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2
목 차
영혼이 하나님만 바랄 때(시 62:1) 1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시 62:2) 6
거짓된 악인을 비난함(시 62:3-4) 10
고난 받는 영혼의 치유책(시 62:5) 13
나의 구원과 영광(시 62:7) 18
우리의 마음을 토할 곳(시 62:8) 23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삶(시 62:9-10) 27
권능과 인자가 주께 있음은(시 62:11-12) 32
시편65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영혼이 하나님만 바랄 때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시 62:1)
구원의 개념
이 시는 다윗의 시입니다. 오늘 시인은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은 신약에서 말하는 구원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입니다. 신약에서는 구원이 내면화되어서 내적으로 죄에 매여 있는 상태가 인간의 불행의 뿌리라고 봅니다. 마치 골수에서 피의 성분들을 생산해내듯이 우리 안에 하나님을 맞서려는 죄의 법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살려는 경향을 산출해내서 우리의 말과 사고와 행동, 모든 것에 죄를 깃들게 하고, 이것들은 각양 많은 악들을 생산해냅니다. 이런 사람들이 홀로 무인도에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섞여서 살아가면서 관계의 파괴와 갈등, 불행과 고통들을 산출해내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는 인간의 불행과 고통의 근본적인 뿌리를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거기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것을 구원의 핵심으로 삼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개념을 펼쳐갑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뿌리와 근본에 관심이 많습니다. 구약에서는 어떻게 신약이 근원적인 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구약에서의 구원의 관점은 훨씬 더 포괄적입니다. 비유를 하면, 신약에서는 핵심적인 관점으로부터 시작해서 포괄적인 관점으로 나아가는 구원의 개념이라면 구약은 포괄적인 관점에서 핵심적인 관점으로 들어가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이 그에게서 납니다.”라고 말할 때 이것은 굉장히 포괄적인 것입니다. 좁게는 하나님이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을 비롯한 영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해서 국가적으로 원수들의 위협으로부터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택된 백성들에게 크게 세 가지를 베푸시는데, 선택과 인도와 보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계명을 함께 거론하면서 구원의 개념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개념을 펼치는데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납니다.”라는 것은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커다란 의존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인적이고 영적인 차원의 문제뿐만 아니라 가정적이고 사회적이고 국가적인 모든 문제, 특히 전쟁과 기근과 자연적인 재앙에서 자기 백성들이 구출 받는, 모든 악과 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비슷합니다. 같은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구약에서는 시작점이 상당부분 가려져 있고, 신약에서는 그것이 특징적인 것으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신약적인 구원에 압도되어서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이 영혼이 구원받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단적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결국은 그 뿌리인 죄로부터 건짐을 받고, 죄의 결과인 악과 고통으로부터 구출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구출이 그분에게서 나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모든 불행과 궁핍, 고통으로부터 건져낼 수 있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살다보면 우리 스스로 건져내지 못할 영적인 위기, 환경적인 위기들을 만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 그 모든 위기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신학사상은 바로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을 기준으로 갈리게 됩니다. 우리가 칼빈주의 교리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신학의 출발점이 거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 그것이 바로 신학을 아름답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인간이 모든 불행과 결핍의 상태로부터 하나님께만 구출 받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될 때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연약함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 없이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기 확신입니다. 내가 이렇게 될 것이라는 자신의 확신입니다. 성경은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잘 안합니다. 믿음의 정의를 내리고 믿음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담론보다는 오히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기능으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지에 관심의 초점이 맞추어져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에이든 토저 목사님은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시인은 본문에서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조용히 하나님을 바랄 때 나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이렇게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만을 의지하라고 할 때 자주 쓰시던 표현이 있습니다. “잠잠히 나의 행하는 것을 보라.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라. 하나님께 기도하라. 너희는 잠잠히 있어 오늘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보라.” 여기에 나오는 ‘잠잠히’는 늘 따라다니는 하나의 부사입니다.
영혼에는 수많은 기능들이 있습니다. 영혼은 마음을 통하여 우리의 육체를 움직이기도 하고 우리의 정신을 움직이기도 합니다. 마음은 고정된 실체로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거울이 밖에 사물이 자신에게 비치는 것을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영혼은 끊임없이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면서 상들을 마음 안에서 만들어내고 그것들을 해석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 분요해지는 이유입니다. 우리들이 할 일이 많고 만나는 사람이 많고 도심 속에 들어가서 이런저런 많은 사물들을 볼 때 우리의 마음은 번잡스러워집니다. 그런데 기도원에 가서 홀로 조용히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우리의 마음이나 생각들이 조용히 정돈됩니다. 여기서 ‘잠잠히’라는 것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마음의 쓸데없는 작용들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마음대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생각이 없으면 사물을 들여다보면서도 거기에 그것이 있는 줄 모르고 찾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 눈에 수많은 사물들이 들어와도 생각이 다른 데 있으면 사실 그것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의미는 하나님 한분만을 쳐다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집중입니다.
영혼의 힘, 믿음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우리의 마음과 정신의 하나님을 향한 집중의 상태입니다. 그분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의 의식과 사고에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우리의 정신의 작용을 주장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영혼’이라는 것은 우리의 심령의 가장 깊은 좌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내적 세계의 중심적인 기능이 ‘영혼’이라고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자는”이라고 할 때의 ‘심령’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만을 온전히 바라보고 주목하게 될 때 우리의 구원이 그분에게서 나오는 것을 본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믿음은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사랑에 빠지게 되면 마음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응시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관심이 없고 그 한 사람을 끊임없이 응시하게 됩니다. 그 사람이 사라져버리면 질병상태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상사병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동반합니다. 사랑이 없는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 사랑에서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담고 시인은 시편 62편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아야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고난과 시련도 지나고, 때로는 평탄하고 즐거운 길도 지납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의 주권아래 있습니다. 인간의 의무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행복과 불행, 시련과 고난, 기쁨과 좌절이 피할 수 없이 자신에게 다가올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자살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했습니다. 칼빈 한 사람만의 의지는 아니겠지만 의회에서 법을 만들어서 자살한 사람의 재산은 유산으로 물려줄 수 없게끔 시에서 몰수했습니다.
우리가 불행과 고통, 좌절을 겪어도 우리가 한 가지만 가지고 있으면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닫고 그분을 사랑하고 찬송하게 하는 재료가 됩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살아계시고, 우리에게 선을 베푸시며, 우리가 어떤 사정에 처해있든지 당신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다루시는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한 믿음,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그분은 선하신분이시며, 당신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세 가지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앙망하면 우리의 인생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시련과 고통은 아름다운 악기의 현을 연주하는 연주자의 손길과 같은 것이 됩니다. 그것이 뜯고 두드릴 때 현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두드리고 건드리는 타격 때문에 줄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며 가락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 한 분을 온전히 앙망하며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본분입니다. 이러한 의존 속에서 기도할 마음도 생기고, 다시 일어날 마음도 생기고, 좌절했던 사람이 희망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선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2)
반석이신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은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반석입니다. 반석이라는 것은 옆으로 퍼져있는 종류의 바위입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다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집이 될 것입니다. 건축학에서도 땅이 무르면 파일을 박습니다. 수없이 많은 파일을 위에서부터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고 밑에 있는 파일들이 그 힘을 분산해서 받을 때 충분히 그 건물을 받쳐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속에서 파일의 개수를 결정하고 위에서부터 두드려서 박기 시작합니다. 파일이 더 이상 안 들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옆은 무른데 커다란 암석이 발견되어서 무른 땅을 뚫고 들어가서 파일이 바위와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 온 힘을 다해 내리쳐서 파일을 바위와 만나게 한 다음, 윗부분은 잘라버립니다. 그렇게 해도 충분히 건물이 지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반석입니다.
주님이 나의 반석이시라는 것은 나를 요동하지 않게끔 나의 인생과 삶에 있어서 기반이 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반석은 히브리어로 ‘추르’(rWx)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 않는 강력한 기억이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 물이 없어 갈할 때,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었습니다. 결국 반석은 흔들리고 요동하지 않는 삶과 신앙의 기반이며, 목마름을 해갈시켜주시는 하나님의 큰 구원의 행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보면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시라”는 찬양의 가사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이 언약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할 만한 반석이시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존이라는 것은 성경 전체 사상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교인들과 교회 안에 기도의 열정이 식어갑니다. 아마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 심해질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단순히 교회가 은혜가 떨어져서 기도를 안 한다는 측면도 있겠지만, 그보다 이 시대의 정신이 누구를 의지하는 것 자체를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의존입니다. 과학이 발달되기 전까지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자연세계는 신비에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신들로 가득 찬 세계 안에서 신들의 움직임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비가 오면 신이 기쁨의 눈물을 흘린다든지, 바람이 불면 신이 화가 났다든지, 천둥과 번개가 치면 신이 진노했다든지, 이렇게 생각하다가 과학에 의해 모든 것의 원인이 밝혀지면서부터 그것은 하나의 법칙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그것을 이용하면서 자신감도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점점 더 자기 자신을 신뢰할 존재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이 발휘될 가능성이 예전보다 점점 더 적어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저만이 나의 반석이시요”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과 신앙의 기반이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잃어버리면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반석이신 주님 안에서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한 순간에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이 그 고백을 끊임없이 머금으면서 살아갈 때 위기와 고난 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십니다.”라고 노래합니다.
산성이신 하나님
세 번째는 “나의 산성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성은 재성(羅城)과 나성(在城)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도시 전체를 에워싸는 성이 있고, 특정 장소만을 보호하기 위해 쌓는 성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성안에 성이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산성은 목표 자체가 공격을 받기 어렵도록 만든 성입니다. 적의 공격을 받아서 왕의 일가와 측근들이 도망하게 되었을 때 산성으로 피난하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반드시 피난처가 있게 마련입니다. 고구려시대에는 해자를 팝니다. 성을 지어놓은 다음에는 성 주위에 땅을 파서 거대한 연못을 만듭니다. 그리고 자기들만 건너다닐 수 있는 통로 하나만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리 하나를 지키든지, 다리를 파괴시켜 버리면 적군들은 할 수 없이 물을 건너야 합니다. 굉장히 불리할 것입니다. 보통 성은 둥그렇고 그 가운데 커다란 문이 나있어서 성문이 됩니다. 들어오는 문을 안쪽으로 쌓아서 문 양쪽에 높은 벽을 세웠습니다. 군인 수백 명이 빼곡하게 설 수 있는 벽을 만들어서 거기를 통과해서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대는 공격을 맞으면서 와야 합니다. 그것이 고구려성의 특징입니다. 아주 지혜롭게 만든 것입니다. 평지밖에 없을 때는 그렇게 하지만 산에 성을 쌓는 것도 방법입니다. 남한산성 같은 경우가 그런 용도로 쌓은 것입니다. 남한산성의 지형을 보면 백 명이 달려들어도 한명을 죽이기가 어렵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깎아지른 절벽이나 언덕을 수많은 돌멩이와 뜨거운 물, 뜨거운 기름, 화살의 공격을 받으면서 올라와야 하는데, 위에 시체가 엎어져서 쌓이기 전까지는 넘어오기 어려운 성입니다. 그런 것이 산성입니다.
산성이라는 것은 불행이나 큰 고통으로부터 해를 입지 않도록 보호해주시는 주님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성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으며 인생을 산다고 늘 승리하고 세상만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질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피할 산성이 있습니다. 인생의 큰 환난과 고통의 때, 그분께로 피하면 그분의 품안에서 사랑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적들이 자신의 인생 주위에 가득한데 오히려 산성에 피함으로 하나님과 깊은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되는 일은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제멋대로 살면,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과 어려움을 만나게 하셔서 산성으로 도망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과 독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그분의 보호하시는 은총을 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의 경험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저희를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구설의 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하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크게 요동치 아니할 것이다.” 그렇게 인생을 사는 담대함이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에서 나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 속에서 살아갈 때 기도하면 열렬해지고, 말씀은 절실하게 섭취하게 되고, 하나님이 무엇인가를 맡겨주시면 충성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된 악인을 비난함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저희가 그를 그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시 62:3-4)
악인들에게 공격을 받을 때
시인은 하나님만을 잠잠히 바라면서도 자기를 고통가운데로 몰아넣는 악인들을 향한 강력한 탄핵이 있었습니다.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람’은 단수로 나옵니다. 이것은 아마도 다윗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악인이 작정하고 덤벼들어서 시인을 괴롭히는 광경이 마치 가만히 내버려둬도 넘어질 것 같은 불안한 담을 밀어버리는 행동처럼 느껴졌던 것입니다.
“너희가 일제히 박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시인을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기 위해 공격하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위장을 하고 친절하게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거짓을 행하고 시인을 파멸시키고자 하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인들의 공격을 시인이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앙망함
시인이 원수들에게 공격을 받는 끔찍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스스로 설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인지를 보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자신의 형편을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에 비교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서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이 붙들어주시는 한도 안에서만 서있는 것이고, 주님이 우리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진정으로 서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약함을 경험하게 하시고, 때로는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 존재인지를 깨닫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매일매일 도우시고 이끄십니다. 우리에게 나쁜 일처럼 보이는 많은 일들이 사실은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깨달을 수 없는 우리 자신을 깨닫게 만들고 우리를 비춰보게 하는 거울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매일매일 우리를 붙들어주고 인도해주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시인은 악인에게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 지금 이 악인을 비난하기는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악인과 타협하거나 악인이 변하기를 기다리거나 악인에게로부터 오는 은혜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악을 행하도록 내버려두고 그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 한분을 앙망하였습니다. 고난으로 가득한 때 오히려 하나님 한분을 집중하며 모든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고 산성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62편 전편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시인의 목메도록 녹아내리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사람을 가리켜 늘 제사 속에서 살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녹아내리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의 마음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 앞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형통하고 좋은 일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하게 되거나, 환난과 시련을 많이 당해서 주님을 덜 의지하게 되는 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한사람, 한사람이 당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주 앞에 살도록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십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고난받는 영혼의 치유책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나는도다”(시 62:5)
하나님이 판단하신다
악인들이 자신을 끊임없이 무너뜨리려 하고 존귀한 데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날 때 이상하게 하나님의 도움이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명백하게 악인들이고 내가 지금 당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럽고 억울한데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도와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서 역사해주시면 나는 거기에서 구원을 받고 악인들은 입을 닫을 텐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악인들이 옳은 것처럼 한동안 내버려두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나는 마치 버림받아 만물의 찌끼가 된 것처럼 멸시와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시편을 통한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그의 신앙의 특징을 보면, 악인들이 자신을 모함하고 악을 행할 때 시인은 일관되게 “나는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나이다.” 이런 태도를 취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 가운데 잠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적들에게는 자신들의 비난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는 좋은 상황이 되고, 비난은 더욱 거세집니다. 시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 이면에는 아주 분명한 사상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잠시 악인이 이기는 것 같고 옳은 것으로 드러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결국 당신의 뜻을 펼치실 것이고 그때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들을 옳게, 그른 사람들은 그르게 판단하신다는 신앙입니다. 다윗의 역사의 기록을 보면 다윗이 자기를 대적하는 자를 향해서 비난을 퍼붓거나 욕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시편 속에서는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주권사상이었습니다.
전설적인 설교자 조지 휫필드는 제가 한때 굉장히 존경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분의 설교를 즐겨 읽었는데 웨슬리와 같은 시대에 살았던 인물입니다. 정말 순수한 칼빈주의 청교도였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분에게서 많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분은 일생의 철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에게 자기를 변명하지 않고 논증하지 않고 변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설수에 올라서 부흥회 돈을 떼어먹는다는 등 험한 이야기가 돌았습니다. 그러나 일체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가지고 있는 생각도 다윗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때로는 오해도 받고 비난도 받고 공격도 당하지만, 모든 변화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살아갈 때 언제나 있을 수 있는 변화입니다. 그것을 인하여 일희일비하면서 인생을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사람의 사람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자세가 오늘 다윗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자신의 영혼에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자신의 영혼이 잠잠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의 경우, 지성적인 면뿐만 아니라 감성의 크기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정신의 크기라는 것은 결국 지성과 감성의 크기입니다. 그는 정신의 크기가 아주 큰 사람이었고 감성도 굉장히 큰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의 상처도 굉장히 많이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억울함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는 기록이 시편에 많이 나옵니다. 그는 자기의 영혼을 향해서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고 말합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다면 영혼을 타이를 것이 있겠습니까? 끊임없이 요동하는 자신의 영혼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자세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진리를 따라 살고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 중에 이러한 대적들로 인해서 고통을 받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의 본질, 타락한 사람들의 본성 자체가 하나님 한분을 향해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라” 이 관용구는 다윗의 시편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은 내적 대화입니다. 우리가 죄를 선택해서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게 되면 한쪽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소리치는 자아가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고 해도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느냐고 소리치는 자아가 있습니다. 비중생자들은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죄를 지을 때는 복합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거듭난 새로운 의지가 그것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꼭 그렇게 살아야할 필요가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은혜에 잠기게 될 때는 자아가 일치된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새 본성을 거스르는 자아가 온전히 못 박혀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만 둠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여기에서 ‘바란다’는 것은 히브리어도 ‘바타흐’(jf'B;)라는 단어입니다. 그냥 쳐다본다는 뜻이 아니라 희망을 그분에게만 둔다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는 대부분 ‘hope in’이라고 번역했습니다.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지 않고 오직 자신이 잠잠히 바라는 하나님에게서만 소망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설명하기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거기로부터 물이 흘러나오듯이, 소망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만 소망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의 다른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은 하나님을 집중하지 못하는 원인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한분을 향하여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신자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모든 소망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옳다고 해도 주님이 그르다고 하시면 나에게 무엇이 유익하겠으며, 천만인이 나를 향해 박수갈채를 보내도 주님이 나를 인정하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거치는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비난하고 미워해도 내가 주님의 편에 있고 주님이 나를 기억하고 인정해주시는 것으로 나는 충분히 만족합니다.”라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의 신앙이며 생활입니다. 어디에 있든 지간에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중심이 된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면, 평화롭고 순적한 환경에서는 교만해지고 역경과 어려움이 오면 그것 때문에 마음이 갈라져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깊은 은혜 속에서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는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고, 순적한 환경 속에서는 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도 자신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련도 보내시고 고난도 겪게 하셔서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르게 알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우리가 올바른 지식을 갖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어려운 것입니다. ‘저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결점이나 문제는 잘 보지만 자신의 문제와 결점을 왜 모를까?’ 우리는 객관적으로 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환난과 시련과 고난을 주셔야만 겨우 자신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식하고 살면 그분께서 매 순간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깨닫고 올바로 아는 사람, 즉 자신에게 엄격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너그러운 사랑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너그러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엄격합니다. 그런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황을 통해서 자신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상황은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인간으로서 자신에 대해 생각해봐야 자기를 향한 찬양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고난 중에 깨닫게 되는데, 고난 자체가 나 자신을 비춰보는 거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말씀이 거울이 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119편에서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입니다.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고난과 역경을 당해야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겨우 생각이 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난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잘 들어오는 것은 고난이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움과 분노, 억압, 이런 것들이 속에서 솟구칠 때 오히려 이성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옆에 성지타워 건물을 짓고 있는데, 그 회장이 자살해서 신문에 났습니다.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면서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집중하고자 할 때 그 말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말씀에 비춰볼 때, 거기에서 진실한 참회, 자기 깨어짐, 끊임없는 자신에 대한 포기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우리에게 더욱 강렬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모든 힘은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바라고 그분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분에게서만 소망이 온다고 확신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에 적합한 마음이고, 순종하기에 적합하고 마음을 쏟아 기도하기에 적합하고 하나님을 섬기기에 적합한 마음입니다.
나의 구원과 영광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시 62:7)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를 7절에서 묘사하고, 8절부터는 실질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하는지를 말합니다. 시인은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라고 고백합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히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약에서도 ‘구원’이라는 개념 자체가 포괄적입니다. 인간을 모든 악과 고통에서 건져주셔서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있게끔 해주시는 모든 것이 구원입니다. 구약에서는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영적인 관계를 확인하고, 반대로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통해서 삶을 주관하고 통치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십니다.
나의 구원이신 하나님
“나의 구원이 하나님께 있음이여”라는 이야기는 “삶속에서 만나는 크고 작은 모든 위기와 고난에서 건져주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나에게 하시는 일입니다. 내 영혼이 침체되어서 죽은 자 같이 되었을 때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일도 주님이 나를 위해 하시는 일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묻어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의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다윗을 구약의 최고의 인물로 꼽으며 존경했던 이유도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을 그의 참회하는 심령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깊이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의존한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손으로 그 사람을 빚어가실 때 그에 합당하게 순종할 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존경을 받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이 없을 때는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나를 곤궁과 어려움에서 건져내기 위해 많은 방법들을 사용합니다. 때로는 이것이 지나쳐서 잔재주와 잔꾀를 의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려움에 빠져있는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죄를 짓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시인은 “나의 구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 어려움에 처하고 고난을 당할 때 거기에서 건져주시는 일은 오직 주님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영광이신 하나님
그러면서 그는 말합니다.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영광’이라는 말은 시인이 시편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나의 영광’이라는 말도 자주 사용합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카보드’(D/bK;), ‘무겁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무겁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무게가 무겁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거기에서 발휘되는 효과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힘입니다. 여기에서 ‘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하나님 때문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입니다.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다른 부분에서는 ‘오직’이라는 말이 첨가됩니다.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신앙이 없을 때는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겁게 취급되기 위해서 남다른 지식을 소유하거나 많은 물질을 소유하거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다스림으로 자기의 영광이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영광이시구나.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높이 여김을 받는 것은 결국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 있구나.’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나의 영광입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때로는 우리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것 같아도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앞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하나님과 맺은 관계와 신앙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나의 영광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비록 내가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거나 내게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거나 내가 하나님을 버린다면 내 영광은 없습니다. 따로 존재할 수 있는 영광이 아닙니다. 나의 영광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의존적인 신앙, 이것이 시편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내 힘의 반석이신 하나님
시인은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반석’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추르’(rWx)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위’입니다. 넓고 평평해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종류의 바위입니다. 이 반석위에 어떤 건물을 짓는다면 기초가 매우 튼튼해서 흔들리지 않는 건물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큰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합시다. 그가 무거운 것을 번쩍 들고 진흙위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힘으로는 그것을 충분히 들 수 있어도 발을 디디고 있는 곳 자체가 불안정하면, 오히려 그것을 들고 있는 상태가 그 사람에게 더 위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서 돈을 많이 소유해보십시오.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삶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박수와 갈채와 영광을 받아보십시오. 어떻게 되겠습니까?
일본작가 중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탐독하던 작자가 있었습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이 「설국」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참 아름답게 쓰인 소설입니다. 그 책을 쓰고 일본에서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과 얼마가 지나지 않아 자살했습니다. 엄청난 영광과 수입이 있었고 일본의 수상은 누군지 몰라도 가와바다 야스나리를 모르면 간첩이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노벨상을 받고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때 자살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습니다. 커다란 영광을 받고 결국은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을까? 결론은 자신에게 주어진 명예가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나의 힘의 반석이 되십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영광을 얻고 때로는 고난을 감당하기 위해 큰 힘을 발휘할 때조차 주님은 나의 반석이십니다. 마치 큰 집이 반석위에서 견고하듯이, 내 인생에 무거운 짐을 져서 쓰러지고 주저앉고 땅이 꺼져서 넘어지지 않도록 탄탄하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나의 힘의 반석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
실수가 없으시고 내가 인생의 어떤 처지에 처해있든지 그분을 의지하기만하면 나의 발을 붙들어주시고 내 삶의 건축하는 모든 일의 토대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을 시인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토대 없이 무조건 자신 위에 재물과 권력과 지식들을 쌓아올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참된 반석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의 자살률이 매우 높습니다. 한때 제가 심취했던 ‘프리드리히 니체’ 같은 사람도 사람을 대상으로 수많은 글을 쓰고 엄청난 추종자들을 만들었습니다. 그 사람 책을 안 읽으면 시대정신을 모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1889년에 결국은 길거리에서 쓰러져서 병원에서 쓸쓸히 죽어갑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건축하느냐와 함께 우리의 삶의 기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나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여기서 피난처는 전쟁이 났을 때 도망가는 장소를 가리킨다기보다는 도피성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실수로 사람을 죽이거나 사고를 내면 살해할 의도가 없는 사람일 경우에 우선 도피성으로 도망을 갑니다. 손해를 입은 가족이나 친지들이 미워하는 마음으로 보복 살해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피성으로 도망가면 거기는 안전합니다. 절대로 다른 사람이 보복하러 들어올 수 없도록 도피성에 머물면서 심리를 받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그렇게 도망쳐야 할 때가 있는데 시인은 “하나님이 바로 나의 인생의 피난처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어떻게 하나님만 바라보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5절에서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토할 곳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시인은 개인적인 신앙의 간증을 하고 난 다음에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가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어떻게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야할지를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받은바 은혜를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필연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참으로 올바로 알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 복음을 통해서 그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더 큰 동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지식에 대한 경험입니다. 헬라인들은 지식이라는 것을 어떤 사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식을 자기의식 속으로 투영시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밖에 있는 것들에 대한 인상을 머릿속에 투영시켜서 꽃에 대한 생각과 만나게 되는 것을 지식이라고 보았습니다. 히브리인들은 지식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보이는 꽃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을 뒤섞었습니다. 꽃에 대한 인식이 자기에게 들어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꽃 속에 뒤섞어서 그것 자체를 자신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것, 내가 꽃에 대한 인식 속에 섞이는 것입니다. 단순히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냄새도 맡아보고 건드려보면서 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저 남자를 잘 안다.”라고 말하면 큰일 납니다. 그러면 혼삿길이 막힙니다. 안다는 지식은 경험과 뒤섞이는 성질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나면 그것을 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 술술 나오는 이야기들은 전부 다 경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경험이 얼마나 강력했느냐에 따라 이야기하고 싶은 일 순위, 이 순위, 삼 순위가 마음속에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 순서를 따라서 말을 할 때는 말을 하는 것이 쉽지만 일 순위에 있는 것을 뒤로 미뤄두고 사 순위, 오 순위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이야기하려고 할 때는 버벅거리고 더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라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산성이시고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시고 구원이신 것을 절실하게 경험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그분을 대하며 살아야할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로 집약됩니다. 첫 번째는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항상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자신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면서 경험하게 된 구원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구나.’ 그것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모든 백성들도 의지하며 살도록 그 앞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라
두 번째는 “마음을 토하라”, 이것은 종종 나오는 표현입니다. ‘토한다’라는 말은 먹은 것들을 게워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생활 속에서 토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한 질병이 있지 않는 한 정상적으로는 사람이 음식을 먹고 그것이 밑으로 내려가서 위에서 소화가 됩니다. 토한다는 것은 이것이 역류해서 올라와서 밖으로 쏟아내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토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일반적으로 토하는 것은 위장에서 음식물을 토해내는 것인데, 여기에서는 마음을 토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글을 쓰면서 우리의 위나 장이 음식을 보관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생각을 저장하고 있는 위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위와 같습니다. 그 속에 많은 것들을 담아두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쓰고 달고 매운 맛을 느끼면서 음식이 내려가지만 내려간 후에는 그것이 쓰지도 달지도 맵지도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많은 일들이 경험되지만, 일단 기억 속으로 내려가면 그 기억은 슬프지도 기쁘지도 애달프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다시 올라올 때 그것은 다시 우리의 마음을 건드려서 슬펐던 기억은 우리를 슬픔으로 데려가고, 기뻤던 기억은 우리를 기쁨으로 데려갑니다. 물론 슬프고 가슴 아픈 것들도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질 수는 있지만 슬픈 감정을 통해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5년 전에 가슴 아프고 슬펐던 일이 떠오르면서 갑자기 웃게 되는 경우는 흔치않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라”고 말합니다. 결국 마음을 토한다는 것은 의지하는 감정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 마음 깊이 묻혀있는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모두 아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보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토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려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있는 염려와 근심과 고통과 괴로움, 심지어는 유혹과 죄악까지도 하나님 앞에 모두 토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알고계시는 분이시지만 그것을 주님 앞에 토해놓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모두 쏟아놓으면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일 때 기도를 많이 하게 되지만, 기도를 깊이 많이 하게 되면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기도 안하면 점점 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점점 사라지면 하나님 앞에 더 매달리지 않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은 마지막으로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인생을 살면서 경험한 고백이었습니다. ‘나의 피난처’가 ‘우리의 피난처’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으로 모든 백성들을 불러들여서 함께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살자고 하나님 앞에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삶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시 62:9-10)
외형적인 것들의 헛됨
본문을 보면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시인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과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일 것입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 안에서 나오는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접촉하는 사람들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권세 있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왕이 되기 전의 다윗은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시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지만 끊임없이 사울에게 박해를 받으면서 도망 다녔습니다. 권력 있는 사람들이 힘이 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지를 다윗은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누가 천하고 누가 높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삶의 외관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평가하시는 당신 나름대로의 잣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독특한 저울입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저울에 사람들을 달아 보실 때 “입김보다 경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존귀해 보이고 높아보여도 하나님께는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있습니다. 사람의 영광이라는 것이 사람이 보기에 영광스러워 보이는 것이고, 부자라고 하는 것도 사람이 보기에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으니까 귀해 보이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명예와 권세와 영광의 원천이시고, 이 세상의 부의 원천이신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사람이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보는 기준으로 하나님이 사람을 보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뛰어난 미모나 학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본뜬 것인데 무한하고 불변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에 비하면 인간이 본떠서 가지고 있는 것들은 우습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당시의 저울이라는 것이 간칭(杆秤)입니다. 저울추를 달고 물건을 올려놓아서 추와 평행을 이루게 해서 무게를 잽니다. 추보다 물건이 가벼우니까 들려 올라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영광이 있고 높아보여도, 하나님의 저울에 달면 들려 올라가는 지극히 가벼운 것이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그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모습이자 모양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우리를 달아보실 때 가볍게 들려올라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말하면서 시인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포학을 의지하지 말라
첫째는 포학(暴虐)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포학은 무엇입니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내가 원하는 질서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에 의도를 가지고 솟구치는 분노와 함께 대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발산해서 그 상황을 돌려놓고 움직이려는 것들은 결국 자기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불신앙적인 인간의 표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정치사 속에서 나타날 때 포학한 군주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아무리 포학한 군주라고 할지라도 모든 것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잘 되고 움직이는 동안에는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는데 왜 그러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들이 자기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 자기가 원하는 대로 돌려놓고, 원하는 대로 되지 못 하게 했던 사람들을 징벌하려는 의지가 쏟아져 나오는 분노와 함께 상황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포학입니다. 이것은 가장 악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것이고 가장 나쁜 방식으로 상황을 자기 마음대로 바꾸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우리를 에워싼 삶의 질서가 항상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은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이 원하는 대로 뭐든지 해준 아이들은 불행해집니다. 아무리 훌륭한 곳에 시집을 보내도 불행해집니다. 자기 부모는 그렇게 해주지만 세상 사람들은 부모와 같은 애정을 가지고 자기가 주저앉아서 버둥거리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자신에게 힘이 있다고 해서 자녀들에게 모든 것들을 다 발휘하여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은 그들을 불행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제가 청년들을 만나보면 열 명 중에 세 명은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객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보더라도 저 성품과 저 성질머리로는 절대로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통계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절반 가까이가 이혼을 합니다. 제가 점수를 후하게 준 것입니다. 못할 것 같은데 잘하는 사람보다는 잘할 것 같은데 못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언약 백성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움직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고 삶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고통스러운 질서들, 혹은 평안한 질서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앙망하고 바라는 생활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은혜가 떨어지면 포학해지는 것입니다. 소리를 지르고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포학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 독립하려는 인간의 특징입니다.
탈취한 것으로 허망해지지 말라
두 번째는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전쟁의 문맥에서 자주 나타납니다. 나라가 전쟁을 해서 다른 나라의 것을 빼앗습니다. 이것이 탈취입니다. 빼앗은 것을 함께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나누어줍니다. 그때 그들은 아주 교만해집니다. 전쟁의 문맥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윗은 이스라엘 속에서 힘이 없는 자의 것을 빼앗는 사람들을 많이 발견했습니다. 포학을 의지하고 힘을 가지고 연약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서 자신들이 엄청난 자원을 소유한 것처럼 허망하여진 사람들을 많이 본 것입니다. ‘허망하다’라는 것은 없는 것을 찾는 열심입니다. 그것이 형이상학적으로 악입니다. 사실은 없는데 없는 것을 찾기 위해서 마음이 허탄해지고 허무한 것에 굴복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라
마지막으로 세 번째 나오는 것이 “재물이 늘어도 거기 치심치 말지어다” 입니다. 재물은 없으면 없기 때문에 마음이 재물에 집중되고, 많이 있으면 많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재물에 집중됩니다. 예수님도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그곳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늘어난다고 할지라도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치심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온전히 앙망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치심치 않기 위해서는 재물보다 더 좋으신 하나님으로부터 누리는 만족이 그 사람의 영혼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시때때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앞에 자기의 마음을 토하는 일이 있어야하는데 그것이 없을 때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따뜻한 여름날의 음식과 같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냉장고 밖에 두면서 “제발 썩어라.” 하고 빌거나 거기에 썩는 약을 뿌리지 않아도 내버려두면 하루면 쉬어서 먹을 수 없고 며칠을 외출을 하고 돌아오면 퍼렇게 곰팡이가 피어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과거의 신앙도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주님의 손에 붙들리고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믿음생활입니다. 그것이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의 생활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매순간 절실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입니다. 그것이 가장 농축된 형태로 표현된 핵심이 기도생활입니다.
제가 분명하게 예고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유산은 교회에서 잊히기 시작할 것입니다. 특별히 후기 근대주의가 저물어갈수록 인간은 종교적이 되어가면서도 점점 더 참된 경건과는 멀어지는 시대가 되어갑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이미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안에서의 진정한 종교성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앞에 자기의 마음을 수시로 토해놓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분을 온전히 의존하게 되는 관계를 통해서 우리가 신앙의 도리를 배워가고 거기에서 인간의 본분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권능과 인자가 주께 있음은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시 62:11-12)
본문해설
시인은 62편의 끝을 맺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들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 속에서 들었던 신적인 음성을 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시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풍부하게 주어지던 시대였고, 다윗이 왕이었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는 선지자 중 한사람이었습니다. 충분히 하나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당시에도 모세오경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권능이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상과 표현들이 많이 발견됩니다. 시인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왕의 권능
시인은 하나님과 교통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분명한 말씀을 들었는데, 그것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권능’이라는 것은 대개 왕과 관련하여 쓰이는 단어입니다.
왕은 그 나라의 수도에 거주합니다. 왕이 왕국의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면서 통치하지 않습니다. 왕이 한번 행차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왕은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직접 그 자리에 임하여 통치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민주화시대가 되었으니까 덜하지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본인이 신변의 위협을 많이 느꼈기 때문인지 대전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면 6개월 전부터 계획을 세우고 보안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일주일 전부터 보안요원들이 대통령이 묵을 방에 가서 하수도구멍까지 조사를 하고 봉인을 한다고 합니다. 제가 대전에 내려갔을 때 대통령이 잤던 방에서 한번 잔적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도 도자기를 뒤집어보니까 거기에 금속탐지기로 검열했다는 봉인이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내려오는 날은 호텔직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전부다 경호실 직원이라고 합니다. 똑같은 복장을 하고 호텔 전체를 접수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그러한데 옛날의 왕들은 신변의 위협을 더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왕이 직접 현지를 지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수도에서 자기가 가보지도 않은 땅까지 명령이 하달되는 것입니다.
섭리 안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
자신의 뜻에 사람들이 복종하고 그것이 구현되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권능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고 할 때 ‘권세’는 당신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통치하시는 능력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완전한 통치가 구현되고 모든 인간이 온전히 복종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입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모든 인류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권세를 행사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보다 복잡한 요소가 있습니다. 인간들이 자율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악을 행할 때 악이 하나님의 권세를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 악까지도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이바지하게 만드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권능이 주께 속한 것입니다.
인간은 자율적인 존재로서 죄를 짓고 악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섭리 안에서 그것들을 사용하셔서 권능을 행사하십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거룩한 통치 앞에 무릎을 꿇고 권능을 인정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고, 신자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이 미래에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복종이 없이 불순종하고 분수에 넘게 행동하고 아직까지도 자신이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행동해서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막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라고 합니다. 칼빈을 비롯한 많은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준 성경 인물 중, 큰 영향을 준 구약의 인물 중 한 사람이 다윗입니다. 다윗을 통해 바울 못지않은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두를 통치하는 진정한 권세와 권한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권능을 행사하시는 방식에 대한 해설, 즉 성경의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분께 온전히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권능이 주께 있다는 확신 때문에 잠시 번성하는 악인을 보고도 불신앙적인 회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하나님이 세상의 역사를 움직이고 계시고 나의 인생을 굳게 붙들고 이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언약백성을 향한 인자하심
시인은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인자를 노래합니다.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권능과 인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권능은 하나님이 세상 전체를 통치하시는 통치의 방식입니다. 언약 백성들에게는 인자한 방식으로 통치가 시행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서 이 땅에 권능을 행사하실 때 자기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그 권능이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행사될 것이고, 불복종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이익을 박탈하는 쪽으로 권능이 행사될 것입니다. 언약백성들에게 권능을 베푸는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자비하심이 넘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공급과 용서, 은혜를 베푸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언약백성들이 비록 죄에 빠지고 하나님을 떠나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십니다. 비록 그들이 명백하게 악을 행했어도 진실로 용서를 빌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그들을 진정으로 용서해주실 뿐만 아니라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비록 악인이 잠시 번성하는 것 같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은 언약백성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신실한 언약백성들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진실하게 따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한 대로 갚으실 때 악인에게는 긍휼히 여김이 없으시지만 언약백성들에게는 긍휼히 여기시는 인자하심으로 대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인은 시편 62편의 마지막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전적으로 의존할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도록 살아야합니다.
시편65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
시편62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