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3
목 차
영혼의 갈망(시 63:1) 37
생명보다 나은 인자(시 63:2-3) 41
생명보다 나은 주님이시기에(시 63:4) 47
영혼이 만족함은(시 63:5) 51
홀로 있을 때의 하나님(시 63:6) 55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부르는 노래(시 63:7) 58
내 영혼이 주를 따를 때(시 63:8-10) 61
하나님을 즐거워함(시 63:11) 65
시편65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영혼의 갈망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 63:1)
나의 하나님
시편에는 “주는 나의 하나님이라”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소유격을 사용해서 마치 하나님이 자신의 소유물인 것처럼 표현합니다. 하나님도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너희는 나의 기업이라.” 기업이라는 것은 재산입니다. 본문에서도 “주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가 된다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매우 특별한 관계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나의 책, 나의 돈, 우리 집’ 이런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누구의 제약을 받지 않고 내가 그것을 충분히 누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세 들어 사는 것보다 집을 소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는 데 남의 집이나 내 집이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떻게 보면 남의 집이 더 편한 것도 있지 않습니까? 망가지면 전화해서 “물이 새는데 빨리 고쳐주십시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 집을 갖고 싶어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년만 살면 나가라고 합니다. 2년이 지나고 나면 여간 괴로운 게 아닙니다. 못 나갈 게 뻔할 때는 집세를 많이 올려 달라고 합니다. 생활하는 데는 불편이 없지만 그것을 충분히 누리지 못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소유격으로 묘사함으로 언제든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변동 없는 누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충분히 누리면서 사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소유격을 써서 배타적으로 당신만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시편 뿐 아니라 성경 전체에 많이 나옵니다. 언약 백성들의 가장 큰 특권은 하나님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혼의 갈망
시편 63편은 ‘다윗의 시’라고 합니다. 성경은 이 시를 가리켜 그가 유대광야에 있을 때라고 성경이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지만 아마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사울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 쓴 시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번역이 조금 이상하지만 “내가 간절히 주님을 찾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찾습니다. 이는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는 것 같습니다. 나의 육체도 주를 바라봅니다.” 이렇게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기본적으로 물이 없는 땅입니다. 그 지역은 강수량도 적고 샘이 별로 없는 곳입니다. 그래서 우물을 파도 물이 잘 안 나오고, 물이 나와도 쓴 물이 나와서 사람이 먹기 어려운 물입니다. 그것을 ‘마르고 곤핍한 땅’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곤핍한 땅’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지친 땅’인데, 땅 자체가 지쳤다고 하는 것은 척박하다는 것입니다. 식물을 심으면 땅이 습기와 양분을 적절하게 머금어서 씨를 뿌리거나 곡식을 심으면 그것을 무럭무럭 자라게 만들어 주는 땅이 젊은 땅이고 생산력이 있는 땅입니다. 심어도 농사가 안 되면 땅이 지력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이것을 ‘피곤한 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마르고 곤핍한 땅’은 자기가 처해있는 광야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어서 마르고 곤핍한 광야와 같은 땅을 자기 영혼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자기가 처해있는 자연적인 상황 속에 하나님 앞에서 고통 하는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투사시킨 것입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내가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목마르다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물’이라는 단어가 압도적으로 많이 등장합니다. 음식을 못 먹어서 죽는 것과 물이 없어서 죽는 것은 종류가 다릅니다. 음식을 먹어서 아직까지 활동할 수 있는 힘이 있어도 물을 마시지 못하면 고통가운데 서서히 죽게 됩니다. 다른 자원들이 우리에게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영적인 자원이 인간에게 없을 때 정상적인 삶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내 영혼의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갈망한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갈급하다’라고 번역을 하면 좋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내가 목마르고 내 육체는 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물이 없을 때 다른 인생의 즐거움들은 사치스러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목이 마를 때 육체적으로 물을 찾기 위해 처절히 몸부림치는 것처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을 원하기를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는 것처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영혼의 집중
이것은 영혼의 집중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남들 하는 것을 다 따라 해도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의 마음 없이 대충 살아가는 것보다 단 한 번 처절하고 간절한 갈망 속에서 주님을 향하여 사는 생활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의 성품의 빛깔을 더 많이 보여주십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절실함과 하나님을 향한 집중과 간절함이 없이 마음이 흩어진 채 살아갑니다. 그러면 삶의 모양은 종교적이지만 그 마음은 한 번도 신앙적인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끊임없이 신앙생활의 양식을 찾아보려고 몸부림치지만 그것은 형태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한 번도 하나님을 목말라 해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것에 스스로 만족하고 부요해서 자기의 영혼의 결핍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시인은 “나의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왜 굳이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서 썼을까요? ‘육체’라고 표현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감각적인 생활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마음에 가끔 생겨나는 사람도 실제 생활로 들어가면 다시 퍼지는데, 이것은 생활 속에서 만나는 수많은 생활의 여건, 상황, 이런 것들입니다.
마태복음 3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앙 즉,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핍박과 환란이 오면 마치 돌짝밭에 뿌려진 씨처럼 말라버린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모두 환경입니다. 핍박과 시련이 오면 마음이 빼앗겨서 자기 안에서 시작되었던 신앙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재물이 많이 늘어나고 자기에게 좋은 일들이 생겨날 때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하나님을 향한 집중이 결국은 지속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로 말미암아 잠시나마 하나님께 집중하려고 했던 마음과 생각들이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과 같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기에 앙모합니다.”라는 고백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생명보다 나은 인자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2-3)
성소를 바라볼 때
시인이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성소에서 주를 바라볼 때 하나님이 보여주신 권능과 영광의 베풂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시인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시지만, 특별히 성소에서 자신과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입증해주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살든지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붙드시고 보호하십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일반섭리입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아닌 다른 곳에서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살필 때도 주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에서 하나님을 경배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필요한 많은 것들을 채워주십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녹아 어린아이처럼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면서 나 혼자가 아니라 많은 지체들이 함께 자신의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의 영적인 가정을 그 안에서 이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면서 죄 지은 자에게는 참회를, 갈 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빛을 통하여 갈 바를 알게 하십니다. 쓰러진 자들에게는 다시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교회 안에서 만큼 그렇게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일주일 동안의 삶 속에서도 경험하지만, 농축되고 집약되고 집중적인 형태를 주님 앞에 나아왔을 때 교회 속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보면서 개인적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붙드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돌봄을 받는 것을 보면서 교회에 속해 있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역시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로서 그분의 돌봄을 받을 것이라는 자각을 갖게 됩니다. 시인은 이것은 성소에서 깊이 경험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주의 인자’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당신의 영광과 권능을 보여주신 것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교회에서 뿐 아니라 어디에서 생활하든지 하나님은 자기를 그렇게 대해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성소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시가 끊어진 것처럼 표현을 삽입하는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감격하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가장 커다란 영광은 교회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먼저 교회 안의 지체들이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깊이 발견하고 감격한 후에 그것을 따라 살면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세 가지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주를 갈망하는 것처럼 주님을 간절히 알기 원하는 성도들, 그리고 그 둘을 묶어서 진리를 경험하게 해 주시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 이 세 가지가 함께 만날 때 영혼에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에 와서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 교회에 와서 무엇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를 절실하게 하나님 앞에 바라고 사모해야 할 텐데 다른 목적과 기대를 가지고 교회에 옵니다. 교회가 전할 진리가 없고 성령의 역사가 사라지게 되면 교회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해 깊이 깨닫게 만들어주는 일을 잘 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명보다 나은 주의 인자
시인은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생명은 자신의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생명은 이 세상에서 인간이 최종적으로 소중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살아있어야지 모든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우체국장을 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 보험을 처음으로 도입한다고 해서 위에서 빨리 모집을 하라고 압력을 넣는지 매일 아침마다 괴로울 정도로 실적을 올리라고 지시가 내려왔었습니다. 직원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보험 좀 들어주시라고 사정을 하고 그랬습니다. 직원이 설명을 하면서 “아저씨, 이거 굉장히 좋아요.” 뭐가 그렇게 좋으냐고 하니까 “다른 것은 다 똑같아 보이지만 이것은 죽었을 때 돈을 엄청 많이 줘요.”라고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것만 빼 놓고 딴 걸로 봅시다.” 하는 것입니다. “왜요?” 그러니까 “아니, 내가 죽었는데 돈이 많이 나오면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조금 나와도 내가 살았을 때 받아서 살아야지.” “그래도 남아있는 가족들이 있지 않습니까?” “가족들이 남아있어도 내가 죽었는데 그까짓 돈이 많이 나오면 뭐합니까? 살았을 때 많이 나오는 걸로 봅시다.” 자기가 죽었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생각입니다.
생명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오죽 했으면 지혜자는 “산 개가 죽은 사자 보다 낫다”라고 했겠습니까? 당연합니다. 살아있는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다가 죽은 사람을 계급을 올려줍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긴 하지만 승진을 안 해도 살아있는 게 낫지, 죽어서 승진하면 뭐하겠습니까? 그만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의 기반이 생명입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생명이라고 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구약에서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 피를 뿌립니다. 그 의미는 생명입니다. “죽기까지 이 언약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맹약입니다. 인간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얼마나 헌신되어 있는지를 말할 때 뭐라고 합니까? “목숨까지라도 바치겠다.”라고 합니다. 그것이 끝입니다.
“그 생명보다 주님의 인자는 더 낫습니다. 더 좋습니다.”라는 말은 “주님의 인자는 그 생명보다 훨씬 탁월합니다. 뛰어나게 좋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육체의 생명은 육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접으면 죽습니다. 죽으면 육체의 생명은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영적 생명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육체 없이 지속된 영혼도 하나님의 자비를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몸은 더 이상 목숨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영혼은 불멸하는 존재로서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갈망하기 때문에 “주의 인자는 생명보다 낫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인자는 나의 육체의 생명보다 더 낫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다윗은 벌써 우리의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 그리고 죽음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혼의 생명이 지속되고, 영혼의 진정한 행복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이러한 교리적인 사실을 굳게 붙들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마음속에 살아 있기만 하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할 것입니다.
마음에서 울려나는 찬양
시인은 “그렇기 때문에 내 입술은 주님을 찬양할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전에는 찬양을 안 했는데 앞으로 찬양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용법에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내 입술은 주님을 계속 찬양하고 있습니다. 찬양하는 중입니다. 계속 찬양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내 입술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입술로 고백하며, 내 입술로 노래하며, 내 입술의 말씀’ 유사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말’이라는 것이 커다란 통의 울림과 같다고 보았습니다. 기타를 보면 커다란 통이 있어서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소리가 통 전체에 울려 퍼지면서 그 소리가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 소리는 원래의 소리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똑같은 소리를 불어 넣으면 똑같은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인간의 말이라는 것을 그렇게 보았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어떤 종교보다도 거짓말에 대해 굉장히 단호합니다. 오죽하면 “거짓 증거 하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거짓에 대해 굉장히 단호합니다. ‘후’ 하고 공기를 불어 넣었을 때 ‘뚜’ 하고 커다란 항아리 전체를 울리면서 소리가 나는 것 같이, 나오는 소리가 인간의 말이라고 보았습니다. 자신의 영혼과 마음을 울려서 나오는 것이 인간의 말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말을 듣고 그 사람의 내면의 세계를 알 수 있고, 내면세계는 수많은 언어들을 쏟아내되 그의 내면의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인간의 구조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울려 퍼지는 것이 ‘악’일 경우, 내면에 울려 퍼지는 대로 악을 쏟아내는 것을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울려 퍼져 나오는 것이 진리에 합치할 때 우리는 그것을 진실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그가 가치 있는 것을 표현하면 우리는 그 사람이 소중한 것을 쏟아낸다고 말하지만, 욕지거리를 퍼붓고 사람들을 모욕하고 악한 것을 쏟아낼 때 그것을 가리켜 소중한 것을 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제외하고 진리라는 가치에 부합하는 것들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울려 퍼진다고 본 것입니다.
시인은 거짓을 굉장히 미워합니다. 계시록을 보면 지옥에 가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더더욱 악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거기에서 정직하게 살아야 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용기가 없으면 정직해질 수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죄는 굉장히 큰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에 대해 파괴적인 기능을 합니다.
결론과 적용
여기에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시인의 마음에 무엇이 가득 찼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득 찼습니까? 주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격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격해서 우리의 입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런 삶을 살기 원한다는 고백을 합니다.
생명보다 나은 주님이시기에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시 63:4)
본문해설
여기에서 ‘이러므로’라는 것은 ‘그렇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앞 절에 이어서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라고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생명과 바꿀 수 있는 가치 있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주님의 인자가 생명보다 더 낫다고 고백했습니다. 생명보다 더 나은 인자, 생명보다 더 탁월한 하나님의 사랑, 이것은 육체의 생명을 능가합니다. 생명은 살아있는 동안에만 필요하지만 영혼의 생명은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주를 송축함
“그렇기 때문에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여기서 ‘내 평생에’라는 부분은 희랍어 성경에서 ‘내 모든 생명의 날 동안에’라고 되어있습니다. 육체가 살아있는 자연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의 목숨이 붙어 있는 날 동안에 내가 주님을 송축하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복 되신 분이라고 노래하며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가장 중요한 인생의 본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본분은 “주님은 모든 복의 근원이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자비는 무한하고 영원합니다.”라고 주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시편 136편에 나오는 것처럼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영원하시도다”라고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덕으로 인해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송축’입니다. “그것 밖에는 내가 하나님께 할 일이 없습니다.” 이러한 고백입니다. “이 먼지와 같은 미물, 죄인 중 괴수와 같은 악한 인간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두루 대해주시기를 마치 이 땅에 있는 모든 만물들에게 태양이 빛을 비추는 것처럼 그리하시니 나는 주님의 큰 사랑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행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괴로워하고 갈등하는 대부분의 요인은 욕망 때문입니다. 누구도 자족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경건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은 마치 암에 걸린 사람들의 몸속에 암이 자라듯이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나가 만족되면 사라지는 것 같지만, 또 다시 자라 오르고, 이 욕망을 만족시키는 저 욕망, 저 욕망을 만족시키는 다른 욕망이, 끊임없이 방향을 이동하면서 우리에게 욕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끝없는 욕망의 활동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이 이미 베풀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만족을 하지 못하고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괴로워하고 불만족하고 고통을 받게 됩니다. 끊임없는 욕망 속에 살면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송축할 수 없습니다.
시인은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셨습니다.”라는 뜻일 수도 있지만, 욕망이 무한히 증가하는데도 하나님이 무한히 채워주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시를 쓸 때 그는 유대광야에 있었던 시절이므로 왕이 되기 전이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부족한 것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먹을 정도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이러한 고백을 하고, 시편 23편에서는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은 결국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가장 갈망하고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욕망을 줄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향한 찬양과 만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인하여 손을 듦
두 번째로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맥락에서 보면 손을 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는데, 그것이 구약에서는 경건의 상징이었습니다. 손을 높이 드는 것은 왕에게 “만세” 하고 부르는 동작과 관계가 있습니다. 왕을 향해 손을 드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함께 포함되어있습니다. 왕을 송축하고 높이는 것과 또 하나는 높으신 왕께 복종하겠다는 고백이 그 동작 속에 들어있습니다. 왕 앞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당신께 복종하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 앞에 시인은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겠습니다.”라고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인하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주님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겠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이름’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이름은 이 땅에 두셨다는 공식을 마음에 새기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기에 안 계시고 이름만 두셨는가?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땅에도 계시지만 그의 이름을 두셨습니다. 그분은 더 높아지실 수도 없고 낮아질 수도 없는 분이지만,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셔서 그 이름이 높아질 수도 있고 낮아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된 사람들이 잘 살면 주님의 이름이 높아지고, 잘 살지 못하고 잘못된 태도를 보여주면 이름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여기에서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내 손을 들겠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신앙의 눈을 가지고 자신을 포함한 세계를 보니까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간섭하셔서 자기를 위해 일하시고 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에 맞도록 움직이시는 것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시인은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의존하고 복종하며 살 마음을 시인에게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이것은 일평생 가끔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하나님을 송축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인자하심 때문에 주님의 이름이 높여지도록, 하나님의 통치에 감격하며 그분의 통치에 복종하는 백성으로 살아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동행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영혼이 만족함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시 63:5)
본문해설
여기에서 시인은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내 손을 들리라” 이렇게 말한 후에 자신이 왜 그렇게 살게 되는지를 5절에서 설명을 합니다. 그가 고백하는 내용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 같이”, ‘골수’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풍부함’이라는 뜻입니다. 정확하게 보면 ‘기름진 것’이라는 말이 먼저 나옵니다.
오늘날은 기름진 것을 먹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은 굉장히 호사스러운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기름기가 있는 음식이 워낙 없었기 때문에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배 나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배가 나오면 사장배라고 했습니다. 배 나온 사람들은 스스로 긍지를 가졌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했는지는 모르지만 나쁘게 보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기름진 음식을 먹는 것이 부의 상징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기름진 음식으로 만족함
여기에서 육체가 음식을 먹는 것과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고 만족을 누리는 것을 함께 비교했습니다. ‘풍부하다’라는 것은 영양도 풍부하고 기름진 음식들이 넉넉하게 있는 식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음식이 계속 공급된다면 육체가 그것을 먹고 만족을 누릴 것입니다.
“밥을 먹으러 갑시다.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물을 때 “그냥 간단하게 먹읍시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은 아직 배가 안 고픈 것입니다. “뭐 그렇게 복잡하게 합니까? 그냥 물이나 말아서 김치하고 간단하게 한 술 뜨고 말지.” 이것은 배가 고파도 음식에 대한 욕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굉장히 고픕니다. 맛있고 풍부하게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배가 고플 뿐 아니라 영양에 대한 욕망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욕망이 있을 때 상을 내왔는데 진귀한 요리가 가득 차려지면 그것들을 먹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입니다.
음식을 충분히 먹었습니다. 그 때의 완전한 포만감, 더 이상 음식을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게 된 완전한 포만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배만 부른 게 아니라 더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겠다는 욕구가 모두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 때 육체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음식에 관한 만족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충분히 드셨어요?”라고 묻을 때 “satisfied?” “만족하셨어요?” 이렇게 물어 봅니다. 충분히 먹으면 인간의 욕구가 만족을 느끼고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만 채워지는 영혼의 만족
똑같은 일이 자신의 영혼에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식에 대한 욕망은 칼칼한 것을 먹고 싶다든지, 고기를 먹고 싶다든지, 생선을 먹고 싶다든지, 맛있는 비빔밥을 먹고 싶다든지, 많은 종류가 떠오르지만 영혼이 곤고할 때는 이것도 해고 저것도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을 때는 그것이 무엇으로 해결되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곤고하고 고통받고 외롭고 쓰라리고 방황하고 허무할 때, 그것 하나하나에 대해 다른 처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물어볼 때도 육체가 원하는 것은 비교적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영혼이 원하는 것은 꼭 집어서 “나는 이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해 그렇게 처방을 내릴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은 상당한 수준의 사람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야만 그 모든 것들이 해결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몸의 배고픔은 여러 가지 많은 욕구들을 동반합니다.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아요.” 그것은 배고픔 자체가 압도한 상태입니다. 배가 고픈데 “이거 먹자.” 그러면 “싫어.” 그리고 다른 곳을 찾으면 그것은 다양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아침부터 불을 피워서 굽는 갈비를 먹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아침에 얼음이 둥둥 뜬 차가운 냉면을 먹고 싶다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배가 고파도 음식에 대한 욕구는 다양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가 음식을 못 먹었을 때는 먹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다양한 음식의 욕구들이 생겨나지만, 영혼이 하나님을 못 만나면 감정이 떠돌면서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나는데, 그것들 하나하나에 대한 처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처방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을 놀이로 치료한다, 음악으로 치료한다, 미술로 치료를 한다, 이야기로 치료를 한다고들 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인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정신의 질병인데, 하나님을 만나야 영혼의 진정한 치유와 변화가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분을 향해 내 손을 들겠습니다. 이것은 나의 영혼이 하나님께만 참된 만족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풍부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고 만족한 후에는 더 이상 욕망이 없는 것처럼, 주님을 만날 때 내 영혼이 진정한 만족을 느끼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인자가 내 육체의 생명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경험합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찬양, 영혼의 가락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찬송’도 그냥 입을 벌려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 마음과 영혼 전체가 하나의 울림통이 되어서 거기에서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찬송은 영혼의 가락입니다. 찬송을 부르면 찬송이 우리의 영혼의 가락을 조절해줍니다. 마음이 번잡스럽고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할 때 찬양은 영혼의 가락을 북돋아줍니다. 찬양할 때는 항상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노래를 하면 안 됩니다. 요즘은 스스로 즐기기 위해 찬양을 합니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찬양이 아닙니다. 찬양은 영혼의 가락입니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도록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찬양의 의미입니다. 요즘은 유행가 인기순위를 매기듯이 찬양의 순위를 매기고 자신을 즐겁게 하기위해 부르는데 그것은 찬양에 대한 중대한 모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통해 백성들이 당신을 즐거워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입술로 찬양한다.”라는 것은 몸과 영혼 전체가 울림통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가락으로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만날 때 그는 마음이 찬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찬양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홀로 있을 때의 하나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시 63:6)
밤중에 하나님을 찬앙함
풍부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을 때 만족을 느끼고 몸이 강건해지는 것처럼, 하나님이 영혼을 먹이실 때 만족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밤중에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밤중에 침상에서 찬송하는 것인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편 119편에서도 보면 하나님께 대한 놀라운 감사와 찬송을 밤중에 기억하고 하나님께 올린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인이 홀로 있는 시간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자연스러운 성향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든 방면에서 나타나지만, 혼자 있을 때 잘 나타납니다. 사람들 앞에서 해야 하고 보여주어야 할 때 나타나는 행동은 자신 안에 있는 정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홀로 있어서 자기 마음 안에 있는 성향들이 마음과 행동을 통해 충분히 드러날 때 비로소 그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됩니다.
시인은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특히 밤 시간은 고도의 집중이 가능한 시간입니다. 경건한 시인은 밤 시간에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분을 향한 감사 속에서 보냈습니다. 시편 119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지키며 살 수 있게 해주신 율법을 자기에게 수여해주신 것에 대해 밤중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자기 성찰의 삶
다른 사람의 평가에 의존해서가 아니라 홀로 있는 시간에 나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에 의해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시인을 통해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해야 할 필요성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생각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결점을 보고 집요하게 비판할 때 우리의 태도를 한 번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악의를 가졌을 때 다른 사람들의 결점이 얼마나 눈에 잘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선의를 가졌을 때 결점은 많이 묻히고 장점이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선의를 가지고 사랑하면 똑같이 결점은 묻히고 좋은 점만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자기 아부의 삶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자신을 엄격하게 들여다보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난하고 살피려는 것처럼 그런 의도를 가지고 우리 자신을 파고들어갈 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고 영혼과 삶의 태도를 평가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됩니다.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찾음
시인은 홀로 있는 시간에 주님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으로 마음이 가득 차 있는 그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간절히 주님을 찾되 물이 없어 곤핍하고 마른 땅에서 자신의 영혼과 육체가 주를 앙모한다고 고백합니다. 홀로 있는 시간에 자신이 마음이 하나님과의 합일을 꿈꾸고 그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한 바람과 몸부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시인을 각별히 사랑하셨습니다. 시인은 홀로 있는 시간의 외로움을 오히려 주님과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갈 때 매순간 주를 앙망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외롭고 고독한 시간이 주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부르는 노래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시 63:7)
도움이신 하나님
본문을 보면 왜 시인이 밤중에 주를 묵상하면서 그를 송축하기로 마음을 먹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도움’이라는 단어가 시편에서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힘이 남아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서 지고 있을 때 도움을 간절히 청했더니 달려오는 응원군입니다. 이것은 전쟁할 때 군인들이 쓰는 단어입니다. 그들 때문에 전세가 뒤집히는 도움을 가리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전쟁을 하는데 전세가 팽팽하다가 밀리기 시작합니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군인들이 두려움에 떠는데 저 멀리 지평선에서 하얀 흙먼지를 일으키면서 대군들이 가득히 몰려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 때 누군가가 “힘을 내자! 우리 응원군이 온다!”라고 소리를 치면 지금까지 낙심했던 병사들은 큰 힘을 얻게 되고 적군들은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종류의 도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이 조금 힘을 주셔서 나에게 도움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 혼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큰 힘과 능력 때문에 승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군인이었기 때문에 전쟁에서 응원군의 위력을 누구보다 절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큰 능력과 힘을 의지하면서 그분 앞에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길에 도움이 되셨기 때문에 나는 주님을 잊을 수가 없고 송축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만 살아갈 뿐,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우리의 믿음 생활입니다.
날개 그늘아래 보호하심
시인은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에서’라는 표현도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어미가 새끼들을 둥지에서 보호할 때 큰 날개를 펼치고 새끼들을 그 날개에 보듬습니다. 날개로 덮으면 바깥에서 새끼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미의 날개가 새들을 은폐시키는 것입니다. 짐승의 세계에서는 새끼들이 태어나서 어른으로 자라기까지의 비율이 아주 낮습니다. 물고기의 경우에는 포식자들에게 거의 다 잡아먹힙니다. 심지어 사자의 경우에도 열 마리가 태어나면 그 중에 다 자란 사자가 되는 것은 잃어버리거나 포식자에게 먹히고 서너 마리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어미 새가 자기 새끼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착은 아주 놀랍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쯤 되었을 때 방학을 맞이하여 시골에 갔습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나무 아래에 새끼 새가 떨어져있었습니다. 살아있었는데 깃털이 조금 나고 겨우 눈을 뜬,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새끼였습니다. 그것을 잡아서 네모난 상자에 넣고 위에 망사를 씌우고 고무줄로 묶어서 집에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오후 서너 시쯤 되었을 시간인데 새 한 마리가 우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한 시간가량 집요하게 웁니다. 아마 새끼를 위해 먹이를 구하러 갔다가 왔는데 새끼가 없으니까 삐약 거리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 소리가 우리 집까지 들렸습니다. 결국은 어린 마음에 풀어줬습니다. ‘새끼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이 굉장하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미 새의 울음소리가 지금도 또렷한데 그렇게 처량하고 간절할 수가 없습니다. 일상적으로 부르짖는 새의 울음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새끼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가지고 새끼를 날개에 은폐시켜서 다른 짐승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냥꾼이 새끼를 보았다고 할지라도 날개그늘 아래 품고 있으니까 어미를 쏘기 전에는 결코 새끼들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엄폐하는 것입니다. 새끼에 대한 강한 애정과 집착, 은폐와 엄폐, 보호, 이 모든 것을 보면서 언약백성인 우리가 그러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아래 살아간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삶
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그 도움이 어떤 이유로 시인에게 주어진 것입니까? 언약 때문입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특별히 당신과 언약관계를 맺고 당신의 선택을 받은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시인은 그들이 주의 날개그늘 아래서 하나님 앞에 즐거이 부르며 살아가게 되는 행복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어떤 교훈을 주겠습니까? 언약백성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 이 그림은 알에서 갓 태어나 어미 새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힘없는 새끼 새 같은 언약백성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는 전능자의 날개그늘, 전쟁에서 패배할 시점에 달려와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힘은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 도우시는 주님, 자신들을 큰 날개 그늘아래 보호하시는 여호와의 능력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우리 삶의 뿌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그 은혜와 능력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거기서부터 나오는 큰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내 힘으로는 질 수 밖에 없는 삶의 전쟁에서 승리를 경험하고, 전능자의 날개그늘 아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기 때문에 시련과 핍박이 와도 더 큰 은혜와 능력을 받으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내 영혼이 주를 따를 때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시 63:8-10)
하나님의 택하심
시의 끝부분에서 시인은 주님을 따르는 자신과 자신을 멸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악인 사이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주의 오른손’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선택을 가리킵니다. 이사야 41장에도 보면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니”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당신 우편에 두신다는 사상입니다. 하나의 비유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붙드신다는 것은 결국 선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왜 오른손이 선택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오른손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 훈련을 받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른손’이라고 하면 왼손보다 더 중심적으로 사용하고, 오른손은 왼손보다 강하다고 인식되어 있습니다. 당연히 오른손은 선택한 자요 하나님이 붙드시는 손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나를 붙드신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 때가 언제입니까? 시인은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친근히 하고 그분께 애착을 갖고 사랑하는 영혼의 모습을 ‘가까이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분이 무엇을 명하시든지 그 명령을 즐거이 따르고 순종하는 영혼의 상태를 가리켜서 ‘따른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친근히 함으로 그분께 가까이 하고 그분이 어디로 이끄시든지 즐겁게 따르는 시인의 영혼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생애 최고의 행복과 기쁨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시인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고 주의 오른손이 그를 붙들고 있는 모습은 주님과의 동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한 가지는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완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과 구김이 없는 상태입니다. 구김이 없는 상태라는 것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관계를 무시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잘못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이 빌립보서에서 이야기하는 ‘흠 없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놀라운 내적인 결속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의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열망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샬롬,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 이 두 가지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인간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러한 하나님과 동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어떠한 시련과 환란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던 신앙의 모습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의 모습인 것입니다.
악인의 결국
시인은 악인들을 대조하여 묘사를 합니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붙인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이다”, “땅 깊은 곳에 들어간다.”라는 것은 결국 음부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같이 지옥에 관한 교리가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땅 깊은 곳’은 하나님은 물론이고 어떤 기쁨이나 희망, 도움이 차단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땅 깊은 곳’이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곳’이라는 묘사가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특히 시편에서는 하나의 절망을 가리킵니다.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나이다” 요나서에도 나오는 ‘깊은 곳’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칼의 세력에 붙인 바 되어 시랑의 밥이 되리다”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어서 시체가 처리되는 모습이 그 사람의 일생의 복락과 저주의 상태를 투사하는 그림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어도 시체는 존중하게 다루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길거리에 버려져서 청소부가 쓸어다가 힌놈의 골짜기 같은 데 던져서 쓰레기와 함께 태워버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버림받고 아끼는 자 없이 죽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저주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 못지않게 비참한 것은 인간의 육체가 죽어서 짐승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랑’이라고 나오는 것은 여우입니다. 여우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이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현재와 미래까지 모두 완벽하게 버림받은 비참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시인은 하나님을 즐거이 따르는 사람이고 이 사람들은 시인의 영혼을 멸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은 히브리어로 ‘네페쉬’(vp,n<)인데 이것을 ‘목숨’이라고 번역하면 됩니다. “나의 목숨을 찾아 멸하려 하는 저희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서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연중에 분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시인은 영혼으로 하나님을 즐거이 따르고, 악인은 그러한 시인의 목숨을 끊어버리고 그의 영혼을 찾아 멸하기 위해서 찾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수많은 원수들이 나를 죽이려 하고 내 목숨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당신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나를 미워하고 내 영혼을 수색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라고 묘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보여주는 대조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항상 주님의 편에 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하는 소원이 우리 마음속에서 솟구쳐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보다 신앙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 때, 거기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시련들을 이길 수 있는 용기와 은혜들이 흘러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함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시 63:11)
하나님을 즐거워함
시인은 악인과 의인의 대조를 말한 후에 시편 63편의 마지막 절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정체를 왕으로 드러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악인들이 시인에게 고통을 주고 잠시 시련을 당하는 것 같지만 그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알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즐거워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자기가 원하는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표로서 좋아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부는 좋은 그물이나 좋은 낚시도구를 좋아할 것입니다. 낚시와 고기 잡는 도구들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많이 잡으려는 목적 때문에 그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고기가 있어도 맨 손으로 바다 속에 뛰어든다면 한 마리도 잡을 수 없겠지만 좋은 그물이 있다면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기를 잡을 수 없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낚시도구든 그물이 더 이상 즐거움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기 때문에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행복하고 좋아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번에 북한에서 화폐개혁을 했다고 합니다. 하루아침에 많은 돈들이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그 돈을 벌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애를 썼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한 장만 달라고 해도 절대로 주지 않고 열심히 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부에서 발표를 합니다. “내일부터 이 돈은 아무 쓸데가 없다.” 그래서 그 돈은 이제 어디에 가도 통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더 이상 그 돈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한 것은 그것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재화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법적으로 그것이 불가하게 될 때 그것은 휴지조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워한다는 것은 결국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형이상학적인 정의가 무엇입니까? 어떤 한 대상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것과 가까이 있고 싶어 하고, 그것에 고착하려는 마음과 정신의 움직이는 성향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사랑을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최종적인 끝입니다. 다른 모든 사물들은 그 끝을 차지할 자격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마지막을 차지할 자격이 있으십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고난을 통해 배우는 하나님의 성품
시인은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것은 좋아하고 시련과 고난은 미워합니다. 그러나 시련도 행복도 고난도 위기도 모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시인과 같은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생을 살면서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는 몰랐던 하나님의 큰 사랑을 시련과 위기를 지나면서 배우게 됩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좋았을 때는 냉랭하던 가슴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뜨거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상황은 바이올린 줄과 같습니다. 가느다란 줄부터 시작을 해서 굵은 줄까지 있습니다. 바이올린은 금속으로 만든 줄이지만 가야금은 명주로 만든 줄이고 기타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줄입니다. 줄의 종류와 굵기가 다양합니다. 줄에 손을 대고 뜯거나 켜면 모두 다른 소리가 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서로 다른 환경들을 현악기의 줄처럼 사용하셔서 당신의 속성의 어떠하심과 그 속성이 시행되는 방식을 보여주십니다. 보이는 환경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평안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모르던 것들을 어려움이 오면 깨닫게 되는데, 없을 때는 모르다가 많으면 깨닫게 되는 것보다 더 많습니다.
60-70년대 쯤 되어서 나라가 굉장히 어렵고 힘들게 살 때,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을 보내도 언젠가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필요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텔레비전도 많지 않으니까 라디오에 이런 프로그램을 많이 내보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절망은 없다”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렸을 때 감명 깊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펄벅 여사의 「대지」를 보면 흙을 물에다 빨아서 먹었다고 하는데 그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지냈던 사람이었습니다. 애를 쓰고 노력을 해서 재산을 모으고 집안이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1년에 한 번씩 자신들이 고생했던 시절을 기념하여 가장 빈궁하고 고통스럽게 살 때 먹었던 음식으로 한 끼를 차려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모든 식구들이 그 음식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풍족하게 누릴 수 있는데도 단 하루 그것을 거절하고 옛날의 음식과 환경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대하면서 과거에 대해 묻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부러 만든 상황이지만 그 자체가 현악기의 줄처럼 되어서 우리 마음에 풍족한 상태였더라면 못 느꼈을 또 다른 정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자신의 인생에 가장 곤고한 날에 하나님이 어떠한 성품을 보여주셨는지를 발견하고 깨닫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주께 맹세한 자와 거짓말하는 자의 결국
시인은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로 맹세한 자는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할 때 주님과 더불어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약속의 관계입니다. 넓게 바라보면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 앞에 주로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낭독되고 제사장이 맹세와 함께 피를 뿌리고 그 가운데서 “아멘, 아멘” 함으로 죽기까지 율법에 순종할 것을 다짐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고, 좁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살기 위해 하나님께 서원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서원을 한다고 할 때 그 기준은 하나님의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인 모든 사람마다 결국은 주님을 자랑하게 될 것입니다. 당장은 악인에게 고난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승리하게 하실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게 할 것이지만 거짓말 하는 자의 입은 막힐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 하나님이 마음에 계시지 않다.’ 마음속으로 ‘그런 하나님은 계시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바로 거짓말 하는 사람들입니다. 시편에 나오는 의인과 악인의 대조의 전형적인 묘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의인은 절대적으로 선하게 살고 악인은 절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의인도 때로는 죄를 짓고 넘어지지만 마음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인정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악인은 모든 사상과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입은 막히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마음속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어서 오히려 말하는 것이 사람들 앞에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상황을 오늘 시인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시편 63편 마지막에서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은 시련이든지 고난이든지 모든 환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시편65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
시편63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