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사랑
(2003-2004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3-2004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나는 게달의 장막 같아도(아1:5) 2004.2.3 교직원예배 1
2. 게달의 장막, 솔로몬의 장막(아1:5) 2003.3.10 교직원예배 5
3.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아2:6-7) 2003.4.15 교직원예배 8
4. 거룩한 사랑에서 자라감(아1:12-15) 2003.5.12 교직원예배 13
1. 나는 게달의 장막 같아도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1:5)
여기서 게달 의 장막이라고 하는 것은 게달 은 아랍의 유목 민족이었습니다.그래서 그 사람들은 대게 장막을 지을 때 염소 가죽을 가지고 장막을 지었습니다. 이 술람미 여자는 솔로몬의 연인 인 동시에 또 후에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아름답게 설명한 그런 예표가 되는 여자입니다. 술람미 여자는 아가서 전체의 문맥을 보면 결코 특별한 귀족출신의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5절과 6절 7절 뒤 모두를 살펴보면 이런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검다고 했는데 여기서 검은 것은 햇볕 에 그을려서 검게 탄 것이니 아마 이 여자가 길일이나 밤일 혹은 목축을 하는 일에 자신을 많이 바쳤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양 볕 에 그을려서 거무틱틱 하게 된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 예루살렘 도시에서 호의호식 하는 여자들을 부르면서 나는 비록 검으나 게달 의 장막 같으나 그러나 솔로몬의 휘장 같도다. 그렇게 고백을 하는 거지요. 이것은 겉모양은 비록 내가 햇볕 에 많이 그을려서 그래서 볼품없는 여자가 되어 버렸고 그리고 내 사랑하는 남자를 아주 기쁘고 행복하게 하기위해서 외모로서 일평생 준비된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는 내 내면의 세계는 솔로몬의 휘장 같다 그런 이야기지요. 게달 의 장막이 염소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바람과 비바람에 씻기다 보면 아주 거무틱틱 하게 변하지요. 솔로몬의 이 휘장은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성전을 짓고 난 후에 그 속에 들어갔던 그 휘장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그 휘장은 성막 시대부터 이미 있었던 휘장인데 아주 화려 하게 짠 휘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던 그 성막도 그렇게 아름다운 모습 은 아니었습니다. 멧돼지 가죽으로 껍질을 씌웠으니 오랜 세월의 풍화 작용 에 씻기면서 거무틱틱했 을 것 입니다.
그러나 열고 그 속에 들어가면 정말 화려한 그런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리고 그 휘장을 지나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가슴 뛰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여기 나오는 술람미 여인을 교회로 해석을 하면서 많은 사람은 일광의 피부가 검게 된 것을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당한 고난의 흔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생 살면 늙습니다. 그리고 그 곱던 얼굴들도 이제 모두 다 변합니다. 이건 창조의 섭리이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에 정해 놓으신 원리입니다. 여러 가지 건강을 유지하고 또 좋은 피부와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를 쓰지만 그러나 가는 홍안을 막을 사람이 없고 오는 백발을 그치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해져 가는데 그 후패해져 가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냥 세월의 흐름 속 에서 마치 우뚝 서있는 바위가 아무 말 없이 비바람 에 깍이고 씻기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우리의 인생 이 라면 우리의 인생은 너무 슬프고 허무 한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렇게 나날이 겉 사람은 후패하고 쇠해져 가면서 그러면서 우리 안에 고난당한 예수의 흔적을 지닌 사람들이 될 때에 그때에 우리의 겉 사람이 후패해져 가는 것 그리고 우리가 늙는 것 그리고 이 여인이 이야기 한 것처럼 얼굴이 볼품없어 지고 거무틱틱해지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 여인은 노동과 그리고 여러 가지 섬김의 일에 종사하면서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대가 집 마님들이 거울 앞에서 자기의 얼굴을 다듬고 몸매를 가꾸고 험한 일에 종사하지 않을 때 이 여인은 일광을 마다하지 않고 노동에 종사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 노력에 자기를 바치면서 살았습니다. 아마 그 힘쓰고 애쓰는 모든 날들도 사랑하는 이를 위한 그런 일이였을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광 은 뜨거 졌고 여인의 피부는 거무틱틱 해 져 갔습니다. 여러 가지 묘사로 볼 때 이 여인은 몸매도 아름답고 얼굴도 뛰어나게 아름다운 여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일광에 그 얼굴빛이 그을리면서 예루살렘에 있는 여자들과 사뭇 다른 여자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그 거무틱틱 해진 그 얼굴 때문에 자신의 여인인 이 여자를 못 알아보았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을 사랑하는 그 신랑은 이 여인이 비록 일광에 그을려 검은 피부가 되고 그의 외모가 게달 의 장막 같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 사랑하는 신랑의 눈에는 더 없이 소중한 연인 이였습니다. 신부였고 누이었습니다. 왜! 그가 한없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지요. 비록 예루살렘의 여자들처럼 남성의 시선을 만족 시켜 줄 수 있는 아름다운 피부 와 고운 몸매는 없었지만 일광에 그을러서 그저 막살아가는 여자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이 신랑의 마음을 깊이 사로잡은 것은 이 술람미 여인의 외모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아가서 전체를 보면 은 이 신랑은 자기의 사랑하는 이 여인 속에 있는 어떤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 사랑의 눈 빛 으로 그의 이마도 보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도 보고 콧날도 보고 입술도 보고 눈동자도 보고 귓부리 도보고 그리고 가슴도 보았습니다. 그때 이 신랑의 눈에는 이 여인의 몸에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이 너무 너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아직까지도 높아지고 유명해지고 심지어 부유해지고 심지어 자기의 야망을 이루고 이런 것 들이 여전히 우리의 목표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정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화장품과 좋은 음식과 훌륭한 의복에 에워 쌓여서 거울을 보던 예루살렘 의 여자들이 못 만난 그 사랑하는 연인을 이 거무틱틱한 술람미 여인은 만났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게으른 사람들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인생을 본받아서는 안 되고 오히려 그 사람들의 인생에 세배 네배 의 인생을 살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그렇게 불철주야로 주님을 섬기는 동안에 우리는 늙어갈 겁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예수의 흔적이라고 표현했는데 그는 자연적으로만 늙어 간 것이 아니라 돌로 침을 당하고 사십 에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그리고 육로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여행의 위험과 춥고 배고픔과 수 없는 외부적인 환란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삼십 삼세의 나이로 공생애를 마감하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바리새인과 논쟁을 하다가 예수님과 함께 논쟁을 했던 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향해 말했습니다. 네가 오십이 안 되었거늘 아브라함을 보았다 하느냐 전 그 성경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찔렸는지 몰라요.
예수님의 얼굴은 역사가에 의하면 말할 수 없이 수려한 얼굴 이였지만 그러나 공생애 삼년을 사시는 동안에 예수님 의 얼굴은 마치 오십 살 쯤 되 보이는 조로한 얼굴 로 변해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헐벗고 고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되신 겁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 가지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녔노라고 말할 때 히랍어 로 그 스티그마 는 결국은 채찍에 맞고 돌로 내침을 당하고 고난 받은 그 흔적이었습니다.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아직까지도 남아 있었던 그 고난의 흔적을 기억 해 보십시오. 그거는 구원 받아서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안일하게 예루살렘 여자처럼 살수 있는 수많은 길이 있었는데 신랑 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온몸이 게달 의 장막 같이 되도록 술람미 여인과 같은 삶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일함과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떨쳐버려야 합니다. 저는 어제 태어나서 엊그제 최고로 설교를 많이 했습니다. 여덟 시간을 예배드렸고 그리고 여섯 시간을 설교 했습니다. 월요일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하고 쉬었는데 화요일 아침인 오늘이 되었는데도 체력이 회복이 안 되는 걸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게 만만한 게 아니 구나 생각했습니다. 언제까지 계속 할 수 있을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 명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우리가 아직까지 숨 쉴 수 있는 날 동안에 말 할 수 있는 날 동안에 그리고 허리를 굽혀 섬길 수 있는 날 동안에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혼불 이라고 하는 소설을 쓰고 죽은 작가를 기억합니다. 암 말기에 시달리면서 마지막에 그 원고를 탈고하고 아마 일주일인가 있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그 투병하면서 마지막에 그 소설을 완성 하고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져가는 예술을 위해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처절하게 몸부림을 치는 데 우리의 영원한 인생의 가치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가 그렇게 소진하기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보면은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 중에는 포악하게 변해간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정열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은 거친 인격을 가지기가 아주 쉽고 결단력이 있고 우유부단하지 않은 사람들은 항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가 쉽상입니다. 너무 주님을 많이 섬기다 보니까 인격적으로 다듬을 기회가 없었는가 보지요? 그러나 오늘 보십시오. 그 여인의 겉은 거무스름해서 게달 의 장막 같았지만 그 속은 그 등불이 켜져 있는 아름다운 솔로몬의 휘장과 같았습니다. 청색 홍색 자색실로 금색실로 짜서 그 현란하게 아름다운 그리고 하나님과의 임재의 만남이 있는 그런 장막과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에 겉모습이 너무 그럴 듯 했는데 깊이 사귀고 혹은 목양을 받고 나서 이인간이 정말 껍데기 뿐 이었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하물며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 무화과나무의 잎사귀를 뒤지실 때 우리에게 잎 파리가 가득한 우리의 외면적인 삶을 보면서 이 사람은 뭘 좀 살았겠나 하고 잎 파리 사이를 뒤집어서 아무 열매도 없었을 때 예수님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는 정 반대의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잎이 모두 지고 나면 그 나무는 그렇게 쓸쓸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손꼽아 기다리는 게 전 봄이에요. 봄이 되어서 잎 파리 들이 열린 공간 앞에 쭉 피어나면 그렇게 행복 할 수가 없어요. 겨울에 는 새들도 오지 않아요. 잎이 떨어진 나무는 정말 볼품이 없고 너무 을씨년스럽고 잎 파리가 떨어져서 가을에 앙상하게 된 나무 가운데 아름다운 나무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있습니다. 감나무! 입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가 되었는데도 그 붉게 읽은 감이 저 꼭대기에서 이 아래 까지 그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가득 매달려 있을 때 그 아름다운 감나무 거기에 매달린 감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하늘 높이 솟아 있을 때 우린 아무리 그 나무가 잎 파리 하나 없어도 을씨년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잎 파리 보다 더 좋은 붉은 감이 가득 매달려 있을 때 오히려 잎 파리가 매달려 있을 때 탄성을 지르지 않던 사람들이 그 열매를 보며 환호성을 을 지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나무는 그 좋은 열매로 그 나무의 주인을 만족하게 해 주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면의 세계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져 갈 때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기를 점검하고 그리고 검토하고 그리고 다시 생각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서 우리의 모든 외면적인 것들은 게달 의 장막과 같아도 마지막 죽음이 가까워 올 때 그날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날이 가까워 올수록 우리의 눈은 거룩한 주님을 뵈올 소망에 더욱 어린 아이처럼 빛나고 이윽고 주께서 고생과 수고를 마치고 오라고 하시는 바로 그날이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최고로 성화된 그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쓰러지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뒤로 물러갈 인생이 아니었다 는 것을 좋으신 주님 앞에 입증하고 그렇게 영광을 돌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2. 게달의 장막,솔로몬의 장막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아1:5)
여기에 나오는 내가 비록 검으나 구절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술람미 여인이 흑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검다는 것이 피부색이 아니라 햇볕에 그을린 것으로 좋은 가문의 여자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노동에 종사하며 살았던 여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내가 비록 게달의 장막 같으나’에서 이 게달의 장막은 짐승의 가죽을 벗겨서 만든 텐트를 의미합니다. 그렇게 친 텐트는 햇빛을 받고 비를 맞고 습기를 견디면서 아주 검으면서 칙칙한 색을 냅니다. 이 여인은 겉보기에는 자기가 그렇지만 솔로몬의 장막 같다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성막을 덮고 있는 덮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검으면서 볼품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치 성막을 덮은 짐승의 가죽처럼 오랜 세월 비바람에 씻겨 볼품이 없으나 그 성막 속으로 들어가면 청색홍색 자색실과 화려한 자태로 겉으로는 짐작할 수 없는 화려함이 성막의 그 내부에 같듯이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이 자신에게 흠뻑 취하게 된 것이 외적인 아름다움보다도 가까이 다가와서 자기와 함께 교제할 때 발견하는 내면의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자기가 솔로몬 왕의 사모하는 바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아가서에는 여인의 자태에 대한 아름다움이 시적으로 상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알고 보면 이 여인이 지니고 있던 내면의 세계에 깊이 심취했던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 외모라는 것을 우리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우리의 육체는 후패합니다. 그리고 세월에 떠밀려서 온갖 이 세상의 시련을 당하는 동안 마치 방금 제작이 되어서 항구에 묶여 있는 배는 깨끗하고 아름답지만 수만리 풍파를 헤치고 대양을 가로지르며 폭풍을 뚫고 비바람을 견디면서 장구한 세월을 항해한 배는 그렇게 깨끗하고 예쁘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습니다. 매일 잘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순결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래도 오랜 세월 비록 죄를 먹고 마시지 않아도 워낙 많은 죄와 싸우고 살다보면 방금 거듭나서 주님의 품안에 있는 것보다는 흠이 많은 법입니다. 죄와 싸우는 동안 우리를 성결하고 순결하게 되지만 죄인과의 싸움은 때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그 싸움에서 그 죄와 악에 물들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헤치고 교묘한 죄들과 살아오는 동안에는 게달의 장막과 같이 육체로는 세월이 흘러 늙어서 그리고 영혼으로는 많은 죄와 싸움에서 여기저기 얻어맞기도 하고 악마의 손톱작용에 흘기기도 하고 피 튀기며 싸운 유혈이 낭자한 그런 전투복을 입을 때도 있고 또는 죄에 무릎을 꿇었던 흙 자국도 있습니다. 우리의 외모는 이렇게 많이 후패해져 갑니다. 그렇지만 우리 신랑 되는 예수님은 우리의 겉모습만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게달의 장막 같아도 여호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짐승의 거무튀튀한 가죽을 엎어놓고 가장자리에 하얀 테두리를 쳤던 광야 시대의 성막과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성소와 지성소에 들어가면 밖에서 쳐진 가죽 덮개를 보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갖춘 성막이었던 것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곳은 6평밖에 안되는 작은 방이지만 거기에 창조주 여호와께서 임재하신 그런 놀라운 곳이라는 걸 밖에는 선 알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겉 사람은 후패합니다. 오류가 없고 과오가 없는 깨끗한 삶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순결한 사람은 우리 가운데 아무도 없습니다. 날마나 애쓰고 온전하게 살려고 몸부림 쳤지만 때가 참 많이 묻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많이 됩니다. 흘러가 버린 세월이라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왜 내 인생이 좀더 순전하지 못하였을까 좀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을까 내게 주어진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더 많이 섬기지 못하였을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긴 세월동안 좀더 찬란한 지식의 빛 아래에서 살수 없었을까 하는 그런 후회가 서럽게 밀려 옵니다. 아마 저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도 살아온 세월은 어쩔 수 없지만 어느 날 문득 보면 양보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정말 날마다 새로워져야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새로워져서 거듭나고 한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의 도상에서 늘 가능하면 아침마다 ‘어제의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나는 새것이다’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조명이 있을 때마다 그 빛으로 우리자신의 거룩해져 가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기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고 그리고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릴 수 없는 것, 단 하나에서 승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는 것, 삼위일체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이름을 연모함에 있어서 온전해지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게달의 장막과 같은 우리 속에 솔로몬의 장막속의 화려함이 깃들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 오웬은 철저하게 율법으로 우리 안에 역사하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죽이지 못한 죄가 있으면 복음으로 먼저 데려가지 말고 율법의 빛 앞에서 갈 때까지 가는 정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견딜 수 없는 진노와 그런 자들을 다루는 율법의 방식에 대해 갈 때까지 가고 자기에게 영원한 형벌이 보증되어있고 이 죄의 끝이 얼마나 비참한 하나님의 진노인지 깊이 깨닫고 자기의 죽이지 못하고 남아있는 죄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내동댕이쳐지는 광경을 묵상하고 그리고 부들부들 떨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복음으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께 내가 이런 정욕을 품고 이런 죄에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가를, 그분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어떻게 그분이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있게 하셨는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낀 것이 있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 내동댕이쳐짐을 당해 아파하고 형벌의 위협 앞에서 부들부들 떨던 사람이 이번에는 복음 앞에서 진저리가 쳐지도록 나는 이렇게는 살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매우 시시하여 마치 집안을 위해 정략결혼을 한 여자 같아서 그런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때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받은 것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이고 그것을 실제로 누리는 사람에게는 어떤 두려움도 없습니다. 죽음의 위협도 그를 요동하게 할 수 없고, 환란과 시련의 소식과 박해가 임박했다는 비극적인 전갈도 그를 우울하게 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날 동안 그는 행복할 것이고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장 힘쓸 의무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 많이 더 진실하게 더 순수하고 열렬하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고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합니다.
무엇이 내 안에 있는 주님으로부터 나를 이렇게 낯설게 만들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 가장 많이 그리고 뜨겁게 순수하게 온전히 사랑받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무엇인지 미워하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들을 생명 걸고 치우며 그리고 그분의 임재와 그 속에서 느껴지는 사랑 속에서 살아서 우리의 인생을 마치는 그 날에는 희미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사랑하는 주님의 실제로 뵈옵는 것이 이루어지는 그날에 기쁨에 뛰놀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던 사람들은 죽음의 통지가 자신에게 다가올 때 아마 군대가기 싫은 사람의 입영통지서 같겠지만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온전히 사랑받는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들은 마치 합격통지서를 받은 고시생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가장 슬플 때는 일을 못할 때도 아니고 일을 잘못 하였을 때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사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님의 인격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발견하기 힘들 때 그 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누구하고라도 일은 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은 개인적으로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사랑하지도 않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마음 깊이 사랑받지도 못하는 분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아가는 사람만큼 불쌍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일의 노예입니다. 그래서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많이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여러분들 되길 바랍니다.
3. 그리스도의 사랑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 (이2:6-7)
아가서는 교회와 예수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묘사한 xxxx같은 작품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말씀해 주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지만 때로는 일찍이 본적이 없는 아주 화려하고 혹은 인생의 깊은 그림 한폭을 보여 주심으로서 우리를 깨어나게 만드셔서 신앙의 진리를 붙들게 해 주시기도 합니다. 여기에 보면 왼손으로 신랑이 베게를 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결혼 해보신 분들은 이 표현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것입니다. 왼손은 부자유하고 오른손은 자유로우니까 왼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안고 오른손을 사랑하는 사람 몸위에 얹어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더듬으면서 자기의 애정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성경에서 오른손은 하나님의 선택과 관련되어 있는 손입니다. 그런 손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왼팔로 안으시고 가슴을 바짝 그 교회를 붙이시고 교회의 머리 끝부터 시작해서 목덜미까지 해서 교회의 모든 신체를 각 지체 어느 부위 하나 소중한 것이 없이 그렇게 두루 어루만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론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적용 되어야 합니다. 교회론적으로 먼저 적용해보자면 교회가 정말 교회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교회 전체가 예수님의 침상에서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교회의 지체들 하나하나를 예수님이 어루만져 주시는 애정의 손길들을 골고루 모든 지체들이 느낄때 그 교회가 신랑되시는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순결을 지킬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르게만 한다고 해서 교회가 모두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해서 올바른 것을 포기해도 좋을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xxx위해서 바르게 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을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교회가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완전히 몸 구석구석을 신랑이 신부를 어루만지듯이 그 신랑에게는 어느 한 부분도 소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 전체를 어루만지듯이 예수님께서 교회를 품어 주셔서 이교회가 모두 그렇게 어루만져 진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교회의 지체, 기관, 모든교회에 속해있는 지체, 부서들이 좋은분이 신랑되신 예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수 있을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 해보면 알지만 하여튼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성들입니다. 남편이 있는데 사랑을 안 해 줍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도 그 사람들이 열심히 득심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왜냐하면 즐거움을 못 찿으니까 그런 즐거움을 교회에 와서 충족하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뭔가 이렇게 참된 신앙과 신앙이 아닌것들이 뒤섞인것을 정확하게 구별을 해서 지도를 해줘야 합니다. 청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 아빠의 사랑을 충분히 받으면서 동기간이 함께 사랑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은 안그렇고 덜 그런데, 뭔가 가정에서 치인사람은 사랑 받아야할 관계에서 충분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망가진 관계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서 자신의 연약함이 성품과 고착되어서 죄성을 띠게 된 사람들, 그 사람들은 굉장히 이상합니다. 그렇다해서 남편한테 사랑받으면 교회도 나오지 말라는 말인가, 가정이 문제가 있으면 신앙 생활도 하지 말라는 말인가 하는 뜻이 아니라 그런 연약함을 본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고 영혼들을 돌보는 우리들도 알면서 그렇게 돌봐야 합니다.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뭐냐면 예수의 품에 안겨서 남편에게 못 받은 사랑, 엄마 아빠에게 못 받은 사랑, 동기간에 못 받은 사랑, 모두 예수님께로부터 충족한 어루만지심의 사랑을 받고 거기서 충분히 공급을 받을때 비로서 그 사람이 그렇게 결핍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굽어지고 찌그러졌던 성품들이 펴지면서 변화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간절히 열망해야 합니다. 교회의 영광이라는 것은 이세상에서 전사적인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매일밤 예수 그리스도의 품에 안겨서 신부로서 신랑에게 따뜻한 끌어안음과 애무 없이는 그런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교회가 실질적으로 가장 필요한 것이 신랑되신 예수님께 깊이 사랑받는, 그래서 여러분들이 교역자들도 있고 직원들도 있는데 직원들은 대부분 구역장이고 그러면 여러분들의 가장 큰 기도제목이 여러분의 구역 자체가 하나의 신부가 되어서 예수님이 베어주시는 왼팔의 팔베게로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서 구역장이 된 나부터 시작해서 이제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새 구역원에 이르기까지 사랑스럽고 순종을 잘하는 지체부터 아직까지 가시가 남아 있는 지체까지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의 구역을 당신의 품안에 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루 안아 주시는 그것이 가장 큰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교구와 교회학교를 맡고 있는데 똑같습니다. 여러분 기도제목이 분명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맡고 있는 그 부서를 예수님이 당신의 품에 안으셔서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연약한 지체부터 가시가 남아 있는 지체까지 어루만져 주시는 그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것을 적용하자면 여러분 자신들에게 적용되는데 다른 어떤 것보다 소중한것이 예수님 xx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사랑의 품에서 충분히 사랑 받는것보다 더 뛰어난 가치는 이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매주 회의를 하고 마음을 쓰고 지적을 하고 하면서 올바르게 목양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 때문 입니까? 그렇게 예수님께 사랑을 받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해 주시기 위해서는 또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반응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렇게 지체들을 잘 목양해서 그렇게 예수님의 품안에 안기는 것을 행복해하고 좋아하는 사람들로 실제로 주님이 어루만지셔서 그들을 변화시켜 주시도록 우리들이 노력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정말 내가 이땅에 살아 있는 것을 우리 주님께서 기뻐 하실까? 가장 커다란 기도의 제목이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정말 주님께 내가 이세상에 살아 있는 것같이 주님께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오직 성화를 위해서 노력하는 이유도 무엇 때문입니까? 성화되지 않으면 뭐가 나쁜것 입니까? 성화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십니까? 사랑하십니다. 변함없이 사랑 하십니다.
그런데 성화되지 않으면 문제는 그렇게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밖에 없는 귀한 신부라고 생각하시면서 우리 몸을 어루만지시다가 우리를 안고 잠드시는 것 같은 오늘 성경에 나와있는 이런 장면을 우리들이 경험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연합 그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성화를 위해서 애쓰고 노력을 한다고 볼수 있는 것입니다. 애들을 기르면 제일 먼저 부모가 해야 될 일이 아주 어렸을때 부모가 호불호를 정확하게 구분해서 아이들에게 표정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선악에 대한 관념을 심어주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싫어 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가르쳐 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목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보여줘야 하고 아이들이 조금 어렸을 때는 모르지만 조금 커서 한 살쯤 되면 착한일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지만 나쁜일을 했을때에는 XXX합니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는 도덕적 판단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것을 통해서 이것이 보편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이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야단을 치는 순간에도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엄마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신다 할지라도 나타나실때마다 XXX하고 나타나신다면 우리의 삶이 행복 할 수 있겠습니까? 원리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과거의 추억 가지고는 우리들이 절대고 행복해 질수 없는 것입니다. 그가 나를 기뻐해서 나의 집에 찿아와서 나를 자기의 품에 안고 잠드시는 그런 봉락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러분이 사역을 하지만 오늘 아침에 그런 생각을 했는데 제일 염려되는 사역하는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사역을 잘 못하고 늘 좀 떨어지고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걱정이 되는 사람들은 사역을 하면서 예수의 품에 안겨서 어루만짐을 받아본 경험이 고갈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언젠가 자신이 섬기고 살아가는 이 모든 동기가 예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반드시 들어 냅니다. 때가 아직 여름이기 때문에 상록수나 아니면 가을이면 잎이 떨어지는 나무나 모두 같이 파랗게 있는 것이지 때가되면 반드시 그것을 구별할 수 밖에 없는 그런 때가 되면 반드시 기필코 그것은 본인이 그러지 않아도 반드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부끄러운 모습이 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아픔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내가 죽는데까지 따라 가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절대로 주를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에는 아직 여름 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끌려가시고 사람들이 흩어졌을때 그때가 겨울이었습니다.
결국은 예수님이 잡히신 가야가의 뜰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많이 사랑하고 언제나 그분의 품에 안겨서 함께 동침하며 어루만짐을 받는 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괜챦습니다. 조금 능력이 부족해도 주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를 고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능력이 좀 떨어지지만 그는 결코 게으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데 어떻게 게으르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부족한 능력은 성실함으로 보완하고 떨어지는 재능은 부지런함으로 배워가면서 점차점차 나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일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늘 이야기 하지만 우리가 목회를 하면 다 무슨 수 백명 목회를 한사람 처럼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림을 그리면 모두 김중섭 화백같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람마다 자기의 그릇에 따라 사람을 쓰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일생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똥을 퍼도 진짜 그렇게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자신의 소명을 이루어가면서 사는 그 삶이 복된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뒤에 보면 애절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 입니까? 그러니까 밖에 노루와 사슴들이 있는데 노루와 사슴들이 부스럭거리거나 소리를 내고 하면 신랑이 깬다는 것입니다. 노루와 사슴에 부탁해봐야 못 알아 들으니까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내가 정말 부탁하는데 내가 신랑하고 있는동안 나를 위해 봉사를 해라. 노루와 사슴을 잘 간수해서 우리 신랑 좀 깨우지 말아라. 이렇게 이야기 하는것 보니까 이 신부는 잠에서 깨어 있습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신랑의 품에 안겨서 신랑이 자신의 온몸을 어루만지다가 손을 얹고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꺠면 신랑이 몸을 뒤척이면서 자기를 머리에 베게한 왼손을 빼고 자기를 끌어 안았던 오른손을 떼버릴까봐 그것이 두려워서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있는 가운데 마음속으로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밖에서 나고있는 바스락거리는 노루와 사슴 소리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제발 부탁한다. 나를 위해서 지금은 다 XXXX할 시간이니까 노루와 사슴을 부스럭 거리지 않게 도와달라. 이것이 그리스도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신랑의 품이 그리웠으면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쥐가 날텐데 말입니다. 결혼하고 얼마 안 됐을때인데 밤에 자는데 밤새도록 가위에 눌려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커다란 통나무가 배위에 올라와서 숨을 쉴수가 없어서 ‘숨을 쉬어줘’하고 고함을 치는데 안나와서... 그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신랑이 팔을 올려놓고 있는데 움직이지 못하고 가만히 신랑은 잠들어 있으니 힘이 안들지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쥐가 날 정도인데도 XXX에 좋은가 하면 신랑의 품에 안겨서 어루만져 지는 이것이 너무 행복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런것이 뭐냐면 교회가 환란이 온다하면 겁낼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랑을 떠나도록 흔들어 깨우는 노루와 사슴들의 소리는 그것이 환란이나 핍박이 아닙니다. 그래서 환란이나 핍박이나 칼이랴. 적신이나 위함이냐 칼이나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결코 꺼낼수가 없으리라. 환란이나 핍박이나 위함이나 적신이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허물과 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끊어진 것처럼 느끼게 할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공들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막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부주의하게 생각없이 그냥 막 살고 힘들다고만 하고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랑이 깹니다. 이런 세심함을 가져야 합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정말 내게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괜챦지만 예수님의 사랑이 나에게서 사라지면 어떻할까? 신랑되신 그분께 어떻게 할까? 두려워 하면서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섬세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미 안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소심하고 소심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나하면 ‘케어플리스’ 주의 깊음에서 비롯되는 소심함입니다. 죄가운데 있는 사람은 담대합니다. 어디에서 비롯되나하면 죄를 향해서 겁내지 않는 영적인 대담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죄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 그런 것입니다. 냉렬함 광기 대담함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운데 깊이 쪄든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심판 그런것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주의 깊음에서 오는 신령한 소심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신령한 교제를 충만히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아주 소심하게 살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될까? 내가 이런것을 기뻐하실까? 이것을 몇 년에 한번씩 하는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마다 하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매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실까? 이런 마음은 싫어 하실텐데 어떻게 하나 내가 벌써 그럼 마음을 가졌었는데... 이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신랑의 품에 안겨서 어루만짐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신부로서의 교회의 모습이고 성도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 기도하면서 여기저기 들려오는 이야기들... 교인들이 왜 이렇게 거칠고 대담할까? 물론 세상적으로 보면 커다란 잘못은 아니지만 어떻게 이렇게 대담할까? 좀 이렇게 예수님이 보시기에 애처로울 정도의 마음 씀, 신령한 소심함 그런것들에 마음을 쓰는데 예수님이 괜챦다 그렇게까지 너무 마음쓰지 말아라. 그렇게 살아야지. 예수님이 너 그렇게 살면 되겠냐? 아이 괜챦아요 예수님 뭐 그정도 가지고 그래요. 너 이렇게 되면 안 될텐데. 성령님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다른 사람들은 더해요 괜챦아요 뭐 이정도 가지고 그러세요. 이렇게 하면서 사니까 사람의 삶이 예수님께 사랑을 받는 애뜻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성 자체도 말로는 주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아주 거칠어지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렇게 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마음속이 교회가 이렇게 되도 괜챦을까? 아파하고 내가 이렇게 되도 괜챦을까? 고통하고 하면서 어떻하든지 신랑의 마음에 맞게 해야합니다. 그래서 그분의 친교와 사랑이 자기에게서 떠나가지 않기를 깊이 고민하면서 그렇게 살아갈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경회는 바로 그렇게 신랑이 멀리 떠났을때 신랑이 가버렸을때는 신랑을 찿아 가야 합니다. 그런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런 결단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 이러한 사경회 그다음에 참회의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애뜻하게 예수님의 품안에서 항상 어루만짐을 받으면서 살고 신랑이 잠든 그 순간에도 조용히 눈을 뜨고 예루살렘의 여자들에게 노루와 사슴을 인하여 부탁하는 그럼 마음을 가지고 살지 않을때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들은 다시 그 신랑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그 품으로 돌아가서 어루만짐을 받으면서 살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런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현장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어떤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으로 듣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느 교회 신방에서 만나서 이야기 했는데 사경회에서 어떤 말씀을 깨달았는가? 했더니 하는 이야기가 자기는 너무 감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감탄하고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 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하고 나하고 나이 차이가 별로 안나는데 어떻게 목사님은 그렇게 설교를 잘 하십니까? 그래서 감탄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난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것이 아닙니다. 설교들도 사라지고 세상도 사라지고 정말 우리들이 만나야할 그 신랑의 품에 안겨 그 어루만짐을 받고 이세상에서 정말 예수님이 나를 이 모든 세상도 사랑하시고 나를 당신에게 있어서 전부인것처럼 사랑하신다고 생각 할때 우리는 고난도 이길수 있고 사역에서 오는 견디기 힘든 통증들도 이길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역이 힘들고 일이 어려워서 우리들이 넘어지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신랑의 사랑이 없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여러분들한테 미안하지만 나한테는 이야기 합니다. 뭐 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들이 전도할 때 초대교회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낍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설교를 하다가 사도 바울처럼 투옥을 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받을 대접 받으면서 우리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뭐가 힘듭니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수시로 교회 전체적으로 혹은 자기가 개인적으로 예수님의 팔베게를 하고 안겨서 어루만짐을 받는 그 은밀한 사랑의 기쁨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 죽음 이런것들이 파무치는 그런 세상 속에서도 향기로운 인격을 가지고 주님을 나타내는 편지처럼 살아갈수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예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말씀에 탁월한 인식을 가졌더라도 오늘 그 신랑의 품에 안겨서 그 사랑을 받고 어루만짐을 받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동기에서 사역을 감당할 수도 없고 사역을 감당하면서 향기로운 신앙의 인격으로 여러분들이 다시 빚어 질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번 사경회에 깊이 은혜를 받고 절대로 객관적으로 말씀을 듣지 말고 건성으로 흘려보내고 테이프 다시 듣지 그러지 말고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정말 예수님의 품에 안겨서 그렇게 살수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 거룩한 사랑에서 자라감
“왕이 침상에 앉았을 때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뿜어냈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주머니요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아1:12-15)
우리안에 뭐가 있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비추어서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기까지는 우리 자신도 잘 모릅니다. 흔히 잘 속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어떤것이냐면 우리가 무엇인가 일을 열심히 해 나가면서 그 일이 잘되는 것 혹은 자기가 그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이 곧 자기안에 믿음이 있는것이라 혹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있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근데, 그렇지 않은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이 솔직히 얘기하면 개척을 해서 담임목회를 할때보다는 전도사때 목회를 훨씬 더 열심히 했던것 같아요. 그렇게 보면은 20년 넘게 목회를 한샘인데 20년동안 목회사역을 돌아보고 나니까 열심히 일하는것도 힘들어요. 왜냐면 우리의 육체가 싫증을 느끼니까
게으름에 빠지니까 열심히 목회를 하는것도 참 힘듭니다. 근데 열심히 목회하는 것도 힘들지만 그거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이 우리안에서 계속 증대되어 가는 것이죠. 그것이 열심히 일하는것보다 훨씬더 힘듭니다. 일은 일 자체가 일로 이끄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데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빛 그 빛앞에서 무릎을 꿇고 그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아버지의 말씀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러한 귿은? 필요하고 그 말씀앞에 끊임없는 깨어짐의 아픔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으로 점차점차 변해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목사님들이 여러분 모였고 그분중의 한분은 영국의 유명한 신학교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교수로 계신분이 었는데 같이 모였다가 헤어질 때 제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목회를 하는 것은 조금 어려운데 목회를 하면서 자기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은 많이 어렵더라. 그리고. 이 사역을 하면서 정말 자신의 마음이 자칫 잘못하면 완악해져가는데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은 정말 사실이고 거기로부터 자기자신을 지키기위해서는 일에 대한 열망 못지않게 자기자신의 거룩과 완덕, 삶에대한 집요한 목표, 불타는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는거죠. 그렇게 되지 않으면 우리는 어느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으로 발견되요. 다만 일을 하는 그런 사람으로 전락될 수 있다라고 하는 거죠.
오늘 성경에 보면은 덮은 우물, 봉한샘이 나옵니다. 바깥에서부터 묘사하면서 점층적으로 안 으로 들어가는 그런 방식의 서술을 보여주고 있죠. 항상 이 부분을 읽으면서 눈을 감으면 아주 그 왕만 드나들 수 있는 비원이 있고 비원안으로 들어가면 중앙에 동산이 있고 동산안에 들어가면 그 은밀한 곳에 우물이 있고 보지 못하도록 살짝 덮여있고 나뭇잎파리 같은걸로 덮여있고, 그리고 거기서 더 들어가면 그 한가운데는 우물을 우물되게 만들어 주는 샘이 있는데 그것이 철저히 봉해져 있는것이죠.
무슨뜻이냐면 오직 한 사람에 대해서만 허락이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그런것이란 말이죠. 그래서 사랑의 속성 자체가 그런것이예요. 사랑의 성격 자체를 기쁨과 소중히여김. 딜라이트와 벨류에이션이라고 보다면 딜라이트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얼마나 큰지 나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거나 미워하는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게 집중된 것이 사랑의 기쁨이예요. 또하나는 그 하나만을 소중하게 생각한 나머지 다른 하나는 아무것도 아닌것처럼 버려진것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벨류에이션입니다. 이런한 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성격이예요. 우리의 신앙의 인격은 결코 일에 의해서 저절로 다듬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중심자리에 있는사람들이 강포하고 완악하고 하나님의 은혜와는 거리가 멀고 포악하고 인정없는 이런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보는지 모릅니다. 이런것들은 결국은 그 사람 자신의 이 거룩한 삶에 있어서 진전이 거의 없는 일만하면서 살아가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일을 마치 자기자신의 거룩을 방해하는 적수인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거룩하게 만드는 힘이 그안에 없듯이 또한 일은 하나님을 거스리게 하는 요소자체를 일안에 가지고 있질않아요. 그러면 무엇이냐 일과 관계를 맺는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지 일 자체안에 그런 것들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얘기죠. 그래서 일을 많이하면서도 그 일을 통해서 일과 상관없이 하나님과 끊임없이 만나고 그 안에서 자기의부족을 발견하고 주님의 성품의 빛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를 갈망하게 되요.
어젯밤에 우리 아들이 오늘부터 시험입니다. 저녁에 저녁에 잠깐들어가서 한 10 분동안 간단히 얘기를 했어요. 너무 길게하면 우리집사람이 싫어할거 같아서 10 분 얘기했는데 두 가지를 얘기 했어요. 첫째는 공부의 수준을 높이 잡아라. 이렇게 근근이 공부해서 중간고사라도 잘 맞으면 그걸로 만사오케이다 라고 생각하면 너는 결코 지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없다.무엇을 하든지 이 공부수준을 높이 잡아라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원서들을 읽을 채비를 하는 그런수준으로 잡아서 영어공부를 해라. 그리고 다른 공부도 마찬가지고 세가지를 얘기했네요.
또 하나는 학교공부에 매달려서 저렇게 살아가는것을보면 참 측은해요. 지금 읽어야하는 책들이 너무 많거든요. 엊그제 신문을 보다가 민족사관학교의 필독도서목록을 봤어요. 근데, 나도 꽤 책을 읽는가고 읽엇는데 2/3가 내가 안 읽은책이예요. 물론 그 시절때하고 지금하고 시대가 다르고 새로나온 책들이 많이 나왔으니까 하겠지만 나는 이런생각을 햇어요. 이런 정도의 추천서를 한국의 대학을 나온 소위 지성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중에 몇권이나 읽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중에는 고1 필독도서속에 최근에 나온 숙명의트라이앵글-로암츔스키의 책까지 들어있더라구요. 그것을 보는 순간 참 맘이 많이 상했습니다. 지금은 늦었습니다. 지금 그런 책들을펴놓고 탐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앞에 참 죄송스러운 일이예요. 그럴 시간이 엇어요. 그래도 여가시간이라도 봐야겠다 싶어서 목록을 작성에서 주문했어요. 이런책들을 정신없이 읽어야 하는데 학교 공부땜에 읽을수가 없어. 그래서 부지런히 효율적으로 공부해서 일주일에 5-6 시간이라도 시간을 냇거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지성의 기반을 다져야한다. 그래야 니가 폭넓고 깊은 사고를 하면서 무엇을 하든지간에 뭔가 지도자의 길을 걸을수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면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무릎을 꿇어라 공부하다 너무 힘들면 무릎을 꿇어라. 그리고 간절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그러면 하나님이 도와주신다. 나는 그것을 수없이 경험했어. 하나님 너무 힘듭니다. 너무나 내 몸이 약합니다. 내게 힘을 주셔야겠습니다. 그러면 힘이 생김니다. 읽어나가는데 다루고 있는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어느 한부분이 이해 안가요. 그러면 책을 펴놓고 엎드려서 지식의근원이신 하나님, 내가 빛을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하면 열어주십니다. 제가 엊그제 영국사람 심방을 했습니다. 상담을 할때 직접 말하기도 하고 복잡한건 통역을하기도 하고 했는데 설교까진 통욕을 할순 없잖아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유학을 한적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는데 그래도 이영혼을 돌봐야하지않겠습니니까? 하나님 제게 말할 수 있는 제능을 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입을 열어주세요. 한 30분 설교했어요. 끝나고 나면 다시 안되요. 저는 그런 것을 영어설교를 몇 번이나 경헙했어요. 성령님이 붙들어 주시면서 나도 모르게 영어가 나와요. 엊그제 한 자매님도 고백하잖아요.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하고 미국으로 유학갔는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것같아서 영어도 다 잊어버리고 아이들 데리고 어떻게 여기와서 유학하나 하는데 갑자기 교회에서 한국에서 오신 자매님이간증을 통해서 간증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하는거라.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합니까? 입을 열었더니 자기도 모르게 청산유수처럼 영어가 막 쏱아져 나오더래. 오웬은 그것을 지식의 은사라고 부릅니다. 근데 탁월하게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세요. 정말입니다. 시험해보세요. 신학서적을 읽을 때 일목요연하게 적응이 되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십니다. 이런식으로 공부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면 살아가는 것을 연습하는거에요. 그것이 끊임없이 영혼과는 상관없는 수학을 풀고 사회를 외우고 국어를 공부하면서 자기의영혼에 하나님이 일하기게끔 허락하는 일이다라는 거죠.
그래서 일을 어떤방식으로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정말 역동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앞에서 변화가 되면서 살아갈수 있는것이예요. 우리는 흔히 일은 내가하고 일이 아닌 진짜 기도해야 되는 것 그런것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고 그분을 위해 있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우리구주 예수 그리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드리는 보은 헌신과 사랑 경배와 우리의 모든 기도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올려지는 것이예요. 그래서 일을 안할 수는 없거든요. 지금 눈을 들어서 희어져추수하게 된밭을 보십시오. 게으르고 일을 한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빨리 안오는겁니다.
어제 오셨던 그 목사님은 오엠의 선교사로 영국가서 선교사로서 바울이 쓴 연구서를 써서 호평을 받으셨는데 50대 초반인데 영국의 교회가 30년동안 오천개가 문을 닫았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자랑하는 교회가 감리교 교단인데 뭐라고 자랑하냐면 우리교단은 영국에서 다른교단이 따라올 수 없는 교인수를 자랑한다. 한 교회당 50명씩이나 모인다. 이게 감리교의 자랑이예요. 그럼 다른교회는 어떠냐? 다 문닫고 쇼핑센타로 나이트클럽으로 심지어는 교회당을 혈자는못하게 하니까 교회당을 쪼개서 종탑에 집, 강단에 집, 성가대에 집, 이런식으로 원룸스타일로 만들어 팔아먹는다. 이분이 런던 바이블 칼리지에서 강의를 하는데 330명인데 그 중 60명정도가 해마다 졸업을 하는데 12명정도만 풀타임으로 일하고 나머지는 신학공부마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간답니다. 왜 그러느냐 고용해 주지 않기 때문이죠. 스스로 개척하는 일이란 있을수 없다는 거예요.
어떤 교회에서 9명이 남았는데 도저히 운영이 안되서 문을 닫고 흩어지자고 하는걸 조금만 더 견뎌보자. 결국은 이 목사님이 그 교회를 맡아서 개척한거나 마찬가지죠. 갈 때 여러 가지조건을 말하는 가운데 매을 매주 전도해야한다. 영국사람들은 가정을 ‘성’ 이라고 부르는데 아무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무식한 행동인데 영국에서 한국식으로 전도를 했는데 ‘여호와의증인’들 인줄 안다는 거죠, 그래도 해야한다 지금은 100 명이 나와요 지금은 있을수가 없어요. 축호전도, 거기가 미국의로 말하면 베버리힐스같은 억만장자들이 사는 동넨데 그런 동네에도 전도를 통해서 복읆을 받아들이고 BBC방송 부사장이 셰수믿고... 그런 간증이 많이 나와요.
우리들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면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예전에는 저의 꿈이 일찌감치 사역을 정리하고 아름단운 숲속에서 좋은 글을 쓰고 일생을 마치는 것이었는데 지금은 오래전에 버렸어요, 아마 하나님이 그렇게 안해주실것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면 이 세상에 할 일이 너무너무 많아 그 외치틑 수많은 영혼의 울부짖는 소리를 진정 시킬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해야합니다. 그래서 이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을수 없는 죄중의 하나는 시간을 낭비하면서 사는 삶이예요. 그건 있을수 없는일이고 하나님 앞에 너무 죄스러운 일이예요. 그래서 힘있는데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돼요. 그렇게 하면서도 우리 자신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의 비밀들을 더깊이깊이 터득해 갈수 있어야해요. 이게 우리가 거룩해져가는 길이고 우릿 신앙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 더 온전하고 사랑스러워 가는길이예요.
그래서 가장 바깥으로는 외형적으로는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그 다음 내포적으로는 우리의 존재 그 자체 인격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실수 있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이 이 땅으 홍수로 심판하실 때 개탄하셨던 것은 무엇이냐면, 그 마음의 중심의 계획과 생각이 악할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그 마음이었거든요.,
성경에 보면 가끔, 인간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정말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어요. 다윗과 같은 사람,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했다 그랬거든요. 사실은 하나님이 그 말씀을 하실 때 다윗이 무슨 하나님의 일을 엄청나게 했나요? 양떼나 치는 목동에 불과했거든. 하나님 마음에 합했다는 것은 양떼를 치고 일을 하는 그런정도가 그 사람속에 있는 마음이 당신의 마음에 합당했다는거죠. 마음에 합당했기 때문에 아주 귀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끊임없이 1년을 사역하고 나면 1년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뵙고싶고 더 하나님 나라에 가고싶고 10년을 사역을 하고 나면 10년전보다는 비교할수 없을정도로 주님을 더 많이 닮아있고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더 깊ㅇ은곳을 감찰할수 있는 성숙한 안목을 거룩한 안목을 가진 그런사람으로 우리 자신의 끊임없이 영적으로 성장해가고 거룩해져 가서 하나님이 이 세상일을 끝내고 내게로 오라 이렇게 부르시는 그날이 우리의 상화의 최고의 수준이 달한 그날이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주님께 기쁨이 될겁니다. 주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만약에 미끄러진 날에 우리를 부르신다면 주님이 결국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것이지만 얼마나 부끄럽고 슬프겠습니까? 끊임없이 성화되어서 주께서 부르신 그 날이 이 지상의 생애 가운데 도달했던 최고의 거룩한 날, 주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날, 그런 날이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받으실겁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