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과 사랑함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서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녹취자:신현희
육체의 게으름은 영혼의 싫증에서 옵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싫증이 육체의 게으름의 뿌리가 되는 것이죠. 그러면 그 싫증, 혹은 권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싫증이나 권태는 사실 엄밀하게 말하면 무중력상태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마음이 사랑으로 이끌리거나 혹은 미움으로 이끌리거나 할 때에 그 어느 쪽에도 이끌리지 않는 양쪽의 힘이 거의 균형을 이룬 상태가 싫증의 상태입니다. 그 이 싫증의 상태는 그러니까 사랑으로부터 멀어졌으니까 싫증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미움으로부터 멀어진 것일 경우는 그 미움이 해소되어가는 상태라고 긍정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결국은 그 원인이 아름다움이에요, 아름다움. 아름다움이 사랑의 원인이에요. 그리고 미움은 추함이 그 미움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아름다운 게 진짜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이냐 그냥 지 생각에 아름다운 거냐,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그건 상관이 없이 어쨌든 그것이 자기가 아름답다고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그것이 사랑의 원인이 되고 추하다 라고 판단하고 생각하는 그것이 추함의 원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가장 불행한 모습은 객관적으로 볼 때에 모든 판단이 추한 것을 자기만 유난히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인간은 미워해야 될 것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해야 할 것을 미워하게 되는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기독교 성화의 궁극적 목적은 이런 사랑의 논리에 입각해서 보면, 아름다운 것을 지성으로써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정확하게 판단을 하고, 그 아름다운 것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 그의 성향이 되기까지 나아가는 것이 결국은 성화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인간이 마땅히 행할 의무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되고 자산의 성향이 되어서 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저절로 나오게 되는 그걸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2년 전의 일이었는데요. 2년 정도 된 거 같습니다. 처음 메밀차 맛을 봤습니다. 메밀을 차로 타서 먹는다는 거는 난 별로 생각 안했거든요. 다른 사람은 별로라는데 저는 그 풍미가 정말 좋더라고요. 그때부터 계속 마시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황성주 박사가 인터뷰를 하는데 메밀을 적극 권장하면서 자기네 가족들은 항상 식사하고 나면 항상 메밀차를 든다고 야기를 해요. 그전까지 하루에 커피를 네 잔에서 다섯잔정도 마셨거든요. 이제는 일부러 한잔 정도 마시곤 합니다. 그러고는 커피를 안 먹게 되고 늘 메밀차를 찾게 돼요. 2년 정도 되면서부터 성향이 된 거 같아 이젠. 식사를 하면 항상 메밀차를 찾게 되고 좀 더 좋은 차가 없을까 , 티백은 정말 나빠요. 메밀차는 국산 메밀차는 못쓰고 중국제가 좋습니다. 중국젠데 왜 그러냐면 히말랴야 아래에서 메밀이 제일 잘 자란답니다. 몸이 차가운 사람들은 조금 달라요 판단이. 저는 몸이 뜨겁기 때문에 메밀을 정말 좋아합니다 이런 것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은 몸에 좋은 걸 먹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고 코를 막고 이런 거는 지속해야 얼마나 지속할 수 있겠어요? 이것이 성향이 되고 좋음이 되는 것 이게 결국은 기독교 성화의 목표고 우리의 목양의 목표에요. 이런 게 얼마나 어려운 거겠어요
한 인간이 죄 가운데 태어나서 오류와 거짓으로 가득 찬 이 표상의 세계에 살면서 그 표상의 오류를 다 걷어내고 내적인 그 이 죄와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결함들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죄 가운데 태어나고 표상으로 가득 찬 세상인데, 실제의 아름다움을 마음깊이 사랑해서, 사랑해야 하는 그것이 실제적으로도 자신에게 사랑이 되게끔 인간이 그렇게 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것이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총의 도우심이 아니면 그것은 거의 불가능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인간 불행의 원인이 되는 거죠. 그러면 싫증은 결국은 아까 말씀드렸지만 항상 그 기준점이 사랑, 사랑입니다.
(칠판에 그림 그리면서 설명) 사랑이고 미움. 미움의 원인은 추함이고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 인간의 마음이 이 사이를 오가는데 그 중립지대가 싫증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잖아요? 여기에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고 여기서 이렇게 이동했을 가능성이 있잖아요. 여기에서부터 이렇게 이동한 것은 싫증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부터 여기로 이동하면 무관심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미워하다가 그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서 미워함이 사라지고 무관심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랑하다가 다시 말하면 affection,, 반동이 정동이 있다가 거의 무정동한 상태가 되는 이게 싫증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무엇에 의해서 인간이 성도가 싫증을 느꼈다고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가장 중요한 원인은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사라졌느냐, 객관적으로 계속 있는데 자신의 마음이 주관적으로 인지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림처럼 보여주는 예를 사무엘하 6장에서 읽어드리겠습니다. 사무엘하 6장을 펴보세요. 사무엘하 6장입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의 궤를 맨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이 여호와 앞에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다윗이 그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려보다가 다윗왕이 여호와 앞에 뛰놀며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다윗과 미갈이 아주 정확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법궤가 들어올 때에 다윗은 그 여호와의 법궤 이것이 상징하고 있는 하나님의 임재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큰지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에 가슴이 뛰면서 그는 계속 정동이 일어나고 있었고, 그것이 춤을 추는데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속에 터질 듯 한 기쁨을 춤으로써 표현한 겁니다. 누가? 왕이. 왕이 그러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 다윗이 발견한 아름다움의 그 정동이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막 춤을 추는 것이죠. 그러니까 바다에 파도가 일어나게 되면 작은 파도에는 웬만한 배는 끄떡거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17미터 30미터씩 파도가 치게 되면 몇 만 톤의 배라도 가랑잎처럼 요동칩니다. 그게 바로 정동의 원리입니다. 얼마나 이 다윗의 마음속에 놀라운 정동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에 비해서 미갈은 아무런 정동 없이 법궤가 들어오면 들어오나 보다 그러고. 왕이 되어서 체통도 없이 왜 저모양일까 하면서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의 그 왕으로서 얼마나 바라는 게 많겠어요? 그런데 다윗은 한나라의 위대한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소박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평생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이 결국은 성전에 대한 사모함을 가지고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와 함께 했던 시간, 장소, 물건 모든 것이 다 소중하게 느껴지잖아요? 우리가 주님을 깊이 만나면, 그 윗 필드가 영적인 침체에 빠질 때마다 자신이 회심한 교회에 찾아가서 자기가 앉았던 의자에 키스했다는 얘기가 바로 그런 거잖아요. 내가 여기서 주님을 만나서 회심했지 하고 입을 맞추었다잖아요? 그러니까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 이것이 중요한 것이죠. 그러므로 이제 지난주 설교와 함께 엮어서 결론을 내리면 한사람이 싫증에 빠졌다라 하는 것은 그에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사라진 것을 보여준 것이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이 사리지면 그게 결국은 사랑이 식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의 정동이 식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끊임없이 가슴속에 정동이 일어났고 이러한 신앙생활이 있었기 때문에 여호와의 법궤가 다윗성에 들어올 때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뛸 듯이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왕의 체통을 잃어버린 그런 방자함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어린아이의 순수한 다윗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미갈과는 정신적 연합을 이룰 수 없는 영적인 격차가 있었던 것이에요 물론 인제 다윗이 이런 영적인 어린 미갈을 그 큰 사랑으로 품고 그를 감화시켜서 자기가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세계 속으로 데려가지 못했다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것이 바로 싫증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하나의 커다란 경고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들이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정동으로부터 반대편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싫증과 권태라는 영역을 통과하게 되는 겁니다. 한사람이 열정에 사무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열정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심령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변화되고 새로워지게 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움은 어디서 발견하게 되는가? 하나님이 아름다운 분이시긴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보여주시지 않잖아요? 우리가 눈으로 직접 태양을 쳐다볼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많은 매개체에 담아놓으셨습니다. 그래서 크고 작은 그릇에 당신의 아름다움을 담아서 그것을 전달해주시는데 그 아름다움의 엑기스가 성경입니다. 이 아름다움의 진수를 성경을 통해서 깊이 체득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데 그때에 이런 아름다움을 보기를 사모했던 시인의 마음이 시편 119편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나의 눈을 열어 주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 이게 복수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아름다움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거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많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하게 하는 겁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성경을 어느 날 읽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 주실 때 마치 이 속에 담겨진 성경 본문 속에 담겨진 아름다움은 한 번도 누군가가 캐지 못했던 아름다움인데, 오늘 내 앞에서 이 아름다움이 드러나는구나! 라는 그런 장엄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설교할 때에 그 감격을 참 많이도 누렸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900페이지 정도로 책이 나오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데 그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될 때에 싫증을 떨쳐버리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싫증이 날 수가 있어요?
애들이 그저 기쁜 일도 없고 슬픈 일도 없이 맥이 없이 심심하게 있고 엄마가 부르고 아빠가 불러도 재미가 없는데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그 뭐 인형을 사왔다든지 아니면 게임프로그램을 사왔다든지 해서 아이들에게 보여주면 아이들이 무료하고 싫증내던 태도를 버리고 갑자기 열렬해지게 되잖아요. 왜 자기가 아름다운 것이 자기 앞에 있으니까 말이죠.
결국은 인간의 영혼은 그 예전에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만나고 은혜를 받았어도 그것에 곧 익숙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그렇게 ‘회고하라, 기억하라‘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상기할 때에 예전에 베푸셨던 은총의 의미가 오늘 나의 삶과의 연관 속에서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미 발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사색하면서 재연하는 거죠.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관한 기록들이 일회용일 수 없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성경을 읽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구나 하고 정말 아름다우시구나!‘ 정말 감탄을 했는데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몇 달 지나가고 나서 시들먹해졌어요. 한편으로는 그것을 능가하는 보다 깊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증거를 발견한 것도 중요하겠지만 잊혀진 것 이 자체가 사실은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면은 그 하나님에 관한 모든 것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거거든요. 그게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그게 아니잖아요. 우리들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과거의 일인데도 예를 들자면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도 현재의 일처럼 새로워지고 그러잖아요.
(예화) 할머니 돌아가신 지가 올해로써 지금 정확하게 26년 됐습니다. 그러니까 87년도에 돌아가셨으니까 지금 26년 됐죠. 그런데도 생각이 늘 납니다. 봄이 되면 봄대로 생각이 나고, 그리고 얼마 전에는 민어매운탕을 하나 먹었는데, 심방 갔다가 민어매운탕을 먹으면서 할머니가 그렇게 민어탕을 좋아하셨어요, 조기탕, 민어탕을 좋아하셨어요. 회는 그때 모르셨고 된장하고 고춧가루 풀고 이렇게 얼큰하게 끓여서 쑥갓 넣은 민어탕을 좋아하셨어요. 한번은 월급을 타가지고 한번은 남대문 시장에서 정말 커다란 조기를 두마리 사가지고 가서 제가 끓여드린 적이 있어요. 근데 민어를 먹을 때마다 항상 할머니 생각이 나요 할머니가 민어탕을 참 좋아하셨는데.
그러니까 회고하는 일도 중요해요 새로운 걸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회고하는 일도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옛날에 들었던 설교 옛날에 나를 깨웠던 말씀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것들을 묵상할 때에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들이 되살아나고 우리의 마음의 비늘들을 벗겨내면서 다시 처음 은혜로 돌아가게 하는 이 회상이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과 같이 겸비 될 때에 그 싫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훌륭한 예증이 있어요. 사도바울도 사람인데 어찌 침체가 없었겠어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2장 같은데 보면 그런 어떤 침체의 흔적이 나타나고, 낙심한 흔적이 나타나고 고린도후서 1장에서는 명백하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항상 회고했던 것이 뭐냐면 “나는 죄인중의 괴수라. 그리스도께서도 죄인들을 위하여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이 끊임없이 사건.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의 회심사건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자신의 회심을 다시 반복해서 이야기해요. 그만큼 과거에 일어난 일이지만 끊임없이 무지한 자기를 그렇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게 하셨던 그 과거의 사건을 회상함으로써 그걸 생각하면 자기가 누구인지 생각하면 하나님 앞에 게으를 수 없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삶을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 전서 같은 사도바울의 초창기에 쓴 작품과 에베소서나 골로새서 같은 작품과 비교가 안 되죠. 깊이라고는 자체가 그런 영적인 깊은 성숙을 이루어갔던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결국은 게으르다고 하는 이야기는 열정이 없다는 건데 열정이 없다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겁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동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라져갔다는 거고 평신도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면 은혜에서 멀어졌다는 뜻입니다. 이 침체로 그러니까 이런 데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