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사랑하라
(2002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2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신자의 영성과 형제 사랑(요일4:20) 2002.7.7 주일오후 1
2. 주께 받은 사랑의 계명(요일4:21) 2002.7.14 주일오후 13
3. 신자 안에 주신 사랑의 본성(요일5:1) 2002.7.2 주일오후 23
4.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요일5:2) 2002.7.28 주일오후 32
1. 신자의 영성과 형제 사랑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요일4:20)
이번 주부터 몇 주간에 걸쳐서 형제 사랑의 도리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요한일서는 요한복음의 후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복음적인 교리와 복음적인 삶에 대해서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상황은 많은 이단들이 생겨날 때의 일입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둘러 싼 이단들이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 중에 사도 요한이 보낸 이 편지를 받는 크리스천들이 마주하고 있었던 이단들은 소위 ‘가연설주의자’라고 하는 이단들이었는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단들이 있는 상황에서 요한일서가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교회의 교훈을 어지럽히고 믿는 사람들을 꼬이려고 하는 이단들을 논박하고 그들을 대적함으로서 교회가 거짓된 가르침에 오염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서 교회가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믿음의 형제들끼리 사랑으로 공동체적인 결속을 더 강화하면서 살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이 4장에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다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다. 눈에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어느 정도만큼이나 형제사랑을 통해서 입증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영적 생활에 대해서 말할 때에, 좀더 직선적으로 말하자면 한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사람-혹은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 흔히 사람들의 마음에 떠올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떤 것일까요? 열렬한 기도, 눈만 감고 기도하면 훤히 아는 은사 같은 것을 생각하고, ‘나는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는데 영적인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즉각 응답해주신다. 그래서 내가 직접 기도하는 것은 돌아가는 것이고 그 사람을 통해서 기도 응답이 무엇인지 듣는 것은 직선으로 질러가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 이상하게 영적인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에는 어려운, 무슨 행동을 할 지 예측을 불허하는 두려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화: 처음 은혜 받고 기도원에 올라갔는데 평범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손가락으 로 가리키면서 “너, 두 여자 때문에 시험 들어”라고 말했다-그러나 그런 일은 없 었다)
그런 것도 상당히 영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또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합니다. 그런데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한 그리스도인이 너무 신령할 때 그 사람의 핵심적인 특징은 사랑입니다. 여러분들이 고린도전서 13장을 꼭 들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듣지 않으면 사랑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계속 갖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를 보는 시야를 흐립니다. 한 사람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성경은 그런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용이 없고”라고 하는데, 천사의 말을 하고 방언을 하고 지식이 뛰어나고 다 있다고 하더라도 네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참된 행복과 은혜가 없는데 나타나는 일반적인 현상들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오늘 내게 말씀하셨는데’ 식의 말을 못하게 합니다. 기도는 조금하고 권위는 많이 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공식적인 회의에서까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할 때만 영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부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신령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표징이 아닌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이 확고히 믿은 것은 신령한 신앙의 핵심부에는 아가페의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지금 요한이 논의하고 있는 사랑에 대한 논쟁들은 단순히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정말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있고,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진실하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그는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고, 그의 모든 신령한 삶과 사고의 핵심부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으로부터 14-5년 전에 이 문제에 대해서 깊이 깨달으면서 그때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이 진리를 몰랐기 때문에 혼란스러웠던 것들이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은 신령한 크리스천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방언을 하고 예언을 하고 귀신들을 내어쫓는 모든 것들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 한 사람의 신령함은 반드시 그 사람의 인격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서는 직접화법으로 ‘누구든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박해한다는 의미, 증오한다는 의미인데 단순한 감정의 문제를 뛰어넘어서 위해를 가할 의지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한 사람을 싫다고 하는 것은 외나무다리에서 서로 만났을 때 그가 떨어져도 도와주지 않는 감정이라고 한다면, 증오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떨어지지 않아도 확 밀어서 떨어뜨려 버리는 정도의 적극적인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외형적으로 놀라운 영적인 특징이나 신령한 지식이나 인정받을만한 다양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그 누구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그렇게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거짓말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편의롭게 생각하면서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가르쳐주시고 천국시민의 윤리를 가르쳐주셨을 때 이 정직과 진실은 그 사람의 신앙의 생명이 달린 중요한 덕목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지옥에 가는 사람이 거짓말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말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로서는 가볍고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되어있지만 이 당시 문맥으로 돌아가 보면 거짓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정도로 이 거짓말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한 것입니다.
정직해지지 않고는 사회가 합리적이 될 수 없습니다. 거짓에 대해서 좀더 깊이 생각하면서 손해를 많이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풍조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부정행위를 하고 거짓으로 서류를 작성하는 것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정직하도록 노력해야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크리스천들의 특징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그렇게 살아서 보편적으로 거짓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뜨끔뜨끔하도록 만들어주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거짓말쟁이요’하는 것은 직선적으로 말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와 상관없는 사람이고 저주받은 사람이고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누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일서에서도 보면 이단의 무리를 향해서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그 내용을 그대로 끌어와서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할 수 없는 이가 보이지 않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미 본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본적이 없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고 나옵니다.
어떻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사도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놓고 하나님 사랑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고 심지어는 그 사람을 거짓말쟁이라고 매도함으로서 한 공동체에 속한 지체임을 의심할 정도로 타격을 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사도가 사랑을 강조하다보니까 논리를 극단적으로 끌어들여서 그 사랑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짐짓-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지만- 보이는 바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런 의미가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인격적으로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분의 인격 안에서 체험하는 그것이 곧 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것을 들은 바요 본 바요 만진 바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1세대인 자기 자신들이 정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고 그분의 품에 안겼고 그분의 손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분과 육체적인 접촉이 있었고, 자신이 증언한다는 것이 1차적인 의미이지만, 또 하나의 의미는 지금은 그분이 살아 계시지 않지만, 그리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지만 그러나 2천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고 인격체로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당신을 만져보게 하시고 당신을 보게 하시고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시는 인격적인 생생한 교통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을 웅변적으로 증거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의 복음에 대한 체험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까? 그분이 떼어주는 떡을 먹은 적이 있고 그분이 따라주는 포도주를 마셔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산상수훈을 여러분들이 들었습니까? 예수님의 눈이 어떻게 생겼고 예수님의 귀와 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일이 있습니까? 유대인들의 고기록에 보면 예수님의 용모가 빼어나게 미남이라고는 나옵니다. 그러나 그런 그림을 그려놓은 것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본적도 없고 만진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데 신기하게 예수의 복음을 듣고 그 십자가의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우리 속에 주님이 살아 계신 것이 보고 듣고 만지고 그 품에 안긴 것 보다 생생하게 확신이 됩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갖는 복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사도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너희가 만일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경험하고 그분을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그 첫째는 그 사랑을 받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가치 없는 인간이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에게 얼마나 과분한가 하는 것에 대한 자각이 있고, 또 하나는 그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깊이 만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나면 바로 너희 주변에 있는 함께 하나님을 알게 된 형제의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렇게 ‘선한 일을 하면 내가 기억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어린아이 속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계시느냐면,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 최초 인류의 조상이 범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에 육체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라고 지칭되는 영혼을 불어넣으셔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존재가 되어서 산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함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결정적인 특질, 즉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실제로 많이 상실하고, 또 하나는 사람 속에서 그것을 볼 수 있는 능력까지도 상실한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다루고 돈이면 인간을 살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을 소중한 줄 모르고 짓밟는 풍조들은 인간의 눈이 얼마나 어두워졌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되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다시 회복되게 되고 회복된 그 사람들은 반드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 하나님이 그런 형상과 모양을 두셨고 하나님께서는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로 말미암아 상실하게 된 그 형상과 모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너무 사랑하시고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심으로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우리를 구속하신다는 사실을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 형제들에게서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더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터치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신데 그 분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고 그분이 명령하시는 것을 복종하고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을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마음과 삶의 반응들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진짜 신자라면 바로 그 일을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믿음의 형제가 된 지체들 속에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형제라도 모두 잘 할 수 없고 윤리적으로 모두 올바를 수 없고 모두 훌륭할 수 없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저 사람을 싫어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그 형상의 회복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피로 값 주고 사셨다는 이 사실은 어떤 식으로도 부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개의치 않고 짓밟으면서 그를 자유롭게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주님을 만나고 거듭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이 이 요한의 논리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서 단순히 ‘형제를 사랑해야겠구나’가 아니라 형제들을 함께 모아 놓았을 때에 그 형제들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보이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다음과 같은 의문이 떠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형제들을 무한대로 사랑하기만 한다는 뜻인가’ ‘나는 가끔 형제들이 미운데 구원받지 못한 사람인가. 그런 식의 논리를 성경이 지지하고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상태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다는 욕구와 가능성들은 남아있겠지만 정상적으로 사랑을 받을 수도 제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망가진 사람들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 받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관계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워하고 갈등을 일으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항상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쉽게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만 쉽게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는 못하고 쉽게 다른 사람을 증오하지만 다른 사람의 사랑을 쉽게는 받아들이지 못하는 병든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해야 된다는 사실은 알고 사랑하면서도 일시적으로 형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도전하고 악한 말로 그를 괴롭힐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신 속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형제를 잠시 미워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하려고 할 때 즉각적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지에 대해서 자각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다음에 그 사랑에 감화를 받고 나면 ‘나는 정말 쓸데없는 죄인이었는데 하나님이 사랑하셨구나. 그러니까 주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한 것처럼 형제들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나의 본분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에 대한 생각이 바뀐다는 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에 사랑이 완성되었지만,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패한 성품, 쉽게 원수 맺고 노여워하기를 잘하고 분노하기를 잘하는, 쉽게 미워하는 기질들이 살아남아서 여전히 방해가 되고 있다는 면에서는 아직까지도 사랑이 완성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성화생활이 요구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쉽게 분노하는 자기 자신이 깨트려지고 과도히 형제를 미워하고 쉽게 원수 맺는 자신의 부패한 기질들에 대해서 깊이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거룩의 은혜를 회복해 가는 가운데 점점 더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요한이 결코 완전주의적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요한의 논리에 따르면 한 사람이 정말 진실한 크리스천이라면 함께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형제를 향해서 잠시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이고 결국 마지막 회귀하게 되는 지배적인 감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필연적인 숙명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회고할라치면 즉각적으로 자신의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분명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해 놓으신 다음에 함께 살아가면서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와 노여움을 풀지 않고 형제에 대해서 맺힌 감정을 풀지 않고 움켜쥐고 살아가는 것들은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커다란 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공동체적인 특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초대교회 때 사도들이 집사 일곱 명을 세웁니다. 그 일곱 명의 집사를 세우게 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아마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서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제를 받는 데 있어서 헬라파 과부들이 히브리파 과부들에 비해서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아마도 ‘우리가 헬라파라고 괄시하는 거야?’하는 얘기가 나왔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 한 피로 맺어진 형제다. 종이나 자유자나 없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공동체다’하는 신앙적인 커다란 일치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도들이 전부 유대인이니까 유대인들이 더 많이 받아가는구나. 그래서 헬라파 과부들을 괄시하는구나’하면서 신자냐 불신자냐 하는 구분보다도 오히려 헬라파냐 히브리파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 공동체 속에 흐르고 있던 뜨거운 사랑과 이해, 교제, 영적인 분위기들이 순식간에 냉각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도가 잠시 역사하기를 멈추는 위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보십시오. 무슨 심각한 죄도 하나님의 교회의 위대한 복음의 역사를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어느 한 순간에 일시에 냉각되면서 차갑게 돌아서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강력한 부흥과 복음의 역사가 차갑게 식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고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큰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아마 그렇게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멈추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투덜거렸을 뿐인데 복음의 역사가 멈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결국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새로운 신약종교의 영적인 특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두 가지로 요약되는데 우선 첫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며 정말 하나님의 진실한 자녀로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만들어 주셨다는 것, 원래는 하나님 앞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주님이 나를 택해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예화:형벌을 받아서 사형 당하기 직전에 있는 죄수를 왕의 특사로 풀어 준 비유-왕 에게 은혜를 갚고자 하는 그 죄수에게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요구 하지 않았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의 사랑이 왜 크리스천의 영성의 핵심부에 있느냐면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자신이 절대적으로 가치가 없는 존재라고 하는 사실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없이는 한 사람의 신자의 마음으로부터 그 사랑이 흘러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이 십자가 앞에서 정말 쓸모 없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러한 처절한 자기 인식이 없으면 결코 거기로부터 십자가에 대한 복종, 십자가에 대한 깊은 참회와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을 깊이 깨닫는 낮아짐 없이는 아가페의 사랑이 흘러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고도의 영적생활을 통해서 획득되는 것인지 아십니까?
여러분들이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라고 하는 것을 얼마나 드물게 하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단순히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유감을 표명하고 후회하는 정도의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정말 쓸모 없는 죄인이고 자신이 정말 무가치한 죄인이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구속의 사랑이 부당하다고 말할 정도로 자기가 정말 하잘 것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뼈저린 자각을 동반한 기도가 여러분의 생애 가운데 몇 번이나 나옵니까? 그런 자각 속으로 수시로 돌아가서 자신이 하나님을 많이 섬기고 유용한 사람이면서도 주님의 그 십자가의 사랑 앞에서는 내가 섬기고 행하는 이것이 아무 것도 아닐 정도로 하나님께로부터 진 사랑이 빚이 크다 하면서 십자가에 자기의 섬김이나 자랑들을 못박을 수 있는 자기 성찰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고도의 영적인 생활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한 사람이 영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영적 성숙도는 마지막에 인격적인 사랑의 성숙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늘 자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용납하기 어려운 지체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가슴속에 항상 그 지체가 우리에게 행한 일을 기억합니다. 그러면 그도 죽고 자신도 죽습니다. 그것을 응시하기 시작하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것이 자기 양심에도 찔릴 정도로 명백하게 자기가 잘못한 것인데 형제가 지적해서 미워하게 되면 반성이라는 것을 해볼 수도 있는데, 자기는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는데 형제가 자기를 비방할 때 그리고 미워할 때 그리고 그 미워하는 것이 이유 없다고 생각될 때, 더더욱 그 미워하는 것이 정당한 이유가 없는, 내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미워한다고 생각될 때 미워하는 그 지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 사고하면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절대 불가능합니다.
예수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미워하면 복수의 감정이 생깁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잊어버리는 경우는 있지만 어느 한 순간 결단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도록 돌이킬 수 있는 힘이 불신자들에게는 없습니다. 복수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기 전에 그런 적 없습니까? 정말 미워했는데 어느 한 순간 뜨거운 사랑으로 턴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크리스천에게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확인하는 자기 성찰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깊이 깨닫습니다. ‘예수님이 나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용서해주셨구나’ 그것을 통해서 형제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자신을 보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사랑은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화의 문제이기 때문에 하나님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랑에 대해서 많이 묵상하고 생각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사랑이 없을까,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었으면, 예수님의 그 사랑에 비하면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데’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에 대해서 계속 성찰하면서 고뇌하면 여러분들이 사랑에서 성숙해져가고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아주 변덕이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사랑하다가 어느 날 은혜가 떨어졌다고 차갑고 야멸차게 대합니다. 그리고는 ‘은혜 떨어지면 이렇게 밖에 살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신앙의 어떤 한 덕목이 있을 때 그것을 아직 흉내내면서 실천하고 있을 때에는 안정적이지 않지만 그것이 인격화되었을 때에는 안정적입니다. 그렇다고 흉내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흉내내고 애를 쓰는 것은 인격화되는 비결입니다.
(예화:처음 담배 피울 때는 무척 고통스럽지만 몇 개월 지나면 몸이 흡연에 맞게 적응 되며 오히려 몸이 담배를 부르게 된다)
담배를 피우는 연습을 하는 동안에는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깊이 몸에 배이고 나면 자연스러워지듯이 신앙의 어떤 덕목을 처음 실천할 때는 고통도 많고 어려움이 많습니다. 기도생활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기도 자체가 목표가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면 기도를 안 하면 너무 곤고해집니다. 그리고 하루라도 기도를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집니다. 기도가 인격화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의 영향을 받으면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과의 끊임없는 씨름과 싸움이 우리 안에서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른 사람이 ‘너는 사랑 없어. 그것도 사랑이냐’라고 할 때 찔리면서 ‘맞아 나는 사랑 없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 예수 믿는 사람이 그렇게 사랑이 없냐’할 때 금방 속에서 솟구치는 것이 ‘자기는’합니다. 그러니까 제일 어리석은 것이 사람들이 모여서 ‘우리는 너무 사랑 없다. 너희는 왜 그렇게 사랑이 없냐’하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자기 죽임과 자기 깨어짐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깊이 깨트려져서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고 나면 그 영향력이 흘러들어 갑니다. 그러면서 메아리처럼 그런 사랑들이 번져나갑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과 부단히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편견을 부수면서 끊임없이 살아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화: 공부 못하는 아이들은 모두 불성실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한순간 그 편견이 깨트려지는 일이 있고 나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 중에서도 사랑 받을 만한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말씀 듣고 은혜 받고 변화 받고 충성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 식의 사랑은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사랑입니다. 교회에 유익이 되고 소용이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는 종류의 사랑은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단체들은 ‘나는 이 단체에 꼭 필요하다’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지만 교회는 ‘나는 정말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것이 결국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다양한 것들이 우리 안에도 있고 우리 밖에도 있습니다. 힘을 많이 써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했는데 그것을 배신했을 때, 이것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어 주는 강력한 요인입니다. 더군다나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그것을 배신했을 때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예화:전에 있던 교회의 젊은이들이 공동체를 만들어서 오갈 데 없는 한 형제를 회 비도 없이 받아주고 데리고 살았는데, 돈을 다 훔쳐서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를 받아 주는 문제로 공동체가 반으로 나눠져서 다투던 이야기)
우리로 하여금 사랑할 수 없게 하는 요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타락해서 죄에 물들고 난 다음부터는 두 가지 특징을 갖게되는데 사랑하도록 도전하시는 하나님의 자극에는 아주 둔감하게 반응하고-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야지 조금 사랑하고-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에는 아주 강력하게 자극을 받습니다 그리고 주저앉아버려서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성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화가 나면 성경이고 사랑이고 율법이고 교훈이고 성화고 없이 다 날아가 버리고 성질만 충만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무수한 요인들 중에 지배적인 요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깊은 사랑을 갖춘 성품이 되어서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는 예수 사랑의 향기를 발하기까지 그는 정말 가시에 찔리면서 수 없는 자기 성찰의 길을 걸어옴으로서 그런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사랑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주님께로부터 이 큰사랑을 받고 내가 왜 사랑하며 살지 못할까’에 대해서 깊이 고뇌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의 삶을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받는 삶 못지 않게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항상 순교적인 각오를 양면적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선교적인 상황 속에서 자기를 던져서 순교를 불사하는 희생, 또 한편으로는 그런 순교적인 각오로 자기를 쳐서 십자가에 못 박고 복종시키면서라도 주님이 자기를 구속하실 때에 자기 안에 회복시키고 싶으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거룩과 순결 속에서 완전히 회복하고자 하는-자기 희생을 통해서라도 그 형상을 회복하고 싶어하는-것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양자가 성화의 두 기둥입니다. 하나는 주님의 성품을 닮는 존재가 되는 것과 또 하나는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성화의 두 기둥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살아가는 삶, 그것이 하나님을 진실 되게 사랑하는 사람임을 입증해주는 삶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성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버리고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옛날에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은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다시 상종 안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심지어는 그렇게 헤어진 사람들 가운데 부모나 자식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형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인연이 하나님의 나라에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불화하고 미워하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토마스무어’라고 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스데반이 먼저 천국에 갔고 바울이 올라갔을 때 서로 처음 인사를 어떻게 했을 지 궁금하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그렇게 지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에 무엇인가를 꽂고 살아가다가 천국에서 어떻게 만나겠습니까?
(예화:한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어떤 이에 대해 말하면서 그 사람도 천국에 가느냐고 물은 후 그 사람이 거기 있으면 거기가 어떻게 천국이 되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굉장히 가슴아픈 것은 지체들을 미워하고 마음에 원수 맺는 것을 아주 사소한 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음에 안 든다며 다른 교회로 가버립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상처받았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가시투성이인데 무슨 상처입니까? 그런 것은 하나님이 안 기뻐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사랑을 위해서 희생해봤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져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는 충실하지 않아도 우리 자신의 감정을 신처럼 생각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주님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데 사랑하려고 애를 써본 적 있습니까? 주님 때문에 용서할 수 없는데 용서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 사람과 마음에 맺히면서 살아가는 것이 분명히 내 감정의 자연적인 흐름인데, 하나님의 말씀에 그것이 옳지 않기 때문에 먼저 가서 나를 용납해달라고 무릎꿇고 빌어본 적 있습니까? 교회를 위해서 눈물 뿌리고 땀흘리면서 봉사해본 적은 있어도 그런 적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교회를 위해서 헌금하고 땀 흘리고 애쓰고, 전도하기 위해서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아파트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저녁때면 피가 다리로 몰려서 이불을 괴고 다리를 고추 세우고 피로를 푸는 그 헌신과 앞에서 이야기한 끊임없는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해서 교회의 일치를 이루어 가는 이 화해와 사랑을 동일하게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런 사랑을 완성해 가는 것에 있어서 약하냐하면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희생이 따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인격자도 못되고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목회를 해오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형제 사랑과 미움은 산에 번진 불길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형제를 헐뜯거나 형제에 대해서 불만을 이야기할 때 고개를 계속 끄덕이면서 동의하고 불을 붙이기 시작하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갑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할 때 자신도 공감이 가지만 그 공감을 표현하지 말고-그 공감을 표했을 때 이루어질 결과를 깨달으면서- 그것이 아니라고 마음을 접고 객관적인 편에 서서 안 그런 면도 있다고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점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몇 번만 확신을 가지고 설득하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형제를 헐뜯고 비난하던 사람의 감정의 불이 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수긍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교회가 화합과 사랑이 찢어질 때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 깊이 자기를 성찰하는 진실함 들은 사라지고 경박한 말들이 수없이 돌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와 일치가 깨트려지는 시험과 미움의 뒤에는 반드시 말의 역사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을 꺼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성찰하며 끊임없이 사랑할 수 없게 하는 것과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느껴질 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지는 한 방법이다’ 당신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이렇게 어려운 사랑을 이루신 예수님의 그 아픔을 생각하면서 일생 빚진 자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아골골짝 빈들에도 소돔과 같은 거리에도 가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 속에서 이것을 실현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오해가 있는 곳에 진실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체를 분노가 있는 곳에 평화를 가져다주면서 살아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자신이 점차 진실해져 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들이 했던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상처받았다고 교회를 떠나오면서 그 교회에서 받은 것들만 생각하지 여러분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그런 사랑이 없는 교회를 얼마나 끌어안고 고민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화목의 재물이 되고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지고 오해의 한복판에서 미움의 한복판에서 서보려고 애를 썼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 사랑 받기를 원하고 사랑과 화해와 일치 속에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사람들 모두 원하지만 자신들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것은 성령 받은 신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더 많이 받은 사람들은 더 많이 해야합니다. 그래서 사랑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십자가에 대한 은혜, 그리고 그분의 고난에 대한 감격도 여러분 속에 새로워질 것입니다.
2.주께 받은 사랑의 계명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4:21)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못 박으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을 사도가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21절의 내용은 이런 내용입니다.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 부분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세 번째는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입니다.
우선 첫 번째로 형제 사랑의 계명의 권위에 대해서 사도가 말하고 있고, 두 번째는 신자의 신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세 번째는 그 신자의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이 계명의 권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자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계명이 갖는 권위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이 요한 사도는 말하기를 이 계명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주께로부터 소유한 것이니’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가페의 사랑으로 서로를 온전히 사랑하며 주님께로 받은 그 사랑같이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런 일들은 사람들 속에서는 스스로 일구어 갈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들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 속에는 사랑의 형상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신 것을 본받아서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모두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이 형제 사랑의 도리를 실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로부터 이 계명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이 계명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단지 그것을 지켜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의무만을 부과하는 율법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계명을 주실 때에는 당신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른 형제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품으면서 살수 있는 그 아가페의 사랑의 능력도 하나님이 함께 주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이 지상에 계셨을 때에 가르치신 중심 되는 계명이 바로 이 사랑의 계명이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에는 우리들을 그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도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서 인간의 구속을 이루심으로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시 새 생명을 주시는데 그 생명은 바로 이전에 하나님을 전혀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의 깊이를 터득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많은 사랑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여전히 원수 맺어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는 놀라운 변화를 주시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놀랍고 큰 은혜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만들어주시려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실제의 삶에 있어서 그렇게 실천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가장 큰 계명이 바로 이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율법 중 가장 큰 계명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해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예수님의 이 사랑의 계명은 많은 계명들 중 한가지가 아니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모든 계명 속에 스며들어야 할 계명 지킴의 원리라고 하는 것을 이런 식으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계명의 권위는 바로 주께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위치는 인간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오신 메시아인 동시에 또한 구약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을 하셔서 그 구약 속에 있는 진정한 계명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어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복음의 정신을 따라 믿고 살면 율법을 모두 성취하게 하는 일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었고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자의 위치에 계십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계명은 율법과 단절된 계명이 아니라 오랫동안의 불신앙과 무지로 인해서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일깨워서 그 율법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그 속에서 우리가 참 생명을 얻도록 만들어주셨는데 결국 그것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은 율법에 뿌리를 박고 있는 것이지 율법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율법을 완성하려고 왔다”고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가장 중심적인 계명이 바로 이 사랑의 계명이었고 예수님 자신의 생애가 바로 그런 희생과 복종의 생애였는데 그 희생과 복종도 결국은 사랑이라는 의를 이루기 위한 복종이었고 희생의 생애였다는 점에서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가장 커다란 계명이 사랑의 계명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욱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은 살아생전에 예수님과 가까이에서 교제하며 함께 산 사람이었고, 그래서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가장 잘 알 수 있었고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든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든 혹은 사람들을 책망하시든 사람들을 위로하시든 복음을 들려주시든 무엇을 하시든 그 동기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진실한 사랑이었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요한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그 사랑이 없이 예수님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무의미하고 그 사랑이 없이 어떤 계명의 실천을 이야기하고 그 사랑이 없이 진리가 어떤 것이라고 운운하는 자체가 예수님이 접근하신 진리와 사랑의 방식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아주 단호하게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한 것이라면 그에게는 반드시 그러한 하나님을 믿는 표가 있으니 그것은 함께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바 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못 박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은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최대의 계명이 바로 이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형제를 사랑해야한다는 이 계명은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제2, 제3의 종속적인 인간의 많은 작은 규칙과는 다른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주신 최대의 계명이고 이 율법과 선지자와 모든 하나님의 말씀조차도 이 사랑에 뿌리를 박고 있을 때에 진정으로 그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주일을 지키지 못한 죄에 대해서는 회개할 때가 있고 돈을 훔치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다른 도덕적인 범죄를 행한 후에는 하나님 앞에 많이 회개하여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심한 경우에는 하나님이 용서해주셨는데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해서 -그 용서를 확신할 수 없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데, 사실 우리가 계명 중에 가장 커다란 계명인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형제를 미워한 죄에 대해서 얼마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회개 했는 지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형제를 미워한 것은 작게 범죄한 것이지만 보이는 곳에서 형제를 멸시하고 공공연히 형제를 비난한 것은 혼자서 마음으로 미워한 것보다는 훨씬 더 커다란 죄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형제의 명예를 심하게 훼손시키고 더 나아가서 그에게 직접적으로 보복을 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돌이키기 힘든 죄 가운데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죄가 살인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 죄가 간음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그 죄가 이 세상의 형법대로 벌받을 범죄 요건을 구성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이 죄인 줄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지하게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들이 돌려 받을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죽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사람들을 쉽게 미워하는 사람들은 항상 신앙생활의 기복이 아주 심합니다. 충만한 것같다가도 어느 순간 미움의 덫에 걸리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금방 성령이 슬퍼하셔서 받았던 많은 은혜들을 쏟아버리고 다시 메마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깊이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인간성은 황폐하게 되고, 사람을 미워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깊은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예화:한 한의사가 어느 부인의 맥을 짚은 후 ‘왜 그렇게 마음에 한을 품고 사느냐. 다 풀어버려야 자네도 낫는다’고 했다)
(예화:어느 의사가 텔레비젼 강의에서 ‘쉽게 맺히고 맺힌 것을 풀고 살지 못하는 사람 들에게 암이 많이 발견된다’고 했다.)
(예화:‘한 푼이라도 더 벌어서 먹고살아야지’하며 사느라고 고민하는 스트레스는 건강 을 깎아먹고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을까’고민하는 것은 생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는 책의 내용-모든 스트레스가 인간을 질병으로 몰고 가는 것 이 아니라 그 스트레스의 종류가 어떤 것이냐가 중요하다-그래서 늦게 오는 남 편을 미워하며 기다리는 스트레스는 병이 되지만 어떻게 하면 남편이 기뻐하는 집으로 꾸밀까 고민하는 스트레스는 생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생활 하면서 신앙생활과 관련해서는 스트레스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스트레스가 아니라 좀 긴장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좀더 좋은 신자가 되기 위해서 고민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까’고민할 때 세상사람들이 하는 말로 영적인 스트레스가 옵니다. 어떤 때는 그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하게 오는지 기도할 때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기도 합니다. 그런데 늘 자기 깨어짐의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 스트레스가 되어서 암에 걸려 죽었다는 것은 못 봤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의 원리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신령한 목표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수고와 노고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미래에서 뿐 아니라 현세에서도 어느 정도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인데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우리의 신앙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씨름하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우리의 부패한 옛 자아는 점점 물러가고 진실한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서 새로워지는 복된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자의 신분입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어떤 사람입니까? 말로 하면 많은 정의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든지 하나님의 자녀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든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한 교회에 소속되어서 목양을 받으며 진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정통적인 교리를 신봉하는 장로교 신자가 참신자라든지 열렬한 불을 가진 선조를 가진 감리교 교도가 참신자라든지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그런 것을 모두 날려버립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현재형 분사로 나옵니다. 옛날에 사랑했다가 지금은 그만 둔 사람도 아니고 지금은 사랑하지 않지만 미래에 하나님을 사랑할 계획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을 ‘아가파오즈’의 분사형으로 ‘아가폰’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형제를 사랑한다는 말에서도 역시 ‘아가파오’를 썼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심각한 의문이 듭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의 신분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를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내 자녀라고 인 치셔서 불러주신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할 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영원한 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는 똑바로 믿는 사람도 있고 덜 똑바로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이 성화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좀 덜 성화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주 과격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고 혹은 아주 신중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재능을 갖고 주님의 자녀가 됐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런 재능을 가지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능하고 어떤 사람은 성도들을 섬기고 돌보는 일에 능한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깨닫고 기도하는 일에 능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받은 은사가 무엇이고 그들의 성품이 어떠하고 그들의 성화의 정도가 어떠하든 지간에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있는 공통적인 표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하여야 할 가장 커다란 악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도의 본분은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생명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 사랑을 받았으니 주님처럼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성도의 제일 큰 소명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일에 거침이 되는 모든 것들을 아낌없이 버릴 수 있는 삶, 그것이 신자가 추구하며 걸어가야 될 삶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성화의 삶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 원동력이 어디에서 옵니까? 평소에 ‘정말 내가 거룩해져야겠다. 오늘도 변화되지 않는 내 모습 때문에 나는 정말 고통스럽다. 이 모습으로 살아서 주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느니 차라리 일찍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다’하는 정도로 거룩해져야겠다는 열망이 마음이 가득 찰 때가 언제입니까?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생활 안 하면 그만이지 어떻게 하겠습니까? 교회 지하실에 유치장을 만들어놓고 감금하겠습니까? 자기 하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내 육신의 일은 좀 망가져도 내가 맡고 있는 하나님의 일은 잘 감당해서 꼭 이루어져야겠다’하며 노심초사하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선한 일을 마지막까지 완수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애쓰는 마음이 언제 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신의 가슴속에 충만하게 될 때 주님의 일도 사랑스럽고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말하는 신자의 이름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연초에 마음 지킴이 얼마나 어려운지 닷새동안 설교를 들었는데, 그렇게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고 피나는 투쟁을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마음을 지킴으로서 주님이 우리 안에 두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CBS잡지에 한 여신자가 간증을 썼는데,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다가 어느 순간 “네가 왜 그렇게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느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면서 어린아이처럼 울게 되었는데, 정말 일생을 살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 마치 자신의 직업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아온 것이라고 느끼며 아팠는데 그 아픔이 바로 자기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아파하셨던 주님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인생의 노년에 들어간 사람들이 그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는 때가 언제입니까? 한 성도가 건조하기 짝이 없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생활을 하다가 어느 순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어린아이처럼 흐느껴 울며 자기의 죄를 회개할 때 그의 마음속에서 무엇이 회복되고 있는 중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회복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과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긴 세월동안 예수 믿고 살아오면서 무슨 경험을 안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신분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주님이 물으셨네
이것은 죽을 때까지 들려오는 주님의 현재적인 질문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물으시는 그 질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여전히 부족하고 주님이 은혜를 많이 주셨지만 그만큼 거룩해지지 못했고 내 마음에 악함과 더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하는 것이 바로 ‘주님 없이 살 수 없습니다’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인 신자의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사랑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가장 우선적입니다. 물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형제를 책망해야 하는 적도 있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면서도 엄격하게 가르쳐야 하는 때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형제를 향한 사랑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를 원망하고 교회에서 분쟁하기를 잘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일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고갈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면 형제의 잘못을 봐도 ‘사람이니까, 부족하니까’하는 관용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고갈되어버리고 나면 다른 사람의 결점이 자기의 가슴에 칼같이 와서 꽂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를 아프게 한 사람들의 마음이나 행동이 비수같이 와서 꽂혀서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 아픔 때문에 자기 자신도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역사가 펼쳐질 때부터 이미 입증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인류 최초의 살인이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입니다.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인간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온 다음에는 하나님 앞에 특별한 은혜를 받으면서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도 죄 된 성품 속에 내재하는 사람을 미워하는 본성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고자 하는 본성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기는 방법은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죤 화이트’는 ‘인간은 맹수를 마음에 하나씩 기르고 있는 사람이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맹수도 맹수 나름입니다.
(예화: 한 선교사부부가 서부아프리카 사파리에서 사자와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 던 중 후레쉬가 터지자 단번에 갈갈이 찢어버린 이야기)
서커스단이나 동물원에 있는 사자는 안전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동안에는 안전합니다. 그러나 풀어놓으면 큰일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그런 짐승과 같은 본성이 있습니다. 그것을 가두어두는 창살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미워하는 본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사자처럼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가두었습니다. 한순간 미움이 솟아나다가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예화: 미국사람들은 서로 싸운 후 주기도문 하자고 하면 아무도 안 하는데 한국사람 들은 싸운 후에도 주기도문을 잘한다)
‘내가 바로 저런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용서해주셨지'하면서 마음이 녹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우리 안에 짐승과 같은 본성을 가두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의 계명과 연결되는 것이 사람을 미워하고는 열렬히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품은 미움은 기도의 불길을 끄는 얼음물과 같습니다. 기도의 불길이 올라 왔다가도 얼음물을 뿌리면 단숨에 그 불이 꺼져버리듯이 그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를 미워하면서도 계속 은혜생활 하는 사람은 마치 불쏘시개로 계속 장작을 때면서 한 손으로는 얼음물을 그 장작불에 계속 붓는 사람과 같습니다.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억해야합니다. 사람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 의무는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입니다. NIV성경에도 보면 ‘must love’라고 나옵니다.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저절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행복해질 수 없는 사람으로 바뀌어버렸습니다.
담배끊었다가 다시 피우는 사람들이 ‘이 맛이 아니야’하고, 어릴 때 좋아하던 음식을 다시 먹어보면서 ‘이 맛이 아닌데’하는 것은 미각세포가 노화와 생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말 바뀌었기 때문에 똑같은 맛이 안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쾌락이 있으면 행복하고 즐거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난 다음에는 다시 옛날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어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갔는데 행복하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잠시 못올 데 왔다가 다시 가야할 곳으로 돌아간 사람입니다. 유사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의 신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는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오늘은 하나님을 사랑 안 합니다. 작년에는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는데 올해는 냉담합니다. 작년에는 냉담했었는데 올해 말씀사경회를 통해서 은혜 받으면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은 언제 식을 지도 모르고 식어진 사랑은 언제 불붙을 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많은 말씀의 지식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정사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삶을 살피면서 주님이 주신 사랑과 이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의 삶에는 하루도 휴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휴전이 없고 휴식이 없는 것입니다. 분투하는 삶, 그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믿게 되면 저절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지만 사랑하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사랑할 수 없게 하는 것과 더불어 부지런히 싸우면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이를 악물고 용서하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데 주님이 용서하라고 하시니까 용서하면서 그 속에서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사람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이었는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성경이 ‘할찌니라’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성도의 신분인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신자의 본분인데,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마땅히 자기의 형제들을 사랑해야한다’하며 또 새롭게 하나님 앞에 애쓰고 노력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너무너무 살기가 어렵습니다. 내 주위의 사람들이 사랑 받을 짓만 하면서 살면 정말 사랑해줄텐데 말입니다.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고난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예화: 집에 있는 조그만 책상을 보면 할머님 생각이 난다- 할머님께서 길가에 심으 신 호박을 따다 파셔서 복 주머니 두 개에 100원 짜리를 가득 넣어오신 그 돈으 로 산 것이다-그때는 그렇게 고생하시는 것이 싫었지만 그것이 할머님에게는 기 쁨이었다)
(예화: 개울에서 싱싱하게 노는 송사리를 잡아다가 예쁜 어항에 넣어두면 죽는다-효도 는 각도를 부모님께 맞춰드리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대상이 없는 사람입니다. 황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희생도 고난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적합한 사람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기에 딱 맞는 사람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입으로 주님을 모욕하고 온 삶으로 하나님을 훼방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예수 예수 예수 내 마음을 녹이셨네
그래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최초로 많이 받았을 때 기뻤습니까, 아팠습니까? 아픕니다. 자기가 너무나 주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함께 깨달으니까 주님의 사랑을 받을 때 아픈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향해서 원수 맺은 것밖에는 없는데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을 모욕한 것밖에는 없는데 주님이 왜 나를 사랑하시나’하며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아픈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가 내신 자를 사랑할찌니라’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대한 묵상 없이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한 묵상이 있으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때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계기가 됩니다.
용서해주기 힘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때 견디기 힘든 고통이 따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짧은 세상에 뭘 그렇게 아웅다웅 사느냐’며 간단하게 말하지만 자기가 실제로 당해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용서해 주려고 할 때 그리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해주려고 할 때 너무 아픕니다. 그 때에 비로소 ‘이것이 예수님의 고난이었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밑에 서서 ‘십자가에서 내려 오라. 왜 다른 사람은 구원하고 너는 구원하지 못하느냐’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 예수님의 마음에 저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셨던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정신으로 우리를 다가가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살아가면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혹은 직장에서 우리는 원수 맺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라 화평케 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 매여있으면 풀러 다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지키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해줄 때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해주시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구나’를 깨달으면서 주님 보고 사랑하고 주님 보고 용서하고,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그 사랑의 능력을 구하고 용서의 은혜를 구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합니다 .
저는 은혜 받은 이후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한답시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저의 한번의 용서가 한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쉽게 원수 맺는 성격은 아니지만 저도 한번 사람을 미워하면 만만한 성격이 아닙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면서 옛 성품을 누르면서 살아가면서 만 희망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상대방이 너무 많이 잘못했고 무엇으로 보든지 내가 적극적으로 미워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는 것을 가지고 나를 비난할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느 한 순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서 직접 찾아가서 맺힌 것을 풀고 용서해주고 의심 없이 나와 함께 사랑하며 살아갈 사람이라고 받아줄 때 그 사람의 인생이 변화되는 것들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자의 본분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신자의 의무는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3. 신자 안에 주신 사랑의 본성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5:1)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한 사도는 이제 그 논리를 좀더 질서 정연하게 구체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몇 토막으로 나누어서 본다면 사도가 주장하는 교리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첫째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자들이다. 하나님이 거듭나게 해주신 자들이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세 번째는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낳아주신 그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렇게 세 가지 교리를 가지고 1절을 엮어 내려가고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에서 지적하고 있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하는 대목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낳기까지 그 아이는 이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분명히 둘이 결혼했는데 요즘 셋이서 교회 다닙니다. 부부의 손도 그대로이고 발도 그대로인데 한참 지나고 나더니 셋이 된 것입니다. 또 지나면 넷이 됩니다. 존재하지 않았었는데 태어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소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에게 우리의 존재를 빚지고 있는 것입니다. 부모가 결혼을 통해서 아이를 낳았지만 그러나 그 부모도 하나님이 한 사람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도구였을 뿐 우리는 우리의 존재 그 자체를 하나님께 빚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로서 태어난 자인데 여기에서 사도가 ‘그에서 난 자니’에서 태어난 것은 육적인 피조, 혹은 육적인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탄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적인 탄생은 없는 데서 생겨나지만 영적인 탄생은 죽은 데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 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죽었고 그 죽었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된 것이 마치 아무 것도 없는 무존재의 상태에서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모르고 불신자이던 시절의 그 사람과 하나님을 믿고 새 생명을 얻은 다음에 살아가는 삶은 완전히 대조되는 삶입니다. 예전에는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았고, 예전에는 하나님에게 진노의 자녀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받는 자녀가 되었고, 전에는 마귀의 자식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기 스스로 살아가고 존재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자기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지 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이 극명한 대조와 차이는 부인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신자가 누군가 할 때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다시 태어난 사람,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들,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자녀가 된 사람들, 마귀의 지배 아래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사람들, 예전에는 죽은 영혼 밖에는 아무 것도 없고 이 세상의 신들이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도록 무지와 어둠 속에 가두어둔 인생을 산 사람들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으면서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로 바뀌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분입니다.
그런 신분의 사람으로서 형제를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보복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불행해지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들은 모두 거듭난 사람들이 가져야 할 마음과 삶의 양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 모두 주님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지 못한 채 죽음 가운데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옛 사람이 지향하던 삶의 흔적들입니다.
(예화:강원도에 산불이 났을 때 어느 소주 회사에서 소주 한 병 팔리는 데 5원씩 내서 복구하겠다고 했는데 20억을 내놓았다고 하니 얼마나 소주를 많이 먹었겠는가)
예전에 술을 마시며 살 때 술을 매개로 해서 만나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술을 먹은 적이 몇 번쯤 되는 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은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와 분노가 원인이 되어서 술이 그런 것들을 풀어줄 수 있는 것처럼 술잔 붙잡고 산 세월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술을 먹다먹다 지치면 토하고 괴로운 밤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술 선전 중 ‘이 술을 먹으면 순하게 취하고 부드럽게 깹니다’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술 먹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는데 신기하게도 이틀쯤 지나면 몸이 술을 먹을 준비를 끝내게 됩니다. 다시 그 술을 받아들이기에 적합하게 바뀝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은혜 안에 잠겨 살 때에는 잠깐 은혜를 잃어버려도 결국은 세상에 만족을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에서 너무 오랫동안 멀어진 사람들은 은혜를 잠깐 받고 눈물을 흘려도 다시 죄 가운데로 들어갈 준비를 끝냅니다.
그러니까 술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리는 것입니다. 먹다먹다 외국에서 수입해서 먹습니다. 프랑스산 꼬냑을 가장 많이 사가는 나라가 일본과 우리 나라라고 합니다. 그렇게 먹고 취하는 것이 오늘날의 삶입니다. 아마 술은 인류의 종말이 오는 날까지 박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없이 살아가던 옛날의 우리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미움과 갈등들을 해소하던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이 실질적으로 어느 정도는 해소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께 구박을 받는 며느리들이 즐겨하던 일이 다듬이질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속에 있는 미움과 갈등들을 풀어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향한 미움을 간직하고 사는 것은 질병 덩어리를 가슴에 품어 앉고 사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자기를 황폐화시키고 자기의 인격을 부서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생을 살아오면서 미움, 증오, 의심, 배반 속에서 시달려온 사람들이 다행이 하나님을 만나서 그 미움, 의심, 배반, 증오, 이런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의 영향을 많이 받으면서 새사람이 되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하면 그 사람의 삶은 계속 어두움의 패역된 성격과 삶을 벗어 던질 수가 없습니다. 새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새 삶은 새사람이 사는 것이지 헌 사람은 새 삶을 살수가 없습니다. 흉내낼 수 있어도 그것은 흉내일 뿐이지 헌 사람은 헌 삶을 사는 것이고 새 삶은 새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옛날에 우리들이 분노를 삭히며 살던 방식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성경이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규명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깊이 미워하면서 산 사람의 공통점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와 같이 쓸모 없는 죄인을 그렇게 후하게 대우해주시는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없습니다. 복수심에 불타는 사람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은 그런 방식으로 원수 맺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생명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많은 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모든 죄가 다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반역, 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함에 있어서 모자라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그 죄가 질적으로는 같다고 할지라도 그 죄의 크기는 다 다릅니다. 예를 들자면 지나가다가 우연히 여자를 보면서 사악한 마음을 품는 것과 실제로 사악한 일을 행하는 것이 같을 수 있겠습니까? 다 다릅니다.
성경이 모든 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경고하고 있지만 가장 무서운 죄는 살인입니다. 그 살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형상을 인위적으로 파괴해버려서 멸실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도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많은 죄들 중 어떤 죄를 곧 살인과 연결시키셨는데 그것이 미움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미움들을 품고 앞에서 말씀드린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면서 분노를 억누르면서 자기 자신 속에 한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 견지해나가야 할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가 먼저 자기의 편지를 받는 교인들에게, “너희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라고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상기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감정 두 가지가 있는데 미움과 사랑의 감정입니다. 두 감정의 공통점은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감정이 처음에는 살짝 스치는 감정으로 시작되었는데 여건이 잘 조성되면 그 사랑의 감정이 자랍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혼자 잘 살았었는데 이제는 ‘그 사람 없이는 내 인생에 의미가 없다’하는 극단적인 데로 가는 것입니다. 미움도 마찬가지로 환경이 조성되면 막 자랍니다. 처음에는 그냥 싫었는데 점점 자라서 증오의 감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있는 세상에 내가 없든지, 내가 있는 세상에 저 사람이 없든지 하는 것이 낫겠다’하면서 살인의 감정과 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무서운 감정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임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미움을 대적하고 조절해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신자 안에 있는 중생의 능력, 신자 안에 내재하시는 성령의 능력은 그로 하여금 믿음으로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 힘을 구하면 미움을 물리치고 사랑하지 않는 마음을 돌이켜서 사랑하게 할 수 있는 파워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성화의 도상에서 몸부림친 사람이라면 그런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면서 대부분의 시기에는 내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는 내 마음이 누군가에 의해서 주장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생명의 은혜를 구할 때 어제까지는 너무 하고 싶었던 그 일이 오늘 아침에 너무 혐오스럽게 느껴지고 그 일이 하기 싫은 적도 있었고, 어제까지는 그 사람이 너무 싫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마음을 바꿔놓으셔서 그 사람이 좋아지게 되는 경우도 있고, 전혀 용서할 수 없었는데 어느 한 순간에 말씀의 깊은 은혜를 받으면서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자기의 마음을 녹이자 자기 자신도 할 수 없었던 큰일들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원수 맺은 자들과 화해하는 용서입니다. 성화를 위해서 어느 정도 몸부림쳐본 분들은 모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주십니다. 그것이 신자 안에 하나님이 그런 능력을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성경의 의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 자기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미워하게 됐는데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그 미워하는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 정말 그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자기도 주체할 수 없이 불가항력적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이 주장해주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강력하게 개입하시는 손이 자기를 붙들어주시지 않으면 자기가 미움의 죄라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고백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바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한계 상황에서 보이는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 미움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굉장히 힘듭니다.
사람이 너무 미워지면서 그 미워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가책을 느낄 때는 가슴에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통증이 옵니다. 이것이 굉장히 무서운 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을 안 하니까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고 우리 안에는 미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이 있다’를 사도가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우리의 패역한 옛 본성에 끌려 다니느냐 아니면 그것을 극복하며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사느냐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어느 쪽을 붙드느냐에 많이 작용됩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의 믿음의 결단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누군가를 미워할 때는 항상 자신이 미워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암시를 많이 줍니다.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내가 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저 사람이 나에게 미움받을 짓을 한 것에 비하면 너무 작은 것이기 때문에 두 개를 비교하면 문제가 안 된다’는 논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쓸데없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의 원인제공을 누가 했습니까? 하와가 했고 하와가 자기도 먹고 그것을 남편에게도 가져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뱀이 원인제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뱀은 물론이고 차례대로 모두 책임을 물으셨습니다. ‘모든 원인제공은 네가 했으니까 너 혼자 뒤집어쓰고 죽어라’고 뱀에게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각자 각자에게 책임을 물으시면서 그에 상응하는 하나님의 저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항상 미워할 때마다 저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한 양을 자기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자기 생각이 맞는지 안 맞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자신 속에 일어나고 있는 옳지 않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정확한 판단을 구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정답이지 다른데서 무슨 정답이 나오겠습니까?
부모님 원망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렇게 착하고 좋은 애가 왜 저런 집안에 태어나서 부모가 부모답게 안 살고 폭력하고 알콜 중독에 가정은 돌보지 않으면서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짐승처럼 살게되었을까’생각됩니다. 그가 아버지가 때리면 망치 들고 대항한 것도 아니고 그냥 실컷 두들겨 맞고서 마음속으로만 그 아버지를 밉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뿐입니다. 그 아버지의 폭력적인 행위와 부정한 삶에 비하면 그 아들의 지은 죄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에게 ‘아버지가 아무리 잘못했지만 그렇게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미워하면 되겠니?’라고 말할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판단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부모를 향해서나 동기간을 향해서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복음이 전해집니까? 아버지를 인간이라고 생각 안 한지 오래 되었고 죽어라고 미운데, 어느 날 그 아버지를 끌어안고 그 영혼이 불쌍해서 펑펑 울고 ‘오늘 짐승 하나 전도했네’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 공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정이 복음화 되지 않고 있는 이유가 예수 믿으라고 사영리 안 전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맺힌 것을 풀지 못했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 되게 하지 못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나는 이렇게 피해를 받았고 이렇게 고통을 받았는데 내가 마음으로 좀 미워한 것이 그렇게 잘못하는 것입니까?’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잘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미움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와 같이 쓰러진 그 영혼을 수많은 사람들의 칭찬으로 다시 살릴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시각 앞에 서서 자신의 죄와 잘못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은혜를 갈망하는 성도의 진정한 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에게는 그러한 본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런 본성을 따라서 살도록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했는데, ‘예수’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육신적인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메시아적인 호칭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것이 짧으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당시로서 이 신앙의 고백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당시의 문맥으로 돌아가자면 ‘예수’는 요셉의 집안에서 태어난 성육신 하신 인간으로서의 그분에 대한 지칭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라는 단어 그 자체가 우리처럼 초자연적인 신적인 의미를 가지고 가슴속에 다가왔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는 그 당시에 흔한 이름인 동시에 나사렛 촌 동네에 사셨던 가난한 목수 집안의 한 아들, 그것이 예수가 가지고 있는 초라한 인성의 의미였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 이름이 고귀한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셔서 비천한 생애를 사신 그분이신데 그분을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굉장히 하기 어려운 고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가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보내신 유일 무이한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온 인류를 구원할 구원자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크리스천,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믿음에 있어서 체험적인 요소입니다. 처음 성령이 강림한 후에도 유대인들은 소수의 성령 받은 사람을 제외해놓고는 두 부류의 사람들로 갈라졌을 것입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예수님 살아 계실 때에 예수님과 사도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뭔가 감화를 받았던 사람들, 또 한 종류의 사람은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사람들, 그런데 두 부류의 사람들이 똑같이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하기 전까지는 그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모두 그 두 번째 부류에 속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법정이 지목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런 나쁜 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가까이서 뵈었지만 나쁜 일이라고는 하신 적이 없고 그분의 삶은 자기를 다 버리는 이타적인 삶이었고 늘 그러신 것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정말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시고는 저런 일을 하실 수 없다는 놀라운 광경들을 주님이 보여주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는 그 이상일 수 없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면서 거기에서 기도하던 모든 사람들에게 한가지 중대한 사실이 체험된 것입니다. ‘너희들이 나무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가 곧 그리스도시니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서 기도하면서 성령을 받은 모든 사람들의 불 체험의 확신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그 사람들이 모두 다락방을 뛰쳐나와서 열렬한 전도자가 되었는데, 사람은 자신의 체험 속에서 방금 경험한 것을 말하게 되어있기에, 그 선포의 제목이 바로 ‘너희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그 예수가 사실은 메시아였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죄 사함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신다’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서 성령의 불 체험을 한 사람들의 핵심적인 선포의 제목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은 믿음의 체험적 성격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여러분들 앞에 요한 사도가 살아 나타나서 여러분들에게 ‘너희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느뇨’라고 물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혈기 충천했던 그 사도가 예수가 바로 자기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메시아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십자가로 아로새겨진 삶을 살면서 일생을 다 살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매인 바 되어서 귀양살이까지 하던 죽음을 눈앞에 둔 그 사람이 여러분들에게 ‘너희는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느뇨’라고 말할 때 그 다가오는 느낌을 여러분들은 느낄 수 있습니까? 동일하게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까?
사도에 의하면 그렇게 함부로 믿는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답하신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한 사람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그 이면에는 반드시 그 믿음의 체험적 성격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 우리의 죄를 위해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시고 사신,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섬기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그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이 사람의 전 삶이 담긴 고백입니다. 그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다라고 하는 고백은 평면적인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 속에 엮어 넣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그 고백 속에는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도성인신의 교리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이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것은 메시아의 화해케 하는 중보적 사역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비참한 죄악이라고 하는 인간이 처한 상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고백 자체는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이 죽었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하는 자기의 죄에 대한 고백을 동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를 체험한 사람이 어떻게 형제를 미워하며 살 수 있는가.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마치 예수님을 믿으면 저절로 형제를 사랑하게 된다는 논리에 빠져들면 안됩니다.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순간에 하나님은 미움보다도 더 강력한 본성을 주셨는데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를 함께 사랑하며 살 수 있는 본성입니다.
그런데 불순종과 죄악이 그것에 거스르면서 신자의 영혼 속에 은혜의 세계를 파괴하고 죄의 세계를 구축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결국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십자가를 경험하는 것과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동일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떠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다분히 주관적이거나 위험하거나 혹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다고 말하면서 그 사랑의 경험의 핵심 속에 십자가에 대한 경험이 없으면 그런 사랑의 체험이 그 사람의 신앙을 견고하게 붙들어줄 수 없습니다.
인생을 살다가 죽을 고비를 만나는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예화: 어느 공사장에서 20미터 꼭대기에서 에이치빔이 떨어졌는데 안경을 부러뜨리고 코끝에 상처만 내고 내리꽂혔다)
그런 일이 있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기로 결심해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한 계기일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쉽게 잊어버리는 지 아십니까? 그 한 예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서서 제일 먼저 홍해를 만나고 막막했지만 그 홍해가 갈라지고 마른땅이 드러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의 믿음이 그 이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견고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큰 기적을 보고 나서 3일만에 물이 없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바다가 갈라지는 것을 보고도 그 유효기간이 3일이었는데 죽을 고비에서 살아나고 그 유효기간이 이틀간다면 많이 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긴 설명을 드리면서 입증하고자 하는 바는, 한 사람의 신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그 사랑의 체험의 핵심에 십자가가 없으면 그것은 안전하고 건강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많이 있는데 진짜 큰사랑에는 감탄을 안하고 작은사랑에 감탄하는 것은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사랑이 없나니”하셨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의미하신 것입니다. 그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의 신앙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곧 그 예수님이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구주가 되셨다고 하는 것에 대한 깊은 감격이 그 믿음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체험적인 측면입니다.
사도가 너무나 당연한 사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이라는 것, 예수가 우리의 메시아로 오셨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의 은혜를 필요로 하던 사람이었는지를 상기시켜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사실을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지난 주에 설교한 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우리가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서 어떤 선한 것을 찾으면서 그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자기가 받은 그 놀라운 구속의 사랑과 그 은혜는 독점적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나는 ‘저런 쓸모 없는 인간이 왜 내 곁에서 빙빙 돌며 나를 괴롭히나’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필요하셔서 이 세상에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고 나면 이 세상이 버린 사람들을 주워 모을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형제의 모습 속에 보이는 하나님 형상 아름다워라
존귀한 주의 자녀 됐으니 사랑하며 섬기리
그가 나와 교파가 다를 수 있습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은혜의 깊이가 다를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매우 문제가 있어서 그와의 교제를 경계해야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공동체에서 솎아내져서 어디론가 내동댕이쳐버리는 것이 일시적으로는 그 공동체를 안전하게 하고 분위기를 화해롭게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그는 비록 죄인이고 허물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허물이 나에게도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받은 이 놀라운 사랑은 나만 독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미워하는 그 사람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가 느끼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을 극복하고 그를 사랑하고 인내하면서 그를 주님 앞에서 세우는 그 일은 곧 그 사람 안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 형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주님을 위해서 미친 듯이 헌신하고 열정적으로 살고 충성되게 주를 위해서 살면 그 삶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데 대개 그렇게 확신에 차서 충성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칩니다. 그는 대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보다 훌륭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가 살고 있는 모든 삶이 하나님 앞에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다 옳겠습니까? 우리가 다 잘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충성스럽게 살고 주님을 위해서 분투하면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그러한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보다 배나 더 많은 자기 성찰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밖으로만 충성되고 헌신된 삶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충성되고 헌신된 노고의 과정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도 끊임없이 정결해가고 거룩해져가야지 포악해져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정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정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이 인간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의 몸을 입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로 죽으셔야 했던 그 이유가 바로 우리다. 나의 죄 때문에, 정말 쓸모 없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창조의 질서에 반역하는 쓰레기와 같은 존재였는데 바로 그런 쓸모 없는 존재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다는 사실을 체험한 것, 그것이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내가 체험한 바 그 핵심이 하나님은 아무 쓸모 없는 자를 위해서 천하보다도 고귀한 자기 아들의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이라면 그 정신으로 내가 형제를 보고 자매를 보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유지하면서 살아야할 영적 본성인 것입니다.
4.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요일5:2)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의 자녀 안에 있는 사랑의 본성에 대해서 1절을 중심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사도의 논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그것은 자기의 의지대로 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는 영적인 진실한 변화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모든 삶의 근원이고 그분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이루신 구속이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었고 그래서 그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아무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는 죄인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을 그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받아들인다는 절대의존적인 믿음은 결코 체험 없이는 획득할 수 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무가치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안에 있는 사랑의 본성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어서 2절을 사도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희랍어 성경에는 뒷부분이 먼저 나옵니다. “이것에 의하여 우리가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마다” 즉 “이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사실은 매일매일 우리의 신앙적인 삶 속에서 확인이 되어야 할 종류의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오래도록 하나님 믿으면서 ‘이것이 신앙이려니’하면서 살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깨닫고 보니까 사실은 자기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회개하면서, 자기가 이제껏 까지 신앙생활하고 교회 생활하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가장 근본적인 것-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정말 깊이 깨닫게 됩니다.
만약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빛이 비추어서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밝히 보여주시는 영적인 각성이 없었다면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으며 자기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다는 사실을 자기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서 자기를 각성시키고 나니까 사실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깨닫고 회개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각별하게 노력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진솔하게 확인할 수 없듯이 형제사랑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모두 신앙생활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말씀의 빛을 비추셔서 자기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회개했던 것처럼, 어느 순간 자기 안에 형제를 향한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형제를 향한 아주 더러운 미움의 감정들이 자기 안에 이모저모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될 때 자기가 정말 이렇게 불결하고 더러운 인간이었는가 하는 것을 자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심히 떨며 몸부림치며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그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러면서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로 난 형제를 우리가 진실 되게 사랑하고 있는지 사랑하고 있지 않은지가 형제 사랑 그 자체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 무엇에 의해서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지 않고 있다 하는 감정은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자가 되기 전에 주님을 깊이 만나고 결정적인 영혼의 변화를 경험하고 나서 정말 상당히 여러 해 동안-지금도 부분적으로는 계속 되고 있지만- 가슴 아팠던 사실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들이 너무 가볍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전에도 물론 하나님을 사랑했고 또 그런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나름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경험한 첫 번째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만지고 지나가실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할 수 있는지를 경험하고 나니까 예전의 사랑은 너무 형식적이었고 너무 가벼운 것이었고 진실하기는 했지만 그 사랑의 농도가 너무 엷은 사랑이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제가 그런 변화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이전에 제가 하나님을 사랑했던 그 사랑 자체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면서 이제껏 까지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이 사도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내용과 일맥상통합니다. 사도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우리들이 안다' 즉 ‘이런이런 것들에 의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난 우리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이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무엇에 의해서 확인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두 가지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서(희랍어 성경에는 “지킬 때마다”) 그것에 의해서 우리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안다’ 즉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그 기초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의 형제 사랑이라는 것은 동기 자체가 영적인 선에 기초한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그런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고 그 계명들을 지키게 되고 그리고 그 기초 안에서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 묻겠습니다. 사람들과의 교제가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까, 방해가 됩니까? 두 가지가 다 답이 될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까, 안 기뻐하십니까?
(예화: 어떤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며 살기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절대 목사님을 안 찾아간다고 했다)
제가 한가지씩 비판해보겠습니다. 첫째는 사람들과의 교제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비판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 들판에서 하나님 만나고 교회에 와서 혼자 큰 사람 있습니까? 선지자들이나 그렇게 하나님을 만났지 없습니다. 맨 처음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사실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옛날에 하던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한심합니까? 가당치도 않은 행동을 하면서 교회생활을 했습니다. 일일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할 때 주위의 사람들이 따뜻하게 돌보아주고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해도 다 들어주고 다독여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인들도 은혜 받기 전까지는 정말 교인이 아닙니다.
(예화: 어떤 성도가 “설교를 한시간만에 끝내주면 용서할 수 있는데 한시간을 넘어가 면 용서가 안 된다”고 했다)
여러분들도 다 그런 정도의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처음 믿는 사람이 신앙의 뿌리를 내리는데 교제는 결정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예화: 새신자환영회 때 전혀 교회에 가보지 않은 새신자가 이 교회에 처음 와서 예 수 믿고 은혜 받고 7주 과정을 다 끝내고 주님 영접한 과정을 들으면서 ‘정말 하 나님이 여기 계시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변화되고 나면 제일 먼저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기도의 은혜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영은 곧 사랑의 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장 풍부하게 기도생활 할 때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할 때였습니다. 시련이 올 때도 하나님 사랑하면 열렬해졌고 그렇지 않으면 시련 속에서도 기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이 교제의 문제는 신자가 일생 살면서 하나님 앞에서 해결해야할 무거운 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의 시선이 하나님 자신에게로 향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할만한 이유가 있는 사람이 교만한 것을 교만하다고 하지 교만해질 아무 이유가 없는데도 교만해지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분류가 됩니다. 예수 안에서는 잘생긴 사람이나 못생긴 사람이 없습니다. 다 주님이 창조하신 걸작품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전에 하나님 믿지 않았을 때는 얼굴이 못생긴 사람들은 잘생긴 사람들 틈 속에 들어가면 주눅이 들어야지 교만해지면 그것은 교만한 것이 아니라 정신질환입니다. 교만하다는 말의 정의는 의지할만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의지해서 사실 마땅히 그래야 할 바보다도 그것 때문에 훨씬 더 자기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안중에 없는 것이 교만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십니다. 그 교만의 이유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만이 여러 방면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공부를 많이 한 것 때문에 교만합니다. 여러 모로 볼 때 그 사람이 공부하지 못한 사람보다 중요한 것을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래도 하나님을 덜 의지해도 될 만큼 교만해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믿으면서도 여전히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교만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더 많이 하나님의 은혜에 잠겨서 정말 하나님 앞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가치관들을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잘 정립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만해집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 얼마나 교만해지기 쉬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제왕과 같이 살 수 있고 많은 사람을 부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의지하면서 교만해집니다.
얼굴이 잘 생기고 용모가 단정하고 매력적인 사람들은 어디 가든지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중심적인 인물이 됩니다.
(예화: 귀공자같이 생기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고등학교 다닐 때 친구들은 풀빵을 먹으 면서 그분에게는 양과자를 사다가 주었다는 이야기)
그런 사람도 자기의 용모로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특기가 있고 남보다 두드러진 것이 있으면 그것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그 양심 때문에 교만해집니다. 아무리 우리들이 도덕적으로 잘 살고 양심적으로 바르게 살아도 그렇게 바르게 산다고 하는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정말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예수님은 기쁘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하지가 않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했는데 청결한 사람들은 도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청결한 것이 아니라 회개의 눈물로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마음으로 순결해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교만해질 수 있는 이유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을 참 많이 의지합니다. 그런 것들이 주님을 믿고 신앙생활 해나가는데 있어서 적지 않게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은 ‘도대체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우리 목사님은 열린 것 같으면서도 저렇게 고루할까’하겠지만 저 고루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나이 또래의 목회자들과 이야기하다가 속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왜 저렇게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목숨을 걸까’합니다. 머리에 노란 물 들이면 어떻습니까? 열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저는 결혼할 분명한 부르심이 없이 연애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보다 사람을 절실하게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홀로였을 때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던 형제나 자매들이 연애하면서 그런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개중에는 신앙이 뛰어나서 연애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힘써 함께 알아가고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지체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 드뭅니다. 청년의 정욕들도 많이 작용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상처를 입습니다. 결혼에 대한 분명한 계획도 없이 19-20에 열렬히 연애를 시작해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말씀 듣고 은혜 받은 지체들이 미끄러지는 것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약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살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사는 것이 그렇게 쉬울 수 없는데 일단 한번 사람을 깊이 의지하고 그 사람의 보호와 도움이 아니면 자기 혼자 설 수 없는 인생을 한번 살아보고 난 다음부터는 정말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사람의 인정을 받는 데 있어서 병적인 집착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인데도 사람들이 자기를 잘 인정해주면 더 땀나게 일하고 보람을 느끼고 사람이 인정을 안 해주면 그 일을 자기에게 맡기신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위협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구들은 모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홀로 서는 데 도움이 안됩니다. 그런 면에서는 사람들과의 교제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많이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교제 자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느냐 안 막느냐가 아닙니다. 그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의 중심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면 그 교제를 통해서 정말 하나님께로 가까이 갑니다.
(예화: 한 형제의 글-교회에 와서 지체들과 교제를 하고 돌아갈 때는 ‘더 많이 하 나님의 말씀을 알고싶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싶다. 기도하고 싶다’하는 마음으 로 불붙는다고 했다)
앞에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목사님과 의논하지 않는다고 한 지체는 도움을 받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혼돈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고 물매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그는 그날 처음 물매를 돌려본 것이 아니라 평소에 많이 물매를 가지고 생활을 했고 맹수들을 내어쫓았습니다. 그는 돌을 물매에 먹여 돌리는 기술자였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활용했고 돌을 고를 때에도 물매돌을 발사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까 주님 능력대로 하실 것이라고 커다란 돌멩이를 가지고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가장 반들반들하고 멀리 나갈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돌멩이를 고르고 또 골라서 챙겨가서 돌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술을 활용했을 뿐이고 그가 의지한 것은 물매도 물매돌도 아니고 자기의 기술도 아니고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일이 있고 너무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일이 있고 갈 바를 알지 못해서 방황하면 목양을 받아야지, 옛날에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고 살던 그 삶을 청산하고 들어온 사람들이 용기가 정말 필요할 때는 뒤로 도망가고 용기 내도 되지 않을 때는 용기를 내서 선택을 그르치면서 삽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통해서 논증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중심적인 교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형제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안다’ 그 교제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으면 형제들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사랑의 감화를 입은 사람들도 사랑을 하다가 실족하는데 그런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의 감화는 없고 단지 사람들을 사랑해야겠다고 하는 인간적인 의지를 가지고 그것을 유일한 자신으로 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사랑의 깊이보다 훨씬 깊은 인간에 대한 실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실망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대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가 없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만들어주는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오늘날 교회 분열의 많은 현상들이 왜 일어납니까? 형제가 형제를 대적하고 교회가 교회를 대적하고 함께 발을 씻기며 사랑해야할 지체들이 칼 같은 미움을 품고 서로 대적하고 교회가 찢어지고 갈라지고 편을 가르는 불행한 일들이 왜 일어납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의 깊은 감화를 통해서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변화와 성장이 없으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가 오늘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실은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실재를 고백이 제대로 반영을 못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정말 내 안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그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형제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형상과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한 그것이 곧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마다 이로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계명이 하나가 아니라 ‘계명들’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뒤편에 넘어가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요한 사도는 다른 주제보다 ‘영생과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사도 바울보다 훨씬 더 풍부한 통찰을 서신서와 복음서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의 체험도 굉장히 많이 반영되었고 그 폭넓은 영생과 사랑의 체험을 통해서 영생과 사랑의 실제를 성공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던 사도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이야기하는 많은 계명들을 지킬 때 그것으로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안다는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주신 계명이 많이 있는데 그 많은 계명은 모두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계명의 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우리들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을 향한 사랑,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쉽게 분리되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3장 테이프를 재독해보실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비유하자면 사과나무에 달린 많은 사과 열매가 계명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 사과가 같은 나무에 매달렸어도 크기도 다르고 태양을 바라보는 각도에 의해서 색도 다르고 높이에 따라서 모양도 다를 것입니다.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고 다 다릅니다. 그리고 당도의 차이도 조금씩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근본적으로 그것은 사과나무에서 빨아올린 수액을 먹고 그 진액이 열매 구석구석에 들어가서 사과라고 하는 실체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과가 다양해도 사과 하나 하나가 소유하고 있는 본질이 나무가 소유하고 있는 본질과 일체를 이루듯이 예수님이 주신 많은 계명들이 있는데 그 계명 속에 일체를 이루는 실체로서 깊이 배어있는 하나의 동일체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성경이 침묵하고 있어서 어떤 것이 옳은 지 판단하기 힘들다고 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두 가지 정신에 부합하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에 대고 질문하면 대부분 이것인지 저것이지 구분할 수 없는 윤리적인 문제들은 없다는 것이 개혁주의적인 윤리관입니다. 어려운 말로 ‘아디아포라’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을 향한 사랑, 이 두 개의 잣대를 가지고 윤리의 문제를 재면 거기에는 아무래도 괜찮은 것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주신 계명들을 잘 지킬 때마다 우리가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계명의 중심이 “주 너의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 모든 계명의 열매 속에 파고 들어가 있는 실재-reality-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결국 성화의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우리의 성화 되지 못한 모습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는 것이 언제입니까? 노래방을 싫어하게 되고 담배 냄새를 정말 싫어한다고 해서 거룩해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금 정확히 내는 것이 우리의 성화의 정도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그런 것들도 척도가 되기는 하지만 더 정확한 척도는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랑의 진실성,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는 기꺼운 희생의 실천, 그 희생의 마음의 분량만큼 우리들이 성화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무자비하고 거룩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그가 진리 편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잔인하면서 거룩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사람은 언제나 사랑의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성화된 인격 속에 깃들인 거룩의 기운을 두렵게 느끼는 것이지 그는 포악한 사람일 수 없습니다. 그것이 성화의 깊이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군가가 미워질 때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그만큼 했으면 할만큼 했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붙들고 물러봐라 누가 잘못했나’하는데, 광화문 네거리가 아니라 주님을 붙들고 물어봐야 합니다. 주님을 붙들고 ‘주님 저도 할만큼 하지 않았습니까’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실 까요? ‘일흔 번에 일곱 번쯤 했니?’ 하실 까요? 거기에서 자기 자신을 향해 깊이 실망할 때 그것이 자기의 성화의 정도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