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69
목 차
수렁에서 찾으시는 하나님(시 69:1-3) 1
고난당할 때 자신을 돌아봄(시 69:4-5) 5
주를 바라보는 자의 기도(시 69:6) 10
주를 위하여 수치를 당할 때(1)(시 69:7-8) 14
주를 위하여 수치를 당할 때(2)(시 69:9-11) 18
여호와께서 열납하실 때에(1)(시 69:12-13) 23
여호와께서 열납하실 때에(2)(시 69:13) 28
수렁과 깊은 물에 빠질 때(시 69:14) 31
시련을 당할 때 드리는 기도(시 69:15-16) 35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시 69:17) 38
내 영혼에 가까이 오소서(시 69:18) 43
훼방으로 마음이 상할 때(시 69:19-20) 48
위로하는 자가 없을 때(시 69:19-20) 55
악인에 대한 탄원(시 69:21-22) 59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시 69:23-24) 63
상한자의 탄원(시 69:25-27) 66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시 69:27-29) 72
황소를 드림보다 더욱 기쁘시게 할 것(시 69:30-31) 78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구원(시 69:32) 83
궁핍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시 69:33-34) 88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백성들(시 69:35-36) 92
시편69편 강해 1
시편69편 강해 1
시편69편 강해 1
시편69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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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69편 강해 1
시편69편 강해 1
깊은 수렁에서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시 69:1-3)
본문해설
시편 69편은 탄원시입니다. 언제 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의 시입니다. ‘영장으로 소산에 맞춘 노래’라고 되어있는데, ‘소산’이라는 것은 ‘백합화’라는 곡조를 가리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가사를 지어놓고 “이 가사를 찬송가 211장에 맞춰서 부르시오.” 이런 것입니다. 백합화 곡조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가락이었습니다. 이 시에 그 가락을 맞추어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성가대의 악장 같은 사람을 말합니다. 그 사람을 시켜서 ‘소산’이란 곡조에 맞춰서 불리던 시편이라는 뜻입니다.
깊은 수렁에 빠졌을 때
제일먼저 시인은 위기를 호소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여기에서 ‘영혼’이라고 번역된 말이 ‘네페쉬’(vp,n<)라는 히브리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영혼’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구약에서 다양하게 번역이 됩니다. ‘영혼’이라는 뜻으로도 번역되고, ‘사람’이나 ‘정신’이라는 뜻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물이 어떻게 영혼까지 흘러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네페쉬’라는 말은 ‘목숨’이라는 뜻으로도 사용이 됩니다. ‘영혼’은 직역을 한 것이고, 이것은 ‘목구멍’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물들이 넘쳐흘러 목구멍까지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물에 빠져서 헤어날 수 없으면 허우적대다가 결국 그 물을 마시고 죽게 됩니다. 익사하는 것은 물을 많이 먹어 결국은 기도가 막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에 빠져 기력이 없어서 죽기 직전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들이 내 목구멍까지 흘러들어 왔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이 물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이라고 표현했는데, 물속에는 깊은 곳도 있고 얕은 곳도 있습니다. 한군데라도 발이 닿는 데가 있으면 목숨은 부지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 버티고 서서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면 구조해주는 사람이 나타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곳이 없습니다. 대게 바닥이 평평하고 고른 곳에서는 익사사고가 많이 안 납니다. 해안가나 강에서 바닥이 평평하다가 갑자기 확 꺼져서 수렁 같은 것이 나타나는 곳에서 사람들이 깊이를 모르고 놀다가 익사하게 됩니다. 그런 광경을 여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서있을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서 멈추어 서자니 디딜 곳이 없고, 헤엄을 치자니 기력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더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니까 물결이 칩니다. 물결이 칠 때 더 깊은 곳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경험한 인생의 난관과 위기였습니다.
이런 위기가 우리에게도 언제나 찾아옵니다. 자신의 힘으로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을 쳐도, 수렁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것 같은 상황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대게 늪이나 수렁에 빠지면 헤어 나오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면 진흙과 몸 사이에 공간이 생깁니다. 몸부림을 쳐서 공간을 만드니까 몸이 더 빨리 빠져 들어가서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가 됩니다. 설 곳이 없는 수렁으로 계속 빠져들 때 몸부림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고 더 깊은 수렁으로 데려갈 뿐입니다.
목마름, 대체될 수 없는 하나님
1, 2절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인생의 시련과 고난의 상태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깊이 몸부림치다가 마지막으로 3절을 택하게 됩니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거기에서 시인이 한 일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록 가운데 기도의 여러 형태가 나오지만 그 중 하나가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부르짖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과 자신이 처한 위기, 이 두 가지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그가 간절히 부르짖을 때 그것이 순식간에 응답된 것은 아닙니다. 간절히 부르짖어서 매우 피곤하게 되었고 결국 목이 마르게 되었습니다.
물속에 빠졌는데 목이 마르다는 것이 아이러니 하지 않습니까? 하나의 문학적인 모순법입니다. 아주 좋은 대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빠져 있는 것도 물이고, 목말라서 먹고 싶은 것도 물인데,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만으로는 충분히 살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충분하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이것은 마치 바다에 배를 띄우고 항해를 하는 사람들이 목말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주변에 널려있지만 그것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물이 필요합니다. 그 물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때도 있지만 파도가 치면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습니다. 그 물만 가지고는 안 되고 또 다른 종류의 물이 필요합니다.
“내가 목이 마릅니다.”라고 할 때 이것은 육체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겠지만 성경에서 표현하는 ‘물’은 신령한 의미에서 하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시편 41편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내가 목이 마릅니다.”라고 하는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목마른 자에게 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욕망에는 대치할 수 있는 욕망이 있고 대치할 수 없는 욕망이 있습니다. 대치할 수 있는 욕망은 이것입니다. 배고픈데 밥이 없어서 빵을 먹은들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목마른 것은 대체할 것이 없습니다. 목이 마른데 “물은 줄 수 없고 좋은 영화 한편 보여줄 테니 위로를 삼아라.” 이것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대체할 수 없는 욕망입니다.
전 세계에서 물과 전기를 이렇게 펑펑 쓰는 나라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낭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전기불이 켜져 있는 것만 보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끕니다. 물을 이렇게 마구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물이 너무 흔해서 그렇습니다. 휘발유가 없으면 전기로 대체하고, 빵이 없으면 쌀을 먹고, 소고기가 없으면 닭고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물은 무엇으로 대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다른 것들은 대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대체할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다른 무엇으로 보충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눈이 쇠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종종 우리의 인생에 어려움이 생기고 고난이 생길 때 하나님이 우리를 단번에 건져 주시기도 하지만, 그것을 통해 묵은 찌꺼기를 털어내고 하나님 아닌 것을 스스로 선택한 결과를 깊이 뉘우치면서 돌이켜 하나님을 선택하게 하십니다. 결국은 자신이 그릇되게 선택한 결과가 얼마나 아픈 것인지를 충분히 경험하고 난 후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찾는 마음이 되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때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찾을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을 이루어가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표현입니다.
고난당할 때 자신을 돌아봄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시 69:4-5)
의인을 미워하는 악인들
시인은 고난을 당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미워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악함으로 인해 시인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불신자들이 미워한다고 생각해봅시다. 거기에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것 없이 미워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악인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려고 하지 않으면 그 속에는 누가 있겠습니까?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 중심적인 사상이나 삶의 방식에 대해 강한 저항을 느끼게 됩니다.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하고 도전을 합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를 싫어함으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악인의 정체입니다. 악인이 항상 악을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은 근본적으로 마음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결국은 제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악인입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사상이 하나님 중심적인 사상과 맞을 때는 맞는 대로 살고, 맞지 않을 때는 강하게 도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미움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한 미움이고 그것과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면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미움이 함께 들어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라틴어로 ‘크레데레 데움’(credere Deum)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크레데레 데오’(credere Deo) 하면 하나님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나는 잘 믿어지지 않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것들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든 사랑이든 미움이든 다 똑같은 원리에서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향한 미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 본성적인 미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그런 사람들이 있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이 그들보다 우월할 때는 그것이 고난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상전이 있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비천한 종이 있는데 그가 하나님을 미워한다고 할 때 그가 실제적으로 상전에게 고난을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삶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흐트러트리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힘과 권력이 없습니다.
고통을 호소함
이러한 커다란 고난은 대부분 환경의 어려움을 동반하게 됩니다. 시편에서는 영혼의 곤란한 형편을 이야기할 때 환경의 깊음을 함께 이야기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곤고해지고 환경적으로도 어려움이 오게 됩니다.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온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환경을 장악할 수 있는 권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 혹은 주변 환경에 의해 내가 원치 않는 질서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통을 받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까닭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고 부당하게 나의 원수가 되어 나를 끊으려 하는 자가 강하였으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끊는다’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한 사람이 목숨을 쭉 이어갑니다. 자식을 낳는 것을 목숨이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대를 끊어 버리리라.”는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원수들이 이것을 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끊어짐을 당하는 것은 자신에게서부터 이어지는 가문과 혈통의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될 정도였습니다.
시인은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내가 빼앗지 아니한 것도 물어 주게 되었나이다” 이것은 모든 힘을 상실해 버린 상태를 의미합니다. 채무자들이 돈을 백만 원밖에 안 빌려줬는데 폭압적으로 위협을 가하면서 이백만 원을 빌렸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취하지 않은 것도 물어줘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항거해도 그것을 계산할 능력과 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도 이런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바로 세우심
이때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 내가 이렇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 그분은 어디에 계신가?” 이런 한탄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때 반성을 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우매함을 아시오니 나의 죄가 주 앞에서 숨김이 없나이다” 하나님이 정결케 하시는 것과 보응하시는 것, 두 가지는 대게 조화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이 죄를 통해 나를 단련하시고 변화시키시려고 나를 이렇게 다루시나보다.’ 하는 생각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깊은 고난 앞에서 이것을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우리를 바로 잡으시는 계기로 삼으십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을 징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징계의 성격 자체를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으로 생각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해석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징계하실 때 그 의도가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입으신 손해와 마음의 고통을 풀어내는 방식의 징계가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께 그런 것이 있다면 유한한 인간과 하나님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겉으로 볼 때는 하나님께서 다윗이 지은 죄 때문에 징계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징계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섭리하셔서 그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베푸셨던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언약백성들에게 복 주실 때뿐만 아니라 때리실 때도 그것을 당신을 아는 기회로 삼게 만드십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 주님의 도움으로 자신을 돌아보아 예전에 지었던 어떤 죄를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근원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예전에 지은 죄는 아직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거짓말을 했다면 그 이후로 거짓말을 안 했을지 몰라도 거짓말을 하고자하는 죄의 성향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면을 살피도록 시인을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깊이 돌아보고 회개하고 뉘우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피도록 만들어 주셔서 자신에게 그런 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합시다.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를 용서 주시는 것과 잔존하는 죄를 없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때 인간은 더욱 처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에는 일반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도 일반섭리의 문제가 있고 영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죽을 위기에 놓여 있다고 합시다. 하나님이 아니면 도와줄 분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립니다. 이것과 자신 안에서 죄를 발견하고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죄를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은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후자가 훨씬 더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경적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호소할 때는 능력의 문제이거나 단순히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문제이지만, 자신의 영혼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절망할 때는 더 큰 복음적인 은총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입니다. 이것이 부어졌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어떤 일들이 잘 이루어졌을 때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신앙적인 감격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든지 우리가 인생의 문제를 통해서 영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며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주를 바라보는 자의 기도
“주 만군의 여호와여 주를 바라는 자들이 나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를 찾는 자가 나로 말미암아 욕을 당하게 하지 마옵소서”(시 69:6)
본문해설
본문에는 앞 문맥과 어울리지 않는 탄원의 내용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그것이 6절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찾는 자를 머릿속에서 그려냅니다. 전형적인 병행법인데, ‘바라는 자’와 ‘찾는 자’가 짝을 이루고, ‘수치를 당한다’는 내용과 ‘욕을 당한다’는 내용이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를 바란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주님께 소망을 둔다는 뜻입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과 짝을 이루고 있는 ‘하나님을 찾는 자’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사람의 다른 특성을 강조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읽으면 “딴따딴따 딴따딴따” 이렇게 박자가 맞게 되어있습니다. 운율이 맞아서 리드미컬하게 읽혀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그런 것까지 번역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의 기도
시인이 주님께 소망을 두는 사람, 주님을 간절히 추구하는 사람들이 수치를 당하거나 욕을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자신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시인이 악인들에게 끊임없이 고통과 고난을 당할 때의 모습은 누가 보든지 간에 비참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저는 주께 버림을 당하였도다.” 이렇게 말하지 않겠습니까? 많은 고난을 당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멸시를 당할 때는 멸시를 하는 사람들보다 멸시를 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행복하고 복되게 살면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믿지, 올바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당사자조차도 그렇게 생각하고 믿음을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시인은 고난을 당할 때 자신은 하나님 앞에 무지하고 악하기 때문에 내안에 무슨 죄가 있는지 살펴보기 원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죄를 주장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고의로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해서 양심을 거스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오늘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세상에는 주님께만 소망을 두고 신실하게 주님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면서 실족하고 욕을 당하지 않도록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로운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동지들이 부패한 권력이나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악인들로 인해 받을 수 있는 박해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다윗이 기름부음 받은 이후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고난을 받을 때 그들도 정치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있었습니다. 자신과 동행하는 자들,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자들이 자기 때문에 고난과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저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추구하는 것을 보시고 선대해 달라는 기도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이 있는 또 하나의 해석은 이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 완전한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악한 자들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은 분명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면서 ‘다윗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악인들에게 고통을 받는구나.’라고 판단하지 못하고, ‘저렇게 오랫동안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다윗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죄를 지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저를 버려서 고통을 당하게 하시나 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의 고난이 길어지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탄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기까지 헌신했던 사람들도 고난이 길어지고 하나님의 도움이 그친 것 같을 때 하나님을 원망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좋은 것 중 우리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 있을 때만 주님의 사람이지 주님이 손을 놓으시면 우리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고, 주님의 은혜에 놓임을 받은 평범한 사람의 마지막은 주님께로부터 물러나고 자기사랑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길어지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넘어져 실족하는 일들이 없도록 도와주시도록 기도합니다. 고통 받는 자신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딘가에 있을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한 사람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교회와 연합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주님나라에 갈 때까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수많은 인연들, 가족, 자녀, 부모, 형제, 이웃, 모든 사람들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의 예수의 편지요 예수의 냄새라.”고 일러주었던 것도 그것 때문입니다. 편지는 보낸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편지는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사람들에게 읽혀집니다. 냄새는 누구의 코끝으로 달려가야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풍겨나면 사람들이 그 냄새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거나 주님을 떠나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자식들에게 인생의 커다란 격려가 되기도 하고, 인생의 커다란 고통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삶의 연관성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또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아름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고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주를 위하여 수치를 당할 때(1)
“내가 주를 위하여 훼방을 받았사오니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
내가 내 형제에게는 객이 되고 내 모친의 자녀에게는 외인이 되었나이다”(시 69:7-8)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
시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이요 훼방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부지런히 추적해 볼 때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이 고난은 주님을 위한 고난이다.”라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도우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들이 볼 수 있도록 즉시 붙들어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릇되게 살면서도 형통할 때가 있는가하면 올바르게 살면서도 하나님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실 때 사람들은 그가 자신의 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시인도 자신이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한다고 판단했지만, 하나님께서 즉시 오셔서 도와주신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에게 고난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상당 기간 동안 고통과 시련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수치를 당할 때
시인이 말하기를 “수치가 내 얼굴에 덮였나이다”라고 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얼굴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시편에는 “저들의 뺨을 치소서.”라는 말이 나옵니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레히’(yjil])라고 해서 뺨이 턱으로 표현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뺨을 때리면 턱을 치게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커다란 모욕이 됩니다. 얼굴에 침을 뱉는다든지 하는 것은 인격에 대한 커다란 모욕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얼굴’은 복수를 드러내는 표적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얼굴은 ‘파님’(!ynIP)이라는 복수형을 이루고 있는데, 얼굴에 수치가 덮였다는 것은 커다란 부끄러움이 압도한 것을 보여 줍니다. 치욕과 수치가 얼마나 넘쳤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 이유가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수치가 얼굴에 덮였다.” 부끄러움과 수치가 덮여서 시인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사람에게 버림을 받을 때
시인은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가장 가까운 형제와 친척들에게도 객이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객’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게르’(rGe)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씨족들이 함께 모여 살았습니다. 거기에 어쩔 수 없이 들어가 살게 되는 경우, 그렇게 우거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나그네라고 불렀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박 씨 성을 가진 사람들끼리 모여 살고, 그 속에 최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두 가정이 들어와 산다고 하면 구박과 불이익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한 씨족 사회에 들어온 타성(他姓)들에 대한 대우였습니다.
나그네라는 말에 그런 커다란 서러움과 응어리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살았을 때, 그들이 노예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그네로서 나라가 없기 때문에 서러움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가장 친한 사람들에게도 객이 되어서 살아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고난과 수치를 당하면서 고통 받을 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위로해주고 돌봐주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와 같이 취급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영광이 있을 때는 그 영광에 가까이 다가오려고 하지만, 그가 영광으로부터 멀어져 수치를 당하면 사람들이 그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들의 변화무쌍한 인간관계입니다.
연변은 역사적으로 북한과 매우 가깝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뿌리가 북한에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되면서부터 연변에 사는 조선족들의 지위가 굉장히 높아지고 소득도 많아졌다고 합니다. 제가 몇 년 전에 만난 북한 가이드는 한국이 한창 경기가 좋을 때, 중국에 살면서 한 달에 칠백만원씩 벌었다고 합니다. 7,8년 전 그 당시 중국과 비교해서 생각해본다면 한국에서 한 달에 4,5천만 원씩 버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나와서 “조선동포 여러분 잘 계시십시오.” 그러면 정색을 하고 대답합니다. “우린 조선동포가 아닙니다.”, “조선동포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한국동포라고 했다고 합니다.
거룩한 고독,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
사람이 영광이 있고 좋은 점이 있으면 따르는 사람도 많고 칭찬하는 사람도 많고 관계를 갖겠다고 다가오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버림을 받고 고난당한다는 느낌을 받게 되면 친구와 좋은 사람들이 모두 다 떠나갑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사랑이 얼마나 유한하고 변덕스러운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들의 사랑의 차이를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보면,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인식하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모두 다 나를 버렸습니다. 심지어는 누구보다 나를 가까이 해주어야 할 내 형제들에게는 나그네가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내 모친의 자녀’는 형제를 말합니다. 병행법적인 표현으로 반복해서 말합니다. 혈육의 형제들일 수도 있고 믿음의 형제들일 수도 있는데 그들에게 조차 나그네가 되었습니다.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만이 변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내 곁을 떠나도 주님은 영원히 나를 지켜주시고 함께하신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의 사랑과 섞여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이런 시련의 시기를 통해 사람들이 모두 떠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사랑의 차이를 깨닫게 되고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고, 시련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외로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훌륭한 통로가 됩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었던 때를 가만히 보면 외로움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의지할 수 없이 나 혼자 버려졌다는 느낌,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의지할 만하지 않다는 확신,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한분만이 영원히 나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신앙이 생겨나게 됩니다. 거룩한 고독을 통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반드시 이런 고독의 느낌을 동반하게 되고, 그때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주를 위하여 수치를 당할 때(2)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주를 훼방하는 훼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내가 곡하고 금식함으로 내 영혼을 경계하였더니 그것이 도리어 나의 욕이 되었으며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시 69:9-11)
본문해설
시인이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할 때, 세상에서는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었고 자기가 가장 가까이 하던 사람들조차도 자신을 못 본척하는 소외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자신의 상태와 그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의 집을 위한 열성이 나를 삼키고”라고 했는데, 이것에 대해 두 가지 정도 가능한 해석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집을 위한다는 악인의 열성 때문에 시인이 고난을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시인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에 사로 잡혔다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비둘기를 파는 자들을 내어 쫓고 돈 바꾸는 상들을 뒤엎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이 성경구절이 인용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리라”고 한 이 말씀을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전자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 서게 됩니다. 요한복음 2장의 문맥을 찬찬히 읽어 보면 저는 아직까지도 마음에 확정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정결케 하실 때 비둘기를 팔고 돈을 바꾸고 하는 잘못된 방식들을 만들어 놓은 사람들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을 표현한 것인지, 정결케 하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생각한 것인지 제 마음속에 확정이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보는 것은 시인은 자기가 당하는 많은 고난이 주님의 집을 위한 고난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올바로 살아가려는 열성 때문에 악인들에게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살기를 포기했더라면 미움과 원망을 받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조차 미움을 받는 상황 속에 있게 된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렇게 살아가려는 시인을 핍박하는 악인들에 대한 비난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봅니다.
사랑이 해석에 미치는 영향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시인은 악인들로부터 끔찍한 고난을 당하고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순히 시인이 악을 행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을 위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악한 사람의 의도는 시인의 행동거지를 해석하는데 까지 작용했습니다. 시인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하나님 앞에 울며 매달리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소원을 아뢰며 금식을 할 때조차도 그것이 오히려 시인에게 욕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고통을 당하면서 ‘혹시 내가 잘못되지 않을까? 나의 잘못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하고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개인과 공동체의 신앙의 상태가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자신을 엄격히 성찰하며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했더니 그것이 오히려 시인에게 욕이 되었던 것입니다. “저것 봐라. 저렇게 금식하고 눈물 흘리는 것을 보니 아마 큰 잘못을 했나보다. 저 금식과 눈물의 간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돌아온 것입니다.
사랑은 무엇을 해석하는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선하고 좋은 방향으로 해석을 하려고 하고, 사랑이 없거나 미움이 가득하면 그 사람의 선한 것조차도 악한 방향으로 해석을 하게 됩니다. 마음에 있는 사랑의 성향은 해석의 성향이기도 합니다. 악인들은 처음부터 시인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었거나, 나중에 시인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접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시인의 좋은 점과 하나님 앞에 살려는 신실한 자세조차 가혹하게 해석했던 것입니다. 시인의 경건하고 진실한 행동을 향한 악인들의 해석이 그에게 욕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살아계셨을 때도 그런 삶을 살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신 동안에 많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들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시며 먹이신 것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한 패거리가 되었다는 비난으로 돌아왔습니다. 긍휼이 넘치는 마음으로 병든 자를 고쳐준 것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하찮게 여기는 불량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그들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시인의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는 그저 사람의 아들일 뿐이지만, 우리가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하고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가려고 할 때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하셨던 것과 유사한 이유로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본질도 변하지 않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악한 본질도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개인과 공동체의 연대의식
시인은 고백합니다. “내가 굵은 베로 내 옷을 삼았더니 내가 저희의 말거리가 되었나이다” 베옷을 입는다는 것은 슬픔의 상징입니다. “베옷을 입고 재위에 앉았다. 재를 뿌리며 앉았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에 미친 불행한 결과가 자신을 포함한 공동체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은 이 재처럼 모두 파괴되어야 마땅하다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철저한 회개를 가리킵니다. 69편을 지은 시기가 언제인지, 시인이 부르짖는 내용이 자신의 범죄에 대한 참회인지 아닌지에 대해 신뢰할 만한 정보는 없습니다. 여기에 보면 시인이 굵은 베로 옷을 삼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실제로 베옷을 입고 재를 쓰고 앉은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문맥을 보면 그런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범죄로 인해 이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 중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일들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공동체의 지체로서의 연대의식 때문에 나오는 것인지는 우리가 쉽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어느 쪽이든지 죄에 대한 시인의 철저한 회개는 공동체와의 밀접한 연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났던 인물 중, 다윗만큼 신약시대에 이루어질 교회의 영적이고 유기체적 성격을 풍부하게 보여준 인물이 많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 영적인 깊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의 비밀을 아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교회를 세우시고 그들과 영적인 연관을 맺으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인들이 거기에 접붙여져 지체로서 한 몸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놀라운 사랑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주시는 삼위일체적인 사랑에서 분여 받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께 받는 사랑조차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는 사랑에 참여함으로써 누리는 중보적 사랑이라고 본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 교회를 위한 삼위 하나님의 관계의 비밀을 이해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결국 시인의 고백을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가 어떠한 처지를 당하든지 하나님은 우리가 처한 상황을 해석하게 해주시는 유일한 궁극자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우리의 죄와 악함을 고백할 때,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거나 교회와 관련하여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이유와 섭리, 그것에 대한 치유책들을 하나님 앞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따로 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과 하나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을 세상에 두셨다는 의미에서 세상도 현실도 포기할 수 없는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힘닿는 대로 나의 살아있음이 교회를 바르게 하는데 이바지하고, 교회가 살아있으니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데 이바지하도록 살아가는 신앙의 포괄적인 관계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열납하실 때에(1)
“성문에 앉은 자가 나를 말하며 취한 무리가 나를 가져 노래하나이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2-13)
본문해설
시인이 참회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자신의 죄를 토했습니다. 그리고 겸비하여 굵은 베옷으로 자신의 옷을 삼았습니다. 베옷이라고 하는 것은 상복입니다. 베옷이 상징하는 것은 슬픔과 비참함입니다. 실제로 베옷을 입기도 하였겠지만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하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며
고난은 그것이 정당한 것이든지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지 우리를 정화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단정하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선물입니다. 이 세상 모든 인간들 중 누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부패해질 수 있고 마음이 교만해질 수 있고 은혜에서 미끄러져 의지가 부패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그 말씀 앞에 거울로 삼아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하나님의 훌륭한 방법이 고난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요즘과 같이 자기 우월주의에 빠져 살도록 격려를 받고 있는 시대에서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살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적인 방법으로는 우리 자신을 반성하여 돌이키게 하실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서 스스로 돌아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시인은 탁월한 경건을 소유하고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의 세계가 시편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도 예외 없이 아담의 후손이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미끄러지고 죄 가운데 있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철저히 볼 때에 슬픔의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옷을 한동안 자신의 의복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지난날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철저한 회개의 순간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말거리가 되었고, 술 먹고 취한 사람들조차도 조롱하듯 시인의 비참한 처지를 노래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고 사람으로부터 받는 멸시와 모욕이 가득한 시간을 보낼 때, 그의 마음속에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절망하는 대신 주님을 붙들고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의 신앙이었습니다.
절망의 때에
시인과 같은 위대한 인물도 부패했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부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때 시인이 선택한 하나의 길은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곤고한 날에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모으고 부르짖는 것이 그의 간절한 기대가 되었습니다.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죄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지 절망하는 것의 끝은 욥기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두 거기까지 표출되지 않아서 그렇지 마지막에는 우리를 거기로 데려 가는 것입니다.
죄죽임의 교리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사람을 향한 미움이 양심의 억제를 받지 않고 환경의 제악을 받지 않고 무한히 계속 펼쳐지면 마지막에는 살인을 하는 것이 그 죄가 원하는 결말입니다. 절망하는 마음이 양심의 억제와 상황의 제악을 받지 않고 끝까지 펼쳐질 때 그 절망이 마지막으로 데려가고자 하는 종착역은 하나님을 욕하고 자신은 파멸에 이르는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절망은 결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죄인이 죄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심판을 인식하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데 사용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의 참여가 있고 사단의 세력의 개입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은 신앙과 아주 유사합니다. 신앙을 갖게 되면 막다른 순간, 아무것도 안보이고 오직 하나님만 보이면서 그분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고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반대로 절망하고 거기에 의지가 이끌리게 되면 인간은 절망 자체에서 큰 쾌감과 안정을 얻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몰입을 하게 됩니다.
얼마 전에 F1 대회를 했다고 합니다. F1 레이싱 카가 시속 350km로 달리면 시야가 야구공만 하게 보인다고 합니다. 빨라질수록 시야가 계속 좁아집니다. 너무 빠르니까 시야가 아주 좁아져서 야구공만 하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고 주님을 붙드는 믿음을 갖게 되었을 때, 아무것도 안보이고 주님만 보이는 것처럼, 인간이 절망하게 되면 희망적인 해석의 능력이 사라지고 절망 하나에 미친 듯이 치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자살을 너무나 너무나 살고 싶은 욕망의 표현으로 보았습니다. 인생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그냥 살 텐데,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 사이의 차이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는 좁힐 수 없는 엄청난 절망으로 다가올 때, 내가 원하는 나로 존재하고 싶은데 원하지 않은 나로 존재하도록 강요를 당할 때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진짜 살고 싶은 사람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과 절망은 아주 유사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 아래 굴복해야 할 존재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으면 인간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인식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큰 난관을 만나고 절망에 빠질 때 인생이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면 그렇게 절망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조금 부족해도 도움이 됩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한번 왔다가 사라지는 것인데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보입니다. 그냥 미친 듯이 질주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믿음이 있는 사람과 믿음이 없는 사람 사이의 차이가 드러나게 됩니다.
의지할 분, 하나님
시인은 잘못해서 주님 앞에 베옷을 입고 원수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죄 중에서도 자신을 붙드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것이 절망에 빠진 시인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탄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자신이 기도하는 그때가 주님이 열납하시는 때라고 믿었습니다. 죄를 지어서 의지 할 곳이 없을 때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 원수들의 조롱과 비웃음이 가득할 그 때에 하나님이 죄인의 기도를 받으시는 열납하신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히 열납하시는 때가 있다는 생각자체가 성경과 모순이 되지 않겠습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은 죄인들을 기다리시고 어리석은 죄인들을 하나님 앞에 부르시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고 바라시는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이때를 열납하시는 때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만큼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주님은 받아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랑, 인정, 이런 것들은 참 잔인하고 야박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 순간 자신을 실망하게 만들면 모든 것을 한 번에 지워 버리는 것이 인간의 정입니다. 한 때 코미디언으로 상당히 이름을 날리던 연예인이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 한 사람인데, 그 양반이 개인적으로 간증 하는 것을 직접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느 날 인기가 떨어지는데, 죽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더랍니다. 인기가 갑자기 떨어지는데 자살하고 싶은 생각 밖에 안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환호하던 많은 사람이 등을 돌릴 때 단순한 돈벌이의 문제가 아니라 심정적인 문제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매일 수면제를 만지작거리면서 ‘난 죽는 것밖에 없구나.’ 그런 좌절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인정, 박수와 갈채는 어는 한순간에 차갑게 변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굉장히 마음 아파하십니다. 결국은 그가 무엇을 의지하든지 의지하는 그것이 영원하고 안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이 상하고 화가 나서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며 살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것이 뼈저린 실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십니다.
상한 마음이 있는 그곳에 언제나 하나님은 찾아오시고, 물같이 녹는 마음이 있는 그곳에 언제나 주님이 임재하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믿고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마음속에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의존을 떨쳐버리는 시간들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자기 깨어짐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생활, 이것이 하나님께서 바라시고 원하시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여호와께서 열납하실 때에(2)
“여호와여 나를 반기시는 때에 내가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3)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때
악인들에게 에워싸인 상황 속에서 시인이 택한 것은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여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 기도할 때 특별히 열납해 주시는 때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에 처하였을 때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는 때라는 고백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마음 쏟고 기도하면 주님이 자신을 열납하시고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때가 따로 있다기보다는 기도자가 하나님 앞에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는 시기가 바로 하나님이 특별히 열납하시는 때라고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바람
시인이 말합니다. “열납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기대했던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은 인자하심과 자기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시인이 큰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을 때 주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의 기반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자하심’은 특별히 언약관계 안에서 우리를 성도되도록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세상을 살면서 시련과 고난과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가 온전하게 정당했습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건 하나를 두고 우리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저 사람이 틀렸다고 할 수 있는 때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우리가 난관을 만나고 고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행했던 악하고 잘못된 일들이 오랜 세월을 거쳐 우리 자신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을 자주 발견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되면 다른 사람의 잘못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허물과 찌끼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중 어떤 것들은 그런 고난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전혀 파악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시인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기대했습니다. 만약 자신이 완벽하게 옳다면 인자가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의로움 대신에 하나님 안에 있는 신실함과 은혜를 바라면서 그분을 구하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신앙생활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람
시인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번역된 그대로 “내가 이 상태에서 어떻게 구원받아야 할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게 응답해주십시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이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진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신실함’이라는 뜻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신실함으로 내게 응답하소서”, 이것은 구원에 관한 진리를 가르쳐 달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을 사랑하셔서 언제나 구원해주시는 신실함으로 나를 이 고통스러운 위기와 어려움에서 건져달라는 간절한 탄원인 것입니다. 저는 후자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커다란 위기 속에서 구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간절히 구할 때 그 마음은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의존하는 마음이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을 간구하게 되고, 그 때 인간은 자기를 위한 사랑을 포기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종종 고난 가운데 두셔서 거기서 자신의 악함을 보고 잘못을 털어내고 정결케 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심하게 부패해서 한 때 건강하고 아름다운 영혼이었다는 사실이 일평생 그런 영혼의 상태로 살아갈 것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영혼이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후에 더욱 하나님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고통스러운 위기 속에 계속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행복해지고자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 많은 유익을 얻는다 할지라도 고통 자체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 앞에 구원의 진리로 구원하시는 신실함으로 내게 응답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도 시련과 어려움 속에 처했을 때 의지할 이가 주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과 위기 속에서 주님의 크고 넓으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더욱 매달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수렁과 깊은 물에 빠질 때
“나를 수렁에서 건지사 빠지지 말게 하시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시 69:14)
수렁에 빠질 때
자신 안에 일어나는 잘못들이 있습니다. 욕망이든 정욕이든 죄든 낙심하는 마음이든 절망감이든, 이런 것들은 수렁처럼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끊임없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어제 신문을 보는데, 도박을 좋아하는 사람의 뇌의 모양과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의 그것의 이상 증상이 똑같다고 합니다. 뇌의 변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도 어찌 할 수 없이 중독되어 빠져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환경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든지 계속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좌절하게 되고, 그 다음에는 비참한 마음을 갖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밖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수렁과 같이 사람을 빠져들게 만들어서 자신의 힘으로 저항할 수 없게 만듭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흙으로 된 구덩이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몸무게에 의해 계속 밑으로 빠져 내려갑니다. 몸부림을 치면 공간이 생기니까 더 빨리 빠져 내려갑니다. 자신에게 밧줄 하나 던져주는 사람이 없다면 서서히 빠져 내려가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에 보면 전쟁에서 사람들이 도망을 가다가 깊은 웅덩이에 빠져서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런 웅덩이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면 무기도 용맹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함께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수렁에서 건져주셔서 빠지지 않도록 도와달라는 탄원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일 때
본문의 후반부에 나오는 것들은 환경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와 깊은 물에서 건지소서”라는 표현은 같은 뜻의 반복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 곧 깊은 물에서 건져 주시옵소서.”라는 뜻과 같습니다. 시편에서 ‘깊은 물’은 죽음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시편에는 “하나님이여 물이 내 영혼에 까지 찼습니다.”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요나도 그런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목숨을 나타냅니다. 물이 목구멍까지 차게 되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전반부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후반부는 바깥의 것들이 밀려들어와서 자신을 엄습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나를 미워하는 자들, 원수들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 복수로 나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에워싸서 고통을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건져 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인의 입장에서 근거가 아주 없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들을 보면서 스스로 빠져 들어가는 절망과 낙담, 죄의 유혹과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의 깊은 물속에서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의 경우를 보면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서 바다에 던집니다. 배가 항해에 위험을 느낄 정도로 엄청난 파도가 칠 때 사람들은 그를 바다에 던집니다. 바다에 빠졌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어느 정도의 물이면 항거하고 몸부림을 칠 수 있겠지만 요나는 바다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이 장면을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에서 나를 건져 주시옵소서.” 시인은 이런 큰 고통과 곤경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환경을 보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자신을 지탱할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주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몸부림치며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는 깊은 내적인 빠져듬, 외적인 환경 속에 엄몰당하는 깊은 위기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나를 건져주시옵소서.”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삶의 환경이 고통스럽고 어려울 때는 그것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 것 같아도 좋은 환경이 주어지면 그것 때문에 미끄러져서 시험에 들고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좋은 환경을 주면 그 속에서 부패합니다. 반대로 시련이 오면 모두 주님을 붙들 것 같지만 그중 일부 사람들만 주님을 붙듭니다. 시련이 오면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던 신앙생활의 껍질조차 던져버리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모든 사람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아니고, 고난 받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내면의 문제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당신의 두 손으로 굳게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환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거칠게 파도치는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쪽배와 같습니다. 여러분은 바다에 떠있는 큰 배를 보면서 ‘굉장하구나!’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천 톤이든 이천 톤이든 오천 톤이든 만 톤이든 바다에 나가면 가랑잎과 같습니다. 파도의 힘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커다란 파도가 치고 시련이 올 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험을 주시되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지 않으면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간절히 의지하며 살아가는 의지의 표현이 하나님 앞에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향한 의존의 간절한 표현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 드리는 기도
“큰 물이 나를 엄몰하거나 깊음이 나를 삼키지 못하게 하시며
웅덩이로 내 위에 그 입을 닫지 못하게 하소서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시 69:15-16)
본문해설
시인은 시련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큰물에 의해 삼킴을 당하는 바다의 뱃사공, 혹은 흙 웅덩이에 갇혀있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엄몰한다’는 것은 해일이 일어나서 배를 덮어 버리는 동작을 생각나게 합니다. 시인이 이 시를 쓸 때 작은 배를 몰고 가는 뱃사공을 생각하고 그렸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작은 배가 있는데 큰 풍랑이 일어서 배를 덮쳐버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웅덩이에 빠졌을 때 입을 닫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웅덩이에 갇혔는데 흙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한 4-5m 깊이의 웅덩이에 빠졌다면 누가 밖에서 도와주지 않는 한 자신의 힘으로는 거기에서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밟고 올라갈 것도 없는 흙더미인데 거기에서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상황도 절망적인데 땅이 입을 닫아버린다는 것입니다. 흙이 허물어져서 매장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 상황은 자신의 힘으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외부로부터 도움이 오지 않으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고난 받고 있는 처지가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보여줍니다.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
시인은 “주의 인자하심이 선하시오니 내게 응답하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게로 돌이키소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시인에게 베푸시는 자비하심이 선하다는 이야기는 시인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목적이 선으로 돌아가게 하려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순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선하심에서 나오고, 선하심에서 나오는 인자하심은 우리를 선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베푸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불순종하다가 하나님께 큰 은혜를 받았을 때, ‘아,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도 사랑하시는구나. 나 같은 인간도 버리지 않고 사랑하시는구나.’를 경험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인자를 절실히 경험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입었으니 이제는 불순종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혜는 우리를 선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멀리 떠나 선으로 돌아올 수 없는 비천한 인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도 바로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 가까이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선과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인이 고난 속에서 발견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면, 순종할 때 그 은혜가 더욱 잘 보존되고 마음속에서 더욱 풍성하게 일어나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맞이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의존하며 살아야할 자신의 지극히 연약하고 비참한 처지를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시련과 환란 속에서 경험한 바였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당신의 인자하심과 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자신이 독립해서는 살 수 없고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늘 간직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의 특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하나님께 간섭받지 않고 자기 인생의 임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독립의 마지막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십니다. 비참함을 경험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인자와 선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마음을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순간 사랑과 은혜로 당신을 붙들고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원하십니다.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7)
하나님 얼굴빛, 주의 백성들의 복
“주의 얼굴을 숨기지 마소서”라는 표현은 시편에서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면하실 때는 진노와 심판을 내리기위해 대면하기도 하시고, 당신의 언약백성들에게 복주기 위해 대면하기도 하십니다.
민수기에 보면 전쟁에 나갈 때 제사장은 “주는 그 얼굴빛을 네게로 향하여 드시고 비추시며.”라고 축도했습니다. 그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이런 사상은 예수님에게도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비추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고 되어 있지만, 그것도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복 중, 정수에 해당하는 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서야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계셔야 애통하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유가 되어야 온유한 것도 의미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이 계셔야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석을 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임하는 복이야말로 최고의 행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과 관련하여 많은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도덕적인 피조물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짐승도 만족스러워 하는 때가 있습니다. 개도 좋으면 꼬리를 치고 고양이도 기분이 좋으면 꼬리를 올립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행복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이 누리는 모든 행복과 만족의 원천이 완전한 행복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그것을 자각할 수 있는 인간을 비롯한 지성적인 피조물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복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만족이 참다운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으로서 당신 자신의 완전함 때문에 행복하십니다. 그 행복의 정체가 삼위의 교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하나님과 교통하고, 완전한 행복을 그분께 받는 비결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것 자체가 커다란 특권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경견한 시인들은 하나님의 얼굴빛을 비춰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던 것입니다.
시인은 얼굴빛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낮에 태양을 향하여 제발 그 빛을 가리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양은 스스로 빛을 가리는 법이 없습니다. 눈이 펑펑 내려서 해를 거의 볼 수 없을 때도 비행기를 타고 올라가보면, 구름 위에는 찬란한 태양이 비치고 있고 거기에는 흐리거나 어두운 것이 없습니다. 해는 밤이나 낮의 개념도 없습니다. 지구가 스스로 태양을 등지고 돌아앉기 때문에 밤이 오는 것입니다. 태양은 언제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언제나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역설적으로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서 숨기지 말아주십시오”라고 호소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공평하고 완전하신 속성 때문에 그분 앞에 정죄를 당하거나 심판에 이르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은 자신을 위한 기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정체성
시인은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것에서 정체성을 찾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함유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목표를 보여주고, 또 하나는 이 사람이 하나님과 맺은 관계를 보여줍니다. 그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종의 특징은 자기 자신이 주장하는 목표나 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있으면 그는 자유인입니다. 종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종은 일상의 계획이 없습니다. 주인이 부리고 시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어떤 계획을 짠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인을 섬기기 위한 대의에 의해 만들어진 계획입니다. 그것이 종의 특징입니다.
오늘날은 종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제도 안에서 사실상 존재하지만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명백하게 종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에베드’(db,[)라고 하는 단어를 들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가슴에 와 닿았겠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때가 10세기인데, 놀랍게도 이 단어는 위로 거슬러 올라가 아브라함 시대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관련하여 사용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다.”라고 했던 사도바울의 정체성에 대한 고백은 그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언약의 하나님을 만났던 아브라함, 혹은 그 위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정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루스’(δοῦλος)라는 그리스 시대의 종들이 얼마나 비참했습니까? 사도는 그것을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계급으로서의 종이 없었습니다. 신분상 계급으로서 종이 되려면 세습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런 노예제도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희년에는 노예들이 대가 없이 모든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로마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 있었던 노예제도와 같은 방식의 제도가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해서 외국인을 노예로 데리고 들어오는 방법이 있었고, 가장 흔한 방법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파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에도 그런 제도가 있었는데 도저히 자신의 지분을 감당하지 못하면 자신의 몸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빚을 청산하고 가족들이라도 살리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께 순종할 때는 노예제도를 비인간적으로 운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떨어지고 사욕이 가득 차게 되면 다른 나라처럼 노예제도를 운영했습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로마 사람들이 눈요기를 위해 노예들을 풀어서 칼싸움을 시키고 죽이는 것을 봅니다.
‘종’이라는 단어에는 극단적인 두 그림이 함께 들어가 있습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밝힌 것은 먼저, 그가 목표를 삼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로, 구약에서 이야기하는 종이라는 개념이 단지 죽도록 일만하는 노예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내 종이라.” 이렇게 불러주셨을 때는 어둡고 칙칙한 그림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밀함을 나타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모스서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비밀스러운 일을 나의 종 선지자에게 말하지 아니하고는 행하는 법이 없느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숨겨진 내밀한 계획을 털어놓으시고 미리 알려주시는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애정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높은 사람이 밥 한 그릇 던져주고 가는 것보다는 조용히 불러서 자기의 일을 의논하고 미래에 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이 기쁨이 됩니다. 정부에서도 대통령의 의중에 있는 생각을 파악하는 순서가 애정의 순서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종이라는 말은 그런 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종이라는 그림을 하나의 개념으로 일관성 있게 보면 안 됩니다. 상황에 따라서 한두 개의 그림을 가지고 다양하게 문학적인 서술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시인의 고백에는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숨기지 마십시오. 저의 일생의 목표는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라는 뜻과 “내가 환란을 당하고 있지만 나는 주님이 친근히 대해주신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이 함께 묻어있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합니다. 얼굴빛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은 그가 환란 속에 있지만 핵심을 정확하게 잡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환란 속에서 있어도 그의 관심사는 시련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면 신앙의 힘으로 모든 것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 지혜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보면서 이 판도가 이렇게 되면 가장 좋을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완전한 답은 아닙니다. 우리가 간절히 원했는데도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전혀 다르게 이루어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주님을 경외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시인은 그 다음으로 “내가 환란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깊은 고통 속에서 시련을 당하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이것을 환란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환란 중에 있으니 속히 응답해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환란을 당한 사람에게 응답이란 희망입니다. 아직 모든 상황이 바뀌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자신을 건져 주시겠다고 하는 분명한 응답이 있으면, 마음에 평강이 오고 그 말씀을 약속으로 삼아 붙들 수 있는 희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시인은 그것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다른 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어느 때까지니이까?” 믿음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없으면 우리의 마음은 고통스럽고 흔들리게 됩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표증을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주님이 응답해주시면 내가 환란과 시련을 견딜 수 있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믿음을 따라 살면서 주님을 힘입어 이기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내 영혼에 가까이 오소서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 내 원수를 인하여 나를 속량 하소서”(시 69:18)
본문해설
17절에 이어 탄원이 계속됩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에게 가까이 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영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혼’이라고 해설할 수도 있고 ‘목숨’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이 영혼에 있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느 번역이든 좋지만 ‘생명’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위급한 가운데 하나님이 가까이 오셔서 나를 구속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내 원수로 말미암아 나를 속량하소서”라고 하는 것은 같은 단어의 병행법적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구속하심
구속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출해내시는 구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외적이고 환경적인 것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계시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인 것으로부터 구원해주셔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난 증거로써 외적이고 환경적인 구원을 보여주십니다.
본문은 “내 영혼에게 가까이하사 구속하시며”라고 하는데, 이것은 원수들에게 싸여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도움과 은혜가 아니면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속박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올 수도 있고 밖으로부터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있는 것을 없애버려야 속박에서 해방되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반대로 없는 것을 공급 받아야만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가난이나 고통은 공급을 통해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에게 죄가 있거나 원수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는 은혜로 죄를 제거해주시고 언약백성들을 괴롭히는 악인들을 처벌하심으로써 어려움에서 건져내십니다. 그것을 구속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복
시인은 “내 영혼에게 가까이 하사 구속하시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사람입니다. 모든 과정을 다 거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가까이 하시는 것과 멀리하시는 것의 차이를 충분히 체득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자신의 마음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은혜로부터 멀어질 때 자신의 삶에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지를 너무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 깊은 고통과 괴로움을 충분히 경험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까이 하사”라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모든 질서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주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과 가까이 하시는 친교를 통해 질서들을 재편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당신을 앙망하는 자의 영혼에 은밀한 일을 행하심으로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한편으로 우리 삶의 질서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보여주기도 하십니다. 이러한 역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고, 우리 삶의 변화가 그분의 능력 안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삶이 평안하고 질서들이 자신이 원하는 상태에 있다가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모든 질서들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파괴됩니다. 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면서 비로소 모든 질서가 자기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수많은 삶의 질서들, 육체의 행복과 불행을 좌우하는 현실적인 질서보다 영혼의 상태에 대해서 깊이 두려워하고 고민하게 되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또 다른 가치관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있어서 한 사람의 영혼의 상태, 그의 마음과 그의 신앙의 상태는 그의 삶이 미래에 어떻게 형성될지를 보여주는 나침판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고 붙들고 계시다는 신앙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것이고, 가장 큰 재앙은 주님이 자신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은 다윗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시인들이 자주 언급한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자신의 복이라는 고백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에 가까이 계실 때 자신을 모든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내실 수 있고, 자기를 미워하는 수많은 대적들 앞에서 자기를 속량해내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량의 동기
‘속량’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값을 대신 지불하고 그것을 사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어려움 속에 있게 된 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면, 하나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이나 노예가 잘못된 일을 해서 손해에 책임을 지고 누군가에게 억류되어 있을 때 주인이나 아버지가 와서 돈을 대신 물어주고 그를 건져내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하는 아들이 커다란 사고를 쳐서 엄청난 배상의 의무를 지고 있을 때, 그것을 버려두지 않고 손실을 각오하고 손해 입은 사람에게 정당한 배상을 하고 아들을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그러운 상전이 종을 그렇게 구해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엄청난 재산의 손실을 보면서도 그를 건져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관계 때문입니다. 그 사람과 자녀, 종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 때문에 그 관계에 대해 헌신하면서 희생을 감수하고 사오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 차체는 끊임없이 관계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다는 것은 관계를 함부로 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내 아내고 내 남편이면 어때?” 하면서 그 관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자식이고 부모라도 내 마음대로 하면 어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때문에 당신이 나와의 관계가 나빠지고 우리 사이에 거리감이 생기고 불편함이 생겨도 상관이 없다.” 이런 것이 이기심이고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의 아름다움
인간의 사랑은 의지적입니다. 사람을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의지적이라기보다 당신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성품 때문에 계속해서 발현되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의지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에게 사랑의 아름다움의 원인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그분을 향한 사랑의 아름다움의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는 것이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는 열성의 원천이 됩니다.
주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기도를 많이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최고의 표현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의 자연스러운 표현이기 때문에 기도는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감정에 비례하게 됩니다. 도덕적으로 떳떳하고 올바른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기도를 더 잘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가 그 사실을 적실하게 말해줍니다. 누가 보더라도 바리새인은 떳떳하고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은 세리가 훨씬 더 강했기 때문에 역설적이지만 그는 죄를 지었어도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죄를 지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언제나 교만하기 때문에 외적인 삶과 형편이 내 맘대로 되어가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내 힘으로 넉넉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경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역경을 통해서 스스로는 모르는 나 자신의 마음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달으면서 기도하고 그분을 의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최고의 자리는 손바닥만큼도 안 되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의 가난함과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의존,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믿음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우리를 구속하시고 속량하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때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때까지 우리를 버리고 멀리 떠나신 것처럼 놔두십니다. 그 것은 주님이 우리를 싫어하여 버리신 것이라기보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당신을 향한 갈망을 갖도록 만들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외적인 삶에 복을 주셔서 모자란 것 없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무엇보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주님을 의존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축복들로 인해 걸려 넘어지거나 거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님께 마음을 더 집중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름답게 보십니다.
훼방으로 마음이 상할 때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 69:19-20)
본문해설
시인은 자신을 구속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겠습니까? 여기에서 ‘영혼’은 목숨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이 당하고 있는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토로하고 있습니다. ‘훼방’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고 있는 삶의 질서를 흩으려놓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기보다 외부의 환경이 영향을 주어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삶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것을 가리킵니다. ‘수치’는 영광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명예를 추구함
성경에서 언약백성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명예입니다. 우리는 흔히 명예를 추구하는 것을 비난합니다. 그때 비난을 받는 것은 사실 이상의 명예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치와 허영 같은 것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 언약백성으로서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할 정당한 명예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죄의 유혹을 받을 때 ‘내가 이러한 죄를 짓고 어떻게 다음에 주님을 뵈올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도 명예를 추구하는 것의 일종입니다. “그 죄를 지어도 구원에는 이상이 없어.”라고 하면 어차피 모두 용서받은 것인데 죄를 담대히 짓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이 “참 잘했구나.”라고 인정해주시는 명예를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으로서 이러한 죄를 짓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수 있을까?’ 그것은 정당한 명예의 추구이고, 그런 것이 없다면 그는 사실상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이 정당한 명예 아닙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도 명예를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사람들이 직접 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언약백성들이 육신의 눈을 통해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보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심 때문에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고, 인간인 우리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누군가가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멱살을 쥐고 호주머니에서 십만 원만 빼앗아도 큰일 날 것입니다. 그것은 액수에 상관없이 강도 현행범입니다. 더군다나 멱살을 쥐고 위협을 가했다면 강도입니다. 소매치기를 한 것과는 종류가 다른 범죄이고, 두 사람 이상이 그 일을 하면 특수강도입니다. 그것은 가중처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당한 명예를 훔치거나 더럽혔을 때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인터넷에 떠도는 쓰레기 같은 글들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악한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사람의 주머니에서 돈을 훔친 것보다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사람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더 끔찍한 악이라고 봅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영광이나 명예를 가로채는 것은 쓰레기 같은 일입니다.
언젠가 목회자들을 위한 잡지에 글이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펴서 읽어 내려가다 보니까 제 글입니다. 저는 여기에 글을 낸 적이 없었습니다. 저자는 수십 권의 책을 써도 자기 글에는 지문이 묻어있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한 페이지를 쭉 읽어나갔는데 제 글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직원들을 불렀습니다. 이름을 가리고 “읽어봐라. 누구 글이냐?” “어, 이거 목사님 글이잖아요.” 그런데 다른 사람의 이름이 써있습니다. 이것은 도둑질입니다. 그냥 넘어갔지만 그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명예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불명예스럽게 오래 사는 것보다 명예스러운 죽음을 택했던 것이 군인정신 아닙니까? 명예스럽게 죽는 것이 수치스럽게 사는 것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물론 수치스럽게 죽는 것보다 명예롭게 사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본문은 그런 것들이 모두 박탈당한 상태를 설명합니다. 시인은 그런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수치는 소극적인 측면이고 능욕은 그것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모욕을 당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만약에 수치가 정당한 명예를 잃어버린 것이라면, 능욕은 그 위에 불명예가 기름처럼 쏟아 부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 능욕입니다.
주님이 아신다
어떤 의미에서 시인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주님이 아신다.’는 것은 객관적인 정보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이 알아서 그것에 상응하는 감정을 가지고 합당한 조치를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신다.’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주님은 마음만 먹으시면 정리하실 수 있습니다. 내 대적이 다 주님 앞에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상전이 하인에게 명하여 가라고 하면 가고 엎드리라고 하면 엎드리는 것처럼 주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강한 군대가 약한 적군을 맞이했을 때 마음만 먹으면 어찌할 수 있는 것처럼 다 주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탄할 때 매일 매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매달리고 의지하는 모든 은혜 생활, 주님을 향한 추구, 이것들은 결정적인 날에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한 준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의 비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나의 대적자들이 다 주님 앞에 있나이다” 이렇게 간절히 호소할 때는 양심에 부끄러운 것 없이 주님 앞에 서 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인간이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가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최소한 양심은 자신을 책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네가 어려움을 만났다 해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이런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느냐? 네가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고 그들과 한패거리가 아니냐?’라는 양심의 외침이 들려서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난다 할지라도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사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문제이지 환경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유명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많은가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있는가 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 수는 없지만 우리를 에워싼 대적이 너무 많아서 대적에게 핍박을 받거나 고난을 받아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죽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는 모르지만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이길 수 있게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을 기대하며 매달릴 수 있기 위해서는 깨끗함이 있어야 합니다.
저 공중에 구름이 일어나고 큰 나팔이 울려날 때 ♬
주 예수 오셔서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우리는 주님 앞에 늘 부족하지만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처지와 환경을 아신 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거기서 시인들이 위로를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잠시의 무질서와 고통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상한 마음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 시인은 ‘훼방이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라고 고백합니다. 훼방이 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가 마음속에 원하는 질서가 있는데, 이것들이 바깥으로 그대로 나타났을 때 마음과 바깥에 이루어진 질서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지면서 행복한 것입니다. 성격이 깔끔하고 단정한 사람은 초대를 받았을 때 아무리 맛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대접을 받아도 집안이 지저분하면 거기서 먹는 것 자체가 괴로운 것입니다. 저는 음식점을 찾을 때 음식이 맛이 없어도 깨끗하면 용서해줍니다. 꼭 그렇지는 않겠지만 환경이 깨끗한 집은 음식을 막 하지는 않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저분하면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기쁘지가 않습니다.
처음에 제가 목회를 하면서 심방을 할 때, 마음에 많은 걸림이 있었습니다. 누구네 집에 삼방을 갔는데 집안이 굉장히 지저분한 것입니다. 목사가 심방하러 간다는데도 말입니다. 그 자매에 대한 인상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저분한 가정을 가진 자매. 청소도 하지 않는 자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도 다 선입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정은 청소하지 않아도 교회에 와서는 봉사를 잘 했습니다. 그래서 선입견을 버렸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들이 바깥의 질서로부터 공격을 받을 때 이것은 환경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무너트리는 공격입니다. 그래서 깊이 고통을 받고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상한다’는 것은 ‘솨바르’(rb'v)인데 깨뜨려지는 것입니다. 사발이 깨지듯이 마음에 금이 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하게 되는 일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상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고, 미끄러지는 디딤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상함은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를 통해서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상한 마음은 불신자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않아도 인생의 허무함을 직시한다든지, 죽음 뒤에 자기도 알지 못하는 무한한 세계가 있다든지, 인과응보 법칙이 있어서 내가 잘못 행하는 대로 반드시 갚음이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함께 마음이 상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 때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신앙으로 해결되든지 아니면 마음이 미끄러져서 그런 고통을 잊기 위해 쾌락에 빠지거나 방탕의 길을 가든지 선택하게 됩니다.
통회하는 마음
성경은 상한 마음이 언약백성의 고유한 마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도 이것이 가능합니다. 언약백성의 고유한 마음은 상한 마음에서 한걸음 더 진전하여 통회하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통회하는 마음은 깨어진 마음이 아니라 으깨어진 마음입니다. 고기를 방방이로 두들기면 짓이겨집니다. 그것과 같이 형체를 잃어버린 종류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받으심 직한 마음입니다.
시인은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근심이 충만하여 자기의 처지를 긍휼히 여기고 위로할 자를 찾아보지만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상한 마음인데 철저하게 하나님께 집중하고 그 앞에 매달리는 마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도움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 매달리러 가는 길에 잠시 눈에 띄는 즐거움을 보고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잊어버린다면 그는 충분이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가난한 사람은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결론 및 적용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당시에는 쓰라리고 아픈 경험이었는데, 놀랍게도 후일에 생각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가져다주는 통로가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우리를 대적들에게 에워싸이게 하시고 원수들에게 훼방 당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섭리 속에서 당신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적당한 괴로움과 고난은 우리가 경건하게 살기만 하면 이 땅에 우리의 마음이 찰떡처럼 달라붙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하나의 좋은 자극제가 됩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늘로 가는 나그네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위로하는 자가 없을 때
“주께서 나의 훼방과 수치와 능욕을 아시나이다 내 대적이 다 주의 앞에 있나이다
훼방이 내 마음을 상하여 근심이 충만하니
긍휼히 여길 자를 바라나 없고 안위할 자를 바라나 찾지 못하였나이다”(시 69:19-20)
본문해설
시인은 계속해서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토로하고 있습니다. 대적들이 가만히 앉아서 시인이 망하기를 기다린다면 그것은 대적이 아닙니다. 대적은 시인을 멸망시키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동하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훼방한다’라고 하는 것은 많은 그림을 담고 있습니다. 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시인이 추구하고 유지하려는 삶의 질서들을 흐트러트리는 역할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면서 시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마음이 상함
이 상황에서 시인은 ‘마음이 상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히브리어로 ‘마음이 깨졌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릇이 떨어져서 금이 가버린 상황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깨뜨려진다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본인에게는 괴로울지 모르지만 신앙적으로는 아주 좋은 것입니다.
마음이 깨진다는 것은 결국은 마음이 가지고 있었던 작용이나 기능이 상실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여기는 자기 의에 대해 깨뜨려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자기 깨어짐이라고 합니다. 자기사랑과 자기 의가 깨뜨려지기 전에 먼저 마음이 상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상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마음, 생각, 삶, 이런 것에 대해 깊이 회의를 느끼고 그것을 고통스럽게 느끼도록 만들어주는 상황에서 일어납니다.
인생을 막 살다가 옆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게 되면 갑자기 이 세상을 사는 것이 정말 덧없고 헛되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런 마음의 상함은 특별은총이 아니라 일반은총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영원을 생각할 때 느끼는 인생의 허무라든지, 자기가 집착하고 좋아하는 것에 몰두하고 난 다음에 느끼는 허무함 같은 것들이 마음을 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은 그 자체가 좋은 마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나쁜 마음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중립적인 것입니다. 상한 마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신앙의 의해 잘 이끌어질 때는 주님을 간절히 찾고 구하는 마음으로 이어지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마음이 미끄러져서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쪽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한 마음의 작용이고 한계입니다.
시인은 훼방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이 상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시인은 상한 마음을 주님을 간절히 찾는 신앙으로 이어갔습니다. 훌륭한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노래도 있습니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세상이 허무하고 헛되기 때문에 오늘을 즐기자고 합니다. 대개 이런 노래는 젊은이들이 부르는 게 아니라 노인네들이 부릅니다. 자기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옳지 못한 반성입니다. 그런 것은 신앙적인 반응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은퇴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목사님과 지인이 통화를 했습니다. “요새 무슨 일을 하면서 지내세요?” 그랬더니 “요새 예수님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슨 말씀이세요?” 그러니까 이제 은퇴하고 죽을 때도 다가오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서로 누구냐고 물어보면서 “어디서 많이 뵙던 분인데.” 그러면 안 되니까 예수님이 누군지를 잘 알고 죽어서 만나면 덥석 안겨야지 버벅대면 되겠냐고 그랬답니다.
인생의 허무와 헛됨을 깊이 직시할 때 오히려 마음이 상하면서 ‘주님 밖에는 없구나.’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삶이 되겠는가를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
시인은 “근심이 충만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찬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아도 우리는 여전히 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해주시지만 여전히 우리는 약한 사람일 뿐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 일의 시작과 결말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휘두르는 힘과 무게가 너무 크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마음의 근심이 충만할 때 사람으로부터 오는 위로를 얻고 싶습니다. ‘나를 긍휼이 여겨줄 사람이 없을까?’ 사람들을 두루 살펴보니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는 사람도 없고 자기를 위로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들을 보내주셔서 주님을 찾는 마음을 독려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주님은 마음이 상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을 홀로 두심으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하십니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사람에게서 오는 위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위로를 대신하지 못하게 하시려고 주님은 매순간 강한 능력으로 우리를 붙드시고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하기 위해 큰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외로운 처지가 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시인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악인의 훼방이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근심이 가득할 때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로부터 긍휼과 위로를 구하지만 얻을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자기를 내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곤경 가운데 두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아니면 어느 곳에서도 곤경을 해결할 수 없도록 당신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고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훼방과 근심과 고통은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주님을 간절히 구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악인에 대한 탄원
“그들이 쓸개를 나의 음식물로 주며 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시 69:21-22)
시인의 탄원을 대하는 관점
본문은 시인이 고통 받는 가운데 악인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을 청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시편에 자주 등장하는 악인을 저주하는 기도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나옵니다. 시편에서 악인을 탄원하는 기도는 영적인 미성숙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된 것입니다.
첫째는 계시의 역사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아가페적인 사랑과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죄인에 대한 끊임없는 용서와 사랑의 개념은 신약시대에 와서야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약 1000년 전인 다윗의 시대로 가서 왜 그런 개념이 없냐고 묻는 것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문맥의 원칙에 위반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고 자기를 해치는 원수까지도 긍휼히 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특성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처지에서 3000년 전을 향하여 “그때는 왜 시인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고 악인을 위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묻는 것 자체가 시대를 너무 거슬러 올라간 것입니다.
이것을 ‘아나크로니즘’(anachronism)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조선시대에 누군가가 “김삿갓이 스포츠카를 타고 대관령을 넘었다.”라고 글을 썼습니다. 김삿갓이라는 인물은 그 당시에 있었지만 스포츠카는 20세기의 것이니 분명히 그 글은 김삿갓 시대의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20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이 시대를 거슬러 김삿갓과 연결시켜서 쓴 것입니다. 그런 것을 ‘아나크로니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순서는 먼저 한 가족, 한 족속, 한 나라를 택하셔서 독점적으로 그들을 사랑하시고 열방을 다루시는 것을 보여주시면서 우주적인 사랑을 계시하십니다. 그래서 본문을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해치는 악한 자들을 저주하는 내용의 핵심이 그들에 대한 앙심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나를 해치는 사람들에 대한 앙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인간의 질서를 훼손시키고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악인을 향한 시인의 저주와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영적인 미성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이 사람들처럼 우리를 괴롭히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큰 사랑이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누구도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지 않고 참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악인에 대한 탄원
그런 맥락에서 시인은 원수들에게 받은 대접을 하나님 앞에 토로하고 있습니다. 식물은 배가 고프니까 배부르기 위해서 먹습니다. 배부르게 먹으면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냅니다. 그 힘이 있어야 생각에 있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생각에 있는 것을 마음으로 옮기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악한 원수들은 시인이 배가 고파서 식물을 구할 때 쓸개를 주었습니다. 동물의 쓸개는 안 먹는 것입니다. 쓸개는 먹을 수 없는 아주 쓴 것을 이야기 합니다. 목이 갈할 때 물을 주어야 하는데 초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초는 음식에 약간만 치는 것인데 그것을 물을 대신해서 마시게 했으니 진저리 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악인의 모든 보응을 갚아달라고 빌고 있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밥상이 어떻게 올무가 됩니까? 21절에 나오는 그림이 보여주는 것은 포로가 된 상태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됩니다. 밥상이 올무가 된다는 것은 밥상을 받을 때 조건부로 받는 것입니다. “이 밥을 먹으려면 자백을 해야 된다.” 범죄자의 경우 그럴 것입니다. 혹은 “너는 이 밥을 먹고 모두 털어 놓아야 한다.” 밥상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건부로 주어져서 밥을 먹고 난 후에 더 커다란 올무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옵소서” 평안을 누리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 하나의 덫이 되어서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짐승들에게 덫에 한번 걸린다는 것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깊은 웅덩이에 갇혔든지, 줄을 건드렸더니 위에서 커다란 망이 떨어지면서 망에 갇히게 되었든지, 창에 꿰이게 되었든지, 어떤 경우든 간에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상태가 덫에 걸린 것을 말합니다. 저희들이 자신을 박해하고 언약백성들에게 악을 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갚아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탄원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보복을 당하고 하나님의 공의의 법도가 올바르게 서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시인의 간절한 갈망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속성이 계시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우리 삶에 적용할 때, 우리를 에워싼 세계 안의 많은 악과 죄들을 보면서, 죄인은 사랑하고 용서해도 주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악과 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고 단호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시 69:23-24)
본문해설
계속해서 시인이 원수들을 탄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시인의 때에는 아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열망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부어달라는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원수를 향해 가져야 할 마음
여기에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원수관계가 된 사람들에 대해 이런 기도를 하면 안 됩니다. 끝없이 용서하라는 것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계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원수를 향해 하나님의 분노를 부어달라는 이 기도보다 더 배울만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간절한 갈망입니다.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싸도 개인적인 원한을 가지고 기도를 하는 것은 자신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교회를 박해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이것입니다. 그 사람들 속에 흥왕하고 있는 악과 마음속에 있는 죄를 깊이 미워하고 하나님이 그것에 진노를 쏟아 부으시기를 기도할 수 있지만, 그 사람들을 향한 사랑은 끝까지 포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 자비와 사랑의 율법은 굉장한 것입니다.
성경에 예고된 것이지만 오늘날 사람들은 작은 일에 분노하고 원한을 품습니다. 그것은 본인이 얼마나 악한 기질이 있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 넘치게 되면 그 사람이 악을 행하는데도 죄와 사람이 나눠져서 마음에 다가오게 됩니다. 그것을 구약의 성도들은 못 느꼈다고 봅니다. 아마 거의 느끼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시대가 도입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시는 비밀입니다. 어떤 오류나 잘못이 생기면 우리는 당연히 그것과 싸우지 않습니까? 그러나 싸우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커다란 문제입니다.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시인은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어두워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육체적으로 말하면 소경이 되는 것 아닙니까?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허리’는 성경에서 모든 힘의 근원입니다. 힘이 빠져나가고 떨리니까 자기 몸을 지탱할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눈도 멀고 허리를 지탱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전쟁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뜻입니다.
“주의 분노를 그들의 위에 부으시며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분노를 붓는다’라는 표현이 성경에 자주 등장합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멸망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분노가 부어지는 것입니다. ‘붓는다’라는 표현은 서서히 젖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물을 확 부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불이 잘 타다가 물을 확 부어버리면 한 번에 꺼지지 않습니까? ‘붓는다’라는 표현 자체가 예상치 못했다가 한 번에 확 밀어닥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악인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서서히 이해되어서 사람들이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에 부어져서 그 사람 속에 임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확 부어지는 갑작스러운 진노, 하나님의 분노, 더 나아가서 맹렬한 노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불의 그림입니다. 불이 맹렬하게 타오르면 끌 수 없습니다. 불이 붙으면 계속 타들어가서 결국 어느 지점에 확 삼켜버리지 않습니까? “주의 맹렬하신 노가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꺼지지 않고 계속 타들어가서 악인이 있는 곳을 태워버리기를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과 괴로움이 얼마나 컸으면 악인에 대해 이런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 자신과 교회와 세상 속에 있는 죄를 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으려는 자아를 보고, 교회 안의 불순종을 보고, 세상의 죄악들을 발견하려고 할 때,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신앙으로 살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죄와 이웃의 죄를 바라보면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한자의 탄원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시 69:25-27)
본문해설
계속해서 악인에 대한 탄원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떤 배경에서 이 시가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시인이 굉장히 커다란 고통가운데 이 시를 쓴 것은 분명합니다. 시인은 많은 고통 중 상당부분 하나님 앞에서 징계를 받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본문은 악한 자들에게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이방사람들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언약백성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69편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시인은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합니다. 이것은 심판의 문맥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실 때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을 완전히 멸하도록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을 치를 때 사람들을 남김없이 죽이고 멸하라고 명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한 심판의 맥락을 생각하면서 보시면 됩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사람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도시 자체를 쓸어버립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텔’이라고 부르는 것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명을 보면 ‘텔아비브’, ‘텔 엘 아마르’ 같이 ‘텔’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텔’이 히브리어로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고대 국가들은 다 그렇습니다. 점령을 하면 모조리 부숴버립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쉬웠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대게 흙으로 집을 짓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부서져 버립니다. 그리고 그 위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도시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되고 취락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다시 부숴버리고 새롭게 짓는 것입니다. 부정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금세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발굴을 해보면 케이크처럼, 한 시대가 살던 흔적이 나오고 그 위에 다음 도시, 그 다음 도시, 그 다음 도시의 문명이 발견됩니다. 옛날에는 도시를 결정할 때 물이나 산, 방어에 적합한 지형들이 고려되었습니다. 갑자기 허허벌판에 도시를 세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위험한 일입니다. 그래서 도시가 있던 곳에 도시가 계속 세워지는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날 때 쓸어버려서 사람도 죽이고 집도 전부 파괴하는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면 됩니다.
“저희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옛날에 나라에 역적이 생기면 반역한 한 사람만 처단하지 않고 거기에 엮여 있는 삼족을 멸한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구족을 멸했다고 합니다. 얼굴도 알지 못하는 친척 때문에 다 죽는 것입니다. 그런 끔찍한 형벌을 내리는 이유는 아예 보복의 싹을 잘라버리려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그렇게 간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이 심하고 힘들었으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탄원을 하겠습니까? 그들의 죄상을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대저’라는 말은 ‘그러므로’라는 뜻입니다.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이것은 조롱한 것입니다. 사람이 슬프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가만히 두어야지, 주위 사람들이 수근 거리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이런 일을 당했대.” 옆에서 맞장구를 치면서 “평소에 하던 꼴을 보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중적인 그림을 보게 됩니다. 시인은 자기 자신을 의화시키는 것입니다.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그가 하나님 앞에 잘못을 해서 주님이 치시고 징계를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고 고통을 당하고 상하게 하셨다는 것도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하나님이 이 사람을 고치기 위해서 치시고, 그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마치 부모한테 얻어맞은 아이가 밖에 나가서 동네 친구한테 또 얻어맞는 격입니다. 설움이 복받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는 야단을 맞고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잘못했기 때문에 주님은 나를 치실 수도 있고 나를 아프게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악한 자들이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줄을 알고 핍박을 합니다. 주님께 징계를 받은 내 모습이 초라해서 조롱합니다.” 설움과 하나님을 향한 탄원의 마음이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때리시지만 치고 때리시는 깊은 고통 속에서도 주님과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과오로 인하여 주님이 나를 때리고 치실 지라도 주님과 나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사랑의 관계에 변함이 없음을 확신하는 시인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때리시는 것은 오히려 그를 사랑하고 고치기 위함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징계 중에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는 종종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하나님께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소외되고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아프고 괴로울 때 하나님은 거기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편하게 먹고 살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올바로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근심하게 하시고 아프게 하시고 쓰라리게 하시고 믿었던 것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은 우리의 인생을 이끄십니다. 주님이 비록 자기를 치고 상하게 하셨어도 다른 이들이 자기를 핍박하고 조롱하는 것을 하나님이 차마 두고 보지 않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보호와 인도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시인이 징계 중에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원수들에게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의존하며 살도록 창조하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존하면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서도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주님을 의존하는 마음이 더욱 생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시인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원래는 “죄악에 죄악을 더하사”라고 나옵니다. “이들이 죄를 더 짓게 해주십시오.” 이렇게도 번역이 됩니다. 죄에 죄를 더하지 못하게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억제하는 은혜를 베풀지 마시고 저희들이 갈 데까지 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징벌이 크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들이 짓는 죄를 더 해달라고 애원하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오게 될 하나님의 커다란 심판과 책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해 주십시오.” 입니다. 법에는 ‘가중 처벌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똑같은 죄인데 이러한 입장에서 이 죄를 짓는 것은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원래는 3년 정도 살아야 하는 범죄이지만 6년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법을 만드는 이유는 특정한 죄를 저지를 때 자기가 받는 법이 굉장히 무섭게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지나가다가 사람의 지갑을 슬쩍 훔쳐 가면 도둑입니다. 그런데 “돈 내놔.” 그리고 가져가면 강도가 됩니다. 둘 이상이 정교하게 계획을 짜서 같이 협박을 하면 특수강도가 됩니다. 그러면 가중처벌을 받는 것입니다. 범죄에 대한 형벌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결코 주님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 긍휼을 베풀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적용시켜야 되느냐 하면, 주님께 피하는 신앙은 배우고 원수에 대해 징벌을 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에 넘치는 큰 사랑을 알았던 신약의 성도답게 용서해야 합니다. 주님이 사랑이 나를 향해 오래 참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도 참으시고 주님의 사랑을 받은 나도 참으면서 저들도 주님의 의에 들어오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약성도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를 미워하고 고통 속에서 주님께 피하는 신앙은 배우고, 그들의 저주와 멸망을 구하는 기도는 사랑과 용서와 돌이킴으로 바꾸고, 그 대신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영광에 대한 열망은 계승하는 방식으로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결론과 적용
결론적으로 우리가 피할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애매히 고난을 당하든지, 오해와 거짓으로 시련과 모함을 당하게 되든지,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주시는 고통이든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주님 앞에서 깊이 아파할 때마다 주님께 피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를 치셨으나 싸매실 것이요 나를 때리셨으나 고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피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의 가장 나쁜 것은 주님을 향해 앙심을 품는 것입니다. 앙심까지는 아니더라도 토라지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히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악해 보이는 일이 일어나면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의 질서를 거슬렀기 때문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거슬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악과 고통의 원인이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토라짐, 앙심, 이런 것들은 우리 영혼의 생명을 말려 죽이는 무서운 마음의 범죄가 됩니다. 좋고 잘 된 일이 있으면 모두 주님의 은혜이고, 나쁘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시 69:27-29)
본문해설
시인은 계속 하나님께 탄원을 합니다. 탄원의 내용 중 두 가지가 본문에 나타납니다. 첫째는, “저희들이 지은 죄가 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죄악이라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주셔서 하나님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시옵소서.” 그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ʻ주의 의ʼ의 개념
시편 31편에 나오는 ‘주의 의’의 경우, 마틴 루터가 ‘복음적 의’의 개념을 깨닫게 된 하나의 단추가 되었다고 역사적으로 보도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주의 의’를 마틴 루터처럼 ‘복음적 의’를 가지고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계시사적으로 당시의 문맥에서 본다면 구약 자체에서 발전된 계시의 정도까지만 생각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마틴 루터의 경우, 복음 시대에 살고 있고 복음에 대한 깨달음이나 경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구약으로 들어갔으니까 구약이 찬란하게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마틴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주의 의’의 개념을 복음적인 개념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보는 것입니다. 계시사적으로 볼 때 이 사람들이 ‘주의 의’라고 하는 것들은 후일에 발전되면서 복음적으로 의로 나타날 것들은 충분히 씨앗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편만 놓고 보더라도 시인이 이것을 기록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기록한 사람보다 해석하는 우리가 그의 글을 더 정확하게 해석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은혜를 많이 받고 공부를 많이 했다는 전제 하에서 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 설교를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시인이 설교를 통해 우리가 얻은 것 같은 깨달음을 가지고 그 시를 써내려갔을 것이라고 긍정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자라도 요한보다 낫다.” 이것은 천국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신약의 복음의 계시가 주어질 때의 축복성에 대해 이야기한 것입니다. 열심히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며 살아갈 때 어마어마한 복음과 진리의 빛이 들어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신자의 차이는 짐승과 사람의 차이와 같습니다. 교육을 받지 않으면 거의 짐승과 다름이 없습니다.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이것을 루터가 해석했던 것처럼 복음적 의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정확히 말하면 언약백성들이 누리는 의의 혜택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기준은 율법을 통해 계시되었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럼으로 주의 의에 부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파생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안 지키며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올무처럼 부담스러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말할 수 없이 감사하고 고마운 것입니다. 요즘 100대 기도제목을 내놓고 기도하는데 기도를 안 하려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부담이겠지만 기도하려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는데 읽으면 기도가 되니 감사한 것입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그런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총체적인 계시가 넓은 의미의 율법이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사람에게 “나 하나님은 이런 것을 원한다. 저런 것을 원한다. 이것을 원하지 않고 이것을 싫어한다.” 이런 의사표명은 말할 수 없는 행복이 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의 의’를 누리를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복음적인 의와 관련이 있습니다. 순전하게 율법을 지킴으로만 하나님의 의에 부합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구약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생각 못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나를 구원해주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만족을 드리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당신의 뜻에 합당하지 않아도 그분의 자비로운 성품으로 받아주시는 것이야말로 외부로부터 덧입혀진 의인 것입니다. 그런 개념이 여기에 들어있습니다. ‘주의 의’를 누리며 산다는 것은 의가 발현되어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고 벌을 주시는 것이 불신자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백성과 나라라 할지라도 죄악이 가득차고, 역사를 움직이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들의 죄악을 보시면서 징벌하고 멸하십니다. 그 점에서 그들도 하나님의 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혜택을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이것은 오직 언약백성들만이 누리는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
다윗이 69편을 써내려갈 때 등장했던 수많은 악인들은 모두 언약백성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언약에 참예할 수 없는 사람들, 오늘날로 말하면 거짓 신자들이 교회에 있는 것처럼, 언약백성 중에도 그 약속을 향유할 수 없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언약백성 중에 속해 있지만 그들은 ‘주의 의’에 들어올 수 있는 백성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신학적으로 교회에서 참된 신자와 거짓 신자를 나눈다고 할 때 이것은 사랑이 없어서 분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은 밖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 사람들과는 삶이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분리주의의 개념이 아닙니다. 순전한 교회가 되도록 몸부림치는 것은 우리 속에 남아있는 죄를 가지고 성화를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것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 안에 죄악 된 요소가 여전히 있는데 자기 의에 빠져서 자신은 건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진실하게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의에 찬 사람 안에는 그리스도가 없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어느 청교도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길들여진 짐승이라고 표현했겠습니까? 자신 안의 죄를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비회심자들 때문에 고뇌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야합을 하게 되고, 회심하지 않은 무리들이 교회에 주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조직적으로 반항을 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지 못하도록 하고 사람들은 반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외관적으로 아무리 클지라도 넘어간 것입니다. 그것들을 깊이 고민하면서 몸부림쳐야 합니다.
저는 몇 달째 삼위일체 책을 쓰고 있습니다. 어제도 밤 12시까지 책을 쓰다가 갔습니다. 오늘날 삼위일체를 안 믿으려고 하는 시도들이 있습니다. 정통적으로 내려온 교리를 비틀고 기형화해서 전체적인 신학 구도의 변화를 가져오려고 하는 시도들은 신학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신앙의 문제입니다. 자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성경에 대한 경외심을 갖지 못한 채 신학을 하니까 결국 자기가 원하는 하나님을 신학 속에 집어넣고 비틀어서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수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가치가 없는 것들입니다. 논리만 있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 전파되고 전파되면서 커다란 설득력을 갖고 신학이 사회학처럼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데, 이것은 단순히 악인에 대한 반감과 미움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라기보다 그들로 인해 훼손될 하나님의 교회의 아름다움에 대해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갈망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것입니다.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생명책이라는 이야기가 구약성경에 모세의 기도 속에 나오고 여기에서도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생명책의 개념을 계시록에 있는 생명책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는 아직 내세사상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은 때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생명책에서 도말하사”라는 개념이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히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받은 공동체로 등록되어 하나님 앞에 향유하고 누리는 상태라고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봅니다.
구원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관점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때이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생명책’이 계시록에 나오는 최종적인 구원을 뜻하는 생명책이라고 말할 때는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첫째는 계시가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끌어온다는 것이 해석상 맞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만약에 그렇게 이해를 했다면 지우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생명책에 적어 놓으셨는데 그것을 지우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계시의 발전의 정도와 문맥에서 본다면 이것은 언약백성으로서 등기된 이름일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습니까? 지워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언약백성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언약백성 중에는 참되고 진실한 언약백성과 가등기 상태의 언약백성들이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다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마엘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언약백성이지만 불신앙 때문에 떨어져 나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시인은 “의인과 함께 저희들이 기록될 수 없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하나님여, 구원하소서˛
마지막으로 후렴구처럼 시인의 기도 속에서 호소가 반복됩니다. “오직 나는 가난하고 슬프오니 하나님이여 주의 구원으로 나를 높이소서” 여기에서 나오는 ‘구원’은 영육간의 모든 상태를 의미하는 포괄적인 것을 말합니다. 우선적으로는 악인에게 고통 받는 상태에서 자기를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신학함과 철학함의 전범(典範)으로 다윗을 삼은 가장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가 철학책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던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의 제사를 하나님 앞에 진실하고 간절하게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제사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면서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황소를 드림보다 더욱 기쁘시게 할 것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함
시인은 지금은 악인에게 고통을 받고 있지만 결국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광대하시다고 할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그 앞에서 올린 기도와 관계가 있습니다. “악인을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시고 주의 의에 들어오게 말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자신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광대하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성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주 무한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것을 찬송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현실은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악인들이 처처에 행하고 있지만 광대하신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 곳이 없으시고 형언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세계 안에 계시면서 당신의 통치를 실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들에게는 보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다면 왜 이렇게 세상이 어지러운 것입니까? 심지어는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대적하는 인간들이 버젓이 살아서 시인에게 핍박을 가하고 고통을 주는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릴 뜻을 가지고 계실 텐데 어떻게 인간들이 하나님의 통치에 도전하고 거스르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이 세계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속에서 생생하게 경험하며 살지 못하면 하나님 살아 계시다고 고백을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고백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세계와 관계를 가지고 계시고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크고 위대하셔도 세계를 직접 다스려 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하나님의 크심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며 이해한다고 한들 그것이 인간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늘이 한없이 커서 온 지구를 뒤덮고 있어도 오늘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의지를 가지고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십니다.
반역을 선으로 돌이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기계처럼 창조하시고 다스리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자유라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리실 때 바꾸지 않기로 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한편으로는 인간에 의해 거절당하고 거역당할 수 있는 뜻이 있습니다. 성경이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 뜻이 계속 꺾이고 위반되고 인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반역이 하나님의 뜻을 꺾는다기보다는 인간에 의해서 거절당하고 꺾일 수 있도록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생각을 하게 되면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왜 인간들의 반역과 도전을 하나님이 허락하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뜻을 꺾고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통해 더 큰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베드로 사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거절하고, 어떤 사람은 받아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안 믿으려고 뜻을 세운 것 같습니다. 그것만 놓고 보면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인데 인간들이 불순종하고 믿지 않습니다. 교회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아는 일에 온전히 하나 되어 흠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전한 교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됩니까? 욕을 먹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고 때로는 교회가 세상에게 손가락질을 받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그렇게 만드신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있지만 인간들이 순종하고 당신의 계획에 함께 참여함으로 당신의 의지가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살지 않고 거꾸로 살아가면 잘 안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교회를 통해서 온 땅과 세상에 당신의 창조와 구속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는 변함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면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하시는 사랑이 감격적이고 기쁘고 잊을 수 없는 일이 되었던 것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무지와 어둠 속에 살며 주님께 반역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반역한 것이 우리에게 선을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도전하며 살았던 것은 결국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의 과거를 미끄럼 삼아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용서하신 것이 얼마나 위대한 사랑인지를 가슴 속에 심어주셨습니다. 모든 것들을 이성적으로 다 설명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시인이 “광대하시다 할 것입니다.”라고 노래할 때 마음에 있었던 그림이 이것이었습니다.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
더욱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제사
“이것이 곧 소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황소는 제사를 드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릴 수 있는 헌제 가운데 가장 큰 제물이었습니다. 속죄의 제사제도를 보면 하나님은 무리가 없으신 분이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너희 죄를 속하려면 황소 한 마리씩을 가지고 와서 바쳐야 한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너희의 형편대로 할 것이다.” 하시면서 여러 가지 제물들, 아주 작은 새부터 시작해서 황소까지 바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중에서 황소는 최고의 제물이었습니다. 황소에게는 당연히 뿔과 굽이 있는데 ‘커다란 뿔과 굽이 있는 황소’라고 묘사한 이유는 완전한 제물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황소가 온전히 자라야지만 뿔이 나오는데, 제물 중에서도 흠 없는 자격을 갖춘 최상의 제물을 드리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감사가 그보다도 여호와께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진 황소를 드려도 사실 그것 또한 하나님의 것입니다. 물건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이고 믿음 생활입니다.
시인이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찬양으로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에 대한 사랑은 주님 자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시편 23편에서 배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게 그분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찬양이 하나님께 가장 받으심 직한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제물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에는 신앙도 자리하고 불신앙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자리하고 세상을 향한 사랑도 있습니다.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쏟아나기도 하고 하나님을 향한 반역이 도사리고 있기도 한 것입니다. 마음은 두 가지가 치열하게 다투는 전쟁터입니다. 성경은 지킬만한 것보다 마음을 지키라고 우리에게 가르쳤던 것입니다.
시인은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할 것이라는 고백을 합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제사는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하는 마음의 찬양이며, 그것이 하나님께 돌리는 영광입니다. 시인은 원수가 파멸되는 것을 보고서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고백했지만 신약시대의 큰 사랑과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원수들을 축복하고 하나님의 이름과 광대함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올렸던 제사보다 얼마나 더 아름다운 제사가 되겠습니까?
마음을 시원케 하는 구원
“온유한 자가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시 69:32)
온유한 자의 샬롬
“이를 보고 기뻐하나니”에서 ‘이를’이라는 것은 시인이 악한 자들의 무리로부터 하나님의 건지심을 받고 감사함으로 하나님은 광대하시다고 노래하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은 ‘온유한 자’라고 나옵니다. “온유한 자가 기뻐하나니”라고 되어있습니다. 구약성서에서 나오는 ‘온유함’이라는 것은 언약백성 사이에서만 사용되는 인격적 특성입니다. 온유함의 원천은 평화입니다. 평화 때문에 온유한 것입니다. 그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샬롬’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것 때문에 다른 언약백성들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온전한 평강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당해도 쉽게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안정된 가운데 온유한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민수기 12장에 나오는 모세입니다. 많은 백성들이 모세에 대해서 도전하고 심지어 자기와 함께 사역의 길을 걸어갔던 미리암과 아론이 “하나님이 모세와만 말씀하셨더냐?”라며 도전하고 대들 때도 “비난받을 때에 모세의 온유함이 온 지면에 승 하였더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자신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있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샬롬입니다. 저들이 하나님 뜻을 알지 못해서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평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잘못된 일을 할 때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억울함을 가까스로 억누르고 용서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저 사람이 하는 행동이 나를 격동시킬 수 없을 정도로 초연해지는 것이 바로 평강입니다. 용서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용서해야할 만큼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이 정착해서 나라를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온갖 신들이 와서 “너희가 모여서 나라를 세우면 나를 섬겨라.”고 요구했습니다. 포세이돈이 와서 말하길 “너희들이 나를 섬기면 모든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겠으니 나를 섬겨라.” 하자,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테나가 와서 하는 말이 “너희가 만일 나를 섬기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를 택할까요? 당연히 아테나를 택할 것입니다.
힘들게 자기를 꺾고 용서하는 것보다 훌륭한 것은 용서할 것조차 없이 마음이 요동치 않고 초연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살아가면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런 일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도 내가 초월적인 은혜에 붙잡혀있으면 상대방의 행동이 상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집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달플까? 저렇게 헛일을 많이 하느라 얼마나 힘들까?’ 상처가 되지 않고 초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인이 지나가다 “할머니 바보” 하면 마음이 상하겠지만, 조그마한 꼬마가 지나가다 “할머니 바보”라고 한다면 전혀 화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 초연함은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옵니다.
온유함의 근원, 까리따스의 사랑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 없는 마음을 먹고 부끄러움 없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적인 법에는 우리가 미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구김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온유함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쉽게 노여워하지 않고 요동치지 않는 마음, 그것을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아파데’(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윗덩어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을 덕으로 여김)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오히려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과의 평화와 사랑 때문에 웬만한 것에는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상태가 온유함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런 사람들이 이를 보고 기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잠시 하나님이 안 계신 것같이 살던 것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구원의 놀라운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온유한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사랑은 안으로 오그라드는 경향이 있고, 까리따스의 사랑은 밖으로 펼쳐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사랑은 폐쇄적 사랑이고, 까리따스의 사랑은 개방적인 사랑, 혹은 유통하는 사랑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자기사랑이 안으로 오그라들면 짐승만도 못해집니다. 자녀도 부모도 없이 오직 자기 행복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은 그것이 깨트려지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면 관심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옮아갑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그것이 마음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이 악인에게 고통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그것은 자기의 이익이 침해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이 찌그러지고 하나님의 법도가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해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다면 그는 진정한 온유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신약은 이런 구약적인 배경을 밑에 깔고 전개됩니다.
예수님이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라고 할 때 ‘온유’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마음에 하늘나라를 소유하고 그것 때문에 세상에서 이해를 초월해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샬롬’을 누리며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영향력을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확장해나간다는 의미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면 추종자들을 만들고, 권력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면 아부자들을 만들지만, 온유한 인격으로 사람들을 감화시키면 그가 온 땅의 진정한 지배자가 됩니다. 그것이 칼 한 자루 없이 예수님이 세상을 지배하시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일치의 삶
“그런 사람들이 기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이것의 의미는 어그러진 언약백성들이 본분에 어긋난 비루한 행동을 하고 의인들에게 박해를 주는 일이 부지기수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일어났고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어디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 상당수의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찾는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라쉬’(vr'D)입니다.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너무 소중해서 갈망을 가지고 그것을 찾아 헤매고 구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 가까이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절실한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육체를 가진 한정된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다라쉬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입니다. 우리가 만일 동전을 잃어버렸다가 찾으면 “아, 찾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을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서 자기소유로 두고 안정감을 느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물질을 가지고 찾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을 말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이렇게 거룩한 삶을 살아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찬란한 속성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이유는 그 빛에 어울리는 마음을 가지고 거기에 부합하는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일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이스라엘을 선택하면서 간절히 기대하셨던 것이 일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먼저 당신의 속성을 비춰주시면 언약백성들이 깊이 감격하고 기뻐하면서 주님 성품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주님의 속성의 빛을 직접 알 수는 없지만 인간들을 통해 나타나는 속성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알리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지면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은 세상 어디서든지 볼 수 있습니다. 선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악인의 멸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속성의 빛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의 영적인 깊이는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서 비춰지는 하나님의 속성의 빛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속성의 빛이 사람들에게 쉽게 인식되는 방법은 사람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흘러나올 때입니다.
어느 주일학교 학생이 고백하기를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성경에서 많이 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가르치시며 눈물을 흘리셨을 때, 나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세계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가득해도 그것은 다른 증거에 의해 가려서 희석되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역사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언약백성들에게 커다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온유한 자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병행법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너희들아 너희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 의로운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악인들이 판을 치는 광경을 보면서 심령이 죽은 자와 같이 되었다가 하나님이 악한자의 손에서 의인을 건지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은혜의 광경을 목격하면서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아주 놀라운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고난을 이길 담대함을 마음에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에 살면서 가장 커다란 영광은 주님의 아름다운 속성을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드러내며 살아가는 삶이 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고 그렇게 알아가는 삶이 복된 삶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궁핍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로다”(시 69:33-34)
본문해설
앞 절에서 시인은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악인들의 행위를 하나님이 갚아주시도록 탄원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와서 자신이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깨달은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앎
시편 전편에 흐르는 하나님의 경험에 대한 패턴이 있습니다. 자신이 겪는 생사간의 고락을 먼저 노래합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선대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기도하고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갚아주시도록 탄원하기도 합니다. 거기에서 눈물과 기쁨, 슬픔과 고통, 환희, 이런 것들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언약백성이 아닌 사람들이 경험하고 살아가는 인생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개별적인 사건들 속에서 희로애락을 경험하고, 그 안에서 발견하게 된 사실들을 가지고 하나님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속성이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과 기쁨, 슬픔과 고난을 주셨는지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셔서 자신들을 선대해주시는데 그 과정에서 인간들이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게 됩니다. 거기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뜻과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불순종이 만나게 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악과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면, 빛이 공기 중에서 똑바로 비치다가 다른 매질, 물을 만나면 빛이 꺾입니다. 그것을 굴절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물 층을 통과해서 공기가 나오면 빛은 꺾어진데서 다시 바르게 굴절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하나님은 좋은 것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실 뿐만 아니라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노래와 찬송으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 시인이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신앙 안에서 성숙해진다고 하는 것은 예전에 잘 모르던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세계와의 관계에서의 출렁거림이 전부가 아니라 이것을 뛰어넘는 변함없고 일괄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에 대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자신의 삶이 안정되고 일관성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성숙을 부르짖어도 하나님에 관한 앎이 없이는 성숙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들은 그 패턴을 따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이라는 것은 고통하는 인간의 세계에 대한 공통적인 답변입니다.
궁핍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이것은 기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기도가 없어도 세상이 고통으로 신음하면 그 고통의 부르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고, 하나님이 이 땅을 살피십니다. 여기서는 그런 포괄적인 의미보다는 시인이 악인들로 인해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귀를 기울이시지만, 고유한 의미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 자신의 마음을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어 하나님께 쏠린 사람, 모든 고통과 괴로움에 힘겨워하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의 의미입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는데 방해를 받지 않는 믿음, 이것은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는 주님과의 만남의 조건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행위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몸에게 명령하면 말을 듣는데 신기하게도 마음이 마음에게 명령을 하면 마음은 또 다른 마음의 명령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의 마음이 깊이 낮아지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하게 되는 마음의 가난함, 그 자체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주님과의 간절한 만남을 위한 마음의 가난함과 궁핍함은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부유해지기를 거절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여호와는 궁핍한 자를 들으시며 자기를 인하여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나니”, 수금되었다는 것은 옥에 갇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속박을 받는 사람, 악인을 인해서 속박을 받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살다가 환경의 억압을 받는 사람들을 주님께서는 멸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언약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입니다. 악인 때문에 잠시 하나님의 정의가 굳는 것 같고,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에서 소외되고 악인에게 핍박을 받는 때가 있지만, 이것은 결국 공기 중의 빛이 물을 통과하면서 굴절되는 것과 같아서 불변하도록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막거나 변경시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양하게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면서 이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의 빛을 비추심
시인은 “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그 중의 모든 동물도 그리할지로다”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적합한 영광입니다. 인간에게 부요함이란 하나님 편에 서서 의를 위해 박해를 받고 마음이 가난해져서 주님을 의지하고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광에 어느 정도 참여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존귀한 사명은 주님을 알고 주님께 비치는 속성의 빛을 자신과 관계하는 사람들과 세계에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악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공평한 빛이 굽어져서 나타나지만 의로운 언약백성들은 자신이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속성의 빛을 그대로 비춰주는 것입니다.
속성의 빛을 비춰준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의 어떠하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삶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속성에 관해서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속성들이 구획이 지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단순하시고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지신 분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관계를 맺으시면 풍부하신 하나님으로, 불의한 자들과 관계를 맺으시면 엄정하고 공평하신 하나님으로,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실 때에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속성이 올곧게 나타나는 것처럼 자신이 사람들과 관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올곧게 나타내 보일 때 사람들은 언약백성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을 섬기는 최고의 삶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사람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삶은 사람에게서 흘러나오고 그 삶은 다시 사람을 만듭니다. 자신에게도 그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백성들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시 69:35-36)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고통 받는 중에 당신을 찾는 언약백성들을 선대해주신다는 이야기가 앞 절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시고 궁핍한 자를 들으시고 수금된 자를 멸시치 아니하시는데 결국은 모든 땅의 만물들이 주님을 찬양하고 바다와 동물들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 안에서 살아감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시리니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이 깃들여있는 특별한 도성, 시온을 이야기합니다. 특별한 도성 유다의 성읍을 거론합니다. ‘시온’이라는 단어는 여기에 명백히 나오지 않는 보역입니다. 뒤에 나오는 것이 유다 성읍이라는 지역을 나타내니까 병행법으로 봐서 35절에 이 보역을 넣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온’을 넣은 것 같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그 산지를 구원하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언약백성들에게 주시는 기업이 영원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 땅에 살아도 좋다.”라고 하면서 집을 못 짓게 한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쫓겨날 수 있는 난민과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 성읍을 건설하고 도시를 세운다면 그 땅을 영구하게 소유로 주는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관계가 임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고 끊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이루어진 기업이기 때문에 지켜주실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고 그 언약을 따라 당신의 뜻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과 맺은 관계가 영원한 언약의 관계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불순종하고 멀리 떠나면 그 확신이 우리에게서 옅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진실한 신뢰와 언약에 대한 확신은 나란히 갑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그런 하나님의 참된 사랑과 은혜에 대한 고백 속에서 살지 못한다면, 언약에 대한 확신도 우리에게서 함께 사라집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파기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없다는 것도 아울러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좋으면 그 사람이 말하는 것도 좋고 말하는 내용도 믿어지지만, 그 말이 신뢰가 안가고 그 내용이 믿을 수 없어진다면 그 사람에 대한 신뢰도 함께 깨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수없이 많은 선택과 결정을 하게 될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 그분의 말씀에 대한 특별한 믿음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약속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내리는 결정과 신뢰할 수 없이 내리는 결정, 사이에는 말로 할 수 없는 큰 격차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은 이 원칙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을 누림
“무리가 거기 거하여 소유를 삼으리로다” 이렇게 나옵니다. ‘무리’는 언약백성들의 무리인데, 하나님이 시온을 구원하시고 유다 성읍들을 건설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이 항구적으로 머물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니까 흩어졌던 언약백성들이 돌아와서 하나님의 영원한 은총의 약속이 깃들여져 있는 거기에 거하면서 소유를 삼는 것입니다. 소유를 삼는다는 것은 시온과 유다의 성읍을 누린다는 이야기도 되고, 거기에 거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소유를 확대해간다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저는 전자에 더 마음이 갑니다.
이것을 시로 지었을 때 다윗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들이 무엇인지 모두 다 알 수는 없습니다. 다윗은 왕정이 시작되기 전, 사사들의 시대를 거치면서 수시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았던 역사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은 언약 백성들이 순종하고 당신의 뜻대로 행하면 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을 때 나라를 빼앗기고 시련과 환란이 왔던 사실들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이 부분을 시로 지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만약 이 시의 저작연대가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한 이후의 말년이라고 설정한다면, 그는 궁에서 쫓겨나 성소와 결별해야할 때도 있었고, 악인에게 지배되었던 때가 있었고, 하나님이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주신 때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지었을 수도 있다고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은유나 묘사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들을 반추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은 그분이 주신 땅과 그 언약이 깃들여있는 성에서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심오한 땅 사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 땅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연합의 관계가 신약시대에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삶의 모형이라고 추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무리가 거기에 거하면서 소유를 삼으며 하나님과 더불어 복락이 있는 삶을 누리는 광경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축복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종들의 후손이 또한 이를 상속하고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가 그 중에 거하리로다” 하면서 병행법을 쓰고 있습니다. 상속하는 사람이 그 이름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종들의 후손이 바로 그 이름을 사랑하는 자이며 그 중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축복은 당대 이스라엘 백성들만 누리는 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후손들까지도 받을 복임을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의무, 하나님의 기업을 보존함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주시고 그 기업을 누리면서 살게 하셨을 때, 이 복락은 후손들에게도 상속됩니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며 우리가 주님께 받았던 기업을 누리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기업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분명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헤릿 이밍크’(Gerrit Immink) 박사가 우리 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화란에 있는 대표적인 개혁주이 신학교가 셋이 있는데 이번에 합쳐져서 한 학교가 되었습니다. 그곳의 학장으로 계시는 분인데 화란의 신학이 굉장히 깊이가 있습니다. 그 신학적인 유산들이 부럽습니다. 아마 칼빈주의가 실천적으로 가장 꽃핀 두 나라를 꼽으라면 하나가 영국이고, 또 하나가 화란의 개혁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란은 온 세계의 교회가 부러워할 정도로 아름다운 개혁신학의 유산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불과 17세기의 일인데, 2세기도 안 되는 짧은 시기에 신앙이 모두 사라져버리고 지금은 교회를 유지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예배당을 크게 지었습니다. 국가에서는 크게 지어놓은 예배당을 함부로 손을 못 대게 합니다. 현대적인 건물을 손대는 것은 망가진 것을 뜯어내버리고 부분적으로 수리하면 되는데, 그 건물은 수리도 국가의 승인을 받고 문화재를 수리하듯이 특별한 공법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유지비가 엄청나게 많이 들어갑니다. 나라가 요구하는 조건에 맞게 교회를 관리할 수 있는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안모이니까, 덩그러니 예배당만 하나 남아있는 것입니다. 주일이면 잠깐 모였다가 다 흩어지는데 왜 그렇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이밍크 박사가 하는 말이 그때 그렇게 커다란 종교개혁의 유산을 물려받고 학자들이 열심히 학문을 탐구해서 기독교 신앙의 찬란한 체계들을 만들었는데 커다란 해일이 덮쳐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계몽주의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라는 인간을 중심에 놓은 계몽주의가 몰려오면서 교회만 덮은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덮어서 전도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계몽주의의 물을 먹으면 기독교를 안 믿겠다는 의지가 생겨납니다. 안 믿겠다는, 믿을 수 없다는, 신뢰할 수 없다는 사상입니다. 게다가 그런 상황을 교회가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던 터에 19세기가 되고 자유주의가 밀려닥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동정녀를 통한 탄생, 천국과 지옥 같은 복음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부인하는 이성주의의 시대가 열리게 되고, 결국 교회는 주저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만 주님을 잘 믿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이 잘 물려지도록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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