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8
목 차
경건한 자의 기도(시 68:1-2) 1
의인이 기뻐하는 날에(시 68:3) 6
왕의 대로를 수축하라(시68:4) 12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시 68:5-6) 17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시 68:7-8) 21
은택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시 68:9-10) 27
승리하게 하신 날에(시 68:11-12) 31
주의 품에 있을 때(시 68:13) 34
하나님이 열왕을 흩으실 때(시 68:14-15) 39
여호와를 시기하지 말라(시 68:16) 42
여호와의 통치와 승리(시 68:17-18) 48
우리 짐을 지시는 여호와(시 68:19-21) 51
원수에게서 분깃을 주심(시 68:22-23) 56
주께서 행차하실 때에(시 68:24-25) 61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자들(시 68:16-17) 65
견고케 하소서(시 68:28) 68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릴 때(시 68:29-30) 71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사람들(시 68:31-32) 75
하나님의 속성과 해석(시 68:33-34) 78
성소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시 68:35) 83
시편73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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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시편68편 강해 1
경건한 자의 기도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연기가 몰려감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시 68:1-2)
본문해설
시편 68편의 기도는 탄원의 내용들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찬송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여러 각도로 길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현실 속에서 찬송하고, 미래를 전망하면서 찬송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앙의 본능 중 하나는 ‘회상’하는 것입니다. ‘회상하고 잊지 않는 것’, 쉽게 이야기하면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 과거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던 일을 회상하면, 오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1절에서 2절 사이에는 같은 내용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치 1절과 2절이 하나의 병행구인 것처럼 전체적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일어나사’라고 탄원을 드리는 묘사가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데, 주님은 물리적으로 어떤 장소를 가지고 존재하는 인간과 같은 분은 아니십니다. 이것은 시적 표현입니다. 마음속에 주님의 임재를 그릴 때 보좌에 앉으신 분으로 그립니다. 보좌에 앉으신다는 뜻은 앉으셔서 권위를 가지고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과 인간을 왕의 권세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묘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적인 권세로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시는데 우리가 ‘일어나사’라는 탄원을 드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위급한 상황을 만나 당신의 왕권을 더 강력하게 행사하여야 할 때를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어나시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는다.’라는 말은 히브리 사람의 문맥에서 보면 ‘일이 끝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상황이 끝나면 다시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언약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여 일어나시옵소서.”라고 부르짖을 때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급박한 상황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어나라.”고 명령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일어나라.”고 인간에게 명령하실 때는 잠자고 흐릿하던 신앙에서 깨어나 각성하고 결단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뜻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일어난다는 표현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일어나라.”는 명령어가 나올 때 이런 것을 염두에 두고 읽어나가면 상당히 유익합니다. 물론 일어난다고 할 때는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는 뜻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어나서”라고 하면 그것은 그냥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일어나라.”는 단어가 상당 부분에서 이러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나 선지자가 큰물고기에 삼킨바 되어 뱃속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탕자가 ‘이제 내가 일어나서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니 이제 나를 품꾼 중의 하나로 여겨주시라고 말하겠다.’ 하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시인이 “하나님, 일어나십시오.”라고 간곡히 탄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통치와 간섭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돌보시고 이끄시지만 지금은 특별히 우리를 돌보시고 악인을 다루어주셔야 할 때입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백성들의 마음을 당신 앞에 집중하게 하시기 위해 악인들을 사용하십니다. “정신을 집중하고 싶다.” 아니면 “정신을 차리고 싶다.”, “나 자신을 찾고 싶다.”라는 말을 영어로 표현할 때 'collect oneself'라고 합니다. ‘나 자신을 모으고 싶다.’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최대의 방해는 흩어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감각 속에서 흩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절제가 필요한 이유도 너무 많은 사물에 에워싸여서 물 흘러가듯 하면 욕망이 좋은 것으로 통일되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물들의 영상이 마음에 찍혀서 이것도 먹고 싶고, 저것도 입어보고 싶고, 여기도 가고 싶고, 이 일도 해보고 싶고, 저 일도 해보고 싶어지게 됩니다. 감각에 따라 생각과 욕망이 분산될 때 신앙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모아질 수가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것을 ‘기억의 찢어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기억의 찢어짐 속에서 인간은 속임을 당하게 되고 혼란스러운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조차 세상에 있는 물질이나 사물, 자기의 명예와 육신적인 욕망, 이런 것들과 하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모아서 집중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인데도 원수를 일으키셔서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도록 시달리게 하시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의지하는 마음이 깊어질 때 파산선고를 받은 것처럼 마음이 가난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신 복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첫 번째 복에서부터 팔복까지 보면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주시고,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는 배부르게 해주시는데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신다고 하십니다. 두 번째 복에서부터 팔복까지는 첫 번째 복을 선언하고, 첫 번째 복을 다시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그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지지 아니하고는 절대 애통하는 자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지 아니하고서는 온유한 자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애통하면서도 가난한 자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가 아니고서는 애통할 수 없습니다.
비가 와서 빗물이 사방에 고여 있지만 그것을 기울여 주면 물이 치달으면서 한 쪽으로 모아지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드셔서 다루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면서 살아가면 나쁜 일은 없습니다. 나쁜 일도 결국은 그 때는 쓰지만 그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원수를 흩으소서˛
시인은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전쟁을 많이 경험해본 사람의 표현입니다. 전쟁터에서 적의 군대가 새까맣게 몰려올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진지를 굳게 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전쟁을 생각해보십시오. 창과 병거를 들고 앞에는 방패를 앞세웁니다. 전력이 비슷하거나 부족할 때는 그 군대를 격파하기 위해 그 군대와 일직선으로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병사들 중에서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군인들을 선봉으로 세워서 어마어마하게 몰려오는 대군들을 쪼개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옛날 마게도냐가 4만 군대를 가지고 26만의 페르시아 대군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 전법은 수많은 대군의 가운데를 치고 지나가면서 반으로 나눠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흩어지고, 다시 가운데를 쪼개면 군대는 현저하게 힘이 없어집니다.
“원수를 흩으시옵소서”라는 표현은 전투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각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를 미워하는 자’라고 했는데, 그것은 원수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전쟁에서 패배하여 도망하는 패잔병들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가 2절에서 나옵니다. “연기가 몰려감 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을 때면 연기가 납니다. 연기는 불에서 발생하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하늘로 솟아오릅니다. 놀라운 속도로 불길이 타오르면 연기는 저 멀리 높은 하늘로 상승합니다. 그것과 같이 “어마어마한 수의 원수가 우리를 에워쌌지만 저희를 몰아내시고 불 앞에서 밀이 녹음같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라는 표현입니다. ‘밀’은 양초의 촛농을 말합니다. 밀이 형태를 갖추고 있는데 옆에서 불을 때면 녹아내리듯이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녹아내리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녹는다’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녹음까지도 포함합니다.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망하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는 내용이 1절과 2절에서 나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백성의 커다란 행복은 이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오면 예전에는 홀로 울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는 시련과 고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언약백성들을 향한 그분의 탁월한 사랑을 맛보는 기회로 활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가장 고통스러운 시련 속에서도 그분의 능력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입니다.
의인이 기뻐하는 날에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 68:3)
본문해설
앞 절에는 시인이 원수들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원수를 흩어 주십시오. 미워하는 자로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전쟁의 맥락과 관련이 있습니다.
“연기가 휘몰려 가는 것같이 저희를 몰아내소서. 불 앞에서 밀이 녹음 같이 악인이 하나님 앞에서 망하게 하소서.”라는 간구는 하나님이 천천히 역사하셔서 조금씩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간섭 속에서 이런 일들이 과격하고 확연하게 일어나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강력한 부흥에 대한 갈망이고, 섭리적으로 보면 급격한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간섭을 청구하는 것입니다.
간섭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기적을 통해서, 혹은 역사에 깊이 간섭하셔서 급격하게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기대입니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의 역사에 매순간 개입하셔서 흔들어놓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돌봄을 벗어나는 피조물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작용까지도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를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셔서 각기 자기 의지를 행사하면서 살아가게 하시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멀어지면, 보다 확실한 방법으로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날의 양면성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악인을 무너뜨리시는 날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날의 개념입니다. 하나님 뒤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하나님을 마주 대하지 않을 수 없는 날이 오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당신의 성품을 따라 정의를 실행하시는 날이 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날의 개념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악인들을 강력하게 징벌해서 세상을 청소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왕을 폐하게도 하시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이 악인에게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온 언약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가 있습니다. 고난 받으며 살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상급과 보상이 있는 날인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임하시는 날이 어떤 날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 앞에 살아온 삶의 태도와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그날은 하나님의 진노와 축복을 함께 가지고 있는 날입니다.
예수님이 맨 처음에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선포하신 메시지는 세례 요한의 메시지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도 또 다른 여호와의 날의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바로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혈통이나 민족, 역사, 나라, 지역, 이런 것으로 임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특별한 교통으로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그림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의 바깥에 있다는 것도 충격이고, 그 나라가 오는 것이 마치 커다란 바위가 굴러오는 것과 같아서 어떤 식으로든지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태도를 바꾸고 삶을 고치지 않으면 깔려 죽는다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언약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 나라가 오는 것이 그들에게 심판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을 기뻐하는 의인
구약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여호와의 날의 개념으로 보면 그날이 도래했을 때 기뻐하고 찬송하는 사람들은 대개 고난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구조 속에서 고통 받고 괴로워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실제적으로 악인에게 눌림을 당하면서 고통을 받는 물리적인 고통일 수도 있고,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되지 않은 현실을 보면서 애통하고 아파하는 종류의 고통일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고통 받고 분투하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날에 기쁨의 국면에 참여하게 되고, 악인들은 심판의 측면에 참예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에서 2절 사이에서 적들의 무너지고 소멸하는 것과 뒤에서 의인이 기뻐하고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것은 여호와의 날의 양 국면을 차례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인이 멸망당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때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강력하게 임재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것, 고통 속에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여러분을 하나님이 이해해주신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믿어지게 되었습니다. 성령의 넘치는 위로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을 괴롭히던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아니면 두 다리를 공중에 매달고 병원에 누웠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때 그 사람의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누웠다는 사실 때문에 기뻐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오셔서 여러분을 어루만지신 것 때문에 기뻐하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시인은 악인이 무너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날의 두 가지 측면, 하나님이 백성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게 해주시고 악인이 소멸되는 것을 함께 보여주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는 날이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의 바라는 바는 악인이 멸망을 당하는 것이 아니요”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의 파멸을 보고 기뻐하는 것은 사랑이 온전히 성숙한 상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살아감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얼굴’이라는 말과 전치사 ‘to’, 혹은 ‘at’이 하나 붙어서 ‘누구누구의 얼굴 앞에서’, ‘얼굴과 대하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이 있으신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얼굴’이라는 표현은 우리를 이해시키기 위한 신인동형적인 표현입니다.
누군가 거짓말을 하려고 하는데 심증만 있지 물증은 없습니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내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봐.” 그러면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얼굴’이라는 단어는 신비한 의미를 갖는 복수로 사용됩니다. “내 얼굴을 보고 말해.” 그러면 발끝을 보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눈을 보면서는 거짓말을 못 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진 인간의 본 모습에 직면하게 될 때 그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으면 내가 악인이라고 할지라도 악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최고의 특권은 바로 하나님의 눈빛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표현 중 하나가 ‘구김이 없는, 꾸밈이 없는’이라는 말입니다. 꾸밈이 없고 구김이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것은 “나 이정도 살았으면 잘 살았죠? 나는 주님 앞에 설 자신이 있습니다.” 이런 뜻이 아닙니다. 마음에 접고 있는 자락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를 감추고 자기를 포장하려고 하는 것이 없는 상태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이 모습 그대로 주 받으옵소서 ♬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그러기 위해서는 삶이 완전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구김이 없어야 되는 것입니다. 옳지 않은 면도 많이 있고 모자라는 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것도 내가 의도한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일관된 의지를 가지고 스스로를 강하게 의지하고 있을 때는 그런 찬송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누가 완전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경배할 그날에도 사람의 마음속에 죄책과 오염의 흔적이 묻어있고, 사고 속에도 여전히 죄에 대한 영향이 완전히 제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완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양심의 자유가 있는 것은 자기가 아는 한에서는 의도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구김이 없는 마음이 됩니다. 그렇다고 마음에 구김이 없는 사람들이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는 모든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나도 내가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장 잘못한 것은 나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I'm sorry for what I am. 내가 나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와 현재 존재하는 나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고 임재를 느끼면 나의 행한 일과 존재 자체가 한 덩어리로 다가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로부터 삶의 개별적 행동이 흘러나오고 개별적인 행동을 통해서 자신을 발견하지만 마지막에 돌아가는 것은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말 하찮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더러움과 악이 가득 찬 존재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회심할 때 옛날에 친구 돈을 훔친 것을 회개합니까? 엄마 속 썩여 드리는 것을 회개합니까? 그런 것이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것보다 훨씬 더 깊고 심오한 것입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인입니다. 회심의 놀라운 은혜가 임할 때 “하나님, 제가 돈을 훔쳤습니다.” 그렇게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가 가득 찬 죄인일 뿐입니다. 나의 정신과 영혼은 물론이고 행동과 육체에 속한 어느 한 부분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삶을 살 수는 없지만 꾸밈이 없이 구김이 없이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주님이 지적해 주시면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다는 선한 의지가 자기 안에 남아 있어서 양심을 거스르지 말아야 합니다. 죄 중에서 제일 큰 것은 양심이 자각을 하는데도 실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에 미치는 죄의 흔적이 굉장히 큽니다. 그것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양심에 털 난 사람들도 많은데 그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있습니다.
양심의 발현의 크기는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추호도 그런 것에 자극을 받지 않는 완악한 악인도 있습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한계 안에서 양심까지 던져버리면 법 자체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부터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꾸밈이 없고 구김이 없이 온전하게 살아갈 때, 여호와의 날이 언제가 되든지 주님의 온전한 통치를 기다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
왕의 대로를 수축하라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그 이름은 여호와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시 68:4)
본문해설
4절은 여호와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광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인들의 전형적인 문학적 관습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하고 뒤이어서 같은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해나가는 것이 널리 사용되어 오던 문학적인 기법입니다. 같은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3절에서는 여호와의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을 조금 더 상세하게 확장시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께 노래하며 그 이름을 찬양하라”,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단어가 성경에 자주 나오는데, ‘이름’을 히브리어로 ‘쉠’(!ve)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름을 실체와 동일시합니다. 서양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보다 훨씬 강합니다. 그들도 우리나라처럼 이름에 대한 존중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은 동의어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힘입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다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동의어입니다. ‘이름’이라는 단어를 떼버리면 간단합니다. 여기에 ‘쉠’, ‘이름’이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신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모든 물질세계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초월적인 분이십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할 때 하나님이 세계 속에 물질처럼 계신다고 보고 하나님을 위하여 산다고 하는 개념이 거절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뛰어난 초월성을 강조하는 의도에서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엄밀한 의미에서 영광을 받으실 수도 없고 모욕을 받으실 수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욕을 돌릴 수도 있기 때문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 속에는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두고 영광을 받으시거나 욕을 당하실 수 있는 분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인간에 의해 모욕 받을 수도 있고 오해 받을 수도 있고 영화로워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영광이라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용사요 왕이신 하나님
본문에서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타고’라는 말은 마차를 탄다는 말이 생략된 것입니다. 이것은 왕의 마차를 말합니다. 그것을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라는 뜻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이브리’(yrib][i)라는 말에서 온 것입니다. 이것은 ‘아바르’(rb'[)라는 동사에서 나온 것인데, ‘건너다’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합비루’라는 민족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강을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이름 자체가 고유명사라기보다 ‘강 건너온 야만족들’이라는 뜻으로 불린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넜기 때문에 히브리 민족이라고 불린 것입니다. 정확히는 그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불립니다.
그들은 그 후에 광야생활을 합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다가 최소 이백만에서 삼백만 정도 되는 사람들이 길바닥에 우르르 쏟아져 나왔으니까 다른 민족들이 보기에는 오합지졸 같았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어가(御駕)를 타시고 그들을 다스리며 통치해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용사이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안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의 뜻대로 살도록 통치하시고, 밖으로는 이스라엘 해치려는 많은 무리들과 더불어 싸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왕의 행차를 위한 어가가 아니라 전쟁의 개념에서 사용되는 어가입니다. 나라의 국운이 걸린 엄청난 전쟁일 경우에는 왕이 전쟁에 참여합니다. 전쟁터에 친히 어가를 타고 옵니다. 왕은 병사처럼 위장을 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군인들, 심지어는 적군들까지 볼 수 있도록 화려한 어가를 타고 옵니다. 수많은 군대들이 어가를 공격할 수 없도록 에워싸서 방비를 하면서 옵니다. 전쟁을 하는 군인들은 높이 둘러싸인 왕의 어가를 보면서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께서 전쟁터에 친히 오셨다. 비교되지 않는 탁월함으로 왕이 우리와 함께 오셨으니 우리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라는 강력한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병사들은 “왕께 충성!” 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전쟁을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당시의 문화나 삶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가지고 시편을 보면, 겉치레로 읽어나갈 때는 발견이 안 되던 정교한 그림과 인상들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는데 커다란 도움을 줍니다.
“타고 광야에 행하시던 자”, 과거형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는데 용사로서 통치하십니다. 사기나 북돋우기 위해서 오는 왕이 아니라 실제로 전쟁을 진두지휘 할 수 있는 왕입니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같은 왕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대로를 수축하라
“광야에 행하시던 자를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시고 전쟁을 승리로 이끄셨습니다. 용사이신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승리를 거두고 마지막에 하나님이 주신 가나안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 왕을 위하여 대로를 수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King's highway'라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전쟁을 할 때 친전하여 싸우시던 왕이 바로 오늘 우리의 삶속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왕이 지나갈 때 먼저 외치는 자가 따라갑니다. 외치는 자가 큰 소리로 나팔을 불며 “왕이 모년 모월 모시에 이곳을 지날 터이니 너희는 마음을 단정히 하고 왕을 맞을 차비를 갖춰라.” 하고 외치며 지나갑니다. 그리고 뒤에 도로를 개축하는 사람들이 따라옵니다. 높은 데는 깎아서 낮추고 낮은 데는 흙을 돋아서 바른 길을 만듭니다. 옛날에는 도로 포장도 없었습니다. 길이 험하면 덜컹 거려서 왕이 지나갈 수 없으니까 도로를 먼저 수축합니다. 아무도 못 지나가게 하고 왕이 지나갑니다. 이것이 'King's highway', ‘왕의 대로’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이 세례요한과 관련되어서 나옵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외치는 자가 나타납니다. 길에다 대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내는 것입니다. 회개함으로 마음을 돋우고 낮추어서 예수님이 오실 길을 내는 것입니다. “수축하라 영광의 왕이 이제 오신다. 그 이름은 여호와이시니 그 앞에서 뛰놀지어다.” 그러면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명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명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언약백성들에게 계시된 이름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왕 중의 왕이신 하나님, 역사 속에서 용사이시고 친히 전쟁터에 임하셔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의 참된 행복이다.”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에게 수많은 싸움이 있고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난이 있어도 하나님은 용사이십니다. 아무 능력이 없이 아버지로부터 권좌를 물려받아 힘없이 나라를 통치하면서 그 왕권으로 단물이나 빨아먹는 너절한 임금이 아닙니다. 친히 백성을 건지실 수 있고, 붙드실 수 있고, 친히 다스릴 수도 있고, 당신의 위대한 능력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고 어떠한 성품을 가지신 분인지 배우면서 우리 삶속에서 일어나는 정황들을 통해 거기에 묻어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존재와 성품 때문에 그분을 높이고 경배하고 기뻐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제일가는 본분입니다. 그분을 즐거워하고 그분 안에서 그분 자신을 누리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본분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누리기에 적합한 존재가 되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를 세워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하나님은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수금된 자를 이끌어 내사 형통케 하시느니라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시 68:5-6)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
앞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 때문에 구체적으로 언약백성들이 어떤 복을 받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약백성들의 복은 하나님께서 외롭고 억울한 자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이시라는 것입니다.
고아는 부모가 없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들은 외로운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보호해줄 사람이 없는 사회적 약자입니다. 혹시라도 고아에게 유산이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빼앗길 수 있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고아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돌보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고아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친아버지가 자기 자식들을 끔찍이 생각하고 돌보는 것처럼, 세상에서 육신의 부모를 가진 자식들 부럽지 않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과부는 억울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남편이 없으면 사회적인 약자가 되고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합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워서 이런 사람들이 늑탈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면 그분께서 과부의 재판장이 되어 주신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과부는 사회적 약자이고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는 사람인데, 권력과 재력이 많은 사람들, 일가친척이 많은 사람에 의해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공정히 재판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과부의 재판장이 되어 주셔서 그들을 지켜주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게 되면, 하나님의 뜻대로 나라가 다스려질 것이고 그 때 놀라운 변화가 온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왕이 한 나라를 다스릴 때 그 왕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는 모습은 현저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보면 폭군 같은 임금이 있고, 성군 같은 임금이 있었습니다. 폭군이 나라를 다스리면 나라의 법도가 올바로 서지 않고 폭력적으로 변합니다. 왕 자신이 법을 지키고 인자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백성들을 통치하고 다스릴 때는 폭압적으로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폭압적으로 다스리고 악한 일을 행하게 되면 그 나라의 백성들이 그대로 피해를 봅니다. 만약 어진 임금이 등장하게 되면, 그 임금은 나라를 그렇게 다스리지 않습니다. 나라를 평화롭게 통치합니다. 법은 살아있지만 백성들을 화합의 정신으로 돌보면서 통치합니다. 그것이 어진 임금과 악한 임금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이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나라는 그분의 어진 성품을 반영하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법도로 통치하시며 악인을 벌하시고 교만한 자를 꺾으시지만,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폭압적인 통치로 질서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인간의 내면을 굴복시키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모든 사람들의 내면을 굴복시킬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통치를 받게 되면 그 앞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이끌어 가려고 세우신 질서를 사랑하게 됩니다. 왕을 사랑하면 왕의 통치를 기뻐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질서를 좋아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시고 통치하시는 나라와 세상의 임금이 통치하고 다스리는 나라의 차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같은 이야기가 6절에서 반복됩니다. “고독한 자로 가속 중에 처하게 하시며”,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외로운 사람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맞아주셔서 외롭지 않게 하시고, 함께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수금된 자, 죄수로 억울하게 갇혀져 있는 사람을 다시 올바르게 재판하셔서 그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서 형통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외롭고 고독한 삶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은혜를 받으면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의 부모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고, 때로는 동기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따뜻한 돌봄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외롭고 상처 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당신의 품에 들어와 안식과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거역하는 자의 거처는 메마른 땅이로다”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여행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메마른 땅은 그들에게 재앙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풀밭이 있고, 짐승들을 먹일 수 있는 물이 있고, 그늘이 있어서 쉴 수 있는 환경이 절실하게 필요했습니다. 요즘도 이스라엘에서는 종종 사고가 난다고 합니다. 광야를 구경하러 갔다가 사람들이 길을 잃고 죽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특히 광야를 구경하겠다고 물을 잔뜩 싣고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거나 다치게 되면, 광야에 갇혀서 연락도 안 되고 나무그늘 하나 없기 때문에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메마른 땅은 재앙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그런 메마른 땅에 거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결론과 적용
주님을 의지하며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통치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 안에서 유익을 누리며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 (셀라)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하나님 앞에서 떨어지며
저 시내산도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진동하였나이다”(시 68:7-8)
본문해설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이끄실 때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지은 노래입니다.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라고 하는 것은 특별히 어느 한 때라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 들어가서 가나안에 이르기까지의 전 과정을 가리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광야를 지나면서 마주해야 했던 수많은 나라들과의 전쟁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산과 시온의 왕을 꺾으시고 수많은 나라와 더불어 싸우며 광야를 행진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전투
신약적 성취로 본다면 이것은 지상세계에 있는 동안 교회는 전투적인 모습이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를 받은 것이고, 마지막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본다면, 그 사이에 있는 광야생활은 끊임없는 전투의 연속입니다. 사도바울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영적전투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에베소서 6장에서 “우리의 씨름은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주관자들과 대한 것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의 삶의 본질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의 전투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공동체적으로 교회에 분여된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체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은총, 은사, 모든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된 우리에게 분여되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주신 전투적인 운명도 그리스도의 지체된 우리에게 똑같이 분여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는 신앙생활과 나눠지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여 주의 백성 앞에서 앞서 나가사 광야에 행진하셨을 때에”라고 말합니다. 전쟁의 문맥으로 보아 하나님이 용사가 되셨다는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쟁은 성전(聖戰), 즉 거룩한 전쟁입니다. 거룩한 전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이 땅에 펼치시려는 질서에 대항하는 나라들과의 전쟁입니다. 이것은 세상 전쟁의 친정(親征)과 현저히 다른 모습입니다. 친정이라는 것은 왕이 직접 전쟁을 진두지휘하는 것인데, 절대로 왕의 어가가 전투 앞에 서는 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행진하십니다. 이스라엘의 특권은 하나님이 왕이시지만 전쟁을 할 때 군인들을 앞으로 내보내고 당신은 화려한 어가를 타고 뒤에서 군인들을 독려하는 세상 임금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당신이 모든 군인들 앞에 용사로서 진두지휘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호위하고 함께 진군하는 영적 군사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 나타난 전쟁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게하시에게 보여주셨던 도단성을 에워싸고 있는 대적들과 그 뒤를 포위하고 있는 하나님의 엄청난 군대들이 바로 그 그림입니다. 아람 군대를 능히 이길 수 있을 만한 수많은 군대들이 포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우시는데 당신의 천군천사들을 동원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쟁의 개념입니다.
신약적인 성취가 바로 이것입니다. 교회가 전투적인 삶을 살고 세상에서 올바른 길을 걸어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앞서 행하시는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용사이시라는 개념이 기독론적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셨을 때 놀라운 평화의 삶을 사는 것 같았지만, 영적으로는 끊임없는 전투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세상에 계시는 동안 핍박과 고난과 멸시를 받으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후에는 당신 자신이 교회를 영적으로 앞서 인도하시면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한 마음으로 세상을 긍휼히 여기고 뜨겁게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질서에 항거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공존하게 됩니다. 세속주의에는 이런 분노가 없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지체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나누어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걸어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 앞서 행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보편교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땅이 진동하고 하나님 앞에 떨어지며 시내산도 진동하였나이다” 진동이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은 보역(補譯)이지만 정확하다고 봅니다. ‘진동한다’라는 것은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무너지는 것입니다. 등산을 하는 사람에게 위험한 것은 이것입니다. 비가 오고 흙이 가라앉으면 바위들이 산 위에 간신히 얹혀있는데, 그 때 큰 차가 지나가거나 기차가 지나가면 흔들리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나라를 어떤 나라라고 표현했습니까? ‘진동치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위(位)의 견고함, 어떠한 영적인 세력도 흔들 수 없는 그리스도의 통치의 위엄과 권세를 이야기할 때 진동하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진동한다는 것은 망함의 징조가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용사가 되어서 이스라엘에 앞서 행하실 때, 자기들 나름대로 하나님이 없는 나라의 질서를 만들어 놓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진할 때 그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행진 때문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권세와 위대한 힘, 어떤 것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의 강인한 힘, 이런 것들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교회의 위대한 힘과 권세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한 사람의 승리하는 영적 생활의 총체는 결국 그 시대의 보편교회 모두의 승리입니다.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강한 교회가 되도록, 하나님이 앞서 행해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번영은 단순히 교회 건물을 많이 짓고,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주님이 우리의 용사가 되어 주셔서 그 시대의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나타나는 것, 그것이 바로 교회의 능력입니다.
보편교회의 모습을 지역교회들이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역에 있는 교회가 교회의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항상 마음 깊은 곳에서 세상에 있는 모든 보편교회, 심지어는 몸으로는 건전하지 않지만 영으로는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인 사람들까지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들을 가슴에 품고 전 세계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번영하고 올바로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교회도 다른 교회의 경쟁 상대가 된다든지, 시기의 대상이 된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그런 것들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편교회를 이롭게 하고, 보편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편의상 지역에 교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훨씬 높은 지위에 올라서 오히려 보편교회의 몸을 찢어서라도 자신의 교회를 부하게 하려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편교회에 속해 있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게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역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 교회는 다른 교회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보편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을 이롭게 하고 올바르게 번영하고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시골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해외에 가서 교회들을 보고 아파하면서 돕습니다. 그것이 우리 지역교회를 발전시키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영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들을 일깨우면 지역교회의 교인들이 늘어납니까? 시골에 내려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그들이 교회에 보태주는 것이 있습니까? 그런 생각으로는 복음의 참 의미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어느 교회이든 건전하지 못하거나 옳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독한 마음으로 비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마음으로 아파하면서 그 교회를 품고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최근에도 몇몇 교회들이 많은 문제를 일으키면서 언론에 오르내리고 그리스도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비난을 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그러지 말고 기도해라. 사람들에게 교회를 비난하는 것 먼저 하지 말고 기도해라. 나쁜 일을 해서 교회의 명예를 실추시켰지만 그 사람이 교회는 아니지 않느냐? 그 사람의 잘못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미워하고 욕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면 당신의 영혼에도 안 좋다. 기도해라.”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영적 이스라엘로서 보편교회에 대한 눈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몸을 바라보시는 것처럼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마음을 교회에 많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아마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모습도 훨씬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특히 개신교는 그런 점에 있어서 약점이 많습니다. 우리만이라도 보편교회에 대한 사랑을 간직해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 앞서 행하실 때 진동이 일어납니다. ‘진동’이라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엄위요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에서는 놀라운 사랑의 능력, 영적인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실 때는 창칼을 들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그리스도인의 무리들도 창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검도 가지지 말고, 전대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떤 종류의 싸움이 전개됩니까? 영적인 싸움입니다. 교회가 참 교회의 역할을 하기 위해 창칼을 동원하거나 세속 권력의 후원을 입었을 때, 그 말로(末路)는 항상 나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 권력을 가진 정치가들이나 돈 많은 재벌이 있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그런 사람들과 결탁을 하고 그들을 앞세워서 옳지 않은 방법으로 후원을 받으며 선교의 유익을 얻으려고 할 때 마지막 결과는 부패로 나타납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창칼 없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나라는 이제 세상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그 나라를 움직이고 있는 정신이며 영적인 세력들이며 문화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그리스도 예수 앞에 굴복시키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앞서 용사가 되어서 그들을 승리로 이끄신 것처럼, 오늘도 그분께서 당신의 교회에 앞장서서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십니다. 우리도 즐거이 그 고난에 참예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고난이 없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늘 부르던 찬송이 “복음 들고 나선 이몸”입니다. 요새는 거의 불리지 않는 찬송입니다. 고난에 참예하는 것, 그러면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고 영적인 용사가 되게 하는 것이 주님이 오늘날 교회를 붙들고 계신 목적입니다.
은택을 준비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시 68:9-10)
본문해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서 광야를 행진하던 시대에 하나님이 강한 능력으로 용사가 되어주셔서 앞서 행하시며 전쟁을 수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을 수행하시는 전사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끄셨던 것이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군사적인 측면을 보여준다면, 9절과 10절은 자애롭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시는 어머니와 같은 손길을 보여줍니다. 9절과 10절의 문맥은 농경사회의 문맥을 그리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과 가나안에서의 정착, 이 모든 것들이 함께 기억 속에서 오가는 가운데 비단이나 직물을 짜듯이 실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비의 소중함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비’입니다. 광야를 지나면서는 비의 소중함이 덜했을 것입니다. 광야를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정착 생활을 하면서 농경문화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농경문화의 기본적인 토대는 농사입니다. 농사를 토대로 산업이 발달하게 됩니다. 농사를 지어서 많은 곡식들을 거두어들여야 수입이 생기고, 여유 자금으로 생활에 필요한 기구나 직물을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이스라엘에서 직접 만드는 것도 있었겠지만 어떤 것들은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하는 것도 있었을 것입니다. 재화를 교환하고 거기에서 이익을 남긴 사람들이 그것으로 농산물을 구입하면서 경제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유럽의 경제침체를 깊은 우려 가운데 보고 있습니다. 유럽의 구매력이 전 세계의 4분의 1을 차지합니다. 전체를 합한 것이 미국과 거의 맞먹습니다. 전 세계의 4분의 1의 구매력을 가진 사람들이 지갑을 닫고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같이 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에 치명적인 어려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에서 원자재를 수입할 수 없고, 커다란 불황이 예고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축소된 형태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다음, 농사가 중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비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스라엘은 강수량이 많은 나라가 아닙니다. 강수량이 부족해서 세계의 강수량을 재활용하는데 가장 탁월한 기술을 가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비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렇게 두 번 내리는 비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아주 중요하다고 합니다. 첫 번째 비가 오면 파종을 하는데, 이것을 이른 비라고 합니다. 늦은 비가 오면 그 비를 맞고 곡식이 마지막 결실을 하면 곡식을 거두게 됩니다. 이러한 비를 제때 내려주시는가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가 흡족하게 오면 곡식들이 잘 자라게 됩니다. 산업이 곤핍하다는 것은 이것이 잘 안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비를 주셔서 산업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농사가 풍년이 되면 인심도 좋아지고 산업도 발달하게 됩니다.
은택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
전쟁에서 용사로 싸우는 것이 군사의 모습이라면, 이러한 은총은 집안에 있는 아이들에게 물건을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주는 엄마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들에게는 강하고 담대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자비하게 심판하시지만, 언약백성들을 향해서는 어머니와 같이 자애로우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주의 산업의 곤핍할 때 견고하게 하셔서 주의 회중들로 하여금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당신의 회중들이 곤핍한 가운데 있을 때 견고하게 하셔서 풍부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일상생활을 돌보십니다.
오늘날 번영신학들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시고 건강과 부를 누리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존 파이퍼’ 목사님이 이것을 쓰레기라고 했겠습니까? 성경의 철저한 관심은 인간의 고통의 근원을 다루는 것입니다. 그 근원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믿고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계획과 완성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세상에서 용사로 싸우시면서 우리의 앞길을 개척하고 인도하시기도 하고, 올바르게 살 수 있도록 책망하고 견책하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같은 자애로움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고 날마다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이끌어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 인도, 사랑, 돌봄,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어머니 되심을 보여줍니다. 자애롭게 이끄시는 결과가 우리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호흡이 있고 먹고 살고 기도하는 것까지 주님의 은택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것을 초점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은 고통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 그것이 신앙이고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은택을 준비하셨습니다. 은택이라는 것은 자격은 없지만 곤핍하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입니다. 인간의 물질생활과 일반섭리의 영역뿐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영역까지도 모두 포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끔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복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당신의 크신 사랑과 은혜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다루시는 손길에 복종하고 주님께 온전히 순복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가 좋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만났다면 그분들이 날마다 이끌고 돌보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보다 더 아버지 되시고, 우리의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되셔서 인생을 이끌어 주십니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내 인생의 어떠한 시련과 환란이 있어도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시다.”라는 믿음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곤핍한 땅을 지나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곤핍한 시기를 지날 때도 있고, 육적으로 곤핍하고 괴로운 시기를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승리하게 하신 날에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여자가 큰 무리라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시 68:11-12)
본문해설
본문은 전쟁터에서 승리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터에 왜 여자가 등장합니까? 분명하게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두 부분이 모두 여성 명사로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것이 반드시 여성을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저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제쳐두기로 하겠습니다.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주께서 말씀을 주시니 소식을 공포하는 자가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가 ‘말씀을 주다’ 인데, 이것은 하나님이 소리를 내셔서 말씀하셨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내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가리킬 때의 말씀을 지시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승리의 상황을 통해 내적인 감동으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위해 대신 싸우시는 용사이시다.” 그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것입니다. ‘소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안 나옵니다. 이것은 ‘예언하다’, ‘전파하다’라는 뜻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하나님이 위대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용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서로 하나님의 성품과 위대한 능력을 찬송하게 된 것을 묘사합니다. 이것은 전쟁 중, 혹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면서 싸웁니다. 그것이 서로를 격려하면서 큰 힘이 됩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이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큰 능력을 찬송하는 소리들이 서로를 격려하여 전쟁에서 이기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 전쟁에서 언약 백성들이 보여주는 반응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나 혼자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면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데 주위에서 사랑하는 지체들이 나보다 어려운 환경을 딛고 이기는 소식을 들을 때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자신의 삶이 반드시 승리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사는 게 힘들고 고달파서 불평하고 침체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가장 확실한 처방은 자신보다 더 고달픈 삶을 살면서 믿음으로 이기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자기가 하는 고민이 얼마나 작은 고민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장로님 한 분이 상처(喪妻)를 당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산다고 해도 늘그막에 상처를 당하고 나니까 상심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우울증 증세까지 오는 것입니다. 심방을 하고 예배를 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교수님 한 분이 “장로님, 그러지 말고 나하고 중국여행이나 갑시다.” 잘 타일러서 중국을 데려 갔습니다. 관광지를 다닌 게 아니라 탈북자들이 연변에서 고생하는 곳을 데려간 것입니다. 먹는 것, 자는 것, 할 것 없이 고생하면서 그들이 주님을 섬기는 현장을 돌아보더니 장로님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구나.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비참한 인생의 막장에 있는 사람들이 많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그리고 이년 반 만에 떨치고 일어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을 때, 그 속에서 수많은 언어들이 들려오는 것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고 어려움에서 이긴 경험을 하고 난 뒤에는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생생하게 밀려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은 자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승리하게 하실 때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이스라엘은 홀로 싸웠으나 이스라엘과 대적하기 위해 나온 적군들은 연합을 이루며 그들에게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을 깨뜨린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군대의 왕들이 도망하고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라고 말합니다. ‘집에 거한 여자’라고 했는데 ‘집에 거하는 사람’이라는 정도의 뜻일 것입니다. 이것이 공교롭게도 여성명사로 쓰였습니다.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여자일 수도 있습니다. 앞에 단어는 여성명사로 쓰여 있지만 군인일 가능성이 많고, 뒤에 것은 혹시 여자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굉장히 힘이 되는 메시지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제일 먼저 피난시키는 사람들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들, 노인들, 아녀자들입니다. 적들이 패배하고 지나간 전쟁터이니까 전쟁에서 이기고 있는 중이 아니라 종료된 것을 보여줍니다. 완전한 자유와 평화가 찾아온 것입니다. 전쟁의 위협이 두려워서 집에 숨었던 여자들도 전쟁터에 나와 승리의 결과인 노획물들을 나누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승리를 주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리던 영광이요 환희였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난 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욱 더 풍부하게 알게 된 지식은 탈취물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시련과 어려움을 만났을 때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승리를 경험하면, 이기고 승리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외적인 것보다 더 커다란 것을 마음속에 주십니다. 이긴다는 확신을 심어주셔서 이기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명심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도록 하나님께서는 날마다 우리를 불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품에 있을 때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시 68:13)
본문해설
본문은 갑자기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을 깨면서 앞 뒤 내용과 다른 내용이 들어와서 삽입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시인은 여기에서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는 그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을 황금으로 입힌 비둘기 같도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시를 쓴 사람이지만 우리는 시편의 시를 단지 시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시인일 뿐만 아니라 선지자였습니다. 학문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시편에 나온 상당히 많은 구절들이 주님께서 시인에게 직접 말씀해주신 직접전달에 의해 기술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 부분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이것은 시인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신적 전달의 형태로 선지자의 입을 빌려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는 직접화법이라고 설명해야 타당할 것입니다.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
여기에 보면 비둘기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날개를 은으로 입히고 그 깃은 황금으로 입혔다.”라고 말합니다. 날개를 은으로 만들고 깃털은 황금으로 만들었다고 하니까 이것은 문학적인 비유이지만, 값진 보물로 비둘기를 만든 것을 보여줍니다. 비둘기는 구약에서도 평화의 상징입니다. 또 비둘기는 기쁜 소식을 가져오는 새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와 같은 형체로 임하셨던 것을 보이심은 결코 우연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의 날개를 은으로, 깃털을 황금으로 입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평화를 주시고 지극한 평화 안에서 이스라엘이 존귀한 나라가 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대적과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에워쌌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이스라엘에게 평화를 주셨을까? 앞 뒤 문맥으로 보면 이스라엘을 독수리로 묘사하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가장 힘이 없는 짐승인 비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유하면서 치열한 전쟁을 묘사합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들의 평화로운 상태는 하나님에 의해서 보전된다는 것입니다. “천만인이 에워쌀지라도 나는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시인은 자기를 에워싼 대적들보다 더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신뢰함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천만인이 자신을 에워쌌으나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에 오히려 안연하다고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수많은 대적들이 에워쌌기 때문에 오히려 시인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시는 샬롬을 의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대적을 이기는 진정한 힘이 하나님과의 평화로운 관계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악인은 검불과 같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지푸라기와 같이 불타버리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백성들, 삶의 뿌리를 하나님께 내리고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열왕들이 에워싼 치열한 전쟁 속에서도 결코 두려워하거나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평화로 정복하는 하나님 나라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언약 백성들이 이방나라를 정복하는 비결에 대한 암시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얻기 위해서는 치열한 전쟁을 통해 정복을 하든지, 돈을 많이 벌어서 사든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어진 마음으로 사람들 안에서 살아갈 때, 땅 끝까지 미치는 감화력과 사람들을 다스리는 인격적인 승복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무력과 전쟁을 통해 영토를 넓혔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의 한 모형일 뿐이었습니다. 그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진 지금은 더 이상 창과 칼로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복하면서 세우는 나라입니다. 정복을 하고 난 후에는 잔인한 보복이 뒤따랐지만 그리스도의 왕국은 복음으로 정복한 후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이 모든 평화의 한복판에는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샬롬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공동체임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매순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십니다.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합당한 방법으로 정복하기 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존귀해졌는가? 성경은 “너희가 양 우리에 누울 때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양이라고 부르시고 양 우리를 말씀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강하게 해주신 나라이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양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 우리에 누울 때 하나님이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은혜의 품 안에 있을 때 이스라엘은 가장 존귀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자신이 존귀해지는 법을 압니다. 그 존귀는 세상에서 박수를 받고 많은 사람에게 갈채를 받고 눈길을 끌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은 놀라운 하나님의 통치와 사랑 안에서 그분의 백성의 자리를 잘 지킬 때, 가장 존귀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을 똑같은 그릇으로 사용하려고 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금 그릇처럼 귀하게 사용하고 어떤 사람은 질그릇처럼 덜 귀하게 사용하기도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영광의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영광의 차이 때문에 오히려 그들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아름다운 존재로 여기십니다. 비록 내가 역사의 주연을 맡고 있지 않아도, 주연 옆에서 빛이 흐린 조연이 됨으로써 전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 충분히 존귀한 자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조연으로 살아가는 것이 불만일지 모르지만 자기의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면, 세상에서 더 귀한 그릇이든 적은 그릇이든, 크게 쓰임 받는 것이든 작게 쓰임 받는 것이든, 더 빛나게 쓰임을 받든 흐린 별처럼 쓰임을 받든, 그것은 결국 하나님 당신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기에 각자가 없어서는 안 될 삶의 모양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과 관련해서는 밝기와 크기와 모양이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지정하셔서 우리에게 섭리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양 우리에 누워 주님의 품안에 있을 때, 그 안에서 넉넉한 쉼을 얻고 있을 때, 가장 존귀한 존재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본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게 주님이 지정하신 곳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온전해져가는 모습을 보이며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드러내게 될 때, 하나님은 거기서 그 사람을 가장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만드셔서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왕을 흩으실 때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살몬에 눈이 날림 같도다
바산의 산은 하나님의 산임이여 바산의 산은 높은 산이로다”(시 68:14-15)
불순종하는 이유
13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때에 가장 존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정하신 자리에 온전히 거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하면 좋다는 것을 다 아는데도 불순종하면서 살게 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는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지 못하는 욕망들을 갖기 때문입니다. 죄 된 욕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순종하면서 살면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되고 많은 사랑을 베풀어 주시지만, 욕망이 충동질을 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안온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마음에 정욕이 고르지 않을 때 충동이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품안에서 온전히 거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소극적으로 보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시련과 고통을 만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신다고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우리가 스스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믿음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묵상했던 것입니다. 다른 시편에서 시인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라고 노래했습니다.
열왕을 흩으실 때
“전능하신 자가 열왕을 그 중에서 흩으실 때에는”, 이것은 전쟁의 문맥입니다. 수많은 열왕들이 연합군을 이루어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흩다’라는 것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연합했던 적군들이 전쟁에서 패하니까 살기 위해 혼비백산 흩어지는 그림입니다. ‘살몬’이라는 지역에 높은 산이 있는데, 거기에서 눈이 날리는 것처럼 사람들이 도망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산’은 사마리아 북부 지방입니다. ‘바산의 산’이라는 말을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이북 쪽 산지입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높은 산들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들을 많이 해서 ‘바산의 암소’라는 표현이 선지서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사마리아의 권력자들이나 실력자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바산의 산들이 너희 보기에는 굉장히 높고 여러 개의 봉우리를 가진 거대한 산처럼 보이느냐? 그 산도 하나님의 산이다. 높은 산들이 솟아 있지만 하나님은 그 산보다 더 뛰어나시고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산들도 그분께 복종하느니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산’이라는 것은 인간의 교만에 종종 비유됩니다.
“하나님이 열왕들을 흩어버리셨고, 바산의 높은 산들도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고백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양 우리에 누워있는 양같이 고요하게 그분을 의지할 수 있는 근거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성품과 그 성품이 시행되는 방식에 대해서 더욱 온전한 앎을 가질수록 그것을 알지 못할 때 느꼈던 두려움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양이니 양 우리에 누워 그분의 보호를 받고, 그 안에서 안연할 것이라고 굳게 믿으면서 주님을 의지하며 살 때, 우리는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면 주님이 우리를 높여주실 때 우리의 인생이 가장 높았고, 주님이 높여 주시지 않는데 스스로 교만하여 높아졌을 때는 진정으로 높아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분의 전능하시고 위대한 능력을 신뢰하면서 그분 앞에서 살아갈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장 존귀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양이 우리 안에 누워서 쉼을 얻는 것처럼, 주님의 교회에서 안온하게 진리의 말씀을 먹고 안식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가장 존귀하게 여겨주십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해주실 때 진정으로 높았지, 주님이 우리를 외면하실 때 높았던 적은 없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존귀한 자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여러분을 높이고 존귀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시기하지 말라
“너희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시 68:16)
본문해설
본문에는 “높은 산들아 어찌하여 하나님이 거하시려 하는 산을 시기하여 보느뇨”라고 나옵니다. 시인은 두루 다니며 여행했던 사람이었을 텐데, 여기에 나오는 ‘높은 산’이라는 것은 북쪽 사마리아 지역의 많은 산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앞에 보면 ‘바산의 산’이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산이 어디였는지 우리가 찾아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높은 산들이 하나님이 거하시려고 하는 산을 시기한다고 나옵니다. 이 산은 바로 뒤에 나오는 시내산일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통적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지라고 여기던 시온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열왕들의 교만
이 모든 것들은 보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사실에 대한 하나의 비유입니다. “높은 산들아”라고 할 때, 이것은 열왕들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왕들이 나라를 다스릴 때 그들의 통치 이상(理想)은 자신의 영토에서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성군으로서 자기 나라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이 땅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현해가는 종으로 자처할 때 올바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그 왕국에 의해 이루어지는 도덕적인 질서, 통치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과정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 알도록 해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조차 그것을 훌륭하게 구현하면서 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 이유는 왕들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권력 자체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 방법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않을 때 지도자와 왕은 그 권력을 사용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처럼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를 보면 왕들은 항상 자기 자신을 ‘천자’(天子)라로 불렀습니다. ‘하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왕 자신도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일 수 없고, 하늘의 뜻을 받들 때 비로소 올바른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을 하나님이 일반은총 속에서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고백해도 실제의 삶이 그 고백을 따라주지 않으면 말일 뿐, 실제는 그렇게 구현되지 않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고 나라를 다스려야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아들과 같은 왕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높은 산들’이라는 것은 히브리 원문을 보면 ‘여러 산들’이라고도 나옵니다. ‘여러 산, 높은 산들’이 모든 평지와 산들 위에 높아지려는 것처럼, 세상의 열왕들이 하나님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을 시기하여 봅니다. 세상에 있는 많은 열왕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시기하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통치의 주권을 부러워하고 더 나아가 시기할 때, 그것이 바로 세상의 권력과 임금들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두려우심
하나님은 가장 높은 봉우리에 계시는 것도 아니고 가장 큰 나라를 선택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크기로 해결될 문제일 것 같다면 역사적으로 두세 나라 정도만 선택하셨으면 끝났을 것입니다. 이집트, 중국, 로마 정도만 선택하셨으면 끝났을 것입니다. 만약에 높은 것으로 해결된다면 하나님은 모세를 히말라야에서 만나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열왕들이 하나님이 계신 산, 그것이 시내산일 수도 있고 시온산일 수도 있지만, 그 산이 어느 것이든지 간에 자신들과 같은 높이에 맞추어서 시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작은 동산이라 할지라도 그 산이 높은 것은 봉우리가 높아서가 아니라 높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높음의 의미를 알고 세상에서의 높음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떨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크고 두려우실 뿐만 아니라 어떻게 자비롭고 인자하신지를 언약관계를 통해서 보이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의무는 세상의 다른 나라 백성들의 의무보다 더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벌벌 떠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깊고 놀라운 사랑을 언약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섬기도록 불러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에게는 언약 관계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신 것처럼 당신을 풍부하게 계시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우신지를 알고 떨며 그분에 대해 삼가는 마음만 가져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합당한 복을 베푸셨습니다. 물론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더욱 찬란한 계시의 빛 아래서 언약백성들처럼 주님을 섬기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지식의 층차를 가지고 민족들을 다루십니다.
하나님을 시기하지 말라
로마가 멸망하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로마가 망하게 된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비난을 할 때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최초의 역사 철학서를 쓰게 됩니다. 그는 로마 제국 초창기의 5현제 시대에 나라가 융성하였던 것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일반은총 차원에서 하나님이 현명하고 덕스러운 황제들을 축복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왕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그러면 왕이 아니라 아주 어린 아이들까지도 복음을 싫어하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마음도 있지만, 하나님을 싫어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마음도 인간 속에 본성적으로 내재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하나님을 멸시하고 능가하려는 교만도 본성 속에 함께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라는 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불가해한 존재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에 있는 죄의 본질은 자신을 왕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우주의 중심이고,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라는 생각입니다.
인간의 참된 본분은 무엇이 높은 존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것을 알아 하나님의 판단에 굴복해서 자기 존재의 위치를 정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대로 받아들이고 승복하여 더 높은 가치를 위해 낮은 가치를 희생하고 사는 것이 인간의 참된 본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더 높이고 자신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부인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결국 하나님을 능가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입니다. 열왕의 마음이 모든 인간 속에 깃들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시때때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도록 하기 위해 비참에 처하게 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 속에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큰 어려움 속에 두십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미 있었던 자신의 비참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늘 비참한 존재인데 평소에는 못 깨닫다가 하나님이 큰 고난을 주시거나 어려움을 주실 때 비로소 ‘내가 비참하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생긴 비참이 아니라 원래 그런 존재인데 눈이 가려서 못 보고 있다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으면서 인간은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을 넘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산이 높은 것은 높으신 하나님 때문이니 하나님의 높으심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정말 사랑하고 그분 앞에 겸비하게 되면 하나님이 관계를 맺으신 모든 사물과 사람을 보면서 그 높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교회는 눈으로 보면 작은 건물에 불과합니다. 세상에는 그것보다 높고 화려한 건물이 훨씬 많지만, 주님이 관계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를 높은 곳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성도의 모임이 가장 탁월한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교회와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도들의 모임이 세상의 어느 회합보다 탁월하게 높은 모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큰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은 큰 영광이 되어 돌아옵니다. 세상 나라를 위해 일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권력도 누리고 부도 누립니다.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하찮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일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각도로 주님이 관계를 맺고 계신 모든 것들을 높이 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낮추어 보면서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가치의 질서들을 재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 수 없고 충성스러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이 산에 영영히 거하시리로다” 그러면 하나님은 변함없이 그 산에 거하시며 당신이 거하시는 효과를 나타내시고, 그 산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모든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 높은 사람이 되지 말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높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높으신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에 높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이 보기에 큰 교회, 세상이 보기에 높은 교회가 아니라 주님 때문에 의미 있는 교회, 주님 때문에 높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의 통치와 승리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시 68:17-18)
여호와의 통치
앞 절에서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한 없이 높아지는 인간의 교만을 그렸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교만이 영원히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의 통치와 승리를 보여주며 입증합니다. 나라가 아무리 크고 백성이 많아도 왕이 백성과 나라를 자기 뜻대로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이 없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합방되기 전에 제국이 있었고 황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나라를 다스라는 권력이 없었기 때문에 일제에 빌붙어서 부귀와 영달을 꾀하던 악한 조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명(命) 하나로 죽고 살 신하들인데, 왕이 그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왕의 뜻이 신하의 의해 좌절되었습니다. 신하가 좌절시켰다기보다 신하 뒤에 있는 일본 제국의 권력이 왕의 뜻을 좌절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도 있고 왕이라고 불리고 있어도 사실상 그 나라는 자신이 통치하는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그런 왕으로 보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인간들을 통치하시고 선악 간에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고 만만이라”고 말합니다. 천천이면 백만이고 만만이면 일억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숫자의 나열이 아니라 무수히 많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천천만만의 병거를 가지고 있는 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솔하시는 병사들은 이 땅에 있는 병사들이 아니라 하늘에서 신묘한 능력을 가지고 권세를 위임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데 충성할 종들입니다. 천천만만이 되는 병거가 있으니 병사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이것이 하늘의 천군과 천사입니다.
시인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제일먼저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고, 성막이 완공되었을 때 그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충만했습니다. 이와 같이 성소에서 종교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가 그분이 다스리시는 천군천사들 가운데 동일하게 임재 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고 강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큰 능력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곤경에 처했을 때는 하나님이 여기에서 자신을 건져주실 수 있다고 믿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여호와의 승리
18절에는 전쟁에서 이기고 난 다음, 승전을 축하는 행사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주께서 높은 곳으로 오르시며 사로잡은 자를 끌고 선물을 인간에게서, 또는 패역자 중에서 받으시니” 이것은 전쟁이 끝났을 때,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외국의 사절들을 맞이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포로들을 사로잡아 끌고 옵니다. 한때는 반역하던 자들이 이제는 사로잡혀서 무장해제 된 채 끌려오는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수많은 물건들을 탈취하고 나라들에게 선물을 받고, 패역자 중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위대한 분이시라는 고백을 받아냅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려 하심이로다”라고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시고, 큰 능력으로 하나님 자신을 대적하고 악을 행하는 자들을 다스리고 통치하시기 위해 이 땅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결론과 적용
신자의 본분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살아계심을 깊이 깨닫고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본분이요 행복입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자들은 심판하시고 교만한 자들을 낮추십니다.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지만,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당신이 직접 세상을 당신의 뜻에 맞게 온전히 통치하실 그 날을 바라보시면서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신앙의 사람들은 이 일들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높아질 때 낮아질 수 있고, 교만해지려고 할 때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하고 박해를 당할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여호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그 원수의 머리 곧 그 죄과에 항상 행하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치시리로다”(시 68:19-21)
우리의 짐을 지시는 여호와
본문에서 시인은 하나님이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분이시라고 묘사를 합니다. 하나님과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참여하시면서 당신도 고통 속에서 성숙해간다는 현대 신학자들의 신관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현대사상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언약백성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많은 고통 안에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것 같은 신앙적인 친밀함과 약속의 실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언약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시련과 괴로움을 겪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고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당신의 주권으로 간섭하고 계시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큰 고난을 겪고, 사회적인 시련이 다가오고, 불의가 가득할 때 하나님은 어디계시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현장에 함께 계십니다. 시인은 언약 백성이었습니다. 언약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무한한 보호와 인도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난을 당하고 큰 시련을 당할 때, 역사 속에 개입하여 건져주셨던 많은 역사들을 회상하면서 그것이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하신다기보다는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와 맺은 언약관계를 기억하시고 그 상황에 계셔서 구원 행동을 통해 우리를 건져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와 함께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언약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체결된 약속과 언약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지만 언약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의 놀라운 성품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보이시는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창조된 세계에는 수많은 자연 피조물들이 있습니다.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흙으로부터 시작해서 인간을 제외한 동물에 이르기까지 세상은 생명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보존하시고 유지하심으로 그 모든 것들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희미하게나마 그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더 놀라운 흔적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동물들에게 간섭하실 때는 육체와 관계를 맺으실 뿐이지만, 인간에게는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당신을 닮은 성품, 속성들을 찬란하게 비춰주십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성품의 아름다운 빛을 비추는 매질(媒質)이라고 한다면 인간은 이중의 매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뿐 아니라 영혼이 어울려 작용하는 특별한 존재로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당신의 아름답고 놀라운 속성의 빛깔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 중에서도 그 한 가운데 언약백성들이 있습니다. 이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운 속성을 더욱더 찬란하고 아름답게 비추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주님과의 언약관계 속에서 생활하고 보니, 내가 불신자일 때도 하나님은 내 인생에 간섭하시고 나를 버리지 않고 찾으셨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언약백성이 된 후에는 날마다 당신의 사랑으로 채우시고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며 살게 만드는 하늘의 자원을 베푸십니다. 신묘막측(神妙莫測) 한 하나님의 작용과 성품의 역사는 우리가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인간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가능하고, 더 넓게 확장하면 세상 모든 만물도 주님을 경배할 터이지만, 고유한 의미에서 주님을 진정으로 찬송할 수 있는 특권은 언약백성들에게만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이 교회의 한 몸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시인도 주님을 몰랐더라면 자신의 인생에서 당하게 되는 수많은 괴로운 일들과 고통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거나 원수의 짓궂음과 행패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모든 고난에서 자기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행동을 우리의 짐을 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줍니다.
철이 든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엄마. 아빠.” 하다가도 칭찬하면 우쭐해지고, 책망을 하게 되면 삐치는 것이 애들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깊이 성숙하게 됩니다. 그러면 엄마가 밥 한 숟가락을 먹여줘도 그게 밥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들여있는 엄마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한일합방 백주년 때, 신문의 사진 한 장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대동아 전쟁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끌려가기 전 마지막으로 면회를 했던 모양입니다. 총을 메고 가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전쟁터로 보내면서 마지막으로 전송을 온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시집 장가를 일찍 갔습니다. 저희 할머니가 열여섯에 시집을 가셔서 열일곱에 우리 아버지를 낳으셨는데, 애가 스무 살 정도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엄마는 많아봐야 사십 정도 밖에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 보니까 바싹 늙은 할머니입니다. 할머니 같은 엄마가 그윽한 눈빛으로 살아 돌아올지 어떨지 모르는 가운데 전쟁터에 아들을 보내면서 마지막 선물을 주는데, 두들겨 맞아서 찌그러진 밤송이 같은 양은그릇에 물 한 사발을 떠서 아들의 입에 올려 줍니다. 그 사진을 보는 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냉수 한 그릇을 받아도 자신에게 냉수를 건네는 어머니의 마음 안에 있는 성품, 볼 수는 없고 만질 수는 없지만 자식과의 관계를 통해서 발현되는 어머니의 마음을 느끼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드러나는 증거가 없을 때도 자신을 향한 성품 때문에 어머니, 아버지가 살아계신 것에 감격하는 마음이 참 효도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근본은 하나님 한분께 모두 수렴되는 것입니다. 교리가 모두 중요하지만, 하나님에 관한 교리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으로 집약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시 삼위일체의 아름다움으로 집약이 됩니다.
죽음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본문에는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들을 사망에서 구원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망’이라고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육체의 죽음입니다. 육체가 죽는 것이 사망입니다. 두 번째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신약에서처럼 영혼에 대한 멸망의 개념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스올’이라는 말로 영혼의 죽음을 표현합니다. 사람들이 죽은 후에 들어간다고 믿었던 ‘스올’이라는 곳은 완전한 생명의 박탈이나 멸절이라기보다 살아있을 때의 생생한 활기를 잃어버리고 희미해지고 침체에 빠진 죽음과 방불한 상태입니다. 세 번째는 육체를 입고 살아가는 현실에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야곱이 요셉을 잃어버리고 “음부로 내려가는 것 같다.” 라고 노래합니다. 살아 있지만 너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와 생명이 끊어진 상태에서 죽은 자와 방불한 삶을 사는 것이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육체가 죽을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주십니다. 시편 73편에서는 생명의 기운을 잃어버린 때도 거기서 하나님을 뵈옵는다는 고백을 보게 됩니다. 욥기에 나오는 증언을 보면 그에게도 이런 신앙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육체 밖에서 나의 중보자를 뵈오리라.”
하나님께서는 현실의 삶속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생기 없음과 좌절 속에서 새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은 언약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던 원수들의 정수리를 하나님이 깨치실 것이라는 담대한 선언으로 이 구절을 마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약백성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하든, 고난을 당하든, 우리가 악에 빠져 미끄러졌을 때든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맺은 관계 속에서 그분의 속성의 찬란한 빛을 보이십니다. 그를 통해 이전에는 몰랐던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감사하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시행되는 방식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더 알아갑니다. 거기에 우리의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믿음은 바로 그 지식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원수에게서 분깃을 주심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시 68:22-23)
언약백성들에게 주시는 복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이방 원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백성들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하신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바산’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날 때 길을 열어주지 않아서 전쟁을 해서 대파(大破)했던 나라입니다. 바산과의 전쟁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커다란 패배와 죽음을 안겨줄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들을 훌륭하게 격파하고 이겼습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바다 깊은 데서 나오는 경험은 출애굽에서 잘 나타납니다. 물이 양쪽으로 벽이 되어 서고 그들은 그 사이로 난 마른 땅을 걸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들을 향한 도륙과 승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옛날의 전쟁은 창으로 찔러 죽이고 칼로 사람을 치는 형태의 전쟁이었습니다. 당시에도 폭탄과 유사한 불덩어리들을 폭격하는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전쟁기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나게 발달했습니다. 사람들은 칼과 창끝에 죽어갔습니다. 커다란 전쟁을 치를 때면 땅에 피가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가면 벽이 이중으로 되어있습니다. 오스만 터키제국에 의해 망할 때 사람들이 절벽과 같은 높은 성벽을 넘어오고 넘어오는 이들을 막기 위해 화살을 쏘고 창으로 찌르는 전쟁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성벽과 성벽사이에 시체가 쌓여서 시체를 밞고 건널 정도였고, 성벽과 성벽사이에는 피가 도랑같이 흘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도륙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을 해하고 악을 행하려고 했던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피로 다스렸음을 보여줍니다.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는 것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쾌하게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저는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는 말씀을 혀의 재주,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 전쟁을 피할 수 없을 때 외교로 그 상황을 극복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돌려주시기 원하는 분깃들을 찾아내는 복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봅니다.
본문에서는 네 가지 복이 등장합니다. 정치군사적으로 이길 수 없는 바산에서의 승리와 바다 깊은 곳에서 다시 건져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이스라엘을 향하여 악을 행하고 도전하는 무리들을 징벌하되 그들의 피가 흥건하여서 발을 잠글 정도의 완전한 파멸과 승리, 그리고 외교 기술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분깃의 축복, 이 모든 것 중 어느 하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래의 장점이나 힘으로 획득한 것은 없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에 헌신하셨기 때문에 생겨나는 복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 강력한 능력과 큰 권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소극적인 순종, 적극적인 순종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행사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실제 우리 삶의 많은 불순종,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살지 않는 삶, 이것들이 어디서부터 오는지 생각하도록 만들어주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사는 우리의 삶은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으로 나뉩니다. 소극적인 면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적극적인 면이 필요한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사도요한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킬 뿐 만 아니라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소극적인 원리만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잘못해야 죄인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적극적인 면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자유가 주어져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을 돌릴 수 있는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토레이 신부님의 할아버지가 되시는 토레이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1900년대 초, 미국과 영국사회는 집을 지으면 지하나 일층에 무도시설을 만드는 것이 부유한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밤이면 술을 먹고 서로 춤추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도 한때는 부자들이 지하에 바를 만드는 것이 유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토레이 목사님은 거기에서 춤을 추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술을 먹지 말거나 모여서 춤추는 것에 대해 금지하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있냐고 사람들이 반론을 제기할 때, 토레이 목사님은 기독교인의 윤리의 한 기준을 독특하게 제시하셨습니다. “성경은 술을 먹는 것도 금하지 않고 있고, 춤을 추는 것도 금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과 중생한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영혼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밤중에 남녀가 모여서 부인과 남편을 바꾸어가며 살을 부대끼고 은밀한 불빛아래서 춤을 추는 것이 성경에 금지가 되어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확신이 나에게는 들지 않는다.”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 사람들은 흔히 ‘어디까지 해야 죄가 되지 않나?’를 생각하지만, 토레이 목사님은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그것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인 기준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로 주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버리는 것이 옳다는 새로운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
우리에게 일어나는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은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이 나를 충분히 지켜주시며 내 인생이 그분의 수중에 있고, 내가 믿음대로 살면 그분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결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수하시는 방법은 은혜로운 방법이고, 우리가 우리를 간수하는 방법은 대부분 신앙의 원리를 파괴하는 방법입니다. 더욱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사랑과 순종의 마음이 없을 때, 우리가 우리를 위하는 대부분의 방법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방법과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정당한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을 얻기보다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바깥에서 복을 얻으려고 할 때, 거기에 수많은 악들이 생겨나고 삶 전체가 하나님이 주신 언약의 원리에서 왜곡되어 가는 것입니다.
경건한 시인들이 세파(世波)를 이기며 살아갔던 방법을 생각해보십시오. “천만인이 나를 치려고 에워쌀지라도 나는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이렇게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방백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우리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낫도다.”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라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당신의 언약관계에 충실하실 것임을 굳게 믿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도와주지 않거나 나를 소외시키실까봐 떨지 않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언약관계에서 이탈한 사람이 되거나 주님의 법을 멀리 떠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거기계시고 우리가 여기 있어서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닌 우연적인 것들입니다. 종교개혁가 ‘츠빙글리’는 화해의 약속을 깨고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자신의 마을을 쳐들어오는 카톨릭 군대들의 소식을 듣고 여행하던 길에서 급히 돌아와 ‘카펠’이라는 곳에서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됩니다. 숫자 자체가 세배가 되는 적군이었기 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사위와 아들과 함께 거기서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죽어 가면서 자기를 끌어안고 있는 병사에게 말했습니다. “단지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목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것이라면 그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생명까지도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 아니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에게 없는 것, 모자란 것, 부족한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너무 많이 생각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오히려 주님이 이제껏 나에게 주셨던 것,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주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 때로는 살아가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난을 당하기는 했지만 항상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십시오. 알 수 없는 당신의 섭리 속에서 때로는 우리를 홀로 두시는 것 같아도 그분은 언약관계에 충실하고 헌신하신 분이었습니다. 언제나 그 언약관계에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굳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건져낼 수 없는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이길 수 없는 적들을 멸하시며, 극복할 수 없는 난관들을 이겨 나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행차 하실 때에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시 68:24-25)
하나님과의 언약관계
22절에서부터 24절은 하나님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장면을 노래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겪는 시련과 고난에 함께 동참하셨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관계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분명한 언약관계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해주시는 것입니다. 언약관계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라와 나라사이에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나라와 나라 사이에 상호방어조약이 맺어집니다. “이 나라를 공격하면 우리나라를 공격하는 것으로 알겠다.”라고 해서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되는 것입니다. 언약관계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전쟁이 났을 때의 경우이지만, 전쟁이 아닌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포괄적인 언약관계를 맺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특별히 간섭하십니다. 간섭하고 역사하시는 일들 속에서 당신의 성품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언약관계입니다.
하나님이 행차하실 때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여기에서 ‘저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저희’는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행차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왕의 친전(親戰)을 가리킵니다. 나라가 크고 작은 많은 전쟁을 치릅니다. 전쟁은 모두 다 중요하고 나라의 안위와 관계되어있지만 모든 전쟁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남해안에 조그마한 외적의 무리가 몰려 왔다더라, 격퇴하려고 사람을 보냈다더라, 그런 것은 나라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정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전면전이 시작이 됐다든지 나라의 존망이 걸린 중대한 전쟁이 있게 되면, 이것은 나라의 운명을 갈라놓는 전쟁이 됩니다. 이때 왕이 친전을 합니다. 왕이 친히 그 전쟁에 나서는 것입니다. 왕 자신이 전투에 도움이 되는지 확신은 없습니다. 왕이 전쟁에 나가게 되면 수많은 군대들이 왕을 에워싸야 될 것 아닙니까? 대신에 병사들에게 있어서 그 사기는 굉장한 것입니다. “왕이 친히 우리의 전쟁에 임하셨다.” 이러한 왕의 친전의 그림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왕이 친전하면, 병사들이 왕을 보호하기 위해 정신을 많이 빼앗기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니까 전쟁터에서 전사하거나 패배할 위험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전쟁에 임재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쟁을 주도하셔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이런 기록은 구약에서 많은 역사적인 증거를 가지고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나타나십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바다의 심히 깊은데서 건지시고 피에 발을 잠그게 하고 혀로 원수에서 각각 제 분깃을 얻게 하는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친히 전쟁에 행차하셨기 때문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맺는 영적인 관계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전쟁에 임재하십니까? 본문은 “성소에 행차하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성소는 성막 안에 있는 작은 방입니다. 열여덟 평정도 되는 공간을 삼분의 일과 삼분의 이의 크기로 잘랐을 때, 삼분의 일 크기의 방이 지성소이고 그 배의 크기의 방이 성소입니다. 성소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넓게는 주님이 찾아와 주시는 회막을 가리켜 성소라고도 부릅니다. 결국 “하나님이 행차하셨다.”라고 하는 것은 “왕이 성소에 행차하셨다. 성막, 성전에 주님이 오셨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매우 특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뜻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블레셋과의 전쟁이 있습니다. 아벡의 전투입니다. 그 때,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법궤까지 갖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결국 법궤도 빼앗기고 전쟁에서도 패배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에 관한 종교관을 완전히 뒤바꾼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법궤도 빼앗기고 전쟁에도 패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그때 커다란 각성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여호와를 믿는 종교는 그런 의식에 붙잡힌 종교가 아닌, 영적종교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법궤가 아무리 거룩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지만, 여호와가 우리를 기뻐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맺는 영적인 관계가 의식적인 종교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본문에서 묘사하고 있는 전쟁은 하나님이 백성들을 특별히 사랑하셔서 임재하사 이기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러한 전쟁에 돌입할 때가 수없이 많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삶 전체가 끊임없는 영적전쟁의 연속입니다. ‘이런 영적전쟁의 연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가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옵니다. 세상에는 환란과 시련, 많은 유혹의 태풍이 불어도, 주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연약한 것 같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신앙의 성소에서 그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
“소고 치는 동녀 중에 가객은 앞서고 악사는 뒤따르나이다”, 전쟁이 끝나서 개선의 행진을 하는 모습입니다. 유사한 행진이 언제 일어났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언덕에 모두 모여서 미리암의 소고에 맞춰 “여호와와 같은 분이 어디에 있느뇨” 하는 유명한 찬송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 찬송이 온 홍해 바다위에 두루 퍼졌습니다. 옛날에는 어느 나라든지 다 마찬가지입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나라를 위해 싸운 이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보내는 행사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것을 보여줍니다. 전쟁에서 이겼을 때 소고치는 여자 아이들 중에 노래 부르는 사람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은 뒤따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많은 승리가 있으면 찬송은 저절로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승리하는 삶은 승리 그 자체를 위해서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 차게 하기위해 더욱 필요합니다. 온 마음을 모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 자체를 영적인 전쟁이라고 여기고 이길 수 있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소에 행차하신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시련이 많고 영적인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될 때 성령에 의해 말씀과 기도로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자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찌어다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시 68:26-27)
이스라엘,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
본문은 전쟁 중에 하나님이 임재 하셔서 승리하게 하신 경험을 노래한 다음,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복에 대해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라고 말합니다. 원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함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 개명하게 된 사건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밧단아람에서 돌아와서 형을 만나고자 할 때 그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을 먼저 보내고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기도합니다. 거기서 천사와 더불어 씨름을 하는데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아집인 것을 깨닫고 울며 회개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꿔주십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뤄서 이겼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겨뤄서 이겼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결국 하나님 앞에 자기방식대로 살던 삶을 회개하고 뉘우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자의 위대함을 보여준다기보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찾아오셔서 그를 용서하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언약적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자식을 기릅니다. 어떤 때는 자식들이 부모 마음에 들 때도 있지만 부모 마음에 어울리기는커녕 고통을 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자식은 부모를 버릴 생각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부모는 자식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녀와 부모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왜 유독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시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언약관계를 기초로 놓고 보면 ‘이스라엘’은 또 다른 의미로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뜻이 두 가지로 나눠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원에서 많은 자손들이 나옵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서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찌어다” 그들이 모두 모였을 때, “너희들은 하나님을 송축하고 찬송하라. 주님을 경배하라.”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사람들이 대회 중에서 하나님을 송축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때 맺으신 언약을 지금도 계속 지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후로도 수많은 국가적인 전쟁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해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전쟁 같은 삶을 끊임없이 살아가지만, 거기서도 하나님은 늘 함께하셔서 당신의 크고 놀라운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는 저희 주관자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방백과 그 무리와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의 방백이 있도다”라고 나옵니다. 저는 왜 열두지파 가운데 네 지파 정도만 거론이 되었는지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찾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거론하면서 지도자들을 거론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방백’이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파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지파는 각각 달라도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후손들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언약관계에 대한 충실하신 하나님의 태도와 관계는 어느 한 지파에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파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유다가 중요한 지파이긴 했지만 작은 베냐민 지파에게도 나타났고 스불론의 방백과 납달리 방백에게도 나타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 언약관계 안에서 그들을 지키시고 붙들어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시는 것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놀라운 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행하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모든 삶에 개입하신 것입니다. 나는 혼자이고 하나님이 자신을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없을 때조차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붙들어 주셔서 당신을 위해 살도록 만드시고 보호하고 지키십니다.
결론과 적용
인간은 사람이기 때문에 약속을 어기기도 하고 식언하기도 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주님은 인생이 아니시기 때문에 후회도 없으시고 식언하지도 아니하시고 말씀을 신실하게 끝까지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의 관건은 변함없으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떻게 반응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 한분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잘못했을 때는 돌아가서 용서를 빌고 다시 은혜를 받고, 바르게 살아가지만 힘이 없을 때는 주님께 간구하여 바른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야할 바인 것입니다.
견고케 하소서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시 68:28)
힘의 원천, 하나님
본문에는 짤막한 탄원이 나옵니다. “네 하나님이 네 힘을 명하셨도다” 사람들이 힘을 얻는 방법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힘을 빼앗거나 다른 사람에게 있는 물질을 취해서 자신의 힘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힘을 명하시기만 하면 힘이 생기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시인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자주 자주 회상했습니다. 시편 121편에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떤 도구나 누구의 힘을 빌리지 않으시고 명하시자마자 세상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이 모든 능력의 근원이요 힘의 원천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 도구 없이도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면 강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일상생활 속에서도 경험했고, 전쟁의 역사 속에서 더 잘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질 수 밖에 없는 전쟁에 주님이 친히 임재 하셔서 승리하게 하실 때도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견고케 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인의 삶은 본질적으로 영적전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서 하나님의 힘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고 매달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히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명하시면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이길 수도 있고 위기도 극복할 수도 있고 큰 시련에서 승리할 수도 있습니다. 이김과 승리, 극복, 계속해서 그런 상태에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힘에 부친 물건을 열심히 굴려서 언덕까지 올렸다고 합시다. 더 이상 구르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많은 힘이 필요합니다. 한번 난관을 극복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난관을 극복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더 큰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에도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지 성화의 실천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불신자가 신자가 되는 것도 기적이지만 신자가 된 사람이 신자다운 신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일평생 견고케 하시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사실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창조하신 세계를 붙들고 계시는 유지자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 이긴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그들을 강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영할 때나 가난할 때나, 난관에 처할 때나 형통할 때나,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 두시고 당신의 이름을 빛내며 살게 하시기 위해 구원해주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답게 살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붙드시는 은혜로 매일을 살아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릴 때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시 68:29-30)
전쟁을 통해 가르치심
갑자기 시편 기자의 관심이 성전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다시 전쟁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여러 전쟁을 치렀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테스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자신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하나님은 숨기지 않고 항상 가르쳐주셨습니다. 선지자를 보내어 “너희들은 이것이 잘못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너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통해서 그들의 실상을 보여주실 때 깊이 각성하고 깨닫고 뉘우치면 용서해주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다른 일들을 통해서도 보여주시지만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전쟁은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쪽은 바다에 접하고 있고 삼면은 모두 다른 나라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옛날부터 외교에 있어서 기본은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원칙입니다. 먼 나라와는 수교를 해서 친밀하게 지내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하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교통이나 통신, 무기가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먼 나라는 이해관계가 적고 가까운 나라는 이익과 직접적으로 관계됩니다. 영토 분쟁을 비롯해서 많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삼면이 다른 나라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위에서는 남하해서 내려오는 북방세력이 있고 남쪽에서는 치고 올라오려고 하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강대국 블레셋이나 애굽이었습니다. 요단강 건너편에서는 작은 종족들이 기회를 노리다가 이스라엘을 공격하거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맺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언약관계가 어떠한지 그 상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이야기를 하다가 전쟁이야기가 나오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림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이 구절을 놓고 두 가지로 해석이 갈립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확장해서 많은 나라의 왕들이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에 “주께 예물을 드리나이다”라고 되어있는데, 속국이 예물을 드릴 때 그들은 신앙이 없기 때문에 주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왕께 드리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이 하나님이시니까 그분께 봉헌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자연스러운 해석은 이 ‘왕들’이 이스라엘의 왕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여러 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를 물려가면서 왕들이 하나님을 공경하며 올바르게 주님을 섬기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는데 이 시의 저자인 다윗은 성전을 짓기 위해 일평생 동안 어마어마한 물질을 모아 하나님께 드립니다. 옛날에 누군가가 칠판에 계산을 하면서 보여주었습니다. 금 한 돈에 오만원이라고 쳤을 때 삼백조 원어치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이십만 원이니까 천조가 넘는 어마어마한 돈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드리고 왕들이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적들을 꾸짖고 흩으심
여기에 나오는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는 자기 분수를 모르고 뛰어다니는 짐승들입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훼방하면서 해하려고 하는 무리들을 가리킵니다. 그 짐승들이 곡식을 해치고 농사를 망치는 것처럼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신앙의 열매, 의의 열매를 맺어서 그분께 영광돌리고자 하는 일에 방해를 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이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입니다.
“은 조각을 발 아래 밟으소서 저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은 조각’은 왕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왕족들은 예나 지금이나 은그릇과 금그릇을 사용합니다. 은은 여러 독성물질을 제거하는데 유용합니다. 우황청심환을 보면 금색 껍질로 싸여 있는데 이것이 진짜 금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먹으면 속에 있는 중금속 같은 것들과 함께 몸 밖으로 배출이 됩니다. ‘은용수’라고 해서 은을 녹인 물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은은 왕국의 영광의 상징입니다. “그것들을 밟아버리십시오.” 이것은 “당신의 나라에 대적하는 자들이 당신의 영광을 훼방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밟아주십시오.”라고 시인은 하나님 앞에 탄원합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 우리의 모든 삶은 전쟁입니다. 다 감지하지 못할지라도 우리의 삶은 매순간 이기고 지는 영적 싸움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이기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패배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승리가 어디에서 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너희의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곧 나를 믿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고 그분을 의지하는 신앙만이 우리가 승리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마음속에 주님을 경배하는 성전이 올바로 서있을 때 우리는 그분을 힘입어 늘 이기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드는 사람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열방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찌어다”(셀라)(시 68:31-32)
하나님이 만민을 꾸짖으시는 방법
앞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밟으셨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민의 송아지들을 꾸짖으시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소극적인 방법으로는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희가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민족의 위대한 힘이 그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소극적인 방법입니다. 적극적인 방법은 선교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감화를 받아서 그들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앙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민이 하나님을 인정함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방백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이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이 됩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처지에 있었는데, 그 인물들 중에서 방백이 나왔다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애굽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함께 따라 나왔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해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구스인은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사람입니다. 그들은 흑인입니다. 그들이 왜 손을 듭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을 올리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지간에, 30절은 하나님이 만민의 송아지들을 꾸짖으시는 커다란 그림을 보여준다면, 31절은 전쟁만이 아니라 선교적인 방식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출애굽기 12장에 증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중다한 잡족들이 따라 나왔다고 되어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에레브 라브’인데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따라 나왔다는 것과 함께 많은 종족들이 따라 나왔다는 뜻입니다.
애굽의 역사를 보면 고왕국 시대, 중왕국 시대, 신왕국 시대로 나눠집니다. 여러 가지 이설(異說)들이 있기는 하지만 가장 표준적인 학설은 토착민족인 애굽의 왕조가 끊어지면서 그 사이에 왕조가 하나 세워지게 됩니다. 이민족(異民族)에 의해 세워지는 왕조입니다. 역사적으로 ‘힉소스’(Hyksos) 왕조라고 합니다. 토착민족들이 정권을 잃어버리고 이민족이 쳐들어와서 애굽의 왕권을 세우고, 애굽은 잠시 토착민에 의한 지배가 끊어집니다. 이때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노예들에 대한 처우가 조금 달라집니다. 그들이 정치적으로 어떤 노선을 택했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이민족들이 공정한 기회를 얻어서 관직에도 나아가고 권력들을 분점해서 토착세력을 누르려고 했을 것 아닙니까? 옛날에는 혈통이나 품계를 훨씬 더 중요시 했는데, 요셉과 같이 노예로 있던 사람이 아무리 큰일을 했다고 해도 어떻게 한 번에 국무총리까지 등용될 수 있었겠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토착민족에 의한 지배가 잠시 끊어진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펼치셨던 열 번의 대 재앙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해 회심한 사람들이 노예들 중에만 있었고 방백들 속에는 없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 많은 여호와 신앙을 따라서 이스라엘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엄격한 혈통에 의한 공동체라기보다는 믿음에 의한 공동체입니다. 믿음을 통해 공동체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갈렙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전쟁을 했는데, 그는 혈통적으로 보면 가나안의 후손 즉, 그니스 족속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다지파에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지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직계적인 혈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린교회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개척교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선교적 공동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공동체는 선교적 성격을 띠었습니다. 그 안에서 애굽의 방백들도 주님을 찬송할 수 있고 구스 사람들도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셔서 혁혁한 승리를 이루시는 정치적인 승리, 군사적인 승리, 심지어 가나안 정복의 과정까지도 선교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축복의 개념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구속사적으로 전승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복과 놀라운 은혜는 우리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영적인 축복을 보여주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를 원하시는 선교적인 동기와 목적을 잘 보여줍니다. 육체의 껍질 속에 영혼이 있는 것처럼, 외적인 축복 속에 담겨있는 영적인 축복의 의미들을 공정하게 이해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양한 복을 주실 때, 주신 복들을 흘려보내고 많은 사람들이 신앙으로 들어와서 선교적인 목적을 함께 이루는 것이 복을 주시는 이유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이루어졌을 때의 그림도 수많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광경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해석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 능력이 하늘에 있도다 아멘”(시 68:33-34)
본문해설
본문은 과거에 하나님이 큰 능력을 발하셔서 이스라엘을 지키셨던 일들을 회고한 후,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자에게”라고 했는데 ‘하늘’이라는 것이 원래 복수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들의 하늘’이라는 표현은 성경에 몇 번 나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다음에 하나님께 봉헌 기도를 드리는 가운데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용납할 수 없거든 하물며 사람이 지은 성전이겠습니까” 하면서 하나님을 노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심과 광대하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그저 단순한 복수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있는 복수라고 봅니다. 유대인들이 하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점들과 관계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우주를 가리키는 하늘과 눈으로 볼 수 있는 파란 하늘을 가리키는 하늘이 다릅니다.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늘이 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이 있는 하늘이 있고,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이 있습니다. 하늘에 대한 다중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하늘이든지 하늘들의 하늘을 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무엇 중의 무엇’이라는 표현은 최상을 의미하므로, 하늘들이 많다고 하더라도 하늘 중에 가장 높은 하늘일지라도 그것을 타신 자가 하나님이니까 그분을 찬송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답이 나옵니다.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할 때 앞에 ‘하늘들’이라는 복수가 다칭적인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뒤에 있는 ‘하늘’은 주님이 친히 거하시는 가장 거룩하고 초월적인 곳으로서의 하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탄다’라는 단어는 전쟁에서 군인이 말이나 병거를 탄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탔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대로 그것을 지배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말의 절대적인 크기와 힘에 있어서는 인간이 비할 수 없이 강하지만, 일단 유능한 군인이 올라타서 발길로 옆구리를 차고 달리기 시작하면 말의 큰 힘이 줄 두 개에 의해 기수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속도, 방향, 정지, 운동, 모든 것이 기수의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동일하게 하나님이 하늘들의 하늘을 타고 하늘들을 움직이시고, 하늘과 관련을 맺고 있는 땅을 움직이십니다. 삼라만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것이 없지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움직이고 멈추게 하시고 방향을 정하시기를 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천체로부터 시작해서 가장 어린아이의 마음까지도 당신 수중에 놓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께서 그 소리를 발하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여기서 ‘소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장수가 부하들에게 우렁찬 소리로 명령할 때 그 명령 하나에 대군의 진들이 움직이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외치실 때 웅장한 소리가 들리면서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이 움직인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건으로 당신의 속성을 드러내시는 하나님
애굽을 물리치고 구스 사람들을 물리쳤던 전쟁에서의 놀라운 승리의 역사를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심히 싸워서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앙적인 시야에서 보면 저 위에 하나님이 하늘들의 하늘을 타고 우렁찬 소리를 발하시면서 하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세상의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와 관계를 안 맺으신 적은 없지만, 특별히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관계를 드러내신 것이 그들을 위한 구원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사건이라는 것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입니다. 그 의미들이 풀어지면서 이해될 때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찬란한 지식의 빛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이 해석되고, 해석된 의미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을 대적하고 있는 이방에까지 알려지게 될 때 사람들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지고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누구이신가 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오고 그들을 통해서 이방사람들에게 전해집니다.
해석하는 능력, 신앙
이 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당신의 속성을 보여주시는 수단이 됩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해석이 필요합니다. 그 해석은 이성만으로는 안 되고 신앙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당신을 보여주셔도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 사건들을 통해 당신이 누구신지 보여주는 지식의 빛을 품지 못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품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훌륭하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내면의 세계가 주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앙망으로 가득 차 있고, 삶이 하나님 앞에 순전하여 복종하며 사는 사람들을 그것을 잘 발견합니다. 작은 사건에도 감격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기도도 안하고 신앙에서 물러가 있고 둔해지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해 큰일을 해주셔도 감사가 안 나옵니다. 어려운 일이 일어나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마음이 굳어지고 완고해지니까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쪽으로 해석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가 충만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사랑의 성향은 믿음의 성향입니다.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행하거나 생각했을 때, 그것을 의심하면서 나쁜 방향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믿는 성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과 믿음의 관계를 해석할 때 그것을 엄중하게 분리하려고 하는 시도는 잘못된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사랑과 믿음을 분리했던 접근의 방식에 대해 그 뜻은 이해하지만 깊이 동의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조그만 사건이 일어나도 너무 감격하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만원 한 장만 생겨도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내가 궁핍한 것을 아시고 나에게 만원을 주시는구나. 정말 감사하다.’ 심지어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만원을 잘 쓸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런 마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바로 해석의 능력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보여주셔도 사람에 따라서 그 해석의 층차가 엄청나게 다릅니다. 그런 것들을 풍부하게 해석해낼 수 있게 될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빠르게 마음에 축적되어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것을 책망을 받아야 한다.” 그런 생각을 나무라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떻게 보면 주님의 도움 없이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책망하시는 것은 해석적인 능력이 우리 지신의 상태에 많이 달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개입하셔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들을 성취해가고 이루어가십니다. 그것을 통해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찬란하고 아름다운 속성들이 얼마나 많이 발견됩니까? 그 속성들을 따라 우리가 살아가려고 할 때 그 안에 놀라운 행복이 있습니다. 미워할 때는 그렇게 마음이 고통스러운데 온 힘을 다해서 자신을 꺾고 그를 용서할 때 놀라운 자유가 주어지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 속성을 따라 사는데서 오는 자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진리가 쑥 들어와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수단에 불과합니다. 주님께로부터 파생되는 가르침이 진리라고 한다면 엄밀하게 말하면 그 진리는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과는 구분이 됩니다. 나누어질 수는 없지만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만, 말이 곧 그 사람은 아닙니다. 그 진리를 파생적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자신이 진리 자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진리는 가장 효과적으로 하나님 자신에게로 인도하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파생적인 진리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이 자유로워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늘 개입하셨던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는 과정 뿐 아니라 때리고 책망하는 과정을 통해서도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라고 하는데, 능력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능력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사에 일어났던 크고 놀라운 일들이 하나님의 신적인 능력을 기반하고 있음을 통해 능력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위엄에 대한 찬송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위엄을 경험하면서 이방이 두려워 떨고, 하나님이 얼마나 엄격하시고 모든 만물들 위에 뛰어나신 분이신지를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온전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질서 없이 행동하고, 심지어는 교회에서 싸움을 하는 모든 것들은 그 사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동안 교회에서 얼마나 봉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기반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순간 그것들을 다 드러내십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없고, 각 사람의 마음에 진리가 심겨져서 주님의 영광과 위엄을 알고 그 앞에서 인간의 분수를 아는 것이 몸에 베인 상태가 경외의 상태입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교회를 통해 얻는 유익이고, 진정한 신자가 진리로부터 받는 영향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통해 주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우리 위에 뛰어난 위엄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분께 모든 것을 돌려드리면서 복종하며 사는 해석의 능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성소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시 68:35)
본문해설
이 시의 결론입니다.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보역을 한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성소에서 위엄’ 이렇게 나옵니다. 이것은 시이기 때문에 동사가 생략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라는 것은 “당신은 당신의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옵소서.” 아니면 “하나님이여 당신은 위엄이십니다.”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의 희구법으로 “하나님이여 당신은 소망을 나타내시옵소서.”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가장 좋지 않나 생각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큰 위엄을 성소에서 보고 싶어 했습니다.
성소에서 위엄을 보이시는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는 것과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그분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서 나타나는 것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과는 상관없이 주권적으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세상에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믿음이 있는 곳에 나타나셔서 당신의 큰 능력을 보이십니다. 여기에서 ‘위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대하고 높으심, 자기의 길을 행하심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타협받지 않으시는 주님의 존재의 높으심과 엄격하심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깊이 받아들여져서 그들이 거기에 승복하고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려는 믿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나타나셔서 당신 뜻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거기에서 당신의 경륜을 이루시며 당신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고 능력이 있는지를 드러내십니다. 당신의 영광과 놀라운 은혜를 입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성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기능이 무엇입니까?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제사입니다. 죄의 용서, 속죄의 제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바치는 서원의 제사, 하나님 앞에 자신을 기쁘게 헌신하는 제사, 주께서 명하신 절기를 따라 올리는 제사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때, 하나님은 위엄을 보여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깊이 깨달으며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성경에서 보여주신 위엄을 역사 속에 나타내십니다. 이방사람들을 꺾으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고, 위기와 고통 속에서 건지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위대하신 분이시구나. 높으신 분이시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힘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
시인은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 힘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고 찬송을 했는데, 그 힘과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 앞에서 누리는 특권이었습니다. 힘과 능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 힘과 능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가지고 계신 놀라운 언약적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힘입어서 살아가는 힘과 능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면 힘이 생깁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들을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정신에 힘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악한마음을 품었는데, 마음으로는 그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 때 주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랑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러한 힘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지혜를 주시고, 힘이 없는 자에게는 힘을 주시고, 메마른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풍부한 정서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세상의 자원이 부족한 사람들에게는 자원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본성,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구조, 정신, 육체,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전달하는 도구가 됩니다. 예전에는 우리에게 없었던 힘이지만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때 이미 있던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사용하셔서 그런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주시는 은혜는 그분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내가 제외된 가운데서 하나님이 내안에서 혼자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 일에 함께 참여함으로서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추호도 의심이 되지 않을 정도로 성령과 나 사이에 놀라운 합의와 일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가 우리에게 역사하고 있을 때 우리가 악을 행하게 되면 죄의 작용과 영향이 우리의 의지와 분리되지 않는 것과 유사합니다. 어느 쪽으로 행하든지 우리는 제외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의 정신과 마음의 구조를 사용하셔서 힘을 주시고 선을 행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은혜가 결핍되었을 때는 악을 행하고 주님께 불순종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우리가 하나님과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그냥 살아갈 때보다 영적인 침체에 빠지거나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고 영혼의 깊은 곤고함이 밀려올 때,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분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에게 찬송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힘과 능력을 구함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봅시다. 살아가다가 올바르지 않은 상황을 만나거나 마땅히 감당해야 되는 상황인데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 설 때 우리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내가 할 수 없을 때도 주님은 나에게 힘과 능을 주십니다.’ 이 고백을 하게 되면 큰 위로가 옵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그 일을 내게 명하실 때는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실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겠다는 것은 잘 알겠는데 그것을 도저히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으며, 누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악이라면 모양이라도 버릴 정도로 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으며, 흠 없고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인간이 누가 있겠습니까? 자신은 그렇게 행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명하시는 것을 내게 주시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옵소서.” 이것은 “주님이 명령을 하셔도 나는 당신이 원하는 바, 그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당신이 명령하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내게 먼저 그 명령을 이행할 은혜를 주시옵소서. 그 후에 나에게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명령해주시옵소서. 주님이 나에게 능력을 주셨다면 최소한 내 의지가 그 명령을 돌이켜 주님께 불순종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너무 중요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백하게 무엇을 명하시는데 그것을 할 수 있는 힘이 없을 때, 우리는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이 이것을 나에게 명령하시니 나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 후에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게 명령해주시옵소서. 내가 기꺼이 순종하겠나이다.” 이런 고백을 가지고 주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시인은 수많은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지어다.”라고 고백합니다.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찬 경험 속에서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 시를 끝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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