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자의 사랑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1-36)
녹취자: 김경애
아는 바와 같이 25장은 말세에 일어날 일들인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장입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하나님 편에 서있던 선택한 자들이 받을 영광과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제일 먼저 천사와 함께 주님께서 자칭 자기를 따르노라고 했던 백성들이 많을 텐데 그때에 양과 염소를 목자가 나누는 것처럼 그렇게 참된 자녀와 거짓된 백성들을 구분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그때 주님께서 선택한 자들로서 구분된 자들에게 주님이 그들을 칭찬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해 예비 된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행위로 얻는 구원을 찬양하는 것처럼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행실을 하며 살았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릴 때에 먹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위문을 갔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 이렇게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선택한 사람들이 행한 모든 이웃을 향한 선행이 예수님 자신에게 대한 것이었음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굳이 사도 바울 이후에 전개되는 교회의 영적인 개념을 여기에 끌어오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에게 맨 처음 나타나실 때부터 당신과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 사이의 영적인 일체를 강조하셨습니다. 그것이 좁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르치지만 넓게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머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세상나라의 백성들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 속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자기와 사랑을 안 사람들이고 그 자기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선행을 한 대가로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았다가 보다는 이들이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의 성품 때문에 이웃들에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선을 행하며 이웃의 행복을 증진시키는데 자기를 희생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위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로 이들이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성품을 따라서 산 결과가 갇힌 자들을 위문하고, 병든 자들을 돌보고, 주린 자를 먹이고, 벗은 자를 입히고, 아픈 자를 돌보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모든 창조는 사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도 아직 시간과 공간속에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당신 자신 안에 있는 관념의 세계를 사랑하시고 또 창조될 인간을 당신의 단순지안에서 사랑하셨기 때문에 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지혜로써 그 사랑을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이후로 모든 창조의 역사를 보면 사랑에서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사람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어떻게 사람에 의해서 완성되는지를 보십시오.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남녀가 서로 만나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이 결실함으로써 생육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죄로 말미암아 큰 고통이 들어온 것은 사실이지만 본래는 그 속에서 새로운 탄생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식물학자들은 식물들도 수정을 하고 번식을 하면서 쾌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결국 사랑과 기쁨 속에서 모든 창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어떤 일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천재성을 보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천재성만 가지고 위대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천재성은 그들의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천재성이 입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뒤집어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천재성을 받았어도 자기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그 천재성이 입증되고 발휘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천재들의 나타남에는 ‘천재 Cluster’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천재들이 예술, 문학, 신학, 철학, 이런 데에 나타날 때에는 정규적으로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수십 년 동안 천재가 나타나지 않다가 한번 나타나면 덩어리처럼 천재들이 분출하며 쏟아져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재 Cluster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들도 보면 그러면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셨을 때에 어느 시대에만 천재들이 태어나도록 그렇게 재능을 주셨을 것이라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에게는 천재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비율로 나타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여성들이 짓밟히고 억압받던 시대에는 여성천재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과거 역사에서 여성천재는 없습니다. 1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여성천재라는 것은 희귀하게 있기는 하지만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자기 일을 사랑하면서 자기 일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사회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재성이라는 것도 결국은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사랑해도 천재성이 없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있는 사람은 그 사랑을 통해서 천재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이야기도 제가 말씀드린 이 이야기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그렇고 우리는 자기의 본성을 따라 행한 일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없어서 한 일은 아주 오래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자기가 행한 악한 일을 잊는 법이 없고 악한 사람은 자신이 행한 선을 모든 사람이 잊어버려도 자기는 영원히 기억을 합니다. 왜냐하면 본성을 따라 행한 그런 일들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가상적인 대화이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이 그렇게 칭찬하시니까 이 사람들이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했습니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오래전 일인데 전도사로 있을 때 교회에 중등부 학부모 한분이 찾아와서 저와 대화를 했습니다. 어쨌든 여러 가지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아이들을 교회가 잘 돌보지 못한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했습니다. 자기가 여태까지 성가대 7년을 하면서 한 번도 연습에 빠진 적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을 가끔 만납니다. 회심한 이래 여태까지 교회를 한 번도 빠진 적이 없다고도 합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굉장히 기이하게 들립니다. 나는 그런 기억을 한 번도 더듬어본 적이 없습니다. 내가 몇 년 동안 교회를 빠지지 않았는지 그리고 성가대 모임을 몇 년 동안 결석을 하지 않았는지 기억해본 적이 없고 일 년에 며칠 동안을 공부했고 성경을 몇 번 읽었는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제 덕이 그 사람들의 덕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어떻게 그런 것을 세고 있을 마음이 듭니까?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거의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행하면 주님께 상을 받을 것이며 이렇게 행해야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했더라면 본성을 거슬려서 그 일을 했더라면 아주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을 것입니다. 잊어버릴까봐 노트에 적어놓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냥 굶주림 사람을 만났을 때에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줌으로써 가장 행복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편하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아팠을 때에 그들을 돌봐줌으로써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지속하고 돈독하게 함으로써 가장 만족을 자기 자신이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윤리의 완성은 도덕이 아닙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당시의 바리새인과 그리고 창기와 세리와 같은 사람들을 비교하셨습니다. 실제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실 바리새인들은 회개할 죄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있어서 창기와 세리보다는 더 율법에 부합하고 온전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 누가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모든 십일조를 드리고 십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표리가 완전히 부동하고 실제로는 사기꾼이고 겉으로는 거룩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율법에 합치하게 살려고 애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보다 낫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듣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절망을 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의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보다 나을 수 있겠습니까? 그만큼도 우리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데 어떻게 그만큼 할 수 있겠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그 의가 자신이 쌓아올린 의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윤리의 완성은 도덕이 아닙니다. 이런 죄를 짓지 않고 이런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것은 범법한 사람들에게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한 법을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며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주 졸렬한 것입니다. 그러면 윤리의 완성은 도덕이 아니라면 무엇이겠습니까?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도덕 감정의 최소공약수입니다. 그리고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이 윤리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최소한에 하여야 할 혹은 하지 말아야 할 도리입니다. 그렇게 도덕을 통해 규정하는 이유는 그것을 지키지 않고는 윤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취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윤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런 죄를 짓지 않고 이런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도구가 되어서 그것이 참된 사랑으로 이르게 하는 도구가 되어서 궁극적으로 완성해야할 것은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주의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너무나 그 사랑으로 도달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범인 도덕조차도 지키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강조하면서 윤리의 궁극적인 목적인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이 도덕주의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없는 도덕주의는 이념의 머슴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실은 이 대목에 있어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의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 도덕의 기준조차도 충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역사 속에서 여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세월호 이야기를 오늘 새벽에도 이야기했습니다만 물론 우리가 ‘이것은 우리의 죄입니다.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고 회개하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너무 내면화하면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는 기도하고 눈물을 씻은 다음에는 다시 그 구조 속에서 익숙하게 살아가면서 뇌물을 받고 부정을 행하고 어떻게 하든지 싼값에 하려고 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은 밑지든 밑지지 말든 그것에는 상관없이 어떻게 하든지 싼값에 배를 타고 제주도까지 가려고하는 그런 마음을 계속 먹으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한 개선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개선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연결 고리에서 돈을 받아먹고 뇌물을 찔러주고 그렇게 하고 소비자들은 70,000원에 제주도까지 가겠다고 하고, 선사는 70,000원 가지고 안 된다고 하고, 정부는 올리지 말라고 하는 구조 속에서 말도 안 되는 악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항거하면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항거하면서 사는 이유는 그런 것들이 모두 변화되지 않고는 우리가 온전한 정의가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살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정의라는 것도 궁극적으로 보면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입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보면 사랑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온전한 사랑이면 마지막에 이루어지는 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정의 없는 사랑이나 사랑 없는 정의는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주 기개 충만한 삶이어야 합니다.
청계사 쪽으로 요새 밤마다 많이 올라가는데 비가 올 때도 있는데 마음에 드는 표어를 하나 써 붙였습니다. ‘큰 소리에도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모아서 해놓은 것 같습니다. 그중에 어떤 것은 자기들이 지어내서 한 것도 있는 것 같고 오만가지가 뒤섞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그렇게 타계적인 종교로 여겨지는 불교까지도 참다운 불심을 인간의 마음 안에 이루기 위해서는 사자와 같은 용기를 가지고 살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고, 사회의 불의에 항거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용기가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다스려져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의 선행이 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기억나지도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매일 변화된 성품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일상입니다. 변화된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일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우리들이 듣고 생각할 때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도덕의 기준도 충족을 시킬 수 없고 마치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는 것과 같은 한계를 느끼는데 하물며 그것을 뛰어넘어서 사랑을 완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늘도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부어져서 한 선한 행동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공로로 기억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치 하나님이 수동적으로 나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신 것 같은 그런 인상을 우리가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일 매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사랑하기 힘든 그 사람들의 결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오늘 이 말씀을 생각하고 ‘나는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이고 나에게는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사랑이 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의 새로운 본성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고 진리 안에서 살면 북돋워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 우리들은 우리의 명분에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모든 고민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나오는 이 가상적인 대화에서 자기의 선한 일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사는 이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좋은 것은 매일 매일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은혜를 힘입어서 우리 자신이 'Exercise' 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실천을 해서 그래서 원래 'Exercise'는 ‘엑서키투스’라는 라틴어로 군인들의 훈련을 의미합니다.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총검술을 배웁니다. 총검술대로 그렇게 찌르면 저쪽에서 즉 내가 기마자세를 하고 있으면 저쪽에서 찌르고 찌르면 내가 맞고 그러는데 누가 그렇게 규칙대로 합니까? 각본을 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기본을 계속 몸에 익히고 나면 반사적으로 그 상황이 올 때에 그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삼만 번 정도의 연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엑서키투스’를 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 그래서 선을 행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을 하고 하기 힘들 때에는 내가 이 일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힘을 주신다는 마음을 가지고 이웃에게 베풀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식 속에 꼭 배겨서 남을 이롭게 하면서 사는 것이 예수님의 황금률이 그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그렇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너는 하라 그래서 나 자신에게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은 다른 사람에게 행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황금률입니다. 뭐냐 하면 남을 사랑하는 것은 후천적이지만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본성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황금률로 삼으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늦지 않았으니까 마음 깊이 이웃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용해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서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에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다면 그러면 그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백성이라는 표를 드러내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