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5
목 차
심사를 통촉하는 기도(시 5:1-3) 49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라(시 5:4-7) 56
주께 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시 5:8-12) 62
심사를 통촉하는 기도
“여호와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1-3)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이 시는 다윗의 시로 표제가 붙어 있는 탄원시입니다. 시인은 아주 깊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에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1절에서는 자기의 심사를 통촉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통촉’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말에서 ‘촛불을 켜 밝혀서 들여다본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주십시오.”라고 탄원을 드리고 있습니다. 누가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기를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아 주십시오.”라고 탄원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인간의 마음이 아무리 깨끗한들, 하나님이 들여다보실 만큼 깨끗한 마음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안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죄뿐 아니라 우리들의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멂으로 인해서 파악할 수 있는 수많은 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알아봐 달라고, 들여다 봐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결국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들여다 봐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하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그렇게 깨끗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자신의 마음이 한때는 더렵혀졌고 죄와 불결로 오염되었다 할지라고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사람! 그러 사람이면 누구든지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기도할 때, 시인의 마음이 순결한 상태였기보다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고 있는 상태! 그때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이렇게 마음을 쏟아놓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기에, 하나님 앞에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시고, 만약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시고, 원수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으면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인생의 고비가 있으면 그것을 넘어갈 힘을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작용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용,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할 갈망입니다.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목마름, 주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변화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의 소원! 이것들은 인간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작용 중에 최고의 작용입니다.
하나님을 섬김에 대한 갈망
만약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가운데 갈망이 생기고 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소원으로 이어지게 되고, 자신의 죄 가운데 있게 되면 그가 참회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반대로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도 갈망이 없다면 그는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미끄러집니다. 죄가 많이 있는 데도 갈망이 없다면 죄 가운데 영혼은 계속 파괴되어 갑니다. 그러니 이것은 정말 간절한 갈망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갈망입니다. 그러므로 갈망이 없으면 사실은 사람은 죽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고 주일이면 예배드리려 나오고 성경을 읽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서 안개가 가득 차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갈망이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계속해서 어두움 속을 걸어가게 됩니다. 특별히 괴로운 것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가슴 벅찬 신앙의 감격도 이미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걸 성경은 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갈망을 시인이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그런데 시인의 마음을 찌르고 있는 고통은 원수들의 숫자나 그들로부터 받는 핍박이나 고난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시인의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만들었습니까? 원수들의 압제나 고통 육체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자신에게 비춰주시지 않는다는 안타까움이었습니다.
그 모습 내 눈에 안보이고음성 내 귀에 안 들려도 ♬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언제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의 귀에 들리게끔 크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도 내 영혼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음성을 나의 지성으로 들을 수 있다면, 보이는 세상보다는 안 보이는 주님을 더 의지합니다. 만져지는 세상보다는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진 것이 원수들의 많은 숫자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까? “언제든지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라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께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습니까? 그분 앞에 우리의 마음이 쏟아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의 시선이 그분께 고정되어 있습니까?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고정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깊은 찔림을 받고 마음의 눈을 들어서 세상에 잡다한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가 누구든지 간에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던 세리는 정말 죄를 일삼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을 수 있게 되니까,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자기를 통촉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여기서 시인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시선이 무엇입니까? 심판하기 위해서 들여다보시는 감찰관 같은 눈초리가 아닙니까? 긍휼과 은총이 가득 찬 연민의 마음으로 들여다보시는 하나님의 눈빛을 기대합니다. 신자의 모든 삶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 어느 때든지 흩어진 마음을 모으면, 하나님을 갈망하게 됩니다. 길을 가다가 그분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흐르고 밥을 먹다가도 하나님의 생각에 목이 메는 것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은 자비로운 눈빛으로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부족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부분적으로 삶에 있어서 온전하지 못하는 불순종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측은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통촉하십니다. 우리에게 정말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부어 주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과 마음을 쏟는 기도
“한번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내가 상황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나를 통촉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마음을 찢으며 매달리는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시인이 나는 기도하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통촉하시는 마음은 기도의 향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일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관건이지만, 그렇게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 앞에 말씀에 감화로 말미암아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눈부신 진리의 빛과 마음을 쏟아 붇는 기도는 때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눈부신 진리의 빛이 자신의 지성가운데 비친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은 눈부신 빛이 정말 그의 영혼의 장렬하듯 비춰서 그를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은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움직일 때, 우리의 지성이 움직일 때가 있고 그냥 사변만 하도록 움직일 때가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생각만 하도록 우리를 움직이는 경우에는 생각만 질서를 잡아 줄뿐 생각한 것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어 주지는 못합니다. 근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만 정리하게 만들어준 진리가 아니라 행동하게 만들어준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안에 깨어짐이 일어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들이 우리에게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 오늘 설교 들었어? 정말 감동적이었어!”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아~ 오늘 설교 정말 들을 때 마음이 따뜻했어.” 그래서 무엇이 바꿨다는 겁니까? “아~ 오늘 예배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드렸어.”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엔조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부신 진리의 빛을 깨닫고 진리대로 사는 삶이 나타나야합니다. 그래야 거짓과 허위에서 벗어난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한 반응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을 쏟아 붙는 기도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십니다. 그러나 시인이 여기에서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는 것은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알고 계시면 충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이커스 빌드에서 집회를 하고 오는데, 어느 성도가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를 기억해 주세요.” 제가 바보입니까? 일주일씩 집회를 하고 온 곳을 제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손을 붙들고 탄원하는 성도의 간절한 사모함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망각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오랫동안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생각할 때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필요하다면 달려와 주십시오.”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통촉하십니다.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이 긍휼의 사랑에 가득 찬 마음을 가지고 돌아보십니다. 우리가 곤고하게 사는 것을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죄 있는 많은 사람들도 곤고함에서 벗어 날 수 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곤고하게 사는 것은 환경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곤고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곤고한 사람들도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곤고하게 살게 내벼려 두시느냐고 탄원하는 기도가 없습니다. 제 영혼이 곤고합니다. 제 영혼을 하나님이 만약 이렇게 곤고하게 버려두실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 제 영혼을 차라리 취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곤고하게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나의 기도를 들으시리라
그런데 오늘 시인이 “나는 아침에 기도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침은 우리와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새벽이라는 것을 뜻하는 독특한 단어가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보케르’(rq,Bo)라는 ‘아침’은 어두음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전부 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아침에는 새벽이 포함됩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시인 다윗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에서사람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사람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만한 기도의 사람도 없습니다. 기도의 사람, 찬송의 사람,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풍부한 기도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 자기는 아침에 기도한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루만이 아니라 일평생동안 아침에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시편 속에서도 새벽에 기도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심지어 “나의 마음을 정했고 확정했으니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느 때든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렇지만 시인은 오랫동안 아침의 첫 시간에 아주 쇠락한 정신으로 하나님께 주목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쏟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통촉해 주시는 비결이라고 시인은 경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비몽사몽 졸다가 새벽기도 갈 바에야 나오지 마십시오. 그렇게 한 달을 나오는 것 보다는 맑고 쇠락하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나는 마음으로 와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꽉 찬 가운데 내가 새벽에 시간에 주님의 얼굴을 뵈옵게 해 주시옵소서.”하는 사모함으로 나오는 일주일의 기도가 훨씬 의미 있습니다. 시인은 새벽의 시간에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새벽에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홍해를 가르신 새벽, 하나님을 배역하던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우시던 새벽,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던 기적을 기억하며 시인은 이른 새벽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의 마음을 쏟아 놓았습니다. 한 나라의 왕인 사람이 이렇게 간절히 토로하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가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도,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들 자녀로 불러주신 소명을 위해서는 더더욱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더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매달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이렇게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라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유하지 못하며 오만한 자가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고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시 5:4-7)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통촉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은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의지하는 마음이 가장 최고도로 달한 것,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의 순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는 때는 필연적으로 다음의 문제들이 대두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4절부터 6절까지는 시인이 하나님의 한 성품을 통해서 깨닫게 된 기도를 들으시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피를 흘리고 거짓말하고 하나님 앞에 오만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이중적인 적용을 갖게 됩니다. 첫 번째로, 악인들이 나를 아무리 에워싼다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이요,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오만한 자들이요, 그리고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이요, 거짓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다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환란을 당하여도 지금은 이들로 하여금 괴롭힘을 당하고 있지만 많은 그 속에서도 내게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이시고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적용은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큰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외부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그렇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움을 위해서는 자신이 하나님편이 되어야 되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 그리고 거짓말하는 자, 피 흘리는 자, 그리고 교만한 자, 이렇게 하나님의 법도와 어울리지 않게 살아가는 자들과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통촉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도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거나 교만히 행하거나 피를 흘리거나 하나님 앞에 거짓말하는 사람은 아닌가를 자기 스스로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진정 깨어있을 때는, 매우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진정으로 깨어있을 때입니다. 단지 자기 자신의 다급함에만 치우쳐서 어떻게 해서든지 기도해서 응답을 받아야겠다는 마음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매달리며 자신의 인생 전체를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게 될 때입니다.
절대적인 순종은 절대적인 의존에서 나오고 절대적인 의존은 절대적인 사랑의 핵심입니다. 사랑하면 필연적으로 의존하게 되어있고 사랑하면 순종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통촉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서 스스로 점검하며 고민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절박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만약 나에게 죄가 있다면, 만약 나에게 내가 알지 못하는 악이 있다면, 만약 나에게 하나님을 향한 교만한 마음이 있다면, 만약 내가 거짓말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어찌 나의 기도를 들으시겠는가?’ 그래서 그러지 말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야지 통촉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살펴봐 달라고 감히 탄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쏟는 기도를 못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에 마음을 쏟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말 얼마 안 되는 유한한 인생, 이미 그중에 많은 부분을 잘살았든 못살았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지만 정말 하나님 마음에 합당할 수 있을까? 나의 인생이 많은 것을 누리고 행복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그곳에 하나님이 안 계시면 나는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이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깊이 천착하는 삶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 찾다가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만나서 해결하고 싶으니까,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해결사이신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어서 인생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이유에서 기도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 벗어나면 다시 내 길로 갈 테니까 말입니다.
여러 가지 핑계들은 많이 댑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애들이 속을 썩여서, 남편이 박해를 해서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요인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나 죽어있냐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는 수도시설이나 하천시설이 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비만 오면 하천에 둑이 터지고 피해도 많이 입었습니다. 그런 날에 물고기를 잡습니다. 둑방 위로 물이 넘치면 미꾸라지 같은 고기를 잡으려면 흐르는 물을 등지고 삼태기를 놓습니다. 그러면 한참 있다가 가보면 물을 거슬러 올라가려던 미꾸라지 같은 물고기들이 삼태기에 가득 모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신의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죽어있는 상태에서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상태에서 기도할 수 있을 것이고 만약 살아있다면 모든 어려운 난관들을 만났을 때 물고기가 물을 거스르듯이 하나님 앞에 더욱 매달릴 것입니다. 시인이 많은 난관 속에서 통촉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그러한 신앙을 본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이면 하나님께는 큰일도 없고 작은 일도 없습니다. 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원의 한계 때문에 큰일도 있고 작은 일도 있지만 하나님께는 큰일도 작은 일입니다. 어차피 그분의 능력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으니 하나님께는 큰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적들이 얼마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정말 하나님 편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지금 정말 나와 함께 하시는가 사실 그것만 문제이지,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고난을 통해서 오묘한 하나님의 뜻이 드러납니다.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배신을 통하여 당신께 더욱 연합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들이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힘입어
두 번째로, “주의 인자하심을 힘입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주의 성전에서 기도하리이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우선, 시인이 이렇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돌아보면서 “아 이정도면 됐지. 나만큼 사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나야말로 마음을 쏟아 붓기에 합당한 삶을 산다고나 할까?”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자기 의’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로 가득 차있는 신자에게는 항상 두 가지 핵심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둘째는 자기가 많은 잘못을 하고서도 변명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는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를 변명해서 정당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각하게 여기고 하나님 앞에 정직한 자의 편인데 정 반대로 행합니다. 그래서 자기 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이 상하고 통회하는 사람들의 편입니다.
시인은 삶에 정성을 기울이면서 자신을 압제하고 아프게 하는 자들과는 구별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통촉하는 하나님의 앞에 나아갈 때 사람이 진정으로 의지했던 것은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내가 마음을 다해서 주의 계명을 향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지만 나를 주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게 만드는 것을 이러한 나의 실천이 아니라 나를 감화시켜서 선한 의지를 불러일으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게 하시는 주님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 때문에 통촉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신자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향한 갈망에 두 눈이 이슬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
시련을 만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말할 수 없는 심적인 고통에 흔들릴 때나, 심지어는 유혹을 받을 때조차도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아 나는 나를 신뢰할 수 없구나.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내 편이 아니구나. 나의 영과 나의 방패 나의 머리를 드시는 그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구나’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데 모든 것들이 도움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마지막으로는, 이러한 일들을 경험하면서 시인의 마음은 성전을 향하고 있습니다. 구약시대의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왕권을 성전을 중심으로 펼치시고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삶을 응집시키는 가장 중심적인 처소였습니다. 성전으로 올라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뵈러 간다는 것과 동일했고 성전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는 통촉하시는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빈들이나 사업장 같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디에나 하나님이 계시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잘 느낄 수 있고 약속이 깃들여져 있는 곳, 하나님의 성전을 찾았습니다. 성전의 개념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기 때문에 신약의 예배당은 상당히 중요한 맥락들이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진리의 말씀을 위탁하셨고 임재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백성이 모두 모였을 때 하감하시는 하나님의 통촉하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향하여 그렇게 기도하겠다고 고백했던 수많은 시인들의 각오가 결심들이 바로 거기서 비롯되었습니다. 정말 자신을 통촉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자주 나와야 합니다. 새벽에 비가 좀 와도 나오고 힘이 들어도 나오고 어려워도 나오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이곳에서 감사드리고 괴로운 일이 있을 때는 이곳에서 눈물을 흘리고 시련이 있을 때는 이곳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영광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영혼들이 핍절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그들의 입술에는 침묵이 감돌고 그들의 목에는 거미줄이 끼여 있습니다. 영혼의 아름다운 화현의 줄이 끊어졌습니다. 그 속에서 껍질만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도 없고 하나님의 위대한 용서의 능력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10년 동안 지속된들 우리에게 무슨 좋은 일이 생기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정말 우리들이 그렇게 살다가 우리의 인생을 마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혼의 회복을 위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길이고 보람의 길입니다.
주께 피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총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저희 입에 신실함이 없고 저희 심중이 심히 악하며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저희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저희를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많은 허물로 인하여 저희를 쫓아내소서 저희가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저를 호위하시리이다”(시 5:8-12)
원수 앞에서 곧게 하소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며 살겠노라고 고백을 하던 시인이, 시편5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악인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할지를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시인은 자기를 둘러싼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이 주의 길을 시인 앞에서 곧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을 자기 앞에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곧게 해주십시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주의 길입니다. 길은 하나님의 도를 말합니다. 악인들의 번성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하나님의 법이 굽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되고 주님을 거스르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잘못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면서 ‘우리가 말로만 듣던 하나님이 계시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계속 고난을 당하는 상황이 벌어지면, 물론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야 이것은 잠깐이고 필시 의인은 번성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흔들리지 않겠지만, 많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주님의 길이 하나님의 법칙 그대로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걸어가는데 길이 주의 길입니다. 그런데 유혹을 받거나 시련을 만나거나 원수들의 공격을 받으면, 시인이 아니라 누구라도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데 상당한 현실적인 방해를 받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길을 순종하며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 바로 주의 길을 곧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 다음으로 원수들에 의해 많이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고, 원수들이 어떤 사람들인지에 대해 나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수많은 악한 말들을 토해내고 욕망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시인을 괴롭히기 위해 온 힘을 쏟는 악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는데 시인은 주의 길을 곧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환경이 어렵기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고 흔들리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히려 환경이 어려울 때 더욱 주의 길을 곧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주의 길을 걸어갑니다. 불길이 약할 때는 물을 뿌리면 불이 꺼지지만 불길이 워낙 강할 때는 물을 뿌리면 불은 더 맹렬히 타오릅니다. 특히 기름에 불이 붙었을 경우에는 더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참으로 있는지 없는지를 하나님께서는 종종 물을 끼얹어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십니다. 환경과 야합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오히려 믿음으로 살기로 결심하고 주의 길을 곧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저희를 정죄해달라는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사랑이 없는 기도가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안인들로 인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더 나아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탄식입니다. 원수들에 대한 미움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편 전체를 이런 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갖게 되면 땅에 공의가 이루어지고 그분의 통치가 온전히 실현되기를 사모하면서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시인이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 성도가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고 뜻대로 살게 해달라고 마음을 토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사실 그 사람에게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만이 온전히 영광을 받으시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토로할 수 없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토로하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도가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아주 깊이 사랑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저들을 정죄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피함과 하나님을 사랑함
그러면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두 가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께 피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 피한다고 고백합니다. 수많은 원수들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힐 때 시인은 그것들과 싸우고 현실에서 그들을 변화시키려 애를 쓰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피하고 있습니다. 현실 도피가 아니라 그분의 위로와 도우심과 은혜를 앙망한다는 표현입니다. 현실을 개혁시키고 변화시키기 위한 모든 위로와 힘, 사랑과 자비를 주님께로부터 공급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내가 주님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하면서 덧붙이기를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들로 에워 쌓이고 고통이 극에 달하는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피하는 사림이 되기를 결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시인의 고백에 비춰보십시오. 우리는 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며 살지 못하는 지에 대해서 역설적으로 말해줍니다. 시인은 고난과 시련이 많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고난과 시련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방해를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 피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때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살아있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도저히 자신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시련과 고난이 극에 달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실패와 죄로 인해서 자신은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주님께 나아가 그분을 사랑할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5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