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였으므로 죽었노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7-19)
녹취자: 남궁지선
예수님이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아직 베드로와는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누신 것 같지 않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모든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만나고 해결해야 할 하나의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고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그 질문은 바로 유명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불이 피워진 것도 제사장의 뜰과 비슷했고 예수님이 세 번을 똑같은 말로 물어보심으로 세 번 부인한 것을 하나씩 지우시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요한복음은 20장에서 끝나면 딱 맞는 책입니다. 21장은 그래서 요한복음의 부록입니다. 그런데 이 부록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까지 마지막 결국에는 제자들이 모두 예수를 부인하고 버리고 도망간 것으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입니까? 다음 장 사도행전 1장을 넘기고 나면 그런 사람들이 모두 교회의 커다란 지도자들이 되어 나타납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21장을 부록처럼 끼워 넣으셔서 여기서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장면을 통해서 그렇게 실패한 자들을 부르셔서 당신의 나라에 위대한 일꾼을 삼으시는 복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잠시 후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고 이제 성령이 임하시고 나서 초대교회가 이루어지게 되면 베드로가 그 교회의, 말하자면 최고의 지도자가 될 터인데 예루살렘교회의 담임목사가 될 터인데 예수님은 한 가지만을 질문하셨던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그리스어 본문에 이 세 가지 ‘사랑하느냐’하는 단어가 다른 단어로 쓰였다는 것 때문에, 질문의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를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은 하나의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오직 하나만 질문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다른 묻고 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을 텐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나만 질문하셨을까요?
이 문제가 오늘 목사 위임을 받으시는 우리 백금산 목사님과 그리고 이 목사님을 모시고 함께 목회하게 될 여러분들을 위한 질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우리 관점을 옮겨서 저 멀리 창세기로 넘어가 봅시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흙으로 빚어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갈비뼈를 취하여 만드셨습니다. 둘을 혼인하게 하셨는데 혼인 직전에 고백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이러한 무엇 중의 무엇은 히브리 문학에서 보면 최고를 뜻하는 것입니다. 오늘 질문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것은 흔히 사람들이 아담과 하와, 남편과 아내의 사랑의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 이 두 사람이 당시의 유일한 인류의 조상이었음을 기억해 보십시오.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아들도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했을까요? 아니면 엄마 아빠만 살 중의 살이고 너는 그렇지 않다. 라고 했을까요? 정답은 모두 살 중의 살, 뼈 중의 뼈라고 고백을 했을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굳이 한 사람을 만드시고 이어서 모든 사람 들을 하와까지 만드시고 생육하게 하신 이유는 그들 모두를 인류사회로 만드실 때에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며 사는 사회가 되도록 만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그렇게 함께 태어난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처럼 살아가는 사회를 만드시려고 인간을 지으셨던 것입니다.
죄가 들어왔습니다. 그렇게 고백해야 하는 관계는 서로가 존재함으로서 견딜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첫 번째 불평이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함께 하게 하신 그 여자”라는 아담의 불평에서 시작합니다. 이후로는 신속히 살인과 폭력이 도입되었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끼리 미워하고, 질투하고 죽고 죽이는 일들이 끔찍하게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를 사랑으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들 중 그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바람 앞에 꺼질 것 같은 등불처럼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러한 사회를 이루어 모든 나라에게 모본을 보일 것을 지시하셨지만 그들은 마음이 각기 부패해져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웃을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방나라 보다도 더 사랑이 없는 그러한 부패한 사회가 되어 버렸고 하나님이 왕국을 멸망시키셨던 것이죠.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끊어지는 것 같았으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내려오시게 되었고 아담과 하와가 짝을 이루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신부인 교회와 한 몸을 이루셨습니다. 당연히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사랑의 고백을 했던 아담처럼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사람의 사랑은 불완전하였으나 하나님이신 예수의 사랑은 완전했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그 사랑은 변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불러 그 분의 교회를 삼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하고 교회를 신부로 하는 혼인의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그 위대한 사랑을 성자인 아들에게 부으시고,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 속에 신부인 교회는 참여하고 우리는 그 몸의 한 지체가 됨으로서 그 사랑의 연합 속으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죠. 그리고 이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임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믿은 자녀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억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은 하나님이 심으신 것이기 때문에 그는 그 본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시 그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도 잔존하는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그것보다는 세상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을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을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고 그 사랑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이전에 모르던 것을 깨닫게 함으로써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기가 사랑하는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우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사랑의 감정은 아름다움을 발견하는데서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임무입니다. 만약에 모든 성도들이 구원을 받은 즉시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들어가고, 그 사랑이 변치 않고 항상 머물러 있다면 목회자는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안목의 정욕을 사랑하고 육신의 정욕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할 위험이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목회자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특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보여주고. 자신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 때문에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행복하게 사는지를 인격과 삶으로 가르쳐 주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회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백 목사님보다 한 6년 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저도 26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저의 목회는 한참 젊은 시절을 지나서 목회의 끝자락에 서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헤어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우리의 모든 인생의 인연이 그러하듯이 교회와의 인연도 영원하지 않고 언젠가는 나도 사랑하는 회중들과 헤어져야 할 때가 있고,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는 교회도 예전에 있었던 목사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사는 겉모습이 어떻게 변할지라도, 불변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실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코의 호흡이 끊어져도 그 후에는 보다 영원한 세계가 펼쳐질 것이니 거기서도 우리들이 변함없이 해야 할 아름다운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의 영적 지도자인 베드로를 선택하시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내가 너에게 양 떼를 맡겨 줄 터이니 그들을 네가 끝까지 사랑하겠느냐?” 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을 물어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도 아니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의 위대한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고백을 한 후 사실상 예수가 버리게 하신 이름이었습니다. “이제 네 이름을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 그 버린 이름을 예수님은 다시 부르시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말씀 하십니다. 실패한 자에게는 “위대한 믿음이여. 반석과 같은 신앙이여”라고 부르시는 것은 낙심스러운 호칭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르시기 전 베드로의 있는 모습 그대로 한 인간으로 돌아가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훌륭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사람 앞에 서 있는 바는 원래 그 사람과 다를 수 있으나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는 원래 있는바 내가 아닐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처럼 외모에 속으시거나 겉모습에 진실을 오해하시는 법이 없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연약하지만 그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목양으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게끔 자기를 도우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를 앞으로 어마어마하게 커질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목회자로 삼지만 잊지 말거라. 너는 그냥 요한의 아들 시몬이란다.’ 대사도, 교황 1대도 모든 사도들의 머리도 역사상 다시없을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아니고, 그냥 요한의 아들 시몬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스토리를 보면 우리에게 충격적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을 묻고 세 번을 대답해서 이제 예수님도 확실히 믿게 되셨습니다. 그 다음 하시는 말씀은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네 원하는 곳으로 다녔으나 늙어서는 사람들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친절하게 이 말이 무슨 뜻인지 까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순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간단하게 말하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시고는 “그렇습니다.”라고 진심을 다해 대답했더니 “그렇다면 너는 나를 위해 죽거라”하신 것이 예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온갖 세상의 복을 약속하셔야 다른 사람도 따라 할 텐데, 사랑한다고 물으신 후 그렇다면 너는 나를 위해 죽거라,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보이는 물질이나 이 세상의 번영으로 사랑의 보상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영혼들을 사랑하도록 설득하며 일생을 눈물과 피로 물들이며 살았던 사람에 대한 최고의 보상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이고 죽어서는 그보다 더 완전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교제를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백 목사님도 예외가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종들 중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더없이 진실하시고, 더없이 말씀에 충성되시고, 더없이 정결하시고, 더없이 교회를 위해 헌신적이신 목사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목사님을 여러분들의 목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여러분과 함께 머물러 있는 동안 자신의 지성과 모든 의지를 다하여, 당신이 사랑했던 하나님을 여러분들도 변함없이 사랑하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헌신하실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기서 우리 백 목사님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또 여러분 교인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백 목사님께 위로를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동기가 되어 목회에 자신을 바치고 일평생 지성과 의지로 사람을 설득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예수를 위해 살게 한 목사님은 넘치는 위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실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고난이 그치지 않겠지만 고난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물 붓듯 부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위협을 끝내고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할 그때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보좌로 이르는 길에 붉은 양탄자를 까실 것입니다. 세상의 빛나는 황금으로 치장된 비단 양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뿌려 만든 자줏빛 카페트를 밟고 보좌 앞으로 나아가 충성스럽게 살았던 목회자로서의 피 묻은 전투복을 벗고 세마포 옷을 입은 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에 사모님도 함께 계실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위로를 삼으시길 바랍니다.
나는 교인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의 가장 큰 특권은 이 시대에 백 목사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명쾌하게, 정확하게, 깊이 있게, 선명하게 전하는 설교자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깊이 감사해야 하고 그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 성도들에 비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할 책임감을 서너 배나 더 느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많이 맡은 자들에게는 많이 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목사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목사님을 위한 최고의 보답은 여러분들이 목사님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 때로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이 세상에서 눈뜨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지라도 거기서 하나님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행복해하는 여러분이 되는 것이 목사님에 대한 최고의 보답입니다. 목사님의 목회를 통해 여러분이 그렇게 되실 줄을 믿기 때문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사로 부름을 받는 것도, 한 교회의 위임목사가 되는 것도, 그런 목사님을 청빙 하는 것도, 설교를 하는 것도, 그 설교를 듣는 것도, 오직 모두 한 가지 목적을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므로 우리의 마음속에서 주님을 향한 경외심과 함께 이웃을 측은히 여기는 사랑이 넘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 앞에 살아가는 삶이 거룩하고, 아름답고, 흠이 없고, 진실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행복하도다 라는 고백을 받게 하기 위해, 우리 모두 그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이 중요한 예식과 함께 목회자와 모든 성도들이 오직 하나, 이전보다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고 사랑하게 하는 비전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