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3월 3일 새벽예배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히 5:14).
그 바로 앞부분에서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이는 의인에 말을 경험하지 못한 자들이다. 이렇게 나오죠. 확실한 사실 하나는 무슨 신자를 계급으로 나누는 것은 아니지만은 확실한거 하나는 신앙의 성장에 과정과 정도에 있어서 어린아이에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있고 어른과 같이 장성한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알 수 있죠. 근데 그렇게 어린 아이에서 어른으로 이렇게 정상적으로 자라가는 것 이라면 은 문제가 다른데 영적 그리스도에서 다루는 것과 같이 근데 이제 그런 거거든요. 정상적으로 이렇게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에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다는 거죠. 어린 아이 상태가 병적으로 아주 길다 이거죠. 그러면 결코 그 사람이 건강한 신앙생활 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런 유아 상태로부터 벗어나서 그래서 장성한 불량에까지 성장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뭐냐하면 의인에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여기에서 의의라고 하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만 은 그 의의는 이제 청교도들에 의하면 은 특별히 지은 오연에 의하면은 의의를 세가지로 나눕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은 속성적인 의의라 해서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자신의 성품으로서에 의의를 말하는 거죠. 그건 뭐 우리가 본받고 그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죠. 원래 그 의의라고 하는 것은 당신에 거룩함을 해치는 모든 것에 대항하는 하나님에 성품이에요. 그러니깐 하나님에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라고 하는 것이 위로가 되죠. 왜냐하면 그 의로운 성품 때문에 자기가 부딪힐 일이 없으니깐. 그러나 불의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의로우시다 라는 사실이 항상 두려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속성에 부딪히니깐. 그게 속성적 의의고 두 번째는 율법적 의의에요. 율법적 의의라고 하는 것은 율법에 기록된 사항들을 지킬 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의의가 되는 것이죠. 세 번째는 뭐냐 하면은 복음적 의의입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 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잖아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하면 복음적 의의다. 복음적 의의는 우리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 다음에 다시 사셔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는 의의를 가리키는 거죠. 그니깐 속성적 의의는 율법적 의의를 요구 하는데 율법적 의의를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스른 자들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당신에 거룩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 백성들을 이 세상에 인간들을 심판하는 것이 속성적 의의에 발현이라는 것이죠. 근데 사실 그렇게 하면 누구도 하느님 앞에 살 수 있는 인간이 없으니깐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복음적 의의를 덧입혀 주셔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받아 들여지게 하시는 거란 말이죠. 이거거든요. 근데 그런 의의가 결국 그런 의의에 대한 하나님에 말씀이 있다해서 결국 그것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성이 되잖아요. 그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그 사람이 장성한 사람이 되어간다 이런 이야기죠. 그래서 이 의의에 개념이 아주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제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상세하게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나오는 이야기가 그 연장선상에서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이런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말씀을 경험하고 신앙이 어른처럼 된 사람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다 이거죠. 그래서 진짜 우리의 몸에 충분히 영양분으로 공급해 줄 수 있는 음식들은 유아식이 아니라 어른들이 먹는 음식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런 것들을 충분히 섭취하고 힘을 내게 될 때에 어른들로서 적합한 활동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많이 먹고 그 다음에 많이 힘을 써서 그게 활동함으로써 그러면서 점점 몸이 튼튼해지고 이제 자기가 이 세상에 자기 몫을 감당하면서 살아가는 거잖아요.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래서 그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거기에서 구원 받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믿음이 자라고 그 다음에 어른이 되는 그런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오늘 여기에서 세 가지를 들고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지각을 사용한 자이고 연단을 받은 자이고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다. 이 지각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에 말씀을 경험하고 나야지만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각이 생겨나고 또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한 지각이 생겨납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그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리고 부패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영적인 침체나 이런 것들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경험함으로써 그가 장성한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에 그는 영원한 것들과 신령한 세계 그 다음 영혼의 비밀한 세계에서 눈이 떠지게 되고 거기 있는 많은 것들을 지각하게 되죠. 죄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그 다음에 만져지지도 않는데 그것들을 파악하게 되고 알게 됩니다. 그들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도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데 신령한 안목들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자잘한 것이라도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되고 그것들이 자기 안에서 움직이면서 어떤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들이 눈에 파악이 되기 시작한단 말이죠. 이런 모든 지각들이 생겨서 그들을 사용함으로써 그런 것들을 싸워오고 죄를 죽이고 할 수 있는 그런 안목들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이게 결국 지각을 사용한 사람들에 신앙 생활이란 말이죠. 두 번째로는 뭐냐 하면 지각을 사용하고 연단을 받은 사람이다 이랬잖아요. 이 연단을 받았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받는 환란과 고통 시련 이런 것들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면서 뭐라고 그럴까 단련되는 것을 말하는 거죠. 예를 들자면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별로 중요한지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책망하시고 자기에게 주신 영혼에 좋은 것들을 잃어 버리고 그래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 들어가고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아 이게 잘못됐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더 많이 깨달아서 이제 다시 선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사는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도달하고 도달하고 하면서 이미 받았던 확신이나 이미 받았던 확신을 통해서 갖게 되는 더 세부적인 확신들에 대해서 이렇게 확인을 하고 또 점검을 받고 하는 가운데 그런 것들이 이렇게 다져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에요. 다져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렇게 해서 이제 계속 다져지는 가운데 단련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제 확신같은 것들이 굳어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이렇게 선한 뜻을 가진 것들이 다져지고 다져져서 그래서 웬만한 것으로 흔들 수 없는 그런 것들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장성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것이죠. 신앙이 그런 식으로 성장한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선악을 분별한다 라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선악은 이 세상에서 선과 악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다 판단력을 가지고 있죠.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선악을 분별한다 라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본성에 빛으로도 판단할 수 있는 선악에 분별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악이 시작되는 그 맨 초기부터 다시 말하면 선하고 악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데 있어서 영적인 안목을 함께 갖게 되었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단순한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본성에 빛으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잖아요. 그렇지만은 진짜로 영적인 신앙에 세계로 들어가게 되다 보면은 사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사실은 잘 판단이 안된단 말이죠. 그러니깐 쉽게 이야기 하면은 지식이 너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오늘도 어저께 밤에 열린 신문 나오걸 보니깐 어떤 형제가 글을 쓰셨는데 새가족반이라니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무얼 그런거 정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렇게 투덜대는 새가족반 말을 들어봤는데 그 다음 말이 재밌어. 들어갔는데 자기 생각하고는 조금 다르고 묻느니 모르는 것뿐이요 대답하자니 아는 것이 없었다. 똑같애 표현이. 묻느니 모르는 것뿐이요 대답하자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 것들이 지식이 전무하니깐 그게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 없어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그리고 그 무지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도 없죠. 저도 매일 같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 죄의 세계애 대해서 무지한가 라는 것을 저도 매일 뼈저리게 느끼면서 공부를 하니깐 여러분도 저와 같은 마음 아니겠어요. 그러니깐 그렇게해서는 우리들이 장성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더 많이 알도록 한편으로는 지적으로 깨달아 알게 기도하고 깨달아 알도록 부지런히 알도록 하고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열어 주셔서 그것들을 더 깊이 연단되어서 그래서 내 지식이 되도록 기도하고 그렇게 해야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