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4
목 차
근심하는 자의 기도(시 64:1) 71
숨기시는 하나님(시 64:2) 75
악한 자의 칼 같은 혀(시 64:3-4) 79
악인의 연합과 지혜(시 64:5-6) 84
악인에게 활을 겨누시는 하나님(시 64:7-8) 89
하나님을 선포할 때(시 64:9-10) 92
시편65편 강해 1
시편64편 강해 1
시편64편 강해 1
시편64편 강해 1
시편64편 강해 1
시편64편 강해 1
시편64편 강해 1
근심하는 자의 기도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시 64:1)
근심이 가득 찰 때
64편은 탄원시입니다. 이 시는 하나님 앞에 올리는 간절한 탄원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시인이 근심으로 가득 찼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근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에 밀려오는 염려입니다. 현재적으로 앞으로 무엇인가 자기를 둘러싼 삶의 질서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펼쳐지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 걱정, 이런 것들로 가득 차 있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왜 이런 근심이 생겨나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근심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현재 사물의 질서를 통해 생각하게 됩니다. 눈에 비치는 환경과 모든 것들은 우리 마음속에서 해석되고, 그것을 비관적인 방향으로 해석하거나 올바로 해석했다고 해도 그 결과가 나쁠 것이라고 예상될 때 근심이 생겨나게 됩니다. 근심이 있으면 우리 마음은 분산되기 시작합니다. 우리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공부를 해도 집중할 수 없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올바르게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지장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근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라고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근심하고 있다고 공표하고 다니는 것이라기보다는 마음이 근심에 쌓일 때 나는 소리를 말합니다. 신음, 한숨, 염려와 근심으로 인해 뒤척이는 소리들입니다. 그러한 것이 자기 안에 많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도가 근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근심
근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고, 또 하나는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근심입니다.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근심은 근심할수록 그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집중되게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각성에서 오는 근심은 하나님을 주목하며 하나님께 은혜를 받아서 그분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옵니다. 자기가 아직 회심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는 근심은 주님께 집중하는 마음을 갖게 만들어서 어찌하든지 하나님 앞에 구원받아야겠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근심,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싶다는 절실한 몸부림을 가져올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분명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어떤 근심은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근심 속에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집중하게 됩니다. 이 때 우리의 기도는 불붙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이 때 근심할수록 마음이 나눠지고 흩어져서 하나님을 바라보던 마음을 분산시켜버립니다. 이런 근심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고 매달릴 수 없게 됩니다. 근심이 마음속에 있으면 말을 해도 생각은 다른 곳에 가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근심이 있으면 마음이 온전히 하나 되어 하나님을 섬기기가 어렵습니다. 근심은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파도와 같습니다. 끊임없이 파도를 넘어갑니다. 근심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어 줍니다.
유일한 피난처, 하나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원수들로 인해서 깊이 근심하는 가운데 시인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마음에 근심이 쌓일 때 신자의 유일한 피난처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신자의 피난처입니다. 시인은 근심이 자신을 두르고 있을 때 근심하는 자신의 소리를 들어 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합니다. 근심의 내용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원수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이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그는 근심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왕이 될 때까지, 심지어 왕이 되고 난 후에도 많은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이치로 보면 벌써 죽었어야 될 사람인데 원수들이 숲처럼 늘어서있는 모든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시인이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근심과 원수의 두려움 속에서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을 수 있었고, 그의 생애에 종종 다가왔던 큰 고난과 근심은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을 바라보고 갈망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의지해서 매순간 간구함으로 근심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비록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의 사랑을 받는 성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닌 반면, 이 세상은 우리의 눈에 잘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영향을 받고 신앙을 공고히 하기 전까지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일 때 우리는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진 사람인 것 같이 늘 염려하고 근심할 수 있습니다. 염려와 근심은 소용돌이처럼 우리 생각과 정신을 빨려 들어가게 만듭니다. 큰물이 휘돌며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한 쪽으로 그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과 정신과 모든 것을 빨아들여서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에 비범하게 집중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근심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소용돌이를 치며 물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강물을 타고 다른 곳으로 흐를 수 없는 것처럼,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빨아들이는 무서운 효과가 있습니다. 근심이 밀려올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잘 다스리며 하나님을 찾아야 될 때라고 자신을 타일러야 합니다. 염려가 엄습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교만할까봐 이런 걱정과 염려를 주시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숨기시는 하나님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소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64:2)
본문해설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바는 자기를 숨겨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한 자들이 시인을 수색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시를 언제 지었는지 시기는 간단하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시인의 개인적인 경험이 많이 묻어나 있습니다. 그는 특히 사울에게 쫓기던 때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끊임없이 도망 다녔고 사울은 자객들을 풀어서 다윗을 쉼 없이 찾았습니다. 도망 다니는 기간 동안 하나님이 그를 숨기지 않으셨더라면 아마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숨겨주셨습니다.
숨기시는 하나님
오늘도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숨겨 달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되 우리를 숨기심으로 보호하십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자였습니다. 많은 시간 동안 사울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 다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연적인 현상에 직면하면서 천둥과 번개를 피하기도 했을 것이고 비를 피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의 시를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피하게 하시는 은신처가 되신다는 사실을 여러 번 고백하였습니다. 피할 바위요 산성이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자연재해와 전쟁으로부터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자기를 건지고 구원하시는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는 분이시고 피할 바위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고백하였습니다. 모든 과정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꼭 필요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도 하시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붙들면서 다윗은 고난과 시련이 와도 환경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환경을 능가하는 능력과 사랑으로 붙드시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배경에서 숨겨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행악자의 특징
시인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해를 입지 않도록 하나님께 숨겨달라고 간청하는지를 말합니다.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소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비밀한 꾀’라는 말은 악인이 가지고 있는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선을 베푸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악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고, 겉으로는 달콤한 것 같으나 그 뒤에는 칼이 들어 있는 음모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대부분 단순합니다.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단순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말을 하면 그 말에 마음이 담겨있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마음과 일치한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진실한 사람의 특징입니다. 시인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습니다. 대적자인 사울을 비롯해서 자기를 배반했던 부하들, 일생의 원수가 되었던 행악자들 안에는 이러한 일치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행악자’는 악인과 통하는 개념입니다. 악인은 질료적 개념이고, 행악자는 거기에 구체적인 의도가 들어가서 마음의 악으로부터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경건한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솟구치는 용암과 같이 마음에 있는 악으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일치, 진실함, 이런 것들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사람이란 자연적으로 선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화를 입어서 선한 사람입니다.
행악자들이 용암이 솟구치듯 악을 행하고 일관성 없는 거짓으로 가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경건한 백성이라고 악인의 기질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경건한 백성들에게는 악인에게 없는 작용이 있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법인 율법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죄에 대한 회개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각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완전하지는 않아도 제사를 드리거나 율법을 읽을 때나 가르침을 받을 때 율법이 진리가 되어서 자신을 비추는 것입니다. 어디서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진리의 책망을 받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의 질서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처음부터 진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죄에 대한 관념이 현저하게 약화된 것은 사람들의 양심이 실종되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실종된 이유는 선악의 판단의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죄라는 생각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행악자들의 특징입니다. 악인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솟구치는 욕망과 악행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생각해내는 악한 꾀의 다양성과 종류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사는 선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 경건한 사람들에게는 처음부터 행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지만, 악인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꾀를 만들어 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줍니다.
진리 안에서의 평강
시인은 하나님 앞에 탄원합니다. “죄악을 짓는 자의 소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평정, 평안, 평강의 상태는 진리만이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질서를 표현하는 것이고, 진리가 질서를 만들어가기 때문에 진리에 자기를 합치하는 사람들만이 평강과 평정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서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것 없이 평강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죄악이 가져다 준 평화입니다. 그것은 결코 영구한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 자체가 세상의 본질입니다. 물이 끓듯 세상은 요동치게 되어있습니다. 그 속에서 평강을 잃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진리 편에 서 있다.”라는 확신을 통해 진정한 내적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입니다. 시인은 비밀한 꾀와 요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기도할 수 있도록 언제나 주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한 자의 칼 같은 혀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시 64:3-4)
상대적 의미의 완전함
여기에서 ‘완전한 자’라고 하는 것은 우리말로 하면 ‘온전한 자’라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입니다.
상대적인 의미의 완전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뜻을 내포합니다. 관계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완전의 기준은 율법이 됩니다. 외적인 행동에 있어서 율법의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내적인 마음의 질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완전하다고 하는 말의 두 번째 상대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완전하지 않은데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인정을 해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성경은 노아를 당대에 의인이요 완전한 자라고 했는데, 홍수가 끝나고 나서 그가 얼마나 부주의하고 어리석은 사람인지 그가 잘못을 저지르는 기사에서 나타납니다. 그러한 사람됨이 없다가 갑자기 생긴 것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인데도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한 자라고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 의도는 그 시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표준으로 삼고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인정해주시는 이유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입니다. 누가 다윗을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렇게 인정해 주시고 이후에 열왕들이 따르도록 그를 표준으로 삼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육적인 의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완전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의 정체
이러한 사실들을 기초로 할 때 완전하다고 하는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완전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완전하고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짐으로 완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은 완전하지 않아도 하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면서 그분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이 완전한 자의 정체입니다. 완전한 자의 개념은 시편의 신학에서 악인과 의인의 대조와 연결이 됩니다.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과 의인의 대조는 인간론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악인과 선인을 어떻게 대조하는가? 악인은 언제나 악을 행하며 사는 사람이고, 선인은 의인은 언제나 의만 행하며 사는 사람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이야기 하면 의인 중에도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고, 악인 중에도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단순히 윤리적인 행동의 구별이 아니라 그들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판단과 관련이 됩니다. 그 뿌리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인가?’ 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그분을 사랑할 것이고, 사랑하는 자는 순종할 것입니다. 세 가지는 인간의 가장 큰 의무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교를 가르쳐 주신 것도 이 세 가지를 위해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아는 것, 사랑하는 것, 순종하는 것, 이것이 어느 한 순간 외부에서 밀려 들어와 우리의 마음속에 부어져 기계처럼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물이 소용돌이치면서 맴돌 듯, 하나님이 의인이라고 인정해주신 사람들은 이 세 가지를 구심점으로 그의 사고와 삶, 모든 생활들이 달음질칩니다. 끊임없이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핵심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핵심을 향하여 가는 끊임없는 회귀, 이것이 믿고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데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회귀하고 은혜를 입고 사랑하는 순서로 계속 자기 나름대로 인간을 만드신 선한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자기 회귀성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의인의 내면세계입니다.
구약에서 ‘성도’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하씨드’(dysij;)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 자비를 입은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나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한 사상은 전혀 새로운 사상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이미 익숙하게 흐르는 하나님 은혜 입은 자로서의 성도 사상이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의 독특한 고백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하는 일반적인 고백입니다. 그 고백이 없으면 그는 성도일 수 없고 그리스도인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이 여기서 말하는 ‘완전한 자’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화살같이 독한 말로 겨눌 때
이 사람에게 악한 자들이 행하는 일반적인 범죄는 말로 고통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화살이라고 비유를 합니다. 연마하기는 칼 같이 연마하는데, 그것을 사용해서 완전한 자에게 해를 입히는 방식은 화살과 같습니다. 두 가지 무기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칼은 자기를 노출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병기입니다. 칼의 길이가 1미터가 조금 넘으니까 상대방을 공격하려면 자기 자신을 완전히 노출하고 공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화살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에서 날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이 시기가 주전 10세기 경이니까 이 때 활이 얼마나 날아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화살을 연구한 것을 보니까 430미터를 날아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인덕원역까지 900미터밖에 안 되는데 두 번 화살을 쏘면 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북쪽 오랑캐들을 이기는 큰 무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더 멀리 화살을 내보내기 위해 활의 시위, 활의 재질, 엄밀하게 수학적으로 계산된 화살의 크기, 무게, 이런 것들을 끊임없이 계산해서 사정거리를 늘리는데 사용했던 것입니다. 430미터면 엄청난 거리입니다. 그 정도 거리에서 쏘면 쏜 사람이 보이겠습니까? 은신해서 쏘면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말이라고 하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쌓여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첫 번째 작용은 마음의 작용이고, 어떠한 마음인지를 드러내 보여주는 첫 번째 표지가 말입니다. 은혜로운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을 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말에 있어서 악의가 드러납니다. 그의 마음은 끊임없이 솟구치는 흙탕물과 같이 악한 분노, 험악한 말들을 쏟아냅니다. 배설하듯이 무절제하게 쏟아내는 것 자체가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이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묘사가 그림 같습니다. 혀를 길게 내밀고 그 혀를 숯돌에 간다고 생각을 해보십시오. 옛날에 활을 만들 때 대장간에서 두드려서 화살촉을 만들고, 나무를 가볍게 해서 캡을 씌우듯이 화살촉을 씌우고, 나무 뒤에 깃털을 달았습니다. 그리고 화살촉 하나하나를 숯돌에 갈았습니다. 뾰족하면 적은 힘으로도 뚫고 들어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상력을 더욱 높이기 위해 화살촉 끝에 독을 발랐습니다. 그러면 살짝 닿기만 해도 죽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병기를 만들던 광경을 여기에 도입한 것입니다. 화살촉을 뾰족하게 갈아서 일발필살의 기회를 노리듯이 악인의 혀는 평소에 연마된 것입니다. 어떻게 연마되었을까요? 그는 마음에 경건을 잃어버리고, 악의에 가득 찼습니다. ‘혀’라고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에서 끊임없이 연마질을 해서 악한 말을 하기에 적합하도록 한 것입니다. 의인, 하나님의 완전한 사람을 향한 적의와 반감들을 키운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그것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자기는 화살을 쏘고 잊어버렸지만 그 화살은 완전한 자의 가슴에 박혀서 큰 고통을 겪게 만들었습니다.
‘롱펠로’(Henry Wadsworth Longfellow)라는 사람이 시를 썼습니다. “하늘 향해 화살 하나 쏘았네. 그리고 잊어버렸네. 먼 후일에 알았네. 그 화살이 고목나무에 박혀 있는 것을.” 쏜 사람은 잊어버려도 그것에 맞은 사람은 오래도록 그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는 화살에 맞았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삼지만, 악인이 쏜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반드시 갚으십니다.
결론과 적용
이 세상은 어둠 가운데 있기 때문에 빛의 사람들을 싫어하고, 세상이 굽기 때문에 옳은 사람들은 미워하고,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환한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미움으로 가득 찼고 자기 사랑으로 찼기 때문에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 편에 서있는 완전한 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서는 악한 말로 겨누고, 화살처럼 쏘는 사람으로부터 종종 고난을 당합니다. 그들이 악을 행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런 과정들을 통해 주님께로 피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지만 그분께 받아들여지고 은총을 입음으로써 더 온전한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끄십니다.
악인의 연합과 지혜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시 64:5-6)
인간과 하나님을 아는 지혜
시인은 악인들에게 고난을 받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악인의 실체를 이해하는 지혜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순결한 것은 좋지만 지혜로워야 순결한 것이 빛나는 것이지 어리석으면 순결한 것은 결코 빛날 수 없습니다. 악을 알면서도 자신은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순결하면서 악의 실체를 깊이 이해하고 꿰뚫을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반되는 것을 지혜롭고 충성된 것으로 가르치시면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도록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게 되면 무조건 순결할 수만은 없고, 순결할 뿐만 아니라 지혜도 함께 갖게 됩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인간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여부는 인간을 아는 여부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왜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인간을 알게 되고, 인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크기가 될까요? 여러 각도로 설명할 수 있지만 모든 논의의 핵심은 인간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가장 닮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계시의 빛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만 그것을 인식하는 것도 자기를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 다른 인간을 아는 지식은 하나인 것입니다. 칼빈은 두 지식의 지평이 일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악인들의 연합
다윗은 순결한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서 인간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악인으로부터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은 자신에게 무익한 것처럼 생각되었지만 결국 모든 고통의 과정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고 악인의 정체를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5절과 6절에서 시인은 악인의 특징을 세 가지로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연합입니다.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은 뭉치고 모이고 연합하기를 힘씁니다. ‘서로 함께’라는 단어가 짧은 구절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몸과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싫증에 빠지고 죄를 짓게 될 때 우리의 생각과 마음, 육체의 행동, 모든 것들이 놀랍게 일치를 이루면서 악을 행하는 것과 같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놀라운 일치가 있습니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몸의 지체인 교회가 성령의 은혜로 충만할 때, 주님을 섬기기 위한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서 혼연일체가 되는 것을 생각나게 만들 정도로 놀라운 일치를 이룹니다. 이것이 악인의 특징입니다. 교회는 선한 일을 위하여 싸울 때 힘을 합치지 못 하는 일이 있어도 악인은 악을 이루기 위해 놀라운 일치와 연합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시인이 악인들로부터 받는 고난은 언제나 일대일의 관계에서 오는 고난이 아니라 다수를 상대하면서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사울 혼자 시인을 미워한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이 함께 시인을 미워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 도망할 때도 압살롬이 혼자 공격한 것이 아니라 악인들이 놀라운 일치를 이루며 연합하면서 시인을 공격했습니다.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옳은 일을 위해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악인들은 그들을 향해 놀라운 일치와 연합을 이룹니다. 퀴즈를 한 번 내보겠습니다. 교회 안에서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이루는 연합이 강할까요? 아니면 교회 안에서 은혜가 식고 악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의 연합이 강할까요? 후자가 훨씬 강합니다.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일치를 이룹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구를 미워하고 악을 행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해나가면서 다수의 악인을 상대하게 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나 우리는 소수이고 혼자이며 우리를 대적하는 악인들은 연합을 이룬다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악인의 연합 속에서 배우게 됩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악인이 몇 명이고 나를 따르는 사람이 몇 명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가치는 내가 옳은 쪽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패배하는 것 같아도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더 큰 승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악인들의 사상
두 번째로 악인의 특징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가 보리요”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도 악을 행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누가 보겠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홀로 모든 것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보지 않는다면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악인의 넘치는 악한 행동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지식의 결핍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선하고 올바르고 의롭고 하나님의 법에 부합하는 신실한 행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나오지만, 악을 행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끔찍한 악행들은 무엇이 있어야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지고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거기에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악들이 나오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선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작용하기 때문이고,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무슨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결핍인(缺乏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지혜
세 번째는 그들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뜻과 마음이 깊도다”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악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악인으로부터 받는 고난이나 해로움을 통해 악의 실체와 악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작용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으로 보게 되면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점점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악을 경험하면서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오히려 그것을 통해 지혜를 배워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을 십몇 년 동안 다녀도 한 번도 바가지를 쓴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정말 창피할 정도로 바가지를 두 번 썼습니다. 그리고 나서 ‘참. 저 사람들이 나보다 훨씬 지혜가 많구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공항에서 내려서 김동수 목사를 만나기로 해서 밤에 택시를 탔는데, 결국은 못 만났습니다. 숙소에서 자고 아침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공항으로 가는 차를 탔는데 미터기를 무엇으로 가렸습니다. 그리고 한 30분 정도 갔습니다. “얼마냐?” 그랬더니 200위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200위안이면 4만 원정도 됩니다. 중국에선 그렇게 많은 요금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보기엔 50위안 정도면 될 것 같은데, 200원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말이 잘 안 통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서툴게 이야기를 하면서 “왜 200위안이냐? 너무 많다.” 그랬더니 “200위안이라는 것입니다.” “그럼 좋다. 내가 200위안을 줄 테니, 200위안짜리 영수증을 다오.” 그랬더니 이 친구가 하는 말이 기계가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고발하면 그 사람은 당장 해고입니다. 그런데 통역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비행기 시간은 늦어서 빠듯했습니다. 거기서 씨름하다가는 비행기를 놓치겠는데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200위안을 빼앗기고 왔습니다. 그 이야기를 현지에 있는 선생들한테 했더니 목사님 겸손하라고 한 번 당한 것 같다고 하면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악인의 실체를 보면서 그들의 결국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악인을 만나되 악인으로부터 해를 입을 때도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더 많이 알아가고 지혜로워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과다한 비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더 많은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됩니다. 악인의 연합과 지혜를 통해서 우리는 올바르고 진실한 지혜가 무엇인지를 주님 앞에서 배워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활을 겨누시는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시 64:7-8)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7절에서는 악인이 시인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베푸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숨어서 활을 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시인은 고통을 당하고 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심판의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악인을 향하여 화살을 겨누시는 것입니다. 화살은 공격하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악인은 자신의 형통에 득의만만해 하지만 그가 행한 일처럼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화살을 겨누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화살에 상하게 되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화살에 맞게 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홀연히 임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홀연히 임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감추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일의 원인과 결과만 볼 뿐 그것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인에게 활을 겨누시는 분이십니다.
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사람의 말은 마음의 발로이고 그 마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어떠함을 보여주는 가장 은밀한 것입니다. 악인들은 말로써 끊임없이 시인을 비롯한 의인에게 고통을 주었고 악을 행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악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혀’는 의로운 사람을 향한 비난과 말의 공격만이 아니라 말로써 악을 도모하고 하나님께 도전하고 불의를 행했던 것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보여줍니다. 비록 자신이 악인에게 고난을 당하고 악을 경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사물들의 이치를 감찰하고 계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강한 팔과 능력 있는 손으로 어루만지셔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붙드셔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도우시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정하신 성품이 악인을 심판할 때, 그 결과가 어떤지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을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라는 것입니다. ‘머리를 흔든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광경이 하도 끔찍해서 고개를 돌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도망친다’라는 뜻으로 나옵니다. 악인이 받은 심판의 광경이 너무 끔찍해서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 있는 상태를 지시하는 말입니다. 이것을 쳐다보는 사람 중에는 악인도 있고 선인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화살을 날리셔서 멸망당한 광경이 너무 끔찍해서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주님 편에 서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해주시고 동행해주시는 삶을 사는 것이 주님이 인정해주시는 삶입니다. 잠시 고난을 당하고 악인에게 악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주님이 보호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고 혹시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들이 진실한 회개와 뉘우침을 통해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은혜의 생활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나 하나님이 그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는 사람은 형통하지만 하나님이 그를 향해 활을 겨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포할 때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시 64:9-10)
악인, 하나님을 두려워함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좋은 일입니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운 감정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감정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64편에서 악인들이 시인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악을 행하는데 모든 미움과 악, 죄들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엎드러지자 많은 악인들이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악인들에게는 경고가 되고 하나님을 따르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되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자기 백성들에게 보이실 때 당신의 뜻을 따라 자비와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공의의 베푸심이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공의로우심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질서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위로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악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대적해서 구축하려고 하는 모든 악과 잘못에 근원적인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심판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위로를 주시고 악인들에게는 두려움을 심으시는 분이십니다.
의인, 하나님을 기뻐함
10절에 보면 악인과 관련된 의인의 대조가 나옵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라고 나옵니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피합니다.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악인들에게 억압받고 고통 받을 때 슬퍼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악인을 멸하실 때는 의인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 있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성품을 보이실 때 백성들로 하여금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짧게 보면 이익을 받는 사람과 해를 입는 사람이 바뀐 것 같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것 같습니다. 주님 편에 선 사람들이 희생을 하는 것 같지만 하나님 앞에 공정하게 놓고 보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이 세상에 펼치시는 과정입니다. 짧은 순간에는 그것이 모순이 되는 것 같아도 긴 시간을 놓고 보면 모순이 아니라 아름다운 질서라고 생각하면서 그 사실을 굳게 붙드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의 논리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의 모든 사건을 주장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모든 것들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자비를 보이시고 악인들에게는 의로움을 보이실 것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본문은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악인을 심판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 아니지만 심판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 때문에 의인은 여호와를 즐거워하게 됩니다. 모순과 고난 속에서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믿었던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행복해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이른 바와 같이 고난이나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그분께 피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피할 만한 바위요 산성이십니다.
시편65편 강해 1
시편64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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