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0
목 차
진리를 위한 깃발(시 60:1-4) 39
세상의 주관자 하나님(시 60:5-8) 44
전쟁을 도우시는 하나님(시 60:9-11) 49
인간의 의존 안에서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시 60:12) 53
시편65편 강해 1
시편60편 강해 1
시편60편 강해 1
시편60편 강해 1
시편60편 강해 1
진리를 위한 깃발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려 흩으셨고 분노하셨사오나 지금은 우리를 회복시키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주께서 주의 백성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비척거리게 하는 포도주로 우리에게 마시우셨나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시 60:1-4)
본문해설
다윗의 시대에 속국으로 있었던 소바왕 하닷에셀이 독립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 다윗이 저를 쳤는데 마병 일천칠백과 보병 이만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승만 남기고 그 외에 모든 말의 다리 힘줄을 끊어버리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다메섹 사람들은 북쪽에 있는 꽤 큰 세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을 도우러 왔다가 다윗에게 패합니다. 아람군대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다메섹이라고 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수비대를 두어서 북방의 경계를 튼튼히 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든 것이 평정을 되찾고 나서 다윗이 이 시편을 쓴 것 같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그는 한 나라를 다스렸지만 나라가 순수하게 정치와 외교, 군사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라와 정치와 모든 것은 그 나라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땅의 백성들을 기뻐하시면 하나님이 그 나라에 여러 가지 많은 일에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싫어하시면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버려 흩으십니다. 결국 언약백성들의 기업은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껍질일 뿐이고 진정으로 상속해야할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명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늘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 두 나라가 지상에서 완전히 일치할 수는 없지만 온 마음을 다해 하늘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백성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이바지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최근에 마이클 호튼이라는 사람이 책을 썼는데 보니까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자신들에게 이루어지는 것과 그 나라가 기독교국가로서의 표를 가지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대법원 앞에 조상 대대로 십계명이 붙어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놓고 자유주의자들이 시비를 건 것입니다. 미국은 완전히 자유로운 국가인데 무엇 때문에 특정종교의 계명을 법원 앞에 비석으로 세워놓느냐고 소송을 걸었습니다. 결국 그것을 떼라고 해서 철거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온 미국교회의 교인들이 괴로워하고 분노하며 항의를 했습니다. 그렇게 분노하고 항의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십계명을 외우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대통령이 취임할 때 성경에 손을 얹는 나라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그것은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닙니다. 국가의례를 행할 때 기독교 예식을 택하고 여기저기에서 기독교 유적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것과 그 내용이 사회에 가득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유럽을 여행해보십시오. 가는 곳마다 수많은 기독교 유적들이 있습니다. 신구교가 싸우고 교파끼리 싸우고 정치가 거기에 가세해서 휘말리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었던 백년전쟁, 신교와 구교 사이에 얽혀 싸웠던 30년 전쟁, 수많은 전쟁이 유럽을 초토화시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볼 때 종교의 광기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이 이상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한사람, 한사람이 내적인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고, 경건의 능력이 심겨지고,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정직과 공평으로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어 내용상의 하나님의 통치를 가득 채우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틈을 기우소서
“주께서 땅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 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소서 땅이 요동함이니이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 같은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 나오는 ‘땅’을 ‘민족’, 혹은 ‘국민’이라고 번역하기를 좋아합니다. “주께서 우리 백성을 진동시키사 갈라지게하셨사오니 그 틈을 기우서소 백성들이 요동함이니이다”라고 말입니다. 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에레츠’($r,a)는 ‘거민’, 혹은 ‘국민’이라는 말로도 번역됩니다. 그만큼 땅과 거기에 사는 사람이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에 왜 저주가 들어오게 되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에 저주가 들어온 것은 땅에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땅에 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자 땅에 재앙이 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구속이 완성되는 그 날에 이 땅도 치료될 것이라는 전망이 성경에 나옵니다. 만물이 탄식하고 신음하며 인간의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땅과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은 떼어놓을 수없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었던 언약백성들이 찢어지고 그 틈새가 많이 벌어져서 화합을 이룰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추억하면서 다윗은 그 틈을 기워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그렇습니다. 그 틈이 너무 많이 벌어져서 가까이 하기에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에 벌어진 틈, 통치하는 자와 지배를 받는 자 사이에 벌어진 틈, 이 사상과 저 사상을 택한 사람들 사이의 한없이 갈라진 틈,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틈을 기우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합치되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했더니 어느 교수님이 그것을 읽고 논문을 썼습니다. “도대체 통일을 하자는 이야기냐? 말자는 이야기냐?” 강력하게 비판을 하면서 설교가 너무 감상적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정치적인 견해가 없겠습니까? 잘은 모르지만 경제정책에 대한 견해가 각자에게 없겠습니까? 보건, 사회, 의료제도에 대한 견해가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견해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여기에서 외치고 선포하고 할 절대적인 진리의 성질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그런 것들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것은 보다 완전한 형태로, 어떤 것은 덜 완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시민으로서 자신의 견해일 뿐입니다. 교인들 가운데는 보수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고, 극우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고, 이러한 정책에 대해 저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아디아포라입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든지 그것은 개인의 자유일 뿐입니다. 그것을 선포하고 확정짓는 일은 강단에서 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신앙적인 시각에서 남북의 문제를 보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의 터 위에서 하나님이 버려 흩으시고 분노하셨던 이 민족이 다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그 틈이 기워지고 복되도록 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말할 뿐입니다. 성경진리의 가르침을 마음에 받아서 극우에 속한 사람들은 우파에 맞도록 적용하고, 좌파에 속한 사람들은 좌파에 맞도록 적용하고, 중립인 사람들은 중립에 맞게 적용하고, 의료제도든지 경제정책이든지 교육정책이든지 복음의 총체적인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틈을 기워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경외하는 자를 승리하게 하심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어려움을 보이시고 그들로 하여금 잠시 실족하는 것처럼 버려두셨습니다.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 이 ‘깃발’은 군대의 깃발입니다. 깃발이 높이 들려 휘날리는 것은 전쟁이 끝난 후의 승리를 상징합니다. 전쟁에 나갈 때는 그 깃발을 흔들며 군대를 모으고, 기수를 중심으로 기단을 따라 전투를 지휘하는 상관의 의지를 읽습니다. 깃발이 진정으로 휘날리는 것은 승리하고 난 뒤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전쟁을 하고 이기고 나면 제일 먼저 그 땅에다가 깃발을 꽂습니다. 그 기를 주시고 그것을 달게 하시는 것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런 승리를 주십니까?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영적전쟁입니다. 이 땅에 있는 개인은 싸우는 신자이고,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승리의 깃발을 주셔서 그것을 달게 하십니다. 세상 나라는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해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진리를 드러내기 위해 그 깃발을 매답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곳에 진리의 비췸이 있고 진리가 찬란하게 승리하는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진리는 곧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육체로는 사라지는 세상나라에 속하였으나, 우리의 영혼과 정신으로는 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속한 백성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그 나라를 위해서 이 나라에서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오늘 하루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주관자 하나님
“주의 사랑하시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 내가 뛰놀리라 내가 세겜을 나누며 숙곳 골짜기를 척량하리라
길르앗이 내 것이요 므낫세도 내 것이며 에브라임은 내 머리의 보호자요
유다는 나의 홀이며 모압은 내 목욕통이라
에돔에는 내 신을 던지리라 블레셋아 나를 인하여 외치라 하셨도다”(시 60:5-8)
본문해설
전쟁을 기억하면서 이 시를 썼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5절 이하의 본문을 읽어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세겜’과 ‘숙곳’, ‘길르앗’을 비롯해서 ‘에브라임’과 ‘유다’, ‘모압’, ‘블레셋’ 등 많은 지명이 나옵니다. 이 지명은 예전에 이스라엘과 유다를 중심으로 주변에 펼쳐져있는 대부분의 나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누고 척량하고 “내 것이요”라고 하면서 많은 지명을 거론하시는 것은 온 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줍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
다윗은 전쟁을 하면서 무엇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많은 군대와 잘 훈련된 병사, 잘 조직된 군대의 지휘체계, 많은 말과 병기, 이런 것들이 전쟁의 승패의 요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군사적인 요인들을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고 그는 장군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들의 싸움일 뿐이고 그 전쟁을 통해서 승리를 주시고 승리의 열매로 땅을 분깃으로 부여하시는 분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친근하게 읽었을 것입니다. 꼭 이길 것 같은 싸움에서 패배하고 패배할 것 같은 전쟁에서 이기는 놀라운 기적들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자신이 몸소 전쟁터를 누빈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마 이런 이스라엘의 전쟁의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더욱이 그는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믿음으로 전쟁을 이기기도 하고”라는 것을 자기의 생애에서도 몸소 경험했을 것입니다. 수많은 군대도 자기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은밀한 바위틈에 숨기시거나 당신의 자비하신 날개의 그늘 아래 피하게 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유다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자기들을 다스리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 사실을 모를 뿐이고, 하나님의 교회의 경건한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안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세상 사람들은 명백하게 주님이 주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셔도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인 것을 모르고 부인하지만, 교회에 모인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속에서 전개되는 역사의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주관자가 되시는 것을 찬송합니다.
교회를 다스리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통치 속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는 개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삶의 출렁거림을 보면서 우리는 거기에 하나님의 숨결이 깃들여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오셔서 다스리신다는 놀라운 증거를 마음과 영혼 안에서도 발견합니다. 역동하는 역사 속에서도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평안한 삶속에서도 끊임없이 움직이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의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본문에는 많은 지명들이 나옵니다. 아마 다윗은 대부분의 장소에서 전쟁을 치러본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거기가 하나님의 땅이요 하나님의 소유요 하나님의 목욕통이요 하나님의 홀이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기 때문에 그 땅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전쟁에서 땅을 얻기 위해 다투는 자 중에 누구에게 그 땅을 맡길 것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의지에 달린 것입니다.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공부를 하든지 사역을 하든지 사업을 하든지 가정을 꾸려가든지 간에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영적전쟁입니다. 그 영적전쟁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승리하고 이기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발견하고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에게 기를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셨나이다”라는 말을 시인은 5절 이하에서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온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누구에게 이것을 주실 지는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근본적으로 영적인 전쟁이고, 우리의 사명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의 진리의 깃발이 펄럭이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원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주의 사랑하는 자를 건지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응답하사 오른손으로 구원하소서” 전쟁을 수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면 그 전쟁은 하나님을 위한 전쟁이 될 것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땅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친히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위해 깃발을 주시고 진리를 위하여 달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노라면 우리의 싸움이 항상 만만하고 이길만한 싸움인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처절한 싸움을 싸울 때도 있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이 있어서 함께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이 도망가고 홀로 남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적이 얼마나 많고 우리의 수가 얼마나 적은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도 전쟁에서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적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순수한 동기, 구김이 없는 의도, 명징(明徵)하게 하나님만을 위한 순수한 마음, 이것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때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때론 패배같이 보이는 것도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전쟁 속에서 다윗이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동안 그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최대의 문제는 그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우리와 은혜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셨을 때 두 가지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하는 자를 위해 베푸시는 은혜의 무한한 공급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서 언제나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참회의 길에 들어서서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뉘우치며 은혜언약 아래 약속된 무한한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르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다시 의롭게 하셔서 당신 앞에 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한번 낙인찍힌 사람을 일평생 풀어주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악을 많이 행하고 주님으로부터 멀어졌던 사람들도 용서하셔서 그 용서의 큰 경험을 통해 당신 자신에게만 매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용서 속에서 주님의 큰 사랑을 확신하고 의지하며 그분 앞에 살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언제나 가볍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큰 짐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공급해 주심으로 우리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언약백성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며 주님께 순종하며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큰 능력의 도움을 받고 회복된 관계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때 각 처에서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주인이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를 살피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는 이유입니다.
전쟁을 도우시는 하나님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시 60:9-11)
본문해설
시편은 논문이나 수필을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시 안에서도 단절성이 있습니다. 단절성을 놓고 비평주의 계열에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 이것을 쓴 것이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이것저것을 모아서 짜깁기를 했기 때문에 단절성이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시편에서의 단절성을 단회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연결이 끊는 것 같은 삽입구나 뒤에 붙어있는 구절들은 다른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들을 짜깁기했기 때문에 생긴 단절성이라기보다는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몇 가지만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시편을 보면 시인이 시를 써내려 가는데 갑자기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를 써 내려가다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처럼 시가 엮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 단절성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겠습니까? 서로 대화하는 것처럼 글을 써내려가니까 인용문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직접화법의 묘사가 왜 들어오는 것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저는 두 가지 정도의 가능성을 생각합니다. 하나는 시인이 자기화법으로 글을 써내려가다가 어느 부분에서 하나님이 이미 하신 말씀, 성경에 나와 있는 구절들을 넣는 경우입니다. 또 하나는 확신하건대 시인이 하나님께로부터 들었던 말씀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를 짓는 순간일수도 있고, 시가 다루고 있는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들려왔던 하나님의 음성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선지자였고 하나님께로부터 얼마든지 직접적인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단절성의 또 다른 가능성은 이것입니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닙니다. 문학작품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에 대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한 편의 시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이지만 찬송의 이유는 두세 가지의 다른 역사적 사건을 다루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 단절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정밀한 형태로 매듭이 이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다가 갑자기 그 사건과 다른 과거의 사건이 연상될 때 그 사건으로 넘어가서 그 사건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관성이 시편에서의 단절성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전쟁을 도우시는 하나님
본문에서도 갑자기 “누가 나를 이끌어 견고한 성에 들이며 누가 나를 에돔에 인도할꼬”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것이 8절까지의 내용과 연결은 되지만 10절부터는 연결이 잘 안 됩니다. 9절에서 “숙곳도 길르앗도 에브라임도 유다도 모압도 에돔도 모두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그분의 주권아래 있는 땅인데 누가 나를 견고한 성 에돔으로 인도할꼬.”라고 노래합니다. 견고한 성은 에돔과 병행으로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결국 에돔이 견고한 성을 짓고 방비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성지의 지리를 보면 에돔에는 바위들이 많아서 바위 사이에 사람들이 숨도록 집을 짓고 궁도 지어서 침공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것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누가 나를 강한 성에 들어가게 할 것이며 나를 에돔으로 인도할 자가 누구냐?” 이것은 난공불락의 요새에 숨어있는 적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지고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다윗이 과거에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해 실패하던 때를 연상하면서 스스로 경고 받는 장면인 것 같습니다.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라고 합니다. 전쟁에 능하고 잔뼈가 굵은 다윗이 전쟁에서 실패하거나 승세의 진전이 없을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신앙적인 측면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가 잘하는 것에 있어서는 자기 자신을 신뢰하기 마련입니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말에 관한 한 자신이 있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지식에 관한 한 자신이 있습니다. 자기가 잘하지 못하는 것은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만 생기면 되지만, 자기가 잘하는 것에 있어서는 먼저 자신을 의뢰하던 마음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다윗이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아무것도 아닌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원수도 용서할 수 있었고 적도 감화시킬 수 있었고 패배할 때는 패배를 인해 주님의 성품을 다시 배우고 승리할 때는 승리를 통해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전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항상 승리하거나 항상 우리의 기대를 따라서 만족을 얻게 만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시로 우리에게 시련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고, 역경도 주시면서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한걸음, 한걸음 하나님 앞에 더 다가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해주십시오.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어차피 인간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도구이기 때문에 사람의 열심과 능력으로도 잠시 자기의 원하는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래위에 서있는 것처럼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성공이 거듭될수록 그것은 우리의 인생에 더 큰 위험이 되는 것입니다. 모래위에 판자로 단층집을 지었다면 그 집이 무너져도 사람이 다치지는 않겠지만, 모래위에 이층집, 삼층집을 세웠다면 이것이 무너질 때, 쌓아올린 영광과 비교되지 않는 커다란 비극이 발생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엄위를 보이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당신을 의지하지 않는 악한 자들을 아주 높이시고 마지막에 넘어뜨리심으로써 하나님의 엄위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 말고, 먼저 마음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해야 합니다. ‘그 마음 안에서’라는 말은 결국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마음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게 하려하심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시려고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못하실 수 있는 일이 없으시고, 하나님이 안하시려는 일을 우리가 해서 성공하면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참된 본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면서 전심으로 그분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행복을 위한 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아가고 그분 앞에 겸손하게 복종하며 섬기며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인간의 의존 안에서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저는 우리의 대적을 밟으실 자심이로다”(시 60:12)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많은 능력을 주셨지만, 이 능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능력을 주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행사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떤 좋은 것이 있을 때 남에게는 없지만 나에게 있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생각하면, 남에게 없는 특별한 것 때문에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 많이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송하고 경배하는 자는 그 이유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더 많이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받지 못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 오히려 의지하지 않는 사람보다 뛰어난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남보다 더 나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입니다.
의존하는 마음에서 분출되는 감정
인간의 감정분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심성에서 분출되는 감정은 덕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가운데 낭비하듯이 분출되는 감정은 모두 악하거나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우리를 구원하고 붙들어 주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쓸모없는 좌절과 패배감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나 자신에게 있는 어떤 장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이 쓸모없는 인간이 구원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도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나 같은 인간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에 비해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없이 ‘나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야. 아마 내가 없으면 이 세상도 시시할 걸?’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교만한 생각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사랑을 느끼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좋은 것을 발견하게 하실 때 ‘아 참 좋구나. 예쁘구나. 그러니 저것을 저렇게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저 사람은 참 곱구나. 그러니 저 사람을 창조하셔서 우리 곁에 두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아름다움을 느낄수록 그 사람은 덕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과 상관없이 ‘저것 참 예쁘구나. 어떻게 하면 저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저 여자 참 예쁘구나. 어떻게 하면 저 여자를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면 이런 감정의 분출이 있을수록 하나님 앞에 악한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서 사랑하자. 사람에게서든 사물에게서든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한 번의 아름다움에 마음이 끌리지 말고 그 아름다움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자. 아름다운 것 때문에 아름다움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자. 우리가 이렇게 사랑한다면 우리 중 아무도 잃어버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 사람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 안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면 그 사람이 사라져도 그에게 아름다움을 주셨던 근원이신 하나님은 남으니까 결국은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의존하는 마음에서 오는 용기
용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용기 있게 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 용기는 우리로 하여금 도전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게 하고, 두려움 속에서 자기의 의무를 다하고 격려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도록 만들어 줍니다. 용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없는 용기는 인간의 사악한 욕망의 분출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에 예후라는 인물이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아합이 이세벨과 함께 악을 행하고 우상을 섬기는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예후는 아주 혁명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결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숙청합니다. 그래서 나라의 기반이 무너집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돌볼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다 죽여 버렸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 사람의 행동이 신앙이 아니라 혈기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이 훨씬 더 강한 것입니다.
시인은 “용감히 행하리니”라고 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를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이것입니다. 이 용기는 덕스러운 용기입니다. 여기에 절제가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말씀에 의해 통제되는 종류의 용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바깥으로 베푼다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들려서 베푸는 것은 아름다운 자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의존에서 떠나서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의 방탕함 때문에 많은 것을 낭비하고자 할 때, 그것이 결국 사치가 되고 분에 넘치는 영화가 됩니다. 낭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덕스럽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감정의 분출이 하나님을 향한 의지함을 떠나면 악이 흐르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게 됩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그렇게 절제를 강조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용기는 하나님과 단절된 가운데 솟구치는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을 깊이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나오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는 우리의 마음속에 한없이 솟아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만이 우리의 대적을 원수로 여기고 밟으실 자라는 것을 노래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전쟁입니다. 오늘 이기기도 하고, 내일 지기도 하고, 내내 이기기도 하고, 내내 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결국 그 전쟁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냐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승리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한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전심으로 그분을 앙망하고 의지하며 자신을 믿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진정한 용기가 나오고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시편65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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