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월 21일 새벽예배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우리가 시작할 때라 라는 것은 믿음을 시작할 때라는 거죠. 믿음을 시작할 때에 그 때에 확실한 것. 믿음이 시작될 때에는 기독교 신앙에 이치에 대해서 정교하게 알지는 못하죠. 그렇지만 아주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예수님이 죄인인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라는 것과 그리고 다시 사셨다는 것과 그리고 그분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바로 자기를 위해 일어난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값없이 구원을 받았으니깐 이제 예수님만 사랑해야 된다는 것. 이런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처음 회심하고 주님을 믿을 때 아주 확실 합니다. 알았죠? 아주 확실합니다. 그렇게 아주 분명하게 아주 확실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유대교를 버리고 혹은 이방에 종교를 버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 올 수가 없죠. 이 당시에 그리스도 인이 된다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 인이 된다라고 하는 것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였어요. 그래서 너무나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은 자기가 붙잡는 것에 대한 아주 확실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로마 시대에 박해가 아주 심해지면 심지어는 어떤 기록까지 나오냐 하면은 하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니깐 이제 세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제 그 어떤 핍박을 하는데 어떻게 까지 핍박을 하냐면은 세례를 받으면 죽인다. 세례만 안받으면 그래도 완전한 이교인이 아니니깐 세례만 받으면 죽인다. 그래도 그래도 사람들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 정도까지 말하자면은 박해가 가해지는데 그래도 예수님을 믿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은 그 들이 붙잡은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죠. 근데 사실은 자신들만 그 확실한 확실했기 때문이였는지 그게 뭐냐면은 일절에 나오는 믿음에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 온전케 하시는 믿음에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바라보고. 그거거든요. 예수 그리스도는 믿음에 도리에요. 그래서 그 분이 누구이시고 왜 사람으로 오셨고 그리고 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왜 부활하셨고 그리고 장차 왜 오시는 지를 깨달으면 믿음이 기본적인 골격이 성한거야. 그걸 붙잡은 거죠. 근데 사실은 자신들이 붙잡았다기 보다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붙잡으신 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하냐 그리스도 예수께 잡힘 받은 그것을 붙잡으려고 쫒아가라. 그런거죠. 그러니깐 주님이 우리를 확 붙들고 계신 동안에 우리도 주님을 꽉 붙들어야. 진리가 우리를 강하게 사로잡는 동안에 우리 하나님 말씀에 붙잡혀 살고 말씀에 붙잡혀 사는 동안에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산단 말이죠. 근데 그렇게 확실한 것을 그렇게 붙들며는 그렇게 붙들고 사는 것 그런 것이 신자에 삶이라는 거죠. 그래서 견고히 잡으면 견고해 잡으면 흔들리지 않게 견고히 잡으면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바 되리라. 이거는 아까 안식에 들어가는 문제를 쭉 이야기 하다가 내가 여기를 이야기 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깐 이거는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통해서 안식에 들어갈 그 약속이 이루어 진다는 거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래서 그 안식에 들어갈 약속을 우리가 얻기 위해서는 우리가 굳게 그리스도를 붙들고 살아야 된다는 거죠. 근데 구약에서 이스랑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마음을 강팍하면서 멸망했던 그 사건과 한번 관계를 지어보면은 어떤 결론이 나오냐 하면은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미끌어질 가능성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어제 지난주일 오후에 제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근심하시는 과정을 차례대로 설명을 했잖아요. 근데 그것만 여러분이 깊이 이해를 해도 막사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는 사실을 느끼는 거예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 안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그리고 그 사랑을 빙자해서 그래서 한없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 하며 살아갈 수 있는 담대함을 부채질 하는거. 근데 그런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냐 하면 느낄 수 없어요. 그러니깐 진짜 뒤로 물러가 심연에 빠지는게 아니라 정말 구원을 얻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께 잡힘 받은 그것을 계속 붙잡으려고 그렇게 견고하게 살려고 하는 몸 부림이 있다 이 얘기입니다. 그런 영원한 안식이고 그래서 가나한에 비유될수 있는 영원하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안식을 누리는 거죠. 신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완전한 시련이에요. 거기서 다시 끊어지고 이런거 없단 말이죠. 그게 또 하나는 뭐냐하면 현재적인 연합이에요. 그래서 언제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이야기 할 때는 시련되지 않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갈 하늘 나라와 그 하늘나라가 그 하늘나라에 영향력이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통치가 아직 그 천국이 실현되지 않았는데 우리에게 앞당겨서 느껴지는 거예요. 그게 이 세상에서 누리는 천국이에요. 그니깐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고 신앙 생활 잘 하면서 말 할수 없이 마음이 기쁘고 솟아나는 은혜가 있고 막 이렇게 되면은 그 동안 그 안에서 우리들이 그 기쁨과 평안과 은혜를 얻게 되잖아요. 이게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심으로써 얻게 되는 천국에 영향력이에요. 근데 그 나라에 완성 될 하나님에 나라는 이거보다도 훨씬 더 이건 하나에 맛보기에 지나지 않고 이거보다 훨씬 더 완전하고 좋은 은혜의 왕국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들이 그래서 믿음에 도리인 그래서 처음 믿을 때 확실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면은 우리들이 영원한 세상에서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 분과 연합한 가운데 안식에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이 두 가지라고 말씀 드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죠? 히랍어 성경에 보면은 안식이 두 가지로 나오는데 카타파우시스라는 안식이 있고 사바티스무스라는 안식이 있어요. 사바티스무스는 이렇게 푹 쉬는 겁니다. 육체적으로. 사바티스무스는 그런건데 카타파우시스는 구원으로 말미암는 안식이에요. 여러분 그런거 있잖아요. 너무 고단하고 지치면 쉬죠. 육신을 쉬고 병도 좀 낫고 숨을 돌리고 나면은 육체가 편안하니깐 마음도 조급하고 괴롭고 억눌리던 것들이 풀리고 마음도 쉼을 얻게 되는 경우있죠. 그게 사바티스무스에요. 그런데 어떨 때는 고단하게 분토하고 쉴래야 쉴 수 없어. 근데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가 확 밀려오니깐 (찬송) 몸도 쉬지를 못했고 그리고 끊임없는 이 고통과 그리고 끊임없는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너무 안전하고 하나님에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에 큰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나고 그들도 막 물결이 일어나고 마음에 아주 편안한 거예요. 그게 카타파우시스에요. 구속으로 말미암는 안식이에요. 이런 모든 것들 이런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다. 어떻게 하면 믿음에 도리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고 아주 분명한 신앙 안에서 견고히 살려고 할때 그때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미끄러지면은 어떻게 경건하게 살고 죄와 분토하고 죄에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이 깊은 몸부림은 안하니깐 쉽지만 아주 신속하게 미끄러지면서 그렇게 그리스도를 붙들고 신앙으로 분토하지 않음으로써 얻었던 평안함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우리 속에서 안식이 사라져 가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 말씀에 기록된 바와 같이 죄인에게는 평강이 없는 거예요. 죄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또 지금 우리가 그 안식을 당겨 누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믿음에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확실하게 붙들고 그렇게 걸어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