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를 양육하라(1)
녹취자: 오희열
반갑습니다. 가족관계의 회복을 위한 시리즈 아홉 번째의 시간입니다. 지난 한 주간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오늘은 자녀 양육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결혼 전에는 인생에서 결혼이 가장 큰 숙제였습니다. 그렇게 결혼을 합니다. 살아 보니까 연애할 때 그 사람이 아닙니다. 두 번째 어려움이 닥칩니다. 적응할만하니까 아이가 태어납니다. 처음에는 너무 기쁩니다. 그리고 조금 있으면 고달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어마어마한 수고와 노동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저는 결혼하고 7년 만에 아이를 낳았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이 우리 둘이 해결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신대원을 다니던 때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위대해 보이는 사람은 역사 속에서 빛나는 위인이 아니라 길에서 아이의 양손을 붙잡고 걸어 다니는 엄마 아빠였습니다. 너무 위대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좀 크면 한숨을 돌립니다. 이것은 네 살에 미운 짓을 하고 일곱 살이 되면서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부모에게 고민을 안겨줍니다. 어렸을 때는 아이들을 뒤치다꺼리가 힘들지만, 전에는 사춘기가 중학교 2학년 3학년이었는데 요새는 초등학교 5학년, 4학년까지 내려옵니다. 그때는 아이들이 부모를 괴롭게 하는 것이 차원이 다릅니다. 이제 아이들이 크면 대학을 들어간다고 합니다. 더 반복할 필요가 없이, 아이를 낳고 나면 부모가 눈을 감을 때까지 무한책임을 지게 되어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고달픈 인생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을 그렇게 생각하면 기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좀 다른 방향으로 이런 문제, 특히 자녀 양육의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의 큰 두 주제는,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는 성도와 열방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답을 줍니다. 이런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우주적인 계획 속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머리인 교회가, 그 안의 성도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는 지혜가 나옵니다.
맨 왼쪽에는 인류가 범죄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무엇으로서 인간은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끊어집니다. 사랑과 생명입니다. 이것을 힘입어서 인간을 살게 되는데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생명과 사랑을 현실적으로 공급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이렇게 새사람이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렇게 타락한 인류를 새 인류사회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는 세포처럼 작은 가정들 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혼자 사는 사람도 있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지체들도 있지만 어쨌든 그들도 가정에 속했을 터이니 가정을 단위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빛나는 가정이 될 때 많은 사람들은 이 가정과 교회를 보면서 그들의 그 아름다운 삶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가 전파하는 많은 복음들이 유용성을 갖게 되고 결국 모든 인류가 구원받은 인류가 됩니다.
이 이상은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지고 부어진 것을 이 사람들이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세계에 대해서 가지신 이상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구원의 계획, 인생의 모든 것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속에 있습니다.
제일 뒤에 계신 분은 할머니와 할아버지이고, 어머니와 아버지,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가정의 문제는 사실 가족의 문제입니다. 가정의 문제는 그 가정을 이루는 구성요소들인 가족들에게 문제가 있을 때 나타납니다. 그 가족의 문제는, 가정을 이루면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피할 수 없는 사정에 의해서 결혼하기 전에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결혼하고 나서 별로 안 좋아지는 사람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의 바탕은 크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함께 가정을 이룬 그 상황 속에서 감추어져 있던 그 사람의 어떤 사람됨이 가족관계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연애는 단순한 열정의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몇 달 사귀다가 그만두는 것을 수시로 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로 연애에는 생활이라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생활입니다.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가는 것은 결국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이 불완전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온전한 신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물론 이 세상에 온전한 신자라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지만 한 사람의 신자가 되어가면서 이상적인 사람에 가깝게 되고 그러면서 좋은 가족이 되고, 그러면서 좋은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입니다.
서로 좋아서 둘이 만나 결혼하는데 실제적인 큰 부담은 서로에 대해서 다 알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래 연애해서 볼 것, 못 볼 것을 다 보고 바닥까지 들어갔다면 좀 더 많이 알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결혼이라는 환경 속에서 이 사람 속에 뭐가 있는지는 결혼을 하며 함께 살아봐야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똑똑한 남녀가 얼마나 면밀하게 판단을 했겠습니까? 그런데도 결혼해보면 서로 깜짝 놀라서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었구나!’ 하며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만나서 함께 살아갈 때 그 사람은 오늘 창조되어서 나에게 온 사람이 아니라 이미 지금까지의 일생을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살다가 온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다른 가정에서 태어나서 내가 다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부모와 형제들, 가족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사람입니다. 그때 만나자마자 콩깍지가 씌워지면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을 더 빨리 잃어버리게 됩니다. 다행히 그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을 착각했을 때에는 많은 시련이 뒤따르게 됩니다. 너무 사랑하지만 인간으로서 그 사람의 존재 여부가 내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 놓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헤어질 수도 있고 만날 수도 있는데 누군가 한 사람이 내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것은 안 되는 일입니다.
가정의 역할은, 사람이 그 가정에서 태어나게 되면 그 아이에게 관점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그 집안에서 성장하면서 관점을 배웁니다. 하나님, 세계, 인간, 인생, 이런 것에 대한 관점을 배웁니다. 하나님을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의 최대의 유익은, 첫 번째로 하나님을 의심할 여유가 없이 당연한 것으로 그 존재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의 빛 아래에서 세계, 가정, 인간, 나,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는 틀이 제공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자연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할지도 가르쳐줘야 합니다. 집에서 환경교육을 잘 시켜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다 그렇게 사는데...’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 아이들만이라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작년에 한국 사람이 쓴 1회용 컵이 254억 개랍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자연이 파괴되었겠습니까? 우리는 그런 조류에 대해서 좀 저항하며 살아야 합니다.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사랑, 자유, 이에 따르는 책임,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평화, 이런 것들의 가치를 가정을 통해서 배웁니다. 만약 한 집안에 태어났는데 엄마 아빠에게 이런 것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아주 희박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다가 삶도 매우 휘청거린다고 생각하면 그 집안의 아이는 불행을 안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부모에게서 그런 것을 배우지 못하거나 혹은 잘못된 것을 배우면서 온몸을 부딪치며 그것을 배워가게 됩니다. 그러면 고통도 뒤따르지만, 그런 부모 아래에서 태어나는 부모와 똑같이 생각이 없는 인생을 살 확률이 매우 높아집니다. 그래서 교육은 정말 중요합니다.
엊그제도 뉴스를 보면서 마음이 아팠습니다. 소득상위 20%가 지출하는 교육비가 하위 20%가 지출하는 비용의 30배정도 된다고 합니다. 그것을 5%로 줄인다면 그 격차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생활, 이 모든 것들이 극복할 수 없는 차이로, 그들이 원하지 않아도 세습됩니다. 실제로 통계가 나왔는데 잘 사는 집안의 아이들의 도덕 수준이 높다고 나왔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옵니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것만 무서워하지 말고 교육이 대물림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 사랑, 자유, 책임, 평화, 이런 것들은 학교에서 가르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들은 어렸을 때 배워야 합니다. 유아교육자들의 말에 의하면 3세에서 5세 사이에 80% 이상 인간성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서 온전한 신자가 됨으로써 어떻게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지를 배우는 것이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자녀를 기릅니다. 오늘 자녀에 대한 덕목을 이야기하면서 “노엽게 하지 말라” 를 이야기합니다. ‘파로르기조’는 ‘격노하게 하다’ 라는 뜻인데, 하나의 전치사와 동사를 합해서 나온 말입니다. ‘파라’는 전치사로 ‘옆에’, 혹은 ‘넘어서’ 이고, 여기에서 나온 영어 단어가 ‘parable’, ‘우화’입니다. ‘우화’는 직선적으로 말하지 않고 옆에 툭 던져서 이쪽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패러블릭, 과장하다, 또는 과대망상, 패라노이어, 이런 것들의 ‘para’ 가 여기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오르기조’는 ‘화를 나게 하다’ 입니다. 일상적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울컥하면서 화가 솟아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것을 다 표현하지 못합니다. 이런 것이 아비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엄마는 이렇게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이렇게 할 가능성이 엄마보다 아빠에게 훨씬 더 많다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시대에는 아버지가 가정에서 거의 절대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자녀는 숫자에 끼워주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린이’ 라는 말이 방정환 선생님에 의해서 만들어졌듯이, 그 이전에는 아주 천하게 아이들을 부른 것입니다. ‘어린이’ 라는 말의 ‘이’가 높임말입니다. ‘아랫 것’, ‘어린 것’, 이렇게 불렀는데 ‘어린이’라고 높여준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에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첫째, 성경은 그냥 “노엽게 하지말라” 라고 이야기하지만, 빗나간 자기 욕망, 자녀를 향해서 자기가 한풀이하듯이 자녀를 기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걸 못했으니 너는 꼭 이걸 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초창기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특별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나중에 제가 주님을 깊이 만나서 정리하면서 아이들에게 늘 주고 싶었던 것이 ‘자유’였습니다. 방종하지 않은 자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하는, 그런 자유였습니다. 아이들을 기를 때 분재를 기르는 것처럼 하지 말고 화원을 가꾸는 것처럼 아이들을 길러야 합니다. 화원에서는 가지치기 정도는 해 주지만 철사로 묶어서 비비 틀지는 않습니다. 두 번째는 부모가 너무 과도한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녀가 법대를 가서 법관이 되거나 의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자기가 해서 법관도 되고 의사도 되는 것이지 그것을 아이한테 강요하면 안 됩니다. 실제로 우리 학생들 가운데에는 제가 아는 교수의 아들도 아빠가 너무 간절히 원해서 당시 서울대 컴퓨터학과를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 당시 1980년대 말, 90년대 초였으니까 정말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가는 곳이었습니다. 합격하고 나서 너무 좋아서 동료 교수들을 불러서 잔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공부를 하면서 계속 학사경고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기질을 따라서 음악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을 가도록 놔둬야 합니다.
아이들이 잘못하면 우리가 징계할 수 있습니다. 그때 조심해야 할 것은 잘못한 것에 맞는 만큼만 징계를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공정에 관한 관념에 동의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반발심이 됩니다. 아이들은 권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표출할 수 없습니다. 너무 어려서 엄마 아빠가 인상을 쓰고 있으면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자라게 되면 그 상처가 그대로 남아서 함께 자랍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식에 대해서 소유의식을 갖습니다. ‘이 아이는 내꺼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폭력과 무관심이 있습니다. 아이들에 대해서 언어폭력을 쓰고 때로는 엄마 아빠가 욕을 하거나 때립니다. 부모가 그릇된 모본을 보이면 아이들은 저항하지는 못하지만 그 속에서 굉장히 분노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들이라고 하는 것은 시집, 장가 간 자식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아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봐야 합니다. 내가 낳았고 양육하고 있지만 이 아이의 인생에 대해서 자기에게 무슨 권리가 있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됩니다. 이 아이를 진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이라고 보고 이 아이가 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 길러야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교육할 때 학교에서 하는 공부 하나만을 가지고 우열을 가립니다. 여러분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얼굴이 조금 덜 생겼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지만 다른 아이는 100점을 맞는데 우리 아이는 70점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면 자존심이 상하고, 더구나 다른 아이는 일류대학에 입학했는데 우리 아이는 전문대도 못 갈 실력이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확률적으로는 좋은 대학에 입학하면 더 나은 수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통계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의 행복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주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최근에도 제가 아는 의사 한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그 사람이 의사였을 때는 다들 부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돈도 잘 벌고 사회에서 안정된 직업이라고 생각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본인은 자신의 인생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든 것입니다.
아이의 능력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고 관심사가 다른 것이라고 돌려 생각해야 합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의 관심사가 학업일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습니까? 여러분의 부모님도 여러분이 공부를 잘 안 해서 굉장히 속 썩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은 태어나기 전이라서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은 잘 압니다. 어떤 아이를 공부 때문에 야단쳤더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는 예전에 공부 좀 했어?” 하더랍니다. 엄마가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아이들이 다 압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합니까? 알아서 한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짓궂게 할머니에게 물어본다고 합니다. “할머니, 우리 아빠 학생 때 공부 잘했어?”, “하긴 뭘 잘하니? 고등학교 다닐 때 몇 번을 그만두겠다고 하는 것을 가서 사정해서 간신히 졸업했다.” 이것이 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입니다.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는 것입니다. 관심사가 어떤 것이 있는지 아이들을 일깨워야 합니다. ‘education’이라는 말 자체가 ‘이끌어내는 것’ 입니다. 아직 자기도 모르는 것을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 아이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용납해주는 것, 그것이 교육입니다.
그런 사랑 속에서 돌봄을 받으면서 아이가 성장하도록 도와야 하는데 그런 아이를 노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교육을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공부를 싫어하니까 포기하라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가르치되, 명심해야 할 것은 아이와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도록 인격적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자녀에 대한 부모의 덕목을 두 가지로 제시하는데 하나는 소극적인 것입니다. “노엽게 하지 말라” 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양육하라” 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양육을 합니까? 사랑으로 양육을 하는데, 사랑하는 마음에 들려진 두 개의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훈’과 ‘훈계’입니다. 이 두 번역은 원래 희랍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주지는 못합니다. 개념이 그렇다는 것인데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우선 ‘양육’은 소아과에서 쓰던 용어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기르는 것, 그 아이들을 세워주는 것, 건강과 정신, 모든 것에 있어서 말입니다. 이것을 ‘양육’이라고 부릅니다. “성장하기까지 영양을 공급하다.” 어린 아이들은 자기가 필요한 영양을 스스로 다 섭취하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먹기 싫어해도 숟가락 들고 따라다니면서 먹이는 이유는, 아이들은 그런 판단이 없기 때문에 먹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내버려 두면 발육이 안 됩니다. 양육은 사육과는 다릅니다. ‘사육’은 짐승이 자라도록 사료를 주어서 성장하게만 하면 됩니다. 양육에는 또 다른 요소가 개입되는데 그것은 ‘올바름’이라는 요소입니다. ‘올바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반듯하게 자라는 것, 그것이 올바르게 기르는 것입니다.
“교훈으로”라고 했는데, ‘파이데이아’, 여기에서 영어의 교수학을 뜻하는 ‘pedagogic’이 나옵니다. 희랍어 ‘파이디온’은 ‘어린이’ 라는 뜻입니다. ‘baby’ 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대부분 3세에서 7세, 8세, 9세 정도, 청소년이 되기 전까지의 나이를 ‘파이디온’이라고 합니다. ‘파이데이아’는 ‘교훈, 훈육, 교양, 훈련’입니다. ‘군사훈련’이 아니라 ‘생활의 훈련’이고, ‘징계’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아이를 가르치는데 그 목표는 판단력을 기르고 인간으로서 선한 습관이 확립되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교육’입니다.
강아지 하나를 사왔습니다. 난지 15일쯤 된 어린 강아지인데, 놀라운 것이 들여왔더니 낯선 표정을 하며 엄청나게 긴장을 했습니다. 배변훈련을 시키는데 배변 패드를 여러 곳에 깔아둡니다. 처음에는 아무 곳에나 눕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배변 패드를 깔아둡니다. 여러 개를 깔아두어서 어디를 가든지 하얀 배변 패드가 있게 합니다. 며칠 지나면서 하나씩 없앱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한 개만 남겨둡니다. 신기하게도 온 지 7일 만에 정확하게 배변을 가리게 되었습니다. 잘못해서 배변 패드를 베란다에 두었는데 문을 닫고 잡니다. 아침에 문을 열어주면 거기에 가서 호수처럼 쏟아냅니다. 그것이 없으면 배변을 못한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선한 생활의 습관을 길러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지식이 조금 모자라는 것은 조금 문제가 되지만 선한 생활의 습관이 정착되지 않는 것은 미래에 그의 인생에 있어서 엄청난 고통을 줍니다. 자매를 만나서 결혼을 하게 되어도 여러분이 받는 대부분의 고통은 남편이 무지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힘든 것입니다. 교정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 선한 습관을 확립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활의 습관의 모든 교훈들이 성경에 담겨있으니 그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훈계’는 ‘누데시아 큐리오’인데, ‘큐리오’는 ‘주님의’라는 뜻이고 ‘누데시아’는 ‘누’와 ‘데시아’의 합성어입니다. ‘누스’는 인간의 정신입니다. ‘데시아’는 ‘티데미’라는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이것은 뭔가를 ‘올려놓다’, ‘두다’ 라는 의미입니다. ‘훈계’는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정신을 두게 만드는 것’입니다. 올바르게 말입니다. ‘훈계, 권면, 경고, 책망, 타이름’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에 대한 실제적인 지침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잘했을 때는 칭찬하고 격려해주는 것을 아주 뚜렷하게 해줘야 합니다. 잘못했을 때 야단치는 것은 10으로 야단치는데 잘했을 때는 2정도로 칭찬해줍니다. 그러면 아이의 속에서 삶에 대한 부정적인 관념이 생겨납니다. 부정적이라는 것은 다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해서 훨씬 더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을 정말 잘 살기 위해서는 옳은 것, 해야 할 것을 훨씬 적극적으로 하는 것, 그것이 아름다운 관계 아니겠습니까?
정리하자면, 부모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노엽게 하면 이 아이가 낙심을 합니다. 낙심하면 열정을 잃어버립니다. 열정을 잃어버리면 그 아이는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도전, 실천, 이런 것들이 매우 약해져서 현실에 적응하기 어려운 인간이 됩니다. 또한 해야 할 것은, 교훈과 훈계를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가 활기찬 삶을 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적용과 결론은 자녀를 사랑하되 예뻐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손주 손녀들을 보니까 아이들이 가장 예쁠 때는 두 살 정도부터 네 살까지입니다. 정말 예쁩니다. 존재 자체가 예쁩니다. 그리고 그 시기가 지나갑니다. 그러면 정신적으로 고차원적으로 부모에게 신경을 쓰이게 만듭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얼마나 예쁠 수 있겠습니까? 그림처럼 생겨도 부모가 아이의 외모 때문에 예뻐하겠습니까? 사랑은 결국, 자신 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부모와 오랫동안 떨어져서 서울에서 유학했기 때문에 사실 아빠와 엄마가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고 나에게 아빠 엄마에 대해서 어떤 관념이 있는지 너무 약했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단점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똑똑한 아이에게 처음에는 엄청나게 기대를 하고 나중에는 실망도 하면서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저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은 히브리서에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으니까 야단을 친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회를 끝마치고 차를 타고 오는데 하나의 깨달음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도 내 아들이 네 아들도 네 아들인데 네가 네 아들에게 하는 것은 내가 너에게 하는 것과 사뭇 다르지 않느냐?” 그때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또렷하게 떠오른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이 나같이 망가진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제 아들이 그때는 나에게 그렇게 꾸지람을 들었고, 기본적으로 아이를 향한 저의 따뜻하고 깊은 사랑이 모자랐기 때문에 혼자 얼마나 외로웠을 지를 생각하며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그게 나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회심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아이를 사랑해주기만 하자고 결심했습니다. 그 전에는 매번 성적표를 요구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한 번도 성적표를 보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사랑만 해 주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집을 나오면서 가슴이 아릿했습니다. ‘그때 정말 더 따뜻하게 해 줄 것을...’ 아이가 일곱 살부터 해서 학교에 들어가고 열두살 정도까지 한 5년, 교회를 개척하고 정신없이 바쁠 때였는데 그것이 아직까지 제 마음에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자녀는 하나뿐인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인간은 많지만 그 아이는 하나입니다.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길러야지 다른 아이와 비교하면 안 됩니다. 자녀들이 여러분에 대해서 다른 부모와 비교하면 좋겠습니까?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함께 생활해 주어야 합니다. 같이 있는 시간을 할 수 있으면 많이 가져줘야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잘 못했습니다. 늘 마음에 안타까움을 남습니다.
오늘 배운 내용 다섯 가지입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형상인 피조물이다. 부모는 자녀를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 자녀를 가슴 아프고 화나게 하지 말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부모가 먼저 삶의 모본을 보이라.
질문 1) 저의 자녀는 초등학교 4학년 여자 아이 하나입니다. 다른 것들은 잘 못하긴 하지만 의미가 전달되는데 지금 저의 가장 고민은 아이가 미디어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빠가 그것을 똑같이 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하는데 왜 나는 못 하게 하느냐?” 합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 자녀의 양육도 훈계, 경건한 생활, 이런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답변 1) 우선 첫 번째로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 말씀하시는 어머님이 미디어는 무조건 하지 말라고 하지 마시고 먼저 책을 좀 읽으십시오. 그리고 강의도 들으면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그 미디어를 꼴보기 싫고 왜 자꾸 하느냐고 하지 말고, 아주 공정하게 이것이 우리의 삶에 어떤 좋은 영향과 나쁜 영향을 주는지 지식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가 제일 문제입니다. 아버지를 설득해야 합니다. 대화를 해서 우선 아버지가 자녀가 그런 것에 빠져서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예를 보여주면서 “이 아이를 이렇게 미디어에 많이 노출시키면서 몰입하게 하는 것은 이 아이의 인생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예를 봐라, 이런 예를 봐라, 그리고 당신도 이런 책을 봐라, 이런 특강을 들어보라.” 하면서 아이 아빠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하고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절제 있게 하고 그렇게 한 모본을 가지고 아이를 설득해서 아이가 그런 생활에 있어서 규범을 가지고 절제 있는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이 해결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비 미디어적인 일들을 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게 해보십시오. 레고를 한다든지 화초를 기른다든지 보디빌딩 같은 것에 재미를 붙인다든지 싸이클을 탄다든지, 무엇이든지 접해보지 않아서 그렇지 아빠가 재밌어할 만한 것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노력해보십시오. 오늘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