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26일 새벽예배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9-10).
몇 일 전에 말씀드린바와 같이 멜기세덱은 밑도 끝도 없는 제사장입니다. 그 근원을 알 수 없어 하느님에 제사장 이였다는 것. 그리고 아브라함을 맞이하고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에게 10일조를 드렸다는 것. 이렇게 그냥 이해되고 있습니다. 근데 구약에서 매우 신비한 존재이죠. 근데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을 멜기세덱에다가 비교하는 이유는 사람마다 스승이 있고 제자가 있고 가문이 있고 그래서 제사장에 대제사장에 직분은 아론에 후손들만 하는 거거든요. 그렇게 이어 내려오는 혈통이 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대제사장이라고 하시면 어느 반열에 세우면 되겠어요? 누구 반열에 세우면 되겠냐고? 세울 수가 없죠. 우선 그 분은 사람에 혈통을 따라서 죄인의 사람을 쫒아서 태어나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세울 수가 없죠. 그러나 구약에서 아무리 뛰어난 대제사장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자기 태어난 가문이 있고 선임자가 있고 그죠? 아버지가 있고 이렇게 나가는 거죠. 예수님이 비록 마리아에 몸을 빌어 태어나셨지만 사실 요셉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성령으로 잉태돼서 태어나셨는데. 그러니깐 그런 관점에서 보면은 예수님을 그런 식으로 세울 수 없었다 라는 것이고요. 또 하나는 대제사장끼리는 그들이 하는 사역이나 일들이 모두 같았고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건 뭐냐면은 일시적인 제사를 지내서 제사를 지내서 일시적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을 화해 시켜주는 역할을 한 사람들이죠. 근데 예수님은 단번에 임시적 제사가 아니라 영원한 제사로 하나님께 드림으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화목케 하는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 일을 한 사람이 있으면 예수님이 그 뒤에 서시면 되겠는데 없다 이거죠 아무도. 그러니깐 누구 뒤에 줄을 세워서 계보를 만드는 것이 예수님에게는 불가능 했다 이거죠. 그런데 제사장이시란 말이에요. 대제사장이시란 말이에요. 근데 히브리서를 쓰는 사도 바울이 이걸 썼다고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만은 그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깐 그 예수님이 대제사장이시면서도 사람에 계보에 속하지 않는 사람 그런 신비한 인물을 찾으니깐 구약에서 딱 한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멜기세덱이 나오는 거예요. 멜기세덱을 딱 세우면서 멜기세덱에 반차를 쫒았다. 반차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반차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제사장들이 말이죠 대제사장 말고 제사장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드렸잖아요 이렇게. 그래서 제사장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가 굉장히 많았다 그래요. 예수님 시대 때 그렇죠 뭐 예수님 시대 때 세레 요한 시대니깐 그때 예루살렘에만 예루살렘을 위시해서 이스라엘에 있는 제사장들 수가 얼핏 기억이 나는데 숫자가 정확하지는 않아요. 거의 맞을 껍니다. 18000명 가량 됐다고 그러니깐 제사장들도 뭐 그 당시에는 제대로 생활비를 주고 그러기 보다는 자기 직무하는 날이 오면 가서 직무를 수행하고 그러면 다시 자기 고향으로 내려와서 농사를 짓고 살던지 짐승을 키우고 살던지 그런 식 이였다 그래요. 구약 시대에는 우리 정확한 수요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랬단 말이죠. 근데 그렇게 돌아가면서 하는 걸 이야기 하는 게 반차거든요. 그러니깐 멜기세덱에게 예수님이 멜기세덱에 반차를 세웠다 그러니깐 결국 표현은 그렇게 했지만 구약에서 밑도 끝도 없는 대제사장 멜기세덱 같은 그런 존재로서 예수님이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에 그 근원을 캐자면 이 세상에 없던 멜기세덱하고 예수님하고 아론하고 그 후에 대제사장들하고는 그 혈통적인 관계가 있지만은 멜기세덱하고 예수님하고 무슨 혈통적인 관계가 있어요. 그러니깐 비유를 그렇게 한 거죠. 그러니깐 결국은 뭐냐면은 밑도 끝도 없는 분이시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을 멜기세덱을 파고 들어가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은 예수님을 파고들어가도 마찬가지라 이거에요. 그런데 다만 근원을 캐서 파고 들어가면 하나님이 직접 보내신 분이시다. 그래서 이 지상에는 밑도 끝도 없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사람에 몸을 입고 태어나시고 그리고 죽으신 다음에는 그 육체가 하늘로 올라가셨으니깐 그야 말로 밑도 없고 끝도 없는 그런 존재로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화목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셨던 거에요. 그런 모든 영광스러운 일이 어떻게 이루어 졌냐 하면은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케 되셨은 즉 이 얘기에요. 왜 그렇게 얘기가 나오는거에요. 예수님이 사람에 몸을 입고 하나님에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다라는 것 자체가 대단한게 아니라 그렇게 오신 모든 낮아지심이 겨냥하고 있는 마지막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는데 그것이 뭐에요 우리를 위해서 당신 자신을 화목 제물로 바쳐서 제사를 드리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여시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 아들을 화목제를 위한 제물로 받으실 때에 어차피 죄 없는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니깐 그냥 받으시면은 되는 데 이 세상에서 온갖 고난과 쓰라림을 다 맛보게 하시고 거기에서 받으신 그 고난을 통해서 아들이시라도 온전케 되시는 그 순종을 통해 성촉하셨을 때 그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신 거에요. 이것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대하는 바였어요. 그게 뭐에요. 순종이요 순종. 그래서 믿는 도리에 순종 그 믿음을 통해 복음에 도리를 믿는 순종 그리고 그 복음에 도리를 통해서 거룩해져가는 거룩함에 순종. 그리고 복음에 계시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예배에 순종. 이런 모든 분야에서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 당신이 보내신 아들과 더불어 화목한 하나님에 자녀들을 향한 우리 하나님 아버지에 간절한 기대였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이신데도 순결하긴 대로 고난을 통해서 더 온전케 되고 순종을 배우게 하셔서 그래서 당신 자신에 몸을 대속 제물로 드리는 하나과 우리 사이에 대제사장이 되게 하신 거에요. 이런 도리를 기억해 보면 정말 우리에 믿음에 결국이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걸 배우게 되는 거죠. 그게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요. 그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어요. 죄도 죽일 수 없고 그 다음에 거룩함도 이룰 수 없고 하나님과의 친교도 없고 둘 중에 하나만 남아요. 외식하는 삶만 남던지 배교적인 삶이 남던지 둘 중에 하나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온전하고 순전한 당신에 아들인데도 받으신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워 온전케 하신 후에 그 아들에 희생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순결하지 않고 죄가 많은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순종해야 되겠느냐 라는걸 알 수 있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들이 겨우 거룩해져 갈 수 있기 때문이죠.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