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양육하라(2)
녹취자:이경순
가족관계 회복시리즈 오늘은 우리 가족관계에서 소외되기 쉬운 형제관계에 대해서 성경이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형제와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에는 형제들이 다투면서 크다가 철이 들면서 그런 다툼들이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좀 잦아들고 그리고 형제들이 서로가 소중한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사형제인데 둘째와 셋째, 셋째와 넷째끼리 잘 다툽니다. 그런데 다른 집안들은 모르겠는데 우리 가정의 경우에는 큰형과 별로 다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동생은 바로 위의 형이나 언니는 만만하게보고 한 단계 넘어가면 약간 좀 높게 보는 모양입니다. 결혼하게 되면 분가해서 나가니까 좁은 의미로 가족에서 이탈되어서 또 다른 가족들을 만들어 갑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면 형제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집니다. 거기에 작용하는 것이 결혼하면서 들어온 각자의 아내들 혹은 결혼한 다음에 여자는 우리나라의 경우에 시집을 가면 당연히 자매들끼리 멀어지게 됩니다. 자기 일에도 매이고 이런 외부적인 요인도 있지만 결혼하고 나면 형제자매 관계들이 멀어지게 됩니다. 오늘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은 ‘형제들이 관계가 화목하지 않고 자주 만나고 왕래가 없이 사는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무엇인가?’ 입니다. 이유는 형제사이에 맺힌 것 때문입니다. 섭섭함 같은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쌓이면서 관계가 멀어지게 되고, 심지어 부모님의 유산문제가 나오게 되면 소송도 불사할 정도로 이익이 개입이 돼서 싸웁니다. 이런 방식으로 멀어집니다.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은 우리 혼자 구축한 것이 아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까요? 오늘 이야기 하고 싶은 문제입니다.
부모 슬하에 한 인간이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성장합니다. 아이는 철저한 사회 속에서 성장합니다. 인생은 한 인간이 태어나서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형성해 가는 성장의 과정입니다. 제일 먼저, 태어나서 최초로 관계를 맺는 사람은 엄마입니다. 사실 아이들은 아빠의 개념도 잘 없습니다. 그래서 열 명이면 열 명이 ‘엄마’라는 말을 먼저 배우고 ‘아빠’라는 말은 나중에 배우게 됩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도 해당되는 공통점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우선 엄마하고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고 아이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엄마에게 어떠한 정신적인 끌림이 아빠보다 훨씬 더 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이가 아빠란 존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부모로서 아이를 낳아서 갖는 관계라는 점에 가깝습니다. 이러한 자기의 출생과는 상관없이 부모 다음으로 만나는 첫 번째 사회가 형제입니다. 물론 자기가 먼저 태어났을 때는 혼자이지만 이어서 동생들이 태어나고 혹은 자기가 나중에 태어나서 형이나 누나가 있습니다. 또한 첫 사회에서 맺은 형제와의 관계가 친구로 확장되고, 이웃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통해 자녀들이 성장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자녀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은 훈련이 필요한데, 사실상 형제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워간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심리학자와 교육학자들에 의하면 한 사회가 형성되려면 3명이상의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홀로 자란 아이들은 그런 사회를 경험을 못해보는 약점이 있고, 둘도 좀 부족하고 셋이 되면 사회를 배운다고 합니다. 형제가 셋이면 그 중에 편을 먹습니다. 그래서 외톨이가 되는 것을 경험하고 외톨이를 면하기 위해서 다시 전략적으로 양보하고 제휴하고, 또 한쪽을 왕따 시키는 법을 배우면서 사회를 학습합니다.
오늘날 자매들에게 이런 이야기하면 잔인한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남자아이 두 명, 여자아이 두 명을 나으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하나만 낳는 것도 힘듭니다. 어쨌든 사회를 배웁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 속 형제들부터 관계가 틀어집니다. 틀어지는 이유를 여기서 낱낱이 예를 들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틀어지는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틀어진 관계를 그대로 방치 할 것인가?’ 와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복원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나옵니다. 사실 기독교인이 되고나서 제일 힘든 것 가운데 하나는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생활을 보여주는 것은 참 쉬운데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형제가 대판 싸웠다고 합니다. 형은 되게 못된 사람이었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잘해줍니다. 동생이 자기 물건이나 옷에 손대면 펄펄뛰면서 교회 애들은 데리고 와서 옷도 빌려주고 심지어 돈도 빌려주고 그러는 것입니다. 동생이 나중에 열 받아서 “나는 형한테 교회 다니는 애들보다 못하냐? 걔네들한테 해주는 것에 10분의 1만이라도 나한테 해주면 형은 진짜 나한테 존경받은 형이 되었을 거야!” 라고 얘기했습니다.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사람에게 나를 선하게 보이는 것은 쉽습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온 환경과 바닥까지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한테 잘해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교회 지체에게 잘 해주는 것은 주는 것만 희생하면 됩니다. 그런데 형제들에게 잘해주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양보해야 됩니다. 요즘 흔히 쓰는 말로 죽어서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순간마다 울컥울컥 화가 솟아오릅니다. ‘내가 왜 이렇게 부당한 것을 참아야 되나?’ 생각이 들면서 화가 솟아오릅니다. 그래서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나면 실제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저는 우리 동생을 잘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평생 같이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동생과 결혼한 아내들은 남입니다. 솔직히 그 남자 하나 보고 시집온 것이지 나머지는 전부다 끼워 팔기로 온 사람들입니다. 사실 아닙니까? 솔직히 시부모 좋아서 시집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 남자에게 갔는데 끼워 팔기 식으로 온 것입니다. 그렇듯이 동서들 간에는 서로 이해하는 것을 잘 못합니다. 더군다나 그들도 다른 집안에서 온 사람이고 그들이 만나는 시아주버니나 아니면 시동생도 전혀 생경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형이 동생을 사랑하고 동생이 형을 이해하면서 덮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것이 잘 안 보입니다. 그러면서 형제사이가 꽤 괜찮았던 집안이 며느리들이 들어오면서 갈라지게 됩니다. 미묘한 문제입니다. 결혼과 함께 외부적인 영향들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형제사이가 많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꼭 혈육의 형제뿐만 아니라 결혼관계를 통해서 맺어지게 된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데 사랑은 마음에 막힌 것이 없어야 할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런 막힌 관계를 해소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형제사이에 이미 맺혀져 있는 것을 풀어야 합니다. 화해와 용서라는 개념이 먼저 들어옵니다. 그러면 남편과 아내사이도 마찬가지이고 부모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를 아무리 공경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로 부터 상처를 많은 사람은 먼저 부모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이 그림은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é)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판화가의 그림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뜨겁게 해후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야곱과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이었고 두 사람은 성향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야곱은 가정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집에 있으면서 엄마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가하면 에서는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활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야곱은 여성적인 사람이었고, 에서는 그야말로 남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활달하고 씩씩하고, 사냥해서 맛있는 고기를 대접하는 아들이 좋았습니다. 결국 가정 사이가 갈라지게 됩니다. 이것은 편애입니다. 형제사이를 화목하게 하려면 부모가 편애하면 안 됩니다. 사실은 인간이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도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좀 더 좋아하는 자녀들이 없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나는 어떨까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는 딸을 훨씬 더 좋아했던 거 같습니다. 자라면서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균형을 잡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집안에서도 보면 뚜렷했습니다. 형제 넷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좋아하는 아들, 할머니가 좋아하는 손자, 고모들이 좋아하는 아이들로 뚜렷하게 다 나뉘어있었습니다. 마음이 가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그런 것을 잘 표현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이 그림은 야곱을 떠나보내는 장면입니다. 아무래도 야곱과 에서를 같이 있게 하면 원한이 깊어져서 안 좋다고 봤습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어머니가 야곱을 정말 사랑합니다. 편애를 했고 또 한 가지 결정적인 이유는 앞을 잘 볼 수 없고, 분별없는 아버지의 약점을 틈타서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아버지를 떠나서 메소포타미아로 갑니다. 밧단아람입니다. 거기에서 외삼촌 라반을 만나고 그 집의 딸들과 결혼하고 정착합니다. 그 집에 딸이 둘이 있었는데 언니가 레아이고 둘째가 라헬입니다. 어느 날 삼촌이 부르더니 “내가 품삯을 주겠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라헬을 주십시오!” 했더니 “7년을 일하라. 그러면 내가 품삯으로 우리 딸을 주마.” 그랬습니다. 야곱이 7년 동안 일을 합니다. 성경을 보면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 29:20) 7년 후,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치렀는데 그 당시에 전기불이 없었는지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레아입니다. 누군지도 모르고 첫날밤을 지낸 것입니다. 배신감에 사로잡혀서 삼촌한테 가서 “어떻게 이럴 수 있냐?” 라고 따지니까 “우리 지방에서는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일을 없다.” 라고 합니다. 진작 이야기를 해야지 그럼 포기를 했을 텐데 그래서 화를 내니까 “그래. 그럼 라헬도 너에게 주마. 일주일 기다려라. 그 대신 7년 더해야한다.” 결국은 끼워 팔기로 7년짜리 레아를 덤으로 얻고 라헬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머슴처럼 일해 봤자 아무것도 얻는 게 없으니까 야곱이 이제는 가족들 데리고 “내가 떠나야 되겠습니다. 언제나 내가 내 집을 일으킬 수 있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외삼촌과 야곱사이에 거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유명한 알록달록한 양들의 사건입니다. 외삼촌이 우생학적으로 알록달록한 것 다 제거하고 하얀 것들만 남은상태에서 알록달록한 것이 태어나면 네 것이 된다고 제안했습니다. 우생학적으로 진짜 확률이 낮습니다. 경험적으로 라반은 알고 있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했을 때 한 마리도 안 태어난다고는 생각은 안 하는데 숫자가 어느 정도 될 것인가 대충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고 계약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놀랍게 복을 주셔서 엄청나게 많은 양을 얻게 됩니다. 야곱이 불편해지니까 도망가게 됩니다. 그런 속에서 한편 큰 아들은 점점 더 원한이 깊어져 왔던 것입니다. 야곱은 이미 부모의 집을 떠나서 밧단아람으로 갈 때에 벧엘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나중에 거기서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개인적인 약속을 받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거부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야곱의 제일 커다란 염려는 원한에 사무친 자기 형이 자기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람에 의해서 소식이 들어왔는데 형이 약 400명의 종들을 거느리고 (사실은 종이 아니라 무사입니다.) 동생을 맞으러 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생을 칼로 정리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왜 그런지 무사들을 고용하고, 그런 일은 포기하고, 형과의 화해를 간절히 바라면서 많은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형을 만나서 일곱 번을 굽혀서 절을 하는데 거의 왕에 대한 신하의 예의 정도에 해당됩니다. 그러면서 형과의 화해를 도모하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밤에 종들을 보내고 일진을 보내고 이진을 보내고 가족들을 보냈는데 가족들 보낸 순서가 자기가 약간 덜 사랑한 사람은 앞에 보내고 진짜 사랑한 사람은 맨 뒤에 보냈습니다. 맨 뒤에 라헬과 그의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를 치면 도망가고 여기를 치면 도망하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보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것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얍복강가 (나중에는 그곳이 브니엘이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에서 하나님 앞에 정말 목숨을 건 간절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것은 형과 화해하고 싶다는 것만 아니라 자신이 살아야겠다는 절박함이 함께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납니다. 여기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 보입니다. 창세기만 읽어보면 천사하고 씨름하다가 천사가 도저히 이길 수가 없으니까 야곱한테 항복 비슷하게 하고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묻습니다. “나룰 복주시지 않으면 당신을 놓지 않겠습니다.” 라고 답하는 야곱의 스토리로만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생각할 때 좀 이상합니다. 천사는 뭐든 인간보다 훨씬 월등하게 뛰어난데 아무리 이 사람이 목축을 하면서 근력을 키웠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매달려서 씨름을 할 때 거기에 무릎을 꿇을 정도의 천사는 좀 아닌 것 같지 않습니까? 이것에 대해 호세아가 우리에게 답합니다.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호 12:4) 라고 나옵니다. 호세아서는 창세기에서 일어난 이 일에 대한 해석을 보여줍니다. 그럼 이 두 개를 같이 결합하면 처음에는 야곱이 천사가 나타나니까 천사를 붙들고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합니다. 천사가 뿌리치니까 강하게 붙들고 씨름하고 경기를 한 것이 아니라 천사를 붙들고 “제발, 제발”하며 매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워낙 힘이 세니까 천사하고 씨름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좀처럼 안 해주는 것입니다. 너무 매달리니까 천사가 허벅지아래 부분을 쳤습니다. 허리아래 있는 뼈가 어긋났습니다. 남자들에게 있어서 그 부분은 결정적인 부분입니다. 허리아래 골반하고 다리뼈하고 만나는 지점에 이상이 왔습니다. 뼈가 어긋나서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깨지지는 안았다고 하더라도 어긋나서 힘을 못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에 야곱은 비로소 이 천사에게서 축복을 받는 것이 자기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이구나 하면서 거기서 회개를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힘이 세서 굴복한 것이 아니라 그 회개하는 그 모습이 하나님께 감동을 드려서 이 야곱이 이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하는 문제를 해결 받는 장면이 나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 울며 회개했고 하나님께 용서를 빌 겸비함을 주셨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셔서 인생의 이 난관을 극복하게 만들고, 그곳 이름을 ‘브니엘’ 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야곱의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중요한 한 가지 일을 해주십니다.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 로 지어주셨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이라는 말은 ‘이겼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겼다’ 라고 하는 것인데 ‘내가 가진 힘으로 하나님을 이겼다.’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 ‘야곱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간구가 회개가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을 준 방식으로 하나님을 이겼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겨주셨다는 이야기를 ‘이스라엘’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이름이 이 이후에도 선택된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 로 불리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여기서 야곱은 원한으로 일생동안 칼을 갈아 왔던 형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놀라운 화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겸비하게 하셨습니다. 야곱은 형으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보복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하는 것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를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치는 것은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야곱은 자신의 잔꾀를 의지하며 살던 사람이었는데 이 사건을 통해서 생리적으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희박했던 사람이 벧엘에서의 사건 후에 얍복강가에서의 사건 (같은 장소인 브니엘에서의) 축복을 통해서 그의 신앙이 점점 성장하게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기에서 깊이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몸부림치지만 내 인생을 움직이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에서의 마음을 바꿔놓으셨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장자의 축복을 빼앗고 부자가 된 야곱을 보며 배가 아팠지만 다리를 절면서 오는 동생을 보면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도록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바꿔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화해하는데 서로를 용서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에서도 깊이 경험하면서 형제와 화해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보여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거리가 멀어지고 관계가 나빠졌어도 하나님이 이 관계를 좋게 하고자 역사하시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부부가 함께 사랑합니다. 십자가의 정신으로 삽니다. 그러면 이렇게 형제들이 그 사랑의 영향을 받으면서 화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부부가 그런 사랑이 없습니다. 이미 이 두 사람 사이가 깨져갑니다. 고통스러운 눈물을 흘립니다. 이런 상태에서 한번 원한이 맺히거나 깊은 상처로 관계가 깨어졌을 때 형제가 화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십자가 사랑으로서 우리가 무장되고 그 사랑으로서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라는 주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입니다. 원래 사랑은 A와 B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살다가 보면 A와 B와의 관계는 얼마든지 깨지는 때가 나옵니다. 만약에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고 하면 이 관계가 복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시 사랑으로 복원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용서’입니다. 용서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용서받는 때도 있고 용서를 해야 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형제사이가 깨어 졌을 때에 그것은 제일 먼저 부모에게 고통을 줍니다. 부모의 가장 큰 기쁨은 자기의 자녀들이 서로를 깊이 사랑하며 화목하게 사는 것입니다. 관계가 깨지면 부모의 마음에 고통을 주게 되고, 그 관계가 깨져서 부모가 고통을 받을 때 개인이 주는 효도의 행위는 큰 위로가 안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형제와의 관계가 깨지면 부모에게 불효를 하게 됩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관계가 깨진 채 살아가면 하나님의 마음을 슬프게 합니다. 우리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명령을 받고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데 그런데 실질적으로 원수보다는 훨씬 나쁘지 않은 형제들의 과거의 관계에서 깨어진 것 때문에 관계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 불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해해야하는데 이기심을 버리고 희생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양보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기본적으로 희생의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그리스도를 통해 배웁니다. 그러니까 자잘한 것을 늘 양보하도록 노력하고 큰 것, 예를 들어서 나의 신앙을 방해 받지 않고 지키는 것 또 복음을 전하는 것 그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 가족들 간의 화목을 도모하는 것이 큰 것입니다. 그런데 형제간에 작은 것으로 죽어도 지지 않으려고 하고 경제적인 작은 것들 때문에 다툼이 계속 많습니다. 그런 속에서 어느 한순간에 ‘예수를 믿어라’ 아니면 ‘내가 형이니까 이 모든 문제를 조정하겠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크게 어필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신자로서 사랑의 모본을 보임으로 우리가 믿는 종교가 정말 매력적인 기독교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배운 내용 다섯 가지는 형제관계는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이 겪는 사실 첫 번째 사회이다. 두 번째 하나님의 뜻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다. 세 번째 관계의 회복을 위해서 갈등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이 어려울 때마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도록 부름을 받은 부르심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나의 신앙이 가족들과의 관계 안에서 입증되어야한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어려울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형제의 화목이 부모에 대한 진정한 효도입니다.
<질문>
저는 무뚝뚝하고 가족 간에 소통이 없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저의 남동생은 그런 아버지로 인해서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동생이 아버지에 대해서 불만을 저에게 토로를 할 때면 ‘우리가 그래도 아빠를 바꿀 수는 없다. 이해를 해드리자. 그리고 동생 너 또한 개선해야 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면서 조언을 해주는데 동생은 그런 저를 보고 오히려 적개심을 드러내기도 하고 실망스러운 표정도 짓고 해서 제가 할 말을 잃게 됩니다. 동생에게 어떻게 제가 어떻게 대응을 해줘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답변>
그러지 말고 동생이 와서 그러면 함께 아버지 흉을 보십시오. 중요한 것은 누나를 만나서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가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너무 힘든 것들을 동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동생도 모르는 아버지의 나쁜 점들을 들춰내서 욕 하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그냥 동생의 이야기에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지냈으면 저렇게 아파할까, 동생의 마음에도 아버지를 향해서 내가 이런 마음을 오래 품으면 나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너무 힘드니까 누나한테 와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나가 계속 교과서로 답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가면서 ‘아이 그래 너 잘났다.’라고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러고 그것을 누나한테도 못 털어놓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공감해주라는 것이 아니라 한번 깊이 동생의 입장에 대해서 나는 어느 정도로 성숙하고 혹은 신앙으로 이렇게 철이 들어서 극복을 했더라고 하더라도 얘는 이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얼마나 아팠을까 그러면서 귀를 기울이면서 사실 너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사실 나도 그랬다, 그렇게 공감을 해주는 것입니다. 어느 청소년 상담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하여튼 얘가 가출을 했는데 엄마한테 대해서 미워하는 감정이 아니라 험한 욕을 할 정도로 한이 주저리주저리 맺힌 아이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가봐야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네가 참아야한다. 엄마도 너를 사랑할거야.’ 그런데 이 상담사는 ‘그래.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러니까 그 다음에 이 아이가 악살을 받은 것처럼 엄마의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건 인간도 아니다. 너는 진짜 생각 없이 착한 애다. 나 같으면 중2때 가출했겠다! 넌 지금 고등학교 1학년이 되도록 있지 않냐.’ 그러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열을 받아가지고 이 아이에게 공감해주면서 더 엄마를 야단을 하니까 나중엔 “근데 아저씨 왜 우리 엄마 욕해요?” 하는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이 공감을 해줘야합니다. ‘나도 힘들었다. 진짜 그 점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잘못한 거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만 돌아가도 가면서 ‘아. 어떻게 하든지 관계를 개선해야지.’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 번을 들어주다가 ‘사실은 아버지가 이런 면도 있어.’ 하면 듣지만 하나도 안 듣고 교과서를 이야기할 때 ‘아버지가 이렇게 했다.’ 그러면 뭐라고 생각 하냐면 ‘아이고 누나만 편애했네.’ ‘아이고. 두 분 다 잘나셨네.’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기술입니다. 담에 오면 얘기를 해주십시오. 그리고 찾아보십시오. 아버지의 단점이 무엇이었는지 찾아가지고 ‘사실은 나도 이때 되게 힘들었다.’ 진짜 우리 아버지 못 됐다 하면서 이해를 해주는 것입니다. 이열치열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동생이 돌아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