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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1월 13일 새벽설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어제는 담대함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담대함은 핍박에 있어서 강도를 이기기 위한 그 대비가 된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어서 나오는 이 인내는 그 핍박의 시간적인 길이를 참는데 매우 유용한 대비책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우리에게 인내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그랬는데 여기서 약속을 받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약속이야 뭐 핍박을 받기 전에도 주어지죠. 여기에서 약속을 받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그 약속이 자기에게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성경에서 하고 있는 많은 약속들이 있는데 사실 그 약속들은 믿는 모든 사람들을 모두 그리로 부르는 것 같잖아요.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그런 약속들이 객관적으로 주어지지만 또 믿는 사람 누군든지 그 약속에 참여한 바가 되지만 내가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정말 하나님이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셨구나, 그리고 정말 그 하나님이 나같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허락해 주셨구나하는 것을 체험하게 될때에 그때에 그 약속이 단지 객관적인 약속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거기에 참여한 그런 약속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여기에서 약속을 받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 약속이 자기에게 실현되는데 참여한다라고 하는 의미예요. 그런 의미에서 이 약속이 바로 약속을 받는다라고 하는 의미죠.
실제로 우리의 신앙이 고도의 감격을 누리고,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그 아주 중요한 비결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또 그 말씀이 자신의 삶 속에 온전히 이루어지게되는 이런 놀라운 변화를 통해서 우리들이 고도의 감격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죠?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라고 하는 약속은 그렇게 감격적이지 않지만 내가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고 그 은혜의 감격을 누리게 될 때에 그때 경험하게 되는 기쁨과 이루 말할 수 없죠. 그럴 정도로 너무너무 행복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감사한 거예요. 이루 말할 수 없는거예요. 그런 것이 바로 약속을 받는다는 것이거든요.
그런 약속을 받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냐면 절대로 인내가 필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내가 필요하고, 이 인내를 통해서 그래서 배교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인내가 무엇인가? 하기 싫을 때까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행하라고 하는 성경의 요구가 있고, 또 성경에는 우리는 너무 하고 싶은데 그것을 하지 말도록 하는 요구가 있어요. 따라서 이 인내도 역시 하나님 앞에서 하기 싫은 것을 행하기 위해서 참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하고 싶은데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행하지 않기 위해서 참는 것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한편으로는 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참고, 또 한편으로는 안행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참는 것이죠. 똑같이 양쪽이 어느 경우든지 간에 하기 싫을 때까지 참는 것은 인내가 아닙니다. 그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죠. 인내라고 하는 것은 하기 싫을 때까지만 안하는거, 혹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까지만 하고 그 다음에는 안하는 거,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인내가 아니예요. 하기 싫을 때까지만 행하는 것은 인내가 아니예요. 인내는 마지막까지 그걸 참아내는 거죠. 그리고 그 일의 목표가 요구하는 분량에까지 끝까지 인내하면서 그것을 참아내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에서 인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내는 매우 중요해요. 왜냐하면 핍박이 한번 잠깐동안 주어지면 담대함 하나로 이길 수 있겠지만, 그것이 오래도록 계속 된다는 거죠. 꼭 핍박이 아니라 시험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이라도 그 시험이 잠깐 왔다가 몇 시간만에 사라지는 것은 우리가 시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험은 항상 장기간 동안 우리곁에 머물면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해요. 그래서 시험한다라고 하는 것은 충분히 괴롭혀야지만 시험이 되는 거예요.
어떤 물건을 갖다 놨는데 이 좋은 물건이 각각 좋은 품질인가 시험하기 위해서는 한참 걸려요. 요즘 보면 무슨 자동차 회사에서 왜 자동차를 나눠주면서 1000대씩 나눠주며 시험한다. 3~4시간 타보고 어떠냐고 물어보지 않죠. 1년씩 빌려주죠.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죠.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말하자면 100m달리기가 아니고 기다란 마라톤과 같아요. 우리의 믿음의 길에 보면 하나님 앞에 정말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인정 받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서 미끄러지는 사람도 있고, 신앙도 별로 없는거 같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좋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하나님 앞에 다시 세움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기간이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이 인내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이 끝까지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한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실패의 궁극적인 원인 중의 하나가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오래도록 참아야 해요. 여러분들이 주위에서 보석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또 세월이 흐르면서 자신의 인격과 삶 속에 많은 성화의 진보를 보았던 사람들, 예수님의 형상을 많이 소유하게 된 사람들을 보면은 모두 오래 참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래 참으면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무엇이고, 그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사람이예요. 핍박도 오고, 환란도 오고, 고난과 어려움도 많이 오지만 그 시련과 환란, 그 고난을 통해서도 끝까지 참고 인내했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향기로운 신앙의 인격을 발하게 되고, 또 마음 속에 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승리의 약속들을 받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예요.
이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게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께 부름 받은 표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예요. 그래서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 사람들이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전해주는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도바울을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중에는 12사도가 사도지 아니 다메섹 가는 길에서 하나님 혼자 만났다고 자기가 그러는데, 그게 진짜인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가 진짜 사도겠느냐? 그러면서 사도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수용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그때에 바울은 자기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사도직이 부인당하고 나면 자신이 가르치는 것이 모두 거짓이 되니까 사도라고 하는 사실을 변명했습니다. 그때에 내가 사도가 된 표가 있는데,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인내였고 하나는 기적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공교롭게도 인내가 먼저나온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진짜 예수님이 세워주신 사도가 아니라면 내 사도직이 정말 예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면 내가 이렇게 참을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사도가 자신의 사도직을 변명하는데 자기의 인내를 증거로 제시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이 사도바울이 참고 인내하는 것에 대해서 3번이나 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 사람이 오래 참은 사람이었는가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래 참고 하나님 앞에서 살았던 이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사랑의 성품을 인내 안에서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죠. 예수님이 바로 바울에게 이러한 감화를 끼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핍박과 고난속에도 오래도록 인내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인내하는 삶, 인내하는 그 인격적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있는 인내하시는 모습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사랑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적으로 볼때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세가지로 이루어지는데 오래참음과 자비와 긍휼이예요. 그것이 바로 사랑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약속을 따라서 살고, 마지막에 그 약속이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까지 보아야겠는데, 그때 우리에게 오는 이 시험과 어려움들이 너무 많고 참고 있는 동안에는 반드시 고통이 계속이 되요. 그렇게 참고 있는 동안에 반드시 고통이 계속이 되는데, 그렇게 참고 있는 동안에 고통이 계속되기 때문에 그것을 인내한다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고통이예요. 그래서 오래 참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상급을 베푸시고,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핍박을 견디고 고난을 견딘 사람들을 향해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게 그렇게 어렵기 때문이예요. 너무너무 어려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 그 자체가 참으신 생애였어요. 오래 참으신 생애였어요. 왜? 그게 한가지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 오셨고, 예수님께서 그 목표를 이루시기 위해서는 그 목표가 실현될때까지 참으셔야 했어요. 그 오래참고 예수님이 고난을 감당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도 사도가 말하기를 참아야 할때마다 그 죄인들을 향해 오래 참으신 것을 기억해 보라. 강도에 있어서는 죄와 더불어 싸워지만, 피 흘리기까지는 싸우지 않았고 길이에 있어서는 오래 참지 않지를 않았느냐? 이거죠.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 고난과 이런 것들을 참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지금 강릉에 가면 남대탕 쪽에 연어들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그게 거기서 알을 낳은 고기가 치어가 되어서 방류가 되면, 바다에 나가는 즉시 동해바다에서 70%이상이 잡아먹힌다고 합니다. 그리고 30%만이 바다를 헤엄치는데 그 중에 상당수가 죽는거죠.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아마 1/10, 1/10도 안되겠죠. 뭐 1/10은 1/10이겠습니까? 그게 북 태평양까지 갑니다. 그리고 거기까지 갔다가 이게 돌아오는데, 얼마나 자기의 모촌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이 수 많은 죽음의 위협을 이기고 낚시꾼의 미끼의 유혹을 이기면서, 그래서 이 폐수가 쏟아져 나오는 더러운 물을 참고, 뚫고, 그리고 폭포수가 나오는 거기에 몽뚱아리를 부딪치면서 향하여 오르면서 미친 듯이 모촌을 향해 회기합니다.
우리의 신자의 삶도 바로 이런 연어와 같은 삶이 되야되요. 주님이 우리를 향해 주신 그 약속, 우리를 구원할 때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은 좀 하찮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희생해도 좋고, 허비되어도 좋다는 마음을 가지고 끝까지 그 길을 달려가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그때 하나님이 그걸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큰 기쁨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나아와 이처럼 기도하고 간구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와 함께 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깨닫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서 받는 고통과 어려움들을 이기도록 도와주시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렇게 고난을 받고 참으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우리도 그 뜻을 따라 순종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