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강해Ⅰ
(199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199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서론:기독교의 영성과 사랑Ⅰ(고전13:1) 1998.2.4 수요예배 1
2. 서론:기독교의 영성과 사랑Ⅱ(고전13:1) 1998.2.11 수요예배 13
3. 사랑이 없으면Ⅰ(고전13:1) 1998.2.18 수요예배 27
4. 사랑이 없으면Ⅱ(고전13:2) 1998.2.25 수요예배 37
5. 사랑이 없으면Ⅲ(고전13:3) 1998.3.4 수요예배 50
6. 사랑과 오래 참음(고전13:4) 1998.3.11 수요예배 62
7. 사랑과 온유함(고전13:4) 1998.3.18 수요예배 75
8.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고전13:4) 1998.3.25 수요예배 90
9.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고전13:4) 1998.4.1 수요예배 106
10.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고전13:4) 1998.4.22 수요예배 118
11.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고전13:5) 1998.4.29 수요예배 131
12.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Ⅰ(고전13:5) 1998.5.6 수요예배 142
13.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Ⅱ(고전13:5) 1998.5.13 수요예배 153
14.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고전13:5) 1998.5.20 수요예배 168
15.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1998.5.27 수요예배 182
1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고전13:6) 1998.6.3 수요예배 196
17.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13:6) 1998.6.10 수요예배 211
18.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고전13:7) 1998.6.17 수요예배 225
19.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고전13:7) 1998.6.24 수요예배 240
20.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고전13:7) 1998.7.1 수요예배 254
21.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13:7) 1998.7.8 수요예배 267
22. 사랑은 영원합니다(고전13:8) 1998.7.15 수요예배 278
23. 사랑뿐임을 알게 되리라(고전13:9-12) 1998.7.29 수요예배 292
24.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고전13:13) 1998.8.5 수요예배 309
1. 서론: 기독교의 영성과 사랑Ⅰ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13장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빛을 발견하게 된 것은 오래 전에 일입니다. 구체적으로 다 탐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직감적으로 ‘아, 저 섬에는 보물이 묻혀 있겠다’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13장을 설교하는데 미루어 오는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이유는 ‘혹시 신앙이 어린 여러분들이 사랑에 대한 설교를 잘못 듣고 오해를 해서 오히려 사랑에 관한 어설프고 잘못된 사고방식 때문에 하나님을 찾고 주님께로 나아가는 데 잘못하는 지식들이 방해가 될까!’ 두려움이 가장 큰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본문을 바라보는 저의 눈빛이 아직은 멀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이렇게 비유를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오르다가 조난을 당합니다. 물론 안나푸르나, 맥킨리, 에베레스트산 등의 세계 정상들도 정복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산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산을 비유로 말하자면, 노련한 등반가나 아주 초심자들은 사고를 당하는 법이 없습니다. 노련한 사람은 산이 분노할 때와 잠잠할 때를 알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산이 울어도 괜히 그러는지 정말 화난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분별할 수 있고, 저처럼 등산이라면 언덕을 올라가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은 올라가지 않기 때문에 사고 당할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설악산에서 여러 명이 조난을 당하였습니다만 얼치기들이 그렇게 조난을 당하고 사고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전한 등반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올라가 보지도 않은 사람이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에게 간접적으로 듣는 것도 경험입니다.
높은 산을 정복하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헬기를 띄우는 일입니다. 거기를 정복하기 몇 달 전부터 지형을 관찰한다는 것입니다. 왜 지형을 관찰할까요? 거기에는 셀파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전문적인 등반가로로서 가이드를 서면서 등반대들을 정상 정복하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이 현지의 셀파입니다. 셀파들이 있기 때문에 산을 너무나 잘 아는데 다 아는 길인데 무엇을 다시 조사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데 전문적인 산악인들의 이야기는 ‘그렇게 커다란 산은 3년 전, 4년 전에 정복을 하고 왔어도 3, 4년 후에 올라가 보면 전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산이 변해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이 많이 쌓이기도 하고, 산사태가 나서 무너지기도 하고, 봉우리의 모양이 변하고, 새로운 골짜기가 생기기도 하고, 새로운 크레바스나 혹은 새로운 빙벽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헬기를 띄워서 산맥 전체를 정탐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진을 찍고 어떻게 산이 변했는가 하는 것을 보고 코스를 어떻게 잡을 것인지를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봉우리들과 장조들을 집중적으로 공중에서 캠프를 칠 수 있는 곳을 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와서 사진을 놓고 조사를 한 다음에 하나씩 정복해 가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제일 먼저 산맥전체를 보고, 다음에는 봉우리 몇 개를 올라가 본 다음에 백두대간 같은 곳을 종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 때도 우리에게는 그런 사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더더욱 성경에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어떤 성경의 장은 기독교에 있어서 생명적으로 중요한 교리를 두드러지게 다루고 있는 장이 있고, 그거보다는 덜 치명적인 교리들을 다루고 있는 성경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자에 해당되는 부분들은 앞에 말씀드린 비유와 같은 탐사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일 먼저 성경전체의 고린도서의 위치는 어떠하며, 고린도서에서 13장의 위치는 어떠하며, 13장에 있어서 1절서부터 3절, 4절부터 7절, 8절부터 마지막까지 위치는 어떠한가! 하는 것을 충분히 답사한 다음에 13장의 산에 접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봉우리, 둘, 셋, 넷 차례대로 탐사해 가면서 우리는 비로소 13장이라고 하는 위대한 산맥이 줄달음쳐오는 성경의 진리 속에서 어느 부분에 해당되고 거기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과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인생,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 주는 13장의 의미, 다시 말하면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통찰이 성경을 탐구해 가는데 안전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에서 이 13장의 위치는 무엇이겠습니까? 이 고린도서는 주 후 55년경에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세 편의 편지를 썼다고 믿어지는데 한편은 유실되고, 두 편이 남아서 고린도전서와 후서가 되었습니다. 고린도후서가 교회 일군, 충성, 일군으로서의 고뇌 이런 것들을 다루고 있다면, 고린도전서는 고린도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해서 씌어진 서신입니다.
고린도 시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예로부터 항구도시에는 사람도 많고, 돈도 많고 그래서 타락도 많은 곳입니다. 몇 개월씩 바다에서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항구에 정박하기 때문에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능한 학자들도 많이 살았던 것 같습니다. 교회가 있는 도시가 고린도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2절에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교회는 이처럼 문제가 있는 도시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으면 사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는 교회의 사명입니다.
한 도시가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 두 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이 있고, 교회를 지배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두 가지가 전혀 모순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죄지은 사람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교회는 자기가 죽을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푸는 곳이 교회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정면으로 대치되는 정신의 지배를 받을 때도 있는데 그렇게 지배를 받을 때에 문제는 도시의 정신이 교회로 들어오든지, 교회의 정신이 교회로 들어가든지 동화작용을 하려는 요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불행하게도 두 번째 경우가 아니라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되는 교회였습니다. 도시에 번져있었던 정신이 교회에 침투했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가 있었는데 중요한 것이 타당을 만드는 문제였고, 성적인 타락의 문제와 여기서 지적하고 싶은 사랑이 없는 이기적인 도시의 정신이 고린도교회를 파고 들어왔던 것입니다.
학자들이 많고,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많고, 인생에 대한 견해가 많으니까 사람들은 각자 자기의 견해를 주장하고, 사람들은 그 사람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보스가 있고 뒤에 부하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항상 그러한 제자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것이 자신의 명예요, 학문의 깊이를 입증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만나면 ‘저 사람과 내가 어떤 견해가 다른가’를 다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이 교회 속에 파고 들어왔습니다. ‘나는 게바파라’, ‘나는 아볼로파라’, ‘나는 그리스도파라’, 심지어 ‘나는 바울파라’ 하면서 각기 하나님이 세운 일군들을 중심으로 편을 가르면서 예수그리스도조차도 자신들의 파당에 우두머리로 전락시키는 잘못된 일들은 모두 그릇된 도시의 정신이 침입한 것입니다.
그 도시는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그 음란한 것들이 교회 속에 들어와서 교회 안에서 심지어는 자기의 어미와 자식이 함께 통간하는, 그러면서도 버젓이 교회에 참석하고 예배를 드리고 성찬에 참석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모두 세상의 정신이 들어온 것입니다.
여기에서 13장은 고린도교회가 처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전서의 뒷부분은 고린도교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서 답을 해주는 문제였습니다. 그것이 신령한 문제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누구의 은사가 더 우월한 것인가!, 어떤 사람의 영적인 체험이 더 결정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다투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예외 없이 도시의 정신이 침투했습니다. 돈 많은 도시는 인심이 사납습니다.
저희 아버님이 저가 초등학교 다닐 때에 사냥을 좋아하셨습니다. 겨울에 사냥을 하러 가실 때가 되면은 항상 깊은 산골에 들어가시는데 혼자 가시거나 몇 사람이 가시는데 갈 때는 돈을 가지고 가시는 게 아니라 가방에다 양초, 성냥, 치분(양치질하는 가루치약), 나일론 양말 등을 싸 가지고 가십니다. 한 가방만 가지고 가면 두 세 사람이 가서 열흘정도는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먹고 잘 수 있습니다. 돈을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먼 장터에 나와야지 통용이 되는데 나올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돈이 없던 시대에는 인심이 참 좋습니다. 그래서 사랑방하나 내 놓고 누구든지 들어와서 며칠씩 기거해도 되는 때였습니다. 그러나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돈이 많아지고 돈이 오고가는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인심은 사나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애야 이 가방 좀 저기까지 들어다 줄래!”, “할머니, 얼마주실 건데요?” 이런 세상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이 도시가 그런 것들이 침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천 년 전의 얘기치고는 실감나지 않습니까? 그렇게 파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기심이 영적인 우월심과 맞아떨어지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체험이 더 우월하고 우등하다고 얘기하면서 절제 없이 그것을 행하고 서로 영적인 놀라운 은혜를 받아서 오히려 교회에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12장에서는 고린도 교회에 영적인 은사 문제, 그것을 다루고 있고 그 연장선상에서 13장을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2장에서는 여러 가지 은사의 문제를 얘기하면서 사도 바울이 줄을 그어준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혼란을 일시에 잠재우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줄입니까? “너희들이 은사를 받았느냐? 그렇다면 잘 생각을 해 봐라, 이 은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너희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게 하시기 위해서 너희에게 주신 영적인 은사다. 어떤 사람은 예언, 어떤 사람은 방언, 어떤 사람은 통변, 어떤 사람은 지혜 등 여러 가지를 주셨는데 결국은 모든 것들을 받아서 가지고 있는 너희들이 온 몸의 각 지체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너희들이 영적인 은사를 받았어도 통일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것이 한 지체를 세우는 일에 기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는 쐐기를 박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사도 바울이 영적인 은사를 바라보고 나아가서는 13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사랑을 보는 관점 자체를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12장에 들어오기 전에 11장의 후반부에서 거론하기 시작한 것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성찬의 문제를 다루면서 12장, 13장으로 건너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13장을 풀어 나가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시종일관 12장에서 은사 문제를 풀 때에 우리들이 견지하여야 했던 기준, 12장을 보는 틀을 13장에도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틀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라는 얘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사가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고 세우는 외부적인 것들이라고 한다면, 13장에 거론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은사가 구체적인 섬김으로 나타나서 교회에 유익을 끼치게 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심장부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13장을 풀어나가면서 이런 설교를 들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여러분, 사랑은 오래 참아야 합니다. 참지 못하면 사랑도 아닙니다. 아무개 집사를 보십시오. 얼마나 오래 참았습니까? 참는데는 도가 트더니 결국은 좋은 집으로 이사갔습니다.’ 이런 식의 설교를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은 그런 것과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이 13장 전체의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한 빛이 있는데 그 빛이 비취면서 13장을 보여주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생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 이 빛으로 비취면서 13장을 해설해 나가고 13장의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존재, 성품, 생애, 죽으심, 고난, 부활의 영광까지 우리들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사랑이 왜 그리스도에게서만 발견되어져야 합니까?”, “사랑은 그리스도보다 훨씬 크지 않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계속 보면서, 우리들이 바울에게서도 똑같이 발견되고 요한 사도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물론 베드로에게서도 발견됩니다. 똑같이 발견되는 사랑을 다루고 있는 방식이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삶 속에서 밖으로 표출되는 하나의 덕성입니다. 물론 사람 마음속에 들어있는 본질적인 문제를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사랑’을 얘기할 때는 무인도에서 홀로 도닦고 있는 사람은 사랑과 관련지어서 생각할 수 없어요. 무인도에서 홀로 앉아서 아무도 만나는 사람 없이 도를 닦는다고 할 때 그 사람에게 사랑을 얘기하기는 힘들어요. 그것은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있어도 결국은 때묻은 인간들이 서로 옷깃을 스치고, 부딪히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표출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먼저 동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사랑을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어떤 오해를 자꾸 하게 되느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행동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는 하나의 도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사랑’ 그 자체가 도덕적인 특성을 반드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들에게 인간 사회에 통용되고 있는 모든 도덕을 우리에게 얘기함에 있어서도 복음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도덕과 세상의 윤리가 우리에게 얘기하는 도덕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자도 ‘부모를 공경하라’하고, 어느 책에는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라’ 이런 얘기들이 나옵니다. 성경에도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한 자다’ 그러면서 가족에 대한 의무도 강조합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고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습니다. ‘부부가 서로 유별하라’고 유교에서는 가르치고 성경에서는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일반은총 면에서 공통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종교를 초월해서 비슷비슷한 도덕이 요구되는 환경에 놓여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도덕이라는 것, 덕성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옷을 주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면 우리는 그것을 도덕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데도 거기를 외면하고 야비하게 도망가버리면 ‘부도덕하다’ 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쪽에서는 굶어죽는데 자기는 금으로 치장하고 다녀도 ‘부도덕하다’ 라고 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 사람에게 돈을 주면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는데 “동기가 뭐냐?”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너는 왜 이 사람에게 돈을 줄 수밖에 없고, 너는 왜 이 사람에게 먹일 수밖에 없고, 왜 옥에 갇힌 이 사람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세상의 도덕은 거기까지 묻지 않습니다. 물론 묻는 경우가 전혀 없지 않습니다. 묻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사람을 찔러 죽인 경우와 차를 잘못 세워서 모르고 사람을 치어 죽이는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은 일단 이루어진 행동과 결과를 가지고 따지지 그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의 성향이나 동기를 집요하게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적절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으면 성경에서 얘기하는 사랑이 아니라고 못박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동기가 되어서 거기로부터 비롯해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문제를 다루려 할 때 특별히 작년에 설교했던 내용 가운데 ‘제일 가는 계명’이라는 시리즈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람이 통합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었는데 그 tape를 꼭 듣고 이 설교를 계속 들으시면 훨씬 더 좋은 이해를 가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얘기를 하느냐 하면 ‘내가 사람에게 선을 행하고 도덕적인 일을 하고 그에게 무엇인가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이 속에 그러한 행동을 유발시킬만한 동기가 있고 그 동기에 절대적인 이유가 하나님이 되느냐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무시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도덕적인 선행을 행하는 것이 그 사람의 영혼을 깊이 곤고하고 메마르게 하는 상황을 많이 봤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위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많이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은 또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아니 선을 행하면 됐지, 뭐 그렇게 복잡합니까?” 원래 신앙은 복잡합니다. 신앙은 단순한 면도 많지만 세상에 있는 것과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도덕적으로 선한 일을 하면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는데 선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구제하면서 오히려 사람들의 영혼이 더 피폐하고 메말라 가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사람에게 선을 베풀고, 사랑을 하는 것, 그것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하나님과 관련이 있을 때에는 선을 베풀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고,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집니다.
‘참된 영적 생활과 외식’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1, 2, 3번 테이프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서 이런 반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구제하는 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데려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개혁주의 사고방식이 뛰어난 여러분들은 “아니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니요” 그렇게 말했습니다. 두 번 ‘아니요’ 했으니까 결국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외식을 하는 가운데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리고 가지 못하고, 우리의 의를 세우고, 우리를 생각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은밀하게 진실한 마음으로 구제하면 주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집니다. 실험해 보십시오. 교회를 사랑하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누구냐 하면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그럴 것입니다. ‘어떡하나 나는 조금밖에 못했는데!’ 저는 그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분은 원래 돈이 없으니까 자기는 만원밖에 안했지만 돈 많은 사람 100만원 한 것보다 더 많이 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전에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헌금 나온 내역을 안 보았습니다. 왜?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것도 모르면서 금액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면 안돼요. 어떤 분들은 많이 못한 것에 대해서 너무 아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가 낸 금액을 말하고 싶어서 목회자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는 일부러 모르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지를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사람 앞에서는 “걱정 마십시오, 하나님은 아시고 나도 압니다. 당신이 돈 많으면 혼자서라도 짓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아무도 모르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힘에 넘치도록 헌금해 보세요. 바치는 순간에 나에게 이런 고백이 옵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 외에 내게 누가 있으리요! 주님만이 나의 진정함 분복이시며,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옵나이다. 내 모든 것 주의 소유 삼으시옵소서’ 그런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영적인 선에 기초한 섬김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얘기하는 방식자체가 사도들이 성경 속에서 얘기하는 사랑의 방식은 오늘날 우리들이 얘기하는 방식과 매우 특이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에게 서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고, 정직하게 살고, 긍휼을 베풀고 하는 것들을 가리켜서 도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라고 가르켜서 도덕적인 교훈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도덕적인 교훈이 있고, 또 한편으로는 ‘선포적인 진리’, 어렵게 말하면 ‘페리그마’라는 것이 흘러갑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택하셨다. 너희는 구원받았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셨다. 삼일만에 부활하셨다. 우리를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다.’ 이런 것들이 ‘페리그마’ 선포적인 진리입니다. 성경 속에는 도덕적인 교훈과 이런 선포적인 진리가 함께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일방적으로 얼핏 성경을 보면 이런 선포적인 진리 ‘예수님이 너희 죄를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예수님이 다시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천지는 하나님께서 창조 하셨다.’ 이런 선포적인 진리는 예수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이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착한 사람이 되라, 정직하게 살아라’ 이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향한 선포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1930년대이래 많은 신학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성경 속에 흐르고 있는 도덕적인 교훈과 선포적인 교훈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당히 오늘날까지 흘러 내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성경을 정직하게 볼 줄 아는 사람들의 생각과 성경을 보는 우리들의 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히 서신서는 사도들이 교회에 대해서 쓴 것입니다. 교회에는 안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사는지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린 도덕적인 교훈과 선포적인 교훈을 나누어 버리는 방식이 올바른 성경을 보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빌립보교회, 고린도교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 데살로니가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선포적인 진리는 모두 빠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교훈만이 가르쳐져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경을 보면 우리는 전혀 그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보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이 선포적인 교훈과 도덕적인 교훈 두 개는 꽈배기처럼 함께 꼬아져 가면서 신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때는 어느 부분이 거기에 속한 것인가를 구분해 내기 힘들 정도로 함께 통합적인 구조를 이루면서 신자들의 삶에 파고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에베소서는 에베소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편지입니다. 에베소교회에도 사랑이 없는 문제, 희생이 없는 문제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그들을 권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베소서를 통해서 에베소교회의 문제를 다루는 가운데 그는 5장에서 에베소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희생하며 살아야 될 이유를 말하면서 그는 예수그리스도를 먼저 거론하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생축과 제물로 드리셨으니 너희는 이처럼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십자가에서 생축과 제물로 드리셨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에베소 교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것은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 선포적인 진리였습니다. 기독교가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 너희들이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순수하게 도덕적인 교훈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그런 도덕적인 교훈을 이끌어오는 방식이 바로 선포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거기에서 ‘그러므로’라고 하는 접속사로 연결을 하면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선포적인 진리를 상기시킨 다음에 거기에서 그 사랑의 뿌리를 박고, 너희들도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그 사랑 때문에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관계가 되라고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매우 중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고리가 우리의 도덕적인 삶과, 영적인 풍성함을 어떻게 엮어주느냐 하는 결정적인 단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지난여름 수련회 때 바울 신앙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바울의 기독론에 대해서 설교를 반쯤 들으셨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어 종의 형체가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 했습니다. 다 알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에 관한 서술들을 도입하기 전에 바울이 어떤 권면을 부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2장 5절을 시작하기 앞서서 2장에서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에게 서로 하나되도록 권면했습니다. 서로 낮아져서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도록 권면했습니다. 사랑으로 하나되고 진정으로 모두 함께 우애하는 교회가 되도록 권면했습니다. 여기에서는 도덕적 권면이 먼저 나오고 뒤 이어서 그 교훈을 강화하기 위해서 진정한 뿌리를 말하기 위해서 선포적인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뒤에 가서 예수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놀라운 부활의 사실을 입증하면서 부활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될 것을 뒤에 덧붙입니다. 뒤에는 다시 선포적 진리가 먼저고 도덕적인 교훈이 후반부에 오는 구조를 가지면서 우리들을 설득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초대교회의 도덕적인 삶과 영적인 삶이 분리되지 않는 놀라운 강점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깨트려지기 시작하는 위기를 고린도 교회에서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 믿으라고! 야, 아무개 봐라! 야 그가 사람이냐! 나는 예수 안 믿어도 그렇게는 안 산다 그게 인간이냐!” 라는 얘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야, 아무개 봐라, 예수 믿는다 그러더니 기도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잠을 못 자게 하고, 가정 예배를 드리면 찬송을 부르면 불렀지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 야, 어제도 외상값 떼어먹고 또 싸우더라, 내가 그처럼 될까봐 교회에 안 나간다” 그리고 나면 교회의 반응이 재미있어요. “맞아, 외상값 떼어먹으면 안돼!, 전기요금 가지고 싸우지마!” 그런 얘기를 들으면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 와서는 큰 소리로 “동네 가서 누가 처신을 잘못했다더라”고 하면서 침 튀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때는 자기가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를 무수하게 듣고 있는지를 잠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많이 전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가 예수가 된 줄 압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을 많이 하게 되면 자기를 그렇게 이미 살고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문제들을 다룰 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껏 결심하는 것이 ‘아, 그래 외상값 떼어먹지 말자, 동네 사람하고 싸우지 말자!’ 그거예요. 다섯 가지를 지켰습니다.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여섯 가지, 일곱 가지가 또 나옵니다. 외상값 안 떼어 먹었더니 저쪽에서 수도세 가지고 시비를 거는 거예요. 저는 주위 사람들과 전혀 싸우지 말하고 신신당부를 하지요. “야, 주는 데로 받고 나머지는 교회에서 보태라”, “귀한 헌금을 그렇게 써도 됩니까?” 써도 돼요. 왜냐하면 주위에 교회가 있음으로 사람들이 덕을 봐야 되요. 가게에서 물건값을 너무 깎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세상이 우리들을 향해서 바라보는 요구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나님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보고 실망하는 동안은 교회는 소망이 있습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그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 외상값 떼어먹은 것 가지고는 화제가 되지 않는데, 닫힌 교회의 집사가 외상값 떼어먹고 싸우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교회에 대해서 선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탈세하고, 사기 치고, 간음하며 살아도 교회는 그런 사람이 안 모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같은 사람만 받아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신문을 보면은 부도에 몰리면 장로라고 해서 부도를 내지 않고 쇠고랑 안 찰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신문에는 이름을 쓰고 가로를 치고 장로라고 씁니다. 불교인이 그런 잘못을 저지르면 그런 말을 쓰지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감사합니다. “하나님, 이 신문을 발행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은 뭔가 남다르고 이런 기사에는 들어서는 안돼는 사람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 이런 기대를 갖고 있는 한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은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다음입니다. 뭐냐하면 교회는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다양한 욕구에 놀아나기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이 좋아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거나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마태복음 5장을 내밉니다. 하고자 하는 말이 ‘너희도 사람 앞에 착한 행실을 하여서 빛이 비취게 하라’ 그런데 그것은 잘 생각을 해야지 무조건 그 하나만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것이 곧 하나님께 칭찬 받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연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신문지상에 그리스도인이 이런 선을 행한다고 오려 가지고 다니면서 “이것 보세요, 우리교회가 이런 일을 했어요” 그런 것은 너무 불쌍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교회가 선을 베풀고, 구제하고, 사랑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교회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선을 행하고, 구제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윤리적인 삶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독특한 이유를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13장의 문제와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고, 심지어는 지체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가족들에게 사랑을 베풀잖아요? 세상에 있는 사랑은 사랑을 함으로서 돌아올 수 있는 반사적인 이익에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사랑, 영적인 선에 기초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드러나는 사랑은 그렇지가 않고 기대하는 바가 그 사람을 통해서 내게 돌아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안에 사랑할 수밖에 없게 해 주시는 그것을 표출함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데에다 가치를 둔다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얘기하는 사랑은 쥐꼬리만큼 선을 행하고, 개꼬리만큼 칭찬을 받아야 하는 요구에서 출발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서는 초연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로 하여금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도록 만든 진정한 힘, 진정함 동기가 외부적인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입니까? 사랑할 수밖에 없는 비밀을 가진 사람들만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외에 사람들은 진정함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계속해서 발달되어져야 지만 비로소 습득될 수 있는 아주 고 단계의 신앙의 기술인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은 그리스도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 때 곧바로 우리에게 은사처럼 다가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사람을 향한 사랑이 분리되지 않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누차 걸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그를 알게 된다. 그리스도를 너희들이 안다면 사랑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펴는 것이지요. 이것은 굉장히 정교한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인가!’ 하는 것들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처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하늘의 해와 달도 주님이 만드셨습니다. 추위가 닥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에 60도 80도 마이너스까지 내려가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적응하게 하시고, 철을 따라 비를 주시고, 곡식을 주시고, 호흡하며 살수 있도록 건강도 주장해 주십니다. 그런데 세상에 있는 사람 누가 그 사랑에 감격을 합니까? 진실로 감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끌어 오르는 사랑, 핏빛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세상에 당신의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못 박혀 죽으시게 한 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가장 잘 드러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하는 제자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내게 아버지를 보이라고 말하느냐 네가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고 싶으냐, 나를 봐라.” 그게 예수그리스도의 논리였습니다. 성경의 논리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려고 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망원경의 렌즈라고 하고 렌즈를 통해서 본 먼 산을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한다면 마치 렌즈 없는 망원경을 가지고 먼 산을 보면서 폼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뭐가 보이겠습니까? 보이기는 보이지만 희미한 형체만이 나타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 없이는 살수 없고, 그 사랑이 얼마나 추상적이 아니고, 구체적인 사랑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하다는 사실을 붙들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인생을 맡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져본 적이 없고 더욱이 하나님을 뵌 적이 없지만 그러나 주 달려 죽은 십자가에서 자기의 피로 나무 형틀을 적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보면서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것입니다. 거기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 거기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탄원하시는 그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보면서 우리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이시면서도 우리와 더불어 화목하기를 원하시고, 하나님의 가슴에 못 박고 당신을 등지고 도망간 죄인들을 끌어 안으셔서 당신의 가족 삼으시고, 그 관계를 다시금 돌려놓고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을 읽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못 박는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흉악한 죄인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성품을 읽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 이전에는 반드시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에 대한 진정한 감화가 없는 사람은 참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며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조차도 부르셔서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그 피로 우리의 구석구석 적셔서 새 사람 만드시려고 하는 아버지의 이 놀라운 사랑을 만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난 하나님의 사랑은 의미 없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는 더듬어도, 더듬어도 알 수 없는 처지에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의 렌즈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감화를 입고 나니까 비로소 자기는 구원받을 가치가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 사실에 대한 깊은 감동이 그로 하여금 자기를 향해서 아무 가치가 없는 인생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고난을 통해서 자기의 커다란 죄를 용서하신 사실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는 그 사랑에 빚졌기 때문에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어기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반역하고 거슬리면서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이 십자가 앞에서 깨닫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지겹도록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사람들을 목양할 수 있고, 선대할 수 있고, 끝까지 그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랑이 분리가 된다면 그것은 매우 이상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바에 의하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는 그런 사랑이 불가능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생활과 도덕적인 생활 이것이 긴밀한 연관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놀라운 구속의 사건을 보면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동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온전히 빚진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빚진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내가 내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줄 수 있도록 권한을 주신 하나님의 권한을 주님의 마음에 맞게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면서 쓰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체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논리를 가지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삶을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의 사건,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려오고 여기 속에서 감화가 삶을 통해 뻗어 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사람이 행하여야 할 마땅한 도리와 그리스도인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라고 얘기를 하면 그렇게 살아도 문제고, 안 살아도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안 살면 불순종하니까 문제가 일어나고, 살고 나면 ‘나 얼마나 잘났어요, 하나님?’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처음에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같아도 시간이 흘러가면 예수도 없고, 하나님도 없고 남은 것이라고 ‘내가 얼마나 잘 살았는데!’ 그것밖에 남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영적인 생활은 피폐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자신이 경건하게 살기 때문이라고 착각을 하고, 자신이 타락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은 타락한 죄가 하나님의 사랑을 역사하게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타락을 심하게 했어도 마음속에서 ‘나는 죄인이다’ 이렇게 말할 때에 ‘오 주여 저는 어찌합니까?’ 하는 마음이 없으면 더 많이 타락하면 더 많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2. 서론: 기독교의 영성과 사랑Ⅱ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지난주에 ‘딜레마는 어떤 것입니까?’라는 얘기를 하다가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봐 야지만 사랑이 무언인가를 알고, 행하기도 하고 또 그 사랑을 더 깊이 맛보는 거룩한 은혜 속으로 들어갈 텐데, 왜 다른 사람에게는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 마음을 녹이시고 심령을 놀랍게 흔들어 놓는 감격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주위에 있는 지체들에게는 뜨겁게 느껴지는데 나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와 닿지가 않느냐 하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해 보지만 그러나 역시 뜨거운 사랑은 다가오지 않으니까 모태 신앙인 사람을 비롯해서 뭔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의 체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망상을 하기 시작한다는 얘기입니다. ‘아하! 내게 이런 하나님의 감격적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내가 너무 경건하기 때문인가 보다! 나도 타락을 하면 저렇게 감격적인 사랑을 맛 볼 수 있을 텐데!’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딜레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사람은 뭔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더라도 너무 경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안 느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자체가 바보 같습니다. “목사님 한번 타락해 보고 싶어요”, “왜?", “저는 타락이 주는 즐거움에서가 아니라, 타락 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딜레마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는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여서 그분과 우리가 하나되는 사랑의 결합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마음으로 사람과 사물을 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분의 사랑과 생명이 우리에게 늘 충만하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 없이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이나, 우리 주위의 사람들이나, 심지어는 우리 자신들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시선은 그분의 마음을 담았고, 그분의 마음은 바로 사랑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서 버려서 구속의 제물로 자기를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아까 말씀드린 문제제기 한 딜레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신자들에게 체험하게 하시는 것, 이것은 확실히 인간이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주권입니다. 이것은 정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의로운 삶이나, 도덕적인 생활, 순서대로 사람들에게 사랑이 밀려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서 혼란을 경험합니다. 죄가 많고 분명히 명백하게 죄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감격적인 사랑을 맛보고 새 사람이 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 흠 없이 살아온 것처럼 제법 경건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감격을 전혀 모르는 성도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타락하고, 범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볼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중요한 한가지 요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감격적이고, 충만한 사랑을 맛보았을 때, 또한 그런 것을 원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랑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을 봤을 때 그들이 주목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 얼마나 죄를 짓고, 어떤 사람이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았는지 그런 것만을 주목했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관찰하기를 놓쳤다는 말씀입니다.
결론을 내리면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이나, 율법사나,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예수그리스도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아드리고,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는 대신, 오히려 거절된 그 사랑이 창기와 세리와 같이 도덕적으로 파괴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임했던 놀라운 역사는 단지 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은 비록 도덕적으로 무너지고 타락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 사랑 없이 살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피묻은 손으로 내미신 사랑이 담긴 구원의 손길을 거절할 수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드린 이러한 문제들은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보다는 마음속에 깊이 묻혀져 있는 인간의 내면의 작용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았던 것일 뿐입니다. 그들은 간통하고, 패역하고, 동족의 돈을 후리고, 나쁜 짓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자비한 인격과 죄인들을 고치시고, 병든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이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바로 소망이 없는 자기와 같은 죄인들을 향해 내미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 사랑으로 다가오고 있는 구원의 손길을 거절하는 것은 죽음 자체를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했고, 인간적인 의로는 아무 볼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들은 예수그리스도통해서 내미신 하나님의 피묻은 사랑의 손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사랑에 붙잡혀서 사는 것, 그런 사랑으로 자기를 용납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믿음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따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역사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 지를 알게 되었고, 내가 그분을 믿게 되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진정 그분의 사랑에 대해서 눈떴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와 감동 없이 ‘예수그리스도가 구주이신 것을 믿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세리와 죄인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아니하고, 물론 여러분들은 대부분 세리와 죄인과 같은 창기와 같은 위치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속에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체험에 대한 고민은 바리새인들의 입장에 훨씬 가까이 서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고민이 바로 여러분들의 고민일 것입니다. ‘주일도 잘 지키는데! 왜, 저렇게 허랑 방탕하고 저렇게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아 마땅한 파탄된 저런 사람들은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저렇게 흐느끼며 감격하고 기뻐하는데 나는 도대체 뭔가! 나는 십 년 넘게 주일을 빠진 적이 없고, 십일조도 걸러본 적이 없고, 절기 때마다 조금 헌금한 적은 있었지만 그냥 넘어간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내가 언제 주의 종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이 있던가!’ 이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신앙생활을 정말 제대로 하고,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려면 허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진실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겉멋 들린 신앙생활을 시작하면 그건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미인의 가면을 쓰시고, 못생긴 얼굴을 하고 사시렵니까? 아니면 예쁜 얼굴로 다시 태어나시렵니까? 여러분, 오늘날 교인들의 영성이 깊어지지 않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기도 안 하기 때문입니까? 물론, 기도도 지겹게 안 하지요. 말씀을 안 읽기 때문입니까? 물론, 말씀도 안 읽습니다. 열심히 안 모여서 그렇습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이제는 ‘수요예배를 꼭 드려야 하나!’하는 회의론이 들기 시작합니다. 주일 저녁 예배는 이미 회의론이 많이 퍼졌습니다. ‘2천명 교인의 100명도 안 모이는 예배를 꼭 드려야하나!’ 회의가 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이기를 폐합니다. 이렇게 모든 것들이 한국 교회의 영성을 좀먹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가장 커다란 문제는 허세, 허위, 거짓, 가식, 위선 이런 것들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몇 번이나 하나님 앞에 정직해 보셨습니까? 정말 하나님 앞에 정직합니까?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한 사람의 영성이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서 말미암는 건강한 영성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손을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이나 권세가 아닙니다. 그가 예수그리스도, 그가 성령의 은혜를 깊이 체험하고 얼마나 진실한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거짓과 허위를 벗어버리고, 진실하나를 붙들고 살아가게 되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가면과 가식과 허위가 파괴되고 진실하게 되는 일들이 체험을 통해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질문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모든 신앙생활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참된 성품을 체험하는 일 없이는 누구도 이런 진실한 하나님의 사랑을 물려받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바 되었을 때 우리가 진실로 사랑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허위와 함께 하시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겉멋 들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면 이건 파멸입니다. 정직해져야 됩니다. 정직해질 때 참회가 있습니다. 허위가 있는 곳에서는 1년 12달이 지나도 결코 참회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참회는 진실한 자만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슬리고 산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도, 그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 아버지 앞에 가난하게 빈 마음이 되어서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도 모두 정직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삶의 허위, 허세 이런 것들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누구도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서로에게 정직을 권면하게 진실하게 살아가는 자세를 일깨우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겉멋 들린 사람들은 결코 중직자로 뽑아서는 안됩니다. 멋 부리기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허세 부리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중요한 일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정말 진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단지 오래도록 신앙생활하고 오랜 경력이 붙었다는 이유 때문으로만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마음도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인격 속에 더 깊이 부은바 되어서 날이 갈수록 마음이 강퍅해 지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흘러가고 연륜이 깊어 갈수록 그 마음이 점점 더 어린아이와 같아지고, 어린아이의 속살과 같아져서 주님이 오셔서 무슨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의 신비 속에 교훈을 새기시든지 언제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로새겨질 수 있는 여린 가슴을 가진 사람, 그래서 노년은 눈물로 보내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눈물,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고 알아서 노년이 될수록 그 사랑을 의지하며 사는 것밖에는 소망이 없다고 하는 주님에게 집중된 성숙한 마음,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가까운 것을 기억하면서 이제껏 사랑하며 살아온 그분을 뵈올 날에 가슴 설레하는 마음으로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 이것이 바로 노년이 되어 갈수록 우리 속에 영글어 가야할 신앙인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허위와 거짓이 있고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신앙의 연조가 싶어질수록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강퍅하고 완악해지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교회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매일매일 만나는 은혜의 감격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하신 자비하심을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는 부패한 인간성의 각질들을 제거하는 자기의 진실한 계획이 없이는, 우리는 오래 교회생활 하고 우리의 삶이 반듯해지면 반듯해질수록 그리스도의 참 사랑의 감격으로부터 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의 모든 문제가 그렇듯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진실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허위를 마귀처럼 무서워하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위선과 가식, 자기를 드러내는 자기 자랑, 교만,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들입니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큰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은혜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이 부단히 거짓된 삶을 살려고 하고, 위선 된 삶을 살려고 하고, 인간적인 자기 의에 만족해서 그것으로서 마음속에 밀려오는 우리의 신앙의 근본적인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을 대치하려고 하는 허위들을 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지난주에 마지막으로 내린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자면 이런 결론 이 나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람으로 하여금 남들이 느끼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체험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은 반듯한 신앙생활 자체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삼지 않고 자기의 의와 습관적인 교회생활을 신앙 생활의 밑천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징벌이라는 얘기입니다.
교회생활 신앙 생활하는 모습도 반듯해야 합니다. 성도가 십 년이 지나도록 주일을 빠지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십일조를 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절기를 따라서 헌금을 하고,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을 물질로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도덕적이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는 삶을 대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기반은 그리스도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이 시간에 강조합니다. 결국 13장을 바라보는 중요한 망원경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오래 참음, 인내, 사랑, 견디는 것, 온유함, 성내지 않는 것, 예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을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랑이 기독교적으로 적립 되어야지만 세상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겠느냐를 통해서 내린 결론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감화 속에서 배운 사랑에 관한 교훈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교회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전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기반이 자기가 서 있는 신앙생활의 반석이 예수그리스도인지를 다시 물어봐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의 반석은 그리스도 예수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위에 견고하게 서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13장을 들어가지 전에 우리가 먼저 물어봐야 할 문제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들이 받아야 할 질문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생활의 중심, 반석이 예수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의 삶이 예수그리스도를 반석으로 삼고 있는 신앙생활이냐 하는 문제와 직접적으로 중요하게 연관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다양한 것에서 발견하려고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가장 뚜렷하게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은 다양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우선 하늘의 영광을 마다하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성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상에 사셨던 생애를 통해 보여주신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섬김은 곧,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다양한 섬김과 이 지상에서의 생애를 낱낱이 주목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세한 사랑을 읽어내는 눈들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신 것은 단지 병자를 고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산상에서 설교하시고, 오병이어로 떡과 물고기를 배고픈 자들에게 먹이신 것은 단지 구제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행하는 구제행위와는 다른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집요하게 이 예수님의 행동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어떤 측면을 보여주는 지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친 그곳에서 단지 병든 자를 고치실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을 보면 성경을 우리는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입니다. 병든 자를 고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치료를 통해서 우리는 가망이 없이 죄인되고, 병들어 있는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쉽게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더 풍성하게 들어 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오심과 함께 어떻게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내리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이 세상에 보여주신 모든 삶,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기 직전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누우셨던 모든 비참한 생애는 곧,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서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훌륭한 도구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장 모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성경에 나와있는 모든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계명을 읽어나가는 동안에 시종일관 이러한 관점들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침과 삶 전체, 그분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의심하던 자들, 하나님의 사랑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던 자들이 받을 형벌보다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참된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의 죄가 훨씬 더 큽니다. 왜냐하면 이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일 만큼 모두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군인들이 전쟁을 하다가 어두운데 무엇인가 수상한 물체가 나타나면 제일먼저 쏘아 올리는 것이 조명탄입니다. 조명탄은 탕 쏘면은 꼬리를 물면서 쭉 올라가서 위에서 불이 켜집니다. 그리고 낙하산을 타고 천천히 내려오면서 대낮과 같이 환하게 지상을 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말하자면 구약의 시대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조명탄을 쏘아 올릴 때에 한줄기 빛을 발하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이었다고 한다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것은 하늘꼭대기에서 조명탄이 찬란하게 터져서 빛을 발하여 온 지면을 환하게 비추게된 상황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당신이 부르신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신자들의 삶, 신자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 또한 성령을 체험하게 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참 사랑을 더 많이 느끼고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유는 성령이 오신 것 자체가 스스로 높임을 받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신자들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심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들을 체험하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입증하시는데 이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하실 때 우리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증거하시는 가장 중요한 직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증거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증거할 때에 성령께서는 필연적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그분이 이 세상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에 대해서 증거하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증거할 때에 우리의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서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에 대해서 감화를 받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될 때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그분의 사랑의 성품이 부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의 감화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체험,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모든 경험 한 가운데 단지 신비밖에는 남은 것이 없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체험이 아닙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성령의 체험은 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부은바 되어서 집요하게 그로 하여금 예수의 사랑을 좇아 살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못할 때에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근심과 고통과 자기를 불러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어울리지 못하는 삶을 살게된데서 오는 양심의 가책과 고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은혜의 체험 한복판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리스도를 체험한 한복판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저의 이 말씀을 여러분들의 신앙의 경험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하게 만나는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체험이 강도를 각기 다르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에게는 공통된 체험이 하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하는 체험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왜 눈물을 흘리게 됩니까? 자기가 죄인이라고 깨닫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를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 순간, 자기가 죄인이라는 인식과 함께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시라는 깊은 깨달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 것이 그렇게 슬퍼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함 개념이 없다면 사람들은 참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한 참회를 경험하고, 자기가 죄인임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라’고 고백을 하면서 바로 그 앞에서 그가 고백한 말이 ‘미쁘다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고, 그 사랑에 어울릴만한 신앙을 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죄악 된 모습이 생각난 것입니다. 이것은 동전의 앞 뒤 면과 같고, 손바닥과 손등과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생활의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진정한 참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허위와 가식은 있어도 진실이 없고, 진실한 참회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비록 그들의 삶이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이지 못하고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체험이 살아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언제나 참회가 있습니다. 참회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죄는 정결케 되고, 정결케 되기 때문에 그들은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심령은 다시금 기경됩니다. 그리고 무딘 심령이 다시 사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워져서 다시금 하나님의 세미한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할 수 있는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영적인 순발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이 위대한 고린도전서 13장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체험 없이 진정한 그리스도인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진정한 체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체험 없이 누구도 정상 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어떤 스타일의 신앙을 가지고 있든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타일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서 있는 삶의 기반, 신앙의 기반이 과연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위에 서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반석이신 예수그리스도, 그분 앞에 서 있기 때문에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이 그분의 사랑에 힘입고 살아가는, 그분 앞에 은혜에 빚진 자된 삶이냐는 것입니다. 자기는 죄인이고 오직 자기의 삶에 있어서 선한 것이 있다면 자기 같이 더러운 죄인을 십자가에 보혈의 피로 구원해 주신 예수그리스도 한 분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신앙이 인생의 모든 반석이 되고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 위에 서 있을 때만 우리의 모든 의로운 삶은 안전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서 있지 아니하는 것은 바로 이전에 사도 바울이 그토록 의를 행하고, 그토록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그토록 열심히 율법을 연구하고, 그토록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애를 썼을 때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던 바로 그 방해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에 대한 진실한 지식이 그리스도예수를 삶의 기반으로 하고 있지 않으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았습니다. 주님을 위한 충성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그의 눈을 가리웠습니다. 반석이 그리스도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체험,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사랑 없이 그는 참 신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공을 세우나 은혜 갚지 못하네’ 이런 고백은 예수그리스도를 반석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행해 온 많은 충성된 날들을 자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죄를 짓는 것은 편한 삶입니다. 그러나 그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피 흘리는 고난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게 의를 행하고 살아 온 삶을 어떻게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고, 그런 공로를 행하면서도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며 자기의 소유, 자신의 마음,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사람들에게 주어서 섬기면서도 그렇게 희생적으로 섬겼던 자신의 선한 것이 생각나지 않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잊어야겠다는 노력일까요? 그러면 더 어려움에 걸립니다. ‘나는 한번도 나의 의로움을 자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이번에는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선하게 살았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하지 않았더니 자랑하지 않은 그것이 그에게 자랑거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많은 선을 행하고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며, 지체들을 눈물로 뜨겁게 섬기고 자기를 모두 찢어서 나누어주는 사랑의 삶을 살고도 오히려 희생적으로, 헌신적으로 살았던 삶 때문에 그리스도가 안보이고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가운데 그리스도께 더 하나되고 그와 더 심리적으로 연합되고, 그와 더욱 한 몸이 되는 신앙의 깊은 비밀한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면 많은 선을 행하고, 큰사랑과 구제를 베풀고도 도무지 그것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비결은 하나입니다. 우리를 위해 행하신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의 발자취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크고 놀라운 사랑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행한 이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눈물이 없이 우리를 바라보실 수 없었던 뜨거운 긍휼과 넘치는 신적인 놀라운 자비심을 우리들이 깨닫고 체험하게 될 때 우리가 그 분 앞에서 행하게 되는 사랑이, 선행이, 구제하는 일들이 우리를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자기의의 기반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쥐꼬리만큼 충성하고, 더 크게 자랑하거나 혹은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베푼 사랑과 선행을 잊지 않고 가슴에 깊이 새기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값없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감격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기억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사랑이 기억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왜 제가 이 아름다운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장을 강론하기에 앞서서 사랑을 말하는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런 예비적인 점검들을 통해서, 여러분 속에 역사하고 있는 사랑의 순수성을 점검하지 않는다면 고린도전서 13장을 배우는 것이나, 논어를 배우는 것이나 여러분들에게는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13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온통 우리에게 자기를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13장은 그리스도 전체입니다. 아니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자신 안에 깃들어 있는 작은 성품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장을 읽어나가면서 여러분들이 그리스도 자신을 아는 깊은 은혜에 숲 속으로 들어가서 사랑의 다양한 요소의 샘물에서 물을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이 될 때에 비로소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안전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그렇다는 사실은 우리가 알았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알아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고, 또 우리의 삶의 반석이 순수하게 그리스도예수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온전하고 완전한 반석이실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것이 서론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답하기 앞서서 사랑이 얼마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어가는데 있어서 요긴한 것인가 하는 것을 먼저 살펴봐야만 이 문제에 대해서 더 적절한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사랑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물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만 그러나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한 대답입니다. 이런 논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을 때 태어날 때부터 이 세상 속에서 섞여 살아가는 세상사람 중에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약속으로 치면 이방인이고 외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외모, 피부색, 공부, 학벌, 문벌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가지를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놀라운 사랑으로 구원하셨다는 것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왜 그런 놀라운 사랑을 유독 우리들에게 맛보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셨는가하는 이 두 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생활을 계속해서 통제해 나가는 중요한 두 개의 재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왜 그런 놀라운 사랑을 베푸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런 놀라운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한복음 17장에서 하시던 대제사장의 기도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잡히시기 전 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17장의 기도를 드리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 속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원하는 것은 이들을 데려가게 하심이 아니요 이들을 이 세상에 두어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소원은 제자들이 이제 예수님이 가시고 나면 제자들은 홀로 남게 되고, 예수그리스도가 계실 때도 그러했듯이 예수님이 받았던 핍박과 박해를 이 연약한 제자들이 감당해야 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이 이 세상에 남아서 사는 삶은 매우 고통과 시련이 이어지는 생애라는 사실을 직감하셨습니다. 그들을 이리가운데 내버려두고 가시는 것과 같은 마음이었을지 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소원은 그 제자들을 당신과 함께 한 품에 안고 강도가 그러했던 것처럼 천국으로 데려가 버리시는 것이 예수님의 구원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특별한 사랑을 깨닫고 살았습니다. 그 은혜를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분이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가도 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어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끊임없이 내세를 전망하고, 그곳이 바로 신자가 궁극적으로 가야할 나라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나라를 그리워하고, 그 나라를 탄식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다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사람들만 그렇게 기다릴 자격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먼저 잘 믿기 전에 잘 사는 일이 있어야 됩니다. 주님을 만나서 기뻐하기 전에 주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슬픔과 죄가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삶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중간적으로 얻어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두셔서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있는 백성들과는 다르게 구별된 백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어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은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삶이고,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보여주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누구 신지를 보여주는 방법은 말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 신지를 보여주는 방법도 있지만 보다 더 일반적이고, 구체적인 방법 중에 하나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 사람들과는 여러분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인지를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의 삶은 이 세상에서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감동함을 받은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자신들이 무엇인가 빠뜨린 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남겨두신 하나님의 목표요 계획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삶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을 끌지 못하면 여러분의 말도 세상 사람들에게 주목을 끌 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수많은 회사의 광고처럼, 그렇게 휴지조각처럼 취급을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도 그리스도인들이 특별한 삶을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세상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세상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 대신, 이 세상 사람들이 동의해줄 수 없는 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조차도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조차도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를 용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특별한 삶이 아닙니까? 한쪽 뺨을 때리면 또 한쪽 뺨을 돌려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유별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죄조차도 자백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실행에 옮기지 않은 죄조차도 하나님과 사람 앞에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의 사랑, 주님의 순결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런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어떻게 삽니까? 정말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정말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서 삽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애통해하지 않은 이 세상의 죄와 자신의 불결과 속히 임하지 아니하고,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지체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애통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이 되어있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포악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온유해지고 겸비해지는 것을 배웠습니까? 정말 그리스도를 위해서 능력을 받고, 고난을 때 기뻐합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로 자신이 채워질 때 기뻐합니까? 그래서 팔복의 사람들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삶의 반석이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소금이 되지 않습니다. 빛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예수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신앙의 참된 반석을 예수그리스도로 삼는 일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설익은 그리스도인, 거짓 그리스도인, 가짜 그리스도인들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읽는 것을 마치 흔들리는 파도를 통해서 언덕 위에 풍경을 비춰보는 것처럼 불가능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보여주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보기 좋게 좌절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없으면 우리의 지식 속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나, 하나님이 누구 시고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지식 속에 있는 것이 우리의 생활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구별짓지 못합니다. 구별짓는 것은 오직 그것입니다. 머릿속에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머리로 섬길 뿐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 마음을 섬깁니다. 온 인격이 그리스도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지면 그는 자신의 모두를 예수그리스도를 위해 바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지식에 머무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식을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흉내를 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역사를 보면 교회의 의식, 교회 속에서 행하는 교회를 다닌다는 사실, 여러분들이 기도를 한다는 사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서 의무를 다한다는 사실 이런 외면적이고 종교적인 사실 하나가 이 세상에 감동을 준 적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그리스도인 속에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 다시 말하면 그 사람이 예수의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워두신 이 세상에서 당신을 알리는 방법은 허공에서 알리시고, 깃발을 세워서 알리시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사람과 접촉하며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접촉하고 만나게 하십니다. 지난 1주일 동안도 여러분은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십니다. 그런 수많은 만남들을 통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분들 속에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그 무엇이 여러분들의 삶을 움직이고 있고,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안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 사랑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대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를 움직이고 계신 분이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삶의 원동력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입증하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우리는 매일 매일 삶 속에서 하나님이 누구이시고, 예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삶,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 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우리를 매일매일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사랑을 소유하지 않고는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서 삶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로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지 않는 인생을 사는 동안 포악하고, 무자비하고 사람들의 가슴에 자기는 손톱 만한 상처를 입고, 다른 사람에게는 도끼로 내리치는 상처를 입히며 살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들인데 예수님의 참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들에게 상처를 헤아리면서 우리를 향해서 칼 들고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오히려 쓸어안고 용서해주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삶을 살 때에 비로소 인간 속에 깊이 뿌리박고, 서로서로 얽혀있는 궁극적인 불행의 쇠사슬들이 끊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사람들에게 준 상처는 기억하지 않고, 자기가 받은 상처만을 기억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건, 밖에서건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어서 일생동안 그것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족쇄가 되고 있다면 여러분, 그렇게 족쇄가 되고 있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커다란 죄악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그러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 사랑을 깨닫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영혼의 질병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그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과 상처가 가져다 준 끊임없는 윤회적인 고통을 주고받는 서클은 여러분들에게 와서 단절이 되고 끝나는 것입니다. 꼬리에 꼬리는 무는 상처들이 끝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불행의 원인이 인간들 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랑이 결핍된 관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 이런 것들이 모두 무시되고, 사람들은 이 사람이 저 사람을 미워하게 된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 결국 가난이 인간의 비극적인 문제가 아니겠느냐’, ‘건강 때문이었다', ‘오해 때문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충족시켜 보지만 그러나 인간 사이에 줄달음질 치고 있는 이 미움과 상처의 문제들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타라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되도록 부름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렇게 사랑하지 못하므로 말미암아서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의 씨앗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줄기차게 흐르는 모든 잘못된 고리들을 어느 한순간 여러분에게 와서 그것을 끊는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을 때, 누군가가 나를 미워할 때, 여러분들은 그 속에서 망가진 그 사람의 형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망가지고 일그러져 버린 사람, 그래서 그런 식으로밖에 반응하며 살수 없는 사람, 마치 색맹처럼 초록 색맹인 사람은 초록을 분간하지 못하잖아요.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밖에 반응할 수 없는 그 사람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과 망가지고 사람들과 망가진 채로 살아가서 버려진 모습이 얼마나 비참하게 질병에 걸린 상태와 같은 것인지를 바라보며 한없이 불쌍히 여기고, 그 상태를 한없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민하게 될 때에 마음속에서 자에게 받은 상처는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까지 줄달음치면서 다가왔던 수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만들었던 상처의 고리는 거기서 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거꾸로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쪽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 다시 반작용이 나갈 때 그것이 그에게 돌아오면서 자기가 사람들에게 상처 주면서 합리화하는 일들이 생기는데,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상처를 주었는데 건너가는 것은 긍휼과 자비와 참 사랑이 흘러들어 갑니다. 이것을 통해서 ‘저 사람 속에 무엇이 역사하길래 내가 던져준 그 수많은 상처가 이러한 놀라운 사랑으로 되돌아오는가! 저 사람은 무엇 때문에 상처를 준 나에게 저토록 선대하는가! 내가 그토록 미워하는데 저 사람은 왜 나에게 선하게 대하는가! 무엇 때문일까!’ 사람은 잠시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그 사람 속에 있는 진실한 사랑이 예수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때까지 말입니다.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아, 나의 궁극적인 불행의 문제는 미운 저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보게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이요, 그 지식에 기초한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런 관계를 역 추적해서 용서와 긍휼이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줄달음치던 저주의 고리가 끊어지면서 다음에는 변화의 고리로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의 시점을 여러분 삼으시려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한번 이 고리에 깊이 걸려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일들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사랑의 놀라운 은사를 이미 주셨고, 또 주고 싶어하시고, 이미 주신 것들을 우리 안에서 새롭게 불 일도록 만들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3. 사랑이 없으면Ⅰ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고전13:1)
소설에서 본 이야기 같습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서 모든 것을 동원을 해서 사랑을 했지만 결국은 그 남자의 마음을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마지막 헤어지게 된 상황에서 이 여자가 울며 통곡하듯이 이 남자에게 매달리듯이 따지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어디가 마음에 안 듭니까? 내 살이라도 깎고 뼈라도 깎아서 당신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고 싶으니 나를 제발 사랑해 주십시오.” 우리는 번번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신앙 생활을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자세 없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리즈를 시작하는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이전에는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제는 이 설교를 듣고 나서 아주 말을 잘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 말씀을 듣고 깨닫는 목표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의 포악한 성품이 변하여 예수님 닮은 사랑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 사랑할 수 없었던 미워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영적인 삶, 뛰어난 신앙의 특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무치지 못하므로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와 체험들을 통해 주님을 드러내지 못했던 이 실패한 삶들을 기경하여 새롭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말씀을 들을 때에 이렇게 주께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면,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그렇게 살겠다는 우리의 내면적인 다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뜻대로 살기 위해서 지불해야될지도 모르는 많은 비용들을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각오가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이 그 말씀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반응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말씀 자체 속에 깃들여 있는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이번에 고린도전서 13장을 여러분들이 새롭게 깨달으면서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일대 전환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선 1절에서 3절 사이를 보면 사도는 사랑에 대한 서론을 말합니다. 그리고 4절에서부터 사랑이 무엇인지를 풀어나가기 시작하고 뒷부분에 가서 사랑에 대한 묘사를 끝낸 후에, 사랑의 영원한 특성에 대해서 13장 마지막 부분까지 써내려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세 토막으로 나누어지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 장을 보면서 서론부터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선 1절에서 3절에서는 사랑이 무엇인가를 말하기에 앞서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가, 혹은 어떤 것들이 있으면서도 사랑이 없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 말함으로써, “이러이러한 것들이 있고 이러이러한 것들을 알고 있고, 이러이러한 것들을 내가 경험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로 미루어 볼 때 내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어떤 것을 결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모두 뒤집어 버리는 놀라운 일들을 사도는 이 부분의 진술을 통해서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 ?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첫째는 말이고 둘째는 지식이며 셋째는 믿음이고 넷째는 구제이고 다섯 번째는 헌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말, 지식, 믿음, 구제, 헌신 이런 것들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뒤집으면 사랑이 없이도 이렇게 말을 잘 할 수 있고, 또 놀라운 지식을 소유할 수도 있으며,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질 수도 있고, 사랑이 없이도 구제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사랑이 없이도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그러한 삶을 살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1절을 해설해 나아가기 전에 먼저, 충격적인 교훈이 폭풍과 같이 다가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 확인이 되어지는 것이지, 다른 것으로 사랑이 확인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말을 잘하는 것이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나 많은 물질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 심지어는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불사르게 내어주는 이런 일들도 사랑을 말해주는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도 지식도 믿음도 구제도 헌신도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사랑 자체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스스로 속을 때가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이러이러한 것들을 내가 하기 때문에 저러저러한 것들은 내게 있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주님을 위해 일을 많이 했으니까 나는 참 경건한 사람일 것이다 내가 저렇게 큰 일들을 이루어 놓았으니 나는 분명히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일 것이다. 이렇게 크고 놀라운 일들을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내가 거룩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이러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는 우리 자신, 나아가서는 사람을 판단해 주는 그 사람에 대한 판단이 얼마나 정확하지 않은지를 깨달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서도 우리들에게 이런 신앙의 평범한 교훈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것에 의해서 사랑이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에 의해서 그 사람이 사랑 있는 사람인지가 확인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사도 바울의 말씀에 의하면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눈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평범한 생각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놀라운 믿음이 있으며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많이 구제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줄 때, 그 사람들 속에 사랑이라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히 기본이 아닙니다.
기본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음식점에 가서 기본이라 하면 무엇을 시키든지 제일 먼저 사람 들어오면 물을 가지고 옵니다. 여러분! 사도는 오늘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에 의해서 못을 박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일들을 12장에서 사도는 이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쭉 얘기한 다음에, 내가 너희에게 더욱 더 큰 은사를 보이겠다고 말하면서 13장으로 들어오는데 13장에서 거론되는 것이 이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어떠한 그리스도인이든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말 잘하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으면서도 포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신앙생활을 발가벗기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래 예수 믿으신 것, 왕년에 하나님의 은혜 많이 받으신 것 저도 압니다. 신비체험도 좀 하셨다고 소문 들었고 어떤 분들의 체험은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저절로 사랑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 것입니다. 사랑이 전혀 없이도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묻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특성에 기본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무엇인가 별도로 하나님 앞에 받아야할 은사인 것처럼 사도가 오늘 말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우리에게 먼저 1절을 말합니다. “네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네게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 자!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이것이 제일 먼저 사랑을 대치할 수 없는 것이라고 거론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성경을 강론할 때마다 종종 강조하는 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순서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이런 것들이 있으면 사랑은 저절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의 편견을 깨뜨리기 위해서 제일 먼저 거론하고 있는 것은 바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사랑 자체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아니 거의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격차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에 관해 말하고 이야기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어떻습니까? 비용이 드는 것입니다. 4절 이하에 나오는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되는 사랑에 대한 속성들을 여러분들이 고요히 귀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모두 살을 에고 뼈를 깎는 것 같은 희생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무엇에 대해서 많이 말하면 그것에 익숙해지기 쉽고, 익숙해지고 나면 그것들이 우리가 단지 말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참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두 가지 사이를 혼동하는 그런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게 되면 우리가 예수님이 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무협소설을 읽고 재미있는 전사들의 이야기를 열을 내어 친구에게 얘기하다보면 자기도 입에 칼을 물고 하늘을 날아다닐 것 같은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말로서 사랑의 삶을 대치하려하는 그런 삶을 많이 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너희가 사랑에 대해서 많이 말할 줄 아느냐? 너희가 사랑에 대해 많이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곧 너희가 사랑의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라고 먼저 못을 박아서 우리의 외식과 가식을 한 꺼풀 벗겨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달랐지만 사랑의 사도로 불리었던 사도 요한도 동일한 위험을 지적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촉구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되 사랑을 하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그 사랑은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꾸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을 택한 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로, 혀로만 하는 사랑에는 돈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희생과 비용이 지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라고 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신비한 체험을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방언은 외국어입니다. 천사의 말은 천사들이 주고받는 언어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셨을 때 사람들이 방언을 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들은 외국의 방언을 배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이 임하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그 고장에서 말한 사람들도 아니데 각국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이 방언 사건들을 하나님이 선교에 급하신 나머지 사람들에게 이런 방언을 한 번에 부어주셔서 외국어를 습득하는 시간을 단축하셨고 외국으로 선교를 보내시기 위해서 행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죽으라고 영어 공부하는 사람들은 가장 믿음 없는 사람들입니다. 뭐 그것을 하고 있습니까? 그냥 기도하고 앉아서 ‘세계의 방언을 주시옵소서’ 라고 하며 시키는 대로하면 되는 것이지 왜 그런 바보 같은 일을 합니까? 또, 하나님이 말만 그렇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글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소식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복음처럼 들리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 식의 사고 방식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장이 쓰여진 그 시대는 로마 시대였습니다. 그 이전에 지배했던 나라가 여러분들이 역사 시간에 배운 마케도니아 시대입니다. 마케도니아가 이룬 커다란 문명을 가리켜서 헬레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나서 네 개로 나누어지는데 후에 로마가 일어나서 정치적으로 그 나라를 모두 삼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민족은 원래 아주 무식한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의 품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알렉산더 대제가 한 가장 큰 일의 하나는 공통어를 사용케 한 언어 통합 정책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헬라어 곧 그리스어입니다. 그 그리스어를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보급했습니다. 그리스어에는 어려운 그리스어와 쉬운 그리스어가 있습니다. 어려운 그리스어가 바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런 학자들이 써 놓은 아티카 희랍어라고 해서 고급 문학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코이네 방언이 있어서 모든 제국에서 쉽게 배우고 통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태어나면 당연히 두 가지 언어를 함께 배우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모국어와 제국 속에서 유통되고 있는 코이네 희랍어를 함께 배웠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는 어디를 가든지 코이네 희랍어를 말하면 통하는 광범위한 언어시대가 열렸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외국의 방언을 기적적으로 습득해야할 필요성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제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성령을 통해서 이처럼 천하 만방의 모든 족족들에게 전파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방언입니다. 그리고 천사의 말도 역시 신비한 체험에 의해 주어지는 방언입니다. 저는 천사의 말이 무엇인지 적당하게 여러분들에게 설명드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성경구절을 기초로 해서 방언에는 이 세상에 있는 언어를 기초로 해서 나오는 사람의 방언과 또 이 세상의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고 천사들만이 아는 그런 방언 두 가지가 있다고 분류를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 이것은 바로 신비한 체험 속에서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그 방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방언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여러분! 방언을 여기서 받으신 분이 얼마나 될까요? 저는 방언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는 방언을 받았을 때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방언을 달라고 오래도록 기도 하다가 받아서 기뻤던 것이 아닙니다. 저는 평소에 그런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안수해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빈 교회당에서 혼자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성령의 강력한 불이 임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제가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는 방언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큰 은혜를 받고 은혜와 함께 방언이 제게 임하는 것이 경험되었습니다.
어떤 체험 속에서 그것을 했는지는 더 소상하게 말씀드릴 필요가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하는 것입니다. 방언을 받으니까, 저는 그 때 성령의 은혜가 제게 임할 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놀라운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이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그런 방언을 하나님이 저에게 주셨습니다.
사도는 오늘 이런 방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습득을 통해서 우리에게 얻어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놀라운 은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쓸데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습습니까? 만약에 인간적으로 너무 갖고 싶어서 얻어왔다면, 만약에 내가 박사가 되고 싶어서 돈을 주고 가짜 박사학위를 사왔는데 하나님이 그것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하면 이해가 될텐데, 그런데 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 쓸데없다고 하시니 이 얼마나 모순입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자, 제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예수 믿어야 하는 지를 다 가르쳐준 후에 그것 다 소용 없어 라고 한다면 “누구 놀리는 것입니까?” 라고 할 것입니다. 얼마나 이상합니까? 책을 써 놓고 사서 읽으라고 해서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읽고 밑줄까지 쳤는데, 그 다음날 “그것 다 읽어봐야 소용없어” 라고 한다면 말입니다. 진작 이야기할 것이지 얼마나 방언의 은사를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면 애쓰며 받았는데 그 방언을 오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주신 이가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영적인 세계에 누구보다 뛰어났던 사람 바울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는데 불을 끄는 소방수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은사를 받기를 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그가 은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이것이 하나님이 지체들을 통해서 일을 이뤄나가는 것이라고 12장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얘들아, 너희가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이런 것들을 하게 하시는 성령을 체험했느냐?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합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논리가 다 그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바로 앞에서 이야기하는 놀라운 지식, 예언을 하는 능, 다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말, 그것이 쓸데없다라고 하는 단계를 넘어 한 단계 나아가서 신령한 은사로서의 방언이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좀 충격적이긴 하지만 몇 가지 가닥이 잡히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적절한 요건을 구비하지 않으면, 또 쓰는 사람의 인격 속에 이러한 사랑이 깃들여서 함께 역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임에도 불구하고 쓸모 없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받은 사람에게 물론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의 방언을 하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러한 놀라운 신비의 체험,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성이나 영적인 뛰어남,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이 곧 사랑은 기본으로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이야기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사도 바울의 머리 속에는 누군가 상정하고 있는 영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이 말한 마음속에 상정한 가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특성을 더 능가할 정도로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뛰어난 영적인 특성을 지닌 사람들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거론 될 수 있다면, 오늘 우리는 이런 위험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 그러면 거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런 의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을 그런 놀라운 신비의 체험 속에서 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런 체험을 하고도 사랑이 없을 수 있는가?” 그럴 수가 있다는 사실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서 만나는 많은 그리스도인을 통해서도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기도원과 은사집회를 많이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열심히 은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확실히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많은 은사를 소유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자, 방언을 늘 받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방언을 받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보다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받고싶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그런 방언의 은혜도 많이 주어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진짜 영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운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어려울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쪽에 치우치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방언 할 줄 아느냐? 그런데 사랑이 없으니 네가 받은 그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닐 것이야. 그것은 가짜야 혹시 마귀가 준 것이 아닐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런 은사를 받은 것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정죄를 받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보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의하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면서도 사랑이 없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겠는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 깨닫게 되는 것이 성령에 의해서 우리가 은사를 받는 것과 그 다음에 하나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는 것은 일치할 수도 있지만 일치하지 않을 수도 많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지로 제가 방언을 체험했을 때에 물론 순수한 젊은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야비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순수하고 눈물이 있고 주님께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 경험 자체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는 그런 일과 함께 나타났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훨씬 후에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놀라운 방언의 체험도 사랑과는 관계없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방언의 은사를 비난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방언의 은사가 아니 모든 하나님의 은사가 참된 은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것들을 통제하는 더 크고 놀라운 사랑이 그의 인격 속에 그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신앙과 은혜체험(1) 시리즈’를 다시 들어보시기를 권합니다. 특별히 거기에 ‘인격 속에 담기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테이프가 나옵니다. 그것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인격 속에 성령의 은사도 담긴다는 것입니다. 인격 자체가 사랑이 없고 야비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사가 담겨도 그 은사를 사용하는 방법이 정말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은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지배하려하고 우월감을 갖는 그런 고린도교회와 유사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자, 문제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문제를 앞으로 풀어가겠지만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주셨지만 그러나 우리들은 그런 많은 은사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 사건, 그의 지상생애와 그리고 그 이후의 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삶, 예수그리스도의 성품과 그의 섬김 이런 것들을 통해서 깊은 사랑의 감화를 받는 것은, 모든 은사보다도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느 날 하늘이 열리고 우리에게 예언하는 능과 방언 하는 능력이 부어지는 것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한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아 그런 사랑의 인격에 이런 방언의 놀라운 은사가 담겨져야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네게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라고 말합니다.
자, 이것은 또 무슨 말이겠습니까? 소리나는 구리 울리는 꽹과리, 이것은 어느 악기인지는 정확히 찾을 수 없었지만 그러나 이 악기 자체가 쓸모 없는 악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악기가 하찮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감정이나 인격을 갖지 못하고 두드리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그런 모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의 은사를 사용하고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말입니다. 자! 지금 이 종을 치면 소리가 납니다. 이 것은 아무런 소리를 내야겠다는 의지나 울리는 소리에 어떤 깊은 감화나 감동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외부적으로 때렸기 때문에 그냥 울릴 뿐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생활이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 그것이 무엇이냐?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입니다. 방언의 놀라운 은사가 있고 그리고도 사랑이 없으면 그러면 바울의 신앙생활과 바울의 모든 삶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요구하시거나 소리나게 하시면 그것에 따라서 비인격적으로 움직이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버린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그런 것이 될 수가 없고 우리의 믿음생활은 인격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인격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도 인격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기계적인 복종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특히 군대 같은 데는 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그런 것을 복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격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믿음을 우리를 억지로 입을 벌려서 고백하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시고 움직이셔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커다란 고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내 안에서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번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미국에는 밤에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심야에 방송 설교자들이 나옵니다. 텔레비전 플러스 이벤저리스트를 합해서 텔리벤저스트 라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심야 방송 때에 그 사람들의 설교를 내 보내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여류 설교자가 오래 전에 있었습니다. 얼마나 설교를 능란하게 잘하는지 불면증으로 고생하던 사람들은 그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고 감화를 받은 후에 평안을 되찾고 잠자리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잠자기 전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양복장으로 가서 거기에 헌금을 쓰고 사인을 해야만 잠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감화를 불러일으킨 설교자가 어느 날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죽은 원인은 수면제 과다복용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설교로 평안히 잠들게 해주고 자신은 평안한 잠을 이루지 못해 매일 밤 수면제를 복용하며 잠자리에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 해가 지나면서 약의 독성이 쌓여서 결국은 어느 날 늘어나는 수면제의 양을 감당하지 못하고 약물에 중독 되어 죽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삶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모두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일들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저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복음을 전해서 자기는 구원받지 못해도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 하나님의 일정한 진리가 있고 그 진리를 성령이 잡아서 감화시키면은 그 사람들 속에 감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아이들이 동요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이들 마음속에는 어거스틴을 회개시키고자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붙잡아서 그들의 동요를 통해 역사 하였습니다. “들어라 읽어라” 이 노래 소리를 들으면서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로마서를 읽고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논리에서 본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름다운 노래로 아름다운 찬양으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그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맛보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찬양이 여러분들의 영혼 속에는 전혀 울려 퍼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은 바로 오늘 이러한 예가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다운 신자의 영적인 생활에 기반을 둔 믿음생활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는 놀라운 신비한 능력이, 성령의 놀라운 은사가 우리에게 있어도 만약에 우리에게 이런 놀라운 능력 그런 것들이 담기는 우리의 인격 속에 깃들어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화가 우리를 움직이고,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사를 사용하는 그 방법과 사용하는 그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 사랑에 의해서 장악되어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바로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고 감동을 준 후에 자기는 잠을 이루지 못해서 수면제를 복용하다 죽어간 그 여류 설교자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긴장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고 자기는 오히려 그 구원으로부터 멀어질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역사, 모든 하나님의 사역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하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우리는 인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계십니까? 그 섬김이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인격을 통해서 여러분에게서 흘러나오고 잇습니까? 그 사랑이 주님을 향한 사랑 십자가에 달린 예수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동이 여러분들을 움직이고 있습니까? 여러분들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게 하고 복음을 전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원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13장 1절은 첫 장에서부터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놀라운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말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불러일으킬 수 잇습니다. 도전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도전을 못 받는데도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여러분들이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여러분들의 한 인격 속에 담겨져 있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사무치고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은사조차도 그렇게 우리에게 심겨진 사랑에 의해서 지배당하고 그 사랑에 의해서 장악되어서, 우리의 삶을 꽃피우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많은 은사, 많은 재능과 깨달음 이런 것들이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면서도 도구를 통해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이 우리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그런 비극적인 상황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오늘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방언도 귀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더 풍성한 은사를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이 그것보다도 더 훌륭한 하나님의 선물,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으며 그 사랑에 사무친 인격을 가진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 사랑 때문에 살고 그 사랑 때문에 죽고, 하나님이 무슨 은사를 주시고 우리에게 무슨 재능이 있고 우리에게 무슨 기회가 주어지고 우리에게 하늘을 열고 보이시는 놀라운 신비의 체험이 있어도,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그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을 받고 그래서 그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인격 속에 그런 놀라운 신비한 체험들이 담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 절마다 확인해야할 중요한 기도제목이지만 오늘 우리는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강퍅한 마음, 돌과 같이 굳어지고 바윗덩어리와 같이 차가운 우리의 마음에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나타난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두운 눈을 들어 그리스도의 피묻은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볼 때 우리들이 무감각해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사랑에 감화를 입고 감격하고 흐느껴서, 우리의 인격이 그 사랑으로 새롭게 빚어지는 놀라운 역사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4. 사랑이 없으면Ⅱ
네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네가 아무 것도 아니오(고전13:2)
1절에서는 네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 지라도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예언의 능과 믿음의 문제를 가지고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두 번째 문제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오.’ 여기에서 눈길을 끄는 단어 하나는 ‘모든’ 이라는 단어입니다. ‘모든 지식, 모든 비밀,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에서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지식과 비밀을 알고’ 하면서 지식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예언이나 지식, 이 모든 것들의 은사가 이 앞장인 12장에서 성령께서 주신 은사들로서 기록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될 것은 1절에서 이야기하는 방언이나 2절에서 말하는 예언하는 능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지 않고 악령이나 혹은 성령과는 관계가 없는 다른 것들로부터 주어지는 그러한 신비한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예언하는 능은 성령께로부터 주어진 예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서 그래서 인간의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은 경지 속에 있는 그런 비밀스런 하나님의 일 그리고 또 평범한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없는 믿음에 관한 지식, 이런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예언하는 능이 있는데 예언하는 능이 있어서 모든 지식과 비밀을 가지고 있어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이것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사랑 없이 예언을 하던 예와 또 사랑을 가지고 예언을 하던 예를 살펴보게 되면 이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쉽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한 번 찾아보겠습니다. 요한 복음 11장 47절입니다. 45절부터 읽겠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오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가리라‘ 하니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가로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줄 생각지 아니하는 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예언입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더라 예언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자기 지식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사용하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 성령이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멸망 받지 않도록 되는 것이 옳다고 하는 대속의 비밀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가야뱌가 예언한 이 말은 예수님께서 일찍이 예언하셨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 라고 하신 이 말씀과 맥을 같이하는 대속의 예언입니다. 한 분이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는 이 대속의 일에 대해 이 사람이 예언을 했습니다. 굉장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 사실을 감격적으로도 아닌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예언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그 예언을 남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대속의 사실을 말하고 그 장엄한 예언을 남기면서도 그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그 영광스런 감화를 자기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예언을 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만약에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고 참 사랑에 감화를 입었다면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에 관한 놀라운 교훈들을 어떻게 우리가 감화 받지 않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그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25절에,
“예루살렘에 시므몬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니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성을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 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하더라.”
이 장면은 여러분 알다시피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아기를 데리고 전례를 행하러 이제 성전으로 들어가실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일평생을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가 와서 그를 보기 전까지는 죽지 않으리라고 예언을 받은 그런 하나님의 사람 하나가 있었습니다. 선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예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품에 안겨서 함께 성전을 들어오는 광경을 보면서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해 졌습니다. 그리고는 “주재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제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이유가 하나님께서 아기를 통해서 온 인류를 구원할 이라는 증거를 보여주시기 전까지 자기를 죽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메시야 한 분에 대한 소망에 묶였기 때문에 자기가 이제껏 죽지 않고 살았는데 아기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으니 자신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자, 아까 그 가야바는 그 놀라운 대속의 죽음을 이야기하는데도 아무런 감동도 없이, 심지어는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위대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속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똑같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언하고 있는 이 시므온의 경우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예언할 때에 그는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예언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충만하게 느낀 사람이었습니다. 이 예언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예언이기도 했지만 그러나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감화로 말미암아 인격적인 감화로 말미암아 쏟아져 나온 예언이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둘 다 똑같은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대속적인 죽음을 예고하고 그 영광스러운 인류구속의 예언을 하면서도 위대한 복음적인 사실과 자신은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이 가야바의 영혼의 처지는 얼마나 불쌍한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시므온을 보십시오. 그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예언을 하였지만 그리스도 자신의 그 충만한 은혜와 사랑으로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고린도서로 다시 돌아가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그렇게 예언하는 능이 있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예언하고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일들을 알고, 알 수 없는 깊은 하나님의 사정을 헤아려서 예언하는 능이 있다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내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사도는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모든 지식, 모든 비밀을 말한 것처럼 모든 믿음을 말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그렇게 말합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이 얼마나 위대하게 역사하는 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종종 사용하셨던 그러한 말씀이었습니다. 만약에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이 산도 옮길 수 있다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 예수님이 얼마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믿음의 필요성 그리고 믿음의 당위성에 대해서 얼마나 강조하셨는지 모릅니다. 신앙 생활에 있어서 이 믿음이 가지고 있는 위대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원해 내기도 하고 숙명적으로 복종하며 살아야할 실패가 확정된 사람들에게 새로운 환경을 열어 주기도 합니다. 가망성이 없는 분들, 도저히 변화될 수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중보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바뀝니다. 믿음으로 불과 칼을 이기기도 하고 맹수의 입에서 풀려나기도 합니다. 이 놀라운 일들이 모두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믿음이 이처럼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랑에 관한 새로운 교훈들을 발견하면서 우리는 우리들이 생각하고 있었던 평범한 신앙생활에 대해서 깊은 점검을 받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예언하는 능이 있어서 모든 비밀 모든 지식을 헤아릴 정도로 신령하고 그리고 놀라운 믿음이 있어서 그 믿음이 그에게 역사하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그는 사랑이 결핍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에는 배치되는 것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데 그가 어떻게 사랑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 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영적인 놀라운 비밀을 아는 것 그리고 강력한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 이것과 우리가 사랑을 소유하는 것 그래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마치 어느 정도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자, 이것을 우리들은 이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랑은 제일 먼저는 물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것이고 이것 없이는 누구도 이런 사랑을 행할 수도 없고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저는 이 중요성을 이미 13장을 시작하기 전에 2 시간에 걸친 서론에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당연히 이런 사랑, 영성에 기초한 참된 신앙적인 사랑은 한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알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하여 보여준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는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참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죄로 말미암아 철저히 부패했고 타락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과 기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로 부패하고 타락한 것처럼 철저히 무능한 존재로서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난 그 사람이 물론 어느 정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과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독교적인 사랑을 스스로 실천하고 기독교적인 사랑 속에서 살아가기에는, 살아갈 수 있도록 그렇게 가꾸어지리라고 기대를 하는 것은 어리석을 정도로 그렇게 작은 부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치료는 사람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 있는 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전한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온전한 사랑을 베풀 줄 압니다. 그 이유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학습이 아니라 경험과 삶과 인격을 통해서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관계를 통해서 습득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기독교적인 참된 사랑이 결국은 어떻게 우리들 속에 주어지게 되느냐 그것은 한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서 혹은 하고 난 후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얼마나 더 깊고 더 온전하게 더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느냐 하는 우리의 사랑의 진정한 성장, 그런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 안에 우리들이 얼마나 더 분명하고 보다 더 확실하게 체험하게 되느냐에 의해서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기독교적인 사랑이 아닐 가능성이 많고 그리고 실제로 그런 깊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큰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체험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우리에게 은사처럼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자. 예언하는 능이 있다고 칩시다. 이것은 계속해서 학습을 해서 우리 속에 성장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방언 하는 은사를 주시면 방언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거두어 가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예언의 은사를 주시면 예언합니다. 걷어 가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이 예언이나 방언같이 은사로서 주시는 측면도 있지만 그러나 이 사랑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성화의 영역 속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하나님이 은사를 주실 때에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들이 기껏 하는 일은 아멘 하고 받았습니다. 저도 방언과는 전혀 상관없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많은 부분이 성화의 영역에 함께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화의 영역은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협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아무리 경건한 사람으로 만드시려 해도 여러분들이 계속 불경건한 삶을 택하면 여러분들은 경건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거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거룩한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주시고 진리를 깨닫게 하여도 여러분들이 거룩하게 살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거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정결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해도 여러분들이 불결한 삶에서 스스로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번쩍 들어 올리셔서 마치 진흙 속에 빠진 사람들을 헬기가 와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구덩이 속에서 건져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 건지시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거기에는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해야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날 오후에 저는 말씀과 기도의 관계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를 입어야 기도생활에 발동이 걸린다.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감화가 있을 때 그는 반드시 깊고 풍성한 기도생활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삶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감화는 분명히 받는데 기도생활 속으로 안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유는 R하나입니다. 영적인 게으름인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말씀의 감화를 주셔도 동일하게 감화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어떤 사람들 속에 기도의 영이 풍성하게 거합니까? 그런 감화를 흘려버리지 아니하고 게으름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기도하고 기도하기로 맹세하고 또 자신을 기도하는 삶에 끊임없이 복종시키면서 기도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과 더불어 철저하게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그 감화가 더욱 불붙고 더욱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갑니다.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말씀을 향해서 더 열린 마음을 갖고 더 감화를 받을 수 있는 영혼의 준비가 기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은 기도에 불을 붙이고 기도는 말씀의 감화를 준비시키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풍성해지고 없는 사람들은 있는 것마저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사랑이 성화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이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사도는 굳이 이렇게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언제나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 어차피 하나님이 주시면 하고 안 주시면 못하는 것인데 그럴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사랑을 행하면 주님이 주신 것이요 행하지 못하면 주님이 안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도는 이 사랑은 방언이나 예언과는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얘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사도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말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사랑을 구하라. 지금 여기서 예언의 능이나 방언이 필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도 훌륭하고 산을 옮기는 믿음도 위대하지만 그러나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아니하면 그 모든 것들은 나를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에게 화목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부은 바 되어야 합니다. 우리같이 돌같이 굳고 그리고 자기의 유익밖에 모르고 남을 위해 희생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녹이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크고 놀라운 사랑에 압도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에 압도되고 그의 거룩한 사랑에 압도되고 그리고 자가와 같이 철저하게 더러운 죄인을 향해서 부어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사랑이 부은 바 되어질 때 우리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기도의 영을 부어주셔야 우리는 깊은 기도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영원히 진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동시에 우리에게 너희는 기도하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 충만한 상태에 있든지 그렇지 못하든지 기도의 문이 활짝 열린 충만한 기도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죄악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 도저히 기도할 수 없는 장벽이 놓여 있든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순한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중단되지 않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찾고 매달리고 끈기 있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도의 영을 부으십니다. 기도의 영을 부은 바 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끈기 있는 기도생활을 이어갑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끊임없이 주님께로부터 사랑의 감화를 입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과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을 묵상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신 구원에 행동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진실한 행동에 대해서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일처럼 묵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매 순간마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 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우리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우리 된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십자가의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향한 그 분의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매 순간마다 그 사랑을 받기에는 전혀 합당하지 않은 자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단 한 순간이라도 우리가 그 사랑을 받을 만하고 우리가 아니면 그 사랑을 누가 취할 수 있겠느냐고 생각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마다 그 사랑에 합당치 않고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은 전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었으며 분에 넘치는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항상 그 앞에서 황송한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부어진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요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 부어준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는 왜 그랬는지 다 알 수 있다고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많은 말을 하던 입을 다물고 다만 어찌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의 몸을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버리셨는고 하면서 애통하고 늘 우는 것밖에는 우리에게는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울어도 눈물로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람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에 사무친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단 하나의 재산인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여기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어지는 사랑과 끊임없이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우리의 삶이 연속적인 순환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감화를 촉진하고 감화는 순종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화 없는 참된 순종도 없고 사랑이라는 계명에 대한 순종 없이 사랑의 참다운 감화에로 나아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할 때 그분의 생애는 믿음으로 사신 생애였고 그리고 거룩한 영광의 기적 속에서 사신 생애였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그분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얼마나 기적적인가 하는 사실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시던 밤에 밤하늘을 두루 비추던 별빛에 의해서도 입증되었습니다.
그 의 생애는 또한 어떠했습니까? 기적을 말하지 않고는 그의 생애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병자를 고치신 것,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수의를 입은 채 나오게 만들어 주셨던 그 능력은 기적적인 능력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로암 연못가로 사람을 보내시고 진흙을 이겨 바르시고 눈뜨게 해주신 사건이나 오병이어로 굶주린 백성을 먹이셨던 놀라운 일들은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생애가 기적과 무관하지 않은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특별한 권세로서 우리에게 당신자신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어떻게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그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야말로 예언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만 온 생애는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 분이 놀라운 능력을 행하시는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그분의 생애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오직 그런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 계셨었다는 사실을 알뿐입니다.
아무리 돌아봐도 우리가 그분의 그 놀라운 능력 때문에 병이 나은 것도 아닙니다. 병 나은 사람들은 살다가 이미 죽었고 보리떡을 먹은 사람들도 이 땅에 이미 없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 기적을 보았습니까? 우리가 그 기적을 체험했습니까? 그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과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그리고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기록들을 보면서 감화를 받는 것은 내가 병들었기 때문도 아니고 내가 죽어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내가 굶주렸기 때문에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면서 감격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지 않아도 얼마든지 빵과 떡과 물고기를 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감화와 감동을 받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물고기는 필요 없고 보리떡은 필요 없어도 주님으로 하여금 베세다 광야에서 굶주린 영혼들을 위해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셔서 그 물고기로 기적을 가능하게 하셨던 그 원래의 동기,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아가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병자를 고치는 사건, 문둥병자를 고치시는 사건, 그리고 굶주린 자를 먹이시는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감화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곤궁하고 고통하던 영혼들을 위해서 기적을 베풀게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안에 있는 그 놀라운 기적과 신비한 체험들의 근원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는 바로 아가페였던 것입니다.
고통하는 영혼들에 대한 끊임없는 연민과 눈물, 그리고 죄 가운데 살아가는 무지몽매하고 고통받는 영혼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끊임없이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 이 아가페가 오늘 2천년 후를 살고 있는 우리들을 감동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이미 이 놀라운 신비한 영적인 체험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런 영적인 국면과 사랑의 국면들이 어떻게 하나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기적 그 한 가운데에는 그 기적을 통해 혜택을 입는 영혼들에 대한 불쌍히 여기는 사랑이 동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는데도 그 중에 단 하나도 자기를 위해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제자들이 사다주는 떡과 포도주로 드셨지 스스로 떡과 포도주를 기적으로 만드셔서 자신의 식생활을 해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의 그 놀라운 기적 위대한 일을 행하실 수 잇는 그 신비한 창조주의 힘은 항상 사랑에 의해서만 작동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의 신비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삶을 사셨기 때문에, 사도는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이라는 단서를 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놀라운 영적인 은사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동기가 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 영혼들을 향해서 그 연민이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어 주신 그러한 특별한 은사 특별한 재능 여러분들에게 주신 남다른 특기나 특징들을 통해서 그것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것들을 통해서 우리를 자랑하고 교만하고 우리를 드러내고 우리를 알리려고 하는데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비한 체험은 있지만 마치 신비한 체험이나 영적인 강력한 능력이 있으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그러한 사고 방식, 이러한 것들은 전혀 영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놀라운 체험과 신비한 은혜로 무장되어 있을 때 그는 반드시 기독교의 참된 영성의 한복판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체험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깊은 사랑의 체험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체험이고 이 체험은 곧 그로 하여금 자신을 통해서 나타난 혹은 자신에게 부어주신 신비하고 놀라운 일들이 아니라, 그 껍질 속에 둘러 싸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에 눈뜨도록 항상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제로 온전한 신앙생활의 체험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가끔 우리들이 매우 영적인 사람이라고 여기면서도 인격이 사랑에 의해서 깊이 젖지 않은 다시 말하면 영적인 어떤 권세나 영적인 신비한 힘들 혹은 그런 체험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 체험이 없는 우리들이 보기에는 굉장히 영적인 사람이라고 느껴지면서도 이러한 사랑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대단히 영적인 것처럼 우리들 눈에 비치는 많은 부분은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고 그 사랑 앞에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겸비한 의식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도 자신의 영적인 체험을 늘 부풀리고 그러한 하나님이 주신 체험이나 영적인 은사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는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사고 방식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주 적은 체험을 크게 부풀리거나 자기가 영적인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외식을 하는 일들도 무의식, 혹은 의식 속에서 서슴지 않고 행하는 것입니다. 분별력이 없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대단히 평가절상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겉으로 드러내는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굉장히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부흥회 때 반말로 하는 그런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폭악적인 행동을 보면서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그 사람이 영적인가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혹은 그런 것들이 실제로 주님이 놀라운 은사를 주셔서 신앙의 어느 부분에 있어서 매우 특별한 은사의 표징을 보여 준다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것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성화의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은사는 때로는 그의 도덕적인 면이나 잘 다듬어진 성화된 인격과는 상관없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신비의 체험이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고 그렇게 사랑하며 살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과 더불어 싸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을 복종시키는 그러한 자기 변화 된 삶, 자기 부인의 삶을 지속적으로 살지 아니하면 그는 결국 그러한 영적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여기서 경고하고 있는 “사랑이 없으면” 이런 조건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덜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에서 사도가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에서 이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이 사랑은 사람들 속에서 유행하고 있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사람들 속에선 배울 수 없고 하나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끊임없이 회상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없는 사람이 아가페의 사랑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주님이 자기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이 아가페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격이 없으면서 이 사랑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다음 시간에 밝히려고 합니다.
어쨌든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평범한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이고 긍휼히 여기는 그런 인자의 사랑입니다.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자비, 인자입니다. 헤세드의 사랑인 것입니다. 선택된 백성들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와 자비, 당신이 창조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하신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이것이 바로 헤세드의 기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 아가페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하나님이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그 사랑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함으로 어떠한 대가가 나에게 돌아 올 것인가? 사랑하면 온전한 메아리가 될 것인가? 저 사람이 나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인가? 사랑을 하고 나면 내게 후회될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 하는 이런 복잡한 계산을 모두 초월한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사랑이 바로 그러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을 오늘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 사랑이 사람들 속에서 흔히 발견되는 사랑일 것 같으면 얼마든지 인간들 속에서 배우고 개발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사랑은 인간들 속에서 배우고 학습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입어야할 필요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특이하게 눈길을 끄는 장면은 2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내게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면 우리는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러니까 예언하는 능에도 사랑이 깃들여야 하고 그리고 모든 지식 모든 비밀을 아는 데에도 사랑이 깃들여야하고, 또 나아가서는 산을 옮길만한 믿음에도 사랑이 깃들여야 하는 것이구나.” 라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그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기에서 내는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을 일차적으로 가리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심지어 성령이 주시는 은사를 받아서 예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모든 비밀을 알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예언의 놀라운 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풀어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지식이 있고, 그가 기도하면 산이 옮겨지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그를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는 우리보다 훨씬 기도에 있어서 뛰어나고 영적인 일에 있어서 해박합니다. 우리가 그를 어떻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사도 바울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라고 말한 것은 정직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는 가치관과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판단하며 살아가는 가치관이 얼마나 혼돈된 가운데서 살아가는 지를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놀라운 신비의 체험을 하셨습니까? 은혜를 많이 체험하셔서 성경을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습니까? 기도하면 신비한 일들이 보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이적을 보여주고 계십니까?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놀라운 권능이 나타나고 다른 사람의 기도는 외면하시는 것 같은데 여러분들의 그 기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기적을 이루시고 이변을 일으키셔서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 가는 놀라운 증거가 보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이 너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마태복음 7장에 나타났던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였나이다. 그 때에 내 말이 나는 너희를 도무지 모르노라 희랍어 성경에 보면 부정 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알았는데 나중에 하는 꼴을 보니까 못되어서 모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귀신을 내어쫓을 그 때부터 처음에 선지자 노릇할 그때부터 몰랐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몰랐노라 애초부터 몰랐노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역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과 여러분들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들이 나타난다는 것과, 그런 일들이 여러분 자신 안에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풍성한 은혜가 없어도 여러분들이 전하는 말씀이나 여러분들의 기도나 섬김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러분 안에는 없는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방언의 은사, 예언의 은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거나 혹은 믿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나를 나 되게 만드는 영성의 특징, 신앙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요한은 이 점을 우리에게 누차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라는 사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서 입증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함께 태어난 형제들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가 이제껏 신앙생활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모든 가치 모든 중요하게 생각하는 많은 것들을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점검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 그 한가운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각성, 무엇에 대해서 각성하는 것입니까? 그 각성의 한 복판에는 반드시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가치 없는 그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다양하고 풍성하게 나타나는가를 깨닫는 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부흥은 결국 무엇에 대한 부흥입니까? 결국은 부흥을 통해서 사람들이 각성을 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눈뜨고 나면 마지막에 그들에게 도달되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고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랑을 모른 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이 그 사랑에 합당치 않았고 우리가 그런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인생의 참다운 동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각성의 때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래서 부흥의 때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 새롭게 다가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느니라.” 하는 이 요한 복음 3장 16절이 가장 심각하게 실제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신앙의 한 복판에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언의 능이 없어도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방언을 하지 못해도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방언의 은사 없는 사람들은 어떠하겠습니까? 신령한 비밀을 다 알지 못해도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은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을 포함해서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구원하셔서 당신의 피묻은 자녀로 삼으셨는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세상이 진정으로 알아야할 하나님을 보여주는 사람들로 이 세상에 세워놓으신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주님이 목 메이도록 알리고 싶어하신 것은, 여러분들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이세상의 인간들을 사랑하시는지를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통해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보여 주어도 인간에게는 하나님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마치 두더지를 땅 속에서 꺼내어 해를 보게 하고 태양을 관측하게 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무모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자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살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 앞에서 이 세상 것들에 대한 많은 사랑을 십자가에 못박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잇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주님이외에는 사랑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형상들을 나누어 가진 인간들을 보면서 그가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망가져 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 형상을 향한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물려받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죄인 안에 있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먼저 예수 믿게 만드셔서 여기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안에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이 세상에 있는 버려진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스스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는 존재들, 심지어는 서로가 서로를 버리고 서로가 서로를 못박고 정죄하고 포기하는 관계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이 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한 사람이 거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버린 죄인들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인격 속에 영혼 곳에 부어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동일한 사랑으로 형제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의 가능성을 보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랑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끝없는 사랑에 감화를 입었기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과 질적으로 동일한 사랑을 가지고 망가진 형제의 삶 속에 존재하고 잇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 세상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곧 눈에 띄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랑을 행하는 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사랑과 선행을 베풀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로 하여금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수많은 칭찬이나 미담거리가 아니라 자기 안에 역사하고 계신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사랑을 하게 될 때에 그는 필연적으로 자기는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의 눈에 뜨이게 되는 것입니다.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모두들 포기한 관계 속에 뛰어 들어서 서로를 서로가 포기한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뜨겁게 사랑하는 모습, 그래서 섬기는 손길을 보면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보라! 사랑이 여기에 있도다. 우리가 이 긴 세월 살아 왔지만 누가 우리를 사랑하였던고? 모두들 우리를 서로 버렸지만 그러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찾아오신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그리스도가 아닌가?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우리 존재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있을 그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5. 사랑이 없으면Ⅲ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전13:3)
먼저 사도는 13장 1절에서부터 오늘 살펴볼 3절까지 사랑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사랑이 우리 기독교인의 삶,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어떻게 필수적인지에 대해서 이해를 받게 한 후에, 그 다음에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가르치는 전형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사도는 분명히 우리에게 말하기를 1절과 2절, 3절에 거쳐서 사도는 몇 가지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것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1절에서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는 ‘신비체험과 그리고 큰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3절에서 든 것은 ‘구제와 헌신’입니다. 그리고 지금 든 그 헌신과 구제 신비한 체험과 큰 믿음, 그리고 능숙한 말, 하나님의 깊은 사정을 헤아리는 그러한 모든 것들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헌신이 없다면 그 사람의 신앙을 무엇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신앙 생활하는데 아무리 은혜를 받았어도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까? 여전히 하나님 앞에 헌신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이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신앙이 들어가면 우리는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도 헌신해야하고 우리의 물질과 시간도 드립니다. 우리의 마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모두 드립니다. 마지막에 주님께서 목숨을 원하시면 그것까지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 없이 우리는 신앙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제하는 것, 가난한 자를 보고 곧 물질로 말미암아 고통 하는 사람을 보고 돌아보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고,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는 삶이 없다면 그 사람은 신앙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이 있는 곳은 반드시 구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구제하며 살아야합니다. 마치 구제할 기회를 만나면 달란트를 맡은 것처럼 그렇게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회를 누구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들이 돕고 그리고 자신의 물질로 섬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복음의 정신이요, 기독교의 삶, 정신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믿음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신비한 체험이 없다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많은 생각은 모두 정보로서 그의 머리에서만 움직이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우리는 자기가 믿는 바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 말이 많아지는 사람들입니다. 그처럼 말, 신비한 체험, 큰 믿음, 구제 헌신 모두 신앙에 있어서 생명적인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사도는 자기의 손으로 격파해 나가고 있는 느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신앙을 잘 보여주는 요소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점차 단계를 높이며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말보다는 신비한 체험, 큰 믿음 이것이 믿음의 본질에 더 가깝습니다. 적어도 외면적으로 볼 때는 믿음이나 신비한 체험보다는 자기의 귀한 것을 나누어주는 구제의 행위, 아니면 신앙의 도리를 위해서 영웅적인 죽음으로 자기를 불태워 버리는 극단적인 헌신이 신앙의 본질을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가장 잘 보여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제 이 문제를 점검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자, 제일 먼저 사도는 무조건 말이나 신비한 체험과 믿음 그리고 구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조건을 하나 달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이라고... 사랑이 없으면 물질을 퍼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행위나 선행이나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 주는 죽음에 이르는 헌신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이 없이도 구제할 수 있는가? 사랑이 없이도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가 있는가?” 결론은 그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이는 구제할 수 없고 자기 몸을 내어 줄 수 없습니다.
종종 보태 달라는 거지를 만나는데 거지 행색이 아닌 멀쩡한 차림의 거지를 만나면 도와주고도 기분이 찜찜합니다. 그러나 몰골이 초라하고 신체가 부실한 사람을 보면 구제를 하고 자주 만난다 해도 기분이 상하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 없이 이것이 가능합니까? 이유 없이 여러분들이 만원 하나라도 내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 큰 물질을 이유 없이 내어놓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저의 이 말은 말장난 같지만 성경의 진술을 뒤집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내게 있는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이도 그런 일들이 행해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들이 살아보면 사랑 없으면 그런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이 사이의 논리적인 간격을 메울 수 잇겠습니까? 문제는 이것입니다. 이유가 있기 때문에 구제를 하고 더욱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때에는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심심한데 오늘 한 번 죽을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야만 죽음에 이르는 헌신도 가능하고 자기의 물질을 주는 헌신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이 아가페라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는 구제할 수도 없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없지만, 아가페 없이는 구제할 수도 있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사랑이 근본적으로 모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아가페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예수님 시대에는 이런 아가페적인 사랑이 없으면서도 구제하고 기도하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선 이런 사람들이 바로 외식하는 사람들이라고 예수님께서 지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긴 사랑했으나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높여줄 자신의 명예를 사랑했습니다. 그런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기도하게 했습니다. 구제를 하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베풀어주는 것은 아까운 것이지만, 그러나 내가 이렇게 구제함으로 말미암아 번지는 소문들이 자기에게 가져다줄 좋은 평판은 그 물질보다 훨씬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명예에 대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그들은 구제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종종 수재민 의연금을 걷고 신문에서 얼굴을 내밀고 사진을 찍으면서 돈 봉투를 건네는 많은 사진들을 봅니다. 아무 것도 알리지 않고 그저 무명이라고 기록했을 때에 몇 억씩 낼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것도 사랑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외식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똑같은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데 그것을 하게 한 동기는 물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그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명예를 사랑하는 것,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나와 함께 이 땅에 살아 있어서 좋은 사람 그리고 그가 나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이 땅에 존재하고 번영하는 것이 내 인생을 번영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도움을 끼칠 것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에 대한 사랑, 이런 사랑이나 자기의 명예에 대한 사랑이나 무엇이 다를 바가 있냐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약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너희의 사랑이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랑의 문제는 매우 미묘하고 거미줄처럼 얽혀서 우리가 사실은 정말 이타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고 정말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많은 부분들이, 결국 그 사랑의 수혜자 그 사랑의 혜택을 받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잇습니다. 우리는 부모들에게서도 이런 것들을 많이 봅니다. 공부를 유난히 못한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굉장히 공부를 강요합니다. 물론 공부를 잘했던 부모들이 자식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을 바란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유난히 그렇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에 있어서 순결하지 못한 사람들이 반대적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순결을 강조하는 심리적인 모습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의심받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 다른 사람들의 행동이나 모습을 어두운 시각에서 보면서 의심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인간이 그런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공부 못하는 부모가 자식을 공부 잘하도록 사정없이 두들겨 패고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서 아이를 공부시키려 노력할 때에, 그것이 순수하게 자녀들만을 향한 참된 사랑이 동기가 되었겠습니까? 어느 정도는 상당히 많은 부분은 자기가 이루지 못한 생각이나 꿈들을 자식을 통해 실현해 보려고 하는 보상적인 욕구들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순수한 부모의 사랑에 있어서도 우리는 이러한 요소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남녀가 서로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야 더 더욱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들이 결국에 그 사랑을 통해서 혜택을 받는 사람이 자기에게 귀착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하면서 그 사랑이 마치 지상에 없는 지고하고 순결한 사랑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싶어하셨던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 사랑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이러한 차원에서의 사랑을 가지고 생각하고 거기에 함께 엮으려고 하면 안돼는 것입니다. 사랑 없으면 구제도 불가능하고 더 더욱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 중에 가장 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물질적이고 자기 자신의 눈에 모이는 이익을 위한 그러한 욕구에서 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때로는 좀 더 고상해 보이는 것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야만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민주화 투쟁의 시기를 겪으면서 수많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온 몸에 휘발유나 신나를 뿌리고 고층빌딩에서 투신 자살하는 광경을 일 주일에도 몇 번씩 보면서 80년대를 지나야 했습니다. 사랑이 시킨 것입니까? 더욱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그런 사랑이 시킨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습니다. 그리고 온유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인데 뭔가 여기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그런 사랑,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무엇이냐고 묻는 그 율법사의 말에 답하시는 가운데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 계명에서 나오는 그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은 우리의 집념에 의해서도 가능하고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편견에 의해서도 가능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서도 가능한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때로는 이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을 찍는 사진사들은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생명을 건 모험을 합니다. 오랫동안 연극을 하면서 한 평생을 살아온 어느 연극 배우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80세 가까이 되어 인터뷰를 하는데 자기의 마지막 소원은 무대에서 연기하다 피 토하고 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이 시킨 것입니까?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아가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원하는 그런 죽음은 세상적으로는 객사이고 직업으로는 순직이라고 합니다. 그런 삶을 그렇게 그리워하고 그 삶이 멋있다고 꿈꾸는 하는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 자신의 삶을 드리고 싶어하는 열심,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쁨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적인 신념 이런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이 사랑은 철저하게 신자들의 세계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화를 입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행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그리고 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많은 부분들, 겉으로는 그럴 듯한 선행, 겉보기에는 상당히 아름다워 보이는 그런 착한 삶, 겉보기에는 칭찬 받을 만한 신앙인으로서의 균형 잡힌 생활, 이런 많은 것들이 기초 그 자체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 사랑이 아닌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어떻게 드러납니까? 기도교인으로서의 삶은 너무 반듯합니다. 정직합니다. 올바릅니다. 그리고 지킬 것은 지킵니다. 예의 바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들의 동기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거기에는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삶이 반듯할 뿐이지 도대체 삶에의 감동도 감화도 없습니다. 살고 싶은 많은 삶들은 언제나 가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데 이런 종류의 사람들의 삶은 영혼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삶이 아니라 언제나 머리 속에서 나오고 사람의 구조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들은 굉장히 놀라운 것입니다. 신앙에 의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주어서 어떤 일을 하게 하는 것은 굉장히 힘이 들지만, 그러나 모든 것을 건너뛰어서 여러분은 그것을 해야 합니다. 만날 적마다 상기시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만날 적마다 사람들에게 주입시키면 그러면 놀랍게 그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는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저희 동역자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나름대로 사연이 있었겠지요- 한 번 만났는데 “김교수,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장기를 모두 가지고 죽어 버리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평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별 대꾸하지 못했습니다. 자기는 그것을 죄악으로 생각하며 자기와 자기 가족 모두는 사랑의 장기 기증 운동 본부에 모두 기증했다고 했습니다. 죽는 즉시 모든 장기를 다 빼서 다 나누어주라고 했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광고 시간에, “콩팥 두 개 달고 뭐 하느냐 오늘 다 기증하고 가십시오.”라고 한다면 한 사람도 내 놓고 갈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매 주, 매 시간마다 설득하고 가르치고, 교재 만들어 가르치고 기도하게 하며, 계속 그것을 바치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계속 설교하고 가르치면, 여러분들은 어느덧 두 개의 콩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부자연스럽고 죄송스러워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한 사람씩 침대에 누워 콩팥을 내어놓게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저는 그 운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할 용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아무런 감화 없이도 훈련만 통해서도 그런 일들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박대통령 시절에 서슬이 시퍼렇던 때가 있었습니다. 굵직한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형언도를 받았습니다. 그 때에 재판장에서 일어나 일화입니다. 형에 의해 사형을 선고하자 웬만한 사람들 같으면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을 것이지만 젊은 청년들이 “영광입니다.”라고 말했으며 주위의 동료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얼마든지 그런 일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이 시키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나머지 일들은 얼마나 쉽게 가능하겠습니까?
그 선행, 그 균형 잡힌 행동, 그 그럴싸해 보이는 종교적인 모습들이 근본적으로 그것들을 움직이고 있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점검도 없고 그리고 사람들을 그런 쪽으로 내몰아서 어떤 일들을 행하려고 할 때, 처음에는 그 장면이 감동적일지 모릅니다. 그리고 감동적으로 보는 것이 세상의 눈빛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아가페가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이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나 감화가 그것들을 시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감동을 받은 어떤 의무 순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을 움직일 고 있는 것은 이데올로기이고 개인의 사상이고 사람들 앞에 받을 수 있는 어떤 평판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입니다. 얼마든지 이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서 사랑이라고 생각되는 표현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정말 영적인 선, 아가페의 사랑에 기초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 여러분! 어떤 사람들이 이런 함정에 빠지게 됩니까? 어떤 사람들이 이런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진정한 감화도 없이 강요된 어떤 도덕이나 이데올로기나 자기들 나름대로 가진 그런 신념을 가지고 무엇인가를 행하게 하는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런 삶이 가능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삶이 가능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과 은혜의 이해 없이 우리들이 그런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 사고, 사랑은 그리스도를 기반으로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고 자기의 전 재산을 퍼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도 언제나 그는 공허한 삶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 없이도 그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해보면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말씀을 통해서 깊은 감화를 받는 이 기본적인 신앙의 틀 자체가 정리가 안된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을 넘어 서서 무엇인가 자꾸 하려고 하고 뭔가를 보여 주려하고 성취하려하고 선한 일을 향해 뭔가를 자꾸 계획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많은 선을 행하는 것이 그에게 거룩한 기쁨이나 하나님으로 가득 찬 사랑의 즐거움을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랑의 행위를 보면서 자신 속에서는 이상하게 사랑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겉모습은 거룩했으나 거룩한 생활에 어울리는 그들 내면의 거룩함이 없었습니다.
겉모습은 그럴 듯합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집사. 장로, 혹은 목사가 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지도자로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의 예절 바른 교회 생활은 신앙생활의 세월이 흐를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모범이라 말하고 그에게 예수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법 없이 살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영혼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면적으로는 넘치는 종교적인 삶 자기를 내어주리 만큼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던져 버릴 만큼 헌신적인 삶을 사는 데도 그 불꽃이 그들 안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 앞이 아닌 혼자 있을 때에는 그런 삶을 이어갈 자신이 없습니다. 표리부동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화) 윤리 운동에 앞장 선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의 어느 여 전도사 님을 가끔 만나 여러 해 동안 교제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그 교회에 어 울리지 않게 복음에 대한 깊은 감격을 지니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자기 교회에 장로님 한 분이 있는데 모든 교회 교인의 사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믿음이 좋으냐는 저의 말에 그분은 전직 세무서장이었 는데 지금도 아주 작은 집에서 노모와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으며 그분의 생 애에 부정은 없었고 완벽할 정도의 정직한 공직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존경할 만하다는 저의 말에 그 전도사님은 그분이 정말 정직한 것은 틀림이 없으며 부정 과는 관계없는 일평생 청백리로 사셨지만 그러나 자기는 교역자의 양심으로 그분 의 영혼은 죽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장 싫어하는 신앙의 모습이 그런 것입니다. 정직한 것을 싫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이 정직하게 살고 공직생활 일평생을 집 한 채 없이 그렇게 올바른 청백리로서 일생을 살았다는 사실에는 조금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을 살게 만들어 준 것이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삶의 기반은 불행히도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일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그것이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 기반이 그리스도께로 오는 모든 좋은 영적인 감화와 풍성한 삶, 죄에 대한 진정한 참회, 거기에서 비롯되는 하나님의 사랑의 빛을 가로막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그리스도를 못 만났습니까? 왜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을 영접했지만 그렇게 의롭게 살던 사람들은 왜 주님을 못 만났습니까? 주님은 한 번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가르침이나 행함을 비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삶을 문제로 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회칠한 무덤을 문제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뼈다귀가 문제가 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창기와 세리들을 사랑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없는 것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들의 삶은 문제가 안되었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여러분들이 방탕하고 멋대로 사는 것보다 정직하고 단정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수요일에 단란 주점이나 노래방에서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보다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을 훨씬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의로운 삶이 있었지만 불행히도 그 기반은 그리스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의 삶의 기반이 되었더라면 그들은 그들의 의로운 삶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더 풍부하게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잘 그리스도를 만났을 것입니다.
바리새인과는 다르긴 하지만 시므온과 안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전례를 받기 위해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안고 성전에 올라갈 때에 처음 예수그리스도를 뵈었던 그 두 사람 말입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지존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뵈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기와 세리들에게 보이시기 전에 먼저 일평생을 하나님을 바라보며 정결하게 자신을 지키며 거룩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리스도 예수, 오실 메시야 예수를 향해 고정된 삶을 살았던 의롭고 정결한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서 깨끗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공직에 있다면 뇌물을 받아서는 안되고 사업을 하고 있다면 부정한 방법으로 뇌물을 주고 그런 것을 수단으로 일을 꾸며 가려고 생각해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모두 인정하면서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구제와 헌신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열심을 여러분 흉내 낼 수 있습니까?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할 자신이 있습니까?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낼 자신이 있습니까? 그 복잡한 절기를 다 지킬 자신이 있습니까? 율법대로 행하기 위해서 노력할 자신이 있습니까? 그럴 필요도 없지만 그럴 능력도 여러분에게는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의로운 삶은 있었지만 그 의로운 삶의 기반이 그리스도 예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의였습니다.
그러나 창기와 세리는 자기의 의를 좀 삼으려고 해도, 뇌물 얻어먹고 몸 팔고 술 따른 것 밖에는 내세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 위에 어떻게 서겠습니까? 그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나아 오려고 하는데 옛날에 악한 길을 걸어온 것을 자랑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죄인들을 거저 오라 부르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불의와 부도덕한 삶, 죄악 된 삶을 보면서 깊이 회개했지만, 그러나 그들에게 의로운 삶은 없었지만 자신들에게 새로운 구원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받아들이기에 그들은 처절하게 목숨을 걸었습니다.
설자리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반석이었습니다. 그것 이외에는 자신들에게는 의로운 삶도 정결한 삶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 더욱 그리스도 예수만을 붙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았더라면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보다 훨씬 더 크게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도덕적인 삶도 없었고 그리고 자기 의가 될만한 아무런 기반도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하는 사실과 그분이 자신들을 끔찍이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들은 그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사실 하나, 이것밖에 그들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 걸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가페가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랑할 것이라고는 사랑할 것이라고는 그리스도 예수밖에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살던 많은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들을 배신했지만 그러나 자기들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만은 자신들의 사랑을 받아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죄인들 사이에는 사랑의 관계가 성립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기반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기반 자체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우리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 가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치 없는 죄인들의 의로운 삶이나 도덕적인 삶에 기초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 베푸시기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 덕분에 사랑을 입게된 그 사랑의 사람들, 이 사람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을 가르쳐서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하시드라고 말합니다. 하시드는 헤세드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헤세드는 아가페입니다. 그리고 하시드는 헤세드라는 명사의 피동형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시드는 헤세드를 입은 사람들, 신약에 와서 희랍어에서는 아가페 (터이?)라고 말합니다. 아가페를 입은 사람 수동형입니다. 내가 아가페를 불러일으키거나 내가 가져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느 사람에게 아가페를 주셔서 그 아가페의 사랑의 은혜를 입은 사람, 이들이 바로 사랑 받는 자들 하나님의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기반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반이요 영적인 삶의 핵심이요, 우리의 인생 전체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서 있지 않는 사람들은 반석이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종교적인 열심히 있고 자극을 받으면 펑펑 울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 서 있는 삶의 기초가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아가페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삶은 견고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너무나 외식하고 살아가지 않습니까? 외식이 있는 곳에는 거룩한 영성이 깃들 수 없습니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실이 없는 곳에는 영으로 드리는 예배도 없고 하나님을 만나는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천하를 두루 살피시면서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전심으로 자기를 찾는 자들은 모두 허위와 거짓과 가식과 잘못된 의를 벗어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이고 반석이신 예수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입은 사람들이고 그 사랑만이 자신들의 삶에 동기가 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은혜 입히신 자들의 삶이요 신앙인 것입니다.
고의적인 범죄만큼 무서운 것은 무의식적인 외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참 사랑에 대한 감화도 없이 우리는 이것저것 그럴 듯한 자신의 신앙생활의 모습을 일구어 가면서 그 모습에 스스로 도취되고, 그렇게 쌓아 올린 외식의 껍질들의 키를 재면서 서로 비교하고 있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 없이도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 줄 수도 있고 그럴싸하게 구제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행하든 거짓으로 행하든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그런 선한 삶, 헌신적인 삶의 기반이 하나님을 향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삶은 그럴싸한데 영적인 생활은 그럴듯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래 교회 다니고 오래 신앙 생활하면 교회에서 어떻게 예의를 갖추고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되는지 어떻게 교회를 섬기고 목회자에게 어떻게 해야 예의이고, 교회를 어떻게 운영해야되고 모두 배웁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룩한 감동이 없이도 얼마든지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직장에 다니면 직장 일을 꾸려 가듯이 교회 일도 그렇게 꾸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생활은 굉장히 신앙적입니다. 문제는 감화가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면서도 그 주님이 귀하신 분이라는 사실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자기의 있는 것을 구제 해 나누어주고 그리고 옳은 일을 위해서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던져 주면서도 하나님의 참 사랑의 아가페와 그의 마음속에 섬기면 섬길수록 더 크게 떠오르고 자신에게 커다란 감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의 영적인 허기, 한없이 허해오고 공허해 오는 하나님을 섬기면 섬길수록 열심히 봉사하면 봉사할수록, 일을 할 때는 뭔가 되는 것 같은 데 홀로 있을 때는 모두 무너질 것 같은 구멍 뚫린 가슴을 안고 주일 오후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조국교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홀로 자신을 성찰하는 것이 너무나 무섭기 때문에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들을 만들어 내고 일이 끝나면 교회는 또 다른 일들을 계획해 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엇인가 계획을 가지고 내모는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우리의 영적인 삶은 철저히 가식과 위선 속에 에워 쌓이게 되는 거십니다. 섬길수록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는 점점 멀어지고 주님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분으로 느껴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덧붙이면서 경고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런 유익이 없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구제하면 자기에게 유익이 있습니까?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면 자기에게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구제는 자기에게 유익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설교를 들으시면서 마태복음 6장의 참된 신앙과 외식이라는 시리즈를 다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 때 제가 은밀한 구제에 대해 설교하면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구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께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 줍니까?” 구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하는 데 좋은 행위입니다.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구제를 은밀하게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소중한 것을 바치는 것과 함께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 분인지를 깨닫게 되면,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귀한 것을 바치면 바칠수록 우리 인생의 참된 소망은 주님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섬기며 사는 것이 외에 우리의 인생은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 해 보십시오. 정말 그렇습니다.
제가 처음 은혜를 받고 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고 나니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있어야지 드리지요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나서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칠 때마다 바치기 직전까지는 밀려오지 않던 신앙의 감격들이 밀려옵니다. “아! 맞아 이렇게 사는 것이 신앙의 본분이야.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면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야.”라며 나 같은 죄인 통해서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여러분, 교회를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교회를 위해 자기의 물질과 젊음, 마음을 드리며 소중한 모든 것을 다 바쳤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목사가 자기 교회를 제일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외국에 가서 공황에 도착하자마자 향수병에 걸립니다. 보고싶습니다. 너무나... 더군다나 예배 드리는 시간이 되면은 교회생각이 더욱 간절합니다. 이유는 일반적으로, 꼭 그렇지는 않지만은, 목회자가 그 교회를 세울 때에는 자기의 생명과 바꾸는 것입니다. 가장 많은 것을 그 교회를 위해서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구제를 통해서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헌금내역을 다 보지는 않지만 많은 헌금이 들어오면 너무나 기쁩니다. 그 헌금을 가지고 쓰고 나누어 갖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아! 이렇게 많은 헌금을 성도들이 냈을 때 주님은 그 성도들의 마음 곳에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으로 다가갔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월급을 탄 첫 열매를, 어떤 사람은 구제헌금으로 혹은 신학생헌금으로 바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맛보았을 하나님께로 다가가는 은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대한 더 깊은 감동 이런 것들을 보는 것입니다. 구제는 분명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 주고, 그리고 그런 구제의 은밀한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를 섬기며 살아야될 사람이라는 자기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 없이 부부가 서로 싫어질 때 자식들에게 불만이 쌓여갈 때 여러분 선물을 해보십시오. 선물을 사고 포장을 하고 들고 가면서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 마음에는 안 들지만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다시 밀려오고 자기가 누구를 위해 살아야될 사람인지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헌신은 올바른 방법으로 할 때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을 더욱 불일 듯 일어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때에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못박히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올라가셨던 주님처럼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모욕과 핍박을 받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며 비난과 조소를 받을 때 우리는 주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느낍니다. 고난받은 그 자리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십자가지신 그 주님을 더 가까이 느낍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되고 그럴수록 우리는 더 많이 우리자신을 드리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 앞에 드려도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존귀하신 주님을 우리가 존귀하게 주님을 섬길수록 그 분이 우리 개인에게 존귀하신 분으로 다가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고백이 있습니까? “주님 저는 일평생을 살아 왔습니다. 그러나 제게는 아무 것도 사랑한 것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주님을 다 드렸고 내 마음의 그리움은 주님과 만나는 날 뿐이었습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신 것을 깨달은 그 날로부터 제 마음에는 주님 이외에는 참된 사랑이 없었습니다. 이따금 제 마음을 빼앗긴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주님 제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주님은 아시지요?” 고난받을수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의 감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헌신하고 불사르게 내어주는 일들을 감당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오는 더 큰사랑 그 고난을 통해서 헌신을 통해서 그 분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사랑의 지성소로 진입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죽어본 적이 없습니다만 순교자들의 열정을 읽어보면 모든 그 광경을 본 사람들 비슷한 일을 체험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고백이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인데 감당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는 정말 자기의 힘이 아니라 어떤 사랑의 놀라운 감화에 의해서 그 고통과 아픔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자신의 존재 전체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불붙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그것을 봅니다. 모든 죽는 것이 다 고통스럽겠지만 돌에 맞아 죽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머리가 터지고 얼마나 많이 던졌는지 돌이 무더기와 같이 쌓였습니다. 그렇게 돌이 날아오고 피가 터지는 그런 상황 속에서 그는 하늘을 쳐다보며 얼굴이 천사와 같이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리고는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 데 황홀경 속에서 되뇌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주여 이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의 그런 모습 속에서 이 돌에 맞아 고통하며 아픔을 참는 모습은 읽을 수 없습니다. 이미 고통이 그를 억제하지 못하고 아픔이 그를 억제하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어서 그 고난의 현장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찬란한 광채를 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필이면 보좌 우편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모습은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고 자기의 몸을 돌에 맞아 죽도록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주는 스데반의 눈에만 들어 왔습니다. 이래도 여러분 헌신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만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 바로 이런 유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할 때 고통이 되는 것은 아직 자기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완전히 죽어버리고 나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했을 때 하나님 앞에 밀려드는 보상이 있습니다. 강물과 같은 기쁨, 올무와 같이 얽매인 구속으로부터의 자유,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원수 맺은 사람과 화해하고 그들을 담대하게 용서해 줄 때 순간적으로는 큰 아픔과 갈등이 일어나지만,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자기마저 죽어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 밀려오는 것은 강물과 같은 커다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총의 감격이 그렇게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는 영혼들에게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국에서만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 샬롬을 만드는 자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미워할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을 용납하는 그곳에 마귀의 올무는 끊어지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자유가 밀려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랑의 기초에서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그들을 섬기려고 할 때 거기에는 고난과 희생이 따르는 것이 사실이지만 사랑하기 위해서 지불했던 고난과 희생에 비교도 안돼는 보상이 즉시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하면서도 한없이 마음속에 원망이 쌓이고 사랑하면서 두려움이 쌓이고 더욱 더 용서할 수 없는 벽들이 높이 쌓여가고 사랑하면서 낙심하고 실망하는 것은, 문제는 그 사랑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치 없는 죄인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제대로 사랑에 대해서 알고 사랑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를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베푸는 사랑과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는 그 사랑이 일직선상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는 사랑과 우리가 행하는 사랑이 우리는 불완전하고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불연속선상에 놓아서는 안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이었는지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베푸신 사랑이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어두운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 그리스도에게는 어떤 보상에 대한 생각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그것을 시켰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이 죄와 슬픔에 가득한 세상에 내려 보내셨고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이 죄 가운데서 속박을 받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창조의 목적과는 관계없이 죄악 된 길에서 살아가는 불행한 수많은 사람들을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오셨고 거절당하시고 박해를 받으시고 고난과 결핍 속에서 사시다가 마지막에 자기의 생명도 십자가에 매달아 깨뜨려 우리를 위한 구속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가치 없는 인간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끝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받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유와 용서를 얻을 수 있다면 자신의 희생은 어떠해도 좋고 그리고 자신이 베푼 이 사랑의 아무런 대가도 이 세상에서 바라지 않을 수 있는 생애였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길 수 있게 오신 것도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아가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오늘 깨닫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이런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우리의 모든 그럴싸한 종교적인 삶, 이 모든 것들이 쓸데없는 것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그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그 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 사랑의 깊이를 배우도록 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언제나 그분의 사랑에 감화를 입고 그 분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그 감격이 시키는 바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납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6. 사랑과 오래 참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드디어 사도는 이제 여기에서부터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도 바울의 이 사랑에 대한 정의를 보면서 너무나 평이하고 쉬운 이야기들로 써 내려간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랑은 매우 특별한 것이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설명이 필요할 텐데 특별한 설명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부딪히는, 늘 경험하는 일들을 사랑이라는 하나의 초점 속에 집약시켜 놓은 것을 봅니다. 오늘 여기에서 약 15가지의 사랑에 대한 부정적인 정의와 긍정적인 정의, 다시 말하면 사랑은 이런 것을 하고 이런 것을 하지 않는다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실 이 15가지를 우리의 인생 혹은 신앙생활의 경험에서 빼어버리면 과연 어떤 것들이 남을까 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이렇게 우리 삶 속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많은 경험들, 인내에 대한 경험, 삶을 예의바르게 대하는 경험, 그리고 투기하는 경험, 소망을 갖는 경험 등 이런 모든 것들을 사랑이라고 하는 하나의 초점을 향해서 설명해 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받는 교훈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경험들을 오늘 사도가 이렇게 일부러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의도적으로 여기의 한 사랑이라고 하는 구도에 맞춰서 모든 것들을 재배열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아닙니다. 이처럼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을 살아가게 하는 정 가운데에 사랑의 정신이 모든 것들을 지배하고 있어야 할 필요를 사도는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지금까지 인내의 문제라든지 용기의 문제, 헌신의 문제, 영적 경험의 문제, 신비 체험의 문제 등 많은 문제들을 일부분씩 추구하고 찾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는 이 13장의 장엄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삶 속에 추구되어야할 신앙적인 덕목들, 삶에 있어서 인간으로서의 모든 의무, 인간 사이에 가져야할 많은 인생의 경험들과 추구점들 이런 것들은 하나의 정신에 의해서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 2, 3절에서 보여준 영적인 체험과 신비의 체험, 사람의 말 이런 것들만 사랑의 지배를 받아야 되는 것들이 아니라, 인간 속에 신앙 속에 추구되는 많은 추구점들이 결국 사랑이라는 이 핵심에 의해서 지배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는 제일 먼저 ‘사랑은 오래 참고’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뜻은 결국 사랑이라는 특성이 삶으로 나타날 때에는 오래 참는 성품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사도가 사랑을 이야기하면 하고 싶은 말이 얼마든지 많을 것입니다. 만일에 여러분들이 성경을 몰랐다면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흔치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떠나 사랑을 정의할 때는 불꽃같다든지, 아낌없이 주는 것이라든지 이러한 적극적인 것들이, 다시 말해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볼 수 없는 어떤 적극적인 행위를 하는 것, 그런 것을 우리들은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는 사랑이라는 것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없는 무엇을 내 속에서 일어나게 하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사랑은 일차적으로 자신 속에서 일어나기 원하는 많은 것들을 누르는 것이라고 하는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제일 먼저 사랑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순서가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가 오늘 사랑에 대한 정의를 ‘오래 참음’으로 시작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선 하나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라고 하는 성품 속에 많은 것들이 깃들여 있는데, 그 속에서 가장 크게 감동을 받으며 발견한 것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는데 그 다양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이 사도 바울을 크게 감동시켰던 부분이 바로 오래 참으심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고 영적으로 깊이를 더해 가면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하면서, 가장 압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사랑과 비교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 부분이 바로 오래 참으심이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인내하셨는지를 매우 반복적으로 말했습니다. 늘 읽을 때마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디모데전서 1장 15, 16, 17절에서도 역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경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같이 죄인 중의 괴수인 인간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것은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자기를 향해 오래 참으시고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계속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는 그 곳에는 언제나 자기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가 함께 거론됩니다. 감격하는 그 시점에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내와 자기를 향한 사랑을 말합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확인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자기를 향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자기의 의로운 행위나 하나님이 자기의 인생을 바라보시면서 자기의 행위가 소망 있음에 기초해서 오래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면 발견할수록 그는 그 사랑에 어울리지 않게 살아갔던 자신의 모습, 또 지금도 살아가는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하나님의 큰사랑, 인간의 깊은 불순종, 하나님을 향해서 참지 못하는 인간의 마음과 그리고 인간을 향해 한없이 참으시는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이제 이 사도 바울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한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13장 4절부터 이어지는 사랑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도 예수 없이는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도가 사랑이란 오래 참는 것이라는 것을 어디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까? 자기 인생의 경험에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오래 참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죄인 중의 괴수였고 그리고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삶을 스스로 걸어갔습니다. 완악하고 광포한 삶을 스스로 택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도라고 생각하고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의 삶에는 전혀 개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만과 자만과 그리고 무지함이 그의 인생을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박해하고 대적한 무지한 인생을 일관되게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에는 어떻게 변화되고 새롭게 하나님을 찾아가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겸비하고 낮아지는 종 된 사도가 될 것이라는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하신 것은 참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사도를 향해서 참고 참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는 일을 참는 것은 마음에 없는 헌신을 하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전혀 근거 없는 여러분을 향한 비난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모함을 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삶의 순수성, 신앙의 순수성을 공개적으로 의심받아 본적이 있습니까? 자기가 전혀 그런 죄와는 관계없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어 주는 그런 부당한 대접을 받을 적이 있었습니까? 그때 소망은 무엇입니까? 그런 부당한 대접을 받고 근거 없는 비난을 받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을 때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가장 커다란 소원은 무엇입니까?
신학교 다닐 때 비교적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으시던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학교 학생들의 분위기가 약간 어수선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업시간에 들어오시더니 화를 내시며 “어느 놈의 자식이 나를 모함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여자관계가 복잡하다는 것이었기에 목사로서 얼마나 기가 막히셨겠습니까? 자기는 너무 속상하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아내와 걸어갈 때도 3미터 이상 떨어져서 걸어간다고 하셨습니다. 타지에서 자기만 알아보는 사람이 혹시 오해할까봐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어서 늘 3미터 뒤에서 걸어간다고 했습니다. 확인 할 수 없었지만 워낙 신앙이 확실한 분이었습니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ROTC를 2년간 열심히 받았는데 임관 예행연습을 주일날 못한다고 우겨서 예배 끝난 후 오후로 바꾼다고 하니까 오후도 주일이라 할 수 없다고 참석하지 않아 결국 장교가 못되었습니다. 불과 200명 남짓 하는 교회에 가서 10년 봉사하시면서 1300명 모이는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기도가 살아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교수가 될 때까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새벽예배를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고3 때에도 학교 안가고 사경회 쫓아다녔으며 그래도 서울대에 들어간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분에게 그런 소문을 퍼트린 것에도 놀랐지만 어느 놈인지 명예훼손죄로 잡아넣겠다고 하시는 그분을 보며 정말 참는 것이란 그토록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보며, 저럴 때 온화한 미소로 “저희는 나를 비난하나 나는 저희를 사랑할 뿐이라. 오직 주께서 내가 가는 길을 아시나니...”라고 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자기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래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한 번 해보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압니다. 차라리 며칠 품을 파는 것이 낫지 이 속에서 확 솟아오르는 분노의 감정이 일어날 때 오래 참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인이 일어나고 폭력이 일어납니다. 얼마나 그런 일들이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사랑은 오래 참고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인간으로 하여금 사랑하며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감정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정욕입니다. 이것은 사랑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정욕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사랑하고 싶고 저 사람도 사랑하고 싶고, 모두 다 결혼하고 싶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정욕입니다. 사랑은 확실히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어떤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속에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북돋워서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입니다. 인간 안에는 아무리 뒤져봐야 돌하고 죄밖에는 없습니다. 머리에는 돌이요 가슴에는 죄밖에 없습니다. 아무런 선한 것도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통해서만 거룩한 삶이 성취되듯이, 사랑도 제일 먼저 사도가 오래 참고라고 말함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찌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 그 참지 않으려고 하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 없이는 사랑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까 말씀드렸듯이 참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근거 없는 비난을 받거나 부당한 모욕을 받을 때에 마음속에서 솟아 오른 욕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직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이 부당한 대접, 근거 없는 모함 이런 것들을 나중에 후회하더라도 폭발해 버리는 것이 가장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것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통제가 안되면 그것은 복받치면서 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살인의 감정입니다.
만약에 무엇인가 좋아하는 감정이 이런 식으로 억누름이 없이 참지 못함으로 솟아오르게 되면 그것은 더러운 정욕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요, 미워하는 감정이 솟아오르게 되면 그것은 살인의 감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을 누르고 통제하는 거룩한 억압 없이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사랑을 하며 살고 사랑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없는 매우 강력하고 특별한 통제장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화나면 화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아야합니까? 화를 내야 됩니까? 참아야 됩니다. 그러나 참으면 자기 손해입니다. 그것이 가슴에 응어리가 됩니다. 참아보십시오. 잘 참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반드시 인성에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좌로도 갈 수 없고 우로도 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자, 마음에 솟아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않고 솟아나는 대로 살면 억압받지는 않겠지요. 억압에서 오는 인간성의 파괴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벌어지니 모든 일들은 죄입니다. 이번에는 죄가 자기를 파괴합니다. 참으면 어떻게 됩니까? 대책 없이 무조건 참고 무조건 견디면 속에서 사람이 병이 됩니다. 그래서 정신병이나 정서적인 문제로 깊은 혼돈에 빠지게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활달한 사람은 확률이 적습니다. 대개 꿍하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질병에 걸리기가 쉽습니다.
오래 참으며 참는 일에 도트며 살아온 옛날의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들의 생활을 보십시오. 죽은 듯이 이조시대의 여인처럼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동안에 가슴에 피멍이 들고 누구에 의해서도 쉽게 고쳐질 수 없는 그런 파괴된 인성을 가진 사람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심하면 그것이 병이 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존재이며 성경이 얘기하는 인간은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모르고 하나님이 알려지지 않는 곳에서는 사랑할 길이 꿈같은 얘기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던 때를 그는 수시로 회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마주친 다메섹 가는 길이 어떤 길이었습니까? 참지 못하는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힌 사울과 오래 참으시는 그리스도가 그 벌판에서 만난 것입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고 자기의 율법에 대한 견해로서는 말하자면 배교적인 죄를 저지르고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형벌하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여 이제 달려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도 바울을 만나셨을 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말씀은 책망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울에게 사울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예수님의 경고였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주여 뉘시나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하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대우하셔야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주님이 그때까지 참으신 것만 해도 사도 바울의 고백대로 일체의 오래 참으심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긴 세월을 참으셨습니다. 의로운 사람 스데반을 죽이는 곳에서 가편( ? ) 투표를 하고 옷을 찢는 것도 주님은 지켜보셨습니다.
여러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여러 방면으로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을 보내시고, 예수에 관한 소식을 듣게 하고, 또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렬하게 죽어 가는 진리에 사로잡히고 성령의 감화를 받은 한 사람의 죽음을 보게 만드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도 바울은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이 나서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과격한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서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려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의 길을 부드럽게 막으셨습니다.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부당한 대우였습니다. 과분한 대우였습니다. 우리 주님에게 바울을 그렇게 대우해 주어야할 어떤 의무가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나를 향하여 오래도록 참으시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도저히 자기의 삶을 돌이킬 수 없게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가는 길을 가로막으시며 자기를 돌이키시는 이 모습을 보면서, 결국은 천국에 갈 때까지도 그는 왜 예수님이 자기를 특별하게 대우해 주셨는지 자기는 한번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오직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시다’ 이었으며 그리고 그는 그것에 늘 감화를 입은 것으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에 이 오래 참으시는 사랑, 이 오래 참으시는 인내가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그 앞에서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기 위해서 달려갔던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부끄러워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언제나 확인하는 것이 하나있었습니다. 이 사랑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합당치 않은 인간들에게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너무나 과분한 것이고 특히 자기와 같이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이 되지 못해서 태어난 것같이 모자라는 인생 하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토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한 고통, 당신을 핍박하는 그 핍박과 그리고 부당한 모든 박해를 감당하시면서 까지 참으셔야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주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생각했고, 그 사랑을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 베풀어주신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왜 오래 참으셨는지를 설명하는 일이 아니었고 더욱이 설명할 수 있는 이유와 근거를 자기 자신 안에서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자기는 죄뿐이 없고 죄인 중의 괴수요, 아버지 앞에 아무런 쓸모 없는 인생인데 자기를 향해 예수님이 그처럼 오래 참으셨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또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와 같이 만삭되지 못한 자와 같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깨달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고 거부하는 인생들, 일찍부터 복음을 보내셨지만 그 앞에 도무지 인격적으로 승복하지 않고 자기 맘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우매한 길들이지 못한 망아지와 같은 인간들을 향해서 그토록 오래 참으시는지, 그래서 결국은 오늘 우리를 여기까지 진멸하지 아니하시고 데려 오셨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지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인생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것인지 우리가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인지 도대체 분간을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제가 뜻을 세우고 한번 시험해 보겠나이다.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면 끝까지 참아보십시오” 라며 하나님을 놀리는 듯합니다. 찬송하고 돌아서서 범죄하고, 주님 앞에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눈물 흘리고 눈물이 마르기 전에 두 번째 죄를 지을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니 그 전에는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보다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잘못되긴 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는 열심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찾던 자들이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살려는 열심히 있는 자들이었습니까? 오해를 해도 좋으니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욕망이 있는 자들이었습니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죄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을 떠나서 먹고 마시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내를 시험하듯이 그렇게 살아온 자들이었습니다. 거역할 수 없도록 우리를 붙드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었고,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녹이셔서 우리들이 그 주님을 영접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우리들의 삶은 얼마나 가증하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사랑 받을 가치가 없는 인생들의 삶이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매일 매일 기도하며 살아가면서 어떤 때는 벼룩에도 낯이 있다고, “이 기도 몇 년째 하는데 도대체 내가 변하지 않는구나.”라는 탄식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기도할 때의 첫 번째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몇 년 전에도 똑같았던 기도제목 말입니다. 적어도 우리 자신에 관한 한은 그 제목이 이루어지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가 진멸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죄인들을 향해서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그것이 바로 오래도록 참으신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도 집회를 가면서,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묵상을 하면서 내린 결론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주님이 혹시 “네 인생은 무엇이었느뇨?” 라고 물으신다면 “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산 것도 별로 없고 죽은 적은 더 더욱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몸부림 친 것 같지만 주님을 위해서 해놓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저 걸어온 길이 보일 듯 말듯하고, 이루어 놓은 것은 손에 잡힐 듯 부서질 듯 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없이 일생을 살았습니다. 살면 살수록 빛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요, 나조차도 나 자신에 대해서 참을 수 없이 역겨울 때가 있는데 주님은 내 인생을 보시면서 참으셨습니다. 실로 지루하기 짝이 없는 긴 싸움을 해 오면서도 결국은 그 싸움 속에 진멸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오래도록 참으신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만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해 오래도록 참으시고 인내하셨는지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에게는 주님이 오래 참으신 덕분에 효도를 좀 보셨습니다. 불꽃같이 살다 죽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주님이 한 번만 더 참아드리면 모두 불꽃으로 변할 자신이 있습니까? 우리는 대책도 없이, 그저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이 참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반드시 계시다.” 라고 말하자 십분 동안 시간을 줄 테니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보여달라며 여러 가지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습니다. 십분 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무신론자는 “그것 봐라.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말했습니다. “살아 계시지 않느냐? 너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을 했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징벌하심으로 자기를 보이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방종하고 거만하고 죽어야 마땅한 패역하고 외람된 말을 마구 퍼붓는 너를 이렇게 데려가지 않고 살려주시는 것을 봐라.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느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이 이렇게 오늘 참으시고 내일 참아주셔도 사도 바울처럼 장엄하게 내 인생 모두를 바쳐서 주님을 위해 살기도 싫고 살 자신도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그렇게 참으실까? 거기에 “오래” 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도가 이일을 설명하는 대신 했던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감탄하는 것입니다. 탄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인하여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것으로 인해서 감동을 받는 것, 그 앞에서 자기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하나님의 인내의 표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앞에서 입을 벌리고 그저 감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 임하셨다함이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 그는 감탄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깊은 감탄이 사도 바울로 하여금 사도 바울의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무엇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왜 하필이면 나였습니까?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셔서 구원하셨습니까? 내 주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 구원이 미치지 않았는데 왜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습니까? 누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잇겠습니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그것은 가치 없는 인간에 대한 오래 참으심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앞에서 감탄하는 것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왜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너를 그렇게 사랑하고 특별히 오래 참으셨느냐고 말한다면, 예루살렘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의 길에 들어섰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 두 번의 원망 속에서 죽어 가는 것 같은 성경기사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왜 그렇게 나를 대우하시지 않고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살아도 오래도록 이렇게 참으시고, 심지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모욕을 받으시면서 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존심 없어 보이는 것 같은 하나님의 그 일방적인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설명이나 계산이 아니라 감탄하는 것입니다.
“아! 나 같은 인생을 향해서 이렇게 오래 참으시는구나. 그리고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 나를 향해서 왜 그렇게 오래 참으셨습니까? 나의 마땅한 처지는 예수그리스도께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감당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께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하는 그 감격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예수를 위해 살게 하고 사랑을 베풀게 하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향해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토대로 실제로 삶 속에서 놀라운 인내를 이루어 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2장 12절에서 자기가 사도 된 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 첫 번 째가 인내였습니다. 두 번 째가 표적이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내가 예수그리스도께 부름을 받은 진정한 사도라는 것을 의심하느냐 그럼 나는 너희에게 증거를 보여 주겠다. 그리고 그 증거는 바로 내가 예수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그 고난의 길에서 얼마나 오래 참았는지를 봐라 이것이 내가 진정으로 주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표가 아니냐” 라고 말했습니다. 표적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않고도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나 은사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인격을 아는 것과 은사를 체험하는 것은 전혀 무관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은 모두 오래 참으면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그 인내를 사랑으로 이루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이 사랑의 장 고린도전서 13장을 쓰기까지 그는 완전히 바뀐 인생을 살았습니다. 변화되어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으면 결코 살지 않았을 그런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는 생애를 살았지만 그는 철저히 그리스도의 노예와 같은 삶을 살도록 강요당하였습니다. 친척도 가족들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친구들도 그는 잊어버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기 위해서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했던 모든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겨야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가장 고상한 지식 하나가 있고 나머지는 모두 버렸습니다. 그의 인생을 볼 때 그 속에서 탐나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명예도 부도 모든 것들을 버렸습니다. 사람도 버렸고 그리고 자기와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이 없었더라면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를 핍박하고 박해했습니다. 동족들로부터 위험을 받고 유대인들로부터 위험을 당하고 이방인들로부터 모욕을 당했습니다. 가는 것마다 복음이 거절당하는 곳에서 죽도록 고생하는 것밖에는 그는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그에게 좋은 것이 되어서 돌아온 것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 끊임없이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받으셨던 것과 같은 부당한 대접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생애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 부르신 바 된 사도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 지를 보여 주어야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우선적인 성품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의 성품이었습니다. 참음이 없이는 이 일들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래도록 참았습니다.
성경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전승에 의하면 사도는 키가 작고 배가 나오고 목이 짧고 머리가 벗어졌다고 하니까, 참 요즘 모든 여성들이 흠모하는 ( ? ) 그런 외모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성격은 불같았고 말은 어눌했다고 합니다. 대개 말을 조리 있게 잘하는 사람들은 성격이 불같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불같은 사람들은 사람들을 말로 설명하고 설득시킬 수 없기 때문에 말보다 열이 먼저 뻗치는 것입니다. 그 한 예가 갈라디아서에 나옵니다. 이방인과 함께 베드로가 식사하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먹지 않은 것처럼 슬쩍 피합니다. 무론 베드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자기를 인간적인 의미에서 보면, 이방인들을 위해서 복음전하는 사도로서의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길을 터 준 사람이 바나바와 베드로입니다.
우리는 바울 편에서 이 서신서를 해석하니까 바울은 인간에게 구애받지 않고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사도베드로를, 수제자요 예루살렘 교회의 권위의 상징이었던 그 사람을 완전히 면책했습니다. 말이 면책이지 묵사발을 만들었겠지요. 그런데 어느 분이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한 편으로는 사도 바울이 올바른 것을 보여주는 것은 틀림이 없지만 그의 미성숙한 인격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는 인간적으로 봐도 그럴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전도여행을 놓고 다투는 장면을 봐서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성경 속에서 그림을 보면 굉장히 과격하고 다혈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리스도의 성품과 가장 크게 부딪히는 부분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는 날마다 죽노라 나를 쳐서 복종시킨다” 라고 한 것은 정말 눈물나는 표현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성화의 와중에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통찰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멋있는 말은 반지름한 입이나 잘 굴리는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과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녹아진 사람의 입에서는 무엇인가 쓸만한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고뇌가 있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서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고 싶어서 남이 알지 못하는 거룩한 투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자기 부인 의 삶 속에서는, 언제나 복음에 대한 놀라운 통찰, 누구든지 배울만한 가치가 있는 진리에 대한 통찰들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사랑에 대해서 문학작품이 수많은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까? 요즘도 굉장히 많은 소설과 영화들이 우리에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별의별 잡다한 것들을 다 끌고 들어오면서 사랑이라고 한 수 가르쳐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정한 사랑과는 관계가 없고, 다만 인간의 욕망이나 인간의 정욕과 욕구 인간의 이데올로기가 각각 자기 원하고 자기 좋아하는 대로 마음이 원하는 대로 우리들을 몰고 가는 것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예수그리스도께 감화를 받지 못했지만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오래 참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있는 그곳에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가 계셨고 그분은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과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의 그 사랑을 아는 곳에는 언제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가말리아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까지만 계속 되었더라도 사도 바울은 소망이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뻐기면서 다닐 때까지만 참으셨더라도 소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오래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부활하신 그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은 다메섹에서도 구해주시고, 대화 자체를 통해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끓어오르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향해 식지 않는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사랑을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이토록 오래 참으시고 박해와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오랫동안 견디시고 참으시며 모든 것을 인내하셨으니 이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구원을 입었으리요? 그러므로 주께서 나를 위해서 참으신 것처럼 또한 나도 주를 위해 인내하여야 하리라” 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소명의 핵심부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없었더라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리스도 예수의 소명을 이루어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을 전도하려할 때 그가 당한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게됩니다. 그로 하여금 고난과 시련 앞에서도 불굴의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은 그 사도 바울 안 에 있었던 목표에 대한 열정이나 에너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래 참는 사랑이었습니다.
한 번 이렇게 주님의 그렇게 오래 참으시는 사랑이 자기와 같은 비참한 죄인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에 붙잡히게 되니까 인내를 요구하는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낙심되기보다는 고난과 시련, 괴로움을 당하면서 오히려 더욱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게되었던 것입니다. 오래 견디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생명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삶으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모두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그리스도께서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삶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보다 고상한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 보다 더 뛰어나 헌신과 열심히 여러분들이 맡은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해 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할 것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지배하고 있지 않을 때는 모든 섬김과 헌신이 모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가장 뛰어나 비결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하며 살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잠시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정욕이 원하는 대로 우리의 분노와 마음과 감정에 충실한 삶을 사는 대가로 주님이 우리에게 충성되게 사랑을 행하며 사랑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며 살도록 허락해주신 수많은 기회들을 떠내려 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연약하다는 말 한마디로 얼버무리면서 주님의 사랑과 그 긍휼에 소망을 가지고 나아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큰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릇된 삶을 살아가고 나서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오히려 자신의 악한 삶에서 돌이키지 않는 방법 중에 하나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고 그것을 묵상하도록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칼날같이 정직하고 분명한 사람, 선악에 대한 태도가 분명하고 그리고 거룩한 것과 불결한 것들에 대한 태도가 확실하고 명확한 사람,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이 무엇인지 분명한 사람, 그래서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마치 자기를 괴롭히며 살아가는 가슴 막히게 하는 그리스도인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풍부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적당한 삶, 이럭저럭 살아가고 적당히 때우고 애매모호한 신앙과 삶의 견해를 자기 친구처럼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오래 참고”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예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잊혀진 사랑이 되지 않도록 언제나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이 공급해 주신 능력으로 살아서 잠시나마 우리들이 승리를 맛볼 때에는, 이 모든 승리를 그리스도예수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신앙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고 패배를 할 적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같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인내하시는 그 놀라운 사랑, 그릇된 길로 갈 때에도 우리를 홀로 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셔서 결국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감화를 입도록 만들어 주신 예수의 사랑에 빚지고 살아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진멸되지 않고 살아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주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언제나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참을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충실하게 사는 대신에 오히려 매일 매일 부당하게도 우리에게 축복하시고 분에 넘치게 우리를 대우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에 감화를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참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근거 없는 비난을 받거나 혹은 하나님이 원하지도 않는데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서 내 욕망대로 살고자 몸부림 칠 때에, 우리가 만약에 육신의 소욕 대로 살면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산 대가는 영적인 죽음이고, 자기를 사랑하며 산 대가는 하나님을 등지는 것이지만 주님께 순종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오래 참은 결과는 우리의 사랑이고 그리스도예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삶을 흉내내는 사람들이 되어야하고 오래도록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이웃을 향해서, 자신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서 오래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 라는 말을 언제든지 잊지 말고 기억하십시오. 이 말은 무한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한정 견디고 무한정 참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 수 있느냐고 묻는 것은 바로 사랑의 자원 자체가 우리 자신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오래 견디셨는지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통해서 그런 삶을 보여 주셨고 그런 삶을 통해서 결국은 돌덩이와 같이 굳어진 사람들의 마음조차 감화시키셔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인격을 받아들이기까지 말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을 감화시킨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께 협박을 받고 예수를 믿게된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랑이 시켜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고 복음을 붙들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도록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우리보다도 흉악하고 우리보다 더 소망 없는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나타나셨던 그리스도 예수의 베푸신 그 오래 참으시는 사랑보다 더 크고 더 온전한 사랑을 요구합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이렇게 오래 참지 않고 그리스도예수의 사랑을 이루지 아니하고 우리자신의 육신의 소욕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랑 없어 기갈 중에 헤매는 영혼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 기갈을 끌 수 있는 사람들, 이 목마른 불길처럼 타오르는 갈증을 끌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로지 특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특별한 사랑을 행하며 살 수 있는 사람, 주님의 한없는 인내를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참고 참으며 그리스도 사랑에 의해서 사람들이 감화를 받기까지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 말고 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의 망가진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는 한 말입니다.
7. 사랑과 온유함
사랑은 온유하며(고전13:4)
지난 시간에는 “사랑은 오래 참고” 그랬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랑은 온유하며” 온유한 사람이 설교를 해야 말발이 서는데, 우리 집 사람이 고개를 끄떡거렸습니다. 온유한 사람이 설교를 해야지 온유함이 돋보이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사랑은 두 번째 특성을 “온유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온유하다 라고 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들을 때에 여러분들은 제일 먼저 어떤 느낌을 받으십니까? 여러분! 솔직히 말씀드려서 우리는 이제 온유를 잊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덜 떨어진 사람은 가끔 만날 수 있지마는 진짜 기질 자체가 예수의 사랑으로 변화되어서 부드럽게 되어진 온유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이 세상이 그런 온유한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세상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사람들이 너무나 일찍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 온유를 포기해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그 열매들 중에 충성이라든지 아니면 아까 이야기한 오래 참음이라든지 뭐 그러한 많은 절제라든지 이러한 열매들은 많은 대가들을 지불하고 살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온유를 그렇게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냐를 물을 때, 그렇다,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뭔가 결단력이 있고 용기가 있고 저돌적이고 논리가 뛰어나고 단숨에 사람들을 제압해 버리는 어떤 힘!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성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이렇게 믿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더듬어 가면서 우리들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사랑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세상에서의 처세술은 어떻게 하면 성공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삶이 세상에서 성공하기 좋은 삶이냐, 여기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이 진실로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아는 자의 삶이냐, 어떤 삶이 하나님의 지식으로부터 흘러나온 삶이냐, 어떤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이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때에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이냐,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야기할 때, 그건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모르고 그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어떤 사랑을 베풀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존 오웬” 같은 사람이 죄를 죽이는 삶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일단 죄를 죽이는 삶이 실천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고 구원받은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삶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어야지, 참 거룩한 삶이 되고 참 진실한 삶이 되고 거기서 흘러나온 것이어야지, 우리가 그런 삶을 살면 살수록, 우리의 영적인 생명의 부요한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도 역시 그러한 도덕적인 성품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역시 이 사랑의 문제도 공통적인 기초를 가지고 있다 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랑은 온유하고 라고 말할 때에도 우리의 초점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가 지고 계신 온유하신 성품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커다란 은혜를 입었는가 하는 것을 늘 생각하고 거기에 감화를 입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 참음 뒤에 온유가 함께 나옵니다. 여러분! 오래 참음 뒤에 온유가 함께 짝을 이루면서 나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이 역사하면서 오래 참을 때에 그것은 단지 사랑 없이 오래 참으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가슴속에서 한과 미움과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밖으로 풀어버리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많은 마음의 질병들이 생깁니다.
그러니까 이 온유는 오래 참음이 만약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보고 거기에 감동을 받아서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신 것처럼 나도 본받는다 라는 그렇게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작용이라고 할 것 같으면, 이 온유는 무엇을 보고 배우는 개념도 있을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자기의 마음속에서 누리고 있는 평정한 상태로부터 흘러나오는 온유함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이 온유함은 마음이 평정을 누리고 있는 평정의 상태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는 인격적인 특징이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들쭉날쭉 개판인 사람은 온유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온유 자체가 무엇인가를 추구하면서 “저렇게 살아야돼, 저렇게 살아야돼” 하고 불질러서 열심을 낸다고 해서 나오는 성품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평정한 상태를 누리고 있을 때, 거기로부터 흘러나오는 인격적인 특징이라는 말입니다. 평정을 누리십니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정이 우리의 마음을 평정이 지배할 때 거기에서 온유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 평정의 기원이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과의 확실한 관계,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분명한 연합을 가지고 있는 이 관계에서 비롯되는 평정입니다. 이 평정은 인간의 삶의 휴식이나 정서의 만족이 가져다주는 평정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서 흘러오는 평정입니다. 그것 없이는 온유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덕이 그러하겠지만 이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한번의 은사와 같이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것은 언제든지 이 온유는 한번에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평정이 흔들리면 그 온유함이 곧 사라져 버릴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켜나가는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온유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굉장히 영적인 경험도 많이 하고 신앙도 뛰어난데 이상하게 그리고 기도도 상당히 말하자면 힘이 있어 보이고 그리고 무엇인가 유능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데 이 온유를 잃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성령 충만하면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 능력이 부어지면 그냥 막 온유가 쏟아져 나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아무리 열심이 있고 또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는 탁월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온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러한 부어지는 영적인 은사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이제 영적으로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매우 뛰어난 무엇인가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있으면 이 온유함은 흘러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청교도들이 조급해지고 안달복달하는 것 이런 것들을 굉장히 싫어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일이, 일을 하면서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인데도 그 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 일 자체가 목표가 되어 가지고 막 몰아갈 때에는 평정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러면 아예 마음이 편한 사람은 아예 그런 사람, 도둑이 들어와도 발 쭉 뻗고 자는 사람, 뭘 해도 급한 것이 없는 사람 되는대로 사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자기를 온유의 극치를 달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게으름에서 오는 평안과 이 심적인 평화에서 오는 평정은 같은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게 아닌데 사람들은 그걸 그거라고 생각을 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네들 생각이고 그러니까 거룩한 열심이 있다 라고 하는 것과 평정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보십시오. 거룩한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 아! 뭐, 될 대로 되라지” 그러면서 살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만난 그리스도인가운데 대책 없는 부류 가운데 한 부류가 이런 부류거든요? 다- 주님 뜻대로 됩니다. 그런데 목회자인 내가 이렇게 들여다 볼 때는 그것이 믿음에서 나온 게 아니라 뭐냐하면 될 대로 되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어떻게 벌어져도 견디는데는 저는 이골 났습니다. 그런 사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자기가 감히 그리스도의 온유, 평정, 이런 것들과 연관지어서 생각한다니까 그러니까 변화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속에 뭐가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영적인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부패해서 감각을 잃어버리고 태만해 진 상태를 거룩한 온유 내지는 심적인 평정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건 참 바보 같은 생각 아닙니까? 돼지는 뜨물 통에 코 박고 나가지고 온갖 잡다한 것 한 모금 들여 마신 다음에 자기가 싼 똥 위에 벌렁 드러누우면 세상에 근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 사람이 아니라 돼지입니다. 세상에 근심이 없는 돈 선생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살이 찌는 것입니다. 그 평강을 어떻게 그 평정과 연관 지어서 생각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설교를 듣기 전에 영적인 게으름 속에서 자기가 뭔가 자기가 온유하고 평정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당장 정신을 차리고 깨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진리의 빛 앞에서 평정을 누리고 있는 것과 영적인 게으름 속에서 돼지우리와 같은 곳에서 사고가 없고 생각이 없고 진리의 말씀이 비치지 않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자극 받지 않는 사람 말씀이 자극을 주기에는 마음이 너무나 돌밭과 같이 굳어졌고 콘크리트와 같이 굳어져 있어서도무지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번민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평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온유가 아니란 말입니다. 더러운 태만입니다. 사실 선지자들을 비롯해서 불꽃처럼 살았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도 바울이 고백했듯이 근심이 그치지 않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다 주님 뜻대로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주님 뜻대로 안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다 주님 뜻대로 됩니다.
예수 안 믿고 죽는 사람도 다 주님 뜻이고 오늘 수요 예배 안 나온 사람도 주님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실제 그렇게 불꽃처럼 살았던 사람들은 사실 안달하며 살았습니다. 남들이 “어이구 야! 오늘 교인 많이 왔네”하면 한쪽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오늘 누구도 못 왔습니다.” 온 사람 안보이고 안 온 사람만 보이는 것입니다. 누구도 안 왔습니다. 주님 누구는 지금 단란주점에서, 노래방에서 신나게 돼지 멱따는 소리하고 있습니다. 주여! 눈물이 쏟아지며 마음에 평정이 옵니다. 주님! 안타까운 마음이 불붙는 것입니다. 이게 살아있는 신앙의 표징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온유는 결코 태만과 나태에서 오는 평강이 아닙니다. 그것은 거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불꽃처럼 살았던 거룩한 사람들 진리의 말씀을 의지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쫓아서 애써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타는 것 같이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고 어쩔 줄 몰라하고 가슴이 녹는 것 같은 동일한 인격 속에 평강이 함께 깃드는 것입니다. 평강이 그래서 막 너무너무 안타까워 그런데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쉽게 얘기하면 거룩한 번민이 가져다주는 것은 우리의 성질을 못된 곳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질대로 살게끔 못되게 몰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런 거룩한 근심, 거룩한 안타까움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이냐 하면 그 기초자체가 하나님과의 평정한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 하나님 한 분에게 자신의 인생의 모든 목표를 걸지 않는 사람에게서 거룩한 불안, 거룩한 번민, 거룩한 안타까움, 거룩한 번민 이런 것들을 찾아볼 수 있느냐 이 얘기야 있을 수 없다 이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으니까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마는 그러나 안타까워하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만 기초 자체가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에서 평정을 누린 상태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그것들이 흘러나올 때 아주 자신의 나쁜 성질에 안타까움이 결탁이 되어서 이상하게 나타나지 않는단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그런 사람 없지만 오늘도 수요예배 나왔는데 많이 나오셨네요? 그런데 비어 있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30명 와도 더 앉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주일날은 꽉 찼는데 지금 조금 모자라지 않습니까. 그럼 이 사람들 어디 가 있을까요? 들려오는 이야기가 뭐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고 정신 못 차리고 돌아다닌다고 그럽니다. 생각할 때, 그 인생이 너무나 불쌍해서 막 안타깝고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이 기도하고 난 다음에 눈물 닦은 다음에 “이 자 식, 내가 죽여 버리고 말거먀” 그리고 노래방으로 병들고 뛰어가지 않는단 말입니다. 너 술 좋아하니까 이 병으로 한번 맞아봐 술병이다. 그러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움과 안달복달하는 이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것이 아닐 때는 실제로 그렇게 됩니다. 도대체 말이야 이 자식은 왜 집에 안들어 오는 거야 이거 벌써 속에서 거룩한 번민이 아닙니까? 이 자식 말이야, 월급 타서 집에도 안 갖다 주고 말이야 매일 퍼먹고 돌아다니고, 뭐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됐을까? 왜 이렇게 속을 썩일까? 도대체 내가 왜 걔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을까? 이런 게 막- 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 못 참아! 방망이라도 들고 뛰어가는 것입니다. 너 죽고 나죽자 그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할 것은 거룩한 번민, 거룩한 안타까움과 이 마음의 평정에서 오는 온유함은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온유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할말도 못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면 그저 꾹 참고, 남들이 구박하면 그저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고 참고, 남들이 그릇된 이야기를 하면, 주여! 나만 안 그러면 됩니다. 그것이 온유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그건 죽어지내는 것이지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이거는 이렇고 이거는 이렇습니다. 그러면 저말은 다 틀렸는데 내가 뭐 굳이 벌려서 이것을 설명을 하고 저를 가르쳐주랴! 10년만 지나면 다 밝혀질텐데, 이건 온유가 아닙니다.
모세를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미리암과 아론이 구스 여인을 자기 아내로 취한 것 때문에 백성들과 한패거리가 되어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모세는 어떠했습니까? 비난받을 때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 그랬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막 비난할 때에 모세는 오히려 그들을 온유함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아니, 모세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대답 좀 해보십시오. 모세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건 모세하고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지도자가 되고 나서도 광야에 들어선 다음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순종할 때에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쉽게 실망을 하고 쉽게 낙망을 하고 심지어 그랬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 사람들을 낳았습니까? 내가 이들의 유모입니까? 왜 내가 이 애들을 데리고 이 고생을 해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항의했던 사람도 바로 이 모세였습니다. 그 성질머리 가지고 살던 사람이 이번에는 정말 한번 휘둘러보기 좋은 때 아닙니까? 그 여인을 아내로 취했습니다.
사실 구스 여자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에디오피아 지방 사람입니다. 결혼을 했는데 새까만 깜둥이하고 결혼을 한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이게 진짜 정신 나간 얘기 아닙니까?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목사님을 청빙하는데 정직하게 얘기해봅시다. 목사님은 정상적인 한국 사람인데 사모님도 기도는 많이 하고 그러는데 키 조그맣고 입술 탁 튀어나오고 얼굴이 완전히 토종 새카맣고 머리 곱슬곱슬하고 그러고 나타나면, 여러분 쉽게 도장 찍어줄 수 있겠습니까? 딴 목사님도 많은데 왜, 그럴 겁니다. 틀림없이!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더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은 여인을 데리고 와서 자기의 처로 취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완전히 눈이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때의 맥락에서 보면 그 사람들이 너무나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모세는 비난받을 때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뭡니까? 바로 하나님과의 평정한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모세가 결혼을 여러 번 한 것이 가하냐, 안 가하냐 지금 우리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구스 여인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회중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그리고 이 여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나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한 무리로 받아들이시고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있어서 어떤 경우에라도 이러한 사람들을 차별 대우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구스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속한 한사람이었다는 것을 알았고 자신의 결혼에는 문제가 없다. 그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문제를 가지고 왜 피부가 검은 여인과 결혼을 했느냐고 주님이 자기를 책망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그 일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릴 이유가 없었단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평정에서 흘러나온 그 온유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자신의 삶의 기반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든든히 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교인이 있는데 가끔 교회 일을 하면서 돈도 떼어먹고 사기도 치고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연약한 성도들이 나타나서 ”너, 돈 떼먹은 적 있지!“ 이렇게 물어보면 열이 뻗치기 시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범사에 그 런 문제에 있어서 깨끗하게 살아온 사람은 연약한 신자가 와서 ”돈 떼먹었지!“ 그러면 웃을 겁니다. 저 웃긴다, 넌 어디서 사는 녀석이냐? 상종할 가치를 느끼지 않을 겁니다.
모세는 바로 그렇게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더냐? 우리는 선지자가 아니냐? 그러면서 기본적으로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이스라엘에 대한 영도권에 대해서 모세에게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문제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큰 문제가 일어난 겁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자체가 분열의 위기에 놓인 것입니다. 이게 간단한 문제입니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굉장히 크고 중대한 문제에 봉착한 겁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온유함으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옳다. 이겁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옳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이 자리에 서서 하나님과 평강을 누리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온유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안한 사람들이 성질 머리가 고약합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하고 자기 성깔대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안 죽으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그러고 성깔대로 살려고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보면 더럽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의 사랑을 알았으면 자기가 죽어야지 예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은혜를 알았으면 자기가 죽고 자기가 낮아지고 자기의 잘못된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 앞에서 변화되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렇게 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느냐 이겁니다. 자기를 죽이지도 않고 자기의 변화도 없고 자기의 성품, 자신의 도덕적인 품성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일말의 가책도 없고 오직 마음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내 성질대로 살고 어떻게 하면 내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고 어떻게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하면서 인생을 하느냐하는 방탕한 생각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미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이지요 가히 정말 불꽃처럼 타오릅니다.
한신교회에 계신 이중표 목사님이 쓰신 설교집을 한번 읽어보니까 시골 교회 가 가지고 말이지 시골 교회에 성질머리가 못된 장로가 있더랍니다. 그래가지고 매일 기도가 ”주님! 저 장로 바꿔주셔야 되겠습니다. 이게 무슨 목회입니까? 난 못살겠습니다. 막- 기도하니까 어느 날 하나님이 음성을 들려주시더랍니다. “중표야! 걔는 나도 못 바꿨단다. 너가 참아라” 뭐 그 음성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었는지 나는 믿을 수가 없지마는 어쨌든 그분 깨달은 게 그것입니다. “얘야! 그 장로는 나도 못 바꿨다” 바꿔서 말하면, 얘야! 걔 성깔 그대로 놔 둔 것은 너 사람 만들려고 그대로 놔 둔 것이다“ 그러면서 이 목사님이 거기서 큰 은혜를 받았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를 바꿔 주십시오.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거기에 못지 않은 자기가 보이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왜 아멘을 안하십니까? 다 아멘! 해야 될 사람들인데! 할렐루야! 아멘! 그래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온유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 부인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한 다음에 제일 먼저 잃어버린 것이 온유함입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잘 이해가 안가시겠지요? 성경 하나만 찾아봅시다.
창세기 4장 23절입니다. 보십시오. 같이 읽어봅시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실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소리를 들으라! 너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고 가인을 위해서는 벌이 7배 일진데, 라멕을 위해서는 벌이 77배이로다. 이것이 결국은 온유를 잃어버린 상태를 보여준 것 아닙니까? 무엇입니까? 나의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였다는 게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조금 창상을 입혔는데 나는 때려 죽여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조금 상처를 입었는데 어린 소년이 잘 모르고 그랬는데 그 소년을 아예 죽여 버렸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걸어가는데 차가 와서 흙탕물을 탁 튀기고 가니까 차를 세워서 창문을 끄집어 내려서 운전사를 망치로 쳐서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벌어지는 일 아닙니까?
요즈음은 좀 덜하지 않습니까? 작년까지 만도 공중전화에서 사람을 때려죽이는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그러니까 빨리 안 끊는다고 이게 말이지요 미친 세상입니다. 포악한 현상입니다. 근본적으로 이 세상에는 이러한 온유함, 그리스도의 온유함이 존재할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성품대로 살도록 계속 우리를 충동질합니다. 성질대로 살면 마음의 평정이 오고 자기 성질을 죽이면 독을 먹은 같이 펄펄 뛰고 미치겠다는 것입니다. 가슴이 막 불 붙는 것 같은 것입니다. 그 불이 그런데서 붙으면 안되는데 말입니다. 신령한 은혜에 불이 붙어야 되는데 거기서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포악하게 온유와 하나님과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자기 성질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데 누가 제동을 걸면 신앙이고 교회고 뭐고 다 때려 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얘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다 집어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자기의 생각대로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품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이 온유는 반드시 거듭난 성품이다 이겁니다. 하나님과의 평정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은 이러한 방탕한 감정을 따라서 치닫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복 주실리가 있느냐 이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평정을 쉽게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뭘 한 게 있다고 때려치웁니까? 뭐 쌓은 게 있어야 때려치우고 한 게 있어야 때려 치지 내가 보기엔 때려 칠 것도 없구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온유함을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특징이고 이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도덕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온유라고 하는 어떤 것들을 얻으려고 몸부림치면서 달려가는 삶이 아니라 평정을 먼저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온유가 나오는 것입니다. 평정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기가 죽어야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그 예수님께로부터 제일 먼저 받았던 느낌은 뭡니까? 여러분들은 뭘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에 느꼈던 것은 예수님이 아주 소프트한 분이다, 아주 부드러운 분이다 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부드러운 분이시다. 그것이 뭐냐하면 결국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부드러우신 본이었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빗장들 말입니다. 온갖 더러운 잡동사니 사상, 여기 잔뜩 쓰레기 집어넣고 이게 내 평생에 보물인 것처럼 이러고 살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이렇게 안 살면 목회자에게 고난이 없지 이러구 살다가 이거를 다 풀어놓고 여기서 하나씩, 하나씩 내 더러운 자아 다 집어 내버리고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도끼 들고 와서 막- 이거 열어 안 열면 당장 박살을 내 버릴 거야. 다 두들겨 맞고 열거야? 아니면은 순순히 열거야! 그래서 겁 나가지고 주님! 항복입니다. 그러는 사람 없습니까?
주 예수 대문 밖에 기다려 섰으나
단단히 잠가두니 못 들어오시네
주님은 와서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설복하시고 그러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폭풍처럼 밀려다니는 은혜 체험을 하고 예수님 앞에 다 털어놓고 인생의 빗장 끌른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봄바람과 같이 다가오는 주님의 그 다정한 속삭임 앞에서 자기를 푼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나기와 같은 성령의 은혜를 받으면서 녹아진 사람이지만 어떤 사람은 조용하게 내리는 이슬비와 같은 은혜 속에서 자기를 주님 앞에 최초로 허물고 연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 은혜를 받았던 간에 결정적으로 거기에 작용한 것은 뭐냐하면 주님은 온유하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화낼 줄을 모르시는 분이 아니라 나 하나님을 떠난 인생 하나를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부드러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주님의 손에 사로잡혔던 사람도 결국은 그 사로잡힌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범죄하고 나쁜 일 할 때, 주님이 청룡도를 들고 와서 우리의 손을 잘라 버린 것이 아닙니다. 부드럽게 우리를 설득하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우리를 감싸시고 결국은 우리가 찾고 우리가 목말라 하는 사랑이 정말 크고 온전한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시키는 사람 없어도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겁니다. 믿습니까? 주님이 그런 평정, 그러한 놀라운 것들을 보여주십시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지만, 주님을 마치 이렇게 좀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곤란한 것입니다.
교회 가다가 돌부리를 차서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습니다. 즉시 생각하기를 야! 2,000원 주머니에 넣고 있다가 하나 옆으로 재끼고 1,000원만 헌금했더니 주님이 야단치시나보다. 물론 계속 그러면 주님이 야단칠 수도 있겠지요. 근데 돌에 걸려서 지가 넘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무슨 뺑덕어멈입니까? 주님은 인격적이신 주님이십니다. 제가 늘 말씀 드리지만 다음주일에 하루 교회 안나와도 물론 낚시 가는 사람 물에 빠지고 등산가는 사람 발목이 부러질 수도 있지만 안 부러지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걸 보면서 주님의 무능을 배웁니까? 주님의 오래 참음과 주님의 온유를 배우지 않습니까. 결국은 겁나서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그 부드러움이 우리를 압도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그런 두려움을 느껴본 적 없습니까? 저 죽여 버릴 거야! 막 이러고 갔는데 막 웃으면서 “왜 그래! 무슨 일이 있었어?” 그럴 때,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두려움이 생기지 않습니까? 내게 없는 어떤 평강이 저 사람에게 있고 저 사람이 당연히 복수해야 하는데 복수대신 온유함으로 갚는다고 할 때 두려움이 느껴지는 것 경험해보지 못하셨습니까? 그런 두려움을 줘 본적은 없지만 느껴본 적은 가끔 있으실 텐데! 그 온유함은 결국 이런 하나님과의 평정에서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내려오셨습니까? 섬김을 받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자기를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하나님도 아십니다. 그분은 여기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쫓아서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우리같이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양떼들을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분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꿍쳐 놓고 사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명예나 재물이나 모든 것을 그렇게 자기중심으로 뭔가를 생각을 하고 자기 아집으로 사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었고 그분의 삶 그분이 계획하고 있는 것 그분의 모든 생, 그분의 모든 사역, 그분의 모든 감정까지도 모두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단 강변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오지 않으셨습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이것은 신분입니다.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이것은 주님께서 하시고자하는 일입니다. 그분의 존재와 그분이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디에 가든지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내가 항상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고난받을 때나, 비난받을 때나. 형통할 때나, 항상 하나님과의 형통한 관계를 누리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온유함을 우리에게 100% 보이실수 있으셨습니다. 여러분들이 거룩한 근심을 갖는 것 이외에 어떠한 근심, 어떠한 안달복달, 어떠한 어쩔 줄 모르는 조급함 이런 것들이 남아 있는 한 여러분들은 결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정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온유함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씩 온유해지는 사람은 볼 수 있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도 기분 좋으면 “그까지 것 그래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러는 거야. 그러나 다음날 가보면 똑같은 문제가 일어났을 때 “아니! 그럴 수가 이조 500년에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이 완전히 뒤집어지듯이 바뀌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 사람의 평정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럽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전에 아닌 것은 지금도 아닙니다. 전에 옳은 것은 오늘도 옳습니다. 이전에 용납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도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일관성이 없습니다. 언제는 된다고 그러더니 언제는 안된다고 그러고 언제는 또 너그럽게 아! 그럴 수도 있지 그러더니 언제는 네가 인간이냐고 물어보는 것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온갖 불편함과 어려움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혼자 계란으로 바위치기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가 변하기를 기다리십니다. 다가가 보면 주님! 잘못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 하나님이 이게 두 번째지? 이번엔 못 넘어간다. 그러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다시 용서하시고 회복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단 말입니다. 거기에서 우리 자신 속에 결국에는 그러한 불안정한 하나님에 대한 태도 일관성이 없는 모든 신앙의 태도, 어떨 때는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하나님 위해서 안 살면 인생 꼴깍 넘어갈 것처럼 그러다가 또 언제는 자기 성질에 뻗쳐 가지고 뒤집어지면서 “다 때려칠 거야” 이러는 이런 기복 이것은 모두 온유가 없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영적인 미성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있습니까? 영성이 정말 있습니까? 그 영성의 한복판에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 십자가를 아는 영성의 한복판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떤 일들을 이루시고 그분이 이 세상에서 어떤 부당한 대접을 받으시고 인간들에게 모욕을 받으시면서도 우리를 향한 태도 속에서 온유함을 잃지 않은 것이 기억에 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 그래서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이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기뻐하시고 나의 소원은 주께 열납된 바 되었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도 사실은 주님이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일이다, 그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계시는 그 일에 내가 참여하고 있다 이런 분초마다 계속되는 확신과 평정이 우리로 하여금 온유함을 드러내게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얻었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얻었고, 또 온유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투명한 관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됩니다.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어때! 지금 성질이 뻗치는데 그런 고차원적인 것 생각할 때야? 회개는 나중에 몰아서 하고 지금은 성질대로 살아야겠어! 이런 사람들의 대가는 항상 온유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 옆에 가면 평정이 흔들립니다. 그 사람 옆에 가면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하고 그 사람이 뭔가 웃고 잘해주면 잘해줄수록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저게 언제 또 폭풍우가 불꼬! 그런 사람들이 계속해서 말하기를 형제여! 이것은 나의 연약함이니, 연약함이 아니라 패역함입니다. 고쳐야지. 자기가 성질 부릴 대로 다 부리고 "어찌하여야 합니까-“ 뭘 어찌해요? 변화되어야지. 새사람 되어야지. 그래서 하나님과 평정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 세상이 침해 할 수 없는 하나님과의 평정함! 이런 것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이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온유는 바로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십시오. 그러면 평정을 찾게 됩니다. 안달복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님이 인정해 주시는 인생 살면 그걸로 족한 것 아닙니까? 너무 빨리 부해지려고 안타까워하지 마십시오. 왜 18평 아파트 밖에 살 능력이 안되는 사람이 40평 아파트 계약해 놓고 그거 뒷돈 대느라고 똥줄이 타는 삶을 사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고 오직 돈밖에 보이는 것이 없어 평정을 잃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니 온유함이 나오겠느냐 이겁니다. 우리가 왜 그렇게 사느냐 이것입니다. 자기에게 너무 과분한 목표에 목을 매다는 것도 그것은 평정을 잃어버리는 비결입니다. 지름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들이 요만한 규모의 사업을 하도록 기업을 하도록 허락 받았으면 거기서 조금 더 잘해 보려고 노력을 하십시오.
구멍가게 하면서 졸지에 벼락 갑부 되어 가지고 대기업 회장 할 생각하지 말라 이겁니다. 그것은 비전과 자기 속에서 끓어져 나오는 정욕적인 욕망은 차이가 뭐냐하면, 비전은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이루려는 소원은 가지고 있지만 아무리 소원이 불타듯 뜨거워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습니다. 정욕적인 것은 당장 손에 넣지 못하면 어쩔 줄을 몰라서 안달복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유함을 모든 환경과 조건이 우리를 온유하게 도와줘도 온유할 가망성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말씀하시지요?
여기서 설교하는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도 머리에 넣으면 뭐밖에 잡히는 것이 없어요? 돌밖에 잡히는 것이 없고 마음 깊이에서는 구정물 밖에 잡히는 것이 없는 인생들이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변화되기 전에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물며, 환경까지도 그렇게 헛된데다가 목표와 욕망을 걸고 안달복달하는데 거기서 무슨 평정이 나오고 거기서 무슨 온유가 나오겠느냐는 것입니다. 몇 달 더, 몇 년 더 셋방 살면 어떻습니까? 몇 년 더 작은집에 살면 어떻습니까? 누가 가지 말라고 합니까? 2년만에 장만할 것 5년만에 장만하면 어떻습니까? 그 나머지 생활이 그렇게 피눈물 나는 생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하고 얼마나 잘난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를 목표하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여러분들이 예수를 알고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영적인 사람들이 되어서 얼마나 주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바로 그런 하나님과의 평정한 관계를 기초로 해서 흘러나오는 도덕적인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사람은 한결같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하면 적합한 표현이 아니지마는 말하자면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정한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정하지 못할 때는 기도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정하면 그러면 즉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들려옵니다. “너 왔니?” “예! 왔습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왔니?” 이렇게 하나님과의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평정을 잃어버리고 나면 자기 성질대로, 방탕한 마음의 기질대로, 막 살다가 열이 치 뻗쳤는데 교회당으로 달려오는 사람 봤습니까? 기도하려고? 안된다는 말입니다.
평정을 잃어버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에 평정이 없으니까 온유함이 없고 온유함이 없으니까 자신의 감정을 따라 방종한 삶을 사는 것이지요. 결국은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아직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영적인 특성들이 없는 미성숙한 사람들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그렇게 살 것이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거기에 감동을 받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이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났으면, 이젠 우리가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받으며 살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첫 시간에 제가 말씀드린 것과 같이 이 사람의 영역은 하나님의 독립적인 영역이 아니라 협력적인 성화의 영역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의 사랑을 본받으려고 하면 본받아지고 “그게 뭐야! 내버려둬! 난 이대로 살다 죽을거야!” 내버려두면 머리 까매서 성질대로 살던 사람이 머리 하얗게 되어서 성질대로 산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바뀌고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예수의 사랑을 경험했으면 이제는 예수의 그 사랑을 쫓아서 살고 그 사랑의 성품이 내게 어떻게 살라고 말하는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성품이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순종하고 그 뜻대로 살았을 때에 찾아오는 진정한 영적인 기쁨들을 우리들이 체험으로 간직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기의 사랑을 안다고 하는 것은 단지 눈물 펑펑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평생을 하나님의 진리를 쫓아서 사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사는 성도들의 얼굴에는 뭐가 가득하다고?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한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왜! 예수의 사랑을 보면서, 주님이 내게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고, 또 방종한 육신의 성질대로 살고 싶은 것이 불끈불끈 솟아올라도 그거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그걸 눌러야합니다. 그리고 아! 내가 말도 안되게 살았을 때에 주님이 나를 어떻게 대해 주셨는가! 주님의 그 온유하신 성품과 주님의 온유하신 주님의 마음 때문에 오늘 내가 여기서 주님 앞에 진멸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에다가 자기의 못된 기질과 방종한 성질을 못박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포악이 사라져야 온유가 나올 것 아닙니까? 강포가 사라져야지만 그 속에서 자비가 흘러나오는 거 아니냐 말입니다.
그러므로 온유하게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은 사실 사람들이 사는 대로 바보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세가 바보였습니까? 온유함이 지면에 승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건 이겁니다. 주여! 내가 어떻게 해야 하옵나이까? 그렇지 않았습니까? 범죄가 일어나면 그 유명한 바알브올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간음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죽여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비느하스가 분노를 일으키면서 레위의 자손들이 마구 사람들을 마구 찔러 죽이지 않습니까.
그는 단호한 사람이었습니다. 온유한 것과 단호한 것은 함께 존재합니다. 온유하면서도 단호합니다. 대개 성질 잘 부리고 고약한 사람들이 맺고 끊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다. 성질 부리는 것처럼 끊으면 진짜 속히 거룩해 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 때려 칠거야! 그거를 그럴 때 쓰지 말고 세상이 나를 막 유혹할 때 “내가 다 때려 칠거야! 세상 너 상종 안 해!” 다시 안볼 사람처럼 칼 빼더냐? 안 그래 그쪽은 또 다 뒷거래 해 다 뒷거래하고 그냥 뭐 잘해 보자고 그러고 신앙적이고 좋은 것은 다 집어 칠거야 그러다가도 세상적이건 아! 어떻게 해! 그래도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고 다 뒷거래한다고 그러니 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모세는 온유했지만 바보 같지 않았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무골호인이 아니었습니다. 일루 밀면 저리로 가고 저리로 밀면 저리로 가고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닌 것은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정리 해 버릴 사람은 정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죽을 사람은 죽는걸 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 사람은 그의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목마르게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무엇인가 신념에 있는 사람들은 포악합니다. 강포합니다. 뭔가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하고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 사람들은 마구 정죄합니다. 또 그러지 않고 사람을 잘 이해해 주는 사람은 도무지 방향이 없고 줏대가 없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보면 너무나 흠 잡을 데 없는 사람인데 지도자로 서게 되면 매일 콤플랙스에 걸린 사람처럼 말이지요 지도자면 뭔가 어거해야 됩니다. 이렇게 탁 잡아야됩니다. 일루 가자, 저리로 가자, 서라, 얘기해야 되잖아요? 어려운 일이 일어나면 지금은 잘못된 길로 달려가면 죄인들이 잘못된 대로 달려가면, 가족들이 잘못된 대로 달려가면 서라! 이렇게 얘기를 해야 되는데 막- 잘못된 대로 달려가는데 이건 모두 ”저 때문이옵나이다.“ 그건 우선 가는 길을 막아놓고 그건 하나님 앞에서 혼자 얘기하라 이 얘기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였으나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결단 내릴 때에는 담대하게 결단을 내린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권위를 가지고 그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게 하나님과 평정한 관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인격 자체가 일관성이 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평정하니까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들쭉날쭉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자기가 판단을 해서 옳다! 판단을 합니다. 이 판단 내리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이 판단을 내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평정을 깨뜨리지 않는다 하나님과의 화목에 저해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결정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정이다. 결정을 내리십시오. 담대함과 결단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의 핵심부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온유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온유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범죄 했는데도 우리가 그릇된 길로 걸어갔는데 주님 앞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잘못된 죄를 저지르고 실패한 삶을 살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시고 용납해주시는 그 온유함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빌고 인격적으로 승복할 때 주님은 우리를 받아주시는 그러한 놀라운 인내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온유함을 본받은 성품이 아니고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누구든지 달려가 장난을 칠 수 있는 그런 분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분이 포악한 분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 온유함이 오히려 그 사람들에게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권위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런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자존심도 이 하나님과의 평정한 관계 거기서 비롯되는 온유함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런 온유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은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습니까? 여러분 눈을 크게 뜨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굳게 붙들어 보십시오. 안달복달해야 될 일이 뭐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큰일 죽는 일밖에 더 있겠습니까? 마음을 크게 갖고 큰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가치들을 중요한 것으로 붙들고 늘 변하는 것들에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삶을 살아서는 안돼요. 그러면 온유한 삶을 성취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자기의 성질대로 살지 않고 온유한 삶을 사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대답을 해보십시오. 쉬운 일입니까? 어려운 일입니까? 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무언가 축복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팔복을 말씀하시는 가운데 세 번째 말씀 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어떻게 할 것이요? 천국이 저희 것이요는 1번이고 마음이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어떻게? 당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야! 이 얘기를 하고 나니까 웬 땅? 이건 말이지요 물리적인 땅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온유해지기만 하면 막 아파트가 생기고 막 땅덩어리가 생긴다면 나는 제일 좋은 사람입니다. 지금 교회 지을 땅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여러분 몇 사람만 1평씩만 온유해지면 이게 200명, 200평하면 좀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두 번하면 400평 아닙니까? 그럼 지을만 합니다. 좀 작기는 작지만 4번하면 800평 아닙니까? 아쉬운 데로 몇 년 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땅은 그런 게 아닙니까? 땅을 정복하는 것은 뭐냐하면 사람에게 감화를 끼쳐서 사람을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람을 정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성깔대로 사는 사람 자기의 성질대로 살고 싶어서 방종하게 자기의 원하는 데로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들 중에는 따라 다니는 사람들은 있는데 그건 열렬한 추종자입니다. 무슨 이익에 관계 됐던지 성질이 자기하고 맞던지 해 가지고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팬입니다. 팬! 그러나 마음이 온유한 사람들에게는 열광하는 팬은 없지만 그러나 매일 감화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던지 그 사람이 대접을 받습니다. 어디에 가던지 절대 야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야합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이 손해 보는 것도 아닌데 어디에 가서든지 인격이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포용하고 그리고 황무지와 같은 곳에서도 주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사명을 사람들 속에서 찾는 사람이 이게 온유한 사람입니다. 사람들 속에서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온유한 사람 곁에는 늘 그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은 없고 함부로 그에게 달려와서 범접하지는 못하지만 늘 그 사람을 존경하고 그 사람과 가까이 있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래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끼리 놀 때는 신이 나는데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오면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저 사람이 우리를 잡아먹을 것 같애 그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냐 이겁니다. 우리끼리 놀 때는 뭔가 모자라는 것 같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딱 오면 한참 처음에는 우습게 알았는데 한참 이야기하고 교제하다보면 자신들도 모르게 그 사람의 어떤 성품에 의해서 어떤 영향을 받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삶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은 포악하게 살고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포악하게 모양으로 하자면 머리에는 날카로운 뿔이 박혀서 피가 묻었습니다. 하도 들이받아 가지고 이빨도 드라큘라처럼 늘어져서 아무나 물고 뜯어 가지고 피하고 고기 덩어리가 지저분하게 묻어있습니다. 자신들은 그런 식의 삶을 살면서도 세상사람들은 그러면서도 만족이 없습니다. 세상사람들뿐만 아니라 성질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말하자면 부드러운 솜털이 난 것 같은 가슴입니다. 기대어서 자기 이빨에는 피가 묻고 자기 뿔에는 혈흔이 있지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드럽고 온유한 품에 기대기만 하면 뿔도 들어가고 드라큘라 이빨도 도로 들어가서 자기도 착한 사람이 될 것 같은 그러한 그리움들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갔다가 너가 먼저 좀 가져라 싫다니깐 받아버리는 것입니다. 너가 좀 가져라 그러니까 “왜 나보고 그걸 먼저 가지라고 그래 이가 먼저 가지라니깐” 그렇게 하고 서로 안 온유해 진다고 둘이서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결국은 서로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온유해지지 않으니까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이 있어도 수많은 교제를 해도 그 교제를 통해서 그 치유의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치유는 하늘에서 별빛이 떨어져서 치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온유한 사랑의 성품을 깨닫게 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에 모두 목말라하고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찬송가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기갈 중에 있는 영혼들이 곳곳마다 해갈을 하면서 그런 사랑을 원합니다.” 그런 사랑을 원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렇게 고통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대안으로 보여주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평정한 관계를 누리고 돈 때문에 안달복달하고 평안을 잃어버린 사람들 그래서 돈 안주는 부모도 받아버리고 돈 안주는 동기도 받아버려서 뿔에 피맺히고 이빨에 피맺혀서 이 사람 저 사람 씹고 다니는 인생들, 그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온유한 성품으로 깃털과 같은 가슴에 품어서 끌어안아서 그들의 뿔도 녹여 버리고 이빨도 녹여서 정말 온유한 사람으로 그렇게 감화를 주는 그런 일들을 계속해 나가게 하려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 믿고 주님의 사랑에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그 품에 와서 안겨 “아이고 돌았지 그 품에 왜가서 안겨?” 그냥 가슴을 열면 고슴도치 털 같은 게 잔뜩 솟아나 가지고 끌어안았다가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는데 그러니 그렇게 살아서 결국은 인생을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가? 사람들이 우리에게 그렇게 묻는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은 평생 땅을 정복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모든 사람들은 그거를 보면서 표로 삼아요. 안 믿는 사람들은 저 사람을 보면 예수 믿을 이유가 없다, 믿는 사람들은 믿어도 저렇게 믿지 말아야 되겠다, 나름대로 공헌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렇게 부정적인 공헌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 역시 예수 믿어도 자기 성질은 못 버리는거구나! 예수를 믿어도 결국은 자기하고 싶은 것은 해야지 사는구나! 왜 그런 식의 인정으로 살아야 되느냐. 한사람이 예수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나면 그는 정말 더덕과 같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 보면 더덕 한 뿌리만 있으면 더덕 냄새가 흠- 와- 아주 기가 막히게 시골사람들은 캡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한사람이 그렇게 주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이 우리를 향해서 얼마나 온유해 지셨는지를 깨달아서 하나님과의 평정을 누리면서 누구든지 지치고 뿔에 피 칠하고 이빨에 살점이 붙어있는 그 포악한 인생들이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품에서 그 복음의 샘물을 마시면서 신기한 샘물처럼 후루룩- 마시기만 하면 뿔도 들어가고 이빨도 들어가고 그 포악하고 악마와 같은 사람들이 변해서 눈물 흘릴 줄 알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하게 해주는 이런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서 주님의 온유한 사랑을 본받고 그런 삶을 우리에게 이어가면 주님이 우리에게 인정을 해주셔서 좋고 평정을 잃지 않아서 좋고 그래서 그 평정 때문에 온유해져서 좋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어서 여러분들이 수많은 사람 정복하고 결국은 여러분들이 정복한 사람들이 예수에 의해서 정복되어서 그렇게 땅을 넓혀 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시면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렇게 살 사람들만 다같이 기도합시다.
8. 사랑은 투기하지 않습니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고전13:4)
지난주에는 온유하지도 않은 사람이 온유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온유하며를 지난주에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면서 이 온유함은 유유부단이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온유함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이 온유함은 하나님과의 평화로부터 비롯되는 내면에서 흘러 넘치는 인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의 핵심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거리낌없이 뜨겁게 사랑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우리는 부단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이제 오래 참고 온유하고는 긍정적인 면에서 사랑은 이러해야 한다는 것인데 뒤에 보면은 사랑은 이렇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쭉 나옵니다. 그것을 한번 우리들이 살펴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오래 참고 온유하며 두개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6절로 넘어가면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참으며 이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믿으며 그 다음에 바라며 견디느리라. 똑같은 것입니다. 5개가 긍정적인 면으로 나오고 그 다음에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8개가 나옵니다. 이 숫자를 세어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데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니까 순서뿐만이 아니라 이 숫자도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하면 사랑은 계속해서 무엇인가 우리 속에 더해야지만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뭔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빼내야지만 진정한 사랑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이 속에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서 살수 없도록 만드는 그 무엇인가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것이 내 안에서 잘못된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들을 경험하는 동시에 새로운 것들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에 우리들이 비로소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속에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숫자를 보면 부정적인 것이 8가지이고 긍정적인 것이 5가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은 인간이 미움과 원망, 용서하지 않고 서로 다투면서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노력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냥 살면 인간은 원래 그렇게 되어먹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 죄성이 속에서 역사해서 사람을 미워하는 훈련은 필요 없는데 사랑하는 훈련은 필요합니다. 원수 맺는 일은 교습을 받을 필요가 없는데, 화해하는 일은 자기를 죽이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Troble Maker는 가르쳐주지 않아도 저절로 되지만 Peace Maker 는 무엇인가 그런 Peace Maker가 될 수 있는 변화가 자기에게 일어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서 그냥 우리를 내버려두면 우리는 정말 말도 아닌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 멍에를 매고 내게서 배우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우리들이 사랑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전 삶에 걸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인식은 바로 이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막되어 먹은 삶, 그리고 아무렇게 난 살아가는 삶,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결단이 나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미움과 원망으로 뒤엉켜버리고 그래서 마지막으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전하는 도구와는 거리가 먼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전하는 도구와는 거리가 먼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고 자기를 죽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기를 살리고 나면 마지막에는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자기를 죽이면서 자기 안에 잘못 박혀있는 잘못된 자기의 아집과 편견과 더불어 싸우면서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고난에 상응하는 놀라운 삶의 축복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애지중지하고 그 못된 죄된 성품과 포악한 기질을 애지중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고쳐지고 새로워지기를 거절하면서 일 평생을 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숫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 안에 잘못 박혀있는 기질 하나님 만나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아집 그리고 편견 그리고 패역한 고집 이런 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본질적으로 괜찮은 사람이기 때문에 이제 무엇인가 나에게 하나님이 더 주시기만 하면은 나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며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여러분 감히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해보나마나 절망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잘못 심겨져 있는 우리의 그릇된 사고방식과 아집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삶이 뿌리 뽑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고 그 사랑에 붙들려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잘못 심겨진 것들이 뽑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을 마음껏 하나님 앞에서 맛보고, 그 사랑에 감격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번영을 누리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의 패역이 고쳐지는 것들을 생각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굳이 사람이 오래 참고 온유하며 그러다가 갑자기 투기하지 아니하며 투기하는 사람이 되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투기하지 아니하며 왜 이렇게 말합니까? 투기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서로를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긍정적으로 서로 인정해주며 그렇게 말하지 않고 투기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라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삶 속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삶의 방식이 투기라는 것입니다. 투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투기는 개발되고 달란트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죄성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 이 철저한 투기심이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 투기가 무엇입니까? 투기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투기라고 하는 말이 ‘부글부글 끓다’에서 왔습니다. 얼마나 멋있습니까? ‘부글부글 끓다’에서 왔고 여기에서 나온 말이 무엇이냐 하면은 같은 어근에서 나온 당이 셀롯 당원이라는 것입니다. 열심당원 그것도 끓다 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치열한 열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시기하다’,‘열심을 내다’ 혹은 심지어는 ‘불’이라고 까지 번역이 되었습니다. ‘불’,‘열심을 내다’,‘시기를 내다’,‘질투하다’이런 모든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투기는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투기는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나은 것 혹은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갖거나 존재 자체가 자기보다 뛰어난 것에 대해서 가지는 말하자면 분해하는 마음입니다. 가지보다 낫거나 존재에 있어서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자기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없는 어떤 좋은 것을 가지고 있거나 그렇게 그런 상태가 된 것에 대해서 분노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질투 혹은 투기 혹은 시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희랍어 성경에는 그 아가페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아가페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라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는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가페의 그 사랑이 아니면은 얼마든지 투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이 투기는 어떤 면에서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투기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서 나는 셋방을 사는데 아프리카에 있는 어느 교회 교인이 집을 하나 샀다고 그러는데 얼굴을 모르고 성도 모르고 동네도 모릅니다. 그런데 선교편지에서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을 들으면서 ‘아’ 도대체 나도 못산 집을 그 아프리카 흑인은 왜 샀을까? 그러면서 부글부글 끓면서 그렇다면 교회보다 정신과를 먼저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투기 그 자체는 상당히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나 혹은 사랑해야할 관계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어봅시다. 호떡 장사가 나란히 있으면은 서로 싸우겠습니까? 안 싸우겠습니까? 싸울 것입니다. 이 사람은 찾아와 가지고 여기 와서 사먹고 요렇게 왔다가 이렇게 갔다 사면 그래도 한번은 참는데 계속 그러면은 더군다나 이 사람이 이리로 오라고 자꾸 이러면은 그런데 여러분 방배동의 호떡장수라고 부산의 호떡장수하고 멱살잡고 싸우는 것 보셨습니까?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투기는 사랑을 나누어야 할 그러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인류 최초의 살인이 이 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가인을 낳습니다. 두 번째 낳은 아이가 아벨이었습니다. 두 사람이 살다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습니다. 한사람은 농사꾼이었기 때문에 곡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렸고 한사람은 양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제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우리는 명백하게 알 수 없지만 히브리서하고 연결을 시켜서 생각해보면 가인은 곡식을 드렸기 때문이고 아벨은 양을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받았다는 식의 해석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아닌 그 사람은 곡식 그거 하는 사람이니까 그 곡식을 거둬다 제사를 드렸을 것이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니까 그 양을 갖다가 드린 것이지 그 자체를 가지고 무슨 동물의 제사냐 식물의 제사냐 얘기 할 것이 없습니다.
또 레위기로 넘어와도 식물을 드리는 제사도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제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에 관해서 히브리서 11장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 하면은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아벨에게는 믿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은 아주 재미있게 나옵니다.
뭐라고 나오냐 하면은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셨으나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더라 그러니까 제물하고 제물을 바치는 사람하고 분리가 된 것이 아니라 다 하나가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안 좋아하시는데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싫지만 기도소리 하나는 하나님이 좋아하신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싫으면은 처음서부터 다 싫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싫은 사람이 오면은 노래를 불러도 싫고 숨쉬는 것도 싫고 밥 먹는 것도 싫고 밥 안 먹는 것도 싫고 코 고는 것도 싫고 다 싫지 않습니까? 좋으면 그냥 좋은 것입니다. 옆에 와서 개겨도 좋고 그저 뭐 너무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안 받으셨지만 아벨과 그 제물은 받으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아벨을 사랑하셨으면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겠습니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문제가 가인의 제사가 열납이 안된 것이 아벨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자기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문제가 무엇인가를 생각을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왜 거기에서 아벨의 제사가 그렇게 드려졌을 때 그 아벨을 향해서 분노하는 마음을 품었든 투기하는 마음을 품었든 그야말로 불일듯 일어나는 미움의 감정이 복 받쳤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이런 것들이 바로 투기하는 마음이 미움으로 이어지고 살인으로 이어지는 사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아벨이 제사를 드리지 않고 가인 혼자 제사를 드렸는데 자기 제사가 열납 안됐더라 그랬으면 기껏해야 아벨의 제사도 열밥 되지 말아야 할텐데 겨우 그런 생각밖에 안 했을 것입니다. 죽이기 까진 안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파괴적으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 투기하는 마음에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투기와 미움 살인 이세가지는 모두 사촌관계입니다. 그러니까 한쪽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 그 다음 아주 쉽게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투기는 단순한 미움보다도 훨씬 악질적입니다. 왜냐하면 미움은 대개 무엇인가 손해를 입은 것이 동기가 되어서 미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투기는 그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손해 입히지도 않고 한 사람이 잘되거나 뛰어난 존재가 되었거나 하나님께 인정받게 되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품게 된다는 면에서 만약에 서로 어떤 관계가 얽혀서 이해관계가 얽혀서 상처를 주고 받다가 미워하는 것은 칼싸움을 하다가 상대방을 찌르는 것이라면 이 투기는 가만히 앉아서 노래부르고 있는 사람한테 칼 들고 가서 가슴에다 꽂고 나오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투기는 그렇게 거의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에 억제가 없으면 투기는 즉시 미움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그 투기의 마지막 목표 마지막 바램은 뭐냐 하면 너가 없었더라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를 치워버리는 것입니다. 살인이 뭐 별것입니까? 있는 사람 없애는 것이 살인이지 않습니까? 쓰레기 치우듯이 처분해버리는 것이 살인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투기가 결국은 단순한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그런 도덕적인 깊은 살인에까지 도덕적으로 그런 살인에 이르기까지 깊은 죄악에 뿌리가 맞닿아 있다는 면에서 볼 때 이것은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투기가 왜 생기느냐 이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을 함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로 본 것이 아니라 경쟁관계로 보기 때문에 투기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Context자체가 교회입니다. 교회 속에서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주위에 있는 자체들을 여러분과 경쟁관계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한 일에 있어서나 나쁜 일에 있어서나 여러분이 경쟁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서 지체를 향해서 칼을 준비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교회입니다. 꽃꽂이를 해 놓았습니다. 꽃꽂이를 저희 교회에서는 우리 김선옥 성도님이 늘 저렇게 예쁜 꽃꽂이를 교회의 보조도 안 받으시고 무상으로 저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데 혼자서 하십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는 꽃꽂이에 도가 튼 사람이 두 사람 있었다고 합시다. 한사람이 올려다 놓으면 다른 사람이 와서 그것을 치우고 자기 꽃꽂이를 놓고 이런 식으로 말하자면 씨름을 한 것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그러면서 그 두 사람의 마음이 갈리고 서로 투기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소리를 지르면서 이까짓 놈의 꽃 없이도 난 교회 잘 한다고 다 집어치우라고 화분 갖다 놓으라고 꽃꽂이 생전할 필요가 없는 그것을 갖다 놓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러분 그런 일에 있어서 조차도 지체들을 경쟁관계에 있다고 여러분 생각을 합니까? 여러분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매우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들의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사람의 삶에 심한 암초가 된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지체들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여러분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경쟁하기 위해서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여러분 주위에 있는 이 지체들은 함께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존재들이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여러분들이 함께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는 공동체의 지체들이요. 형제 자매들인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실 때에 그 사랑이 상대적인 사랑이었습니까? 절대적인 사랑이었습니까?
여러분 아무리 제가 못났어도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기도할 때 주님이 저한테 굉장히 많은 여러 가지 기도 속에서 응답을 많이 주셨습니다. 음성도 들려주시고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저한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야! 그 아무동네 아무개 목사 좀 봐라 넌 그게 뭐하는 거냐 내가 너한테 은혜를 얼마나 줬는데 너 그따위로 밖에 못하냐 할꺼야 집어 칠거야 다음달까지 통보해!”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개를 봐라 도대체 너는 똑같은 애가 왜 그러니? 야 누구 좀 봐라 은혜 조금 줬는데 목회 잘한다. 넌 은혜 그렇게 많이 줬는데 도대체 뭘하고 있는 거냐 지하실에서” 하나님 한번도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주님이 제게 다가오실 때는 이 세상에 저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 다가오십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많은 사람을 위해서 내가 죽었다. 그런데 그 속에 니가 하나 껴있더구나 그렇게 말씀 안하십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바로 형벌 받을 너의 죄악을 위하여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것이 저한테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제가 보기에 무능해 보이는 목회자에게도 하나님 그렇게 다가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한다라고 하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허황되고 바보 같은 사람입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그저 만나면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자매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안다고 말하자면 어떻게 속속들이 알겠습니까? 사랑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의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안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러면 또 섭섭하지 않습니까?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자매가 그러나 여기 특별한 사랑 안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아는 것 하나는 나에게 다가오셨던 그런 방식으로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절대 가치인 것처럼 다가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사랑입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그런 사랑을 배웠는데 우리가 비교하고 왜 바보같이 경쟁관계에 있느냐 말입니까?
전 주위에 가면은 저보다 교회 크게 하고 성공하고 세상적인 말로 그러다 막 정말 뭐 자기는 말이야 교인수 이름 외우는 걸 이미 포기했다고 그러할 정도로 그렇게 큰 교회하는 사람들 많이 알고 있습니다. 포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 2·3.000명이 되면 또 어떤 목사님은 5.000명까지는 외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될지 우린 안 되어보았으니까 난 모르지만 나는 그래도 그 사람이 나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훨씬 많이 받는다 그렇게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마 너보다는 훨씬 사랑을 많이 받을걸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유혹을 받은 적은 있지만은 실제로 그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해 본적은 없습니다. 얘기해봐야 쓸데없는 얘기이지 않습니까? 그 사람은 나하고 똑같은 느낌을 또 갖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는 지하실도 아니고 비도 안 새고 뭐하면은 나름대로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각자 절대적으로 다가오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 자신 하나 하나가 절대 가치인 것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비교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 이것입니까? 그런 사랑 어디서 배웠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배운 것입니다.
옛날에 직장에 다닐 때 자매가 하나 있었는데 그 자매가 어느 형제를 참 좋아했습니다. 형제를 좋아했다기보다 형제가 좋아했는데 그것을 기꺼이 받아드렸습니다. 그래서 둘이 서로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형제도 뭐 예수 믿는 사람은 둘 다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었지만 그것은 뭐 그냥 괜찮은 평균적인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뭐 자매가 좀 외모가 약간 죄송하게 생겼지만 그래도 뭐 그것 빼면은 다 괜찮습니다. 건강한 남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형제가 진급시험을 봐서 붙었습니다. 그러더니 그 관계가 열렬하게 뜨거워졌습니다. 그러더니 그것도 참 이변이지 삼차 시험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관계가 식더니 그 자매는 딴 사람에게 시집을 가 버렸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절대가치로써의 사랑이 아니라 자꾸 저울질하면서 재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그 아가페의 사랑이 아닙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우리에게 권고하기를 당신들은 사람을 사랑하되 수단으로 사랑하지 말고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사랑하도록 힘쓰시오 라고 권고한 권면은 그런 점에서 볼 때 매우 복음적인 충고다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자체가 우리에게 있어서는 매우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느끼면서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이 가슴 저미는 것 같은 이 가슴 시려운 이러한 놀라운 사랑의 사연을 너도 안고 너도 안고 너도 안고 너도 안고 여기까지 왔겠지 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한사람 한사람이 그렇게 절대 가치로써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한사람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절대로 소중한 가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유능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한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덜 유능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자르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유능하고 무능하고 혹은 하나님의 일을 잘하고 못하고 그것이 아니라 인간, 우리 그 자체를 하나님께서 너무나 소중한 절대의 가치로서 알고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 감격적으로 삽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생각하면서 늘 감격하고 분에 넘치도록 주님 힘에 넘치도록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아직 깨닫지를 못할 뿐입니다. 찬송가가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까?
특별한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이 찬송 부를 때 몇 사람만 부릅니까? 다 부르지 않습니까?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알면 형제들을 경쟁의 상대로 생각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쉽게 형제들을 깎아 내리고 그리고 무언가 형제들을 낮게 평가하려고 애를 쓰고 그래서 그들의 평가를 낮게 하고 그 위에 우리 자신을 높이 평가받고 싶어하게 하고 비교해보고 거기서 무엇인가 우월 의식을 느끼려고 하는 이런 것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 것입니까? 형제들을 보면서 여러분 우월 의식을 느낍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잘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월을 느낍니까? 복음을 많이 전하고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수고한 것에 대해서 우월 의식을 느끼십니까? 진리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달아 알았다는 것 때문에 우월 의식을 느끼고 계십니까? 감히 여러분들 빛 가운데에 살고 형제들은 어두움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면서 형제에 대해서 우월 의식을 느낍니까?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나태하게 사는데 나에게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수 있도록 열심을 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매우 특별하게 사랑해 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은총의 증거를 보여주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하시면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시는 것이지 그것을 빌미로 가지고 가서 형제들과 비교하고 그리고 그 형제들을 평가하고 그 형제들을 깎아 내리려는 그러한 면죄부를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하나님께 특별히 인정을 받거나 혹은 물질적으로 형통하거나 혹은 여러분들이 소원하는 일들이 끊임없이 좌절되는데 어느 형제에게는 계속 그러한 소원이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들을 여러분 발견하게 될 때 배아픈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못 느끼면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엄마가 아기를 안고 뽀뽀해 주고 끌어안고 뺨을 비비고 어쩔 줄 몰라하면 그것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됩니까? 그러나 엄마가 없는 아이들에게는 상처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내와 남편이 다정하게 손잡고 어깨를 맞대고 걸어가는 것이 다른 사람은 문제 안되지만은 혼자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하면 눈꼴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는 일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비교의식을 느끼고 그 앞에서 Complex를 느끼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라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한 비교의식이 우리자신에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각양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만족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형통할 때 그 형통을 부러워하거나 거기에 마음 빼앗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기업을 통해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나는 내게 주어진 그 분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독특한 삶이 있고, 이 독특한 삶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 이러한 아름다운 삶은 누구의 삶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삶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투기 그 자체도 하나님과의 잘못된 관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자기에게 놀랍게 나타났고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체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이상적인 현상이라 이것입니다. 투기할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 지체들이 받는 것을 보고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나는 셋방 살아도 지체들이 집 샀다 그러면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비록 사업이 잘 안되어도 지체들이 잘되면 그것을 축복해주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나는 말이 어눌해도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서 많은 영혼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다고 하더라 그러면 그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영원히 우리들의 지체는 우리의 경쟁관계의 사람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지체들도 또한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다. 지체들이 그런 사랑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이 또한 그러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의지해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나라에는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열등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 자매가 하나 있는데 다이어트를 해도 살이 찌고 물만 먹어도 살이 찌고 계속 늘어났답니다. 이번에 미국 갔더니 미국에 기록인데 869kg 나가는 사람이 생겨났다고 그럽니다. 860kg이면 도대체 황소가 450kg 밖에 안 나가는데 뭐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래서 위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계속 살이 찌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울을 보면서 stress, 옷을 입으면서 stress 그러면서 계속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 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의지가 약해서라기보다도 별의별 일을 다해도 안됩니다. 그런데 그 다이어트도 말이지 한 두 번이 먹히지 계속하면은 살을 빼야지 하면 살들이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살들이 방어 작전을 펴는 것입니다. 얘들아! 우리 뺀 데, 야! 꼭 붙들어 그러니까 안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계산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 이 자매가 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무엇인데 이 껍질이 무엇인데 이 껍질하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송두리째 날아 갈 수가 있느냐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45kg일 때만 나를 사랑하셨을까? 미안한 얘기지만 98kg쯤 됐는데 그 사랑이 반으로 줄었는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물론 마음껏 쪄라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자기의 현실을 그래도 받아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최선을 다해서 사는데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자기와 같이 고민하면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뚱뚱보라는 잡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고통해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자면은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법,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백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 잡지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수많은 위로와 용기를 준 것입니다. 인생관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말하자면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열등감을 느끼는 이런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절대적으로 귀한 가치인가를 못 느껴 본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누가 제일 폼을 잡습니까? 선생님 앞에 있을 때 누가 제일 폼을 잡습니까? 공부 잘하는 애입니다. 거기서도 처졌습니다. 공부를 못하니까 이리 와라 성적순서대로 1등, 2등, 3등, 4등... 쭉 이렇게 앉혀놓고 너 뒤에 가서 너 혼자 앉아 매일 이런 대접을 받아 본 것입니다. 선생님 사라진 다음에 애들끼리 있을 때에는 누가 인정받습니까? 얼굴 예쁜 아이가 인정받을 것 아닙니까? 거기서도 처졌습니다. 또 그런 것도 없으면 돈이라도 많으면은 대접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돈도 없습니다. 매일 얻어먹는 신세입니다. 또 처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졸업을 하고 그 다음에 사회에 나가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면 대접을 좀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뭐 취직자리도 없어 가지고 빈들빈들 노는 그런 삶을 살고 거기서도 처졌습니다. 그런 식으로 사니까 누구하고 만나면 항상 뭘 생각하느냐 하면 함께 손잡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일렬로 서면 내가 몇 번일까 이런 생각들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의식조사를 했는데 제일 불안해하는 명령이 같이 의논해서 잘해봐 이것을 제일 힘들어한답니다. 서열 안 정하여 주고 같이 협동해서 잘해 이것을 제일 힘들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다가 안되면은 니가 나이 많으니까 넌 1등이고 난 2등, 3등, 4등 하여튼 함께 줄을 세워놔도 전부다 세로 일렬로 설려고 하는 것입니다. 정 안되면은 가나다라 순서대로라도 서서 1,2,3,4번 꼬리표를 붙여야지만 인정 난 꼴지다, 난 아홉 번째다. 여덟 번째다 분수를 알아야지 이렇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그 하나님의 참 은혜를 깨닫고 나면 우리에겐 그런 콤플렉스가 자리 붙일 데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이 뭐라고 그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나만 좋다 그러시는데 이렇게 좋은 일에 시기 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저도 개인적으로 콤플렉스에 다양한 콤플렉스가 많습니다. 지금 여기서 다 고백을 할 가치가 없습니다만 심지어는 이 키에 크다고 콤플렉스에 걸려 가지고 밥도 못 먹고 그랬었던 적이 있었다고 그랬었지 않습니까? 중학교 다닐 때에 나는 왜 이렇게 클까? 그런데 나중에 자라보니까 난 너무 작아 한 10cm는 더 커야 되는데 말입니다. 그런 쓸데없는 콤플렉스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인가 생각하니까 다른 사람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왜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사랑하기 위해서 눈에 들어오지만 적어도 그런 식으로 내가 애하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뒤로 갈까 앞으로 갈까 이런 바보 같은 생각을 안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다가오실 때 애야 내가 너한테 찾아갔단다. 그런데 너한테 오기 전에 내가 먼저 김준성한테 먼저 들렸단다. 주님은 그런 식으로 말씀 안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조치지 않으십니다. 어! 주님 오셨습니까? 그런데 너는 막판이다. 그렇게 말씀 안하십니다. 들렀다 오셨을지라도 주님 그렇게 말씀 안하십니다. 교회에서도 가만히 보면 사실 목회자가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도 어렵지만 그 표시를 똑같이 한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조금씩 어떻게 하다보면은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면 악수를 어떻게 하다가 손이 아파서 쉬고 다른 사람을 한다든지 아니면 악수를 계속하다가 사람도 도 잘 보고 해야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매인데도 자기가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하자고 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손 내밀면 불신 남편한테 가 가지고 거기 갔더니 목사가 매일 손만 만질라 그러더라고 그런다고 그러니까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다가 눈치보고 내밀면 악수하고 하는데 누구는 악수해 주고 누구는 안 하더라 그런 것부터 시작을 해 가지고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다 가지고 그렇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언제 얘기했는데 상처받았다 그래서 수련회 가서 상처를 푸는데 왜 그랬냐 그러니까 전도사님 모시고 나서 얼마 안 되서 전도사 때인데 사탕을 사서 너도 먹어라 너도 먹어라 그러더니 자기는 안주드래 거 없는데 어떻게 하나씩 주고 나니까 없는데 아니 3명 있는데 2개 밖에 없으니까 너 먹어라 너 먹어라 저 뒤에 있으니까 못 봤겠지 하고 안 줬지 잘라서 줘야 되는데 그게 참 목회적인 큰 실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가지고 막 이렇게 비교하고 이러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까지도 하나님 앞에 인격적인 위탁이 안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참 어떻게 보면은 구속한 주만 보이는 것입니다.
아!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한번도 이러한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다 주다가 찌꺼기만 날 주셨구나 그런 생각 안합니다. 그래서 복음성가에 나오는 것처럼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자기만 그런 노래 부르나 나도 그런 노래 부르는데 그러니까 모두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신 것을 아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결정적인 자기를 향한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주님을 몰랐을 때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뭐를 통해서 자기가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느냐 하면은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똑같이 일을 했는데도 이 사람에게는 돈을 많이 주는 것, 이런 것을 가지고 굉장히 말하자면 자기의 가치 자기가 귀하다 하는 존재를 그런 식으로 계속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그런 식으로 내가 유능하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 줬다든지 하는 것이, 곱기 때문에 나를 사랑해 주셨다든지 그런 생각이 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누가 복음 18장에서 세리와 바리새인이 기도하러 올라가지 않습니까? 세리는 그냥 감히 바리새인은 폼잡고 기도를 했는데도 하나님이 안돌아 보셨지만 세리는 가슴을 치면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면서 이 세리가 바보같이 ‘아! 역시 바리새인은 못치는 가슴을 내가 쳤더니 바리새인은 못하는 회개를 내가 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참 이렇게 사랑하시는 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겠느냐 이겁니다. 자기가 가슴을 두드렸든지 고개를 숙였든지 죄인이라고 말했는지 그것과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 그 사이에 어떤 연관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회개를 자랑하는 사람처럼 멍청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아직까지도 하나님 못 만난 사람입니다. 뭘 회개를 그렇게 잘해 왜 그렇게 회개하게끔 그렇게 살았습니까? 자기가 부끄러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 자체를 정말 자기가 멋있게 했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 사람은 아직까지도 자기의의 기초가 하나님의 일방적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라고 하는 자기 의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주위에서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제법 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람들 속에 이런 교묘한 자기 의가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낮추기 경쟁하는 것 보셨습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홀로 설 때는 그렇지 않으면서 사람들만 만나면 자기가 얼마나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비참하고 그런데 왜 기도 안합니까? 그렇게 소망 없는 사람이 그러면서 경쟁적으로 사람들 앞에 과시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 봐라 내가 얼마나 낮아지나 봐라 거기에서 사람들이 나는 죄인이야 그러면 나는 죄인 중에 괴수야 난 그것보다 더 죄인이야 그러면서 계속 깎아 내리는데 문제는 그것이 삶 속에 그런 고백이 녹아 흘러서 하나님을 향한 태도에 영향을 미쳐야 하지 않습니까?
혼자 있을 때는 그런 생각 거의 안하면서 살다가 누가 하면 누가 더 많이 내려가나 경쟁하는 것입니다. 땅바닥에 엎드려 버리는 것입니다. 살 때는 그렇게 겸손하게 살지 않으면서 이런 것들이 바로 영적인 허영입니다. 이런 것 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참사랑을 우리들이 못 만났기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일들을 하는 것이고 또 만났어도 그 하나님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떤 방식으로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면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무슨 유익을 가져다줍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여러분을 볼 때 아! 나보다 더 영적이구나 그것이 무슨 도움이 됩니까? 그래서 그 사람이 절망하면 여러분이 실수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참 만나고 그 사랑을 알게 되면 우리는 이 콤플렉스, 개인적인 열등감 이런 것들이 설자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너무 귀하다 그러시니까 너는 너무 귀하다 너는 너무 소중하다. 너는 나에게 있어서 가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깨닫고 보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나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 속에 그래서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수십 억 분지 일 나 때문에 못 박힌 것은 수십 억 분지 일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을 만나고 보니까 죄인이 이 세상에 나 한사람밖에 없었어도 주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데 주님이 나를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처럼 내가 거기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드려야 되겠다. 그러니까 주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뭐가 있습니까? 기대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의 대가가 아니라 사라하는 사람에게는 기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에는 계획이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니까 내가 이 하나님의 사랑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야 되겠구나 거룩한 삶도 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나아야 된다는 예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기 의에 빠지는 바리새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 콤플렉스에 걸려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여러분 자신 그 존재 자체를 여러분들의 사랑으로 여기셔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기뻐하십니까? 착각도 자유입니다. 아니 그렇게 나쁜 것들이 속에 박혔는데 통째로 좋아 하실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애를 낳았는데 애가 똥을 싸버렸습니다. 똥 묻었다고 애를 쓰레기통에 버리겠습니까? 닦아서 써야지 그렇지 않습니까? 목욕시킬라 그러는데 막 똥을 싸버렸습니다. 너무 더러워 버려라 물하고 같이 버리는 부모 봤습니까? 사람은 사람이고 더러운 것은 더러운 것이지 마음속에 박혀있는 패역과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싫습니다. 그런데 그렇지만 그것이 싫어서 여러분들을 쓰레기통에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랬더라면 누가 남았겠습니까? 주님 혼자 계실 것입니다. 다 쓰레통에서 우리는 만났을 것입니다. 똥 묻었다고 다 애들 버렸으면 그 쓰레기봉투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딱아서 씁니다. 그래도 똥은 더럽습니다. 그래서 치웁니다. 닦아서 다시 더 예쁘게 사랑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치웁니다. 닦아서 다시 더 예쁘게 사랑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자꾸 고치고 더 온전해져서 존재 그 자체가 아름다워지도록 존재 그 자체가 거룩해지고 정결해지도록 하나님이 그런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투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자주 사람들을 깎아 내리기 좋아하고 비교하면서 무엇인가 우월 해질려고 이러한 시기하는 성품들 무엇인가 지체들이 잘못된 길로 걸어 갈땐 그것 봐라 잘된 길을 걸어갈 때는 까짓게 해봐야 이러면서 우리 스스로 지체들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투기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투기는 바로 그 지체자체를 경쟁상대로 여기는데서 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린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경쟁상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한 사랑 안에서 한 세례로 한 교회 안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함께 하나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며 섬기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경쟁상대라고 생각하는데서 투기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또 하나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피해의식이나 결핍증세를 가지고 사람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바로 그 자체가 이번엔 정반대로 그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투기한다는 것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우린 서슴없이 마음으로 범죄하고 우리의 입으로 그리고 심하면은 우리의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사랑이 나만을 감격시킨 것이 아니라 지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감격시켰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아직 그런 감격을 맛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그가 받고 있다고 생각하면 한사람 한사람의 지체들은 매우 두려운 존재들이 되는 것입니다 내 앞에서 살아가는 저 형편없는 지체가 사실 내가 받은 것과 같은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있고 아직 인격적으로 승복되지 않아서 물인지 불인지 모르고 돌아다니지만 그러나 나도 옛날엔 그랬고 그리고 나를 승복시킨 것처럼 언젠가 저 지체도 변화시키셔서 승복시키실 것이라 하는 이런 기대를 가지고 있으면 우린 그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절대 안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사랑을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부터 직접 소명되어서 12사도와는 별도로 사도로 부르심을 받고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일평생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화려한 사역 속에서 자기자신을 불꽃처럼 드려서 하나님의 복음사역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바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났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인격 속에서 깨달을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나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러한 불붙는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마음 아파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긍휼이 바로 자신의 사역에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사도 바울이 배웠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교제가 깊어져 가면서 그분의 사랑의 인격을 배우게 되고 그 사랑의 인격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었지만 그것 때문에 우월한 의식을 가질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물론 교회를 지도했고 연약한 자들이 가르치고 훈계하고 책망하기도 했고 때로는 야단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 사도 바울이 그의 사역 속에서 잊지 않았던 것은 그들은 복음 안에서 자기가 낳은 자녀들인 동시에 또한 이들은 하나님의 양떼들이라고 하는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양떼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지극히 사랑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고 하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깊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놀라운 사랑, 그런데 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이러한 이렇게 대하는 것. 그것은 결국은 그 사람. 그런 하나님의 자녀들을 그런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하나님 앞에 여김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대한 태도는 곧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태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런 사람을 향한 불붙는 사랑, 그 속에서 그들을 모두 끌어안으면서 자기의 양떼요, 자기의 자녀라고 하는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사람들을 자기 아래 종속시키고 자기가 지배하고 그들을 타고 다니고 하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이것은 내가 복음 안에서 낳은 내 자식들임과 동시에 또한 누구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양떼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하는 사실이 이 두 가지가 긴장을 이룬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도구로 쓰여지는 방법들을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은 바로 그런 오랜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부터 배운 그 사랑이 자기의 인격 속에 용해되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배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엔 많이 나오진 않지만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변화되기 직전까지 보여줬던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 빌립보서에 나오는 자신의 고백, 사도행전에 세 번 나오는 자신의 고백, 이런 것들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정말 이 투기와 굉장히 가까운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줘야 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까 비로소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은 참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놀라운 죽으심. 그분의 그 놀라운 고난의 사랑은 바로 이렇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나뿐만이 아니라 또한 수많은 연약한 지체들을 위해서 주님이 보여주신 절대적인 사랑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여러 가지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고 그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사랑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아가페의 사랑은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이제 우리는 마지막으로 나아가서 어떻게 살아야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삶으로서 이루는 것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들에게 있는 지체들을 경쟁관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긍휼이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축복해 주어야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축복 받을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 받았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여러분 기뻐하십니까? 누군가 여러분이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이지만 설교나 혹은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 여러분은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말고 어느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고 많은 성도들이 근본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복은 3장에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주는데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세례를 주시게 됐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쫓았습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이제 그 일을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그때 요한이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일평생 그가 견지했던 태도는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요한은 어떤 의미에서 좋은 경쟁상대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선지자라고 생각한 오래간만에 나타난 걸출한 두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지도 똑 같았습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세례 요한에게 다가 오셨는지 아십니까? 너는 내게 세례를 베풀어라 다가오셨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아야 될 터인데, 어떻게 제가 당신께 세례를 드릴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누가 앞서고 뒤서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렇게 낮아지셔서 죄인과 한 가족이 되시고 그래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이세상의 메시야로 오신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그러한 일들을 통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바라보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목표는 누가 앞서고 뒤서는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마음에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 두 분의 관심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훌륭하게 그 일들을 감당해 나가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지체들 우리 주위에 있는 많은 지체들이 우리의 경쟁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육적인 일에서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우리가 감히 경쟁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은 옳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선의에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자극을 받으면서 주님을 위해서 보다 거룩한 삶을 살고 더 열심히 섬기는 삶을 살아야 될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나 투기하는 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이 아닌 것입니다. 열심 있는 사람들 속에서 이 투기는 더 불꽃처럼 일어나는 법입니다. 늘 말씀드립니다 만은 주일날 와서 예배만 드리고 가는 성도들에게는 문제가 별로 없습니다. 그 자체가 문제자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늘 교회에서는 열심을 가지고 집 팔고 땅 팔고 논 팔아서 섬기는 사람들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이것입니다. 성화 되지 못한 결과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참사랑에 변화되지 못한 결과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누가 잘됐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감사 기도하는 방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축복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쪽박차고 살아도 누가 좋은 차 타고 다닐 때 시기하고 세상에 나는 이러고 사는데 사랑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러지 마시고 축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축복하고 진심으로 마음을 주고 그러면서 우리가 서로 경쟁상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로 긍휼히 여기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던 그러한 관계들임을 깊이 깨닫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이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을 깨닫고 나면 서로를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그렇게 되면은 많은 벽들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복음은 경상도, 전라도도 못 뛰어넘는 복음 아닙니까? 정신들 차리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입니까? 어느 목사님은 내가 육성으로 들었습니다. 자기 죽을 때 유언할 것이랍니다. 어느 지방사람들은 장로세우지 말라고 이것은 어느 복음서에 나온 것입니까? 또 어느 교회는 어느 지방사람들이 와야지만 줄서서 장로가 됩니다. 그게 뭡니까? 그게 어디서 나온 복음입니까? 저런 주의가 우리 나라 복음이 이것을 뛰어 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 판단 받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것들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은 이것은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사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그래서 본적을 없애자는 주의입니다. 도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다 집어치우고 작대기로 이 밑에서부터 이렇게 가로로 갈라서라도 도를 새로 만들라고 그럽시다. 1도, 2도, 3도, 4도, 5도, 6도, 7도, 8도.... 그게 뭡니까?
콧구멍 만한 나라에서 그래가지고 무슨 복음이 그 안에 있겠습니까? 저도 유언하고 죽으라고 합니다. 그런 얘기하는 사람 절대로 장로 세우지 말라고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예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깨달아지게 될 때 우리자신이 하나님 앞에 절대가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임한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제가 그래서 후배 교역자들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사람자체가 신비해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목회의 소명이 아니다. 사람은 나중 문제고 사람자체가 오! 신비하다. 잘생긴 사람만 아니라 못생긴 사람도 오! 신비하다. 저런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니 정말 기적이다. 이러한 느낌이 들지 않으면 목회의 소명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감탄합니다. 허! 세상에 저 사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니, 야 저 껍질이 좀 변화되어야 될텐데, 하나님의 형상은 어차피 그 안에 있는 거니까 변화되어야 될텐데 그러고 봅니다. 정말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신비한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어떻게 저런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었을까? 깨달으면서 우리는 바로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많이 깨닫고 복음을 깊이 알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미워하고 투기하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가 정말 복음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인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악하기 짝이 없고 돌덩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심령도 녹였습니다. 새사람을 만들고 포악하던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강포하던 사람으로 온유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던 사람을 바꾸어 놓아서 하나님이 주신 생명 하나하나 신비하게 여기고 그 영혼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감격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아는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Complex에 걸리고 우리가 무엇 때문에 비교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까?
남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난 내가 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 사랑은 최고의 사랑이었고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이었다. 이제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받은 내가 있다면 아직까지 이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 Complex에 걸려서 자학증세에 빠져서 어둠 속으로 기어 들어가며 살고 있는 이 불쌍한 인생들에게 사실을 이러한 놀랍고 특별한 사랑을 바로 너를 향해 베풀고 계시다 라고 하는 사실을 가르쳐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람의 빛 앞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겠다고 결심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살아 남겨 두신 것은 바로 이것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의 놀라운 사랑, 이 세상의 선행이나 공로에 상관없이 모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한사람 한사람을 향해서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시고 그들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매일 넘어지고 쓰러지고 죄악 가운데 엎드러지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고 주님은 아파하십니다. 그러나 아파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감소되거나 혹은 잘려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을 안타까워하고 그 모습들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고쳐야될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은 계속 불붙으며 그 불붙는 사랑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지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 있을 때에도 지속되고 빛 가운데 있을 때에도 더욱 찬란한 빛을 발합니다. 어디서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았습니까? 또 어디서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런 사랑은 오직 이 아가페, 그 아가페의 사랑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소망은 이 아가페의 사랑 안으로 들어와서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 사랑에 감격하면서 사는 것 이외에는 인생에 참 행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것을 안 사람,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의 교훈, 이 사랑을 베푸신 그리스도 예수의 기대대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9. 사랑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고전13:4)
지난 시간에는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 왜 투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우리가 받은 사랑이 너무나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비교와 상대적인 비교에서 생겨나는 그 투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발붙일 곳이 없다하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자랑한다는 것이 뭐 나쁩니까? 흘러가는 물도 자랑거리가 있고 공중에 날아다니는 새도 뽐낼 것이 있습니다. 자랑거리가 없는 인생은 정말 시시합니다. 무엇을 하든 자랑할 것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자랑거리를 가지고 계십니까? 다 없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 자꾸 캐 들어가 보면 한 두 가지쯤은 자랑거리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자랑할 것이 없는 인생은 참 건조하고 메마른 인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주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아주 간단하게 참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자랑이 어떤 성질의 자랑이며, 왜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본문이 주는 교훈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자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 원어상 볼 때에 부풀려서 말하거나 뽐내거나 자만하기 위한 자랑을 의미합니다.
무엇인가를 사실보다 과장하거나 부풀려서 사람들에게 뻐기기 위해서 자기를 과시하는 그런 종류의 자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야기하는 이 자랑은 철저하게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자랑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할 때 그 자랑은 내가 다른 사람의 선행을 자랑하거나 훌륭한 성품을 자랑하는 거나 심지어는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거나 하는 그런 자랑이 아니라 여기에서의 자랑은 자기 자신에 관한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 관해서 사람들에게 사실보다 더 훨씬 부풀려 말하거나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말하거나 이런 것을 여기에서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런 자랑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은 이런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일까요? 우리는 그 문제를 먼저 깨닫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오늘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배경에 숨겨진 참된 의미를 우리는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에 눈뜨게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앞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도 하나님 앞에 자기가 행하던 죄악된 삶을 돌이키던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율법적인 회개와 복음적인 회개로 나누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에 굉장히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살다가는 하나님 앞에 징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느낌입니다. 정말 내 영혼 위에는 도끼가 놓여있고 정말 이런 식으로 계속 살다가는 하나님이 도끼로 내 영혼을 박살 내실 것이다. 지옥의 불길이 내게 가깝다. 하나님은 내가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혼내실 거야 하는 두려움은 굉장히 자주 우리로 하여금 가던 길을 멈추게 만들고 우리가 탐닉했던 것들에 관해서 입맛이 가게 만듭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신나게 여태까지 했는데 어느 순간에 그런 생각이 싹 스쳐가니까 즐거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가 하던 일을 그만 두게 하거나 혹은 하나님과의 관계, 신앙 생활 같은 것들을 되돌아보게 만들어서 그런 것들을 그치게 만들거나, 멀어지게 만들거나, 거기에서 느끼던 많은 사랑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게 만들어 주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겉으로 볼 때에는 정말 그럴듯한 회개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하나님 무서운 줄 모르고 막 사는 시대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가져다 준 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적인 회개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열매를 맺는 회개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회개는 거기에서 한 걸음 나아가, 물론 율법적인 회개를 통해서 복음적인 회개로 가지도 합니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어떻게 명쾌하게 어느 것이 먼저다 나중이다 구분 할 것 없이 한꺼번에 그 성품이 다가 오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부흥회 같은 때를 보면 두려움에 휩싸이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됩니다. 그런 것도 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시작일 뿐이라고, 율법적인 회개는 반드시 동시에 혹은 그 후에 무엇을 가져다줌으로써 그 회개를 온전하게 하는가 하면 복음적인 회개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회개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의 회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의 회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복음의 회개입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러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값없이 구원을 주셨다고 하는 그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 2복음이 내포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적인 회개는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 회개라고 할 것 같으면 복음적인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회개입니다. 내가 이렇게 할 수도 있고 저렇게도 할 수도 있고 죽기도 각오하면 무엇을 못하겠느냐 하며 하나님을 등지고도 살수 있고 이 짓도 할 수 있고 저 짓도 할 수 있지만 예수의 사랑이 나를 감동 시켜서 이제는 즐거운 곳에서 나를 오라고 불러도 수요일에는 하나님의 교회를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말리겠습니까.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퇴근을 한 후 단란 주점으로 누가 말리겠습니까. 법이 말리겠습니까? 목사가 말리겠습니까? 그런데 말리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의 사랑이 말리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사랑이 말립니다. 하나님의 협박이 우리를 말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말립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사역을 하면서 저는 이런 것을 가슴 깊이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강대상에서 길길이 뛰면서 입에 다 거품을 물고 하나님의 심판을 외쳐도 도저히 꿈적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을 때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에 또한 그 사랑을 거절하면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클까하는 뉘우침과 회개도 함께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적인 회개로 나아가서 결국은 회개가 열매 맺는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떤 동물인지 아십니까? 두려워해도 그 두려움은 언제나 잠깐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커다란 사랑에 감동을 받을 때에 회개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결국에는 참된 회개도 무엇에 감동을 받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뜨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뜨게 되니까 자신의 삶에 대한 많은 가치관들이 대부분의 모든 가치관들이
모두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 변화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놀라운 변화입니다. 자기 자신의 놀라운 변화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내가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에는 열등감에 시달리고 컴플랙스에 빠지고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을 한탄하고 심지어는 부모를 원망하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다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나를 향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생각에 바뀌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이렇게 귀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주에 말씀드린 모든 열등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나는 여러분께 확신 있게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아직까지 열등감과 상대방과 자기를 비교하는 어떤 컴플랙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좀 못하면 어떻습니까. 세상 살아가기 좀 불편하지만 공부를 못한 나를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요긴하게 사용하시고 또 하나님이 공부 잘하는 사람에게 보여주시지 않는 놀라운 사랑을 내게 보여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재산이 좀 없고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사랑은 참 공평함을 느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얼굴이 좀 못생겼으면 어떻습니까.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얼굴이 좀 못생겨도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지식을 내게 주셔서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주님의 성품에 관한 감동과 지식을 주셨습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누가 나보고 넌 전과자고 옛날에 나쁜 놈이었고 형편없는 건달이었고 아무리 그렇게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예전에 내가 주님 없이 살았을 때에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하고 죄악 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진실하고 성실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나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더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그 자체가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결국은 가만히 그렇게 된 자신을 돌아다보면 발견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다른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는 하나도 없고 주님이 내게 은혜로 주신 것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버려두었더라면 돈도 많고 얼굴도 잘 생겼지만 아주 못 되 먹고 패역한 성격 때문에 결국은 인생, 수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메이커로서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사람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나누어주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의 가슴에 창으로 찌를 사람이 오히려 날개를 펴서 깃들게 하는 사람의 성품으로 바뀌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을 누가 했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좋은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못된 것은 자기가 다 옛날에 가지고 있던 것입니다. 머리 속에 덜그럭거리는 돌은 주님이 주신 돌이 아니라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돌입니다. 가슴속에 손 집어넣고 꾸적꾸적 잡히는 더러운 구정물 같은 것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아직 처분을 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내 인생에서 떼어놓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를 떼어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내 인생에서 잘라내 버리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당장 폐기처분하지 않으면 안될 위험물 내지는 공해물질 밖에는 자기의 존재 자체가 맹독성 공해 물질 이상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관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자랑할 것이 있느냐 말입니다. 혹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서 변화를 받아서 그분 덕분에 잘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자랑해야 됩니까. 당연합니다. 주님을 자랑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입에 거품을 물고 자기에 대해서 과시하고 뽐내고 자신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와! 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성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옛사람의 성품이란 말입니다.
오늘 이 고린도전서를 누가 썼습니까. 사도 바울이 썼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사도 바울을 통해서 쓰게 하신 것이지만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서 시종일관 주시해야 될 관점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터 받은 바울이 체험한 하나님의 사랑,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지금 오늘 고린도전서 13장을 철저한 바울의 체험을 통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에게서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교훈을 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 이 사람은 무엇인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랑거리가 진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를 보아도 자기의 얼굴을 자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만 빼놓고 진짜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키가 조그맣고 목이 짧고 대머리가 벗겨지고 배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조금만 마르면 E. T 비슷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여튼 이 사람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우선 다스리는 곳에서 당대에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 힐렐과 가말리엘이 있었습니다. 당대에 최고의 석학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사람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말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커다란 명예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엄격한 유대인의 법도를 따라 신앙생활을 해 온 것도 그에게 커다란 자랑거리였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사이비 유대인이 아니라 정통 유대인이었고 정통 랍비의 길을 걸어갔던 유대인이었단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가문도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율법 위의 규례를 따라서 할례를 받고 살아온 지난 모든 날들에 대해서 이 사람은 깊이 자랑거리를 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자랑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자 그 한 분이신 인격적인 그 분을 통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모습으로 이 사람에게 나타나셨는데 사실 그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그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왜 오셨고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가하다 돌에 맞아 죽어갔던 스데반이 왜 죽어야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그분의 성육신, 그분의 죽으심을 통해서 그분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니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는 사실을 자기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를 쓸 때에 옥중에 있지 않았습니까? 옥중에서 디모데전서를 쓸 때에 순교를 앞두고 있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노년에도 그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감격하고 있는 이유는 죄 없으신 그분이 죄인 중의 괴수인 나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이제는 자기가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이 대부분 근거가 없는 것이었고 자기가 자랑거리라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전에 자랑하던 것, 내가 이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 그것 때문에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고 그것에 눈이 멀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참사랑에 눈을 뜰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빌립보서에서 무엇이라고 고백을 합니까? 이전에 내게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 여길 뿐만 아니라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나니까 이전에 자기가 자랑하던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중에 어떤 것들은 정말 자랑할만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그것은 마치 태양볕 앞에 촛불이나 등불 같아서 아무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시카고에 갔을 때 그 동네에서 10분가는 거리에 노스웨스트 유니버스티가 있었습니다. 그 학교를 안내해 주는 목사님이 남의 학교 들어가 볼 것 없고 정문 옆에 호숫가로 이렇게 나 있는데 아주 경치가 좋았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여기는 천재들이 들어오는 학교입니다. 미국에서 제 2위인데 정말 좋은 학교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말도 못하고 들어갈 때 수재 같은 사람들이 들어가는데 그 사람들이 그렇게 지독하게 건강에 위협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하고 졸업을 하니까 여기서 수재들이 나옵나다. 그런데 목사님 미국인들도 들어가지 못해서 쩔쩔 매는 이 학교를 거의 상위권으로 학업을 이수하는 한국 학생들이 꽤 여럿 있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진짜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런 사람들 앞에서 시골 초등학교에서 2학년 때 우등상 한번 탄 것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 장난입니다. 노벨 문학상을 탄 사람한테 가서 동네 백일장에서 동상 하나 받은 것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구제하라고 돈 좀 몇 푼 주었기 때문에 혹은 학교에 열심히 하얀 봉투를 갔다 주니까 엄마 얼굴을 봐서 상 준 것을 하나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도 바울의 생각 가운데도 다른 사람에게 없기 때문에 자랑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자신의 인생에 떠오르고 나서는 설마 그 분 앞에서 무엇인가를 자랑한다는 것이 너무나 창피하기 그지없는 낮 간지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약한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으면 나의 약한 것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왜?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면 어떻게 약한 사람이 저렇게 강해졌어하고 물을 것 아닙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어 그럴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때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예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말하면 그 사람들은 나를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하나님을 주목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주목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자기가 온전해지는 것이 약한데서 온전해지고 자기가 예수 죽인 것을 항상 몸에 짊어지고 살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신입니다. 사랑의 정신입니다.
이 자랑거리가 사도 바울에게 바뀌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이렇게 자랑거리가 확 바뀌게 되었습니까? 사랑거리가 바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랑거리는 곧 사랑거리입니다. 사랑거리는 자랑거리이고 자랑거리는 사랑거리입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마음에 없는 것을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자기가 다 사랑하는 것들을 자랑하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자랑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것, 다시 말해서 사랑은 자기를 뽐내거나 자기를 과시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랑의 참된 특성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참된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사랑거리는 자랑거리인데 사도 바울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사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고 지옥의 불길에 떨어져야 마땅한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자기가 행했던 모든 선한 행위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비롯된 선한 것이 아니었고 그 열심도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비롯된 영적인 선을 결핍한 열심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결함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아는 하나님의 참사랑 없이 율법에 대해서 열심을 품었을 때에 그 열심, 그 사랑은 사람을 죽이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핍박하고 사람들을 박해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고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참 그에게 깨달아지지 못했을 때에 사랑을 위한 그의 열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대들고 그리스도에게 대적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잘못된 삶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이렇게 자기가 아무런 자랑거리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은 단지 자랑을 하지 말자 라고 하는 율법적인 결심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단언한 것, 사랑은 자기를 뽐내거나 자기를 사실 이상으로 부풀려서 이야기하므로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낫다고 하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자기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싶어하는 것과는 결별한 것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있어서 그는 자신이 사랑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의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내게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내가 그를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한 세상이 나를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도 분명하게 사도 바울이 그토록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했을 때에 결국 그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고는 내 인생 중에 어떤 선하게 보이는 부분도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대해서 못 박히고 세상이 내게 대해서 못 박혔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자랑하고 뽐내고 자신에 대해서 과시하던 이런 삶, 그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참된 의미를 아는 그 순간에 죽어버렸다, 십자가에 못 박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도는 하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를 말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한번 세상에 나가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소개할 때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어떻게 소개하고 어떻게 과시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자랑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예화) 금반지를 사서 끼고 머리가 아프다고 손가락을 보이면서 자랑하는 것.
금이빨을 하면 자꾸 입을 벌리고 말을 하고 싶어지는 것.
이 세상 사람들은 정말 자랑하기 위해서 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래도 이 세상에 정을 붙이고 살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자기를 부러워해 주는 것, 그것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힘이 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자기가 돈이 있는 것을 부러워하는 사람 때문에 인생의 살 보람을 느낍니다. 얼굴이 잘 생긴 사람들은 자기의 미모를 부러워하는 사람, 가끔 사람들이 괜한 말로 해주는 것인데 한마디 듣고 나면 거울 앞에 계속 서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제일 예쁘니?” 물어보는 그런 재미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렇게 기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그가 누리고 있는 지위나 직분들을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갑자기 인생의 살 힘이 나고 용기가 솟아납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옛날에 살던 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로 돌아오는 그 순간,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그런 것들을 원동력으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세상 앞에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그런 힘, 썩어 없어질 그런 보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훨씬 더 귀한 가치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서 아첨하고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하는 좋은 말은 모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받는 사랑은 하나님 한 분 앞에서 받는 칭찬은 아무리 많이 받고 그 사랑을 아무리 많이 받아도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올바로 깨닫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교만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결국은 아들 예수의 몸을 가르고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이 아들 예수의 육체를 갈라서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이유는 결국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받으면서도 항상 그 사랑 속에 무엇인가 있느냐 하면 자신의 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하는 그러한 깨달음과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죄악에서 나를 건져주셔서 나에게 자유를 주셨다고 하는 이 깨달음, 둘 사이에 언제나 긴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긴장은 비례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올바로 알면 알수록 자기가 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전에 열등감을 가졌던 요인들이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남이 가진 재물은 없지만 남이 가지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 나 공부를 못해서 공부한 사람 줄로 서라 하면 맨 뒤에 가서 설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순서로는 내가 일 번이다, 너는 공부 잘하고 돈 많고 집안이 좋아서 세상이 너를 귀하게 여겨서 써주지만 나는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 주셔서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신다, 그리고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무엇을 깊이 깨닫게 되느냐하면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죄인 중에 내가 괴수러라, 이 고백이 계속 함께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사랑을 받으면 교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위가 낮고 그래도 높은 사람의 비호를 받으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아이들이 있어도 막내를 너무 사랑해주면 그 부모들의 사랑을 편애할 때에 자기 형제들에 대해 교만한 마음이 생깁니다. 세상 사랑은 이렇게 부작용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왜곡되게 이해하지 않고 그 사랑의 본질이 어떤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깊이 사랑해 주시는 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기는 그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속으로 들어가면서 동시에 긴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나 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이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 그리고 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닫고 그 사랑의 깊이 속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랑거리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랑거리가 있다면 오직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크고 찬란하게 나타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확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사랑거리이기 때문에 결국에 그 사랑거리만 우리 인생에 있어서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까지도 무엇인가 특별한 지체들을 향해서 과시하고 싶은 것들을 갖고 있습니까? 그래서 거기에서 무엇인가 상대적인 우위를 누려보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은 분명히 공허한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정말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그 사랑이 내 인생에 있어서 절박한 필요충분 조건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다른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깨닫습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보다 더 큰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있거나 작은 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새로 산 큰집을 자랑하고 싶으십니까? 그것보다도 더 훌륭하게 자랑할 것은 여러분들에게 깨닫게 하시고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에 흐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자랑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에 입에 거품을 물면 물수록 여러분들의 가슴에는 왜 나 같은 죄인에게 내가 지금 증거하고 있는 이 놀라운 사랑을 주셨을까 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입에는 거품을 물로 달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해도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왜 나를 사랑하셨을까? 왜 하필이면 나 같은 사람을 주님이 사랑하셨을까? 수많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구원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고 떠내려가고 수많은 사람은 아직까지도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어두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신앙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왜 하나님은 그 어두운 길에 찾아오셔서 단 한 사람, 내 손을 잡고 빛으로 나를 이끌어 내셨을까? 이런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파고 들어오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자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겸손하게 되고 겸비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보다 큰집에 살든, 그 사람이 나보다 얼굴이 잘 생겼든, 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이 배웠든, 그 사람이 나보다 더 좋은 직장에서 부를 누리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보다도 더한 자랑거리가 나에게는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내게 있는 자랑거리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내게 나타내 보여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비교할 수 없는 투기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내가 아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감격하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사랑의 품에 안겨서 한번 녹아 보아야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 옆구리는 창에 찔리셨습니다. 그 품에 안기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옆구리에 흐르던 피를 묻히지 않을 수 없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길 때 어떻게 그 피가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옆구리에 그 피가 묻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끌어안아 주셨을 때에 필연적으로 그에 등허리에도 그리스도의 피가 맺혀 쓸것입니다. 볼을 비비면 거기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피가 있습니다. 한번 그 사랑의 품에 깊이 안겨서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깨달은 사람의 몸에 예수의 피가 묻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피를 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주님께 사랑 받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랑거리이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놀랍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사랑거기도 없고 사랑거리가 없으니까 행복하고 너무나 기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뽐내는 그 인생이 얼마나 박진감이 넘치고 기쁜 인생입니까? 여러분들이 간증을 할 때도 언제나 유의해야 합니다. 간증을 다하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어머, 어쩜, 저 사람 정말 멋있어.” 그러면 실패한 것입니다. 사람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그를 통해서 그의 가슴속에서 영광을 받으시고 그의 마음과 삶 속에서 자랑거리가 된 예수 그리스도가 자랑되고 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사모함들이 생겨나는 간증이 정말 아름다운 간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길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거리가 바뀌고 나니까 자랑거리도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그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것들을 자랑하며 살아갑니다. 심지어는 지체들끼리도 그런 것들을 뽐내고 그런 것들 때문에 마음 상하고 또 그런 것들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고 하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지식이 그들 안에 가득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미성숙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의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우리에게 아직까지도 자랑거리가 남아있다면 그것은 정말 시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노새가 자기의 힘을 자랑하지만 젊은 시절이 지나고 나면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소가 힘을 자랑해서 밭을 갈지만 나이가 먹으면 푸줏간으로 그 몸이 해체되어서 운반되듯이 그렇게 우리들이 자랑하는 것들도 모두 순간에 지나가는 것들이요, 혹은 순간조차도 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사랑거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은 아무리 자랑해도 그 자랑이 마르지 아니하고 아무리 많이 자랑해도 하나님의 그 사랑을 지나치게 과장해서 말했다고는 비난받을 수 없을 만치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렇게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해도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이런 논리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내가 이제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사랑하고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고 사람들에게 구제를 베풀고 참을 수 없는 일들을 참아 내면서 사람들에게 관용합니다. 그의 삶은 변화되었고 그는 분명히 놀라운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나로서는 이런 삶을 살 수 없는데 내가 이렇게 오래 참고 이렇게 온유하고 내가 이렇게 투기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겸손하게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살 수 있게 한 그 사랑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 사랑을 움직이고 있는 이 원동력도 내가 아니라 사실을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 받은 것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가 사랑이라고 하는 선은 내가 사랑이라고 하는 도덕적인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내게 누적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결국은 이런 사랑을 하게 하는 참된 힘이 예수의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선행을 하고 구제를 하고 사랑을 하면서 계속해서 자기 의가 쌓이는 것은 결국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선행의 기초가 참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기초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의가 쌓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자기 의가 쌓일 수 있겠습니까?
자! 바울의 신앙 경험을 통해서 보면 이렇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선교 사역에 고달팠던 생애를 말합니다. 강한 매를 맞고 돌로 침을 당하소 사람들이 자기를 성 밖에 버리고 그리고 전도하기 위해서 여행할 때에 도둑들을 만나고 동족들에게 위협을 당하고 모함을 당하고 커다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고난, 그런 어려움을 다 말합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로 오로지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미쳐서 그래서 그가 온전히 다 자기를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 위해서 지불했던 희생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안락한 삶이 보장된 종교 지도자의 미래를 버려야 했습니다. 동족으로부터 끊어져야 했고 가족들의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혈육들과도 인연이 끊어졌습니다. 동족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동족에게 대적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사랑에 감동을 받고 나서 그에게 허락된 삶은 꽃피고 새가 지저귀는 동산을 거니는 것과 같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피나는 가시밭길입니다.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 삶을 그가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받을 때에 그들은 모두 무엇을 생각했는고 하니 예수께서 자신들을 행해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한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이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깨닫고 싶어했던 지식 중의 하나가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하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고난의 미학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왜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점점 이렇게 안일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고 자기 의가 쌓이고 나만큼 그리스도에게 헌신된 사람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왜 이렇게 자기 의가 쌓여 가는 대신에 이런 삶을 살면 살수록 죄인중의 괴수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고 그러한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던 피나는 고난이 그에게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에 그가 자기의 고난거리에 대해서 자랑했더라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감동을 주었겠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영웅적인 그의 삶을 보면서 틀림없이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보답하는 영웅적인 고난의 삶을 보면서 우리는 틀림없이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의 고난, 모든 아픔과 희생이 자기 의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고난을 받으면 고난받을수록 자기는 만물의 찌끼와 같은 사람이요, 고난받으면 받을수록 그리스도만이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자기가 고난을 당해도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서 당하신 그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선행을 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선과 사랑이 자기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생각해 볼 때 자기의 선, 자기의 공로,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거룩한 공로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계산한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거부 앞에서 1원 짜리를 세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지난 모든 날들을 주님을 위해서 고난받은 삶조차도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얼음으로 된 탑이 있다고 합시다. 하나 선행을 했습니다. 그것이 기억에 남아서 쌓아 놓고 또 하나 선행을 합니다. 또 올립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습니다. 또 하나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또 올려놓습니다. 이렇게 계속 쌓여져야지 이것이 얼음 탑이 될 텐데 이것이 놓여있는 마음의 웅덩이가 무엇이냐 하면 펄펄 끓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갖다 놔 봐야 녹아 없어지고 기억에서 사라지고 놔 봐야 잊혀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의 의가 얼마나 하찮은가 하는 것을 자기가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자기가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왔던 것처럼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바로 자기의 사랑거리 조차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사랑의 원동력이 사실은 자기에게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를 감동 시켰으니 사랑 때문에 영광을 받으실 분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 아버지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자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아는 자마다 자기를 과시하거나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만약에 누군가가 자신을 과시하고 자신의 소유나 자신의 지위나 자신의 재능이나 자신의 능력을 자랑해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자기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이려할 때 여러분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면서 부러워하고 있다면 유유상종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사람들과 똑같이 오히려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육신의 자랑거리에 매달려서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사람들에게 과시하고 사실보다 부풀려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얼마나 허기진 영혼인지를 지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의 공허한 몸짓을 보면서 우리는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가 저런 자랑거리가 바뀌고 사랑거리도 바뀌게 될 터인데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주님의 참사랑에 감화를 받아서 그 사랑 때문에 힘을 얻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로지 자기를 사랑하신 예수님만 자랑하고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만 자랑합니다. 무엇을 자랑해서 결국은 사람들이 자기로 인하여 입벌리게 만들어주는 대신에 자기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감탄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왜냐하면 사랑거리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자! 여러분들의 자랑거리는 이제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의 사랑거리는 이제 무엇입니까?
10. 사랑은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고전13:4)
이번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를 여러분들에게 강해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참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알면 자기를 자랑할 수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나면 자랑거리가 바뀌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거리는 곧 자랑거리이고, 자랑거리는 곧 사랑거리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인생의 초점이 바뀌어 진 사람들은 옛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옛 것과 함께 죽고 새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사도는 우리에게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하면 제 가슴이 이렇게 오그라들 듯이 이 말씀이 다가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 말을 전해주고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수 만나기 전의 이름은 ‘큰 자’는 뜻을 가지고 있는 사울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아들을 낳고 ‘김대복’이라고 지은 것과 비슷하다라는 것입니다. ‘큰 大(대)’ ‘복 福(복)’ 자, 아니면 ‘큰 大(대)’ 자에다 ‘용 龍(용)’자 ‘大龍(대룡)이’ 그런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누가 지어주었는지 모르지만, 어떠면 자기가 칭했는지도 모르지만 ‘바울-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가진 삶이 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사도 바울이 교만하지 아니하며 라고 이야기 할 때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가슴 저미는 체험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보았고, 누구에게 들었고, 누구의 간증에서 채집해서 사랑이라는 것은 교만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 자신의 깊고 진실한 체험을 통해서 ‘교만하지 아니하며’ 라는 것이 나온 것입니다. 우린 여기에서 우선 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사람이 사도 바울이니까 이 사도 바울의 생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하나의 렌즈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하고 Pride로 가득 차고 자만심과 오만, 확신, 그리고, 자기 의에 대한 신념 이런 것들로 똘똘 뭉쳐져서 완전히 덩어리가 되었던 사도 바울이 이렇게 낮아지게 된 것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생애 속에서 이런 모습을 봅니다.
율법의 의로는 스스로 흠이 없는 자라고 자부했습니다. 가장 엄격한 유대인의 지파 가운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인 베냐민의 족속으로 태어났습니다.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그는 정치적으로는 민감한 청년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죽이는데 그의 옷을 찢겼고, 그리고, 거기서 가편 투표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차서 언제나 종교 지도자를 꿈꾸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생을 살고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될 것을 가르칠 사명이 있다고 믿었던 사람, 잘못 하나님을 믿거나 그러한 도를 전파한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서 그들에게 파송되어 그들을 모두 잡아 없애야만 자기가 마땅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 오만과 방만함으로 가득 찼던 이 사람이 성도중의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 마지막에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자기를 칭하면서 하나님 앞에 정말 한없이 낮아진 자기의 모든 좋은 것, 자기의 모든 자기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자기의 고백을 하는 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모습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이 하늘 높은 줄 모르는 교만과 한없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지고 엎드려지는 이 겸손한 인격의 변화 사이에 무엇이 일어나신 줄 아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나니까, 이 사람이 교만과 결별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가치, 자신의 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고상함,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의로운 행동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리고 오직 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체험하게 되자 교만과 결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니 겸손하다라는 말로는 그의 낮아짐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겸손한 것이 아니라 겸비해졌던 것입니다. 한없이 낮아지고 낮아져서 마지막에는 스스로를 비참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에 눈길 앞에 서 있는 그 존재조차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낮아지는 그런 사람으로 놀랍게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바울이 이러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백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거기에는 교만이 설 땅이 없습니다. 사랑이 현재의 그 사람에게 역사하고 있다면 그는 결코 높아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런 겸비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에 목사님이 계시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목사님이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제가 속속들이 보지 않았습니다만, 교인도 한 400명 정도 모이고 하니까 외관상으로 볼 때 그렇게 목회를 못하시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나름대로 교회가 복음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은혜가 되니까 교인들이 모일 것 아닙니까? 목사님이 거기서 개척을 해서 연세가 50이 넘으셨는데, 400여명 모이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이 자기는 고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는 Complex에 깊이 걸려있는 것입니다. 제대로 공부를 못했다는 콤플렉스에 깊이 걸려 있는데, 그 complex가 있으면 자기가 혼자 알아서 속으로 끙끙 앓으면 그것이 교회적으로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을 하거나 회의를 하다가 자기가 코너에 몰리면 ‘그래, 뭐 내가 다 못 배웠으니까...?’ 교인들이 배웠는지 못 배웠는지 은혜 받으면 그만이지 여러분이 무슨 학교 나왔는지 압니까?
그런데, 목사님이 하도 그러시니까 교인들이 다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 못 배워서 저렇구나’ 그렇게 이제 이해가 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의 complex에 불을 지르는 장로님이 한 분 계셨답니다. 그 분은 공부를 많이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는 공부를 많이 하셔도 비교적 많이 하신 분이지 워낙 많이 하신 분 같지는 않았습니다. 워낙 많이 하면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다.
제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데, 교사 수련회를 한다고 수 십 명의 교사들을 모아 놓고 (물론 목사님은 그 때 안 계셨음) 하는 얘기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 말은 정답이지요) 저를 보십시오 (뭔가 좀 이상한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까?) 제가 목사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납니다 (이것은 완전히 잘못 간 거죠) 목사님 보다 제가 젊지요(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요) 그리고, 목사님보다 공부도 많이 했지요 목사님 보다 지위가 높지요(그것은 어디서 나온 논리예요) 모든 면에서 뛰어납니다. 그렇지만 저는 교회에 오면 낮아지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이 겸손입니까? 그것은 정신병입니다. 겸손은 자기가 월등히 높은데 무릎을 꿇어 주는 것-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내가 모든 면에서 노보다 낮지. 얼굴 색깔도 너 보다 하얗고, 키도 너 보다 크고, 잘생기고, 대학도 너 보다 더 좋은 대학 나오고, 몸매도 내가 날씬하고 다 좋지. 그러나, 내가 무릎을 꿇고 너의 발을 씻긴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그 사람보다 뛰어난데 그 위에 겸손도 한 장 더 얹어 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한 모습을 행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자기의 겸손을 인정받아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높이 평가를 받고자 하는 교만이 가져다주는 겸손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결국은 외식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겸손, 오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교만하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가 많이 될 때 ‘야, 참 우습다. 내가 너희들 보다 낫지. 그러나, 내 겸손이 입 다문다’ 이것은 겸손한 것이 아닙니다.
겸손의 출발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우열을 비교하는 것에서 오는 그런 겸손이 아닙니다. 겸손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는 겸손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얘기는 사랑 속에는 인간을 교만하지 못하게 하는 놀라운 특성과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붙잡히기만 하면, 온전한 사랑에 붙잡히기만 하면 거기에는 인간을 높아질 수 없게 하는 교만할 수 없게 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교만하지 말아야 된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자체 속에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교만할 수 없게 하는 그 어떤 힘이 그 사랑의 특성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온전한 사랑은 교만이 설 수 있는 모든 자리를 파해버리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이 사도는 무엇을 보고 이렇게 오금이 저리는 사랑을 만났는가?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교만하던 사람이, 교만 그 자체이던 그 사람이 이렇게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라고 아예 사랑하는 행위나 사랑하는 삶, 사랑하는 마음속에 교만이 내재할 수 있는 모든 자리를 없애 버리는 그러한 단언을 할 수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늘 말씀드립니다 만은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는 렌즈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이 완전히 무너지고 함몰된 그러한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된 곳이 어디였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러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사도 바울의 사랑을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3장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사도 바울과 동일하게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참 사랑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경험한 사람들만이 13장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고 붙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바 되셨으니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마지막에 자기를 복종시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예수님에 의해서 표현되는 사랑- 그것은 철저한 낮아짐을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시고 싶어했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표현하는 그 사랑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우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거룩하고 영광 가운데 휩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나지를 아니 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과 주님의 그 크고 놀라운 우리를 향한 불변하시는 사랑은 하나하나 나타날 때마다 주님께는 커다란 인내를 요구하는 겸손을 통해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개를 이만큼 숙이실 때 주님의 사랑이 (고개에 비유하자면) 고개 위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더 숙이면 더 많이 더 숙이면 더 많이 ...마지막에 못 박혀 죽으시고 땅 위에 눕혀 지시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찬란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 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비뚤어진 성격과 빗나간 편견을 가지고 펄펄 뛰던 것도 결국 알고 보면 사랑이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 받지 못하며 자란 사람은 매우 위험합니다. 사랑 받지 못한 사람은 매우 위험하고 단 하나 그의 인생이 위험을 극복하고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사람의 사랑 보다도 훨씬 뛰어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서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을 조금도 불행하게 할 수 없으리만치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새로워지는 것만이 그 사람의 인생이 행복해지는 비결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사랑이 폭포수와 같이 자신에게 밀려오고 그 사랑이 자신을 에워싸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그 사랑에 감격 때문에 평생 피묻은 복음을 위해서 피나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큰사랑-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철저히 낮아지시는 겸비함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종처럼 우리를 위해서 기어다니시며 우리를 섬긴 비참한 생애를 말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경험한다라고 하는 것은 결국 어떤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치르셨던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피 흘리시고, 종 되시고, 섬기시고, 그리고 자기의 몸을 버리시고 죽기까지 낮아지시고, 우리는 이러한 비참한 용어를 사용하지 아니하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한 사랑을 표현할 수 없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향하신 사랑을 표현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단 한 줄도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느낀다고 하면서도 사람들이 교만한 이유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이렇게 우리를 위해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속에서 발견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그 사랑에 깊이 붙잡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신 것과 이 비참한 세상에 내려오신 것과 종으로 사시고 마지막에는 당신이 사랑한 사람들에 의해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며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고난을 당하신 이 사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이 단지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많이 느껴도 도무지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을 본받는 겸비함이 그 사랑 속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뛰어난 영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매우 독특한 교만을 봅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겸손하다는 사실 때문에 교만한 사람들을 봅니다. 자기가 어떻게 겸손했는지를 기억하기 때문에 그것이 그를 교만하게 하는 사람을 봅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결한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을 봅니다. 심지어는 자기 속에 주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마음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교만해지는 사람들을 봅니다. 정말 웃깁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알고, 그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교만해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두 잘못된 영성입니다.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참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미치고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참 은혜에 우리들이 잠긴다면 우리는 그렇게 바보 같은 속임수에 속아넘어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전에 자기가 얼마나 겸비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은 적어도 그의 마음속에는 겸비해졌던 자신은 살아있지만 그를 그렇게 겸비하게 살 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겸비하신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사랑은 빠져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 수준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우리는 좀더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교묘한 덫에 걸리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영적인 삶을 가장하고 뛰어난 도덕적인 삶을 가장하고 우리들에게 파고 들어오는 그 헛된 교만과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파고 들어오는 영적인 생활의 그 허함을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이렇게 말하면 너무 어렵다. 뭐 저렇게 따지는 것이 많을까? 이렇게 말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얼버무리기 좋아하는 사람치고 하나님 앞에 투철한 영성을 유지한 사람이 없습니다.
청교도의 시대를 보십시오. 그들은 많은 설교사들이 그리기를 따지기를 좋아하고 꼬장꼬장한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비판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따지기를 좋아하고 꼬장꼬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그들은 자신의 지식을 다른 사람보다 높이 평가받게 하기 위해서 꼬장꼬장하거나 혹은 많이 따지기 좋아하는 논쟁적인 정신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모든 관심이 하나님을 정말 높이고,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리고, 참된 영적인 삶을 추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경험했습니다. 얼버무리는 일들이 얼마나 우리에게 수많은 외식을 만들어내고 그 외식들이 우리의 정상적인 영적인 삶을 얼마나 쉽게 허물어 버리는지를 파악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논리나 자신들의 유익이나 혹은 자신들의 이름이나 자신들 속에 있는 논쟁적인 정신을 복 돋우기 위해 따지고 꼬장꼬장 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은 진실로 바른 영적인 삶 보다 더 풍요한 삶을 추구했습니다. 보다 더 뛰어난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를 향한 경배를 올려드릴 수 있는 삶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물었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논쟁하고, 꼬장꼬장하고, 그리고, 얼버무리기를 싫어하는 태도들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교리들을 파헤쳤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했을 때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좇아서 이 세상에 자기 몸을 스스로 낮추어 종의 형체로 이 세상에 오셨던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했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모든 나타나심은 한결같이 겸비하고 낮아지시고 비천하신 그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읽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준에 맞게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세상에 내려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맛보는 모든 수고와 고통과 고난을 맛보게 하시고 죄는 없으시지만 인간의 모든 슬픔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청교도는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죄 없는 한 아들이 있습니다만, 슬픔이 없는 하나님의 아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런 슬픔과 모든 고통을 맛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홀로 많으셔야 할 분이 그렇게 고통을 당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박해를 받으시고, 그리고, 자기 땅에서 자기의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셔야 했던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 얼마나 겸비해지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바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 사랑 앞에서 자기가 허물어져 가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 자기를 살렸는지를 압니다. 어떤 사랑이 자기를 죄 가운데에서 구했는지를 이해합니다. 어떤 사랑이 자기를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자리에서 자기를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로 자신의 처지를 바꾸어 놓았는지를 너무나 잘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는 천국의 고귀한 향취가 뭍어 있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는 이 세상의 티끌과 비천하게 하는 이 세상의 피와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티끌과 같은 것들이 묻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언제 세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다운 대우를 받으셨습니까? 좋은 옷도 좋은 잠자리 화려한 거처도 그 분을 위해서는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3류 인생 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으시고 거처하시는 모든 환경이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종처럼 이 세상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살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천국의 황금 가루에 뭍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거친 먼지에 묻어 있고 거친 돌가루와 그리고, 인간의 땀과 눈물과 피가 배인 그러한 요소들에게 당신의 사랑이 묻어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그렇게 낮아지셨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았다 하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았다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그 사랑을 따라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그렇게 종처럼 낮아지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기 위해서 보냄을 받으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우리에게 당신의 그 사랑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처철하게 낮아지시고 겸비해지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랑을 통해서 정말 낮은 자리 저주를 받아 마땅한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을 입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은총의 특권을 얻은 우리들이 하나님의 참 사랑을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발견했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더 낮아져야 되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렇게 낮아지셔야 할만한 이유가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고, 지존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그렇게 낮추셔야 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비추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더 낮아져야 될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자기를 버려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게 하셨습니다. 그 분이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장엄한 필치로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사도 바울이 변화 받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교만했던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참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교만과 아집으로 뭉쳐져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패역한 길을 걸으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지 않고 그들의 눈에는 예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렇게 낮아지셔서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으면 우리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돌같은 우리의 마음을 그의 뜨거운 피로 녹이시고 무엇에도 쉽게 풀어지지 않던 우리의 마음속에 맺힌 것들을 그 십자가의 보혈의 뜨거운 피로 우리를 풀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이 녹고 뭉쳐진 모든 고집과 아집이 풀어 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폭풍과 같은 진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한없는 두려움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겁먹고 하나님 앞에 항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그 분 앞에 승복하고, 그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그 사랑이 우리를 감화시켰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를 보고 고난으로 가득 찬 그의 땀의 생애, 피의 생애, 눈물의 생애를 보면서 그 분이 당하신 그 모든 비참한 고난이 더 비참한 가운데 있던 우리를 살리고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 곧 사랑의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들 속에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는 것에 대한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참 사랑에 대한 깊은 아픔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황홀한 잠미꼬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피 냄새를 머금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웃게 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울립니다. 우리를 기쁘게 하기 전에 그 사랑이 먼저 우리를 한없이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 사랑을 입은 사람으로 긍지를 느끼게 하기 전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런 식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서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몸을 찢게금 만드시지 않을 수 없게 원인을 제공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마음 아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고통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가책과 함께 다가오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우리에게에게 한없는 아픔, 그래서, 우리를 찌르고 우리를 넘어뜨리고 우리를 파하게 만드는 것과 함께 다라옵니다. 우리를 아프게하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면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처절하게 자기를 낮추셔야 했던 그 이유가 우리 때문이였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깊이 고통하고 아파하지만 결국 불변하는 능력을 가진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이 진노와 저주에 자리에 있던 우리를 구원하여 진노 받을 수 밖에 없던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받는 은총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은 것에 대해서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은 사람들은 사랑을 위해서 아픔을 지불하거나, 낮아지거나, 사랑을 위해서 짓밟히는 것들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다가온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런 종류의 사랑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의 사랑이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도 그런 사랑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비극은 이와 같이 자기를 철저히 복종시키고 낮추고 그래서 피묻고 진흙에 묻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연애 감정으로 반응하는 데에서 모든 문제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 보여주시는 이 사랑의 한 진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사랑은 비천한 자리에 처하기를 좋아한다고 표현해야 옳은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교만하지 않은 생애였다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종의 형체를 가지고 우리에게 오셔서 종처럼 살고 종처럼 죽어 가신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경험하고 십자가에 사랑을 깊이 체험하는 거기에는 성도들이 자기를 낮추는 겸비함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섬기고 사랑하는 모든 사랑의 원천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입니다.
오늘 보십시오.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말합니다.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자기를 주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주목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에는 그러한 놀라운 힘이 있는 것입니다.
비행기가 추락하거나 자동차가 충돌하면 아버지가 데리고 있던 아이들은 죽는 확률이 높고, 엄마 안고 있는 아이들은 살아남을 확률이 많습니다. 통계로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들은 “꽝” 하고 부딪히면 자기 살 궁리를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엄마는 끌어 앉고 자기가 불 가운데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 아이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로마 문명 거기에서도 보듯이 화산이 폭발할 때 그 어머니가 아이를 끌어 앉고 죽은 화석들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이게 어머니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그 대상을 주목하게 하는 그러한 힘이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러합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셨을 때 주님 자신이 낮아지는 고통과 아픔이 무엇인지에 주목하셨다면 아마 주님도 그렇게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그 영광을 버리고 신성을 인성 속에 감추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 주님의 시선은 자기가 이 세상에 내려가서 당하게 될 고통과 고난이 아니라 자기의 이 낮아지는 이 사랑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는 이 백성들을 주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그런 희생과 고난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사도행전 7장에서 장엄한 설교를 하고 유대인에게 돌로 맞아 죽을 때 그렇게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천사와 같이 빛난 얼굴을 하고 하늘 보좌를 우러러 볼 수 있었던 것은 분명히 사랑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입증하는 성경구절 하나가 나오는데 그는 마지막 죽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남기셨던 유언을 되풀이하였습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자니라’ 되어 있습니다. 그는 돌팔매에 맞으면서 터져 피 흐르는 그런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기를 향해 돌 던지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토록 사랑하는 동족들의 영혼의 운명에 대해서 염려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자기가 돌에 맞고 고통을 받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파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상처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하나 만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속에 있는 상처를 가지고 오랫동안 신음하면서 신앙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영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해 답보상태에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봅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상처가 워낙 많기 때문에 이렇게 신앙 생활에 지장을 많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다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비유를 하면은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부산에 내려가면 오륙도라는 섬이 보입니다. 한 번은 그쪽 동네로 집회를 갔다가 누가 태어져서 섬에 갔는데, 그 뱃사공의 설명이 재미있습니다. 사라호 태풍 기억하시지요. 1960년대에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피해를 냈습니다.
그 풍랑이 일 때 그 위를 넘어갔답니다. 물이. 부산 안 갔다오신 분은 실감이 안 나겠지요. 하여튼 그게 엄청 높습니다. 그게 파도에 잠겼답니다. 집체만한 파도라고 그러는데 집체만한 파도는 파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늘 있는 것이고, 여기는 집체가 아니라 태산과 같은 파도가 치는 것입니다. 파도가 어쩌다가 쳐서 뚝방을 넘었다 이 정도면 뭐 좀 차이가 있겠지요. 판자 집은 잘 무너질 것이고 콘크리트집은 잘 안 무너질 것 아닙니까? 그러나, 파도가 사라호 태풍과 같이 엄청난 폭풍이 파도를 몰고 와서 태산과 같은 파도가 그냥 막 휙 넘어 왔을 때에는 기와집이든 판자 집이든 그게 다 그것인 것입니다.
한 번 TV에서 폭풍이라고 방송을 해 주는데 생생하게 찍었습니다. 뚝방에 파도가 휙 몰아치니까 pride가 휙 날라 가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봉고고 뭐 막 날라 갑니다. 스타렉스도 날라 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 아닙니까? 자기 상처가 깊으면 얼마나 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밀려오는데.
자기 상처 붙들고 계속 들여다보는 것이 한동안 유행 했잖습니까? 요즈음은 물 건너갔습니다. 항상 들여다보는 것이 유행했잖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卒(졸)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 상처는 王(왕)으로 보는 것입니다. 卒(졸)이 아무리 부딪혀봐야 왕을 이길 수 있습니까? 왜 그런 식으로 생각하느냐 말입니다. 자기 상처 들여다보는 동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주목하면 더 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기 상처 계속 들여다보면 연민 밖에는 생기는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들여다보면은 큰 은혜가 넘칩니다. 왕년에 자기만큼 상처 안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 대하 소설 30권 짜리 쓰라고 하면 씁니다. 다 눈물 흘리게 쓸 수 있습니다. 나도 일생 story 쓰라고 하면 여러분 10권까지 필요 없고 2권에서 다 울릴 자신 있습니다. 누가 사느냐가 문제지만, 보십시오. 하나님의 큰 사랑이 우리에게 밀려오고 그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때 우리가 자연적으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돈 받은 아버지 가지고 태어난 것 자기가 만든 것 아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원래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닙니까? 자기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되거나, 아니면 자기가 열심히 해서 공부를 많이 했다든지, 밥을 많이 먹고 살이 쪘다든지 아니면 칼로 얼굴 깎아내서 예쁘게 되었다든지, 세수를 자주 해서 얼굴이 하얗게 되었다든지 옷을 자주 빨아 입어서 깨끗한 옷을 입었다든지 어떠하든 간에 자기가 노력해서 되었든지 자기의 노력과는 상관이 없이 되었든지 둘 중의 하나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지식도 그렇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이것을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삶을 살고 뛰어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저 사람에게는 왜 안 주시고 내게는 왜 주셨는지 우리는 궁금하고 모를 뿐입니다. 단지 아는 것 하나는 나는 내가 아는 하나님을 만났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아는 인식을 가지고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때 내 영혼은 어루만지시고 다른 사람은 내버려두셨는지 우리가 그것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무리하게 설명을 하려고 하고 그것을 설명하다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특성들을 계속해서 내세우게 될 때 우리는 自己義(자기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간증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어떻게 놀랍게 나타나셔서 어떻게 자기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고 사명을 주셨는가, 그래서, 자기가 주님을 위해 살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것을 말했지 왜 주님이 함께 가던 사람들은 내버려두고 자기에게만 다가오셨는지 결국 죽을 때까지 설명하지 못했고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것을 세 번이나 간증하지 않습니까? 좀 그럴 듯 하게 묘사하면 어떻습니까? ‘나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그날은 왠지 틀렸다’ 우리는 분명히 간증할 때 그런 식으로 말합니다. “왠지 마음이 틀렸다. 형언할 수는 없지만 왠지 마음이 이상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고, 뭔가 중요한 사건을 만날 것만 같았다. 내가 비록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해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가긴 가지만, 그러나, 왠지 그 영장을 손에 받아든 그 손이 평소에 다른 종이를 만지는 것과 같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계속 묘사를 하면서 ‘계속 가는 동안에 나는 점점 내 마음이 무엇을 향해서 준비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을 얘기하면 멋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일체 얘기 안 합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아무 말도 안 합니다. 거기 보면은 멍하니 걸어가다 “펑” 하고 예수 만나서 변화된 것- 그 얘기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 간증 들여다보아도 어떻게 하면 은혜 받는가? 그런 방법 안 나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것을 노린 것입니다. ‘봐라. 내가 흉악한 죄인이요. 죄인 중의 괴수였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사도 바울의 간증을 대하는 사람마다 사도 바울에게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비참한 죄인도 그런 패역한 인간도 찾아오시는 그 예수님에 대해서 소망이 생기게 만들어 주는 간증인 것입니다. 오늘날 폼 잡는 간증과 얼마나 틀린 것인가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겸비해 질 수밖에 없었던 교만할 어떤 여지도 주지 않았던 사도 바울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고백은 바로 그런 반영의 한 고백인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신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주목하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점점 나아지고 훌륭해져 가는 자신의 도덕적인 생활이나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분께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받을 때 우리들은 그분께로부터 받는 사랑과 그 분께 바치는 사랑이 얼마나 엄청난 격차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우리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날마다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이웃,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해서 그 큰사랑을 받은 사람으로 소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자신들이 하는 사랑의 행위, 자신들이 행하는 사랑의 표현, 자신들이 힘쓰는 이 사랑 하는 것-사랑하는 것 ,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과 얼마나 커다란 차이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고 질적으로 그 사랑이 다른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 교만이 설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사랑할수록 절망할 수 있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이 이웃을 사랑하고, 지체들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려고 애를 쓸 때마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 사람들은 절망을 배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그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은 것과 그리고, 자신을 통해서 그러한 사랑을 나타내 보여야 하는데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과 자기를 통해 그 사랑이 흘러가는 것 사이에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너무나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사랑해본 사람이 아니면 사랑이 절망이라는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겸비해지게 되고 사랑을 하면 할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이 돋보이게 되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할 여지를 주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11.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습니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읽으면서 사랑은 어떻고, 어떻고, 어떻고 거론되는 가운데 가장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가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다른 것들은 뭔가 고상하고 높은 차원의 얘기 같은데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견디고, 또 바라고, 믿고 이런 것들은 모두 고상하고 높은 차원의 얘기 같은데 무례히 행치 아니며 라는 말은 왠지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할 많은 요소 가운데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하나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제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곧 알 수 있게 되려니와 사랑에 있어서 이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라는 이 말은, 다른 사랑의 모든 요소와 이것이 없으면 어떤 의미에서 모두 허공에 매달리는 것과 같은, 그럴 정도로 중요한 사랑의 한 요소요 나타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은 생각을 자주 합니다. 왜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라고 기록하였을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흔히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거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라고 하는 사랑의 요소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 무지로 말미암아서 혼돈을 느끼고, 고통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드리거니와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 그 진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라고 말합니다. 이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라는 말은 희랍어 원어로 볼 때는 ‘모양이 좋지 않다’ 그런 뜻에서 나온 거의 앞에 부정어가 붙은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례히 행치 않는다 라는 말은 완전한 번역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다 라는 말은 원래 뜻은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말에 부정어가 붙은 거예요. 그래서 ‘사랑은 어울리지 않지 않는다’ 라는 것이지요. 그 뜻이 신약 성경에서는 ‘아름답지 않다’라는 말로 쓰이고, 또 그것이 더 정확한 뜻으로는 ‘책망 받는다, 책망 받을 만 하다, 어울리지 않으니 책망을 받는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사랑은 책망 받을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며’ 그런 뜻입니다. 그것을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인생과 신앙 생활의 고민은, 가끔 왜 그런지 사랑한다라는 것 하나 가지면 그게 그토록 중요하니까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서로 모든 것이 통할 수 있어야 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본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려고 애쓰는데 이상하게 서로 사랑하려는 손바닥의 마주침이 ‘짝’하고 맞아야 되는데 이쪽의 내미는 사랑의 손도 사랑이고, 저쪽에서 내미는 사랑의 손도 사랑인데, 장님 손뼉 마주치는 것처럼 한번도 맞을 때가 없다는 것이지요. 사랑이 일단 사람에게 베풀어지고 그 사랑을 위해서 자기를 쏟은 다음에 사랑이 함께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올 때 그 사랑은 격려가 되고, 북돋아지면서 함께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계속 헛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 사랑을 했는데 이상하게 두 사람 다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데, 서로 사랑을 한다고 하는데 이상하게 사랑의 행동들이 그 사람들에게 자꾸 많은 고통을 안겨주고, 무엇인가 사랑을 해 보려는 노력이 동일한 지점에 가서 자꾸 고통스러운 일들로 나타나니까, 결국은 그 관계 자체를 힘겨워 하고 포기하거나, 아니면은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 사랑이 미움과 원망으로 바뀌게 되어서 사랑을 나누어야 될 관계에 상처가 생기는 불행한 일들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일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데 이상하게 박자가 안 맞는, 장단에 맞추어서 춤추는 것처럼 뭔가 어색하고, 자꾸 고통이 생기고, 교회에서 신앙생활 할 때나 친구들과의 관계, 혹은 모든 동료들간의 관계에 있어서 그런 것들을 경험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런 일들이 경험될 수 있어요.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사랑하나면 모두 통해야 하는데 어떤 때는 우리의 사랑이 진심이 받아드려질 여지가 없거나 혹은 배척받는 사랑들을 만나게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렇게 무례히 행하는 것들, 이 말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결국 이 말의 의미는 사랑을 하는데 그 사랑은 똑 같아요,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처음에 13장을 하면서 서론에 말씀 드렸지만 이 사랑의 모든 기원은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기초는 다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 진짜 사랑하는 사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랑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첫째 조건이 천성이 좋거나 사람이 원래 법 없이 살만한 사람의 성격, 그런 것을 가지고 이런 거듭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이런 사랑을 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경험해야 하고, 그 하나님이 어떤 아가페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는지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달음과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과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지게 될 때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크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가장 놀라운 증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과 그의 생애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원하면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주목하지 않는 사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참다운 사랑이 없으면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참다운 감동이 없으면서도 자신이 많은 사랑을 행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마치 햇볕 아래서는 책을 읽을 수 없는데 촛불 아래서는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우기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의 모든 기초는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랑의 기초는 다 같고, 사랑의 본질 자체는 다 같지만 그러나 그 사랑이 나타날 때는 사람마다 각자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아버지처럼 사랑해요. 어머니는 어머니처럼 자식에게 사랑을 해요. 남편은 남편처럼 아내에게 사랑을 해야되고, 아내는 아내의 자리에서 남편을 사랑해야 되요. 목회자는 목회자의 자리에서 성도들을 사랑하고, 성도들은 성도들의 자리에서 목회자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존경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젊은 목회자가 있습니다. 목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너무 황당한 일을 만났다고 나에게 와서 여러 가지 얘기하고 갔습니다. 청년들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한 청년이 와서 “목사님 저가 목사님께 꼭 말씀드릴 일이 있습니다.”, “얘기를 해 봐라”, “그런데 먼저 기억하셔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제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은 교인으로서 온 것이 아니라, 목사님의 형제로서 온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내가 온 것은 당신은 목회자이고, 내가 목양을 받는 양떼라는 그런 관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부름 받은 한 형제라는 위치에서 자기가 왔다’라는 것입니다. 나한테 그랬으면 뒤통수 한방 맞았을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은 수양이 많이 된 모양입니다. “형제, 그 얘기는 내가 해야지, 네가 하면 어떻게 하느냐” 꼭 뭐하고 같냐 하면 “아버지, 제가 이제 아버지께 말씀드리는 것은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의해서 창조된 똑같은 피조물로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아버지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오늘은 맞먹겠습니다. 하는 얘기하고 똑 같은 거예요. 이것이 바로 무례한 사랑입니다.
각자 자기에게 주신 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 그 위치에서 각자가 나타내고 표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랑이 그런 사랑입니다. 그렇죠? 내가 가지고 있는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형제를 사랑하고, 동역자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사랑은 하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모두다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사랑입니다. 하등의 문제는 없습니다. 사랑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나오는 여 성도들에게 내가 아내에게 하는 것처럼 사랑을 표하면 어떤 혼란이 생기겠는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목회자인 저에게 여러분들의 남편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대하는 사랑으로서 표현을 해 보십시오. 어떤 혼란이 생기겠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서 일어난 것처럼 안 믿는 남편의 머리를 끌고 올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여기에서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은 모두 같습니다. 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이나 여러분들이 저를 사랑하는 것이나 같은 것입니다. 그 기초는 모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한 분께로부터 말미암아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아 왔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물이 흘러 내려와서 그 물이 밭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논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혹은 마을 앞을 휘돌아 지나가기도 합니다. 어디로 지나가든지 그것은 다 저수지에서 나온 물입니다. 똑같은 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있는 그 사랑은 모두 한 가지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가 처해있는 위치에서 자기가 사랑하는 방식을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독특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부모님이 계시고, 또 남편이 있고, 또 자녀들이 있고, 그리고 손자들이 있습니다. 모든 관계에 표현해야 될 사랑, 모든 관계에 나타내 보여야할 사랑은 모두 독특한 표현들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 자체가 사랑이 흘러나오는 통로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은 적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저 사람이 나를 향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왠지 그 사랑이 내게 흘러 들어올 때 자연스럽지 않고, 그 사랑을 받는 것이 자신에게 고통이 되거나 어려움이 될 때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사람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무례히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그렇게 사랑한다는 것을 오늘 성경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놀라운 사실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발견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신 방법,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얼마나 이 세상을 사랑하는 지를 보여주신 그 방법은 너무나 이례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도록 만드셨습니다. 얼마나 파격적인 사랑의 표현 방법입니까?
그러나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평생 이 세상에 살면서 사랑 자체인 삶을 사셨지만 그러나 그는 한번도 자기가 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 베푸는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사랑하는 제자들이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수시로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상기 시켰고, 그 사랑의 기원, 그들을 위한 섬김의 모든 기초가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수시로 상기시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인간과 함께 친밀하게 지내시고,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인간들에게 깊이 찾아오셔서 그 인간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생애를 사셨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우시고, 고통받는 자와 함께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헐벗은 자들을 위해서 섬기는 생활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눈물 흘리실 이유가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채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사랑의 삶을 사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아주 놀라운 사랑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생애를 사셨던 것은 원동력이 없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삶을 사신 것은 분명히 원동력이 있는 그런 삶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의무감만으로서 병든 자를 고치고, 아파하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워 온 자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영혼들을 바라볼 때 가슴에 녹는 것 같은 사랑이 이 속에 절절히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 자체셨습니다. 그분의 혈관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고 있었고, 그분의 체액도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용해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그의 눈빛에서 묻어 났고, 그의 사랑은 그의 말을 통해서도 묻어 났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서 그렇게 쉬지 않고 천국의 교훈을 가르치시고 기독교의 참된 진리가 무엇이고,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이시며, 구원의 길로 보냄을 받으신 자기가 어떤 분인지를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 단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나타내기 위한 의무적인 강연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봅니다. 그분은 백성들을 가르치는 그 가르침도 주님의 사랑이 묻어 났습니다. 고통하는 자를 바라보는 그 눈빛에도 이런 사랑이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독특한 예수 그리스도의 입과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언어는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나 당시 제사장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사랑의 눈빛에 마주쳤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전에도 많은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 앞에서 그렇게 자신이 녹아지는 것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섬김은 이렇게 가슴 깊은 곳에서 넘쳐나는 이러한 사랑으로 가득 찼다는 사실을 우리는 먼저 염두해 두고, 다음 이야기들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정말 잘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는 마태복음 9장에서 목자 잃은 양 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보고 민망히 하셨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함이라’ 민망히 여긴다는 말이 ‘에스플랑 크니스 데’라는 희랍어인데 창자가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어디 있냐고 물을 때 어느 신체부위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만 대개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어보라고 말합니다. 이 심장 부위라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창자에 인간의 영혼의 자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창자가 흔들린다는 얘기는 영혼 밑바닥이 떨림을 경험을 정도로 감동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동의 장면이 아름답고 기쁜 감동의 장면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심히 고통스러운 장면이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민망하다라는 말은 팬티 바람으로 돌아다니는데 옆집 사람이 찾아왔다든지, 아니면 무식이 탄로 났다든지 그랬을 때에 민망하다고 하는 것이지 이것은 전혀 오늘날 어법하고는 맞지 않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번역하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파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함이요 고생함이라’ 이렇게 번역하면 가장 잘 된 번역입니다.
그 장면 바로 뒤에 사도들을 파송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파송하신 그 동기도 결국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영혼들을 향한 사랑, 사랑과 아픔은 항상 같이 가잖아요? 그러한 사랑이 예수님께 있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사도들을 세상 밖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더라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런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계셨다고 하신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인간들과 정말 떨어지지 않은 가까이 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죄인들과 함께 마시셨으며, 사랑하는 제자는 그 품에 기대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그 품에 기대어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생애를 사셨지만 그러나 언제나 예수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영혼들을 향한 빛깔 짙은 사랑을 뜨거운 농도로 충만하게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 때문에, 누군가가 예수께 무례히 행하거나 자기가 스스로 무례히 사랑을 받도록, 그렇게 관계 자체를 허물어 버리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한 인격 안에서 끌어 오르는 사랑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이 항상 같이 갔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셨으나 너무나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에게 오셨지만 그는 세상 사람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둘러 싸이셨지만 그러나 그는 죄인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그 죄인을 구원해 내기 위한 메시아로 그들 가운데 사셨습니다. 거만하고 오만하게 깨끗한 곳, 경건한 곳에서 더러운 죄인들을 오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 더러운 곳으로 예수님 스스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죄 가운데 거하시는 대신,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에게 순결한 하나님의 성품, 그리스도 예수의 참되고 순전한 인격을 보여주심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끌어 오르고 넘치는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가 자기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고 믿으면서도, 그러나 언제든지 그분이 그리스도이신 것과 자신들이 그 그리스도에 의해서 부름 받은 제자들, 혹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 그것을 잊지 않는 관계를 이어가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배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13장을 읽으면서도 바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를 알고 나서 가슴에 차 올랐던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닮은 빛깔 짙은 사랑과 고 농도의 아가페의 사랑을 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비유하자면 뚝방이 무너져 터지면서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다스릴 수 없는 물과 같은 사랑이 아니라, 수문이 열리고 물이 힘차게 쏟아져 나오면서 소리를 내면 달려가지만, 그러나 이미 만들어 놓은 수로와 길을 따라서 골고루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아니하고, 물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도달하며 온 땅과 산하의 대지를 두루두루 적시는 물과 같은 사랑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이 사도 바울에 의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발견되어 졌을 때 사도 바울은 정말 사랑에 미친것과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정직한 마음으로 로마서를 읽어보고, 고린도전서를 읽어보고, 또 다른 서신들을 읽어볼 때에 우리는 사도 바울을 불덩어리라고 표현하는 편이 가장 훌륭합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한다고 스스로 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넘쳐 오르고 그 불붙는 농도가 짙은 사랑이었습니다. 그저 그 몸에 무슨 칼을 대던지 창을 대면 사랑이 핏빛 사랑이 터지면서 분출할 것 같은 그러한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의 사랑은 절제된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정확하게 자기가 어디에 서야하고 어떻게 서서 어떻게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절제된 가운데 더 멀리 뻗어 나가고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와 용기와 격려를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엄밀하게 말해보면은 사랑을 표현한다라고 하는 방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이 흐르지 못하도록 관계 자체를 파괴하는지 모릅니다. 똑같은 물인데 뚝이 터져서 쏟아진 물은 수많은 집들을 삼켜버리고, 수많은 농토들을 수몰시켜 버립니다. 그러나 다스림을 받는 그 물은 얼마나 좋은 물입니까? 수로와 길을 따라 하천으로 개울로 흘러들고, 두루두루 땅을 적시며 개울가의 심은 나무들이 시절을 좇아 결실하게 만들어주는 놀랍고 은혜로운 역할들을 해 나갑니다. 우리가 사랑 속에서 이런 것들을 배워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무례히 행치 않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위치에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을 가졌을 때 그때에 우리가 어떻게 이런 사랑을 표현하고 살아야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사랑을 표현한다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기쁨과 유익을 주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금방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면 여러분들은 더 생생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가끔이기는 하지만 직장에서 아주 충성심이 뛰어난 사람들이 직장에 심각한 고통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는 이제 입사한지 얼마 안 되는 사원인데 회사를 향한 충성심이 뛰어나서 사장이 해야할 일을 하려고 한단 말이지요. 그리고 자기의 분량 밖의 일에 나서는데 그것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공명심이나 명예심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는 것이지요. 아가페의 사랑은 아니지만 말이지요. 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도 가만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일날 예배만 드리고 가는 사람들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고통 자체이기 때문에 교회에 큰 누를 끼친 게 아닙니다. 조용히 와서 예배 드리고 헌금하고 가는데 그 자체가 고통이지 않습니다. 대부분 교회의 상처는 충성스럽던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요즘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는 어느 감리교회의 이야기도 장로님이 어떻다 그럽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 목사님 입에서 그 장로님을 얼마나 칭찬하는 얘기를 저가 한 다리 건너서 집회간 교회에서 들었습니다. “너무나 교인들이 많이 오고 교회당이 협소하니까 다시 지어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듭니까?” 계산을 뽑으니까 430억이 나오더랍니다. 장로님이 “제가 지어서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 그것을 가까스로 말렸답니다. “그러면 되냐? 절반씩 하자” 그래서 230억을 내기로 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돈을 내려고 할 때는 무엇인가 가슴속에 있으니까 그러한 결심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람들이 나중에 반드시 교회의 고통을 준 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자리에서 정확하게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것이 교회의 고통이 되고 문제가 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많이 사랑합니다. 사랑만 하면 됩니까? 저는 단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지요? 사랑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요? 그러면 자녀들은 “목사님 그것을 말씀이라고 하세요? 사랑만 하면 모든 것이 끝나지요.” 진심으로 사랑만 하면 끝나요? 노예처럼 부려도 괜찮아요? 그거 하나 가지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 사랑 자체는 비난받을 것이 아닌데, 그런 사랑이 올바로 표현되는 방법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되면 그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부은바 됩니다. 이제는 주님만 위해서 살고 싶어요. 주님만 위해서 살고 싶고, 주님만 사랑하면서 살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같아요. 왜? 내가 받은 사랑이 너무 크니까.
오늘도 충청도 갔다가 올라오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특별한 사랑을 하나님께 받았으니까 주님을 특별히 사랑하며 살아야겠는데 내 인생이 이만큼 살아올 때 주님을 사랑하느라고 애를 쓴 적도 많이 있지만 그러나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어요. 내가 남들이 받지 못한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조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결국은 이렇게 살다가 특별한 사랑을 받고 일반적인 사랑으로 때우다가 결국은 죽는 거 아닙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여러분 모두 그러한 특별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랑은 한번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정말 올바로 주님을 향해서 표현해서 그 사랑 자체가 무례히 행치 않는 성화 된 사랑이 되기 위해서 많은 가르침과 자기 깨어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사랑은 빛을 발하게 되고, 그 사랑은 우리 속에 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정이 결국은 삶으로 나타나게 될 때에 하나님께 놀라운 영광을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끌어 넘치는 이런 놀라운 사랑이 정말 어디로 흘러가야 되겠습니까? 물론 사랑이 끌어 오르면 찬양 집회도 가야합니다. 그러나 정답은 이런 넘치는 사랑은 결국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녹아지는 것입니다.
무인도에 혼자 있으면 고린도전서 13장을 읽을 필요가 없어요. 전혀 없지는 않지만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벌거벗고 있든지 ,팬티 바람으로 있든지, 뒹굴든지, 욕을 해도 들을 사람이 없는데 무례히 행할 것이 무엇이 있겠어요. 자기밖에 없는데요. 그러나 여기에서 얘기하는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온유하며’ 이런 모든 것들은 대부분 이렇게 어깨를 맞부딪치면서 쉼 없이 부딪히며 만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요구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이 부어지는 것은 순간에 부어질 수 있을 지 모르지만 그 사랑이 정말 삶으로 녹아들어서, 그 삶 속에서 사랑이 무례하지 않게 표현이 되어서 결국은 사랑이 흘러 들어가는 삶마다 생기가 돋아나서 황폐했던 땅이 축복 받은 땅으로 변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게 되기까지 우리는 많은 가르침과 성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교회가 세상의 가정 같아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가정 같으면 안되고 하나님 나라 같아야 합니다. 교회를 가정 같게 만들면 교회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요. 왜냐하면 그런 가족적인 교인 몇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랑의 표현으로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문제는, 기본적으로 목회자가 교인에게 그런 식으로 터놓고 지내는 그것은 무례한 사랑을 허락한 것입니다. 제가 지금 얘기하는 것이 목회자는 폼을 잡아야 하고 가정은 무게를 잡아야 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실 거예요. 하나님이 그 교회에 목회자를 세워 주시고, 성도를 세워주신 우선적인 관계는 매일 아침 사우나하고, 족구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물론 자기들도 족구하기 위해서 만난 것은 아니지요. 새벽기도 하기 위해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선적인 중요한 흘러야할 관계는 무엇인고 하니 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목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이 트랙을 정해놓고 그 트랙을 달려가는 그런 식의 사랑이어야 하는데,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해서 이리저리 남의 트랙을 넘다들면서 이런 식으로 사랑하니까,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고 거룩한 삶을 사랑이 만들어 내지 못한단 말입니다.
거룩한 삶의 원동력은 결국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는데 왜 고난을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겠습니까? 거룩하게 사는 참다운 기쁨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맛보지 못하는 사람이 왜 쉬운 세속적인 길을 버리고, 거룩한 길을 걸어가겠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을 그 때에 우리는 그 사랑을 가지고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그 거룩한 삶을 살아가서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런 사람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이 얘기는 결국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라고 하는 사랑의 이런 표현은 하나님의 사랑 속에 나타난 놀라운 질서를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너무나 많이 사랑하시지만 그래서 그 사랑이 핏빛 사랑이지만 그러나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얕잡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해 친구라고 부르셔도 여러분들은 “어이 친구”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얕잡아 보이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뒷집 아저씨나 친구가 아닙니다. 지존하신 하나님이시고,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우리는 그 앞에 티끌과 같은 인생들입니다. 우리가 그 사랑을 가장 잘 느끼는 것은 그 하나님과 맞먹음으로서 그 사랑을 가장 잘 느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바 된 피조물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충만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주님이 “너는 나의 친구라, 너는 내 것이라” 이렇게 불러 주신다고 해서 “하나님, 이제 그러면 맞먹어도 되겠군요?” 그런 식으로 튀어 올라간다고 해서 사랑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상급의 사랑을 말씀하셔도 우리는 항상 두 발을 디디고 떠나지 않아야 하는 자리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은바 된 아주 작은 피조물이고,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셔서 우리를 그 피로 사셨으니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그렇게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영원토록 찬송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기쁨입니다.’ 라고 하는 이 신앙의 고백의 자리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풀어주시는 그 사랑이 계속 증폭되고, 증폭되어서 우리에게 감동과 더 거룩한 감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이 사랑에 대한 잘못된 교리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례한 사랑이 아닌가 하는 것을 오해한 대서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깨닫고, 그런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이 무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만 하면 그들은 사랑을 빌미로 하나님 앞에 방종하거나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덜 두려워하거나, 하나님을 덜 두려워한다는 이유 때문에 더 사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러한 망상적인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이 세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그런 매우 특별한 사랑입니다. 두려움 속에 친밀함이 있고, 거리감 속에 가까이 다가오는 놀라운 사랑의 실제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위치를 지킬 때에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을 인정할 때 자신이 하나님께 존귀하게 인정을 받는 그러한 매우 특별한 관계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정으로 무례히 행치 않는 참된 사랑이라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면 높여 주실수록, 우리는 참된 사랑을 알면서 우리가 사실은 어느 자리에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시는 표징을 그의 생애와 사역 속에서 충만하게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향한 사랑이 아무리 독점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리 탁월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칭송하여도 다 할 수 없을 정도의 탁월한 사랑이었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언제나 한쪽 발을 떼어놓지 않았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미쁘다 이 말이여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여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라’ 자기 인식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참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내를 부름을 받았습니까? 사랑을 받는 관계 속에 들어가십시오. 그러나 언제든지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아무리 남편에게 사랑을 받아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아내의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넘치는 사랑, 그리고 부부끼리 나누는 비할 데 없는 빛깔 짙은 사랑이 계속해서 지속되고 증폭되어서, 결국은 삶 속에 그 부부간의 사랑이 용해되어서 거룩한 삶을 창조해 내기 위해서는, 바로 자기가 한 남자의 아내로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이 한 남편에게 순종하고 살아가며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셨다는 그 자리를 잃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남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같이 뜨겁게 사랑하다가 결혼하고 나서 헤어지는 많은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제주도에 집회하러 가면서 비행기를 탔는데 비행기 안에 쌍쌍이 앉았어요. 도대체 무슨 날인지, 그날이 7년만에 돌아오는 최고의 길일이랍니다. 남녀들이 꽉꽉 찼어요. 공항에 도착해서 택시를 탔더니 택시 기사 얘기가 “손님, 아름다워 보이지요?”, “그렇네요" 그랬더니 기사가 하는 얘기가 “저거 다 웃기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얘기입니까?” 자기가 택시 운전을 하면서 공항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고 호텔에 가다가 “아저씨 차 돌려요” 그러는 사람을 봤다는 거예요.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 여기서 이혼하자” 여자가 그러니까 남자가 “혼인 신고를 했어야 이혼을 하지” 그러드래요. 거기서 헤어지는 부부를 본다는 거예요. 그렇게 격렬하게 사랑하고, 없으면 못살 것처럼 그러다가 결국은 그런 식으로 불시착하는 많은 경우들이 결국은 사랑이 무례히 행치 않는 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가장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을 하고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하나님이 한 남자를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셨을 때 그는 단지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사는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세워 주신 것이 아니라, 가장이라는 현실에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그런 사랑을 나누어도 거기에서 떠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가장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가장으로서 자신에게 하나님이 어떤 거룩한 의무를 부여하셨는지를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그 의무를 지키려고 하는 방식으로 사랑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든지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동일한 사랑이 결국은 우리가 얼마나 성화 된 삶을 살고, 얼마나 이 사랑을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위치에서 사람들에게 삶으로 나타내 베풀어주느냐에 의해서, 이 사랑은 우리에게 놀라운 인생의 커다란 능력을 불러오기도 하고 이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고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지기를 기도해야 되겠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이 특별한 사랑을 받고 우리가 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아가페의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위치가 어디인지를 하나님 앞에 물으면서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이 우리의 인격적인 미성숙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아픔과 고통을 주는 계기가 되지 않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올바른 사랑을 찾아가고, 그 사랑 속에 살고, 사랑을 표현하는 그런 관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넘쳐나는 사랑이 뚝이 터진 물같이 수많은 논과 밭에 고통을 주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절제된 사랑, 사랑이 마음속에 불붙고 있지만 그러나 그 불을 끄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고, 자기가 만나는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사랑해야할지를 바르게 잘 깨닫는 것,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사랑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랑을 베풀 때, 이런 사랑 속에서 살아갈 때,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그 사랑이 가슴속에 넘쳐나는 것이 왜 교회에 고통이 되겠으며, 가정이 고통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메마른 시대, 메마른 땅에 살면서 우리는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 마르지 않는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자신의 성화된 인격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며 이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이런 사람, 이런 사람들이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고통하는 현실에 대한 유일한 치료책이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무례히 행치를 않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12.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지난 시간에 저는 여러분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라는 사도 바울의 사랑에 관한 진수를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는 이 부분을 우리가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희랍어 원문에는 ‘사랑은 자기 자신을 찾지 아니하며’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말 성경에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영어에서도 이기적이라는 말과 자아라는 말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인간 자신은 결국 자신 속으로 들어가면, 어떤 특별한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변화되지 않으면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사랑을 얘기함에 있어서 ‘사랑은 자기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은 그야말로 자기에게 유익이 되고 자기를 위하는 이기심, 그것을 충족시키는 모든 추구, 모든 방향, 삶의 모든 지표, 이런 것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과 작별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가페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자기 자신을 찾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즉시 참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를 버리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지만 사랑을 하기 때문에 자기를 버린다라고 하는 것은 표현상으로 문제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이런 표현을 쓰는 것은 어떻습니까? 진정한 사랑은 몰아적인 사랑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이 무시되는, 진정한 사랑은 자기 자신을 하찮게 취급하는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판단하고, 이해하고 이러는 인격적인 주체성을 의미하는 자기아가 아니라, 여기에서 얘기하는 몰아적이라고 할 때 이 ‘아’ self 자기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건전한 의미에서의 자기가 아니라, 인간의 자체 속에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본성, 그리고 좋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보다 자기가 누리면서 살고자 하는 본성, 언제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밟고서라도 자신이 안락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 좋은 것은 자기가 취하고 좋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주고자 하는 자기 중심적인 마음, 상황과 사건이나 사람의 명예가 걸려있는 모든 상황들을 해석해 나아갈 때 언제나 자기가 유리하고 자기가 편하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도록 그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사건들을 해석해 가려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자기 사랑의 마음, 이것이 바로 말하는 ‘아’ 자기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러한 자기를 잃어버릴 때 그 때에 비로소 그 사랑은 진정한 의미에서 아가페의 사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연히 이런 사랑의 속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깨닫게 된 가장 놀라운 사실 하나는, 이전에 자기가 하나님을 위해서 품었던 많은 열심들이 사실은 진정한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수많은 자기를 위한 욕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혹은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혹은 자기의 사랑을 실현하는 도구로 사용됨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그러한 모든 인간적인 의와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적인 욕심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보일 수밖에 없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에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고백은 빌립보서를 비롯해서 서신서 구석구석에 숨겨져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온전히 버리는, 그럼으로써 사랑이 참 사랑되는 장면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요하신 분이셨지만 사랑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가난한 자가 되셨으며,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셨지만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 손아래 죽임을 당하기까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복종하신 삶을 산 모든 성육신과 고난의 과정이 결국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그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라고 고백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틀림없이 이 서신서를 써내려 가면서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을 버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였을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과 고생으로 일관된 생을 사시면서 자기를 위해서 아무 것도 취하거나 모으시지 않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내려오실 때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이셨지만 그러나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위해서 또 우리를 참된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랑은 잠시 그분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게끔 만들어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받으시던 그 모든 생애는 만약에 ‘내가 하나님인데 나는 창조주인데’ 라고 하는 자기 인식이 전체를 지배했더라면 아마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시는 그런 생애를 사실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분은 당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한번도 잊어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인생과 함께 이 세상에 사셨지만 자신이 죄 없으시다는 사실도 믿었고, 자기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믿었으며, 아버지와 아들로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라는 사실도 굳게 믿으셨습니다. 결국은 당신이 이 세상에서 승천하시고 나면 성령을 이 세상에 보내실 것도 믿으셨고, 마지막으로 후에 이 모든 우주를 창조주이신 그분의 주권 앞에 굴복시키기 위해서 재림주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 지상에서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서 그분이 창조주라는 사실, 자기가 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시라고 으스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 같지 않는 인간들을 만나주셨습니다. 사람 같지도 않고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부여하셨던 그 아름다운 성품과 본성이 모두 파괴되고 부서져 버린 망가지고 오염되고 병든 인간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거하시고 그 병든 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 분은 오히려 스스로를 친구요, 이웃으로 자처하셨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셨다면 어떻게 창조주이신 그분이 인간들, 그 인간들 중에서도 병들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신 성품을 모두 스스로 파괴해 버린 동물과 다름없는 인간들을, 자기를 향해 전혀 우호적인 태도로 자기를 영접하지 아니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먹이고 입히시고 그들을 위해서 치료하시고, 그들에게 하늘의 복음을 전하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어떤 의미에서는 잊어버린 생애셨습니다.
우리는 누가 크냐고 다투던 제자들 앞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를 가지고 와서 무릎을 꿇으신 채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시는 모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 가운데 사시면서 인간의 많은 아픔과 슬픔을 보시면서 사람들이 울 때에 함께 우시고, 고통 할 때 함께 고통하시던 예수그리스도의 낮아지신 모습 속에서, 우리는 창조주의 영광을 읽는 대신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당신이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당신 자신의 영광의 몫을 스스로 마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성품은 감추시고 종 된 인간의 성품은 드러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아 이 세상에 오셨고, 하나님께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일을 행할 수 있도록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그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부여한 권세 중 어떤 권세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까? 병든 자들을 위해서 떡과 물고기에 축사하셔서 이적의 물고기와 이적의 떡을 먹이시긴 하셨지만 자기는 없으시면 굶주린 생애를 사셨습니다. 병든 자들을 고치고 고통하는 자들을 주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위로해 주셨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받아야 할, 몸과 마음과 영혼의 모든 고통을 경감하시기 위해서 어떠한 기적적인 방법도 스스로를 위해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주는 고난에 복속되셨고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향하여 퍼붓는 모든 핍박과 고난에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이신 그분이 죽은 자를 수 없이 살이셨던 그분이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많은 무덤에 있는 사람들은 살아나게 하시면서 자신은 고요히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생애는 없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구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신 생애였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시면서 그토록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옳을 자기의 몫조차도 포기하고, 그렇게 이 세상에서 고난받고 이 세상에서 천대받는 인생을 사시면서 짓밟힌 자처럼 폭력에 짓이김바 된 자처럼 그렇게 인생을 사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그 아가페의 사랑이 이렇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사랑이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생애의 갈피 갈피를 통해서 모두 드러내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 자아에 대한 이기적인 사랑은 주님을 몰랐을 때에 이 세상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자연스러운 사랑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참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자기 사랑을 만족시키기 위한 사랑입니다. 물론 양심에 화인 맞고 더 많이 일그러진 사람들은 자기의 핏줄조차 학대하고, 자기의 핏줄조차 비참하게 폭력으로 일그러지게 만듭니다. 최근에 나온 일년의 가정 폭력들을 보면 정말 인간이 얼마나 철저히 망가진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 아침에도 국민일보에 학대당하고 구타당하는 그리고 성적인 폭행을 당하는 어린아이들 중에 73%가 그 가해자가 자기의 친부모라는 것입니다. 의붓어머니나 의붓아버지가 아니라 자기를 낳아준 친 엄마, 친 아빠가 자기를 성적으로 학대하고 꼬챙이를 불에 달구어서 지지고, 두들겨 패고 하는 이 무지막지한 폭력을 행사한단 말입니다.
몇 해전에 캐나다 갔을 때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얘기를 들으니까 아예 유치원에 들어갈 때부터 아예 철저하게 교육을 시킨다고 합니다. ‘엄마, 아빠가 때리면 즉시 911로 전화해라’ 그것을 어린아이일 적부터 가르쳐 주는 거예요. 사회 자체가 가정을 아예 믿지를 않는 거예요. 엄마 건 아빠건 너를 폭력으로 다스리면 너는 즉시 전화해라. 그러면 어디서든지 전화하면 10분 안에 와서 당장 체포해 간다는 거예요. 그것을 보면은 우리 나라는 그런 면에서 참 후해요. 우편물 같은 것을 다른 사람이 뜯어보면 현행 우편법상 3년 이하의 징역입니다. 여러분은 어때요? 중학생인데 남자친구한테서 왔는데 엄마가 뜯어보면 엄마를 고발할 수 있겠어요? 고발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법상의 특별권력관계입니다. 공법상의 특별권력관계는 군인, 국가, 공무원 이런 것이지만 부모와 자식은 사법상의 특별권력관계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아직까지 부모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너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렇게 철저하게 악한 존재입니다. 오죽 했으면 세례 요한을 이 세상에 보냈을 때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을 아비에게 돌아가게 하겠다’ 부흥이 일어나면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게 되고, 자식이 아비에게로 돌아가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다. 이미 벌써 성경은 예리하게 마지막 때가 될 때에 어떻게 인간의 기본적인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믿을 수가 없을 것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참 사랑에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인 사랑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들은 논리에 무리가 있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부인들이 왜 그렇게 남편들을 사랑하고 보약 챙기고 왜 그래요? 결국은 과부가 되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요? 자식들을 왜 그렇게 끔찍이 챙기고, 좋은 학원, 좋은 학교에 보내려고 몸부림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나중에 자식들 때문에 속썩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닙니까? 획일적으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논리에 무리가 있을 지 모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벌써 인간 사이에 주고받는, 소위 얘기하는 선을 행하는 동기에 대해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에게 선대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면 그것이 무슨 상급이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하면 이 세상의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인간끼리 행하는 그 많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 결국은 다 자기 좋아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니까 행하는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우는 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참 아가페의 사랑은 자기를 찾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사랑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인생의 가치관과 자기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이 인생의 기준과 초점이 옮기는 변화가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삶에 있어서 이러한 초점과 기준이 옮아간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서 쓸데없는 추리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오늘 이런 사랑을 깨닫게 된 사도 바울과 이런 사랑을 깨닫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로 돌아가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사도 바울에게 무슨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그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단지 사도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내가 이렇게 참 쓸쓸하고 외로운 인간이었는데 나를 무시하지 않는 분이 한 분 계셨구나! 아, 참 그분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계시구나!’ 이런 사실들을 예수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에게서 참 사랑을 발견하게 되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기를 이토록 사랑하시고, 자기가 하나님을 향해 보였던 모든 반역과 폭행과 불순종을 이렇게 자신이 불순종과 죄악에 어울리지 않는 크고 놀라운 사랑으로 되 갚으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그는 하나님 앞에 놀랍도록 새로워지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사도 바울은 단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실 뿐 아니라 어떤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중압감이 그의 영혼 속에 밀려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중압감이라는 말입니다. 그 중압감이 무엇이냐 하면 ‘주님이 이렇게 나를 사랑하셨으니 이제는 내가 이전처럼 살 수 없다’라고 하는 그런 놀라운 무거운 압력이 사도 바울의 가슴을 향해서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자신도 형용할 수 없는 어떤 사랑의 강제력이 그에게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고, 자기와 같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공경하여야 할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반항하고 대항하며 어그러진 길로 걸어가는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엇인가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들을 진실로 불쌍히 여기는 어떤 마음이 커다란 강제력을 가지고 그의 마음속에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랑이 자신의 인격 속에서 저항할 수 없는 불이 되는 것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 빛깔 짙은 고백이 그의 서신서 구석구석에 배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사랑에 관한 한 극단주의자였습니다. 사랑이 언급되어진 곳에 항상 죽음이 언급됩니다. 이상하지요? 살아야 사랑을 하는 것인데, 사랑이 강조되는 곳에는 언제나 죽음이 나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또 사도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미친 것과도 연관이 되어서 나옵니다. ‘우리가 정신이 온전하여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요 우리가 미쳤어도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생각하면서 ‘아! 하나님의 사랑 참 귀한데 그러면 어떻게 할까! 사랑이나 좀 해볼까!’ 그러면서 ‘사랑을 해보자’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어떤 강제력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폭풍우와 같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어제까지 없던 어떠한 불같은 뜨거운 사랑의 감정이 그의 마음속에 밀려들어 와서 하나의 불덩어리가 되어서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소명의 심장부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 안에 있는 성도로서의 거룩한 부르심의 심장부에 있다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러한 사랑이 어떤 강제력을 가지고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밀려들어오게 되자 그의 의식의 세계에는 놀라운 변화, 그의 의식의 세계뿐만 아니라, 가치관의 정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자기를 사랑하며 사는 것, 자기의 유익을 찾고, 그것을 쌓으면서 사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 아버지의 이런 놀라운 사랑, 하나님께로부터 자기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이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자, 어떤 강제력 있는 사랑이 그에게 중압으로 다가왔고, 그 사랑이 그의 인격을 지배하게 되자 이제는 자기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던 옛 사람의 모든 삶의 방식과 애정들이 변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사람의 애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말하든지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은 그것 하나만 있으면 나머지는 아무래도 관계가 없다는 극단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진실 된 것으로서 통합니다.
제가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주는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형편은 안 되는데 음대에 가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고 있는 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집안에 불이 났답니다. 불을 끄러왔던 동네사람들, 소방서 사람들이 보고 깜짝 놀란 것이, 그 여자 혼자서 우리 보통 교회에 사용하는 식의 피아노를 여자 혼자서 들고 이층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더라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들어도 들 수 없는 무게입니다. 물론, 그 불을 다 끈 다음에 들고 올라갈 때는 그 여자가 못 들고 올라갔습니다. 이런 것들을 사람들은 초능력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렇게 불타고 수많은 사람들이 연기 속에서 질식하고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그 불길 속을 헤치면서 연기 속으로 뛰어들어갈 때에 이 여자의 눈에는 오직 피아노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그거 하나 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하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지 잘 쪼개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게 집중된 놀라운 힘이 있고, 나뉘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잘 안 나뉘어지려고 하고, 세상을 향한 사랑도 안 나뉘어지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마음속에 나뉘어지기가 쉽습니까? 세상을 향한 사랑이 나뉘어지기가 쉽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인간의 본 바탕에서 우러나온 사랑이 아니고, 변화된 기질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일정한 조건 속에서 변화의 상태가 유지되고 있어야지만 그 사랑이 존속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한 사랑, 죄를 향한 사랑은 본 바탕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특별한 사랑이 침범하지 않는 한 저절로 그렇게 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인간의 본 바탕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던 사람도 유혹과 거듭되는 죄에 빠지면서 쉽게 그 사랑하는 마음이 나뉘어져서 이타적인 사랑,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자기만을 위하는 옛날의 사랑의 방식으로 타락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특별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이 마음을 버리기 위해서는 버리려고 애를 쓰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키려고 하는 의지를 포기하면 즉시 옛 생활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에 한참 다니시면서 한 2년 전에 마태복음 6장을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아마 이 예화를 기억할 것입니다. 염전을 하는 어느 장로님이 말씀하시는 거예요. 겨울에 김장을 하기 위해서 소금을 풀면은 정말 안 풀어집니다. 방망이를 가지고 휘둘러야지만 겨우 녹습니다. 설탕은 뜨거운 물에 빨리 녹지만 소금은 뜨거운 물이든지 차가운 물이든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성질이 있습니다. 그게 용해가 물의 온도에 따라서 크게 좌우되지 않습니다. 일주일 정도 되면 소금이 되는데, 소금을 가마니에 담아서 바닷가에서 차에 싣다가 잘못해서 바닷물 빠져버리면 얼른 꺼내는데, 신기하게 불과 2분 사이에 꺼내는데 가마니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성도는 원래 하늘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 죄악된 세상에서 취한바 된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으로 돌아가기만 하면은 그렇게 즉시 풀어져 버립니다”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자기를 위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이해 관계에 얽힌 사람들의 사랑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기심으로부터 출발한 사랑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얘기하고 있는 이 아가페의 사랑은 땅에서 오고 사람 자신에게서 솟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국은 무엇인가 그런 것들을 유지하며 살게끔 우리의 악하고 죄악된 본성들이 계속 억제 당하는 가운데서만 이 아가페의 사랑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유지되는 그곳에서는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생애를 간단히 말하면 그의 생애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에게 미친 생애였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오늘과 같이 냉담하고 차가운 시대에 사도 바울이 살아 돌아와서 어느 교회를 목회 했다면 아마 틀림없이 이단 취급을 받기가 매우 쉬웠을 정도의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그는 냉담한 사람들, 세상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어 가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불같은 뜨거움과 뜨겁다고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 한 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거기에 완전히 미쳐버린 생애를 산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취미가 무엇이었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안식년에 무슨 일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님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까? 그에게는 취미도 없고, 사랑하는 것도 없고, 좋아하는 것도 없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한 분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그에게는 사랑하는 것이 없는 생애를 살았습니다.
이전에는 사랑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문벌도 사랑했고, 학벌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보장된 장래도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나고야 마는 자기의 더러운 의도 그는 참 사랑했습니다. 사람의 평판,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정, 이런 모든 것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는 오직 한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였습니다. 빌립보서 3장에서 그는 이전에 사랑하던 것들을 많이 말합니다.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고, 열심히는 교회를 핍박하고,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었고, 베냐민의 지파요’ 자랑을 했는데 결국 마지막으로 그러한 모든 사랑하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린 것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오직 하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고상한 지식 하나 때문에 예전의 모든 자랑, 예전의 모든 사랑은 모두 물 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직 하나로 살았습니다. 그에게 만약에 이력서를 쓰든지 설문 조사를 내면 간단했을 것입니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당신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당신은 왜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왜 복음을 전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당신은 마지막에 죽어서 누구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핍박당할 때 누구를 생각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무엇을 위해 먹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무엇을 위해 마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이런 식으로 써내려 갔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이런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왜 자기를 반역자처럼 생각하고 모함하고, 핍박하고 간교한 개교로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 있는 동족들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골육지친들을 향해서 눈물이 마르지 않는 생애를 살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교만과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어서 자기와 같은 유대인들, 별도로 생각하는 이방인들을 위해서 그렇게 고난을 받으면서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당신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거기서 큰 환난이 기다린다고 누군가가 예언해 주었을 때 그가 ‘내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데 성령께서 환난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나 내 주 예수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일에는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노라’하는 그러한 순교의 놀라운 고백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에게 미쳤기 때문에 그는 몰아의 경지에 들어갔습니다. 자기를 모두 잊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살았던 사람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자신의 인생이 이전에는 자기가 주인이었는데 이제는 자신의 그리스도께 소유된 노예로 불리워지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의 것으로 그의 소유로 살기를 좋아했고, 자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고, 자신의 삶과 꿈과 모든 계획과 목표가 그리스도뿐이라는 것을 고백을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속에서 그렇게 자기를 온전히 잊어버린 몰아의 사람으로 다가오셨기 때문에 자기와 같이 더럽고 추악한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울의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주님이 눈이 머셨지 마약에 눈을 똑바로 뜨고 계셨더라면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하실 수가 있었겠느냐!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고 나같이 핍박자요, 폭행자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이 죄인중이 괴수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것은, 이미 사랑 안에서 자기 스스로의 유익을 찾기를 포기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야말로 사랑의 눈먼 분처럼, 그렇게 자기 하나를 건져내기만 하면 그분의 모든 목표가 실현되는 것처럼, 그렇게 죄 가운데 죄인 중에 괴수로 살아가는 그 비참한 인생에게까지 찾아 오셔서 결국은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고, 구속의 보혈로 씻어주시고야 말았다’고 하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이 사랑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죄인 중에 괴수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아무리 황당무계하고 무지막지한 사람을 만나도 그는 항상, 자신이 그보다 훨씬 죄인이라는 사고를 한 것입니다. 괴수라고 하는 이 말이 희랍어로 ‘프로토스’인데 ‘퍼스터’ 이런 뜻입니다. ‘첫 번째’라는 뜻입니다. 내 앞에 누구도 나보다 죄질이 나쁘고 사악하고 비참하고 더럽고 부패한 인간이 없다라고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자기 같은 죄인을 주님이 정말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는 사랑이 아니었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기를 구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 사랑 감화를 입고 이 사람은 그 사랑에 전심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면 우리는 자기를 잊은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고 봉사할 때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결국은 자기의 유익이 아닙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헌금할 때에도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자기의 유익입니다. 자기를 버린 사람의 헌신, 자기를 버린 사람의 봉사, 자기를 버린 사람이 걸어가는 소명의 길, 자기를 버린 사람들이 영혼을 사랑하는 방식 이것은 언제나 놀라운 사랑의 힘을 발휘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렇게 당신 자신을 다 버린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생애를 사셨던 예수그리스도가 당신의 본을 좇아서 그들도 그 사랑에 감동하여, 그렇게 자기를 잊어버린 몰아의 사랑을 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보시고 쉽게 감동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을 감동케하는 곳에는 언제나 그 사랑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자기를 다 버린 사람들, 다시 말해서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는 길이 열리고, 주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고자 하는 사람들, 자기가 모두 잊어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억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산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는 결국은 제약받지 않는 무지함의 사랑을 그분을 향해서 쏟아놓으면서 산다라고 하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삶의 원동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주를 섬기고, 그 사랑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그 사랑 때문에 낮아져서 지체들을 섬기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를 죽이고 자기의 사악한 욕심을 멸하는 이러한 삶이야말로, 정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했던 그 사랑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의 상처와 대부분의 고통은 모두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자기가 죽지 아니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고, 대부분의 영혼을 찌르는 고통은 하나님의 그 사랑 앞에서 자기를 모두 버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본받는 대신에 자기의 유익을 찾고자 하는, 어떻게 하면 자기의 유익을 찾는 것과 주님을 섬기고,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사이에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볼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서 모든 갈등과 고통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온전히 사랑하고, 자기를 비우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몰아의 사랑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우리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에 있어서 사랑할 것만을 뜨겁게 사랑하고, 사랑해서는 안될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삶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들을 억압하겠으며, 누가 그들을 억제할 수 있겠습니까?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받으면 기쁨이 충만 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우리는 얽매이는 것은 고난이나 고통이나 시련, 거역할 수 없는 우리의 환경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말 자기의 유익을 포기한 사랑이 가져다 준 위대한 능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잊어버리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발견되는 몰아의 사랑, 자기는 죽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고 싶은 몰아의 사랑, 자기는 잊어져도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생각나게 하려는 그리스도만을 위한 자기를 잊어버린 몰아의 사랑이 이러한 놀라운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 밖의 영역에서 살아야겠다는 욕망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서 영화로워야 져야 되겠다 라고 하는 욕망을 포기해 버렸을 때 무엇인가 인생에 있어서 달관한 자유를 가진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보면서 이 세상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을 목격합니다.
시인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의 보리피리라는 시를 보면은 문둥병에 걸려서 비참하게 자기가 죽어 가는 광경을 시에 옮겼습니다. 그의 시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오늘도 고개 하나를 넘는다. 오늘도 신을 벗어보니 발가락이 하나 떨어진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그렇게 비참하게 가족들로 버림받고 산을 하나 넘으면은 발가락이 떨어지는 그렇게 비참하게 썩어 가는 자신의 몸을 보면서 얼마나 진저리 치듯이 미칠텐데 삶에 대한 사사로운 욕망을 포기하니까 ‘어! 발가락이 떨어지는 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예요. 어떤 달관과 관조의 경지에 들어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이나 세상에 대한 사악하기 이를 때 없는 욕망 몇 개를 거두어 들여도 이렇게 달관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모습을 우리들이 보게되는데, 하물며 이제 사랑하지 말아야 될 것을 포기하고, 다시 말하면 미친 듯이 자기를 위해서 살던 이기적인 목표를 포기하고 하나님이 그토록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셨던 예수그리스도 그분 자신을 향한 그 놀라운 사랑, 거기에 집중되고 거기에 붙잡힌 생애를 살게 될 때, 얼마나 그 인생이 하나님 앞에 변화되게 될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앞에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여러분 중에 가장 나쁜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 본바탕이 바울보다는 괜찮았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최소한 예수 믿는 사람 잡아서 박해하고 핍박하지는 않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죽는데 가편 투표를 할 정도로 나쁜 사람들은 아니지 않았습니까? 사도 바울이 워낙 거룩하고 도덕적이던 사람이 오늘 이렇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본 사랑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체험하고 자기가 행하고 살고 있는 자신의 속에 있는 그 사랑을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그런 사랑을 실천하며 살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믿을 수 없지만 여러분들 속에 일하시는 분이 믿을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그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라보고 황홀하게 생각하다가 죽으라고 이 아름다운 사랑의 장을 기록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제껏 까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위한 사랑 하나에 붙잡혀서 일평생을 살아와서 결국은 살아온 모든 길이 피 흘린 길이었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를 낸 생애였다고 한다면, 이제는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자신을 버림으로 아버지의 의를 이루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만난 자가 되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 사는 그런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3.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습니다Ⅱ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13:5)
사도는 오늘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는 고백을 한 후에 우리에게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희랍어 본문으로 볼 때에는 자기의 유익이라고 번역된 이것은 자기의 것, 그의 것을 구하지 않는다라는 소유 관계에 있는 그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제일 먼저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기의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사랑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헌신적으로 내어주는 것이며, 사랑이란 자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봉사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며, 사랑이란 급기야 불태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바치는 것이라고 그렇게 열정적으로 떠벌리지 않습니다.
사도는 그러한 삶이 훌륭한 삶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불꽃과 같은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발목잡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부터 뿌리를 자르는 이러한 고백을 우리에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짧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의 것을 구하며 살게 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세계관과 모든 생각, 모든 판단, 모든 사고가 자기 중심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어에서 자기만을 위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의 사고를 가리켜서 에고이즘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나는, 내가, 나로 말하자면, 나, 나, 나를 잘 말하는 것을 가리켜서 에고티즘이라고 합니다. 에고이즘과 에고티즘은 언제나 함께 흘러가는 것입니다. 사고가 자기 중심적인 사고, 자기 중심적인 인생관에서 탈피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은 에고티즘이 에고이즘으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사고를 가진 사람은 결국은 사고만 나 중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도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철저한 이기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기적이라고 하는 것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이기적이고 그렇게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것을 지키고 자기의 것을 소유하려고 하는 강한 성령을 가진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인간은 단지 자기의 것만을 소유하겠다고 하는 단순한 본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타락하고 죄악된 본성과도 맞물려서 이제는 자기의 것을 소유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까지도 자기의 소유로 만들고 싶다는 그러한 강한 집념을 가진 것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살아가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기의 것을 구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렇게 철저하게 자기의 것을 구하고 자기의 것을 위해서 사는 삶으로 뭉쳐진 덩어리라는 사실을 사도가 알았기 때문에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고 자기를 헌신적으로 내어 던져서 수많은 사람을 섬기는 빛과 같은 사랑을 말하기 전에 먼저 그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발목을 잡고 있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 사랑을 자르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남을 사랑하며 살 수 없고 당연히 남을 사랑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사랑하며 살수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지금 이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길지 않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하자면 사랑이라는 이 단어를 가지고 위선 속에서 살아가면서 영적인 생명을 잃어버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자기 사랑이 절단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인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인가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행을 하는 것처럼 뭔가 자기를 내 세우고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처럼 따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그러한 많은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생활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점에 있어서 한 이태 전에 설교했던 마태복음 6장의 외식 시리즈를 모두 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거기에서 외식의 문제를 다루면서 어떻게 그 외식이 철저하게 그리스도인의 건강한 삶을 파괴하는 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외식이 있고 거짓과 가식이 있는 그 곳에는 결코 건강한 영적인 삶이 뿌리를 내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필라델피아에 갔을 때, 그 펜실베니아 대학의 풀밭에 모두 앉아서 함께 이야기하는데 그 곳의 사역자 한 사람이 고통스럽게 저한테 자문을 구했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왜 이렇게 교회가 사랑이 없느냐고 그럴 때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교회가 사랑이 없느냐고 하면서 막 분노하더랍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말에 개의치 마십시오. 대부분의 그런 사람들은 자기 의에 빠져있는 사람들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되어서 진정한 동기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은 교회가 사랑이 사라져 갈 때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아파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깨닫고 나면 이 교회 사랑하는 공동체와 이 지체들이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무엇인가 헤아려서 고쳐주어야 할 대상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한 지체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건강하고 진실한 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하니까 고민하는 문제는 많아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해결할 수 있는 영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가운데 무엇인가 하늘의 힘과 능력이 자기의 기도와 은혜의 세계 속에서 함께 하므로 말미암아 망가진 지체들을 고치고 상처받은 공동체를 치유해 나가는 이런 간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망가진 공동체 속에서도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망가진 사람들을 보고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고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영양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삶이 뒷받침 해 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한없이 허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랬을 때에 자기가 모든 사람, 어느 그리스도인이든지 “당신 왜 그렇게 사람이 음탕하냐?” 그러면 “난 그렇지 않아”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거짓말을 잘 하느냐 그러면 나는 그런 일이 없다 할 수도 있지만 사랑이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누가 나는 거기에 해당사항이 없다 라고, 그 계명에 있어서는 완전하다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나름대로 다 걸리는 것입니다. 이 완전한 사랑은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거기에서 그것을 딱 물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아! 공동체에 이렇게 사랑이 없느냐, 그럼으로써 무엇인가 자기는 말하자면 보상적인 충족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말 진실한 신앙생활과 깊이 있는 영적인 생활 속에서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시고 그의 심령을 하나님의 하늘의 신령한 은혜로 채워주셔서 십자가의 사랑에 깊이 감동하고 은혜 받는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을 그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사랑이 없다라고 하면서 마구 무차별 폭격을 하면서 어떤 보상심리를 느끼느냐 하면 “봐라, 너희들은 이런 문제를 아느냐. 무엇인가 자신의 비참한 영적인 생활을 걸러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과시적인 욕구가 많은 것입니다.
지금은 설명을 다 드리지 못하겠지만 짧은 시간에 핵심을 찌르는 말로 제가 그 문제에서 자유로우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으로서 사랑이 가득 차는 것이 아니니까 사랑으로 교회가 변하는데 있어서 그런 사람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니까 개의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은 누가 돌멩이를 들고 일어나서 이 자식들아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왜 이렇게 사랑이 없어 하면서 돌팔매질을 해 가지고 몇 사람의 이마를 터트려서 피가 나온다고 해서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그렇게 해서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미움이 있는 곳에서 그 미움 때문에 그 오해를 당하고 그러면서 사랑을 실천하면서 거기에 밟히는 낮아짐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교회에 사랑 없음으로 인해서 피해를 보면서 그 사랑 없음으로 받는 피해와 상처를 다시 사랑 없음으로 되 갚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미움을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사람들로부터 받는 편견과 핍박과 고난을 예수의 사랑으로 그것을 끌어안을 때, 그때에 교회가 변하고 사람들이 변하고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 이태 전에 지방에 있는 어느 교회로 집회를 내려갔는데 내려가면은 일체 교역자들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못하면 너무 세속적인 말 같습니다만 부흥사하고 담임목사하고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되다는 말입니다. “부흥사님, 사실은 우리 교회에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있습니다. 이번에 사실 돈도 필요합니다.” 이것 9가지를 집중적으로 좀 해달라고 그러고 옵니다. 담임 목사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은 사람들은 이제 그런 것 몇 번 경험하고는 부흥회에 대해서는 신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담임 목사가 인도하니까 이야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다 집회가 끝나는 마지막날인데 제가 바닷가를 보고 싶다고 해서 점심을 먹고 바닷가를 쭉 걸어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 사실은 이번 집회를 지내면서 나는 여태까지 우리교회의 장로님들이 깨어져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장로님들한테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가슴에 멍이 많이 들었습니다.” 어쩐지 교회가 좀 이상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교인이 이 백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후임 목사로 갔는데 장로님들이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더랍니다. 이 양반이 아주 신사입니다. 아주 얌전한 분인데 부딪히지도 못하고 가슴앓이를 한 것입니다. 사실 그 분들이 문제가 있기는 있습니다. 장로님이 절기 헌금을 하는데 이천 원을 하더랍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해서 나는 뭐 거 가난하면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그 장로님이 빌딩이 두 채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이천 만원을 이천 원으로 잘못 알고 낸 것이 아닙니까 하였더니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속에 미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마귀가 원하는 대로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고 깨닫고 나니까 자기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잘못이 없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 자기에게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처음 상처받은 그 이후로부터 이제껏 까지 한번도 저 사람들을 품속에 끌어안고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고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그 돌멩이를 껴안고 하나님 앞에 가느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매듭이 풀어지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왜 용서해야 될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합니까?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다 자기 때문에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꼭 물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자기중심, 누가 나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어서 그 고통을 줬으면 이제 내가 가서 칼로 찌르거나 방망이로 두들겨 팰 수는 없지만 그러나 누가 나에게 나쁜 짓을 하고 내 마음에 상처를 주면 내 위로는 무엇이냐 그 이름 석자를 떠올리면서 마음속으로 한번씩 미워하는 것입니다. 사탕 하나 깨물고 우지직할 때에 쾌감을 느끼고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해 주고 나면 난 이제 무슨 재미로 사느냐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밉게 보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 미움을 놓지 않고 끝까지 붙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에고이즘, 자기를 위한 이기심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은 물론 이거니와 자기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아집, 그것을 놓지 못하고 끊어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결코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할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이렇게 자기만을 위한 이기심에 묶여 있는 그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좀처럼 넘어서기 어려운 커다란 벽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이 그 스스로를 믿는 그 순간부터 여러분들의 신앙 생활은 정말 바른 길로 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모든 사람이 자기를 사랑하는 우선 순위가 같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일 순위입니다. 돈만 뺏어가지 않으면 다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 자기의 아집으로 돈은 줄 수 있고 내어 줄 수 있어도 누군가가 자기 신앙이 잘못되었다거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아집을 건드리기만 하면 몸서리를 칠 정도로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물질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내어주면서 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마음을 비운 사람이다 하는데 그것은 절대 착각입니다.
다른 소중한 것을 마음속에 깊이 감춰놓고도 돈은 하나님 앞에 다 내어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단지 돈을 많이 쓰고 내 놓는다는 것, 그것이 곧 그 사람이 정말 주님 이외 사랑하는 것이 없구나하는 유일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기억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움켜쥐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마다 각기 자기의 그 이기심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강한 집착이 어떤 사람은 물질, 어떤 사람은 사상, 어떤 사람은 아집, 또 어떤 사람은 인간 관계, 모든 것으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다양한 우상들이 가득 차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자기의 것을 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의 것, 자기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적인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고 보이지 않는 모든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를 사랑하는데서 비롯된 모든 구하는 것, 그것을 여기서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두 돈에 미쳐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그것으로부터 초월한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명예라고 하기만 하면 사족을 못쓰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초연한 사람들도 어느 정도 있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것은 유형, 무형의 자기 중심적인 애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은 겉으로 보기엔 정말 선할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은 벌써 잊혀졌지만 한 10년 전에 신문에 대문짝 만하게 났습니다. 목사님이 권총으로 사람을 살해하고 돈 이천 오 백 만원을 빼앗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고 하니까 그 다음 대답이 하지 않았으면 교회가 덜 창피하지나 않겠습니다. 그 돈으로 교회를 지으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난 그 말을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사람하고 내가 있던 교회가 같은 노회에 소속되어 있는데 주위의 동기들이 교회가 부흥되고 잘 되어 감사하면서 자기의 교회는 안되니까 왜 이럴까? 하나님 왜 이렇습니까? 하고 매달려야 하는데 결론을 이상한데서 내린 것입니다. 저 교회는 교회를 지었기 때문에 저렇게 사람이 잘 모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말하자면 나도 저들만 못하지 않는데 이것은 순전히 교회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그러면서 하나님은 사라지고 이제는 교회를 지어야하겠다는 것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욕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총으로 살해한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선한 것 같은 것들도 이런 집착과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까지도 모두 다 자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악의 근원이 결국은 자기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결별하지 아니하고는 어떤 식으로든지 이 죄와 모든 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약에 자기 애착, 자기 집착, 자기 사랑의 줄만 끊어 버린다면 우리는 상당히 죄로부터 자유한 삶을 살수가 있을 것입니다. 결국은 끊임없는 자기 사랑, 자기 집착과 자기 애착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서 불순종하며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문제가 사랑에 있어서 매우 핵심 부분에 와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고 뽐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사랑거리는 자랑거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자랑거리는 사랑거리인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에 대한 강한 애착이 사라지지 않으니까 악에서부터 떠날 수가 없고 자기의 사랑, 거기에서부터 비롯되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으니까 죄와 결별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숙명적으로 그렇게 깊이 달라붙어 있는 그러한 자기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정결해져야 합니다.
순환적인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악순환이란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정결하지 못하니까 자기 사랑을 떨쳐버리질 못해 자기 사랑을 떨쳐버리질 못하니까 무엇을 하든지 간에 죄를 짓게 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되니까 마음이 불결해지고 불결해지니까 그 다음에 더 담대하게 자기의 유익에 초점을 맞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의 것을 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결국 한이 없는 욕망을 타고 팽창되는 것입니다. 정말 실직 상태에 있고 고통스럽고 그럴 때에는 그저 한달 가서 일하고 밥이나 먹여줘도 좋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막상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는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그러면서 그 욕망은 한없이 팽창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삶의 구심점에 누가 있느냐 하면 끊임없이 자기 인생을 향해서 무엇인가를 착취하려고 하는 자기 자신이 거기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수 없이 많은 것들을 자꾸 갖다가 바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만족은 욕망을 부르고 또 욕망은 더 많은 만족을 요구하면서 계속해서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러한 자기의 유익을 구하려는 욕망이 다른 사람의 욕망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면 거기에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다툼과 살인까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라의 욕망과 나라의 욕망이 충돌을 일으키면 전쟁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으로 내 몰리는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유익을 구하면서 사는 삶, 이것이 결국은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우리 자연인 상태에서 가지고 있는 그러한 본성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깊이 깨달은 것이 그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이렇게 열심히 율법을 지키고 열심을 내고 율법에 있어서는 흠이 없는 삶을 살고 그렇게 조상들의 유전과 종교에 대해서 탁월한 열심을 보였는데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고 나니까 나중에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그 모든 노력들, 율법에 순종하며 살려고 했던 노력까지도 알고 보니까 결국은 자신의 탐심과 자기의 만족과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삶의 한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명을 향하고 계명을 지키면 지킬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더 큰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계명을 행하게 되면 행하게 될수록 그런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적개심이 생겨나고 그런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무능한 사람들을 정죄하고자 하는 사악한 본성들이 계속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경험한 실패였습니다.
결국 자기에 대한 집착과 자기에 대한 한없는 사랑은 결국은 모든 악의 근원이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파괴하고 생명의 기초를 모두 무너뜨리는 그런 결정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자기의 유익을 구하며 살려고 그러한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물질 생활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경건한 성도들이 내세에 소망을 두면서 살아가는 비결 중의 하나를 공통적으로 자선에 꼽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자선을 행함으로써 천국에 간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만 그러나 이 사람들은 철저하게 한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그가 정말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물질을 긁어모으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을 좌우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물질, 열심히 노동을 해서 얻은 물질들을 가지고 연약한 사람들을 돕고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구제하고 선한 사람을 위해서 그 물질을 흩어 버리고 나누어주는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내세에 대한 소망을 이 세상에서 촉진하는 비결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물질을 거룩하고 신령한 일에 소비하므로 말미암아 자기의 진정한 꿈과 소원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이제 이러한 사랑의 결정적인 특징을 우리에게 말하면서 진정한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물질에 대한 욕망을 버린다고 해서 그가 완전히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물질의 욕망 말고도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만드는 요소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부분의 많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이 물질이 귀하게 공헌을 합니다. 명예가 부족해도 물질이 많으면 명예를 살수도 있습니다. 자기는 힘이 부족해도 물질이 많으면 물질로 힘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물질 하나에 집중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일단 우리로부터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이 마음, 사랑 없는 이 마음이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질에 대한 집착만 뽑아 버리면 많은 욕망의 잔뿌리들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장 커다란 덩치가 뽑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물질에 있어서 한없이 자유로우면서도 다른 아집이나 인간적인 사고 방식을 물질보다 더 사랑하고 그것이 뽑히는 것이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는 것보다도 더 가슴 아프게 살아가는 나름대로의 사상적인 애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깨뜨려지지 않으면 일평생 고집덩어리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물질과 많이 결부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가 헤브라이즈 군도에 선교를 갔다가 많은 사람들이 제사 드리는 날이라고 하면서 돼지를 잡았습니다. 수많은 돼지를 잡는데 돼지를 잡는 것은 좋은데 털을 벗기도 깨끗이 다듬더니 돼지마다 꼬리를 다 잡더랍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그러니까 제사에 쓸것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꼬리는 무엇이고 몸은 무엇이냐고 했더니 이 꼬리는 우리의 신들에게 바쳐야할 것이고 몸통은 우리 것이다라고 그러더랍니다. 그것이 바로 얼마나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이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우리 생활하고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소득이 이 만큼 있으면 꼬리 탁 잘라서 하나님께 바치고 몸통은 이것은 내 것이다 그러지 않습니까? 꼬리를 이렇게 보면서 사람들이 아이고 세상에 누구는 저렇게 큰 꼬리 십일조를 냈어 그것은 꼬리는 작지만 몸통은 큽니다. 그런데 꼬리가 그렇게 크니 몸통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섬김을 받으실 때에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그래서 우리의 추구점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자기 중심적인 유익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물질 생활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 김목사의 생활 신조가 아닙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제물을 모으면서 사는 것을 옳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혹시 이 세상에서 제물을 모아야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그것은 매우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하고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범을 보여 준 사람이 누구였는가 하면 쟌 웨슬레였습니다. 정말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일년에 천 편 내지 천 이 백 편의 설교를 하면서 엄청난 선교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수많은 돈들이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이 살았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가난한 사람들의 선교를 위해서 흩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의 정신은 교회 안이나 교회 밖이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시대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에게 속한 것은 죽어도 내어 좋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시대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결국은 우리는 오늘 왜 그러한 현장이 우리의 눈앞에 있게 되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대답은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 말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물질에 있어서도 자기 중심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가치관을 청산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것을 배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배운 모든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배웠고 세상에서 배운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교정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서 배우지 않은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오늘 사랑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기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라고 정의를 내렸을 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것을 구하지 않으면서 일평생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가 그림 같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셨던 그 생애를 사도 바울은 아마 지켜보기도 했을 것이고 듣기도 했을 것이고 혹은 후일 자기보다 더 훨씬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배웠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인품과 그의 청빈한 삶과 그의 물질로부터 자유로와서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하여 사셨던 생애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의 많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글도 있었기 때문에 이런 저런 자료를 접하고 무엇보다도 더 커다란 것은 그가 깊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깊은 은혜의 속으로 들어가면 예수의 정신을 그의 사역 속에서 배워나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자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이미 사도행전 20장에 나타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그는 이제 장로들을 청해서 마지막 고별인사를 하면서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느니라.
사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입니다. 그 당시 무슨 자료를 통해서든지 예수님의 그런 기록이 흘러 다녔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셨느니라 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예전에 이기적이고 아집에 가득 찼던 사람이 정말 자기의 영혼들, 자기의 지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자기가 복음을 전해서 예수를 믿게 된 많은 지체들을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아 혹은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라고 부르면서 자기의 물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허비하도록 내어주고 싶다는 고백을 여러 곳에서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붙잡히게 되었고 예수님의 그 인격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생애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의 모습을 가지고 우리와도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 분 자신만을 위한 삶을 생각했더라면 그 분에게는 이 땅이 어울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어울리시는 분이었습니다. 천군 천사들이 노래 소리가 있고 성도들이 할렐루야 찬송하며 어린양의 이름을 높이는 그 곳이 예수님에게는 훨씬 어울리는 곳이었습니다. 그 분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제가 몇 시간 전에 강원도 거진에서 집회를 마치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집이 이 세상에 집회 가서 그렇게 맛있게 저녁을 대접받기에는 처음입니다. 배도 물론 고팠습니다. 들어가는데 집이 1960년대 집이었습니다. 속은 그렇게 깨끗한데 겉에는 상전 마냥 문 열고 들어가는 나무로 만든 집입니다. 들어갔는데 그렇게 누추해서 죄송하다고 하였습니다. 뜨듯한 방에 앉아 있었는데 정갈하고 정성껏 차렸습니다. 그러면서 이것 좀 드셔보시라고 내놓는데 보니까 문어였습니다. 이것이 웬 문어냐고 하니까 글쎄 이 문어가 응답 받은 문어라고 하였습니다. 문어가 무슨 응답을 받습니까? 강사님이 오신다는데 식사를 대접해야할텐데 문어 한 마리가 어디 없을까하고 해변가를 걸어가는데 문어가 나 여기 있어요 하고 바위 위로 올라오더랍니다. 그래서 잡아 가지고 끊는 물 속에 집어넣으니까 그렇게 좋아하면서 물 속으로 들어가더랍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오셨다니까 자기네 집이 누추해서 그렇게 좌불안석 같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누추한 말구유간에 오셨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말구유간에 오신 이 사실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누가 예수님이 이렇게 낮아지셨기 때문에 그렇게 낮아지신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입고 오신 그 모습이 너무나 마음 아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님이 왜 그렇게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 오셨습니까? 왜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사랑을 당신은 베푸시는데 그 사랑을 핍박과 미움으로 갚는 그 많은 인생들을 끌어안고 울고 슬퍼하시고 애통해하시면서 결국은 자기를 향한 인간들의 미움과 도전과 핍박을 보면서 아파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를 이렇게 대우하는 인간들이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결국 예수님의 관심은 자기의 핍박이나 고난, 혹은 자신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아니라 알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해서 결국은 자기를 향해 박해와 고난을 가하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 가는 그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아파하신 생애였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결국 인간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영광을 버리신 생애였습니다. 부요하신 그 분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서 가난한 자가 되셨고 모든 것을 가지신 그 분이 우리가 모든 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하시면서 당신은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인생을 사셨습니다. 주님이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셨던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용납 받게 하려고 하는 구원의 소망 때문에 당신이 버림받으시기를 스스로 자처하신 그러한 낮아지신 생애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을 배웠던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사랑은 결국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구나! 주님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세상에 오셔서 결핍과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병든 자들과 흉악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당신의 거룩한 본성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한 삶을 사셨던 것도 자기를 버리는 과정이었고 그렇게 비참한 인생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모든 과정도 결국 알고 보면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유익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결국은 예수님이 자신의 것을 모두 포기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의 영광을 양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한 진노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에 처한 죄인들 사이에서 자기의 유익을 버리시므로 불화 했던 하나님과의 관계에 화목의 다리를 놓으시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자들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던 자들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바꾸어 놓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유익을 포기하심으로써 이런 사랑을 이루셨고 이 사랑에 빚진 자 되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제는 진노의 자식이 아니라 사랑 받는 자녀, 주님이 기쁨을 이기시지 못하는 그러한 성도의 한 사람으로서 오늘 하나님 앞에 서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는 하나님이셨지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당신의 거룩한 신성을 인성에 감추이시고 하나님 이후로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그저 죄인들과 같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함께 죄인들 속에 거하시는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내려오셨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모두 포기한 이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고 자기의 이익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에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기쁨을 얻는 것을 통해서 즐거워할 수 있는 마음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이러한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면서 자기의 것을 모두 버리신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주님을 참으로 만나고 십자가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자기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충만하게 될 때에 그 때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바는 오직 예수를 이용해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든지 내가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 예수를 어떤 식으로 이용을 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이기적인 욕심이나 욕망을 채워야하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한 성도가 그 사랑 앞에서 이전에 자기만을 사랑하면서 살아왔던 생애가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 생애였는지를 깨닫고 무너지기만 하면 그는 자기의 것을 도무지 구할 수 없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나의 마음이 한없이 감동을 받아서 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나 같이 흉악한 죄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뜨고 나면 그 사랑은 거기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될 때 그렇게 십자가의 사랑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소원이 있습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저 얼굴 좀 예쁘게 새로 만들어 주세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제가 언젠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제가 책에 그런 이야기를 썼는데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깨닫고 나니까 나도 모르게 어떤 기도가 나오느냐 하면 “하나님!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으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마음을 쓰지 마시고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온 마음을 기울이시옵소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의 진정한 소망은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우리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깨닫고 나면 자기가 간절히 원하고 소망하는 바가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물질이었고 다 인생의 계획을 세워 놓습니다. 25살에는 무엇을 하고 30살에는 30평 아파트를 사고 40살에는 무엇이 되고 많은 인생의 계획이 있습니다. 주님 만나고 그 사랑에 감동 받게 되면 한번에 다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 기도 제목도 바뀌고 모든 것이 바뀝니다.
이번에 간 그 교회에 전도사님이 나이가 많으셨습니다. 사업을 하는데 얼마나 잘 되는지 한 달에 얼마를 버는지를 계산을 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게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데 동업을 하다가 한 사람이 어디 간다고 하면서 헐값에 다 넘겨주고 갔는데 일감이 들어오고 돈이 남기 시작하는데 얼마나 돈이 들어오는지 정신을 못 차리겠더랍니다. 돈을 억수로 벌었습니다. 진짜 벌어 가지고는 다른 사업을 한 번 해보자 그래서 그 때 한참 잘 나가는 유통 사업에 돈을 투자하려고 아주 길목도 좋고 커다란 유통 쎈타가 있는데 돈을 덜컥 내고 계약을 하고 중도금까지 다 집어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인수만 하면 되는데 인수만 했다하면 떼돈을 벌 수 있게 다 정해진 순서였다는 것입니다. 중도금까지 다 내고 이제 잔금만 내면 되는데 돈도 가지고 있는데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마음을 두드리시더랍니다. ‘너가 그거 계약하면 이제 나하고 약속한 것은 어떻게 되는 거냐.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라 하던 약속은 너 나이가 벌써 이 만큼 되었는데 여기 사업에 다시 발을 들어 넣으면 결국은 사업에는 성공할 지는 모르지만 나하고의 약속은 끝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 앞에 고민하다 마음의 정리가 되더랍니다. 갖다 낸 돈 떼 먹히고 다른 사람에게 헐값에 넘겨 버린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을 헐값에 인수 맡으면서 그 사람보고 얼마나 고마워했겠습니까. 고마워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고 병신, 그러더랍니다. 복 덩어리라도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 정말 예수의 사랑을 깨닫고 나면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은 대답은 간단한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었으면서도 그렇게 세상의 것에 집착하고 물질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예민하고 거기 집착하는 삶을 사느냐? 가난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라고 하는 신앙의 고백이 없기 때문에 결국에는 거기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때 거리만 없는 사람들만 돈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내일 것을 걱정하고 내일 먹을 것이 있는 사람은 일주일 후 것을 걱정하고 평생 먹을 것을 둔 사람들은 자식들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7편에서 이야기하는 자기의 유업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분깃을 둔 인간들의 삶에 현주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만을 위하는 자기 사랑, 그런 모든 사랑이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생애에 대해서 깨닫는 순간 그야말로 자기를 얽어매고 있었던 이 많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그 인생의 진지한 탐구와 노력들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그것이 깨트려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발견하고 그 사랑 앞에서 십자가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사람은 정말 소중한 것이 없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유익을 포기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에게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이러한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유익을 철저히 버리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을 바라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추구하는 바가 바뀐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러한 옛사랑, 자기 사랑과 결별하며 살지 못하는 사람들, 혹은 그 꿈이 세상에 있고 세상에 있는 것들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새가 발목을 둥지에 단단히 묶어 놓고 수 없이 날개 짓을 한들 얼마나 그가 날아다닐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교회에 헌금이 잘 안 나올 때에 김창인 목사님은 가끔 올라가셔서 그 분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야 생명 내 걸고 그 교회를 이끌어 오신 분이니까 다른 젊은 사람이 가서 그렇게 말하면 상처를 받겠지만 그 분 이야기에는 상처를 받지는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요즈음 여러분이 헌금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의 유익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마지막에 자기의 몸까지 십자가에 못박아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 앞에 우리의 것을 움켜쥐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바보 같고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생애를 살아오셨습니다. 긴 생애를 살아오셨지만 당신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본받아야 합니다.
남는 것 없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모든 것들을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아버지를 위해 쓰셨습니다. 그분은 마지막에 남은 자신의 목숨도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하나님 앞에 깨트려 주시고 오실 때 강보네 싸여 오셨다가 가실 때는 통으로 짠 그 옷마저도 군병들에게 벗어주고 오실 때에는 강보에 쌓여 오신 분이 마지막에는 그것도 없이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죽으셨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제껏 하나님의 이러한 은혜와 주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자가를 버리신 이 고난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에게 기억된 바 되었고 그 피가 우리를 씻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세워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아있는 의무는 예수님의 이 사랑을 본 받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셨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가난해져야 될 사람들이 부하게 되었고 하나님 앞에 정죄될 사람들이 용서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저주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되었은즉 이제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유익을 포기하고 주님을 위해서 우리의 소중한 것을 바치면서 살아야 될 때라고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자기의 유익을 버리는 그런 십자가의 사랑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에게 그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주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신 십자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십자가의 정신으로 주님을 위해 자기의 유익을 버릴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기의 것을 부인하고 유익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이 십자가의 사랑은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가 아닙니까.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진짜 부하게는 살아본 적이 없지만 가난이라면 진짜 어디 가서 이야기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가난한 세월도 지내보았습니다. 결혼을 하고서도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고 이제 물질에 있어서는 근심할 것이 별로 없다라고 생각한 지가 불과 몇 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힘들고 고달픈 세월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신학대학원 다닐 때 얼마나 가난했는지 그때도 덩치가 좋았습니다. 한 12시간씩 공부를 많이 하던 때였습니다.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 이렇게 일어나면 갑자기 연구실 바닥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휙 돕니다. 그리고 별이 반짝반짝 합니다. 그렇게 가난한 시절도 보냈습니다. 그래도 한번도 돈이 없어서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등록금을 못내서 가방을 싸들고 학교를 등지고 담임 선생님이 “야! 임마, 교무실에 가서 막대 그래프를 봐라. 네 이름이 제일 꼴찌다” 이렇게 말을 하여도 교정을 나올 때도 한번도 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밤에 그것도 오밤중에 일어나서 너무나 서럽게 울었습니다. 목사가 왜 하필이면 오밤중에 일어나서 돈이 없어서 그렇게 가슴아파보기는 그날 밤이 처음이었습니다. 며칠 전 교회가 사람들이 꽉 차니까 어떻게 해야 되겠기에 어느 집사님들이 가건물이라도 짓고 예배 드릴 수 있는 좋은 땅이 있다고 참 좋다고 그랬습니다. 내가 입을 벌려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정도의 큰 액수의 돈이었습니다. 몇 군데를 보았는데 다 비쌌습니다. 그러면서 그날 밤에 2시 반쯤 깼습니다. 그렇게 가슴이 아픈 것입니다.
이제껏 주님이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면서 살아오게끔 만들어 주셨는데 이제 그 비록 살아온 인생이 하나님 앞에 흠도 많고 점도 많은 그런 인생을 살아왔고 부족한 사람이 목회에 들어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 적이 정말 많은 인생을 살아왔는데 마음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허물도 많고 온전하지 못하지만 참 하나님이 나를 유익되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얼마나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셨는지를 깨닫게 하시면서 저를 이끌어온 생애였습니다.
주님, 나는 이 시점에서 나의 주님이시여. 나의 사랑이시여. 그래서 주님을 제가 최고로 대우해 드리고 싶은데 하나님 아무리 돌아봐도 돈이 없습니다.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침대에 누워서 한 30분을 내가 돈이 없음 때문에 울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찬송하고 주님을 높여드리기 위해서 모이는데 그리고 하나님이 한사람 한사람을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베푸셔서 소설을 써도 몇 권씩 쓸 것 같은 세밀하고 인자한 사랑으로 이끄셔서 여기까지 데려오셔서 그 더러운 죄들을 버려서 우리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돌아가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보혈의 샘에서 한 죄인도 더럽다고 불평하지 않으시고 모두 씻어서 정결케 하시고 정말 내버려두었다면 폐품 창고와 같았을 교회를 한사람 한사람 고치고 새롭게 하셔서 보석보다 귀한 성도로 만들어 주셨는데 하나님 이제 제가 주님을 정말 이 세상에서나 하늘에서나 최고로 대접을 해드리고 싶고 이 성도들을 이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그 사랑 앞에 정말 우리 주님을 가장 최상의 주님으로 그렇게 대접을 해드리고 싶은데 하나님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슬프고 서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로 하여금 유익한 모든 것은 버리시게 만들었습니다. 좋은 것은 우리를 위해 모두 버리게 하시고 고통스럽고 아프고 쓰라린 것은 모두 짊어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시기 위해서 가시밭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가시밭길과 같은 고통스러운 결핍과 자기의 유익을 버린 고난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아무 공로없이 그 길을 걸어서 주님의 산 자녀들이 된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자기의 유익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해지고 나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기뻐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으로 여겨지는 것이 주님을 아는 사랑에 가득 찬 성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보다도 더 사랑하신 분이 없었지만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유익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그렇게 보냄을 받아서 당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을 버려서 마지막에는 자신에게 남겨있는 생명까지도 십자가에 못박으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스러우셨지만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잠시 후에 받을 영광과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후에 당신이 십자가를 모두 지고 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부활로 다시 살아나게 하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주님이라는 이름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게 만드셨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유익을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면 하나님 앞에 지금도 몰라서 자기를 향해서 욕을 하고 십자가에 못박는 소망이 없는 죄인들인 우리를 건져내 주실 것이라는 소망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유익을 보며 자기의 고난을 이긴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
놀라운 사랑 받은 나 몸으로 제물 삼겠네
주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자기의 유익을 버리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의 인생에 남은 마지막 희망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를 우리의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피를 주고 사신 당신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는 대신 우리를 위해서 자기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고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우리의 모든 유익하던 것들이 주님을 위해서 쓰여지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쓰여지고 지체들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인 것을 깨닫는 마음이 예수의 사랑을 아는 마음입니다.
14. 사랑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내지 아니하며(고전13:5)
오늘이 14번째로 13장을 강론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는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되어있는 이 본문을 우리들이 오늘 살피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랑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런 뜻이겠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되어있는 이 부분이 희랍어 본문에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되어있는 이 원어는 옥스스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동사 형태인데 수동태로 되어있다. 옥스스는 분냄, 날카로움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원어적인 뜻은 날카롭게 되지 아니하며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에서 뭐라고 번역 했냐하면 도발되지 아니하며, 격동되지 아니하며,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의 어떤 놀라운 내면적인 특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할 때 사랑은 무엇에 자극을 받아서 분노하지 않으며 그런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분명히 우리들이 인간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람이 성격이 온순하고 비교적 남들이 뭐라고 그래도 고분고분하게 살다가는 그런 사람 좋은 성품과는 관계가 없는 말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팔복에 나오는 것이나 여기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것이나 모두 타고난 자연적인 인간의 성품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팔복이나 여기에 나오는 사랑의 속성 사랑을 닮은 성품 팔복에서 거론하고 있는 어떤 인격적인 특성은 모두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후천적으로 변화된 성품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제일 먼저 하나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진실로 알고 그 사랑에 의해서 놀랍게 변화되면 여러분은 성내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기 보다는 사랑의 모든 속성이 그러하듯이 오랜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획득되는 거듭난 기질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그러한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으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은 얼마나 맥아리 없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뭔가 좀 격렬하게 쏟아 부을 때는 쏟아 붓고 화를 낼 때는 좀 화를 내고 그래야지만 좀 사람이 부드러워질 때 그 온유함이 얼마나 자기들에게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성내지 아니하며 하는 이 말씀은 도무지 아무 것에 의해서도 자극 받지 않고 격동하지 않는 그런 요지부동의 삶을, 성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뜻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답하기에 앞서서 우리는 먼저 성경 속에서 거룩한 분노라고 부를 수 있는 분노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예수그리스도에게서 이 아가페의 사랑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종종 외식하고 회칠한 무덤과 같은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를 향해서 격렬하게 진노하시면서 화 있을진저 라고 외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이 있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여. 말씀하신 그분이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는 “화 있도다”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생애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물건 파는 자들을 내어쫓으시면서 정결케하시는 장면은 더더욱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노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셔서 그것을 휘두르시면서 분노하시며 사람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이런 분노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의 것은 성화가 덜됐다 쉽게 말하면 성질이 덜 죽었다 이렇게 말하면 간단하지만 우리는 감히 예수님을 향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하신 분이시고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더 이상 거룩해지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셨습니다. 그러니 이 부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선지자들에게서 이런 분노를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지자들의 사역은 분노 없이는 할 수 없는 사역이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지를 받아 가지고 역사 현장에 등장한 선지자들의 불붙는 메시지의 핵심에는 항상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선포하시는 것이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방종하게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선지자들이 즐겨하는 일은 치를 떨며 분노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하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푸실 끔찍한 재앙을 그들에게 예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이스라엘 역사 한 정점에 등장해서 제일 먼저 외쳤던 말씀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느니라”고 말했을 때, 요한이 어떤 모습으로 그 말씀을 외쳤을 것 같습니까? “얘들아! 회개해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대!” 그렇게 아이들처럼 동네아이들 부르듯이 말했겠습니까? 아니면, 눈물을 비질비질 흘리면서 “얘들아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대” 그랬겠습니까? 보지 않았지만 그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저에게 떠오르는 세례요한의 이미지는 하얀 와이셔츠에 예쁜 넥타이를 매고 살은 배짝 마르고 얼굴은 하얗고 손마디는 그늘에서 글씨 공부만 해서 하얗고 말이죠 바지는 칼날같이 세우고 모래바람이 일어나는 곳에서 바람이 괴롭다는 듯이 흰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고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회개하십시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이렇게 말했겠느냐 오히려 건장한 체구에 거기에 약대 털옷을 두르고 배도 적당히 나오고 그리고 얼굴은 검붉은 얼굴에 광야의 모래바람에 거친 피부에 그러면서도 수염이 나있고 그리고 무엇인가 눈은 거룩한 것을 바라는 염원에 이글거리고, 그리고 입을 열어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를 외쳤을 때, 넓은 광야에 못 듣는 사람이 없이 고고이 울려 퍼지는 그런 장엄한 목소리를 가진 주인공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시면 제 말이 맞냐고 한번 물어 보십시요. 먼저 가는 사람이 빨리 가서 물어보도록 합시다. 그가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외쳤을 때 그것은 다급한 목소리였고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인내를 빌미 삼아 자신의 패역한 길을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을 향한 다급한 경고의 음성이었으며, 진노의 음성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성경 속에는 이렇게 분노의 음성, 분노의 함성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전달해주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그러면 예수님 빼놓고 나머지 모든 선지자들과 세례요한과 혹은 사도 바울이나 모든 거룩한 종들이 그렇게 분노했던 것은 성화가 안됐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승질이 안 죽었기 때문이다. 성질이 아니라 승질입니다. 승질이 안죽었기 때문이다. 라고 보아야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두 가지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을 여러분들은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하는 것은 자극을 했을 때, 외부적으로 자극을 했을 때, 그 자극이 그 자극을 받는 사람의 내면에 있는 부패한 본성과 맞닥뜨리면서 일어나는 폭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패한 본성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포악한 기질과 함께 맞닥뜨려서 그것을 자극하여 폭발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예로든 그리스도와 그리고 선지자들과 세례요한과 같고 사도들과 같은 사람들의 이 거룩한 분노는 그야말로 거룩한 분노입니다. 이것은 외부의 자극이 부패한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있는 포악한 기질을 자극해서 폭발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자극이 그들 속에 있는 거룩하고 하나님을 공경해서 일어나는 폭발이요 분출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외부의 자극을 받을 때에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의 자극을 받아서 그래서 그것 때문에 격동하여 분노가 폭발하는 것은 모든 인간이 다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지마는 외부에서 무엇인가 어떤 자극을 받았을 때 그것이 이 사람 속에 있는 거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본성과 맞닥뜨려서 신령한 폭발이 일어나는 거룩한 분노는 이거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있는 사람들 주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시며 그분이 얼마나 거룩하신 분이시며 그분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 인간들에 의해서 높이 존귀이 여김을 받아야 하는지를 안 사람들, 그 거룩하심을 자신의 신앙의 경험 속에서 체험하고 자신의 죄악됨과 세상의 부패하고 패괴함을 인하여 분노해본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이런 본성이 깃들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우리에게 제일 먼저 가르쳐주셨던 기도의 제목은 예수님이 평소에 하시던 기도의 제목에 첫 번째 제목이었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사신 생애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사시는 동안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세계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라고 기도하면서 이 첫 번째 기도에 목매 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사람 마음속에 부흥을 경험했거나 이미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사람이외에 누구도 이 기도를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주기도문은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 한 결코 주문의 신세를 ”주문“ 예배 끝나기 위해서 하는 주문, 주문의 신세를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교회 속에 한 개인의 영혼 속에 하나님을 아는 거룩한 부흥이 일어날 때 이 기도의 제목들은 아주 진실하고 솔직하고 현실적인 기도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마음속에는 사람마다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기들을 거룩한 말씀사역으로 부르시기에 앞서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렇게 자기를 불러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소명에 대해서 그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위대한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서 스랍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두려워 떨었던 것은 바로 그런 경험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놀랍게 그 영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이 얼마나 존귀하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깨달았던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주님의 이름이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높이 여김을 받고 존귀이 여김을 받고 불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어울리지 아니하거나 혹은 정면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의 이름을 훼방하고 주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동이나 역사나 사건들을 목격하게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그러한 잘못된 사건이나 역사나 개인의 행동을 보게 되었을 때 그것은 자극이 되어서 즉시 그들의 마음에 파고 들어왔고 파고 들어온 그 인식은 그들 속에 잠재하고 있었던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져야한다라고 하는 주님의 영광을 위한 열망을 자극하여서 거룩한 분노를 폭발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을 위해서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랑으로 뜨거워질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나님은 자기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재물로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자신을 소개할 때, 어떤 하나님이라고 소개 하셨습니까? 어떤 하나님이라고 소개했어요? 나 여호와는 무엇하는 하나님이라구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라 보십시오. 사랑이 있는 곳에 질투가 있습니다. 격렬한 사랑이 있는 곳에 뜨거운 분노가 있습니다. 뜨거운 사랑이 있는 곳에 치열하게 타오르는 미움의 불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고 살아가는 것은 성경이 이야기하는 아가페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한번 설교할 때, 한 세 번 정도만 확실하게 ”아멘“ 하면 참 좋겠습니다. 전기다마를 하나 달을까? 여러분! 뜨거운 사랑이 있는 곳에는 치열한 분노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기쁨은 사랑의 슬픔과 함께 갑니다. 치열하게 타오르는 사랑의 불길은 견딜 수 없는 분노와 함께 갑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렇게 돌아보면 정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때에는 우리의 인생이 건조하거나 단조롭지 않아요. 정말 다이나믹해 비록 내가 정확하게 아침 몇 시에 일어나서 밥 먹고 기도하고 또 출근하고 또 퇴근하고 다람쥐 쳇바퀴 도는 삶을 살지마는 그러나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그 생활을 다람쥐 쳇바퀴라고 말하지 않아요. 왜, 눈에 보이는 삶은 단조롭지만 단조로운 그 삶에서 느끼는 그 감정의 기복이 너무나 크고 놀랍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새롭게 알아 가는 기쁨이 있습니다. 날마다 눈을 뜨고 나면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게됩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날마다 변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모습이 구태의연해 보이고 도무지 그 사람이 그 사람 같고 도무지 변화도 없는 것 같고 무미건조한 삶을 이어가는 것 같으면 여러분! 한번 사랑에 빠져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으로부터의 사랑은 쓸데없는 투자를 많이 해야하고 배신 받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배신이라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아무리 가치 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에게 사랑 받으시는 것을 감격해 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특권을 주신 우리의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이렇듯 사랑하는 그 인격 속에는 반드시 질투와 분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할 때 그것을 획일적으로 도무지 분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석을 해서는 곤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여기서 역설적인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분노할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 없이는 우리 속에 분노가 치밀어 오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분노를 가져야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분투하는 삶이 될 수 있고 이러한 거룩한 분노가 있는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불붙는 기도가 불꽃처럼 타오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가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하소서 우리의 죄 고쳐주소서 그는 이미 황폐한 이 땅을 향해 슬퍼하며 동시에 땅을 황폐하게 만든 이 세상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인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바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본성이 자극을 받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이 본성은 그런 거룩한 본성이 촉발하고 자극 받은 것이 아니라 부패한 본성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거나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지 못하는 포악한 사람의 마음 그것이 자극을 받아서 폭발한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받은 사람, 아가페의 사랑을 좇아서 사는 사람은 결코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끓어오르는 분노로 되 갚으며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는 어떻게 하면 그러면 이렇게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고 라고 했는데 그러면 이렇게 많이 성내는 우리의 모습은 결국은 무엇 때문이고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렇게 연이어 패배하는 그러한 모습 속에서 우리자신을 돌이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지를 우리는 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인간의 내면 깊은 속에서는 이렇게 포악한 성품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질문 하나해 봅시다. 가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 잔소리 입에다가 늘 달고 아이들에게 회초리를 휘두르는 성질 급한 어머니, 그런 속에서 학대받으며 자라는 아이들의 심성이 온유하고 곱습니까? 돈도 있을 만큼 있고 따뜻한 주위의 아이들이 온유합니까,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말입니다. 어때요? 물어볼 필요도 없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꾸 가문을 찾는 것입니다. 황당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자꾸 그런 것을 찾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TV에서 상류사회를 특집으로 다루는데 참 뭐 별로 저걸로 가리기는 했지만 별로 대단하게 예뻐 보이지도 않던데, 자기는 상류사회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그런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상류사회 남자하고 결혼해야 됩니까? 물론입니다. 상류사회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은 아닙니다. 간단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참 생각을 많이 했구나 내가 그랬습니다. 쓸데없는데 되게 예리하였습니다. 나는 용도 못 되어 봤지만, 참 그 말에 정신이 버쩍 났습니다. 아! 이게 의식이 이런 것이구나. 왜 그러냐, 그랬더니 아주 간단한 논리예요. 개천에서 용처럼 된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는 상류사회 사람이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는데 문제는 그렇지 못한 떨거지들을 끌고 상류사회로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 참, 예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말이지요 인간의 포악과 인간의 강포함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맞닥뜨려서 그 사랑에 의해서 변화되지 아니하면 어떤 식으로든지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환경, 그 자체가 우리들을 놀랍게 변화시켜 새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를 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니 않습니다. 여러분 그 사람은 다행히 넉넉한 물질과 평화로운 가정 환경에 자랐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덜 포악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건만 갖춰지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그러한 소지를 안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어쩌면 그 사람이 그 포악한 사람과 똑같은 환경 속에서 자랐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보다 배나 더 포악한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일생을 자극 받지 않고 그러면 평안하게 일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나 사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서 불가능하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때 도덕적이고 존경받던 사람들이 어떤 한 상황에서 무참히 무너지는 광경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결국 인간의 본성을 하나님이 변화시켜주시지 아니하시면 아무 소망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거듭해서 인간의 철저한 부패와 인간의 완전한 타락과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과 중생의 씻음이 없이는 아무도 그를 새롭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그의 영혼이 정결케 되어지고 그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 속에 살면서 새로워지는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지속적인 과정의 은혜 없이는 결코 그가 근본적으로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그러한 본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문제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래서 목회를 하다가 종종 정말 포악한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려고 애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하자면 남들이 겪지 못하는 수많은 자극을 받으면서 그렇게 가슴깊이 묻혀있는 내적인 하나님 만나고 변화되지 못한 포악한 본성이 충분히 자극을 받아서 폭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가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설명하기 전에 먼저 즐겨 우리들이 듣던 한 예화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저는 옛날에 어렸을 때 시골에서 그 새우젖 독같이 크고 기다랗게 된 독에다가 감자를 썩히는 광경을 여러 차례 본 일이 있습니다. 어떤 과정을 거쳐서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기억에 나는 것은 감자가 물 속에서 썩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참 내버려두면 이 녹말이 무거우니까 감자가 썩으면서 계속 녹말이 생깁니다, 그리고 물이 가라않습니다. 그 물은 꼭 무슨 물하고 똑같으냐하면 죄송합니다마는 약주물 하고 비슷합니다. 막걸리를 가라앉힌 약간 하야스름한 약주, 생각 안나요? 그런 약주, 그런 약주가 생각이 나지요? 그런 약주같이 맑은 물이 생깁니다. 그것을 볼 때는 그 독이 제법 쓸만한 독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다란 막대기를 가지고 한번 푹 쑤셔서 흔들어 보십시오. 썩은 감자가 위로 뜨면서 온갖 찌꺼기들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신 은혜로 그 본성을 새롭게 하시기 전에는 쑤셔서 폭발 안 할 인간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그러세요. 자신 있어요? 누구든지 쑤시면 폭발하게 되어 있다 이겁니다. 문제는 뭐냐, 얼마큼 쑤셔야 폭발을 하느냐 이게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완전히 핵폭탄입니다. 칼부림이 납니다. 어떤 사람은 몇 번씩 찔러도 씩씩거리고 가만히 있습니다.
필리핀에 몇 년 전에 갔을 때 거기 있는 선교사가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미소가 많은지 몰라요.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골난 사람 같습니다. 그러니 외국 사람들이 돈 싸들고 왔다가도 질겁을 하고 도망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식당에 가서 웃는 종업원들을 보지 못합니다. 물 컵 같은 것도 덜컥, 접시 갔다놓을 때도 덜컥 갔다 놓습니다. 간장이 죽- 엎질러지게 말이지 왜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참 필리핀 사람들은 생글 생글 웃습니다. 수줍은 시골 사람들처럼 그렇게 수줍어 하면서 그럽니다. 그 선교사가 9년인가를 있었는데 한번도 필리핀 사람이 큰소리 내고 싸우는걸 못 보았답니다. 그 말을 하는데 바로 옆집에서 바가지가 막 날아가면서 소리를 막 지르는 것입니다. 하필이면 그때 그럽니다. 그러니까 그 선교사가 목사님! 9년만에 처음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말이요 그런데 하는 말이 무서운 애들입니다. 왜 그러냐, 누군가가 그에게 비난을 퍼붓거나 욕을 하거나 부당하게 대우를 하면 고개를 푹 숙이고 인상을 쓰다가 손이 일루 들어간대 그러면 거기서 권총이 나오고 그냥 쏴 죽이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어떻게 하느냐,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FRANCH 불란서 사람들이 그렇게 기질이 다혈질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남미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월드컵 하다가 자살골을 집어넣었는데 그 사람 그 날 밤 총상 당했어 사람이 저격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골 한번 잘못 발로 찼다고 그냥 죽어버렸어 총에 맞아서 기관총을 가지고 머리통을 난사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렇게 다혈질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필리핀 사람들처럼 꾹 참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권총 꺼내서 쏴버리고 도망가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차이가 있습니까? 결국, 우리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은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기 전에는 결코 새로워지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 쑤셔서 폭발하나 살짝 스쳐서 폭발하나 그 놈이 그놈이지 무슨 별것 있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정말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본성이 변화되어서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단계에까지 오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자면 아까 말씀 드린대로 필리핀 사람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FRANCH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까? 여러분의 인상에 말입니다. 그는 블란서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다혈질적이고 분노하고 막- 이러는 성격을 가진 과격한 젊은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변화되어 가는 놀라운 과정을 보시기 바랍니다.
신학교 선생으로 있을 때인데 가끔 이상한 정신증세 가진 사람들이 가끔 신학교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왜 학교에 집어넣는지 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물어보니까 그 사람의 엄마가 신학교 집어넣으면 정신병 고칠 것 같아서 집어넣었답니다. 도장찍어준 사람은 누구고 받아준 사람은 누군지 이해가 안가 가끔 그런 돌아이들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완전히 돌아이 기질로 돌아서 버린 사람들도 아니고 학생은 학생인데 나이는 좀 먹었는데 건달 비슷합니다. 건들 건들하고 죽었습니다. 몇 년 전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수업을 하는데 손을 들고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하더니 뭐라고 막 떠드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사실 지금 정도만 됐어도 그저 한마디의 말로 제압을 했을 텐데 가 가지고 초보운전인데 새가슴이 됐습니다. 진짜 벌떡 일어 나가지고 뭐라고 그러는데 가령 수업방식이 뭐 어쩌구 히브리어 가르치는데, 새가슴이 됐습니다. 그러더니 말이지 막 뭐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말이지요 돌아와 가지고 말야 “나쁜 놈 같으니 이걸 어떻게 할까, 죽여 버릴까? 잘라버려? 학교당국에 고발해서 잘라버려? 아니면 그냥 계속해서 히브리어를 F를 놔?" 별생각을 다하면서 아! 정말 마음이 상했습니다. 너무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교회에서 당하는 것은 전도사 때부터 그래서 이골이 났는데 학교에서는 다들 ”교수님, 교수님“ 그러다가 말이지 초보인데 웬 깡깽이 같은 녀석이, 너무 괴로워서 새벽에 기도도 못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딱 읽는데 참 한없이 울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읽고 갈라디아 교인들이 결국은 바울도 싫다, 바울의 복음도 싫다 그렇게 배반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면서 막 사도 바울이 책망하고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놀라운 것은 뭐냐하면 형제들아 형제들아 그러더니 그들의 결점을 모두 말하고 난 다음에는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내 안에 그리스도 형상을 이룰 때까지 내가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내가, 하나님이 참, 그러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사도 바울의 마음을 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배우고 나니까 이 가슴속에서 “그놈. 하고 타오르던 진노의, 분노의 불길이 갑자기 꺼져버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그때를 계기로 영원히 그를 미워하는 모든 부자유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참사랑을 알고 나면 제일먼저 우리의 부패한 본성에 영향을 끼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그 예수님의 사랑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을 발견하면서 결국은 그 사랑의 감화를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 속에 있는 포악한 기질과 성품이 서서히 죽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숨을 거두는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나니까, 이 세상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더불어 사귀고 교제하면서도 여기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 죽음 너머에 있는 완전한 죄로부터 자유로운 교제를 그리워하며 사모하며 우리가 우리의 육신을 벗을 날들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깨달았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이전에 그렇게 포악하고 무엇 때문에 그가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포악한 기질을 억제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래야 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포악한 기질을 억제하려는 마음도 적었거니와 억제 할 수도 없이 그렇게 본성을 따라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짐승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리차드 백스터의 책을 이렇게 넘기다가 보니까 기독교 교육에 관해서 쓰면서 ”A saint or a brust" 성도가 되시렵니까? 아니면 흉악한 야만인이 되시렵니까?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진리를 통해서 거룩해지고 변화가 되면 성도가 되지만 그러나 “내버려둬, 이대로 살거야” 그러면서 고집을 쓰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어떤 생애였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는 정말 한마디로 말하자면 못 볼 것을 보면서 사시는 생애였습니다. 정말 못 볼 꼴을 보면서 사시는 생애였습니다. 정말 못 볼 꼴을 보면서 사시는 생애였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 우리가 하늘을 명하여 불을 이 땅에 내리게 하겠습니까?” 허물이 많은 사도들이 보아도 이건 정말 너무하다라고 하는 그러한 반역과 복음에 대한 차가운 거절의 태도를 사도들조차도 보고 분노하였습니다. 완전하고 순결하신 그분이 이 세상을 바라보실 때 얼마나 패역한 세상이었겠으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거슬리고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은 얼마나 완악한 백성들이었겠습니까?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사랑하시던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고 고난을 당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그분은 무엇을 깨닫게 되셨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로 그들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앞에 중보하셨지만 사실은 그분이 불붙는 의로운 분노로 이 악독한 인간들을 멸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셨어도 우리는 예수님을 비난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의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사람이셨고 예수그리스도는 결국 자기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고 십자가의 고난의 잔을 마시도록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정하신 분이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분노할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이미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 그래서 분노하고 포악하게 진노하는 이 본성이 예수그리스도 안에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의 그런 자극을 받아도 그렇게 비열한 인간을 향한 분노와 추악한 분노가 격발될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바울이 바로 이 같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그의 성품을 배웠다고 하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자극을 받아도 결코 타락한 본성과 자극이 맞잡아서 분노를 폭발하는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분노가 있다면 거룩한 분노뿐이었지만 그 분노도 사실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내시기 위해서 억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이 같은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이처럼 자극을 받아도 폭발할 듯이 분노하는 부패한 본성과 함께 만나는 사실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이전에 외부적인 자극이 들어 오기만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폭발하고 그 폭발이 분노를 가져오고 분노가 지속적인 미움을 낳고 그 미움이 결국은 사람을 죽여버리고자 하는 살인의 의도로 이어지는 경험과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서 발견되어지는 이러한 성내지 않는 성품을 비교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고결한 사랑의 성품에 매료되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예수그리스도를 닮고 싶어했던 성품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런 성품이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게 격노하고 분노하고 마치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맞닥뜨린 그러한 성내는 본성을 거룩한 본성인 것처럼 착각하며 동족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마다하지 않는 그러한 분노의 사람이었던 그렇게 자기를 업신여기고 자기를 사도로 생각하지도 않고 자기가 전한 복음을 한때는 감격하다가 이제는 그 복음을 배반하고 이단의 길로 접어들려 하는 사람들을 눈물로 권고 하다가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라는 말이 변하여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아 라고 눈물 섞인 음성으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배운 본성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어떻게 부인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 자극을 받아도 폭발하지 않는 이러한 부패한 본성이 자신 속에서 예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소멸되는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그는 온전한 사랑의 인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간교와 동족의 시험을 인하여 당하는 모든 고난을 감사함으로 견디고 이길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고 손가락질을 받고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내 동족, 이 백성,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모르는 이 만천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속히 알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선교의 소망 이외는 무엇에도 그의 마음에는 상처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이런 부패하고 자극 받을 때 폭발하는 육신적인 이 강포한 본성이 수없이 죽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온전히 죽어서 자극을 받아도 우리 속에 격발시키고 폭발하듯 일어나는 격정적인 인간의 분노가 없으리만치 이렇게 온전한 사람으로 주 앞에 성화 되기까지 그가 했던 고백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자신의 사랑 없음을 보고 죽었습니다.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그 놀라운 사랑을 자기가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진노하게 하고 마침내는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다가오셔서 바울에게 하시는 말씀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고 부르시는 친근한 예수그리스도의 소명에 음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기의 모든 지난 포악한 삶 그리스도를 분노하고 그리스도를 격노케 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심지어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지체들을 때리고 체포하고 죽는데 까지 내어주기 위해서 혈안이 되었던 포악한 삶을 살았던 이 사람에게 이토록 온유하게 대하시는 광경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깊은 감화와 감동을 받았을 것임에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짐승과 같이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도록 성도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외모를 가꾸는데 마음을 기울이는 것처럼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고치는데 마음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인격은 우리의 성품은 얼마나 많이 그리스도를 닮아 갈까요? 몸에 뿌린 아름다운 향수는 3미터를 벗어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의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을 때는 우리의 삶과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풍겨 나오는 그칠 줄 모르는 예수의 향기는 먼발치에서 우리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 감동시킬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향기 내게 하는 사람 되게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같이 포악하고 무지막지한 죄인들이 그 동안 주님을 수없이 진노하게 하고 자극하고 그분의 노를 격동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일체 오래 참으심과 자비하심을 보이셔서 오늘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신 것은 이제 주님의 이 성내지 아니하는 본성을 좇아서 우리가 그의 피로 구속함을 얻었으니 이제는 우리가 그 성품을 본받아서 주님의 참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삶 그 자체가 거룩한 삶이 되어 향기 나게 하시려고 우리를 하나님이 그렇게 일체 오래 참으신 사랑으로 성내지 아니하시는 아가페의 사랑으로 우리를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때까지 감격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전에 내가 포행자요 핍박자였으나 그러나 나를 충성 되이 여겨 그리스도의 일꾼 삼으심이라.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토록 주님을 진노하게 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격동하는 분노로 자기의 죄를 갚지 아니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성내지 아니하시는 사랑으로 그를 불러 인격적으로 설복하시고 신앙적으로 승복시키셔서 예수의 사랑을 전하는 복음의 그릇이 되게 만드신 사실을 기억하며 그 사실 때문에 바로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이전에 쉽게 분노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폭행하고 그들을 살인하려고 하였던 자신의 참지 못하는 그 경박한 분노가 대조될 때에 그는 오로지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는 은혜, 그리스도 예수의 성내지 않으시는 자비한 아가페 이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결국은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그런 사실이 되었던 사실을 우리는 발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분노하고 그리고 그 분노를 통해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 얼마나 엄청난 피해를 보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선,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냄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자극을 받을 때 부패하고 포악한 본성이 반응만 하지 않는다면 자극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은혜가 떨어져서 자극에 반응만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인격전체에 어떤 사람이나 혹은 누구를 향한 그런 검은 먹구름 같은 미움이 가득 차게 됩니다. 분노는 미움을 부르고 미움은 적의를 품게 만들고 적의는 결국 살인하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몸과 온 지체와 온 혈관이 더럽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하게 되면 맥박수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혈액의 흐름이 달라지고 얼굴의 색깔이 변하게 되고 위장의 혈액의 분포 상태가 변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지고 한번 분노하면 한번 늙는다고 그렇게 고백을 했습니다. 오래도록 사는 것이 우리의 꿈일 순 없지만 하여튼 오래 사는 사람의 비결이 뭐냐고 물으면 분노하지 않는 즐거운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보십시오. 세상에서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의 이치야 더욱 분명하지 않느냐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서 성냄이라고 하는 이것은 밖으로 확 쏟아져 나와서 죽어버려! 나가죽어! 왜 태어났어! 이런 포악하고 뭘 집어던지는 것만이 성내는 것이 아닙니다. 성내는 것은 정확하게 정의를 하자면 자극이 내면의 세계에 파고들어서 포악한 본성을 자극해서 그 먹물 주머니 같은 것을 탁! 터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인격과 영혼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되는 그 상태 그게 바로 분노고 그것이 바로 성내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사리에 대한 판단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분노에 사로잡히게 되고 내면의 세계가 성남으로 지배받게 되면 사랑하는 자기의 가족들도 죽일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미움의 뿌리는 곧 살인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우리 속에서 이렇게 성냄이 우리 속에서 확 먹물과 같이 쏟아져 나올 때 그때에 우리의 신앙 생활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미움의 문제가 고개를 들고 확 우리의 영혼을 뒤덮을 때 하나님을 찬송하던 우리의 입술에서는 찬송이 사라지고 저주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던 그 입술에서 이번에는 악독한 말이 먹물처럼 쏟아져 나와야지만 마음이 평정을 찾는 전혀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의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 평정을 모두 되찾고 그렇게 잠시 자기의 영혼이 먹물과 같이 더러운 성냄으로 인하여 어두워지고 더럽혀진 때를 회개의 눈물로 깨끗이 씻고 미움의 감정을 완전히 청산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들어와서 마음이 다시 정결하여 하나님의 사죄의 은혜가 임하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기까지 때로는 가혹할 정도로 긴 시간을 외로운 투쟁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문이 막히고 버림받은 것 같은 처절함 속에서 몸부림 쳐야 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까닭 없이 자극을 받고 부패한 본성으로 격발하는 이 성내는 것을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 지를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하지만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가 아니라 나 아무 아무개는 성내지 아니하며 라고 말할 수 있기 되겠습니까? 그렇게 됐다면 그 사람은 사랑 자체입니다. 우리는 물론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해 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이 완전에 이르기를 포기하라고 가르쳐주는 그러한 결론으로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완전케 하시는 분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부르심을 받아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도록 작정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닮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아 갈 때에 우리 속에는 주님을 닮기 위해서 지불했던 고통을 능가하는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평화와 그리고 주님의 성품을 닮는 자에게 베풀어주시는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잠시 거룩해지기 위해서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받는 고난 거룩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 받는 그 모든 아픔과 고통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큰 위로와 사랑으로 되 갚아지는 것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그것이 화병이 되어서 죽은 사람은 있지만 주님을 닮기 위해서 뼈를 깎고 살을 저미는 노력을 하다가 한이 맺혀서 죽은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들에게는 미래의 상급만 약속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들에게는 주님들 아는 놀라운 지식이 쌓여갑니다. 거룩해지는 사람들은 거룩해지는 사람들끼리만 아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악한 인간의 본성, 사랑이 없는 나의 이 강포한 본성이 날마다 죽을 때 우리는 우리의 본성이 죽는 속에서 고통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내가 죽을 때에만 살아나는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 안에서 봅니다. 그리고 우리는 멀어졌던 하나님 그분께로부터 거룩한 삶을 통해 더 가까이 다가가고 그 하나님과 하나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이것은 우리의 죄가 완전히 죽고 거룩한 성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날마다 부패한 본성을 죽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격발하기를 잘하는 분노하기를 잘하는 우리의 본성을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으로 적절하게 다루어서 우리를 죽이는 열심을 가지고 우리는 날마다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죽으면 그리스도는 사시고 내가 살면 내 안에 그리스도는 죽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주는 인생을 살도록 주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죽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사시기를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말 사모하고 정말 원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사랑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들은 언제나 기억하면서 우리들은 예수께서 우리들을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우리를 죽이는 고난이 아무리 크고 심하다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하나님의 저주하시는 진노를 받으시며 죽어갔던 그 고난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람들 그리스도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언제나 사라지지 않는 별빛과 같이 영롱한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같이 비천한 죄인을 그리스도께서 그 보배피로 구하셔서 주 백성 삼으셨으니 내사는 날 동안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주를 닮아 나를 보는 모든 사람들마다 주님이 누구이신 지를 알게되기를 소원하는 그런 그리움이 있습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날마다 그렇게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자신의 모습을 인해서 애통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주님의 그 거룩한 본성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 속에서 주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아가페를 맛 볼 적마다 자신 속에 그와 유사한 성품이 너무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해서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인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닮아 가는 그런 거룩한 기쁨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새로워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강포하고 포악한 본성을 가졌던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이 무엇인지에 묻는 질문에 대해서 얘들아 사랑은 성내지 않는 것이란다. 이 고백은 간단한 고백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얼마나 오랜 세월을 자신의 포악한 본성과 싸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존재자체가 포악이었던 그 사람이 존재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덩어리가 되기까지 그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죽는 연습을 했을지 우리는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그리스도의 완전한 사랑 때문에 성내지 않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죄악을 긍휼로 갚으시고 우리의 패역함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자비하심으로 덮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부패한 본성과 아직까지도 멸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자극 받기만 하면 짐승처럼 폭발하는 분노를 가진 성도라 일컬음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야만스럽고 무지한 우리 자신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죽기로 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이런 사악하고 부패한 본성이 반응하지 못하고 우리 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우리는 저 깊은 은혜 속에서 주를 붙들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접하고 기도를 통해서 그 거룩한 복음의 샘물에 깊이 잠겨서 우리의 사악하고 부패한 본성의 악독이 빠져나가고 중화되고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를 버리시는 성낼 줄을 모르는 거룩한 본성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보는 자마다 주 본듯한 사람들이 되도록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성도의 거룩해져 가는 기쁨, 온전한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경험하는 완전한 거룩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사셔야 할 사람들입니다.
15.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고전13:5)
사랑은 어느 한 행동의 표현이라기보다는 모든 행동에 뿌리가 되는 근원의 변화요, 이기심과 자아 그리고, 난폭하고 포악한 성품으로 가득 차 있던 내면의 세계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놀랍게 변화되어 본질적으로 새로운 본성을 창조해 나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결과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게되면 내면에 세계의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를 분노하게 하는 자극이 종종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극 때문에 자제를 잃어버리고 우리 자신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이렇게 나옵니다. 물론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것은 사랑의 순수함과 순결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은 단지 열렬하게 끓어오르는 그런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아가페 사랑은 단지 인간이 남녀 사이에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불길같이 타오르는 자기중심적인 격정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다” 이렇게 말할 때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문학소설에서 읽고 TV자막에 수시로 나오고, 영화 포스터에 나오고, 잡지를 펼치면 어디서나 나오는 그런 사랑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에로스의 사랑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으로 비롯된 그 사랑에는 순결한 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가페의 그 사랑은 정말 순결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한 조교가 있었습니다. 아주 당차고 선교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씩씩한 자매였습니다. 선교단체에 깊이 개입해서 지금은 부부가 간사사역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루는 저한테 질문 비슷하게 이야기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교 단체에서 수련회를 가서 간사들이 토론회를 열었답니다. 거기에 있는 간사들은 헌신된 사람들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 직장을 안 갖고 말하자면 학교 같은데 가서 후배들을 돌볼 각오를 한 사람들이니까 상당히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모여서 열심히 기도를 하고 뜨거운데 솔직히 자신을 털어놓는 시간을 가졌는데 거기에서 사랑과 성의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헌신된 간사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는데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사랑한다면 결혼하기 전에도 그게 무슨 문제가 되겠으며, 또 결혼한 여자나 결혼한 남자라도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하는 그런 사상을 상당수의 간사들이 가지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고가 얼마나 그리스도인 청년들에게 깊이 파고들어 갔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옛날에 소설을 조금 읽었는데 지금은 사실 소설 읽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소설 같은 것을 가끔 보면 정말 깊이 빠져 들어가면서 사랑이 너무나 고귀하기 때문에 부도덕이 묻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 자체가 워낙 승화되었고 고귀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라는 것이 여기 아가페의 사랑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뜨겁게 사랑하는 그런 에로스적인 사랑을 얘기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워낙 아름답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부도덕이 묻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마력을 가지고 있는지 읽는 동안에 자기 자신이 그런 부도덕한 주인공의 분신이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아가페의 사랑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사랑은 순결한 것입니다.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순결한 사랑은 그것이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아가페의 사랑이 순결하다는 것, 그리고 아가페의 사랑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선하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그러면 목사님 악한 사랑도 있습니까?’ 악한 사랑은 없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 악을 내포한 사랑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데 삼각관계에 걸려서 한 사람을 쳐서 쓰러뜨려서 죽여버리면 그것은 악한 사랑입니다. 부도덕을 내포한 사랑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탈취하기 위해서 그래서 자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주어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랑에 순결하고 정결한 사랑을 묘사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초점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는 바로 앞부분에 나오는 지난 시간에 이야기 한 ‘성내지 아니하며’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의미는 ‘악한 것’ 할 때 복수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단수로 쓰여졌습니다. 정관사가 붙어있는 ‘그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 이 구절 자체가 바로 앞 구절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성내지 아니하며’ 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는 사실상 하나의 사랑의 속성처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그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 어떤 악한 자극을 가한다고 할지라도 본질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변화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확 뒤집어지고 날카롭게 되어서 자기가 확 분노하게 하는 오물이 쏟아져 나올 것 같은 성냄도 없고, 그런 자극을 받은 것에 대해서 그것을 악하게 생각하고 또 그것을 악하게 갚기 위해서 무엇인가 선하지 않는 꾀를 계속해서 만들어 내는 그런 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우리의 본성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덜 된 사람은 누가 와서 찔렀을 때 확 뒤집어 지는 것-그것이 결국은 인간의 가장 사악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나서 가인이 아벨을 쳐서 죽이고 하나님 앞에 징벌을 얻고 자녀들을 낳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자녀들이 계속해서 번성해서 퍼져 나오는 것들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이렇게 인간이 타락하고 범죄한 이후에는 이전에 없었던 놀라운 성품이 인간에게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분내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담아, 네가 어디 있었느냐?’ 그렇게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 아벨을 찾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가인이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이니까?’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하면서 그 하나님 앞에 대꾸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굉장한 분노가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시를 지어서 노래를 하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입혔으나, 나는 그것 때문에 더 상처를 입히고 더 죽인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타락하고 나서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그 사랑이 허물어지고 나니까 인간 속에는 아주 강포하고 포악한 본성들이 밑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물론 찌르는 것도 나쁜데 그 본성 자체가 완전히 변화되어 있으면 완벽은 있을 수 없지만 그 본성 자체가 놀랍게 새로워져 있으면 찔러도 왈칵 하면서 더러운 오물이 자동으로 쏟아져 나오듯이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통에 무엇인가 꽉 차 있으면 푹 찌르면 ‘쫙’ 하고 쏟아집니다. 다 사라지고 밑에 찰랑찰랑하면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런 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인가에 자극을 받아 가지고 인간에 마음을 찌르게 되면은 찔러서 그 다음에 그 안에 가득히 강포와 믿음이 쌓여서 찔렀을 때 그것이 왈칵하고 ‘확’ 쏟아지고 나면 속이 비는 것이 아니라 쏟아지고 난 그 자리에 뭐가 차느냐 하면 복수심이 차는 것입니다. 복수심은 악의 덩어리입니다.
사랑은 그런 것을 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무엇인가 사람이 모욕을 주거나 자극을 꽉 주었을 때, 그 때에 그 자리에서 왈칵하고 쏟아내면서 사람을 친다든지 심지어는 살인을 한다든지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누르고 참을 수 있습니다. ‘내가 참자’ 그러고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참으면서도 피하기 어려운 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악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정확한 근거가 없이 자기를 자극한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을 악한 쪽으로 해석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자극을 받았던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폭발시키지 못했던 분노 이런 감정을 가지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악한 일들이 일어나거나 내가 그것을 갚거나 혹은 그런 일들을 당하기를 원하는 그런 마음이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락하고 범죄한 인간들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웃깁니까? 이러한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부모님의 문제, 효도에 문제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드렸지 않습니까? 마음속에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평안하게 살았는데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기가 어린 시절에 혹은 살아오면서 찔렀단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향해서 칼을 들거나 몽둥이를 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속으로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누르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에서 그 악한 감정이 쌓인 것입니다.
결혼하지 않는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했는데 70%가 자기 아버지를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상황을 내버려두고 효도하라, 공경하라, 그래서, 어버이날 고기나 한 근 사 가지고 가고, 술이나 한 병 사 가지고 가고(믿는 사람이니까 술은 안 사가 지고 가고), 돈이나 봉투에다 넣어 가지고 갔다 드리고 그것이 효도냐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바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외면의 세계와 내면의 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제로 삼으시는 것은, 부모님에게 고기를 사 드리거나 돈을 드리는 것을 문제로 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도 그렇게 바꾸라는 것입니다. 용서하고 예수님의 참 사랑을 알고 너희가 그런 예수의 사랑을 받았으면 이제 너희가 그 사랑을 본받아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변화되고 나면 그런 것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예화) 일본에서 있었던 일-채플 축제니까 기라성 같은 강사를 기대하는 일본 신학생들 의 기대를 저버리고 지팡이를 집고 모자 하나 쓰고 머리는 하얀 노인 분이 등도 구부정하여 걸어 들어옴. 그 학생 중에 과격한 학생 하나가 뒤에서 걸어 나가시 는 목사님에게 “아, 그것도 설교라고 하고 밥을 먹나” 이런 식으로 다 듣게 욕을 하였음. 그 후로 세월이 지났고 클래스에서 모여 기도회를 하는 중에 회개의 역 사가 일어남. 이 학생에게 ‘너가. 거룩한 종에게 교만했다’고 성령님이 회개하게 하심. 밤새도록 눈물로 회개를 하고 그 분이 어디 계신지 주소를 알아내서 ‘몇 년 언제 목사님이 저희 학교에 오셔서 설교를 했는데, 제가 바로 목사님 바로 등 뒤 에서 그렇게 욕했던 학생입니다’ 하고 용서의 편지를 씀.
답장이 세 줄로 옴. “잊었습니다. 영원히. 바로 그 때에”
마지막이 의미 심장한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맞다. 나쁜 자식, 인간 같지도 않은 놈. 니놈이 목회를 하나봐라. 저것을 잘라’ 이러고 오다가 씩씩거리다가 한 몇 달 있다가 잊어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욕이라는 것은 오물을 자기 얼굴에 끼얹는 것과 같습니다. 차라리 오물을 끼얹는 것이 훨씬 기분이 좋습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는데 무교동에서 건널목을 걸어 내려오는데 어떤 녀석이 철가방을 들고 털렁 털렁 걸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뽀뽀하는 것처럼 오더니 침을 쫙 뱉는 것입니다. 왜 그랬냐고 하니까, 자기는 다른 곳을 보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안하다고 정말 잘못했다고 그러면서 닦아주는데, 이미 닦아주면은 무엇을 합니까? 가래까지 묻었는데. 예수를 안 믿었지만 내가 그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내 나이 또래 밖에 안 되었고, 나는 학교를 다니는데 너는 학교도 못 가고 철가방 들고 다니면서 참 안되었다 하면서 용서해 주었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침 뱉음을 당하는 경험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참기가 쉽습니다. 이것은 세수하고 나면은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모욕은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계속 가슴속에서 살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의하면 사랑 없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분이 워낙 훌륭한 인격을 가졌으니까 ‘확’ 하고 모욕을 하니까 기분이야 순간적으로 나빴을 것입니다. 안 나쁘면 인간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정서가 있는데. ‘확’ 나빴겠지만 그러나, 그 속에서 자극을 했는데 문제는 이 속에서 성내면서 악을 품을 수 있는 그 무엇이 그 속에 거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응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응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용서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직까지 그 문제를 가지고 있느냐? 나는 당신에게 모욕을 받는 그 순간 잊었다. 영원히 바로 그 때에 용서하고 잊어버렸다.
사실 우리들이 바깥에서 악한 것들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 안에서 그것이 대해서 반응을 하지 않으면 죄가 성립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셨습니까? 안 받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유혹을 받으셨지만, 문제는 죄가 성립되려면 유혹에 대해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이 반응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는 것과 믿음을 갖는 것이 똑같습니다.
말씀이 계속 주어져도 우리 안에서 내면에서 그 말씀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반응을 해야지만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에서 그런 자극이 들어올 때 정말 그리스도에 의해서 내면의 삶이 진정으로 변화되고 나면 악을 품고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하면서 악한 쪽으로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사람일수록 사람들로부터 자기가 사랑을 입은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자기가 작은 상처 입은 것은 몇 년씩 몇 달씩 고이고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간직하고 살아가면 그 사람은 새사람 되어도 백 번 새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살아가는 모욕이나 자극은 곧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사랑과 호의를 오래도록 간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삶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의 가슴을 열어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은 큰 상처, 작은 상처, 큰 고통의 기억, 누가 나쁜 짓 한 것, 누가 자기 욕한 것, 지나가다 침 뱉은 것, 등등이 다 쌓여 있는 것입니다. 주저리 주저리 쌓여 있는 것입니다. 가슴팍만 열어보면은 그 사람이 상처 자체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상처의 미학에 쌓여 있습니다. 자기는 워낙 고차원적이고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상처를 쓸어 앉고 살아가는 그런 말하자면 주인공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주인공입니다. 어두움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불순종의 주인공으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자(좋은 사람)는 가슴을 열면 뭐가 있나 하면 누가 나한테 어떻게 해 준 것, 누구에게 도움을 받았던 것, 누구로부터 보낸바 된 그 따뜻한 미소, 누가 나에게 갈 길을 몰라 방황할 떄 가르쳐 주었던 따뜻한 사랑, 이런 것들이 다 간직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의 그 사람은 속 자체가 나쁘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쁜 사람은 기분 좋게 살아가다가도 딱 열어보면 기분 나쁘게 살아갈 수밖에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딱 열어보면 사랑할 수 없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은 뭔가 살아가는 것이 너무 건조하고 외롭다는 느낌이 들다가도 가슴을 열어보면 그 아름다운 향기들이 피어나는 것입니다. 롱펠로우라는 시인이 시를 지었습니다. 다는 기억을 못하지만 두 연이 늘 머리에 뱅글뱅글 생각이 돕니다.
먼 하늘을 향해 그 옛날 내가 노래 한 마디를 불렀지
오랜 세월이 지나버린 후에야 나는 알았네
그 때 내가 하늘을 향해 부른 그 노래가
내 친구의 가슴속에 메아리 치고 있다는 것을
어느 먼 옛날 나는 허공을 향해 화살을 하나 쏘아 날렸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나는 알았네
그때는 그 화살이 어디 간지를 몰랐지만
먼 후일에 그 화살이 나무에 깊이 박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네
이전에 받은 그 사랑 그것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계속 자기 마음 안에서 메아리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상처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계속 그 상처가 메아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인성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인성을 막 파괴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대부분 ‘정신과 치료를 요한다’라는 진단이 나온 사람들 중에서 진짜 뇌 세포의 문제가 있는 사람은 1/10도 안됩니다. 그런 문제들을 나쁜 사람처럼 간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깨닫는 지식이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상처를 받거나 어떤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것이 아픔이 되어서 오래도록 남지 않고 중화되어 없어질 수 있는 그러한 영원의 기능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분노가 되어서 계속 쌓이는 것입니다. 그 말은 어렵게 말하지 않고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커다란 가르침을 줍니까?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단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것을 제일 먼저 충격적으로 배운 사람은 스데반이었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스데반의 순교의 장면은 그 당시에는 그냥 충격이다.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 라고 생각을 했지만 후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나서는 그 스데반의 그 사랑-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와 반대되는 삶을 보여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는 왜 그 사람이 그렇게 다멕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기 위해서 공문을 청해서 쏜살 같이 달려갔던 가장 터다란 이유는 이들이 유대교의 인기를 종식하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유대교의 독무대였던 종교계에 또 하나의 라이벌이 나타난 것입니다. 씨를 말려야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사도 바울에게 무슨 나쁜 일을 했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사실 유대교를 믿지 말라든지, 유대교는 나쁜 종교라든지, 사실, 초기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전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들의 메시지는 간단하고, 단순하고, 분명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시고 그리고, 너희가 십자기에 못박아 죽인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다. 그리고 그는 너희들이 죽였지만 죽은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고 승천하셨으며 다시 그가 오실 것이다. 그때에는 영광 가운데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터이니 너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라” 그것이었습니다. 사실 그 선포의 내용을 보면 그게 무슨 사도 바울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당시의 사람들의 종교를 무슨 사업으로 본다고 할 것 같으면 사업적인 유익이 약간 이해 관계가 부딪히는 그 정도의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마치 하나님을 위한 충성심인 것인 양 부풀려서 그냥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어야 되겠다. 궁극적으로는 죽여버려야 되겠다 라고 하는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달려갔었는데 가만히 보니까 이 사람이 자기의 그 행동과 스데반의 행동을 보십시오. 그렇게 사람들이 바른 것을 설교하는데 그 사람에게 수많은 사람이 돌을 던져서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머리가 터지면서 갑자기 사람이 심리적으로 사람이 여기 이렇게 있다. 죽여라 하고 돌을 던질 때 여러분, 심리적으로 어디를 겨냥할 것 같습니까? 머리입니다. 머리를 겨냥해서 던졌을 때 피가 난자하게 막 흘렀을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여, 이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고요히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는 무엇인지 그 현장에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자극 중에서도 ‘너, 못났지. 바보’ 이런 식으로 놀린 것이 아니라, ‘죽여’ 그러고 돌멩이가 날라 온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아가페로 가득 차게 되니까,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살의를 가지고 자신을 향하여 죽음으로 덤벼드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성낼 것도 없었고, 악을 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스데반에게 없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느냐 하면은 오늘날의 영성과 스데반이 가지고 있는 영성이 얼마나 차이가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집사였지만 평범한 집사가 아니라, 목회자와 같은 집사였습니다. 오늘날의 집사하고는 다른 집사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그런 종류의 영성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들이 병도 고치고 또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그런 일들을 다 하면서도 고린도전서 13장 강해 서론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그 그리스도인 영성의 한 복판에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상하게 왜 성령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포악합니다. 능력 받은 사람들 대부분 옆에 가면은 따뜻하게 느껴집니까? 겁나게 느껴집니까? 능력 받은 사람이 사람 따귀 때리고, 어느 목회자는 교인들을 막 팹니다. 그것이 교계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부모가 자식을 사람되라고 때리지 죽으라고 때리냐.” 그 분에게 내가 묻고 싶은 것이 만약에 그 분 부모님이 그 교회에 교인인데 말을 안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도 패야 됩니까?
그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뭔가 능력을 받은 사람은 거칠고, 그리고, 뭔가 부자비하고 사람들을 막 부딪히면서 지나가는 것이 마치 권위의 능력 받은 사람들만의 독특한 그 무엇인 것처럼 그리고, 거기에 주눅 든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주눅드는 것이 영적인 분을 알아보는 것처럼 그래서 양쪽이 합작품을 만들어서 바보 같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로 만드는 것입니다. 깡통과 돌멩이가 만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조개와 낙지가 만나면 반찬이 되지만 깡통과 돌멩이가 만나면 최악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본적인 공식도 그렇게 생각이 안 돌아갑니까? 여러분보고 묻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고 묻는 것입니다. 왜 수준이 그것 밖에 안됩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영성. 영역이라는 부분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독교의 영성의 한복판에는 뜨거운 사랑이 있습니다. 불붙는 사랑이 있습니다. 능력이 많으면 눈물도 많은 것이 영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사랑 아닙니까? 대부분 자신이 무슨 영적인 능력을 받은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런 것들은 굉장히 많은 부분이 부풀린 과장인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결국 그 속에 사랑의 영의 감화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포악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사도 바울이 이러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랑의 놀라운 진리를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간략히 요약을 하자면 악을 당하면서 사는 생애였습니다. 오실 때서부터 시작해서, 오실 때는 그만두고 그 아이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 어머니인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했음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방 한칸 차지할 수 없었던 것은 세상이 마리아가 미워서라기보다는 마리아 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낸대하게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뱃속에서부터 벌써 악을 받으시는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그렇게 악에게 자극을 받으시고 그런 생애를 사신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렇게 죽도록 고생을 하셔야 되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렇게 고생을 하셔야지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을 배울 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물론 그것이 넓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낮아지시고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에 멀리서 화려한 옷을 입고 우리에게 외친 것보다는 우리와 같이 성육신의 정신으로 오셔서 주리는 자들과 함께 주리고 고난 받는 자들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그 자리에서 외쳤기 때문에 그 음성이 우리에게 더욱 뜨겁게 다가왔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곳은 사실이지만, 넓은 측면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셨는가를 간단하게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람 대접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악을 행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서 보여준 악의 절정이었습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도 그렇게 자기들을 섬기던 예수 그리스도의 손과 발에 못박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잔혹하고 인간이 사람을 가장 악하게 죽일 수 있는 최대의 악한 방법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어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항하고 아버지께 대항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진노하셨습니다. 자기에게 악을 향한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고 진노하신 것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그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바로 십자가에서 남기신 유언은 바로 그것 아닙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모르겠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왜 모르겠습니까? ‘당신들 뭐하고 있습니까?’ ‘우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있습니다’ 뭘 모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이 그렇게 구차하게라도 이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변화해 주고싶고 당신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되지만 자기가 죽기 위해서 악을 행하므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도구가 되었던 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징벌이 미치는 것을 견디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범죄하였을 때 어떤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당신이 온몸으로 경험을 하고 계셨기 때문에 더더욱 이런 심판이 나로서 끝나야지 나에게 이런 고통과 아픔을 준 사람이 하나님께 징벌을 받아선 안된다 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그 밑에 있는 죄인들을 위해서 주님이 용서해 중보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고 주님의 생애일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영성(영역)이라고 하는 그러한 말 하나로 얼마나 우리들은 강포하고 포악한 삶을 살려고 합니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더 섬기고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더 뜨거운 사랑의 사람이 되어서 이전에 누구에게도 녹아지지 않던 돌멩이와 같은 인간들을 그 품에 끌어 앉고 그 사랑으로 녹이고 정말 변화시킬 수 있는 이러한 놀라운 일들이 바로 영성을 입증하는 것이고 영역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전에 있었던 저희 교회 목사님이 시골교회를 갔는데 그 분은 부흥회를 개최할 능력이 없는 시골교회에 다니는 것을 소명으로 알았습니다. 큰 교회에서 오라고 해도 안 가셨을지 모르지만 하여튼 보통 20명, 6명 모이는 작은 교회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가셔서 부흥회를 하시는데, 젊은이 하나를 데려오더니 귀신 들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동네 사람들이 두들겨 팬 것이 아니라 교회 사람이 얼마나 두들겨 패었는지 반 병신에 다 멍이 들었더랍니다. (아니, 귀신이 때린다고 나갈 것 같으면 권투 선수의 집에는 안 오겠네요) 그 놈을 엎어 놓고 얼마나 주먹으로 때렸는지 그래서 사람 기도 실에서 죽이는 일들이 가끔 신문에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절대 그런 바보 같은 행동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미련합니다. 막 두들기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대단한 분이십니다.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 무식한 것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사람 잡으라고 한다고 말하면서 그 젊은이를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잘 안 고쳐져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독특하게 그 분 하시는 방언기도를 ‘주여, 믿습니다’ 하고 하시는데 잘 안되는 것입니다. 하다가 안되고 나니까, 무슨 생각을 하게 되냐하면 자기도 불쌍하고 그 젊은이도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3일을 새벽기도 때마다 강단에 올라오라고 해서 끌어 앉고 그렇게 울었답니다. “하나님, 이 젊은이가 앞길이 너무 창창한데 귀신이 들려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쩌면 좋습니까?” 그러면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씻은 듯이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기독교의 영성 한 복판에는 ‘애애애애, 주여, 주여 (허스키한 목소리), 할렐루야’ 그런 것이 영성이 아닙니다. 누가 그러면 가서 이렇게 말하십시오. “폼 잡지 마셔요” 제가 폼생폼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다 잘못 배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누가 영역이 있고 깊은 영성을 가졌다면 그리고, 그 영성이 기독교적인 영성이라면 그에게는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으며 틀림없이 그에게는 들판을 불지를만한 사랑의 불이 있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린 이런 것을 사도들에게서 충분히 보았습니다. 바울이 죽은 사람까지 살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포악하게 하는데 사용을 하고 교인들을 짓밟고 내가 이런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너희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이런 식으로 사람 잡는데 쓴 것이 아니라, 섬기는데 사용한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 떨리는 마음으로 나아갔다. 너희 중 누가 실족했다 하면 내가 마음 아파하지 않더냐.’ 그러면서 철저히 그 영성을 섬기고 또 섬기고 그리고 연약한 자들을 붙들고 눈물로 살아가는 여기에 사용하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정말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정말 깊이가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폼에 깜박 죽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성경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대개 그것을 심리학적으로 쎄디스투아 마조키스트라고 합니다. 쎄디투스는 두들겨 패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학대하면서.
부흥회를 갔는데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돌아가셨는데 유명한 욕쟁이 부흥사였습니다. 이천석 목사님이 아닙니다. 다른 목사님이셨는데, 하여튼 설교 시작서부터 욕입니다. 자매들이 날이 추우니까 무릎 사이에다 손을 넣고 설교를 들을 수 있지 않습니까? 입에도 담을 수 없는 욕을 막 퍼붓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데 어디 가랑이 사이로 손을 집어넣느냐 하고. 처음서부터 끝까지 욕에서 시작해서 욕으로 마치더라는 것입니다. 고향 후배라 딱 불러서 ‘너, 우리교회 와서 부흥회 할 때는 우리 고향에서는 그러면 안된다. 설교단이 어떤 단인데 거기서 그렇게 욕하고 다니냐? 우리교회선 그러지 말아’ ‘예, 형님 교회인데 제가 그러겠습니까?’
그런데, 정말로 욕을 빼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더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욕을 빼고 하루를 설교를 했는데 집회에 위기가 오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무 능력도 안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다음날 해도 좋다고 허락을 했답니다. 그랬더니, 다시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엉터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까, 가학 증세가 심해진 것입니다. 막 욕을 하고 이러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 중의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면 그렇게 욕을 먹고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을 때에 뭔가 목회자의 품에 안기는 것 같은 그런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마조키스트입니다. 그러니까, 마조키스트가 없으면 쎄디투스가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막 욕하면, ‘너가 뭔데’ 이렇게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성립이 되지 않지 않습니까? 막 욕하면 ‘아멘’ ‘아멘’ 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키워 주는 것입니다. ‘이년들아’ 그러니까 저쪽에서 ‘아멘’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게 다 똥 폼인 것입니다. 천국은 이런 사람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사랑은 악한 것이 아니라, 순결한 것입니다. 깨끗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상처와 고통을 주어도 그것을 인하여 계산을 하고 여기서 이 ‘생각지 아니하고’라는 말이 ‘count' 헤아린다라는 말입니다. 상처가 딱 들어오면 헤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러한 영성의 한 복판에 이러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설교를 하는 이 순간에도 그 엉터리 영성이라는 것에 눌려 가지고 기를 펴지 못하고 노예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게 뭐냔 말입니까? 병든 자가 나으면 어떻고 눈에서 불이 반짝이면 그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니면 아니지.
정말 우리는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독교 영성의 한 복판에 이러한 거룩한 사랑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물론, 도덕적인 성품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고 능력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이게 다소 불균형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20년 전에 불균형이던 사람이 20년 후에도 불균형이라면 그것은 영성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가 우리에게로 들어오면은 정말 순결하게 살고 싶도록 그런 소원과 거룩한 은혜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 그것만하고 다니면 그게 뭐냐는 것입니다. ~랄라라라.. 랄랄라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왜 그러냐고 그러니까, 이렇게 하다보면 방언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방언을 주십니다. 저도, 방언을 받았습니다. 안 받은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면 자기가 못 받았으니까 그러지 합니다. 그럴까봐 주님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은 방언이 온다라고 하는 그러한 논리는 추구점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면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거룩한 능력, 큰 은혜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이 모두 받기를 원합니다. 그것을 받았을 때 교회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한 번 보십시오. 능력이 없는 사람은 죽어 가는 사람을 잘 죽으라고 걱정 말고 죽으라고 그 말하기 위해서 심방을 가는데 능력이 있는 사람은 고쳐주기 위해서 심방을 간다는 것입니다. 초상집 같은 그 상황 수의까지 다 끊어 놓은 집에 기쁨의 옷을 입혀주고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화려한 신앙생활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몰라서 막 혼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은사가 없으면 가서 같이 횡설수설하고 한숨 쉬다가 ‘그래, 세상은 참 거지같지’ 그러고 오는데, 지식의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가서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넌 이래서 여기서 넘어지고 여기서 잘못 되었으니까, 너는 여기서 고치면 하나님이 복 주신데’ 그러고 오는 것입니다. 안개 속에 쌓여서 갈 길을 모르는 사람이 그 심방 한 번 받고 나면은 ‘아, 길이 있구나!’ 딱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런 은사를 교회에서 받았을 때 얼마나 훌륭하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자체를 보십시오. 성령의 은사를 주셔도 사람들이 은사라고 하는 것은 한 순간에 하나님이 주실 수 있지만은 그것이 성령께로 오신 것이면 그가 계속해서 거룩한 삶을 사모하게 되고 그 영성으로 인해서 자기가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생인지를 알고 주님의 인내를 보면서 인내를 배우고, 주님의 온유를 보면서 온유를 배우면서 그런 능력을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사도 바울처럼 그렇게 겸비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성의 한 복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움직이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는 무엇인가 영적인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성령의 은사인가? 하는 것까지 확신이 안 갈 적이 많지만은,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 더욱 불행하게 된 사람을 많이 만났습니다. 캄캄한 돌머리였는데, 빛이 하나 ‘퍽’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예를 들자면 신비한 체험 하나였습니다. 그것 하나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 줄 아십니까?
그것 이외에는 말씀도 아니고, 신앙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닌 것입니다. 모든 기독교의 진리는 자신이 받은 체험 하나를 입증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은 얼마나 허무 무지한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모든 영성의 한 복판에는 이 그리스도 예수의 아가페의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깊이 그 사랑에 감화를 받고 나면 말하자면 내가 능력을 받은 것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성령에 은혜의 체험을 통해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한 인식이 내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 주님 앞에 더욱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배척을 받으시고 악을 받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사람들이 수 없이 와서 찌른 생애였습니다. 마지막에는 못박아 죽이신 생애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도는 사랑 자신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미움이나 정화되지 못한 인간을 향한 악한 감정들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분에게 가득 찬 것은 진리와 사랑 이외에는 가득 찬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 없는 자극을 가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얻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렇게 무지하게 자신을 자극하는 그 불쌍한 인간들에 대한 연민만을 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우리에게 비추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다양한 신앙의 체험 없이 어떻게 우리가 여기까지 걸어올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손을 씻어 정결하게 하려고 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하고 우리의 마음을 가다듬어서 똑바로 정신차리고 신앙 생활 하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기도도 하고, 더 많은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고 능력으로 무장되기를 우리는 참 사모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그런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얼마나 내면의 세계가 변화되었습니까? 우리의 겉모습을 치장하고 그리스도인답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일에는 많은 투자를 했지만, 그러나, 내면의 우리의 사랑이 거룩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변화된 인격을 가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자신을 위해서 자신과 더불어 싸우고 포악한 옛 성품을 못박기 위해서 주님의 더 큰사랑에 붙잡히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거의 변화되지 않는 모습으로 주 앞에 서 있어서 겉모습이 그럴 듯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와서 뭐가 있나보다 하고 들어와 보면 포악과 강포의 열매 이외에 맺힌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참된 지도자나 좋은 그리스도인은 멀리에서 볼 때는 별로인 사람으로 보여도 괜찮습니다. 한 발 가면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구나, 한 번 더 가면 사람 참 좋다, 좀 더 가면 이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향기로울 수가 있을까? 더 가까이 가면 이 세상에 있기에는 정말 아까운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뭐하지만 세상이 감당하기에는 말하자면 조나단 에드워드의 사위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대해서 서문을 쓴 사람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가 왜 일찍 어린 나이에 죽었는가? 세상에 오래 두시기에도 너무 순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데려 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느껴져야 되는 것입니다. 어머, 세상에 어쩜 저렇게 폼 날까? 한 걸은 다가가면 이상해. 좀 더 다가가면 평범해. 좀 더 다가가면 세상에 인간도 아니네, 좀더 다가가면 세상에 저런 사람이 어떻게 살아 있을까? 저 사람 세상한테 미안하지도 않나? 이게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안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에게 뭘 기대합니까? 내가 불신자라면 그리스도인에게 기대하는 것 아무 것도 없습니다. ‘거짓말 치지 말고 요리조리 눈치보지 말고 제 할 일이나 똑바로 해라’ 그렇게 하고 싶은 것이 세상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영성, 영성하고, 영역, 영역하지만은 우리가 정말 기독교적인 영성을 가졌는가? 예수의 영역을 가졌는가?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 대군을 이끌고 돌격하는 총사령관의 모습 같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불신앙의 땅들을 귀신들을 내어쫓으면서 제압시키면서 그러다가 연약한 지체를 만나고 교회의 슬픔을 만나거나 시험을 만나거나 혹은 자기가 그 지체들에게 사랑으로 권면해야 할 때를 만나면 그 사람은 지극히 사랑으로 물 같이 녹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연약한 그야말로 바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의 영성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수없이 위대하고 능력 있는 사역들을 하면서도 마지막에는 그 가슴속에 깊이 남았던 것은 그 위대한 자기가 남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그렇게 만드셨던 예수 그리스도가 남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 윗필드가 일평생 외쳤던 그 외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로 하여금 이 윗필드는 잃어버리게 하십시오.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말아요. 오직 내게 전했던 그리스도 예수만 기억되는 것이 내게는 행복입니다’ 그게 정말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얼마나 부패하고 포악한 성품이 자리잡고 있는 지 지켜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 속에 있는 이러한 포악하고 많은 것들, 그러한 많은 것들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극을 받고 자극을 받으면 부르르 끓어오르고 끓어올라서 우리 몸을 스스로 더럽혀서 그 뒤에 장기적으로 지속적으로 악한 마음과 악한 감정을 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두 무엇이 되느냐 하면 비유를 하자면 하늘을 차고 오르는 연에다가 돌을 매달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고 무엇을 하는 것을 보면은 그런 무거운 것들이 다 하나하나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막 비행기를 띄워 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엔진에 불이 번쩍번쩍 나는 대도 뜨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많이 달았기 때문입니다. 연을 띄워 보려고 어린아이가 들판을 가로질러 달렸는데 안 뜨는 것입니다. 연 끝에다가 기다란 꼬리를 달아야지만, 바람을 차고 오르면서 팡팡하게 오르지 않습니까? 수십 미터까지 팡팡하게 오르지 않습니까? 뒤에다가 돌멩이를 죽 매달고 돌멩이를 띄워보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부르짖어도 삶으로 아멘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외치는 소리가 교회당에 가득하고 통성기도로 교회당을 가득하게 매울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보좌에는 정막이 깃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한번 사도 바울이 배웠던 것처럼 예수님의 성품을 앞에서 배워야 합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생애, 짓밟히신 생애, 수많은 사람이 준비했던 악의 덫을 당신 가시는 발길 발길마다 놓았던 그런 당하시는 생애를 사시면서도 마지막에는 우리를 성내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향한 어떤 악의 감정도 남기지 아니하시고, 단지 너희가 이렇게 했지만 난 복수하지 않겠다 하고 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당신의 육신을 쪼개어서 보증하고 그 구원의 다리를 놓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포악, 악독, 그리고, 분노하고 성내어서 무엇인가 악을 계획하고자 하는 이 모든 마음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이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단지 누군가가 나를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속이는 것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그렇게 되는 것은 너희를 휘 집어 놓은 사람들이 워낙 힘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대신에 너희 안에 나의 아가페가 없구나” 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오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고 말입니다.
1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고전13:6)
저는 지난 시간에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를 가지고 꽤 긴 시간동안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의 요지는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는 앞에 나와 있는 그 성내지 아니하며와 밀접히 연관된 사실이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성내어지지 아니하며로 수동태도 되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자극을 주어서 변화되지 못한 본성 밑바닥에 깔려 있는 포악한 성품을 자극할 때 사랑은 그런 자극을 받아도 악한 것을 생각하며 보복하기를 꿈꾸지 아니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드리면서 사랑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6절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희랍어 본문에는 “그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사랑이 한 소극적인 요소인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 다음 시간에는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랑, 즉 아가페는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랑이 가지고 있는 순결한 특성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사랑과 성경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하시는 사랑의 또 다른 차이점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에 많은 불의와 죄악을 미화시키거나 오히려 덮어버리기가 일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논리에 취해서 옳고 그른 의와 불의에 대한 분별을 잃어버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감동 깊은 문학제품이나 영화를 보면서 사랑에 관한 주제를 다루어나가는 것을 보거나 혹은 읽을 때에 우리들은 그 소설이나 드라마 속에 흐르고 있는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가지고 묘사되고 있는 사랑 때문에 많은 죄악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 사랑 때문에 묻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랑은 언제나 불결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불결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될 수 있는데 하나는 그 사랑이 아무리 사람들 속에 오가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순결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모르는 사람들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깨끗할 수 없다는 개념과 또 하나는 이 세상에 흐르고 있는 사랑에는 항상 이런 도덕적인 부패를 내포하고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사랑에 대한 이러한 생각 때문에 얼마나 많이 의로운 우리의 판단과 사고가 영향을 받는지 모릅니다. 자 여러분들에게 이 문제를 좀더 실감나게 설명하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화) 여러분들은 읽으셨는지 모르지만 헤르만 헷세라는 유명한 독일 소설가의 대표적 인 작품가운데 나르치스와 고르트문트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와 사랑”이라는 이 름으로 번역되어 엄청나게 많이 읽힌 책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그 책을 깊이 탐독했고 저야말로 이 책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세계의 몇 사람 안되는 사람 가운 데 하나일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앞부분에 헷세가 “나는 이 책을 모든 사람들이 이해주리라고 생각하면서 쓰지 않는다. 서너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고 할 때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내가 바로 서너 사람 중에 한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르시즘에 빠져있었던 사람이 었습니다. 워낙 분량이 많아서 그 스토리를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책에 보면 고르트 문트라는 주인공이 나르치스와 대조를 이루는데 나르치스는 아주 차 갑고 지성적인 사람의 대표이고 고르트 문트는 사랑을 쫓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보헤미안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헷세의 마음속에 있었던 한 인간 속에 긷든 두 본성이 갈등을 일으키는 과정을 묘사해 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는 고르듯 문트의 보헤미안적인 방랑의 역정이 줄줄이 기록되어있 습니다. 한국으로 말하면 김삿갓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사람은 김삿갓에 비해 젊 고 아름다우며 예쁜 사람입니다. 그리고 어느 곳을 가든지 많은 여자들이 그를 따릅니다.
그런데 중반부 이후로 넘어가면 아주 선정적인 장면이 많이 묘사됩니다. 고르트 문트가 방랑을 하면서 많은 여자들을 만나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들이 나옵니 다. 그곳에는 성적인 결합이 있고 사랑하다가는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 애정 편력을 그립니다. 그런 것과 오늘날의 가끔 불륜으로 문제를 일으켜서 신문기사 나 주간지에 나오는 두 가지를 볼 때 똑같이 하나님 앞에 불결한 성적인 범죄를 한 사건인데도 이상하게 후자는 불결한 느낌이 드는데 반해 전자는 죄악까지라도 상당히 미화된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사랑의 결함있 는 구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불법과 불의가 덮여지고 옳지 못한 것이 정당화되어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묵인하고 통용되며 이해되는 것들이 마치 그런 일들을 많이 행하고 많이 불법한 것들을 덮어주고 없는 것처럼 해주면 그것이 곧 사랑이며 사랑의 정도에 비례하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 많이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러한 것을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했던 사랑이 아니라 오늘날 타락한 이 세상의 사랑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사랑의 특성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사랑이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사랑을 이야기하고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을 그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대부분의 사랑은 오늘 성경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사랑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로부터 말미암는 하나님의 사랑은 참으로 순결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은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전해준 사랑에 대한 교훈이 생각날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느니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이야기했던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라는 말은 사랑은 모든 불의와 불법을 모두 덮어주고 이해하고 용납해야된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허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 같이” 그렇게 말씀하셨던 같이 이곳에서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에서 허물을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을 향한 불법이나 불의를 우리가 용서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피해를 받고 우리가 손해본 것을 우리가 사랑으로 베풀 때 그것을 덮어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자체는 오히려 하나님의 교훈에 어울리고 적합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사랑을 보면 그 사랑이 무조건 모든 불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순결한 성격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순결한 성품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기만 하면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이 순결한 사랑의 성격을 바로 이해해야만 우리들은 사랑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고 멀리 떠나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히려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 33년의 생에를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며 사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지은 허물과 죄악을 해결해주셔서 우리를 그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한 방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인생들, 그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하나님의 진노아래서 죽어갈 수밖에 없는 많은 죄인들 그러면서 그런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채 범죄하면서 계속해서 심판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주님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진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구원의 길을 여셨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그것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죄를 향한 불붙는 하나님의 진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죄를 향해서 불붙는 진노야말로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을 대해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의 불붙는 진노는 호세아 선지자가 말한 여호와 마음의 불붙는 긍휼과사랑만큼이나 농도가 짖고 강도가 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품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알 수 있고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면 그 죄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향해서 진노하시고 분노하시는지를 깨달은 만큼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이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죄를 향한 이러한 진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낱낱이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신 그 끔찍한 형벌과 찢기시는 깊은 고통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해 불붙는 진노는 바로 인간의 불의를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순결한 사랑이 가져다준 성품이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의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함과 도전으로부터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지키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성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을 가지고 계시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아가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이 세상에서 실천하고 나누기 원하시는 사랑 역시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거룩한 사랑은 불의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아니하고 불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아니하면 그 사랑은 참 아가페의 사랑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형벌을 당하신 모든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그 고난의 두 가지 형상을 한꺼번에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불붙는 사랑과 죄를 향한 하나님의 타오르는 진노를 동시에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향해 타오르는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순결의 또 다른 측면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순결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불의를 향해 진노하게 만드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순결한 채로 보전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랑가운데 다가오시지만 죄를 향해서 분노하고 진노하시는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에 가운데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 언급되고 있는 수많은 사랑은 사도 바울 스스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깨달은 사랑이었다고 첫 시간에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의 이 같은 측면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웠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로 돌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분이셨고 온유한 분이셨고 투기하지 않는 분이셨으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사랑을 가지신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의 세계를 사시는 동안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달콤한 사랑을 가득 가진 사랑의 화신처럼만 나타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분은 사랑이었고 사랑 자신이었으며 완전한 사랑 속에서 사신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 우리의 영적인 상태가 바닥으로 내려가고 우리 속에 있는 영적인 신앙의 자원이 고갈되어질 때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악한 본성을 드러내어 아직까지도 주님의 사랑에 의해 충분히 강화되지 아니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충분히 성화되지 아니한 우리 자신 속의 포악함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리 인력으로 밑바닥을 파고 들어가도 예수님의 밑바닥에는 포악함이나 성냄이나 분노나 포악한 기질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셨고 성령이 함께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관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매우 특별한 관계였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당신이 함께 하시는 놀라운 징표들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임재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전파하는 말씀과 치료하시는 그의 사역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들은 예수님의 영성을 의심하거나 예수님 마음 밑바닥에 있었던 도덕적인 불완전성을 거론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느 순간에 포악한 성품이 발동하여 잠시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린 적이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서를 넘기면서 차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짚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분노하고 진노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의 믿음 없는 것으로 인하여 분노하시기도 하고 때로는 바리새인과 유대인들과 외식을 보면서 분노하시기도 합니다. 혹은 비둘기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로 가득 찬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분노하시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장면에서 다양하게 분노하고 계시는 모습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분노하실 때에는 사람이 분노하는 모습과 다른 모습이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웃으시면서 분노하시는 적은 없었습니다. 농담을 하면서 분노하시는 적은 없었습니다. 분노의 바탕을 틀릴지라도 분노하시는 겉모양은 우리들이 분노하는 것과 매우 흡사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격정에 사로잡히셔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악한 바리새인들과 외식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 “화있을지언저” 노래하시면서 그들에게 화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친히 보거나 듣지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화있을지언저”. 그 진노하신 말씀은 팔복산에서 들려오던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시던 그 음성과 어조와는 다른 것이었을 것입니다. 회개를 외쳤던 세례 요한의 선포가 속삭임이 아니라 우뢰와 같은 우렁찬 목소리로 역사의 한가운데 번갯불을 동반한 천둥소리와 같이 들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의 가득 찬 음성도 위엄에 가득 찬 동시에 격정에 사로잡힌 음성으로 이스라엘의 회중 가운데 들려졌을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노의 말씀을 하실 때에는 주님이 분노하고 계셨고 그리고 불의를 꾸짖으실 때에는 그 불의에 대해서 대단히 진노하시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생애를 사셨다 하실지라도 우리는 그렇게 주님이 진노하시고 때때로 분노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이 없는 생애를 사셨다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없고 주님의 생애가 불안전한 생애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보다 분명한 그림은 사도행전으로 넘어오면서도 구체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으로 넘어오자마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께 바치기로 약속한 자신의 돈을 처분한 일부를 감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 베드로의 말 한마디 앞에 시체로 되어 실려나가는 장면이 사도행전에 실려있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그 순간은 사도 베드로의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떠났고 그가 이전에 배를 탈 때 가지고 있었던 포악한 기질이 발동하였다고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두 사람이 시체로 실려나가는 순간에 베드로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이 진지하고 거룩한 사역의 한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랑과 분노의 특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그 해답을 오늘 고리도전서가 답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불의와 야합하고 악한 것과 손잡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는 대신 불의에 대해 분노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노는 단지 복수심이나 적개심에 불타는 분노만이 아닙니다. 이 분노는 슬픔을 동반한 분노입니다. 좀더 쉽고 자세하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참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이 세상을 적당히 살아갈 때에 그는 이 세상의 성공 여부에 의해 울고 웃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모든 감정의 기복은 세속에 의해 움직이고 그의 모든 감정적인 고조는 세상의 형통과 그렇지 못한 환경에 의해 좌우됩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참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는지 깨닫게 될 때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가장 잘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예수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특히 부흥의 때에 나타나는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죄에 대한 깊은 통회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식이 생깁니다. 개인적으로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여러 가지 많은 현상이 나타나지만 그 중에 뛰어난 것이 하나님의 참사랑이 강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전에 그 사랑을 몰랐을 때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래서 되는가, 그래도 내가 집사인데, 그래도 내가 교사인데, 그래도 내가 장로인데, 내가 목사인데”하는 이러한 인간적인 체면이 그로 하여금 도덕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었지만 그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안 다음에는 죄를 두려워하는 이유가 죄가 가져다주는 형별이나 죄가 가져다줄 나의 수치나 부끄러움 때문에 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가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혹은 하나님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대한 정상적인 적용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기 전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이 얼마나 뛰어나며 그 사랑을 내가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고 그 사랑 가운데 사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그 사랑을 모르고 살았던 수많은 날들이 나에게 있어 원통한 날인지를 깊이 깨닫지 않고는 진정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똑같이 율법을 지켜도 이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는 징벌하실 것이라는 공포감속에 율법을 지키는 것과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아서 어떻게 하면 내가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랑을 내가 깨닫지 아니하고 그 사랑에 대해 올바로 반응하지 아니하면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율법을 지키는 동기가 되는 것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의 시대에 율법을 지키던 많은 사람들의 신앙적 실패가 그런 식으로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가 될 때에 그것이 비로소 온전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고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연결이 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주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깊은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깊이 알게 되면 그 사랑 때문에 스스로 범죄하는 것이 그 사랑에 대한 배신이라는 마음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를 받게 되면 우리 속에 놀라운 새로운 본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한쪽에서 생겨 나는 것이 불의한 세상에 대한 깊은 애통함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과 생겨나는 것은 그러한 하나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 주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못하게 살아가는 사악하고 무자비한 이 세상을 볼 때에 마음속에서 깊은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체험하고 나면 불의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참사랑과 이 세상의 사랑이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사랑을 덮개로 해서 어두운 그늘이 생기고 그 사랑의 그늘의 덮개에 의해서 많은 불의와 불법이 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투명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들이 깊이 사랑하게 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향해 감추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든지 우리의 삶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느니라”고 하는 것이 짝으로 나오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주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어떤 사랑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어두움 속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신이 만족하고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나는 불의한 세상, 불의한 삶이 아니라, 의로운 삶, 어두운 속에 있는 삶이 아니라 빛 가운데 사는 삶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빛 가운데로 인도해주는 것이 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러한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면 불의한 세상에 대해서 그렇게 분노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마음입니다.
보십시오. 이렇게 하면 여러분의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불의한 종교지도자들과 사악한 바리새인들을 보셨습니다.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속은 시커멓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없으며 율법을 행하고 선한 일을 행하지만 그것은 모두 자기 자신이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높임을 받고 싶어하는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자신의 행위 때문에 율법의 기초가 되고 동기가 되어야 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과 의로움은 모두 내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삶은 껍데기뿐이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보시자 그들이 그러한 식으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을 하늘 영광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는 얼마나 다른 사랑인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희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나를 하늘 영광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셔서 나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너희들에게 구원과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거늘 너희들에게는 진실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을 섬기고 사랑한다며 주님의 뜻대로 산다고 말하는 모든 외면적인 모습들이 가증되고 거짓과 외식과 부패와 타락한 본성을 회칠한 무덤과 같이 덮어버리려고 하는 거짓과 위선과 술수로 가득 차 있는 그 모습이 바로 너희들이 모습이라면 이것이 하나님의 참사랑과 너의 속에 있는 본성과 얼마나 다른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셨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스스로 낮아지셔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인간과 함께 결핍과 고난을 받으신 생애를 사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아는 분이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을 인간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아리고 헤아려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양으로 이세 상에 내려오신 그 광경, 그 겸비함, 낮아짐의 비참함에 대해서 우리는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영광이신 하나님이신 그분이 세상을 위해서 자기의 영광을 버리고 내려오셨을 때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겪으신 그 겸비함과 고난과 고통은 곧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함께 느끼는 고통이었고 아픔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내려왔기 때문에 참사랑을 그러한 식으로 거짓과 허위와 위선으로 대하고 있는 그들을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진노가 솟아오르게 만들었고 어찌할 수 없는 분노가 마음 밑바닥에 치밀어 오르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상황에 자극을 받아 생겨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부터 부어진 분노였습니다.
여러분 시편을 보면 끔찍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악인을 향한 저주의 기도가 많이 나옵니다. 이것도 우리들은 지금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보면 모든 문제가 풀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타난 시인들의 미성숙한 신앙과 아직까지도 성화되지 못한 포악한 본성에서 비롯된 잘못된 기도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시인들이 깊이 경험했기 때문에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에 부합하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가는 죄인과 포악한 죄인들을 볼 때에 시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분노, 거룩한 분노가 폭발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여러분들이 불의하고 부패한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이 있는가를 보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누구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도 세상이 포악하고 불의하게 돌아간다는 소리를 듣고 이곳저곳에서 잘못된 소식과 부패한 소식이 들려오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분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신문에는 8월이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사셨던 지상의 세계를 완전히 반 기독교적 입장에서 묘사한 영화가 공연심의위원회를 통과해서 한국에서 상영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막달라 마리아와 정사하는 장면까지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소식이 여러분에게 들릴 때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분노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무엇인가 공법과 올바른 것들이 바르게 펴지지 않고 굽어지고 하나님의 참사랑의 정신이 왜곡되는 현실과 직면하게 될 때에 여러분에게는 분노하고 그 현실에 대해서 끌어 오르는 진노하는 마음이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가슴속에서 옳지 못한 일을 보고 분노가 끌어 오르고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사람들이 살아갈 때에 그것에 대해 분노하는 마음, 이 세상이 모두 주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에서 세 들어 사는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창조주이심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이 모두 그 거룩한 하나님의 손에 의해 빚어져 이 세상에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기간동안 잠시 머물다가 사라지는 없어져야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피조물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교만하고 방종하며 하나님의 창조의 권한을 대항하려고 하는 방종하고 사악한 본성이 나타날 때 여러분의 마음속에 분노가 있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멸시하고 말씀을 우습게 여기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을 볼 때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분노가 일어나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선지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우리들은 봅니다. 그들은 한 시대에 태어나 그 민족가운데 한 형제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히려 자기의 형제들을 위해 오히려 심판의 칼을 드시도록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은 동족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거룩한 이름이 모욕을 받고 있는 현실을 보며 마음속에서 불붙고 있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현실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형제를 멸해서라도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영광을 되찾도록 하나님께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도 투철했기 때문에 그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도대체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기도를 반복할 수 있는 예언자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 백성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말씀하셔도 돌이킬 줄( ? ). 모두 망하고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감람나무 열매 없고 포도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에 송아지가 없을 지라도, 흉년이 들거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모두 황무하게 되고 우리의 먹을 것조차 없다 할지라도 그렇게 되어서라도 주님의 거룩하심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우신 분인지 드러날 수만 있다면 저는 오히려 넉넉하고 형통한 세상에서 주님의 이름이 억압을 받고 더럽게 여김을 받는 것을 보며 살기보다는 망해버린 폐허 위에서 주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지자들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뜨거운 사랑은 이러한 순결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흐느끼는 사람, 주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는 이 현실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땅을 멸해서라도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주님의 의로운 세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면 정말로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런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사랑의 사랑은 혼탁하고 불투명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아버지께로부터 온 아가페의 사랑은 투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대가없이 무조건 사랑해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차고 넘치는 사랑을 가지고 계셨지만 그러나 우리의 죄와 불의를 미워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를 처참하게 형벌하시고 그에게 짊어지운 우리의 죄를 향해서 당신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와 죄인을 향한 타오른 의로운 성품을 모두 쏟아 부으신 후에 비로소 감격적인 사랑을 우리와 누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셔서 우리의 불의를 위해 짊어진 그 죄로 말미암아 끔찍한 형벌을 당하셨습니다.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시고 그 십자가가 피로 낭자하게 되기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유보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참사랑은 우리에게 나타나서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들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피가 모두 흐르신 자리에서 우리를 얼싸 안으시고 흘리시는 감격적인 사랑의 눈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입니다.
저는 이러한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도무지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상당히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것을 빌미 삼아 하나님 앞에 적당히 살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야할 의무를 사랑을 빌미 삼아 얼마든지 무효화시키고 얼마든지 살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입으로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이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바꾸데 개선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약 불의를 개의치 않는 사랑을 하시는 분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돌아 오라, 돌이키라, 악을 버리라, 불의를 멀리하고 죄에서 벗어나라는 말씀을 자꾸만 하셨겠습니까? 죄가 묻었으면 묻은 채로 끌어안으시고 불의를 지고 왔으면 보따리 채 우리를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의에서 떠나며 죄에서 떠나라고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게 정결케 되기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의 특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어떠한 죄인도 용납합니다. 의로운 사람들만 주님이품에 안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망 없는 사람들을 그 품에 안으십니다. 혼자서 아무런 희망이 없는 사람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의로움이라고는 아무런 소망이 없고 이 세상에서 오히려 도덕적으로 파산해서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 인간으로서는 모든 희망을 벗어버린 절망적으로 죄 가운데 빠진 그 사람을 주님은 보혈의 능력으로 그러한 사람들을 건져내십니다. 구해내시고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들을 이끌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죄인을 용납하시는 것이지 불의를 용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그 죄인이 하나님의 큰사랑을 알기 전에 회개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돌이키는 과정이 필요하고 자신의 죄를 벗어버리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도 없으며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고 불의가운데서 떠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지절거리는 것에 불과하지 문제는 내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 가지고는 살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속에 깊이 경험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붙잡아야지만 그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불의를 용납하거나 불의를 눈감고 넘어가지 않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순결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결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페의 사랑에는 죄에 대한 분노가 있지만 동시에 그 죄 가운데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 대한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분노하지만 그러나 죄인들에 대해서는 깊은 슬픔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무나도 하나님을 떠나 회개하지 않고 패역하게 살았기 때문에 멸망을 앞둔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던 그 모습은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를 향해서 진노하고 불법을 향해 진노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사랑 속에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 가운데 멸망하는 죄인들 향해 손뼉 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오히려 죄 가운데 멸망하는 이 세상의 인간을 바라보며 아파하며 고통하는 제사장의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었고 마음이었습니다.
그들이 죄인들을 향해 슬퍼하고 죄인들을 향해 눈물 흘리는 것은 단지 동정심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고 깨달았으면 그들이 받았고 누렸을 놀라운 축복과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죄 가운데서 죽어 가는 현실 사이기 너무나 커다란 격차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처지를 인해서 슬퍼하고 아파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참 아가페의 사랑을 안 사람들에게는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불의 가운데서 살아가는 인간들을 향한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의 사랑은 불의에 대해 진노하지만 무자비한 사랑이 아닙니다. 분노하지만 그것은 보복을 꿈꾸는 그러한 분노가 아니라 죄 가운데서 죽어 가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진 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생애를 통해서 가르쳐준 이 모본을 통해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참사랑에 대해 깨달은 것입니다. 그 사랑은 정말로 불의에 대해 진노하고 노하지만 그러나 그 사랑한 순결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죄를 미워하지만 죄인들을 한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이 세상을 사시는 동안 죄인들을 향해서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죄인들을 향한 참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죄인들을 보시며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를 올리셨습니다. 분명히 그 죄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죄였고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죄 가운데 태어나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 살아서 결국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는 인간의 영원에 대한 깊은 연민을 가지고 이들이 하는 것을 이들이 모르고 있사오니 하나님아버지께서 그들을 용서해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페의 사랑은 상반된 특성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아가페의 사랑은 아주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아가페의 사랑은 불의에 대해 진노하는 것과 함께 인간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눈물이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있는 사랑은 이렇게 사랑의 하나 속에 증오와 사랑, 증오와 애정이 들어가 있는 사랑이 없습니다. 슬픔과 분노가 그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과 진노가 함께 들어가 있는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이러한 사랑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비추어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아니하면 영혼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한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영혼을 얼마나 뜨겁게 사랑하는지를 보면 그가 하나님 앞에 예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그 구원의 은혜 속에 담긴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고 나면 이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가장 뚜렷한 변화는 사람의 영혼에 대한 관심입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환경이나 성품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가 있지만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다고 말하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로 안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면 그는 그렇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든지 고통하는 영혼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들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무거운 의무감을 느낍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공통된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실제로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든지 복음을 전하든지 아니면 그들이 정말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자기가 무엇이든지 희생해서라도 그들을 좋은 그리스도인들로 만들로 싶어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들이 좋은 신앙을 가지고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알 수 없이 기뻐하는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잠겨 영혼들을 보게 됩니다. 이전에는 무관심하게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이 영혼으로 보입니다. 왜 그렇게 영혼이 소중해 보이는가 하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니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경험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예수님의 그러한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고백도 함께 있게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나서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 느낄 수록 이 사랑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울리는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주님을 만난 후에는 이 사랑을 받은 것이 너무나 신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습니다. 외치고 싶고, 전하고 싶으며 내게 임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이러한 사랑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나 같은 인생이 이러한 아가페의 사랑을 거져 받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대가를 받고 물물 교환하는 그러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일평생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께 본전 찾아드리려고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삶은 하나님도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면 주님께 그 빚을 갚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몸과 뼈를 갈고 우리의 피를 짜서 하나님께 바치면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고통이 다시 환원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오늘도 이 밤에 모여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되며 좋은 그리스도인 될까? 거짓 신앙이 가득 찬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우리들이 무공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이러한 꿈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결국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놀라운 사랑과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이고 우리가 주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때조차도 주님이 얼마나 우리를 필요로 하시고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우리가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 알기 때문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에 대한 감격이 우리의 삶을 움직여서 우리에게 그러한 소망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현재적으로 역사하지 않으면 옛날에 하나님께 사랑 받은 추억만을 가지고는 오늘의 삶을 거룩하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온유해질 수 있으면 그 사랑이 없는데 참을 수 있겠으며 투기하지 않은 수 있으며 성내지 않으며 무례히 행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사랑을 깨닫고 현재적으로 그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하면 바로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들을 향해서 뜨겁게 퍼붓는 눈물과 사랑이 가득한 사랑을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모두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눈앞에 쓰레기 같은 사람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오로지 누구만 존재하는가 하면 주께서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람들만 보이는 것입니다.
참 예수의 사랑이 역사하고 있는 곳에서는 사랑이 없는 사악한 마음으로 사람을 난도질하고 평가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얼마나 형편없는 죄악 가운데서 아무런 공로 없이 주님의 사랑이 구원받았는가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모든 사람들을 향해 베풀어 주셨고 내가 그런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그 사랑을 못 깨달았고 나는 깨달았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깨닫게 하신 이도 사실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자랑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나를 사랑해주신 하나님 그분밖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연민의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을 위해 전도하고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불쌍히 여기는 모든 섬김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아가페의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롭지 않은 것들을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사랑은 투명하고 순결한 사랑입니다 사랑 하나로 모든 불의를 얼버무리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다가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죄 값으로 모두 갚으시고 찾아내고야 마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을 해도 우리의 사랑이 정말로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성품을 깨달아 안 것에서 비롯된 사랑이라면 우리의 사랑도 이같이 순결해야합니다. 주님의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랑이 순결한 사랑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때묻는 것 같은 그런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은 그러한 사랑이 아닙니까?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때가 묻고 우리의 신앙의 양심이 마비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의리가 그렇게 만들고 이 세상에 있는 인간관계의 친분, 사랑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진리를 안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부어진 참 사랑은 우리를 그런 곳으로 데려가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면 나눌 수록 우리는 더욱 순결해 집니다. 사랑을 나누면 나눌 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했던 그 불의한 미움도 사랑과 함께 자라갑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불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우리 속에서 자라갑니다. 이러한 사랑이 역사하고 충만한 곳은 점점 사람들이 빛 가운데로 나아가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불의도 없고 투명한 사랑이며 불투명한 사랑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진리의 밝은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가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이 사랑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의 불의를 위해서 지불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대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불의와 죄악이 모두 도말되고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입맞추어주신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은 결코 우리의 불의를 받아주고 용납해주는 사랑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불의를 모두 담당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항상 생활을 해나가면서 불의에 빠지고 죄 가운데 빠지려고 할 적마다 우리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의와 죄악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우리가 주님의 참사랑이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로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 용서받지 못하신 심판을 스스로 감당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후 다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이라는 미명하에서 오히려 우리 속에서 우리를 통해 이러한 불의가 재현되고 촉진되어서 그 사랑 때문에 불의가 독버섯처럼 자라는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을 깊이 나누고 난 다음에는 우리가 그 사랑 속에서 주님께 감격하고 주님의 참사랑을 느낀 다음에는 항상 우리 속에는 의롭게 살아야겠으며 주님 이러한 사랑을 베푸셨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니 나는 하나님 앞에 순결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결심이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마다 우리들에게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한 삶을 위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참사랑을 너무나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깊이 체험하고 깨달은 분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그 사랑 때문에 얼마나 의로워졌습니까? 율법으로도 결국 성취할 수 없는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성취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의 구원을 받고 사랑의 감화를 입은 자가 되어 불의를 미워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야했던 모든 불법한 죄들을 미워하며 주님 앞에 투명하고 정결한 삶을 살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의 이러한 놀라운 사랑을 알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체험했지만 여러분들은 얼마나 의롭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까? 의를 위해서 얼마나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바른 것이 아니면 미워할 수 있는 마음을 얼마나 유지했습니까? 타협하고 적당히 야합하는 것보다는 순결하게 고난을 받을 일을 택하는 일에 얼마나 열심을 내었습니까? 이러한 삶을 우리가 분투하며 살아갈 때 우리 속에 주님의 사랑은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그 사랑 안에 살게되어 정말로 주님이 기뻐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주님과의 사랑은 깊어 질 것이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아는 의식은 좀더 풍성해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이유인 것입니다.
17.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고전13:6)
지난 시간에는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를 가지고 살펴보았습니다. 말하자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아가페의 참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하고 불의한 일을 생각하거나 그것을 도모하거나 혹은 그러한 일들을 자행하면서 만족을 누리게 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거듭난 사랑이 필요합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거듭나지 아니한 이 세상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려고 하기 때문에 많은 신앙의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을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사실을 살펴보면서 여러분들을 비로소 지난주에 들었던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참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이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전에 태어날 때부터 그들에게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고 또 사랑할 수 있는 성품을 주셨습니다. 물론 사랑 받을 줄 아는 성품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후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몸에 하나님의 영혼을 불어넣으시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께서 영혼을 불어넣어 인간을 만드셔서 인간이 단지 동물과 같이 그런 느낌만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사고력과 지성이 있고 인격을 갖춘 그러한 존재로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 때 주님이 인간 속에 만드실 그때부터 넣어주신 성품중의 하나나가 사랑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안전했지만 인간의 사랑은 불완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당신의 성품을 쫓아서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 받으며 살 수 있는 이러한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연애하는 것은 누군가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잘 합니다. 사랑을 표현하고 사람의 마음을 낚아채고 사람의 마음에 들게끔 행동하는 것은 기술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능력의 차이가 있고 거의 못하는 사람도 있으며 직업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사람을 향해서 사랑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표현을 잘 하는 사람이 반드시 풍부한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표현을 안 한다고 해서 마음속에 불붙는 사랑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표현의 방식이 사람의 눈에 띠는가 그렇지 않은 가의 차이일 뿐입니다.
누구에게나 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훌륭하게 감당합니다. 그 시조는 아담입니다. 아담 혼자 있을 때에는 사랑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모든 피조물들을 사랑했겠지만 인간을 향한 사랑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이 이제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서 하와를 만듭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아담은 생명을 얻고 걸어나오는 하와는 본 한순간의 시선에 완전히 사랑의 화살을 깊이 맞았습니다.
깊은 사랑이 빠져서 무엇이라 말했는가하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주례사에 많이 쓰는 말입니다. 히브리 문학의 관점에서는 무엇 중의 무엇하면 베스트(Best)라는 뜻입니다. 최고라는 뜻입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무슨 의미입니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예화) 살을 얼마만큼 몸에서 떼어 냈다고 합시다. 솔직히 말해서 살을 엉덩이에서 떼어 냈다면 큰 불편도 없고 보기에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옆구리에서 떼어 냈다면 뼈가 허옇게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흉찍하겠습니까? 엉덩이에 비하면 살 중의 살일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기능과 관련 있는 부분을 말하면 더욱 심하 지 않겠습니까? 웬만한 살을 깊이 패여도 아물면 상관이 없지만 신장이나 장기같 은 것은 단지 1Cm만 흉기가 들어가거나 손상이 되어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곳을 살 중의 살입니다.
이미 두 사람이 함께 살기 전 아담이 하와를 보았을 때에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고 하니까 이 것을 현대말로 바꾸면 나는 당신 없으면 살수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오늘날의 사랑 고백도 표현만 다를 뿐이지 창세기에서 다 배운 것입니다. 뼈 중의 뼈인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뼈가 아니고 살은 살인데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그런 살이 아니라 그 살이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살, 그 뼈가 없으면 내가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뼈. 인류가 남긴 사랑의 고백 가운데 그것보다 더 진하고 확실한 최상급의 사랑 고백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결혼하신 분이나 그렇지 않은 분이나 여러분들 그런 고백을 한번 해보십시오. 복잡하게 어디에서 베끼려하지 말고 창세기에서처럼 그대는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입니다 라고 편지를 써도 훌륭한 편지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이 사랑은 평범한 사랑이 아니라 진정으로 마음속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사랑이 이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셨는데 분명한 사실 하나는 아담의 마음속에 하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이 솟아났습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최상급의 언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로다”라는 진실한 고백을 만들어 냈을 때 그의 마음은 사랑으로 온전히 뜨거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아담이 하와를 향한 사랑으로 마음이 뜨겁데 타올라서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는 고백할 때 이 사랑 때문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잠시 종적을 감추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담의 마음에 하와를 향한 사랑이 반이었습니까 가득했습니까? 분명히 가득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 마음에는 없습니까? 그렇지도 않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아담이 하와를 향한 사랑이 가득해서 최상급의 언어로 이 하와를 향해서 “그대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라는 고백을 했는데 그러한 사랑이 있으면서 여전히 주님을 향한 사랑도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하와를 향한 사랑도 백이요, 아담이 주님을 향한 사랑도 백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하와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저촉 받거나 감퇴되거나 식어지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고 주님만을 바라보던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주님을 향한 열심도 식고 기도도 잘 안하고 데이트하느라고 예배에도 빠지고 본업은 둘이 사랑하는 것이고 부업은 주님 사랑하는 것이 됩니까?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 차이는 이렇습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이런 것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국 어떠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사랑은 결국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되는 분들은 제일 큰 계명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것을 꼭 들어보시기를 강력히 권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들어보시면 여러분들이 왜 우리가 실제로 남편도 사랑하고 자식도 사랑하고 회사도 사랑하고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많은 데도 결국은 사랑이 하나밖에 없다고 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타락하기 전에는 사랑이 한 종류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람을 깊이 사랑해도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타락하면서부터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성품이 함께 타락하고 왜곡된 것입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하게 왜곡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인간이 마땅히 사랑해야 될 것을 사랑하면 인간의 삶은 그렇게 멀리 하나님을 떠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잘못된 것이 문제가 된 것이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언제나 자신에게 느껴지는 삶을 산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지 않는데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러한 사랑을 부어주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하나님에 의해서 언제든지 옳다고 반응이 오는 사랑이라면 그의 삶의 상당히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이미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설교와 설교자”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 약 한 사람의 목사가 있어서 설교를 하고 그 설교를 통해서 성도들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면 그 성도들은 나머지 모든 것들은 다 받아들여 주어야 한 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입장에서 그런 이야기가 통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통해서 은혜를 끼치면 아무렇게나 해도 관계없다는 말씀입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그런 말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목사가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 영혼을 향한 하나님의 진실한 음성이 되어서 영혼이 진심으로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인정해주시지 않는 현상을 통해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잠시 사람을 미치도록 흥분하게 만들고,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은 가능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움직여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는 영적 변화는 오직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교인들과 빚고 있는 갈등은 원론적이고 중대하게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느냐, 올바른 강단이 되느냐, 올바른 신자가 되느냐, 참 말씀이냐 하는 본론적이고 중차 대한 문제가 아니라 사소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양식으로 만든 교회당을 원하느냐, 한옥으로 지은 교회당을 원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 곳이나 들어가 예배드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말한 것입니다.
똑같은 논리에서 사람의 문제를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만약 정말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사랑이 모든 다른 사랑의 기초가 된다면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랑과 그 사랑은 유통해서 흐르기 때문에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것을 느낍니다. 저도 인간이기에 교인들하고 같이 생활하다보면 주일날에만 왔다가 축도도 끝나기 전에 목회자를 피하듯이 가는 교인들과는 관계가 소원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심방을 합니다. 그가 살아온 한해 동안의 삶을 듣고 함께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주님이 주신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나면 마음속으로 열심히 없다는 생각만 하다가 내가 돌보지 못하는 사이에 미꾸라지와 같은 줄 알았는데 사실은 사람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달픈 일도 많았고 험악한 세월을 살았구나! 아, 내가 정말 돌아보지 못했구나! 하는 마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사랑이 생깁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사랑이 생긴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느끼고 심방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더욱더 사역을 잘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런 사람을 보내주셔서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치며 신앙 생활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견고해지고 더 깊어집니다.
어떻게 방해받을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강화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똑같은 논리가 부부사이에도 자녀사이에도 모든 성역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꾸만 방해받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상당부분이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타락하기 이전에 아담이 하와를 향한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니라 진리와 함께 기뻐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향한 떠난 사랑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그런 사랑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은 배교에 가까운 행동입니다. 하나님이 금하시는데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화) 내가 저 사람을 참 좋아하는데 시집도 갔구나! 남편도 있고 아이도 있구나! 어떻 게 하면 저 여자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을까?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것. 사실 그런 사랑이 존재하지도 않지만 있다면 그런 사 랑은 사악한 감정의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완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완전하게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 속에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요소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명확하게 가려낼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가난하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자로 사는 것과 가난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떠한 정도의 삶을 살면 바람직하겠는가? 이것은 사실 한마디로 잘라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살아가는 동안에도 주님이 주신 축복과 은혜의 부를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너무 크고 화려한 차를 타고 다는 것은 보기 안 좋을 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돈을 많이 벌고 사회적으로 나아지면 조금씩 나은 차를 타고 다닐 수 있고 사회적으로는 그런 일들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작은 집에 살다가 알뜰하게 모아서 좀더 큰집에 갈 수 있을 수도 있고 여유가 있는 환경에서 살아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지 않지만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말하기를 누구든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누리고 살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는 말을 하지 않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없다라고 단언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렇기에 똑같은 것을 누리면서 산다고 할지라도 단지 그것을 누리느냐, 끔찍이 사랑하느냐는 차이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제가 전에 말한 순순한 의미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충돌하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충돌을 일으키는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의 사랑과 충돌을 일으키는 타락한 인간의 하나님을 거슬리는 정욕적인 사랑이었느냐, 아니면 순수한 사랑이었느냐 하는 차이는 그 사랑이 잃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정말로 사심이 없이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고 단지 자기에게 주신 것이 때문에 그것을 누리면서 산 경우에는 그것이 사라져 버려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부패한 인간의 정욕으로 사랑했을 경우에는 그것이 사라져 버리고 나면 즉각적으로 하나님의 관계에 심각한 영향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신뢰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믿을 수 없게 되고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섬기던 사람이 마음에 상심을 해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화) 제 친구 중에 수영을 잘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스물 한 살쯤이었는데 물이 있 는 곳으로 수련회에 갔습니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놀이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같이 배를 타고 가면 되는데 자신은 수영을 잘하니까 헤엄을 치며 배 뒤를 따라 갔습니다. 그의 수영실력으로는 그 강을 몇 번이라도 건너고 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수영실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심장에 문제가 생 긴 것입니다. 심장 마비로 허우적거리다가 실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3일만에 찾 았는데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4대 독자로 군대도 가지 않은 귀한 아들입니다. 그것도 아들을 늦게 보아 다시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대가 끊긴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실망한 것은 아버지가 그 동네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큰 교회의 장로입니다. 그 교회에서만 20년 이상을 충성과 기도로 사신 분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죽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입 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 계시다면 우리에게 이런 아픔을 주실 수 있는가 하 는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결국은 자신들이 그런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독자를 향한 사랑이 충돌을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죽고 나자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아들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커다란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는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죽음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그것을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상실해 보면 내가 무엇을 정말로 사랑했는지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랑의 기초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에 기초한 것이라면 그것들이 사라져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자식이 죽었는데 눈물 흘리지 않겠습니까? 잘 죽었다고 말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슬프고 마음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깐 동안의 인간의 정이고 눈물을 씻고 나면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음성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그런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아들을 풍파 많은 세상에서 고이 품어 하나님의 품으로 데려갔으니 감사하다. 이런 것이 주님을 사랑한 동기에서 자식을 사랑한 부모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의 생애에서도 보이지 않습니까? 모든 것을 잃어버린 다음에도 그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고 재촉하는 부인을 향해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취하는 이도 여호와시니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지어다”. 욥이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교리학자입니다. 그분이 네 살 박이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 아들을 갑자기 잃었을 때 그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게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제 친구중의 한 명이 그분과 가까운지라 아이가 죽어 영결예배를 드리는 곳에 참석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죽은 것이 너무나 슬퍼 눈물이 나왔는 데 나중에는 저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왜냐하면 목사이면서 교리 학자인 아버지가 관을 붙들고 ‘너는 가면 안된다’고 서럽게 우는데, 저 사람이 천 국을 믿는가하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물론 슬픔이 있고 아픔이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는 동기와 기초가 되었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 사람과 사랑과 빠졌을 때에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구체적이 되고 그 사랑이 더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잃어 버렸을 때는 잃어 버렸기 때문에 잠시 마음이 아플지는 모르지만 잃어버리고 나서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상실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면서 비로소 우리는 이 사랑이 아직까지 내 안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내가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의 행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대한 깊은 감격을 느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만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사랑은 즉 아가페는 진리와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랑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을 사도 바울이 누구에게 배웠다고 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신 생애는 사랑의 생애였습니다. 가난하고 병들어 고통하는 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리고 그들을 건지시기 위한 생애였고, 영혼의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그들 곁을 찾아가셔서 그 영혼들을 새롭게 하시는 일에 자신을 모두 바쳐서 사랑하는 삶을 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삶을 온전히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더욱 완전해지며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한 사랑이 보다 완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 참 아가페의 사랑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단순히 우리를 향한 불붙는 사랑의 감정만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진리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최고의 관심은 이 영혼들을 사랑해서 그 사랑으로 입히고 먹이고 병을 고쳐주는 것만이 모든 해결책이 아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장 해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진리의 빚 가운데로 여러분과 저를 데려오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 자신이 그 길이요, 그 빛이요, 그 생명이시라는 사실을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 생명을 우리가 얻게 하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그러한 사랑의 빛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하셨던 모습을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라는 것은 단지 타오르는 뜨거운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무엇을 해주어야 겠다 라고 하는 인도주의적인 감정 자체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은 그들이 어떻게 살든지 그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든지 아무런 상관없이 그들을 향해 무조건 베풀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화) 예배 전에 생명의 말씀사의 책임자 한 분하고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런 이야 기를 했습니다. 많이 알려진 교회인데, 아주 열심있는 부인이 목사님에게 고민을 호소했습니다. “목사님 제 남편이 저렇게 예수님을 안 믿고 있는데 성당에 나가 면 같이 나겠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목사님이 “빨리 따라가십시오. 그렇게 해서라도 예수를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부인은 성당으로 가버렸습니다.
이것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그것을 나도 기뻐할 수 잇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이 슬퍼하셔도 어쩔 수 없이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배우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갖기를 원하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인데 그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이 기뻐하는 것을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 속에 있는 사랑의 감정의 노예가 되어서 주님이 슬퍼하는 일을 행하면서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이 슬퍼하셔도 어쩔 수 없다라는 삶의 태도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사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했던 우리의 사고방식과 세상의 유행하고 있는 견해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중의 상당부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 아니라 인간의 정욕과 인간의 강한 욕망과 하나님께도 불순종해서라도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인간이 열렬한 인간의 마음속에 불붙어 있는 감정의 다름이 아닙니다.
여러분 고린도 전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이 사랑이 온 세상에 충만하면 세상이 얼마나 행복한 세상이 되겠습니까? 교회가 이런 사랑으로 충만하게 될 때 그 교회는 천국과 유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현실을 보십시오. 사람이 사랑 때문에 서로 불행해지고 있습니다. 사랑과 사랑이 충돌하면 미움이 일어나고 욕망과의 충돌을 불러일으키고 욕망과의 충돌은 사람들을 해치고 공격하고, 나라와 나라의 욕망이 부딪치면 전쟁이 일어나고 인간은 많은 불행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는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는 서로 사랑하고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나라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나라가 되는 것이 참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많이 사랑한다고 믿고 있고 많이( ? ) 슬퍼할 수 없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할 수 없다면 여러분 속에 있는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닌 것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되게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 때문에 주님을 더 가슴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가정을 이루어서 가정을 사랑하면서도 가정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는 그런 가정이 아니라 혼자 살았으면 하나님의 사랑의 사랑을 몰랐을 텐데 가정을 이루어 살았기 때문에 가정을 사랑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더 깊은 사랑을 깨닫게 해서 우리의 사랑을 성숙하고 온전하게 하는 그러한 사랑, 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그 하나님의 아버지와 같은 어버이의 성품을 깨닫게 되어서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방해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있어서 자녀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애틋한 아버지의 마음을 몰랐을 텐데 그 자녀들이 있어서 그 자녀들을 깊이 사랑하게되니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직장을 다녀도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모든 사랑의 관계가 아가페의 사랑에서 통합된 관계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랑을 우리는 그런 식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모두 아가페의 사랑이 공존합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토막치고 나누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서 통합되고 그러한 통합된 아가페의 사랑 속에서 부부간의 나누는 사랑에는 고백의 모양이 달라도 그러한 모든 것들이 아가페의 사랑에 의해 통합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없으면 내가 이 남자를 사랑하고 이 여자를, 이 사람을 이런 지체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만날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기 때문에 나를 시켜서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고 지체를 사랑하게 합니다. 오래 참게하고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생각해야 합니다. 이 사랑은 얼마나 미묘한 문제인가 하면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다 쓸데없을 정도로 중요하고 방금 전해 말한 것과 같은 이러한 순수한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면 하나님을 거스르는 잘못된 사랑이 우리에게 있으면 그 작은 사랑하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영적인 삶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와 사랑이 우리 속에서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생명을 잃는 것을 보면 참으로 기이합니다. 어떤 사람은 팔다리가 다 떨어져도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사람은 심장에 있는 좁쌀 만한 핏덩어리 때문에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랑의 문제는 바로 이런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 앞에 그렇게 변화 받기를 갈망하고 남들이 만난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싶어도 우리들이 그런 참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커다란 은혜와 비할 데 없는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위해서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못하면 커다란 문제를 보게 되는데 결국은 사랑과 연결됩니다. 주님 밖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고 그 사랑 말고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이미 그 사람 자체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 섬기고 봉사하는데 내가 이일이 아니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고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 일을 통해서 열매맺어 하나님께 돌리면 나는 사는 것이요, 만약 내가 이런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지 못하면 나는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이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특정한 한가지 사명에 매여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하늘이 열리고 환상보고 신비한 은사가 떨어지지 않아도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는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무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고난이 오고 맞고 쫓겨나며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라도 주님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관계없다라고 그 사랑 하나에 붙들린 사람은 그 자체가 위대한 능력이고 힘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불꽃처럼 살아야 된다는 의미는 결국 하나님을 향한 한 사랑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말씀드린 타락한 인간의 정욕에서 비롯된 사랑과 참다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리스도를 앎에서 비롯되는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과의 차이는 진리입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사랑에는 어두움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면 할수록 진리의 필요를 더 절박하게 느낍니다.
목회자에게는 여러분에게 없는 감각이 있습니다. 한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여러분이 와서 장문의 편지를 건네주거나 여러분의 일대기를 늘어놓으면서 이야기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이 변화를 받고 있는지 침륜에 빠지고 있는지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자와 성도가 진정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 함께 있는 다고 하나되는 것이 아닙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말씀에 은혜를 받고 목회자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가 됩니다. 식사 한번 대접하거나 선물하는 일이 없어도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영혼의 변화를 받으면 우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옵니다. 목회자가 이러한 진리를 가르쳐 주며 왜 목이 매이고 이러한 것들을 알게 하면서 왜 분노했는가를 알게됩니다. 한 사랑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연합입니다. 그러한 연합을 통해서 교회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교회가 아름다운 유산을 읽어버리고 있습니다. 그 하나가 사랑스런 목양의 관계입니다. 목양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참사랑입니다. 제가 여러 번 이야기했습니다. 서울 시내에서 삼 백 명 이상 팔백 명 이하 모이는 교회의 삼십대 천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는데 칠백 팔십 명이 주일날 예배는 자신의 신앙과 관계가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당에 나옵니까? 그런 상태를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 속에는 두 가지가 뚜렷하게 흐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으며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유추해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에 대한 태도가 두 가지로 확연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는 주의 종이라면 맹종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목사님 앞에서는 절대 복종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인도되어지는 모양이 이단의 교주들 떠받드는 식으로 합니다. 한쪽은 반대입니다. 남남의 사고 방식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는 사장이 월급 주고 너는 내가 월급 준다는 생각입니다. 흘러 다니는 말이 있습니다. 장로는 대주주, 담임목사는 고용사장, 집사는 소액주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고용사장의 직위는 대주주에게 달린 것입니다. 대주주가 자르라면 자릅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그런 식으로 완전히 편의주의적인 사고방식으로 되어갑니다.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맨 처음에 우리 나라 교회에 경건주의와 청교도적인 배경을 가진 선교사들이 들어와 복음을 전하여 믿게되고 커다란 부흥이 있게 되었습니다.
(예화) 그때의 목사 중에 신앙에 곁길로 나가고 이단적인 요소를 가진 사람으로 정죄 받았던 이용도목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가 3년 전에 캐나다에서 이용도목 사의 서간집을 일고 엄청나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편지가 아니가 자신의 심장을 터뜨려서 그곳에 붓을 꽂아 쓴 편지였습니다. 편지 하나 하나에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고백이 쓰여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목회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목사들은 평신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워낙 거룩하고 주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려는 각오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고 워낙 하나님을 뜻을 따라 살려는 거룩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처지에서 목회자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존경스러운 것입니다.
들리는 말이 있습니다. 6.25가 나서 목회자가 성경찬송 가지고 다니다가 공산당 앞에서 성경 찬송을 버리는 것을 보기 전까지는 목회자도 화장실을 가느냐고 묻는 시골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답니다. 그러니 얼마나 거룩한 사람들이었겠습니까? 그렇기에 그러한 거룩한 감화와 영적인 감화를 통해서 자신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그를 향한 진정한 존경심과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존경심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섬기기를 좋아하고 그의 말을 듣는 것을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처럼 순종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시대가 흘러 교회의 영성은 아주 쇠퇴하고 옛날과 같은 영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적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청교도가 말한 것처럼 옛날에는 나무와 같은 그릇에 금과 같은 목회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나니 금과 같은 그릇에 나무와 같은 목회자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진리로 말미암아 영혼이 변화되어 목회자와 교인이 하나되고 교인과 교인이 하나되는 진정한 하나되는 비밀은 사라지고 단지 그런 식으로 떠받들어야만 복을 받아야 된다는 기복사상만 남아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런 이상한 모습을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그런 경험이 사라지고 개념조차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막보는 사이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교회당에 와서도 성도를 보면서 성도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매우 다른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는 살면서 만나는 동네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와서는 다른 사람 한사람 한사람이 성도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성도들 속의 언어도 달라져야 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도 달라져야 합니다. 자매를 대할 때에는 일체의 깨끗함으로 연장자에게는 어버이와 같이 대하는 거룩한 행실이 통용되는 것이 성도의 교제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청년 임원들이 단합대회를 하는데 다란 주점에서 했습니다. 교회에서 그것의 부당함을 말하자 개인적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도 안에서는 개인이 없습니다. 개인은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성도 모였을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 안에서의 사랑의 관계, 사랑의 교제, 하나됨,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는 독특함, 특별한 공동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어 하나되는 것들을 그들이 진정으로 느끼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사람 한사람이 똑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진리로 말미암아 영혼의 변화가 와야 합니다. 오늘날 왜 목양의 관계가 그리고 성도의 아름다운 교제가 사라졌는가하면 진단을 목회자와 운동하지 않고 성도들간에 단합대회를 하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사라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하면 우정 충만해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정 충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가페의 사랑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그런 우정 충만한 모임을 만들려고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습니까? 친목단체를 조직하지 왜 교회 간판을 걸고 그런 일을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사랑이 넘치기 위해서는 진리로 말미암아 그 교회에 속한 사람이 변화되기까지는 결코 하나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진리로 말미암아 깊이 변화될 때 육적인 그리스도인 혹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던 사람 속에 영혼이 거듭나게 되고 영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진정한 영성의 심장부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진리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 새로워지게 되면 우리는 그 변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내가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깊이 감화를 받고 나면 주님의 이런 깊은 사랑이 나를 움직여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그렇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그런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들을 보면서 그들이 진정으로 변화되고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들이 정말로 변화를 받았을 때 그 다음에는 뜨겁게 이야기가 통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은 삶의 형태를 결정짓고 사랑은 결국 관심을 결정짓는다는 것입니다.
기차를 타고 갈 때입니다. 신학생이때였으니 창가로 눈에 들어오는 것이 교회밖에 없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땅 장사인가 봅니다. 계속해서 땅을 사고 팔며 투자하는 이야기만 합니다. 서로의 관심이 평행선을 걷습니다.
사랑의 차이가 이렇게 엄청난 관심과 방향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그런 두 사람이 한 지붕 밑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교회에서 진정으로 하나되기 위해서는 결국 이런 사랑이 생겨나야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은 영혼의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고 영혼의 변화는 하나님의 진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런 결론 하나를 내리게 됩니다.
참다운 진리를 배우는 성도들이 없는 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랑이야기는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사랑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대개 예배시간에 자고 진리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사랑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교회는 사랑 있는 교회로 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사랑 없음을 말하면 있는 사랑도 식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리를 통해 인간이 진정으로 변화 받게 될 때 그 변화의 한복판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 후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사랑으로 진정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하나되고 나면 모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들을 기뻐합니다. 주님이 슬퍼하시는 일들을 슬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사모합니다. 자신의 어두운 영혼을 밝혀 주었던 복음의 진리의 빛이 저 사람에게도 비치기를 원하고 이 사람에게도 비춰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원하고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하면서 점점 눈 먼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랑을 하면 무엇을 사랑하든지 그 사랑 때문에 진리를 더 많이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달아야 할 필요를 느끼고 주님이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지를 더 많이 깨달아야 할 필요를 계속해서 느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사랑하고 있는 대상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들을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무엇인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욱 순결해질 필요를 느끼게 됩니까?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까? 그 사랑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던 하나님의 사랑이 더 사심 없이 뜨거워지고 더 하나님만을 위해서 정결한 믿음이 되어가도록 도와주고 있습니까? 혹은 그 사랑이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거나 여러분의 양심에 죄의식을 심어주거나 그 사랑이 여러분들로 하여금 신령한 신앙생활에 거침돌이 되지는 않습니까? 어떤 경우의 사랑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십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사랑, 우리가 그 안에서 살아야 할 사랑은 어둡고 후미진 곳에서 나누는 사랑이 아닙니다. 무지에 어두움이 드리워진 캄캄한 곳에서 나누는 그러한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랑은 참 빛 가운데로 나오기를 원하는 사랑입니다.
(예화) 제가 직장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변화도 덜 받고 결혼하기 훨씬 전입니다. 레 스토랑에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조금 이상한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길이가 상당 히 깁니다. 앞부분에서부터 점점 불이 어두워집니다. 그렇게 해서 맨 끝에는 밤중 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이 어두운 데부터 좌석을 앉기 시작합니다. 그 리고 앉을 자리가 없으면 환한 빛 가운데로 나옵니다. 이런 것과 같은 사랑이 아 닙니다. 컴컴한 곳에서 무엇을 하려고 깊이 들어가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이 누리려고 일구어가야 할 사랑은 진리의 빛이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더 정결해져야할 필요를 느끼고 사랑을 하면 할수록 주님의 사랑의 깊이를 더 많이 이해하게 되고 사랑을 하면 할수록 아버지의 마음을 더 깊이 깨닫게 하는 그러한 사랑,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때문에 나도 기뻐하고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하고 주님이 마음 아파하는 것을 나도 마음 아파해서 우리의 사랑의 감정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 받은 그러한 사랑이 되기를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이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 시간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정말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내가 먼저 진리의 빛 가운데 살기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깨닫지 않고는 영적인 변화가 없고 영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리스도 예수의 심장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진리의 빛이 우리를 비추어 주어 그 진리가 우리를 깨뜨리고 변화시켜 주며 또 새롭게 만들어 주어 진리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를 주장하고 있는 이 사랑이 정말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면(이곳에서 진리는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즐거워하는 사랑.
내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나의 이런 그릇된 사랑을 보면서 마음 아파하고 안쓰러워 하시며 고통하도록 주님을 만들어드린다면 우리를 그 사랑으로 데려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의 보답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하시고 사랑하는 대상을 주시며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우리가 그런 사랑을 알아서 그런 사랑을 몰랐을 때보다도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사람되게 하시려고 그런 사랑의 자리에 우리를 두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그리스도를 소외시키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충족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깨닫고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사랑의 빛 앞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함께 기뻐하는 그런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은 바로 온 교회 모든 성도들이 이렇게 주님과 기뻐하는 사랑에 불붙은 마음이 되는 것, 그러한 사람들이 그러한 사랑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 횃불과 같이 살아가는 그러한 시대가 오기를 하나님께서 얼마나 갈망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사랑은 하나님의 등뒤에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 만족을 느끼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신실한 사랑은 주님 앞에서 주님의 거룩한 눈빛이 있는 그 면전에서 가책 없이 나누는 사랑이고 주님이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시는 가운데 주님과 함께 기뻐하며 나누는 그런 사랑인 것입니다. 그 사랑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고 오히려 찬란한 진리의 빛만이 있을 뿐입니다.
18. 사랑은 모든 것을 참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고전13:7)
우리는 지난 시간에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이 시간에 지난 시간에 전했던 내용을 다 되풀이 할 수는 없지만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말하면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사랑도 발견할 수 없고 그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면 인간들이 사랑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 앞에 죄를 쌓아갈 뿐이라는 것을 지적 받았습니다. 우리는 참사랑이 어두움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사랑이 아니라 진리의 빛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참된 사랑인지를 알기를 원하고 그러한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지를 알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사랑을 하면 할수록 우리에게 더 많은 진리의 빛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고 깨달으면 깨달을 수록 우리는 점점 무지하고 어두움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더욱더 밝은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 사랑은 분명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누는 참사랑이 아니면 그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정확한 사랑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참 아가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대로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더욱 진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우리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제법 됐다, 이미 나는 상당히 갖추어진 사람이다, 그리고 내가 이만큼 신앙생활 했으니 나는 많은 사람들에 인정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참 사랑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부족을 느끼게 만들고, 자기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당당하게 만들지만 아가페의 사랑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깨닫게 해주고, 아가페의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우리는 무엇인가 더 많은 진리를 필요로 하고 그래서 우리의 사랑이 더더욱 빛 가운데 사귀는 사랑이기를 소망하는 그런 사랑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는 또 한가지 이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맨 처음에 사도가 사랑의 속성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은 오래 참고”. 이것이 다시 한번 반복되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몇 주 후에 우리들이 살펴보게 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는 부분에서도 역시 다시 한번 참는 문제가 사랑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세 가지를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이라고 획일적으로 몰아버리기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을 주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희랍어 단어가 앞의 “오래 참고”와 뒤에 나오는 “참고”라는 단어가 같지 않습니다. 앞에 쓰여진 단어는 무엇인가 오랫동안 솟아오르는 격정을 참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에 쓰여진 참고도 유사하기는 하지만 물 같은 것이 스며들어오지 못하도록 무엇인가로 단단하게 막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성경 어느 곳에서는 이 단어가 “자제하다”라는 단어로 바뀌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어성경 어느 곳에서는 “프로텍터(Protect)”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커버(Cover)”라고 번역했습니다. 덮는다. 또는 무엇인가를 보호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역시 참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여러 곳에서도 “참는다”는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참는 종류를 나누기보다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는 “오래 참고”라고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변하지 않고 계속해서 참는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을 참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시간적인 길이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다양한 방해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온전한 사랑을 이루는 데는 많은 방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을 많이 경험합니다. 어떤 한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려고 마음먹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사랑하지만 그 사람과 관련해서 일어나는 얘기치 못한 다른 많은 일들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다가 결국은 사랑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은 본받아서 온전히 사랑하려는 사람들은 많은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자신과의 싸움에만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랑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많은 각도에서 공격해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 저는 이 고린도 전서 13장을 강해하는 첫 시간에 기독교의 삶 한가운데는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있고 영성의 한복판에는 사랑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가르쳐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사랑만큼 영적인 일이 없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만약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만큼 육적인 것이 없지만 그것이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사랑만큼 영적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을 하는 그곳에는 언제난 마귀의 괴계가 있고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게 하는 죄의 강렬한 반발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온전히 이루고자 결심할 때 여러분들은 즉각적으로 사랑할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한번 누군가를 주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려고 할 때에 도저히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고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없게 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심은 한번 했는데 보이지 않던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들이 들이 떠오르고 그런 것들은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공격이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제일 먼저 이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말하면서, 오래 참고 그 뒤에 다시 참고를 말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이라는 단서를 다시 한번 붙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고 우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푸른 풀밭을 거니는 연인들의 산책과 같은 것도 아니고, 잔잔한 호숫가에서 배를 타고 노는 뱃놀이도 아닙니다. 사랑을 하고자하는 사람은 모래 바람이 부는 벌판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벌판에서 심한 모래 바람과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그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원수도 보이지 않는데도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온몸에 맞을 상황도 감수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은 사랑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영적인가를 알고 싶거든 그가 정말로 사랑 있는 사람인가를 살피십시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랑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아가페의 사랑,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정욕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사랑이나 가기에게 돌아올 보수는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라 값없이 가기를 내어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희생적인 사랑을 본받은 그 아가페의 사랑인지를 확인해보십시오. 누가 하나님을 위대하게 만났고 자기가 뛰어난 영성을 소유하고 있으며 천국의 모든 비밀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지라도 그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의 영성을 여러분들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영성은 열매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고 영성의 가장 훌륭한 열매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사랑과 영성이 매우 밀접한지에 대해 다시 한번 강조를 드리자면,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으나 마태나 마가와 같은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깊이 체험하고 그 성품을 경험하게 됨으로써 그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참사랑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경험이 있었고 그 한 복판에는 그렇게 자기를 버려 이 세상에 자기처럼 흉악한 죄인을 구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참사랑이 그리스도 예수의 생애와 고난을 통해서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한 그곳에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겸허함이 있었고 그 한복판에는 이러한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떨어질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한사람이 뛰어난 영적인 체험을 하고 천국의 비밀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상한 지식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만약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에 대한 불붙는 사랑과 붙잡힌 인격이 없다면 그가 체험한 모든 영적인 체험은 건강한 체험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사랑을 온전히 이룰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때에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내어쫓고 병을 고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인정함을 받지 못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여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 있는 거입니다.
놀라운 이적을 행하고 많은 기적을 행했지만 만약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체험이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와의 만남에의 놀라운 체험이 있었을 것이고 그 인격을 진실로 체험하는 자들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앞에 무릎 꿇지 않을 수 없고 그렇게 꿇었던 사람들이 삶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만큼 그는 사랑에 대해 눈뜨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한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다양한 종류의 고난과 방해와 공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참는 것이 사랑을 이루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오래 참는 사랑, 나아가서는 모든 것을 참는 사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어두운 세상, 죄와 슬픔에 많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 같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이 세상에 내려오게 하셨을 그때에 주님이 당하셨던 모든 일들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는 길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고 사랑하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 받고자 하는 우리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으로 이어지는 아무 것에 의해서 방해받지 않는 가교를 타고 건너오셔서 끔찍이 사랑 받고자 하는 우리와 사랑하고자 하는 예수님 단둘이 만나서 주고 받은 그런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고 끝까지 우리와 같은 죄인들을 구원하기 원하셔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데 자기들이 그 사랑을 받기 싫으면 그만이지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사랑을 거절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핍박을 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했고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할 뿐만 아니라 그를 자신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랑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희생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신 그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고통을 여러분들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만약에 소말리아나 아니면 에스키모 원주민들이 사는 추운 북극이나 질병이 창궐한 미개발 국가에 벌거벗은 몸으로 여러분들을 내려다 두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인간이 살던 한 장소를 이동해도 그러한 깊은 고통을 느끼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셨고 천국에 계시던 그분이 영광을 버리고 낮고 천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그분께서 사람이 되어주신 그 고난의 깊이와 그 부끄러움의 넓이가 어떠한지 우리는 깨달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영광이 주는 위로를 맛보기 전에 하나님이신 그분이 자기의 몸을 비워 하나님의 성품을 인간의 성품에 감추이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심의 그 비천함과 고통에 대해서 인식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셨지만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내려오셔서 낮아지시고 자기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 주신 것도 예수님에게는 어마어마한 희생이었고 견딜 수 없는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를 마음놓고 사랑할 수 잇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예수 오시는 그 길을 가로막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도 여러 모양으로 박해를 하고 핍박하며 그를 위협하고 혹은 그가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가려고 노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고자하는 그 계획을 좌절시키고자 힘썼습니다.
사단은 어떠했고 영계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자 하실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베푸시는 그 은혜 앞에서 떡을 먹고 배부르던 사람들을 충동질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해달라고 소리치는 성난 군중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온 마음으로 정성을 쏟아 부어서 자신의 분신처럼 사랑하던 그 제자들은 주께서 고난 당하시던 그때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 가까이 곁에 있어 드려야 할 그때에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고 도망갔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생애에는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온전히 우리를 사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모든 것들에게 둘러 쌓이시고 모든 것들로부터 집요한 공격을 받으신 생애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온전한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받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그러한 방해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사라지도록, 천군과 천사들이 와서 그 모든 방해들을 단번에 격파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이 시키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의 놀라운 힘은 모든 것들을 기적의 방법으로 해결하기를 원하는 대신에 예수님의 인격으로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에 있어서 기적을 바라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어떠한 기적이나 놀라운 힘으로도 마땅히 참사랑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고난과 희생의 역할을 감축시킬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에 있어서 그런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서 사랑을 위한 희생을 아껴보려는 모든 생각들은 신앙적인 생각이 아님을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기적이 있는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한 의무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놀라운 힘을 가지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래 참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을 성취하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자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사람을 가로막는 수많은 방해의 요인들과 싸우시는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기적으로 물리치는 대신에 자신 속에 주신 하나님의 힘으로 자신이 스스로 오래 참는 고통을 지불하시며 그 사랑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바로 그런 것임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어떤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여러분의 마음에 맞도록 기적처럼 변화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사랑도 아니고 믿음도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기보다는 사랑을 함에 있어서 자기가 지불해야할 고난과 고통을 절감시키기 위한 사행심 어린 생각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한가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참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온전히 우리기 위해서는 두 번째로 사랑하는 그 대상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져야 합니다. 집착이 없이는 이렇게 오래도록 참을 수 없으며 모든 것을 참을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은 환경을 초월하고 여건을 넘어서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참는 힘이 참된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들이 만약에 사랑하는 대상 하나에 대해서 사랑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랑을 이루고자 하면 많은 방해요소에 시달리고 주위의 수많은 공격을 받게 되는데 그 모든 것을 온전히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그 사랑에 대한 강한 집착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의 신앙에 있어서 이러한 생각을 확대시킨다면 여러분들은 우유부단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놀랍게 변화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에 쉽게 좌절하고 믿음으로 살던 우리의 손을 놓아 버리는 무엇보다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는 이러한 일들은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왜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굳건히 하며 거룩한 삶을 사는 일에 쉽게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 약하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여러분에게 있어서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까? 주 예수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까? 세상 즐거움 다 버려도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사랑하면 여러분이 넉넉히 살아갈 수 잇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엎는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를 잃어버리면 진실로 아무 것도 아닙니까? 여기에 아멘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사랑을 이룬 사람들입니다.
가치에는 절대가치와 상대가치가 있습니다. 상대라는 말은 말 그대로 대를 서로 한다는 것입니다. 마주본다는 것입니다. 마주선다. 가치에 있어서 마주보며 누가 더 가치있는 지를 재어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가치가 이것보다 우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도 그것은 상대적인 우위에 있는 것이지 절대적인 가치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가치는 대를 절(切), 즉 끊어버린 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이 가치가 귀하다 못해 이것 밖에는 가치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다른 것에 비교하는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만약에 가난하고 굶주린 기근의 시대가 아닌 지금 같은 시대에 여러분들 이 사랑하는 자녀 외아들을 잃어 버렸습니다. 몇 달 동안 울며 찾아다니다가 결 국은 찾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어린아이를 찾아다 놓고 금덩이와 선택을 하라고 한다면, 아들이 금보다 훨씬 낫기 때문에 아들을 취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엄마는 이 금덩이가 아이만 하면 아이대신 금덩이를 집었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절대입니다. 아무리 커서 태산같을지라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 순간적으로 어느 것이 나을까하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온전한 아가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절대 가치에 대한 사랑에 불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두 가지로 여러분들에게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이런 절대 가치의 사랑에 불붙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 사랑이 그 모든 사랑의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계명은 엄밀하게 말해서 순서로 되어 있는 1번 2번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되어있는 계명입니다.
이것을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나뉠 수 없는 이유는 사람은 미워할 수도 있고 내게 만족을 줄 수도 있고 그 사람은 나에게 여러 가지 감정적인 것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땅에 있는 그 존재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짓밟는 것이며, 파괴하고 짓밟는 것은 곧 사람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짓밟고 그리스도 예수를 파괴하는 것과 똑같은 범죄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움은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미움은 결국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얼마나 이 죄에 대해 깊이 슬퍼하시고 진노하시는가를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주님의 사랑으로 깊이 사랑하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하나님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형상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분의 성품을 닮은 형상을 가지 사람 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형상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참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사랑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사랑에 절대 가치가 되도록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나란히 놓으면 여러분은 무엇을 택하시겠습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전에 말한 어머니와 여러분의 차이는 어머니는 아무리 재물을 쌓아 놓아도 아들을 택하는데 여러분들은 많이 쌓아놓으면 자꾸 생각하며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온전한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삶에 있어서 전적인 가치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와 만두를 가지고 택하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성공을 갖다 놓고 택하라면 달라질 것입니다. 만두와 성공은 같은 질의 것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와 그 예수 그리스도도 같은 질입니다. 결국은 어느 쪽에서 택하든지 신앙의 수준의 문제이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은 이쪽에서 저쪽에서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위대한 힘은 참사랑에서 나옵니다. 보십시오. 수많은 나라가 기독교를 잘 보전하기 위해서 법으로 만들어서 아이 낳고 몇 일까지 세례를 받지 않으면 벌금을 내게 하고 옥에 가두고 신앙적으로 자신들이 고백하는 신앙과 다른 주장을 하면 화형을 시켜는 일이 일어나도 그들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며 살 수 있었습니까? 역설적으로 기독교를 망하게 해버리려면 국교로 정해버리면 신속해 망해버립니다. 되지 않는 것입니다.
창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오히려 그 죄인 앞에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위대한 능력을 가지시고 범죄한 자들의 목을 베시는 그러한 큰칼을 든 위험에 가득 찬 공포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셨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만났을 때도 예수님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랑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그 보혈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며 나타나셨습니다. 어린양 보혈이 우리의 마음을 놀랍게 끌어들이는 강한 흡입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주받은 십자가가 우리의 시선을 끌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손에 들린 칼이 리의 마음을 녹인 것이 아니라 힘없이 우리를 위해 사랑 때문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형상이 강한 우리를 약하게 하셨고 약해진 우리를 꺾어 하나님 앞에 창칼 없이도 무릎 꿇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굉장히 강하던 사람들인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약해졌기 때문에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위해 오늘도 이곳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절대적인 사랑은 이렇게 놀랍고 위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절대적인 가치요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가지고 싶고 가지고 있는 어떠한 것과도 비교될 수 있거나 상대적으로 평가받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러한 마음을 그대로 사람을 향한 사랑에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살아가지 못하고 잇는 저 삶, 끊임없이 미움과 시기 속에서 마음의 갈등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바로 절대적인 사랑으로 다가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랑 받았다는 한가지 이유 때문만으로도 우리는 그를 사랑할 가치가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랑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많이 빚진 사람들입니다. 많이 빚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들을 탕감해주어야 합니다. 주기도문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도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탕감하여 주게 하옵시며 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고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체험한 사람들은 더 많이 사랑해야합니다. 신앙이 어린 신자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 다투었을 때 누가 잘못했든지 먼저 찾아가서 무릎꿇고 용서를 빌고 화해를 구해야할 사람은 주님을 더 많이 안 사람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달은 사람, 주님께 사랑의 빚을 더 많이 진 사람들은 더 많이 베풀며 살기를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놀라운 계획이요 섭리라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들이 생각해볼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힘겨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렇게 절대적인 가치로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러한 사랑은 무엇에 의해서 대체되거나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예수 그리스도를 시험하면서 천하를 보이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노라고 할 때 대답대신 “사단아 물러가라.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셨던 절대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를 절대가치로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진정으로 절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을 어떤 의미에서는 주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과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조화도 이룰 수 없다는 판단이 서게 되시자 예수님은 담대히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고 십자가에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못박게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를 그렇게 절대적으로 사랑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거저 그 사랑을 이루실 수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이 있어도 고난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또 하나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아무리 절대적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가 아무런 희생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절대적인 아가페의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단지 그 사랑이 절대적이라는 확신과 그 사랑을 쫓아 살고 싶다는 소망 하나로만은 불가능하며 그 절대적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 끊임없는 공격과 고통을 견디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그런 사랑을 끝까지 품고 살수 있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 번째로 사랑의 비밀을 가져야 모든 것을 참을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비밀 없이 우리는 모든 것을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인격으로 한 두 가지는 참을 수 있고 작을 것은 견딜 수 있어도 모든 것들을 온전히 이룰 수는 없습니다. 반도체를 만들 때 사람들이 이상한 우주복 같은 것은 쓰고 들어가서 작업을 합니다. 백만 분의 일 밀리미터 짜리 먼지만 들어가도 모두 망가진다고 합니다. 사랑이 그러합니다. 아흔 아홉 개를 잘 견뎌도 마지막에 한가지를 참지 못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모두 깨뜨려지고 지금까지 사랑을 이루기 위해 지불했던 모든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는 오래 참으신 생애였고 모든 것을 참으신 생애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이런 사랑을 본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가장 가슴 깊이 새겼던 삶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참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몇 번 나오지만 전승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 참는 것이 사랑을 이루는데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2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가 사도 바울이 정말 예수님의 12제자 가운데도 들어가지 않는데 정말로 사도라고 할 수 있는가?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때 자신의 사도직을 변명하면서 내가 사도된 표가 있다. 그것이 두 가지인데 큰 이적을 행하는 것과 참는 것이다. 그런데 참는 것을 앞에다 갖다 놓습니다. 혹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아니더라도 이적은 행할 수 있겠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로 직접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지 아니하였다면 내가 지금까지 오래 참은 것을 기억해 보라. 내가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렇게 참을 수 있었겠느냐? 불가능하다. 오래 참는 것을 이적이나 표적을 행한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로서 그 앞에 두는 것입니다. 나의 사도된 증거는 인내와 표적을 행한 기사들이었다고 12장에서 정직히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사랑이 날마다 사도 바울에게 거룩한 감화와 감동을 주어 솟아오르는 분노와 견지지 못하는 격정적의 솟아오름을 한순간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녹여 버립니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 당하셨네
오래 참는 사랑이, 모든 것을 참는 사랑이 함께 못 박힌 강도조차도 구원받게 만드셨고 솟아오르는 공의의 그 진노를 그 사랑의 물로 끄시면서 결국은 인내를 이루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말로 이 사랑을 위해서 인내할 수 있는 것이 우리 안에 없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아가페의 사랑은 이 세상에서 법으로 강요받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에게 매달 생활비 드리고 용돈 드리면 끝이지 세상은 마음을 보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법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합니까?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고 말합니까?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까? 아가페의 사랑은 세상에 의해서 강요받도록 압박 당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신앙이 없으면 언제든지 팽개칠 수 잇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아가페의 사랑을 이야기해보아야 개발의 편자일 뿐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점점 깊이 깨달아 알게되면 법으로 강요하는 것보다도 더 큰 압박감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누군가를 미워하면 법은 우리보고 가만히 있는데, 세상 법이 무엇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이 양심의 법이, 성령의 법이 몹시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시면서 “내가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어서 내가 너에게 어떤 사랑을 보였느냐? 너는 이만한 사랑도 베풀지 못해서 참지 못하고 견지지 못하면서 의심하고 미워하고 약간을 용서를 베푸는 것을 살을 떼어 주는 것 같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느냐? 보아라. 나 여호와는 내 아들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온몸을 찢어 죽어 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런 하나님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 이것은 이 세상의 벌금 받게 하는 법이나 형벌 받게 하는 법보다도 더 무거운 사랑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 사랑에 온전히 붙잡혔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할 수밖에 없고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믿음을 믿음으로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놀라운 변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 누군가가 사로잡혔다고 말하면서 사랑이 없는 사람을 믿지 마십시오. 그는 사로잡히기를 원하는 사람일지는 모르지만 아직은 사로잡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육신의 소욕이 시키고 원하는 대로 살기보다는 우리를 사로잡으신 그리스도 예수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일을 손에 붙잡혀서 하는 사람, 이루고자하는 그 사랑을 이루어 가는 주님의 사랑의 도구들이 바로 주님의 사랑에 붙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우리에겐 사랑의 비밀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죄인을 용서해줄 수 있는 사랑, 우리에게 허물 많은 형제들을 용납해주고도 고통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있어야 버틸 수 있습니다. 살고는 싶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신앙 한복판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관계는 거룩한 사랑과 환희의 관계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괴로운 세상에 할 일이 많아 나가기 전에 먼저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고 싶은 그런 사랑을 느낀 사람만이 이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죽이고 자신의 모나고 거룩해지지 못한 성품들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서 다듬고 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자기와 같은 죄인에게 미치기 위해서 주님이 얼마나 모든 것을 참으셨는지를 생각하면서 내가 참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인내에 비하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 고난의 때를 통해서 더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다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가끔 계획도 없이 나타나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제 가슴에 못을 박도 가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그런 상황에서 할 필요도 없는데 갑자기 다가와서 망치질을 하고 갑니다. 망치질은 한 번했지만 인격의 못을 빼려니 며칠, 몇 달이 걸립니다. 주님께 부르짖으며 깨닫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때 위로 받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욕해버립니다. 그러면 아픔이 가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통제와 같아 맞으면 맞을 수록 용량이 늘어납니다. 점점 욕의 강도가 커지고 나중에는 살인에까지 이릅니다. 미움의 씨앗이 떨어질 때 그 미움이 마지막에 가고 싶은 것은 살인입니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기에 못 가는 것이지 허락만 하면 갈려고 합니다. 그렇게 달리려는 사람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 아픔을 잊는 방법이 미워함도 있지만 그 미움이 상처를 가져다준 미움보다도 훨씬 큰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깨닫고 그 사랑 속에서 살아가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나는 사랑하는 시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속에서 맛보는 사랑이 너무나 크고 감격적인데 미워하는 시간을 내서 사랑을 빼앗아갈 만큼의 여유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들이 분명히 깨달은 지혜입니다. 전자의 방법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받은 고통을 참고 견디는 사람들은 항상 가슴속에 커다란 멍이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점점 커다란 죄의 나무로 여러분들이 마음속에서 자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맺힌 사람들은 얼굴이 틀립니다. 은혜를 못 받고 가슴에 깊은 상처들이 응어리져있을 때에는 혈색도 틀리고 경직됨이 얼굴을 응축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가서 그 마음속의 상처와 한, 미움, 원망과 죽음에 대한 생각들을 모두 가져가 버리고 사랑과 평화와 은혜가 가득 차면 얼굴이 완전히 바뀐 다른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평화가 그 얼굴 가운데서 피어나는 것이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는 사람들의 놀라운 힘이요, 위대한 역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모든 것을 참고 이기고 견디는 삶을 살아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 해서는 우리는 주님께로 말미암아 내려오는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들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겨주는 고통은 다르지만 작은 고통은 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안겨주는 고통은 쉽게 해결할 수 없고 결국은 죽음에까지 그것을 가지고 갑니다. 미움이 일그러져 미움이 미움을 낳고 저주가 저주를 낳습니다. 그러면서 인생 자체가 불행해지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불행이 확산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삶의 정반대의 삶인 것입니다.
큰 못이 박혀도 큰 못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뽑혀지고 주님의 사랑에 더 크게 감격합니다. 이제까지는 너무나 아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처를 받았다면 이제는 기절할 정도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자기와 원수 맺었던 사람, 맺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 평화의 모습으로 나타나서 자기뿐만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치료하는 위대한 힘도 결국은 이러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기계론적으로 영성과 사랑을 분리하려는 시도들이 신약이 가르치는 영성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찾아가서 고치고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참사랑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그 좋은 죄를 죽여야 합니다. 죄를 죽이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여러분은 압니까? 성령 안에서 살아가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에게 있어 죄를 죽이는 것은 손을 잘라내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들이 날마다 은혜생활을 해야 하고 어제의 은혜를 오늘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오늘 은혜를 새롭게 바라고 내일 은혜를 받지 못할까 마음졸이면서 자신을 돌아보며 근신하며 신앙생활을 하다가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는 이 인생을 다 살다가 죽어야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왜 우리가 그렇게 유별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유별난 사랑이 우리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유별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름이라도 예수님의 사랑 없이 살 수 있다면 세상으로 나아가 살아보십시오. 정말 하나님의 사랑 없이 행복하지 살아보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즉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감화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그 아가페의 사랑에 이렇게 깊은 감화와 감동을 받기 전까지 그는 짐승과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을 모두 알고 있었고 유대인의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였지만 그는 짐승과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었고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피 뿌리며 살도록 부름 받은 교회를 박해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소경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알기까지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기 위해서 자기의 회개가 있었다고 생각하기 전에 모든 것을 참으시고 오래 참으시고 어떠한 수치 속에서도 견디시면서 자기 하나를 구원해내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 저미고 목 메이는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모든 것이 한번에 무너져 내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러한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낭만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예배가 끝나고 “주여, 주님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데는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천하는데는 비용이 듭니다. “사랑하게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데는 비용이 들지 않지만 정말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때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사람을 보게되면 실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참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고, 누군가가 그렇게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참으면 사람들은 존경하는 대신에 즉시 손가락질하면서 따돌림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 있어서 사람을 바라보면 우리는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의 출발은 사람이 보고 출발한 사랑이 아니라 주님보고 출발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예화) 우리 나라에 김진홍 목사님 같은 분이 일본에 계셨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라는 분인데, “사선을 넘어서”라는 책도 썼으며, 창녀들과 빈민가에 잇는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눈물로 선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방송국에 출현했을 때 아 나운서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몸도 망가지면서 영혼도 망가진 사람들인데 그렇게 해주면, 그들이 새 삶을 삽니까?” 목사님의 대답이 우리의 심 금을 울립니다. “물론 우리가 그렇게 애써도 새 삶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모든 것을 참으며 사랑하는 것 이외에 그 사람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사람을 보고 출발하고 투자하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한 그들은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키시는 분도 아니시며 또 실망시키실 수 있는 분도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온전한 사랑을 이룬 사람에게는 절망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말씀을 드리기 그러한 사랑의 비밀을 우리들이 가져야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날마다 죄를 죽이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어제의 은혜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은혜 받는 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엇인가 기가 막힌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는 “주님밖에 나를 사랑하신 분이 없지. 주님의 이러한 놀라운 사랑이 내게 있으니 나는 얼마나 복된 사람인가? 주님 제가 주신 이 사랑을 무엇을 위해 쓰시렵니까? 주님 제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지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신 주님의 마음에 다소나마 기쁨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이런 울먹이는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사랑의 비밀을 간직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 이렇게 어렵기 때문에 사랑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오래 참고 인내하며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는 비로소 온전해지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정말로 온전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사랑의 초점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만나면 느껴집니다. 그 경박함. 잘난 체함, 그 오만함, 그 사무적임. 그런데 사랑을 하고 항상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릎꿇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의 대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향기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나보다 잘 배운 것이 없는데 이상하게 머리가 숙여집니다. 입을 열면 무엇인가 내가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깨닫지 못한 통찰들이 흘러나옵니다. 그래서 저에게 충격을 줍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교제하면 숲 속을 함께 거니는 것과 같습니다. 전에 그 사람은 차들이 질주하는 시커먼 아스팔트 중앙선에서 걸어가는 불안한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향기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사랑한 사람들은 곧 그리스도를 사랑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와의 사랑에 빠지게 되면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원한이 맺히면 얼굴이 일그러지고 꿈에서도 날마다 싸웁니다.
제가 팔 년 동안 섬기던 교회에서 목사님께 혹독한 시집살이를 했습니다. 너무 인격적으로 부딪치니까 나중에는 신앙은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데 잠재 의식적으로 밤에 싸우는데 목사님하고 싸웁니다.
사랑에 빠지면 얼굴이 변합니다. 귀신들려도 변하는데 사랑이 들어가면 얼굴이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자매들이 연애하고 안 하는 지를 거의 맞출 수 있습니다. 연애를 하면 벌써 얼굴이 바뀝니다. 그러나 정말 분간하기 어려운 사람은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 연애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사랑에 덮였고 주님의 사랑에 통제를 받고 그 사람과 함께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못합니다. 한쪽의 사랑이 들어오면 한쪽의 사랑은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목사가 되어 가지고 예수님의 사랑이 빠져나가는데 그것을 모르면 인간이겠습니까?
우리들이 모든 것을 참고 오래 참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분투하고 투쟁하며 노력하다 보면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이 정말 사람다운 사람으로 바꾸십니다.
(예화) 제가 대신대학교에 있을 때 아주 다혈질적인 학생이 있었습니다. 완전히 골수 운 동권입니다. 운동권이라면 사상이라도 있는데 그렇지도 못합니다. 그 학생이 한번 나타났다고 하면 모두 긴장을 합니다. 그런데 졸업을 하고 오래 뒤에 찾아 왔습 니다. 교수들이 그를 보고 모두 놀랐습니다. 사람이 저렇게 변할 수도 있구나! 신 학교 다닐 때는 깡패와 같았는데 졸업하고 나니 전도사 같이 되었습니다. 왜 그 렇게 되었냐고 묻자, 교회를 개척했는데 삼 년째 죽을 고생을 하고 있다고 합니 다. 옛날에 운동할 때는 밑에 있는 사람들이 말만하면 쫓아오는데 성도들은 그렇 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변화시켜주시기를 간구 합니다. 그렇게 오래 참는 사랑을 이루어 가면서 결국은 자신이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을 하는 것은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신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여러분이 사랑하기 힘든 사람, 그러면서도 관계를 도저히 포기할 수 없도록 항상 대면해야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정말 여러분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면 여러분을 사람답게 만드시려고 주님이 그런 사람과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숙명에 갖다 놓으신 것입니다.
보면서 내가 인간 같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인간 같지 않은 사람을 내 앞에 두셔서 그 사람을 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시고, 그를 사랑하면서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달으면서 주님도 나를 사랑하시면서 이렇게 모든 것을 참으셨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그런 사랑에 대해서 온전히 승리하고 나면 우리가 정말로 아름다운 신앙의 인격을 가진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중에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겸손한 사람입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 이렇게 까지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담대하게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은 것 같이 너희는 또한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것은 그 순간에 사도 바울이 더위 먹어서 교만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사도 바울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바라보는 삶을 살면서 자신이 정말로 온전해져 가는 희열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산 사람들은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들을 만나도 이렇게 교인들을 정말로 뜨겁게 사랑하고 형제들을 뜨겁게 살아가면서 자기의 부족을 끊임없이 발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목회자들은 오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데도 형식적이 틀에 박혀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쏟아져 나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연애를 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 만나면 감동적인 사연이 오갑니다. 오래 만나면 처음 만났을 때 오갈 수 없는 감동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의 속성입니다. 주님과의 사랑에 빠져도 이렇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를 더 온전하게 하며 더 풍요롭게 하고 더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사랑은 폭풍이 몰아치고 벼락이 떨어진 들판에서 도망가서 숨을 수 있는 은신처이고 사랑은 폭풍이 이는 바다 한가운데서 금방 뒤집힐 것 같은 위협 속에서 찾아오는 평화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이 충만한 사랑을 우리들이 온전히 가지고 사랑이 없어서 주님의 이러한 온전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소망 없이 자신이 버려진 줄 알 고 자신이 그렇게 버려졌기 때문에 막 살아가는 것으로서 인생을 대신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주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참으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들도 그렇게 참으며 그들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고전13:7)
근대의학이 발달되기 전에 유럽전체를 휩쓴 대대적인 재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흑사병이라고 불리 우는 병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죽어 갔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때 불행하게도 많은 교회들은 그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 그리고 장성하게 번성하고 있는 그 도시의 질병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교회에 모여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이는 바람에 죽지 않을 많은 사람들도 함께 페스트에 감염이 되어서 죽어갔던 것입니다.
지식이 없는 사람이나 사랑이 없는 지식, 모두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판단이 없는 맹목적인 사랑이나 판단밖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삶도 결국은 사랑의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사랑의 특징이 무엇인고 할 때 모든 것을 믿으며 라고 기록하고있습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요. 그러나 여기서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투기하지 않고 하는 것으로 계속 되는 것으로 볼 때에 그런 뜻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차적인 의미로서는 참아야하는 대상이 누구냐 하면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 그 때문에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곳에서 사람을 믿는 것, 사람을 의지하는 것을 경고하고있는가? 그런데 어떻게 여기서는 사랑하는 대상도 사람인데 물론 하나님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을 향해서 “모든 것을 믿으며”라고 말하는가? 모든 것을 믿지 못하면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이야긴데 여러분들은 들 수 있고 어쩌면 이것이 바울이 가르치려고 했던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과 인간의 철저한 타락 그래서 인간이 얼마나 믿을만한 존재가 못되는지 에 대한 인간에 대한 바울의 견해와 언뜻 보면은 모순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판단이 없는 믿음이나 신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지식에 기초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거나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도 무조건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그냥 자기의 자녀 혹은 자기의 부모, 자기의 동기간 이런 것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하나도 없이 무조건 충동적인 사랑의 감정 때문에 자기를 매몰시키거나 던져 버리는 것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거듭난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동물적인 사랑입니다. 짐승들이 자기의 새끼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한 10살 정도, 그저 초등학교 2,3학년 때쯤 되었을 때 시골에 가서 처마 끝에 떨어져 있는 새 한 마리를 주어서 아이들이랑 집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지금도 잊지 않는 것은 나무로 집을 만들어 종이로 알록달록하게 예쁜 색종이를 붙여서 속이 들여다보이는 보자기로 씌워서 그 속에 새를 넣고 애들이 그 새를 보고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삼 십분 지나니까 새 한 마리가 저 건너편 기와집 처마에 앉아서 우리집을 쳐다보면서 한없이 우는 겁니다. 그것은 정말 우는 것이었습니다.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보니까 새가 똑같았습니다. 어미가 와서 새 둥지에서 아마 파닥파닥 날개짓을 할 정도의 어리새였는데 어미 없는 사이에 혼자 까불다가 떨어진 모양입니다. 어미새가 와 보니까 새끼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짹짹 소리를 듣는 순간 어미새는 자기 새끼 소리라는 것이 인식이 된 모양입니다. 앞에서 그렇게 애처롭게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놓아주자”생각하고 놓아준 기억이 납니다.
동물들도 그렇게 인간처럼 지성이나 영혼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도 새끼에 대한 사랑은 정말 지극합니다. 요새는 기르지 않지만 개를 기를 때 보면 새끼를 낳을 때쯤 되면 가마니를 앞발로 몇 일을 뜯어서 보드라운 솜털같이 그렇게 만들어요. 사람보고 일부러 하라고 그래도 못할터인데 밤을 새워서 그렇게 뜯어놓은 보드라운 솜털 같은 둥지 위에다 새끼를 낳아 한 마리씩 뉘어놓는 것입니다. 개가 그야말로 진흙바닥에서 놀다가 새끼를 낳으면 새끼가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새끼가 태어날 것을 알고 미리 발톱이 닳도록 며칠에 걸쳐서 보드라운 솜털같이 만들어놓고 거기다가 새끼를 낳아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 새끼를 낳아놓고 보호하는 것은 굉장합니다. 그래서 개가 두 가지 상황에서 가까이 가면 안돼요. 밥 먹을 대와 새끼 낳았을 때 가까이 가면 반드시 물어요. 먹을 때는 개도 안 때린다는 말이 있듯이 물릴까봐서 안 때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새끼를 그렇게 보호하는 것이지요. 철저하게 보호합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사람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나 부부에 대한 사랑이나 동기간에 대한 사랑이 이와 같이 너는 내 핏줄 그러니까 난 무조건 너이 피야 이렇게 가지고 충동적으로 흐르는 사랑 이외에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은 동물적인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런 것을 고상하게 묘사할 건만은 아닙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랑이어야 됩니다. 사랑을 하여도 충동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는 그 사랑이 정말 온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지식이 있고 판단이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사랑은 좋은 사람만 사랑하지만 기독교의 사랑은 나쁜 사람들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만 사랑하지만 기독교의 사랑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줄 뻔히 알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상처받지 않는 사람만 골라서 사랑하지만 그러나 예수의 참사랑을 안 사람들은 상처받는 것이 뻔한데도 그를 사랑하는 겁니다. 사랑하고 나면 마지막에 커다란 모욕과 고통밖에 돌아올 것이 없을 것이다. 내가 저를 사랑한다고 쓰다듬으면 저는 송곳으로 내 손을 찢으실 것이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에서 제일 나쁜 말은 모른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해야할 대상을 알아야지 여러분들이 자녀를 사랑하게되면 그냥 이는 내 새끼니까 그냥 뭐든지 좋다 라는 것은 동물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정확히 파악해야 됩니다. 내 자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어디가 잘못되었고 어디가 문제가 있고 이런 점은 잘되었고 등등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자기자식자랑 아내자랑 남편자랑 하면 뭐라합니까? 팔불출이라고 해요. 여덟 가지 못난이 중에 하나다. 그만큼 공정성을 잃어버리고 올바른 인식을 갖기 힘들게 끔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사랑, 그러니까 타락한 성품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새롭게 거듭나고 변화된 가운데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마음속에 자극을 받아서 그것대로 움직이는 간증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사랑은 아닙니다. 판단이 서야 됩니다. 그러니까 사랑할 수 있는 사람, 혹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 혹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정확하게 판단해볼 때 사랑할 가치가 없는데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 아픔밖에 없는데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맹목적인 충동과 성경에 이야기하고 있는 참 사랑을 구분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먼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모두 인정하지만 오늘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느냐하면은 그런 사람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 있지 않아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라는 판단이 서는데도 내가 이렇게 사랑을 베풀면 이것을 그대로 사랑으로 반응 안 해 줄줄 알아요. 믿을 수 없는데도“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지식의 판단에 기초하지 않으면 참된 사랑이 아니고 동물적인 충동에 가까운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판단을 해보니까 이 사람이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 판단이 섰는데 성경은 무어라 했는가 하면은 사랑은 모든 것을 믿어야한다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하면 여기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조건 너만 믿는다가 아니라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그를 사랑함에 있어서 그 사랑이 계속되지 못하도록 일어나는 방해적인 많은 사건들을 선의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사랑대신 미움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악의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기도 그 사람이 그런 일을 했다면 자신도 더 손해가 되고 고통이 될 수도 있는데도 일단 미운 마음이 생기게 되면 자신이 함께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함께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선의로 해석하지 않고 모든 것을 악의로 해석하면서 이제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이는 눈을 흘겨도 애교를 부리는 것이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미워하는 사이는 쳐다만 봐도 “왜 째려봐” 이렇게 예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과 미움의 차이입니다. 저는 학교 다닐 때 선배들한테 많이 맞았습니다. 왜냐하면 뻔히 쳐다보고 인사 안 한다고 맞았습니다. 그런데 나는 눈이 나빠서 그런 것이었어요. 눈이 나쁘니까 째려보며 쳐다봐요. 이것이 상대방이 사랑이 있으면 나한테 눈이 얼마나 나쁘면 나를 그렇게 쳐다보니? 할 터인데 그 사람이 사랑이 있겠어요 다가와서 조그만 자식이 인사는 안하고 째려보기만 하니 하면서 때렸어요.
어느 형제가 자매와 깊은 사랑에 빠졌어요. 그 자매한테 좋은 말을 해 주어야 하겠는데
“눈이 참 아름다우시군요” 그러니까 그 자매가 하는 말이 “형제님! 제 눈이 굉장히 나빠서 잘 안보여요” 그러니까 형제가 하는 말이 “안개 낀 호수 같군요” 그랬대요.
사랑은 모든 것을 선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미움은 모든 것을 악의로 해석을 하려고 합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나면 최악의 악으로 해석을 하고는 그 다음에 자기에게는 아직 당하지도 않은 그 피해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아! 그런 마음을 가졌겠지?” 확인되지도 않았어요. 그랬겠지? 그렇다면“ 네가 나를 이런 사람으로 생각한 것이지” 하면서 벌써 주지도 않은 모욕을 자기가 받은 겁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복수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움의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사랑도 숨길수가 없고 미움도 숨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숨길 수 없습니다. 가끔 멍청한 사람이 있어서 자기를 사랑해 주는 것도 사랑인줄 모르고 사랑을 미움으로 갚고 그렇게 미워하는데 도 그것이 사랑인줄 알고 멍청하게 쫓아가다가 발에 채이는 미숙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일반적인 사랑은 그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전해지게 마련입니다. 오늘 사도는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움은 모든 것을 믿지 않고 불신합니다. 그리고 악한 것을 생각하고 악한 쪽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누군가가 커다란 고통과 아픔을 주었을 때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기초를 해서 겨우 그것을 시작으로 삼아서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을 상실하면서 피해 의식에 부르르 떨며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복수할 꿈을 꾸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에 칼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마음의 사람을 죽인 살인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기에게 커다란 모욕을 주거나 자신에게 커다란 나쁜 말을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고통을 준다고 할 찌라도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실제 그러한 것보다도 훨씬 더 선한 쪽으로 상상의 날개를 펴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누군가가 돈을 꾸어가고 갚지 않으면 이제 내 돈을 떼어 먹으려고 마음을 먹었구나 하고 이렇게 해석하지만 사랑이 있는 사람은 사는 것이 오죽하면 그럴까?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어준 다고 하는 것은 사랑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마음에 안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하신 하나님도 여러분 마음에 만족하지 않을 때가 있는데 아니 여러분과 같거나 여러분 보다 못한 사람이 여러분보다 낫다고 하더라도 하나님보다는 훨씬 비교도 안 되는 불완전하고 죄로 가득 차고 모순덩어리인 인간이 여러분들에게 만족을 준다면 그것은 정신병자란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항상 실제와 그리고 현상 어떤 사람이 사람 앞에 나타나는 그러한 것과 그 사이에는 항상 차이가 있어요. 그리고 거기에는 굉장히 많은 불량에 있어서 우리의 이해하는 것이 작용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만약에 자기가 옳은 것 자기가 판단하기에 정확하게 맞는 것 그런 것만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만이 여러분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라고 판단하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도 오히려 그렇게 사랑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할 때에 “믿는다”고 하는 말은 내가 사랑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만약에 사랑이 있다면 내게 미친 불명예와 그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판단은 하지만 즉시 그 판단이 그를 정죄하거나 미워하는 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사실 인식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명백한 사실이 허락하고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대한 그를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그의 과실과 허물을 선의로 해석해줄려고 애를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면서 학교에 있을 때나 그 이후에도 보면 하나하나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지 못하지만 홍두깨 같은 사람들이 불쑥 나타나서 마음에다가 못을 쾅쾅 치고 가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저에게 허물이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분노를 삭이고 하루 이틀 삼일 동안 냉정을 되찾으면서 정말 그가 나를 비난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가 있는가 하고 생각해봅니다. 저는 지금 가깝게 지내던 한사람이 내 마음에 쾅쾅하고 못을 치고 간 사실이 있는데 제가 지금 다섯 달째 매일 빼 놓지 않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생각했습니다. 수련회 갔다오면서도 여러 시간을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형제가 왜 그랬을까? 내가 그렇게 사랑하던 형제인데 나에게 마음 아픈 말과 태도를 했을까? 몇 일 동안 잠을 못 잤지만 이제는 그렇지는 않습니다. 냉정을 되찾고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까? 생각합니다. 내 마음 속에 일어나는 분노도 생각해보고 또 어떤 때는 더 냉정을 찾으면 서 그러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최대한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습니다. 저는 내일도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에 꽁하고 묻어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을 통해서 무언가를 내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시는 것일까?
그것이 무엇일까? 찾고 싶은 것입니다. 이제는 감정은 많이 사라지고 사실을 가지고 하나씩 생각을 해 가면서 지금도 곰곰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내리는 결론은 아! 선의로 해석해야된다. 모든 것은 내가 당한 것이 아무리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행한 것 중에 잘못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일부분이고 타당한 면도 훨씬 많았다. 그렇게 해석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을 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판단을 하는 것이 사랑이란 이야기는 무슨뜻이냐 하면 그렇게 판단을 해야지만 마음에 상처가 안돼요. 마음에 상처는 자기가 살면서 무슨 일을 당했을 때 “나는 그래도 싸지”이렇게 하면은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어요. 가끔 말에 절제가 없는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말을 해놓고 나중에 사람들 마음에 아픔을 주어요. 자기는 농담처럼 이야기했는데 그 사람이 정식으로 와서 항의를 해요. 폭탄처럼 항의를 해요. 그것을 다 뒤집어쓰고 말을 해보니까 자기가 잘못했거든요. 그래도 다 뒤집어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돌아서서 미안하다 하면서 돌아서서 자기 입을 때리면서 이 주둥이가 방정이지. 김목사님이 말과 영적 생활을 설교할 때 은혜의 물에 잠길 때 안 잠기려고 동동 뜨는 것이 두 개가 있다더니 입술 두 개라고 하더니 그 말이 맞구나.
내가 못된 인생이지 이렇게 자책을 하는 사람은 당했어도 마음에 상처가 안 되는 법입니다. 상처는 언제 되느냐 하면 퍼붓고 그때는 돌려보냈는데 돌아가고 난 다음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데? 이럴 때 고스란히 상처가 되는 겁니다. 나는 옳고 너는 부당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잘못했느냐? 물어보아라. 무엇을 잘못했지를 그렇게 생각했을 때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과 자기를 향한 감정, 그가 행한 모든 일들을 다 악의로 해석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속에 그대로 상처로 남는 것입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인이 일어나고 관계의 파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사랑은 모든 것을 선의로 생각하고 선의로 이해해주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대체적으로 저의 경험으로 보면 내가 무엇인가 있어요. 오래도록 생각이 납니다. 어떤 때는 나에게 별로 문제가 없는 일방적으로 사람이 다가와서 마음에 못을 박고 지나갈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그런 것으로부터 곰곰이 생각하다가 도저히 그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도 없고 어떤 허물도 발견하기 어려울 때 거기로부터 벗어나는 저의 방법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초 논리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그러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요. 나도 그럴 때가 많은데 왜 지식을 가지고 정확하게 따져봐야 저 사람이 문제 덩어리야.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저 사람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내 잘못이 있을 경우에는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조명을 받으면서 이런 사건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을 깨우시려고 그러실까?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 것도 얻을 것도 없이 지나가다가 쇠똥에 맞는 것처럼 그렇게 괜히 날아온 돌에 한방 맞는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됩니까? “인간이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 하고있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사랑은 믿는 것입니다. 그를 사랑하면 그를 향해 판단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사랑은 그 판단은 갑 속에 든 칼과 같습니다. 사랑이 없을 때는 판단이 딱 섰다 하면 저 사람이 잘못했다고 생각되면 목 쳐야지요. 칼 뺏는데 목 치고 배 찌르고 머리 때리고 그래서 칼에 피가 낭자하게 묻어야지만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다 꽂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지가 않아요. 판단이 칼같이 섰어요.“ 아! 저 지체는 이것이 잘못되었구나.”“이것은 옳지 않아 저러면 안 되는데” 그리고는 그 칼을 다시 집에 넣는 것입니다. 그 판단은 올바로 사랑하기 위한 판단이지 목 치고 배 찌르기 위한 판단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이 훨씬 높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감히 용기를 내서 그리스도께 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을 하려고 하다가 좌절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을 하되 사랑의 충동은 있지만 그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나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가 있으나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려면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우리자식의 약점은 무엇이고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되요. 그래야 비로소 올바른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이 사람을 정죄하고 찌르기 위한 판단이 아니라 올바로 사랑을 하기 위한 판단이다란 말씀입니다.
그러한 것을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은 가지고 있으면서도 두 가지 사실과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을 해 주는 한도 내에서는 최대한 그가 저지른 죄와 허물, 그가 나에게 준 많은 고통과 아픔을 선의로 해석을 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믿는 마음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면 남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그를 미워하는 대신 염려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그가 나를 향해 한 행동이 논리적으로 옳고 제 정신으로 한 행동이었다면 비난을 받을 것이 없을 것이고 내가 잘못했으니까 그가 만약에 한 행동이 논리에도 맞지 않고 어처구니없으면 사랑을 가진 사람이 그러한 논리조차도 모르고 판단조차도 없이 그릇 행하는 그 사람을 정죄하는 대신에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란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많이 체득하면서 사랑을 깊이 이해하고 그런 속에서 우리들이 타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일을 하거나 인간 관계에 있어서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듣거나 어떻게 했을 때 확 치솟아 오르는 분노가 폭발한 적이 있습니다. 전화를 걸든지 혹은 만나서 “너 정말 그럴 수가 있어”라고 하거나 “너 나보고 이랬대매” 그러고 시작했는데 한참 열을 올리고 보니까 그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이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대광 고등 학교쯤에 버스가 멈췄습니다. 그러니 퇴근시간에 버스가 멈추더니 승객들이 얼마나 열을 받겠어요. 빨리 가야 되는데 그러니까 다 가만히 있는데 저 같은 사람도 그저 기사 아저씨 언제나 데려다 주시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계속 시계를 보면서 “도대체 밥 쳐 먹고 정비도 안하고 뭐하는 거야”하면서 마구 퍼부었습니다. 그러면서 후다닥 뛰어내렸습니다. 사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요. 막 버스 앞을 휘돌아 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작업복을 입고 운전석 밑에 있는 바퀴를 계속 들여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다짜고짜로 손가락질을 하면서 퍼부었습니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다쳐다보았어요. “이 자식들 밥 쳐 먹고 뭐하는 놈들이냐?” 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열이 뻗쳐서 이놈들 다 집어넣어야 된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다 퍼 붇다가 실탄이 떨어졌습니다. 작업복 입은 사람이 고개를 들더니 “나 운전수 아니예요. 나도 손님이예요.”하니까 이 사람이 얼굴이 빨개지더니 차를 못타고 걸어서 안암교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열을 받아도 좋지만 운전수냐 하고 확인을 한 다음에 퍼부어도 늦지 않을 텐데 그냥 작업복입고 바퀴 밑을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운전수인 줄 알고 마구 퍼부었던 것입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이런 낭패를 당할 때가 가끔 있었습니다. 이는 오래 참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모든 문제를 믿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선의로 해석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 있는 마음입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에 새차를 택시 강도 한 사람이 법정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재판장에서 피고인이 진술을 하는데 자기가 지금 살고 있는 상황을 다 이야기 할 때 거기 있는 판사를 비롯하여 방청객 등 모든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피고의 진술을 경청을 했습니다. 법률적으로 맞는지는 모르지만 무죄선고는 내렸단 말입니다. 그래서 법정이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강도했다 하면 세상에 돈을 훔쳤구나 하는 것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이 감옥에 갔는데 한사람이 무기형을 받았습니다. 무기형은 평생 감옥살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명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시골에서 올라와서 젊은 총각이 밥 벌어먹을 곳이 없으니까 담을 넘어 남의 집에 들어가서 문을 열고 보니까 네 식구가 자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조려서 훔칠 수가 없으니까 연탄가스를 이 사람들이 먹으면 졸도를 할테니까 “내가 마음대로 훔쳐갈 수 있겠구나”하고 생각하고 잘 자고 있는 방문을 열고 아궁이에서 두꺼비집을 열고 부채로 계속 연탄불을 부쳤다는 것입니다. 연탄가스 들어가라고 그러다가 하도 추위에 굶주리다가 따뜻한 아궁이 앞에 앉아 부채질을 하다가 잠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붙잡혀서 재판을 받았는데 그게 “집단 살인 미수죄”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그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사랑의 눈빛으로 보았더라면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법으로 해석을 하면 그 말이 맞지요. 그러나 조금만 사랑의 눈을 가지고 보면 사실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판단이 든다 라는 이야기를 간증에서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사랑은 모든 것을 선의로 해석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최근에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전과자한테서 편지를 받았습니다. 제 책을 읽었고 감명을 받았는데 책 1권이 살 돈이 없어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3권과 테이프하고 보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는 또 편지가 왔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10권을 보내주었으면 좋겠다고 편지를 구구절절이 썼는데 그래서 보내달라는 것보다 더 많이 보냈는데 답장이 왔는데 그것을 어디다 썼는가 하면 감옥 속에 자기와 같이 있던 죄수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불쌍해서 다 자기가 보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모든 것 자기가 좀 이해 할구 없고 약간은 불쾌하게 느껴지고 때로는 불쾌를 뛰어넘어서 고통스러운 상황이 전개될 때에도 그것을 선의로 해석을 해주는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되는 마음이냐 하면 사랑에서 비롯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믿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처받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모든 것을 그럴 수도 있다고 믿어주고 또 가장 선한 쪽으로 생각해 주니까 이 사람이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르다는 판단은 서 있지만 그것 가지고는 사람을 정죄하지 않으니까 죄짓지 않고 그것이 오히려 그를 올바로 사랑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그러한 도구가 되기 때문에 지식이 오히려 사랑을 온전하게 이루게 하고 모든 것을 선하게 해석을 하니까 항상 자기가 무엇인가를 고통을 받거나 부당한 말을 듣거나 잘못된 것들을 당했다고 할 찌라도 그것이 마음에 고통이 괴거나 상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생을 사는 것을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어렸을 때에는 부모님을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아이들도 많지만 그러나 부모님을 만나서 상처를 받는 아이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젊은이들이 70%가 자기 부모를 미워한다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경적을 줍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는 그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청년이 되어서도 부모님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혼해서는 부부간에 상처를 받고 그 후에는 자식들이 상처를 받고 이러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인생을 한번도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보지 못하고 결국은 조그만 인간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간증의 작용 그거 하나를 붙들고 일생을 파뿌리 되도록 늙으면서 살아온 인생은 세상에 돌아가서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살 인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차피 주님을 위해 산 인생이 아니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가서 술 퍼먹고 타락하고 범죄했지만 이 사람은 멀쩡히 교회 나오면서 마음에 많은 상처를 가지고 마음속으로 수많은 사람을 살인하여 시체가 겹겹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니까 마귀의 계획이 훌륭하게 이루어집니다.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너 일생을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 하나님이 물으시면 주여! 상처를 안고 씨름하다 왔나이다. 그것이 무슨 상처냐? 나를 위한 상처도 있느냐? 그런 것은 받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이 천국에 가면 하나님께서 세 가지 질문을 하실 것이다. 첫째는 내가 준 돈 어디에 썼느냐? 둘째는 내가 준 자식들 잘 키웠느냐? 그리고 내가 준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했느냐?
이 세 가지에 대해서 반드시 대답을 해야 될 것이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다 살고 나서 주님 앞에 가서 “주님! 제 인생은 상처뿐이었습니다” 무슨 상처냐? 그저 내 마음속에 고통이었습니다. 주님! 상처뿐이었습니다. 웬 상처냐? 주를 위해 싸우고 주를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를 위해 고난을 받고 진리를 따라 사느라고 제 얼굴에 악마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잘했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저도 상처가 있습니다. 날 옛날에 내 친구가 이랬습니다. 저리 가라고 그랬습니다.
이렇게 살면 안됩니다. 마귀가 기가 막히게 좋아하는 사람 둘이 있는데 분노를 못 참고 미움을 털어 버리지 못하는 사람과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가지고 놀기가 아주 쉽습니다. 이리 매다 꽂고 저리 매다 꽂고 코 꿰어 가지고 자기가 먼저 넘어가는 것입니다. 코가 아프니까 그래서 곤두박질 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해결은 무엇인가 하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하면 아가페의 사랑이고 아가페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랑의 대상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맹신이 아니라 이해와 판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가 행한 모든 죄악이나 나를 향해서 고통을 준 많은 것들을 최대한 선의로 생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상처가 생기지 않고 그리고 그렇게 선의로 생각할 때 그 사람을 향한 에너지가 생겨 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런 것 많이 경험했습니다. 제가 원래 성격이 여려해 연단을 통해서 지금은 그래도 단단하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데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그 사람이 내게 깊은 고통을 주었을 대 그때에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기껏해야 복수하기를 포기하는 정도에 그쳐요. “그래 너는 그랬지만 나는 너한테 복수하지 않겠다”이런 정도로 날개를 접습니다. 모든 것을 믿으면 즉 그가 내게 행한 악한 것과 잘못된 것을 그럴 수도 있다 아마도 선한 의도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라고 깊이 생각하고 이해를 하게 되면 여기서 고갈되었던 사랑의 에너지가 충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 사람이 그렇게 불쌍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피해를 입은 것은 나인데도 내가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내 마음의 상처가 사라지고 또한 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사랑할 수 있는 아가페의 에너지까지 생겨나니까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두 믿어주는 그가 내게 베푼 모든 악과 허물을 선한 방향으로 생각을 하고 해석을 해서 여러분 자신도 상처받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악을 행한 많은 사람들에게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의 사람들이 되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믿으며” 라는 그 앞에 무엇이 붙었느냐하면은“모든 것을”이 붙었습니다. 세 번이 반복이 됩니다.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모든 것”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라는 말이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이렇게 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도 보여주고 도는 믿는 것, 바라는 것, 견디는 것, 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에게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 명백하게 화살을 자기를 향해 겨누고 있는 사람을 선한 의도로 해석을 해 주는 자체가 자기를 부정하는 자기 부인의 극기가 없으면 그런 일들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거나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면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죄 하나를 용서해주는 것은 자신의 손마디 하나를 끊는 것이나 마찬가지의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하는 것은 용서해주는 차원보다 훨씬 적극적인 차원입니다. 선의로 해석을 해서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악 때문에 그에게 다른 사람으로부터이거나 나로부터 불명예가 돌아가고 비난이 돌아가는 것을 막아주고 싶다라고 하는 보호의 본성까지도 발동된 사람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뿐만 아니라 아주 명백한 해를 입히고 모든 사람이 다 보았을 때에 이 사람이 잘못했고 이 사람이 옳다라고 인정을 해 줄 수 있는 상황에 내가 서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옳다 인정함을 받았다고 할 지라도 사랑은 그러한 완전히 자기가 의로운 상황에서조차도 그가 자신에게 악한 일을 행하고 상처를 주었던 사실에 대해서 긍정적인 해석을 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그것을 용납하고 수긍하는 해석을 하고 이해를 해주고 그것을 믿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참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것에 있어서 얼마나 녹물과 같이 그렇게 우리는 사람을 용납하는 마음이 없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는 마구잡이의 인생을 살면서 주님 앞에 많은 고통을 드리고 지체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내면서도 우리 자신에게 이따금씩 다가오는 지극히 작은 고통, 지극히 작은 손해, 지극히 작은 비난이나 불명예를 견디지를 못해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어주는 대신 모든 것에 분노하고 모든 것을 불신하고 그래서 작은 나쁜 것 하나 때문에 그 동안 자신에게 베풀었던 많은 선한 것을 전부 다 부인해 버리고 관계까지 모두 깡그리 파괴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막가는 본성들이 우리모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시는 이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 말씀을 다 순종하며 살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아가페의 사랑을 다 실천하며 살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마치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법령집을 보고 이것을 지키며 살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성도로서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 성도로서의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수 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세 상에서도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계층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교수들이 모인 사회에서는 거기는 거기대로 살아가야 할 룰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부류에는 다른 사람들로서 윤리가 있을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그래도 양심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만약에 그런 식으로 성도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분명한 삶이 있는데도 하나님이 무어라 하시든지 나는 나대로 살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면 그는 성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이기를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옳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지키지는 못할 지라도 옳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못살면 자기가 못사는 것이 문제이지 그렇게 살도록 부르신 주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명하신 표준들을 받아드리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을 믿으며”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믿고 그가 행한 많든 악한 일들과 혹은 가지고 있으나 선의로 해석하고 그래서 그를 미워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할 때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을 행하며 그렇게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 많은 어려움들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도 모든 것 속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믿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사랑은 그를 불신하거나 낙인찍지 않습니다. 이러하지 못한 것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비록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한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사랑은 끊임없이 그가 저질은 많은 허물과 자기를 향해 입혀주었던 많은 고통들을 선의로 해석을 하고 그래서 그를 용서하고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을 말할 적마다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었는지를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합니다. 자기가 죄인이요. 소망이 없고 완전히 썩은 인간이다 하고 하는 것은 단지 예수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을 회상하며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자신이 얼마나 부패한 인간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기에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라는 것을 철저히 깨달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사도의 길을 걸으면서도 끊임없는 죄와의 갈등에서 이를 악물고 투쟁하는 내면의 투쟁 속에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이제 너희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 좋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이 세상에서 고달픈 투쟁과 갈등을 겪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수 있었던 것은 자기를 그렇게 “모든 것을 믿으며”자기를 하나님이 바라보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이 죄악된 길로 걸어가면 “그래 그래 괜찮다.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렇지 않아요. 그 길은 안 되는 길입니다. 잘못된 길이고 그 길로 걸어가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고통이 그칠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믿으십니다. 여기서 믿는다는 의미는 여러분들이 혼자 무엇이든지 잘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실 때 여러분들이 이전에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온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여러모로 스스로 핑계거리를 만드시면서 우리의 어그러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았던 많은 날들에 대해서 스스로 변명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셨을 때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십자가에서 남기신 첫 번째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여, 저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뒤에 나오는 말은 “저희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왜 모릅니까? 명백하게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누차에 걸쳐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말했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한 그래서 그 손으로 베풀어주시는 보리떡과 물고기를 먹고 병고침을 받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고 로마의 병정들이 예수님의 고귀한 손과 발에 못 박고 가시관 씌워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습니까? 변명할 여지가 하나도 없는 명백한 죄였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이들이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자기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구차한 변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하시면서 어찌 하든지 자기를 못박는 죄 때문에 이들이 자기가 당하는 것과 같은 이런 하나님과의 단절을 경험하고 형벌을 받는 여기에 떨어지지 않도록 아버지 앞에 매달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기도지만 사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렇게 여겨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있을 때조차도 주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단지 형벌 받아 마땅하고 진노가운데 떨어져서 불같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대신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수 밖에 없었던 많은 것들을 많은 상황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들 심지어는 사단의 유혹, 많은 것들을 계산해 넣으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 성령께서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중보하시면서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죄를 누리에게 돌리지 마옵시고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또 그러한 백성으로 여겨주시도록 그렇게 간구하심으로써 우리들이 하나님의 모든 오래 참으심과 긍휼을 입어서 죄인 중에 괴수였음에도 불구하고 은혜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주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있었던 이러한 감격, 자기의 많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면서 자신을 지켜 모아 주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주님을 거슬려서 불같은 심판을 받고 단순에 육체와 영혼이 쪼개져서 불구덩이 속에 던져진 그러한 장작과 같은 신세가 되어야 할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모든 것을 믿으시는 ‘’이 사랑 때문에 자기가 여기서서 바로 고린도교회 교인들! 은혜는 많이 받았지만 참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연성에 한복판에 자리하지 못하게된 이 잘못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사랑의 서신을 쓸수 있게끔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울을 향하여‘’ 모든 것을 찾으시더니 결국은 주님이 그 참으시는 사랑과 주님이 그의 모든 허물을 최대한 선으로 생각하시면서 대려오신 인내하시는 사랑이 모든 것을 믿으시는 그 사랑이 오늘로 하여금 그 실패하고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인간의 고백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이처럼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큰 진리와 지식의 빛 아래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고 얼마나 큰사랑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과 우리의 명예를 심히 더럽히고 우리의 가슴에 커다란 아픔을 남겨준 사람들을 악한 것이 분명하고 잘못된 것이 명백한데 어떻게 그것을 선의로 해석해 주고 그래서 마지막 결론으로는 나도 그 사람의 입장이었더라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해서 원수 갚아야할 그 사람을 오히려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런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 봐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못 박히신 그 십자가의 사랑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나타났고 그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모든 것을 믿어주시는 사랑 때문에 우리는 오늘 여기 서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인간 관계 속에서 혹은 여러분과 함께 생활하는 지체들을 보면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의 손을 굳게 잡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나는 당신을 굳게 믿습니다‘’
“당신은 정말 결국은 믿음으로 승리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선한 사람 인줄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 안에 있는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한번 고백해 모십시오. 감시당하는 사람보다 믿는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훨씬 훌륭한 삶을 살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감시의 눈빛 앞에서는 온전한 삶을 살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뢰의 눈빛 앞에서는 온전한 삶을 살수 없고 감시의 눈빛 앞에서 무엇인가 우리가 잘못했을 때에는 깊은 가책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새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종종 무언가 유혹을 받는 상황, 편한 길을 걸어가야 되는 상황 그런 기로에 서서 신앙적으로 고독하게 결단을 내려야 될 적마다 하나님도 생각하지만 그러나 여러분과 같은 많은 성도들과 제가 가르쳤던 많은 제자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준 것도 없고 베풀어 준 것도 없는데 무조건 믿어주던 그 눈빛들 그리고 하나님의 참 진리를 통해서 변화로 받고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는 당신이 나를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해서 참되 신앙의 길로 걸어가도록 지도해 주실 분입니다 라고 믿는 눈빛을 보여 주었던 많은 성도들, 그들이 나에게 용기를 줍니다. 그리고 타협하지 말도록 내게 힘을 주고 더욱 진리로 쫓아서 모범된 삶을 살도록 저에게 거룩한 촉구를 불러일으킵니다.
여러분 사람의 눈빛 알에도 우리가 이럴 수 있다면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는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살게 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여러분은 어쩌면 한번도 제대로 모든 것을 믿어 보신 적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오눌 눈을 들어보십시오. 여러분처럼 실패하기 잘하는 여러분들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 분들을 모든 것을 믿고 계신 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을 신뢰하고 계십니다, 결국은 저들이 나의 참 사랑을 알고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미혹을 받으며 나를 향해 대항하고 있고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있고 알면서도 계속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나는 너희들이 너희를 행한 내 사랑을 알고 내가 너희를 위해 무엇을 향했고 내가 너희를 위해 어떤 일들을 십자가에 이르렀는지를 너희들이 분명히 깨닫고 인격적으로 나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 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인격적인 사랑 앞에 승복하리 라고 나는 믿는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향해 모든 것을 믿으시는 하나님, 허물이 많아서 우리를 향해 정확한 판단은 판단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러나 그 판단은 우리를 목 치고 정죄하기 위한 피묻은 칼이 아니라 지갑 안에 든 칼로서 우리를 올바로 사랑하고 우리를 올바로 인도하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 의 판단이 깁니다. 그런 판단을 가지고 계신 분이 우리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지급은 네가 이렇게 어두움으로 가득 찬 폭풍이 몰아치는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너를 믿는다. 나는 너의 모든 것을 믿으며 결국은 너는 너로 향한 내 사랑을 깨닫고 거기에 승복해서 그래서 너도 내 안에 있는 참 사랑을 물려받아서 이제껏 까지 나를 알기 전에는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사람들로 받아들이고 미워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오히려 사랑하게 되는 이런 나의 아가페의 사랑을 나는 너희들이 깨닫게 되고 그 사람 안에서 살게 되리라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소외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어떠한 죄악과 무지와 어두움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소외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와 습관적으로 남아있는 여러분들의 죄악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밝은 빛과 주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모든 통롤 가로막았을 뿐이지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여러분이 하나님께 가장 많이 실망을 끼쳐 드렸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여러 분들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믿으시는 사람을 한 몸에 받고있는 분이 신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판단하고 우습게 생각하고 교회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아니 하여도 그러나 와전한 사랑을 가지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여러분들을 향해서 모든 것을 믿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아가페의 사랑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모든 사람을 실망시키면서 살아왔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면서 살아왔어도 이제는 지나간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오늘 우리 앞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신 십자가에 매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 그분만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누가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어둠가운데 죽어갈 때 여러분들에게 찾아왔습니까? 버림받고 소외된 것과 같고 죄의 의식 속에서 몸부림치고 도덕적으로 파산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을 때에 여러분들 찾아오신 분이 누구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렇게 여러분들이 버려진 상황에서 모두 여러분들을 낙인찍고 여러 분들 목에 어떤 선한 것도 믿어 주지 않던 그 때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아무 능력이 없는 여러분들을 믿어주시고 모든 것을 믿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믿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신령하심과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향해 그칠 줄 모르고 믿어주시는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허물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쓰러지고 넘어지면서 여기까지 걸어와서 오늘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고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해서 우리는 섬세하게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인생은 그 동안 주님이 만나게 해 주셨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실망 주고 상처를 주는 인생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우리로 이렇게 끝까지 믿어 주시고 끝까지 모든 것을 믿어 주시면서 우리의 인생의 길을 인도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분에게 만큼은 실망을 드려서는 안됩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모든 것을 믿으시면서 우리를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참 사랑 속으로 들어올 날을 기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당신 앞으로 들어오고 그 사랑 속으로 순종하며 들어가는 우리를 보고 보라! 내가 이들을 향하여 모든 것을 믿었더니 결국은 이들이 나의 믿음대로 내 춤으로 돌아 왔도다. 그래서 내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도다. 주님이 자랑하실 수 있는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습니다.”
20.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랍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고전13:7)
이제 사도가 사랑의 특성을 하나씩 설명하는 가운데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둔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언제든지 자신에게 일어난 일, 그리고 사랑은 언제든지 자기가 사랑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일어난 일들을 선의로 해석하려고 애쓰고 그것을 인해서 사랑하지 않는다고 빌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라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느리라” 희랍어 성경은 “바란다” 라는 말을 “엘피죠”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희망을 갖는다. 이런 뜻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다 그런 뜻입니다. 소망을 갖는다. 그런 뜻입니다.
저는 몇 시간 전에 강원도 양구라고 하는 먼 곳 여기서 약 세시간 반 걸리는 곳에서 강원도에 흩어져 있는 27개의 교회들이 모여서 교사들의 수련회를 이틀동안 말씀으로 섬기고 왔습니다. 거기서 저는 은혜로운 간증 하나를 들었습니다. 노회에 속해있는 존경받고 믿음이 좋고 기도 생활을 많이 하시는 목사님이 계신데 그분이 어떻게 해서 목사가 되었는지 다른 사람을 통해 간증을 들었습니다. 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가 잘 자라다가 무슨 병인지도 모르는데 큰 병에 갑자기 병이 걸려서 결국은 의사도 가망이 없다고 그러고 모든 식구들이 아이를 보니까 눈동자가 넘어가고 호흡도 끊어진 것 같고 죽었다고 그래서 다 버렸답니다. 그러고 모든 식구들이 죽은 것으로 치고 묻으려고 시신을 가지고 나가는 것을 어머니가 울며불며 매달려서 그 아이를 시골에서 나는 참숯에다 쌓았답니다.
나는 처음 알았는데 물건이 부패하기 쉬운 것을 숯에다가 싸매면 상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당장 얼음은 없으니까 이 아이를 숯을 쭉 깔아놓고 거적 같은데 눕히고 그것을 둘둘 감아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붙들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몇 일을 기도했는지, 정확한 날짜는 못 들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했는데 기적과 같이 모든 동네 사람과 의사도 이제는 죽었다고 버린 아이가 다시 기적과 같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저는 아이가 죽었는데 부활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여튼 의사를 비롯해서 모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 이 아이는 죽었다. 숨이 끊어졌다. 그렇게 다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그 아이를 포기하지 않고 참숯에다 말아서 그것을 부둥켜안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를 해서 살려서 결국은 그 사람을 목사를 만들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제일 먼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사라지지 않는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있습니다. 죽은 것과 같아도 사실은 죽었을 리가 없다고 믿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일 수 있고 미친 행동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사랑은 쉽게 포기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이 모든 것을 믿는다고 할 때 과거에 일어난 일, 현재에 행해지고 있는 일들을 좋은 뜻으로 해석하고 믿으려고 하는 성질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라고 하는 것은 현재상황이 어떠하든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끝가지 절망하지 않고 끝가지 소망을 갖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해서 돌을 던지고 폐인이라고 말하고 너 같은 죄인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고 저 사람이 저런 지경에까지 내려 같으니 이제 인생은 끝났을거야. 저 사람이 저렇게 불명예스러운 자리까지 내려갔으니 저 사람은 이제 살아보았자 부끄러움과 고통과 수많은 사람들의 손가락질 밖에 받을 것이 없을거야. 저 인생은 절망이야 저에게 모든 기대는 끝났어. 이제 네 시대는 끝났고 네가 좋아할 만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을 꺼야. 이렇게 말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여전히 그에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전히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절망해야할 상황인데도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지금은 저렇게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서고 말꺼야 지금은 큰 어려움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지만 이 순간만 지나가고 나면 그 사람도 마음 중심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많은 사람이 알아줄 날이 올거야” 그러한 때로는 부당하리 만치 집요한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인생의 모든 불행은 희망을 저버리는데 있습니다.
여러분은 오 헨리라고 하는 사람의 작품인 “마지막 잎새”를 읽어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병에 걸려서 모든 사람이 포기하고 의사도 그날 밤에 넘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그런 정도의 비참한 병자였었는데 창 밖 벽에 붙어 있는 담장이 넝쿨 잎이 하나씩 둘씩 떨어져 갈 때 자기는 이 떨어져 가는 잎을 보면서 저 잎마저 떨어지면 내 인생도 사위어 가는 때이겠지” 그런 고백을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밤새도록 고생을 해서 똑같은 식물을 만들어 떨어진 잎 대신 그림을 그려 놓았고 아침에 일어나서 여전히 그 잎을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있다라고 하는 것을 착각으로라도 생각하고 그가 희망을 갖고 죽음을 극복하게 되었다고 하는 스토리입니다. 희망을 저버리고 나면 인생이 아름다운 것에 대한 전망을 잃어버립니다. 희망이 있는 한 우리는 죄절하지 않고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가 “죽음에 이르는 병” 이란 자신의 유명한 책 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병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절망입니다. 절망하는 그 순간은 범죄하는 순간은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순간이라고 말씀 드렸지만 인간이 완전히 절망하는 그 순간 은 마치 양손에 큰칼을 들고 하나님을 베이려고 하는 것과 똑같은 무모하고 아주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그런 행동이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절망하지 말아야 하고 또 절망하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갖고 있는 한 죽지 않고 살아서 고난을 이기고 기쁜 날을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어떤 의외의 일이 일어나거나 그리고 납득할 수 없는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거나 그리고 그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자신이 커다란 고통을 받는 어떠한 일이 난다고 할지라도 그 대상에 대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 얘기할 것 없어” 그 인간은 안돼, 결국은 인간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아니라 사랑이 없음이 기초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오늘”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먼저 그는 자기를 실망시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데마)가 전도 여행 중 자기를 버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도망간 이야기라든지 마가가 중간에 자신을 버리고 힘든 전도 여행에서 이탈한 이야기라든지 하는 이야기도 사도 바울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이지만 자기가 세운 교회에서 은혜를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바울을 대적하고 물러가서 자기가 세운 그 교회의 교인들을 박해하고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한다는 소문이 들려 오거나 피붙이 같이 사랑하며 전도해서 그 영혼을 불러다가 자기에 가슴에 안고 옷깃을 풀어서 젖을 먹이듯이 그렇게 길러낸 무리들이 바울이 정말 사도냐?고 이렇게 대드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사도 바울이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고 하면 그는 인간도 아닙니다. 분명히 그는 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속에서 분노하는 사도의 인간적인 모습도 발견하고 슬퍼하는 사도의 모습도 발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의 경험, 영혼들 섬긴 그 경험 속에서 그는 이 사랑이 위대함을 깨달은 사람답게 자신에게 어떤 고통이나 상처를 주는 사람도 결국은 그들을 향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이제 수루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려고 결심하면서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해놓고 유언의 가까운 설교를 합니다. 그 설교 속에서 그가 고백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너희들을 섬겼는지 너희들이 나의 증인이 아니냐? 그 중에 고백 가운데 유대인의 간교로 인한 시험과 동족인 유대인이 간교한 꾀로서 동족인 사도 바울을 죽이고 고난을 당하게 하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다 썼습니다. 그리고 동족으로부터 매 맞고 다섯 번이나 맞고 돌로 침을 당하고 하여튼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는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가 예수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가지고 동족들에게 가서 그 예수의 사랑과 구원의 길을 전하려고 할 때 자신을 그런 식으로 부당하게 대했다는 이유 때문에 동족들로 인해서 상처를 받거나 동족들로 인해서 그 동족들을 향해 원망하는 마음을 품은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로마서에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 골육 지친 중 몇 명이라도 저들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서 끊어질지라도 내가 더욱 원하는 것이다”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경험한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자기를 향해 그렇게 박해하고 복음을 전할 때 복음에 순종하기는커녕 노골적으로 복음에 대적하고 그리스도를 훼방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고 결심하고 오히려 예수를 전하는 자기와 같은 자를 박해하고 핍박하고 자신이 구원할 수 있는 동족들도 구원받지 못하도록 훼방한 그 극악한 무리들은 바라볼 때 그런 속에서 결국은 동족들에게 고난을 받아서 (사도 바울이) 옥 속에 갇힌바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자기를 핍박하는 패역한 동족들을 향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갈망하고 간절히 원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서 구원을 이루게 하는데 헬라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이러한 구원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기를 소망하는 마음을 언제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하고 박해도 당하면 당할수록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렇게 박해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참사랑과 구원을 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의 참사랑을 알지 못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동쪽을 향한 그치지 않는 소망을 가졌고 그리고 그 민족이 비록 예수그리스도를 못박고 매달았으나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권고하셔서 결국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는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간단하게 “그가 동족을 사랑하였다”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소망을 저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사랑하는 대상이 그가 자신에게 어떠한 비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자신이 그를 향해 베푸는 사랑에 부응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할 찌라도 여전히 그에 대해서 소망을 갖고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저버리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곳에는 절망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희망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사랑의 대상을 포기하지 않는 그 모든 것을 바라는 특성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당연히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자기를 구원하시고 그리고 자기를 변화시키셔서 이제는 자신이 그렇게 핍박하고 미워하던 이방인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일군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모든 것들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셨으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도 바울의 구원을 주관 하셨는데 그는 구원받는 것은 다메섹에서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신앙이 깊어질수록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의 사건은 이미 계속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이 하나님을 향해 조금도 사랑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긴 세월동안 자신을 짝사랑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필연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구원받고 사도가 된 다음에도 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죄에 대해서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전에는 내가 몰랐으니까 이제 만나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제 내가 주님을 배반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사랑하며 살면 되지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몰랐기 때문에 살았던 날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어느 정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도 이해하시고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전에 핍박자요, 포행자요 그랬던 자신을 인해서 깊이 아파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 내가 하나님을 단지 몰랐을 뿐이지 그분은 내가 당신을 몰랐을 때에도 이미 나를 절실하게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후에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그 하나님이 내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도 그렇게 나를 이미 사랑하셔서 나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때 내가 몰라서 그랬기는 했지만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박해하고 예수 믿는 자를 잡아죽이고 이 끔찍하고 흉악한 죄악 속에서 살았으니 그것이 얼마나 가슴아픈 일인가 하는 고백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만의 체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이와 동일한 체험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가 아직 깊지 않을 때는 모르지만 깊어 보십시오. 계속해서 우리의 옛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옛 삶을 돌아보는 것은 정죄 의식에서 돌아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에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 그때 내가 산 삶이 인간의 삶이었는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죄 가운데서 주님을 훼방하고 살았는데 아! 그렇게 내가 살았으니 이제 무슨 희망이 있겠느냐 이런 식의 이상한 논리를 갖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해서 은혜를 받은 우리 모두는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도 예수님이 나를 한 없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때 그 사랑에 어울리지 않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께 욕을 보이며 살았던 모든 삶을 깊이 가슴아파하면서 그런 나를 주께서 구하셨으니 주님이 나에게 그런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버림받은 짐승과 같이 살았던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렇게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셔서 내가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입고 다른 사람보다 아무 의로운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서 내가 주 앞에 선택되어 주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았사오니 이 사랑과 이 은혜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회개를 하면서 오늘 더 정결하게 살고 나의 마음과 삶이 모든 부분의 하나님께만 바쳐지기를 원하고 내 생명과 시간과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내게 있는 선한 모든 것을 그분을 위해서 쓰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하는 결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예수그리스도의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기대를 거시는 사랑을 십자가에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는 항상 우리가 얼마나 무지막지한 죄인이고 소망 없는 인생인가 하는 것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고백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는 선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를 위해 살고자 눈물을 흘려도 내일은 주님을 위해서 살기 힘겨워하는 인생입니다. 지난 주에는 주를 위해 선하게 살고자 결심하였으나 이번 주에는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견디지 못해하는 패역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런 선한 것이 없고 믿을만한 좋은 것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아무 선한 것이 없는 우리인생을 향하여 주님이 기대를 걸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이 뜨겁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아무리 죄악가운데 있고 하나님의 얼굴에 침 뱉고 돌아섰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희망을 갖고 계십니다.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그 기대는 결코 그치지 않고 여러분들을 향한 그 마음의 소원은 점점 더 강렬해져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말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그랬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안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정말 이 세상에 될 것 같지 않은 자를 불러서 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완전히 소망이 없고 절망적인 인간을 변화시키셔서 그래서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기쁜 사람으로 하나님이 빚어 가십니다. 사도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일체 오래 참으심으로 자기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일꾼 삼으신 이 놀라운 사실 때문에 그는 항상 하나님이 자기를 향하여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사랑과 은혜가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다가 어떤 벽 앞에 부딪치고 몸부림쳐도 도저히 여러분의 힘으로 넘어설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칠 때 그것은 내면의 고통일수도 있고 환경이 가져다주는 고통일수도 있습니다. 그때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전히 그렇게 한계선에서 몸부림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무능하기 짝이 없는 여러분들을 향한 기대와 소망을 주님이 저버리지 않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감히 우리의 인생에 절망을 말할 수 있겠으며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앞에 희망이 있다”라고 하시는데 누가 감히 그 분 앞에서 인생을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에게서 배웠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따라서 사랑을 알게 되고 깨달은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좌절하거나 낙담하거나 인생을 끝장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이 우리에게 놀라운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한번 해 보십시오. 그러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완전히 인생을 실패하고 하나님 앞에 많은 징계를 받아서 앞으로 나가려고 해야 길이 없고 물러서려고 해야 절벽이고 좌우로 튀겨 나가려고 해야 벽돌이 에워싸고 있어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환경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것을 보아도 소망이 없던 그 사람이 어느 날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회개하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이 그의 심금을 녹이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와서 그렇게 복음을 듣고 구원의 놀라운 은혜,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집에 가는 길에 기적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까?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절망하는 가슴을 알고 교회에 와서 회개하고 영접하고 하나님의 참사랑이 밀려와도 죽은 사람은 여전히 죽었습니다. 고통스러운 일은 집에 돌아가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로 남아있는 것이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주님의 사랑을 모를 때에는 절망하던 그 사람이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눈으로 보아서는 아무 곳을 돌아보아도 희망을 가질만한 근거가 하나도 없는데도 이상하게 희망이 솟아오릅니다. “네가 왜 그렇게 희망을 갖느냐? 한번 무엇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가질 것이 있느냐? 한번 증명해 보아라”라고 하면 할말이 없습니다. 기껏 한다는 얘기가 “모르겠어요. 그냥 평안해. 그냥 기뻐”이렇게 밖에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하게 설명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참사랑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에 그 안에서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희망적인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것을 배운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절망을 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보다도 더 나쁜 것입니다. 아까 비유를 드렸습니다만 그냥 죄를 짓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라면 절망해 버리는 것은 주님 앞에 칼 들고 덤벼드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성경에 명백하게 나오지는 않지만 기독교의 전통 속에서 많은 경건한 성도들이 자살한 사람들의 구원에 대해서 회의를 갖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히 절망하는 것, 그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그가 진짜 하나님의 자녀였다면 그런 정도까지는 나갈 수가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사람들을 쉽게 포기하고 판단해 버립니까? 아! 저 인간은 희망이 없어 간단히 말해 버립니다. 그런 태도로 하나님이 만일 여러분들을 대하셨다면 여러분들은 이미 구원의 도상에서 오래 전에 정리해고 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체 오래 참으시는 사랑 그 분에게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이 낙망하지 아니하시고 여러분들에게 대해서 소망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죄 가운데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스스로 거미줄처럼 뒤엉켜서 자신의 힘으로 발버둥치고 몸부림칠수록 더 한계의 상황 속에서 몸부림치고 수렁에 빠진 사람들이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더 깊이 흙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 어느 것에도 환경이 가져다주는 소망을 발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그런 처지에 살아가는 인간, 그래서 자신도 “나는 이제 희망이 없어”라고 단정을 내렸는데 하나님께서 여전히 여러분을 향해서 소망을 가지고 계시고 기대를 가지고 계시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의무는 있어도 우리의 인생을 포기할 권리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생과 자신의 상황을 인해서 철저하게 절망하는 것은 마음에 뿌리 깊은 패역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자꾸 자신을 절망하고 자꾸 자신 속에 어떠한 희망도 없다고 스스로를 암시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없이 멸망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기대를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어떠한 위기에 떨어진다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좋은 상황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 사실만 잃어버리지 아니하면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가 어떠한 좋은 상황에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그는 결코 희망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과 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건져내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는 사람임을 생각하고 주님이 그렇게 기대하시는 성도들로 돌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죄 가운데 빠졌을 때에 여러분들이 무슨 죄를 지었으며 왜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그릇된 길로 오게 되었는가를 정확하게 생각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필수적입니다. 여러분들이 큰 실패를 하게 되었다면 내가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저 버렸고 어떤 점에서 내가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였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서 여러분들은 철저하게 파악하고 생각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정죄 의식에 시달리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은 여러분들을 향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여전히 바라고 계십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이야기입니까? 주님이 여러분들을 바라 보시면서 “엘피죠”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면서 희망을 갖고있고 주님이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면서 소망을 여러분들 속에서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은 이렇게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향해 기대를 갖고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저는 요즘에 의료계에서 찬반양론이 격돌하고 있는 소위 안락사의 문제를 사실 성경적으로 옳지 않다라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은데 저도 그런 입장이긴 했는데 심정적으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거의 식물인간의 상태에서 살아가거나 그렇게 고통 속에서 살면서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정말 그 사람의 목숨을 끊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살인이라고 생각하시겠느냐? 하는 동정적인 생각을 약간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어느 성모병원에 입원했던 환자보호자의 투병기를 읽어보고 나서 커다란 생각의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병원에서도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고 7년을 식물인간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문병을 가도 누구인지도 못 알아보고 그저 링게를 맞으면서 숨만 쉬는 그런 상황이 7년을 계속 되었으니까 스스로 몸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을 종창이 안나도록 하려니 얼마나 고달픈 생활을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사람의 예상 의사들의 모든 진단을 깨고 7년만에 그 사람이 깨어났어요. 그리고 그때에는 휠체어에 타고 다니면서 자신의 지난 사실을 기억을 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이야기도 하는 정도로 사람이 소생을 하였답니다. 여러분 옛날 우리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7년 동안 부인은 아주 젊은 사람이었습니다.
7년의 꽃 같은 세월을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이 거의 없다 라는 말을 계속 들으면서도 한사람을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간호로 7년 동안 모든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 계속해서 간호하고 그를 계속해서 입원상태에 있게 하기 위해서 가산을 모두 탕진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은 그 여성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내가 언제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만 제주도에 내려가니까 택시를 대절해서 타고 호텔로 가다가 거기서 이혼하고 돌아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매달리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성도들의 자세가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의 참사랑을 잃어가고 있고 내 마음 안에서 사랑의 참된 빛을 잃어가고 있고 내 마음 안에서 사랑의 참된 빛이 사라져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주님께 매달려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일찌감치 주님의 관계를 포기하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버리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한 것은 그가 죄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자신은 내놓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하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끝까지 찾고 추구하게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자신의 회복과 변화를 위해서 포기하지 않고 순간 순간 주님을 떠나려고 하는 마음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네가 그러고도 무슨 낮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냐“ ”네가 소망이 있느냐“ ”희망이 없다“ 자꾸 우리의 가슴속에 절망을 불어넣습니다. 그럴 때마다 약속을 바라보고 이제껏 까지 내 인생을 좌절과 공포 속에서도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시고 붙드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회상하면서 지금의 마음속에 파고 들어오는 모든 절망에 대한 생각이 진실이 아니라 지금은 내가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느끼지 못하지만 이전에 내가 곤고할 때에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이 어떻게 내게 다가오셔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변화시키시고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는지를 회상하면서 오늘 내 마음속에 일어난 일은 불신과 좌절하는 마음과 싸워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다시 새로워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움은 정죄하게 하고 미움은 쉽게 끝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격려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용기를 북돋아줍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사랑은 언제나 사랑하는 대상을 향한 희망과 용기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가운데 좌절하고 절망해서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만나서 대화를 하고 나면 “그래 맞아 역시 희망은 없구먼” 그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까? 아니면 자신은 살 소망이 모두 끊어지고 이제는 이대로 곧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 정말 그럴까?” 주님이 나 같은 죄인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하나님은 내 가까이 계셔서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내가 보아도 한없이 밉고 좌절스러운 내 자신을 보면서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내게 희망을 걸고 계시는구나”하는 사실을 느끼면서 돌아갑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이런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쓸데없이 교만해지거나 아니면 쓸데없이 절망하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 사람들 쓸데없이 절망하고 낙담해서 좌절의 노예가 되어버려서 삶의 기대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기를 포기한 그런 많은 사람들에게 정죄의식 속에서 몸부림치고 도저히 자신에게는 끊임없이 희망이 없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풀이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너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너를 향해서 소망을 가지고 계시다고 가르쳐 줄 사람이 그리스도인 이외는 없는 것입니다.
저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이런 것을 참 많이 느낍니다. 나는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굉장히 많은데 그렇게 포기하고 싶을 때 포기하지 못하게 했었던 큰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내 인생을 향해 희망을 갖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면서 순간 순간 우리에게 밀려오는 좌절과 절망들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이 여러분 가슴에 밀려오거나 혹은 이제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아하고 주저 않고 싶은 마음이 여러분들을 파고 들어올 때 여러분들은 그때마다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중심에 있으니 유혹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간절히 필요 할 때 정확히 말하면 주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니까 우리의 완악하고 우리의 차가운 가슴을 열어서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주님의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 한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 천지가 모두 변해도 이러한 것들을 물리치고 그리고 나는 혼자가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향한 소망을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이 내 인생을 향하여 희망을 가지고 계시는 한 나는 소망이 있다라고 타이를 수 있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여기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고 하였는데 첫째는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여 소망을 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20주에 걸쳐서 13장의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는 중요한 결론하나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과 아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과 아무런 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오래 참을 수 있겠습니까? 오래 참을 수 있어도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함께 기뻐할 수는 있어도 어떻게 우리가 모든 것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해도 우리가 분수를 알고 무례히 행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성내지 아니하며 우리가 투기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랑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예수님과 혼자밖에는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이 사랑을 할 수 있게 하는 어떤 자원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씀을 반복해서 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에게 주님께서 이런 사랑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기대하시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의 이러한 사랑이 너희에게 나타냈으니 너희가 이러한 사랑을 받고 그런 사랑을 받고 그런 사랑이 너희를 깊이 감동시키고 너희들이 그런 사랑을 받은 것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그 사랑을 현재적으로 너희들이 체험한다면 너희들도 내 사랑을 흉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없이는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즐거운 것이 아니라 사랑은 피비린내 나는 전투입니다. 사랑은 우리의 일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사랑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주님도 사랑할 수 없고 사람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을 향한 소망입니다. 주님을 향해서 모든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희망을 저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싸우듯이 사랑하며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 위해서 몸부림치며 하나님 앞에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하는 수많은 요소와 더불어 다투기 위해서 피 흘리는 삶을 살면서 사랑을 이루어 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안락한 가운데 사랑을 행치 못하고 살아가는 삶보다는 피 흘리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삶, 모든 것을 끌어안고 풍부히 누리면서 사랑하지 못하는 그러한 삶보다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면서도 결국은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나를 주님께서 지켜보실 것이며 그리고 이렇게 주님의 명령을 쫓아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나의 이 고난으로 가득 찬 삶을 주님께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이 소망 없이는 누구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렇게 뜨겁게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을 사랑한 사람들의 마지막 종말은 모두 이 세상에서 복 받고 잘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사랑에 대해서 쓰고있는 사도 바울은 인생의 말년에 그런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무엇을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까?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자기를 핍박하고 죽이려고 하는 동족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들을 눈물과 애정으로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기를 마다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을 때 그 마지막 결과는 후패한 육신, 더 해가는 동족들의 미움, 점점 더 거칠어지는 인생의 가시밭길, 멀리서 들려오고 있는 자신의 목을 요구하고있는 순교의 소리, 이 외에는 무엇을 그가 사랑을 베푼 결과를 얻을 수가 있었습니까? 젊음도 동족을 사랑하고 복음을 받아야할 영혼들을 사랑하느라고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검고 원기 있던 머리털은 이제 백발이 성한 노사도가 되어버렸습니다. 패기가 만만하던 그 젊은이의 기개는 모두 사라지고 이제는 주의 뜻이면 살기도하고 죽기도 한다는 세상적으로 볼 때는 박력이 없는 사람으로 변하여갔습니다. 그에게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습니까? 장성한 자식이 있었습니까? 따뜻한 가정도 없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부나 권력이나 명예가 사랑을 베푼 대가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가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눈길에 붙잡혀서 그 사랑의 포로가 되어지지만 않았더라면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모든 것을 그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모두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합니다. “내 안에 사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그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 같았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 자였고 무명한자 같았으나 사실은 유명한 자였으며 불행한자 같았으나 사실은 유명한자였으며 불행한자 같았으나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미말에 찌끼와 같은 처지에 놓여서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처럼 여김을 받았으나 그러나 그는 가장 고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따라서 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무조건 그러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요구하셨다 할지라도 그는 결코 그런 삶을 살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사도 바울에게 목숨을 내놓으라고 말씀하셨으며 동쪽을 위해서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라고 주님이 그것 먼저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주는데 그것은 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로 하여금 자신의 생명을 모두 버려 자신의 명예나 앞길이 창창한 모든 젊은이의 미래를 모두 버려서 자신을 허비하여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도록 만들었던 것은 사도 바울 자신이 시킨 것도 아니고 사도 스스로 결정한 것도 아닌 그를 붙잡고 감동시킨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신적인 강제력에 의해서 그를 주장했습니다. 그런 사랑으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 같은 그런 긴장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면 우리는 결코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에게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에게 만일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착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희망을 갖는 것은 그 사람 자식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본 희망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그 형상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저절로 아니라 이렇게 내가 저를 사랑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사랑의 관계에 개입하셔서 저 영혼에게 변화를 주시고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아는 생명과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소망 때문에 우리들이 좌절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보면서는 끝까지 아가페의 사랑을 하면서 살 수 없습니다. 그래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우리의 시선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어야합니다. 사람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사람에게서 사랑의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그저 베풀고 나누어 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갖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이렇게 사랑을 베풀며 사는 삶을 인정해 주실 것이며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미천하고 더러운 자아와 더불어 싸우면서 지금은 완전하지 않지만 조금씩 조금씩 주님의 완전하신 사랑을 닮아가며 그 사랑을 흉내내며 사랑의 날개 짓을 하려는 이 경건한 몸부림을 주님께서 하찮게 보시거나 무시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소망을 하나님을 향해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다 좌절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와서 기도하고 매달리며 다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이런 사랑을 베풀며 살수 있게 한 그것이 그 사랑이 내게 준 것이 아니라 내가 매일 바라 보아야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사람을 보고 낙망해도 하나님을 바라볼 때 다시 소망을 가지며 사랑할 수 있도록 다시 충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열린 관계를 가지고 수시로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는 영적인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산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자기를 모두 소진하도록 그렇게 인생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살아있고 죽는 것조차도 가기가 사랑하던 영혼과 교회를 위해서 결정되기를 소망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그 놀라운 힘도 알고 보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였으나 그렇게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면서 그의 속 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과정에서 망진창이가 되었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백발의 늙은이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그 사랑을 몰랐을 때에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는 자신에 없었던 크고 놀라운 보배와 같은 것들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가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바울의 영혼 속에 날마다 불일 듯이 일어나게 해주시는 놀라운 소명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인생의 종말이 가까울수록 하나님과 더욱 하나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 서면 설수록 그는 점점 더 주님 다시 뵈올 날이 날로 날로 가까워 무거운 짐 벗게 될 날이 멀지 않네 라고 소망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주님이 이렇게 하나님께만 마음을 두고 살아온 사도의 마음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혼에 어떤 풍성한 것을 하늘에 신령한 것을 아가페의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면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 사람 속에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것을 우리에게 잃어버린 그 사람 속에 끊임없이 부어주시는 것을 우리에게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운명하시는 그 순간 하나님 아버지 와 가장 완전하게 하나 되셨습니다.“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인생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 분의 생애는 얻은 생애가 아니라 잃어버린 생애였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끌려갈 때 그토록 눈물겹게 사랑했던 제자들마저도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에게 무엇이 남아있었습니까? 그렇게 공생의 3년 동안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까지 사랑한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어떤 유익이 있었습니까? 그 분은 사랑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아가페의 삶을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 속에서 점점 더 죽을 때가 가까울수록 하나님과의 완전한 일치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고 방해할 수 없는 하나님아버지와의 하나된 결속으로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쁨을 아가페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맛볼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점점 신앙이 길어지고 그래서 피 흘리듯이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과 사악한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으시며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아가페의 사랑으로 영혼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영광스러운 풍성함을 그의 영혼 속에 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들을 사랑하고 가장 소망이 없는 죄인 들 속에서 하나님과의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하며 그 속에서 희망과 낙관을 발견하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자신도 그 영혼과 그 이웃을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오히려 사랑하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은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하지만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고난의 가시밭길에서 더 풍성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진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이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락스”를 여러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 말년에 설교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나를 귀족으로 부르지 아니하시고 그리고 높은 사제로 나를 선택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을 위하여 고난받는 종으로 부르셨음을 인하여 내가 늘 찬송하나이다.” 우리들은 잘 쓰는 말 가운데 상처라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다. 열린교회에서는 그 말을 모두 추방해야됩니다. 무슨 상처를 그렇게 많이 받습니까? 상처를 많이 받는 것은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억해야 됩니다. 여린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누구 앞에 하나님 앞에 여린 사람들이 좀처럼 상처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여린 사람들은 사람을 향해서는 단단합니다. 쉽게 상처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강퍅한 사람들은 사람의 말 한마디 앞에서는 너무 버들버들 떱니다. 건드립니다. 상처입니다. 무서워서 말할 수 없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으로 예수의 사랑을 알고 그런 아가페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싶어하느냐? 너희들은 잊지 말라.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느니라” 여러분 이제 소망을 저버리지 말고 꿋꿋이 사랑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사랑은 모든 것을 견딥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7)
사랑에 관한 속성을 말하면서 오늘 사도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라고 말합니다. 사실 사랑은 오래참고 시작된 사랑의 모든 속성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을 녹이지만 저는 오늘 읽은 이 구절의 마지막에 나오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는 이 사도의 음성을 들을 때 저는 언제나 마음이 숙연해지고 이상한 슬픔이 마음속에서 깊이 번져 가는 것을 느낍니다. 마치 넓은 호수에 어린아이가 던진 돌이 파장을 들으면서(?) 멀리 흩어져 가듯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예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오랜 기간 연애 끝에 결혼을 하였는데 불과 2년도 되지 않아 후회를 하고 따로 살고 있는 사람
왜 이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렬하게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 사랑의 열기에 비해서는 쉽게 무너져 버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애써서 사랑의 불길과 같은 특성만을 강조하고 쉽게 식어버리고 금방 세워놓은 사랑들이 파멸로 가버리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불꽃같다’ 이렇게 말할 때 사람들은 타오르는 불꽃을 연상하며 불길이 사위어 가는 것을 연상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사랑이 가지고 있는 비극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모습들에 대해서는 애써 외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이 세상에서 신앙을 떠나서 생각해 볼 때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으로 끝나는 것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영원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가 하는 가치론적인 문제를 따지지 않더라도 사랑 그 자체가 오랫동안 지속되고 영원한 불꽃처럼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서 우리의 인생이 끝나고 나서도 영원히 나누었던 그 사랑의 관계를 그리워하는 관계로 지속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사랑은 항상 자기 사랑이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많은 작가들의 마르지 않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자기애의 발로였습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한 방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그것이 자신을 즐겁게 하고 자신의 인생에 유익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동안에는 사랑이 지속되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사랑을 주고받아야 할 관계는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로 돌변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앙을 떠나서도 경험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사랑한 것과는 상관이 없이 쉽게 파경에 이르게 되는 것들은 사랑 그 자체가 사랑을 하면서 그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엇을 결핍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사랑은 이렇게 이 세상에서 나누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 성품에 영향을 받으면서 나누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세상에서의 사랑은 인내와 고통을 견뎌내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여기서는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라고 말함으로써 아가페 사랑에 있어서 이 견디는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동기에서 비롯된 모든 사랑은 여기에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감각적이고 본능적이며 그 기초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발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랑 그 자체가 어떤 의미에서는 충동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것은 사랑 그 자체가 커다란 고통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사랑’ 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가르쳐줄 때 사랑이 가져다 주는 많은 고통과 비극과 슬픔들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사랑은 단지 그저 기분좋은 맑고 청명한 봄날에 숲속이나 아름다운 잔디밭을 거닐거나 잔잔한 호수위에서 노를 젓는 것 같이 경쾌하고 아름다우며 행복할 뿐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아가페의 사랑은 그런 그림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눈보라가 몰아치고 비바람이 불어 닥치는 벌판에 두팔을 벌리고 서있는 그런 시련을 견디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폭풍이 몰아치는 엄동설한의 눈길을 눈보라 홀로 맞으며 외로이 외투로 머리에 뒤집어 쓰고 밟으면 사라지는 눈길을 정처 없이 걸어가는 나그네와 같은 견디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가페의 사랑이 이렇게 우리의 본성을 따라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누구도 사랑을 가르쳐 주지 않고 누구에게 특별히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사람들은 점점 나이를 먹으면서 사랑을 알게 됩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에게 사랑을 받는 법을 배우지만 나이가 들어서는 이제 이성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됩니다. 가르쳐준 적도 없고 누가 훈련시켜 준 적도 없는데 그저 어린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젖을 빠는 것을 스스로 터득하듯이 본능적으로 사랑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위해서는 물론 적절한 교양과 여러 가지 충고가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랑 그 자체의 감정이 발산되는 것은 별다른 훈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은 고통을 받고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자기는 아픔을 견뎌야 하는 삶의 모습 그 자체가 이미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사랑할 이유를 갖기 전에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모두 사랑할 이유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랑할 이유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결코 누구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사랑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입은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완성해야 될 사랑은 단지 인간의 충동이 가져다 주는 에로스의 사랑이나 또 그러한 종류의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입은 우리들이 완성해야 될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에로스의 사랑도 완성될 수 없고 형제간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필로스의 사랑도 완성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참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도 하나님의 사랑의 참된 깊이를 모르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할 부부가 사랑하지 못하고 또 함께 사랑을 나누어야 할 동기간들이 상처와 미움으로 가득찬 관계가 되는 것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모두 에로스의 사랑은 있고 필로스의 사랑은 있어도 그것들을 온전케 할 수 있는 아가페의 사랑이 그들 가운데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참아야 할 이유가 없고 견뎌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미움을 상처로 갚고 상처를 복수로 갚는 반복되는 이 악순환들이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불행과 상처로 휘감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도 사도로부터 들려오는 이 음성에 귀를 기울이면서 이 사랑을 우리가운데 완성하고 이루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에 가장 중심이 되는 원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영성은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영성의 심장부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 나타났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참다운 십자가의 사랑은 우리에게 결국 사랑으로 일깨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영성은 진정한 영성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래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바라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참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땅히 참아야 할 것을 참는 다는 의미에 가깝지만 견디는 것은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딜 때 우리는 그것을 “견딘다” 라고 말합니다. 흔히 “견딘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참기 어려운 것, 고통을 동반한 것을 “견딘다” 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구도 잠자는 것을 견딘다거나 맛있는 것을 먹느라고 견딘다거나 놀러가는 것을 견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모진 추위와 더위, 육신의 고통과 견디기 힘든 아픔들을 참고 참으면서 어떤 목표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견딘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사랑은 바로 그렇게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이 견디는 생애를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이후에 가장 놀랍게 변화된 성품 중의 하나는 참고 견디는 성품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상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그러나 얼마 안 되는 성경 구절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바울이 매우 다혈질적인 사람이었고 참지 못하는 성품의 사람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도가 된 다음에도 이따금씩 그 옛 성품이 살아나는 것을 우리는 성경 군데군데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그런 모든 성화되지 못한 모습, 특별히 참지 못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많은 성도들, 그리고 자신의 편지를 받는 교회를 향해서 오래 참도록 그는 수차에 걸쳐서 끊임없이 그들에게 권고하고 견디고 이기도록 그들을 독려하였던 것입니다.
이 모두 사도 바울이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았던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는 자기가 사도가 된 표가 두가지 있는데 하나는 기적을 행하는 놀라운 능력이요, 또 하나는 참는 것이었다고 말하는데 그는 인내를 바로 그 앞에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인내도 단지 참는 것이라기 보다는 견딤으로 입증된 참음을 오히려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소극적인 의미에서 나쁜 일을 할 수 있는 유혹을 참거나 유혹을 인내했던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견디기 힘들도록 다가오는 핍박과 고난을 참고 견디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려고 마음먹는 즉시 그는 고통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복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수하려고 집어든 그 칼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나아가 화해를 청해야 하고 그의 얼굴에 입맞출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자신의 내면속에서 그와 화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상처를 입고 고통을 당한 사람의 유일한 위로는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향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복수를 꿈꾸는 것입니다. 악담하고 그의 생애에 뭔가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꿈꾸면서 상처와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은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런 모든 것들을 견뎌야 합니다. 자기가 옳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는 말을 모든 사람들앞에서 하지 못하고 참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피해자 임에도 불구하고 사과를 받고 용서를 구함을 받기 보다는 오히려 스스로 낮아져서 용서를 구하고 사람들에게 사과를 구해야 하는 그런 처지를 스스로 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에게 있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이요, 아픔인 것입니다.
예화) 마음을 아프게 하던 사람이 있어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 (시31 ;19) 말씀이 생각나 새벽에 기도하며 스스로 반성하게 되었다. 인간이 자신에 대한 부당한 인정을 받을 때 견디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씻어 버리지 못하는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부당한 인정을 받고 그의 이름이 합당하지 못하게 취급을 받으실 때 자신에게 대해서 느꼈던 느낌의 10분의 1만이라도 애절하게 느꼈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이 되었을까 하면서 곳곳에서 주님의 이름이 업신여김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삶으로 하나님께 갚아 드리는 수많은 은혜받은 사람들을 보면서 분노하여야 할 모든 마음을 자신에게 잠깐 동안 누군가가 부당하게 대우해준 그것을 되씹으면서 여러달이 흐르도록 마음속에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 앞에서 초라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날 아침에 결론을 내렸는데 시31편을 생각하면서 주를 경외하는 자 곧 그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해 쌓아두신 주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하나님이 나를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그것으로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러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까 마음이 많이 편해 졌는데 그래도 매일 생각이 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가페의 처음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어서 고통까지라도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제가 만약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렇게 저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요구에 민감하지 못했다면 벌써 전화를 걸어 잘못 한 게 뭐냐고, 안봐도 평생 잘 살 수 있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귀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삶에 있어서 우리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살고 방종한 삶을 살고는 그 존전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신앙은 누군가에 의해서 강요받는 것도 아니고 강요 받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바르게 살지 않고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들을 징벌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앙의 세계는 누구든지 그렇게 물리적인 제재를 가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최근에 이단시비가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목회자가 성도들을 구타하는 것에 대하여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것 처럼 때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목회자가 가진 영적인 권세를 물리적인 권세와 혼돈하는 것이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선지자들은 칼들고 나왔을 것이고 사도들은 채찍을 가지고 전국을 누 볐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에 와서 사람 막보는 태도로 대해도 교회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설교 도중에 누가 “야! 그런 것도 설교라고 아냐?” 라고 소리를 지른다고 해도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나 교회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인 그 무리안에서 자신의 성화되지 못한 성품을 가지고 자기 속에 솟아오르는 감정이나 육신의 정욕이 시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고 행동해서 교회에 누를 끼치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고 용변을 보는 것과 같이 부끄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육적인 사람인가를 보여 주었고 그가 말하고 있는 좋은 이야기들이 사실은 사랑으로 역사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참된 영성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예화) 어느 교단 총회의를 하던 도중 “회장!”하고 부르는 사람을 향해 총회장이 욕설했 다는 이야기.
그 당시에는 자신의 그러한 삶에 대해서 조금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지만 자신의 믿음이 성숙해지고 나면 그렇게 마음대로 말하고 마음대로 행동하고 누구도 자기를 제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속에서 쏟아져 나오는데로 행동했던 모든 과거에 대해서 심한 부끄러움을 느끼고야 말 것입니다.
사랑은 견디는 것입니다. 그 견디는 데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그 사랑의 열매에 의해서 그가 얼마나 영적인 사람인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적인 사랑과 육신적인 사랑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인 기질이나 육신적인 성품에 의해서 좌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이 말하는 이 아가페의 사랑은 그 사람이 얼마나 감정이 풍부하고 그 사람이 얼마나 말을 잘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참사랑을 알고 오랫동안 인내하고 참고 모든 것을 믿어주고 모든 것을 소망가운데 바라며 모든 것을 고통이 와도 자신의 온 몸으로 그 고통을 받으며 견디느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룩한 영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어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자신이 매우 영적인 사람이며 자신이 매우 신령한 세계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할때에 여러분은 말하십시오. “나는 체험으로 말하는 신령한 세계보다는 사랑의 열매로 말하는 신령한 세계를 더 믿겠습니다. 사랑으로 역사하지 않는 믿음, 열매로 드러나지 않은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말해도 좋은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영성이고 무엇을 위한 영력이며 무엇을 위한 지식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기를 원했던 그 모든 모습들은 결국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이 일들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우리에게 전인적인 인내를 요구합니다.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시련과 아픔을 인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시기는 핍박과 고난이 많은 선교의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견딘다'라고 말할 때 그들이 즉시 박해를 생각했던 것을 두말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떨쳐 나오고 사랑하는 친구들을 잃어 버리는 것이 다반사 였습니다. 이 기록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 조차도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사랑 때문에 거기에 붙잡혀서 복음을 위해 부름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의 모든 길은 견디는 수많은 고통으로 얼룩진 길을 걸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능력을 많이 받았지만 능력 못지않게 많은 고난을 받았고 남다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지만 그 사랑에 어울릴만큼 고난을 받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선교지의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의 동족을 눈물로써 사랑한 사람이었지만 사랑이 사랑으로 되갚아지기 보다는 사랑이 원수과 복수와 미움과 그리고 간교와 계교로 갚아진 적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동족을 향한 이 사도바울의 사랑의 심정을 로마서에서 읽을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민족을 사랑한 사람이 있을까? 하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자신의 동족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그의 모든 인생이 핍박과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찬 인생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했던 것처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런 사랑의 삶을 살고 수많은 시련을 견뎌야 했던 그 모든 과거로 인하여 상처받거나 가슴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의 사랑과 이 세상에서 하나님없이 하는 사랑과의 차이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없이 이루어지는 사랑은 좌절은 상처를 주고 상처는 수많은 고통을 낳고 고통은 사랑하려했던 사람들을 향한 미움을 낳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사랑으로부터 좌절당할 때마다 즉각적으로 느끼는 것은 보상심리 입니다.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가 저한테 어떤 식으로 대했는데 내게 이렇게 갚을 수 있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은 이제까지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입은 것은 커다란 피해였고 감당하기 어려운 손해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자신을 그렇게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자신이 사랑했던 그 사람은 자신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사람들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이야기이지 그 사람도 빼앗긴 것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빼앗기셨지만 그러나 사실 그분은 우리를 얻음으로 모두 얻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젊은 날에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혀서 일생을 그리스도를 위하고 복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고난을 많이 당하고 유대인의 간교를 위해서 시험을 당하였으며 순교의 위기를 수없이 넘긴 사람이었습니다.
학자들은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말할 때에 그것은 아마 핍박으로 말미암아 받은 커다란 물리적인 상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런 고난으로 가득찬 인생을 살았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상처받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고도 자신이 모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모두 빼앗겨 버리고도 오히려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누리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이런 아가페의사랑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런 사랑을 배웠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야말로 '견디신 생애였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사시는 동안에 그 분의 생애는 견딤의 연속이었습니다. 고난과 박해의 연속이었고, 그 속에서도 결국은 우리에게 자기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를다 바치신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이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자기를 버리고 생명을 주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한 대가로 그분에게 돌아간 것은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시는 비참한 죽음밖에는 남은 것이 없었지만 죽어 가시면서도 당신이 흘리는 이 보혈의 피로 죽어갈 수많은 우리들을 구원할 것을 바라보시며 그 씨로인하여 열매맺을 우리를 기대하시며 그분께서는 기쁘게 자신에게 허락된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견디셨던 것입니다. 사랑이 그분을 견디게 했고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고통받는 자신을 보는 대신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와 화해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며 즐거워하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은 ‘몰아’ 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를 모두 버린 사랑이었습니다. 자기를 모두 잊어버린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주님의 진노 아래 있던 우리들이 자신의 죽음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열매를 보시면서 그분은 자신에게 허락된 죽음의 분깃을 고요히 감당하시며 모든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조건없이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시고 우리를 향한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대접받은 생애가 아니라 그 사
랑을 성취하기 위해서 고난을 견디고 시련을 견디고 아픔을 견디고 심지어는 당신이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그 사람들, 즉 우리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몰라주는 그 야속한 태도에 의해서 조금도 상처받지 않으시고 홀로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으시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아버지께도 버림을 받으시는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의 고난을 다 당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강하고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위대했기 때문에 주님은 그 힘으로 모든 것을 견디었습니다.
보십시오. 그 한 분이 우리를 향한 그 사랑으로 당신의 고난을 통해 맺힐 열매를 바라 보시고 당신의 견디는 아픔을 통해서 성취될 우리의 구원을 바라보시고 죽으셨지만 우리는 살았고 그분은 버리심을 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사랑을 입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이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이루신 이 놀라운 사랑이 우리에게 이제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할지를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흠도 없고 죄도 없으신 몸으로서 오직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고난을 참으시고 아픔을 견디시고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박해를 받는 것도 견디셨습니다.
그런 놀랍게 견디는 힘은 사랑해야할 대상을 주목하고 그렇게 사랑하도록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소망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은 자신의 도덕심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간성으로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견딜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약에 견딘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많은 한과 아픔을 남겨 놓습니다.
예화) 춤바람난 아내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후 자기가 재혼을 하면 자식들이 상처받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에 일생 홀로 자식들을 키움. 자녀는 아버지에게 많이 혼이 나 도 존경함.
그분은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견디었으나 자식들이 모두 크고 나니까 그 세월이 너무 억울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었고 참으며 견디기는 했는데 가슴에 상처가 남는 것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참고 견디는 한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참고 견디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참고 견디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하나님을 향한 분노나 우리를 향한 적개심 같은 것을 찾아 볼 수 있습니까? 그분은 십자가에 매달리셔서 죽어가는 가운데서도 당신의 온유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죄를 짓고 옆에 죽어가는 강도의 영혼을 염려하셨습니다. 손목에 박힌 못이 손바닥을 찢고 피 흘리는 상황에서도 자기를 못박은 사람들이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탄원하는 마음을 가지셨던 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고난이 극심하더라도 상처를 받기보다는 고난이 승하면 승할수록 온유함이 더욱 충만해졌던 것을 보며 그 고난속에서 우리를 향한 사랑이 더욱 온전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아가페의 사랑으로 참고 견디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루신 그 고난을 참으시고 견디심의 사랑에 주목을 해야 합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흔히 우리의 사랑에 어울리는 반응을 상대방이 하지 못하는 것을 인해서 쉽게 낙심하거나 ‘그러면 그렇지’ 하고 정죄해 버립니다. 작은 사랑이 그를 더 크게 무시해 버리는 발판이 되고 작은 사랑과 동정을 베푼 것이 한 사람을 더욱 완전하게 매장하는 과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룬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참다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사랑하기 위해서 걸어가는 그 길에 다가오는 지체로 인한 모든 실망과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으로부터 오는 오해나 자기가 기대하지 못했던 실망스러운 반응에 의해서 고통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그 고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아가페의 사랑의 길은 희생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길입니다. 만약에 그 길이 고통스러운 길이 아니고 그 사랑을 이루는 데에 희생이 필요하지 않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
느니라“ 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사랑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질 때부터 희생의 기초에서 주어졌습니다. 고통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를 위해 대신 당하신 고난과 아픔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페의 사랑은 피묻은 사랑이며 눈물에 젖은 사랑이고, 아가페 사랑은 우리의 진액과 땀으로 범벅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그런 액체를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도무지 살 수 없고 당치도 않은 이 끔찍한 사랑을 우리에게 자랑하시며 이런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랑을 입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삶을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특별히 살아야 하고 놀라운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보기에 놀라운 생애를 살
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이 모르는 특별한 사랑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복음을 들었고 영적인 놀라운 은사를 체험했고 그런 영성이 뛰어나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고린도교회 였습니다. 사도는 이들에게 그들은 얼마나 능력이 크게 나타나고 방언을 하고 얼마나 잘 맞는 예언에 의해서 영성을 측정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랑으로 검증하라고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남이 갖지 못한 체험을 가지고 있고 남이 알지 못한 비밀스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할지라도 만약에 여러분이 사랑을 위해서 참을 수 없는 것이라면 그 모든 영적 경험들은 불안한 것입니다. 신비한 체험과 남이 못 본 것을 본 기이한 은혜를 사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알고 그 사랑 때문에 살 수 밖에 없고 그 사랑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마음으로 인생을 걸어온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자랑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은혜에 젖은 영성이 아니면 그것은 참다운 영성이 아닙니다. 교회가 온통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여서 교회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기이한 체험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자랑하지 말고 마음에 묻어 두십시오. 이와 같이 시련을 이기고 아픔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가운데 사랑으로 입증되지 않은 모든 영성에 대한 논쟁과 영성에 대한 자기 자랑은 모두 그야말로 자기 자랑에 불과하고 그런 것들을 자랑하는 교회의 성도들은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하는 자신의 삶의 현장을 외면하고 영적 체험이라는 가상 현실로 도망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셨던 그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상 현실 속에서 마음으로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실제로 이 세상에서 발을 딛고 현실 속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사랑 때문에 아픔과 오해를 받으시고 모함을 받으셔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것조차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방법이었기 때문에 그분은 아낌없이 그 모든 고난을 견디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것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희생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으니 분에 넘치는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잘 견디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분노하는 마음을 누르고 시험과 고통을 당할 때도 견디어야 하고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가슴에 아픔을 주고 못 박을때도 그를 향한 복수심에 불타는 대신 우리를 위해 자기를 버려 완전한 사랑을 성취하심으로 우리같은 죄인을 구하신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과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참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사랑하는 가운데 받게 되는 상처와 고통을 해독해 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아름다운 해독제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견디는 것이 너무나 부당하고 견디기 힘든 고통이라고 생각이 들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분의 고난은 위대하지만 그분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겪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사소하고 주님 앞에 내놓을 것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앞에 서고 그것을 볼 때마다 우리가 행한 사랑, 우리가 베푼 사랑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푼 것에 비하면 우리가 주님을 위해 베푼 것이 너무나 적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다가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십자가 없는 사랑을 했기 때문이고 사랑하다가 그 사랑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은 고난이 없고 아픔이 없는 사랑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준 사랑을 오히려 상처와 아픔으로 되갚는 일들은 이 슬픔과 죄 많은 세상에서 언제든지 일어나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런 세상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 우울한 생애였고 어떤 의미에서 고난과 슬픔이 가득한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그분을 본받아서 자기를 모두 버리는 삶을 살고 우리에게 상처와 고통을 준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오히려 사랑하면서 고통과 아픔을 모두 견디는 가운데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욱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고 이 세상은 나의 이러한 사랑을 몰라주어도 이 사랑을 인하여 그리스도 예수
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과 연합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이 우리의 땀과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피를 요구하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같이 부족하고 죄로 가득찬 사람들을 십자가의 피로 건져서 우리를 주의 자녀 삼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그리스도 없이는 알 수 없는 이런 사랑을 우리를 통해 보여주게 하시려고 우리를 남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사랑으로 구속하셔서 우리를 사랑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시고 용서할 수 있는 자리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 우리의 일생이 이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삶이 되도록 그
래서 우리의 삶이 말과 혀의 삶이 아니라 몸바치신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강력하게 붙들려서 일평생 사랑을 실천하고 그 아가페의 사랑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눈물로 범벅된 얼굴과 피로 얼룩진 온 몸을 가지고 그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서 결국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존귀하게 되게 하겠다는 그런 거룩한 결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22.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8)
지난 시간에 저는 아마 21번째인가 22번째 인가로 기억이 됩니다만,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니고 놀이가 아닙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에게 웃음과 기쁨과 성취감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때때로 우리의 입을 벌려 마시기 쓰디쓴 독약을 넣어 주는 것과 같기도 하고 비오듯이 폭탄이 퍼붓는 전쟁터를 홀홀 단신으로 엎디어 가는 것과 같이 그렇게 위험하고 전투적인 상황을 동반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의 참사랑을 많이 깨달아 아는 사람은 더 많이 깨달아 아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은 과격하게 싸우지 않으면 도저히 사랑을 성취할 수 없는 그 장에다가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를 특별히 받은 사람들은 특별히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주님을 위해서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자신이 걸어가는 사랑을 실천하는 그 여정에 편안하고 아름답고 그리고 한가로운 날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 길은 피 없이 갈 수 없는 길이고 우리의 모든 것은 요구하는 길이며 때로는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기쁨보다도 사랑을 위한 고난을 치러야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이런 사랑을 본받아서 자신도 아가페의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사랑이 전쟁과 같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 그 사람은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모든 은사 위에 뛰어난 그러한 은사로서 아가페의 사랑 이런 것을 실천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고 그리고 반짝이는 모든 것이 금이 아니고 노란 것을 발하는 모든 것이 황금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베푸는 동정심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우리가 베푸는 모든 선한 행동들이 반드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이 아가페의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성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실천하지 않는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 되겠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이러한 식으로 금 비슷한 것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미담을 남기고 많은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그런 일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리석음 때문에 이런 사랑들을 모두 분간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당신을 향한 동기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기초가 자신에게는 있지 아니한 그러한 종류의 이 세상에 있는 그런 자기를 위한 사랑인지 주님께서는 모두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랑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 상황을 극복하고 변화시켜 보려고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이 상황은 상황 자체를 매만져서는 결코 개선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시골의 무, 배추를 팔아주고 송아지를 팔아주는 일들은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늘날 이처럼 아가페의 사랑이 메말라가고 있는 것은 교회의 영성의 쇠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참사랑을 아는 감격이 없는 사람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타난 아버지 하나님의 큰사랑의 감격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아가페의 사랑을 할 수가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영혼, 호흡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서도 이런 사랑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랑을 실천하고 이런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도 죄 가운데 살아가기를 즐기는 포악한 우리의 본성과 더불어 다투듯 싸우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기적인 자아는 날마다 죄를 죽이는 생활로 날마다 죽어가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본성들은 날마다 은혜 가운데 살아가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고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인생을 향하여 던져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축복된 처지에 있는지를 생각하며 감격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일상적인 일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사랑의 특성을 모두 말한 후에 이번에는 사랑의 영원성, 사랑의 불변성에 대해서 오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지식도 그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직감적으로 사도가 13장을 왜 썼는지를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그는 12장에서 용서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11장에 이어서 이야기가 나오면서 명백하게 질타하는 이야기가 없지마는 그러나 지체의 비유를 하면서 그러면서 각 지체가 모두 귀하며 그리고 은사도 여러 가지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하나의 몸을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을 볼 때,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가 받은 은사가 우월하다고 서로 다투는 사람들을 겨냥한 질책이 섞인 그러한 변증이었던 사실을 우리는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방언도 폐하고, 예언도 폐하고 지식도 그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분명히 고린도교회 안에 있던 분파주의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 자기가 받은 영적인 은사로 인하여서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우열을 다투고 성령께서 주신 은사가 오히려 그들 가운데 다투는 소재가 된 그 어리석은 사람들의 상황을 오늘 예리하게 간파하고 진단하고 그리고 처방을 내 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지식도 그치리라고 한 이 간단한 한마디의 말로서 그들의 모든 다툼은 설자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방언이냐, 예언이냐 아니면 지식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사랑이 있느냐 하는 문제로 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시선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는 예언도 귀하고 방언도 귀하고 지식도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는 지금 종말의 빛에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의 빛에서 비춰볼 때에 그 종말의 빛 아래로 들어오게 되면 예언도 아무 것도 아니고 방언도 아무 것도 아니고 지식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나라가 일부 경험되고 있지만 그러나 완전히 그 나라가 오지 않았고 또, 그런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알고 있고 그분에 관해서 무엇인가 은사가 무엇인가 가르쳐주고 기여 하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완전한 것이 아니고 온전한 것들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에 따르면 오늘 이 8절의 말씀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방언을 받고 예언을 하고 그리고 지식을 갖추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종말의 빛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니고 오직 남는 것은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많은 영적인 체험을 하고 은사를 받은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이 남보다 더 뛰어난 성경의 지식을 가지고 있고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남보다 더 뛰어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잘 가르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도는 오늘 교회에 가장 커다란 비극은 이것 자체가 교회의 비극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언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예언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섭취하는 그 자체가 목표가 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회의 영성을 퇴폐하게 하고 그리고 교회의 바른 신앙적인 도리들을 굽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고린도교회를 볼 것 같으면 문제가 많은 교회라고 여러분들은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이런 문제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는 고린도교회에 비하면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어느 교회가 성령이 너무 충만해서 은사를 너무나 많이 받아서 은사끼리 충돌을 일으키는 교회가 몇 교회나 되겠는지 한 번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함부로 판단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배우는 것 한가지는 사도가 지금 예언이나 방언이나 지식이 쓸모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귀하고 그리고 모두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이 사람들은 성령께서 그런 것들을 주셨지만 문제는 그들 가운데 그것이 목적이 되고 있고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그걸 주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바른 원리를 가지고 그것들을 활용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주신 이 은사들이 오히려 교회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는 이상한 장면을 보여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배우게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을 수도 있고 달란트를 받을 수도 있고 혹은 여러분들이 이제 인생을 살아가는 중간에 여러분들이 받은 것이 아니라 처음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특별한 은사를 여러분들이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받은 것은 받은 것이고 사용하는 것은 사용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남다른 은사를 받고 남다른 재능이나 은사가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만약에 바르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성령이 누구이시며 하나님이 나 같은 성도를 구원해서 어떻게 살게 하시려는지를 배우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달란트를 가지고 평화롭게 하는 대신 이처럼 교회를 근심시켜 드리고 지체들에게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주는 일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은사를 주셨는데 바르게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가만 내버려두시는가 하는 그러한 문제를 논의 할수 있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은사는 주님이 주셨어도 그것을 사용하시는 것은 여러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제일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이야말로 성령이 주신 은사나 자기가 타고난 특별한 하나님의 천부적인 재질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깨닫고 그분의 성품을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깨우치시는 지식의 빛 아래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바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 없이 동물처럼 사는 사람들이 아무 것도 치장하지 않은 짐승들이라면 이런 사람들은 마치 목에다가 방울을 건 소요, 꼬리에다가 방울을 매달은 강아지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와 함께 성령의 이러한 은사와 함께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을 올바르게 사용하고 훌륭하게 주님을 위해서 봉사하는데 쓰일 수 있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신앙의 도리를 배우고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또 우리에게 섬김을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배워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긍정적인 이야기를 먼저하고 그 다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방언도 페하고 예언도 그치고 지식도 그치리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가 이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까 말씀드린바와 같이 예언이나 지식이나 방언이 아무 쓸모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고린도 교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무지는 무엇 때문이었는가 하면 그들이 경험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무지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찾아가기를 원하시는 진정한 목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예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방언을 함에도 그들은 함께 모인 지체들과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섬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지식은 누가 더 많이 쌓았는지를 자랑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을 걸어가게 하는 약도와 같습니다. 화려한 약도를 가지고 자랑하고 자신은 그 약도대로 한번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그 약도는 오히려 부끄러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이것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에 따르면 방언도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고 사랑의 원리에서 사랑을 목표로 행해지지 않는 예언이나 사랑을 목표로 행해지지 않는 모든 지식은 쓸모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사도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올 것 같으면 그때에 가서는 더 이상 방언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과 의사소통 할 것이며 천국에 있는 천사들과 더불어 말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예언도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지식도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비록 유리 돌 거울이나 구리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그때는 얼굴을 맞대고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도무지 성경을 읽어도 알 수 없었던 진리들과 교리들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 섭리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해서 고통하고 아파했던 많은 날들 아파했던 많은 시간들에 모든 의문들이 해결되기 시작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이 거기서는 모두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자동차를 타고 산을 오르는 것과 비행기를 타고 오르는 것의 차이는 자동차는 앞에 있는 길 밖에 보이지 않는데 비행기는 자동차가 달려온 길과 앞으로 어디 갈지가 훤하게 드러나고 조그만 성냥 끝에 붙은 것 같은 크기의 자동차가 발발거리며 올라옵니다. 올라와서 산을 굽이굽이 돌았기 때문에 올라온 길도 보이지 않고 갈 길도 차에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높은 산꼭대기에서 보면 어느 길을 지나서 왔고 어느 길을 앞으로 가야 할지 모두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그 나라에 가게 되면 모두가 보게 됩니다. 궁금한 것들은 모두 깨닫게 되고 알 수 없었던 것, 목사에게 물어봐도 얼버무리던 모든 것들은 혹은 명백하게 모른다고 대답해주던 모든 것들은 이제 우리들이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성경이 필요 없는 시대를 살게 될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제가 설교하고 여러분들은 조용히 들어야 하는 이런 상황도 아마 끝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어도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은 사라지거나 폐하여 지거나 가치가 떨어지거나 혹은 평가 절하 되거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같은 가치로 변함없이 그렇게 지금 하나님께서 사랑의 가치를 생각하게 하시고 이런 것이 너희의 신앙에 있어서 사랑의 가치다 라고 말씀하시는 그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이 변함없이 떨어지지 아니하는 것처럼 사랑 자체가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변함없이 그것이 그대로 평가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훌륭하게 예언하던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예언을 들어줄 필요가 없고 더 이상 그 예언을 통해 아무 것도 기여할 수 없는 날 들이 올 때 그들은 얼마나 사는 것이 시시하겠습니까? 지식이 훌륭하고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언제든지 입만 열면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배우려고 구름 떼같이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이제 소자라도 자기가 이 땅에서 배운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그 나라에 가게 될 때 지식밖에 없던 그 사람들은 이제 허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 이제는 내가 무슨 재미로 사나?
제가 직장 다닐 때 어느 코미디언 한사람이 와서 직장에서 간증을 했어요. 우리는 뭐 별로 유명하게 된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렇게 유명하게 될 희망도 별로 없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라고 해서 미안합니다. 하여튼 저는 그렇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한국에서 대단히 촉망받는 것이 아니라 정상급에 있는 코미디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인기가 폭락했습니다. 인기가 폭락하니까 방송사에서도 인기가 올라가는 사람을 쓸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광고나 이런 것들도 다 줄어지는 것입니다 주가 떨어지는 것처럼 연예인들은 인기가 떨어지면 그게 피부로 절절히 와 닿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인기 떨어진다고 갑자기 봉급도 떨어지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현실적으로 확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었는데도 하루에 한번씩 자살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답니다. 왜? 자기는 아직까지도 사람들을 많이 웃길 소재를 가지고 있는데 들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훌륭한 성경 지식을 알고 있고 입을 열면 수많은 사람들에게 무릎을 치게 하는 놀라운 신앙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밖에는 없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날 주께서 가장 소자인 어린아이 하나라도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이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그런 마지막 때가 올 때에 그들은 얼마나 사는 것이 허무하겠으며 그 옛날이, 주님이 오시지 않은 그 옛날이 얼마나 그리워지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주님 오신 것이 재앙일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내 팬도 다 빼앗아 가시고 밥줄도 다 끊어지고 그리고 그 신나던 보람있던 세월 다 지나가고 이제는 아무 쓸모 없는 사람으로 만드셨을까? 아마 그들은 불평할 것입니다. 아니 아마 라는 말을 빼겠습니다. 틀림없이 그날에 그렇게 됩니다. 증명하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확실히 심어지게 됩니다. 어떻게 증명할까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지식이나 예언을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들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의 신앙이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자기가 무엇인가 하고있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중요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접받고 인정받는 재미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허무한 사람들입니다. 주님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허무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언을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보이겠습니까? 방언을 훌륭하게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은혜 충만한 사람으로 보이겠으며 입을 열면 하나님의 말씀이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 나와서 수많은 사람을 진리의 샘에서 헤엄치게 만드는 그 사람이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력 있는 영적인 사람으로 비치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신앙의 인격 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아가페 거기에서 비롯되는 이웃을 향한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이 없다면 그들도 그 종말이 그렇게 허전하고 비참할텐데 하물며 그런 영적인 것들도 아닌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이 세상에 있는 육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에 빠져서 주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고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지막은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고린도전서를 쓴 사랑의 사도 바울이 뒤에 가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저주가 있을지니라. 그는 축도를 그런 식으로 한 겁니다. 사랑 장을 쓴 바로 그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가 있을 지니라? 그가 저주를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살아가는 아가페의 사랑이 없이 살아가는 그 인생자체가 저주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일도 지나갑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앉았던 지위도 사라집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기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에 소유하게될 많은 재능과 능력도 사라집니다. 자꾸 하면 늡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도둑질도 자꾸 하면 느는데 주님을 섬기는 일을 자꾸 하는데 안 늘겠어요? 나도 글 써보니까 처음에는 안되는데 자꾸 하니까 늘데! 그래요! 컴퓨터도 자꾸 하면 늘고 머리 속에 생각하는 것도 자꾸 하면 늡니다. 점점 유능해 질 수 있습니다. 안 그런 사람들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섬기면서 점차 늘 수 있습니다. 주님을 섬겼던 일, 섬기기 위한 자리 그 섬기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배웠던 기능,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애써 쌓았던 모든 삶! 다 지나갑니다. 그리고 오로지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 이 하나만이 남는 것입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자! 그렇지요. 모두 지나가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은 모두 아십니다. 내가 그 자리에서 실수도 많았고 실패도 많았고 사단의 공격도 많이 받았지만 왜 죽지 않고 살아서 그 자리를 지켰으며 그리고 거기서 평탄하고 안일하게 걸어갈 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동지도 없고 의지할 이도 없는 그곳에 서서 하나님 한 분 바라보며 견디고 인내하고 몸부림치면서 주님이 두신 거기에 서 있으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왔는지 그 동기가 명예나 권세나 거기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는 어떤 보상 때문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고 거기에 세워주신 주님 때문에 우리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는 아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리고 모든 것이 지나가 버린 후에라도 주님을 사랑한 우리의 마음은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우리의 인격에 여전히 맺혀서 쌓여서 남고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잠시 주님을 향한 마음이 우리 가운데 식어졌다고 할지라도 그때 한순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진실하게 주님을 사랑하며 주 앞에 모든 동기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살려했던 그 모든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몸부림쳤던 그런 모든 충성스러운 날들 하나님께서는 모두 기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것은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것이지 아무 것도 오래 남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짧은 인생을 살면서도 한때 추앙 받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밟히는 광경을 수 없이 많이 봐 왔습니다. 한때는 그분에게 주례를 받은 것이 영예처럼 생각 됐었는데 이제는 그분이 주례를 서있는 사진을 감추어야하는 처지에까지 떨어지는 사람들을 우리 신앙의 세계에서도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안개와 같은 것들입니다. 오로지 소중하고 변하지 않는 것은 주님을 향한 우리의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마음을 드려서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던 그 날들, 그날들은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는 주님을 섬기며 살도록 만들었을 것입니다. 누구처럼 유명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광과 존귀를 한 몸에 받으며 귀하신 몸처럼 주님을 섬기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기도 하고 변함없이 주님을 섬긴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을 적도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거기서 비롯되는 지체들을 향한 사랑이 원수와 모욕으로 되 갚아지는 자리에 서서 쓸쓸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배워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견딘 사람들은 그런 주님을 위해서 받은 모든 고난과 아픔이 결코 그의 영혼 속에 상처로 남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현재적인 위로와 하나님의 참사랑이 그와 함께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사특한 자에게는 온유를 보이시고 주 앞에 부르짖어 용서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보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한자들에게는 주님의 지존하심을 보이시고 무지한 자들에게는 무지한 가운데 살아가는 악한 자들에게 결국을 보이시지만 지혜를 알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달아 그 앞에 엎드리는 자들에게는 긍휼과 자비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서 있던지 무엇으로 주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던지 우리는 이 길 이 자체가 사랑을 위한 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 주를 사랑할 길이 없고 쓰라림과 고통이 없이는 이 길을 완성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섬기기 위한 자리와 지식과 재능과 모든 것들은 사라지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게 만들었던 그 말하자면 소프트웨어 이거는 그대로 주님 앞에 기억이 됩니다. 어떤 때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견디고 몸부림치고 이해해 주는 사람 없이 외롭고 고통받는 나날들을 보내었는데 아무런 일에 진전이 없고 사욕에 성취가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갚아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요즘 죄 죽임의 교리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오웬의 책을 이전에 보았지만 다시 한번 넘겨보면서 어떻게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으면서 눈물이 나는지 혼났습니다. 다음주 설교할 부분쯤 됩니다만, 오웬이 죄 죽임의 교리를 설교하는 가운데 자기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죽어라 하고 죄를 죽이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는데 도무지 진전이 없고 평화가 찾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때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 다음 하는 말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GOD WE REMAIL" 그러나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다. 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이 어떻게 기약도 없는 그 싸움을 싸우겠습니까? 평안을 원하고 승리를 원하는데 승리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싸우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죄는 더 기승을 부리고 악마는 더욱더 날뜁니다. 도무지 승전 할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약속을 믿고 가지마는 그러나 너무나 고달픈 싸움의 연속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우리가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평안하게 신앙 생활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왜 나 혼자 이렇게 유별나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가? 저 사람들을 이렇게 편안하고 오늘도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저렇게 행복한데 마치 나는 세상과 은혜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세상도 잃어버리고 은혜도 잃어버린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이런 속삭임은 우리에게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책에는 ”GOD WE REMAIL" 하나님은 갚아주실 것이다.
얼마나 마음속에 위로가 넘쳤는지 모릅니다. 아! 그렇다. 우리는 보이는 사람들 앞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그리스도 예수를 보았으며 그분의 못 박힌 손을 만져 보았습니까? 그분의 십자가를 보셨습니까? 피 떨어지는 십자가 아래 여러분들이 서 있었던 적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는 사람들이 되었고 그 십자가 아래 모여서 주님의 자녀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상황이 우리를 알아주던지 알아주지 않던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주님이 우리를 세우신 이 자리에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과 고통을 한 품에 모두 끌어안고 주께서 충성된 종아 이제는 이 땅의 수고를 모두 끝내고 너는 내게로 오라! 부르실 그때까지는 적어도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고 싶고 이 아가페의 사랑으로 섬기며 살고싶은 사람이면 누구도 이 싸움을 그쳐서는 안되고 누구도 이 싸움을 그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가 영광을 받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우리는 우리의 일의 성공을 위해서도 여기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한가지만 위해서 소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일도 아니고 그리고 업적도 아니고 그리고 보람도 아니고 성취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한가지 일로 소명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 그 아가페의 사랑 속에서 사는 것 그 한가지를 위해서 소명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똥을 풀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풀빵을 구울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직장을 다닐 수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사업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찰을 할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기사를 할 수 있고 어떤 사람들은 목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하던지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을 사랑으로 섬기며 살도록 부름 받은 오직 그것 하나입니다.
천사가 있다고 칩시다. 지존하신 하나님이 두 천사를 이 세상에 파송하셨습니다. 그래서 한 천사에게는 너는 가서 저 큰 제국의 제왕 노릇을 하며 내가 분부하는 대로 일하라! 지시하셨고, 또 한 천사에게는 “너는 서울의 저 뒷골목에 가서 쓰레기를 치우면서 내가 너에게 주는 그 뜻을 이루어라!” 할 때에 한 천사가 한 천사를 부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 천사가 저 천사를 향해 교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분부를 최선의 가치로 알고 그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아마 섬기고 그 뜻을 이루어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것에서는 다 실패해도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일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인정받지 못하면 우리의 인생도 인정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주 금요일에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면서 여러분들은 누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냐고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목숨을 버려서 기도함으로 목숨을 버려서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몸부림 칠만한 가치 있는 그 무엇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보탰습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여러분들의 인생은 초점이 없는 인생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왜 사십니까? 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있습니까?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그 이름 석자가 우리에게 그리움이 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이름 석자가 우리에게 그리움이 되고 눈물이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아픔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늘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처럼 모든 것이 사라져도 사랑은 영원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사랑이 영원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두 가지로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종말론적으로 우리들이 주님 앞에 가게 되면 그때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사랑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거기에는 유능한 자와 무능한자의 구별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모두 이제 성경도 없고 모이는 교회도 없습니다. 거기는 모두 온전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이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왔는지 더 이상 거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전직 목사, 전직 집사, 전직 간사 그런 말 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 거기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무론 대소하고 그들이 큰일했던, 작은 일을 했던, 그들이 큰 사람이었던, 작은 사람이었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모두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모두 무슨 일을 섬겼던지 모두 한 아름다운 성도들로서 주님을 찬송하고 주님을 경배할 그때에 땅에서 하던 일들을 거기서 계속하는 일들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하나는 기도입니다. 거기서도 기도는 합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그렇게 기도하기 싫었던 사람들은 천국이 얼마나 지옥 같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가면 늘 기도해야 하는데 땅에 있는 교회들을 남겨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거기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 지상에서 하던 것과 똑같은 것을 거기서도 합니다. 그건 뭐냐 하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을 사랑하려고 해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우리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방해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치 부르다가 끊어지고 부르다가 끊어지는 노래와 같았습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서는 끊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랑이 이어질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천국을 올라가기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운동을 여기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표현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유난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정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 살아있는 삶과 인격 자체가 된 사람들은 정말 누가 보더라도 그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기에 적합한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적합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와 슬픔이 많은 이 세상에 살아갈 때에 분투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를 위해 사자처럼 용감하게 삽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을 끌어안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궁극적인 사랑은 당연치 않습니다. 잠시만 오늘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그 나라에 그들의 소망이 있고 그들의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소망도 성취되고 믿음도 필요 없는 때가 올 것이지만 그러나 사랑은 영원히 남아서 거기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천국 백성의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이따금 환경이나 자신의 무지로 인해서 부르다가 멎는 노래처럼 사랑이 끊어지는 것을 경험할 때 그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다시 또 한마디의 노래를 찾아 이전에 부르던 노래에 매듭을 이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주님을 향한 사랑의 노래와 같은 인생을 살았던 모든 사람에게는 그 천국은 그야말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거기서는 아무런 근심이나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는 물리적인 장벽이나 마음의 시험이나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환경의 변동이나 또 악한 것들이 전혀 없고 오로지 우리 속에서 우러나오는 최고의 사랑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께 바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이렇게 영원성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부지런히 살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 갔더니 이런 팻말이 붙어있더랍니다. “천국에 가기를 원하십니까? 여기서 날아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우리 교회에서 날라 가는 법을 배우십시오.” 팻말 자체가 신학적으로 문제는 참 많지요? 그게 날라서 연습을 해서 천국을 가는 것이겠어요? 그런데 거기에서 얘기하는 것은 다른 의미이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랑하면서 살아야할 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주 오시기 전에 훌륭한 준비는 여러분! 아름다운 의복이나 많은 돈이나 높은 지위나 훌륭한 업적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사람들이 누구이냐 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수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 그래서 주님을 향한 그 사랑이 사람들을 향해 밖으로 쏟아져 나아가기를 마다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 그런 사람들을 주님이 가장 귀하게 여기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말씀하시니까 요한이 기다렸다는 듯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요한 안에 무엇이 가득 차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믿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신앙의 어떤 한 특성이 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칼빈이 말한바와 같이 진정으로 우리들이 죄와 욕망을 이기고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는 것이고 이 땅위에 있는 것들은 잠깐 눈에 보이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아서 바람이 불매 풀을 마르고 꽃은 시드는 이치를 우리는 끊임없이 상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지위를 누리거나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거나 남다른 재능과 학식을 가지고 있고 남다른 좋은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도 역시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극히 사랑해 주는 사람 여러분들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 어쩌면 여러분들이 매일 매일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소망을 발견하게 해주는 사람들조차도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마르지 않고 영원히 그치지 않는 사랑, 주님의 나라에 가서도 인생의 무대에 휘장이 내려도 영원히 계속될 사랑,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밖에 없음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일을 우리의 소명처럼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일에 매몰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십자가의 사랑과 그 감화 앞에서 깊은 사랑을 느끼고 날마다 하나님이 나 은 사람에게 사랑 받으시기를 원했다는 사실 문에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 같은 사람에게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고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하는 마음을 삶으로 고백하며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감격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 사는 그런 거룩하고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한다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또 다른 방면에서 입증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놀라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만나셨습니까? 언젠가 전철에서 전도를 하는데 어떤 사람이 그래요. “하나님 봤어?” 여러분! 예수님 보셨습니까? 우리가 못 박힌 그의 손 만져 본적 있습니까? 그분이 못 박히셨을 때 골고다 언덕에서 들려오는 망치소리를 여러분들은 들으셨습니까? 여러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울부짖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그 통곡하는 음성을 여러분들은 들으셨습니까?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아무도 만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느냐고 물어보면 우리는 분명하게 만났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경험이 있느냐고 물어보면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라졌고 십자가는 사라졌으나 보십시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남겨준 이 사랑의 감화는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을 섬겼던 여인이 전해지는 것처럼 주님을 전혀 보지도 못하고 만져보지도 못한 우리들에게까지 이 복음이 전해질 때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녹는 것 같았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나같이 진멸 받아야 마땅할 인생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진멸 당하신 그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그 사랑을 체험하는 그것이 나는 골고다 언덕에 서 있던 여인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 말할 자신이 있습니다. 우리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보지 못했지만 그러나 우리는 오늘도 믿음의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그 형상 볼 때 내 맘에 큰 찔림 받아서
그 사랑 감당 못하여 눈물만 흘리네
수많은 인간의 사상이 떠올랐다가는 사라지고 수많은 인간의 풍조가 불꽃처럼 타올랐다가는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월이 많이 흘러가도 십자가를 통해 드러내 보여준 하나님의 사랑이 말랐습니까? 그분이 임마누엘의 흘려준 그 피가 너무나 많은 죄인들이 거기에서 씻었기 때문에 이제 그 피가 더러워졌습니까? 아닙니다. 수많은 죄인들! 우리와 같은 괴수와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서 우리의 몸의 죄를 씻고 우리의 마음의 악을 씻었지만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임마누엘의 보혈의 샘은 죄 많은 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정결하게 죄 씻음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서 자신의 죄를 씻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우리를 위해 죽으신 참 사랑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이런 놀라운 사랑 이전에는 지식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율법의 의로도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의로 가득 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도 다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폐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제껏 없어지고 말 것, 폐하고 말 것, 그치고 말 것들에 매달려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고 그 사랑의 감화를 받았을 때에 그는 무엇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지를 알았습니다.
무엇이 가장 영원한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이 세상에서 가장 찬란한 빛을 그 사람이 사라져도 발하는 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 미친바 되게 인생을 살았던 것도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죽기까지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서 피 뿌리며 살았던 것도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인격이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었고 바울의 영웅심이 그 일을 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역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붙잡힌바 되어서 그 사랑의 노예가 되어서 그 사랑이 시켰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에게 신적인 강제력과 하늘로부터 말미암는 중압감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이방인들에게도 빚진 자가 되었고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도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자유인이나, 종이나, 기적이나, 제왕들이나 자기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이나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야만과 같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빚진 자가 되었습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오늘도 십자가는 사라졌고 오늘도 주님의 시체는 치워 졌는데도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고 사람들이 가두어줄 수 없는 그 사랑은 수많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오늘 우리를 감당시키고 있습니다. 모두 사라지거나 죽고 나면 다를 후손들이 여기 와서 동일하게 십자가의 설교를 들으며 감동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도 가셨지만 사도 바울도 가셨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부활하셨지만 사도는 엘리야처럼 그렇게 들려 올라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평범한 사람으로서 죽고 그리고 묻혔습니다. 지금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그 사도 바울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섬기면서 그 아가페의 사랑으로 주님을 향해 살고 그리고 그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해 살았던 그 사랑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제가 제 영혼에 서서히 변화가 오기 시작했던 것이 78년도나 79년도쯤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 공무원 교육을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밥 먹으러 가느라고 회색 작업복 입고 막- 뛰는 것입니다. 풀밭에 조용히 앉아서 바울 서신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는 사실 깨닫는 것도 없는데 말입니다. 젊은이가 그 젊은이가 바로 접니다. 한없이 울었습니다. 어느 구절에 은혜 받았는지 잘 설명할 수 없었는데 그 사도 바울이 성도들과 나누는 사랑, 그리고 그 사도가 성령께서 말씀하셔서 그 고난의 길을 가야할 때 보여주었던 성도들의 반응,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사도의 사랑, 이런 것들이 저를 새로운 경험의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죽고 사라졌는데 그가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주님과 영혼들을 위해서 살았던 사랑은 우리같이 무지막지한 사람의 마음도 감동을 주고 감화를 시킵니다. 바울이 위대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그 사랑이 위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그렇게 사셔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사라지고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는 모든 사람들의 귀에 다 잊혀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주님을 항상 사랑하며 살았던 사람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자비의 감격 속에서 살았던 사람,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너무나 고마와서 어떻게 하면 자신을 드려 자기의 사랑을 보이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고민했던 사람, 그래서 여러분들은 사라져도 여러분들이 살았던 사랑의 삶만은 사람들에게 남겨주고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기억합시다.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폐하고 지식도 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않습니다.
23. 사랑뿐임을 알게 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9-12)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로 앞 절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랑이 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사도가 강력하게 논증을 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들이 9절부터 12절까지 상당히 긴 절을 읽었습니다 만은 여기에서는 다시 한번 사랑이 완전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사도가 힘주어서 세 가지 논법으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는 부분적인 것이 온전하게 된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일을 하던 사람들이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주 앞에 설 때에 이제까지 우리가 받았던 모든 은사와 그리고 각양 좋은 하나님의 은혜들이 사랑보다는 뛰어나지 못하다는 사실을 논증하고, 마지막 세 번째는 거울과 실물을 비유하면서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이 13장 전체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을 사랑자체가 무엇인지를 말한 후에 그 다음으로 많은 부분을 그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 다른 모든 은사에 비해서 더더욱 영원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먼저 우리들이 부분적으로 예언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그러던 모든 부분적인 것들이 결국은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그 부분적인 것들이 결국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소중한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때가 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지금 여기에서 사랑이 영원하다라는 논증을 펴가면서 결국은 이 사랑을 종말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보고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영원하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말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영원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육신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썩을 장막이요, 우리가 벗어두고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소유는 물론이고, 우리 눈앞에 보이는 모든 세계도 영원할 순 없습니다. 때로는 대자연의 불변하는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그 자연계 앞에서 영원을 생각하게 만들지만,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영원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 후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남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로 이 세상의 인생을 모두 끝내고 당신 앞에 부르셨을 그 때에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로 남고 존재하는 것, 그것만이 진정으로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은 주께서 마지막 심판하실 때에 그 불에 모두 타서 없어질 것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이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육신은 물론이거니와 이제껏 까지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자랑으로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맺었던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도 대부분 영원한 것일 수 없습니다. 잠시 머물다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족들과의 관계나 부부와의 관계나 우정이나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모든 관계도 사실은 그 관계 자체도 영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잠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더 잘 주님을 섬기며 사랑하며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모를 주시고 우리에게 자녀를 주시고 함께 기대며 살 수 있는 부부를 주시고 친구들을 주시고 우정을 나누게 하시고 애정을 교환하게 하셨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도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술에 대한 사랑이나 혹은 고상한 도덕에 대한 인간들의 사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것들은 이 세상에서 참 영원해 보이고 가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인생은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지만 예술은 영원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예술도 사실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며 빛나는 것 같고 이렇게 인간들이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범죄하며 살아가는 타락한 인생의 발자취보다는 예술의 발자취가 혹은 학문의 발자취가 훨씬 고상한 것 같지만은 그러나 그것도 역시 잠깐 있다가 다 사라져 가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런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고 마음먹지 않는 한 그런 것들에 대한 사랑 역시 세상에 대한 사랑이요, 육신에 대한 자랑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잠시 있다 지나가는 것들, 이런 것들은 모두 영원한 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도 우리에게 말하기를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온전한 것이 올 때에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말합니다.
온전한 것이 오는 때가 언제입니까? 그때는 바로 우리가 천국으로 들어갈 때, 예수 그리스도 앞에 심판을 받고 우리가 그 심판을 모두 통과하고 이제는 하나님을 온전히 인식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을 맞대어 대면할 수 있는 그 하나님의 나라에 가게 되었을 그 때에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모든 것들이 폐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 필요가 없습니다. 방언도 필요가 없고 이제는 성경지식도 필요가 없고 이제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풀어서 가르치는 그런 지식의 은사도 필요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폐해지는 것입니다.
자, 온전한 것이 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모든 이 은사를 통해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자, 방언을 하는 것, 예언을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 잘 가르치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은 마지막에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여주고 그리스도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인격이 어떻고 그분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회에 내려주신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온전한 것이 오셨습니다. 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직접 우리를 대면하시는 때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면하셔서 이제는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는 그런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가르쳐주는 그런 예언이나 성경말씀을 풀어주는 것이나 혹은 방언이나 그런 것들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4장에서 그것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이제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 메시야이신 것을 깨닫고 그는 동네로 뛰어들어갔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분이 바로 메시야이셨다는 사실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들은 이제 말합니다. “네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전해줬으나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하여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해준 것은 네가 전해주었지만 이제는 내가 그 모든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필요가 없다.”하는 것입니다.
(예화) 가끔 제가 집회를 갈 때, 제가 찾아가야 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팩스로 전화 번호, 약도, 기차표, 기차시간, 비행기표, 비행기시간 등을 전해 받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정보들을 통해 집회장소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만약 중간에 집회관계자 (안내자)를 만난다면 더 이상 그 정보를 의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집회장소를 정확히 아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계셔서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이 밝히 우리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시고 어떤 사랑을 가지셨으며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대면하여 말씀하여 주시는데 누가 감히 성경지식을 가지고 그 앞에서 뽐내겠으며 누가 감히 천국에 와서 천국의 말을 하겠다고 그렇게 폼을 잡을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능이 있다고 누가 그 앞에서 자랑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예화) 만약 여러 사람들이 제 전기를 여러 가지 번역본으로 읽었다고 합시다. 각기 다 른 번역본으로 읽은 사람들이 그 전기에 대해 논쟁을 하는데 그 전기의 장본인이 나타난다면 그 논쟁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장본인이 증언이 그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온전한 것이 오면, 즉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고 만나게 되고 우리가 지금 부분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지식들을 완전하게 섭취하게 되는 때가 온다고 할 때에 그 때에 너희들이 지금 자랑하는 이 방언의 은사가 그 의미가 있겠느냐? 너희들이 지금 서로 자랑하는 그 지식의 은사가 의미가 있겠느냐? 너희가 지금 예언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그런 때가 올 때에도 역시 가치를 가지겠느냐? 가치를 가질 수가 없다.
그러면 무엇이 가치를 가지느냐? 사랑만 가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때는 사랑은 그대로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경이 필요 없습니다. 교회도 없습니다. 눈물도 없고, 밤도 없고, 그리고 성경도 필요 없고, 성경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더더욱 필요가 없습니다. 이제는 여러분들이 제 앞에서 성경을 배울 필요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경건서적도 없습니다. 출판사도 없습니다. 낼 필요도 없고, 녹음테이프를 보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 거기서는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도 그것을 말한 사람보다는 훨씬 뛰어난 지식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폐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온전한 것이 있습니다.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한 신앙이 무엇인가를 대면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조차도 조금도 가치를 잃어버리지 아니하는 불멸의 가치를 지닌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천국은 어떤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냐 하면, 마르틴 루터가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정문에는 “아무나 오라”고 되어있는데, 들어가고 나서 뒤돌아보면 “주님을 변함없이 사랑한 자들이 들어온 곳”이라고 써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비유입니까?
보십시오. 모두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지나고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영원히 있느니라.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는 사랑도 영원히 있고 그 사람도 영원히 있는 것입니다. 죽어도 그는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영원히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나는 방언을 하는데, 나는 방언을 더 잘 하는데, 나는 무슨 예언을 하는데, 나는 무슨 은사가 있는데, 나는 무엇을 체험했는데, 그리고 서로 다투고 교만하고 시기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너희들이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그 때에 그 자리에 가봐라, 그러면 지금 너희들이 자랑하는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 뭐 자랑하는 것 있습니까? 한번 얘기해 보십시오. 여러분,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여러분, 우리들이 자랑하는 것들은 대부분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 아니라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의 외모를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체를 자랑하고, 어떤 사람들은 육체의 힘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학벌을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사를 자랑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자신의 문벌을 자랑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랑하는 것은 늘 말씀드리지만, 사랑거리가 자랑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없고, 자랑하는 사람 치고 그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 사랑하는 것들이 불행히도 잠시 있다 스쳐 지나가는 일식간에 없어지고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것들 밖에 없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의 삶이 과연 영원을 지향하는 삶이 될 수 있겠느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영원을 향해서 걸어가는 성도의 삶은 사랑하는 것들부터가 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성도의 삶은 사랑하고 자랑하는 것부터가 벌써 종류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자랑하는 지를 보면, 그가 무엇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는 지를 보면, 그가 결국 마지막에 인생을 통해 도달하고자하는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는 이제 부분적인 것들이 끝나고 온전한 것들이 올 때에, 견딜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묻고 있는 것입니다. 큰 환난과 시련이 올 때, “저 공중의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울려 날 때”라고 찬송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큰 물결이 일어나 우리를 삼키려 할 때에, 그 때에 ‘내 영혼은 편하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들이 그런 환경에 대해서 초연하고 조금도 그런 것들에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음의 위협이 흰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달려 올 때에 거의 그 죽음의 순간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는 참된 비밀과 비결이 무엇입니까?
저는 얼마 전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생애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 ‘아! 이분은 확실히 하나님의 사람이었구나!’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마지막에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셔서 이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병세가 악화되자 이제 의사는 가족과 상의하면서 약의 투여량을 높여야되겠다고 그렇게 제의를 했습니다. 그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힘을 다해서 가족과 의사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이 영광을 빼앗아가지 마십시오. 주님을 뵈올 날이 가까이 왔는데 이 죽음의 이 영광을 나에게서 빼앗아가지 마십시오.”
한 사람의 죽음을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살아왔는지가 분명한 것입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 당신 앞에 다가오고 있는 그 죽음의 그림자를 오히려 하나님이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최후의 순간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병상에서 순식간에 생겨난 확신이 아닙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기 보다 하나님과 영원에 속한 것들을 진실로 사랑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사랑하지 않던 이 세상이 완전히 자신으로부터 격리되고 그토록 사랑하던 영원한 세계, 그토록 변함없이 사랑하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만날 기회가 가까워 오고 있었기 때문에 고통스런 죽음을 영광의 기회라고 말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만이, 이제 불같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도 불변하는 그런 사랑들을 소유한 사람들만이 그런 환난과 시련 앞에서 하나님만이 내 도움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며 살고, 그 사랑의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 앞에 산 사람들만이 죽음과 시련과 고난 앞에서 담대하게 여호와는 내편이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죽음의 고통, 사망의 위협가운데 있는 자들을 도우신다는 약속과 기록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펼쳐놓고 하나님이 고난 가운데 있는 자기의 백성, 자기가 특별히 택하여 부르신 당신의 거룩한 자녀들을 보호하고 지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보지 않고는 성경의 장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성경에 깔려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붙들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 되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고 시련을 만났을 때, 그들의 인생은 송두리째 뽑힙니다. 하나님 앞에 가야할 죽음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그들은 인생의 모든 희망과 이제껏 까지 그럴 듯하게 남들 앞에 드러났던 외식하던 모든 신앙의 모습들이 뿌리째 뽑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모든 것들이 무너지고 그들은 이제 마치 인사불성이 된 사람처럼 자기 앞에 아직까지 경험하지 못한 미래가 다가오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불안감에 떨게 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 영광스럽게 아멘하고 노래를 부르며 죽음의 장막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이 주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의 최고의 가치가 내 주되신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의 장막이 드리우고 나면 그들은 이제껏 자신들이 사랑하던 모든 것들은 깡그리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예수님 한 분 앞에만 서야하는데 그분이 자신들이 늘 부르는 이름이었지만,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분만을 사랑하며 살아온 삶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음 장막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단독으로 대면하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는 순간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지식도, 예언도, 말씀의 놀라운 은사도, 그리고 영들을 분별하는 놀라운 통찰도 모두 잠시 머물 이 세상의 잠시동안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들입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 그것도 모두 함께 사라집니다. 남는 것은 오로지 주님만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인격,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 남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에 남는 것은 오로지 사랑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언젠가 우리 나라에서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시니 대비하라’는 예언자의 목소리 같은 것들이 유행했습니다. 집을 팔고 그리고 땅을 팔았습니다. 금방 예수님이 오시는데 그 돈은 거둬서 무슨 교회를 짓는지 이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다 팽개치고 산으로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얼마나 바보 같은 것입니까? 그런 믿음도 그 런 헌신도 세상이 끝나는 것과 함께 사라지는 것입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오늘 주님이 우리를 부르셔도 “아멘 주 예수여 내가 갑니다”라고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여러분들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누군가가 여러분들의 생명을 억지로 연장시켜줄 때, 여러분도 그 목사님처럼 “내 영광의 기회를 박탈하지 마시오”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게 여러분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길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체험도 아니고 방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예언을 하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지식으로 쌓는 것도 아닙니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그분만을 사랑하고 그분 앞에 자기의 죄를 고하고 그분 앞에 용서받고 그리고 깨어질 수 없는 그분과의 관계를 굳게 붙들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밖에는 사랑하는 분이 없는 그런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 여기 있게 하셔도 그분 때문에 살고, 오라고 부르시면 기쁨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가장 미래를 위한 훌륭한 준비인 것입니다. 기도원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도 미래를 위한 준비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미래를 위한 준비일 수 없습니다. 구제를 많이 하는 것도 미래를 위한 준비일 수 없습니다. 미래를 위한 가장 훌륭한 준비는 내 주되신 주를 참 사랑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타락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큰 죄를 짓고 곤두박질을 쳐야지만 타락이 아닙니다. 어제보다 내가 주님을 더 사랑하지 않으면 그게 타락이요, 그게 뒤로 물러가서 침륜에 빠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영원을 향하여 자신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분, 여러분들의 마음 전체를 한 손으로 받으셔야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만이 여러분의 인생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또 그렇게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영원한 심판을 온전히 견디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로 사도는 어린아이의 일을 또 어른이 되어서 장성한 후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것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말하고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던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후에는 그 일을 모두 버리고 장성한 자처럼 된 사실을 예로 들면서 이제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사랑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도 바울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는, 아까 말씀 드린 것과 똑같이 영원한 종말론적인 맥락에서 이제 보는 것입니다. 즉, 지금은 너희들이 아무리 성경을 연구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각양 성령의 은사를 가지고 믿음으로 산다고 너희들이 말하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너희들이 천국에서 예수님을 대면하여 마주보면서 깨닫게 되는 지식에 비하면 여기서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은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세상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압니다.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생각합니다. 느낄 줄 알고 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그리고 그것은 매우 불완전합니다. 나이가 많이 들고 세상의 물정을 더 많이 알고 인생을 사는 도리를 더 많이 터득하고 나면 어렸을 때 자기가 가졌던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고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이제 성숙하고 장성한 어른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식에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마치 태양을 단지 그림으로 보는 것과 그 찬란한 태양을 대면하는 것과 같은 그런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러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면하여 맛보면서 얻게되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은 이 세상에서 모든 성경을 연구한 모든 사람들과 우리가 애써서 수고하며 얻은 모든 지식을 합해도 거기에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도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만나기 전에 너희들이 섭취하고 깨닫는 지식이 어린아이와 같고 그 나라는 장성한 어른의 지식과 같이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이제 그 나라에 가게 되면, 너희는 갑자기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장성한 어른과 같이 높아져서 지금 은사 중에 어떤 것이 더 뛰어나고 어떤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내가 더 잘났다고 다투면서 너희들이 분쟁하고 서로 교만한 그 모든 일들이 비로소 그 때에는 유치하기 짝이 어린아이의 일이었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깊이 후회할 때가 온다는 그 사실을 사도가 가르치는 것이 첫 번째 전망이고, 또 하나의 전망은 이러한 성숙해지면서 점점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경험은 꼭 천국에 가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현세에서도 충분히 경험되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은사가 넘치고 성령의 각양 은사가 넘친 것은 참 훌륭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은사를 가지고 서로 교만하고 서로 비교하고 서로 우월하다고 자랑하는 이것으로 보아서 너희들은 아직까지 신앙이 어린것임에 틀림없다고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깊어져가고 더 깊어져 가면 그러면 비로소 알게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고 우월하며 그렇게 예언을 하고 방언을 하고 신비한 체험을 하는 이 모든 것들은 잠시 하나님께서 연약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을 좀더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방법이구나 하는 사실을 너희들이 깨닫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린아이가 점점 자라면 보행기를 버리고 자기 발로 걸어 다니는 것과 같이 잠시 너희들이 어리고 미성숙했을 때는 방언 때문에 하나님이 너희를 사랑하는 것을 알고 예언을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너희들이 지식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된다고 감격하지만 그러나 점점 더 주님을 아는 사랑하는 인격에서 성숙해져 가면 성숙해져 갈수록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사실은 그분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신앙의 놀라운 비밀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우리가 서론에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모든 기독교 영성에 있어서 핵심부에는 십자가가 있고, 곧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하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방언을 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여러분들은 그들에게 보다 더 큰 은사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방언을 체험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더 깊이 사랑하게 됐는지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예언을 체험했노라고 말하고 여러분들이 가지 못한 천국에 가보고 지극히 비밀스러운 천국의 비밀들을 경험했노라고 만약에 누군가가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러한 신비한 체험을 통해서 당신이 얼마나 더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게 되었으며 십자가를 더 알게되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얼마나 더 깊이 사랑하게 되었는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일에 그런 체험이 어떻게 깊은 영향을 끼쳤는지,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러한 놀랍고 신비한 체험들이 사랑과 별로 연결되어지지 않고 온갖 신비한 체험이 사랑과 별로 연결되어지지 않고 온갖 신비한 체험자체만을 만들어 놓고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점점 더 가상현실에 빠지게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것은 참된 성령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은사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영적인 체험, 영적인 모든 은사가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찾아온 모든 은사들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더 깊이 알게 해주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은사가 결국은 많지만 이 은사는 마지막에 하나의 핵심을 향해 통합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방언을 체험했을 때, 제일 깊이 체험한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그리스도 의 사랑을 깊이 느껴졌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을 위해서 살고 그분의 참사랑을 전 하고 싶은 소망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젠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는가 보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전히 여러분들이 변하지 않고 이전에 자랑하는 것들이 지금도 여러분들에게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을 때 자랑하던 것들이 지금도 여러분들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의 체계가 변화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그 지식 때문에 이전에 자랑하던 것들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놀라운 사랑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고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교훈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도도 오늘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적도 행하시고 기적도 행하셨습니다. 병든 자도 고치시고 굶주린 자도 이적의 떡으로 먹이시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적의 떡을 먹은 사람도 배고팠고 병 고친 사람도 결국은 나중에 죽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기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들도 예수님의 곁을 떠났습니다.
사도가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에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기적을 행하시지 않지만 그러나 모든 기적과 그리고 놀라운 능력과 병을 고치는 모든 권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적어도 직접 행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 모든 섬기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사람들의 가슴에 남겨주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은 가슴속에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사실은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서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병들어가고 있고 고통하고 있는 이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눈물로 고린도전서 13장을 쓰는 것은 다메섹의 기적의 체험이 그를 여기에 데려다 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같이 죄인중의 괴수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는데 그런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셨으며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 같지 않으니까 기적적인 모습으로 당신에게 나타나셔서 생생한 음성으로 자기를 용서하시고 자기를 선택하고 자기를 불러주시는 놀라운 신앙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여기 서게 된 것인데 그러나 사랑의 경험의 이면에 깔려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울을 향한 마음은 오직 하나로 집약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와 같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성령과 더불어 교통하였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다메섹과 같은 기적적인 모습으로 부활한 모습으로 자기에게 나타나 주시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래도 그는 변함없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체험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그 가슴속에 사랑은 남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왜 여러분들에게 오늘도 변함없이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여러분들과 같이 무디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도 쉽게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하지 않는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여러분들의 어두운 마음의 문을 밝히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에게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쉽게 찾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부어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기적과 같은 놀라운 일들을 일으켜서 여러분들을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때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경험하게 하고 혹은 방언을 하게 하고 혹은 영들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는 지식의 은사를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무엇 하라고 그것들을 여러분에게 주신 것입니까?
그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주신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 받은 것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주셨습니까? 깨달은 사실을 사람들에게 자랑하게 하려고 여러분들을 깨닫게 하셨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남들이 체험하지 못한 놀라운 이적과 신비한 것들을 경험하게 한 것을 자랑하라고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시고 여러분들의 삶 속에 기적과 같은 기도의 응답을 주셨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것 자체를 위해서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들을 베풀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놀라운 체험을 통해서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에게 그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래서 그런 모든 다양한 체험을 통해서 오로지 한 길 그러므로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이시며 내 평생 소원은 오직 그 분을 사랑하며 사는 것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그런 것들을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허락해주시고 또 여러분들이 성숙한 삶을 살면 살수록 여러분은 자신이 성숙해져 가는 그 증거를 사랑을 통해 입증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해진다는 개념은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터득하고 그 말씀을 숫돌에 반짝반짝하게 칼날로 갈아서 지체들의 목을 치는 것이 성숙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뜻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이해를 가질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무지와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마치 짐승처럼 대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참사랑을 안 사람들이 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짓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 하던 짓이었고 참 하나님의 사람인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렇게 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끔 말로는 하나님을 모르고 어둠가운데서 살아가기를 고집하며 사람들을 짐승이라고 부르지만 그렇지만 그들을 향한 마음이 짐승을 대하는 마음 같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그들에게도 우리에게 비친 진리의 참된 지식이 비췄더라면 저들도 저렇게 비참한 어둠 속에서 살아가지 않을텐데 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이런 그리스도를 아는 놀라운 지식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게 이것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시니라”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훌륭한 신앙의 고백을 남겼던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던 바와 같이 우리가 동물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다른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지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랑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지식을 통해서 다시 한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하지 않습니까? 성숙해진다는 것은 이처럼 사랑과 함께 성숙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많이 만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많이 경험하고 그분의 사랑을 더 많이 체험해서 더 온전해지면 온전해질수록 그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신 가장 커다란 계명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고 하는 그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단지 그것은 돈 주고 물질을 주는 것만이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랑은 많은 섬김들을 낳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신앙이 성숙하면 성숙할수록 그는 점점 더 사람들을 사랑하고 점점 더 소망이 없는 인생들 가운데서도 그래도 남아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고개를 젓고 세상의 의사들이 모두 포기했어도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그의 인생과 그의 영혼을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그 안에서 봅니다. 영혼의 위대함을 표현(?) 속에서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할 모습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교회에 와서 교회에 모인 사람들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을 수 있을 정도로 크리스천 에티켓이 몸에 벤 그런 사람이 되어 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식과 거짓으로 가득 차서 겉만 번지르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해 지는 것이고 외식을 타파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자기 의에 빠져서 교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를 발견하고 자기가 선 반석이 예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발견한 것이라고는 소망 없는 자기 자신과 유일한 소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깨달으면서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라고 고백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누군가를 보다가 여러분보다 훨씬 성숙하고 성경의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여러분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들에게 사랑으로 대해주지 못할 때 여러분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것 그 자체가 영혼의 깊은 질병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모든 것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똑같다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이 계명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 모든 혼란스럽고 이분법적으로 되어지기 쉬운 사고들을 말끔하게 정리해주는 훌륭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 앞에 우리를 비춰보면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교정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은 이제 여러분들이 받은 그 사랑을 통해서 이제는 주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해주신 것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이제 여러분의 삶으로 고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삶으로 고백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교회 와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하고 열렬하게 예배하고 열렬하게 헌금하고 그리고 집에 돌아가서 냉담하게 사는 것은 정말 그 사랑에 보답하는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베푼 사랑이 어떤 성질의 것이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기적을 베풀어주셨고 우리를 위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지만 모두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던 기적도 그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던 그 놀라운 우리를 향한 모든 은혜의 경험도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감동이 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섬기신 모든 그 섬김의 근본적인 동기 그것을 움직인 모든 것이 결국 사랑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의 큰사랑, 그 은혜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보면서 그 사랑에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모든 삶이 그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의 모든 행함과 우리의 모든 섬김에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사실 죽은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열심히 살아도 그것은 일을 향한 사랑이나 자기자신을 위한 열심 때문에 열심히 산 것이지 주님을 향한 열심 때문에 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진정으로 사랑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것을 무엇을 보면 알 수 있는가 하면 그것을 사랑했을 때를 보면 우리는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사랑하고 단지 자기의 일만을 살아하면서 살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이 아무리 신앙적인 모습이었다고 할지라도 일을 더 이상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자신을 추스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될 때 그는 견딜 수 없는 고독과 괴로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을 하고 그러한 섬김을 위해서 자신을 드리고 바쳤던 그의 모든 생애가 만약에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말할 것 같으면 그는 틀림없이 일이 사라지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끝나는 그 때에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인생은 허물어지지 않고 오히려 모든 것들이 사라지니까 더 깊이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만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는 그러한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 불화한 부부가 자식 뒷바라지 때문에 결혼생활을 지속하지만 결국 자식을 모두 출가시킨 후에 더 이상 그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고 헤어지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부부생활을 지속시켜준 동인이 자식이었지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을 하는 것인지 헤매게 만드는 많은 위험한 요소들을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예화) 제가 있던 신학교에서는 교단과의 갈등이 빈번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학교를 비 판하는 사람에게 이사와 같은 감투를 주면 신학교를 후원하는 입장으로 바뀝니 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도 그런 위험한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왜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여러분들이 집사님, 장로님이 되셨기 때문입니까? 목사가 됐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교회의 투표를 받아서 장립이 되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함께 개척을 했기 때문입니까?
이런 식으로 잘못된 관계 속에서 교회를 사랑하면서 살아오게 된 사람들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인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교회에 문제가 생기고 사랑하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면 그가 기초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반석 위에 놓여있는 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했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교회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금이 가거나 깨어질 때에도 교회를 향한 사랑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 사랑은 사람들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누가 무엇을 시켜서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사랑하게 됐고 그분이 사명을 주셔서 자기를 거기에 세웠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는 주님 앞에 설 때에 그 때는 우리는 모두 장성한 자와 같이 밝히 지식을 갖게 될 것인데 그 지식 앞에 서게 되면 우리는 이런 육신을 자랑하는 것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들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그것을 인해서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분쟁하는 그것이 더 값진 것을 잊어버리고 더 사소한 것들을 다투는 어리석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도가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더 성숙해지고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 더 온전한 사람들이 되어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이 사실이 얼마나 분명한지를 우리에게 묘사하기 위해서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는 주를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지만 대면하게 되는 것처럼 확실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그렇다는 것입니까? 사랑이 모든 것 위에 뛰어나고 사랑이 그 모든 것보다도 영원하다고 하는 그 진리를 그렇게 분명하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울이 희미합니까? 당시 문맥으로 보면 우리가 보는 것 같은 그런 거울이 나오지 않았을 때입니다. 그 때 거울은 동경이나 석경입니다. 동경은 구리를 반짝반짝하게 닦아서, 석경은 돌을 반짝반짝하게 닦아서 거기다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춰보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자기 모습이 비추긴 비추지만 매우 희미합니다. 색깔은 안 나타나고 번쩍이는 모습만 나타납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 거울을 볼 때마다 자기의 모습이 또렷하게 비춰지길 바라는 그런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시대의 문맥에서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나... 지금은 이해가 안되지만 거울로 보는 것은 당시에는 아주 희미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지금으로 말하자면 핀트가 안 맞은 사진 심지어는 텔레비전에서 가끔 모자이크처리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남녀는 구별할 수 있고 대개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러나 모든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은 그러한 잘못 처리된 사진과 같은 그런 것이었다면 지금은 그렇게 밖에 모른다 그래서 너희들도 지금은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 모르고 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 기인하는데 하나는 너희들의 미성숙이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지식에 대한 한계 때문에 너희들이 지금 오해를 하고 있다만 그러나 그때에는 밝히 보게 될 것이다. 마치 그 때에는 대면하여 보게되는 것과 같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다가 마지막에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되는 것처럼 그렇게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다. 무엇을 말입니까? 모든 것 위에 뛰어난 것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만약에 너희가 그런 사실을 알기만 한다면 너희들은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지 나는 안다. 너희들이 만약에 영원한 가치를 가진 것이 오직 사랑밖에 없다는 사실을 안다면 너희들이 너희가 가진 은사의 우열을 다투기 위해서 사랑을 파괴하고 그리고 이기심 때문에 사랑을 깨뜨려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그릇 속에 좋은 보석이 담겨있는데 그릇을 서로 가지려고 빼앗다가 그 속에 담겨진 아름다운 구슬들을 모두 땅바닥에 쏟아서 깨어지게 만드는 것과 똑같이 어리석은 사실이라는 것을 오늘 사도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럼 도대체 사도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떻게 당신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나 그때에는 대면하여 마주보리라고 그렇게 말을 하면서 당신은 마치 같이 이 세상에 있으면서 모든 것을 다 보았고 그리고 이미 천국에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지식의 긴장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긴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서 때로는 천국의 맛을 보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천국의 맛을 미리 맛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십자가 하나를 붙들고 이 어두운 세상을 믿음으로 살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은혜가 아무리 감사하다고 할지라도 타락하고 죄성으로 가득 찬 이 인간이 그 고마운 마음을 60년, 80년 일생을 간직하면서 일생을 산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이 누구인지 너무나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만큼 배은망덕한 존재가 없고 바보 같은 존재가 없고 짐승과 같은 존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들이 실패가운데서도 딛고 일어서고 사랑 없음을 회개하고 다시 주를 믿으며 다시 한번 용서함을 받고 다시 주가 옳다고 하는 삶을 택하고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삶을 버릴 용기를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통해 얻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자신을 부인하면서 살 수 있게 하는 놀라운 은혜는 단지 옛날에 나를 용서해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와 사죄에 대한 기억 때문에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자기의 의지를 버리며 이기적인 자기를 파하고 주님의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살려고 하는 우리에게 미래에 맛볼 수 있는 천국의 맛을 미리 맛보게 해주시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그 맛으로 그 힘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큰 인생의 시련과 풍파가 다가올 때에 마음속에 밀려오는 놀라운 평안함 이런 것들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나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십니다. 주의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하나님의 인격을 경험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경험하게 해주실 때 우리는 일시에 인생의 어두운 밤들이 지나가고 천국의 놀라운 희락을 얻게 됩니다.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우리들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들은 원래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나 얻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찬송에서 기록한 바와 같이 “기쁜 하늘 잔치의 맛을 보게 하소서” 그래서 그 천국의 맛을 우리에게 오늘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가 주님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이런 놀라운 평화와 천국에서나 맛볼 수 있고 세상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이런 놀라운 평화와 사랑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맛이 우리로 하여금 어두운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놀라운 힘입니다. 우리는 그 맛을 볼 때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배울 때는 윤곽을 그렸지만 성령을 통해서 그 진리가 무엇인지 체험하고 나면 마치 동화 속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림 그려놓은 난쟁이들이 튀어나오고 그리고 동물들이 걸어나오고 집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그려놓은 구름들을 하늘로 올라가는 것과 같은 생생한 실체를 성령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과 똑같이 그렇게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였지만 그는 신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교훈을 통해서 성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종종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신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 그런 사랑이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천국 생활의 맛을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수시로 보게 하셨을 때 그는 마치 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아직은 걸어 가보지 못한 신앙의 세계, 천국의 세계를 미리 갔다온 사람처럼 그들에게 상세하게 말하고 그리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과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 사이에 차이점이 무엇이고 그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구분하고 어떻게 그것을 나누어서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사도 바울은 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와 신령한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은 땅에 있어도 하늘의 일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이 땅 슬픔이 많은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고 그는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맛보지 못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과 그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축복에 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이고 간증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에게 순종하고 당신이 영원하게 생각하시는 그 가치인 사랑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다 더 많은 그런 천국의 비밀들을 맛보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접고 영원한 것들에 대한 사랑을 향해 눈뜨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사도가 쓴 고린도전서 13장을 통해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중에 지금 12장에서 13장으로 넘어 오면서 이렇게 사도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은 그들이 교회 안에서 서로 자신들이 받은 은사의 우열을 자랑하면서 교회의 하나되는 일치의 사랑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그래도 성령의 은사를 받고 서로 자랑하고 그것을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보다 그 받은 영적인 은사를 자랑하다가 사도에게 오늘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것들도 아닌 잠시 머물 이 세상에 있다가 사라지는 지극히 육신적인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랑하며 살던 사람들이 받을 부끄러움은 얼마나 더 클 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지금도 여러분들의 안일한 삶의 여건이나 여러분들의 외모나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잠시 머물며 살 동안 주를 섬기도록 주님이 주신 여러 가지 도구들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들 때문에 교만해지고 그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들 안에 머물러 있지 못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보다도 더 부끄러움을 당해야 할 교인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함께 세상의 모든 정과 욕심을 못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잠시 있다 사라질 이 세상의 육신, 잠시 있다 사라질 눈에 보이는 것들에 그들의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불변하는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끝 날이 다가와서 모든 인간이 사랑하던 것들이 심판의 불길 앞에 모두 사라져도 그 불길 앞에서도 영원히 타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 자체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온 영혼이 점점 더 예수 그리스도께로 다가가고 있음을 우리는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까?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은혜에 감격하고 그분을 믿었던 때보다 우리가 보다 더 거룩해지고 보다 더 주님께로 가게된 것을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습니까? 처음 믿었을 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나 많은 진리를 아는 지식과 그리고 남들에게 주시지 않은 독특한 신앙의 체험과 영적인 모든 은사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졌고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하나님 앞에 은혜 입은 자가 되었다고 하는 이 증거는 무엇을 통해서 드러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하나님 앞에 성숙하고 주님 앞에 존귀한 존재임을 드러내주는 그 방법과 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오랜 신앙의 성숙함을 무엇을 통해 입증하려고 합니까? 여러분, 틀에 박힌 것 같은 교회 봉사와 이치를 잘 따져 알고 어떻게 교회를 잘 섬겨야 할지를 잘 아는 그런 약삭빠른 처세술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 받은 자임을 입증하려고 합니까?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여러분 영악한 신앙생활로서 계산에 빠른 신자의 삶으로서 여러분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생활하고 하나님의 은혜 받은 사람임을 입증하려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움직이고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께 익숙해져가고 다가가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하나의 종교에 익숙해져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그저 가식적인 종교인일 뿐입니다.
우리가 남이 알지 못하는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셨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들은 오랫동안 연단 되었고 삶의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인격과 우리의 마음이 금이 용광로에서 제련된 것과 같이 순전하게 제련된 증거를 우리는 사랑을 통해서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는 성숙한 사랑이 있습니다. 깊이가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깊은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들어간 신자들의 내면의 세계 속에는 주님을 향한 깊은 사랑과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영원에 대한 깊은 불쌍히 여기는 연민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주님 앞에서 성숙하며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온 성도들의 마지막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모습을 잘 간직하며 살다가 주 앞에 가야합니다.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 앞에 보여드려야 할 최후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24.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 사랑이 모든 것보다도 더 영원하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들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들이고 사랑은 영원히 남는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도바울이 그 사랑이 모든 것보다도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고린도교회에게 상기시킨 것은 자랑스럽고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종말에 가서 예수그리스도 앞에 가게되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귀하고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은 사라집니다. 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뛰어난 재능이나 혹은 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남다른 특기나 그리고 심지어는 개인이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운 육체의 모양도 주님 앞에 서는 날에는 모두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모든 은사도 영적인 은사들 , 아름다운 영적인 선물들도 주님 만나는 그 앞에서는 모두 쓸데없는 것들이 되어버립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많이 깨달아 알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이야말로 구원다음으로 우리에게 소중한 은사였습니다. 그 진리의 빛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아니하고 밝은 빛 가운데로 걸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그 말씀을 통해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또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에는 그 말씀에 대한 지식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리가 주님을 마주 대하여 뵙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져도 마지막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있는데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남녀간의 격동적인 에로스의 사랑도 아니고 형제사이에 주고받는 (필리아)의 사랑도 아닙니다. 또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혈연에 얽매인 (스톨게)의 사랑도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조건이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고 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원래 하나님께 있었던 것인데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누구 신지를 깨달아 알면서 그 사랑이 우리를 감화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이제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는 완전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아가페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아가페는 무한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아가페는 무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놀라운지 생각해보십시오. 주님 안에 있는 그 사랑과 우리 안에 있는 이 사랑이 동일한 질의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양과 능력에 있어서는 또는 능력에 있어서는 순수함에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동질의 것이 우리 안에 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귀합니까? 18금이 순금보다는 쌉니다. 그러나 귀한 것은 18금속에도 금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아가페의 사랑은 완전하고 무한하고 영원한 성격을 갖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에 우리 안에 아가페가 있지만 그 아가페는 완전하거나 무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질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런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 안에 있는 아가페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없어도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진실하게 체험한 사람들은 모두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고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논지입니다. 사도는 오늘 우리들이 읽은 이 13장의 위대한 사랑의장의 마지막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는 앞부분에서 사랑의 영원성을 이야기할 때는 사도가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갔습니까? 잠시 이 지상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로 남겨두지 않고 모두 데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종말이 우리를 세웠습니다 종말에서 사도의 이야기를 비추어 보니까 아! 역시 다른 것 다 소용이 없고 그 사랑밖에는 마지막에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랑하고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주 앞에서는 그 마력은 우리를 세워줄 수 없는 지푸라기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행하고 살든지 그것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행한 일이 아니라면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한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줄로 생각을 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가페의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는 그 모든 섬김은 그 날에 모두 풀섶과 같이 사라질것이요. 지푸라기와 같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불에 타고 말 그러한 하찮은 것에 불과 합니다. 사도가 우리를 영원으로 데려가 주었습니다. 또 예수의 심판대 앞에 세워주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 세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순간에 주님을 뵈옵는 순간에 서 보니까 역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 잘났다고 다투는 그 모든 성령의 은사들조차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 그리고 거기서 오직 하나 의미 있는 것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랬더니 이번에는 사도가 우리를 땅으로 데리고 내려 왔습니다.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그런즉,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희에게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말했고 그 후에 사랑이 얼마나 영원하고 사랑이야말로 가장 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종말에 갔을 때에는 사랑이외는 모든 것이 지푸라기와 같다는 사실을 내가 너희에게 보여 주었으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데려 가실 때 거기에는 믿음도 없고 소망은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예화) 콜롬버스가 88명의 선원들을 싣고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을 찾아 나섰습니다. 2개월 정도 흘러도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선원들은 마구 불평을 하며 아무래도 우리가 잘 못은 것 같다고 하면서 콜롬버스를 향해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 때에 그는 좀더 참고 잠 잠히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항로를 인도하시기를 기다리자 그랬습니다. 그 말이 끝 나고 얼마 안 가서 지나가다가 배에 물체가 툭툭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 들이 깜짝 놀라서 내려다보니까 부서진 배 조각이 망망대해에서 콜롬버스가 타고 가는 배에 부딪혔습니다. 배를 멈추고 내려다보니까 틀림없이 민간인이 만들어 놓은 배의 한 부분이 부 서져서 바다에 떠다니다 부딪힌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그들은 말할 수 없이 기뻐했습니다. 왜 기뻐했을까요? 그것을 보고 무엇을 믿을 수 있었지요? 육지가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육지를 발견하는 동안까지는 그 건져 올린 나뭇조각이 그들에게 굉장히 증거 가 되었습니다. 몇 일 더 항해를 한 후에 캄캄한 밤중에 멀리서 깜빡이고 있는 신대륙의 불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인디안들의 불빛 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에 내려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까지도 쪼개진 뱃조각을 움켜쥐고 있었을까요. 필요없습니다. 전에는 그것이 너무나 귀했습니다. “봐라! 이것이 여기 있으니 육지가 가까운 증거이다. ”
그들은 그것을 모두 주목했습니다. 분석했습니다. 이것이 보통나무냐 이것이 진짜 배를 만들었던 것이냐? 토론할 것도 많았습니다. 신대륙을 발견했을 때 아무도 그 뱃조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 믿음이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결코 그는 더 이상의 보이지 않을 것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겨우 맛보아서 알뿐입니다. 너는 알고 나는 모릅니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주님의 선하심을 모두 알 수 있습니다. 거기는 의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어야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확실하고 모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소망도 다 성취되었습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마치 철로역정에서 “믿음씨가 그 장망성을 떠나서 영원한 도성을 바라보며 걸어갔던 것처럼 그것 하나를 바라보고 걸어왔는데 그것도 성취되었습니다. 더 이상의 소망도 필요 없습니다. 이 제는 미래에 대한 소망 이러한 것들이 필요 없고 이제는 그 안에서 모두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13장 마지막 절은 사도가 우리를 예수그리스도의 심판대 그리고 영원한 천국의 세계에 들어 올려서 거기서 사랑밖에는 진실한 소중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이후에 우리를 다시 데리고 지상으로 다시 내려온 것입니다. 사랑이 있고 미움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고 의심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고 절망이 있는 오늘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을 사도가 우리를 데려온 것입니다. 뭐 가슴에 와 닳는 것이 없습니까? 뭐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습니까? 이처럼 신앙은 가상현실 속에 서 주를 믿는 것이 아니라 엄연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삶의 현실 속에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떠한 신앙을 가지고있든지 간에 그가 만일 삶에 실패하고 있다면 그는 역시 신앙도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가 만약에 스스로 신앙인 임을 선언하고 있지만 삶을 실패하고 있다면 그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에 깊은 관심을 갖고 마지막에 삶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 모든 믿음은 사실상 죽은 믿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짧은 13장을 무려 2월부터 오늘까지 6개월이 넘는 기간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다 들을 때 우리들이 그 사랑의 감동을 받고 감격한 것으로 만약에 그쳤다면 우리의 신앙은 가상현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컴퓨터를 들여다보고 게임이나 오락에 빠지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이고 주님의 참사랑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할 것 같으면 우리는 천국에서 맛보는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는 즉시 현실로 내려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넘칠 때 우리의 마음속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기도를 해도 더 많이 하고 싶고 찬양을 해도 더 많이 하고싶고 예배를 드려도 자꾸 드리고 싶고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우리에게 갈망을 더해 줍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이런 모든 놀라운 은혜를 주시는 것은 모두 우리가 그 은혜의 감동을 받고 그 은혜를 즐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잠시는 천국에서 맛보는 것 같은 그런 놀라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비밀을 맛본 후에는 다시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 속으로 내려오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믿음, 여러분들의 영적인 생활, 영성이 참 진실하고 건강한가 하는 것입니다. 삶을 떠나서 단지 체험만을 추구하는 영성, 역사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교회의 놀라운 영적인 부흥, 이런 모든 것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있는 진정한 의미의 영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것은 분명히 천상이 아니라 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이라는 것입니다. 먼 나라가 아니라 천상이 아니라 바로 이 지구 위 문제가 많은 이 세상 그 위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소망,사랑 이 세 가지는 사도로 하여금 13장을 쓰게 만들었던 12장에 나오는 은사에 관한 논쟁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닙니까? 물론 믿음도, 소망도, 사랑도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다는 점에서는 은사라고 말할 수 있지만 엄격하게 말하자면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영들을 분별하고 방언을 하는 것은 은사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기이한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소신과는 상관없이 진정한 거듭남과는 상관없이 어떤 영적인 영향을 받아서 순간적으로 그가 무엇인가 영적인 감각을 가질 수 있고 무엇인가 영의 세계의 것을 가지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마태복음10장에 예수그리스도께서 모든 병과 약한 것을 고치는 권세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주셨을 때 그 속에서 가릇유다가 제외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어느 정도 가룻유다도 동참했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은사는 있었으나 그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세가지는 모든 은사에 뛰어난 구원받은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늘 우리들이 가지고있어야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사랑만 필요하고 나머지는 모두 필요 없다 나머지는 모두 하찮은 것이다 그렇게만 말하고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가 항상 있을 것이다. 즉 그것은 항상 있어야 하고 하나님이 너희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것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분명히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 없이는 살 수 없고 소망 없이 사랑이 어떻게 설 수 있습니까? 예수그리스도 앞에 갔을 때에 믿음도 성취되고 소망도 성취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더 이상 믿을 필요도 없고 소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는 것은 사랑이 남습니다. 주님을 마주 대하여 주님을 바라볼 때에 주님이 진심으로 사랑하던 성도들은 감격이 넘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쉽지 않지만 주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주님의 나라에 갔다고 말할 것 같으면 예수그리스도를 쳐다보고 있는 그 순간이 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 나라가 어떻게 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말 후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마무리하고 있는 이 광경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사랑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 역사하는 믿음 그리고 수고하게 하는 인내 인내하게 하는 그 소망이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지상의 생활은 희미하고 불투명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내일 일을 알 수? 자 1년 후에 여러분들은 어떤 모습이 되어있을까요? 여러분 직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들이 사랑하던 사람들은 1년 후에도 여전히 살아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살아서 도움을 줄까요? 어떻게 될까요? 저는 1년 전에도 이와 같은 현실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1년 전에 꿈꾸지 못했던 일들이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저의 실속에서도 일어납니다. 그것은 좋은 방향으로도 혹은 나쁜 방향으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도저히 할 수 없는 인생을 살면서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을 믿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한시간도 하나님 앞에 숨을 쉬고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보이지 않아도 오직 믿음으로 걸러 가는 담대함도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이어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의 믿음을 튼튼히 합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 교회 문을 두드리고 믿음이 돈독한 형제 자매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믿음이 연약해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하면서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믿어야하며 무엇을 믿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를 다시 한번 회상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여전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을 붙들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그가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주심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을 믿고 예수그리스도를 인정하려는 이유 때문에 세상에서 손해를 보거나 심지어는 박해를 받거나 위협을 받을 때라도 우리는 굴복하지 않고 신앙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모두 믿음이 역사하고 있는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소망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도 결국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내가 이렇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때문에 내 속에서 일어나는 사랑을 죽이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주님께서 싫어하시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포기하고 버립니다. 주님을 더 온전히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 만약에 종말도 없고 내세도 없고 인생을 살고 난 후에 예수그리스도도 없고 심판도 없다면 나는 그분을 사랑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왜! 소망이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은 좋은 일들을 모두 포기하고 단지 옛날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셨다는 추억만을 붙들고 변치 않고 의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불가능하고 또 성결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가 아니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자기의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 너희가 산 소망을 가졌다고 썼습니다. 희랍어에서는 분사를 사용합니다. 지금 현재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소망, 현재 역사하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살아왔던 구약의 모든 성도들은 한결같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 이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를 가든지 네가 누구냐고 물을 때 대답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나그네로라”고 대답했습니다. 히브리어로"겔르구르"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구루" 라고 하는 동사는 "떠돌아다니다"라고 하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나그네는 너무 좋은 표현이고 “나는 떠돌이라” 어디서든지 떠돌이였습니다. 그에게는 소망이 하나님의 나라에 본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그를 믿음의 사람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신약시대에도 예수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았던 그 위대한 성도들의 생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사도바울이 전에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유익하던 것들을 해를 주는 것들로 생각한 까닭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인 지파의 히브리인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의 지파였던 모든 자랑을 하찮게 내버린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제는 유익하던 것들을 해로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리스도 예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과거의 예수님일 뿐만 아니라 미래에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예수그리스도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쓴 자기의 편지 속에서 “의에 면류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 그 면류관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고 그 소망을 가지고 고난과 시련의 넘치는 인생을 살면서 핍박을 받고 배척을 받으면서 사랑을 가르치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탐냈던 것은 면류관이 아니고 면류관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 우리주의 아들 그분 이였습니다. 보십시오. 소망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괴로운 인생길 가는몸이
편안히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든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소망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인생이 원하지 않는 고난이 오거나 시련이 올 때에 가끔은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세상아 속히 지나거라”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 뿐이니…
잠시 지나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소망 없이 우리가 어떻게 순례자의 외로운 길을 걸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도 않거니와 사랑한다 하더라도 주님이 그것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깨닫고 주님의 진리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 마음둘 곳이 없거니와 또 마음을 두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남들이 이런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기고 저런 장사를 해서 이익을 남깁니다마는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화) 젊은 시절에 저는 특별히 교회로 인도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는데 내 발로 교 회를 걸어갔습니다. 이유가 세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간접적으로 저를 교회 나가 도록 기도해주고 권면한 친구가 있었고 두 번째 이유는 새벽종소리였고 세 번째 는 꿈이었습니다. 꿈에 어디로 갔는데 갑자기 양쪽에 불빛이 비치는데 술집, 음식 점, 같은 가게가 쭉 늘어섰는데 집집마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맥주 같은 것을 마 시면서 웃고 떠들고 하는데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첫 집부터 마 지막 집까지 들어갈 곳을 찾는데 나 들어갈 자리가 한자리였어요. 할 수 없이 거 기를 넘어요. 산을 넘어가고 나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거기 에는 무엇인가 보따리를 메고 멀리 걸어가는 거예요. 해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 는데 사람들이 가다가 봇짐을 내려놓고 나무를 베어다가 집을 짓기 시작해요. 나 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왜 사람들은 목적지에 가지도 않고 해도 남아있는데 여 기다 집을 짖을까? 생각하면서 소수의 무리들과 함께 멀리 더 멀리 해지기 직전 까지 걸어가자 하면서 앞으로 쭉 걸어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부동자세로 몇십 분을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돌 머리에 도 생각났는데 이것이 개꿈은 아니다. 그리고 나서 급히 꿈꾼 것을 접지를 못했 습니다. 그때 내가 받았던 메시지는 이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제게 “얘야 너는 이 죄 많은 세상에서 먹고 마시다 죽을 사람이 아니다. 나와 함께 순례의 길을 떠나 자” 그런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때 써놓은 메모쪽지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소망이 없이는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성을 가진 인간들이기 때문에 편안하게 살다가 죽고 싶은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데 왜 우리들이 순례의 길을 걷겠어요. 순례의 길은 집도 지을 수 없고 그리고 손도 가질 수 없습니다. 여관방에서 묵는 사람이 냉장고나, 피아노나 옷장이나 들여놓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가질 수 있는 것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당연히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을 버려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누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소망이 없이 어떻게 이런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소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도 사도는 말하기를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과 소망이 이렇게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 믿음이 소망이 우리에게 힘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에 심장부에 소망의 핵심부에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존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과 함께 역사하지 않는 믿음은 단지 개인적인 확신에 불과합니다. 사랑이 함께 역사하지 않는 소망은 사행심에 불과한 것입니다. “앞으로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꺼야 라고 하는 허황된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믿음과 소망 이 두 가지는 그리고 사랑은 마치 믿음과 소망이 나무의 커다란 잎이라고 말할 것 같으면 사랑은 그 무성한 잎파리들의 땅과 인연을 맺어주는 그 나무 줄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뿌리는 사랑에 박혀있고 그 사랑의 대상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알게된 하나님의 참사랑을 뿌리로 박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세상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을 깊이 붙들고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이런 불변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세상에서 절망하고 낙담할 수가 있겠느냐 말입니다.
지금은 원수들에게 우겨 싸임을 당하는 것 같고 환경에 의해서 짓눌리는 것 같지만 반드시 일어서고야 말 것이며 그들은 반드시 승리하고야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사랑과 함께 역사 하는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꼭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의해서 지지되지 않는 믿음 사랑에 의해서 역사하지 않는 소망, 이모든 것들이 불가능하거니와 거기서 떨어져나가 버리면 그것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소망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요즈음 우리에게는 이런 견해들이 유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아마 일어날 것입니다. 부자가 될 것이라고 자꾸 자신에게 말하십시오. 말이 씨가 됩니다. 결국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기독교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믿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고 인격적으로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날마다 그분을 사귀고 교제하며 그 안에서 깊어지는 사랑 그 사랑의 깊이 뿌리박은 역사 하는 믿음 그 사랑 때문에 절망할 수 밖에 없는 현실 속에서도 그 느껴지는 사랑 때문에 자기를 감동시킨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주님께 소망의 닻을 던질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있고 세상이 짓밟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러면 이런 사실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마지막으로 던져주는 도전은 무엇입니까? 사랑은 그처럼 우리를 살게 하고 믿게 하고 절망 속에서 우리를 건져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랑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무엇인지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다. 알아도 매우 작게 밖에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로서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줘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그림처럼 보여주고 가르쳐줄 의무는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여러분들이 그 사랑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습니까?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가르치는 것은 바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실제로 바람이 불지 않고는 그 바람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방송에서 밖에는 지금 초속계의 바람이 붑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느낄 수 없습니다. 50m 의 바람이 불어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은 바람이 부러도 흔들리는 빨래를 보면서 물 묻은 손을 볼 때 시원한 느낌이 들 때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압니다. 자매들이 흐트러진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바람이 지나간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말과 혀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가리킬 수 있습니까? 가르친다고 해도 그것은 단지 개념만 가르칠 수 있을 있을 뿐입니다. 가장 확실하게 가르치는 방법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여러분들이 붙들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들을 감동시켰고 여러분들을 움직여서 새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랑이 여러분들의 인격적인 허물과 도덕적인 부실함의 장애를 받지 않고 여러분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서 여기서 솟구쳐 흘러나갈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이 건강한지를 보여주는 척도라는 것입니다. 서울 생활에서 제일 커다란 문제 거리는 물입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만 팔당 수질이 지저분하다는데 그럴 수밖에 없어요. 팔당호 주변에 여관 술집 횟집이 새까맣게 불어있어요. 그리고 마구 더러운 물을 내보내는 것입니다. 밑에 더러운 찌꺼기가 쌓여서 배로 긁어낸 대요. 차라리 특별세라도 걷어서 저 멀리 소양강 까지 파이프를 묻어서 맑은 물을 가져오면 되잖아요. 그래야 해결이 되지요. 근본적으로 해결이 안돼요. 결국은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될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참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깊이 깨닫고 우리는 그 사랑을 전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어야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 수 있는 참된 근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물려받은 사람들이란 말이죠.
아무리 좋은 물을 받아오면 무엇을 합니까? 언젠가 한번 수도파이프를 잘라서 순대처럼 보여주는데 수도 파이프가 아니라 순대예요. 너무 더러워서 하도 오래 되어서 그 속에서 녹이 꽉차서 물이 녹사이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저쪽에서는 새물을 받아서 소독하였다고 하는데 오는 동안에 파이프에서 온갖 중금속 애지 세균까지 묻어서 수도꼭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쪽의 물이 좋다고 아무리 그래도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예요. 파이프를 통과하였는데 .......
마찬가지로 주님이 우리에게 모두 예수그리스도의 아가페의 사랑을 알게 하셨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어요. 그 사랑을 몰랐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속에서 계속 순수하게 솟구쳐 나오게 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많이 주신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 안에 여러 가지 고집 오만 잘났다고 자기 것만 챙기려는 이기심 도덕적으로 부패한 성품, 교만 이런 것들이 수도관의 오물처럼 꽉 막혀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솟아 나와도 주님은 파이프로 보내는데 여기서는 병아리 오줌처럼 신통치가 않아요. 그래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쭉 듣고 감동을 받고 나면 아! 하나님의 사랑은 위대하구나. 수원지에는 발견하였는데 와서는 다 없어지고 똑똑똑 떨어지는데 그것도 받아서 검사를 하니 오염 투성이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병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 시간에 가가와도요꼬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창녀촌 병든 곳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구제하면서 그들에게 사랑을 베푸니까“ 그렇게 해서 소용이 있습니까? 성과가 있습니까? 사람들이 물었을 때 선생님이 무어라 말했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 외에 이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랑을 베푸는 것 말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어주신 사랑이 그대로 쏟아져 나온다면 교회도 바뀌고 가정도 바뀌고 세상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부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넓고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네. 주를 보낸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네 갈보리의 구속의 사랑“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그 사랑에 감동을 받고 그 사랑의 자극을 받아서 이제는 잊어버린 첫사랑을 회복하여 어찌하든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다라고 하는 착하고 진실한 마음이 우리에게서 솟아나야 합니다. 아울러서 이것이 솟아날 뿐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샘솟듯 솟아나게 하는 이 사랑을 흘러 보내지 말고 우리의 변하지 않고 깨뜨려지지 않는 이러한 인격적인 결함들 도덕적인 결함들을 거룩하게 변화시켜야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가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오래 참는 사랑을 보여 주시고 우리 속에 넣어 주셨는데 우리는 참지 못하는 성질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솟구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내지 않는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 주셨는데 우리의 성질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솟구치다가 마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는데 인내하지 못하고 고통을 참지 않으려는 부족함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 속에서 밖으로 쏟아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흘러나오지 않는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병에 물이 담겼다고 하면서 아무리 쏟아도 나오지 않는데 그것이 정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거짓말이에요. 물이 있으면 나와야지요. 병에 꿀이 있으면 꿀이 나올 것이고 기름이 들어있으면 기름이 나와야지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고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사랑이 역사하고 있는데 그런 사랑을 베풀면 살고 싶은데 무례해요. 자기 위치와 분수를 몰라요. 마구 살아요. 그것이 거침돌이 되고 그것이 찌꺼기가 되어서 사랑의 샘이 솟지 못하게 됩니다. 더 많은 사랑을 달라고 하지만 더 많은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많은 자신의 잘못된 인격을 깨뜨리고 새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도가 이야기한 ”사랑은 오래 참고“서부터 시작해서 사랑의 모든 속성이 결국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입니까? 우리의 인격 속에 맏이는 열매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홀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우리와 함께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고 말하지 않아요. 무엇을 보는 거예요. 그 사람 머리 위에 있는 것을 본 것입니까? 그 사람 몸밖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나고 드러난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나고 드러난 그 사랑을 보고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안 것입니다.
목회도 하다가 맥이 빠질 때가 있잖아요. 왜 기껏 가르쳐 놓았더니 엉뚱한 짓 할 때 그런 때 맥이 빠지지 않아요. 그래도 소망이 어디서 오냐 하면 아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을 입고 그런 사랑이 몸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할 때 그 때 무엇을 깨닫나 하면 아! 그래 하나님은 이렇게 교회를 버리지 않으셨구나! 아 하나님이 제단을 참 사랑하시는구나 그 사랑이 교회 안에 있구나 하는 것을 느껴요. 그 속에서 솟아나고 고백되는 사랑을 보면서 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이 아가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듣는 것은 단지 하나님사랑은 이런 것이구나 와! 대단하다. 멋있는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놀라운 사랑을 보고 그 사랑을 남이 받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받은 사랑 우리 중에 특별한 사람만 받은 사랑이 아니라 우리 모두 받은 사랑 주님이 자매한테만 그래 참고 다른 자매한테는 오래 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자매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견디고 형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견디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이렇게 나타난 봐 되었으니 우리가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그가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 제물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모두 이 사랑을 받았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가치를 받는 것입니다. 자부심을 느끼기 보다는 주님이 이런 놀라운 사랑을 주셨는데 우리 속에 참지 못하는 마음, 우리 속에 오래 참지 못하는 인격, 우리 속에 무례히 행하는 인격, 견디지 못하는 우리의 조급함 이런 모든 인격적인 결함 때문에 주님이 물 붓듯이 부어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통해 밖으로 흘러 흘러 사람들을 고치고 치료하는 도구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고 아파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 앞에 막 살았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물 붓듯 부어주시는 그 사랑을 흘러 보내지 못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로부터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 사랑을 받았으니 주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서 한없이 생수 되어 솟아나게 하시고 이 생수가 강물이 되어서 우리의 가정을 적시고 우리의 교회를 덮고 온 세상을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가득하게 덮어서 모든 사람이 그 사랑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우리는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신앙생활의 아이러니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깨끗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불결하다고 생각하고 괴로워해요.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되고 더럽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려서 자기를 고치려고 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사랑이 없음을 인해서 고통하고 아파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결국 고통하는 세상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하나님의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가서 돌같이 굳었던 그 심령들을 쪼개어서 그 사랑에 녹아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이 세상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IMF시대가 자나면 희망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국민소득이 늘어나면 희망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직자들이 다시 직장을 찾고 많은 수입을 올리면 희망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희망도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희망입니다.
완전한 희망은 주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에 깊은 감화를 받고 그 사랑에 물에 떠내려가듯이 그렇게 충만한 감동을 입어서 그분에 사랑 앞에 눈물을 흘리고 자신들도 그 사랑을 이 세상에 흘려보내는 도구가 되겠다고 결심하도록 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상한 교회를 고치고 병든 이 땅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6개월간 에 걸쳐서 들었으니 이제는 여러분들이 60여 년 동안 이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여러분 자신의 모든 삶의 원동력이 아가페가 되기를 소망하며 그 아가페가 여러분들 속에서 가로막고 있는 여러분들의 잘못된 인격과 잘못된 신앙생활과 도덕적인 불결들을 끊임없이 주의 은혜로 죽이고 똑 죽여서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부어주신 사랑만큼 이 세상에 한없이 흘러보내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병든교회, 상한 이 땅에 훌륭한 치료의 도구들이 될 때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셨던 예수님께서는 비로소 여러분들을 보며 자신의 십자가의 고난에 만족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