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Ⅱ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6년 1월 13일-18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불붙는 긍휼 가운데 들린 부르짖음 l (호 11:10上) 1997.1.13.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
2. 새같이 비둘기처럼 오라 (호 11:10下-11上) 1997.1.14.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15
3. 거짓을 버리고 마음을 정하라 (호 11:11下-12) 1997.1.15.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26
4. 헛된 것들을 버리자 (호 11:12下-12:1) 1997.1.16.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37
5. 하나님을 감동시킨 회개 (호 12:2-4) 1997.1.17. 새해말씀사경회 저녁 49
6. 벧엘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호 12:4) 1997.1.19. 주일오전 63
7. 전능하신 하나님 (호 2:4下-5) 1997.1.26. 주일오전 74
8.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의 삶 (호 12:6) 1997.2.2. 주일오전 83
1. 불붙는 긍휼 가운데 들린 부르짖음 l
“그들은 사자처럼 소리를 내시는 여호와를 따를 것이라” (호 11:10上)
지난 가을 사경회에 우리는 11장 1절부터 9절까지를 찬찬히 살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비록 그들과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저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저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처럼 식언을 하고 약속을 하고도 그것을 지키시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입으로 하신 약속과 말씀을 끝까지 지키시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타락과 완고한 고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향한 한 가지 열망을 가지고 계셨다. 그것은 바로 그들을 당신 품에서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것이었다. 그들을 치료하고 고치셔서 다시금 새롭게 당신이 그들과 맺으신 언약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이었고 불타는 마음이었습니다. 오늘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를 향해서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해 놓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어서 천국 갈 표를 얻은 것으로 만족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내셔서 이 땅에서 즉시 데려가지 아니하시고 죄가 많은 이 세상에 남겨 두셔서 이 한 세상을 살아가게 하실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백성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라는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강단에서 지루하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음성이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이 만약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이고 그리고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신 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나로 말미암아 하시고 싶으신 계획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은혜를 받았다가는 다시 타락하고 타락했다가는 자기가 괴로운 것이 싫어서 다시 은혜를 구하고 은혜를 받았다가는 다시 뒤로 물러서는 생활이 반복되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그리고 시시때때로 특별한 은혜를 주신 계획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인 회복도 없고 신앙생활의 진전도 없습니다. 되풀이되는 실패가 이런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기억해야 합니다. 나같이 쓸데없는 죄인을 무엇 하러 구원하셨을까? 하나님은 신자 한 사람을 구원하심에 있어서도 당신 나름대로의 그 소자가 아니면 이룰 수 없는 독특한 계획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집니다.
여러분들 은혜를 받아서 무엇 하시렵니까? 은혜가 왜 필요합니까?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배우고 우리의 삶으로 배워야 합니다. 삶으로부터 배우고 성경을 새롭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부터 배우고 삶 속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해 온 지난 날들을 돌아 보면서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하나님에게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린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고사리 같은 주먹을 쥐고 어찌하든지 하나님 내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이 산을 내려갈 수 없나이다. 이 집회에서 내가 떠나 갈 수가 없나이다. 하며 간절히 기도하던 때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는 뭔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목표가 있는 때입니다. 신앙적인 목표가 있는 때입니다. 내가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데 현저하게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겹겹이 난관이 에워싸고 사면에 마귀들이 에워싸서 사면을 두루 보아도 도저히 빠져 나갈 구멍도 없고 이제는 마지막에 배를 흔들면서 요나를 내놓으라고 소리쳤던 폭풍처럼 내 인생이 어느덧 풍랑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 들어서 사면을 돌아보나 도와 줄 사람도 없고 기대를 걸고 기대어 볼 만한 의지도 없을 때에 그 때에 거기로부터 어찌하든지 헤어 나오기를 원하는 삶의 분명한 목표가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고 갈망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의 인생을 이끌어 가시고자 하시는 그 목표와 방향대로 살아갈려고 애를 쓰다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갈등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계획대로 살아지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삶에 대한 가책이 있고 후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예 이것마저 없는 사람들은 죄와 함께 이리 밀리고 저리 떠밀리는 인생을 살아갈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신 이유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남에게 베푸시지 아니하시는 특별한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들에게 걸음을 가르치시고 그들이 곤고할 때는 가슴을 풀어헤쳐 젖을 물리시면서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땅에서 업어 나르시고 광야 길에서 그들을 인도하시고 자라게 하셨습니다. 다칠 때에 그들을 고치시고 치료하시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보이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뭔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택하실 때에 가지고 계셨던 계획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해서 불러 주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대답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 같은 인생을 왜 구원하셨을까? 나 같은 인생을 무엇 때문에 구원하셨을까? 구원받아도 그 신앙생활 하는 것이 마치 짐승과 같이 그렇게 토한 것으로 다시 돌아가고 먹었던 자리에 또 다시 눕고 배설했던 자리에서 뒹구는 그런 짐승과 같은 무지한 삶을 사는 나에게 진리의 말씀으로 깨닫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게 하신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왜 하나님이 이 쓸 데 없는 죄인에게 이런 은혜를 베푸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분명한 하나님의 그 구원의 이유 은혜 베푸심의 계획 그것이 무엇인지를 늘 하나님 앞에서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목사로 부름을 받았든지 전도사나 장로로 부름 받았든지. 무엇으로 부름 받았든지 하나님이 불러주신 그 부르심에 차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은혜를 베풀어 주실 때에 우리에게 거셨던 기대와 소원을 따라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본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저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때로는 책망하시고 때로는 심판하시고 때로는 그들을 나무라시고 설득하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오늘 이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번 가슴팍을 비집어서 하나님의 그 마음이 어떠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불붙는 여호와의 그 타오르는 긍휼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가슴 깊은 곳에서 불꽃처럼 훨훨 타오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어찌 아드마나 스보임 같이 소돔과 고모라성과 같이 너희를 버려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온전히 불붙듯 하며 맹렬한 진노를 발하지 아니하리니 내가 사람이 아니요 하나님임이라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불붙는 여호와의 긍휼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날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시고 다시 그들을 모으실 지를 10~11절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오늘은 10절 상반절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사자처럼 이라고 나오고 있습니다. 영화나 동물원에서 사자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람이 주는 밥을 먹고 길들여진 그런 야성을 잃어버린 사자가 아니라 동물원에서 과자나 얻어먹으면서 그렇게 노리갯감으로 변해 버린 들판을 뛰어가는 야성을 잃어버린 사자가 아니라 정말 밀림에서 광야에서, 야생의 사자는 밀림이 아닌 초원에서 살지 않나 싶습니다. 뛰어나온 사자의 울부짖음은 아마 틀림없이 야성을 잃어버린 사자의 울부짖음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예화) 새벽에 일어나서 제일 꼴불견인 소리가 뒷동산에서 들려오는 야!호!하는 소리입니다. 높이가 50m에요. -낮은 산에서와 높은 산에서의 외치는 소리의 차이의 예화
여기서 이 사자는 그야말로 광야에서 부르짖는 사자입니다. 라이언입니다. 여호와께서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실 때에 저희가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9~10절에서는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사랑은 가슴 깊이 불타는 처절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불타오르고 불타오르는 그 사랑은 이스라엘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불타는 여호와의 긍휼 눈물이 있는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끌어안으신 그 품안에서 오래간만에 하나님의 사랑의 감미로운 체취를 느끼고 그 분의 숨결을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붙는 여성스러운 긍휼 그 한 가운데 울부짖는 야성을 가진 사자의 남성적인 부르짖음이 들려 왔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불타는 긍휼가운데 들리는 이 하나님의 부르짖음을 하필이면 사자의 소리와 같이 비유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불타는 긍휼로 9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했으니까 여기에 와서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고 하실지라도 부드러운 소리로 속삭이는 새소리나 시냇물소리로 묘사를 했더라면 불타는 긍휼에 어울릴 수 있었을 텐데 성경은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무엇인가를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음성을 울부짖는 사자의 음성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불타는 긍휼, 그 불붙는 사랑 한가운데서 감미로운 숨소리가 아니라 대지를 가로지르는, 산천초목을 떨게 하는 절박한 사자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 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성경을 읽을 때는 성경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은혜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를 읽을 때까지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은혜의 샘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그 은혜의 물에 잠기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을 때 한 단락이나 한 절을 읽을 때 그 속에서 계속 뭔가를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말씀하실 하나님의 심정이 무엇인가를 느낄 수가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연속해서 설교가 계속되고 있을 때 저는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그 시리즈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심정을 여러분들이 느끼지 못한다면 여러분들은 거의 아무 것도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심정, 우리를 향해서 너희는 나를 기쁘게 하려고 부름을 받은 백성들이라 계속해서 말씀하실 때 그 내 인생을 향한 그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간절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어떤 때는 우렁찬 함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진노하시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흐느끼는 음성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요즘 여러분들이 설교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 오고 있습니까? 마음이 통하는 곳에는 음성 그 이상의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알 것입니다. 오늘 그러한 상상력을 오늘 여기에 동원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불붙는 그 어머니와 같은 간절한 여성스러운 사랑 그 불붙는 모성애를 말씀하신 다음에 여기에서 사자의 울부짖음을 사자의 포효하는 광야의 부르짖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으시는 그 그림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감미롭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어머니와 같은 뜨거운 사랑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삼켜 버리고 우리의 마음을 녹이지만은 그러나 그 사랑과 함께 그 사랑 속에는 하나님이 광야에서 울부짖는 사자의 그 울부짖음과 같은 그런 하나님 자신의 부르짖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느 순간에 은혜를 주셔서 정말 하나님이 나를 쓸모없는 인생을 하나님이 구해 주셔서 정말 예수 믿게 만드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언젠가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큰 은혜를 받게 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정말 감격합니다. 그때는 우리는 눈물도 흘리게 되고 그리고 정말 그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이제는 입이나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 속에서 나오게 됩니다.
(예화)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 형제 이야기(의안을 가진 형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그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고 우리가 그 사랑을 알기만 하면 즉시 그 사랑은 우리 속에도 불붙습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은 그렇게 감격하고 감미로운 사랑에 도취되어 있을 때 사자와 같이 울부짖는, 부르짖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 사랑 속에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반드시 메시지를 가지고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그 사랑에 도취되어서 잠시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하듯이 여러분들을 한 번 황홀하게 하려고 베풀어 주신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습니까? 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날 하나님께서 진실한 사랑으로 다가오셔서 온 천지에 나밖에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은 모두 들러리고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고 투기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렇게 나만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들이 깊이 느끼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해에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하나님의 면전 앞에서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지금 이 시간에도 거리에는 심지어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을 말해도 가슴이 녹아지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를 말해도 겁먹지 않는 사실상 심장이 돌덩어리와 같이 굳어져 버린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느껴보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의 은혜가 무엇인지 체험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 비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지난 한 해도 남다른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그릇된 길을 걸어가거나 혹은 연약하여서 하나님 앞에 바른 길을 걸어가지 못할 때에도 순간순간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감동을 받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특별히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 사랑에 녹아지게 만들어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선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싶어 한다고 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느끼게 하시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심령을 움직이시고 우리를 흔들어 놓으십니까? 무언가 그 사랑을 통해서 말씀하고 싶으신 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사람의 체험에만 관심이 있지 그 사랑을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마음을 두고 뜻을 두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랑의 불꽃이 금방 식어 버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불을 우린 일평생 가슴에 안고 살아야 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이 우리를 향한 현재적인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동받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가 언젠가 1733년에 자기가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그 경험을 기록하면서 “이후로 하나님은 내 마음을 움직이셨다. 나는 책을 읽거나 성경 읽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듣거나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 이런 낱말을 듣기만 해도 내 마음은 물같이 녹는 것 같았고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다. 그 분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나는 그 분처럼 거룩한 삶을 살고 싶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것 이외에는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었다.” 그것을 평생 간직하면서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똑같은 인간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주님의 그 놀라운 긍휼과 불붙는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체험되고 느껴질 때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고난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넘치는 시련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실 때는 마치 광야에서 부르짖는 사자의 음성과 같이 분명하고 뚜렷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귀를 기울여 보셨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꼈고 지금도 느끼고 있죠. 그 사랑을 통해서 감미로운 사랑에 취하지만 말고 그 사랑을 통해서 부르짖듯이 울부짖듯이 말씀하시는 못 들었다고 핑계 댈 수 없을 정도로 산천초목이 모두 듣고 그리고 광야에 흩어진 모든 들짐승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그 우렁찬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은 여러분들에게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불타는 하나님의 그 긍휼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우리가 받을 때 그 때는 우리를 향한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읽을 수 있어야 됩니다. 우렁차게 들려오는 그 하나님의 사자와 같이 울부짖는 소리, 그 소리가 우리를 보고 어떻게 살라고 요구하는지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의 기억과 함께 그 사랑 속에서 들려주신 울부짖음과 같은 그 크고 놀라운 부르짖음이 우리의 마음속에 단쇠로 우리의 살을 지지는 것처럼 새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 가슴에 끌어안고 그 사랑 속에 들린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이 각별한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제게도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충성된 삶을 살라고 부르짖으시기도 하셨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부르짖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세상을 사랑하는 옛 사람의 성품을 청산하도록 요구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절대적인 순종의 삶을 살라고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놀라운 추억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놀라운 사랑 속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그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 누구도 못 들었다고 핑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그 간절한 부르짖음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 어찌하든지 사랑 속에 담긴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부르짖음을 따라서 우리들이 살아야 하겠다는 결심을 우리 속에 새롭게 할 때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은혜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 사자처럼 이라는 말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함과 위엄입니다. 여러분 뭔가를 필요로 해서 누군가에게 간절히 간구, 애원하고 구하다 보면 비굴해지기 쉽습니다.
(예화) 첫 번째 간 가게를 지나치지 못하는 목사님의 간증
(예화) 무 장사한 이야기
이 사자의 울부짖음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매우 간절한 부르짖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간절한 요구 떠나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치마를 붙잡으시면서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며 가지 말라고 애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간절함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에게 간절하게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하면 보좌에서도 내려오셔서 우리를 붙잡으시는 마음으로 그렇게 간절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부르시고 간절히 애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랑 압니까?
그러니까 말입니다. 교사를 하건 목사를 하건 목양을 하면서 자존심을 세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두움 가운데로 달려가는 그 소망 없는 인생들이 “갈래면 가 봐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그 인생들을 향해 부르짖으시고 돌아오라고 외치시다가 마지막에는 쓰러질 듯 그들의 옷자락이라도 붙잡고 매달리시면서 사망의 길로 가지 말도록, 하나님을 향한 배반의 길로 가서 화를 자초하지 말도록 하나님은 애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받고 사망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입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소자 하나라도 잃어버려 지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지 못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우리를 부르시면 부르실수록 우리는 불순종의 길로 걸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오라고 부르시고 우리를 그 사랑 생각나게 하셔서 당신의 품으로 불러 모으시려고 애를 쓸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 참된 사랑을 배반하고 걸어가는 길이 어찌 그리 씩씩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간절함과 함께 위엄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자가 광야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화) 국민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새끼 새 한 마리 이야기)
사자가 만약에 광야에서 산천초목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울부짖음으로 떨고 있다고 가정하면 그 울부짖음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간절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의 음성을 사자 소리에 비유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그 불타는 사랑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의 체면을 맞지 않을 정도로 애원하듯이 우리를 부르시고 애원하듯이 우리의 가는 길을 막으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우리에게 애원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가져다 준 간절함이 하나님의 위엄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흐느끼시면서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음성이 들려 올 때에 그 하나님의 흐느낌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약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 없는 교만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약한 자처럼 흐느끼면서 여러분들의 음성을 부르시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약함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향한 불붙는 사랑이 그렇게 하도록 시킨 것입니다. 불붙는 사랑이 그렇게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너무나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시는 그 끝없는 눈물겨운 사랑을 안다는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엄위하고 두려우신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그 음성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세우고 순종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영적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경건한 영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 때문에 언제나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친밀함이 그 안에 있고 동시에 하나님의 엄위하신 그 위엄에 대한 인식이 자신 속에 두려움으로 있어서 두려움이 친밀함을 쫓아내지 않고 친밀함이 두려움을 해치지 않는 그래서 늘 가까이 계시면서도 언제나 그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하나님, 그러면서도 그 두려워 떠는 순간이 무섭거나 혹은 두렵지 않고 려워 떨면서도 그 떨림이 한없이 감격스러운 사람, 그러한 영적인 삶, 그런 삶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신앙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번에도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여러분들을 부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러분들은 많이 느끼고 체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을 향한 눈물이 사라져도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돌아오지 않고 있는 우리를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에는 언제나 눈물이 고여 있습니다. 돌아온 죄인들을 인하여 하나님은 눈물 흘리시고 집을 떠나는 탕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십니다. 아직도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면서 죄악 된 삶을 좇아 허랑방탕 하는 그 아들의 방탕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시는 일밖에 무엇을 더 하실 수 있는 일이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깨닫고 돌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실패와 좌절에 가득 찬 마음으로 배불릴 쥐엄 열매도 찾다 찾지 못하여 아버지 앞에 배척받을지도 모른다고 하는 패배감을 안고 어깨 늘어 뜨린 채 힘없이 눈물을 흘리며 걸어오고 있는 그 돌아오는 탕자의 모습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마음은 눈물에 젖습니다. 참된 신앙은 말과 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심정을 알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마음, 나처럼 소망 없고 무지와 어두움에 둘러 싸여서 내 뜻대로 행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삶 때문에 가책을 피할 수 없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는 이 완악하고 굳은 이 마음을 바라보시면서 슬퍼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는 것이 사랑입니다. 참된 효도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노후대책을 세워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 때리시고는 돌아서서 흐느껴 우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 집을 나가게 버려두시고도 돌아오기를 목 놓아 기다리시는 그 아버지 마음을 아는 것 그것이 효도일진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간절함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간절한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실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그 하나님의 간절한 사랑을 보면서 우쭐해지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안 사람은 그 속에서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위엄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감격하고 있는 것은 그 사랑이 비천한 인간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감히 얼굴 마주하고 설 수 없는 엄위로 우신 하나님 지푸라기와 같은 인생과 대화를 나눌 수도 없을 정도로 지존하신 그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을 안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겸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 않습니까? 사람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때로는 목회자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교만해져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보면 나무 같지만 나무가 아니라 나무 부스러진 톱밥 같은 것을 풀을 매겨서 프레스에다 눌러서 합판처럼 만든 것입니다. 여기에다 물을 계속 부으면 팅팅 불어서 후르르 녹아 버립니다. 무겁기는 대개 무겁습니다. 값은 반밖에 안 나가는데 무게는 배로 무거운 것입니다. 돈도 없고 날짜를 못 맞추어서 이것을 한 것입니다. 두 달을 기다려야 되는데 개척을 해야 하는데, 값으로 따지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이빨로 물면 우지직 뜯어집니다. 망치로 툭하고 치면 뻑 하고 깨집니다. 나무가 아니라 풀매긴 나무 조각, 부스러기입니다. 그런데 그 의자를 보면서 문제가 되고 지하실이라는 것이 문제가 되고 환기가 안 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지난 대청소를 하면서 의자를 뒤집었을 대 곰팡이가 파랗게 있었습니다. 이것이 언제 문제가 되느냐 하면 여기서 하나님을 못 만났을 때입니다. 그땐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사람들이 가난한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이유가 이것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모두 제 마음 같은 줄 알았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그러면서 등록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척교회라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언젠가는 교회를 또 지어야 되는 것도 문제가 되고 일꾼이 없으니까 나를 뭘 시켜 먹을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문제가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 다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왔든지, 끌려서 왔든지, 협박을 받아서 왔든지, 납치가 되어서 왔든지 여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9만 원짜리 의자, 지하실 교회 그런 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 변화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나의 모든 잘못을 깨닫게 되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새로운 영적인 삶으로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단순히 값으로 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나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추억과 이곳에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살던 추억이 깃들어져 있는 곳입니다. 남대문에 가보면 찌개를 해서 돈을 엄청나게 번 집이 있습니다. 6.25나고 바로 생겼습니다. 유명한 잡탕집 입니다. 그 집이 생기고 나서 남대문 골목전체가 그 찌개 집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집이 돈 많이 벌었다는 것을 다 아는데 지금 들어가 보면 20년전 에 제가 직장 다니며 먹던 그 환경 그대로 입니다. 누렇고 때 묻은 합판, 삐그럭 거리며 올라가는 2층 그리고 싸구려 비닐장판 때가 새까맣게 있는 소반, 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 “아니 돈 많이 벌어서 저 빌딩도 샀다면서 왜 이렇게 지저분합니까?” 하는 말이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니까 사람들이 올 때마다 그 추억을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바꾸고 나면 장사가 더 잘 되어 대규모가 될 것 같지만 이렇게 소규모로 늦게 오면 자리가 없어 구석에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20년 전에도 그랬고 25년 전에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젊은이가 중년이 되어서 중년이 노년이 되어서 여기를 찾아오면서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에 애정을 갖고 사람들이 더 많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일리가 있는 얘기다 그랬습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여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많이 가진 사람은 (언젠가는 우리는 이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그 사람이 왠지 여기가 자꾸 뒤돌아보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서 의도하던 곳인데 여기서 변화를 받아 신학을 하기로 했지, 여기서 내가 오늘날 얘기 아빠 될 사람을 만났지 그리고 결혼을 하기로 했지 그리고 전도 다니다가 배고파서 저기 빵집에서 만두를 먹기도 했지 하며 추억이 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은혜가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매일 물 나오던 기억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힘들게 물 푸던 기억밖에는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인은 그러한 초라한 집을 하나님의 궁정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크고 위대한 것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였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교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고 섬기다 보니까 나를 여기에서 섬기게 해 주신 하나님이 더 귀하게 느껴지게 되고 하나님을 더 귀하게 느껴져 사랑하니까 교회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될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흘러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교회에서 죽는 것입니다. 목회자의 품에 안겨서 축도를 받으면서 관속에 들어가고 모든 성도들이 눈시울을 붉히면서 다시 만날 날을 그리워하며 손수건을 흔드는 가운데 흙에 묻혀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먼저 올라가면서 나 먼저 올라가서 미안하다 하며 인사하고 올라가서 기다리는 것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남은 사람들이 그 사람 만나기 위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만나 열린교회 동창회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인생을 살면서 특별한 일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까? 예수만을 사랑하는 인생은 박꽃과 같은 것입니다. 화려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화려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그를 볼 때 불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불꽃처럼 살아야 됩니다. 그 사랑은 불꽃 말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아이들 결혼을 시키고 거기서 죽어서 임종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죽는 것입니다. 무슨 특별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특별한 것입니다. 그렇게 별 것 아닌 것 같은 인생을 사는 일에 충실할 때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어두운 세상을 불꽃과 같이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사모하여 쇠약했다”아니 사모해서 힘을 얻은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였더니 힘이 없어지고 쇠약해 졌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남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수반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즐거움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고통입니다. 눈물의 씨앗이라고 누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선지자들이 왜 남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할 때 그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피끓는 애통함으로 탄식했고 괴로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루살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예루살렘이 짓밟히거나 말거나 오늘 나는 무엇을 먹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장에 보면 나옵니다. 예레미야 시대 때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관심거리는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내일은 무엇을 마실까? 모래는 무엇을 입을까? 그것이 근심이었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예루살렘을 지나는 너희들이여 어찌하여 너희들에게는 내 마음에 임한 것과 같은 근심이 없느냐”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근심도 없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오히려 강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박력 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려 깊게 사는 것입니다. 박력 있게 산다고 말하지 않고 확신 있게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면서 사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고민합니다. “아! 내가 그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나님과 관계없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런 고민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심지어는 그런 말을 합니다. 어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을 했는데 남자가 왠지 여자가 싫어지고 미워져서 안 만나고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여자가 울고불고 매달려서 하는 말이 “내 어디가 보기 싫어서 나를 피하고 미워하느냐? 내 코가 높다라면 칼로 깎고, 입이 덜 찢어 졌다면 칼로 더 찢을 각오라도 되어 있으니까 나를 사랑해 달라고...”
여러분! 그게 말이 됩니까? 문제는 마음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여자처럼 사모하게 되면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해 보지 않은 사람은 불안이 뭔지 모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불안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쇠약해집니다. 쉽게 말을 해서 이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상사병이 걸린 것입니다. 존 오엔 이라는 영국의 목사의 설교 집을 읽으면서 저는 감탄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갈망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이 간절해지고 다른데 관심이 없어지고 하나님만 찾기 위하여 내 마음이 절박해지고 내 마음이 아파 오는데 그분은 더 뛰어 넘어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될 때 그는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그리움이 생깁니다. 그 그리움은 안타까움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완전히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너무 목말라한 나머지, 그래서 그것이 과장이 아닌가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을 보니까 다 나와 “내가 주님을 찾기 위해서 심령이 냉갈이와 같이 되었삽나이다.”, “내가 부엉새와 같이 슬프게 우나이다.”, “ 내 육체가 쇠잔하였나이다.” “ 내 육체는 쇠잔하나 나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다.”, “내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나이다.”, “내 피골이 상접하였사오니”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 때문에 더욱이 쇠약함이 바로 그런 쇠약함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쇠약함이 아니라 긍정적인 쇠약함입니다.
저는 신학교 1학년 들어갔을 때 젊은 교수 한 분이 오셔서 히브리어를 가르쳐 주면서 자기가 신문에서 읽었는데 너무 은혜를 받았다고 우리한데 들여 줬습니다. 저는 그것을 들은 지가 벌써 15년 이상이 되었는데도 아직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전주에 가면 전주 예수 병원이 있답니다. 어느 멀쩡한 남자가 상담을 했답니다. 용건은 그 사랑이 예수병원에 신문을 들고 찾아왔는데 그 신문에 “눈을 삽니다”라고 광고가 났답니다. 이 사람은 눈을 팔러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돈 50만원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멀쩡한 사람의 눈을 파내야 하는데 무조건 돈 줄 테니 눈을 내어놓으라고 칼을 댈 수 없지 않았겠습니까? 의사가 그 사람의 사연을 듣고 울다가 원장한데 말을 해서 원장은 모든 직원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했는데 목회자가 없는 조그마한 교회 집사인데(교인 10명 정도) 어쩔 수 없이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마음의 고통은 자기 집은 스레드로 지은 집인데 하나님의 집은 종이로 붙여서 만든 집이라는 것입니다. 건축헌금을 내놓을려고 하니 돈은 없고 보조를 얻을 때도 없어서 자기가 일을 안 나가고 벽돌을 찍기 시작, 자기 손으로 건물을 짓고 스레드를 얻으려고 했는데 그날 몇 년 만에 큰 폭풍이 쳐서 그 동안 지은 건물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50만원이 필요한데 신문을 보니까 “눈을 삽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마다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그때부터 “집사람의 마음을 놓여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며, 부인의 허락을 받아 신문을 들고 병원에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 병원 전체에 부흥이 일어났답니다. 전 직원이 모아 놓고 간증을 시켰습니다. 거기서 나온 돈이 50만원이 넘게 나왔다고 합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하는 자는 죽으리라” 지금 누가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바보 같아지는 것입니다. 왜? 모든 인생의 꿈과 소망과 기대와 인생의 삶의 목표와 Vision이 하나님의 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바르게 되고 바르게 되지 못하는 것, 부흥되고 부흥되지 못하는 것이 이 사람에게 있어서 기쁨이 되고 슬픔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순풍에 돛단배와 같이 은혜롭게 성도들을 새롭게 살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변화를 받고 은혜가 충만할 때 그때는 그것 때문에 즐거운 것입니다. 모든 불행과 고통도 넉넉히 이기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시험에 들고 고통스러울 때는 그것을 부여안고 쇠약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모하기 때문에 쇠약해진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본문의 말을 가장 확실히 알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향해서 이 고라의 자손은 사랑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은 쇠약함과 아픔과 고통을 동반한 쇠약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함이라, 신약이든지 구약이든지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을 향한 관계와 사랑은 동일한 원리와 같습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고 춥고 배고프고 얘기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마음에 눌린 고통이 있으니 이것은 모든 교회를 향한 염려입니다. 그곳에서 자기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고 성도들을 세워 준 그 교회가 올바르게 되고 있는가를 깊이깊이 교회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바울 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한번 만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하늘이 갈라지는 것을 보고 거룩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만났다 할지라도 그가 끊임없는 목회 현장 속에서 양떼들을 사랑하고 눈물로 교회를 개척하고 그리고 텐트를 끌고 다니면서 그것을 기워서 동행들의 먹고사는 것을 공급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웠기 때문에 바울 서신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서신은 철저하게 교회라는 상황에서 쓰인 글입니다. 학자의 논문이 아닙니다. 목회자가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서신을 잘 이해 하려고는 바울과 같은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려야지 만 읽히는 것입니다. 교회 속에서 목회적이고 목양적이고 교회 속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성 등을 가지고 고민하고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고자하는 같은 갈망에 동참할 때 그 서신이 열리는 것입니다.
시편은 어떻게 열립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씨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속에서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그 속에서 슬픔과 아픔을 같이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려야지 만 성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보따리 싸 들고 다니면서 공부해야지 만 열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마치 지식을 계속 축적하면 내가 남보다 성경을 잘 볼 것이라 생각하면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바로 이 시인이 오늘 이렇게 사모하여 쇠약할 정도로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한 것입니다. 아마 1절에서 말한 “만군의 여호와의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않습니까?” 이 고백은 사랑한다는 말을 너무 남발하는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사랑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릅니다. 사람들이 봄날에 가끔 아름다운 동산에 돌라가서 “아! 산천이 참 아름답구나!” 속에서 그런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 지 않습니까?”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찾고 쇠약할 정도로 약해져 가는 그럴 정도로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함,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를 가지면서 살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좀 더 깊이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그렇게 많은 세월들을 교회와 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제일 애매모호한 사람들일 전도사입니다. 왜냐하면 전도사 직분을 맡고 있을 때에는 성도들 보다 더 열심히 뛰어 다닙니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일수도 있겠지만 사랑하지 않아도 교회에서 사례를 받고 봉사하는 한 그럴 수밖에 없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설교자인데 여러분처럼 11시 5분에 나오면 되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누구를 여기에다 세워 놓아도 그 사람은 결코 지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개척 예배들 하는 날 오후에 자다가 10분 늦게 나온 것 아십니까? 참 영원히 기억에 남을 사건입니다. 문제는 교회에 다닐 때 성도들에게 열심을 내라던 사람이 교회를 그만 두니까 주일도 간신히 지킨다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겠지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가장 잘 만날 수 잇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면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칼빈이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은 교회를 사랑해야지 만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할 자격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참 하나님의 자녀라면 교회를 어머니와 같이 사랑하고 그 품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시인이 쇠약할 정도로 궁정을 사모했던 것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모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는 문제 있을 것이 없습니다. 마귀의 최대의 방해공작은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는 이유들을 교회 속에서 끊임없이 발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하나님의 교회보다도 상한 심령이 잘 치료받는 곳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제는 그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니까 사랑하지 못하도록 교회 속에서 끊임없이 상처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목표는 그 교회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려고 아예 생각도 안하고 요금이나 내고 와서 예배 한 번씩 드리고 가는 사람은 교회로부터 상처받은 적이 없습니다. 왜! 받을 시간이 없습니까? 와서 축도도 끝나기 전에 가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상처받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목회자에게 상처가 가장 많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했던 종들에게 상처가 가장 많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상처를 계속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들고 그래서 전심으로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제 말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궁금하면 시험해 보십시오. 주위에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 얘기를 털어놓고 해 보십시오. 교회 속에서 한없는 은혜를 박은 사람은 소수이고 그 은혜를 간직하면서 오늘 그 교회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것이 한없는 즐거움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들이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최고의 도전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 이렇게 영혼이 변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해서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만들고 여호와의 초라한 집을 여호와의 궁정이라 부르며 육신이 영혼이 쇠약해질 정도로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만들어 내는 것이 교회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러므로 교회가 부흥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갔다면 그는 결코 떠돌아다니며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심령이 곤고할 때 부흥회 한번 참석할 수 있고, 기도원 한번 올라갈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떠돌아다니며 신앙생활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쏟아 놓지 않고는 가슴에 불을 품은 것과 같이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쏟아 놓고 싶고 섬기고 싶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살고 싶은 소망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사람들 가운데 싹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성경의 마지막으로 2절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생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이 사람은 부르짖었던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교회 생활하는 사람은 늘 부르짖어도 관념의 하나님이나 죽어 잇는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어떻게 오늘 이 시편에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 내 마음에 불을 지르셨나이까?” 불타오르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의 성소를 향한 그 뜨거운 사랑이 내 마음속에 불 타올라서 그 불이 나의 육신을 삼키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오늘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오늘 시인이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계신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지금은 살아서 관념 속에서 생각 속에서 교리 속에서 묶여 있거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 살아서 내가 간구할 때 내 기도를 들으시고 살아 계신 능력을 가지고 나를 위해 살아 계신 하나님처럼 역사 하시고 그 생명을 가지고 나를 위해 역사 하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내 기도에 인격적으로 능력으로 역사 하시고 나의 간구하는 바를 하나님의 권능으로 살 수 있고 내 앞에 요단강이 갈라지게 하시고 내 앞에 홍해가 갈라지게 하시고 그리고 내 마른땅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시는 능력을 가지시고 지금도 살아 역사 하시는 그 하나님을 생생하게 느끼며 지금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십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께 간구 할 때 내 앞에서 기적을 창출하시고 메마른 땅을 지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시고 굶주리며 광야 길을 헤맬 때 하늘을 여시고 만나를 내리시는 이렇게 행동하시고 역사 하시는 하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뜨겁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생명적인 관계를 붙들었고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생활이 신앙의 유익을 휘한 정도라고 생각하면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것은 생명입니다. 아무리 후진 교회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그 교회와 함께 하시면 그 교회는 결코 작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여러분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내 마음과 육체가 함께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되 생존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관념속의 하나님 살아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교리 속의 하나님, 그리고 묶여 버린 하나님,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오히려 기도했다는 사실 때문에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서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여러분의 마음이 멀어지기 전에 먼저 여러분의 몸이 교회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이악하십시오. 교회에 나오기 힘들어지고 예배 참석하기 어려워지거든 내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교회 속에서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슬픔과 모든 괴로움들을 이 교회 속에서 용해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볼 때 교회 안에 모든 지체들이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음식 한 그릇씩을 먹고 가기 위해서 줄서기 위해서 식당에 모인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내가 생명과 바꿀 수 없는 그 이유 때문에 여기 나와 있듯이 모든 사람은 다 같은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들이 다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지체를 우습게 여기고 소홀하게 여기고 그리고 그들을 홀리게 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 그리고 자신 이 삼자의 관계가 원리적으로 바르게 붙들려 있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서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저는 내수동 교회에서 영결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몇 번 보았는데 앞으로 우리 교회도 그렇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강대상에 올라 가셔서 “오늘 우리를 위해서 김 아무개 장로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우리 영결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이 장로님이 오늘 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장로님은 교회가 세워지기 전 30여 년 전 이곳에 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셨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시고는 찬송가 400장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 이 찬송가는 고인이 평소에 즐겨 부르던 찬송가였습니다.” 목사님이 교인들이 무슨 찬송을 좋아하는지 외우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더욱 눈물을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장로님의 육성을 듣겠습니다.” 그리고는 기도 녹음해 놓은 것을 틀어 주는 것입니다. 개척 교회 때 교회를 지으니까 물이 얼까봐(잠그면 얼고 틀면 콸콸 나오고) 집에도 못 가고 앉아서 그 물을 안 얼게 하려고 밤새 지킨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긴 얘기를... 그리고는 마쳤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고 열심히 교회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지 않으면 여러분 마지막은 어디서 영결 예배를 드립니까? 영안실에서 친척들 모여 가지고 옆에서 투전판 벌여 가면서 영결예배는 무슨 영결예배입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전심으로 사랑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들면서 살았던 그 예배는 모든 성도들에게 그 양반은 죽어서 가면서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떠납니다. 교회에서 그렇게 경건하고 하나님을 훌륭하게 섬겼던 사람들일 죽어서 갈 떼는 모든 성도들에게 심령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저렇게 살다가 죽어야 되겠다는 결심이 생깁니다. 반면에 어떤 집에서는 “막판에 저렇게 죽을 수도 있구나! 이 집에 십자가 휘장이 걸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주님 앞에 갈 때 그래서 마지막에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만 하나님을 위해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죽어서 장례식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죽음을 보면서 언제든지 교회의 위기가 있을 때마다 그렇게 기도와 헌신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던 모습으로 후세들이 그리워하는 영적인 아버지, 어머니로서 하나님의 교회에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회를 좀 다녀야 될 것이 아닙니까? 6개월에 한 번씩 등록카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교회를 옮긴다면 무엇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마지막에는 성도들에게 참 하나님을 섬기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면서 가는 것입니다. 빨리 가고 늦게 가고 차이는 있지만 먼저 간 사람이 터 잡아 놓고 상 차려 놓고 동참할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도의 마지막입니다. 또 무엇을 기대합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회장을 했던 사장을 했던 국회의원을 했던 다 소용이 없습니다. 어느 교회를 섬기다 왔느냐?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며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하나님과 교회의 관계가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올라가서도 그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거기에 올라가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소망도 이루어지고 믿음도 성취가 됩니다. 그러나 그치지 않는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이 옅은 믿음이 아옵나니 주님이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습니까? 몸과 마음과 뜻을 모아 섬겼던 열린 교회를 내려다보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성도의 마지막입니다. 그때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고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마음껏 펼치며 살기 위해서 주신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2. 새같이 비둘기처럼 오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내시면 자손들이 서쪽에서부터 떨며 오되 그들은 애굽에서부터 새 같이, 앗수르에서부터 비둘기 같이 떨며 오리니”(호 11:10下-11上)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긍휼 가운데서도 무엇인가 분명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시고 싶으셨던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불타는 긍휼 가운데서도 백성들을 향해서 말씀을 발하시고, 그것은 그들에게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간절하면서도 엄위로 우신 음성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뒤따라 살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해주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0절 하반 절부터 11절까지는 뜻이 쉽게 이해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떨며 온다’는 이야기가 두 번이나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자처럼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백성들의 반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1절까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이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엄 있게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애굽과 앗수르의 이야기를 하면서 그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0절 하반 절부터 11절 상반 절까지가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불붙는 긍휼 가운데서 부르짖으시는 하나님의 위엄 있는 부르짖음에 합당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며, 그것이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엄위로우시게 감화시키시는 하나님, 이것이 바로 떨며 나온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이고, 두 번째는 애굽과 앗수르로 부터 그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흩어진 자들을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사람들이 그 말씀에 대해서 떨며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 그 긍휼 속에서 눈물 섞인 하나님의 애원하는 경고를 받고 그 불타는 긍휼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깨닫게 되었을 때, 그들은 곧바로 그 불붙는 긍휼 가운데서 들려오는 거의 부르짖음에 가까운 하나님의 함성을 듣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짖으시는 그 음성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들릴 때 그들의 마음속에는 커다란 감화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감화시키시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감화시키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셔서 그들을 어떻게 감동시키셔서 그들로 하여금 이전에 하나님을 떠나있을 때는 도저히 선택할 수 없는 신앙적인 삶을 선택하게 만들고 이전에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몰랐을 때는 제멋대로 제 중심대로 살아가던 어리석은 인생을 돌이켜서,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하면 그 앞에서 복종하고 부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감화입니다. 신앙의 시작도 감화와 함께 시작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믿을 수 없었던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어느 순간 내마음속에 감동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이 하나님 앞에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그 감동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 감동을 받아서, 이제는 우리의 인생 속에서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우리들이 분명히 알고 믿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완전한 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저는 워낙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대면하거나 상담을 할 때 먼저 꼭 묻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시지 않습니까??” 자존심 상하는 질문입니다. 이어서는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도 믿습니까?” 다 믿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알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감화로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물어야합니다. “여러분은 감동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의해서 감동 받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은혜에 대해서 여러분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이 떨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모든 사람들을 감동시키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릇된 길로 걸어간다고 할지라도 어느 한 순간에 깊은 감화를 받으면 우리가 그렇게 누구에게도 인정하기 싫었던 우리 자신의 굽어진 과거와 죄 가운데 살아왔던 자신의 그 더럽고 때 묻은 모습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위로와 긍휼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감화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사라질 때 우리는 마른 뼈와 같은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말씀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긍휼을 알고 그 긍휼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부르짖는 음성을 깨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동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의 무가치한 인생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불타는 듯한 넘치는 긍휼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감동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속에서 지엄하게 들려오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사자와 같이 부르짖는 메시지를 접한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감동과 감화를 받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화) 처음 은혜 받은 사람들이 그 감동 때문에 여러모로 유별난 삶을 사는 것을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이 그들을 미성숙한 듯 바라보는 것이 교회 안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것이다.
그러면서 마치 감동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렇게 끈끈한 신앙적인 습관에 이끌려서 교회 생활하는 것이 성숙하고 달관한 신앙의 표징인 것처럼 그렇게 거만을 떠는 사람들은 화있을진저 입니다.
저는 언제나 사도바울을 보면서 그런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 제가 나이가 많아서 백발이 하얗게 쌓여도 언제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감동 있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바울에게서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저는 디모데전서 1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하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는 장면이 거기 나옵니다. 그때는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말년이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30여년의 성상을 오로지 복음 하나만을 위해서, 구령 하나만을 위해서, 예수님 한 분만을 위해서 살았고, 그가 도달했던 복음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 교리의 기초를 놓기에 충분할 정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래로 그 사람처럼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해박하고 무한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상에는 태어난 적도 없고 앞으로도 태어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런 그 사람이 그 검던 머리카락도 희어지고 윤기 흐르던 얼굴에 깊은 주름의 골이 패이고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말년이 되었는데도, 어린아이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흐느끼면서 자기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동이 있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감화가 있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영적인 감각 속에서 감화가 가슴속에 역사 하는 것,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감동을 참 잘 받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주면 눈물도 쏟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지고 나면 사람들이 점점 둔해지게 됩니다.
(예화) 중학교 시절에 유치원도 다니기 전인 아이를 품에 안고 옛날얘기를 해주었더니 눈물을 펑펑 흘렸다는 이야기
육체적인 나이도 먹으면 먹을수록 감동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가끔 아주 뛰어난 작가 같은 사람들은 나이가 칠십 팔십이 먹었는데도 어린아이와 같이 쉽게 흔들리는 가슴의 감동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글을 쓰면 그렇게 오랜 세월 세파에 찌들려 살았는데도 정말 신선한 샘물을 마시는 것 같은 감동이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세계에서도 아주 비슷하게 통합니다. 부흥회를 하던 뭘 하든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없이 찬송하며 기뻐하고 기도하면서 말할 수 없이 마음이 녹아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는 사람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이 정상입니까? 이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우리의 신앙생활입니까? 말할 필요도 없이 신앙생활을 오래해서 깊어졌기 때문에 감동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악하고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무디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디어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 면역이 되고 하나님 앞에 돌이키는 삶의 결단과 신앙의 결단에 있어서 면역이 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화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당시로서 서른셋의 나이면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이미 청년과 장년기를 지나서 어쩌면 노년의 나이로 접어드는 것으로 계산 되어야 하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때도 예수님께서는 마음속에 그렇게 쉽게 감동 받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셨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시면서 민망해 하시며 그분의 마음에 고이던 눈물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감동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아가시던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불붙는 긍휼을 보여주시고 그 긍휼을 한 몸에 받아서 진멸되지 않고 오늘 살아있으면서도,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에 의해서 감동 받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아니하고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이 시대는 분명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운 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놀라운 긍휼과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셨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긍휼과 긍휼 속에서 들려오는 부르짖음을 받으면서 그 메시지 앞에서 언제나 감동 받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마음을 이렇게 움직일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이 구절을 그 시대를 향한 예언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종말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감화를 받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종말론적인 귀환을 예고하는 것이라고 풀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시키셔서 완악한 불신앙을 회개하고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인데 이것이 마지막 때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성경에서 여러 차례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과 그 긍휼을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서 감동 받게 하시는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 은혜가 메마른 때라고 하지만 그러나 저는 말씀을 전하러 방방곡곡에 다니면서 어디든지 진리의 말씀이 외쳐지는 그곳에는 정말 타는 것같은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과 긍휼을 알고 싶어 하는 영혼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언제나 확인합니다. 다수는 냉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굶주릴 듯 허기진 사람들이 지금 어디에든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아무리 패역한 사람들이 모이고 진리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할지라도 참된 복음의 진리가 선포되고 그 진리의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과 그 사랑을 받은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삶의 초청을 깨닫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있습니다. 어떤 때는 힘들게 멀리까지 갔는데 도대체 설교를 하면서도 나를 왜 불렀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이지도 않고 모여서는 왜 나왔는지, 민방위 교육받는 사람처럼 고개를 외로 꼬고 오뉴월 양지 볕에 병든 병아리처럼 고개를 축 늘어뜨린 사람들을 보면서 외치고 싶습니다. “당신들 나를 왜 불렀습니까?” 그런데 여러 번 집회를 하면서 깨닫게 된 진리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나를 보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자와 같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끝날 날만 기다리는 것처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가운데서도 진리의 복음이 외쳐지고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파악하는 사람들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게슴츠레 앉아있을 때에 그런 사람들은 한쪽 구석에서 흐느끼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고 싶어 합니다. 한 사람이라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자신을 향해서 온 우주라도 주실 것처럼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만 있다면 그런 정도의 수고야 아무 것도 아니니 않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돌아올 것을 예언하시면서, 또한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동 받는 삶으로 돌아올 것을 안타깝게 부르짖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한다는, 그 사랑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삶의 초청에 감동을 받지 못할 정도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져 있다면, 우리는 말씀의 깊은 쟁기를 대고 우리의 심령을 갈아엎어서 우리의 묵은땅과 같은 심령들이 뒤집혀서 옥토와 같은 땅으로 바꿔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감동을 받을 줄 모르는 그 삶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위한 인생을 살겠으며, 어떻게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이 교회에 세우신 거룩한 열정과 그리고 복음의 전파를 향한 불붙는 사랑을 잃어버린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굳어져서 감동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감동시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그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찮게 여기며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 그 감동을 따라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신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곳에서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시는 가장 크고 놀라운 기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언젠가 어느 집회에서 설교를 끝내고 내려오는데 “목사님 제 인생의 최대의 약점은 체험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아픈 것도 낫는다는데 저는 아파본적도 없기 때문에 기도해본적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타락했다가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용서해주셔서 다시 신앙을 회복시키셨다는데 저는 별로 잃어버려본 적도 없기 때문에 회복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네 정말 사랑합니다.” “최대의 기적이 당신의 심령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최대의 기적이 무엇인지 압니까?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감동시키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한 사람 하나님을 향해 얼음장같이 식어지고 돌덩이와 같이 굳어졌던 그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감동시키시고 그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며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던 지체 한사람이 은혜를 받고 감화를 받고 하나님 앞에 놀라운 감동을 회복하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하나님을 찬송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불타는 긍휼을 전하려고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전하면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증거 할 수 있는 최대의 증거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이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이스라엘아 너희는 내게로 귀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이것을 전하려고 살아가는 우리들이기 때문에 일평생 사는 동안에 언제나 이런 감동을 하나님 앞에서 유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서 흐르는 그 눈물이 여러분들이 백발이 되고 얼굴에 골 깊은 주름이 패어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 하기를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가슴속에 벅차오르던 이 놀라운 감격이 마지막 인생을 작별하고 이 세상에서 눈감는 그날까지도
(찬양)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런 감동이 여러분들 속에 계속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을 감동시키는 능력 뿐 아니라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하는데서 나타날 것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해석상 문제가 되는 것이 “애굽으로부터 새같이 앗수르로부터 비둘기 같이 돌아온다”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는 벌써 나왔습니다. 이때는 이미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유다와 이스라엘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진 그 시대의 일이니까 애굽으로부터 도망 나온다는 이야기는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또 이미 옛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하면서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것을 회고하면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시제가 안 맞습니다. 미래에 하나님께서 그 불붙는 긍휼과 긍휼 속에서 부르짖는 사자와 같은 그 부르짖음으로서 능력을 보여주셔서 그 능력으로 너희를 애굽에서 부터 돌아오게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은 이미 다 떠나왔고 애굽하고는 상관없는 삶이 되었는데 애굽으로 부터 돌아온다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 보면 서편으로부터 돌아온다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바다로부터 돌아오게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해석을 한 것입니다. 바다 건너편 지중해 건너편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이 서쪽이니까 그 서쪽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이 곧 바다 건너로부터 돌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먼 섬과 그리고 많은 나라로부터 백성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곧 세계의 각 곳으로 부터 사람들을 돌아오게 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신 예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것이 애굽인데 이 애굽을 어떻게 봐야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애굽으로 붙잡혀 가서 다시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나올 것이라는 말씀이 아니라, 이 애굽은 상징적인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하면 즉시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일본’하면 즉시 생각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36년 동안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지배를 받았다는 생각이 36년이 더 흘러가도 잊혀 지지 않고 남아있는 겁니다. ‘일본’하면 떠오르는 것이 언젠가 우리가 그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애굽’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첫 번째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그 사람들의 종이었다’입니다. 그러니까 애굽을 잊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 애굽에서 먹던 고깃국을 잊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애굽에서 너희의 신분이 단지 그 땅을 기업으로 누리지도 못한 채 그들의 소유물이 되어 살아가던 포로와 노예의 상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애굽으로부터 새처럼 돌아오게 한다’라고 하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서 포로된 것과 같이 그렇게 영적으로 고통받고 짓밟히는 삶을 살던 그곳에서 긍휼 가운데 부르짖는 그 하나님의 부르짖음이 그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으로 갈 수 있게 되기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입어서 ‘아 그렇다 우리가 여기 있어서는 안 되겠다 우리가 속히 여기를 도망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땅으로 가야겠다’ 이 결심 하나만을 가지고 애굽에서 떠날 수 있었습니까?
뭐가 있어야 했습니까? 실제로 그들을 우겨 싸고 있고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세력들을 격파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그들을 돌아오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길을 알지 못하지 않습니까? 죄에 사로잡혀서 살아가던 그 불행했던 나날들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좋아서만 그 죄 속에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좋아서 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때는 좋아서 산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살았습니다. 내 힘으로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가슴속에 하나님 앞에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면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던 옛 추억들이 떠오를 때면 진저리치듯이 괴로워합니다. ‘아 내가 있을 자리가 여기가 아닌데’ 하나님 앞에 깊이 가슴 아파 합니다. 그런데 돌아가야겠다고 하는 것이 ‘돌아갔으면...’하다가 ‘역시’하고 끝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죄 가운데 빠져서 하나님을 떠날 때는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속히 하나님을 떠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은 그렇게 쉽고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이미 오래 전에 호세아 6장을 장시간 설교하면서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가는 길은 기름에 빠지는 것과 같고 미끄러지는 것같이 속히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벗어나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앙의 세계가 아직 무엇인지 정신 차리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것들을 하찮게 생각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내가 언제든지 돌아갈 것이다’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바르게 지키지 못하고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을 거역하고 그 긍휼 속에서 불타는 음성으로 들려오는 은혜 받은 자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절하고 불순종의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불순종으로 인해서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긴 세월을 고통의 터널에서 괴로워하며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비참하고 우리의 마음속에서 감동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참된 순결을 잃어버리면 우리에게 그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깊이 깨닫도록 만들어주어서, 방종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삶을 바꾸어서 하나님 앞에 신중하고 심각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듬으시고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래 하나님 앞에 감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받는 영혼의 메마름이 가져다주는 고통은,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은혜의 맛을 보고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에 한 때 감동을 받았으면서도 지금은 그 감동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영혼의 황폐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사랑의 줄에 더 묶여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입고 그 하나님의 감동과 감화를 더 풍성하게 받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도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이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나면 우리는 단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과 친구가 됩니다. 하나님을 떠날 때는 감미로운 목소리로 우리를 부르는 친구와 같았으나,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는 엄청난 대적의 세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예화) 고등학교 다닐 때 동네 친구의 고백-폭력배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조직에서 나올 때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는 이야기
이것이 죄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버지로부터 가정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죄악의 세계에 들어갈 때는 미끄러지듯이 쉽게 들어갔지만 거기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은 가히 생명을 건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 어떻게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뜻을 세우지만 그러나 우리가 뜻을 세울 때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적의 세력들과 악한 세력들과 악마의 세력들을 격파하시는 진리의 놀라운 능력이 없이는 우리가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너희를 하나님이 돌아보셨고 이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는 그 땅을 주시기로 하셨다’는 사실을 고했을 때 그 말에 감동을 받는 상당수의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애굽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완악한 다수의 백성들과는 달리 감동을 받았고 하나님이 그들을 위하여 이제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개시하시려고 하시는 그 장엄한 구원의 역사의 서곡 앞에서 경건하게 하나님이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감동 하나만을 가지고 그들이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탈출하려고 애굽의 하수를 피되게 하고 애굽의 온 천지를 피와 개구리와 이와 악질과 독종과 심지어는 초태생들을 모두 쳐서 멸하고 온 애굽을 흑암으로 만드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위대한 손이 애굽 온 땅을 치는 역사가 있고서야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박을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로잡힌 죄 가운데서, 애굽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종살이하는 것처럼 비참하게 살아가는 가운데서 그들을 건져주시는 놀라운 능력으로 긍휼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오늘도 그러한 능력은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극복하고 넘어설 수 없는 죄의 구렁과 그리고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경에 의해서 말려들어 가고 사면을 둘러보아도 도움 받을 곳이 없는 그 무기력한 상태에서 그저 환경에 떠밀리며 실패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여러분은 무엇에 소망을 두고 계십니까? 어디에다 희망을 두고 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외교에 승부를 두고 있습니까? 앗수르에게 가서 애원을 해서 바벨론에게 가서 사정을 해서 애굽에 가서 원군을 청해서 나라의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했던 이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과 같은 그러한 태도로 여러분 자신의 포로 된 삶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의 불붙는 긍휼로 그 놀라운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실 때 430년 동안이나 소망이 없는 노예생활이 지속되고 있었고 언제 그 노예생활이 끝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어떤 해방과 광복의 여명도 보이지 않는 그 철저하고 비참한 애굽의 노예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니까 잠깐 사이에 그들은 애굽의 모든 백성들을 무릎 꿇게 만들고 하나님이 약속한 땅으로 일어서서 진군하는 여호와의 군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해방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애굽은 어디입니까? 여러분들의 애굽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애굽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죄악과 어떤 어려움 속에서, 어떤 시련과 환난과, 때로는 우리의 범죄와 시련과 유혹과, 이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어서 도대체 어디로부터 맥을 잡고 어디로부터 풀어야 될 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깊은 수렁과 애굽과 같은 그러한 포로 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상태에 놓여있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께서는 불붙는 긍휼로 그들을 건지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여러분들이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여러분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어서 이미 노예로 살아가기로 자청하고 그저 애굽에게 잘 보여서 고깃국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으면 그것으로서 오늘 운수 좋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그 소망 없고 비참한 나날들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빛으로 나아와서 광복을 맞이하라고 하나님이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애굽으로부터 탈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능력으로 여기에서 벗어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한 단어가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앗수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 번영의 때가 끝나고 심판을 받아서 실제로 앗수르에게 끌려갈 것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징과 실제의 두 가지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비참한 상태로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불타는 긍휼로 회복시켜주실 것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로 끌려가게 하고 거기로부터 은혜를 베푸셔서 돌아오게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이러한 예언 같은 것들은 가슴에 와 닫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우리 나라가 이렇게 강성한데 누가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갈 것인가, 어느 나라가 감히 우리와 맞설 수 있다는 말인가” “보라 우리는 지금 여로보암 임금을 군주로 삼고 그의 영명한 지도력에 힘입어서 세속적으로 불꽃처럼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데, 우리가 포로로부터 돌아온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교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잘 나갈 때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형통할 때 무릎을 꿇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신들의 본분인 것을 깨달았다면 이러한 쓰라린 비극과 고통은 맛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경고와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간절한 음성이 마음에 별로 들리지 않는 여러분들을 향해서 저는 오늘 말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 여러분의 마음을 부유하게 하는지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 나가는 사업이 여러분들을 부요하게 하고 있습니까? 한참 잘 나가는 직장생활이 여러분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고 있습니까? 평안한 삶이 혹시 여러분의 마음을 부요하게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더 멀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영으로 나타났지만, 하나님이 주신 번영의 기회를 그들은 세속을 사랑하는데 다 써버렸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모두 사용해 버렸습니다. 마음은 모두 빼앗겼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바쳐질 심령이 없었습니다. 이런 속에서 이 백성들이 살아가며 “평안하다 평안하다”라고 말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심판의 칼을 갈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 앗수르라는 단어를 보면서 이러한 그림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사도는 말합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신 이가 그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합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아끼시는 독생자 외아들을 너희를 위해서 내어주신 이가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실 지 너희가 한 번 생각해보라”라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너희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기를 원하신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셔도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찾아내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하고 때로는 우리의 평안조차도 앗아가셔서 우리를 고통 가운데 빠트리셔서라도 우리만큼은 되돌려 받기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주신 번영의 기회를 타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을 보시며 베풀어주신 축복의 기회들을 어떻게 선용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훌륭하게 선용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주신 건강과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형통함과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원주인은 모두 하나님이십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여러분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가 주신 것인데, 하나님이 주셨지만 오히려 그것들로 타락의 기회를 삼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한때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삶을 살고있지나 않는지,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회를 방종의 기회로 삼고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앗수르로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광을 자랑하던 그 아름다운 땅들을 폐허가 되게 만드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가증하게도 열심히 섬겼던 이방 신들을 이번에는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 앗수르에게 강요를 받으면서라도 섬기면서 그 우상들 앞에서 먹게끔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원하던 대로 모두 됐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해졌습니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더할 수 없는 아픔을 앗수르의 지배 기간 동안 격어야 했던 것입니다. 전에 하나님의 은총 안에 살 때 먹었던 우상 숭배의 떡은 그렇게 달고 맛있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실컷 그렇게 살아가라고 나라를 빼앗기게 하시고 은총을 거두어가 버리시니까 이제는 그 떡이 쓴 떡이 되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때 왜 그렇게 멀어지는 것이 달콤한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손을 놓아주지 않으시고 “돌아오라. 돌아오라.” 그러시니까 몰래 먹는 떡이 더 맛있다고 하나님을 떠나가는 삶이 그렇게 매력적이고 매혹적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난 너를 모른다” 하시며 버릴 때 그렇게 달콤하던 세상의 떡은 쓰디쓴 떡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르실 때 그 하나님의 애타는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오기 싫어하고 내 고집대로 살겠다고 애를 쓰고 내 원하는 안목대로 살아보겠다고 애 쓸 때에 하나님이 계속 그러지 말라고 하시는 동안에는 버팁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로마서 1장에 말한 바와 같이 ‘그래 내가 너를 내버려두리라’ 하셔도 여러분은 그 길을 걸어갈 용기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점에 있어서 논리적으로도 지극히 모순된 삶을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으로 보이면서 하나님을 대항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화) 어느 중등부 교사가 한 학생을 매주일 데리러 가야만 했는데, 그 앞에서 출석부에 있는 이름을 지우고 나자 그 다음 주에 스스로 나왔다는 이야기
바로 그런 것입니다. 마음대로 하라하면 그것도 하지 못하는 인생들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빌미로 삼아서 왜 그렇게 하나님을 힘들게 합니까?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하시려고 긍휼을 베푸시는데 우리는 그 긍휼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앗수르’라는 단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우리의 불순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들려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불붙는 사랑과 긍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깨닫게 하실 때 거기로부터 비둘기와 같이 날아온다는 것입니다. 기쁨의 상징입니다. 새같이 비둘기와 같이 날아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포로 되어서 자유를 잃어버렸던 그 자리에서 풀어주니까 그 다음에는 훨훨 날아가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불붙는 여호와의 사랑을 아는 것에는 이러한 자유 함이 있습니다.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이 있습니다. 결박된 것으로부터 풀려나는 진정한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것이 자유입니다. 무거운 죄짐이 우리의 어깨 위에, 우리의 등위에 잔뜩 지워져 있다가 어느 한순간에 그것을 벗어버리게 되자 우리는 커다란 자유와 말할 수 없이 놀라운 기쁨을 하나님 앞에서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과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에도 이처럼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시고 간절히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새같이 비둘기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기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건지시는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향해서 그렇게 가슴 절절한 눈물 섞인 사랑만을 가지고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사랑만을 가지고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 불붙는 긍휼의 사랑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그 사랑을 우리를 위해서 펼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여화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여러분들이 처한 문제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위대하고 큰 능력으로 애굽과 같은 자리에서 여러분들을 해방시키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와 같이 우리가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잠시 포로된 것과 같은 비참한 삶을 살고 하나님의 은총을 벗어나서 흑암과 그늘에 앉아서, 곤고함과 쇠사슬에 매인 것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인생의 어두운 길을 지나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불붙는 사랑과 불타는 여호와의 긍휼이 빚어낸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으로 여러분들을 건져내어서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고 눈먼 자에게 빛을 주사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나아오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들, 주의 거룩한 종들과 왕 같은 제사장들로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누구에게도 속박 받지 아니하며 이 어두운 세상을 타오르는 불꽃처럼 살아서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이 여러분들로 말미암아 온 땅에 높이 드러나게 되는 그러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불타는 긍휼과 사랑으로 아직까지도 앗수르와 하나님 사이에서 망설이고 애굽과 여호와 하나님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여러분들을 부르고,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우리에게 외치고 계시는 음성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거짓을 버리고 마음을 정하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호 11:11下-12)
불타는 긍휼가운데 들린 하나님의 음성은 능력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능력으로 나타났고 또 하나는 애굽과 같은 죄악의 포로 된 삶을 사는 그러한 영적인 상태로부터, 그리고 실제로 침략을 받아서 포로로 끌려간 앗수르와 같은 상황에서 그들을 건져내시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보이셨다는 말씀을 어저께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11장 끝에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신 그 놀라운 긍휼과 그리고 그 위대한 능력을 거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같이 비둘기같이 기쁨으로 날아올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예비하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에 대해서 선지자는 오늘 말하기를 “내가 저희를 각 집에서 머물게 하리니 이는 내 여호와의 말씀이라” 성경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저희로 각 집에 거하게 하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았으나 이제는 잃어버린 그 기업으로 그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여 그들의 유업을 다시 잇게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집이 없어서 유리하고 방황했던 그 이스라엘 족장들의 생애를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집에서 종살이하면서 살고 또 그렇게 후일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생활과 방불한 앗수르의 포로로 끌려가는 것과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 그러한 삶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에 집 없는 삶을 경험하였고 또 그 후에는 집 없는 삶을 경험할 예정이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삶을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없는 고달픔, 그 한없는 곤고함에 대해서 여러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언젠가 제가 누구하고 올라갔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우리 식구 중에 가까운 사람인지 친척인지 아물아물해요.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갔어요. 남산에서 산 아래를 굽어다 보니까 그 때에도 지금같이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온 서울 시내에 불빛 천지였습니다. 그 때에 같이 앉아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저렇게 집이 많은데 우리는 집이 없구나...” 여러분, 집이 없는 설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렇게 철저하고 비참하게 깨달았던 민족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불타는 긍휼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잠시 잃어버렸던 기억을 돌려주시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상실했던 그 기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는 당신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을 향한 신실함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지만 70년 동안 그렇게 자신을 낮추며 겸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움을 부르짖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근심 중에 여호와께 간구하고 울부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과연 기적적인 방법으로, 잃어버려서 이제는 남의 땅이 되어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업인 예루살렘으로 그들을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시편 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 바벨론의 포로로 돌아오게 하실 때에 자신들은 꿈꾸는 것 같이 황홀했다고 고백을 하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범죄하고 그리고 유다가 비록 하나님 사랑을 저버렸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허락하신 그 유업을 누구에게도 넘겨주시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그 땅과 유업을 지키며 내 피로 산 바 된 내 백성들이 돌아와서 나의 언약으로 다시 돌아오고 그리하여 내가 저들에게 준 그 땅에 내 백성들이 살기를 그렇게 원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도 않고 정직하지도 않고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들을 지키지도 못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 놓으신 그 유업을 우리가 누리지 아니하면 그것을 비어 두어서 언제라도 우리들이 돌아와 그 유업을 차지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시는 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집을 떠났고 유다는 아버지의 품을 떠났으나 아버지의 마음속에는 그의 아들들이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집 나간 유다와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며, 그들은 하나님을 생각조차 하지 아니하지만 불타는 그 긍휼이 아들과 함께 하던 날들을 추억하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어린아이와 같이 순종하고 여호와의 그 계명에 부종하며 광야에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신랑을 따르듯이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를 따랐던 그 때를 추억하시면서 언젠가는 돌아올지 모르는 그들을 위해서 당신의 집을 비워 두고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어떤 사람은 고집을 많이 피우다가 늦게 돌아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예 일찌감치 하나님 앞에 돌아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 청년들을 쳐다보면 그렇습니다. 뭔가 신앙생활 하다가 어려움이 있으면 호소합니다. “너 몇 살이냐?” “방년 스물 둘이옵나이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야, 너무 좋다. 나는 너만 할 때 세상 좋은 줄 알고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 내 마음대로 돌아다녔는데, 벌써 이렇게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처지가 되었으니 이 얼마나 축복이냐?” 그러면서 오히려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일찍 돌아올 때가 있고 늦게 돌아올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늦게 돌아오신 분들 여기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일찍 돌아온 분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기쁨의 집을 예비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니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쁨의 관을 씌우시고 재 대신 화관을 우리에게 씌우시고 그리고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히시며 우리를 환대하셨습니다. 막판에 거역하다가 돌아온 사람은 돌아가니까 화관은 반쪽짜리 씌워 주고 찬송 대신 기쁨의 옷을 입히기는 입혀 주셨는데 내복같이 반소매만 입혀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늦게 돌아왔던 일찍 돌아왔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고스란히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시면서 비워 두신 그 하나님의 위로의 집,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집을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모든 것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를 차별 없이 그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만들어 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오늘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이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유업을 예비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셨던 것처럼, 여러분이 지난 날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을 모르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고멜과 같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음탕하고 더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죄악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고집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그 집을 예비하시고 기다리셨던 것처럼 오늘 이 시간에도 자신의 고집을 버리고 그리고 목자 없는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며 걸어 다니는 인생들의 모든 길들이 고달픔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그 거룩하고 온전한 기업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고달프고 안타까운지를 깊이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고 그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알고 싶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차별 없이 그 은혜의 집을 예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잃어버렸던 그 기업을 다시 잇게 하시고 상실했던 그 하나님의 집에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에 우리의 죄와 우리의 허물과 그리고 마음 깊은 곳에서 불타는 그 하나님의 긍휼을 멸시한 우리의 죄 때문에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아들이기를 그만두고 자녀의 신분을 포기하고 아버지의 품꾼중의 하나로 여김을 받으면서도 내 아버지 집의 문지기로 악인의 장막 가운데 군주로 거하는 것보다도 복되다고 고백하며 나아오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만 하면 새처럼 환란을 피하여 당신에게로 날아온 사람들, 비둘기처럼 고난을 피하여 당신의 품으로 돌아온 우리들을 위해서 완전한 기쁨과 사랑의 집을 예비하고 우리를 받아주시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옛 사랑을 저버리고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언제 우리가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더니 “오! 하나님. 이제야 제가 이렇게 더럽고 추악하고 음란하고 그리고 고집과 아집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으로 뭉쳐진 이 쓸모없고 더러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그 불타는 사랑을 알았기로 제가 이제 손들고 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에 주님이 언제 “늦었다. 이미 네가 돌아올 시간이 끝났고 너를 위해 예비한 집은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었으니 이제 너는 돌아가라”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우리의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자신을 떠나 음란한 여자가 되어 알지 못하는 남자에게 가서 아이를 낳은 자신의 부인 고멜을 찾아왔던 호세아의 눈물겨운 사랑처럼, 또 다른 호세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오늘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짧은 인생을 지나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이 놀라운 구속의 은혜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실패한 이스라엘처럼 우리의 신앙의 세계가 무너져 버리는 패배와 좌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악으로, 그리고 때로는 우리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연약함 때문에... 때로는 나와 너 상관없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는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세계까지도 파괴되어서 이제는 도무지 어떻게 일어날 수조차 없는 파멸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렇게 모두 무너져 버린 우리의 신앙의 세계나, 혹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될지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버리고 주저앉아 버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이제는 모든 기쁨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어두운 그늘에서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에게도 그 믿음의 세계가 다시 복구될 수 있느냐고 누군가가 물을 때 우리는 단호하게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고 배반의 길을 걸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범죄와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악의 세력들은 하나님이 미워하셨지만, 그 죄 가운데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이 떠 밀려 가며 생명의 길을 버리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과 사랑은 마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든지 여러분들의 지금 최대의 숙제는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뼛속 깊은 곳까지 불붙듯 타 들어가서 그의 심장을 태우고 혈관의 핏속에 불을 실어 나르는 그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리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이것보다도 급한 일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돌아오는 이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기쁨을 예비하시고 그리고 영적인 하나님의 집을 우리에게 예비하셔서 이전에 잃어버렸던 모든 기업들을 다시 되찾게 하십니다. 저는 언젠가 간음의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모두 무너져 버린 어떤 지체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가 저에게 호소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살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들려오는 것은 차가운 거절감, 그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러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는데 손가락 사이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목사님. 나 같은 사람도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요?” 제가 말했습니다. “그럼... ”
(찬송)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하나님은 폭풍 가운데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고 바람 가운데서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돌아앉은 것 같은 차가운 거절감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침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회복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을 회복시키지 않으면 나는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더한 죄악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도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은 새처럼 비둘기처럼 날아온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의 보금자리를 준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 피하는 자를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예비하신 진정한 기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을 가지고 이렇게 여러분들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을 찾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 분께만 소망을 두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오늘 12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우리를 둘러쌌고 유다는 하나님과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정함이 없도다” 여기가 히브리 성경에서는 12장 1절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지간에 여기에서 11절까지와 그 다음에 12절부터 12장 2절 사이에는 날카로운 대조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긍휼과 현재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상태를 이렇게 날카롭게 대조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이런 놀라운 긍휼이 불타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불붙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긍휼가운데 울부짖는 사자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발하실 때에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쫓아오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서 떨며 하나님 앞에 나아오고 그들을 능력으로 역사 하셔서 애굽과 같이 포로 되었던 영적인 상태에서, 앗수르와 같이 포로로 끌려간 포로의 상태에서 그들을 돌아오게 하여 주께서 예비하신 완전한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나님이 하고 계신데 그러한 약속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그 상태는 정말 이 하나님의 긍휼을 모르는 것 같은, 그 사랑을 받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에브라임과 이스라엘 족속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북왕국 이스라엘에 열 지파가 있었는데 그 열 지파 가운데 가장 우두머리 지파가 바로 에브라임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바로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명사입니다. 에브라임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이스라엘 족속, 히브리 성경에는 ‘이스라엘의 집’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북왕국 이스라엘의 집, 에브라임은 같은 말인데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이들이 이런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 그런 약속을 하나님 앞에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그런 하나님의 은총의 품으로 돌아오고 있지 못한지를 선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것이 바로 거짓과 궤휼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그리고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나를 둘러쌌고.... 말합니다. 여전히 그들의 중심은 하나님이었던 것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 중심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있는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 겉으로 볼 때 여러분의 삶의 중심이 누구입니까? 왜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빙글빙글 교회를 도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신앙을 떠나지 못하고 신앙의 언저리에서라도 돌아다녀야지만 마음이 편한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한참 공부할 때에는 놀러갈 때도 책을 들고 다녀야지만 마음이 편합니다. 왜? 그것 없으면 그나마도 불안합니다. 어차피 안볼 건 뻔 하지만... 놀러갈 때도 옆에 책을 들고 가야지만 위로를 받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것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신앙생활이 그러했습니다. 거짓과 궤휼이라고 나오는데 이 거짓은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관련된 말입니다. 헛된 신들, 거짓된 신들에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지 않는 거짓된 방법으로 경배하면서 하나님에게는 거짓된 마음을 바치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짓된 종교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지적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이스라엘 족속의 궤휼이라는 말의 - 이 궤휼이라는 말은 속임수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위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같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 같고 말끝마다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 드리는 것처럼, 입바른 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것이 속임수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에워쌌으나 경배하기 위한 에워쌈이 아니라 거짓으로 우상을 숭배하면서 다가와서 위선의 몸짓으로 하나님께 아부하는 것 같은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하는 이것이 바로 거짓, 궤휼, 그리고 속임수라고 선지자를 통해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양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여호와이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이 정말 가식적인 종교 생활인지 혹은 진정한 신앙생활인지, 영적이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러한 경건과 하나님께 바쳐진 마음이 있는 신앙생활인지, 혹은 하나님 앞에 아첨하면서 또 한 편으로 하나님을 안심시키고 세상을 좇아가며 사는 마음인지 하나님 앞에서는 벌거벗은 것처럼 모두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으로 가는 길은 거짓의 껍질을 벗고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나 설교를 통해서나 죄에 대한 지적을 싫어하고 위선에 대한 지적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참된 신앙을 찾아갈 가망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속에서 ‘참된’이라는 말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다니고 있느냐고 묻고 답하는 것 가지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진정한 신자입니까?” 이러한 말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가?” 물어야 하는 시대를 저희들이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짓으로 하나님을 숭배하고 속임수로 하나님 앞에서 위선을 떨며 신앙 생활하는 데에는 별로 많은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의 행세를 할 수 있고 자기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부인하려고 살을 깎아 내고 뼈를 가는 것 같은 고통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 생활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의 말로는 멸망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선지자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사람들은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핑계할 수 있지만, 참된 신앙이 무엇이고 진정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이고 우리가 왜 자기를 부인하면서 이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지에 대해서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히 알고 그리고 정오의 빛과 같이 진리의 복음의 빛을 받았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속삭이며 말하지 아니하였고 불타는 긍휼로 너희의 심령을 향하여서 울부짖는 사자의 음성을 발하여 너희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너희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내가 나의 사람들을 통하여 말하였거늘 너는 어떻게 살았느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뭐라고 하나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신앙생활 하며 나아가지만 거짓의 옷은 우리에게 두텁게 입혀지고 위선은 각질처럼 우리의 몸의 일부가 되어서 우리에게 달라붙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깎아내려고 할 때 살을 에는 것 같은 아픔과 고통이 수반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그릇된 줄 알면서도 거짓을 벗 삼아 하나님을 섬기고 위선을 벗 삼아 하나님께 찬송을 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그렇게 하나님을 거짓과 속임수로 섬기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범죄 하였을지라도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고 용서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지, 계속해서 거짓과 속임수를 고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언제나 용서의 필요조차도 못 느끼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짐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를 짓밟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 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처럼 만약에 우리들이 끊임없이 계속해서 거짓된 삶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위선된 삶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속이면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그 불붙는 긍휼은 불타오르는 진노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의 호세아서를 잘 읽어보면, 하나님의 그 사랑의 열정과 하나님의 분노하시는 심판의 정열, 그것이 언제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역설적으로 말해서 범죄 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그 피나는 심판, 그 끔찍한 심판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가지고 있었던 사랑이 얼마나 진하고 빛깔 강한 빛이었는지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깊으면 미움도 강해지는 법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이 불붙는 하나님의 진노와 백지 한 장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경고를 남의 말처럼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고 불붙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성경적이 아닌 거짓된 모든 신앙의 껍질들을 벗어버릴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속임수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처럼, 우리를 하나님 앞에 보이고 싶어 하는 이 교만한 마음과 거짓된 속임수를 하나님 앞에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런 면에 있어서 건강해지는 비결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뭐냐 하면, 그가 누구이든지 그 모임이 어떤 모임이든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어디에서든지 긴급 동의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목회를 할 때에도 뭔가 성경적으로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면 와서 뒤에 다니면서 불평하거나 불만 하는 비겁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분별하고 나와서, “목사님이 제게 가르쳐 주신 성경 말씀에 의하면 이것은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목사님, 제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까, 목사님이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 올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학생이라도 성경에 이르기를 하고 손을 들면 그것이 긴급동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교회 안에서만 비로소 이 거짓이 물러가고 진실의 빛이 깃들며, 그리고 속임수의 신앙생활이 사라져 가고 그리고 참된 진실함의 신앙생활의 빛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붙는 하나님의 그 긍휼과 대조하여서 도무지 그렇게 돌아오라고 울부짖는, 부르짖으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지존하신 하나님을 멸시하며 그 하나님을 한 번 속이려고 하는 사기적인 요소들은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 이스라엘 말고 유다라는 나라가 다시 나오는데 유다에 대해서는 비교적 표현이 좀 온건한 것으로 미루어 봐서 북왕국 이스라엘보다는 신앙적인 타락의 도가 덜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한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말은 여기에서 히브리어 본문에서 보면, ‘재갈을 물리지 아니하였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말을 어거할 때 그 말을 어떻게 어거할 수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삼국지에 나오는 적토마는 하루에 천리를 달렸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400킬로를 달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최소한 시속 40내지 50, 자동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렇게 달려가는 말을 무엇으로 막을 수가 있겠느냐는 말이지 않습니까? 장정이 목을 끌어안으면 그 말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발을 붙들면 그 말을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저는 말을 붙들어 보지는 않았는데 제가 시골에 갔을 때 코를 꿰지 않은 송아지를 코 뚫으러 가는데 목에 강아지처럼 줄을 맸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그것을 끌고 가는데 소가 농부를 몰고 가는 건지 농부가 소를 몰고가는 건지 도무지 분간이 안가요. 송아지가 샛길을 따라가다가 한사코 산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농부가 그것을 붙들고 잡아당기는데 그 조그만 송아지가 힘을 쓰니까 밧줄이 ‘휙’ 흔들리더니 농부가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어느 시골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 코 뚫지 않은 송아지, 삼부자가 감당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장정 아들 둘에 아버지가 합세하여 송아지를 붙들어도 그 송아지를 제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코가 뚫어지면 둥그런 것을 끼지 않습니까? 그러면 초등학교에 다니는 애들도 400내지 500킬로그램 되는 소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탁 탁’ 치면 코에 끌려서 가는 것입니다. 말은 어떻게 합니까? 재갈을 물리는 거지 않습니까? 달려가다가 탁 줄을 채면, 서는 거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함이 없다는 것이 그렇게 재갈을 물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멋대로. 정처 없이, 방향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다백성은 이스라엘 백성보다는 좀 낳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낫습니까? 이렇게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처럼 적극적인 거짓이나 고도의 속임수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하지는 않는데 그래도 마음 중심 속에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할 텐데...’ 하는 마음은 있는데 그것이 정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여러분들을 향한 사랑이 불붙는 사랑인데도 그 사랑을 힘입어서 이렇게 애굽과 같이 죄악 된 상태에서 새같이 날아오고 앗수르와 같이 포로 된 상태에서 비둘기와 같이 날아와서 하나님이 예비한 기쁨의 집에 안착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이렇게 모여 있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하나님을 떠나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한 명도 없습니다. 왜? 신앙이 있기 때문에... 늘 세상을 향해서 입맛은 다시지만, 그러나 용기 있게 달려가서 세상의 죄악의 밥그릇에 얼굴을 파묻고 그 죄악의 국물을 마시면서 옛날처럼 그렇게 포식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범죄 하면서도 무서워하고, ‘이러다가 하나님이 손보시면...’하고 뒤통수가 근질근질해 오기 시작합니다. 언제 하나님이 뒤통수를 한 방 치시면서 “네 이놈!”하시며 눈에 불이 날 것과 같은 예감을 체험하면서도, 그런 하나님을 떠나서 살던 삶에 대한 달콤한 추억과 현실적으로 오늘 하나님 앞에 불붙는 사랑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그 회복이 너무나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 사람이 그렇게 마음의 정함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1년 전에 은혜를 받겠다고 하며 “손들고 옵니다.” 하던 사람이 1년 뒤에는 발도 안 듭니다. 발만 들으면 그래도 교회는 올 것 아닙니까? 2년 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내 손을 붙잡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목사님! 제가 이제 벧엘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다시 여리고로 내려가는 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결국 뭐를 의미하는가 하면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정함이 없다’는 말은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하나는 방종과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도 그 마음을 어떻게 확정하지 못하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 멋대로 살고 싶어 하는 방종과 여러 가지 갈등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우유부단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활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피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들은 결사적입니다. 왜? ‘하나님이 내 인생의 갈 길을 보여주시지 않으면 나는 이제 끝이다...’ 라는 것입니다. 배수진이라고 하잖습니까? 뒤에다가 물을 놓고, 빠지면 죽도록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에 결사 항전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올 때도 말입니다. 말기 환자가 마지막으로 병원에 오는 심정으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마음이 정해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견고하게 생활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교회를 한 번 나와 보는 사람들은 마음이 견고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가운데에는 몇 년이 지났어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한결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정함이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시고 그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좋은 것을 보여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사 26:3)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여 정함이 없으니까 언제나 그 마음이 불안하고 그리고 조금 좋은 일이 일어나면 “헤헤헤” 웃었다가 조금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고개를 내리꽂고 오뉴월에 양지 볕의 병든 병아리 마냥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금방 지구의 종말이 오는 것처럼 땅이 꺼지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의 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좋은 것을 얻을 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그가 얼마나 성질이 괴팍하고 혹은 죄를 많이 지었고 여러 가지 약점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저는 사람을 볼 때에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마음에 확정함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정함이 있는 사람들은 잠시 쓰러지는 것 같으나 다시 일어나고 잠시 떠내려가는 것 같으나 다시 돌아옵니다.
여러분, 다니엘서 1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다니엘이 이제 느부갓네살 왕 앞으로 그 왕궁에 끌려가서 이제는 왕의 상에서 나오는 각양 진미를 먹으면서 신앙의 지조를 버려야 하는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그리워지는 영광의 때였지만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람에게는 영광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이 오히려 고난의 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그가 어떻게 그 고난을 이기는 시작을 하나님 앞에서 했는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단 1:8) 했습니다. 뜻을 정하였습니다. 뜻을 정하고 뜻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생사 간에 신앙이 가장 중요하고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없이는 내가 살아갈 수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내 인생이 어디로 가든지 포기할 수 없는 관계라고 하는 확정함이 그의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셔서 그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세운 그 뜻을 지키고 확정한 그 마음을 견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어딘들 우리에게 풍랑이 없겠으며 어디로 가든지 우리에게 시련이 없겠으며 어디로 가든지 고난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확정한 사람들 편에 서시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래서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108:1-2)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비록 인생의 밤과 같이 칠흑 같은 어두움을 지나고 있지만, 그러나 새벽이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어두움 속에서도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캄캄한 밤중과 같은 인생의 고난 속에서도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이 확정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게 저를 슬프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정하신 그 뜻을 한 번도 포기하거나 버리지 아니하시고 시종일관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한 여호와의 긍휼도 그의 정하신 한 뜻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백성을 구원하여 내 백성답게 살게 하리라” 하나님의 정하신 그 한 가지 뜻이 거룩한 성경의 역사의 한 맥을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그러므로 마음을 하나님 앞에 정하고 뜻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요동하는 자에게 적합한 것은 변화무쌍한 이 세상이 그에게 적합한 집이지, 한 가지 뜻을 정하시고 일관되게 그 뜻을 성취하려고 열심을 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는 집은 그들에게 아마 고통일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셨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견고한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영적인 손해를 보고 신앙의 방황을 하며 살아온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불붙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원합니까?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정해진 마음입니까? 이제는 흔들 수 없도록 반석에 그것을 깊이 꼽아 두어야겠다고 하는 결심으로 어찌하든지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싶고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때로는 주님에게 얻어맞은 상처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께서 찢으신 그 아픔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불붙는 그 긍휼과 사랑을 알면 여러분, 족합니까? 그렇게 마음이 정해졌습니까? 오늘 하나님이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에게 “너는 아직 멀었다.” 하나님이 분노하시며 돌아서도 여전히 그 분노해서 돌아서시는 하나님의 옷자락을 붙들고 “주께서 나를 외면하실 지라도 나는 예루살렘을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라고 하는 믿음의 소망을 그렇게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마음이 확정되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면 이제는 세상이 흔들어도 나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며 어찌하든지 주님이 나를 회복시키시면 나는 그 분의 뒤를 따라가면서 살아야 되갰노라고 하는 거룩한 결의가 여러분에게 확정되었습니까? 정말 그 확정이 견고합니까? 세상과 그리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이 흔들 수 없을 만큼 그렇게 정해져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여자를 사랑했던 어느 시인도 “사랑하는 이가 대답지 아니하시면 선 채로 이 자리에서 그 이름을 부르다 돌이 되겠노라”고 고백을 했는데, 여러분, 그런 마음의 확정함이 있습니까?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의 참 사랑을 알아서 주님께 나왔사오니
(찬송)
주 나를 박대 하시면 나 - 어디 가리까..
내 죄를 씻기 원하여 피 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맘으로 주 앞에 옵니다.
주께서 나를 박대하실 지라도, 주님이 나를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나는 주님을 향하여 정한 이 마음을 돌이킬 수 없나이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유다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건져내어서 지금도 불붙는 하나님의 그 타는 듯 한 마음으로 그들을 향한 사랑의 불을 거두지 않고 계시는 하나님의 그 불붙는 긍휼에는 그들의 소명과 그들의 부르심에 대한 기대가 함께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죄악 가운데 건져내서 구원해 내신 그 계획은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기이한 세계를 보이시고 하나님의 율법의 정미함을 보이셔서 여러분들에게 남들에게는 없는 놀라운 은혜를 부으셔서 여러분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세우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거룩한 소명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말할 수 없는 원수도 시기할 정도의 그 아름다운 하나님의 귀하고 놀라운 사랑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향하여 여러분들의 마음이 정해졌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가 여러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여러분들이 이렇듯 하나님 아버지의 그 불붙는 긍휼을 깨닫게 되고 여러분의 심령이 그리스도 예수의 심령에 다시 한 번 사로잡히는 영적인 회복을 주시면 이제는 정해진 마음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소명을 따라 사기로 하나님 앞에 결심하고 있습니까?
한결같이 변함없이 하나님 아버지의 그 부르심을 받들어 우리 같은 죄인 중의 괴수들을 건지시기 위해서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피 뿌림을 하나님의 그 마음을 증거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렇게 확정된 생애였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원받은 우리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수 있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리실 수 있도록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확정되고 정해졌습니다. 그는 마치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이래로 화살이 시위를 떠나서 아무데도 들르지 않고 과녁을 향하여 쏜살같이 날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한 뜻에 마음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거룩한 불붙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모두 드러내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하는 일 없이는 무너진 여러분들의 신앙의 세계가 재건되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기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정함이 없고 하나님 앞에 목표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회복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구름과 같이 떠도는 정처 없는 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 어리석은 생활, 이 옛 사람의 생활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다면 우리는 정함이 없는 마음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연약한 것과, 정함이 없어서 정처 없이 흔들리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혼돈하지 마십시오. 매일 멋대로 살다가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연약한 종...” 연약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사악한 것입니다. 연약하다는 것은 뜻을 정해서 이렇게 서 있고 싶은데 모진 바람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어디로 서고 어떻게 하나님 앞에 뜻을 정하여야 할지 알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유리하며 방황 하는데 그것이 연약한 것입니까? 그것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정함이 없고 삶의 중심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악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이 공평하시고 정의로우시고 순결한 성품을 ‘사랑’이라는 말로 ‘연약함’이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빙자하여서 그렇게 자신의 삶의 정답을 스스로 외면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연약함은 하나님이 돌아보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뜻을 정한 사람들은 뜻을 정하고도 우리는 그 뜻을 붙들고 살아가다가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정말 빗발같이 쏟아지는 그 악한 세력들의 화살 앞에서 잠시 주저앉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좌절을 맛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약할 따름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연약함을 긍휼히 여기사 우리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은 쓰러졌으나 다시 일어나면 다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게 마음을 정한 사람의 연약함입니다. 뜻을 정했습니다. 잠시 넘어지거나 좌절하거나 혹은 무언가 다른 이유 때문에 주저앉아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고 나면 그는 언제나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난의 때가 지나고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그 때를 기다리면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걸어가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한 마음입니다. 은혜를 털어먹고 방황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받아 봐야 소용없습니다. 석 달을 못갑니다. 은혜 받고는 마음의 정함이 없으니까 모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들어오기 전에 세상에서 살았던 삶의 모습입니다. 돈이 부르면 쫓아가고 명예가 부르면 쫓아가고 색이 부르면 쫓아가고 부귀가 부르면 거기에 쫓아가고 기회가 부르면 허둥지둥 허리띠도 안 매고 달려가던 옛 사람의 성품이 바로 정함이 없는 성품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온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확정된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확정된 마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 번 뜻을 정하십시오. “주님, 저를 회복시키시고 저에게 은혜를 주시면, 하나님 아버지 이제 제 마음을 정하겠습니다. 이리저리 유리하고 방황하는 사람이 아니라 저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거룩한 기대를 따라서 살든지 죽든지 쓰러져도 내가 이 뜻을 세운 이 자리에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기쁨을 붙들고 넘어져서 쓰러졌다가는 힘주실 때 다시 일어나는 자리가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자리가 될 것입니다”라는 마음으로 “하나님! 제 뜻을 받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헛된 것들을 버리자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속임수로 나를 에워쌌고 유다는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종일토록 거짓과 포학을 더하여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호 11:12-12:1)
우리로 하여금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에브라임과 유다를 통해서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에서 있어서 거짓과 종교적인 위선이야말로 참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원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이점에 있어서 정직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과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판단과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처지를 판단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우리 처지를 정확하게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그 사랑을 입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만약에 거짓된 신앙생활을 하고 단지 우리가 그 요구를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하나님의 참된 신앙의 요구로 돌아가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에브라임이나 북왕국 이스라엘과 같이 이렇게 똑같이 하나님의 불타는 긍휼을 약속받고 있으면서도 그 약속의 혜택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그릇된 심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빚진 사람들로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정직해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헛된 것을 미워하고 거짓된 것을 처절하게 혐오하는 마음 없이는 진정한 신앙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한 시기에는 그 사람들이 이렇게 거짓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속임수로 자신들의 경건을 가장하면서 인간의 지혜와 사람의 생각으로 성경의 요구를 거절하며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안전하다고 여기는 시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불같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은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참된 것을 미워하고 거짓된 것을 사랑하고 위선을 진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즐겨했기 때문에 그들은 외식과 거짓 속에서 속임수로 일관한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도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를 원한다면, 여러분 마음을 다하여 거짓된 신앙생활에 대하여 극도의 혐오심을 가져야 됩니다. 여로분들이 만약에 등산을 가거나 혹은 산길을 산책하다가 징그러운 뱀을 만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침을 꿀꺽 삼키면서 저걸 고아 먹을까 생각하겠습니까? 우린 아마 뱀을 만나면 질겁하고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그 뱀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할 것입니다. 거짓된 신앙생활을 그렇게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속임수의 신앙생활을 몰랐을 때에는 그것도 잘못이지만 어쩔수 없지 않습니까? 몰랐을 때에는 큰 통나무와 같은 구렁이를 끌어안고 함께 잔다고 칩시다. 모르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끌어안고 자는데 그것이 통베개 같고 수면을 한없이 편하게 만들어줘서 뽀뽀도 하고 그렇게 잤다고 칩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밝히 진리의 빛이 들어 와서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래도 한 번 맺은 인연인데 하고 끌어안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소스라치듯이 도망가야 되겠습니까? 한 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속이기 좋아하는 속이는 자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이 뱀과 같은 거짓과 속임수의 신앙을 끌어안고 동침하면서 천국 갈 길을 계산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극도의 혐오심과 미움을 가지고 거짓을 파하고 진실을 찾으려고 애쓰고 진리의 샘물을 마시기 위해서 속임수의 구정물을 묻어 버릴 수 있는 이런 용기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또 하나 어제 말씀 드린 것이 뭐였습니까? 마음에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정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뜻을 정해야 합니다.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과 내 인생에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을 모르고도 살아 갈 수 있다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이제는 마음을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하나님께로 정한 이 마음이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음에 정함이 있어야 합니다. 뜻을 세워야 합니다. 연약한 것은 뜻을 세우고 그 깃발을 붙들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너무 힘이 없어서 주저앉는 것이 연약한 것이지, 깃발도 없이 이리저리 헤매며 유리하고 방황하는 마음에 정함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바람에 나는 겨와 같아서 하나님께 좋은 것을 얻을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이렇게 마음에 정함이 없어서 이리 저리 유리하고 방황하며 어두운 골짜기를 배회하면서 뭔가 하루 쉴 물을 얻기 위해서 헤매고 있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음을 이렇게 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신실하고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 11장 12절의 마지막 진술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찾으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성품에 합당하게 하나님을 찾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말을 식언치 않으시고 속임수를 쓰시는 분이 아닌, 하나님은 정직하시고 공의로우시고, 오늘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신실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하고 그 하나님의 성품 속에 깃든 여호와의 사랑을 자기가 더 깊이 체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신실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변함이 없이 언제 그 사람을 보아도 믿을만하다는 것이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할 만한 것, 이것이 바로 신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정함이 없이는 신실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하고는 내일 뒤집고, 오늘은 침을 튀며 주먹을 불끈 쥐고 하나님 앞에 얼굴이 새빨개서 기도하다가는 내일을 세상에 들어가서 세상과 팔짱끼고 시시덕거리고 모래는 다시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는데 도대체 그 일관성 없는 삶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믿어줄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뵈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하나님에 대하여서 정함이 없는 유다 백성들에 대해 말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유다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거룩한 분이시다” 이것이 지금 현재 유다 백성들의 상태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데 이 사람들의 마음은 신실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정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이들은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졌습니다. 그러니까 불타는 긍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계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목 놓아 부르짖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정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이 바라보시면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크게 만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성경속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올곧게 외길을 걸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번 정한 뜻인데 그 뜻을 성취하기까지 괴로운 일들도 있죠, 가슴 아픈 일들도 있죠, 넘어질 때도 있고, 때로는 한 걸음도 더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진리의 깃발을 한 손에 붙잡고도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 되는 좌절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자기가 일어서면 자기가 서 있어야 할 부름의 자리, 부르심의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세계가 무너지는 것도 경험했습니다. 때로는 죄로 말미암아,= 혹은 악한 사단의 도전으로 말미암아서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섰습니다. 무너진 세계는 재건되었고, 그들은 회복 되었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찾았을 때, 다시는 너희를 징벌하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 거룩한 말씀이 그들에게 응답 되었습니다. 잠시 그들이 신앙의 불꽃을 잃어 버렸으나 다시 불이 지펴져서는 어두운 세상을 찬란한 불꽃으로 재건된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하여지지 않고는 하나님을 뵈올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팔복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천국이 그들 것임이요” 라는 복이 천국을 소유하는 포괄적인 복이라면 그 천국을 소유하는 포괄적인 복의 진수는 누구를 뵙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뵈옵는 것입니다. 그것이 팔복 전체의 진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첫 번째 복은 팔복 전체를 총괄하는 복이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청결한 자에게 주시는 그 복은 그야말로 팔복의 진수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청결해지는 것, 이것은 단지 윤리적인 청결이 아닙니다. 무엇인가에 의하여 씻겨 지는 그래서 씻겨 지지 않은 것들하고는 구별되는 거룩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 너무나 예수 믿는 데만 열심을 내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너무나 약하기 때문에 이제는 교회 부흥위에다가 윤리의 옷을 입혀야 한다고 하는 주장들이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것은 전적으로 복음에 대한 오해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것, 그런 것들이 우리의 삶의 목표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거룩함,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윤리적인 삶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부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고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찾는 하나님, 우리와 같이 비천한 인생들을 향하여 불붙는 긍휼을 가슴에 간직하고 우리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르시는 그 하나님의 성품이 거룩하심을 알고 그 거룩하심을 본받는 자들이 그 하나님을 뵈옵는 영광스러운 교통의 특권을 누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일에 자유로워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알게 하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매일 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의 삶속에는 경건 이상 그 어떤 거룩함의 기운이 그들 삶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말 진리의 말씀으로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마음에 정함이 없는 것과 그리고 거짓된 신앙생활과 속임수의 신앙생활을 혐오하듯이 미워하며 진리를 알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속에는 그런 거룩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어떤 곳이 되겠습니까? 거룩한 공동체, 천국을 방불케 하는 거룩한 공동체! 우리 모두 흠이 있고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드는 거룩한 사람들이 모이는 그 속에 찾아오는 거룩함의 기운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공동체에 몸담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교회를 이렇게 거룩한 모임으로 만들어서 그 거룩한 백성들이 모일 때 언제든지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얻게 되는 이 거룩하고 놀라운 영광스러운 영적인 교통의 특권을 만날 때마다 누리게 되는 그런 공동체를 사모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사람들은 거룩함보다는 어떻게 속임수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의 신앙의 양심들을 속이고 나아가서는 지존하신 하나님의 불꽃과 같은 눈초리를 피하여서 비용을 들이지 않는 신앙생활을 할까, 사람들은 이것들을 궁리하는 데에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통에 이르는 모든 지름길에 모두 실패했습니다. 거기엔 어떤 왕도도 어떤 지름길도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만이 거룩한 하나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에 그 백성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그 백성을 거룩한 자로 부르셨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그 백성들과 만나서 당신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는 이 처절한 불꽃과 같은 사랑을 알게 하여 이 불꽃을 그들의 가슴속에도 그들의 뼈 속 깊이에도 나누어 주어서 그들로 하나님의 그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랑을 안고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거룩함을 위해서 죄인 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하나님은 잔인하게도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거룩 자시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둘러싸여 있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거룩한 삶을 지키는 것보다 우리가 거룩한 삶을 지키기 힘들다고 하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함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받을 상급이 큰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과 멀리 떨어져서 하나님과 놀라운 사랑을 누리며 살던 때가 이제는 언제였는지 기억도 없고 오늘 이렇게 교회에 나와 사경회에 참여면서 어떻게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해서 잠시 동안 만이라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사랑으로 돌아가서 내가 그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잠시라도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여러분 나오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아는 여러분 가운데에는 3년 전에 교회에 나오셔서 기도 제목이 뭐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제목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의 얼굴을 우리들이 뵈옵게 된다면 하나님을 늘 우리의 영적인 삶속에서 만나게 된다면 그것은 어떠한 놀라운 일들을 우리 안에 가져다주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독특한 삶을 자원으로 삼으면서 우리가 이 어두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이런 놀라운 특권을 주십니까? 거룩한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을 살며 하나님 앞에서 그 거룩한 삶을 지키며 살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축복들을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유다 백성들에게 이것을 생각나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껍질이 남아있는 종교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 삶은 전혀 신실한 삶이 아니었고, 절기를 지키고 있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 되어야 할 거룩한 삶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그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목 놓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 신실하고 거룩한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대하여 정함이 없는 마음을 확정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이 메시지가 2700년 전의 메시지라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귀에 들리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가 바로 이 유다 백성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신앙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한 것입니다. 인간의 풍조가 바뀌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같은 길로 우리에게 걸어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이렇게 신실하고 거룩하게 당신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남이 알지 못하는 사랑을 보이시고 남이 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험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찢기면서도 그 시련과 고난을 헤치면서 진리의 깃발을 굳게 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르신 부르심의 삶을 위하여 달려 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오늘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권합니다. 하나님 앞에 마음을 확정하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신실한 삶, 거룩한 삶으로 불타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기를 소원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12장 1절에서는 이제 이스라엘과 유다의 구체적인 죄가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묘사해 나가고 있습니다. 12장 1절을 한 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악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에브라임은 말씀드렸다시피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명사였습니다. 여기 1절에서 왜 선지자가 자기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그들을 향하여서 그들의 삶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고 그들의 신앙생활이 속임수로 가득 차 있다고 그렇게 탄핵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를 1절에서 구체적으로 네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헛된 꿈, 헛된 추구, 헛된 행동, 헛된 의지입니다.
먼저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가 바람을 먹으며” 무슨 뜻입니까? 여기 먹는다고 하는 히브리어가 양풀을 뜯는다고 할 때 쓰이는 ‘라아’라고 하는 단어를 썼습니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할 때 쓰는 것은 ‘로에’입니다. ‘라아’의 분사형입니다. 그러니까 ‘라아’는 풀을 뜯다하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람을 풀처럼 뜯어 먹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엇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무얼 먹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린 양들이 그 목자가 베풀어주는 푸른 초장에서 그 풀을 뜯어 먹듯이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말씀과 은혜를 먹으며 살아야 될 사람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북왕국 이스라엘 거짓과 속임수로 일관하며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도망하는 이 어리석은 백성들은 바람을 뜯어 먹으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제 무슨 뜻인지 여러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풀을 뜯어 먹어야 양떼가 배가 부르지, 바람을 뜯어먹고 사는데 무슨 배가 부르겠습니까? 결국 이런 묘사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바는 헛된 꿈입니다. 헛된 꿈! 헛된 꿈을 먹고 산다는 말입니다. 이 ‘라아’라고 하는 단어가 얼마나 감동적으로 우리 가슴에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목양하신다 하고 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풀을 뜯게 하신다하는데 쓰여야 할 이 ‘라아’가 바람을 먹는데 쓰인다고 하니 이들이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버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헛된 꿈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자랑, 그들의 꿈은 여로보암 2세의 영명한 지도력 아래서 늘어나는 무역 흑자와 그리고 강력한 군대와 그리고 번영일로를 치닫고 있는 강성한 나라, 거기에 꿈이 있었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에 모든 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그런 번성으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된 사람들은 그 부에 취해서 그 부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은 더 부요해져서 그들처럼 살아보는 것이 그들의 꿈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아모스 선지자가 이 호세아 선지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사람인데 어느 정도였는지 뭐라고 말했습니까? 여름이면 여름 별장, 겨울이면 겨울 별장, 그리고 잠자고 일어나서 기지개를 키는데 그 침대는 수입산 상아로 만든 침대여서 오늘로 말하면 투기해서 졸부가 된 사람들이 이렇게 나라의 부강을 빌미 삼아서 수입된 상아로 만든 침대에서 기지개를 켜고 여름이면 여름 별장으로 겨울이면 겨울 별장으로 놀러 다니고 점토에 점토를 연하여서 그렇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여인들은 온갖 아름다운 장식품으로 치장을 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헛된 꿈에 미쳐서 다니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통곡하는 음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칼을 갈고 계시는 그 음성도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무슨 꿈을 가지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 그렇게 한 발을 세상에 디디고 한 발은 하나님의 집에 디디고 왼쪽 다리를 잡아끌게 만드는 세상의 꿈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얼마나 좋은 것이 거기에 있습니까? 만약에 너희가 미지근한 신앙을 갖고 있다면 차든지 덥든지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토해 내리라. 하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가장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기회주의적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죄인과 세리들, 타락한 사람들, 그래서 자기의 타락으로 인하여 가슴을 치며 아파하는 사람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서 어두운 그늘에서 목 놓아 우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오른 발은 교회에 디디고 왼 발은 세상에 디디고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것이 잘못된 삶인 줄도 모르고 여전히 그렇게 살아갑니다. 목회자 한 사람만으로는 안 됩니다. 교회 공동체 전체가 신앙생활에서 거짓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종교 생활에 있어서 위선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혐오하듯이 미워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거룩함을 지켜나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신앙생활을 하는 기회주의적인 사람들은 교회 올 때마다 하나님 앞에 정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제시 받아야 됩니다. 찰스 피니(Charles Grandison Finney)는 말했습니다. “죄인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앞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자신의 죄를 확신하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죄인의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헛된 꿈을 찾아가고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와 말씀을 먹으며 살아야 할 인생들이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바람을 풀 뜯으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인가 그들의 삶이 잘못되고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내실 심판과 위험이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말해도 겁먹지 않을 정도로 강심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이 “너 그런 식으로 계속 살아가면 나 너 버릴 거야” 라고 말하면 오금이 저려서 한 걸음도 못 디딜 그런 사람들이 “만군의 여호와가 네게 이르노니 네가 마음을 여호와께 정하지 않는다면 여호와인 내가 너를 심판하리라 차든지 덥든지 하라” 말씀하셔도 하찮게 여기는 그런 담대함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담대한 사람은 세상을 향해 비굴하고 세상을 향해 담대한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여린 마음이 되는 것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셔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들은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언제든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나오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아 네가 기껏해야 나를 버리기밖에 더 하겠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를 버릴 수 있다 세상아 너는 나를 버렸어도 내게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계셔서 나를 영접하실 것이니 담대해질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이렇게 헛된 꿈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에게 영혼의 위험함과 위기를 언제든지 외쳐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지 않는다면 부흥하지 않는 교회가 하나님 앞에 복 받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이 헛된 꿈을 찾아다니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이 세상에 한 발을 디디고 교회에 한 발을 디디고 그렇게 이중적이고 기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인임을 밝혔다가 감추었다가 하면서 곡예 하듯이 하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헛된 꿈을 좇기 때문인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이제 거듭난 꿈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꿈이 예수를 믿고 거듭났는데도 여전히 예수를 믿기 전의 그 꿈이라면 여러분들은 연구 대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놓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참다운 신앙을 알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바꾸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으로부터 변화된 꿈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헛된 꿈을 좇아다니는 마지막 말로는 하나님의 심판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베드로 사도가 여러분들에게 말했던 바와 같이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애쓰고 비용을 들여서 거룩한 삶을 살고 신앙 하나를 붙들고 살아가는 그 이유가 무어냐고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꿈을 말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한 너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예비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 우리에게 왜 사느냐고 물으면 웃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웃는 대신에 우리는 밝히 신앙으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님의 아들 아무개가 이 땅에 사는 것은...” 하면서 신앙 고백을 시작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전에 세상 속에서 마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진노의 아들이었더니 유리하고 방황하는 나를 하나님께서 살리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주 백성 삼아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나로 하여금 어떠 어떠 한 삶을 살게 하려 하심이로다” 고백할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헛된 꿈을 버리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헛된 추구입니다. 무엇을 따라갔다고 그랬습니까? 동풍을 따라갔다고 그랬습니다. 이 동풍은 이스라엘 지방의 지리상으로 말하자면 아라비아 지방에서 불어오는 뜨겁고 강한 바람입니다. 그런데 이 바람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파종 때 씨를 뿌리거나, 파종이 끝나고 싹이 올라오려 할 때 이 바람이 불어오면 아주 뜨거운 열기를 사막에서 몰고 온 바람이기 때문에 막 싹이 나서 돋아나려고 하는 어린 식물들을 이 뜨거운 바람이 지나가면서 말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확을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커다란 재해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동풍인데 오늘 말씀에서 뭐라고 했는가 하면 동풍을 따라갔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이스라엘에게 적대적인 위협을 주던 강대국인 앗수르가 있는 위치가 동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동풍이라는 이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이 앗수르라는 강대국을 찾아가서 의지하고 그들을 통해서 어려움을 면해보려고 하는 그 모든 불신앙적인 행동을 향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앗수르로 가서 굽신 거리면서 도움을 얻어 보려고 애쓰지만 그러나 동풍이 너희에게 뭘 해주더냐. 그 동풍들이 너희들의 귀한 식물들의 생명을 말리고 씨를 모두 다 건조시켜서 더 이상 곡물을 거둘 수 없는 황폐한 땅을 만드는 것이 동풍이 아니냐. 그 동풍의 무서움을 너희가 알지 않느냐. 앗수르가 그렇게 너희에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 예언은 정확하게 실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헛된 추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헛된 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살고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면서 살고 그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눈에 보일 때 훌륭해 보이고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될 것처럼 보이는 세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고 있다면 언젠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그토록 사랑하고 추구하는 것에 버림을 받고 그것만 가지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풍이 되어서 우리의 영혼의 생명을 말리고 우리의 심령에 심을 씨를 말려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헛된 추구에 우리의 인생을 보낼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인생이고 우리의 인생은 이미 많은 날들을 흘려보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무엇인가 인생을 기여하면서 살아온 것도 아닌 돌아보면 그 인생이 보일 듯 말 듯 점선처럼 이어지고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비척거렸던 우리의 인생길이 눈에 보이는데 우리는 지금도 헛된 것들을 추구하며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면서 살아야 되겠습니까? 무엇을 추구하면서 사십니까? 오늘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있는 최대의 고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소유하고 싶고, 무엇을 누리고 싶고, 무엇을 붙잡고 싶습니까? 마땅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나라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그들이 자기를 의뢰하고 있는 동안에 분명히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누차에 그들에게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에 그들은 오히려 눈에 보이고 직접적으로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앗수르의 군사와 병기와 그 강력한 힘을 의지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도와준다고 약속해도 하나님이 버리시면 끝입니다. 주님이 버리시는데 세상에서 무슨 도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이 붙들고 있어야만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순간순간 그런 위기의식을 느낍니다. 내가 무엇인가? 뭔가 내 인생에서 남다른 것이 있다면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남이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내가 보았고 내가 누리고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지금도 순간순간 미력이나마 주님을 위해 살게 하시니 이 모든 힘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그리고 오늘 하루도 바쁘게, 바쁘게 주님을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으로 하여금 내 인생 되게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내 손을 놓으시면 나는 무엇이 되겠는가? 거지나 품을 팔자니 힘이 없고 높은 자리에 앉자니 맞아 주는 사람이 없어 갈 곳이 없어 이리 저리 유리하는 그런 신세가 되지 않았겠나.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이 부르심의 자리가 더 충성되게 하나님 앞에서 지키면서 헛된 추구들을 멀리하고 오히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쉬운 명령,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니 너는 나를 추구하라고 하신 그 분부를 따라 살아야하지 않겠느냐’ 하고 자문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버리는 그 날은 우리의 인생 최고의 날이거나 최악의 날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버리고 세상이 우리를 포기하고 세상이 우리를 내팽개칠 때 우리는 그 날이 최후의 날이거나 최악의 날이 아니라, 최선의 날이고 그리고 시작의 날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들어갔던 사람들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았던 사람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그 은혜의 빛 아래 산 사람들 가운데 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지 않았던 사람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오늘 이 하나님의 위대한 신앙의 세계를 외치고 있는 피로 물들어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 호세아 선지자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는 민족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동족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조차도 버림을 받았고 그리고 불붙는 사랑을 안고 그 여인을 찾아갔지만 언제나 그 여인은 자신을 냉대했습니다. 멸시받아야 할 그 여인이 오히려 자기를 멸시했습니다. 가슴속에 불붙고 있는 그 필연적인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어진 사랑이거늘 사랑하는 아내에게 멸시를 당하고 그리고 사랑하는 동족에게 멸시를 당하고 시련을 당해서 짐승과 같이 유리하며 가축과 같이 그렇게 고달픈 인생을 살면서 오늘도 그의 설교와 메시지는 한 사발의 피가 되어 우리의 심령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우리에게 최악의 날이 아닐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손을 떼시는 날은 우리에게 최악의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두려움의 날입니다.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 허물이 많고 이제까지 정함이 없는 삶을 살아왔을지라도 이제 하나님 앞에 마음을 정하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속살이 전해 오는 그 불붙는 긍휼과 그 사랑을 내가 알았으니 이제는 내가 뜻을 정하겠사오니 나를 버리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애원하며 하나님을 추구할 것을 서약해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너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느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목표로 삼고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특별한 관심과 일반적인 관심으로 나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말 특별한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면 우리의 추구하는 바가 특별해야 합니다. “넌 도대체 왜 사니?” “월급 받으려고 살죠.” 이렇게 대답하고 “죽지 못해서 삽니다.” 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이미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마른 뼈와 같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견디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주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사시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풍을 따라가다가 낭패하는 것과 같은 신앙의 실패를 자처하는 선택을 하시렵니까? 여러분 이 질문은 오늘 집회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은혜 받으면 무엇에 쓰시렵니까? 추구하는 바가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경주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에게 훌륭한 경주화가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싸우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 위에 걸쳐진 갑옷이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디에 쓰시렵니까?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추구하는 바를 바꾸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잠시 세상에 하나님이 우리를 두시는 동안에 살다가 생명 있는 날 동안에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추구하며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갈등이 많다고 하는데 그것은 추구점을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추구하는 바를 포기하지 않으니까 어떻게 그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를 조화시킬 수 있는지를 찾으려니까 뒤틀린 신앙생활 밖에는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갈등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를 의지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고 그들과 친선을 맺음으로 나라의 위기와 재난을 면해 보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그들에 받은 것이라고는 결국 동풍, 불어오는 바람과 같이 뜨거운 재난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을 도와주리라고 믿었던 그 사람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힐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렇게 헛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배신을 당하는 보응이 있지만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굶주린 채로 돌려보내는 것을 보셨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구를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 앞에 나왔는데 하나님이 빈손으로 돌려보내신 분 있습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를 찾는 자에게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래서 그 백성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았든지 이제 마음을 정하고 당신 앞에 나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그 품에 안으시고 그들을 씻기시고 입히시며 가슴을 헤쳐 젖을 물리시고 그리하여 우리에게 쉼을 얻게 하시는 그러한 보응을 주시는 그런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하나님을 추구하라고 하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명령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된 우리 모든 인생의 만족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동안에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추구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왜 사는지 이유를 확증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는 헛된 행동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헛된 추구를 찾아서 하나님을 추구하는 대신에 헛된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필연적으로 세상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거짓과 포악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파괴되고, 인간성이 황폐화되고 부도덕과 부패와 타락이 난무하고, 악하고, 곳곳에 살인과 거짓이 충만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배우는 동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마음속에 점점 더 많이 부여 받습니다. 그리고 일단 부여된 그 하나님의 성품이 더 뜨겁게 속에서 용솟음치면서 촉발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쉽게 예를 들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는지를 알게 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경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더 많이 알고 싶어서 더 어린 아이와 같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성경을 연구하고, 깨닫고 나서는 무릎을 치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이전에 몰랐던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서는 너무 기뻐서 성경을 얹고 춤을 추는 이러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이 계속 되었을때는 어떻게 됩니까? 이 속에서 알게 되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더 빛깔이 짙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늘 딸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시집가봐야 철이 드느니라.” 시집가기 직전까지 철 안 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차피 이 집은 내 집이 아니니까 어떻게 하든지 한 푼이라도 더 털어 가지고 갈까?’ ‘한번 안면에 철판 까는 것은 순간이고 이익은 영원하도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부모님들은 고달픕니다. 시집가서 아이를 낳아 보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날 때 얼마나 괴로운지 자기가 경험해 봤습니까? 기를 때 진자리 마른자리 누워 봤지 언제 눕혀 봤습니까? 다 입술로 하는 이야기지 알 리가 있습니까? 그러다가 시집가게 되면 철이 들기 시작합니다. 가끔 전화 걸어서 목메는 음성으로 “엄마, 힘들지?” 하고 물어오는 것도 처녀 적이 아니고 시집 가서입니다. 한 번 코에 단내가 나도록 고생을 해보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빛깔이 이전에는 평범했는데 자기가 실제로 그런 삶을 경험하고 나니까 진한 빛깔로 이 속에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이안에 있는데 자기가 계속 하나님을 추구하면 그 하나님의 성품을 내가 더 풍성하게 느끼면서 그것이 더 진하게 드러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절절이 스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게 되면 세상은 그런 사랑을 간직하고는 자기를 추구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세상을 계속 추구하고 세상을 향한 불붙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또 추구한다고 칩시다.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너 따라오지 마. 난 네가 추구하는 것 싫어. 난 네가 나 추구한다고 하는 것 싫어. 그것 먼저 버려. 죄악을 잉태하고야 네가 어떻게 나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을 만나고 부여받은 이 은혜의 성품들은 점점 죽어 가고,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짓과 포악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 포악해지고 그 다음에 거짓을 통 먹듯이 행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삶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정말 경건한 사람들은 경건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경건해지게 되었고, 거룩한 삶을 이어가니까 경건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세상을 찾아가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을 추구하고 세상을 따라가다 보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으로 에워싸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고, 그리고 포악으로 가득 찬 인생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악하게 살아가서 거짓되고 헛된 행동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과 포악을 더하는 이 헛된 행동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역사를 허비하고 있는 동안 늘어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님 앞에 받을 심판의 죄의 목록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기회, 여러분들에게 주신 건강, 여러분들에게 주신 그 모든 삶의 은혜를 이렇게 거짓과 포악으로 갚고,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대신 세상의 성품을 본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야 되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된 것으로 갚는 이런 불행한 길로 우리는 가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헛된 행동, 헛된 추구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을 미워하고 참된 것들에 속한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헛된 의지입니다. 여기에서 헛된 의지에 대해 무엇이라고 나오는가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앗수르와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요즘으로 말하면 불가침 조약을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군사적으로 강대국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공격을 하면 한판에 쓸어버릴 수 있는 사람들을 공격을 안 하겠다고 찍어줄 때는 뭔가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가 없이 그냥 찍어 줄 리가 있습니까? 한숨에 먹어 버리면 자기 땅이 되는데? 그렇게 강대국에 가서 우리나라에 침공하지 않겠다는 언약을 맺을 때에는 종처럼 가서 머리를 조아리면서 막대한 조공을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런 식으로 자신의 나라의 안전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옵니다. 그것도 마저 설명합시다. 애굽에는 무엇을 보냈다고 했습니까? 기름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올리브유입니다. 올리브는 알다시피 감람나무 아닙니까? 감람나무는 이스라엘의 특산물입니다. 거기에는 올리브유가 많습니다. 애굽에서 수입해가는 중동 지바의 수입품 가운데 아주 중요한 품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굽에 보내지는 이 기름은 우리가 앗수르로 부터 침략을 당할 때 후원해 달라고 하는 청탁조의 선물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름을 갖다 바치고 그렇게 앗수르의 은혜를 입기 위해 머리를 조아릴 때 그들의 겸비함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런 겸손과 겸비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렇게 바치는 수많은 물품들을 하나님께 바쳤더라면 하나님이 그들의 헌물을 받으시고 그들의 마음과 그들의 겸비함을 받으셔서 얼마나 그들을 축복하시고 그들을 지키셨겠습니까? 그들 앞에는 하나님이 이 나라의 위기 속에서 어떤 놀라운 능력으로 그들을 건져 주었는지 위대한 역사가 언제든지 펼치기만 하면 그들 앞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역사를 외면하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대적인 앗수르를 의지하려 했고 애굽에게 빌붙어서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 받으려 했던 것입니다. 헛된 의지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믿고 사십니까? 돈을 의지합니까? 뭘 의지합니까? 돈을 의지한다고 말하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무슨 의지할 만큼 돈이 많습니까?” 맞습니다. 여러분 참 돈 없습니다. 그거 압니다. 난 우리 교회에 헌금하면 한 다발씩 헌금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나는 안보니까 누가 얼마나 헌금하는지 모르지만 내 추측에는 아마 한 달에 돈 백만 원씩 헌금하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없는 걸로 내가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앗수르를 의지하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서라도 애굽을 의지하고 싶어 했는데 여러분의 애굽이 돈입니까?” 그러면 여러분은 즉시 “목사님, 돈이 어디 있습니까? 돈이 없는데 내가 뭘 의지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없어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있는 것만 의지하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없어도 의지하는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있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사람은 없어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있는 것을 지키려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런 것들을 하나님 앞에 미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앗수르를 의지하고 애굽에 잘 보이려고 하며 살아왔던 것이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삶의 추구점이 돈을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떨어질 수 없고 멀어질 수 없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말입니다.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여러분들이 의지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렇게 여러분들을 수없이 배신한 요부와 같은 세상을 의지하고 살아가려고 하십니까? 지금도 그 혹독한 쓴 맛을 보고도 여전히 삼손이 들릴라의 품을 사모하였던 것처럼 여러분 여전히 그 무릎을 그리워하고 그 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세상을 향한 모든 마음들을 결별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보다 세상의 사랑이 더 뜨겁습니까?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보다 더 빛깔 짙은 사랑을 세상이 여러분에게 보증해 주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영혼을 삼키고 육신을 껍질처럼 뱉어버릴 그 더러운 세상의 사랑보다 우리의 몸과 영혼을 동시에 존귀하게 하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는 더 소중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때는 저는 그 찬송을 좋아했습니다.
(찬양)
세상을 보며 사람을 볼 때 만족함이 없었네
나의 하나님 그 분을 뵐 때 나는 만족하겠네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 사람 부럽지 않네
우리는 세상이 모르는 우리만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앗수르가 우리를 돕지 않고 애굽이 우리를 호위해 주지 않아도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시련과 역경의 파도를 헤치며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피로 여기까지 왔고, 앞으로도 그 긍휼과 사랑을 힘입어 살 사람들이라고 하나님 앞에 세상 앞에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의지하고 이렇게 매달렸지만 결국 앗수르로 부터는 버림을 받고 짓밟혔습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부터도 짓밟혔습니다. 열왕기하에 보면 호세아라고 하는 북왕국의 마지막 임금이 애굽에 간절히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애굽도 하나님이 버리시니까 도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헛된 꿈을 버리고 헛된 추구를 포기하고 헛된 행동을 버리고 헛된 의지를 버려서 우리는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과 그 사랑을 의지해 살아가는 백성이니 우리를 보호하고 지키기에는 그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하나님 앞에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본문의 도전인 것입니다.
5. 하나님을 감동시킨 회개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2-4)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불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징벌치 않으신다고 까지 보증 해 주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유다는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거짓과 속임수로 하나님께 대했고, 유다는 마음에 정함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제는 구체적으로 그 이스라엘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헛된 것들을 찾아다니는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보다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참되고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러한 거룩한 성품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뵈려고 하지 않았고, 헛된 것들을 쫒아 다녔다는 것입니다. 바람을 먹는 것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의 신실한 사랑과 은혜를 먹으며 살아야 할 이스라엘의 양떼들이 바람과 같이 헛된 꿈을 먹고사는 처지가 되었고 그리고 동풍을 따라 다니는 것같이 헛된 꿈을 추구하고 거짓과 포악을 더하면서 헛된 행동을 하였고 마지막에는 앗수르를 의지하고 애굽을 의지하는 헛된 의지를 추구함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넘치는 긍휼과 사랑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던 사실을 어제 우리는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이스라엘의 배교의 역사가 거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 길로 가지 않으리라는 결심을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모든 역사적인 사실들이 거울이 되어서 다시는 우리가 그렇게 사랑과 긍휼의 불타는 하나님의 마음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는 못할지라도 그 불타는 하나님의 가슴에 침 뱉고 돌아서는 이러한 배교의 길을 걸어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을 갖되 참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과 같은 시련의 날이 오고 언젠가는 여러분의 믿음이 진정한 신앙인지가 하나님 앞에 TEST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헛된 꿈을 찾아다니면서 여전히 헛된 것들을 먹고 살았던 헛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지푸라기 불에 타 버리는 것같이 그렇게 그 고집과 속임수를 일관하고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한 그러한 모든 신앙생활들이 헛된 것처럼 다 불태워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그 믿음의 집이 반석위에 서있는 것 같아서 전능자가 오셔서 심판하실 지라도 오히려 그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날마다 ‘나는 참된 하나님의 전에, 나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답게 생각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거룩한 고민 없이 우리는 결코 참된 신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여호와의 편에서 진실한 자들은 소수였습니다. 흘러가는 시대의 풍조, 변천해가는 그 시대의 사조에 거품처럼 떠밀려 가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느 한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겠다고 결단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에 태어났고 그 시대가 그랬습니다. 그들이 신앙부흥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어쩌면 그런 위대한 신앙인과 같은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된 신앙이 사라진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으며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때로는 거슬려 흐르는 이 세상의 파도와 심지어는 교회 안에 흐르고 있는 그 모든 거짓된 신앙의 물결을 정면으로 도전하면 거슬러 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참된 신앙을 버리지 않고 그렇게 주님만을 따라가고 성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그러한 본분을 다하는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서 때로는 우리는 외톨이가 될 각오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공경하고 믿지 아니하는 사양길에 접어든 교회에 태어난 우리의 분깃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선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를 당하거나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 사는 것을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겁내 하거나 소심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수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이 신앙을 지킬 수만 있다면 어떠한 불이익도 받으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겠노라고 다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수를 떠나서 소수와 동행하시고 그 소수에게 다수를 변화시킬 위대한 꿈들을 주셨던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언제나 한 시대가 하나님의 진리의 복음으로 변혁되는 일이 있기 전에는 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미리 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수가 아니라 언제나 소수였습니다. 언제나 참된 신앙을 지키며 모든 것을 통해서 밭에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소유를 다 매각하여서 그 땅을 다 산 사람들처럼 그들은 신앙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의 물결을 따라가는 다수가 아니라 그 소수와 말씀하시고 그 소수와 대면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흐르는 시대의 풍조와 그리고 유행하는 시대의 신앙을 쫒아 다니는 것이 곧 우리를 참된 신앙으로 인도하지는 못하거니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진리위에 서있는지 시험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확정되었는지를 확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거짓과 속임수로 우리의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을 숨기려고 하는 이 이스라엘의 죄악을 답습해서는 우리는 모두 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거품처럼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이러한 모든 죄는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르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유다와 쟁변하시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보응하시되 그 소위대로 갚아주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행위대로 그대로 갚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그 사랑을 배신한 자들에게는 불붙는 진노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잘못하면 하나님이 잔인하신 분인 줄 오해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잔인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를 향해서 징벌한다”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서 여러 주석가들은 평하기를 아마 유다의 죄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죄만큼 극도에 달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저들과 변론하셔서 저들이 바르지 못하다는 사실은 인식시켜주고 싶으셨다고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받아들일 수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 하나님이 지금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 다투어서 무엇을 하시겠다고 하는 말씀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유다에 의해서 설득되실 수 있습니까. 또 유다가 하나님을 위해서 설득되겠습니까. 그들은 마음에 정함이 없고 제 갈길로 가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쟁변하시는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진로의 심판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발적이거나 돌발적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참으시고 인내하시고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타는 여호와의 긍휼을 저버리고 심판에 이르게 되었을 때는 소자라도 그 하나님의 심판하시는 행동이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도록 철저히 참으시고 준비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하나님도 어쩔 수 없이 행하시는 일들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다는 하나님 앞에 쟁변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르지 않다고 말할 때에 마음에 정함이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보면서 하나님,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거룩하고 신실한 방법으로 접근하지 아니하려고 하였던 그 모든 인간적인 시도들을 포기하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과 쟁변함으로 유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는 징벌의 길로 스스로 들어서게 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에서 초점은 이스라엘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야곱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야곱은 에브라임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대명사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즉시 이런 의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야곱이 이스라엘의 대명사인가? 야곱의 아래에서 유다도 나왔고 베냐민도 나왔고 그리고 유다는 남왕국 지파에 속한 사람인데 남왕국이나 북왕국이나 모든 열두 지파의 공통 분모 같은 야곱이 어째서 이스라엘의 표상이 될 수 있겠는가? 그 점에 있어서는 아주 정확한 답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야곱은 자연적인 이름이었지만은 하나님이 그를 개명시켜주신 이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이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야곱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대명사가 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과 같은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징벌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여기에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한 가지 진리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붙는 긍휼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이시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눈물을 머금고 그 백성들을 심판하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이제 모든 사고의 중심이 인간이 된 시대입니다. 세계도 인간을 위하여 있고 모든 사상도 인간을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인간을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모든 인간들은 나를 위하여 있다고 하는 이러한 사상들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유행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껄끄럽게 생각했던 성경의 진리가운데 하나가 심판의 교리였던 것입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인간을 심판하실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논리가 오늘 성경에 비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이러한 불붙는 긍휼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뼈 속 깊이 파들어 가는 그 애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목메어 부르시며 너희는 새같이 비둘기같이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집나간 음탕한 여인 고멜을 찾아 눈물로 그를 대속할 제물을 가지고 그 여인과 자기의 씨도 아닌 누구의 씨인지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를 찾아서 나서는 호세아 선지자의 심정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처절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언약을 끝까지 포기하고 돌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징벌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하나님은 반드시 징벌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징벌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의로움을 보이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여야 될 것은 이 징벌은 단지 이스라엘을 향한 분풀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벌주시고 그리고 그들을 보응하시는 그 심판을 그들에게 고통을 주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촉발된 자신의 모든 진노를 쏫아 붇는 한풀이식의 징계가 아니라 그들을 심판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모든 더러운 악들을 털어내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다시 모아서 마치 병충해가 들어서 모두 망가진 밭에서 그중에 병들지 아니한 뿌리 하나를 캐어서 다시 옥토에 심어서 새로운 씨들의 번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을 정결케 하시려고 하나님은 심판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키를 드실 때 바람에 날려가는 다수가 되어 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남은자로 분리되는 하나님의 그 남은 자들 편에 들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분명하게 이 백성들을 향한 진노의 심판을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넘치는 자신의 죄를 버리고 불타오르는 하나님의 긍휼을 기억하면서 손들고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일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견디고, 견디고 죄악의 낙을 즐기다가 마지막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진로로 바뀐 하나님의 불같은 심판을 받는 것이 쉽겠습니까?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에 무언가 어려움이 있고, 지불해야 할 비용이 필요했고, 고통이 있었다면 그들은 마땅히 그 죄악의 길을 걸어갈 때 자신들이 당하게 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앞에서 지불하게 될 심판으로 말미암는 희생과 고난의 비용을 계산하며 힘들어도 손들고 주 앞에 나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죄 가운데 있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있다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할 때 분명히 세상은 여러분들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방탕한 습관에 물들어있던 우리의 죄성이 우리로 하여금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마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때 잃어버릴지도 모르게 되는, 이 세상에서의 수많은 손해들을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이런 것들 모두 버려두고 기약도 없이 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겠느냐? 그 하나님에 너를 환영하셨을지, 버렸을지 모르는데 그 품으로 정녕 돌아가겠느냐? 우리를 공갈하고 협박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불타는 긍휼을 가슴에 품으신 하나님 아버지 품에 돌아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빚쟁이가 빚을 지고 그 빚을 청산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잘못하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던, 돌이켜 서서 거룩하고 신실하지도 않은 우리가 방향을 선회해서 인생을 유턴하여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느냐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하나님의 차가운 거절감이 바뀌어서 이제는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속에 들리는 신령한 교통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회복의 길을 알면서도 회복되기를 포기하고,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그렇게 양발을 담구고, 기회주의적인 신앙생활로서 거짓과 속임수로 신앙생활의 껍질을 입히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나님이 여러분 구해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 북왕국 이스라엘처럼 살아가고 남왕국 유다 백성들처럼 마음에 정함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다가 죽는다면, 여러분, 왜 그 좋은 세상에서 손들고 예수 그리스도께 항복하고 그 십자가를 붙들었습니까? 그렇게 좋은 세상에 발담구고 그냥 살지 않고 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까? 왜 우리가 한때 뱉엘로 올라가야 하겠다고, 모든 것이 나 때문이라고 그렇게 하나님께로 결단하고 돌이켜 섰던 이유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오늘도 흐느끼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께로 돌아가는 이 길이 아무리 멀고 천로역정과 같이 험난해도 그러나, 거기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임박한 심판 앞에서도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돌이키지 않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될 그 끔찍한 심판과 고난의 대가를 기억하면서 그것보다는 오늘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실 때 거룩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훨씬 비용이 적게 드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주의 긍휼을 호소하고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회복시켜 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리는 것 이외에 무슨 다른 소망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한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하나님보시기에 이 시대에서 경박한 말쟁이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의 무리들로 하나님의 눈에 비췰 수 있도록 그렇게 세상이 두려워하지 않은 하나님을 우리들이 두려워하고 세상이 두려워하는 세상을 우리가 하찮게 여기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믿음의 한길로 마음을 정하고 매진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3절은 우리에게 야곱의 옛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회상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계속해서 거론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야곱의 비 신앙적이고 인간적인 접근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주석가들은 야곱이 발꿈치를 잡은 이야기부터 하나님과 겨루고, 천사와 겨루고 이긴 모든 이야기를 성경이 칭찬을 하는 것으로 해석을 하는 주석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본문을 전적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사실은 이 사실이 결코 야곱에게는 칭찬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무엇을 보여줍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에 대한 북왕국 이스라엘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곱의 하나님의 대한 잘못된 접근과 그리고 뒤에 가서는 울고 회개하면서 참된 접근의 두 개를 함께 묶어서 보여주면서 앞에 부분을 본받지 말고 뒤에 부분을 본받으라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우리들은 옳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향해서 인간적인 접근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령한 성경을 무시했다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리브가의 벳속에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서였고 하나는 야곱이었습니다. 물론 뱃속에 있을 대 이름을 지은 것은 아닙니다. 나오고 나서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미 섭리 가운데 작은아들을 축복하고 그 아들을 통하여 신앙의 대를 잇게 하고 구원의 언약의 위대한 보존자의 자리를 계승하는 것으로 이미 마음에 정하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나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냥 좋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좋으셨어도 하나님의 그 일들이 이루어지는 방법은 무리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신앙적이고 매우 훌륭했는데도 그가 하나님의 주권에 없었기 때문에 신앙이 없고 방탕한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계승된 것은 아닙니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율이 충돌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또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의 주권에 변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작은 아들에게 하나님의 신앙의 대를 잇게 하시고, 구원의 위대한 언약의 계시의 보존자가 되게 하고 싶으셨습니다. 왜 그랬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의 신앙을 통해서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런 것들을 정해 놓으셨고 그것을 이미 이삭에게도 말씀하셨고 그리고 리브가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아들을 축복하려고 그렇게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큰아들을 축복하겠다고 매달리는 이삭의 말년의 모습은 경건한 영성을 잃어버리고 세속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요컨데 그러한 아버지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에게 “작은아들을 내가 축복하였으니 너는 그렇게 알아라” 그렇게 말하는데 당시대의 풍조는 장자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어라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풍속과 하나님의 계시 사이에서 무엇을 망설입니까? 무엇을 택하여야 합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고 택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세상의 풍속에 젖어서 큰 아들을 축복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끝까지 신령한 안목을 가지고 죽는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렇게 체험이 많고, 결혼을 그렇게 믿음으로 하고 그렇게 온유하고 아브라함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인격자인 그 사람이, 늘 하나님을 묵상하길 좋아했던 그 사람이 어떻게 마지막에 그렇게 철저하게 명백하고 뚜렷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세상의 풍속을 좆아 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 무엇인가 눈에 씌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안 된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노년에 접어들수록 우리는 젊었을 때보다 더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더 많이 신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이렇게 세상의 풍조의 각질들이 덮어 씌어져서 하나님이 분별하게 하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 믿음으로 일평생을 살다가 결국은 하나님 택하지 않고 세상 택하고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만로에 접어들지 않기 위해서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성경이 하고 있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그것을 마음에 정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든 그리고 리브가든 모두 신앙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위대한 계시적인 비전을 성취해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이 이루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신앙보다 인간의 꽤가 앞선 사람들 이었습니다. 야곱이 뒤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도 바로 이런 그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가 먼저 태어나기를 희망하고 장자권을 그렇게 소망을 하였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었고 하나님의 기업에 대한 소망이었고, 요즘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것은 정죄 받을 것이 없고 오히려 칭찬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행동과 사고방식 속에는 칭찬받아야 할 것과 정죄 받아야 할 것이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본질에 대한 생각은 칭찬 받아야 할 신앙적인 생각인데 그러한 신앙적인 비전들을 이루어가는 방법은 정죄 받아야 하는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야곱이 발뒤꿈치를 잡은 사건으로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에서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산사람이나 판 사람이나 오십보백보지 않습니까?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에서도 성경에 의해서 지탄을 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그릇 식물을 위해서 장자의 직분을 팔고 후일 눈물을 흘리며 그것을 다시 얻기를 원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야곱이 그런 식으로 사취하는 것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을 헌신짝처럼 집어던지고 허겁지겁 팥죽 한 그릇을 때우는 것을 볼 때 그것은 곧 하나님과 팥죽 한 그릇과 바꾼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두고두고 에서를 불신앙의 인물로 지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 하셨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셨지만 그는 불신앙을 도구로 하여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렇게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것도 그런 맥락에서 생각 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본문이 나오는데 “하나님과 힘을 겨루었다”라고 하는 이야기와 “천사와 겨루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야곱이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과 씨름하였고”, 히브리 성경에는 ‘사람의 힘으로’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였고, 그리고 천사와 씨름하였고 그리하여 이겼다” 이렇게 나옵니다. 천사를 이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자체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는 뜻이니까 쌔게 밀어붙이는 씨름하는 이 야곱의 기도가 얼마나 강렬했으면 하나님도 꼼작 못하고 항복하고 축복하실 수밖에 없었으며, 우리도 하나님을 항복시키자. 성경의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문자적으로 맞아도 성경전체의 빛을 받아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아야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무슨 힘이 있어서, 완력이 있어서 천사를 꺾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꺾은 것이라도 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렇게 매달리기만 하면 무조건 항복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레슬링 선수들은 수시로 응답을 받겠습니까? 그러한 얼토당토 않는 해석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이것은 추천하고 칭찬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잘못 됐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한 본보기입니다. 여러 사람이 이 본문을 가지고 여러 말을 해도 그러나 제 판단으로는 이 해석이 옳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하나님과 겨루었다라고 하는데 엄밀하게 하나님이 뭐가 답답해서 사람과 씨름을 하시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하나님과 겨루었는데 그것을 구체적으로 해석을 하면은 천사와 겨룬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천사는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계시해주는 보이는 피조물이었단 말입니다. 보이는 계시의 전달자 이었다는 말입니다. 정확한 표현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전달해 알게 해주는 보이는 계시의 전달자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더불어서 싸운 것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마르아크’라 나오는 이 천사는 아주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그러한 천사입니다. 그러면서 씨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왜 이런 천사와의 씨름의 장면이 나오게 되냐 하면 바로 그것은 창세기 33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은 이런 얘기입니다. 28장에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다음에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이 지켜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밧담아람으로 가서 외삼촌의 집에서 20여년의 세월을 보낸 다음에 다시 돌아오게 되지 않습니까? 돌아오는데 문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가나안으로 돌아와야 하겠는데 가장 커다란 숙제는 축복을 훔쳐서 도망갔던 그 형이 자기가 생각해도 분노의 칼을 갈고 있을 것이 뻔 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에서가 400만의 사람을 이끌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뭐하는 사람들입니까? 웨이트리스나 호텔리스겠습니까? 야곱을 시중들기 위해서 오는 하녀들이냔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 뭐입니다? 집에서 기른 싸움꾼들입니다. 그런 종자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한판 붙어보려고, 싹 쓸어버리려고 오는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이 사람은 대범한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잔 꽤는 많지만 겁이 많고 그리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자기의 지조를 양보할 수 있는 카멜레온 같은 처세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밧담아람에서 강호의 고수인 외삼촌에게서 얼마나 많이 배웠습니다. 이 사람이 가나안에 있었을 때는 자기를 좆아 갈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도 속여 넘겼습니다. 형도 속여 넘기고, 그리고 밧단아람으로 갔더니 자기는 게임도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긴 더 대가가 지존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보니까 지존무상이입니다. 지존이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이렇게 어떻게 우리 집에서 고생만 하겠느냐? 원하는 게 무엇이냐?” “작은 딸 라헬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외삼촌 쟤를 저 주세요.” “그래. 그럼 7년을 일해라. 그러면 너에게 주마.” 얼마나 예뻤는지, 칠년을 몇 일 수일과 같이 일하면서 그렇게 일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1년 지나면은 이제 발목은 내 것이구나.’ ‘2년 지나고 나면 무릎까지 내 것이구나.’ 이러면서 그 여자를 얻을 욕심으로, 사랑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7년을 다 살고 결혼식까지 시켜줬습니다. 밤중에 결혼식을 하잖습니까? 밤중에 하룻밤 자고나서 얼마나 황홀했겠습니까? 아침에 커튼을 재켜 놓고 쳐다보니까 이것은 눈 나뿐 레아였습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가지고 외삼촌한테 가서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내가 이런 사람한테 장가가려고 7년 동안 일했는지 아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외삼촌 하는 말이 “얘야, 너네 고장에선 어땠는지 모르지만 이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단다.” ‘처음부터 얘기하지. 왜 이제 와서 얘기를 하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조금 후, 일주일만 있으면 내가 네가 그렇게 원하던 라헬을 너에게 주마. 그러면 너는 7년을 일을 더해서 외상값을 갚아라.”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진짜 라헬을 사려고 7년 일하고 괜히 사은품 하나 얻느라고 7년을 더 일했습니다. 끼어 팔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자매가 레아가 불쌍하다고 우는 이야기)
그래서 거기도 착취당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축복 해 주셔서 오기는 했지만 거기서 견비 해 진거지 않습니까? ‘확실히 사기 치는데 있어서는 가나안하고 메소포타미아는 수준이 틀리구나.’ 거기서 유학까지 해서 섭렵해가지고 왔으니 에서는 거기에 비하면 돌대가리 아니겠습니까?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로 바둑을 두자면 이기겠는데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칼 들고 들어오는데 잘라지면 끝인데 머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제는 이 엄청난 위기 앞에서는 비로소 어떤 분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 앞에 홀로 서있는데 어떤 천사가 하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가지고 오는 심부름꾼이구나 생각을 한 모양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붙잡은 것입니다. “나 좀 살려달라고” 무대포입니다. 붙잡았는데 천사를 감동을 시켜야지 갑자기 마음에 든다고 가서 형제 멱살을 붙잡고 “나랑 결혼 할 거야 안 할 거야” 이런 형극 아니냔 말입니다. 붙들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놔 달라고 그러니까 “어림없어. 축복 해 주기 전에는 못가.” 그게 뭐입니까? 신령한 발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평생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위기를 넘기던 기질에서 나온 것입니다. 전자입니다. 후자입니다. 말할 나위 없이 후자입니다. 여태까지 그런 방법으로 살아왔으니까 붙들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잘 못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그 야곱을 불쌍히 여겨서 야곱과 만나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경은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야곱을 하나님이 만나주셨다고 되어있는데, 히브리 성경에는 그가 하나님을 만났다고 되어있습니다. 마찬가지 얘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만나게 해주시지 않으면 자기가 무엇인데 주권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번역에는 문제가 없는 거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그에게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그렇게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주시고, 천사와 씨름을 한 그 과정에서 결국은 두 가지 소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형과의 문제를 해결하게 해 준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모사꾼인지 보십시오. 엄청난 가축 때와 종들과 그리고 비무장의 많은 종들과 부인들과 애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개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분대 쭉 내보내고 거리를 두고 이분대를 내어보내고 삼분대, 사분대 다 내어보내는 것입니다. 왜? 어떻게 하려고 그랬습니까? 앞이 무너지면 뒤에 있는 그 때들은 이끌고 도망가려고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유학 가서 다 배운 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보내고 마지막으로 누구도 보냅니까? 자기의 아내들과 자식까지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만 남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보면 다 보내고 외롭게 하나님 앞에 결단하려고 남았지만, 결단하려고 남으면 자기가 먼저 강 건너가서 결단하면은 안 됩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다 무너지면 나 혼자라도 살겠다는 심보 아니냐는 것입니다. 명이 부인 둘 내어 보낼 때도 누구를 앞에 보내었습니까? 사은품 먼저 보내고 정품 뒤에 보내고, 뻔 하지 않습니까? 그 자매가 정말 눈물을 흘리며 레아가 불쌍하다고 이야기 한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대열을 나눈 것입니다. 마지막 남아서 이제 하나님 앞에 결단하는 것입니다. 천사와 씨름하는 가운데 어쨋든 두 가지 소득을 얻었는데 하나는 형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셔서 녹여가지고 피 비린내 나는 살육의 보복이 있을 그 자리에서 어금막혀 울면서 형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면, 도저히 우리의 방법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해결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생각했던 그 머리로, 유학까지 갔다 왔던 그 머리고 최선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아십니까? “너희는 내 주 에서께” 에서를 이제는 주님이라고 부를 처지가 되었습니다. 어쨋든 살려만 주시면 백골남만이로소이다 같은 거지 않습니까? 그래서 머리를 조아리고 자신의 모든 피붙이들이 그렇게 부복하여 절하고 노예와 같이 비굴하게 절할지라도 ‘목숨만 붙여주기만 하면’, 어차피 하나님의 축복은 따놓은 것이니까 죽지 않은 한 결국은 하나님께서 적금 타듯이 주실 것이니까 그거 하나 움켜쥐었으니까 ‘이제는 내가 비굴하게 해서라도 뇌물을 다 바쳐서라도 화해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고 일단 자기를 죽이지만 않으면 할렐루야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머리로 거기까지밖에 더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담이 무너지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야곱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 22년 동안 고뇌하던 그 인생을 단시간에 근본적으로 해결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싶지 않느냐는 말이지 않습니까? 믿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러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두 가지를 얻었다고 그랬는데, 첫째는 그 위기를 넘긴 것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이 벧엘에서 만나주신 것입니다. 벧엘에서 만나주신 것은 28장에서 밧단아람으로 떠나다가 사다리를 타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장면을 보면서 돌담을 쌓은 그 벧엘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창세기 35장에 나오는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그러면서 가족들을 이끌고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난 그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도 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만나주시려고 이렇게 약속을 하여 주셨는데도 그는 즉시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벧엘이 바로 가나안으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속히 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해서 장시간 동안 산 것입니다. 10년 혹은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면서 34장에 나오는 디나의 강간사건을 비롯해서 그 끔찍한 환란과 비바람을 다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깨닫고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겠다. 벧엘로 올라가야 되겠다. 그래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어쨋든 하나님이 그렇게 만나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만나주셨는가?”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을 만나지 않고 해결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문제에 치어있는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그 문제에 종노릇 하면서 살아온 상황에서 하나님 안 만나면 그 문제가 해결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아직까지도 뭔가 해결될 수 있다고 눈을 반짝 반짝 하면서 밤마다 유학도 안한 머리를 자꾸만 돌려보려고 해봐야 야곱을 밑도는 작품밖에 나오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여전히 그렇게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하고 인생의 난제를 풀어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완전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평범한 그리스도인에 불구한데도 저도 이렇게 보면서 지체들 중에서 믿음으로 안 살고 머리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 보면 슬픕니다. 그런데 완전하신 하나님이 보실 때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믿음으로 살게 하려고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하나님 자신이심을 의심 없이 우리에게 수없이 보여주시고 체험하게 하시고 말씀을 통해서 수시로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건만 누구를 믿고 삽니까? 소망이 누구입니까? 여러분들은 누구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까?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 세상이 변하든지 그리고 물결이 흘러가는 것처럼 인간의 풍조가 변하고 교회의 풍조가 변해도 나는 믿음으로 살 것이다 이러한 결단이 서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때 이러한 결단을 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분명히 듣고 수첩에 적어 놓으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결단을 따라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해결되기를 원해도 하나님은 왠지 뵙기 싫은 그런 이상한 마음 아닙니까? “직접 찾아오시지는 마시고 그저 저도 모르게 문제만 해결 해 주시고 하나님 집으로 돌아가시옵소서.”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접근이 야곱과 같은 이러한 인간적이고 사위적인 접근을 싫어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바로 무엇입니까? 신실하고 거룩한 자신 하나님이, 신실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이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은 발뒤꿈치를 잡거나 팥죽을 팔아먹거나 혹은 천사와 씨름을 해서 레슬링을 해서 그 천사를 넘어뜨린 것이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아니라 옛사람의 방식대로 신령한 하나님께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위적인 거짓으로 가득 찬 이러한 신앙의 접근 방식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것들을 벗어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것들을 내어버리기 전에는 우리가 보다 신령한 신앙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우는 것입니까? 우리는 먼저 배우는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야곱을 에워싸고 있는 인생의 문제는 많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많았지만은 해결의 방법은 수천가지 이었지만, 그러나 궁극적인 방법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고뇌하고 괴로워하는 문제, 문제 앞에 설 때마다 한없이 여러분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그 문제에 대한 정답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 자신입니다. 왜냐하면 출제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 서는 것, 그 하나님께 묻는 것, 그거보다 더 분명한 접근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발뒤꿈치나 잡고 인간의 활력으로 천사나 붙들어 넘어뜨려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하는 간절함은 있지만 다분히 육적이고 세상적인 그러한 접근으로 신령한 세계에 나아오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런 것들이 그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확신으로 부풀리기 시작하면 그의 신앙생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고, 경건을 위한 모든 열심히 우리를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 앞에 거짓과 사위를 내어버리고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다가가서 여러분의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인 하나님 아버지를 뵈옵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사람을 벧엘에서 그러한 위대한 만남을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 입니까? 왜 그랬습니까? 그것은 바로 정답이 그 뒷부분에 나오는데 뭐라고 나옵니까?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고 울며 간구하였으며” ‘이기고’와 ‘울며 사이’에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이 무슨 사건입니까? 천사를 이겼는데 천사가 자기의 힘으로 야곱을 감당하지 못하니까 야곱의 환도 뼈를 친 것입니다. 환도 뼈는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골반 윗부분이입니다. 허리 쪽이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성분들이 아이를 낳고 나서 잘못 나으면 환도가 시리다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허리 쪽 부분이입니다. 그리고 허리는 이스라엘 관념에서 보면 자식들이 태어나는 힘의 근원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역시 산 남자가 허리가 강하지 못하면 아무 구실도 못하는 거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천사가 거기를 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게 하셔서 친 거지 않습니까? 이게 뭐냐 면 징계입니다. 무엇을 징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때린 것이 말이 안 됩니다. 넘어졌으면 “네가 나를 이겼으니 참 잘했도다” 그리고 상장을 주고 끝내야지 이기다가 도저히 안 되니까 한방 쳐서 불구같이 만들어 버리느냐 이것입니다. 다리를 절룩거리게 만들어 버리냐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징계입니다. 그가 거듭나지 못한 열심히 하나님에 대한 신령하게 접근하지 아니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옛 기질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에 접근하려고 했던 그러한 형의 뒤꿈치나 잡고 팥죽이나 팔아먹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천사마저 걲어가지고 무언가 자기의 방법대로 자기의 요구하는 것을 얻어 보려고 하는 유학 가서 배워온 그러한 신앙의 태도에 대한 징계였던 것입니다. 친 것입니다. 어떤일 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긴 것입니다. 진 것입니다. 그러고도 이겼다고 성경에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은 이겼다는 의미가 육체의 의미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환도 뼈를 얻어맞아서 불구자가 되었는데 어떻게 씨름을 해서 이기겠습니까? 야곱이 지구를 지키는 로봇입니다. 말이 안 되는 거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거기서 거꾸러진 것입니다. 그때 꽝하고 얻어맞으면서 펄썩 주저앉았겠지 않습니까? 환도를 그것도 사람이 아니라 천사가 내리쳤는데 정신이 번쩍 났을 것입니다. 정신이 번쩍 나면서 주저앉으면서 그때에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는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구나.’ 이제껏 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약속을 받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계시의 보존자와 언약의 수호자로서의 하나님의 세우신 족속의 족장이 되는 그 영광스러움의 특권에 대한 신앙적인 갈망은 있었지만, 그것을 지극히 혈육적인, 비 신앙적인 방법으로 거짓과 사위로 그것들을 쟁취하려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의 방법을 호소하였던 인간적인 모든 삶과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모든 신앙생활에 대한 뼈저린 후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약복강가에서 한없이 우는 것입니다. 야곱이, 머리 굴리는 사람들이 원래 눈물이 없습니다. 머리로 굴리는데 거기로 눈물이 다 들어가서 그러는지, 거기 기름질 칠하느라고 바빠서 그러는지 눈으로 나올 눈물이 없습니다. 대개 눈물이 많은 사람들 보면 신앙의 세계에서 순수한데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눈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어떠한 삶을 살던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순간만큼은 연극배우가 아니라 진실일 거 아닙니까? 연극배우들도 눈물 흘릴 때는 진실이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우느냐고 그랬더니 울어야 할 순간이 되면 비명에 돌아가신 교통사고가 나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그렇게 갑자기 잘 나는 모양입니다. 눈물이 핑 돈다는 것입니다. 영화 장면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우는데 눈물 흘리는 여자의 마음속에는 교통사로로 죽은 아버지 생각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어쨌든 눈물은 그래서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눈물 흘리던 시간에 머리 굴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정말 어떤 의미에서는 생애 최초로 그 심령의 덩어리들이 무너지면서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울었다 그랬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는 이 말은 소리를 내어서 우는 말입니다. 크게 곡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야곱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거지 않습니까? 머리 굴리던 사람이 이 천사가 내 허리를 쳤는데 무엇을 먹으면 나을까 이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순간에 영적인 세계에 불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아! 이게 아니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그 인간의 재능과 사람의 머리, 모사 하나로 그렇게 살아온 똘똘 뭉쳐진 사업가이고 사기꾼이고 하여튼 못된 대명사는 다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이 유학 가서 배운 모사와 사기도 모두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하나님 앞에 주저앉으면서 크게 울면서 통곡하는 것입니다. 이게 회개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어떤 의미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만 만에 하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을 해서 만약에 이 사람이 하나님의 천사를 이긴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 하나님의 천사를 이기게 만들고 나아가서는 이름처럼 하나님을 이기게 만든 것은 무엇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께 감동을 들은 것입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야곱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뼈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깨달음이 있는 절절한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의 시선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여 그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징벌 앞에서 울며 통곡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잡을 수 없는 그 믿음을 야곱이 하나님께 보여드린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십시오. 본받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천사와 붙들고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얻어맞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서 통곡하는 그 장면부터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동안 자신의 인생을 버텨왔던 모든 교만과 인간의 방법과 그리고 오늘 호세아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의 거짓과 그리고 궤율, 속임수로 가득 찬 신앙생활을 어떤 의미에서는 옛 야곱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호세아는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것만 배우지 말고 그 야곱이 거꾸러져서 그렇게 통회자복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렸던 그 신앙은 배우지 않고 왜 거듭나지 못한 야곱의 속임수와 거짓만은 너희가 배우고 그 조상에게서 그것만은 너희들이 가져오느냐? 그러면서 야곱에게 배운 너희들의 그러한 면이 아니라 이런 면도 있었다고 하는 사실, 그래서 그러한 면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축복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호세아 선지자가 그렇게 애타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회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경험으로는 머리좋은 사람들 회개 안하고, 머리 아주 나쁜 사람들 회개 안합니다.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뭐냐 하면 이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 회개를 확실하게 하고 나면은 머리 나쁜 사람들은 물불 안 가리고 충성을 하고 머리좋은 사람들은 견고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다. 바울이 된 사울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머리 좋은 사람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깊이 회개하고 나니까 그 머리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구나.’ 그러면서 이제 진리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탐구력이 있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머리가 그렇게 좋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고 그러니까 우리는 양쪽 다 조심해야 합니다. 참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회개시킨 것입니다. 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시는 장자권에 대한 처절한 열망이 있었잖습니까? 그게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들을 성취해 가는 방법까지도 거듭나서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가야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을 때에 야곱의 성품이 비로소 거룩함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정말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서서, 말하자면 바로가 나이가 많아 보이니까 “아이고 형, 나이가 몇이요. 내 나이가 일백 삼십이요. 조상들의 수에는 미치지 못하나 그러나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그러면서 바로를 축복했습니다. 그때는 이제 나무로 말하자면 거목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런 것 가지고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사는 거룩하고 웅장한 사람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그렇게 고쳐놓으신 것입니다.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짐승은 나이가 먹으면 이빨도 빠지고 마지막에는 가죽 빼앗기 위해서 사람들이 총으로 쏘아서 죽입니다. 추해집니다. 그런데 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아주 장엄해지고 위엄이 있어집니다. 야곱이 이러한 깊은 회개를 통해서 그렇게 변해간 것입니다. 거룩함의 길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야곱이 그 모든 인간의 지혜로 살았던 날들을 통곡과 눈물로 떠내려 보내면서 ‘이제는 내가 이 방법대로 살지 않으리라’ 라고 결심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자 결심할 때 한 번의 결심이 모두 그를 거룩하게 만들어 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징거가 34장에 또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를 계기로 해서 하나님 앞에 크게 거꾸러지면서 자신의 인생을 움직이는 거룩한 원동력을 자신의 꾀에서 찾는 것에 있어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오늘도 여러분 야곱처럼 여러분들의 방법과 재주를 의지해서 그렇게 머리고 살아왔기 때문에 가슴속에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머리로는 그려도 가슴에는 느껴지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이기게 만든 것은 그의 달라붙는 인간적인 끈덕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울부짖는 회개였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자기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바꾸고야만 것입니다. 여러분, 회개만큼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잘못했다고 하나님 앞에 흐느끼면서 용서해 달라고 울부짖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을 보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찹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그쳤던 은혜를 그들에게 베푸시고 무엇이든지 그 자녀들의 인생에 도움 되는 것을 하나님은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인생의 위기를 만나거든 이렇게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서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드리는 신앙생활로 나아가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것 하나님을 보고 울며 간구하였다고 하였어요. 그는 자기가 살았던 지난 모든 날들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면서 주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바랬다는 것입니다. 가까이는 당장 눈앞에 닥쳐오는 에서와의 대면의 위기를 넘겨주시기를 구했고, 길게는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의 인간적인 꽤와 지혜로 하나님이 주신 이 유업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일들이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입증 해 주셨는데 이제 무엇으로 내가 무엇으로 이 꿈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나는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이 내게 이러한 놀라운 약속을 주셨지만 나에게 천사도 부러워하는 거룩한 소명을 주셨지만 이 소명을 따라서 사는 일이 이제는 내게 있지 않고 은혜주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고 회개하는 가운데 울부짖으며 하나님 앞에 간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주저앉아서 통회하였고 그는 회개하였으며 회개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향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대로 살게 해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자신을 지키는 모든 인간적인 방법을 반납하고 나니까 하나님의 손길의 보호 없이는 얍복강 조차도 건널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이 그에게 깊이 파고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그의 부르짖음은 처절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문은 열렸습니다. 여러분, 믿는 것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다고 생각하는 그 믿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 똑똑한 머리와 그 아버지와 형을 뺨치는 묘사를 믿고 의지했지만 그러나 결국은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활용하면서 살아가는 날 동안에 평안이 없고 수많은 원수들을 자기의 주위에 만드는 삶 이상을 살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업과 축복을 한 몸에 받았지만 그는 언제나 이 세상에서 저주받는 자처럼 쫓겨 다니고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고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족들을 그리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나그네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그가 신뢰하던 인간의 방법과 자기 나름대로의 사람의 지혜가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주었습니까? 머리 굴린 사람의 종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는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하며 자기가 이제껏 살았던 인생의 모든 방편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반납했습니다. 반납하고 나니까 이제는 자기를 지킬 것이 자기에게 없었습니다. 주님이 지키시면 살고 주님이 버리시면 죽는 것입니다. 이제 당장 날이 밝으면 그 일은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얍복강 가에서 기도할 때 그는 마치 배수진을 친 사람처럼 그렇게 울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고 그리고 이제는 주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울고 매달렸습니다. 새벽이 밝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여셨고, 그 인생의 고통스러움에 대한 해결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는 많은 고뇌와 걱정과 고통 속에서도 해결 받을 수 없었던 그 인생의 문제가 하늘 문이 열리자 해결되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죄가 아무리 오래 되었기로 이렇게 오래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위기가 아무리 절박할 지라도 이렇게 날이 새면 생명을 보장받을 수 없을 정도로 이렇게 위기에 있습니까? 이런 위기도 건져주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만약에 얍복 강가에 서기만 한다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통회하는 마음으로 이제껏 인간의 지혜로 머리 굴리며 살아왔던 모든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것 붙들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내 생명을 거두시더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두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부르짖을 때 어찌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간구를 외면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오늘 이러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 사경회의 결론입니다.
6. 벧엘에서 만나주신 하나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호 12:4)
지난 금요일 시간에 우리가 한 말씀은 야곱이 그렇게 천사와 힘을 겨루고 그리고 그를 이기려고 한 그 사건은 결코 형의 발뒤꿈치를 잡은 것과 함께 칭찬받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에게 주신 비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지만은 그것을 이루어가는 방법이 인간으로부터 온 방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참 슬퍼하셨다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그가 하나님 앞에 두 가지 일을 함으로서 하나님이 그 부족하고 허물 많은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게 해주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그렇게 허물이 많지만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에 하나님을 만났던 것과 같이 지금 이스라엘의 죄악이 극도에 달했고 그리고 하나님을 떠난 불신앙이 심히 깊어졌지만, 그러나 지금이라도 야곱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민족적인 죄를 회개하고 나오기만 하면, 기도하기만하면 하나님께서 불타는 긍휼로서 임박한 진노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주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다는 것 입니다. 자기가 깨뜨려진 그 속에서 울려 퍼지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지, 자신은 도무지 깨뜨려지지 않으면서 말로만 늘어놓는 그러한 기도가 하나님에게는 전혀 호소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리는 수많은 기도가 사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개봉되지도 않은 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진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수없이 집으로 날라 오는 우편물을 대부분이 개봉도 하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는 마음에서 울려나오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이긴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의 머리와 재능을 의지하면서, 잔재주를 의지하면서 그렇게 살아온 것이 하나님을 이기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서 깊이 깨뜨려진 진정한 참회, 지난날에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고 살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성취해 보려고 했던 지극히 사악한 꾀를 의지하며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철저히 회개하자마자 그의 기도는 영원 속에 울려나오는 울림이 되었고 그리고 그 기도는 하나님에게 감화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야곱의 회개와 간구하는 기도에 감동을 받으시고 그에게 다시 한 번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고 어디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혔고 왜 나의 영혼이 은혜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얼굴을 피하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의 잘못된 경향들을 갖게 되었는지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진실한 기도와 간구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간구,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마치 브레이크가 망가져서 언덕을 향하여 내리구르는 자동차를 제동하게 해주는 것과 같은 힘이 있습니다. 굴러 떨어지기만 하면은 폭발을 해버리고 한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는 그러한 위기 가운데서 제동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예화) 저는 어렸을 때 시골에 방학이면 곧 잘 갔습니다. 한번만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갔다 오면, 특히 겨울에는 며칠씩 가위를 하고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팔도 운전수들 가운데 제일 와일드한 운저사가 옛날부터 유명했습니다. 길이라는 게 산이 있고 강이 있으면 길을 산 쪽으로 기울어지게 파야 되잖습니까? 산에도 물이 내려오고 길에서도 물이 흘러 들어가서 산과 도로가 맞닿는 곳에 하수도를 파서 물을 빼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데 돈이 드니까 강 쪽으로 길을 비스듬하게 깎는 것이었습니다. 산에서 물이 내려오면 바로 길바닥에서 강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차가 달릴 때 커브를 오른쪽으로 틀면 원심력에 의해서 밀려납니다. 그러니까 강에 잘 떨어지는 것입니다. 올 겨울에는 강원도 가는 버스가 하나도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면 그것은 기적일 정도로 그렇게 강에 잘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 번도 굴러보지는 않았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언젠가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머리가 쭉 찢어지셨습니다. 피를 닦았는데 할머니가 놀라시며 “얘야,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아휴, 어머니 저 죽을 뻔 했어요.” 차가 굴러서 아버지가 죽을 뻔한 이야기-
차가 소나무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 막가는 인생의 제동장치가 뭐냐 하면 그게 회개입니다. 유서 깊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생하게 들려주시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스라엘아, 너희가 정말 번영하고 있고 잘 살고 있다고 그렇게 큰소리 뻥뻥 치는데 너희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아느냐? 너희 조상 야곱이 창세기 34장에서 당한 상황, 그것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33장까지는 회개하고 잘 나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형과의 위기도 극복하고 잘 넘어갔습니다. 그러다가 34장에 와서 끝까지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고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아니하니까 거기에서 자기의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뼈아픈 사건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차라리 자기가 죽어버리는 게 낳지 않겠습니까? 그 가슴을 에는 끔찍한 사건을 만나고 거기서도 회개안하니까 계속 시련의 엑셀을 하나님이 더 밟으셔서, 낭떠러지 가까이 가도 회개를 안 하니까 낭떠러지로 밀어서 벽에 데롱데롱 매달려서 이제는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을 찾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회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과 망가진 관계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땜질이나 하면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야곱이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여 결국은 이처럼 커다란 시련을 창세기 34자에서 만나게 된 것같이 너희를 향해서도 그런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야곱이 세겜에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무역하고 돈 버는 재미를 가지고 거기에 팔려서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길로 걸어갔듯이 너희도 이제 나라가 강성하고 돈 좀 번다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는데 야곱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심판의 위협에 놓여있던 것처럼, 너희들도 똑 같은 상황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릇된 길로 걸어가면 우리의 인생을 고치시기 위해서 회개시키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벼랑 끝에까지 굴러갔을 때 회개는 벼랑위에서 그 버스가 만난 소나무와 같은 것입니다. 버스가 구르면 무게가 엄청나니까 한 바퀴만 구르면 가속도가 생깁니다. 그래서 힘차게 굴러갑니다. 굴러 떨어지면 겨울이니까 밑은 강바닥입니다. 그 당시 강원도 얼음이 20 ~ 30㎝로 얼었습니다. 들어가면 사람들이 나오는 구멍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나무 하나가 살려준 것입니다. 회개는 이러한 힘이 있습니다. 정신없이 하나님을 떠나서 벼랑을 향해 달려가다가 회개하면 제동장치가 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멈추게끔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빠져나와서 이제 그 위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입니다. 만약에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 버스가 소나무를 만나지 않은 것과 똑같지 않습니까? 굴러서 물속으로 다이빙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자신이 신앙생활 하면서 이러한 위기를 순간순간 자주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가 한번 씩이라도 신앙이 정신을 차릴 때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 하는 인생의 붉은 신호등을 느낄 때 없습니까? 그때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회개와 기도라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거기서 돌이킬 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용서하시고 다시 만나주신 것처럼 이스라엘을 그러한 회개와 간구에로 부르시며 그들에게 사죄를 약속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그렇게 당신 앞으로 불러내고 계신 것입니다. 언제나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벧엘에서 그를 만나주셨다 말씀하십니다. 히브리어 성경의 문맥에 따라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그가 거기서 하나님을 만났고”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이나 하나님이 만나게 해주셔서 만난 것이나 의미에 있어서는 대동소이 합니다. 그럼 그 벧엘에서 하나님과 만난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벧엘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서 만났을 때 크게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의미에 대해서 중요한 한 가지를 다음시간에 말씀 드리려고 하는데 하나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만나주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만난다음에 반드시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실 때 사용하시는 아주 보편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제일먼저 나타나시면 당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먼저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누구인지 밝히시는 그 표현은 당시 하나님이 만나는 사람이 놓여있는 신앙적인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자기소개와 그러한 소개를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 앞에 서있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상황을 연결시켜서 성경을 보면 그냥 읽을 때 놓치기 쉬운 아주 중요한 통찰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나는 너희의 거룩한 자니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생각하시거나, 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현재적인 하나님의 소원을 나타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구해내기 위해서 커다란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과 거기를 쳐들어온 여러 가지 연합군들과의 큰 싸움에 휘말립니다. 그러면서 롯을 구해내고도 무엇인가 두려워서 떨고 있을 그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무엇을 아브라함이 고민하고 있는지를 아십니다. 보복 받을까봐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방패니라.”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상황하고 얼마나 맞습니까? 그런 다음에 또 잘못된 경우이긴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사라의 말을 듣고 그리고 이스마일을 낳습니다. 그 후 13년이란 긴 세월동안 하나님과의 만남이 단절되고 99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나는 방패요”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가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서 실패한 것은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신약으로 가도 계속 통합니다. 계시록으로 넘어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에 영적인 상황을 진단하고 그들을 판단하시기에 앞서서 각 교회마다 당신이 누구 이신지를 소개 해 주십니다. 그렇게 소개해 주시는 모습 하나 하나가 바로 그 교회의 영적인 상황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논리로 볼 때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말씀해주신 사건은 야곱이 왜 그렇게 주님이 주신 비전을 믿음으로 이루도록 살아가지 못하고 인간의 꽤와 잔머리를 굴리며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한마디로 쐐기를 박으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까? 자기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은 믿었지만 그 꿈을 이루어 가시는데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이것을 쇠로 만든 도장을 시뻘겋게 달구어서 야곱의 가슴에 지지는 것처럼 그렇게 벧엘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마음속에 당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지져놓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거기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개명하신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사실 첫 번째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32장에서도 일어납니다. 32장에서 일어났는데 34장에서 다시 일어난 것은 다시 갱신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10년 내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그 이름을 갱신하여서 자기가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뭘 의미합니까? 왜 하나님이 이미 고쳐주신 이름을 다시 한 번 불러서 “네가 바로 이스라엘”이라고 다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를 얍복 강가에서 회개하는 그를 축복하시고 이름을 고쳐 주셨는데 그가 그 이름에 어울리는 삶을 살지 못하면서 10년 내지 20년의 세월을 보낸 것입니다.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 두 사건이 벧엘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소개하고 계시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지금 현재 호세아의 예언을 듣고 있는 1차적인 중요한 청중인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지 그것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이 사건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며 기도하던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이스라엘에게 소개함으로 먼저 무엇을 보여 주냐면, 기도자의 삶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야곱의 깊은 통회와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셔서 야곱에게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만나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야곱이 두 가지 축복을 받는데 하나는 분명하게 형과의 위기를 넘긴 것이고 그리고 벧엘에서 더 큰 만남에 대한 약속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약속을 받게 되었는데 야곱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거기에서 환도 뼈를 상하면서 그때 거꾸러져서 중심에서 통회하며 기도합니다. 누가 그 회개를 거짓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순수하지 못하다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회개는 순수했고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알고 나서 생전 처음으로 이렇게 심령이 무너진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차서, 인간의 머리 굴리는 반짝거리던 눈에 눈물이 쏟아 지기 시작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울다’라는 말은 이렇게 울면서 ‘통곡하다’라는 뜻입니다.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니, 그 기도가 얼마나 진지하고 올바른 기도였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32장에서 그러한 기도를 드리고 33장에서 은혜 충만하였던 사람이 34장에서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삽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계시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하나님이 수많은 아름다운 약속들을 그들에게 주셨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삶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길로 가면 한때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는 마음으로 통회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에 합한 삶을 계속 살아가지 아니하면 그 기도가 한번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면서 기도하였던 통회하는 기도가 우리의 인생의 영원한 안전보장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 늘 옛날에 엄청나게 회개한 것, 늘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 그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옛날에 회개에 대한 향수에 젖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오늘 나의 삶 자체가 지난날의 회개에 대한 고백이고 어떤 의미에서 오늘날 하나님 앞에 써내려가는 삶의 고백은 지금 이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한 것의 종지부가 아니라 연속되는 것임을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삶이 회개에 동반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들을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러한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도 어느 정도는 거기에 해당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할 때 늘 진심으로 돌아왔는데, 삶이 그 앞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들, 삶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고 그리고 또 후회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회개하고는 다시 옛날의 죄로 돌아가거나 나태로 다시 돌아가는, 눈물이 흐르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눈물이 그치면 하나님도 퇴장시키는 이런 삶이 동반되지 않는 기도, 삶으로 고백으로 이어지지 않는 그러한 회개의 기도는 그것이 아무리 진실 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만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오늘 야곱에게 있어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통해서 이점을 지적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의 조상 야곱이 그렇게 진심으로 내 앞에 기도했고 또 너희들 중에 어떤 사람이 가끔은 진심으로 나를 찾는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이 만약 삶으로서 그 기도에 대해 응답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의 기도에 대해서 삶으로 책임지지 아니한다면 내가 보기에는 너희의 기도가 정서적으로는 진실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기도가 정말 하나님 앞에 받을만한 향기로운 기도라고 나는 인정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한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언젠가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고 올바른 관계로 돌아오겠다고 울며 눈물로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린 잊혀 지지 않는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오늘 그 기도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그 기도를 따라가는 삶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삶으로 아멘하지 아니하면 아직 아멘이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이스라엘에게 야곱의 사건을 통하여 이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너희의 입술로 나를 부르고 한때는 너희들이 나를 진심으로 찾는 때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너희는 삶으로 너희 기도에 합한 삶을 살지 아니하고 삶으로 너희들을 향한 약속에 부합하지 않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내 마음속에 긍휼이 불타고 있을 지라도 그리고 내가 너희를 앗수르에서 애굽에서 새 같이 비둘기 같이 날아오게 하고 싶을 지라도 가장 좋은 것을 너희에게 주고 싶을 지라도 너희는 그것을 받을 수 없다. 너희가 진심으로 참회하는데 무슨 비용이 드느냐? 내가 너희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회손 당한 나의 영광을 다시금 보상 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지나간 날 너희의 불순종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손해 본 내 나라를 보상 해 놓으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너희에게 손해 배상을 청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너희들이 앞으로의 모든 관계를 위해서 전심으로 마음을 돌이키고 나에게 돌아오라.” 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돌아오고 있지 않으니 내 마음에 긍휼이 불붙어도 이 사랑이 짝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옳지 않으니,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기도할때마다 눈물이 흐르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녹아지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기도한 사람이 그 눈물 섞인 마음의 각오를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그 기도의 열매을 맺게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을 여러분들은 믿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기도해도 왠지 그 기도의 능력이 더 깊어지지 않는 한계를 경험하고 계시는 분들은 이제 기도가 아니라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세겜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약속들을 저버리고 그들과 함께 돈벌고 장사하는 재미에 미쳐서 그 귀한 세월을 다 보낸 야곱과 같이 혹시 이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 여러분,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삶이 하나님이 슬퍼하는 자리에 있으면 눈물의 기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삶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v,게 하는 자리에 있으면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억누를 수 없는 눈물을 가지고 주 앞에 매달린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서있는 그 자리를 하나님이 싫어하시는데 거기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네가 나를 향하여서 충심으로 기도할 수 있다면 삶으로 너는 그 자리에서 떠나 내 기뻐하는 자리로 돌아오라. 네가 지금 눈물을 흘리며 내 앞에 참회한다고 하지만 그것은 내앞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감정에 충실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두 번째로 벧엘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이 사건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는 첫째는 기도자의 삶이고 두 번째는 기도자에 대해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 그러한 불순종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짧게는 10년 길면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즈음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울며 간구할 때에 기도를 들으셔서 그를 벧엘에서 만나주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응답하신 일들은 더딜지라도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순종이 그 성취를 연기시키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불신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신 내용들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비록 야곱이 하나님 앞에 잠시 범죄하며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범죄와 불순종을 깨닫고 나니까 범죄와 불순종도 하나님이 주신 그 축복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울며 회개하고 자신이 놓여있는 잘못된 자리를 깊이 깨닫고 벧엘로 올라가자 하나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약복강가에서 그가 울면서 하나님 앞에 통회할 때에 베풀어 주시려고 하였던 약속하셨던 축복을 하나님께서는 여지없이 그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이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시지 않는 무언가를 풀어주고 계시지 아니하는 과거의 일들에 연연해하면서 쩨쩨한 마음으로 하나님 원망하고 믿지 못하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현재에 충실하신 분입니다. 과거에 야곱이 어떠한 죄를 지었고 어떠한 불순종 가운데 살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셨다고 할지라도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서고자하는 변화가 가져다 주는 기쁨으로 모든 과거의 쓰디쓴 기억은 하나님의 마음에서 잊혀 진바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상담을 하면 커다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무슨 혼란이냐 하면 오늘 자신의 영적인 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남으로 위기를 만난 것이 자꾸 옛날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중요하고 커다란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커다란 범죄가 있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눈물로 회개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뭐가 또 안 되면 다시 또 거기로 돌아가요. 또 그것 때문일 것이다. 또 회개해요. 아주 사단이 기가 막힌 송사거리를 붙잡은 것입니다. 속삭이는 것입니다. “요즘 뭐가 되는 일이 없지.” “글쎄 말이야.” “너 십몇 년 전에 일어난 그 범죄, 너 그때 하나님 앞에 잘못한 거 그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거야.” “회개했는데.” “회개했어도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또 커졌잖아.” 이런 식으로 계속 잡아당겨서 오금을 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잘 하다가 이제는 회개하는 것도 포기합니다. 왜? 회개해야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고 심지어는 그때에 하나님이 나를 용서 해 주셨다고 하는 확신까지 있었는데 뭐가 잘 안풀리니까 “그게 아닌가봐.” 다시 옛날로 또 돌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뭐가 잘나가는 것 같다가도 그거하나 잡아당기면 꼼작도 못하고 다시 무릎을 꿇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빠져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커다란 맹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현재에 대해서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현재입니다. 과거에 잘못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통회하고 고백하고 용서까지 체험을 했으면 거기에 부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한 것이 오늘의 문제이지 옛날에 일어난 것 어떻게 합니까?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그랬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일어났습니다. 당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당했습니다. 끝났습니다. 옛날의 일인데 어떡합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때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쟁취하려고 했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너무나 간절한 마음을 가진 나머지 형을 팥죽으로 속이고 발뒤꿈치를 잡고 심지어 건방지게 천사를 꺾어서 항복시켜 보려고 완력으로 매달렸단 말이지 않습니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랬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울면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뭔가 잘못된 삶이 될 풀이 되고 있다면 그것이 옛날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이렇게 옛날로 자꾸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충실한 신앙의 양심 때문 이라고 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해있는 만족스럽지 못하고 고통스러운 신앙생활이나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탓으로 돌려보려고 하는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그런 심리가 나왔는지 아십니까? 이런 얘기입니다. 만약에 이전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할 것 같으면 오늘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모든 어려움들은 모두 내 몫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로 자꾸 핑계를 돌리게 되면 결국은 나는 잘 하고 싶은데 하나님이 용서를 안 해 주셔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렇게 약복강가에서 통곡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주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고 그의 이름까지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는데 하나님이 지금 또 창세기 35장에 나타나셔서 34장에 시련을 주시면서 “야곱이 만약에 하나님, 내가 왜 이 뼈 아픈 시련을 당해야 합니까?” 하면은 “너, 옛날에 형 발뒤꿈치 잡았잖아.” 이런 얘기 또 하시는 것입니까? “너, 팥죽 한 그릇에 팔았잖아.” “그거, 옛날에 약복강가에서 회개했잖아요.” “야, 너는 그거 잊어버려도 나는 가슴깊이 새겨두고 너 천국 올 때까지....” 하나님이 그렇게 대하셨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옛날 핑계를 대면서 무기력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지금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사연을 자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가면 또다시 과거가 되겠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어리석고 바보와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다시 또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갔던 베드로를 새벽시간에 주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 이놈 나 버리고 도망갔지. 그리하고도 허우적거리면서 네가 헤엄쳐서 와. 너도 염통에 털이라도 났냐?” 그렇게 대면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베드로가 옛날에, 옛날에 세 번 부인하고 간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을 사랑하고 있느냐? 이었습니다. “do you love me?” “네가 지금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여기서도 같은 것입니다. 불신앙과 죄악으로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어기며 산 그 불순종이 34장의 위기를 만들어 낸 것이지 뱃속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팥죽 팔아먹고 천사와 씨름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복강가에서 다 용서받고 해결되었습니다.
여러분, 눈을 번쩍 뜨십시오. 그리고 속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여러분에게 밝히 말하십니다. “너의 모든 문제는 내가 용서해준 옛 과거 때문이 아니다. 지금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분명하게 들려오는 광야의 울부짖는, 사자의 울부짖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거기에 부합하며 돌이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아가면 과거가 더 이상 여러분들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고든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통찰들을 받고 있습니다. 아주 잘 나가는 목회자였고 훌륭한 신학교의 선생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는 영적인 지도자였는데 그만 결혼사역을 저버리고 어느 여자와 간음하고 타락하였습니다. 자기 책에서 그대로 적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어떻게 그 사망가운데서 벗어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적어 내려가면서 충고 해 주고 있습니다. 타락한지 2년인가 3년이 되는 기간 동안 그는 사람들과 인연을 끊고 깊은 먼 곳으로 가서 아내와 함께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신의 모든 실패를 하나님 앞에 자인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심으로 회복되고 돌아온 그에게 평범한 질문과 대답을 합니다. 나처럼 이렇게 간음하고 완전히 무너진 세계 속에서 모두 날려버린 사람, 이런 사람도 회복될 수 있겠느냐? 거기에 대한 자신의 대답은 분명하게 YES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전의 자신이 범죄 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지었던 범죄가 회복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 앞에 온당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회복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이 깊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갔지만, 하나님은 야곱이 과거의 잘못에 메이지 아니하고 현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온 모습들을 그대로 가지고 나아가면서 다시 한 번 용서를 빌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받아주시고 그에게 응답도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벧엘에서 만날 위대한 약속을 그에게 주셨고 만남을 통해서 당신의 위대한 계시를 주시고자 하시는 꿈이 있었지만 그러나 야곱이 자신이 진실한 위치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까지는 하나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하나님은 더디 역사하셔도 때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우리의 불순종과 죄악 때문에 막히고 방해받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러나 그가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과거에 메이지 아니하고 현재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요구 앞에 서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교훈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마음을 다 바쳐서 기도하고 응답받는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은 커다란 비밀스런 응답을 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하던 17전에 받은 응답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면서 어떤 의미에서는 17년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시련이 오거나 어렵거나 혹은 내 자신의 허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힘을 잃어버릴 때 나는 언제나 그때 의심할 수 없이 나에게 들려주시던 하나님의 선명한 응답을 기억하며 그 응답은 하나님이 어떻게 저를 들어서 사용하실 지를 보여주는 응답이었습니다. 더디 되어도 반드시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은 이루어 질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제게는 소망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 후로 하나님께서 그 응답의 연장이 되는 것을 말씀 해 주신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기다립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속히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는 부지런히 불순종을 치우고 내 자신을 정결케 하고 죄악으로부터 멀어진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되겠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언제나 상기시킵니다. 여러분들도 살아오면서 무엇인가 금방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그러나 언젠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가정에 관해서, 개인의 영적인 회복에 관해서, 혹은 교회나, 공동체나, 혹은 여러분들의 사업이나 심지어는 직장이나, 혹은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이웃 지체들을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 응답이 더딘 것 같지만 인간들이 자신의 불순종을 제거하고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당신이 응답하신 그 일들을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님이 비록 이스라엘이 지금은 범죄하고 불순종하여 자기의 소견의 옳은 길로 가고 있지만 이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통회하면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게 될 날을 기다리시면서 이들에게 이러한 야곱을 통하여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신실한 응답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한 번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과거를 버리고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세 번째 또 한 가지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건이 보여주는 것은 기도자의 본분을 일깨워 줍니다. 벧엘에서 야곱은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고 거기에서 야곱은 자신의 이름을 이스라엘 이라고 개명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렇게 이름을 이스라엘 이라고 개명하여 준 사건은 이미 32장에 있었던 사건을 다시 한 번 반복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네 이름이 이스라엘이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 그것이 야곱에게 있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부끄러운 사실이었을까요? 그는 33장 마지막에서 세겜에 잠시 머물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장막을 쳤을 때에 제일먼저 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는 말하기를 “엘 엘로헤이 이스라엘” 이라고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자기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32장의 감동을 가슴에 세기면서 자기는 이제 형의 발뒤꿈치나 잡고 사기나 치고 하나님이 주신 꿈들을 사기적인 방법으로 이루어가는 야곱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갈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통회와 기도로 하나님께 감동을 주어 하나님을 이긴 사람, 이스라엘로 살아가야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겼던 것입니다. 현재적으로 그러한 감동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감동은 식었고 그의 삶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벧엘의 만남을 통해서 야곱에게 일깨워 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하게 살아야 할 본분이 있음을 깨닫게 하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벧엘의 사건은 통해서 이러한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던져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아, 너희는 바로 지금 하나님 앞에 타락하고 내 앞에서 방탕하고 더러운 길로 걸어가면서 나의 마음속의 긍휼을 너희들이 무시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속의 깃들여진 의미를 너희들이 아느냐? 너희의 조상 야곱은 깊이 통회하고 나에게 간구함으로 그의 회개를 보고 내가 감동을 받았고 그의 통회하는 기도가 나를 이기었노라.” 지금 바로 너희들이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외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의 이름을 나에게 회개하고 간구함으로 말미암아 나를 이긴 자를 이스라엘 이라고 이름하였거니와 너희는 과연 지금도 나를 이기고 있느냐? 지금도 너희가 나를 이기고 있느냐? 지금도 너희가 회개하고 간구하는 야곱과 같이 내 앞에 나오므로 나에게 감화를 주고 너희가 나를 이기고 있느냐? 오히려 내 마음속에는 너희를 향하여 긍휼이 불붙듯 하고 그리고 나의 심령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에 불붙고 있지만 너희들이 나를 이기지 아니하니라. 내 사랑은 단지 너희에게 부어지지 못하고 내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으로 끝나는 짝사랑으로 마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너희가 아니냐? 그러므로 너희는 이스라엘에 합당한 이름으로 돌아오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이러한 음성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사는 곳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알도록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마지막 얻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다. 우리교회도 있다고 전해들었습니다만, 수련회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생전 처음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셨는데 “하나님 만나주시옵소서.” “너 나 만나서 뭐하려고 그러니” 하나님이 그러시더랍니다. 실화입니다. 여러분 뭐하려고 그럽니까? 하나님 만나서 뭐하려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만남을 통해서 무엇을 주시기 원합니까? 하나님이 죄악과 어두움 속에서 헤매는 인생들에게 가끔 나타나셔서 말씀으로 당신을 보이시고 은혜로 당신이 여러분 앞에 사랑이심을 인쳐 주신 일들은 오직 한가지 길 때문입니다. “너희는, 너희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라.”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시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만나주시기 직전에 야곱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어주신 이스라엘의 이름에 합당한 삶을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은 이 사람을 만나주셨고 그러자 이 사람은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슴에 새기며 그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길로 들어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이름에 부합한 삶을 살도록 촉구하신 것처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기억 속에서 그때 그때 여러분들에게 요구하셨던 삶의 요구가 무엇인지 느껴보십시오. 그것은 모두 한가지의 요구로 일관 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너희는 성도라. 이제 너희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성도라.” 그 이름에 부합한 삶을 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서 응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로 벧엘의 만남이 주는 의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28장에서 야곱이 엉겁결에 하나님을 만나고 놀라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면서 시키지 않았는데 세 가지 소원을 하였습니다. 나에게 양식을 주시고 그리고 평안히 내 아비의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그러면 하나님은 내 하나님이 될 것이고 그리고 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고 이곳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옵니다. 그곳을 벧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을 야곱은 저버렸습니다. 세겜에서 살아간 야곱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만은 위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 되시지도 않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주님 앞에 드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하나님의 집 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벧엘에 세우심으로 말미암아 바로 그 유서 깊은 벧엘, 자기가 의지할 데 없이 추격해오는 형을 의식하면서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이별하고 보집 하나를 메고 요단을 건너서 정처 없이 가보지도 않은 밧단아람으로 도망가야 했던 그 위기 가운데서 만나주신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그 벧엘에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를 생각나게 했습니다. 거기에서 위기에 하나님 앞에 드렸던 서원을 생각나게끔 하려고 하나님께서 야곱을 벧엘에 세우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그렇게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거기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고 서약한 것처럼 이스라엘 너희에게도 나와 만나는 그러한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들이 돈을 많이 벌고 부유하고 이제 잘 사는 나라가 되었고 강대국이 되었다고 해서 나를 멀리하고 나와의 약속에 더 이상 마음을 기울이지 아니하고 약속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데 이것이 너희가 보기에 나에게 가한 것이냐? 하나님은 이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깨어서 살도록 하나님에게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벧엘 사건을 통해서 경고 받았던 것, 응답받았던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음성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했습니까? 여러분들이 형의 추격을 받으면서 사랑하는 부모의 곁을 떠나서 어디로 가야할지 정처 없는 길로 도망가는 야곱과 같이 그렇게 인생에 버림받은 것처럼 외로운 때에 찾아오시는 분이 주님 말고 누가 계셨습니까? 그리고 영원도 마음도 인간관계도 자신에 대한 자화상도 다 구겨지고 때 묻고 스스로는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가 없어서 그저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가슴에 칼을 품고 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때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셔서 어두움에서 밝은 빛으로 인도하여 내신 지극히 고통이며 괴로워하는 그 고통에서 구원해 주신분이 누가 있습니까? 마구 파멸을 향하여 굴러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벼랑길에서 회개로 말미암아 재동을 잡아주신 분이 누가 있습니까? 그리고 이만큼이라도 하나님 앞에 낭떠러지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나아오게 만들어주신 분이 하나님 이외에 누구였습니까? 그때 여러분들은 말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이 위기 속에서 건져주시기만 하면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겠습니다. 나를 위해서 건져주신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내가 깨달았으니 이제까지는 내 인생이 나의 고통과 아픔 때문에 싫어하면서 살아왔지만 이 놀라운 사랑을 입었으니 이제 내가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여러분, 서원한 것 없다면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사랑은 잊어버리고 심지어 나도 잊어버렸지만 희미하게 기억에 남는 기억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것을 기억하십니다. 이것을 생각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벧엘의 사건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 받은 그 놀라운 역사들을 기억 해 봅시다. 그때 그때마다 감격을 느끼면서 하나님께 약속한 것들을 돌아봅시다. 삶으로서 그 약속들을 하나님 앞에 실현해 가고 있는지 한번 조사 해 봅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진심으로 돌아왔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드렸던 수많은 약속들을 정리하면서 어떻게 내가 삶으로 약속을 성취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고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바로 이러한 삶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불타는 긍휼과 사랑을 우리를 향하여 쏫아 부으시기를 원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입고 그 놀라운 십자가의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 약속한 그 모든 아름다운 약속들을 저버리고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신앙으로 갚아드리고 있지 못한 우리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시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감격에 겨워서 약속하던 벧엘에, 혹시 그 기름 부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던 그 제단은 사라지고 이제는 하나님과 만나단 장소가 어딘지도 찾지 못하고 갈대숲이 무성해진 그러한 벧엘의 언덕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마음을 감동시키던 그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약속된 것들은 잊어버리고 이제는 무엇인가 눈에 필요한 것들을 주시하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만족으로 가득 차 있는 이러한 삶에 우리들이 빠져있다면 우리가 어디서 하나님을 만났는지 생각 해 보십시오. 어떠한 인생의 위기에서 어떠한 고통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 주셨는지 기억 해 보십시오. 누가 뭐라고 헤도 벧엘에 오를 때마다 야곱이 하나님께 진 빚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골고다 언덕에 오를 때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없는 빚쟁이들이요, 영원히 그 사랑에 빚진 자들이며 이전에도 그 사랑 때문에 살았고 지금도 그 불붙는 사랑 때문에 살아가고 있으며 이렇게 부족해도 결국은 그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과 사랑 때문에 우리가 앞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놀라운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 삶을 살아서 우리를 향하여 불타오르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을 여기시는 마음을 알고 그리고 우리도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드릴 수 있을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우리의 인생을 조사해 보고 하나님 앞에 고치는 이러한 일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벧엘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주는 첫 번째 음성인 것입니다.
7. 전능하신 하나님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 (호 12:4下-5)
야곱이 하나님을 이긴 것은 그의 인간적인 열심이나 혈육에 속한 집착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적인 회개였다는 사실을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커다란 힘 앞에 감동받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지혜의 원천이신고로 인간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감동시키고자 하는 것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회개하는 자를 향해서 마음에 감동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감동하시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벧엘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이 야곱을 만나 주신 것도 바로 그와 같은 회개 때문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그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냐는 것이 궁금합니다. 일컬어 오늘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야훼’ ‘쩨바우트’인데 이 ‘쩨바우트’는 천군천사들을 의미하는 말하자면 전쟁과 관계된 군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35장에서 이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에 그가 어떤 하나님을 만났는지 했더니 거기에서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났다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만군의 여호와라고 말하고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창세기 35장의 기사에서는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니까 우리는 이 두 기록을 통해서 하나 종합하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그 전능하심은 모든 군대와 그리고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그 실제적인 힘을 가진 여호와 하나님이셨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군의 여호와라고 하는 그 이름이 그 하나님의 어떤 외면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힘에 있어서의 지위를 이야기한다고 할 것 같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엘 샤다이는 하나님 성품 자체 속에 깃들여져 있는 위대한 능력을 계시하는 말이라고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난 하나님은 어쨌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셨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성품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결국 이 한마디 속에서 야곱이 그동안 왜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그 위대한 약속들을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그 약속을 친히 성취해 가실 날들을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며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대신에 인간의 계책과 술수와 계략을 통해서 자신에게 주신 그 약속을 성취해 보려고 몸부림치면서 살았는지를 엿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결국 야곱의 이 모든 그 불행한 불신앙과 심지어는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붙들고도 인간적인 열심에서 그를 꺾어보려고 겨루었던 그 모든 인간적인 계책이나 사람의 힘으로 그 모든 것들을 해결해 보려고 했던 옛사람에게 속한 모든 노력들은 바로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꿈을 주시고 그리고 위대한 비전을 주신 바로 그 하나님이 그 꿈을 자신에게 주셨다는 사실과 함께 또 자기에게 그러한 꿈을 주신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만 바라보고 그리고 인간의 계략과 방법과는 상관없이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면 내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요, 내 삶과 섬김이 주님을 기쁘시게 한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나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어떠한 사람들의 방해와 그리고 어떠한 사건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당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이 뜻을 성취하시고야 말리라고 하는 이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살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눈 앞에 보일 때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형통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 고통스럽고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당신이 원하시는 일들을 이루어 가고야 마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성품을 바라보기 때문에 형통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신앙의 힘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지만 그러나 실제로 내가 내 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을 보면 이 약속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 전개되어 있을 때에도 오히려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평안하게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자기와 함께 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다가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불신앙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 어떤 일을 시작함에 있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그 모든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믿음이 약해지는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믿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믿지 못하기 때문에 순간순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보며 위로와 용기를 얻는 대신에 상황과 여건과 그리고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을 바라보며 낙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이 이 야곱의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의 처지가 바로 그와 같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이 우상숭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고 타락한 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야곱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벧엘에서 만난 이 사건, 회개를 통해서 그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오늘 바로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켜 주시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깊은 불신앙의 뿌리,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만약에 그 죄에서 돌이켜서 회개하면 이스라엘인 야곱에게 베풀었던 그 은혜를 내가 너희들에게도 베풀려니와 만약에 너희들이 회개치 아니하면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너희가,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오히려 대적이 되어서 너희를 치시는 심판을 경험할 것이라고 하는 이중적인 그림을 함께 보여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호세아서에서 압도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사랑인데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은 그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고멜을 통해서 그림처럼 영상화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그리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든지 사랑하고 싶은 그 사람을 나도 사랑하는 것은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특별히 뉴스거리가 될 만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의 그 사랑은 언제나 사람들의 뉴스거리가 되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격이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할 자격이 없는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가 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랑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감동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고 그 사랑을 생각하기만 해도 능히 우리의 삶을 바꿔 놓을 만큼 그렇게 위대한 힘을 그 사랑에 대한 묵상 속에서 발견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묵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고 그 사랑에 대한 묵상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모두 드려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게 할 만큼 우리를 감동시키고 감화시키는 그 위대한 힘의 원천이 어디 있다고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언제나 그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동시에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에 자기가 여전히 하나님에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은 참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을 아는 것에는 우쭐한 것이 있고 교만한 자기만족이 있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감동시킵니다. 그 사랑의 깊이를 더 깊이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우리는 더 많이 감동받게 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그 은혜의 높이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더 몸 둘 바를 모르는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사랑의 빛이 찬란하고 밝게 우리 앞에 비추면 비출수록 우리를 향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얼마나 부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순결하고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순결하고 위대한 사랑을 받을 만큼 깨끗한 존재들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앞에 그 큰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머리를 숙이게 되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은 그래서 모두 하나님 앞에 겸비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치 없는 인생인가 하는 것을 아울러 느끼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살아가는 우리들은 그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인생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하고 필설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 속에 불붙는 긍휼과 타오르는 사랑을 우리에게 아무리 설명해도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 자신도 우리에게 말과 글로써는 하나님의 그 넘치는 위대한 사랑을 알게 하실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사랑을 혁혁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같이 더러운 인생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리 돌덩어리와 같이 굳은 심령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만약에 눈을 들어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그의 가슴 속에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내 눈을 밝히 떠서 저 십자가 볼 때
나 위해 고생당하신 주 예수 보인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아는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가 하는 사실을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밝히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이렇게 하나님이 그토록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우상숭배의 죄에 빠져서 음란한 삶을 살고 그리고 여호와의 불붙는 그 사랑을 저버리면서 그렇게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 앞에 방황하는 인생을 사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한편으로 하나님을 버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으로 몸부림치면서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도망가야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자신들을 지키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광야에서 유목을 하며 지낸 조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풀 한 포기도 제대로 나지 않는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그들이 먹고 입은 것은 자신들의 농사를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오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들은 농경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아주 발달한 선진 문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 땅의 터줏대감이라고 할 수 있는 바알 신에게 잘못 보이고서는 우리의 농사가 풍년이 될 리가 있겠으며 만약에 우리가 바알에게 밉보인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남지 못하리라고 하는 것이 타락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엄밀한 의미에서 버린 것이 아니라 여호와와 함께 또 바알도 섬기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중적인 신앙적인 간음 그 뒤편에는 하나님만이 우리의 여호와시며 그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키실 수 있는 위대한 분이시라고 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이 가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할 때에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타락하고 신앙적으로 간음하는 영적인 타락으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많은 사람들이 한 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로 구원을 얻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고 감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따라가고 그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삶을 다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내 인생을 통하여서 내게 원하시는 무슨 일이든지 행하실 수가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시면 나를 비롯해서 전 세계가 몸부림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막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믿음의 자녀들이 신앙의 순결을 잃어버리게 됩니까? 믿음의 지조를 잃어버리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능하심을 하나님께서 당신이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는 신념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신앙적으로 양보하고 타협하고 뒤로 물러서서 급기야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신앙적인 간음의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변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정절을 지키면서 신앙생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왜 세겜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거룩한 약속과 그리고 가나안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자신의 서원을 지켜서 속히 돌아가지 못하고 10년 넘는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을 그 땅에서 그렇게 세겜 사람들과 더불어서 화친하고 그리고 그들의 우상숭배를 배우며 그들의 문화에 젖어서 하나님을 향한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는 배경이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살면 비록 내 가는 길을 고달프고 그리고 내 가는 길이 정말 불길로 연단하는 것과 같이 고통스러운 길이라 할지라도 내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과 같이 나오리라 이런 확신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수시로 세상과 타협하고 그리고 불변의 믿음을 요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붙들고 살아가기를 요구하는 가시밭길을 걷는 대신에 평탄하고 쉬운 길을 걸어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지나간 날들 동안에 내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과 그리고 계략을 하나님 자신 보다 더 많이 의지하면서 살아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들을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날들을 기대하면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을 우리의 가슴에 부여안고 주님의 우리를 향해서 넘치는 사랑의 증거를 우리 인생 삶 구석구석에서 발견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이스라엘이 이렇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받았던 신앙적인 모든 실패를 거울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그 전능하심을 깨닫지 못한 이스라엘 야곱을 깨우치시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야곱에게 계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모든 죄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붙들고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하나 여기서 발견하는 사실은 야곱이 그 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그의 인생이 놀랍게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에 이 야곱의 기사를 찬찬히 읽으면서 쏟아지는 것 같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한 것 중에 지극히 작은 일부만을 설교하고 또 책을 냈습니다. 그 중에서 제 마음을 훑고 지나갔던 위대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야곱이 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이후에 얼마나 그 인생이 바뀌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모르고 지내지 않았냐 하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 그 이후에 그는 이제 그 하나님의 전능하신 성품을 가정적으로 위기가 올 때나 개인적으로 위기가 올 때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위기가 올 때나 언제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묵상하며 이제 그 하나님의 손에 자기를 맡기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세 가지만을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창세기 37장에는 꿈꾸는 요셉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요셉이 자기의 형들에게 이야기하기를 “해와 달과 11별이 그리고 형들의 곡식단이 나에게 절하였다”라고 그렇게 선포하였습니다. 그 형들이 불평을 하면서 그리고 언사가 곱지를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요셉의 꿈을 들으면서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하였을 때 야곱은 조용히 혼자서 그 어린 아이의 꿈을 마음속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야곱은 마음에 두니라 그랬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황당무계해 보이는 일이지만 그러나 만약에 이 꿈이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는 꿈이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왜? 그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만약 이전 같았으면 아들이 그런 꿈을 꾸었으면 즉시 추리를 하였을 것입니다. 한 번 이 어린 아들이 최고로 잘 풀리는 방안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의 추론으로써 그 아이가 능히 형들의 경배를 받고 부모인 자기의 경배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추론이 닿지 아니하면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야곱의 원래 인간적인 성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때로 인간의 추론을 초월해서 역사하실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이 모든 일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46장에서는 이제 더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거기에서는 이미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었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형들이 거기에 곡식을 구하러 갔다가 요셉의 작전에 의해서 모두 볼모로 잡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요셉은 자기와 같은 배에서 태어난 동생인 베냐민을 데려오기 전에는 너희들의 말의 진실성을 믿을 수 없으므로 우리는 너희를 첩자로 간주할 것이고 만일 베냐민을 데리고 오면 너희를 풀어주라고 하는 약조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베냐민을 형의 손에 딸려서 보내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에 야곱은 요셉을 잃은 것만 해도 가슴의 상처가 지워지지 않는데 같은 배에서 태어난 소생 베냐민을 보내야 되는 것이 뼈저린 아픔이었습니다. 보낼 수 없다고 처음에 생각했지만 그 후에 그를 생각하면서 야곱은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를 지켜주시려니와 만약에 내가 내 아들을 잃으면 잃으리라.
얼마나 성숙된 신앙입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시려니와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 왜? 그것은 이제 자식의 생명 그리고 자식이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 내 인간적인 지혜와 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마 옛사람 같았으면 틀림없이 이상한 놈 돈 주고 하나 사서 “야 너 이 사람 데리고 가서 요놈이 베냐민이라고 해라.” 그렇게 해도 남았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진짜 베냐민을 보내는 것입니다. 솔직히 애굽의 국무총리가 누굴 데리고 가더라도 그가 진짜 베냐민인지를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는 말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를 지키시려니와, 그러니까 너희들이 살고 죽는 문제에 있어서, 내 이 험한 인생의 문제를 걸어가는 길에 있어서 나는 이제 내 계책과 나의 계략을 모두 포기했다. 가나안에서 발휘하던 그 놀라운 잔꾀와 메소포타미아 강호의 고수인 외삼촌에게서 배워 온 그 수입품 사기술까지도 내가 다 버리고 이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나의 살고 죽음이 있음을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라” 저는 여기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의 고백과 일맥상통한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를 이 불 속에서 집어넣어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니와 마지막으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상에 절할 수가 없나이다. 이것이 다니엘의 세 친구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이 얼마나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는 것인지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물을 펑펑 흘리고 감동하던 사람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느냐 하면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것입니다.
(예화) 목격자로부터 들은 이야기-일제시대 신사참배-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기도함-어느 목사님의 등장-순교할 각오를 이야기함-뒤편에서 무명의 한 성도가 한없이 눈물을 흘림-그 목사님은 배교함-무명의 성도는 투옥됨
결국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과 그리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그 신앙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군데가 다시 48장에 나오는데 그 때 야곱이 요셉에게 이미 만나서 유언을 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나는 여기서 죽어도 하나님이 너희를 주님이 약속하신 그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러분, 이 족장을 보십시오. 자신의 고백대로 심히 험악한 세월을 그렇게 130년 넘는 세월을 보내면서도 그 족장의 마지막 소망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약속하신 그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비록 돌아갈 땅도 없고 돌아갈 수 있는 여건도 안 되었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당신이 약속하신 것을 지금의 눈에 보이는 환경과는 상관없이 이루고야 마실 것이라고 하는 분명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야곱과 야곱의 집안이 완전한 인생을 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살려고 노력을 했고 순간순간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의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자신의 계략과 계책을 버리고 그리고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믿는 대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 속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보여 주심으로써 우리의 믿음이 어디 있냐고 오늘도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셨느니라”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현재형으로 말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느니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일어난 일은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이고 그리고 역사가 많이 흘러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은 여전히 남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너희는 이 사건을 기억하라. 야곱이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고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갔고 우상숭배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간 사람이었지만 회개가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그를 사죄 받게 하였으며 뿐만 아니라 그 벧엘에서 엘 샤다이 전능하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붙들고 인생을 하나님 앞에 맡기며 믿음으로 살다가 장엄하게 그 인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처럼 너희는 오늘날 이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야곱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든지 야곱과 같이 혹은 야곱보다 더 교활한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오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보다는 언제나 나의 계획과 나의 인간적인 방법과 수단을 의지해서 살아왔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수단과 방법보다 더 믿을 만 하다고 믿으면서 살아왔다고 할지라도 회개는 여전히 하나님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이 감동하시기만 하면 너희에게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여 주셔서 너희로 그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야곱의 사건이 단지 흘러간 옛 사건이 아니라 오늘 새삼스럽게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알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우리의 신앙의 닻을 두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절박한 인생의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과 저에게도 하나님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절박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전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 하나님에게 믿음의 닻을 던지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의뢰하며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우리의 신앙의 절개는 무너지고 우리의 신앙의 지조는 휘어지게 되는 것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오늘 여러분들의 문제가 너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힘 부쳐서 이 위대한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문제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시며 여러분들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보다 하나님이 훨씬 더 전능하신 분임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고 싶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마음이 정함이 없고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을 향하여 확정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누리는 즐거움보다 더 큰 즐거움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 아닙니까? 어려움 속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고 움직이지 않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느니 보다는 차라리 전능하지는 않아도 유한한 나의 힘과 노력으로 내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정하고 신앙을 향해 마음을 확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흔들리고 갈대와 같이 흐느적거리는 우리의 정함이 없는 마음을 보시면서 하나님은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눈을 들어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또 친히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그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하면서 살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우리의 모든 인간적인 성품들과 그리고 잘못된 불신앙의 요소들을 철저히 내어버릴 수 있는 그러한 결딴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전능하신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향해서 불붙는 사랑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최선의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시고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그 전능하심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 불붙는 긍휼과 타오르는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이 오늘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용기가 되지 않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넘고 싶었지만 넘을 수 없었던 그 모든 어려움의 벽들 깨뜨려졌지만 그러나 회복할 수 없었던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도저히 다시 한 번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갈 수 없었던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깨어진 여러분 자신과의 관계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전능하신 힘으로 고치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여 살아있는 백성들이고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의지하며 살아있는 백성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의뢰할 때 그들은 하나님의 곁을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그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그 위대한 긍휼을 멸시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었을 것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 눈을 들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문제보다 하나님이 훨씬 위대하시고 전능하셔서 그리고 그 전능하심으로 불붙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들을 성취해 가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굳게 믿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여호와는 그의 영원한 기념 칭호라고 말합니다. 직역을 하자면 여호와 그 이름은 우리가 늘 기억하여야 될 이름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아니하고 홀로 계신 분이시며 그리고 전능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며 또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불러내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고멜은 한 사람으로 남편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호세아 한 사람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에 방탕한 길로 가서 간음하여 범죄 한 여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더럽히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적인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이 나를 불러 내셔서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이 당신의 힘으로 맡으셔서 이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께서 결혼하셨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그 한 분만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된다고 하는 것이 우리 삶의 숙명으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면 그게 곧 신앙적인 간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칭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늘 기억되어야 할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 알고 있는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원래 야훼라고 하는 이름은 너무 거룩해서 사람들이 부르지 못했습니다. 왜? 십계명에 어긋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후에 다시 이제 대제사장에 의해서 7월 10일 대속 죄일 때는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을 명백하게 부릅니다. “야훼, 야훼, 야훼..” 하면서 10번을 부르면 백성들은 모두 엎드려서 “그 나라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세세 무궁토록 복이 있을지어다” 그렇게 응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서 이 ‘야훼’라고 하는 여호와라고 하는 이름이 얼마나 성별되고 거룩하게 불려졌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 ‘야훼’라고 하는 이름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영원히 기념되고 있는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관계를 붙들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현재적으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리고 위대하심과 그가 우리와 맺으신 그 놀라운 사랑의 관계를 우리에게 기억하고 되새기고 그것을 붙들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야곱과 같이 혹은 이스라엘과 같이 이 세상의 유혹에 미끄러지거나 혹은 자신이 처하고 있는 문제가 너무나 다급하고 어려운 나머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상황에 접어들었다고 믿어질 그때에 너희들은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두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너희들이 생각하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이시고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또한 너희를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내신 분이 바로 그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너희를 불러내실 때만 위대한 능력으로 너희를 죄악 가운데서, 어두운 나라 가운데서 불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사망과 죄악의 어두움 속에서 너희를 불러내신 그 위대한 능력은 오늘도 당신의 전능하심을 바라보면서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야곱에게 일어났던 이 일이 단지 야곱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야 될 일들이라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깊이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될 것은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믿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 작은 불신앙이 점점 자라서 결국은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의 불붙는 긍휼을 버리고 돌아올 수 없는 타락의 길고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에서 파선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오로지 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뢰하면서 살도록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어려울수록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야곱이 그 회개로써 하나님을 감동시켰던 것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회와 회개로 감동시켜 드려서 그래서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그리고 넘치는 긍휼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나서 여러분들이 전능하신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걸어갈 수 있는 삶되게 하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들 위에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8.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의 삶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 (호 12:6)
저는 지난 주간에 부산지역에 집회를 다녀왔습니다. 차를 타고 산길을 돌아오면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 지역에 똑같이 눈이 왔을 텐데 차를 타고 산길을 돌아갈 때 어느 모퉁이에는 눈이 다 녹아서 보송보송하여 눕고 싶을 만큼 풀밭을 이루고 있었고, 어떤 곳에는 아주 을씨년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얼음 덩어리들이 그냥 남아있고 하얀 눈이 그냥 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똑같은 지역에 똑같이 눈이 왔을 텐데 왜 어떤 지역에는 그렇게 얼음 덩어리가 남아있고 어떤 지역에는 가서 누워보고 싶을 정도로 포근한 풀밭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니, 해가 언제나 똑같은데서 떠서 거의 같은 데로 지니까 그 햇빛을 받는 곳에는 눈과 얼음이 다 녹아서 풀밭이 되고 햇빛을 받지 못한 곳은 얼음덩이와 눈이 그냥 남아 있어서 얼어붙은 땅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한 교회에 은혜가 내리든지 은혜가 안내리든지 똑같을 텐데, 하나님의 은혜의 햇살이 비치는 사람들에게는 얼어붙었던 마음들이 녹아서 하나님을 향하여 모두 풀밭 같은 마음으로 변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햇살이 비치지 못한 사람들 마음에는 여전히 얼음덩이와 같은 차가운 불신앙과 하나님과 사람을 향한 원망과 미움들이 남아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우리의 마음에 비춰주셔서 그 은혜로 우리의 마음을 온화하게 녹여주시고, 그 은혜로 우리의 심령을 감동시켜주실 때, 우리는 비록 눈보라와 같고 비바람과 같은 모진 세월을 잠시 만났다고 할지라도, 그 은혜가 우리의 심령을 녹이고 우리의 인격을 깊이 변화시키면 우리는 눈처럼 돌덩이처럼 굳어졌던 얼음과 같은 마음의 고통과 아픔, 이런 것들로부터 해방되어서 누구든지 가서 눕고 기대고 싶은 그런 신앙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유명한 상담치유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치유하려고 하지 말고 인격을 고쳐주려고 하라’ 인격을 고쳐주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적인 은혜, 그리고 인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만이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Ⅱ” 사경회로부터 계속되는 이 한 열편 가까운 설교의 마지막 일단락을 지으면서 우리 앞에 있게 된 “그런즉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고 너희 하나님을 항상 바랄지니라”라고 한 이 6절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이런 은혜를 회복하고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얼음덩어리와 같은 고통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드리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 그리고 잘못된 우리자신을 향한 관계, 이웃을 향해서 빗나간 관계, 이런 것들을 어떻게 총체적으로 고쳐서,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교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애절하게 표현하시다가 마지막으로 일단락 맺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붙고 우리를 향한 긍휼은 목메게 가슴속에 타오르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 크신 긍휼을 알았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고 침륜에 빠진 사람들, 한때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고 자기를 향한 불붙는 긍휼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과 자신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그 불붙는 긍휼에 감동과 감화를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사로잡으시고 붙드시는 그 사랑과 긍휼을 의지해서 살아가겠노라고 결심했던 사람들이 그 사랑을 향한 하나님의 결심과 마음을 유지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원인이 무엇 때문입니까? 분명히 한때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 긍휼을 의지하며 사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다고 고백했던 사람들이 그 흘린 눈물이 뺨 위에서 마르기도 전에 그 감격이 가슴에서 식기도 전에 주님과 함께 누웠던 신혼의 잠자리에 체온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세상을 사랑하고 마음에 정함이 없이 어리석은 방식으로 예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 살았던 삶의 방식대로 그렇게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만 알았지 왜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은 알았지만 그러나 그 사랑이 어떤 계획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는지 몰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사랑한다고 말할 때 꼬리를 치고, 네가 제일이라고 말하며 어깨를 두드려주고 안아 줄 때 좋아하는 것은 동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고통받을 때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과 사랑 받을 때 그 계획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이 왜 우리를 건져주셨는가’ ‘우리 같은 인생이 무엇인데 하나님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러실 필요가 없으실 정도의 놀라운 사랑으로 그 사랑에 합당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같은 인생을 찾아오셔서 천사도 받아보지 못하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는지 그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 사람 속에 있는 감격도 곧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계획이 무엇인지를 오늘 이 6절에서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그 교훈의 마지막에 인쳐 놓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너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인자와 긍휼을 힘입어 긍휼을 지키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그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애와 긍휼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애는 히브리말로 ‘헤세드’ 입니다. 그리고 이 ‘헤세드’라는 말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희랍어로 ‘아가페’입니다. 그런즉 “너는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가페와 공의를 지키라”라는 것입니다. 공의는 ‘미쉬파트’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샤파트’ 재판 하다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올바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아가페를 지키고 아가페를 붙들고 살고 또 한편으로는 공의를 지키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셨던 하나님의 계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만드시고 여러분들을 구원해주셨을 때,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다는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여러분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이 세상에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내려오셨다면 어떻게 살아가실 것인가’ 하는 그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보여주는 삶, 이것을 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가 대단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애와 공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먼저 인애가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은 그야말로 아가페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가페라는 말을 들을 때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호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이 말씀을 들을 때 이스라엘의 형편은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의 부가 늘어 가면 늘어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열심은 식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향한 사랑의 열심이 불붙었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냉담하였습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뒤집지 않고 케이크를 구워서 밑에는 타고 위에는 설익어버린 그러한 모습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상태였다는 사실을 규탄하였습니다. 부가 늘어 가면 어느 시대든지 어느 백성들이든지 탐욕이 늘어가게 마련입니다. 탐욕이 늘어나면 범죄가 늘어나고 탐욕과 범죄가 창궐하는 곳에는 서로를 사랑하고 긍휼이 여기는 모습이 사라져간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합니다. 물질적으로는 예전보다 훨씬 부유해졌는데 살아가는 것은 옛날보다 훨씬 각박하다고 말합니다. 부에 대한 탐심과 물질에 대한 욕심, 세상에 대한 열중함이 그들의 마음속에서 참된 아가페를 앗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백성들은 그렇게 살아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나라가 부하기를 원하고 모든 백성들이 물질적인 풍요함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를 원하고 더 갖기를 원합니다. 물론 저도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주는 밀가루나 받아먹고 다른 나라가 베풀어주는 쌀에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해야 될 것은 결코 이 땅에서 부해지고 이 땅에서 번영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속에 마땅히 있어야 할 아가페를 잃어버리고 혹은 대가로 주고 이세상의 부를 취하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애가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극도로 부하고 어떤 사람들은 엄청나게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서로 시기하고 원망하고 미움이,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거의 같은 시대에 사역했던 아모스서를 볼 것 같으면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의 온갖 범죄와 사악함과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연대의식과 사랑이 깨져버린 관계-하나님의 사랑과 그 은혜를 알고 함께 하나님의 한 손에 의하여 선택받은 사실을 기뻐하며 한 식구처럼 그리고 한 핏줄로서 그렇게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사라지고- 물질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고 쾌락을 위해서라면 아들과 함께 한 여자에게 가서 동침도 할 수 있는 파렴치한 시대를 당하게 된 것, 이것이 사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가리키는 말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자기 육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사람들의 생명도 서슴지 않고 뺏을 수 있고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의 행복을 짓밟을 각오도 되어있는 이러한 무자비한 사회가 바로 인애를 잃어버린 사회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유익만 된다면 사람도 납치해서 돈 받고 사고 팔 수 있는 세상, 이 세상이 바로 호세아 선지자가 살았던 그 시대가 아니라 여러분들이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아니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신앙,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만나고 그리고 눈물을 많이 흘리고 말씀에 은혜를 받고 여러분들이 매일 기도하면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 그 뛰어난 영적인 삶이 여러분들의 실제적인 삶과 실천적인 삶과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된 영적인 생활인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신령한 분위기를 추구하고 뛰어난 영성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교회가 역사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교회의 영성은 모두 거짓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백성들끼리 모여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고 감격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만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모였을 때 하나님의 백서다운 모습이 나타날 뿐 아니라 흩어져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한 맛을 드러내며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인애가 사라지고 참된 사랑이 사라진 시대를 살아가던 많은 경건한 사람들이 한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그 인애를 지키면서 살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애를 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번에 마태복음을 설교하면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빚진 마음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신앙입니다. “너희는 인애를 지키고”라고 말씀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이 인애를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깨달은 그 하나님의 아가페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서로 물고 뜯으며 시기하고 원망하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혹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위한 수단인 것처럼 생각하는 이세상의 풍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불타는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신 것처럼 나도 내가 미워하던 사람들, 내게 회복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 사람들, 나에게 치유되기 힘든 아픔을 안겨준 사람들, 혹은 지금도 내 불행의 원인이 되고 있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오히려 그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면서 그런 아가페의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다른 백성들에게 베풀지 아니하셨던 그 불붙는 긍휼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퍼부으신 이유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우리에게 한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가 나를 통하여 불붙는 긍휼을 알고 가슴에 타오르고 있는 사랑을 안 것처럼 너희도 동일하게 그 사랑으로 이 어두운 시대에 너희 동족들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하나님이 자신을 향하여 부어주시는 그 불붙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사람들은 사랑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코 그들은 만족하게 사랑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용서해주지 못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준 그 용서가 얼마나 위대하고 그 용서가 가져다준 축복이 얼마나 놀랍다고 하는 사실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인애가 있는 삶을 요구하시고 이런 인애가 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에게 바라시는데 이런 삶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오늘날 돌아가는 세상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 번 때리면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두 대를 때립니다. 사람들이 하나를 뺏아 가면 사람들을 이를 악물고 쫓아가서 등을 쳐서 입에서 나오는 것을 토해서라도 뺏아 가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서 긍휼을 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인애를 베풀면서 살아가라고 말씀하실 때 이것은 우리가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씀하시지 아니하시고 ‘이미 내가 너희에게 준 그 인애를 붙잡으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다른 민족에게는 보이지 않는 가슴에 불붙고 있는 이 치열한 사랑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으니 네가 만약 내 마음속에 불붙고 있는 너를 향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았다면 네가 이 사랑을 받는 것이 얼마나 과분한 것이며 그 사랑이 네게 과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너는 이제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인애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면서 인애를 행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주위에 있는 사람을 용서하다가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때로는 은혜를 받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났다가 잠시 후엔 그 사랑이 식어지고 이전보다도 더 돌처럼 굳어진 미움과 원망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강포하고 포학한 심령으로 바뀌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인애를 행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그토록 불붙는 사랑을 부어주셔서 우리에게 당부하신 그 인애를 지키고 행하며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너희가 어떠한 긍휼을 입었고 그 하나님의 마음에 너를 향해서 불붙었던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애함을 다른 백성들과 지체들에게 베풀지만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그 소망이 없고 사랑에 대하여 보복하고 은혜에 대하여 원수로 보답하고 우리가 긍휼이 여길 때에 오히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이 인애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불붙는 긍휼을 부어주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강포와 피가 피를 뒤 잇대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그 공동체를 이방의 백성들이 지켜볼 때에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 한없는 긍휼히 여김과 아가페의 사랑,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인애하게 여기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살아가는 이 독특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양식을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리고 싶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불붙는 긍휼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버리고 먼 길로 떠나갔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 백성과 똑같은 사람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은 간곳없이 그들 가운데 사라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거울삼으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놀라운 은혜와 사랑, 이것을 기억하면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그 긍휼히 여기는 눈빛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지체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자기의 있는 것을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 내어주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는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이런 아가페의 놀라운 사랑을 실천하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계속 느껴지고 그 사랑이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여서 날마다 우리를 감격시키지 않으면 우리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몇 년에 한 번씩 대목을 보듯이 그 사랑에 충만해지는 것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쌓인 속에서 쌓인 것을 내는 것 아닙니까? 주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알고 그렇게 하나님의 인애에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들, 언제든지 그 말과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의 성품이 삶을 통해서 묻어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들을 향해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 놀라운 사랑, 불붙는 긍휼로 우리를 구원해 내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그러한 아가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끌어안고 고통 하는 자들을 위로하며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게 하시려고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이 계획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애쓰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넘치는 긍휼과 불타는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은 공의로운 삶을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도대체 공의로운 삶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선지자가 늘 한탄하는 제목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너희 중에는 인애가 사라졌고 공평을 잃어버렸도다” 하며 하소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법정적인 의미에서 이것은 판단을 의미합니다.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판단에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 해야될 것은 결코 이 세상은 어느 때에든지-호세아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지금 우리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바르고 정직하고 올바르게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한 보상과 상급이 있어야 할 텐데 이 세상에서는 상급과 보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멸시나 모욕이나 혹은 불이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행하면서 정직하고 의롭게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쉽지 않은 일을 행하고 나면 보상이 너무 어처구니없거나 오히려 손해로 돌아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굽으면 굽을수록 이런 일들은 점차 심해져서 도무지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아가기에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시편23편에서는 하나님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영적인 회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 시인을 인도해 가시고 싶었던 길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의의 길입니다. 공의로운 길입니다. ‘공의로운 길’ 이것이 무엇입니까? 공의로운 삶, 이것이 무엇입니까? 불의한 삶의 반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의한 길을 걸어가는데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의로운 한 백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공의로운 성품 때문에 공의롭게 걸어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품 때문에 그것을 알아서 의롭게 걸어가는 백성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 오랫동안 세를 살다가 조그마한 집을 사게 되었는데 이중계약서를 쓰면 세금을 적게 낸다지만 법대로 세금을 다 냈다는 이야기-그러나 법무사 직원은 비웃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굽은 세상입니다. 불의한 세상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이 이런 모든 문제에 있어서 다 타협하고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아간다”라고 하면 그것이 바로 맛을 잃은 소금이고 세상에 아무런 희망이 없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것은 뭔가 우리가 다른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박수치고 고래고래 통성 기도하는 소리를 통해서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과는 틀린 유별난 종교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싶으셔서 우리를 이 세상에 두신 것이 아닙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통성기도가 시끄럽다고 하니까 무슨 순교의 각오나 한 것처럼 동네사람들과 싸우는 교회를 보았는데 바보입니다. 동네사람이 시끄럽다고 하면 하지 말아야합니다.
(예화) 교회 종을 친다고 주인이 진정을 하니 마귀를 물리쳐야한다고 더 세게 했다는 이야기
그런 것을 통해서 세상에 유별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아도 삶을 통해서 뭔가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그 길을 걷기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마음, 성경에 기록된 원리를 따라 살다가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면 잠시 생각하는 겁니다. “이 현실과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계명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지키다, 지키다 마지막에 도저히 조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현실적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까? 말씀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너무 큰 것만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지 말고 삶으로 그것을 찾아가는 삶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예화) 한 형제가 친구들이 대리로 대답하여 출석표시가 되어있는 것을 정정해달라고 한 이야기
이런 것이 의로운 삶입니다. 올바른 삶입니다. 쓰레기 담아서 옆집에 살짝 갖다놓는 것, 그런 것은 의로운 삶이 아닙니다. 의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정직하고 곧은 삶입니다. 요령으로 살아가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영적인 삶에 풍성함이 없고 양심에 자유가 없습니다. 자유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 자유입니다.
(예화) 90년도에 2주정도 사람이 다친 사고를 냈다고 면허정지대상이라고 나왔는데 경찰관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퇴근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는 이야기
여러분 우리는 도처에서 이런 유혹을 받으면서 살아갑니다. 저는 어느 순간에 그런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화) 과속을 했는데 봐달라고 했더니, 흡연금지구역에서 담배 피웠다는 내용의 벌금을 적용했더라는 이야기. 유턴금지 장소에서 유턴 하다 걸렸는데 싸게 해준다는 경찰관의 말에 법대로 하라했다는 이야기
자기를 변명해서 면책을 받든지 범을 어긴 것이 분명하면 정당한 판단을 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우리는 삶 자체가 이미 이러한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스갯소리로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수없이 이러한 문제들 속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건축을 하면서 공무원에게 뇌물을 안주고 건축업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불가능하답니다.
(예화) 신문에 나 어떤 사람이 2억원짜리 공장을 짓는데 2억 3천만 원이 들어갔는데 그 3천만 원이 뇌물로 쓰였다는 내용. 한 중견건설회사가 뇌물을 절대 안주고도 사업을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런 정신을 가진 기업인들, 그런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애를 먹기야 하겠지만 법대로 하면서 계속 성장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회사 사람들이 관공서를 찾아갈 때마다 부패한 관리들이 정신이 번쩍 들지 않겠습니까? 이런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택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구박을 받고 혹은 바르게 살다가 오히려 손해를 보고, 어려움에 부딪히며 한탄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마저 그 불빛이 꺼져버리면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주차장에서 차를 박고 그냥 가버리는 경우를 몇 번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여러분이 주차를 하다가 차를 박아서 옆문을 찌그러트렸는데, 도망갈 수 있음에도 “제가 주차하다가 선생님 차를 찌그러트렸습니다. 어디 사시는지 몰라 그냥 가는데 책임은 제게 있으니 얼마가 들든지 변상하겠습니다.” 이렇게 이 부패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아직도 시퍼렇게 두 눈 뜨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적당주의에 엉켜서 “이런들 어떠 하리 저런들 어떠 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 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천년만년 살고 지고” 이런 식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백성들을 택하신 그 모든 계획이 좌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드리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뭔가 잘못된 일이 일어날 때에 돌멩이 들고 광화문으로 뛰어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아직까지도 선한 양심을 가지고 공의로운 사회가 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정의의 원칙이 통하는 세상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서 이 불의한 세상의 가슴이 뜨끔하고 성큼한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화) 어느 선교사의 선교보고서-부패가 난립한 나라에 예수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전국 행정관서 중 뇌물 안 받는 창구의 리스트를 만들어 전국에 돌렸다는 내용
“세상이 그렇고 구조가 그렇다”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이 악하고 세상이 불의하면 의로운 정신과 자세를 가지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응분의 대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한 응분의 대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받은 사람,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의로운 삶을 실천하면서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길을 걸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 이런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도 힘들거니와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이런 길을 안 걸어가는 것은 더 이상한 겁니다.
그러면 은혜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너희는 인애를 실천하고 공의를 따라 살라’고 가르쳐주신 그 하나님의 계명이 도대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지켜지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입증을 해야되냐는 것입니다. 사회는 구석구석 썩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시대에도 그랬듯이 법관들은 법관대로 정치인들은 정치인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썩어가는 이 때에 하나님 앞에 정말 바르게 살아야 되지 않습니까? ‘윌리암 퍼킨스’라는 청교도 설교자가 말했습니다. “법관 중에는 열 명에 한 명이 착한 법관이고 의사 중에는 스무 명에 한 명이 선한 의사이고 세상사람 중에 백 명에 한 명만 선한 사람이고 목회자는 천 명 중에 한 명이 선한 목사이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고, 그래서 그 사랑과 은혜 때문에 여러분들이 새사람이 되었고,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과 은혜 때문에 여러분들이 감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그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이라면, 여러분들은 열 명의 한사람일 수도 있고 이십 명의 한사람일 수도 있고 백 명이나 천명의 한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원래 그런 것입니다. 독특한 맛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소금과 같은 백성들은 언제나 소수입니다. 언제 이 세상이 저절로 변해서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여러분들이 꿈꾸는 그런 의로운 세상이 저절로 되어서- 세상의 손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공의를 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너무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세상은 오지 않습니다. 어느 시대든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비용을 지출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신앙의 정절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손해를 보았습니다. 광포와 패역이 잇대이는 세상 속에서 인자와 사랑을 행하며 눈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언제나 손해를 보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다른 사람이 알 지 못하는 넘치는 긍휼과 우리를 향해서 가슴 저미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을 힘입어서 이 세상에서 말씀 중심으로 그리고 진리를 따라서 그리고 공의를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 세상이 바라는 것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선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사랑이 현재적인 감격으로 우리에게 넘치면서 다가오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그 사랑을 온전히 행하면서 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불타는 긍휼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살게 하시고 싶으셨던 그 계획대로 살지 않으면, 우리 속에 넘쳤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도 타협 속에서 식어 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그 넘치는 긍휼, 그것을 알고, 거기에 한없이 감격하십시오. 그러나 눈물을 닦은 후에는 부패한 세상으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거짓과 사기가 판치고 포학과 사악함이 난무하는 이 세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세상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아도 날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독특한 하나님의 맛을 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그 소명을 우리의 삶 속에서 다하여야지만 진정 불붙는 여호와의 긍휼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함으로써 이런 일들이 가능해지게 됩니까? 누구든지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그래서 그 비결에 대해서 오늘 호세아 선지자는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히브리 성경에는 ‘다슈브 베 아도나이’라고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하나님 속으로 돌아와서”라고 나옵니다. ‘베’라고 하는 ‘into’의 의미를 가진 전치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림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께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가는데,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중심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서”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과의 깊고 은밀한 영적인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온전한 회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돌아오되 생각이나 말만 나에게로 돌아오지 말고 온전히 나에게로 돌아와서 이제는 너희 자신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는 나와의 연합을 이루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하고 온전한 회개를 통해서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합일된 영적 관계를 이룰 때에 그 때에 바로 이렇게 인애를 행하며 하나님 앞에 공의를 행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나타나도록 하나님께서는 원하시고 계획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히 돌아온 사람들, 하나님 앞에 완전히 돌아와서 그 돌아온 것이 결국은 하나님과의 단단한 영적인 관계와 연합으로까지 이어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백성의 독특한 맛이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 가운데는 혹시 반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신 분들이 없습니까? 반쯤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반은 여러 가지 계산속에서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고 계신 분은 없습니까? 머리는 어느 정도 하나님께로 돌아갔는데 가슴은 여전히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 하고 있는 분은 안 계십니까? 마음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고 생각되는데 삶이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러한 모순들을 여러분들의 삶 속에서 되풀이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전에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을 연속해서 설교를 들으면서 11장 앞부분에 나오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긍휼이 불붙게 했는가를 말씀하시면서 “내가 내 마음을 돌이켰다”라고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자 어떻게 됐습니까? 하나님이 마음을 돌이키시자 분노하시고 진노하시던 하나님의 마음은 눈물 떨어지는 불붙는 긍휼의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만 바뀌고 실제로 긍휼의 행동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시지 않으시고 계셨습니까? 마음이 진노하는 마음에서 긍휼의 마음으로 바뀌자 드셨던 매는 내려놓으셨고 눈물로 팔을 벌리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안으실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고 회복케 하실 거룩하고 영광스런 약속들을 그런 위대한 약속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이제 마구 부어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돌이키셨을 때에 우리를 향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너는 내게로 돌이키고 내 속으로 돌이키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것은 바로 이런 온전한 돌이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가끔 눈물이 조금씩 흐르고 가슴이 뜨끔해지는 것, 그것은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그래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어.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한다고 돌아온 것 아닙니다. “이전에 내가 잘못했습니다.” 혹은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혹은 “내가 왜 이럴까?” 하면서 후회하거나 안타까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돌아옴은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와의 완전한 영적인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과의 영적인 관계 속에서 이 강포가 잇대는 세상에서 인애를 실천하면서 살고 거짓과 사위가 판치는 세상에서 정직하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어떤 힘들을 공급받는 영적인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로 진정으로 돌아간 삶을 실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쯤 회개한 사람들, 절반쯤 하나님께로 돌아간 사람들은 인애를 행하고 공의를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불붙는 긍휼을 베풀어주실 때에 그 사랑 속에 담긴 계획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삶을 살수가 없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과 긍휼을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많이 받았더라도 그가 오늘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면, 그가 느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놀라운 감격은 단지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센치멘탈리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감상에 빠진 사람들에 의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재적인 사랑이 그분 속에 역사하고 그리고 그분과의 영적인 교제 속에서 세상을 이기면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용사와 같은 백성들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이 땅에 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너무나 많은 갈등,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경배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만을 경배하며 살아가지 못 하고있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되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그래서 이전에 하나님 앞에 야곱과 같이 자신의 술수와 인간의 꾀를 의지하면서 살며 말로는 ‘엘샤다이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노래하면서도 삶으로는 그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고 믿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보다는 머리 굴리는 시간이 더 많고 하나님께 호소하기보다는 사람들 붙들고 하소연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야곱과 같고 그리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백성과 같은 삶을 청산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우리가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 이것은 교회로 돌아간다는 것, 그 의미 이상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잃어버린 탕자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도 잃은 양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에 진정한 의미는 바로 그것입니다. 돌아가서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쏟아부어주셨던 그 하나님의 영적인 은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우리가 즐거운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하소연 할 때 주님이 들어주시던 그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귐이 있는 영적인 교통의 관계, 하나님 속, 그 속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가 6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가 우리를 치셨으나 우리를 싸매어 주실 것이요 또 그가 우리를 상하게 하였으나 고쳐주실 것이라”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자고 그토록 애원하였던 그 ‘돌아가자’는 단지 자신 속에 있었던 어떤 윤리적인 결함이나 몇 개 고쳐서 ‘이만하면 됐지’라는 자기만족, 자기 의를 쌓아 가는 삶이 아닙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물질적으로는 번영하고 세상 적으로는 부흥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최대의 축복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라. 금이냐? 상아 침대에서 잠을 자고 기지개를 켜는 것이냐? 수입식료품을 먹으면서 배불러 하는 것이냐? 여름이면 여름 별장으로 겨울이면 겨울 별장으로 돌아다니면서 살 수 있는 환경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축복이냐? 외화가 늘어나고 국방력이 강해져서 다른 나라 백성에게 조공을 받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축복이냐? 그것은 아니다” 라고 모세는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 백성들이 선민으로서 누리고 있는 특별한 특권에 대해서 말하면서 모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의 열방 백성들 가운데 우리처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 민족이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에 하나님처럼 이렇게 가까이에서 우리의 음성을 들어주시던 분이 세상에 어디 있는지 생각해보라” 선지자는 많은 물질과 번영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지만 그들 속에서 파리해져가고 있는 영혼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의 금과 은으로 부해지는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과 나누는 영적인 교제와 은혜로써 부해질 수 있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타까워하면서 오늘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의 물질을 탐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욕망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를 그리워하고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귐을 사모하며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은혜의 주위에서 맴도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품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영적인 교통을 누리며 살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원이 여러분 속에 역사 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지자는 알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역사 속에서 때로는 위기와 시련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백성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던 그 독특한 특권을 누리고 있을 때에는 시련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는 완전한 회개를 통해 얻어지는 영적인 교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불붙는 사랑에 대한 전체적인 중간 결론을 하나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그 불붙는 사랑을 보답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애와 공의를 통해서 나타나야 하고 그 하나님의 인애와 공의가 실천하며 살아가기 어려운 이 세상 속에서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는 삶을 경험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회개가 없는 곳에는 깨끗한 영적인 생활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영적인 참회, 깊은 신앙적인 회개가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갱신도 없고 영적인 교제에서 오는 축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닙니까? 제 2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타는 긍휼과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때 입었지만 오늘 이제 인애를 행하고 공의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독특한 맛을 드러내면서 살아가는 백성으로서의 삶을 이어가기에는 너무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선지자의 요구대로 우리는 하나님 속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식과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깊은 내면의 세계가 그 하나님과의 독특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서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랄지니라”라고 말합니다. 끊을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은 어차피 운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떠나서 살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제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무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붙드셨고 이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손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무자비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것 말고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이 불붙는 사랑을 알고 주님과 함께 결혼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힘입으면서 이제껏 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가 걸어온 길을 다 모르지만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걸어온 걸음걸음을 모두 알고 또 인도하셔서 오늘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전능하시고 이런 불붙는 사랑으로 우리 인생에 찾아와 주신, 그 사랑에 우리를 붙잡으신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말고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서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고 주님을 소망하면서 괴로운 날이나 슬픈 날이나 언제나 주님만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그런 신앙적인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의 그 완전한 만남을 누리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인생을 끝나게 하실 때까지 이 세상에 두신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드러내면서 그렇게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불타는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여러분들의 의무요 여러분들의 특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는 이 긴 시리즈의 설교를 오늘까지 들은 것입니다. 이제 설교는 끝났지만 여러분들이 불타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대해서 삶으로 반응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Ⅱ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