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5
목 차
주를 기다리는 시온의 찬송(시 65:1) 1
모든 육체가 주 앞에 나올 때(시 65:2-3) 7
하나님이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시 65:4) 13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시 65:5) 18
창조와 통치의 권능(시 65:6-7) 24
땅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시 65:8-9) 28
주께서 베푸시는 은택(시 65:10-13) 31
우리의 죄를 속하시는 하나님(시 65:3) 35
가장 복된 사람(시 65:4) 39
구원의 하나님(시 65:5) 43
능력의 하나님(시 65:6-7) 46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뻐함(시 65:8-9) 50
은택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시 65:10-13) 54
시편65편 강해 1
시편65편 강해 1
시편65편 강해 1
시편65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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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65편 강해 1
시편65편 강해 1
주를 기다리는 시온의 찬송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시 65:1)
본문해설
시편 65편은 찬송시에 해당합니다. 이 시는 첫 절에 결론을 내놓는 방식으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시편은 가슴 벅차 오르는 감격과 감동의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의무를 제시한 후, 왜 우리가 그래야 하는지를 찬송의 방식으로 진술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형태로 그립니다. 시편 65편도 그러합니다.
언약백성들의 찬송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라고만 나옵니다. 주어가 언약백성이라고 보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라고 나와 있는데,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행하신 일들 뿐 아니라 이 세상의 피조물들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 경배와 찬송을 받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표로 그리면 하나님의 시온과 그 백성들이 있는데 그들이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두 개의 원을 마음속에서 그려보십시오. 가운데 있는 원이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원이 언약백성이 아닌 세상에 있는 인류와 피조물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언약백성들에게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 공의롭고 정당한 그분의 속성이 어떻게 더 넓은 세계로 퍼져 나갈지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공정하신 성품은 안쪽으로 수렴하면서 언약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의 진수를 맛보도록 만듭니다.
가운데 있는 작은 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한없이 경배하고 찬송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공급과 자연적인 공급입니다. 육체를 위한 자원의 공급과 영혼을 위한 자원의 공급입니다. 영적인 자원의 공급은 다시 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심으로 언약백성들과 막혔던 담을 허무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공급은 그들에게 필요한 물질과 땅에 있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구분이 되지만, 두 가지 모두 언약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와 사랑을 알게 합니다.
마음과 해석의 관계
“한 사람의 영적인 깊이가 무엇인가?”라고 할 때 그것을 잴 수 있는 중요한 척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반섭리의 복 안에서 영적인 복을 얼마나 읽어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시는 복에는 영혼을 직접 어루만져주시는 복이 있고, 사물의 질서를 움직여서 베풀어 주시는 일반섭리의 복이 있습니다. 신앙이 깊을수록 사물들을 움직여 자신에게 베풀어 주시는 일반섭리의 복 안에서 영적인 복을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내게 복을 주실 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읽고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시는 축복이 되도록 밀접하게 잇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 영적 깊이가 깊어지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세상의 일들을 잘 되게 해주실 때, 그것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는 복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떻게 일반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을 밀접하게 이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해석의 문제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무엇을 줍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것을 엄마가 자기에게 주었다는 사실, 두 개 밖에는 모릅니다. 필요한 것을 자기에게 준 사람도 정확하게 기억을 못 합니다. 배고파서 울고 있는데 먹을 것을 주면 그게 엄마이든 아빠이든 지나가는 행인이든 문제가 안 됩니다. 그것을 먹고 만족합니다. 그러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크면 아이가 낯을 가리게 됩니다. 같은 장난감인데도 엄마가 주면 받는데 얼굴을 모르는 낯선 사람이 주면 안 받습니다. 그 아이가 훨씬 더 성숙하게 되면 엄마가 무엇을 주면 그 속에서 엄마의 마음을 해석하게 됩니다. 배가 고픈 채로 집에 들어왔습니다. 집에 아무도 없어서 실망을 했는데 엄마가 맛있게 반찬을 만들어서 뚜껑을 덮어놓고 따뜻하게 국을 데워놓고 갔습니다. 그것을 열면서 ‘내가 이런 걸 먹고 싶다고 했더니 엄마가 일부러 해주고 갔구나.’라고 해석을 하면서 ‘엄마. 참 고맙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것을 통해서라도 그것을 주는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을 때 그 해석은 물질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을 뛰어넘는 영적인 감동이나 은혜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이런 저런 물질의 축복을 주시고 환경을 열어주실 때, 그것으로만 다가오면 그만큼 신앙이 유아기 상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 상태이고, 그 사람 안에 어떤 성향이 형성되었는가에 따라 해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Spiritual Mindedness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사물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자신 안에 있는 영적인 마음의 기울어진 방향이 어느 쪽이냐에 의해 해석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mind'라는 것은 마음이 간다는 뜻인데, 'ed'가 붙으니까 누군가가 힘을 가해서 마음이 기울어진 것입니다. 마음의 방향이 영적인 쪽으로 기울어지든지, 육적인 쪽으로 기울어지든지 할 것 아닙니까? 이것을 절대적으로 나눌 수는 없지만 성향을 그렇게 나눌 수 있지 않습니까? 은혜가 하나도 없이 미끄러져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죄가 하나도 없이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은혜 가운데 있는지, 은혜로부터 멀어졌는지는 자신이 압니다. 마음의 방향이 해석하는 것을 결정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것이 훌륭하게 될 때 우리는 현실 속에서 작은 것들을 보면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역경이나 고난이 영적으로 풍부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읽어낼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러한 해석이 가능합니까? 두 가지로 원인을 나눠볼 수 있는데, 첫째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은혜입니다.
믿음이 해석에 미치는 힘
믿음이라는 것은 일회적으로 행사되는 마음의 작용과 힘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더 많은 경우에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믿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정의입니다. 우리가 믿음 가운데 있을 때는 믿고자 하는 성향이 계속 발동을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상당히 믿고 신뢰합니다. 그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들릴 때 그를 믿지 않으면 그 이야기를 듣고 빨리 믿게 되겠지만, 일단 믿게 되면 ‘그것은 잘못 안 걸 거야. 누군가 그 사람을 모함하려고 하는 거 아니야?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누가 그걸 악의적으로 해석한 거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돈 가방을 누가 들어주었을 때 똑같은 사건에 대해 해석을 달리하면 돈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해석은 믿고자 하는 성향에 달려있습니다.
최초의 중생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 안에 그런 성향을 심으시는 것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믿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다르게 해석하게 만들어 줍니다. 어떻게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을 때도 ‘이것은 더 좋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기 위한 과정이다. 설령 내가 잘못해서 이 일을 당할 때도 아주 주저앉지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더 좋은 곳으로 데려 가시기 위한 과정일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나쁜 일로 갚지 않으시고 이 일을 통해 더 좋은 곳을 이끄실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갖고 해석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제가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어떠한 도탄에 빠져 있든지 두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은 내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그분의 존재의 필연성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경우이든지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말씀으로 건지신다. 이 두 가지 사실만을 놓치지 않으면 어떠한 위기에 빠져도 우리는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은혜가 해석에 미치는 힘
은혜는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어떤 경우에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만날 때 그 현실이 아무리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해도 나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향이 있는 한, 그 해석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때로 그 해석은 아주 논리적이고 나는 그 해석을 방어할 수 없어도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을 때는 설득되지 않습니다. ‘나는 모른다. 그런 것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이러한 성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에 의해 모든 해석이 달라지고 마음의 정동과 의지의 행사가 달라집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신앙으로 산다고 평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 안에 나름대로의 엄격한 법칙이 있어서 우리 안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쏙쏙 들어오고 기도가 잘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그렇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자 할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 가운데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선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악을 행했어도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이것이 시온에 사는 언약백성들의 의무인 동시에 특권인 것입니다.
모든 육체가 주 앞에 나올 때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2-3)
본문해설
갑자기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에서 커다란 결론을 먼저 내고 2절부터는 그 결론을 입증해가는 방식이 전개됩니다. 이러한 문학적인 기법은 시편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뿐만 아니라 역사를 기술해갈 때 히브리인들이 잘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먼저 천지의 창조의 대략을 서술하고, 그 다음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찬찬히 설명하고 입증해가는 방식입니다. 본문도 그런 방식이 사용되었습니다.
인간, 하나님을 의존해야 할 존재
2절은 1절과 함께 짝을 이루는 결론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여기에 ‘육체’, ‘바싸르’(rc;B;)라는 단어는 사람을 지칭하는 의미로 많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주께 나아올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굳이 ‘바싸르’, ‘육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인간을 지칭하는 말로 ‘육체’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이러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비를 내리고 햇빛을 주셔야만 생존할 수 있는 자연 피조물과 같은 선상에 인간을 놓고,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의존성을 나타낼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인간은 창조된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자기 자신을 알고 사람을 알고 자기 아래 피조세계를 알아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계를 돌보고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을 받았습니다. 더욱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현저하게 구별이 됩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탁월하고 특별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힘과 능력으로 본다면 자연 피조물과 같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지 아니하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성경도 생명이라는 것이 코의 호흡에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탁월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속에 집어넣고 20분만 내버려두면 죽게 됩니다. 인간이 그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 육체가 세상에 있는 만물과 함께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바싸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기서는 언약백성 뿐만 아니라 땅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1절과 함께 결론적으로 표현합니다.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는 것은 커다란 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많이 의존하도록 창조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인간은 육체적인 면에서 다른 피조물과 똑같이 하나님의 돌봄에 의존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 위에 영혼을 주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자연적인 돌봄만 받으면 되지만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측면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더욱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 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은 기도라는 은총의 수단을 통해 증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기도를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객관적으로 계량적으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석이라고 하는 지각의 작용을 통해 파악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의존하고 기도생활을 많이 하게 되면, 기도하지 않았을 때 깨달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으면서 자신의 삶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게 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길 때
시인은 하나님은 찬송을 받으실 만하고 모든 사람이 당신을 의지하며 살만한 분이심을 이야기하면서, 그 이유를 3절부터 묘사합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다른 시편에서는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옵소서”라는 탄원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믿는 언약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짓습니다. 여기에서 ‘이기었다’라는 것은 죄를 짓는데 우연적이고 간헐적인 죄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죄가 큰 힘을 가지고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죄라고 할 때,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세 가지 정도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죄라고 할 때, 다 똑같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라고 이야기 할 때, 그 죄가 인간의 내면에 있는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성향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총체적인 삶의 체계화입니다. 그것은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들이 바깥으로 나와서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체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생각에 있어서나 습관에 있어서나 마음의 움직임에 있어서 커다란 체계를 이룬 것입니다. 세 번째는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법도에 어긋나는 것을 죄라고 부릅니다. 성경을 읽다가 ‘죄’라고 이야기하면 대개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것을 가리키는지 판단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첫 번째 경우의 용례를 뜻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은혜생활을 잘 못하니까 자기 안에서 하나님을 거스르고 불순종하며 살고자 하는 마음의 성향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을 이긴 상태를 보여줍니다. 시인이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죄악이 자신과 무관하게 외부에서 침입한 것처럼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내적인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는 마음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성향이 존재하고, 그것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을 거스르고 살고자 하는 성향이 강해질 때도 있고 약해질 때도 있는 것처럼 언제나 가변적입니다. 가변적이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죄를 지을 때, 머리끝부터 시작해서 몸 전체가 하나의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신자가 죄를 지을 때는 복합의지를 가집니다. 하나는 죄를 지어서 즐거움을 취하고자 하는 의지와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의지, 두 가지가 내 속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죄를 지으면서 마음에 가책을 느껴서 그만 둘까요?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갈등이 분명히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개의 의지라기보다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빛에서 나오는 양심의 가책의 문제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억제해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의지가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의지 안에서 억제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에는 양심의 가책의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자하는 거듭난 의지가 살아있어서 복합의지로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되면 신자의 경우, 불신자보다 더 비참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시인은 죄악이 자기를 이긴 상태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정직하게 이 고백을 한 것으로 판단하면 시인은 굉장히 심각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 때 시인은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적용이 됩니다. “우리의 죄과를 사하고 계십니다. 용서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번역을 할 수도 있습니다. 죄악이 자기를 이겼을 때 자신도 그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경우에도 왕이 되기 전까지는 순전한 삶을 살지만 왕이 된 후에 여러 가지 죄에 빠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을 때, 죄가 자기를 이긴 것을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회개하고 마음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지 자신의 결단에 의존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범죄하지 않았다면 깨달을 수 없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는 철저한 죄성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비참함을 발견한 것입니다.
단일한 마음이 되게 하심
시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있습니다. 죄가 자기를 이겼을 때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밖에는 없는데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도입은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 봇물처럼 밀려오게 됩니다. 우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게 되면 은혜가 봇물처럼 밀려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단순성의 교리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하신 분입니다. 단순하다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섞이지 않으신, 구성요소가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물들은 단일하게 이뤄진 것이 없고 전부 다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상의 물질이 연합되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서로 의존을 하면서 사물 자체의 불완전성을 드러냅니다. 만약 하나님이 다른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신 분이라면 그 요소를 결합한 자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하나님 위에 누군가가 하나님을 결합시켰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하나의 본질로 존재하시는 단순한 분이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 앞에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이 단순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하다는 것은 섞임이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섞임이 없는 심플한 상태가 되길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에서 멀어지면 마음이 찢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시간과 연관 지어 설명했습니다. 인간이 시간세계가 아니라 영원세계를 바라보고 영원을 사랑하게 될 때, 신기하게도 시간 속에서 찢어졌던 마음이 연합을 이루면서 하나가 됩니다. 그 영원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시간세계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을 향해 찢겨진 자신의 마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마음의 찢김과 나누어짐이 없는 일치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마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 성령이 이 땅에 물 붓듯 내립니다. 그 때 모인 사람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의 찢어짐이 하나님을 향한 단일한 마음이 되고 비로소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마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번져가서 사람은 여럿이지만 마음이 일치를 이룬 상태를 교회의 아름다운 상태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강한 영적인 부으심과 은혜와 당신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이 교회를 향하여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나아갈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관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본문해설
시편에는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인데도 현재나 미래처럼 기술되는 경우가 있고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도 과거처럼 기술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후자의 경우,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도 과거처럼 기술되는 경우를 ‘예언자적 현재’라고 합니다. 선지자나 시인이 사건을 적어나갈 때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도 과거처럼 기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이렇습니다. 예언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감동 속에서 미래의 사건들을 볼 때, 시간을 초월한 의식의 상태에서 그것을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슬퍼하는 선지자의 예언이 나올 때, 아직은 일어난 일이 아닌데도 마치 지금 망한 것처럼 슬퍼하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는 장면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예언자적 현재에 대한 경험입니다. 반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 현재처럼 기술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회상이라는 작용 속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히브리어의 특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말은 ‘이렇게 했다, 한다, 할 것이다’ 시제가 현재, 과거, 미래로 되어있습니다. 더 나누면 ‘했었다, 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금 하고 있는 중이다, 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이렇게 진행형으로도 나뉘고 대과거로도 가지 않습니까? “내가 밥을 먹기 전에 책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시제가 복잡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히브리어에는 시제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미래, 과거에 상관없이 어떤 행위가 끝났으면 완결형을 쓰고, 끝나지 않았으면 미완결형을 씁니다. 그것은 동작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 자르듯이 잘랐을 때 나타나는 상이 완결이냐 미완결이냐에 따라 나누는 것입니다. 과거에 끝난 것도 완결이고, 지금 막 끝난 것도 완결이고, 미래에 끝날 것도 완결입니다. 이러한 어법의 특징 때문에 혼란스러워 보이는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런 특징이 나타납니다.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과를 주님이 사하실 것입니다.” 이것도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 지금 회상을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4절은 죄사함의 결과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일처럼 나오는데,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회상하면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전망하는 시제적인 의미가 섞여있는 표현입니다.
주께 가까이 하는 복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4절에 나오는 이야기는 3절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죄를 범해서 죄악이 자기를 이길 정도가 되었는데 하나님이 택하시고 당신의 집에 가까이 하게 하십니다. 사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구약이든지 신약이든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당신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를 보여주시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 용서입니다. 우주 전체에 죄가 들어왔고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보여준 것처럼 개인이 범죄하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바르게 살아갈 때는 굴복하지 않던 인간들이 죄를 용서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인격적으로 굴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굉장히 놀랍습니다. 놀라운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복을 이야기합니다. 복 중에 가장 뛰어난 복이 주께 가까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물리적인 형체를 가지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거리상 가까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풍부하게 이루어져서 주님의 임재 속에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왕의 측근이 된다는 것은 가까운 순서가 왕의 사랑을 받는 순서입니다. 그리고 왕이 백성들에게 베푸는 덕을 입는 수혜의 순서가 사랑을 받는 순서입니다. 왕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람은 받을 수 없는 특별한 혜택을 측근에 있는 사람들은 받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거기에는 권세와 영광과 혜택이 있습니다.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복이라는 것을 시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용서의 경험을 통해 진정한 복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큰 사랑과 드넓은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크고 행복한지를 가르쳐 주지만, 우리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지 않는 동안에는 큰 축복과 은혜가 얼마나 고귀하고 놀라운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다른 것들에 대한 욕망을 모두 버리고 주님 안에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게 되는 것은 그것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크신 섭리 속에서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지도록 허용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 계시거나 혹은 안 계시거나 우리를 버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용서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더 큰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부르시는 과정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총의 넓이와 크기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죄악 중에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인은 ‘택하시고 가까이 하게 하시는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큰 감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용서라는 영적인 축복, 가까이 오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기쁨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은혜의 크기와 넓이를 보여주십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임을 보여주십니다. 삶의 난관에 부딪히고 때로는 불순종으로 죄에 빠진다 할지라도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
온 천지가 변해도 날 버리질 않네
비행기가 추락을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모든 승객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갓난아이 한 명이 유일하게 살았습니다. 그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모든 사람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안고 떨어져서 엄마는 만신창이가 됐는데 아이는 거기서 잠들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심지어 내가 나를 버릴 때조차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커다란 오류에 빠지거나 악에 빠지면 나도 나 자신이 싫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도 내가 싫어진 지금에 와서야 오직 나는 당신만으로 나와 당신을 즐겁게 하고 싶습니다.” 나도 내가 싫어지는 때가 있고, 나도 나를 버리고 싶을 때가 있고, 나도 나를 배반합니다. 양심의 작용이 강하게 일어날 때 내가 싫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작용을 통해서 하나님께 돌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고 당신이 택하신 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당신에게 가까이 오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시인은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이라고 병행법적으로 서술합니다.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은 구체적으로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주의 뜰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다윗시대에는 성막을 말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크신 임재 속으로 자신을 불러들이는 경험을 회고하며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시편 51편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자 할 때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는 하나님과의 단절을 이야기 합니다. 그 후, 다시 주님의 뜰에 거하며 거기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제사를 올리고 주님과 교통하게 되었을 때 신앙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결론과 적용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그 아름다우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이 날마다 우리의 마음에 부어질 때 우리는 육체의 아름다움보다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을 기뻐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의지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새벽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으며 마음의 비늘을 씻어내고 다시 주님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을 가까이 함이 우리의 복입니다.
의지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시 65:5)
본문해설
앞 절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라고 언약백성의 복이 무엇인지를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언약백성이 누리는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과 친근히 지내는 교제입니다.
행복을 얻으려는 인간
모든 인간이 누리고 싶어 하는 복된 상태라는 것은 복 되신 하나님의 복됨을 본뜬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되시다는 뜻은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고 지극한 행복 속에 계시기 때문에 무엇도 부족한 것을 느끼지 않는 상태인 것이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런 지복의 상태에 계시기 때문에 당신과 관계를 맺고 당신의 사랑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복됨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우리들이 세상에서 방황하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다가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우리 마음이 지옥과 같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의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살던 집도 그대로고 주님 앞에 나오기까지 겪었던 고통스런 일들이 즉시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들이 그대로인데 하나님과의 교제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우리는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세상에 잠시 있는 것들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얻는 행복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한, 하나님 자신이 불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항구적입니다. 그런 행복한 상태가 하나님과의 올바른 친교 속에서 획득됩니다. 그런 복됨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그에게 가까이 하는 존재가 되어서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택함과 복됨을 누리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든 당신이 선택한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가까이하기를 원하시지만, 악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가 자기를 전적으로 포기하고 그분만을 사랑하는 삶을 원하지 않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기는 싫지만 그런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상태에는 도달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 인간은 다른 방법으로 그 행복을 조달하려고 합니다. 하나님 가까이 있는 것 같은 행복을 얻고 싶지만, 하나님 아닌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상당히 비슷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본 따면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사치스런 삶은 모든 것에서 부족한 것이 없으신 하나님을 흉내냄으로 유사한 행복을 얻게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뛰어나 교만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느끼는 잠시잠깐의 행복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높으심을 본뜬 것입니다. 자기에게 상처를 주거나 악을 행한 사람들을 징벌하고 보복할 때 어느 정도의 행복감을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것이 아니라 나 중심으로 하나님을 본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행복을 느낍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 아래에 겸손하게 낮아져서 섬기려고 하는 대신, 자신의 밑에 두려고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사람들을 자기의 발아래 두려고 하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결국은 주권을 휘두르시는 하나님을 흉내내보고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떠나 행복할 수 없는 인간
문제는 이런 식으로 악하게 하나님을 본뜨면서 행복하고자 할 때, 그것은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되어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선을 행할 때는 올바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본뜨게 되지만, 악을 행할 때는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흉내내기 때문에 악인이든 의인이든 하나님을 흉내내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본뜨고 살아가는 삶 속에서 인간은 행복을 얻으려고 하고, 자신이 언제나 복된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는 점에서 역시 하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악을 행하든 선을 행하든 어떤 식으로든지 하나님을 본받으면서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글 속에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선을 행할 때는 친근히 대하시는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요 악을 행할 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마주하는 것이니, 우리가 당신을 떠나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성경에서도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우리를 붙드시니이다”라고 하는 고백을 보게 됩니다.
언약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십니다.”라고 노래합니다. 구약에서 구원이라는 것은 죄와 고통, 원수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 할지라도 세상을 사는 동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곤경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은 그 곤경 속에서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고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언약백성은 하나님의 의의 구원을 받는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언약백성과 언약 밖에 있는 백성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면서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삶입니다. 신앙의 중심이 마음에 있고, 마음이 항상 순전하고 올곧을 때 하나님을 만나기에 적합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죄에 빠질 때도 있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할 때도 있고, 믿음이 식어졌기 때문에 예전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의 품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생각하면서 주님을 찾고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며 살 때 삶의 모든 상황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파도가 됩니다. 그것을 타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는 무슨 뜻일까요? 당시 유대인들의 우주관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했습니다. 땅은 커다란 쟁반과 같고 하늘은 그 위에 투명한 바가지를 엎어 놓은 것 같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궁창’, ‘라키아’(['yqir;)입니다. 거기에 별들이 매달려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땅 끝’이라고 하는 것은 쟁반같이 생긴 땅의 끝입니다. 끊임없는 낭떠러지로 물이 계속 흘러내린다고 보았습니다. 그 끝에 있다고 하는 것은 떨어져서 음부에 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땅 끝’과 ‘바다 끝’은 마찬가지입니다. 땅의 끝도 저 끝으로 가면 마지막이라고 생각을 했고, 바다 끝도 결국은 떨어지는 마지막 지점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땅 끝과 바다 끝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가 그런 풍부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는 지옥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에 희망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떨어질 것 같은 상황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거기까지 당신의 지배력을 행사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다른 곳에 보면 “음부에 내가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서도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결코 멀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가 읽으니까 별로 실감이 안 나는 것이지 그 당시에 시인과 같은 우주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읽을 때는 가슴에 절실하게 다가오는 표현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끝, 먼 바다에 있는 자들조차도 의지할 주님이시다. 세상에서 아무 희망이 없고 모든 도움이 끊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을 결코 버리지 아니하시는 주님께서 응답하실 것이다. 당신의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리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
‘엄위’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배어있는 하나님의 탁월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위는 모든 피조물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구별되심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거룩성과 관계되는 것입니다. ‘엄위’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엄격하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은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하나님 사이의 뚜렷한 구분을 이룹니다. 하나님의 엄위는 하나님의 숭고한 아름다움과 일치를 이룹니다. 미학이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신체를 들여다보면서 처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생각하면서 자연 속에서 나타나는 숭고함과 창조주의 위엄을 생각하면서 생겨난 것입니다. 인간의 아름다움은 친근하고 가까이 하는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을 많이 느끼면 느낄수록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데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위엄은 아름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격차를 느끼게 됩니다. 칼빈은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위엄을 느끼면서 인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을 갖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고 그분의 위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 피조물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분으로서 피조물을 향한 주권의 행사를 통해 엄위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시인이 엄위하신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백성으로 살아갈 때 자신을 공격하고 해를 입히는 수많은 악인들 속에서 그가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엄위하신 주권의 행사밖에는 없었습니다. 자기는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께 늘 붙어 있는 자요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이니 하나님께서 당신의 엄위하신 주권과 공의를 따라 행하실 때, 자신은 주님의 편에서 덕을 볼 것이요 하나님을 거슬러 악을 행했던 사람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세상의 불신앙적인 구조 때문에 우리가 올바로 살기 힘들다는 것은 핑계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의로우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사는 것이 죄와 모순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가 보호를 받는 분명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이런 세상을 심판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편에 서게 될 때 심판을 피하는 은택을 입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고난당하는 자의 위로이시고, 홀로 우는 자들의 어머니 되시며, 집 나간 자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
오랜 세월 따라 난 알았네 내겐 주 밖에 없네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와 통치의 권능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 65:6-7)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이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실 때 하나님의 큰 능력은 무엇을 보아 알 수 있는지 본문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창조의 능력과 통치의 권능과 통치가 실제로 자연 속에서 인간의 마음 안에 실현되는 큰 능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오늘날과 같이 과학이 발달된 시대에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산을 세우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국에 가면 사람이 만든 산이 있다고 합니다. 커다란 연못을 만들기 위해서 퍼낸 흙을 갖다 한 곳에서 계속 쌓았더니 그게 산이 된 것입니다. 산이라는 말은 과장된 표현이고 그저 자그마한 언덕 같습니다. 그것도 굉장히 큽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산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산과 산이 이어지는 큰 산맥이 높이 솟아있는 산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시내산이나 시온에 두르고 있는 산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높은 산들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것은 창조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합당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셨으니까 또한 그것을 다스리실 권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시기까지 능력을 행사하셨으니 그것을 다스리는 것쯤은 능히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능력으로 산을 세우셨기 때문에 시편의 기자는 곤고하고 어려울 때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은 지금도 소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면 창조를 통해 드러난 당신의 큰 능력과 영광을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능히 나타내고 드러내실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계를 친히 창조하셔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 되십니다.
통치하시는 하나님
창조하실 뿐 아니라 지금도 그것을 통치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인생도 그분의 손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사실에서 큰 위로를 받습니다.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을 만나고 시련을 당하고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모순이 많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은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것처럼, 내 인생도 그분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할 때 그분의 통치와 주권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왕권의 행사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통치입니다.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띠는 임금이 두르는 위엄의 띠를 가리킵니다. 권능으로 띠를 띠었다는 것은 영광과 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왕의 허리에 두른 띠는 왕권과 위엄의 상징입니다. 손에 들려진 홀이 왕권의 직접적 행사를 의미한다면, 허리에 두른 띠는 왕권의 능력의 힘과 크기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왕의 허리에 둘러져 있는 띠를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범상한 사람들의 힘도 허리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중요한 일을 하고 힘을 써야 될 때에는 일단 허리띠부터 졸라매고 일을 하지 않습니까? 만약에 왕이 무슨 일을 온전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띠를 띠게 되면 그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큰 권력의 행사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된 모든 세계를 친히 다스리시는 권능으로 띠를 띠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권능으로 띠를 띠시고 모든 세계를 통치하시는데 자연의 세계를 통치하시고 한편으로는 도덕의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자연계입니다. 흉용하다고 하는 것은 바다가 무섭게 출렁거린다는 뜻입니다. 바다가 무섭게 출렁거리고 물결이 끊임없이 일어나는데 하나님께서 한 순간의 바람을 불어 일으키기도 하시고 잔잔하게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배를 탔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곳에 풍랑을 일으키지 아니하시고 요나가 탄 배가 있는 그 바다에만 풍랑을 일으키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자연세계 속에 있는 커다란 자연의 힘은 자연 자체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하고 큰 능력이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보이는 자연의 세계 속에 그러한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면 보이지 않는 도덕의 세계와 인간의 마음과 정신세계 속에서 행하실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 훤화라는 것은 떠드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백성들이 길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떠들고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속에 어떤 동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제도 뉴스를 들으니까 캐나다에서 도요타 자동차 급발진 사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 소송을 걸어서 수십억 달러의 손해 배상을 청구했다고 합니다. 불안하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게 될 때, 인간의 마음은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마음이 요동치고 커다란 움직임이 일어날 때, 한 사람의 마음도 아니고 만민이 요동칠 때, 그것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의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 백 명에게는 백 가지 마음이 있는데, 그들이 모두 소동하고 요동할 때 그것을 잔잔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놀랍게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크기를 보여줍니다.
결론과 적용
자연세계와 도덕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공정하신 통치를 보더라도 우리는 그분의 능력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 분의 능력이 우리에게서 멀게 느껴짐은 능력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당신께 가까이 이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부르짖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정결하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당신의 통치를 행사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는 것도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주께로 더 가까이 가는 과정을 통해 형통했더라면 알 수 없었을 우리의 죄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면 좋은 것이 아니고, 아무리 나쁜 것도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면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고 그 통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본분은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의지하고 모든 뜻을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땅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 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8-9)
본문해설
8절은 형식상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지만, 전반부가 그 앞에 붙어야 하는 내용입니다. 8절을 두 문장으로 번역했는데,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이것은 앞부분에서 하나님이 악인을 통치하고 세계를 다스리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인식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타나는 ‘징조’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오트’(t/a)라고 합니다. 이것은 배후에 커다란 의미를 가지면서 그 의미를 지시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홍수 후에 무지개를 펼쳐 보이셨습니다. 그것은 무지개일 뿐이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악할지라도 다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지 아니하겠다고 하는 은총의 표시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히브리 성경에서는 ‘징조’, 혹은 ‘상징’이라고 부릅니다. 성찬에 사용하는 포도주는 주님의 피의 징조요 거기에 공여되는 떡은 주님의 찢으신 살의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징조를 나타내시는 하나님
세상에는 하나님이 돌보시고 통치하시는 증거들이 가득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면서 두려워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증거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제시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만물들을 돌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다양한 어려움들을 만납니다. 그 때 어려움을 해석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자신을 잘 지키면 어려움이 올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하게 하시고 나에게 이제껏 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보이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다.’라고 해석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을 때는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면 그것이 하나님이 나에 대해 진노하시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징조로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때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믿음으로 주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것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끝나고 즐거워한다는 이야기가 8절 하반절부터 13절까지 이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른 통치를 하신다기보다는 이 세상 만물들을 다스리시는 동일한 사건을 누가 살피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교훈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악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의 징조가 되고,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언약백성들에게는 모든 자연만물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커다란 배려요 창조한 세계를 아름답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땅 끝까지 돌보시는 하나님
“주께서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이것은 땅에 있는 만민과 사물들을 가리킵니다.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피조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돌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이 망한 후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니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면서 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것으로라도 그들을 징벌하실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악을 행해도 계절과 날들과 시간들과 추위와 더위, 식물의 심음과 거둠, 이 모든 것을 질서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비 아래 살아가게 하십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변함없이 피조세계를 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증거가 되지만, 신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충만한 은혜의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서 땅이 물을 내서 끊임없이 흘러가고, 하늘에서 비가 내려 땅 곳곳에 흘러 들어가 강에 물이 가득하게 되고, 예비한 땅에서 풍부한 곡식이 나오게 되어서 그것들을 먹고 모든 인간이 배부르고, 짐승과 모든 만물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복을 누리며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변함없이 세계를 신실한 사랑으로 돌보시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악인에게는 심판하시는 두려운 하나님이 알려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언약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놀라운 통치의 증거가 자연세계 곳곳에 징조로 가득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도덕적으로도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마음에서 기쁨이 되고 하나님을 한없이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소망과 도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 사는 소망에 찬 언약백성들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베푸시는 은택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시 65:10-13)
본문해설
시인은 군더더기 같이 긴 노래를 65편 뒤에 덧붙이고 있습니다. 65편의 구성을 찬찬히 살펴보면 정교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온으로부터 동심원을 그리면서 바깥으로 펼쳐나가는 전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로우심, 능력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푸시고, 나아가서 땅에 있는 자연만물까지 사랑과 능력으로 보호하시면서 당신이 위대한 능력과 창조세계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부성
성경은 하나님이 당신이 만드신 세계를 향해 베푸시는 사랑을 사중적 부격(父格)으로 표시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에 대하여 아버지이심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넓게 보면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 대해 아버지가 되십니다. 지극히 선하신 성품으로 마치 아비가 자식을 돌보듯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모든 만물들을 돌보시는데 이것을 창조적 부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두 번째로 선인과 악인을 포함하여 당신이 지으신 모든 인류를 향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인류적 부격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이스라엘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부격을 행사하시는 것, 그것을 가리켜 신학적으로 신정적 부격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당신이 구속하신 백성들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양자적 부격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양자적 부격으로부터 신정적 부격, 인류적 부격, 마지막으로 창조세계에 대한 부격으로 확장하시는데, 모든 사랑의 근원이 성부, 성자, 성령, 삼위 간에 아버지로서 성부와 성자를 사랑하시고, 아버지로서 성부와 성령의 사랑을 받으시는 삼위일체적 부격이 모든 것의 핵심을 이룹니다. 가장 중심적인 삼위일체적 부격, 양자적 부격, 신정 국가적 부격, 인류애적 부격, 창조적 부격으로서 당신의 사랑을 모든 세계에 펼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향하여 어머니의 모성을 닮은 부성을 가지고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돌보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놀라운 동심원적인 적응을 갖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성자, 성령께로부터 아버지가 사랑을 받으시듯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심에 오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동심원을 확장해가면서 마지막에는 악인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인류애적으로 펼치시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들에 깃든 한 포기의 풀,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까지도 창조주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돌보아서 가장 선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펼쳐 보이시는 것입니다.
먹이시는 하나님
적당한 때에 비가 와서 이랑이 평평하게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밭을 갈아 이랑을 만듭니다. 옛날에는 관개시설이 잘 안 되어 있으니까 대부분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이른 비가 내리면 그 비로 씨를 뿌리고 마지막에 늦은 비가 내리면 그 비로 곡물이 결실하고 추수를 하게 됩니다. 비가 넉넉하게 내려서 고랑 사이가 물로 가득 매워져서 평평하게 되면 곡식을 기르는 밭이 물댄 동산과 같이 됩니다. 이것은 최고의 기름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연 모든 만물들을 돌보아주셔서 그것들을 결실케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과 피조세계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이 잘 돌봐주셔서 풍성한 열매로 인간을 넉넉히 먹이실 때 사람들 사이에는 다툼과 분쟁이 현저히 사라집니다.
‘전쟁’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밀하마’(hm;j;l]m) 인데, 이것은 ‘떡’이라는 단어로부터 왔습니다. 떡은 ‘레헴’(!j,l)이고 전쟁은 ‘밀하마’입니다. 전쟁이라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한 투쟁이라는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실제로 흉년이 들면 민심이 흉흉해지고 나라가 어지러워집니다. 먹고 살기가 넉넉하고 부유하면 남의 나라를 침공할 생각도 안 하고 침공 받을 정도로 약해지지도 않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먹고 배부를 때 종들도 편안한 삶을 누리고 심지어는 소출을 먹는 가축과 야생동물들도 여유를 갖게 됩니다.
일상에서 발견하는 은총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창조주적인 부성으로 모든 세계를 돌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면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비유하신 것 가운데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풍년이 들어 곡식을 많이 거뒀는데 더 이상 곡식을 저장할 곳이 없습니다. ‘창고를 짓고 곡식을 보관하자. 많은 수확을 했으니 이제 먹고 즐기자.’라고 자신의 영혼에게 이릅니다. 결국 자신에게 풍년을 주시고 부요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추호도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그분이 주신 축복을 해석할 수 있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멸망하는 사람들의 특성입니다.
우리가 고난과 재앙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형통케 하시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하나님의 어떠한 경륜 때문에 이 풍성함을 자신에게 주시는 것인지 깊이 깨닫고 마땅한 감사를 드리며 그분을 섬기는 것이 언약백성의 본분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사랑과 은혜를 깊이 터득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총과 사랑을 교회 안에서 예배드릴 때뿐만 아니라 일상의 수많은 만남 속에서, 오늘 아침 내리는 봄비 속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언약백성들의 내적인 생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런 해석의 능력이 현저하게 증진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뿐만 아니라 모든 일들을 형통하게 하실 때도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수시로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께 감사와 찬송을 돌리게 됩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그런 해석의 능력이 사라집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큰 사랑을 매일의 일상 속에서 발견하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일상적인 변화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읽게 될 때 어디에서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속하시는 하나님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시 65:3)
죄악이 우리를 이김
본문은 “죄악이 나를 이기었지만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속하시리이다.”라고 번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시편에는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마치 인간이 죄와 겨루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의문이 듭니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그는 순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 앞에 범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입니다.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라고 하는 것은 자기 속의 죄와 정욕을 말합니다. 그것이 교만일 수도 있고 어떤 욕망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하나님의 법을 거슬러 살고자하는 강력한 마음의 힘과 영혼의 의지가 자기 안에 있어서 자신도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죄의 성향이 강해진 상태를 뜻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고 싶은데 실제의 마음의 작용은 그것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 죄악이 나를 이긴 상태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내게 있으나 악이 함께 있다. 나는 마음으로는 선을 원하지만 악을 행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명백한 죄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의 뿌리에도 관심을 가지는 종교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본성의 펼침입니다. 본성을 창조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변화시키고, 변화된 것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철저하게 삶의 종교입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생활의 종교입니다.
언약에 기초한 용서
정확하게 번역을 하면 “죄악이 나를 이겼지만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속해 주실 것입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죄악이 나를 이겼습니다.”라는 것은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그런데 용서에 대해서는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속하실 것입니다.”라고 표현합니다. 죄악이 나를 이긴 것은 개인적인 사건이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용서 받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와 맺으신 언약에 기초해서 나를 용서해주시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쏟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분여입니다. 당연히 죄의 용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와 맺으신 은혜의 언약을 따라 우리에게 시여되는 용서입니다.
시인은 자기의 죄를 개별적으로 말하는 대신, 언약백성 모두의 죄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결코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호도하거나 개인의 죄를 남에게 전가시키기 위한 변명이 아닙니다. 죄에서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은총을 개인적으로 받고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 때문에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우리의 죄악됨은 함께 양립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난로에 불을 떼는데, 나무에 불이 붙어서 타는 것을 보면서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종이컵에 물을 넣고 그것을 난로 속에 집어넣으면 탈까? 안탈까?’ 그래서 한 번 해보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종이컵의 물이 담기지 않은 부분까지는 확 탑니다. 그러나 물이 담긴 부분은 절대로 타지 않습니다. 물이 부글부글 끓는데도 종이가 안탑니다. 물과 불이 만났을 때는 불이 물을 증발시키든지 아니면 물이 불을 끄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동시에 한 공간에 공존할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청교도 ‘라일’은 “기도는 죄를 죽이고 죄는 기도를 죽인다.”라고 했습니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인간이 죄의 용서를 위해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한다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죄를 용서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맺으신 언약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로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기초로 우리가 용서를 빌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용서하시는 방법입니다. 우리의 죄과라는 표현을 쓴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주께서 사하시리이다.”라는 말은 “주께서 속하시리이다.”라는 뜻입니다. 속한다고 하는 것은 남이 대가를 대신 지불하고 그 사람을 건져내는 것을 뜻합니다. 누군가 잘못해서 책임을 져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그 책임을 대신 져주고 용서받게 해주는 것을 ‘속한다’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해 대가를 지불해야 되는데 그 대가를 하나님이 스스로 지불하시면서 우리를 용서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앞 절에서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라고 말한 이유를 3절에서 밝힌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 뿐 아니라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모든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내리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키시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당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도움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 분이 우리의 영혼과 삶의 궁극적인 구원자요 주관자가 되시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가장 복된 사람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시 65:4)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는 비록 죄가 자신을 이겼지만 하나님이 언약 백성을 향한 사랑으로 구원해주신다는 찬송을 했습니다. 3절과 4절 사이에 큰 단절이 있는 것처럼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라고 노래를 합니다. 4절 전체는 두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전반부에 나오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들의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가 하반부에 나옵니다.
복된 사람
상반부에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축복을 삼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인류가 살고 있지만 하나님이 특별히 당신과 언약을 맺으셔서 특별한 관계로 부르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특별한 사람들은 복되다. 선택된 특별한 사람들은 복되다.”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당신에게 가까이 오게 하신 사람’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친교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언약백성들에 대한 묘사인데 그것을 어떤 측면에서 묘사하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온다’라고 하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사극에서 보면, 왕이 있고 양쪽에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이 도열을 합니다. 정일품부터 시작해서 도열을 합니다. 왕 가까이 도열할수록 그것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은 왕과의 친교, 왕으로부터 받는 은택의 정도를 나타냅니다. 중국 역사에 보면 그 사람의 직위에 따라 황제 가까이에 올 수 있는 거리가 지정되어 있습니다. 직위가 높은 사람들만이 황제에게 가까이 올 수 있고 등급에 따라서 황제 가까이에 올 수 있는 거리가 정해집니다. 왕을 모시는 사람들이 아니면 아예 대전에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궁궐도 출입하지 못 합니다.
“가까이 오게 하셨다”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영광과 특권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하나님은 친교의 경험을 통해 당신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지를 알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우리가 하나님께 매우 가까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같은 표현이 한 번 더 반복됩니다.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여기서 ‘주의 뜰’이라고 하는 것은 이 시기에는 성막을 생각하면 됩니다. 그가 주의 뜰에 들어왔다고 할 때,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죄 씻음을 위한 제사,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헌신하는 희생의 제사, 이것을 받도록 하나님이 불러 주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결국은 3중의 묘사, 택하심, 가까이 오게 하심, 뜰에 거하게 하심,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선택과 친교에 관련된 것입니다.
복의 원천, 하나님과의 친교
“이런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라고 할 때 이 ‘복’은 세상에서 잘 먹고, 돈이 많은 복이 아니라 성도들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것들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관점 자체가 성도들의 측면에서 보는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너에게 복 주셨구나.” 이렇게 이야기할 때 물질이나 이 세상의 번영이 제외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영적인 은택을 입은 것이 외적으로 확장되는 외형적인 것들을 포함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1편의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라고 하는 복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누리는 복입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성도의 복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진정한 복의 원천이 외연에서 내면적으로 본질적으로 파고들수록 거기에는 하나님과의 친교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친교가 복의 원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배부르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배고플 때 시장에 가면 별 것을 다 사게 됩니다. 옛말에 “상전이 부르면 종이 배고픈 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배가 부르면 먹는 것에 대해 충분히 만족하게 됩니다. 배가 잔뜩 부른데 먹을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 먹을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들을 인하여 우리들이 만족합니다.”라고 할 때 그것은 마치 음식이 우리 몸에 들어가서 우리를 충분히 배부르게 하고 음식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만족이 되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결론과 적용
인간의 모든 비극은 영혼의 배고픔에서 옵니다. 영혼의 배고픔은 하나님과의 친교의 부족에서 오는데, 그것을 다른 것으로 채워보려고 하는 데서 모든 비극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습니다. 배가 고픈데 노래를 부르러 가는 사람이 없고, 목이 마른데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아서 목마른 것을 해갈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는 어리석어서 하나님 없이는 영혼이 만족할 수 없는데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목마름을 면할 수가 없는데 다른 것에서 목마름을 대신해보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비극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사명은 주님을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사랑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이 참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가장 중요한 본분이며 인생의 행복이 거기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시 65:5)
본문해설
4절에서는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입니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있게 하신 사람의 놀라운 특권은 하나님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만족한다는 것은 배부르다는 뜻과 같은데, 하나님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배부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만족을 말합니다. 마음과 영혼의 진정한 만족입니다.
성전의 아름다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세계 모든 만물 속에 나타나 있지만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가장 농축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보면 현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뜻의 아름다움이 거기 나타나 있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소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들이 펼쳐져서 실제 삶 속에서 전개될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나타납니다.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 바로 교회의 삶입니다.
잘 쓴 문학작품을 연극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도 하나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연극은 모든 사람이 약속을 하고 행동을 하고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이 아닙니다. 내가 연극 속에서 청년으로 나온다고 해도 그것은 시공간 속에 펼쳐졌다는 점에서는 현실이지만 끝나고 나면 또 다시 애기 아빠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는 현실입니다. 각본을 짜고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이 이야기하는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성전 속에는 각양 아름다운 요소들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전개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성전에서 가장 중심적인 기능은 죄를 용서해주는 기능이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모든 것, 죄를 용서받는 제도, 제사 제도, 헌신을 주님 앞에 표명하는 제도,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과 모든 제사의 질서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 주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이 함께 나누는 형제와의 연합과 교제, 이런 것들이 전부 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움이 시인의 마음속에 큰 기쁨이 되었습니다. “내가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할 것입니다.”라고 시인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하나님
5절에 보면,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라고 나옵니다. ‘땅의 모든 끝, 먼 바다에 있는 자들’은 그 시대의 사람들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쟁반처럼 평평한 것이 땅의 끝이고, 저 바다의 수평선이 바다의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먼 바다에 나가는 것을 굉장히 위험하게 생각했습니다. 밑에서 잡아당기듯이 사람들을 끌어내려 떨어뜨린다고 보았습니다. ‘먼 바다, 땅의 모든 끝’ 이런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는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시편에 보면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십니다”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구할 수 없는 낭떠러지의 마지막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을 행사하셔서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험에 처한 사람들이 의지할 주님이십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주님을 만난 은혜에 탁월한 감격이 있었던 때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입니다. 어려움에 처했던 것이 배경이 되어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의 역사를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라는 의미입니다.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라고 할 때 무엇을 간구했을까요? 바다 끝에 있는 사람들은 위험하니까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바다 끝과 땅 끝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보다 도저히 하나님의 도움이 미칠 것 같지 않은 위기 속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응답은 하나님의 도움입니다.
시인은 먼저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라고 결론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의 주가 되시는지를 설명합니다.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옳고 그름을 따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따라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우리 삶이 위기에 놓여 있을 때도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극복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이 거기서도 당신의 손을 펼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위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능력의 하나님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과 만민의 훤화까지 진정하시나이다”(시 65:6-7)
권능의 하나님
구약에는 산을 소재로 한 찬송이 많이 나옵니다. 움직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는데 사용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는 재료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통해서 나타나는데, 사람들은 산을 운명적인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산을 변화시켜 평지로 만드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산이 바위로 되어있을 경우에는 거의 불가능하고, 순수하게 흙으로 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개미만한 트럭이 실어 날라서 다른 곳을 메우고 산을 깎아 평지를 만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의 생각에 산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항력적으로 서 있는 운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피조물이었습니다.
다른 시편에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는 고백이 나옵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서 산을 향하여 눈을 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저 산을 명하여 있게 하셨으니 산을 만드신 능력으로 오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나를 도우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라는 구절에서 앞부분은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능력을 보여준다면, 띠를 띠었다고 하는 것은 왕의 관대(冠帶)를 의미합니다. 띠를 띤 복장은 정식으로 왕의 업무를 보기 위한 차림새입니다. 띠를 띠고 나타났다는 것은 법을 집행하고 명령하기 위한 것을 뜻합니다. 띠를 띠고 홀을 잡고 명령을 함으로 온 나라를 왕의 뜻대로 다스리는 왕의 그림을 묘사한 것입니다. 세상의 왕은 인간에게 명할 뿐이지만, 하나님은 큰 산을 세우심으로 큰 능력을 보이시고 당신의 통치를 자연계와 도덕계에 모두 펼치셨습니다.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흉용’이라는 것은 배를 띄울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파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동’은 물결의 파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원하시면 진정시키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비슷한 예가 요나서에 나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을 때 풍랑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폭풍을 발사하셨다고 나옵니다. 온 바다에 풍랑이 일게 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타고 있는 바다에 바람을 발사하셔서 풍랑이 일게 하시고, 결국은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마음먹으신 대로 세상에 있는 자연세계조차 통치하고 다스리실 수 있는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바다의 흉용과 물결의 요동, 만민의 훤화까지 주관하십니다.
‘훤화’라는 말은 떠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데모를 하면서 산발적으로 구호를 외치고 일정한 구심점 없이 떠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이 요동치는 감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진정시키시는 분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물’은 사람을 뜻하는 말로 자주 쓰입니다. 특히 전도서 같은 데서 많이 쓰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러한 표현에 익숙했고, 시인은 ‘바다’, ‘물결’, ‘사람’을 문학적으로 연장선상에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파도가 요동치는 것처럼 인간들이 땅 위에서 감정적으로 요동치며 소리를 지르고 떠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번에 잠잠하게 만드시는 능력을 자연세계와 인간의 마음 안에서 행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큰 능력입니다.
살다보면 삶의 환경이 요동칠 때가 있습니다. 나는 안정되고자 하지만 주위에 있는 환경이 요동을 칩니다. 그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당신을 깊이 의지하는 우리에게 그 모든 상황을 잠잠하게 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영국에 있는 엘버트 홀은 굉장히 유명한 음악관입니다. 예전에 흑인이 파격적으로 그 무대에 섰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인종차별이 심하던 때였으니까 “어떻게 흑인이 여기에 설 수 있냐?”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음악가는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연주를 하겠다고 나왔는데 관객들이 웅성웅성 떠들고 “흑인이 여기 서다니.” 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빌립보서의 말씀을 외웠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가 조용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최상의 연주를 하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 바깥세상에서 일어나는 파도도 무섭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 일어나는 분노의 파도, 마음이 고르지 못한 격정적인 파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삶을 살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무릇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고르지 못한 데서 일어나는 격정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요동치는 물결을 잔잔하게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만민의 훤화까지도 한 번에 다스려서 진정시키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자연계 안에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도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주님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위로를 주실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인생의 파도를 잠재우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분노나 미움, 욕망으로 요동칠 때,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잠잠케 하시고 변화시키셔서 당신을 따르게 하십니다.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안팎의 수많은 파도와 도전들로부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하나님의 통치의 혜택을 받기 위해 그분의 다스림 속에 있기를 우리의 마음이 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같아지기를 원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도 통치하시고 나와 관련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도 다스리시며 더 나아가 이 세상 만민들까지 다스리시고 통치하심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기뻐함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시 65:8-9)
본문해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라는 구절은 7절과 관련이 됩니다. 절을 나눈 것이 의미 단위로 딱 떨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앞에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자들에게는 구원을 행하시고 당신을 거스르는 원수들에게는 당신의 능력을 보이심으로 두려워하게 하십니다. 땅 끝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세계 속에서 그분의 징조를 발견하게 될 때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질서를 따라 돌보심
“주께서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라고 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 시대에 커다란 홍수의 심판이 있고 난 후, 그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이후에 태어날 인류의 조상으로서 하나님 앞에 약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비록 사람들의 생각이 어려서부터 악할지라도 내가 다시는 물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겠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현상들이 엄격한 법칙을 따라 이뤄질 것이고 심음과 거둠, 추위와 더위, 이런 것들이 정확하게 사시와 시절을 따라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징표로서 무지개를 보여주십니다. 이것도 우리가 성례전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그 이후부터 하나님이 세상의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통치하시는 질서를 따라 당신이 인간들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날들의 정확한 규칙을 따르는 변화 속에는 계절의 변화라든지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여전히 이 세상은 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돌보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아침이 되는 것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는데 그것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뒤이어서 나옵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되는 것과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아침과 저녁이 하나님이 정하신 규칙을 따라 날들이 정확하게 변화하는 것은 이하 모든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가 어긋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들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결국 이것들은 농사와 관련이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면, 방황하는 삶을 끝내고 가나안에 들어온 다음부터는 농사가 주업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부강과 행복은 농사를 얼마나 잘 짓고 충분히 배부르게 먹고 사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시의 연한과 규칙, 날과 날들의 정확한 변화, 이것을 통해 땅을 풍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시의 연한을 따라서 땅을 권고하사 물을 내어” 물들이 대지를 가로지르면서 충분히 공급될 때,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강에는 물이 가득 흐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풍요의 상징입니다. 강에 물이 넉넉하게 흐를 때, 잇대인 강에 물이 넉넉히 흐른다는 것은 강이 그저 흘러가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이 그렇게 흘러가기 위해서는 지류로부터 물이 계속 들어오고, 땅은 그 물을 받아쓰는 물의 교환이 이뤄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 주변에 있는 모든 땅이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넉넉한 땅이 되어서 흐르는 것입니다. 그 땅이 넉넉하여 물이 흐르는 것은 풍요한 결실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그것들을 하나님께서 친히 주관하셔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는 저희에게 곡식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연세계에 풍요로운 결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자연적인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이 도덕세계에 영향을 많이 미칩니다. 먹고 살 수 있는 것이 풍부하게 되면, 사람들에게 인심이 넉넉하고 서로에 대해 너그러운 인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려워지게 되면 사람 사이가 각박하고, 인자와 자비가 간 곳 없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참된 행복
결국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와 영혼 모두가 이러한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는 질서 안에서 아침과 저녁이 오고, 날과 날들의 시절과 사시의 연한이 정해지고, 그것을 따라 정확한 자연의 규칙 속에서 풍부한 열매를 맺고 수확을 통해 육체가 여유를 누리고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파문처럼 번져가는 하나님의 크신 통치 아래 인간의 영혼이 복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과정을 거쳐서 당신의 은혜와 자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연의 세계를 다스리실 때, 자연 모든 만물이 통치에 복종해서 봄이 오면 봄에 순응하고, 가을이 오면 가을에 순응하고, 비가 내리면 비가 오는 대로 순응하면서 하나님의 자연 통치를 받아들여 아름다운 결실로 나아가듯이 인간의 영혼과 도덕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분께 가까이 가면 자신도 복되고 행복하지만, 그 분께로부터 멀어지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이치에 만물들이 순응하는 것처럼 인간은 그렇게 순응하지 않는다는데 인간의 위대성과 비참함이 동시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은택으로 복 주시는 하나님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 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골짜기에는 곡식이 덮였으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시 65:10-13)
본문해설
본문은 9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과 동일하게 온 세계에 가득한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묘사들을 보면, 자연세계 질서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은총, 이런 것들을 질서 없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인간의 생명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아주 시적인 표현입니다.
야트막한 동산에서 양 무리들이 함께 풀을 뜯으며 노는 광경을 파란 산이 띠를 두른 것 같이 묘사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들이 파란 목초지를 띠처럼 감고 도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굉장히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본문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 곡식을 거두는 내용, 양떼를 비롯한 짐승들을 하나님이 먹이고 길러주셔서 거기로부터 젖과 고기를 양식으로 삼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인간의 생명을 풍요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런 하나님의 풍부한 은혜의 역사, 하나님이 돌보시는 자연세계를 통해 인간을 풍족하게 하시는 자비로운 사랑, 이런 것을 여기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10절에서부터 하나씩 해설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밭고랑에 물을 대어 넉넉하게 하셔서 곡식의 소출이 나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들의 초장에도 가축들이 자라게 하시고 마지막 13절에서는 추수철을 노래합니다. 곡식이 가득 덮이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노래하는 광경을 13절에서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노래하면서 찬송하게 하시는 증거들을 한 가지에 적용합니다. 그것은 죄악이 나를 이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사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들과 맺으신 신실하신 약속과 은혜의 기초해서 죄악이 나를 이겼지만 그 죄를 사하여 주시는 은총의 기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밖에 있는 제일 넓은 원은 세상 모든 악인들조차도 통치하시고 두려워하게 하시는 하나님, 그 안쪽 원은 하나님께서 자연의 세계에 복을 주시고 먹을 양식과 마실 음료를 주시기 위해 땅을 축복하시고 가축들에게 복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언약백성들의 땅에 하나님이 은혜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안쪽 원은 언약백성들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누리는 영적인 특권입니다. 그것은 어떤 특권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은 은혜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가지 중요한 혜택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는 무한한 은혜의 공급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에게 약속되는 것입니다. 네 개의 원 한 가운데 마지막 하나의 원이 있는데, 그것이 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중 오중의 은총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당신 가까이에 나아와 친교를 누리게 하시고, 혹시 죄가 있다면 진실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 토할 때 주님이 그것을 용서해 주셔서 다시 주님 앞에 살게 하신다는 놀라운 은총의 증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리의 숙고와 적용의 중요성
놀랍지 않습니까? 복음에 대해서 많은 지식의 빛을 주신 오늘날조차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하는데, 그 당시 시대에 주어진 계시의 의미를 최대한 이해하고 있었던 시인의 신앙 세계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새롭게 더 많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깨닫게 해주신 지식의 빛을 활용하면서 사는 것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새로 깨닫는 많은 지식이 있어도 만약에 자신이 진리를 아는 지식의 빛을 현재적으로 활용하며 살지 아니하면 그의 삶에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파이프에 수없이 물이 지나가도 결국 최종적으로 물을 누리는 땅에 풍요로움이 깃들게 되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부어지고 머무르고 스며들어서 우리의 것으로 활용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생활이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새로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알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땅에 물을 대어 그 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말씀을 우리 마음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두 가지 요소를 꼽았는데, 첫 째는 숙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서 지성 안에 계속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을 계속 머물게 하는 비결입니다. 지성에 계속 머무른다는 것은 기억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억은 굉장히 감사한 것입니다. 아이는 불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성냥불에 한 번 데고 나면 그 기억이 일평생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성 안에 지식이 머무르기 때문에 불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지성에 머물도록 숙고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그것을 자신의 실재적인 삶에 끊임없이 적용해야 합니다. 그 때 말씀이 지성의 창고에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마음에서 작용을 하며 행동을 산출해 내는 것입니다.
늘 하나님 앞에 은혜로운 삶을 사는 성도들의 마음 안에는 현재 그 사람을 움직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금방 진력이 납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음식점이 있는데 음식을 꽤 잘 합니다. 나무랄 데가 별로 없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장사가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초지일관해서 그렇습니다. 음식을 신선한 재료로 정성껏 만들어도 끊임없이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좋은 재료로 맛있게 만들어서 고객들에게 봉사한다.”라는 정신은 변하면 안 되는데, 음식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계속 바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노력해야 됩니다. 된장찌개라든지 설렁탕이라든지 곰탕이라든지 개장국 같은 것은 똑같이 계속 유지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식품입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새로운 반찬들을 만들어 내고 색깔을 조정하고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고 맛의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자극을 받아서 자신의 삶을 고치고 변화시키는 실천적인 노력을 통해서 말씀의 맛이 끊임없이 다양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할 때 마음이 말씀을 통해서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행함 없이 하나님의 말씀만 계속 섭취하는 삶은 금방 진력이 납니다. 한 가지 음식만 계속 먹으라고 하면 질립니다. 단순식품인 경우엔 조금 덜 합니다. 복잡한 식품의 경우에는 복잡할수록 더 질려서 다음에는 그 음식점 근처에도 가기가 싫고 생각만 해도 역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숙고하고 그것을 적용하면서 살아갈 때,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더 깊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 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65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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