제나 당연하지 않고 낯설게 느껴져서 주님 앞에 감격의 삶을 살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이런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누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 때문에 내가 이정도 인간 밖에 되지 않고, 이런 정도의 삶 밖에는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주님께 가장 죄송스러웠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부흥을 주셔서 모든 교회들이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돌아오고 나처럼 하나님 사랑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에 내려오실 길이 필요하다면 나의 육체를 가르고서라도 친히 이 땅에 강림하사 모든 악을 풀의 섶같이 사르시고,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을 위해 잃어버린 가족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고, 그리고 자기가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골육지친 중 몇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노라고 다짐하던 사도 바울의 그 아나데마(ἀνάθεμα)의 정신을 우리는 그대로 경험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을 기억하고 가슴을 뜯고 눈물을 흘렸고 그 기도 덕분에 완고하던 아버지가 교회에 나와 회심하고, 일평생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던 우리 엄마가 주님의 사랑을 알고 경건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우리 자식들이 주님을 알고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이러한 처음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우리는 매일매일 나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기 원하나 핍박 가운데 있는 중국을 비롯한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잃어버린 영혼을 위해 눈물로 채웠고, 그래서 없는 살림에 선교 헌금을 내었고, 우리는 그 영혼들을 돌아오게 하려고 기꺼이 아웃리치를 다녔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을 정말 사랑하는 한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지금과는 달랐습니다. 지금도 선교하고 예배드리고, 기도도 하고, 주님의 교회도 섬깁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 감격이 마음속에 사라져 갑니다. 어떤 사람은 유지하고 있지만 더 많은 사람은 물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거에 이런 처음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특별한 것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지금의 살아가고 있는 처지가 너무 가련하고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은 에베소교회에 대해 생각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처음 사랑의 때를 생각하며 오늘 이 현재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자리에서 떨치고 일어나는 우리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회개하라
두 번째는 “회개하라”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며…”는 것입니다. ‘메탄노에선’(metanoeson)이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다시’ 혹은 ‘후에’ 다시 한 번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하다는 그냥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영적인 통찰로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죄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은 영원히 사라질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본성이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어떠한 신자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커다란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은 자잘한 죄를 짓지만 그 죄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죄의 본질은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크기와 상관없이 그 모든 죄는 동일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작은 죄는 가볍게 회개해도 되고, 큰 죄는 더 크게 회개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죄를 지은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서부터 멀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죄의 본질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아픈 것이지만 이렇게 주님이 촉구하시는 이유는 이렇게 아프게 치료를 받음으로써 그 마음이 고쳐져 다시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한데 이 세 가지가 합쳐짐으로써 이 회개는 하나님 앞에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인격적인 죄에 대한 돌이킴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지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의 빛이 우리에게 비취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크고 작은 죄를 짓고,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침체를 가져옵니다. 오히려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은 또렷하게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이 있으나 자잘하게 죄를 짓고 그것이 회개하지 않은 채 쌓여진 사람들은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아주 선명한 지식의 빛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그의 마음을, 지성을 비춤으로써 회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한 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만약에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면 어떠한 물건도 분간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희미한 불빛을 가지고 있다면 큰 물건들은 구별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찬란한 빛이 있다면 우리는 이불에 떨어진 바늘 하나까지도 찾아낼f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밝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예배를 드려도,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밝은 지식의 빛을 찾지 않고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예배를 드려 몸은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마음은 침대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뒹굴고 있다면 회개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아마 점점 더 뒤로 물러갈 것이고, 그렇게 물러갈수록 죄로 말미암아 겪는 고통은 가중될 것이며, 결국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을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죄가 우리를 강타하게 되면 무방비 상태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게 되고 그리고 마지막에 스스로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는 곤고합니다.’ ‘인생이 꼬였습니다.’ ‘그지 같은 인간을 만나서 내 인생이 망가졌습니다.’ 그런 일은 모든 사람에게 날마다 죽을 때까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런 상황과 환경을 보고 있는 한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만을 고통스럽게 깨달을 뿐이지 해결은 그 안에 없습니다. 문제는 세상에서 생기지만 해결은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빛 안에서만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흐느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가 끝난 후에는 찬란한 빛보다 밝은 말씀의 빛 아래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생명의 길로 들어갑니다. 어떤 사람은 지겹도록 긴 시간을 침묵하며 그렇게 견딥니다. 그런 예배 생활 속에 무슨 지식의 빛이 주어지겠으며, 사도 바울이 와서 그에게 성경을 가르쳐도, 아니 예수가 직접 오셔서 성경을 풀어주신다고 해도 그 사람이 그런 마음으로 회개할 리는 없습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말씀의 빛으로 지식이 주어져서 죄를 깨닫게 되면 감정으로 미워하게 되는 것은 당연히 일어나는 현상이고, 만약 두 번째 것이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 것이 아닙니다. 라돈이 엄청난 수치로 방출되어 심각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사능에 노출되었고, 이제 그 결과는 살아가면서 각종 질병으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도 몰랐습니다. 현대인들은 공해 속에서 그리고 이미 자연의 조화가 깨진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몸들이 예전보다 훨씬 피곤하고 회복력이 늦습니다. 이때 그 모든 살갗을 침투해서 우리의 살 깊이까지 들어가서 세포를 생성시켜 주고, 막힌 것들을 다시 풀어 원활하게 흐르게 해주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원적외선이 나온다고 하니 그 침대를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우리처럼 뭐든지 쉽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광고에 혹하는 사람들은 그 침대를 매우 비싼 값에 샀습니다. 침대 제조업자는 싼 가격에 원적외선이 나오는 재질을 고르다 보니 원적외선이 나오는 것은 틀림없는데 거기서 몸에 치명적인 방사선까지 함께 배출되는 원석을 사실은 알고도 선택한 것입니다. 그 소식을 뉴스를 통해 실험의 결과를 보면서 분명하게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어땠을까요? ‘에이. 눈에도 보이지 않는데….’ 라고 생각하고 침대를 계속 쓴 사람들은 얼마 있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라면 당연히 그 지식의 빛이 들어온 순간 ‘아, 내가 왜 이것을 샀을까?’ 후회하며 당장 그 매트리스를 걷어서 그것도 집 안에 두는 것도 너무 찝찝해서 바깥에 갖다가 배출을 해버리거나 그것도 못하게 하면 지하실에 갖다가 던져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사실은 그것과 함께 접촉했던 모든 가구들에게서 혐오를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을까요? 당연히 그 침대를 갖다가 버리고, 기억에 남아있는 동안 다시는 그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침대를 산 사람들은 아마도 배상의 길이 있을 것이고 보상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남아에 여행 갔다가 한국보다 훨씬 싸서 신나라하고 득템했다고 하며 그것들을 가족별로 하나씩 사가지고 온 사람들은 더 어려운 위치에 처해있습니다. 손해배상을 청구할 데도 없고, 그리고 소비자 보호원도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만약 하려면 태국이나 말레이시아, 혹은 필리핀 같은 제 3국의 그 생산자를 상대로 국제 재판을 걸어야 되니 소비자들 가운데 그렇게 해서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의지입니다. 그것을 당장 갖다 버렸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회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서 회개할 때는 아프고 쓰라리지만, 회개 끝에는 항상 하나님이 예외 없이 당신의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죄가 없는 사람은 없으니 하나님은 또 다른 길을 예비하셔서 그 죄에도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올 길을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한 사람들을 용서하심으로써 그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는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셨으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고, 내 손가락을 붓으로 삼아도 모두 기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사야 선지자를 하나님 영광의 신학자로 부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준엄하게 죄악을 고발하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역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하기 전에 그는 전제를 먼저 깔고 이사야의 예언을 시작합니다. 이사야 1장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하였습니다. 문제는 자신의 잘못을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계속 교회에 나왔는데 왜 그러는 거지?’ ‘내가 주님의 교회를 계속 섬겼는데 어쩌라는 거지?’ ‘내가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선교를 위해서 일했는데…’, ‘내가 얼마나 죄 짓지 않고 살려고 애썼는데…’, 이렇게생각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주님께로부터 똑같은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에게 책망할 것이 있느니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 처음 사랑을 버렸음이라, 처음 사랑을 네가 버렸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입니다. 왜 내일일까요? 왜 다음일까요? 지금 모든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지금이 여러분들이 죄를 회개하고, 처음 주님께로부터 받았던 감격이 있는 사랑으로 되돌아올 때이니 회개하기 바랍니다.
C.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마지막 세 번째는 “처음 행위를 가지라”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의하면 “처음 일들을 실행하거라”입니다. 이 이야기는 옛날에 있었던 이런 행위들이 에베소교회에서 깡그리 사라졌으니 이제 다시 이런 행동들을 하라고 해석해서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말씀의 의미는 처음 일들을 행하는 것과 지금 일들을 행하는 것 사이에 차이를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출석하고, 지금도 출석합니다. 그때도 교회를 섬겼고 지금도 교회를 섬깁니다. 그때도 권사였고, 지금도 권사입니다. 그때도 성도였고, 지금도 성도고 그때도 아웃리치를 갔고, 지금도 아웃리치를 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에게 떨어진 지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처음 사랑의 때이다. 모든 행위들이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 나 그리스도를 너희들이 순수하게 사랑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순수한 사랑으로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교회를 섬기고, 선교하고, 가난하고 불행한 이웃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처음 행위를 행하라’, ‘가지라’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하여 맨 처음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러나온 행위들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말씀은 외적인 생활 속에 내적인 사랑이 가득 채워졌던 처음 사랑의 때와 똑같이 그렇게 하나님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갖는 이것은 하나님의 처음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곤고하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위한 최상의 치료 방법인 것입니다. 이것을 외면하고는 하나님의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길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결정적인 가르침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만한 마음, 모든 태만하고 아무렇게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그리고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그가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여기까지 살아오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돌아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V. 적용과 결론
에베소교회는 모든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탁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간이 흐르며 말씀의 빛과 은혜의 열기에서 사라지며 차가운 교회가 되었고,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오늘 이렇게 준엄하게 이들을 책망하고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는 에베소교회가 반드시 회복될 것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계 2:7) 침체에 빠진 에베소교회를 향해 너희도 회복될 수 있으며, 너희도 이길 수 있으며, 너희도 내가 주는 천국의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다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회심한 후에 얼마 있다가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때 친구에게 이끌려 친구가 다니는 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꽤 유명하고 큰 교회였는데 반주자 한 사람도 없이 아무 반주 없이 찬송하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솔직히 목사님이 전해주셨던 말씀은 별로 기억에 남지 않은데 자매 한 사람이 예배를 위해서 특송을 해주었습니다. 교만하지 않는 태도로 자기가 이 찬송을 부르며 얼마나 가사에 감격하게 되었는지를 간단하게 우리에게 전해주는 것처럼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찬양을 했습니다. 그 찬양이 이것이었습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생각하네
이제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어 그 은혜의 감격 뒤에 침체에 빠졌던 저는 그 뒤편에 앉아서 이 찬양을 드리며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성령 충만하고 주님 섬길 때에만 예수님이 나 사랑해 주시는 줄을 알았기 때문에 은혜에서 물러나고 옛날처럼 섬기지 못하는 나는 이제 주님의 관심의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가르쳐 주시는구나. 성령 충만하고 주님께 충성스러울 때뿐만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나의 죄 때문에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언제나 생각하셨구나.’ 그리고 그 뒤에 앉아서 마음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한 쪼가리의 밝은 빛이 찬양하는 자매의 입술을 통해 나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서 모든 것을 걸고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주님을 멀리 떠나 곤고해 졌든지 하나님은 충만할 때뿐만 아니라 그렇게 침체되었을 때도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돌아가야 할 유일한 희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입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그 처음 사랑을 그리워하며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다시 사랑 받게 해주셔서 잃어버린 처음 사랑이 기억나지 않도록 새로운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