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Ⅲ
(1997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7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엎드려진 자의 갈 길(호14:1) 1997.10.2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
2. 돌아온 자의 갈 길(호14:2) 1997.10.2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15
3. 돌아온 자가 구할 것(호14:3) 1997.10.2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28
4. 돌아온 자를 고치심(호14:4上) 1997.10.2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41
5. 돌아온 자를 사랑하심(호14:4下) 1997.10.24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저녁) 51
1. 엎드러려진 자의 갈 길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호14:1)
우리는 이미 두 번에 걸쳐서 호세아서 11장과 12장 전반부를 두 번에 사경회에 걸쳐서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1. 2를 살펴보았다. 그해서 이번 사경회에는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 3」이 되는 것이다.
14장은 위대한 호세아 선지자의 글이 마치는 지점이다. 이미 여러분들께서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호세아는 북왕국 이스라엘에 선지였다. 물론 남쪽에는 유다 나라가 있었다. 이 호세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 할 때에는 아모스가 예언하던 때와 거의 같은 시대였고 역사적으로는 주전 8세기경이었다.
그때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라고 하는 이스라엘 역사에 대대로 빛날 영명(榮名)한 군주를 만나게 된다. 신앙이 없다는 것을 빼놓고는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대단한 왕이었다.40년 동안 허약해 질대로 허약해진 이스라엘을 재건하고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외교적으로 이스라엘의 최대의 판도를 회복했다. 당시에 지도를 보면 유다는 아주 작은 나라가 되어 버렸고 북 왕국 이스라엘은 요단강 건너편까지 판도를 넓혀서 그야말로 오랜만에 대국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풍부한 물질을 누리면서 잘 살았는지 아모스서를 보면 그 때에 시대상을 잠시 엿볼 수가 있다. 호세아서에도 역시 그런 모습들이 나타난다. 얼마나 잘 살았는지 사람들은 여름이면 여름 별장으로 놀러 다니고 겨울이면 겨울 별장으로 놀러 다니고 웬만한 계층에 사람들은 상아로 깎아 만든 수입품 침상에서 잠을 잤다. 이렇게 찬란한 문명을 자랑하고 누리면서 부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겉모습은 훌륭하고 사람들이 보기에는 강대국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 썩어 가는 신앙이라고 하는 왕국이었다. 철저히 부패해 가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모두 버리고 그래서 깨뜨려진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국은 이들에게 부도덕한 삶을 낳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마땅히 가져야할 자비와 공의를 잃어버렸고 성적인 타락은 매우 심해서 오늘 저녁에 아비가 가서 자고 온 그 집에 내일은 자식이 가서 동침하고 오는 패역한 시대상들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이 본문에 배경인 것이다.
12장 초반부까지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11장 12장까지 타는 듯한 마음으로 예언하였던 선지자는 12장 중반부서부터는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서 돌아오지 않는 자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심판과 엄위하심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13장까지 끌고 온다. 그리고 이 14장 마지막에 와서 드디어 선지자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내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너희의 불의를 인하여 너희가 엎드려져 있느니라”라고 시작하고 있다.
오늘은 첫 시간으로 1절을 잘 살펴봄으로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1절을 펼치자마자 폭풍과 같이 다가오는 새로운 한 메시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이 엎드러졌다고 직설적으로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때였다. 이웃 나라는 조공을 들고 찾아와서 무릎을 꿇게 되었고 이제 어느 나라도 감히 이스라엘 군대를 넘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강대국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먼 나라와 까지도 무역을 하면서 많은 흑자를 보면서 더욱더 부를 쌓아갔다. 나라는 평안하고 나라 안에는 강력한 지도력이 있었고 반군에 세력들은 꼬리를 감추게되었다.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그렇게 부자로 잘살고 번영하고 또한 이웃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이 왕국의 번영과 창성함을 모두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 이외에 자료이기는 하지만 모압 비문이나 그 인근 지역에서 출토되는 글들을 발굴을 해보면 이스라엘을 아예 ‘오므리에 집이라’ 고 표현할 정도로 그 나라는 이방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심어준 국가였다. 무엇하나 모자란 것이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간적인 명예와 세상에 부와 그리고 모든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이 나라에 강대함과 창성함에는 관심도 없으신 채 “너희는 엎으려졌다” 고 간단하게 말씀하시고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새로워진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 가운데 어떤 분들은 살면서 곤고하고 위기와 어려움에 처했기 때문에 손들고 가난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신 분도 있으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오신 분들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분들은 “나는 편안하다.” “염려할 것이 없다.” “크게 근심할 것이 없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모든 것이 잘 되어간다.” 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여기에는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새로워진 신앙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우리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항상 불꽃 같이 빛나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 무어라고 판단하시는 지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고 그 판단에 대해서 받아 드릴 마음에 자세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죄인이다. 이 부패하고 더러운 본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빗나간 가운데 누리는 그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멸망하기로 예정되고 하나님의 심판아래 복종되기로 작정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이 평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마지막은 “산이여 우리 위에 덮으라!” “우리가 어디 가서 숨을꼬” 다시 말해서 “산이여 우리를 숨겨달라” 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살아가지 않은 사람들의 마지막 결과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쓸데없는 만족을 절대로 경계해야 되는 것이다. 쓸데없는 만족을 철저히 경계하고 주님이 우리를 보시는 것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를 바라 보시는가하는 것에 한시라고 귀를 기울일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이다.
깨어서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많이 하면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깨어있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얼마든지 안목에 정욕과 육신의 안목으로 자기 인생을 나름대로 이 세상에서 판단하고 인간적으로 자기의 인생을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시야를 가지고 살아가는 그 인간이 수시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시선에서 자신의 인생의 결함을 보고 모든 것이 평안하고 부를 누릴 그 때에도 “아!, ”사실 나는 엎드려 져있다.” “내가 계획하고 행하는 모든 것이 잘 되어 가는 가운데에 과연 하나님도 함께 계시는가?” 라고 물어볼 수 있는 마음을 가신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사람들이다.
오늘 이스라엘을 향해서 선지자는 “위기가 왔다.”고 말하고 있다. 누가 이 얘기를 믿겠는가?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신다.” 라는 말을 귀 기우려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생각해 보라” 과거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도 듣지 않았고 미래 관하여 심판을 경고하는 것도 사람들은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보면서 이 선지자는 바로 그것이 엎드러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서야할 중요성을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서에서 “남자답게 서서 강건하여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서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강조한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엎드려 진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엎드러졌다고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큰 공연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밀물과 같이 쏟아져 나오다가 무참하게 밟혀 죽은 이야기들을 신문에서 보게된다. 몇 년 전에도 ‘뉴 키즈 언더 불럭’이라고 하는 미국에 대중 가수 팀이 왔을 때 여러 명의 청소년들이 밟혀 죽었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벌떼와 같이 밀려들 때 넘어지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너희는 엎드려졌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엎드려 졌을 때 이것은 쉬는 엎드려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엎드려 지면 엎드려 지기를 그토록 고대하고 엎드려드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올무와 거치는 것들을 놓았던 악한 세력들은 우리가 넘어진 그 틈을 타서 우리를 밟고 지나가든지 우리의 목을 누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영하였지만 신앙의 상태는 이와 같았다고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정말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다가 가고 싶으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을 정직하게 살펴보고 우리가 넘어지고 엎드려 지는 이것이 대수롭지 않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과 직결되는 일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인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떠나갈 사람들이다. 즉 언젠가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을 하다가 넘어지는 것을 보면 고통스럽고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게 된다.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주셨다. 좋으신 주님이 왜 고난을 받고 왜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당신에게는 당치도 않는 아픔과 누명과 모욕을 다하시고 마지막에 죽음에 복종되는 비참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이유가 누구 때문이었는가? 여러분들을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그러한 일들을 치루셨다. 그렇게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내어 주셨는데 그 아들을 내어 주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바라보실 때 어떤 마음이셨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라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주님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었다. 그래서 독생자를 버리게 하시고 구원해 주셨다. 그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을 보는 목회자의 마음도 아픈데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는 사람의 마음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자. 엎드려 넘어져 있는 우리들을 보시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떻겠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깊이 다가오기 위해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여러분들의 사랑하는 어린아이가 넘어져 피를 흘리고 생각해 보자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바로 이 마음이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내 백성은 엎드려 지라고 만든 백성이 아니라 내가 내 백성을 구속하고 내가 내 백성을 살린 것은 그들로 하여금 나의 이름을 드러내서 살아있는 전사와 같은 백성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건져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살아서 드리지는 않고 신앙은 다 털어먹고 겨우 형식만 있는 엎드려 진 신자들을 마귀는 가만히 두지 않고 그 목 위에 발을 얹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고 있었던 번영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었다.
그와 같은 영혼의 상태를 돈으로 구속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권력으로 구속할 수 있겠는가? 강한 창이나 칼로, 군사와 말과 병거로 이러한 이스라엘의 영혼의 상태를 구원할 수 있겠는가? 무엇으로도 구원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위험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나는 오늘 마음을 다해 여러분들에게 권면한다. 여러분들은 눈을 떠야 한다. 자신들의 영혼의 상태를 보아야 한다. 제가 느끼고 있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들을 향해 느끼지는 것과 여러분 안에 있는 성령이 탄식하고 애통하시는 주님이 슬퍼하시는 그 음성과 그 모습을 여러분들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눈물어린 전화를 두통이나 받았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예화) 독자인 한 형제가 자살을 생각하리 만큼 생의 벼랑으로 몰린 가운데 책을 읽고 그 가 운데 은혜를 받고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데 그 이후에 기도한 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비 참한 모습으로 자신을 보면서 울부짖는데 그 모습이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다고 말하 면서 이러한 체험이 무엇이지 물어온 이야기.
이것이 바로 성령이 이 시대를 바라보시는 마음이다. 눈을 들어 하늘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이렇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처참한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살아가니까 함께 주위에 살아가는 수많은 평균적인 그리스도인들 보면서 위로를 받는데 이게 과연 위로를 받을 것인가?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으러 가는 길에 동무들이 많으면 그 심판이 경감되는가? 주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위로를 받고 한꺼번에 지옥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불길이 좀 적어지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여러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눈을 뜨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금이나 은같이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은 곧 살아지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눈을 떠서 우리의 영혼의 위험한 상태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그 사랑에 반응하는 우리들의 삶 사이에 그 어마 어마한 격차를 볼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향해서 주님은 은혜로운 하나님이라고 말하여도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가 맛보아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당신을 향하여 겸비하고 당신 앞에 깊이 무릎을 꿇고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비를 보이신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해 복종하지 않고 항거하고 도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불 신앙으로 거절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넘어지게 하시고 넘어진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엄위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잊지 말고 기억을 해야된다. 언제든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가을에 엎드러진 우리의 영혼을 다시 일으키셔서 소생에 기쁨을 주시도록 우리모두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기를 바란다.
무엇 때문에 엎드러졌느냐를 오늘 선지자는 “너희의 불의를 인하여 엎드러졌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은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구절이 많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로마서 8장이라고 생각되어진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무엇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사실은 실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붙잡혀서 그 사랑에 풍성함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무나 그 소수이다.
한때는 살아났다. 그리고 또 다시 죽는다. 즉 한때는 죄악의 구렁에서 헤어 나와서 빛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을 잡고 빛의 나라로 옮기었다. 그러나 잠시 어둠을 사랑해서 그 나라로 다시 들어가고 이전에 누웠던 그 자리로 가고 싶어한다. 이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끊을 수 없는 사랑 운운하는 것은 참 웃기는 일이다. 그들의 삶 자체가 얼마든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런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잡혀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드러내 보여 주는 삶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에 있는지 한전 검열해 보기를 바란다.
저는 그 형제를 통해서 이 시대의 영적인 상황을 보여 주셨다고 믿는다. 제가 그러한 사람을 만난 것이 한 사람이 아니었다. 여러 해 전에도 집회를 했는데 은혜를 많이 받은 두 자매가 사전에 이야기를 한 것도 아닌데 똑 같은 이야기를 동시에 했었다. 즉 눈만 감고 기도하려고 하면 수 십 만 명의 사람들이 흐느끼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이었다. 차이는 형제는 눈에 보였고 자매들에게는 귀에 들린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동일한 것이다.
엎드려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깨어나게 하셔서 마음의 죄악을 정결케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그들의 영혼 위에 비취도록 만들어 주시니까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개안이 된 것이다. 그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오는 성경은 그렇게 넘어진 것이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그렇게 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사랑이고 사람들은 당신에 의해서 선택받은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붙잡혀 살아가는 자의 삶에서 볼 수 있는 삶의 풍성과 사랑의 충만함을 드러내 보여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강도가 떨어졌다기보다는 ‘불의’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의한 삶, 다시 말하면 죄악 된 삶 그것이 사람이 죽이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번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번영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었다. 주님이 주신 많은 기회들을 이 사람들은 불 신앙으로 갚았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수많은 은혜들을 이들은 하나님을 향해서 불 신앙과 원망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갚아버렸다. 그들의 죄악이 그들을 삼키고 그들을 엎드러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중대한 도전을 하고자 한다. 이 집회에 참석을 해서 은혜를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과거에 과연 은혜를 받은 적은 없는가? 과거에 은혜를 받으신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런가? 언제 까지나 계속해서 은혜를 주시면 감사하고 또 그 다음에는 은혜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 은혜를 열심히 털어먹고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실 수 있도록 기회를 들이기 위해서 자진해서 포복하고 이런 삶을 언제까지 살아가려고 하는가? 이것은 코미디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원인은 오직 하나이다. 즉 죄에 대한 진지한 생각을 갖지 않는 한 여러분들은 죽을 때까지 이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다가 생의 종을 친다는 것이다
목회자가 꿈꾸는 교회는 부흥회가 필요 없는 교회이다. 즉 부흥회를 하는 이유가 부흥회가 필요 없는 교회를 만들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수련회를 왜 하느냐 하면 수련회가 필요 없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 말씀 속에서 매주 깨달은 바대로 진지하게 죄와 더불어 싸워 가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다시 나올 때 감격이 살아있을 것이다.
오늘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죄에 대한 진지한 견해를 갖는 것이다. 이것이 없이는 어떠한 승리도 그리스도인이 삶에서 없다는 것이다. 매일 자기의 사정을 아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는가 이다. “하나님 내 사정 좀 알아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의 응답을 해 주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얘야 네 사정만 알아 달라고 하지 말고 네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배우라 그리고 너는 무엇이 너를 그렇게 엎드러지게 만들고 무엇이 엎드러져 있는 내가 그렇게 일어나기를 원하는데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너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에 대한 태도가 바뀌기 전까지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조금만 지각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그 진리를 깨닫고 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동물적이고 본능적인지에 대해서 혐오를 금할 수가 없다. 생각이 없이 진지한 것은 코미디이다.
이제 모든 것은 분명하다. 감추어져 있거나 비밀이 잇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와 그리고 여러분들이 감격하던 사랑, 불붙는 하나님의 긍휼를 알고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서 살아가자고 두 번씩이나 결심했다. 두 번 다 은혜가 작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 은혜를 얼마나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처음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죽을 것 같은 몸을 이끌고 무엇인가 알지 못하는 힘에 이끌리어서 하나님의 교회당에 들어와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자유를 얻었을 때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결심이 무엇이었는가? “주님의 뜻대로 살리라! 그리고 “주님 없이 산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주님 없이 산 나의 인생이 나를 이토록 고통으로 몰아 넣었으니 이제는 내가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았으니 모든 것을 잃어 버려도 주님 한 분을 붙들고 모시고 살겠노라.” 이것이 처음 여기에 와서 말씀을 듣고 감격하면서 결심했던 바이다. 우리는 이 결심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가? 우리들이 불의를 행하고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하찮게 생각하고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는 청구만 하면 마치 자판기처럼 기도라고 하는 버튼을 누르면 은혜가 쏟아져 나오고 헌금을 집어넣으면 하나님의 용서가 쏟아져 나오고 언제든지 아버지 앞에 철야라고 하는 버튼을 누르면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져 나오는 거처럼 생각한 그 미신적인 사고 방식을 언제까지나 청산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처음 하나님 앞에 왔을 때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마음속에 하나님의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닫게 되고 어린아이와 같이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고사리와 같은 손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겠노라고 주님을 향해 손들 때 우리들은 천사와 같았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자녀였다. 그리고 그것은 거짓된 맹세나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었다. 지금도 우리들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다.
저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보증할 수 있다. “하나님 다른 교회 교인들은 몰라도 우리 교회 교인들은 정말 그러합니다”, “주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버리고 살 수 있을 정도로 바보 같은 용기를 갖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약하고 약합니다.”
조금만 은혜로운 설교를 하면 울고 마음이 떨린다. 이것이 바로 약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등지고 용감하게 엎드러진 가운데서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러한 처음 사랑들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나야 하고 이전에 결별하였던 그 풍랑일고 어두운 바다로 다시 스스로 노 저어 항해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거기에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기 때문인가? 아니다. 스스로 가고 싶어서인가? 그것도 아니다. 무엇인가? ‘죄’ 라고 하는 바람이 우리들을 그리로 몰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으면 그 은혜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반응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일에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자기의 마음의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자기의 생각과 아집을 보화처럼 가슴에 품은 채 신앙생활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 앞에 하기 싫어도 자기를 죽이면서 해야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새로운 생명을 얻을 수 없을 그때에도 마음에 원함이 없을 때에도 용기 있게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삶 속에 죄가 발붙이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우리들이 받았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만약에 죄와 더불어서 싸우고 불의와 더불어 싸워 이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거나 자비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손으로 지은 그 죄와 불의한 삶이 그들을 찔렀고 그들을 상처 내었다. 그리고 스스로 그들은 자신들의 죄와 불의로 말미암아서 엎드려진 바 되었다는 말씀이다.
도무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에 없는 것은 추호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 신앙생활의 태도, 즉 교회 나오기 싫으면 나오지 않고 기도하기 싫으면 하지 않는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싶으면 듣고, 듣기 싫으면 그만 둔다. 그렇게 내 원하는 대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과가 하나님의 택한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와 같이 엎드려진 자가 된 것이다.
일어서서 주님의 깃발을 높이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내어야 할 백성들이 엎드려진 자가 되어서 밟힌 채 살아가는 그 모습을 한번 보아야 한다. 여기에 무슨 평화가 있을 수 있겠으며 여기에 무슨 신앙으로 말미암는 평강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평강, 모든 지각에 뛰어난 여호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평강은 내가 힘써서 신앙을 지키고 내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때에만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로소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요동하여도 거기에 미혹되어서 그 세상 장단을 맞추느라고 불안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진정한 힘이 그 평강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후로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살수밖에 없는 핑계와 이유를 하나님 앞에서 찾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들이 범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의하게 살고 거룩한 삶을 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들 안에 쌓이게된 모든 죄악에 대해서 변명의 구실을 찾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주시고 싶어했던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기신다.
정직한 것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최선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쓸데없이 사람의 동정을 구하고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그리고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평강을 약속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불의를 인하여 엎드려 졌다. 주님이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셨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이 무엇이었는가? 포도나무 하나를 따다가 정원에 심고 물을 주고 비료를 주고 가지를 쳐서 정결케 하면서 햇빛을 받게 하고 정성을 다해서 돌보는 농부의 마음은 오직 하나이다. 멋있는 잎사귀나 기다란 가지를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름답게 맺힌 포도송이를 보고 싶어서 그렇게 공을 들이고 정성을 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새로운 은혜를 주시고 놀라운 은혜를 부어 주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왜 죄 가운데 살다온 사람들, 예전에 승리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실패하고 아무 것도 아닌 인생처럼 살고 마지막에는 정말 죽을 것 같은 인생을 살다가 왔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의와 공로를 따라서가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이전에 모든 죄를 회개하며 나아가는 그 진실한 마음 하나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용서와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베푸셨다. 무엇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셨는지 생각해 보았는가? 왜 하나님께서 의롭지도 않고 올바르게 살다 오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있었다. 성도답게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이다. 왜? “찍어 버리지 않고 올 한해만 더 은혜를 주어보자, 그리고 소생시켜 주자”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소생시키셔서 이전에 많은 허물과 변덕 많기로 유명한 그 알량한 신앙 생활에 대해서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인 것을 보여 주셨다. 그래서 은혜를 주셨다.
그런데 이제는 어렴풋이 우리의 마음속에 혹시 은혜 주신 하나님을 원망하고는 있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을 때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의롭고 거룩한 삶이다. 이전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치료받지 않으면 안 되게끔 상처 나고 찢어지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방식대로 해봐서 이겨 보려고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진 것이다. 왜? 여러분들은 택함을 받았으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본분이라는 사실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을 적당히 실패하게 만드셨다. 이제 우리들은 옛날처럼 머리를 싸매고 협작하고 탈세한다고 해서 부자가 되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의 도움은 나밖에 없다. 너희는 나 없이 살 수 없는 인생들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에 깨닫게 해 주시는 것이다.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시려고 주님이 많이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셔서 당신의 마음을 보이시고 당신이 가지고 계신 우리를 향한 그 자비하신 마음을 그렇게 속살을 드러내듯이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우리를 위해 감추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가 몰랐기 때문에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주님은 여러분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이셨고 심지어는 우리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의 안목에 좋은 대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신앙을 팽개치고 살아가면 얼마나 곤고하고 헐떡이는 인생이 되는가 하는 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세 번 네 번 거푸 보여주셨다.
여우는 한번 걸린 덫에 두 번 다시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우보다 낳은 사람들은 왜 그 덫에 걸리기로 결심이나 한 것처럼 은혜를 받고 나서는 그런 죄악으로 돌진해서 걸려 넘어지고 또 은혜를 받고 나서는 즉시 그 올무로 돌아가서 전보다 더 비참한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이 악 순환을 되풀이하는 것을 하나님이 바라보시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 한번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신앙은 거의 무릎을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이것이 효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극적이고 동물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하나님은 너무나 싫어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만약에 우리의 자녀들이 말도 못하고 걸어다니지도 못하고 생각도 없고 매일 옷 입혀 놓으면 다 벗어버리고 강아지하고 뒹굴면서 놀고 돼지우리 속에 들어가 기러 다니면서 똥으로 얼굴에 범벅을 하고 돼지 밥통에 들어가서 헤엄이나 치는 삶을 산다면 우리들이 어떻겠는가? 아마 돼지우리에 들어가서 통곡하며 “너 죽고 나 죽자” 그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저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래가 캄캄하게 느껴진다. 제 마음에 깊은 무게로 다가온다. 즉 교인들의 나이가 이제 30, 40, 50대에 불과 한데 아직까지도 소천(所天) 하려면 수많은 세월이 남았는데 깨닫고 돌이켜 서서 영원히 종식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아도 씻어다가 도로 눕고 토했다가 다시 주어 먹는 생활이 계속 될텐데 저것을 치닥거리하면서 일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밖에는 내 섬김에 대안이 없는가? 요즘 제 고민이 그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자. 남편과 부인이 모두 인류대학을 나오고 이름을 대면 아는 사람도 더러 있는 저명인사이다. 확인 할 수는 없었지만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첫째 아들을 낳았는데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고 바보였다. 그래서 그 아이를 내다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안 그러신다. 정신병자처럼 돼지우리를 굴러다니는 그 아들을 불러다가 그 보혈의 피로 씻으시고 새 옷을 입히시고 새 구두를 신기고 가락지를 끼운 다음에 “사랑하는 아들아 이제 나와 함께 내 집에서 영원히 살자” 할 때에만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된다.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지난날에는 내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그러다가는 무슨 마력에 홀린 것처럼 아주 쉽게 그 은혜를 저버리고 다시 그 옛 생활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 생활을 즐기느냐 하면 그 생활 속에 들어가서는 찢어질 듯한 고통을 가지고 그 돼지 움막 같은 곳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또 부르게 된다.
이제 우리는 이런 생활을 종식해야 된다. 우리는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우리를 살려 주시고 우리를 건져 주셨다. 그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건져 주시고 엎드려져서 완전히 죽은 자와 방불한 자를 살려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죄를 위해 살지 않고 주님만 사랑하면서 변하기 쉬운 우리의 마음을 날마다 하나님 앞에 깨뜨리며 처음 그 마음을 가지고 주님 사랑하며 살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오늘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진실한 심령을 가지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긍휼과 자비를 보이시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을 이처럼 불러모으신 것은 비록 우리들이 하나님이 살려 주시고 구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불의 허물과 죄악으로 말미암아 잃어 버렸다고 하더라도 주님이 다시 불러 주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이 새롭게 살게 하시고 고쳐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우리들을 은혜의 보좌로 초청하신 것이다. 나는 우리들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는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가을에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면 우리가 완전한 삶은 살 수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치명상을 입고 주저앉아서 다시 옛 생활로 기어서 들어가는 패역하고 반역 무도한 삶은 되풀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연약한 것과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등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걸어 가다가 걸어 가다가 힘이 부족해서 주저앉는 것과 돌아서서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세상 길로 걸어가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연약할 때에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 보좌를 바라보면서 도움을 호소하는 그 연약함과 어려움을 만나서 거기서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고 하나님께 토라지고 대드는 마음을 갖는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그 사랑을 헛되어 알지 아니하고 그 사랑을 배반으로 갚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들을 건져 주시려고 짐승의 줄이나 사망의 줄이 아니라 사람의 줄 사랑의 줄로 묶어서 우리들을 여기까지 오게 하신 것이다. 주님 뜻대로 살기 싫어하는 우리들에게 “너희들 마음대로 해라” 하고 내버려 두셨더라면 이 시간에 모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주님의 사랑의 줄이 우리를 우겨 싸고 도망가고 멀어지려고 할 때에도 주님의 그 사랑의 줄이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한데도 우리에게는 그 사랑의 줄이 고통이 되어 다가 올 때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하심을 보이셨는데 우리에게는 그것이 속박이 될 때가 있었고 자유케 하시려고 깨닫게 하시려는 그 진리가 우리에게 쓴 뿌리가 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성실하시고 선하신 성품을 우리들이 잘못 이해하고 하나님의 그 변함없는 사랑에 대해서 우리들이 그릇되게 반응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한다. 우리들이 만약에 곤고해진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이 있거나 하나님을 향해서 토라진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우리들은 그 피로 더러워진 죄악의 손을 오늘 이 보혈에 샘에서 씻어야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비난받으실 일을 한 적이 없다. 그분에게 잘못이 있다면 가치 없는 우리와 같은 인생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주신 것밖에는 아무런 죄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아끼신 것이 무엇이 있는가? 무엇이든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다 주셨다.
저는 어느 날 한때 하나님을 향한 원망 속에서 교회당 앞에 엎드려서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있을 때 선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네게 주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라고 반문 하셨다.
주님은 우리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원망을 받으시거나 우리가 주님 앞에 등을 돌리거나 주님을 부당하게 해 드릴 만한 어떠한 일도 주님은 하신 적이 없다. 그분의 잘못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사랑은 포기되지 않고 있는 것이 그분의 잘못이라면 잘못인 것이다. 아무 것도 우리에게 비난받으실 만한 일을 하신 적이 없는 것이다.
그 사랑의 줄이 우리에게 고통이라면 당신의 피의 사랑의 줄로 우리를 묶으시는 데도 그 사랑을 모르고 고통 하는 자녀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찢어지시겠는가?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가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했고 그 사랑의 줄로 우리를 붙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친구 삼아서 사망의 이부자리에 누워서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보이시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주님 앞으로 다가가서 주님의 그 사랑을 배반하고 주님의 그 사랑을 불신앙으로 갚으며 살아온 모든 날들에 대해서 진실로 참회하고 새 사랑을 받는 우리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오늘 주님은 이렇게 완전히 실패한 자들을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고 계신다. 얼마나 애정이 담김 호칭인가? 이스라엘아 주님을 버리고 배반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번영의 기회를 패역과 불순종으로 갚은 이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따라서 타락의 길로 걸어가는 것을 가로막는 거침돌이었을 뿐이었다. 신앙의 길을 버리고 그릇된 길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불편한 존재가 없다.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자신의 삶을 감찰하시는 그 하나님의 시선이 버거워 지는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화목한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는 사실이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주님의 시선 앞에서 사는 이 비교 할 데가 없는 즐거움, 주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나의 서고 일어나심을 아시며 나의 눕고 일하는 모습을 아시는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사랑이고 기쁨인가하는 것을 우리들이 깊이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삶을 살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살지 못하게 하고 방탕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거치는 돌로 여김을 받으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스라엘의 이름이 떠올랐던 것이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 받아서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새롭게 알고 돌 단을 쌓으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하던 그때에 신앙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별로 없는 그 아들에게 영혼이 그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하시고 그리고 그에게 이스라엘이라고 불러주신 주님 얍복강 가에서 인생의 위기를 만나 그 앞에서 씨름하듯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불순종을 하다가 결국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거꾸러져서 눈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받았던 그 이름, 하나님을 이긴 자 이스라엘, 깊이 회개로 하나님을 이긴 사람, 깊은 회개와 통회하는 눈물로 하나님을 감동 시켜서 하나님을 이긴 그 사람, 이스라엘의 추억 어린 그 이름을 하나님은 자기를 거치는 돌로 생각하는 이스라엘 앞에서 부르고 계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인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주님을 거치는 돌처럼 여기면서 살아가도 우리는 주님 앞에서 거치는 돌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늘도 그 자리에 계셔서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다시 돌아오는 죄인들, 언제 다시 하나님 면전에 침 뱉고 돌아설지도 모르는 그 죄인들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면서 품에 안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오늘밤에 어찌하려는가? 하나님의 그 큰 사랑과 자기를 거슬리고 떠난 자들을 오늘도 불러 자기 앞에 세우신 이 사랑을 받아 드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 에게로까지 돌아오라”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 다 잃어버리고 주님이 갈아 입혀주신 옷은 돼지우리의 오물들로 전부 묻히고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형상조차 남아있지 않은 실패와 죄악으로 얼룩진 그 인생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일컬음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실수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아니라 결심하고 뒤로 물러갔다고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결심하고 뒤로 물러갔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스스로 버렸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참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도 역시 하나님은 네 하나님 이셨던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에게 반복되는 질문을 다시 하고 싶다. 하나님 없이 살수 있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곁을 떠나 보라, 그리스도 없이 살 수 있는가? 여호와 없이 살 수 있는가? 누가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 우리는 주 없이 살 수 없는 자들이다 세상이 없이는 살 수 있어도 주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하게 살든 악하게 살든 충만한 삶을 살든 메마른 삶을 살든 주님을 의지하며 살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반응과는 상관이 없이 주님은 우리를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백성으로 불러주시고 또 택해 주신 것이다.
우리는 이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만남은 숙명적인 만남이 되었다. 우리는 버려도 그분이 우리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버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비참하게 할뿐이지 하나님을 우리의 인생에서 추방하실 수 없게끔 되어버렸다. 그것이 고통스럽다면 여러분들의 최초의 실수는 주님을 영접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실수가 될 수 있겠는가?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사랑의 줄로 우리를 묶으신 그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비난을 받으셔야 되겠습니까? 오히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말하는 선지자의 음성 앞에서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가 타락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은 이스라엘과 방불하였지만 그러나 그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그 이스라엘의 네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시기를 마다하시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들이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오니 우리를 받아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오늘 마지막으로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네 하나님 여호와에게로까지 돌아오라”에서 ‘까지’ 히브리어로 ‘아드’라고 되어있는 이 ‘여호와에게로까지’ 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시께로 돌이키기를 원하시는 것이 얼마나 철저한 돌이킴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의 돌이킴은 철저한 돌이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처음에는 작았는데 기적을 보고 하늘 나라를 보고 온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창피해서 내 놓을 수도 없는 간증이었는데 한 참 살다 보니까 그 사람들은 땅바닥에 있고 나는 하늘에 있게 된다. 왜 그런가? 작은 은혜를 주셨는데도 그것을 가지고 끊임없이 주신 바 은혜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려고 노력할 때 그 은혜가 우리 속에서 창성하게 자라는 것이다. 맨 처음에는 씨앗이 떨어졌는데 줄기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나중에는 바람이 흔들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나무가 되어서 우리를 지탱하여 주는 것이 바로 은혜의 성장인 것이다.
그런데 은혜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죄도 자라는 것이다. 회개하고 아버지 앞에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해도 죄는 자란다. 그러니까 두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은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의 싹들을 남김없이 태워 버리고 다 뿌리 채 파내어서 집어 던져버려야 한다. 즉 철저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번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이제는 적극적으로 죄의 씨앗이 뿌려져서 성장하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아버지 앞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수많은 죄악의 씨가 뿌려졌다. 어떤 사람에게는 벌써 착상하여 뿌리가 내려졌고 어떤 사람에게는 바람에 불려 날아가 버려서 신앙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은혜라고 하는 호미를 가지고 죄의 잔뿌리들을 수시로 속아내야 한다. 언제든지 그 밭에 쪼그리고 앉아서 한 걸음 한 걸음 가면서 우리의 마음과 삶과 심령과 신앙을 다듬으면서 죄의 잔뿌리들을 거두어내서 언제든지 진리의 말씀의 씨가 뿌려지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그러한 삶과 마음의 밭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 대안이 없는 것이다. 늘 그렇게 노심초사하고 주님이 곧 오실 것처럼 신앙의 허리띠를 동이고 자지 말고 졸지 말고 그렇게 은혜 생활하면서 살아야지만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이 여러분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제는 주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신 거룩한 은혜와 사랑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되는 것이다.
2. 돌아온 자의 갈길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不義)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호14:2)
지난 시간에는 엎드려진 자의 갈 길이 어디인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확실히 우리는 영적인 시각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과 신앙을 보지 않으면 정말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앞에 두고 그렇게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특징은 영적으로 캄캄한 어두움이 그들의 친구가 되었다고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어둠 속에 들어가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빛 가운데 살려고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있기 마련이라는 사실을 오늘 우리는 기억을 하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앞에 사는 즐거움들을 배워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엎드러진 자와 같이 된 우리 자신들의 형편을 정직하게 살피고 그리고 하나님 여호와께로 까지 완전하게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오늘 2절은 우리에게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들이 어떤 마음을 갖게 되는지 또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자들이 어떤 삶을 찾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아주 명쾌한 해명을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이 2절에 숲 속으로 들어가야 된다고 믿는 것이다.
오늘 성경은 우선 우리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온 사람이 하나님 앞에 아뢰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말하기를” 하면서 두 가지를 말하는데 하나는 우리의 불의를 제하여 달라는 소원이고 또 하나는 선한 것을 받으소서 라는 말이다. 선한 것에 대해서는 그 뒤에 나오고 있는데 “우리의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겠나이다.”라는 대목이다. 그럼 우선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자는 제일 먼저 불의를 제하여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참다운 회개가 무엇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회개를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것과 동일시 하고 있다. 그러나 죄 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눈물 한 방울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질기고 생각보다는 얼마나 단단한지 우리들은 아직 잘 알지 못한다.
설교자도 처음에 은혜를 받고 신앙 생활을 할 때에는 보통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회개에 대한 생각이 성경적인 줄을 알았었다. 그래서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자백을 하고 뉘우치면 주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마음에 평화를 얻게 되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번 우리들이 정직하게 우리 자신의 이제껏 살아온 신앙생활에 있어서 회개라고 하는 것을 돌아보기를 원한다. 지금 말씀 드린 것처럼 그런 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즉 하나님 앞에 어떤 특정한 죄를 가지고 와서 마음을 다하여 통해하고 기도하고 깊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고 나니까 자유가 오고 기쁨이 오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경우도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그렇게 자유를 누렸는데 그 자유가 쉽게 없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었는가? 또 보다 더 많은 경우에는 죄를 짓고 자신의 그 죄가 잘못 되었다는 그 사실을 어느 순간 말씀을 통해 양심의 가책이 괴로워서 깨닫고 지실 했었다. 눈물도 쏟아졌다. 마음이 뜨거워 졌다. 그리고 그렇게 죄를 지은 것이 대단히 잘못 되었다는 참회의 마음도 들었었다.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를 빌었고 정말 주님께서 용서해 주셨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에서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가 끝났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이상하게 죄는 용서를 받은 것 같은데 그리고 나 자신도 진실하게 나의 죄에 대해서 회개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진실하게 회개한 그 죄가 회개와는 별도로 여전히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속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죄는 그렇게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눈물만 보면 도망가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은 아주 정확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들은 여호와께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여호와에게로까지 돌아왔다. 그래서 완전히 돌아왔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참회했다. 그래도 그들은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남아있는 그 불의를 제거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바램이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왔고 회개는 순간에 이루어 졌지만 그들은 이제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의 영혼을 억압하고 있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죄의 사슬과 영향력을 끊어 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그 존전에서 자기가 그 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묻었던 그 모든 더러움과 불의를 철저하게 세탁하고 정결케 되는 그런 기간과 일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는 요즘 회개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 앞에 자기의 죄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도 회개가 되지만 그러나 영혼 밑바닥에서 울어 나오는 회개는 참된 삶의 회개는 자기를 괴롭히던 그 죄의 영향력이 거의 박멸(撲滅)되었을 때 진실한 참회가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아무리 눈물을 흘리고 또 하나님 앞에 회개를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만약에 즉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말씀으로 여러분들의 삶을 모두 비추면서 그 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면서 여러분이 영혼 속에 묻고 또 영혼 속에 묻은 떼들은 하나님께서 즉시 씻어 주셨다고 하더라도 삶 속에서 계속 남은 그 더러운 죄악과 불의의 찌꺼기들을 하나님 앞에서 계속 정결케 해서 온전히 깨끗한 사람이 되기까지는 우리들의 참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회가 아닌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들이 하나있었는데 외아들이라 잘 길러 보려고 돈도 많이 주고 좋은 학교 좋은 옷 해달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 주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부모의 돈을 훔치고 또 유산을 축내면서 허랑 방탕한 세월을 보내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나오는 탕자와 같이 말이다. 이 아들이 허랑 방탕한 세월을 보내고 수많은 거리의 여자들과 난잡한 관계를 갖고 술과 노름 담배 마약으로 완전히 찌든 몸이 되었다. 죽음 문턱에 가서 자기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는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고 이제 그를 깨끗이 씻기고 새로운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신발을 신기고 그리고 잃어버렸던 그 아름답고 권세 있는 집의 아들의 위치를 부활시켜 주었다. 이제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는 완전해진 것이다. 새로워졌다. 그 아버지에겐 아들이었고 아들에겐 그 아버지였다. 그러나 거리의 수많은 여자들과 함께 즐기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에 지독한 성병이 걸렸다. 이것은 눈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방탕한 세월을 보내면서 알콜에 중독이 되었다. 돌아와서 좋은 옷을 입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했지만 여전히 그 알콜에 대한 생각 때문에 견딜 수가 없어 하게 된다. 만약은 또 어떠하겠는가? 그는 이제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와의 참다운 화해를 이루었지만 지속적으로 이전에 죄와 불의로부터 정결케 되는 과정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오늘 성경이 이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본문은 안일과 나태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 조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경종을 주고 또 눈물을 흘리고 다시 죄악 된 길로 걸어가고 다시 또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는 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세상으로 흘러가는 대책이 없는 그리스도인에 짐승처럼 반복되는 이 지리멸렬한 신앙 생활의 이유가 무엇인지 그 밑바닥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오늘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비결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정결케 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웅덩이에 담아놓으면 그 물이 신기하게 썩는다. 그렇게 깨끗한 물이었는데 썩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을 사기 위해서는 매일매일 하늘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물이 우리의 영혼 속에 부어져야 하고 혼신을 다해서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는 가운데 우리 중심에 있는 진정한 사랑이 세상과 이웃과 가정을 향해서 우리의 섬김을 통해서 흘러내려 가야 한다. 흘러 내려가고 위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가 부어지는 끊임없는 신진대사와 같은 영적인 교류가 영적인 은혜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영적 생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경건한 삶 이것을 통해서 계속 죽을 때까지 순환이 이루어질 때 그때에 우리는 건강을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많은 은혜를 받으면 우리는 무엇을 하겠는가? 정답은 하나이다. 이제는 썩을 육신을 위해 일하지 말고 잠시 있다 살아지는 세상을 위해 살지 말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여러분들을 죄 가운데 건져주신 살아 계신 그리스도 예수의 영예(榮譽)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하늘을 열고 우리의 영혼과 교통해 주시는 이런 참된 사랑과 은혜를 우리는 필요로 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시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신학을 많이 공부한 사람인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인가? 교회에 높은 사람인가? 모두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사람을 찾아오신다. 불의와 모든 죄로부터 피할 수는 없는 인생이지만 그러나 날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비한 가운데 진리를 받아드림으로 정결케 된 사람, 기도의 눈물과 성령의 불로 죄를 태우고 씻어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날마다 깨끗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왔던 많은 날 동안에 필연적으로 자기가 영향받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불의와 죄악으로부터 자기를 깨끗하게 씻고 그리고 정결케 되어서 깨끗해진 그런 사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보이시고 그리고 풍성한 하나님의 교제를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밀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위한 자원을 공급해 주실 그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종류의 삶을 살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으로도 그런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화) 목양실의 카세트 테이프의 밧데리를 갈고 난 후에 생생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던 이 야기.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너무나 간단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것만큼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충만한 생명적인 교제 거기로부터 우리에게 채워지는 그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과 생명이 떨어지면 분명히 테이프는 똑바로 집어넣었는데 즉 성경지식도 똑 바르고 아는 것도 많은데 살 때는 마치 테이프가 늘어지듯이 살게 되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 될 것 같으면 박사들이 천당에 혼자 들어가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면 우리들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한 번 마음을 툭 터놓고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 본적이 언제 있었는가? 우리는 요즘 자녀들하고 대화를 많이 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떠나는 해외여행 상품도 있다. 우리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찾아가서 아버지 마음에 있는 모든 말씀을 듣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드려 보았는가?
(예화)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를 가지고 약20분 동안 아세아 방송국에서 인터뷰한 이야기.
오늘날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이냐고 묻는 물음에 오늘날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청구 서를 낭독하는 것이고 성명서를 낭독하는 것 같다고 대답한 이야기.
참된 기도를 회복하는 길은 정결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께로부터 비춰오는 그 은혜로운 얼굴빛에 도움 없이는 충만한 기쁨, 그리스도의 빛 된 삶, 마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에 감사하며 이웃을 끌어안는 사랑의 삶 등이 모두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엎드러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정결해 지는 것이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깨끗해지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견고한 관계와 교제를 누리면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비결인 것이다. 누구도 이러한 교리에 있어서 예외가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이번에 깨닫고 많이 우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기도하실 때 “마귀야 이 회개로 너는 끝이다” 왜? “이전에는 내가 여기까지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지만 이제는 내가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로 참회한 다음에 나는 이것을 나의 죄를 모두 청산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이 시점에서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와 생명과 은혜의 빛이 내 영혼에 두루 비칠 때 까지 나는 피 흘리기까지 나의 불의한 모든 죄의 오염들을 씻어 버리고 정결하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 이것이 시작이구나 하며 자신의 모든 불의를 깨끗이 제거해서 언제든지 주님을 뵈올 수 있는 정결한 심령을 가진 정결한 삶을 소유한 여러분들이 도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선한 바를 받으소서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 하리이다.”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될 것인가? ‘선한 것을 받으소서’라고 하는 이 말은 일단 선한 것을 하나님 받으소서 라고 말하고 그 다음에는 뒤에 가서 그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세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바로 이 성경구절에 뜻이 된다. 히브리 사람들이 아주 잘 쓰는 표현 방법이다. ‘선한 것을 받으소서’ 그런데 그 선한 것은 우리의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 부분이 “우리의 입술을 젊은 송아지로 드릴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히브리 성경에 ‘파림’이라고 되어 있는 소는 일년 내지는 이년 정도 된 송아지는 지나서 한 창 힘이 있는 젊은 소, 즉 하나님께 바치는 최상의 제물이었다. 그런데 그 최상의 제물들로서 우리는 우리의 입술을 주 앞에 드리겠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단지 찬송을 부른다는 뜻이 아니라 서원을 하나님 앞에 갚은 것으로 많은 학자들이 해석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면서 언젠가 아버지 앞에 서원 했던 그것의 열매를 짐승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는 드리는 것이다. 입술로 이전에 하나님 앞에 서원 했던 것을 스스로 자백하며 삶으로서 그 소원을 갚는 것이 황소를 드림과 같이 하나님에게는 최상에 제물이라는 사실을 성경이 오는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진정으로 엎드러진 사람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아버지 앞에 자기의 불의를 제거하면서 하나님 앞에 보여 주어야할 삶은 하나님 앞에 서원 한 것들을 갚는 삶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영원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기 위해서 치루어야 할 대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없는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다.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어지는 것은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뉘어진 북 왕국 이스라엘도 긍휼히 여기셔서 똑바로 나라가 서면 하나님이 그들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으로 우리를 불순종과 불의로부터 건져내어서 당신의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서 새 사람 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원하시는 것이 있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그러한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알 때 그러한 사랑을 단지 받고 아무 것도 하나님 앞에 약속하지 않은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다. 이 서원은 단지 돈을 하나님께 얼마를 드리겠다든지 자식을 어떻게 하겠다든지 하는 것만이 아닌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주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깨달았을 때에 하나님 앞에 총체적으로 바쳐진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하나님에 말할 수 없는 사랑에 표현이었으며 우리를 향해서 불붙는 긍휼에 또 다른 한 표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약속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저는 요즘도 약속을 하고 있다. 새벽에 나와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은혜를 주시고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보이실 때 저는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한다. “하나님 남이 알지 못하는 이 크고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이시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끌어안게 하셔서 내가 더 정결하게 살겠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리면서 살겠습니다. 이제 내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것으로 모두 취하옵소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는 그 사랑이 밀려올 때 편하지 않는 속성이 있다. 지금 내게 없는 것은 앞으로 생길 것까지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드리고 싶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서원이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몰랐을 때는 몰라서 마구 살았다. 그리고 건조한 세월을 보내면서 고통 속에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깊은 깨닫고 나니까 이제는 그런 인생을 다시 살기가 싫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닫고 인생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 보람있는가 하는 것을 깊이 알게 되었을 때 그때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밀려오는 그 사랑 앞에서 항복했던 것이다. 항복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인생을 모두 하나님 앞에 바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취하셔서 나를 지배해 주시고 나를 다스리시고 나를 당신의 집에 품꾼으로 삼으시면 정말 주님을 일생 섬기면서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찬송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값을 줄 알아”왜 시원하지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늘 눈물을 흘리고 감격을 하지만 그것을 가지고는 마음이 흡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부어주신 은혜와 내게 부어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그 사랑이 나를 앞도 할 때에 나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만족을 누릴 수 없다. 그리고 주의를 돌아보아도 하나님께 바칠 것이 없고 내게 있는 것이라곤 몸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몸을 바친다”고 고백을 하는 것이다.
마음과 생각과 뜻과 성품과 지혜와 소유와 모든 것을 주님께 바치면서 살아가겠다고 우리는 모두 십자가 아래서 그렇게 맹세한 사람들이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런 순간들이 없었다면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다.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고 그 사랑 앞에서 감격해본 사람이 정말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그때는 모두 드렸었다.
(예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어느 지체의 헌금 겉봉투의 쓰여진 사연 “내 모든 것 주 의 소유 삼으소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경험한 후에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나의 영광은 내 모든 것을 주님의 소유로 삼으신 것입니다. 나는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돌려 드리오니 주님의 소유로 삼으시고 마음껏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일에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하는 것이 십자가에 참 사랑을 안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토해 놓지 않을 수 없었던 고백인 것이다.
우리들이 세겜과 같이 하나님을 떠나서 방탕하고 이방 신을 섬기면서 죽은 자와 되어버렸던 때에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고 벧엘과 같은 영적인 각성에 때로 올라가서 죄인을 용서하시고 다시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맛보고 감격한 후에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는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님 주님의 사랑이 너무 놀랍습니다. 이제 나는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의 뒤를 따라가겠습니다.” 라는 것이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을 맛본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 공통된 고백인 것이다.
그런데 그 서원이 오늘 어떻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서원은 해가 될 지라도 갚아야 하는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서원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복이 있지만 서원을 저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들은 어떠한가? 신앙의 고백을 너무 쉽게 토해 놓고 그리고는 그 고백에 대해서 도무지 삶으로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방종한 신앙 생활인 것이다. 사랑한다는 말을 억수로 퍼 붇고는 도장 찍고 등을 돌리는 이혼한 부부들처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그런 식으로 대접할 자격이 없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어떻게 우리들을 불의와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었는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약속한 것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를 돌아 봐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 앞에서의 약속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마다 하나님 앞에 할말이 없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여부에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구원의 약속과 은혜의 약속들을 견고히 붙드시며 식언하지 않으시며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약속대로 행하심으로 당신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보여오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정말 양식이 되었다. 아침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변함이 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고도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기를 좋아하고 물러가 침륜에 빠지는 것을 오락처럼 생각하는 우리들을 우리의 죄를 보고 대우 하셨다면 우리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설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과의 약속의 신실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신실하셨다. 아침마다 새로운 아침을 주시면서 참회에 때를 기다리시고 당신과의 사랑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은 인내와 신실한 자비를 우리에게 보여 오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그러한 은혜를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것이다. 충만한 사람, 그리고 성령으로 가득한 사람뿐만 아니라 곤고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 앙탈을 부리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셔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이다. 소망으로 충만할 때뿐만 아니라 비참한 마음으로 가득 찰 때에도 함께 하신 것이다.
저는 어렸을 때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마음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언제나 나와 함께 계시네” 이 찬송을 매우 좋아했었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향해서 신실하신 분이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릇된 길로 걸어가면 약속에 성취가 잠시 중단되는 경우는 있지만 참회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다시 하나님의 은혜는 역사하기시작하고 주님의 뜻은 다시 시동이 걸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더욱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 당신의 원하는 뜻을 이루어가서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보석과 같이 빛나고 갚진 인생이 되게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그 큰사랑을 받았을 때에 곤고와 사망에 그늘에 앉아서 고통을 받으며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살아 눈뜨는 그것이 고통이었고 사면을 돌아보아도 돕는 이 없고 우겨 싸이는 시련과 고통가운데서 하늘을 향해 눈물만 흘리던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건져주셨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건져 주셔서 하나님에게 고통을 능가하는 사랑을 보이시고 아픔을 뛰어넘고 초월하는 하나님의 그 광대한 자비를 우리에게 보여 주셨을 때 그 은혜와 사랑에 감탄하던 때를 기억해야 한다. 그때 우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그때 정신없이 말하지 않았었다. 차 오르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가득할 때 보다 우리가 더 온전해지는 때가 언제 있었겠는가? 그렇게 온전해진 그 때에 죽음에서 날 살리신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며 살겠다고 주 앞에 서원 했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마치 야곱이 잠깨어 일어나서 돌 단에 기름을 부으며 이 곳이 벧엘이 되게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던 거처럼 어디든지 주님이 나를 이끄시면 감사하고 의지하며 생명과 소망 주신 주님을 따라가며 살겠노라고 약속했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정말 하나님께 우리들에게 여호와가 되셨는가? 그리고 정말 그때 그 죽음에서 나를 살리시고 곤고와 쇠사슬에 메여서 마귀에게 종노릇을 하며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조차도 파괴되고 자신조차도 미워하는 구제 받을 길 없는 그 비참한 구렁에서 해메던 그 때에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던 감사하며 주님을 따라가고 신앙의 정절을 지키겠다고 하던 그 주님에 품안에서 나누었던 수많은 밀어(密語)들이 지금도 우리들의 삶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고난을 당하고 살 소망이 희미해질 때 우리 겉에 암도 없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보이시고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아주셨다. 곤고할 때에 우리를 어루만지시고 우리가 연약하여 아플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히 치료하시고 배고프고 목마를 때 가슴을 헤쳐서 우리에게 당신의 젖을 물리시면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우리가 자랑하되 약했던 밖에 자랑할 수 없고 우리가 많은 사람들에게 뽐내되 우리가 연약했던 것 이외에는 뽐낼 것이 없는 것은 우리를 여기까지 이끌어오고 우리를 우리 되게 만드신 것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과 인내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 품이 없었으면 우리는 지금 어떤 삶을 살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시기 원한다. 죄악을 향해 발빠르게 달려가던 부패한 본성과 우리를 유혹하는 세상, 우리의 영혼을 죽음으로 이끌어 가려는 대적하는 마귀의 세력들이 합작을 했더라면 우리의 영혼은 사냥꾼에 올무에 걸린 새와 같이 그렇게 비참한 처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 처지 대신에 주님이 당신의 품에 안에 주셔서 연약한 우리를 싸매시고 고치시고 그리고 말도 되지 않는 그 기도를 모두 받아 주시고 하나님을 향해서 일관성 없이 하나님 앞에 혹은 대들고 혹은 항의하고 앙탈을 부리고 혹은 토라지고 하는 이 모든 치기(稚氣)어린 모습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모두 받아 주셨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굴복시켰을 때 우리는 수많은 밀어를 주님과 나누었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약속에 약속을 거듭했다. “내 평생 사는 동안은 주 위해 살리라 주님에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사실 그때 우리는 그냥 좋아서 이런 찬양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왜? 주님에 품으로 돌아왔을 그때에는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형극(荊棘)과 같은 인생이었는지를 너무나 가슴 깊게 뼈저리게 생생하게 느꼈다. 주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그늘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생생하게 느꼈다. 그렇게 때문에 주님에 뜻대로 살겠다는 서원이 있었고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신을 드리겠다고 하는 헌신에 고백이 있었다.
지금은 그 때보다 조금은 났다. 그 때 우리들의 모습은 말기 암 환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이제 걸어서도 다니고 왕래도 하고 사람들이 보면 새 사람되었다고 말을 하고 이젠 교인 같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때에 찾아와 주신 유일하신 하나님 앞에 드렸던 그 약속과 서원의 밀어들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들을 간직하며 일평생 주님의 뜻을 좇아서 내가 생존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 때문에 주님이 근심하시거나 곤고해 하시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이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시고 소망을 가지시고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께 즐거움이 되는 인생을 살아야지만 지난날에 하나님께로 돌아온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돌아온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은 그것이 가능해 지겠느냐 하는 것이다.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삶을 살아야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이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갑을 수가 있겠는가? 오늘 성경은 “너희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되 하나님의 말씀을 가시고 돌아와서”라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이렇게 단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것이 아버지 앞에 순간에 폭발적인 감정을 토해놓는 한 풀이 식의 회개가 되지 않고 끊임없이 그 회개에 합당한 삶을 살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는 그 힘은 그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아오느냐 하는 것이다. 그가 만약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자기의 비참한 처지를 바라보는 동정하는 마음이나 감정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면 감정이 바닥날 때 하나님 앞에 한 모든 맹세와 돌이키는 모든 삶에 대한 소원도 끝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 말한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렸을 때에 이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이었겠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는 이야기는 너희는 나를 버렸다는 것이다. 너희는 말씀을 버렸다는 것이다. 엎드러지기 전에 먼저 성경이 엎드러지는 일이 우리의 삶 속에서 먼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뜻대로 살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이 진리를 향한 우리의 마음 진리를 향한 순수한 신자의 마음이 우리 가운데 엎드러지는 일들이 먼저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있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지탱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엎드러지는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뭔가 희귀한 것을 기대한다. 무슨 희귀한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그 진실한 사랑을 진리의 말씀을 좇아서 살아가는 그 일에서 발견하게되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 점을 기억하고 언제나 이러한 사고를 가슴에 간직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우리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우리들을 죄악 가운데서 건지고 영적인 어두움 속에서 구출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에 말씀 때문이 아닌 것이다. 만약에 고통스러운 삶의 상황이나 답답한 영적인 상황에서 벗어났다고 하면서 그것이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벗어 난 것이 아니면 우리들의 회복이라는 것이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가 어떠하였는지 한번 생각해 보야한 한다. 일 주일에 한번 교회 나와서 다른 교회 교인들과는 달리 정 자세를 하고 앉아서 졸지 않고 설교를 듣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선포에 주의를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 주었다는 이유 하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진리를 따라서 산 사람이요 진리를 붙들고 산 사람이요 진리를 의지하며 산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의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입었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깨닫게 하셔서 죽음에 그림자가 가리워진 사망에 음침한 골짜기에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신 그 손이 무슨 손이었는가? 누구도 끊을 수 없고 무엇으로도 잘라낼 수 없는 빗장에 에워싸여서 자기 나름대로 파괴적인 성벽을 쌓고 그 안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그 어두움에 빗장을 박살내고 우리들을 노예 되었던 그 자리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었다. 피묻은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하나님의 심정이 묻어있는 하나님의 진리의 성경 말씀이었다.
그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를 받은 다음에 얼마나 성경을 사랑했는가? 매일 성경을 읽고 있는가? 또 매일 한 두 장 읽는 것을 가지고 어디까지도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식의 성경 읽기를 가지고 우리들이 성도의 이름 값이나 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외우고 있어도 자기가 오늘 성경을 어디까지 읽었는지를 기억하지도 못하고 더군다나 끊어졌다가는 이어지고 이어졌다가는 끊어지는 그러다가는 아예 포기하고 교회에서 선물과 상품을 준다고 해도 쫓아오지 않는 그런 삶이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간 자의 삶이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생명을 누리기를 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이것은 거짓인 것이다.
저는 이 강단에서 이 생명이 다 하는 날까지 여러분들에게 여러분들과 저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이든지 저는 여러분들에게 진리를 증언할 것이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저도 그 사람을 아무렇게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태도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을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살았어도 그는 죽은 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받을 줄 모르고 주님의 말씀에 까막눈이 되어 있어도 그 무지 속에서 죄 가운데 살아가면서도 만족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을 삶으로서 등진 사람들인 것이다.
입술의 열매로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말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바도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약속할 수 있겠는가? 또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이 약속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주실 이유도 없는 것이다. 짐승과 같은 신앙생활과 결별하기 싫어하는 수많은 신자들을 매일 매일 볼 수 있다. 어떤 때는 마음이 너무 아파서 “어두움으로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이 아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목회자도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마음이 차갑게 식어져서 계속해서 동물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저 그들을 위해 기도할 뿐인 것이다. 그런 마음을 목회자에게 많이 남겨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좋게 보실 리가 없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내가 너희를 하나님께 말할 때마다 감사함으로 기도한다 나의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는 말보다 내게 더 기쁜 것이 없도다” 라고 말했다. 우리들이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며 살 동안에만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많은 사람들은 다시 넘어지게 된다. 혹시 이런 삶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고 있지는 않고 있는가? 바보 같은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은혜들을 잃어버리고 다시 뒤로 물러가고 침륜에 빠지고 다시 엎드러지는 일들을 되풀이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말씀에 대한 참다운 사랑이 우리들 속에 식어 가는 일들이 생기게 된다.
요즘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면서 황홀해 하고 행복해 하는 지체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모습은 가히 천사와 같다. 그리고 우리들 모두 그런 때가 있었던 사람들이다.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고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엎드러지기 전에 먼저 일어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읽어도 그 말씀이 눈에서만 어른거릴뿐 도무지 마음에까지 들어오지 않게 된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성경을 읽으면 잠이 잘 오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무엇 때문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가? 우선 무엇 때문에 그런지를 깨닫기 전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 말씀에 대해서 말씀 속에 들어있는 참다운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는 이러한 영혼의 상태, 그러한 신앙생활에 마음가짐, 이것은 신앙 생활에 거의 모든 기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귀는 우리들을 물리적으로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우리의 마음이 식어져서 진리에 귀 기울이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초만 흔들어 놓으면 그가 성경을 가지고 다니든지 성경을 읽든지 교회에서 봉사를 하든지 교회에서 집사가 되든지 마귀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지 않게 된다.
그가 더 중요한 자리에 있으면 있을수록 그는 더 훌륭하게 자기를 위해서 기여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가 어떠한 위치에 있고 또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것이다. 수많은 방법들이 여기에 동원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을 수 없는 개인적인 사정이 있고 육체적인 환경이 있고 개인적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영혼의 상태가 되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언약을 맺고 내가 그 죄악과 죽음의 어두운 그늘에서 십자가의 보혈로 건져내어서 나를 사랑하며 살도록 구원해 낸 내 백성인 네가 마음으로 나의 말에 청종(聽從)하고 여호와에 입에서 나오는 모든 진리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아멘하는 삶을 지금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드리지 않게 되었느냐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모두 버려야 한다. 아무리 우리 주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받아드릴 수 없게 하는 모든 일들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그러한 외부적인 요소들과 손잡지 않는 한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말씀으로부터 멀어지는 생활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들이 약하기 때문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근심스러운 일들이 일어나도 도무지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너무 고통스러운 육신의 아픔이 계속되어도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싫어하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그 어떤 생각이 거기에 손뼉을 딱 마주치는 동조가 있어야지만 말씀이 우리 들에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자에 대해서는 핑계를 댈 수 있겠지만 그 후자에 대해서는 누구도 핑계를 댈 수 없는 것이다. 왜? 우리 마음의 주인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나님께 예배하는 이 자리에서도 세상에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길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의 주인은 우리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지 않을 때 모든 원인이 자신의 마음과는 상관이 없이 외부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풀리면 말씀이 귀에 들어오는가? 나를 고통스럽게 하던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 말씀이 들어오는가? 그것과는 상관이 없다.
오히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일에 고정되어있고 주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거기에서 공급되는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즐거움을 알고 있다면 오히려 우리는 방해하는 일이 일어나거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일들이 일어날수록 더 말씀에 집중하고 붙들면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이다.
시련이 다가오고 환난이 오게 된다. 그런데 그들은 시련이 오고 환난이 오면 그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돈 문제는 돈을 구하러 다녀야 할 것이고 사람이 없는 것은 사람을 찾아 다녀야 하는데 정말 고난과 어려운 시련이 올 때 하나님의 말씀에 편에 선 사람들은 성경을 찾으면서 거기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게 된다. 나의 삶, 나의 인생, 나의 마음, 나의 심령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싶어하고 알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더욱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표현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 속에서 살아가기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 그것을 요약하자면 자기 속에 있는 모든 더러운 불결을 제하여 버리고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추격하던 죄와 세상 사랑에 영향을 완전히 밟아 버리고 그래서 비록 살아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삶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못하게끔 이기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감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말씀 속에서 날마다 소생에 은혜를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과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온 삶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삶을 유지하기 전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런 삶을 살도록 당신의 백성을 부르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을 본다. 그런데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것은 하나님이 이런 기대를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라보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들은 지금 머리부터 발끝까지 썩을 대로 썩고 타락할 대로 타락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는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기대를 거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 하나님의 기대이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정직하게 호세아서를 읽어볼 때 우리는 이 기대가 하나님의 대단한 착각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게 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 그들은 완전히 썩었다. 도덕적으로 모두 황폐한 천지가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제는 이 백성들을 보고 가끔 절기에 나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 백성들 속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정한 모습과 정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니었다. 세상 백성들과 같이 되어 버렸다.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과 함께 먹고 마시고 방종한 삶을 살아가서 하나님께서 계셔야할 자리에 우상을 대신 놓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대신 계셔야할 자리에 자신의 탐욕과 죄악들을 신상처럼 섬기면서 살아가는 회복이 불가능한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이렇게 돌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은 그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이 이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너희는 돌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면 우리에게는 더 분명하게 돌아올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들이 황무하게 되어버린 우리의 신앙의 묵은 땅을 기경(起耕)해야 될 때인 것이다. 안일하게 살고 죄 가운데 산 사람, 육신의 욕심을 따라 죄의 씨앗을 뿌리며 산 사람들의 마지막 결국은 너무나 슬프다.
그러나 영생의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를 좇아서 주의 의의 도구들로 산 하나님의 경건한 백성들의 미래는 그야말로 잠시 이 세상에 살면서 받은 고난과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성도의 생애에 마지막인 것이다.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 이렇게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생명을 누리게 되시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돌아온 자가 구할 것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 신이라 사지 아니하오리니 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긍휼(矜恤)을 얻음이니이다 할지니라(호14:3)
우리는 지난 시간에 두 시간에 걸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는 불붙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있다. 지난 시간에는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그는 불의를 제거해서 정결케 되기를 구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여야 했다. 그리고 곤고한 날에 하나님 앞에 맹세했던 서원들을 갚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은 진리의 말씀 앞으로 돌아옴으로써 가능해 진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렇게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 것을 하나님이 바라시는가 하는 것을 3절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다. 오늘 이 선지자는 다소 우리에게 낯선 표현으로 시작을 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며 또 말을 달리게 하지 않을 것이며 라고 말한다. 다시는 우리 손으로 만든 것들을 향해서 우리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며 우리 고아들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돌봄을 얻는다고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정말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이 먼저 살아야 될 삶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오늘 이 북왕국 이스라엘이 이제 한창 번성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 호세아의 예언 사역의 기간은 40년이 가까이 되는 굉장히 긴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이 호세아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 때의 그 찬란한 국권을 자랑하던 때부터 이제 서서히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고 이제 그 나라가 점점 기울어져 가는 때까지 모두 지켜보면서 장기간 예언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이스라엘의 그 찬란하던 국권이 고조되었던 국운 상승기가 지나고 이제 점점 나라가 쇠퇴하고 어려웠던 때를 염두 해 두면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고 있었던 세력이 있었다. 그것은 앗수르라고 하는 나라였다. 역사적으로 ‘앗시리아’라고 하는 나라이다. 새롭게 일어난 이 나라는 끊임없이 북왕국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제 팔레스타인 쪽으로 접근하기를 원했다. 지형을 잘 볼 것 같으면 이 이스라엘 나라는 남쪽으로는 치고 올라와서 아시아 쪽으로 이렇게 뻗어 나가려고 하는 애굽에게 교두보가 되었고 또 북방에 있는 민족들에게는 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면 이제 나일강이 있는 애굽 쪽으로 내려 갈 수 있는 중요한 교두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 되니까 여기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싸움이 있었다. 정확하게는 헤아릴 수 없지만 어떤 역사가는 추산하기를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났던 유사이래 큰 전쟁만 5만 번이었다고 하니까 아마 인류역사에서 그렇게 싸움을 자주 한 지역은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치열한 패권 다툼이 있은 곳에 샌드위치처럼 끼여 있는 나라가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모압, 압몬, 에돔, 블레셋, 아람 등 많은 나라들이 어떤 때는 이스라엘에게 복속되거나 혹은 이스라엘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어떤 때는 위협이 되고 반기를 들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이 살아 남기 위해서 앗수르에게 사람을 보내고 또 환심을 사면서 자신들이 앗수르에게 잘 보여서 침략을 받지 아니하고 공격을 받지 않으려고 그렇게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을 펼쳤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매우 슬프게 보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 “말을 달리지 않을 것이며” 라고 되어있는데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 기마 부대의 말을 애굽에서 수입을 해 다가 사용하였다. 그래서 “말을 달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은 자신들의 나라의 안전을 위해서 애굽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표현인 것이다. 예로부터 외교와 국방의 원칙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원칙이다. 즉 가까이 있는 나라와는 이해 관계가 첨예(尖銳)하게 얽혀있기 때문에 싸워야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는 화친을 맺어서 함께 협력해서 자기의 국가적인 이익에 배치되는 가까운데 있는 나라들을 공격하는 것이 늘 외교사에서 있어오던 방법이었고 이스라엘도 역시 이런 방법으로 살아 남기를 원했던 것이다.
멀리 애굽으로 사람을 보내고 거기에 기마 부대를 불러 들여서 국가적인 곤란과 어려움 속에서 자신들을 구출해 보려고 했던 시도는 북왕국과 남왕국 유다의 역사에 있어서 종종 있었던 일이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는 매우 슬픈 일로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너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여호와에게로 돌아오기까지 너희들이 진심으로 참회하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왔다면 이제 너희들이 이런 삶을 청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이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왜?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냥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말씀이 아니다. 그들이 왜 앗수르에게 자신들의 나라를 보호해 달라고 애걸을 하고 왜 하나님을 믿지도 아니하는 애굽의 사람들을 불러 들여서 국가의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왜 그들이 그런 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 외교적으로 보고 정치적으로 볼 때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볼 때는 문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것이 있다.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나에게 순종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니라” 고 말씀 하셨다. 그리고 이 약속은 천하 모든 백성과 나라들에게 주신 약속이 아니라 오직 독특하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여 내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독점적으로 주신 약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나라 어느 백성도 받아 본적이 없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 율법 속에서 당신이 바로 이 나라 당신이 바로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친 하나님 되시고 참 아버지 되신다는 사실을 친히 들어내 보여 주시고 또 그렇게 역사 속에서 당신을 나타내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임마누엘의 백성이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이 세상에 모든 나라 이스라엘과 비슷한 이 세상에 모든 열방과는 구별되는 나라였다. 인근에는 이스라엘보다 마병이 많고 장관들이 많고 백성들이 많은 나라가 많았다. 땅이 넓고 많은 군대를 거느린 나라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나라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는다.
임마누엘에 백성,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백성,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강대한 나라도 그러한 독특한 특징을 가질 수 없는 그런 나라 그래서 그들의 역사 그들의 삶을 통해서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친히 보여 주시고 싶어했던 나라, 그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땅이 넓거나 군대가 많거나 영웅(英雄)호걸(豪傑)들이 많은 나라가 아니었다. 그저 역사 속에 나타났다 사라진 지극히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우리 나라에 몇 개의 도(都)를 모아 놓은 것 같은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나라를 통해서 당신이 어떻게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당신 자신의 백성들의 역사를 통해서 온 인류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실 것인지를 그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이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역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영광은 영토나 많은 말이나 수많은 백성이나 군대나 영웅 호걸이나 이런 것에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최고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앗수르로 달려가서 구원을 청했다. 그들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앗수르로 달려가서 무릎을 조아리면서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를 살려 달라고 주여!, 주여! 하고 불렀을 때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 하여야 했다. 애굽의 마병들을 청원하고 애굽의 원군(援軍)들을 원할 때 그들 마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너무 슬퍼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진실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면 너희들은 이제 이런 과거의 삶을 청산해야 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 조국교회에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외치고 싶은 한 마디의 말씀이 있다. 그것은 “자존심을 가진 백성들이 되라”는 것이다. 얼어 죽어도 양반은 겨불(사과 괴짝의 왕겨로 피운 불)을 안 쬔다고 하였다. 즉 불같지도 않은 불 옆에서 상놈들하고 같이 어깨를 비비면서 다투지를 않는 다는 것이다.
하늘에 위업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존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곧 죽어도 뭔가 정신이 살아있고, 곧 발길로 체여도 벌떡 일어나는 예수의 정신에 사무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타협하는 그 지점에서 세상에 손을 뿌리칠 수 있는 그런 용기 있는 담력과 배짱과 거룩한 자존심, 발은 땅에 딛고 이 세상에 살아도 우리의 눈을 하늘을 보고 살기 때문에 더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신령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면서 살수 있다라고 하는 이러한 믿음, 이러한 사랑, 이러한 인내, 이러한 소망, 이러한 것들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들어내는 삶을 살고 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는 그리스도인 이라고 담대하게 말하고 살고 있는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며 살기 위해서는 거기에 부합하고 부흥하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간단하다. 뒷심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믿는 것이 있어야 배짱이라고 부린다. 그리스도인이 믿을 때가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 밖에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 신앙생활을 개떡같이 하니까 내가 아무리 믿는다고 요즘 내가 살아가는 꼴을 볼 때 내가 아무리 믿는다고 그래도 하나님께서 불성실해서가 아니라 나의 버릇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가 믿사오니 해도 내 삶이 믿사오니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믿어도 물을 먹을 것이라고 하는 피해 의식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세상을 붙잡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지조를 하나 둘씩 잃어버리게 된다. 결국 마지막에는 창녀 같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 자존심을 기대하느니 개에게 인격을 기대하는 것이 훨씬 빠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하나님을 온전히 의뢰하는 삶을 살지 못하면 그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과연 예수 믿는 사람의 기준을 무엇으로 재어야 하는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천국은 마치 바다에 그물을 친 것과 같으니”라고 말씀 하셨다. 그물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즉 쓸만한 물고기만을 추려내는 것이다. 알곡들을 골라내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분명하고 정말 하나님을 향해서 의지하는 살지 않기 때문에 뒷심이 없고, 뒷심이 없으니까 거룩한 자존심은커녕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니까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의 향기가 난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통해서 온 천하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볍게 여김을 받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예화) 깊은 기도를 경험하라 방송 인터뷰. 기도에 있어서 시급한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 는 기도가 시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한 이야기. 즉 그 사람이 삶의 초점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삶의 이유가 하나님께로 초점이 맞춰져 있지가 않은데 그가 무 엇을 기도하든지 하나님께서는 신경을 쓰시겠느냐 하는 것이다.
기도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한 방법을 통해서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하나님 앞에 얻어내거나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부식 창고를 담 너머 들어가서 흠져 가지고 나오는 것이 기도가 아니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서 아버지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이 이루어 드리는 것이 기도라고 정의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하여 삶의 동기나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인생이 되야 될 것인지 하나님 앞에서 정립이 되지 않았는데 그 가 무엇을 기도하든지 하나님께서 신경을 쓰시겠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어떤 사람의 기도는 잘 들어주시고 어떤 사람의 기도는 안 듣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느낌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도 내가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대는 삶을 살고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도 이제 주님 중심으로 살고 싶어서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실 때 그 때에 자존심이 생기는 것이다.
4세기의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자기를 너무 핍박하고 진리를 증거한다는 이유 때문에 자기를 너무나 박해하니까 그는 담대하게 “세상아 네가 나를 버리려느냐 그렇다면 나도 너를 버리노라”라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을 의지하는 심령이요 그것이 주님을 의지하며 걸어가는 인생길이 아니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죄악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삼키고 영적인 어두움이 그들 앞에 드리워졌을 때 그들은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분을 의지하기보다는 사람을 의지하고 도무지 자신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인생과 방법을 의지하는 길에 마음을 쏟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께서 마음 아파하시는 일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하여 눈이 멀었기 때문인 것이다. 주님은 영이시니 보이지 아니 하시는 분이시요, 하나님은 영의 눈이 뜨여진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이 보이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도단성에서 일어났던 엘리사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다. 아람 군대들이 이 전쟁만 일으키기만 하면 자신들의 모든 작전을 영감으로 알아 맞추는 선지자를 찾기 위해서 도단성을 새카맣게 에워쌌다. 엘리사의 종이 아침에 일어나서 절망하며 주인인 선지자에게 말한다.“아 주인이여 우리는 이제 큰일이 났습니다. 이 놈들이 우리를 새카맣게 에워쌌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자기들을 에워싼 아람군대들만 보았다. 그 때에 엘리사는 평안하게 말했다. “열려하지 마라 우리와 함께 한 군대는 저놈들보다 훨씬 더 많다” 무슨 소리인지 이 종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드디어 답답한 선지자는 기도해 주었다. 그리고 영안이 열리게 되었다. 그들은 엄청나게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도단성을 에워싼 그 위풍 당당한 그 기병과 보병들이 새카맣게 벌떼처럼 에워쌌는데 그들을 포위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군대는 실로 장엄한 군대였던 것이다.
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살아 사는 사람들의 눈에만 보이는 것이지 죄 짓고 하나님 앞에 세상을 사랑하면서 하나님과의 순결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살겠다고 약속했던 헌신의 서약들을 잃어버리고 혼인의 맹약도 저버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정말 믿을 만한 분이신지가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구차하게 앗수르와 애굽의 바지 자락을 붙들면서 그렇게 비참하게 노예처럼 살아가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저는 신학을 마치고 목회의 길로 들어서는 후배들에게 늘 만나면 해 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자존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교인들에게 밥 많이 얻어 먹지 말고 분수에 넘치는 것 얻어 가지려고 하지 말고 공짜 좋아하지 말아라 이것이 몸에 온전히 베어서 무릎을 꿇고 성도들을 섬기고 동료들을 섬기는 것은 나중 일이고 우선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밥을 굶었어도 냉수를 마시고 정장을 하고 이수시게를 물고 나갈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향해서 그렇게 해야 된다. 포부 당당한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에 명예는 없고, 학식은 부족하고, 가진 것도 없지만 그러나 이 편법이 유행하고 불의가 창궐(猖獗)하고 요령을 부리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성공하고 득세하는 이 때에 정말 올바른 길을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이 자신의 뒤를 밀어 주시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외롭지만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불의와의 타협을 거절하고 걸어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다고 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며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주님만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에 없는 백성이다라고 하는 것이 가슴에 깊이 사무치지 않으니까 주님과의 관계를 아주 하찮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믿는 것이 너무 많고 사랑하는 것이 너무 많고 의지하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인 것이다. 주님 앞에 자신의 인생이 모두 드려진 사람, 주님의 손이 나를 붙드시면 나는 살고 주님이 나를 버리시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믿는 절대 의존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의 눈빛 하나에 절망과 희망을 갖는다.
누군가가 저에게 사랑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눈물에 씨앗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사랑이 무엇인고 하니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의 눈빛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르내리게 하는 힘이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세상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세상이 자기를 버리려고 할 때 어떠한 태도를 가지는가? 세상 사랑하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을 것 같을 때 보이는 태도는 마치 부모가 잠시 어디를 가도 입술이 새카맣게 질리며 우는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이다.
(예화) 어느 코미디언이 폭락하는 인기를 보면서 자살한 이야기.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인간이 사랑하는 것에 의지하는 것에는 이렇게 약한 것이 인간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면 세상 눈빛 하나에 살고 죽는 것이다. 세상 눈빛 하나에 죽고 사는 것이다. 세상 눈빛 하나에 신앙 생활이 뿌리 채 흔들리고 세상 눈빛 하나에 삶의 기반 자체가 마구 뒤흔들리는 그런 삶을 산다고 해서야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다. 시인이 시편에서 고백했던 것처럼 무엇인가 기도가 안되고 왠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충만하여 주의 사랑이 나를 살게 하지 못하는 영혼의 어두운 날들이 계속 될 때에는 고뇌하는 것이다. 하나님 때문에 전전긍긍(戰戰兢兢)하는 영혼,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부족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목마른 갈망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목마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눈빛과 시선 하나에 모든 희망과 소망을 걸고 살아간다.
주님이 나를 슬퍼하신다 라고 생각할 때에는 그 시로 내 인생은 없는 것이다. 즉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데 밥이 넘어 가겠느냐 내가 무슨 인생에 즐거움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주님이 은혜의 햇빛을 주시면 우리의 죄악을 씻기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과 자비를 보이신다.
주 예수 얼굴 영광이 해 같이 빛나네
해 같이 빛나네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니까,
이 세상에 친구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면 그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를 보고 홀로 있으면 홀로 있기 때문에 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충만하신 하나님의 임마누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오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있어 참 의지할 분이 누구인가? 우리의 언행에 있어서 많은 상처와 고통의 과거는 의지할 바가 못되는 것을 의지했기 때문에 받은 상처가 우리의 상처의 역사였던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묻고 계시고 있다. “너희는 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자녀들인데 너희는 오늘날 누구를 의지하며 사느냐” 이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성도의 삶으로 돌아갑시다.
이어서 선지자는 우리에게 두 번째 고백을 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간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즉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을 우리 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 사실은 ‘신’이라고 번역이 되어있지만 그 단어는 그대로 ‘하나님’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
이것은 우상을 섬기던 과거를 청산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간 사람들은 그런 우상을 청산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들은 창세기 35장에 나왔던 야곱을 찾아오신 하나님, 벧엘로 올라간 야곱의 가족들의 역사를 기억하고 계실 것이다. 야곱의 집안이 큰 위기를 만나고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집안이 세겜 족속에 습격을 받을 위기에 놓여 있어서 멸문지화(滅門之禍)면활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야곱과 만나 주셨다.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자 비로소 어두웠던 영에 눈이 뜨여지고 자기가 세겜에서 살았던 십 년 내지 이십 년 되는 어간의 모든 삶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난 삶이었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벧엘로 올라가기 직전에 온 가속(家屬)들을 모아놓고 결심한 일이 세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신을 정결케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또 하나는 의복을 갈아입는 것이었고 마지막 하나는 우상을 버리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 여호와께로 돌아온 모든 사람들은 즉시 자신의 모든 죄와 허물과 이 우상이 놀랍게 결탁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은 부처나 신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에게 탐심이 곧 우상 숭배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형체를 지닌 주상(鑄像)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만약에 우리의 사랑을 드리는 그 무엇이 있고 하나님을 뛰어넘는 그 어떤 사랑을 바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모두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명(自明)한 것이다.
야곱의 집안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경건한 집안이었던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이다. 그가 세겜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그 단을 명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었다. 즉 이스라엘로 말하자면 ‘하나님 곧 나의 하나님’이라고 이름 붙인 제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하는 것으로서 세겜의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야곱이 깨닫고 나서 자기의 모든 식구들에게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했는데 히브리 성경에 들어가 보면 그 우상은 ‘우상들’이라고 하는 복수로 나오게 된다. 그래서 그 당시에 역사와 문화를 연구한 고고학자들의 보고에 의하면은 크게는 2미터 내지 3미터나 되는 우상부터 시작을 해서 휴대용 우상까지 다시 말하면 작은 연필 깎기 만한 우상까지 크기가 다양한 우상이 수없이 발견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 복을 받고 그것을 가지고 다니고 그것을 대하여 기도하면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그러한 신앙 때문에 그 이방 사람들의 신앙을 본받으면서 그렇게 우상을 숭배하며 살아갔던 것이다.
이러한 우상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나니까 집안에 돌아다니는 조각품과 같은 그 수많은 우상들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은 신기 편한 신발과 같은 것이다. 즉 눈감고 살아가는 영적인 소경된 생활이 그렇게 익숙하고 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이라고 하는 것은 신지 않은 하이 힐을 신고 걸어보는 것처럼 그렇게 힘겨운 것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면서도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선지자는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너희들이 만약에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 진실하고 그리고 너희들이 진실로 하나님에게로까지 돌아왔다면 너희들은 이제 주님보다 사랑하는 우상들을 버려야 된다”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의 사랑은 어디에 있는가? 저 개인적으로 예를 들자면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일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제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보다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사랑하는 것을 원하신다.
그래서 실패한 베드로를 불러서 예루살렘교회의 목회자로 삼으실 때에 소명에 광경이 우리에게 두고두고 보석과 같은 교훈이 된다. 시몬에게 앞으로의 잘 할 것을 다짐하시지 않으셨다. 교회를 사랑해야 할 것을 묻지 않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즉 영원히 계속되는 질문인 그것을 물어보신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가? 만약에 우리들이 교회 나오는 이유가 교회에서 교역자들이나 구역장들이 전화하기 때문이라면 신앙생활이 너무나 비참한 것이다. 내가 떠나면 목사님에게 상처를 주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라면 너무 비참한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하고 주님을 경배하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주님이 그것을 기뻐하시고 주님을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 내게 즐거움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될 때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인격적이고 기쁨이 있고 은혜가 충만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처럼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들을 타파(打破)해야 된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 이외에 다른 것들은 주님을 위해서 얼마든지 허비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것이 바로 온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 하나님 앞에 엎드려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사랑에서 실패한 과거가 있기 때문에 엎드려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정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자비를 보이시고 당신을 전심으로 그리워하는 자들에게 당신이 우리 인생들에게 얼마나 뛰어난 만족이 되시는지를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이렇게 당신만 사랑하면서 살기를 원하신다.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받고 싶어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만들어질 때에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며 사는 것으로만 당신이 만들어 놓은 이 피조물인 인간들이 행복해 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주 옛날을 회상해야 한다. 만족하거나 그릇된 만족에 빠지기 위해서 자기의 의에 흐리기 위해서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입증되었는가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는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활용해야 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의 지난 경험을 생각해 보자. 멀지 않은 신앙생활이지만 우리에게는 첫사랑도 있었고 다시 돌아온 둘째 사랑도 있었다. 이런 사랑의 과거가 다 있었다. 그것이 어느 때이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참된 만족을 누리던 때가 있었을 것이다. 주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만족이 되고 하나님의 참 사랑이 내게 있기 때문에 만족하던 그런 때가 있었을 것이다.
(예화) 가난하던 시절 직장생활을 하던 이야기. 통근 버스를 타며 하루에 500원을 가지고 살 았던 이야기.
하나님께서 내게 진정한 만족이 되니까 세상에 결핍이 나로 하여금 불만족하게 하는 원인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주님으로 우리 자신이 충만하고 만족하지 않으니까 세상에 있는 작은 결핍이 우리의 가슴에 엄청난 구멍을 만들어 놓는다는 것이다. 돈이 조금만 없어도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있다고 기고만장(氣高萬丈)해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거나 슬픈 일을 만나면 휘청거리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몰라한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불쌍하고 가련한 모습을 보시면서 물으시는 질문이 있다. “너희의 믿음이 어디 있느냐?” 그 말씀은 곧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 여호와는 누구냐?” 하고 물으시는 것과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만 사랑해야할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너무 사랑하니까 주님이 나를 만족하게 하시는지를 알기 때문에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참으로 찬송하고 경배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예화) 직장 다닐 때 원고를 써주고 많은 원고료를 받은 이야기(1장 당 4000원).
내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니까 그런 것을 주셔도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고 세상의 것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면 주실 수록 그것 때문에 더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그리고 또 주시지 않으면 안 주시니까 마음이 갈리고 나뉘어져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5장에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이 적절하고 확실한 것이 되는 것이다. “있는 자는 더 가지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하나님만 사랑하면서 그분께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신자의 삶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은 고통이 다가오면 고통 때문에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래서 마귀의 속을 태우게 한다. 또 하나님께서 풍족하게 주시면 주신 것 가지고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까 내가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지 라고 생각하므로 마귀가 절도하게 만들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께로부터 떨어뜨려 놓을 수 없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이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정말 하나님이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면 마지막 결국은 형벌이 중지된 것이 아니라 옛날처럼 주와 함께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역사를 쌓아 가면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어서 우리들이 그 사랑으로 그 사랑의 위대한 힘으로 이 세상에서 우리를 향한 미움도 이기고 사람들의 우리를 향한 도전도 이기고 그 사랑을 밑천으로 우리가 자존심도 세우는 삶도 살고 그 사랑의 힘으로 불결한 것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밑천 없이 우리들이 과연 살 수 있는가? 우리는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얼마나 대단한 은혜를 받았는가? 또한 그 은혜마저 얼마나 쉽게 쏟아 버리지 않는가? 이러한 우리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워하시겠는가?
다윗은 이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임금이 된 다음에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고백할 때마다 늘 “나는 가난하고 비천하오니”라고 고백했다. 양치는 자를 붙들어서 이스라엘에 목자를 삼으시고 위대한 임금 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셔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유일한 이유이다. 그리고 그가 소유하게 된 물질, 명예, 평판 사람들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들어서 세워 주신 그 과정에서 얻어진 부속물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붙들고 계신 것을 염두해 두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많은 부귀와 영화, 사랑하는 많은 백성, 하나님께서 그를 놓으시면 마치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도망을 가다가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욕을 하고 침을 뱉고 저주하였던 것과 같이 그렇게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삶을 택하고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 더 귀하다” 이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고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죽으려고 태어난 사람들인 것이다. 여호와께로 까지 온전히 돌아와서는 일평생 변함없는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런 행복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제 호세아 선지자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에는 무엇인가 자기의 처지를 자각하게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줌으로서 오늘의 본문을 끝맺고 있다. 오늘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이는 고아가 주께로 말미암아 은혜를 얻으니라 할지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나면 그 돌아온 사람들의 마음에 비로소 자기의 처지가 어떠한 처지인지를 아는 자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상적으로 하나님께 돌아온 다음에는 회고한다는 것이다. 그 부를 누리고 영화와 번영에 때를 누리던 여로보암 1세의 영광을 모두 보았던 태평성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고백하기를 “하나님 우리는 고아였습니다”라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인가? “하나님!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군대도 있었습니다 유능한 임금도 있고 태평성대(太平聖代)도 있었고 환락(歡樂)도 있었고 쾌락도 있었고 육신이 필요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없을 때 우리는 고아와 같은 자들이었습니다.”라는 고백인 것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고아(孤兒)가 얼마나 비참한지 알고 있습니까?
(예화) 가정법원에서 이혼한 부부의 자식들의 비참한 모습을 법원 관계자들에게 들은 이야 기.
오늘 그런 상황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잃어버리면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상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엄마가 시장에만 가도 시퍼렇게 질리는 아이가 언제 다시 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길거리에 버림을 받았을 때에 그 절망적이고 비참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래 그랬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르고 돈과 명예와 군대와 부강한 나라와 형통한 살림, 이런 것들을 보면서 스스로 부요 해져서 하나님 앞에 고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는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그의 백성들에게 깨닫게 해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우리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지만 경험할 필요도 없이 우리는 종종 하나님 앞에 범죄하거나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기 때문에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거나 혹은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을 때 우리는 버림받은 영혼의 비참함을 보게된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로 진정 돌아왔다면 너희들이 주 없이 살아왔던 모든 날들이 고아와 같은 삶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부모를 찾아 주는 것이다. 우리들이 만약에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고아와 같이 되어버렸다고 하면 그 길거리와 같은 세상에서 아버지를 내게 돌려 달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하나님께서 자비의 성품을 보이시는 것이다.
혹시 우리들이 부모가 버린 고아의 처지가 되었는데도 거리에서 불량배들이 건네주는 사탕을 빨아먹으면서 버림받은 아이의 처지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날도 저무는 그 길에서 정신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고 있는가? 우리는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이다.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우리는 여호와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뜻한 식탁이 있고 아버지의 참다운 사랑이 있고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어머니와 같은 교회의 돌봄이 있는 그리고 동기간들이 모여 있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서 그 빛 아래서 우리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당신과의 관계로 돌아올 사람들을 기다리시면서 오늘도 우리를 고대하고 계시는 것이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조리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 다오
이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오늘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 돌아가서 고아와 같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청산하는 것이다.
4. 돌아온 자를 고치심
내가 저희의 패역(悖逆)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호14:4上)
지난 시간에는 이제 하나님께 돌아온 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거룩한 자존심이 있는 백성들이 되어야 하고 또 하나는 이제 우리가 사랑하는 우상들을 버리고 주님만을 사랑하고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렇게 하나님께로 나아오는 가운데 우리가 누구인지를 진실하게 자각하게 되는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말씀을 드렸다.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돌아온 자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는가? 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우선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세 개의 중요한 동사가 4절을 이루고 있는데 하나는 고치리니 또 하나는 사랑하리니 그리고 또 하나는 떠났음이니라 이다. 이 세 동사가 4절에 중요한 문맥을 이루고 있다.
우선 첫 번째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자의 패역을 고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늘 나오지만 은 우리가 흔히 쓰지 않는 단어인 ‘패역’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패괴할 ‘패’자에 거스릴 ‘역’자이다. 즉 패괴하게 무엇인가를 거슬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을 히브리어 본문에서 보면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배교’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삶, 삶으로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그렇게 인정하는 것, 그것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패역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배울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정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모든 삶으로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첫 걸음이다. 만약에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온전히 인정하지를 않는다면 그 삶은 역시 패역한 삶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늘 성경을 보면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리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마치 병자를 고치시는 것처럼 패역을 고쳐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이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기를 결심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셔야 할 일이 남아 계셨는데 그것은 그들을 부지런히 치료하고 고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여기서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실은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사는 것은 질병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공경하며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정상적인 신앙의 생활인데 그런데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미끄러지고 뒤로 물러가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안이하고 불순종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고백하면서도 삶으로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은 것처럼 안아 무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사를 결정하거나 무엇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자기의 인생을 지켜보시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자비로 자신을 건져내어서 하나님의 백성 삼으셨다 라고 하는 이 기본적이고 중요한 신앙의 사실들이 전혀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삶, 이것이 바로 질병과 같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질병에 걸리게 되면 병에 걸린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불신앙이 우리의 삶 전반에 걸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깊이 경외하면 그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경외 심히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 미치는 것처럼 하나님을 거슬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우리의 삶 전체적인 것에 영향을 주어서 우리의 삶 전체 나아가서는 우리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슬리고 사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보면 저 사람은 저럴 수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이제 이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전능하신 하나님, 완전하신 하나님은 고사하고 우리 같이 부패한 죄인들이 보아도 그의 삶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대부분 질병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흉악한 죄인들이라도 그 사람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나름 대로에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패역에 질병에 걸리지 않도록 우리가 스스로 신앙 생활의 건강을 늘 챙겨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6개월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건강 검진을 받으면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을 드물 것이다.
(예화) 배가 자주 아픈 어느 목사님이 약국에서 소화제만 먹다가 나중에 병원에 가서 맹장이 터진 발견하였지만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약화되어 결국 돌아가신 이야기.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혼의 건강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며 신경을 쓰고 있는가? 만약에 여러분들을 다 세워 놓고 주님이 건강 진단을 할 때에 어떻겠는가?
이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질병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개념이다. 살다가 연약해서 한 번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즉 잘 살려다 실수해서 짓는 그런 죄가 아니다. 결심하고 그 죄를 떠나서는 못 살 것 같이 삶의 이유가 죄에 있는 것 같이 거기에 집착하면서 계속 살아서 어떤 죄와 함께 하는 부패하고 완고한 어떤 성향이 생겨서 그 성향을 따라서 삶이 흘러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처음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주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작은 질병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그것이 점점 자리를 잡고 힘을 발휘해서 그 다음에 사람들 속에서 질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사람 가운데는 암 세포가 없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10만개까지만 있어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개수가 넘어가서 어느 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나면 그 곳에 암이 생긴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범사에 온전한 신앙을 가지고 범죄 없이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 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신앙의 인물로 살아 남는 비결이 된다. 그런데 실제로 살다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고 그러면서도 이따금 범죄하고 미끄러지더라도 그 사람이 살아가는 경향 그 자체가 어찌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나는 살 수 없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렇게 패역이 그를 주장해서 악하고 완고한 성향을 만들어 내어 삶을 파멸로 몰고 가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매우 심각한 경우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패역은 우상 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질병과 같은 거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병들어 있는 인간을 마지막 고치는 것이 사랑을 통해서 고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곁을 떠나서 이렇게 패역이라고 하는 질병에 걸려서 주님의 놀라운 보혈의 피로 속죄함을 받은 사람들인데도 이렇게 완고하게 오히려 하나님을 거슬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도 사랑을 통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애굽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조상 적부터 한 번도 정착해서 살아 본적이 없는 민족이었다. 즉 그들의 생업인 목축업을 위해 목초 지를 따라 해안과 구릉을 따라 돌아다니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애굽의 종살이를 거쳐 가나안 땅을 약속 받고 애굽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그 길이 광야의 길이었다. 그러니까 성전조차도 이동식 천막이니까 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늘 유리하고 방황하는 그런 삶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두드러진 문명이나 문화라고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가나안은 고대 문명의 발상지였다. 즉 거기서 구가하고 있었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것이었다. 즉 정착된 농경 생활을 통해 이룩한 많은 부와 철기문화를 보면서 기가 막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땅의 문화에 대한 흠모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부유한 문명 뒤에는 배경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발이라고 하는 농경 ‘신’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고민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신 유일하신 여호와라고 하는 절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문제가 되지 않는데 이 사람들은 그런 신앙을 견지하지 못하고 그 당시에 항상 유행하던 지역신의 개념을 가졌다. 즉 그 당시의 사람들은 신들이 지역을 분할하여 다스리고 있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부뚜막에는 부뚜막 신이 있고 변소에는 변소의 신이 있고 장독대에는 장독대 신이 있고 하여튼 너절한 신이 많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하고 광야에서는 대단한 신이었지만 여기서는 하나님만 가시고 안 될 것이다 는 생각이었든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지만 가다가 신앙이 떨어지니까 하게 된 생각일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가 굳이 이 땅의 토착 신에게 미움을 살 필요가 있겠느냐 하면서 바알과 여호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기로 생각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태도로 패역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질병과 같은 모든 패역은 그러한 하나님을 배반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유는 하나님 한 분을 온전히 의뢰하는 신앙의 상실인 것이다. 그래서 선지서를 읽어보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논쟁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희는 날 버렸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냐고 항변한다. 즉 제사를 드리고 번제를 드렸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만 사랑하고 나만 섬긴 것이 아니면 그것은 날 버린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바로 버린 그것이 패역인 것이다.
우리는 패역이라는 단어를 오늘날에 모습으로 보면 예수 믿다가 다 때려치우고 술 마시고 담배피고 나쁜 짓하고 놀음하고 돌아다니는 패륜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 모든 패역의 시초는 우상 숭배에서부터 왔는데 그 우상 숭배의 동기 자체는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가지 못하는 불신앙 거기서 이것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활이 쉽게 이야기하면 요즘 말로 양다리 걸치는 신앙생활인 것이다. 그것이 오래도록 계속되면서 아예 굳어 버리고 어떤 성향을 갖게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삶, 사고, 살아가는 모든 삶에 있어 다양한 결정들,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원리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그 원리가 바로 하나님도 좋아하고 세상도 좋아하는 그런 양다리 걸치는 결정을 하고 양다리 걸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것이다.
이런 것이 하나님에게는 패역으로 보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 앞에 어떤 제사를 드리고 어떠한 행사로 하나님 앞에 나아 오던지 주님이 물으시는 것은 제일 먼저 내 마음이 나에게 바치어졌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들이 내게는 유일한 백성이다. 하나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밖에는 없는 것이다. 내게 있어서 이스라엘 너희는 유일한 백성들이다. 그런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유일한 하나님이냐고 물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문제를 남의 얘기를 듣듯이 해서는 안 된다. 요즘 말로하자면 교회를 잘 다니면서도 이런 패역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허물이나 연약함에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만 섬기며 살지 않기로 뜻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세상에 마음을 섭섭하게 해 주는 상황이 벌어지면 신앙을 버릴 준비를 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뜻을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뜻을 쫓아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뜻을 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말릴 수가 없다. 성경이 뭐라고 이야기해도 중요한 것은 자기가 정한 그 뜻이다. 뜻을 정한 사람은 누구도 쉽게 말릴 수 없다.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다. 그 길을 향해서 걸어가고 그 길을 향해서 돌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불신자들의 모습이나 아니면 신앙생활을 하다가 극단적으로 타락한 자들의 모습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제가 설교 속에 패역이라고 하는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데 그때 그 단어의 의미를 여러분들은 이런 식으로 알아 들어야한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대신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양다리를 걸치면서 아예 그렇게 살기로 뜻을 정하고 우직하게 그 한길을 걸어가는 일에 자신을 바친 사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이 돌이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인간이 얼마나 돌이키지 않으려고 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시 바란다. 좀처럼 돌아서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의 질병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다시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든지 교회밖에 있든지 하나님께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실 것이다.
왜냐하면 어차피 교회 안에서도 치료받기를 거절하려고 뜻을 세운 사람들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는 교회를 다니고 연보를 하고 직분을 맞고 하는 모든 것들이 자기의 의가 되고 있다. 점점 치료의 선상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한없이 불행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이런 패역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리가 없다. 마지막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참 하나님의 백성이었는지 그렇지 않은지 들어내시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는 부드러운 마음이라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 밭이라든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늘 나와서 주님의 은혜에 목말라 한다든지 아버지 하나님의 도움에 대해서 목말라 한다든지 순간 하나님의 그 넘치는 사랑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느낀 다든지 이런 것들은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다.
저는 이렇게 살아있다고는 하나 사실은 죽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 본문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이 그들을 고쳐 주시는 것이다. 그 어디에도 아무런 희망도 없는 것이다. 정말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비참한 것이다. 그러니까 삶에 있어서 어떤 열매라든지 신앙을 통해서 얻어지는 어떤 진실한 수확이 없는 것이다. 십 년, 이십 년 신앙생활을 했는데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사악해지고 그리고 오래 신앙생활을 하고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더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내 주되신 주를 더 사랑하게 됩니까? 사랑하기는커녕 고루한 생각과 신앙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 뱀이 꽈리를 틀고 둥지에 앉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그 사람의 인격을 지배하고 성경이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나는 나대로 살겠다 라고 하는 우직하고 더러운 고집들이 신앙생활을 대변하고 있는 않는가? 그러한 모습들이 오늘 날 우리들의 교회의 모습인 것이다.
거룩해져 가는 기쁨이 있는가? 죄로부터 정결해져 가는 즐거움이 있는가? 아니면은 날마다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 가는 기쁨이 있는가? 교회를 섬기는 요령은 늘어가고 많은 문제 속에 시달림을 받아서 이력은 늘어가지만 그러나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은혜의 감격에 잠기는 그런 진정한 사랑, 그런 것들이 정말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 병이 얼마나 깊은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치료받기를 거절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주님을 사랑하거나 신앙이 동기가 되어서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하나의 인습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패역에 마지막 결과이다. 패역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감동이 없다. 돌멩이와 같이 굳어 버린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앞에 집중할 줄 모르는 마음, 그리고 자신의 영혼의 핍절한 상태의 모습을 보면서도 그 핍절한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셔야할 그 은혜 앞에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발 빠르고 모든 감각이 깨어나면서도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는 모든 감각이 반응하기를 아예 포기해 버린 이런 사람들, 이것이 바로 패역한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깊이 고통 하는 마음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된다. 이런 사람들이 너무너무 많다. 만약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건강한가 하는 표준을 이 시대에 있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에게 맞춘다면 그것은 마치 폐병 환자들을 많이 입원한 요양소에서 자기가 건강한가를 이제 3기 4기 말기에 들어간 사람들과 자기의 건강을 비교하려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대해서 참된 신앙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축복과 하늘의 신령한 복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눈을 뜨고 우리가 그것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패역을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의 치료하심이다. 그러니까 가끔 부흥회를 한다든지 아니면 감동적인 어떤 일을 본다든지 하면 은 그러한 패역한 그리스도인들도 눈물을 흘린다. 왜냐하면 거듭난 인간에게는 영적인 본성이 있다. 그래서 주님 뜻대로 살아 갈 때는 기쁘고 즐겁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 갈 때에는 고통스럽고 기분이 좋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인 본성을 통해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만 은 패역을 고칠 수 없다. 우리는 회개에 대해서 진지한 견해를 가져야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발적으로 혹은 정말 하나님께로 마음이 정해졌는데 연약하거나 피할 수 없는 일로 잠시 순간적으로 범죄 하는 일들은 깊이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면 씻겨질 수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패역의 길이 눈물 한 방울로 씻겨 지겠는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이다.
여기서 ‘고친다’라는 단어는 의사가 치료한다는 단어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치시는 것이다. 의사가 깊은 병에 든 사람을 어떻게 고치는지 생각해 보자 속이 다 문 들어져 썩어버린 그 사람을 데려다 놓고 간단히 치료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칼로 파내고 필요하다면 팔을 잘라 버리고 필요하면 다리를 끊어버린다. 왜냐하면 사람의 목숨만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지속적인 치료의 과정들이 필요한 것이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질병과 같이 패역한 길을 걸어가면서 정말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런 오랜 시간 하나님께서 그를 근본적으로 고치고 변화시키는 과정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한번 경험의 눈을 들어서 한번 우리들과 관계된 주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기 바란다. 그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떠오르는 그 사람들이 질병과 같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완고해진 패역한 상태에서 돌아와서 이젠 어린아이와 같이 정말 어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즐거이 주님께 순종하며 따라가는 생명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고침을 받는 사람들을 일생을 살면서 몇 번이나 보았는가?
잠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자기를 비출 때 자기가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리고 격렬한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패역에서 고침을 받는 그 길은 그렇게 순간적인 느끼는 종교적인 체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패역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 불결과 더러움의 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시간을 생각해 보면 오래된 그 기간 속에서 그의 영혼은 죄와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과 아버지 하나님을 거슬려 살고 싶어하는 그러한 그릇되고 거짓되고 잘못된 성향으로 깊이 굳어지게 되었다. 근원부터 칼을 대고 들어내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렇게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몇 번 눈물 흘리고 반짝 몇 번 은혜를 받다가는 그 다음에는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것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자기의 상태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것은 깨닫고 눈물을 흘렸지만 은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삶으로 만들어 주실 때까지 주님의 치료하시는 행위가 필요한데 그 과정을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잠깐 동안 하나님 앞에 감동이 있었다고 하는 말씀이라든지 잠깐 열렸던 기도의 문이라든지 이런 것들이 닫혀 버리는 것은 순간의 문제이다. 그 긴 역사 그 오랜 정통에 빛나는 그 불순종과 패역의 길이 바뀌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 우리들이 이 신앙의 연조가 일년 지나가는 것에 대해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연조는 자랑할 것이 못된다.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리라”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고치시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너희가 돌아와서 이제는 여호와에게로까지 완전히 돌아오고 돌아온 다음에는 내가 너희를 고치겠다는 약속이 있으니까? 그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제는 어저께 말씀 드린 바와 같이 거룩한 자존심을 가지고 주님만 의지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그리고 주님께만 소망을 걸고 “우상이 나를 버리고 가나안의 농경 사회가 나를 버려도 주님이나를 지키고 계시는 한 나는 만족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보호만이 있으면 나는 살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이러한 절대 의존적인 신앙의 고백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고침 받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 앞에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가 잠시 감동을 받아서 그가 아버지 앞에 받게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에서 받은 지극히 작은 것에 불과 한 것이다. 오랫동안의 패역, 오랫동안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사는데 이골이 난 그의 삶, 그의 마음의 성향, 그의 모든 더러운 찌기 들을 온전히 영혼과 인격과 삶 속에서 깎아내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어떤 극적인 회개를 경험하고 어떤 놀라운 참회를 경험하고 어떤 신비한 시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다시 사랑하게 되었든지 간에 만약에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치료를 받는 마음으로 영혼과 여러분의 삶과 그리고 우리들의 생활 깊이 뿌리가 박힌 이 패역한 길을 쫓아서 살려고 하는 더러운 죄의 본성과 근성들을 도려내려고 하는 하나님의 치료의 복종하는 삶을 살지 안이하면 우리들의 감동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들을 성도의 삶을 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 같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진지한 생각이 필요하고 내가 한 순간 한 순간 나를 죽음 가운데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매 순간 순간 죄를 버리고 거룩한 삶을 쫓아가는, 이 순간 하나님께 내가 속하는 이 신앙생활이 생명처럼 고귀하고 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그 길이 모두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닌 것이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삶이 우리도 살 수 있는 삶이 아닌 것이다. 패역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도 산다. 세상에는 인정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고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고치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에는 하나님 혼자 고치시는 것이 아니라 고침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일이 없이는 고쳐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이 말을 안 믿는지 모르겠다. 정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이것이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기껏 도움이 된다고 하는 것이 불치의 병에 걸리면 성경 구절 몇 개나 외우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면서 그것을 신앙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말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패역한 삶에서 돌이키는 그 일들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포기하는 것이다. 신앙의 껍질밖에 없으면서도 그것이 마치 신앙의 모든 것을 통달하면서 사는 것처럼 살아가는 줄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말한다. 그 말은 옳은 말이다.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라
내 일생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러니까 참된 가지고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축복을 주시고 아무리 많은 은혜를 부어 주셔도 성도들의 공통된 고백은 “죄 많은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그게 이 세상에서 고달프고 시달리다가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도와주시고 고난과 위기 속에서 건져주시는 감격을 경험하며 감사하며 살던 사람들이 마지막 고백한 것이 주님이 아무리 많은 은혜를 주셔도 “주님 저는 제 즐거움이 이 땅에 없습니다” 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것은 장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용을 잘 계산하라고 말씀 하셨다. 싸움을 할 때 먼저 상대편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가를 생각하고 집을 지을 때에는 집을 짓는데 드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을 신중하게 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제 그런 생각을 하나님 앞에 하면서 이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것들을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깨끗한 삶, 그리고 오랫동안 주님 없이 살았던 이 패역하고 방종한 이런 삶들을 하나님이 완전히 고쳐주시기를 갈망하는 삶, 이런 것들을 아멘 하면 기쁘게 순종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치료하시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들이 한 두 번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는 안 된다. 말씀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으면서 우리들 속에 있는 부패한 성향이 씨가 마를 때까지 죽어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안일하고 잘못되고 방종한 삶을 살던 것들을 천국의 복락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돼지와 같이 미련하고 사망이 눈앞에 기다리는 평안보다는 상급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고통받고 불안에 삶을 오히려 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도록 끊임없이 하나님께 매달려서 그 말씀에 은혜 그 기도의 은혜 그 사랑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밖에는 희망이 없다라고 하는 견고한 신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과연 얼마나 유지하는가?
죽음에서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큰 은혜 그리고 그 죄악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어떻게 미쳤는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란다.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인도하셔서 오늘도 하나님이 패역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심판의 불을 지피시는 대신에 “내가 너희를 고치리니”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질병을 안고 살아가는 자녀의 그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시고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장기라도 떼어서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 주시려고 하는 아버지의 성품이 느껴지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치료를 약속하고 계시다는 사실이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치료가 바로 오늘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늘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고 감동이 있고 주님 뜻대로 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렇게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그리스도인 그래서 주님의 신실한 사랑이 가슴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참된 신자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눈물과 감동이 필요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님이 충분히 고치실 수 있도록 수술대 위에 충분히 누워있어야 한다. 고통이 있어도 견디며 참고 마취가 떨어져도 이를 악물고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하게 고치시면 내가 이제는 이전과 같이 건강한 사람들 틈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그런 삶이 아니라 내가 정말 건강한 사람으로 치유되어서 하나님 앞에 정말 훌륭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참아야 되는 것이다. 주님이 그런 패역을 깊이 고쳐 주시고 그렇게 어루만져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는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깨달은 바를 여러분들이 지난 삶의 모든 것들을 지켜보면서 이제는 정확하게 자신을 진단하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디 가서 서야 되는지를 깨달아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이전에 그렇게 하나님을 거슬리고 죄 가운데 살아갈 때에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그러한 뜻을 세우는 일을 이번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수술대 앞에서 그렇게 뜻을 세우면서 주님이 여러분들의 패역을 온전히 고쳐주셔서 하나님의 그 큰사랑이 강물과 같이 우리를 에워싸고 그래서 단 10년을 살다가 죽더라도 정말 사는 것처럼 그렇게 자유롭게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들어내고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것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하나님께 돌려드리고 나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자기의 모든 살을 찧고 피 흘려 주실 때에 구원받는 우리를 향해 거셨던 그 기대를 따라서 한번 살아 보겠다고 하는 이런 소망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살아 온 날들을 생각해 보자. 언제 우리가 우리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시고 자시의 살과 피를 찧고 흘려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향한 사랑과 감동은 늘 있었다. 그러나 정말 그 사랑과 감동대로 한번 살아 드린 때가 얼마나 있는지 우리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입술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순간순간 마음에 다가오는 감화를 받으면서도 우리의 삶은 도무지 그 감화에 걸맞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고백에 어울리지 않는 신앙생활을 살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에게 아픔이 되고 고통이 되는 이런 삶을 언제까지 살아가야 되겠는가?
오늘 우리는 숙명처럼 살아가는데 하나님께서는 폭풍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치리라!” 이렇게 고침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돌아온 자를 사랑하심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호14:4下)
하나님이 지난 시간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돌아온 자를 하나님께서는 고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진정한 새로운 삶은 단지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주님을 떠났던 불순종과 죄의 길에서 굳어질 때로 굳어진 우리의 삶을 고치는 일들이 필요하고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생명 주기를 가로막았던 우리의 영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잘못된 습관, 잘못된 삶, 그리고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려 살려고 하는 이러한 사악한 본성들은 질병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리고 이것들은 치료를 필요로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치료가 필요한데 그것을 가르쳐서 호세아 선지자는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며”라고 말씀했던 것이다. 결국 진정한 의미에 새로운 삶은 우리의 죄의 길을 깊이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에는 정말 그 동안 하나님 앞에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지나면서 지었던 여러 가지 불의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영혼들이 정결케 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거슬려 살기 좋아하고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으로서 인생의 낙을 삼는 그러한 지속적이고 뼛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고 하는 본성들을 고침 받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새 삶이 되는 것이다. 눈물을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고침이 우리들에게 정말 필요하고 그렇게 될 때에 사람이 백합화와 같이 피어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그런 복된 인생을 살게되고 그럴 때 비로소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변화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시간에 강조했던 바는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비용이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와서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고치는 과정은 비용이 많이 든다. 때로는 배를 가르고 다 들어내야 한다. 이것이 너무 너무 힘든 것이다. 그러니까 형식만 남겨 놓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구체적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새 사람이 되는 길을 감히 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좋은 그리스도인 주임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만들고 싶어 하셨던 그런 그리스도인 주님에게 사랑 받고 그 손에 붙잡힌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고침을 받아서 마음속에 새로운 경향성이 생겨나야 한다. 새로운 감동이나 느낌뿐만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강력한 경향이 생겨나야 한다. 즉 옛날에 죄 가운데로 살고 할 수 없으면 하나님께로 피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굉장히 고집스러웠다.
(예화) 전철을 타고 직장을 다닐 때 역 계단에서 넘어진 이야기.
인간이라는 것이 강력한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새 삶을 산다라고 하는 것, 새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 완전히 하나님께로 돌아왔더라고 하는 의미는 그 경향성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을 떠나서 주 없이 혼자 사는데 취미를 가지고 돌진하던 그 사람, 가끔 신앙적으로 살도록 하나님께서 환경을 움직여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삶을 고집하던 그런 경향성을 하나님을 위해서 새롭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새로운 삶에 들어선 사람이다.
가끔 어려운 일이 닥쳐서 믿음대로 살지 못하는 일이 생겨도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내면의 경향성들이 생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우리를 고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려고 하는 그러한 일들이 어떤 때에는 괴로울 정도로 집요하게 계속 될 때도 있다. 말씀을 들으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진지해지고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가중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픈 부위에 손대시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 병들을 고쳐내어 이전에 패역을 돌려내야 된다. 그리고 나면 곧 죽을 것 같아도 새 살이 돋아나고 새 사람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사람들이 견고하지 못한다. 이 교회를 세우고 나서도 견고, 인내, 굳게 서는 것에 대해서 참 많이 설교했다. 많이 설교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회중들이 그 부분에 약함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이유는 눈물이 부족했거나 받은 은혜가 부족했거나 깨달은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쳐지는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충분히 고쳐지면은 견고하다.
(예화) 칼빈의 고달픈 생애와 부인의 마지막 유언.
이러한 강인함과 견고함은 단지 격정적인 체험이나 능력을 받는데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패역한 경향성을 철저하게 수술 받은 삶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이라고 하는 것은 기초가 단단하고 생각이 정리되어 있지 안이하면 거기서 거룩한 삶이 꽃을 피울 수가 없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간절하게 이야기를 해도 가슴에 그 말을 새기지 않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들의 고통이 계속 되는 것이다.
다른 지름길은 없다. 그러한 하나님이 우리를 고쳐 주시는 과정이 없이 즐겁고 유쾌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가지이다. 진정한 기쁨은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치유하실 때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기쁨이다.
(예화) 완쾌가 되어서 퇴원하는 사람과 사망 선고를 받고 퇴원하는 사람과의 차이.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내면의 패역의 경향에 대해서 고치고 치료하심으로서 우리가 온전해진다는 이야기를 할 때 굉장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우울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설교하는 설교자를 매우 불쾌한 설교자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울해 할 것이 아니라 정말 참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만약에 후자의 퇴원을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의 지름길은 없는 것이다. 쉽고 가볍게 모든 기초적인 문제를 남겨 두고 즐겁게 놀다보면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복음은 거짓된 복음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초가 튼튼하고 그리고 살아가는 성경적인 방식이 있다. 그것을 뛰어 넘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사단의 유혹이다. 아무리 해 봐도 안돼는 것이다. 그런 삶을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이해와 올바른 적용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견고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견고하지 않기 때문에 거룩한 삶이 창출되지 않고 거룩한 삶이 그를 통해 흘러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가 때로는 하나님의 일에 미치는 경우는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본받아서 일에 미치면 미칠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본 받아서 거룩해져 가는 삶과 인격의 변화 견고한 신앙생활이 없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언젠가 후자와 같은 퇴원이 아니라 전자와 같은 퇴원의 인생을 살고 싶으면은 통과해야 하는 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충분히 고쳐 주셔서 우리 속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주신 거룩한 부르심을 따라서 정말 굳세게 살고자 하는 이전에 패역 보다도 훨씬 더 강력한 새로운 하나님을 위한 경향, 거룩의 경향을 우리가 소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패역을 고치시는 것이다. 이 축복이 얼마나 커다란 축복인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은 단지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를 고쳐서 사람답게 한번 사는 것을 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이다. 그런 일들이 일어날 때에 그 참회와 아버지께 돌아온 것이 진정한 보람이 있는 것이지 아버지 품에 돌아와서 죽는 그런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니다.
말씀을 듣고 무엇인가 깊이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이제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리라 하는 것은 겨우 회개의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업적도 아니고 엄청난 일을 행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돌아오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돌아온 그 마음을 붙들고 하나님의 깊은 말씀 속에서 그의 패역한 경향을 구체적으로 고쳐나가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그에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평생 그렇게 하나님께로 고침을 받고 거룩한 길을 걸어간 성도들은 성경을 손에 놓을 수가 없고 그 말씀에 대한 깊은 사랑을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우리를 고치시지 않기 때문이다.
돌아온 자를 하나님이 다루시는 첫 번째는 패역을 고치시는 것인데 두 번째는 즐거이 사랑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자유롭게 사랑하리니’, ‘제재 받지 않고 사랑하리니’ 라고 되어있다. 그렇게 고침을 받는 죄인들을 그래서 패역한 삶의 경향이 새롭게 바뀌어서 거룩하게 주님을 위해서 살고싶은 경향으로 변화되어 나아가는 하나님의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은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호세아서 11장 1절에는 “내가 이스라엘의 어렸을 적에 저희를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선지자가 저희를 부를수록 멀리하며...”라고 나온다. 결국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중단 된 것이지 하나님의 그 백성들을 향한 사랑이 중단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많이 사랑하셔도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의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사랑으로 반응하는 하나님의 자녀의 응답이 있을 때에 그 사랑이 불이 되어서 우리의 인생에 타오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향해서 바로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변하지 않으셨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버렸기 때문에 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불순종이었고 패역한 성향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며드는 과정이었는데 이때 하나님께서는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선지자를 보내신다. 그러니까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제사장이 만약에 백성들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었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백성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때에는 피 묻은 손으로 어떤 때에는 도끼를 들고 나타날 때도 있었다. 강력한 선지자는 그런 백성의 패역에 정도에 비례한다. 그래서 패역이 너무 크고 어두움이 너무 깊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상하게 더 불타는 선지자를 보내 주셨다. 그러므로 그 불 신앙과 완악함들을 꺾고 그 어둠에 찬란한 불꽃을 발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 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대가 어두워지고 우리 이웃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신앙 생활을 똑 바로 하지 않고 교회가 점점 빛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런 어두운 시대일수록 하나님께서 이 어둠을 먼저 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하고 강력하게 그 교회와 그 시대와 그리스도인들을 깨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세워 주시도록 기도하면 되는 것이다. 역사는 어차피 하나님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순종하고 말씀대로 살지 안이하고 멀리 갈 때에 내 버려 두시지 안이하시고 당신의 마음을 가지고 또 당신의 말씀을 친히 받은 그러한 주의 종들을 보내어서 그 길은 길이 아니다 라고 말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 떠나고 이미 패역한 경향이 이스라엘에게 자라고 있을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정직한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자기를 바라보시는 정직한 평가를 받을 때 그것을 기쁘게 받아 드렸던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이제 비극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어째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속박 가운데서 건져내신 것도 사랑이었고 또 그들이 그릇된 길로 걸어 갈 때에 내 버려 두시지 안이하시고 계속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나온 선지자들을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예화) 몇 해전 집회에서 모두가 말씀을 받아드리지 않는 가운데 마지막 날 결국 한 자매가 말씀에 무너진 이야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싫어하고 받아 드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말씀하시면서 결국 당신 앞에 직면하게 하시는 것이 당신의 백성에게 고통을 주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는 마음이다.
(예화) 어느 교회 목사님이 똑같은 설교를 교인들에게 그 말씀대로 살 때까지 하겠다고 말한 이야기.
반복되는 하나님의 음성, 이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표현이다. 정말 하나님이 끝장이 내고 싶으시면 버리신다. 그것이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두시며 마지막 때로 준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이셨는데 이 사람들이 그러면 그럴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 간 것이다. 선지자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멀리 마음이 거기로부터 점점 더 멀리 멀어져 가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자. 성경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의 경험이다. 우리의 경험이 성경의 빛을 받기만 하면 정말 귀한 우리의 신앙의 자료가 된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돌아보면 발견하는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에게 바뀌기를 원하실 때에는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마음 아프실 때에 그냥 참고 지나가시는 적이 없으셨다. 꼭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지 말씀을 하신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진지하게 깨닫고 받아드리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넘어 가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과정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참된 그 사랑을 하나님께서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도록 그 사랑으로부터 멀리 스스로를 내어 던진 것이다. 스스로 버린 받은 자가 되고 스스로 엎드러진 자가 되어서 그렇게 소망 없이 살아가는 비참한 신세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향한 이런 사랑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하나님이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고도 그것이 사랑인줄을 모르고 우리 마음대로 자행 자죄하며 그릇된 길을 걸어가면서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내 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수시로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비록 그것들이 반복되는 말이었고 그것이 어떤 때에는 짜증나는 말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말씀하셨다. 언제나 말씀하시면서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열심히 보여 주시고 싶어 하셨다. 그러한 노력을 하나님께서 쉼 없이 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런 말씀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올 때 견디다 견디다 어느 순간에 둑이 터지는 것처럼 그 말씀 앞에 자기를 방어하기를 모두 포기하고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부서지고 무너지기를 오히려 더 즐거워하며 무너진 그 곳에 하나님께서 진리로 나를 새롭게 세우시고 고치시기를 그리워하는 삶을 살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실 때 한 마디의 말씀을 들으면서 세 마디의 구실들을 생각해 내고 한 걸을 하나님이 다가오시면 두 세 걸음씩 뒤로 물러나 도망치는 그런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을 잃어버리고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이라고 말씀하셔도 그 말씀과 진리 자체가 우리에게 매우 낯설어진 상황이 되지 않았는가? 우리는 스스로를 깊이 깊이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정말 깊이 사랑하는 길은 우선 하나님이 나를 향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깊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효도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 사이에는 깊은 일치점이 있다. 효도의 첫 걸음은 부모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그것이 수많은 여행이나 고기나 용돈보다도 귀한 것이다. 부모의 심정을 읽는 것, 그래서 부모님 속에 있는 기쁨과 슬픔의 이유를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효도의 첫 걸음이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 대신에 송아지나 많은 재물들을 바리바리 싣고 가서 하나님 앞에 바치면 주님이 그 뇌물을 받으시고 자신들을 무조건 사랑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그때도 있었고 오늘날도 있다.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완전하시고 순전하신 영이시며 인격이신 하나님이시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인격적이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사랑,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완전히 잃어버리게 된 사랑을 하나님께서 다시 누구의 속박도 받지 않고 즐거이 얽매임 없이 사랑하겠노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도록 얽매이거나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지 못하도록 그들을 못 박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두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죄의 속박, 불순종의 속박, 패역한 삶의 굴레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자유롭게 받지 못하도록 만들었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엇에도 얽매이지 아니하고 우리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결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자신 때문이었더라고 하는 고백이 마음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막혔던 자유롭게 사랑할 수 없었던 모든 속박들을 이제는 끊어 버리시고 이제는 아무 일도 없으셨던 것처럼 다시금 그 광야 때에 아장아장 걷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사리 같은 손을 붙잡고 광야 길을 행하시던 그 사랑, 위기 가운데 엎어서 날으시던 그 하나님의 모성애적인 사랑을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펴 부어 주시기로 작정을 하신 것이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다시 막힌 담을 허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물과 같이 밀려오기 시작했는가? 그들이 돌아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엎드려 졌던 죄에서 뉘우치며 비록 아무 공로 없으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긍휼히 여기어 주시리라는 그 믿음을 가지고 유일한 품인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녹였고 아버지의 마음이 녹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불순종과 죄에서 비롯된 그 막힌 것들을 끊어 버리시고 다시 옛적에 놀라운 첫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어 주시기 시작했다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이런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신 것이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돌아올 때를 기다리시고 그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가로 막혔던 죄의 담들을 뛰어 넘어서 자유롭게 사랑하실 날을 기다리시면서 당신을 향한 우리의 태도가 바뀌시기를 인내하시면서 기다리시며 말씀을 보내시는 하나님 그분께로 돌아가지 않고 인생이 어디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가 있겠는가? 언약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자신 없이는 살 수 없어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부모 없이는 살 수 있어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도록 만들어 진 것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그 소생들인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이모든 삶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면서 그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고통을 받고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이 놓여있는 처지를 얼마나 슬프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연애하며 그 하나님과 함께 즐거워하던 그 첫 사랑의 때로 따라가고 싶어하는가 하는 그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고통이 참을 만 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의 품안에서 사는 즐거움을 회상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분의 가정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사는 가족이 된 즐거움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그 말할 수 없는 행복과 주님을 떠나서 자신의 욕심대로 살아가는 불순종하고 타락한 삶이 가져다주는 속박과 고통을 비교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고 주님께로 돌아가기를 그리워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떠나 있는 것이 죽음이요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말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하는 사실을 깊이 우리가 느끼면서 그 품을 연모하고 그 품으로 돌아가기를 꿈 꿔야 된다는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넘치는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메말랐던 우리의 영혼에는 반드시 은혜의 물이 흐르기 시작할 것이고 메말랐던 우리의 눈에도 감동의 눈물이 다시 솟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기를 거절하였던 우리의 몸에도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뜨거운 피가 새롭게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은 가뭄에 비가 한 바탕 내리면서 수로에 큰물이 흘러가기 시작하면은 그 수로를 타고 작은 물길에 물이 배급되면서 논과 밭이 아주 촉촉해 지는 것과 같다. 김포를 보면서 이런 것을 느낀다. 아무리 가물어도 거기에는 관계시설이 잘 되어있어서 물이 항상 풍족히 흐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물어도 상관이 없다. 그 물길이 깨끗하고 많은 물을 그저 물길을 통해서 계속해서 흘려 보내니까 그 물길에서 작은 물길들이 물을 받고 논들이 그 작은 물길에서 다시 그 물을 받아서 그래서 끝없이 드넓은 농토가 그렇게 풍부한 열매를 낼 수 있는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건조하고 고통스럽고 그러던 삶을 하나님께서 그치시고 막혔던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물을 우리에게 흘려 보내시기만 하면 마음이라는 농토에도 사랑이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섬김 속에도 들어가게 되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들어가게 되고 인격 속에서도 들어가고 내는 헌금 봉투 속에서도 들어가면서 그런 사랑이 힘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고 그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새롭게 회복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원수로 갚고 사랑하던 주님에 칼을 꽂고 돌아선 것과 같은 범죄한 백성들이었다. 우상을 섬기고 그 우상 앞에 신앙의 정조를 다 팔아먹은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는 불순종하는 것을 좋아하고 패역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훈장처럼 생각하던 사람들이었다. 왕으로부터 선지자들까지 썩지 않은 구석이 없었고 제사장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온 귀족들까지도 부패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물질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은 자신의 지상의 나라의 번영에 갈망으로 바뀌었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의 이 목메 이는 음성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고 있는 어떤 의미에서 돌아올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백성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가정법을 사용하셔서 그들이 돌아오면 이러한 사랑을 베푸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 것이다. 우리의 죄악이 많고 우리의 허물이 극 하다고 할지라도 이 이스라엘 백성들만큼 패역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준 사람들은 흔치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래도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훨씬 나은 사람들이다.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그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고 그러한 증거를 영혼으로부터 받고 있는 사람들이다. 돌아올 마음도 갖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러한 사랑의 회복을 약속하셨다면 우리들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커다란 사랑의 회복을 약속하셨겠습니까? 이제 우리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이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이 돌아가기를 원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는 나의 진노가 저희에게서 떠났기 때문이라”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성품을 보여 주시고 있다. 그것은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우리는 즉시 이런 생각을 하게된다. “아니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진노를 하실 수 있겠는가?” 만약에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조화를 이룰 수 있겠는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인간 중심적인 해석이고 사고 방식이다.
우리들은 자녀들을 교육하면서도 부모인 우리의 한 인격 안에 진노와 사랑이 공존하는 것을 수시로 경험한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 두 성품이 우리들의 인격에 공존하는 것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우리들은 부모로서 중대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두 성품 가운데 하나만 느끼고 다른 것은 느끼지 못했다면 우리들의 자녀는 매우 포악해지거나 아니면 매우 방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사랑하시지만 동시에 그 사랑은 인간의 변덕스러운 사랑이 아니라 순수하고 거룩한 사랑이기 때문에 거룩하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개입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시기 시작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진노조차도 어떤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질투를 느낀다. 하나님의 마음도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렇게 다루신다. 그러니까 이 진노는 정당한 것이다. 사랑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고 사랑에 확증이 될 수 있는 것이고 사랑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진노인 것이다. 그런데 이 진노가 떠나갔기 때문에 이제 내가 저를 제한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사랑하리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이렇게 철저하게 썩고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받은 고통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진노를 가시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비록 자기들이 잘못하고 죄의 길을 걸어갔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고통하고 곤고하게 살아간 많은 날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향해서 가지고 계셨던 진노의 마음을 푸시게 되는 것이다.
(예화) 아들을 오랜만에 때리고 상처 난 이야기를 아내로부터 들으면서 가슴이 아팠던 이야 기.
여기서 하나님을 떠나간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체험했다. 그러니까 당연하고 응당한 징계였고 마땅히 받아야할 곤고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은 그러나 이유가 정당하고 그것이 옳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냉담하게 고통 하는 우리를 바라보실 수는 없는 분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우리같이 완악하고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랑 없는 미물도 자기의 새끼를 보면서 당연히 받아야할 징계 같지만은 그 고통을 보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 같은 슬픔을 느끼게 될 때에 완전하신 그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고통 하는 장면을 얼마나 슬퍼하고 마음 아파하시겠는가?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보이시는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성한 데가 없이 때리 시면서도 한쪽으로는 하나님이 흐느끼시면서 “내 백성 이스라엘이 짐승이냐 왜 이렇게 맞아야 되느냐” 하고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반문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이 사실이 고통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성경 속에서 천의 얼굴을 가지고 나타나셔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 아버지의 이런 심성을 읽은 모든 신자들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로 신앙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는 데서부터 신앙은 시작이 되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어디에 가서 이런 사랑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결함과 더러운 부패로 가득한 우리 인생들이 어디서 이런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 변함없는 사랑, 때리 시면서도 어루만지시고 자기가 스스로 걸어가서 고통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허물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시면서 고통받는 본인보다 더 아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머리가 희도록 나이를 먹어도 깨닫지 못했다고 선지자는 한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떠나 그들의 영혼은 고통받고 있었다. 잠시 후 역사도 고통을 받을 것이었다. 심판은 확정되었고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 그 속에서 고통 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아파하시는 그 하나님의 마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읽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고는 그 영혼에 참된 빛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높은 고통이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패역한 길에서 고치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치료의 손길을 마다하면서 우리는 세상 길로 가고 하나님의 뜻을 거슬려 살거나 중심을 바쳐야할 하나님 앞에 얼마간에 예물로서 마음을 대신하려고 하는 이러한 경박한 태도를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능욕하고 만홀히 여긴 적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을 향해 바르지 못한 태도들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그리고 그 많은 고통 때문에 우리의 심령이 상하고 우리의 마음이 갈라지게 되었다. 그런 아픔과 고통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고통 하는 당신의 자녀를 보면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풀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우리들이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고통받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진노가 떠나 간 두 번째 이유는 그들이 예전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이다. 회개의 눈물은 맹렬히 타오르는 심판의 불을 끈다. 하나님의 진노는 쉽사리 잡히지 않는 타오는 불길과 같다. 성경에 나타난 선지자의 맹렬한 외침을 보면 이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이 진노의 불길이 성도들의 회개의 눈물 앞에는 쉽게 꺼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그 임마누엘의 보혈의 피의 샘에서 강도와 같은 죄인들도 구원을 받았고 공로 없는 불결한 인생들, 죄와 벗하여 사망과 함께 먹고 자던 그런 소망 없는 인간들이 천국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씀이다.
회개의 눈물은 하나님께 돌아온 자의 진심 어린 기도는 불타던 하나님의 마음의 불을 끄고 그 뜨거운 진노의 불길을 변하여 불붙는 사랑을 우리에게 느끼게 만들어 주신다. 오늘도 하나님은 이런 주체할 수 없는 사랑을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를 원하신다. 그 사랑을 받은 우리들이 그런 불붙는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일평생을 사는 사랑의 불꽃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번 사경회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자Ⅲ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