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 여기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1 4:10)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사람마다 모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들이 서로 다르지만 누구도 사랑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만 또한 불행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입니다. 그릇 사랑하기에 비참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옳게 사랑하려고 하다가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행복이 사랑하고 사랑받음에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말하지만 사랑을 많이 말하는 것처럼 행복하지는 않은 시대입니다.
II. 그 사랑 여기에
그러면 우리는 그 사랑을 어디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누구나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행복해 하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찾아야 할 진정한 사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1 4:10)
A. 아들을 보내심
아들을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사랑이십니다. 사랑할 대상인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도 하나님은 사랑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삼위(三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삼위(三位)의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를 사랑하심으로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사랑을 베풀어 주셔도 공기의 고마움을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고마움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태어나 사랑의 품 안에서 살다가 사랑의 품 안에서 죽거늘 그런 줄을 인간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볼 수 있게끔 시간 안에서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탄절날 기뻐하고 떠들썩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명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세상에 보내는 것이 기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결국 속죄의 제물로 죽게 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살리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언제 인간이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있었습니까? 살아있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니, 누가 사랑하지 않은 때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항상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안에 참 생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참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과 사랑은 하나입니다. 생명은 우리 인간을 살아있게 하는 내적인 힘이고, 이 내적인 힘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났을 때 이것이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체의 생명은 육신을 살아있게 하여 다른 사람을 향하여 관계를 맺게 하지만, 영적인 생명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여 다른 사람과 자신 사이에 올바른 사랑의 관계가 맺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육체를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지 않으면 진정한 사랑일 수 없고, 자기만을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이니, 그것이 우리를 행복으로 인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주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사랑을 받으며 살도록 태어났습니다. 그 사랑이 바로 영적인 생명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자, 인간의 체구를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체구보다 더 큰 동물들은 이 세상에 지천으로 널려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짧은 시간 안에 최상위 포식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기보다 더 큰 짐승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들을 포획하고 부리며 자기의 용도에 맞게끔 사용하며 살아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의 뛰어난 지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지성은 인간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아주 뛰어난 만물의 영장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동물과 짐승 위에 뛰어난 존재이지만 아주 복잡한 정신의 작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나 돼지나 소나 말이나 나귀나 호랑이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간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결코 살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성경이 자기의 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양', ‘양떼들'이라고 부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모든 구원받을 인간들조차도 ‘양'이라고 부릅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모든 짐승들은 저마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방어 기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어 뜯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 그리고 자신의 본색을 감출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변신의 능력, 심지어는 고슴도치처럼 힘은 없지만 누구도 공격하면 찔릴 수 있는 날카로운 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양은 아무런 방어 기재가 없습니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나 물어뜯을 수 있는 이발 그리고 공격하는 자들을 받아버릴 수 있는 뿔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특별한 동물에 우리 인간을 비유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처음부터 이 양이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의 보호를 받으며 인간에게 자기를 주며 살도록 창조된 것처럼 사람 또한 처음부터 하나님 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인간을 그렇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생명적인 연합이 끊어졌습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참사랑에 이를 수 없고, 참사랑에 이를 수 없기에 그들은 참된 행복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와 인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합니다. 구약 성경은 율법을 통해 복음을 보여주었고, 신약 성경은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율법을 가르쳐줍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약에서 나타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그 사랑은 더 이상 희미하게 암시되거나 겨우 확인을 할 수 있도록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밝히 나타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영원하신 그분이, 시간 안에서 물질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유한한 이 세상에 오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며 돌보실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아주 뛰어난 믿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비로소 그 하나님의 행하심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조차도 육신의 감각은 가지고 있으니 친히 사람의 몸을 입혀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아들의 행하시는 모습, 그 아들이 섬기시는 행동, 그 아들이 그들을 위해 베푸시는 사랑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더 잘 알게 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을 기뻐하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나기 위하여 그 첫걸음으로 그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날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얻을 길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말할 수 없이 기쁜 날이지만, 또 한편 하나님의 마음에는 당신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아무리 낮아져도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으로 낮아진 것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의 비참함을 택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죽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이 성탄의 의미를 생각하는 성도는 우리의 기쁨과 하나님의 슬픔을 아기 예수 오심 속에서 함께 느낄 수 있는 성도가 진정으로 성탄의 의미를 아는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나타내셨습니까?
B. 화목제물 되심
마지막으로 화목제물로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화목제물은 불화하게 된 사이를 화목 시킬 목적으로 바쳐진 희생의 제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 때문에 깨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때문에 인간에 대해 진노하시고,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원수로 여기는 적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한한 낯섦과 그리고 거리감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인생에 있어서 특별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과 더불어 한 가족으로 살았던 존재였습니다. 마치 불효한 자식이 부모를 멀리 떠나 타향에 떠났다가 나이가 많이 들어 자녀들을 생산하고 인생에 철이 든 다음에 자신의 뿌리를 그리워하며 고향집을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가 다시 원래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을 상기하게 하시는 은혜 때문에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안 믿고 오래도록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그것이 비정상적인 삶이었던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후 하나님은 비록 죄를 지었으나 두 가지 은총을 즉시 베푸셨습니다. 언젠가 메시아가 오셔서 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예언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한 하나님의 형벌을 연장시키신 것이었습니다. 죽기는 죽지만, 그러나 잠시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하셔서 자손을 끼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담과 하와는 죄 때문에 죽었지만 그 자손들에 의해서 또 그 자손도 죄 때문에 죽지만 그 자손들의 자손에 의해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목적을 면면히 이어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한시적으로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진노 중에도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을 버렸으나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범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제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어드리는 것이 바로 화목제물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희생제물로 말미암아 노여움을 푸시는가? 희생제물이 아니면 하나님의 마음은 끊임없이 출렁대는 파도처럼 미움으로 그렇게 요동치는 하나님이신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인간처럼 부르르 떨며 노여워하실 수 있으며, 이것이 짐승의 희생 같은 것으로 풀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완전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고백록 속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움직이시고, 당신은 변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변하게 하시며, 당신은 뜻을 바꾸지 않으면서도 모든 일들을 바꾸시나이다.』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은 그러실 수 없는 분이시지만, 만약에 그러기만 하면 인간을 도덕적으로 교훈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부모인데 자식에게 희로애락의 어떠한 정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이들이 여러분을 통해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 악한 것이 왜 나쁜지를 배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과 소통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은 변함이 없으시지만 변하시는 하나님인 것처럼 인간에게 느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으면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떠올리게 되고, 선을 행하면 칭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나 악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끝에서 그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게 되고, 선을 행하고 순종하면 사랑하시고 예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나니, 악인도 그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선한 사람도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의 품을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태어나고, 죄짓고, 선을 행하고, 병들고, 늙고, 죽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품은 우주 전체를 품고 남음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품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이 행복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늘처럼 사랑하셔도 우리가 그 사랑을 알 때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교제 속에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교제를 통해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누리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과 교제의 관계없이는 인간은 결코 창조된 본래의 목적대로 살 수 없고 행복해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잠시 하나님 없이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기쁨보다 더 큰 슬픔과 불행이 밀려오는 것을 무엇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은 보상을 받으셔야 할 만큼 눈에 띄는 손해를 당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목제물로 바쳐질 때 그 제물을 보고 하나님이 노여움을 푸시는 것은 우리들을 향하여 그 제물을 바치면서 당신과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배려인 것입니다.
자, 이제 여러분이 구약시대에 있다고 칩시다. 그리고 죄를 지었습니다. 당연히 양심에 찌르는 가책과 그리고 율법을 따라 큰 징벌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여러분의 마음을 휩싸고 있습니다. 이때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가게 됩니다. 자기가 길렀던 양 한 마리를 데리고 이제 성전으로 간다고 치겠습니다. 제사장은 그의 고백을 들으며 그의 죄를 위하여 기도해주고, 여러분이 지은 죄는 그 어린 양에게로 옮겨가게 됩니다. 여러분 대신 죄를 짊어진 이 어린 양은 처참하게 죽음을 당합니다. 당연히 이 짐승이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알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내게는 죽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짐승은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유혈이 낭자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갈 때는 수많은 배설물을 쏟아 놓게 되고, 결국 죄인은 통곡하고 짐승은 살가죽이 벗겨지며 산산이 해체되어 제단에서 불에 타는 연기로 피어오르게 됩니다. 그 광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실연(實演)식 교육을 시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던 짐승이 그렇게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는 광경을 보면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크고 끔찍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실감이 잘 안 날 것 같아서 좀 무섭긴 하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집에 코코가 있습니다. 벌써 이제 여섯 살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예뻐합니다. 그런데 그 강아지가 제물로 바쳐진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죄 때문에 그 강아지가 죽임을 당하고 피 흘리고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 개는 나를 알아보며 내가 자기를 구원해줄까 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에게 살려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그런데 죽임을 당합니다. 낱낱이 해체되고 불태워지는 광경을 본다면 정신이 온전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거기서 나쁘게 얘기하면 커다란 트라우마를 가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트라우마입니까? ‘나의 죄 때문에 나를 알아보고 그 또한 나를 아는 어린 양이 죽임을 당했구나!' (이것을) 절절하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그때 그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받으시기 위해서 짐승은 연출로서 죽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짐승을 제물로 바쳐서 그렇게 철저히 회개하면 하나님이 그 제물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자신의 죄를 뜨겁게 눈물로 회개하는 그 사람의 믿음을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잠시 닫혔던 하늘의 교제의 문이 열립니다. 그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도 귀에 안 들어오고, 기도도 막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 부서지고, 그리고 온통 죽고 싶은 생각만 가득할 때 은혜를 받은 순간을 떠올리면 되는 것입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은혜를 받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눈물을 펑펑 쏟으며 자신의 지난날들을 회개할 때 하늘 문이 활짝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그런 감격을 구약시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며 진심으로 회개할 때 진정으로 느꼈던 것입니다. 양의 피와 하나님의 진노가 가시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장난치듯이 짐승을 죽이면 그 제사는 하나님 앞에 열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주님이 받으시고 싶어 했던 것은 사실 그 목을 따여서 죽임을 당한 피 흐르는 양의 시체가 아니라 그 죄의 끔찍함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부서지는 헌제자의 마음을 하나님이 받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짐승을 죽이는 건 하나의 연출이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나온다고 모두 그 예배의 감격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예배 속에서 자신을 깨뜨려 주님 앞에 바치는 그 자기 깨어짐이 있을 때 하나님이 교제의 문을 여시고 큰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 제사를 통한 교제의 문은 잠시 열렸다가는 닫히고 이로써는 영원한 화목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나타날 영원한 구원의 그림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영원히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화목을 이루게 되실 예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희생적인 죽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 동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1 4:10 下)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랑은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바쳐지게 하였습니다. 자기의 소중한 아들을 죽게 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여 당신과 화목한 관계 속에 살게 하고자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감격적이었던 성찬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87년도 아마 추수감사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결혼하고 7년 만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유아세례를 받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안고 유아세례를 받고 동시에 성찬의 떡을 떼었습니다. “···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 11:23-24) 아들을 안고 있는데 하나님이 이 아들을 나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서 한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낸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가 하는 것이 체험적으로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1 4:9)
인간 세계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랑이 있습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희생적인 사랑, 부모를 향한 자식의 진실한 사랑,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 조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 국경을 넘는 인류에 대한 숭고한 사랑, 이 모든 사랑은 나름대로 탁월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없었더라면 인간 사회는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상과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은 어느 것도 우리가 돌아가야 할 완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자연세계에서도 볼 수 있는 자식을 향한 어미들의 끔찍한 사랑과 그리고 상호 의존이나 돌봄까지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본뜬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이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 창조된 모든 세계 속에서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봅니다. 인간 사회 속에서 자연의 세계 속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하심으로 한 품에 안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하늘 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그 영광이 사랑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처럼 인간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사랑을 가지고 있으나 어느 것도 원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껏 인류가 찾았다고 믿는 모든 어떠한 사랑도 참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 속에 행하신 수많은 구원과 기적의 기록들이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이 완벽하게 나타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감각으로 볼 수 있게끔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전에는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누구든지 눈을 가진 사람이면 그를 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보이시는 그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셨는지를 알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의 인격과 진리의 말씀과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성탄을 맞이하여 한편으로는 우리가 기뻐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을 짓게 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의 충만한 정점은 그리스도의 생애 중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온 몸을 우리를 위해 쓰셨으니 온 천하가 그분의 것이었고 그분이 주인이었건만 그분의 육신은 머리 둘 곳이 없었습니다. 피할 굴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온 팔레스타인을 두루 다니며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외로운 자를 위로하시고, 무지한 자를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기 위해 손과 발이 닳도록 애쓰고 수고하셨기에 삼십이 갓 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은 쉰쯤 된 사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렇게 고단한 노역의 연대기를 쓰시며 일생을 사셨다가 마지막에 당신의 사랑을 밤하늘에 불꽃처럼 찬란하게 폭발하도록 만드신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자기를 내어주어 못 박혀 죽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두 강도가 함께 못 박혔습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하나님을 욕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함께 욕하다가 마음이 변하여 그분을 믿게 되었습니다. 일평생 태어나서 한 일이라고는 사람을 죽이고 남의 재산을 빼앗은 것밖에 없는 죄인 중의 괴수였던 그 사람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자신들은 죄 때문에 당연히 죽어가면서도 온갖 악담을 하며 사람들을 욕했겠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어가지 않으시면서도 누구도 미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 받게 될 형벌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뜨거운 햇빛 아래 타는 목마름을 느끼며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온몸이 상처투성의 피범벅이 되신 상태에서도 그분의 관심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봬오며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주여! 당신의 나라에 이르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옵소서."라고 빌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으로 받아들이셔서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독감에 걸리면 증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고 온몸에 오한이 나서 춥고 떨립니다. 그리고 목이 아프기 시작하고 콧물이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바이러스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는 증상을 보면서 독감에 걸렸다고 직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과 죄는 감기와 바이러스의 관계와 같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참한 불행과 고통은 우리가 죄라는 질병에 걸렸다는 증상입니다. 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과의 불화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짐승을 잡아 죽이는 제물로는 완전히 치료할 수 없었던 죄라는 죽음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의 표현이 이 세상에는 없는 것입니다. 아들을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과 불화한 관계에서 돌이켜 그를 믿음으로 당신과 다시 화목하게 하고자 하심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될 수 있게끔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돌가슴, 철마음 경연대회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누가 누가 안 깨지나, 누가 누가 부서지지 않나, 경연대회를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난 한 주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눈물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왜 나 같은 인간을 위하여 베풀어 주시기 위해 예수 죽으셨을까?' 생각하며 그 사랑이 너무 놀라워 말없이 눈물 흘린 적이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 그 사랑을 알고 눈물을 흘리고, 기도 속에 그 사랑이 느껴져 흐느낀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경건(敬虔)인 것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사랑을 기도의 눈물로 씻어내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사람이 없기에, 찰스 스펄전은 말하기를 『마른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천국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당신의 종에게 “내가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눈물을 보여드린 적이 언제입니까? 주님이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내어 보내주시는 사랑과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 싶어 하는 자기의 반역을 대조하면서 양심의 깊은 찔림을 받으며 애통하였던 적이 언제입니까? 하나님 아니면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정도로 통렬하게 회개하고 가난한 심령이 되어 애통하는 마음으로 주를 찾은 적이 언제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 하고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착한 마음이 된 적이 언제입니까?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개척교회, 조그만 교회로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결혼도 하기 전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가난해서 주일학교에 전도사님을 고용할 수가 없었고, 무조건 목사님은 저보고 설교를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든지 그 명령을 받들든지 둘 중에 하나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기도하고 이 교회에 와서 등록을 했고, 또 무슨 그 생각에 목사님한테 한 가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제가 논산훈련소 가서 군목님이 말씀하신 그게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논산훈련소에 잠깐 있다가 눈이 나빠서 귀향을 하게 됐는데, 아주 젊은 목사님이 감동적으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설교 내용이 감동적이었던 게 아니라 한 토막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교회든지 사회에 나가서 교회를 다니게 되면 아니 혹시 군에서도 교회를 다니게 되면 숨어서 교회 다니지 말고 그 교회에 다닐 결심이 있으면 정정당당하게 목사님을 찾아가서 두 가지 말씀을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제가 이제부터 이 교회에 나오겠습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제가 비록 연약하지만 무엇이든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시켜주시면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또 생각이 나서 가서 그대로 말씀을 드렸으니 이제 말이 씨가 되어서 변명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스물다섯 살 때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설교하러 올라갔는데 내 신세가 너무 처량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도 아직 성경을 한 번 다 못 읽었는데, 그런데 설교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토요일 내내 어떤 설교집도 좀 보고 보태고 해가지고 말도 안 되는 거를 그리다시피 해서 와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설교를 하는 내가 제일 불쌍했습니다. 그다음에 불쌍한 것은 나 같은 사람 설교 듣기 위해서 아침에 모여 있는 그 60~70명 되는 어린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은혜를 받은 게 아니라 너무 나 자신이 처량하고 애들이 처량해서 설교를 하다가 울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울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하나씩 하나씩 울기 시작해서 얘네들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보셨습니다. 놀라운 어린이 부흥 강사가 태어난 것입니다.
(찬양)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사랑은 십자가뿐이라
그러고 나니까 애들이 이제는 저 집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일마다 기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눈망울 때문에 제가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언제였습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이 세상의 염려와 근심 때문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나를 위해 대신 울어주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내 마음이 큰 찔림을 받아서 함께 눈물 흘렸던 때가 언제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모두가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태어날 때는 죄인으로 태어났지만, 두 번째 성령 안에서 태어날 때는 모두 착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다시 태어날 때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오늘 여러분 중 누군가 가장 패역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여러분 마음의 저 깊은 곳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거기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사랑의 울부짖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제가 살 수 없으니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주님을 사랑하기까지는 내가 안식을 찾을 수 없나이다.' (이런) 고백이 여러분 저 깊은, 우물보다 깊은 그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은혜는 그것을 깨우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제 깨어날 때가 아닙니까? 우리가 잠자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입니까? 아닙니다. 잠자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냉담하도록 운명지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불타도록, 깨어 있도록, 깨어서 주님을 위해 살도록,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 자신을 다 바치도록, 그렇게 살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다시 살려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신 화목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때 비로소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하늘의 자원을 공급해주십니다. 이 땅에 자원도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모든 좋은 것이 오직 거룩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받음으로써 우리는 참으로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해서 외롭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한 분의 사랑은 온 인류의 사랑과 바꿀 수 없이 더 크고 위대하니 나를 사랑하는 온 인류도 하나님 품에서는 먼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가 외로운 것은, 불행한 것은, 한 분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화목제물로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곧 그가 겪으시는 아픔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이 기쁜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시고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보내시면서 여러분과 나누고자 했던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로 돌아가는 뜻깊은 성탄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