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1
목 차
내가 주께 피합니다(시 71:1-2) 29
나의 반석이요 산성이신 하나님(시 71:3) 36
나의 소망 하나님(시 71:4-5) 40
하나님의 주권을 찬송함(시 71:6) 44
주를 찬송할 때(시 71:7-8) 50
늙을 때에도 버리지 마소서(시 71:9) 56
나를 멀리 마소서(시 71:10-12) 62
소망을 품고 찬송하리이다(시 71:13-14) 65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시 71:15-16) 69
하나님의 기사를 전함(시 71:17) 73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까지(시 71:18) 78
의로우신 하나님(시 71:19) 83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시 71:20) 88
나를 위로하소서(시 71:21) 93
내가 주를 찬양할 때(1)(시 71:22-23) 98
내가 주를 찬양할 때(2)(시 71:23) 104
주의 의를 말하게 하소서(시 71:24) 110
시편73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시편71편 강해 1
내가 주께 피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시 71:1-2)
본문해설
71편 표제에 저자가 붙어있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은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서도 시인이 시편 70편과 유사하게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라고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이 기도는 결국은 악인으로부터 말미암는 고난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수치를 당하고 있는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기 때문에 그런 기도가 나오는 것이고, 하나님께 공평을 베풀어달라고 호소할 때는 역설적으로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고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있는 것은 자신이 악인들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케 마소서
시편에는 ‘수치’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표현입니다. 시편에서 이야기하는 ‘수치’는 아주 미묘한 단어입니다. 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간절한 기도 속에 나오는 ‘수치’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이 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련이 되는가? 시인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법도대로 행하면서 살려고 하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멸시와 수치를 당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만 사랑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것들까지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특징이 있습니다. 성도가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 하나님이 정하신 교회의 제도, 하나님 때문에 만나야 하는 사람들, 하나님 때문에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들, 이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치에 대해 시인이 일관되게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생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시인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입니다. 신앙이 뛰어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깊을 때 인생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시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사도 바울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것과 관련해서 ‘수치’라는 말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감입니다.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자존감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자존감이지만 언약백성의 자존감은 하나님과 맺은 관계에서 나오는 자존감입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Bonaparte Napoleon)의 이야기입니다. 잘된 교육이냐 잘못된 교육이냐에 대해 사람마나 평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교육이 그를 잘못 자라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가 초등학생쯤 되었을 때 무엇을 잘못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이 그를 불러서 “무릎을 꿇어라.” 그랬더니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 “선생님, 제가 잘못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 엄마는 나에게 하나님 아버지 한분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말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우상숭배를 금하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존감을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이것은 수치라는 개념과 연결이 됩니다.
우리의 경험을 생각해볼 때, 자존감이 거의 없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자존감이 너무 높아서 그것이 교만이 되어 인생을 망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만나서 조정이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질서의 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망 위에서 내가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자기 자신이 무엇 때문에 존귀한지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우고, 무엇 때문에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지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거기서 정당한 자존감이 나오게 되고, 자기 자신을 정당하게 존중히 여기게 되고, 그런 정당한 자존감을 갖게 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소중한 자존감을 가져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휴머니즘은 바로 기독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생각이 참으로 인간적인 생각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진정한 신본주의 안에서 비로소 진정한 휴머니즘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수치를 당치 말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기도는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존감과 관계되는 문제이기 이전에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일입니다. 자신이 수치를 당함으로써 하나님께 누를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자녀들을 가르칠 때 생명 다음으로 소중하다고 가르쳐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명예입니다. 그것이 부정적으로 묘사될 때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도 멸시와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명예롭게 사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자신의 명예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함께 영광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환란과 핍박을 당해서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주님의 이름은 인간의 악함에 의해 짓밟히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변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이름과 함께 고난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영광이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세상에 가득하게 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시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며 당신의 백성들이 온전한 자존감을 가지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주의 의로 건지소서
시인은 2절에서 이야기를 합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마틴 루터가 매우 주의 깊게 보았던 성경본문입니다. 그중에서도 71편에 나오는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라는 구절이 그러했습니다.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시인이 악인에게 끔찍하게 고통을 당하고 괴롭힘과 억압을 당하는 가운데서 “나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려 할 때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이렇게 해주시옵소서. 저렇게 해주십시오.”라고 아뢰면서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청구하려면 거기에 어울리는 올바름이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 앞에 매달리다 보니 그것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있다고 한들 그것은 사람 앞에서나 통용될 가치가 있는 것이지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통용될 만한 가치가 있을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주님의 의로 나를 건지시옵소서. 나의 의로움을 보지 마시고 주님 안에 있는 그 의 때문에 나를 건지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이것은 어떤 뜻일까요? 시인은 언약백성입니다. ‘언약백성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완전하신 하나님이시기 위해 그들의 의가 부족하고 모자랄 때, 하나님의 의로 인해 언약관계가 신실하게 유지되어야 그분은 완전하신 하나님이 아니시겠느냐?’ 이런 뜻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옵소서.”라는 고백에서 이신득의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의, 질서를 세우심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합니까? 카톨릭 신학자들은 펄펄 뛸 것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생각을 루터가 나오기 2500년 전에 성경본문에 쑤셔 놓은 것이라고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라는 구절을 보면서 제일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하나님이 의를 우리에게 덧입혀주신다는 이신칭의의 사상이 우선이라기보다 근본적으로 모든 세계의 질서를 다시 잡아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의 개념입니다.
불의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질서를 고집하는 것이 불의이고 악입니다. 시인과 당시 사람들 속에 있었던 일차적인 생각으로 ‘의’는 법률적인 의였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법률적인 의를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과 의지와 생각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헌법을 볼 때 법체계가 공산주의와 유물론으로 되어있으면 사회주의적인 국가를 원하는 것입니다. 다수에 의해서 권력이 배분되고 국민의 뜻에 의해 나라가 움직일 때는 민주공화정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손 좀 깨끗이 씻어라.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살아라.” 이렇게 촉구한다면 그 어머니는 깔끔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무슨 상관이 있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녀들에게 정색을 하고 그러한 명령을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책망하면서 명령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여기에서 나오는 의의 첫 번째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의로 나를 건져달라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율법의 질서대로 이 세상을 재편해 주십시오. 그러면 나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법이 잘 통용되는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바보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법이 법대로 시행된다면 나를 보고 바보라고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부끄럽게 될 것이고, 법을 지켰던 사람들이 존중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시편 71편 2절에 나오는 ‘주의 의’라는 말이 담고 있는 첫 번째 개념입니다.
의, 언약백성을 붙드심
이것을 조금 더 확대해서 생각할 때 루터가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의로는 스스로를 건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악인들에게는 공정한 선악의 잣대를 가지고 책망하시고,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것도 의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을 토대로 적용하면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해서 책망을 당하고 벌을 받을 때 회개하니까 용서해주셨다면,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왜 나만 용서해주시지? 정말 신뢰할 수 없는 분이구나.’ 이렇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공평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근거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신앙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이 의로써 나를 건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연결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다 언약관계에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 언약관계 안에 있지만 어떤 사람은 불신앙으로 언약을 어기고 하나님께로부터 이탈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도 건져주셔야 “의로 나를 건지시며”라는 말이 해당될 텐데, 왜 하나님께서는 언약백성임에도 그들이 언약바깥으로 떨어져나가도록 내버려두실까요? 루터의 논리에 의하면 그런 사람들도 하나님이 붙잡아주셔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입증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은 어려운 질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는 시간의 문제, 영혼의 문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건지심
마지막으로 하나만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언약백성을 언약관계 안에서 끝까지 붙드심으로 당신의 의를 나타내실 때 홀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건져주시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절실한 열망과 부르짖음, 그런 것들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의를 보이시는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의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하나님은 왜 언약관계 안에 속하게 하신 다음에 언약을 파기하고 떠나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건져주십니다. 반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불순종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선택되지 않은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죄인을 건져주시고 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의는 주님께만 있는 것인데,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접목시켜서 이신칭의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세한 논의까지 다 공부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 우리를 건져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 우리를 건져 주실 때는 언제나 우리의 신앙을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근거가 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주님 안에 있는 의는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누릴 수 있도록 부여해주십니다. 이러한 결론을 통해 우리는 안정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됩니다.
오늘날 신학자들 중에는 주님 안에 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믿으면 하나님이 그것을 의로 여겨주신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의의 전가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매달리는 것은 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이미 주님 안에 있는 의를 더 깊게 만들어준 것처럼, 이것이 기독론적인 전환을 거쳐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의가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통해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을 믿기 시작할 때뿐 아니라 믿는 과정과 그 후에도 이러한 이치를 세우셔서 당신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에서 우리를 떼어놓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떨어질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굳게 붙들어 매셨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들의 극치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입니다.
나의 반석이요 산성이신 하나님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시 71:3)
본문해설
팔레스타인에는 바위산이 많이 있습니다. 바위에는 침식작용이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동굴들이 많이 있습니다. 동굴이나 움푹 파인 곳에 숨으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고, 설령 먼 곳에서 알아본다 할지라도 화살을 쏘아 맞힐 수 없습니다. 바위가 암시하는 것은 완전한 보호, 은신처, 이러한 의미입니다.
나의 반석이신 하나님
시인은 “주는 나의 무시로 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의 삶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쫓기는 삶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수시로 피할 바위가 되어주시도록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위에 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전쟁과 같은 상황을 수시로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시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만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던 생애를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시련과 고난과 핍박을 당하신 것을 통해 참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믿음을 지키려고 마음을 먹으면 우리도 동일한 환난과 시련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련과 고난을 수시로 당하고 불안정한 삶을 사시면서 하나님을 의뢰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마땅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하나님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이는 주께서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산성이심이니이다” 여기에서 누구에게 나를 구원하라고 하였는지가 불명확합니다. 이것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나를 구원하라 명령하셨으니”,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누구누구에게”라는 말은 없고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을 주셨습니다.”라고만 나옵니다. 이것은 누구일까요? 제 생각에는 간접목적어가 생략되어있지만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라고 할 때, 이것은 천사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피조물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종종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나를 치료하십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드는 목적어가 되는 경우도 있고, 천사가 목적어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아마 말씀이나 천사와 같은 대상에게 명령을 하셨다는 의미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인은 시련과 고난을 만날 때도 굳게 붙들었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고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던 강한 확신이었습니다. “주님이 명하셨는데, 그 명령이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시인은 삶이 요동치는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것을 수시로 경험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하신 일은 아무리 인간이 거스른다 해도 반드시 이루어지고,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 시인이 가지고 있었던 주권신앙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나의 뜻이나 생각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몸부림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을 받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싼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절망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든 인간이든 누구를 향한 원망의 마지막 끝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향해서든 하나님을 향해서든 원망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는 시련과 고난이 닥칠 때 ‘인간의 본분은 이것을 조용히 당하고 견디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이기고 견디며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게 필요합니다. 또 하나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이 더 나은 상태가 되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신앙적인 견지에서 그렇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의 결국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 전부입니다.
나의 산성이신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전쟁 상황의 문맥을 보여줍니다. 전쟁할 때 군사의 수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지형을 이용하여 전쟁하느냐에 따라서 평지에서는 질 수 밖에 없는 싸움이 승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한산성에 올라가서 보면 100명이 공격해도 한 명이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유리한 천해의 지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산성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으며 살아도 그것이 시련과 고난을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게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은 끊임없이 있고, 아픔이 다가와도 그것들을 이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똑같이 시련과 고난의 길을 혼자 몸부림치면서 걸어갔는데 주님을 믿고 신앙을 가지면서 이제는 주님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견딜 수 없는 시련을 견기고, 소망을 가질 수 없는 비참한 절망 가운데서 소망을 가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이고 믿음의 길입니다.
나의 소망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악인의 손 곧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서 피하게 하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시 71:4-5)
본문해설
4절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악인으로부터 자신을 건져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고백을 하면서 여기에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손안에 있다.”는 것은 손 임자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것 아닙니까? “천하가 내 손안에 있다.” 그러면 천하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뜻 아닙니까? 손으로 칼자루나 물건을 잡으면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쉽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학적인 표현에서도 “장중에 있다.”는 말은 보호, 주권, 권력, 임의대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악인들의 세력이 커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과 비교될 수 없는 큰 힘으로 자기를 붙들고 움직이는 광경을 보여줍니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에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날까?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자녀들을 항상 이기게 하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의롭고 선하신 하나님이 왜 세상의 악과 불의를 허용하실까?’ 소위 신정론의 질문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고, 그분은 선하신 분이시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죄가 있습니다. 그 죄가 악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말할 수 없이 크고 신비로운 섭리 속에서 이것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하실까요? 하나님은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선을 선택할 수 있지만 악도 택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악이 세상에 일어날 수 있도록 허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막을 힘이 없어서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해 일어나는 악과 죄 조차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또 하나는 사람들이 악을 택하고 하나님의 선을 등지면서 살아가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죄와 악으로 고통 받는 성도들을 건져내시는 구원의 은총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도록 만드십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다윗이라고 여겨지는 시인은 불의하고 흉악한 자들이 권세를 휘두르면서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장중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하며 주님께 피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시인을 억압하고 장중에 넣을 때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만들어 주자는 의도를 가지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 악을 통해서 시인은 하나님만이 나의 유일한 피난처요 산성이 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주님의 날개그늘 아래로 도망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큰 은혜를 경험했던 때는 다른 사람들이나 나 자신이 저지른 악 때문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날개그늘 아래로 피하였던 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입니다. 악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지만 선하신 하나님은 악조차도 선하게 사용하셔서 당신의 놀라운 뜻들을 이루십니다.
이것은 약학에도 나타납니다. 의사들의 말로 약과 독은 상극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먹으면 절명하는 독약이 약의 아주 중요한 성분으로 사용이 된다고 합니다. ‘안궁환’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우황청심환이랑 비슷한 약인데 아이가 경기를 하고 혼절을 할 때 눈곱만큼 떼어 물에 타서 먹이면 아이가 거짓말처럼 살아납니다. 하지만 그것은 세 번 이상 먹이면 안 됩니다. 그 안에 ‘추토’라는 성분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는 빨간 흙인데 사실은 독약입니다. 아주 미량의 독약이 들어있어서 그 독약이 다른 약의 성분과 작용을 일으켜서 우리를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의원들도 나쁜 독약을 가지고 선하게 사용해서 인간을 살리는데 활용한다면, 인간이 저지른 악을 통하여 더 나은 선을 이루어가시지 못한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결국 불의하고 흉악한자들이 시인을 괴롭힌 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욱 절실히 의지하도록 만들었으니까 이것은 상 받을 일이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동기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을 사용하셔서 선을 촉진하신다 할지라도 악을 행한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냐에 따라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각각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을 당했으나 그것 때문에 더욱 절실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의 소망이신 하나님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내가 어릴 때부터 신뢰한 이시라”, 이 구절은 다윗이 어려서부터 얼마나 외로운 삶을 살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편애 속에서 형들에게 뒤처지고 형들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인생을 살아오는 가운데 그에게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주님 한분을 소망으로 살아왔습니다. 어른이 되고난 후, 환난과 시련을 만났을 때 어릴 때부터 의지하고 소망으로 삼았던 하나님께 돌아가는 신앙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불의한 자와 흉악한 자의 억압을 통해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소망이시고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의지시라는 사실을 깊이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존하는 감정이 사랑의 감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시련과 고난이 주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고, 주님을 의지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그나마 붙들고 있던 신앙의 손은 놓고 세상의 탁류 속으로 떠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시련과 고난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고 단련하십니다. 정말 우리에게 신앙이 있고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랑이 있는지를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흔들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녹음이 우거져가는 계절에는 산하가 모두 푸르릅니다. 어떤 것이 상록수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오고 눈보라치는 겨울이 오면 온 천하가 하얀 눈밭이 될 때 끝까지 나무 잎사귀를 떨어뜨리지 않고 서있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그 나무가 늘푸른나무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오히려 이때가 우리의 믿음을 주님 앞에 보여드릴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외로움과 고난 속에서도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모두가 우리를 버려도 어렸을 때부터 신뢰할 분이셨던 주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의지할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찬송함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71:6)
본문해설
욥이 시련을 당할 때 처음에는 믿음을 지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를 어미 뱃속에서 낙태되지 않고 태어나게 하신 날들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렇게 보면 “내가 모태에서부터 주의 붙드신바 되었으며 내 어미 배에서 주의 취하여 내신바 되었사오니 나는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는 고백은 쉽게 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은 행복하고 좋을 때 부른 노래가 아니라 악인에게 고통을 받던 때에 지은 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인간의 의무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로 가득 차있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일들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닙니다. 나 자신이 성결하게 살아도 나와 관련된 사람들의 죄가 넘치면 그것이 삶의 무질서를 만들어 내면서 나에게 고통을 줍니다. 그런가하면 주위 사람들이 성결하고 올바르게 살아도 내 마음에 죄가 꿈틀거리면 이것이 역사해서 주위의 질서를 흩트려 놓고 악의 열매인 고통을 따게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시련과 고난과 아픔이 늘 있는 곳입니다. 이때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이것입니다. 비록 내가 원하지 않고 직면하기 싫은 상황에 놓여있고, 인생에 시련과 죄의 열매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라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절망은 ‘되고 싶은 나’와 ‘지금의 나’를 둘 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서 비롯됩니다. 특히 ‘있는 그대로의 나’가 현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할 때 인간은 끊임없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고 괴로운 일이 넘쳐날지라도 내가 어떻게 내가 아닐 수가 있겠으며, 내가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나는 어디서나 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되기 싫은 나의 처지를 사랑스럽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거기서 우리는 신앙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망하는 대신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이렇게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무는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기 좋아하는 상황도 만나고 정말 만나기 싫은 상황도 만납니다. 차라리 이 상황을 견딜 바에야 죽어버리고 싶은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자기실존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몸부림 때문에 사람들은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고칠 수 없을 때 자기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살은 오히려 너무 너무 살고 싶은 것의 표현입니다. 지금의 자기가 아닌 자기로 너무 너무 살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 자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인간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갖게 되는 가장 중요한 의무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추호도 자살하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피하지 않고 감당하여야 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괴롭고 힘든 것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목사님은 그게 좋습니까?” 좋아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높으신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살아가는 인간의 책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기에서 신앙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모본을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 견디기 힘들게 괴로운 일들은 우리의 죄이거나 다른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인 경우에도 순수하게 다른 사람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있는 죄와 결합이 된 것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상처를 주고 괴로움을 끼쳤다고 합시다. 그것은 그렇게 한 사람이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마음에 원한을 품는 것은 자신이 한 것입니다. 시작은 다른 이가 먼저 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본인 자신의 죄와 악도 직간접적으로 개입되어있습니다. 많은 고통과 끔찍한 악은 우리의 죄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난과 괴로움이 있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가져야할 가장 큰 의무는 그것을 모두 담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을 의지함
맨 처음 주님을 믿을 때 안 믿어도 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경우는 없습니다. 혼자서도 넉넉히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도저히 자신 혼자의 힘으로는 살 수 없다고 믿을 때, 주님 앞에 나와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은혜를 입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후에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고난과 시련이 닥치고 때로는 이웃으로 말미암아 해를 입어서 커다란 손해와 상처를 입을 때조차도 “나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면서 견딜 수 있습니다. 기쁜 상황 속에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견디기 힘들고 괴로운 상황에서는 그 풍랑을 인하여 더욱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세상에서 적절히 고난을 당하고 배신을 당하며 사는 것은 우리가 부패하지 않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소금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생선같이 싱싱한 생물을 사다가 다 먹지 못하고 남겨두면 상합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소금을 한 움큼 뿌려놓으면 절여져서 저녁에 먹어도 신선한 식품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한 없이 평안하면 부패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시련과 핍박을 훌륭하게 견딘 사람이 형통하도록 축복해주실 때 부패하고 타락하는 일은 언제든지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견디는 것입니다. 그것이 단지 고통을 감당하며 견디는 게 아니라 그것을 견디려고 할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
시인이 고난 속에서 위로를 얻었던 것은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주권아래 있다는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시인은 “내가 태어나서 이렇게 고난과 시련을 당하지만 주님이 나를 버리지 않고 지키실 것이다. 내가 씨로 엄마의 몸에 잉태될 때부터 하나님은 나를 아셨고, 뱃속에서 나를 보호하셔서 태어나게 하신 분도 우리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라고 고백합니다.
(찬양)
내 고생하는 모든 일들은 주께서 아시리
빈 들이나 사막에서 이 몸이 곤할지라도
오늘은 이 곳 내일은 저 곳 주 복음 전하리
이것이 바로 주권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믿으면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인간은 알면서도 돕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보고 그것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돕기를 거절하는 때가 있습니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위협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사랑하면서도 보복이 두려워서 사랑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나눠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한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주님이 나를 아신다고 하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뜻이 됩니다.
“주님이 내 어미의 태에서부터 나를 아셨으며, 주님이 나를 취하여 어미의 배에서 나오게 하셨나이다.”라는 고백은 결국 나의 인생 전체가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상황 속에서 행복할 때나 원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릴 때나 주님이 항상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만약에 우리에게 고난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나의 실존에 힘들고 버거운 시련이 없다면, 우리같이 죄에 물든 종자들이 하늘나라를 앙망하겠습니까? 몸은 이 땅에 살지만 천상의 세계를 그리워하면서 하늘의 가치를 따라 살겠느냐는 말입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종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인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종자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종종 죄가 없을 때도 적절하게 세상에서 배반을 당하게 하심으로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게 함으로써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이유가 세상의 꿀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빛과 소금으로 살기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주실 때만 우리에게 좋으신 분이 아닙니다. 나빠 보이는 것을 주실 때도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그분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돌아보면 좋은 것이 우리 영혼에 끝까지 좋은 것이었던 적은 많지 않고, 오히려 나빠 보이는 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함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 되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시인이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그런 깨달음 속에서 하나님을 매일매일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때로는 애매히 당하는 고난이 있고 때로는 내가 뿌린 씨앗 때문에 거둬들여야 하는 쓰디쓰고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매일매일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분복입니다.
주를 찬송할 때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 시오니
주를 찬송함과 주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하리이다”(시 71:7-8)
무리에게 이상함이 된 의인
시인은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무리들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었는지를 고백하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을 때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결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들과 같지 않다는 말입니다. 시인이 사람들에게 악을 당하고 고통당하는 이유가 악을 행하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위험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은 악인들에게 빛과 같아서 그 사람들의 존재 자체를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미워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교회를 세우려고 할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개척하라고 하셨지만 교회를 세울 자리는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장소를 얻으러 다녔습니다. 어느 병원 옆인데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썩 나쁘지도 않았습니다. 지하실에 예배공간이 하나 났다고 해서 보러갔는데 지하실에 한쪽에는 가게가 있고 한쪽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가게를 얻으러 왔다고 하니까 옆 가게 주인이 반색을 하면서 뛰어나옵니다. “여기 사람도 많이 오고 좋은 데예요.” 뭐하는 가게인가 보니까 퇴폐이발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가게를 얻어서 뭐 하시려고 그래요?” 묻습니다. “교회를 하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들어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들어오건 말건 그것은 건물 주인이 결정하면 될 일인데 자기가 건물 주인에게 연락해서 교회는 못 들어오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들어오면 건물 주인에게 이야기해서 자기는 나가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는 것입니까? 만약에 옆집이 음식점이었어도 그랬을까요? 자신들은 욕하고 비난해도 옆에 교회가 있어서 찬송소리가 들리고 바르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퇴폐이발소의 입장에서는 영업방해인 것입니다.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이런 곳에 오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십자가 간판이 말해줄 것 아닙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악인은 자신들을 해코지하지 않아도 의인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상함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태로부터 하나님께 취한바 되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 직접적인 해를 끼치는 것이 아님에도 악인들이 의인을 미워하는 이유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이미 그들의 삶을 정죄하고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지만 주님은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고백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사방을 둘러봐도 모두 악인들뿐입니다. 악인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회개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 거침돌을 치워버리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교회에 오는 길에 마당에 돌멩이가 하나 있어서 오는 사람마다 자꾸 걸려서 넘어진다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 돌멩이를 뽑아버리지 않겠습니까? 악인에게 의인은 그렇게 거침돌이 되는 것입니다.
주는 나의 견고한 피난처
잘못한 것 없이 악인들에게 미움을 당하고 고통을 받는 그때 가져야 하는 신앙이 “주는 나의 피난처 견고한 피난처 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견고한 피난처’라는 것은 사람들이 화살을 쏘거나 공격을 해도 자기를 충분히 막아줄 수 있는 바위로 된 굴 같은 것입니다. 높은 산꼭대기에 바위로 되어있는 요새도 피난처입니다. 아주 견고해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피난처인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견고한 피난처이십니다. 겉으로 보기에 악인들은 살아있고 그 위협은 현실적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보이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견고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잠시 악이 이기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사물들의 질서를 되돌려 놓으실 때 선과 악이 어떤 것인지, 의롭고 불의한 것이 어떤 것인지 또렷하게 보여주십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을 받고 핍박을 받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보여주십니다. 복수를 하고 더 큰 악을 행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도록 지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더 의지하는 기회로 삼도록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워가는 신앙을 가지면, 선한 사람들만 우리의 신앙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하고 악한 사람들도 우리의 신앙을 촉진합니다. 악인들조차도 우리의 신앙에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마음이 물같이 녹듯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렸던 때를 기억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행과 시련이 닥치고 어려움을 당할 때 오히려 하나님을 더 간절히 의지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것이 형통하고 모자라는 것이 없었을 때는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했는데 어려움을 당하고 나니까 우리의 마음이 주님을 의지하는 것 밖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단일한 믿음을 가짐으로써 영혼의 빈 잔을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우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 교회에 다니면서도 단 한 번도 이런 거룩한 갈망을 느끼지 못한 채 인생을 하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고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영혼과 마음에 변화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바빠 보이는 것을 통해 좋은 것을 주심
누구든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태어나면 행복해지고 싶어하지 불행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잘 먹고 잘 사는 행복보다 고통과 괴로움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에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어제 이동수 장로님이 있는 제주도에 다녀왔습니다. 요즘 제주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표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구해서 6시 20분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도착했더니 안계셨습니다.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치료에 들어가셨는데 몸무게가 9kg정도 빠지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50% 정도는 그 상황에서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균이 들어와서 피를 썩게 만드는데 그 속도가 엄청나다고 합니다. 불과 이틀 사이에 사람들이 죽곤 합니다. 아주 적절한 때 병원에 옮겨져서 치료를 받았는데 균을 거의 다 없앴습니다.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 초쯤 서울로 올라오십니다. 바이러스가 핏줄을 타고 눈까지 침투했습니다. 지금은 안과치료를 하시는데 시력이 많이 안 좋아지셨습니다. 그분과 몇 마디를 나누는데 계속 눈물을 흘리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밖에는 정말 믿을게 아무것도 없구나.” 젊음도 건강도 물질도 세상의 지위도, 견고하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 죽음 앞에 딱 서보면 얼마나 의지할 수 없는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때 보다도 병상에서 기도도 많이 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합니다. 위로해드리고 점심에 올라왔습니다. 의사들 말로는 거의 기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빨리 나빠지는 경우도 처음이었고 이렇게 빨리 치료되는 경우도 처음이었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좋고 평안한 것을 통해 우리의 영혼도 함께 좋아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일을 행하십니다. 시인도 악인들에게 이상히 여김을 받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자신의 견고한 피난처로 삼았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시인은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시인은 고난을 유익한 기회로 삼았습니다.
꽃밭에 가면 꽃들이 냄새를 확 풍깁니다. 향기롭습니다. 벌레 같은 것들이 공격을 하면 꽃향기가 더 많이 납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해충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향기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가시밭에 백합화가 향기를 날린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람에 흔들리면 가시에 툭툭 찔리지 않습니까? 그러면 살겠다고 몸부림치면서 향기를 뿜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합화가 핀 계곡에 향기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참 신비한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인간은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이 온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십니다.
주를 찬송함이 입에 가득함
시인은 말합니다. “주를 찬송함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가득할 것입니다.” 이것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고백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세상의 것들을 많이 주실 때 하나님 앞에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빈 잔을 가득 채우실 때 비로소 “우리가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우는 것은 못하십니다. 능력이 모자라서 못 하신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성품에는 맞지 않는 것을 인간이 요구하기 때문에 그것을 행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을 원하는데 하나님이 악을 행해서 인간을 만족시키실 수 있겠습니까? 또 얼마나 악을 행하면 인간이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의 만족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의 세계는 끝이 없습니다. 그 욕망이 하나님의 지복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욕망을 채우실 때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넘치게 하심으로써 더 이상 그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넉넉함과 풍요함을 한없이 느끼는 것, 이것이 신자의 진정한 만족입니다. 만족을 누리고 나면 주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것이 하루 종일 입에 가득하게 됩니다.
입에 가득한 것은 마음에 가득합니다. 마음에 저주와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끊임없이 욕지거리를 쏟아냅니다. 마음에 헛된 것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입에서 허탄한 말들을 쏟아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과 주를 높임이 가득합니다.”라는 이야기는 마음속에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분을 높이고 그분의 존귀함과 위엄을 찬송하는 것이 마음에 가득 찬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깊이 찬송하고 경배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당신의 크신 사랑과 위엄을 보여주시고 그 능력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는 자들의 삶입니다.
늙을 때에도 버리지 마소서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시 71:9)
본문해설
확정하기는 쉽지 않지만 통상적으로 시편 71편의 문맥을 볼 때, 이것은 다윗의 시라는 표제는 없어도 다윗의 시라고 여겨지고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동의를 합니다. 다윗은 고난을 받지 않은 시기가 없었지만 이 시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지은 시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 시의 내용을 보면 시인이 악인에게 에워싸여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힘이 쇠해버리고 좌절했다는 내용은 많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고난을 만나도 신앙이 살아있고 소망이 있고 육신의 힘이 있을 때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꺾이지 않고 그것을 감당해나가는 때가 있는가 하면, 큰 고난이 아닌데도 육체도 병들고 기운이 약해지고 마음이 매우 쇠잔해진 때가 있습니다. 살다가 보면 그런 때가 있습니다. 시인은 전자에 해당되는 경우라고 생각이 됩니다.
시인은 “자기가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지만 주님은 나의 견고한 피난처이기 때문에 주님을 찬송함과 존숭함이 종일토록 내 입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늙을 때
시인은 갑자기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떠나지 마소서”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시인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아직 늙지 않았지만 “내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라고 간구하는 것은 늙을 때를 염려하는 것입니다. “아직은 힘이 있지만 내 힘이 쇠약한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쇠약하다’라는 것은 ‘늙을 때에’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늙을 때 육체의 특징은 쇠약해지는 것 아닙니까? 기능이 없어집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해가 잘 안가겠지만 노인들의 행동은 어눌해집니다. 물 같은 것을 쏟고, 툭툭 치고 다닙니다. 젊은 사람들은 먹다가 옷에 된장, 고추장 국물을 흘리고 그런 것이 별로 없습니다. 늙으면 지저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행동이 어눌해지고 거리감각, 방향감각, 이런 것이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마음은 살아있어도 몸은 잘 안 움직입니다. 젊었을 때 깔끔하던 사람도 나이가 들면 무엇을 묻히고 다니고, 젊었을 때는 냄새에도 예민하고 거울도 자주보지만 나이가 들면 거울도 잘 안봅니다. 거울 속에서 이상한 사람을 만나야 되니까 그 인간을 보기 싫어서 안 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옷에 뭐가 떨어져도 발견이 안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쇠약해져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들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옷깃에 뭐가 떨어져 있어도 ‘저 양반이 지저분한 양반이구나.’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육체가 쇠잔해져서 오는 현상이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에 갔을 때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 한명을 만났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번 소개가 됐었는데 정말 거물입니다. 그런데 처음 만난 순간, 저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시골에서 온 할아버지의 모습이지 세계적인 학자일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뭐가 묻어 있고 수염은 길고 머리는 허옇고 말씀하시는데도 우물우물하셔서 잘 못 알아듣겠습니다. 세계적인 학자이니 젊은 시절에 얼마나 샤프했겠습니까? ‘나이가 드니까 저렇게 되는구나.’ 제가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는 왜 이렇게 지저분하실까?’라고 생각했습니다. 툭툭 떨어뜨리시고 얼굴에도 흘리고 다니셨습니다. 젊은 시절엔 안 그랬는데 나이가 들면서 감각이 떨어지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었을 땐 몰랐는데 내가 나이가 들면서 그 처지가 되어가니까 이해가 됩니다.
늙을 때에도 버리지 마소서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라는 말은 시인은 젊지만 현재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가장 많이 느끼는 어려움이 무엇일까요? 나이가 많이 들면 어둡고 불편한 것들이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어려움은 외로움입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후회되는 것 중 하나는 그런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하고 용서하고 가까이 하고 싶었는데 표현을 다 안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세월이 많이 지나고 나서 마음에 섭섭함이 되었습니다.
노인 둘이서 제주도에 놀러갔습니다. 남편이 우리가 여기에 언제 다시 오겠냐며 사진 좀 많이 찍자고 하니까 부인이 싫다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여행이 무리가 되었는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장례를 치르는데 부인이 그렇게 후회를 하더랍니다. “남편이 사진을 찍자고 할 때 찍을걸.” 하고 후회를 하더랍니다.
나이가 들면 제일 큰 문제는 외로움입니다. 사람들은 치매라고 노인들을 데려다 치료를 시키고 격리를 시키는데 그것의 상당 부분이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걸 지식이 없어서 모르고, 의사소통도 잘 안되고, 우울증에 걸리면 말도 잘 하지 않기 때문에 치매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입니다. 효도하고자 할 때 그 효도는 삶을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자식 사랑도 마찬가지고 부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고 부모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함께 해주는 것입니다. 내가 꼭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입니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늙을 때 가장 커다란 것이 외로움인데,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면 어떻게 살까?’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 시를 지은 시점이 자식들로부터 배반을 받은 시점인지, 왕이 된 후인지, 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느끼고 경험했던 것입니다.
이 말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여기서 ‘버리다’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자브’(bz"[;)라는 말인데 ‘떠난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다가 떠난 사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사울을 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다가 떠나고 나니 그 사람이 어떻게 변하고 그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설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옵소서. 젊었을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셔서 시련과 고난을 이기시게 하신 것처럼, 늙은 때에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왕관이나 재물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모시던 선생님이 계십니다. 돌아가셨는지 생사도 확인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찾아가서 뵈었습니다. LA에 집회를 갔다가 우리 선생님을 한번 찾아달라고 했더니 금방 찾았습니다. 그 때의 연세가 94세였습니다. 과일 한 바구니와 꽃을 들고 찾아갔습니다. 처음엔 저를 못 알아보십니다. 이것저것 설명을 하니까 알아보십니다. 21평 정도 되는 아파트에 혼자 살고 계셨습니다. 자식들도 70대 중반이니까 같이 늙어가는 처지입니다. 사모님은 어떻게 되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때도 편찮으셨는데 7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92세까지 운전을 하고 다니셨는데 발목이 안 좋아지면서 운전을 못하고 무언가에 의지해서 걷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정신은 말짱하십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책을 한권 드렸습니다. 안경을 끼고 한참을 보시더니, “아이고, 이거 조직신학에 대한 책을 하나 썼구먼.” 하셨습니다. 정신이 말똥말똥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목사님 외롭지 않으세요?” 했더니 사회복지사가 이틀에 한 번씩 와서 챙겨주고 가고, 이틀이나 삼일에 한 번씩 친구가 오면 노인네 둘이서 같이 음식점에 가서 음식도 드신답니다. “외롭지 않으세요?” 하고 묻는데 그 대답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말을 하면서 목이 메는 것입니다. “외롭냐고? 내가 왜 외로워? 내가 혼자 있나, 우리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누워서 책도 읽고 기도도 하고 그러면서 지내지, 외롭긴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돌아서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는 ‘할아버지가 얼마나 바깥 구경을 하고 싶을까? 정신없이 바쁘지만 언제 기회가 나면 후배들이랑 휠체어라도 밀고 공원에 산책이라도 다녀오면 참 좋아하실 텐데. 다음에 오면 꼭 그래야지.’ 그래놓고 벌써 5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살아계실지 모르겠습니다. 100세가 다 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과 나이 많아서 힘이 없어 늙어가면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확신하는 인생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격차가 있습니까? 시인이 젊었을 때에도 하나님을 얼마나 간절히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있기를 원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같이 있어주지 않아도 상처받거나 섭섭하지도 않습니다. 힘이 없고 육신도 약해지면 그런 사람들이 다 귀찮습니다. 옆에 있어서 귀찮은 사람이 있고 옆에 있어서 행복하고 좋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결국은 사랑이라는 감정이 좌우하는 것입니다.
어제 이동수 장로님께 갔더니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앉자마자 “목사님 정신없이 바쁠 텐데 얼른 올라가보세요.” 하면서도 손을 잡고 놓지를 않으셨습니다. 계속 눈물을 흘리십니다. 울지 말라고 했더니 하나님의 은혜가 참 감사하다고 그러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언제 어디든지 노인들은 있어왔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이 어느 시대에는 없었겠습니까? 병원에 가보면 자기 힘으로 기도하면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우리가 잊고 산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버릇없는 행동입니다. 매일매일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제도 병원에 가보니 정상적으로 걸어 다니며 숨 쉬고 자기 손을 움직여서 밥을 먹고 배변을 하면서 산다는 것 자제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돈이 많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수족에 힘이 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을 돈이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필요한 것이 신앙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사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주님과의 관계가 일평생 지속되도록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노년에 자식들이 다 떠나고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가 우리를 홀로 두고 떠나도 마지막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외롭긴 뭐가 외로워?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뭐가 외로워? 내가 주님과 같이 있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원수들이 내게 대하여 말하며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가 서로 꾀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하오니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시 71:10-12)
의인을 둘러싼 악인들의 도모
시인은 자기를 둘러싼 악인들의 도모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시인을 보호하고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인들은 어찌하든지 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보호는 영원하고 변함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실하지 못해서 그 관계가 끊어진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므로 시인이 신앙적으로 미끄러지거나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하기를 기대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악인들은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잘못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원수들’과 쌍을 이루고 있습니다. ‘원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오예브’(byEao)인데 ‘미워한다’는 뜻입니다. 미워하는 자와 영혼을 엿보는 자가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힘이 강력해서 무엇에든 굴복함이 없거나 도덕적으로 떳떳하면 숨어서 엿볼 이유가 없습니다. 힘이 약하거나 정당성이 결여될 때 자기를 감추고 남을 엿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시인을 대하는 행동방식은 엿보고 미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서로 꾀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한두 명이 아니라 많은 악인들이 시인을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이 저를 버리셨은즉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잡는다는 것은 패전한 군대를 추격하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악인들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이 버리신 것처럼 느껴지고, 번성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셨지만 세상에서는 번성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지만 고난의 풀무불 한 가운데를 통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에게는 이것을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신앙의 지식,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지식이 모자랍니다. 그래서 시인이 괴롭힘과 고통을 당하면서 외롭게 거하고 있는 것만을 보고는 “별 볼일이 없구나. 하나님이 저를 버리신 것이 분명하다. 저에게는 번영과 영광이 없고 힘이 없구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이 끊어졌으니 저는 패잔병 신세이다. 군대를 추격하여 패잔병들을 따라잡아 괴멸하는 것처럼 시인을 공격하자.”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시인을 붙들고 계셔서 무시로 피할 바위가 되셨고, 주님께서 친히 반석이자 산성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친근함과 도우심을 구함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아뢰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해달라는 기도도 아니고 원수들을 파멸해달라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는 뒤집으면 결국 자신을 하나님과 친근하게 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누렸던 최고의 영광은 가까움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가르치기를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복 받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느냐? 우리처럼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고 친근히 하셨던 백성이 이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물질의 축복을 하나님이 주시기도 하지만 사람을 통해서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고 친근히 해주시는 것은 하나님 외의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강요하여 우리와 친근하시도록 재촉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따른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만이 우리를 하나님 가까이에 있게 하고 친근함을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언약백성의 가장 커다란 특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가까이에서 은혜를 입고 사랑을 입는 것이야말로 언약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요 또한 기쁨입니다.
시인은 여전히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에 12절에서 “속히 나를 도와주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탄원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시인은 언약백성들의 가장 큰 특권이 친근함과 도우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그분께 도움을 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도 도움이 있지만 이것은 인생의 결정적인 도움이 아니요 오직 주님께로부터 오는 도우심만이 결정적이며 최상의 도움입니다. 다른 곳에 도움이 넘쳐나도 하나님의 면전에서 직접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야할 필요가 감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은혜를 베풀면 베풀수록 주님을 더 의지하고, 교만한 백성들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섭리 속에서 복을 주시면 그 복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의 가장 큰 두 가지 특권, 즉 친근함과 도우심을 누리면서 어떤 시련과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고, 수많은 원수들이 자신을 에워싸도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어떻게 보면 우리는 지극히 연약한 자들이고 세상에서 보호자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거기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친근함과 도우심을 의존하며 사는 언약백성이 되기를 바랍니다.
소망을 품고 찬송하리이다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수치와 멸망을 당케 하시며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13-14)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
“내 영혼을 대적한다”는 표현은 앞에 나오는 “영혼을 엿본다”는 표현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목숨’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데, “내 영혼을 대적한다”는 말은 내가 살아있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싫어서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 애쓰는 사람을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미움과 관계가 있습니다. 사람을 극단적으로 미워하게 되면 그가 살아있는 것 자체가 미움의 원인이 됩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사랑이 되듯이, 미워하게 되면 존재 자체가 미움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커다란 희망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이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잔인하리만치 영혼을 엿보고 대적하면서 수치와 모욕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
시인은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에 대한 처분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악인들을 대할 때 그들을 악한 방법으로 처단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지만, 그것은 결국 또 다른 악을 부르는 것입니다. 언약백성들의 믿음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을 대할 때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며 그분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큰 섭리 속에서 수치와 멸망을 당하게 해달라고 악인의 처분을 맡기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백성들의 태도입니다.
악인은 강한 것처럼 보이고 또 낙심하지 않습니다. 경건한 백성은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의인이 악인들에게 잠시 지는 것 같고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위로를 주십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지혜 속에서 고난을 통하여 은혜와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통하고 좋을 때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혜의 깊이와 사랑의 넓이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언약백성이라도 세상을 지나면서 악한 사람들에게 괴로움과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믿음을 따라 살기 때문에 시련과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에 대해서 자신도 똑같이 악을 행하면 자신도 똑같이 악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문제가 악인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악인을 부적절하게 대적하는 가운데 그도 역시 악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 아닙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속에서 자신을 대적하는 악한 자들에게 수치와 멸망을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고생을 하면서 도망을 다녀야했던 이유는 사울의 악행 때문이었습니다. 도망을 다니다가 절호의 기회를 만납니다. 충분히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그의 옷자락만 베고 물병을 훔쳐서 나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셔서 세우신 자를 향해 그렇게 했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면서 회개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시고 대신 자기를 택하셨는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신앙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이 그를 버리고 자기를 택하셨어도 그것이 그를 함부로 대해도 좋고 악한 방법으로 보복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면 다윗은 그렇게 오랫동안 도망 다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약한 자 같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강한 자가 되고, 버림받은 자 같으나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이 지켜주심을 스스로 입증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소망을 품고 주를 찬송함
“나를 모해하려 하는 자에게는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이것은 그들이 멸망을 통해서 죽거나 살아있다면 끔찍한 부끄러움과 수치를 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수를 향한 복수의 감정이 아니라 모든 일들을 선으로 종결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요 신앙입니다. 그러면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 “잠시 악인의 모사가 이기는 것 같고 자기의 영혼을 대적하는 자가 승리하는 것 같아도 나는 시인을 항상 소망을 품겠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나에게 반드시 선과 기쁨이 될 것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나에게도 기쁨이고, 하나님이 가슴아파하시는 일에 나도 함께 가슴아파한다는 고백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주권이 이기리라는 신앙을 가지고 항상 소망을 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욱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항상 기쁘고 좋고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일만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에워싸이고 수치와 괴로움을 당할 때도 오히려 그것 때문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비상한 성품을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소망을 품고 의지할 수 있는 신앙의 힘과 지혜와 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도 생사 간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소망을 품으며 기도할 의무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생길을 지나면서 어딘들 대적이 없겠고, 어딘들 시련과 고난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시련과 고난, 괴로움을 통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큰 소망을 품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시 71:15-16)
본문해설
악인에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자신의 편이라는 확신을 잃지 않던 시인은 결국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송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교회가 가장 시련을 많이 당하고 고난을 받던 때에 많은 찬송시가 작곡되고 불리워진 것도 이러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주의 의, 주의 구원
그는 하나님을 찬송할 때 찬송의 제목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공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주의 의’, 이것이 찬송의 제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이 시편을 대하는 수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율법을 생각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삶이 부합하여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가 되었을 때 그것이 의롭게 된 상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며 살 수 있는 율법을 주셨지만 그것을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우리의 부패성을 설명하면서 율법을 지키며 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단언합니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시편에 등장하는 ‘주의 의’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에 모자란 사람들에게 덧입혀주시는 하나님의 의로 해석했습니다. “주의 의로 나를 구하소서”라는 대목들,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측량할 수 없는 의, 이런 것들은 자신이 율법을 지켜서 얻게 된 의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기초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용납하고 받아주시는 신적인 의를 가리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의’와 ‘구원’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의가 곧, 구원’이라고 번역해도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악인에게 에워싸이고 고난을 받고 시련을 많이 당했을 때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건져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 때문이라는 사상을 나타냅니다. “한 번 나를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분의 신실하심에 기초하여 내가 모자라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이 후회 없는 부르심이라는 것을 입증해보이시려는 것처럼 나를 용납해주셨다.”는 이야기를 ‘주의 의와 구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찬송할 이유
이것을 종일 전파하겠다는 의미는 이것만큼 자신의 인생을 압도하는 관심사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자신이 존경하고 아주 훌륭하게 생각하는 사람으로부터 칭찬과 함께 작은 선물을 받았을 때, 그것은 선물을 주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자신을 향한 따뜻한 사랑과 커다란 호의의 표현입니다. 선물 자체가 크고 훌륭해서라기보다는 그 선물을 통해 드러난 마음속에 자신을 향한 사랑의 정신 때문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주님이 자신의 삶속에서 은혜를 베푸시고 도우실 때, 그것이 가져다주는 이익 때문에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에 감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구원해주신 것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인상이 되었기에 “종일 내 입으로 하나님의 의와 구원을 전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후에 이어질 자신의 삶에 방식에 대해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내가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주의 공의만 전하겠나이다”라는 미래에 대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라는 말은 “미래에도 시련과 난관, 고통은 언제나 있을 것인데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것이고 하나님은 당신의 의에 입각해서 내게 구원을 베풀어주실 터인데 이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당신 앞에 올 때 하나님의 행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역사 속의 경험을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과의 동행에 대한 믿음과 신뢰입니다.
미래를 향한 모든 불안은 현재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부족, 혹은 결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확신은 미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주님의 손을 붙들고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과 은혜, 능력을 현재적으로 하나님께 공급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16절에서 “내가 주의 의만을 진술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은 아까 말씀드린 주의 의에 대한 해석을 상당히 지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덧 입혀진 하나님의 의, 덧입혀진 하나님의 크고 넘치는 사랑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감격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당하나 든든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애를 써서 주님을 섬기고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노력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의뢰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의에 근거해서 우리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의가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단언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의지함으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또한 확신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사를 전함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시 71:17)
본문해설
시인에게는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을 고려하면서 위로가 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은 자기를 교훈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훈’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떠한 삶을 살아라.” 하고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가르침을 뜻합니다. 당시는 모세의 율법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구약의 다른 책들도 형성되어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확실한 것은 모세오경이 있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신앙의 근간으로 삼았습니다.
말씀을 통해 교훈하심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시인을 교훈하셨을까요? “너는 이런 사람이 되고 이러한 삶을 살아라.” 이런 가르침들을 주셨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다윗의 시라고 여겨지는데 시인은 성경의 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새로운 계시를 주셔서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 되라고 일러주셨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율법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교훈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가 지은 여러 시편들 가운데 흩어져 나오고, 특별히 119편에 보면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이 말씀을 생각하고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는 시인에게 교훈을 주셔서 무엇을 믿고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주시고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러한 교훈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받아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백성의 행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이렇게 살아야 할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교훈을 배우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자녀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일생을 모두 지켜볼 수 없고, 또 지켜본다고 한들 그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 우리가 함께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견고한 관계를 가지고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함
그러면서 시인은 또 한 가지를 고백하는데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다양한 상황을 통해 자기를 교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제까지 주님의 기사를 전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러한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시인이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해서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그것을 사용하셔서 시인을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불은 언제나 붉은 빛이지만 그 불길이 어떤 가연제에 닿느냐에 따라 다양한 색깔을 냅니다. 불이 나무를 태울 때 나는 빛깔과 화학제품을 태울 때 나는 빛깔과 유류제품을 태울 때 나는 빛깔과 심지어 금속과 맞부딪쳐 금속을 녹일 때의 불꽃의 색깔이 다릅니다. 어떤 때는 시뻘겋게 어떤 때는 파랗게 어떤 때는 초록빛으로 어떤 때는 아주 새파란 불꽃으로 나타납니다. 같은 불인데도 그 불이 어떤 가연제와 접촉하느냐에 따라서 다른 빛깔을 나타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한분이시지만 당신의 사랑과 은혜를 시인에게 비춰주실 때 그가 처해있는 다양한 상황과 만나면서 다양한 빛깔로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들을 계시해주십니다.
그것 때문에 시인은 인생의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성품과 새로운 속성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반드시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주는 빛을 가지고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주 커다란 은혜의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주의 기사를 전함
본문은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나팔’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시편 119편에 보면 “내가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함을 보게 해 주시옵소서” 하고 시인이 기도하는 장면에서도 이 단어가 나옵니다. 이 단어는 기묘한 것, 놀라운 것들을 총칭하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 행하셨던 크고 놀라운 기적의 사건들을 가리킨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을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통해 알게 될 때 시인이 경험했던 인식론적인 충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른 땅으로 들어섰습니다. 양쪽에는 물이 벽이 되어 서고 그 사이를 지나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들은 적도 없고 본적도 없고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이었는데, 그 놀라운 기적의 현장을 경험하면서 홍해를 건너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넌 다음에 찬송하는 것은 두 가지 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행하심입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 같은 신이 누가 있느냐”라고 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탁월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구원을 행하셨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찬송의 제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해봅시다. 기적이 일어나서 갈라진 바다 사이를 건너가는 것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마어마한 충격이었지만, 그것은 홍해를 건넌 후, 애굽의 병거들이 뒤따라 와서 수장됨으로 끝났고, 같은 사건은 두 번 다시 되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건을 통하여 더욱 놀랐던 것은 ‘아, 이세상의 신들이 존재하지만 여호와와 같으신 이는 없다. 여호와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구나.’ 라는 두 가지 사실에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잊혀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되었던 것입니다.
기적, 놀라운 일, 기사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구나.’ 두 번째는 ‘그 위대한 기적이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의 구원과 관련이 있구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언약한 바를 지키시고 자기의 백성을 사랑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해 뽑아낸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입니다. 그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기사’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기사’는 외적인 기적과 내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가로지르는 개념입니다.
언약백성의 참된 행복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시인은 깨달은 말씀을 가지고 바깥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의 의미를 연결하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왔습니다. 그것이 시인의 기쁨이고 행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 마시고 예쁜 옷을 입고 큰 집에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삼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그런 재화의 소비를 필요로 하지만 언약백성들의 참된 기쁨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한편으로는 받은 가르침을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가르쳐줌으로써 그들이 어둠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에 대해 눈을 뜨고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언약 백성들의 행복입니다.
교회나 우리 주위를 보면 영혼의 부담감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가르치고 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변화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정말 복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보면서 감격하고 그것들에게 자극을 받지만, 언약백성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매일 매일 알아가는 진정한 행복 속에서 주님을 기뻐하고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까지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발이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력을 장래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8)
본문해설
시인이 몇 세쯤 되었을 때 이 시를 지었는지는 판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장래를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늙어서 백수가 되었을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말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친숙했던 시인은 젊은 날에 하나님과 동행했지만 나이가 들었을 때 하나님과의 아름다웠던 동행에서 멀어졌던 구약의 인물들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역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자신의 주변에 젊어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령에 속한 생활을 하다가 나이든 후에는 육체에 속한 삶으로 인생을 마감했던 많은 사람들을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 중 한사람이 자신의 전임자였던 사울이 아니었을까요? 하나님이 왕으로 부르셨을 때의 사울은 지극히 겸손하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지나면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져 여호와의 신은 떠나고 하나님이 부리는 악신이 임하여 비참한 인생의 말로를 맞이하는 것을 시인은 보았던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
시인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왕국을 강건하게 해주십시오. 부강하고 번영한 나라가 되게 해주십시오.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인의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라고 말입니다.
늙으면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잘 준비되지 않으면 그때 정신적인 공황과 어려움이 찾아오게 됩니다. 젊었을 때 현직에 있었을 때는 만나고자 하는 사람도 많고, 부탁하는 사람들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이 있지만, 머리가 하얗게 되고 현직에서 물러나게 되면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이 자기를 떠나고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 때 파고들어오는 외로움과 두려움, 자신이 버려진 것 같은 마음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만 준비된다면 상관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였습니다. 히브리말로는 “나를 떠나지 마십시오.”입니다. 그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존 오웬 목사님은 성도가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의미는 두 가지를 내포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찬양)
주 내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과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까요? 노력은 하지만 항상 평화를 누릴 수는 없습니다. 사도바울은 권면합니다. “너희는 할 수 있으면 모든 사람과 화평하라” 우리는 덕스러운 삶의 태도도 익혀야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평화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세상과 평화를 누리려고 애를 쓰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기 때문입니다.
월요일에 관상기도에 관한 발표를 했습니다. 50페이지 정도 되는 논문을 쓰는데 사용하려고 복사해 놓은 것만 천오백 페이지 정도 되었습니다. 2주 동안 최선을 다해서 썼습니다. 그 글을 목사님들이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몇 사람이 저에게 와서 이야기를 합니다. “목사님은 전사이십니다.” 우리는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싸워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혈과 육에 속한 싸움처럼 머리로 치고받고, 발로 차는 식으로는 싸우지 않습니다. 진리를 옹호하기 위한 논쟁을 하지 않는 것은 진리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항상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세상과 항상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 항상 평화를 누리려고 하면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과의 영원한 평화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을 합니다. 우리의 부덕한 생활이나 이기심 때문에 평화가 깨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교도들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완벽하게 화평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과의 평화는 우리에게 더 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편에 서있다는 확신, 그분과 나 사이에 거리낌이 없다는 확신, 내가 믿고 살고 섬기는 모든 것이 주님의 마음에 충분히 만족을 드릴 수는 없지만 그분과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삶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삶
또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갈망하는 것은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종교적인 만족 속에서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당신의 존재의 영광에 합당한 것을 인간에게 인정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하나님께 이익이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생활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적으로 복을 주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닙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되 늙어 백수가 될 때까지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생활이며,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원
시인을 통해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늘그막에 소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젊어서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내가 나이가 많아 늙어 백발이 되었을 때도 떠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나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아 나를 버리고 떠날 때에도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동행해 주시고, 그분과 나 사이에 더 큰 평화를 누리면서 그분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꿈꾸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가 많아 늙을 때에도 자기가 포기할 수 없는 일, 한 가지를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을 아는 지식을 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이가 많아 백수가 되면 나라도 다스릴 수 없고, 젊음의 기운, 패기, 힘과 영광을 인정받지 못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자기를 위해 행하신 그분의 위대한 능력,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큰 권능을 회고하면서 놀라운 하나님의 힘과 은혜를 후대의 자손들에게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과 권능을 아는 지식이 어떻게 생겨납니까? 시인이 앞에서 고백한 대로 원수에게 에워싸여 고난 받을 때, 거기서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 때문에 거기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랑들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때로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소화하며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악인이 나와 관계를 맺고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은 커다란 고통이지만,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면서 오히려 평화로웠더라면 깨달을 수 없었을 하나님의 큰 사랑을 경험하고 악인을 징벌하고 당신께 피하는 의로운 사람들을 보호하시며 갈 길을 보이시는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깨달음이 나에게 하나님의 힘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능에 대한 지식이 되어 끊임없이 역사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대한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련과 어려움을 당하고 육체의 질병이 생겨서 사는 것이 너무 불편하고 힘들 때, 일어나지 말아야할 것이 나에게 일어났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본질이고, 나그네 된 삶이 충분하지 않은 이유가 세상의 결함 때문이구나.’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매순간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닫고, 인생의 시련과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찬란한 빛을 비추어 알게 하시는 그분의 성품과 속성을 주목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통해 그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얻게 됩니다. 비록 사람들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라도 젊은 날 누렸던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은혜 안에서 그분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이고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은 나에게 그것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백수가 되어 더 이상 나에게 배우러 오는 사람이 없어도 나 자신을 위해 주님이 누구신지를 배워가고 알아가는 것이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이여 주의 의가 또한 지극히 높으시니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시 71:19)
˘의˙의 세 가지 개념
성경에는 ‘의’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리고 ‘의’에 대한 개념은 다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의’를 언급할 때에는 다의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생각을 해보면 우선, ‘의’라는 것은 ‘옳음’입니다.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제일 먼저 ‘의’는 기준 자체를 가리킵니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는 의이십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 자체를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태양과 같은 분이셔서 수많은 광선을 세상에 비추고 계십니다. 태양의 광선이 지구에 도착하게 되면 태양에서 비추는 빛이 각종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균을 만나면 살균하는 작용을 하고, 어두움을 만나면 빛을 비추는 작용을 하고, 봄철의 식물을 만나면 싹이 트고 자라게 하는 역할을 하고, 겨울의 얼음을 만나면 얼음을 녹이는 작용을 합니다. 많은 피조물들과 만나서 작용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작용중 하나가 ‘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직접 보아서 그분을 알 수 없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 특별히 인간의 삶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그분의 강한 속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렇게 나타나는 다양한 속성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 자체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은 공의 자체라고 말할 수 없고, 하나님은 은혜 자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인식되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의이시다. 하나님은 무엇이시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의’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의’는 이 세상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위해서 보이시는 하나님의 의지 자체를 ‘의’라고 부릅니다. 인간 편에서 ‘의’는 율법에 부합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율법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구약시대에서 율법에 부합하는 상태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특별히 시편을 보면 인간이 율법에 온전히 부합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옳으심으로 인해 마치 우리 자신이 율법의 의무를 모두 준수한 것 같은 유익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세 번째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구원하기로 한 사람이 불순종해서 하나님이 법을 따라 그를 멸망시키거나 버리시면 인간 편에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 앞에 한번 구원을 받고 선택받은 사람이 그분 앞에 잘못하고 율법에 부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완전히 버림을 받게 된다면 하나님의 능력이나 사랑의 완전함을 증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하나님 앞에 그런 염려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이 악을 행하여서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려고 할 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여호와가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꺼내었으나 약속대로 가나안으로 인도하려고 했더니 능력이 모자라서 중간에 백성들을 버렸다는 비난을 받으실 텐데 어찌하시겠습니까?”라고 안타깝게 매달립니다.
스스로에게 모순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의로움 때문에 우리가 아무런 공로 없이 혜택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의’의 개념입니다.
˘의˙ 자체이신 하나님
“주의 의가 또한 높으십니다” 완전히 또 다른 이야기가 19절에 도입이 됩니다. 이런저런 땅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가슴이 벅차면 하늘의 이야기를 할 수도 있고, 세상에서 이루어진 일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갑자기 그 이야기를 끊고 하나님의 은혜가 정말 크고 놀랍다고 말할 수 있듯이, 여기서 시인은 눈을 들어 하나님을 묵시하는 시적인 반전을 보여줍니다.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게 하는 기준에 있어서 결함이 있기 때문에 개념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기준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그렇게 못 살게 하고,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욕망 속에서 기준을 거부하고 매일매일 결단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기준을 아는 것, 진리를 아는 것과 실제 우리의 삶과 마음이 거기에 합치하는 것 사이에는 항상 모순이 존재합니다. 부분적으로는 힘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힘의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기준이시기 때문에 기준을 지키기 위해서 노력을 하셔야할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존재 자체가 의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경향과 속성을 따라 사물을 대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먹으면 그것들이 일관성 있게 의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품도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성품도 있고, 예수 믿고 거듭난 성품도 있고, 아직 남아있는 죄의 성품도 있습니다. 깨어진 가정에서 자라면서 입은 상처로 말미암아 형성된 본성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복잡한 것들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환경들을 통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있는 대로 바깥으로 쏟아내면서 살면 삶이 엉망이 됩니다. 내가 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하지 않고, 하기 싫지만 하나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하려고 애를 쓰면서 살아도 모순투성이의 삶이 됩니다. 그래서 누구도 “나는 의롭다. 나는 의로운 삶을 살고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으로 사시기만 하면 하나님의 속성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실 때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게 행동하시기 위해 꾸밀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움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선을 위해 노력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면 하나님 자신이 선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의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로가 되는 하나님의 의
시인은 “주의 의가 지극히 높으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땅에서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법도를 굽게 하는 것 같고, 여기저기에서 악인들이 성행할 때, 하나님의 올바른 도가 꺾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시 눈에 보이는 현상일 뿐, 하나님은 여전히 의로우시고 어디서든 살아계셔서 당신의 의로운 성품을 세상 위에 두루 비추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시고 주님이 의 자체라는 사실이 시인에게 두려움이 아니라 위로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의 의에 끊임없이 합치하며 살려는 사람들에게 주님이 의로우시다는 사실은 위로가 됩니다. 끊임없이 자신 안에 악한 기질이 있고, 올바르게 선을 행하며 살려고 할 때 낙심이 되는 일이 많이 일어나지만,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 위로가 됩니다. 어디서나 선하게 살고자 하는 자신을 버리지 아니하고 지키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종종 낙심하지만 그 낙심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말하면, 선은 하나님의 자기 사랑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악하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모순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일을 도덕적으로 행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알아가는 것은 그의 삶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분을 올바르게 신앙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본받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쉽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을 때에만 하나님을 올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 없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뛰어나신 하나님
시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우리는 여기에서 시인이 말하는 큰 일이 무엇인지 명백하게 규명할 수는 없습니다. 가깝게 보면 시인이 악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 자신을 건져주신 것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크고 놀라운 일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대사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크고 의로우신 일들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확정지을 수는 없지만 주께서 대사를 행하셨습니다.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라는 말은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이 모든 만물과 모든 것 위에 뛰어나고 탁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자신의 많은 것들과 주님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것들 위에 뛰어나고 완전하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홀로 당신이 우리와 관계를 맺고, 당신의 생명의 기운을 우리에게 뻗치십니다.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당신이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와 사랑을 매일 보고 만나게 됩니다.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시 71:20)
섭리 속에서 보이시는 고난
시인은 바로 앞에서 “주께서 대사를 행했으니 누가 주와 같겠습니까?”라고 했던 찬송에 대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셨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시인을 포함한 언약백성들이 겪었던 많은 고난과 극심한 고통, 이런 것들이 결국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 속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칼빈은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사의 원인이 되신다고 할 때, 우리는 먼데 혹은 가까운 데서부터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깝게 보면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이 원인이 되지만, 멀리 보면 결국은 하나님이 원인이 됩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함께 큰 시련과 환난 가운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나 이 세상의 환난, 시련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 아래에 있다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니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고난을 주님이 보여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들은 모두 주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나쁜 것들은 모두 사람으로부터 온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을 깊이 의존하고 나면 세상의 모든 섭리가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들, 받아들이기 힘든 괴로운 일들이 일어날 때에도 우리는 주님을 깊이 신뢰하고 하나님을 따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해할 수 있을 때만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해할 수 없는 환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을 때도 모든 상황을 뛰어넘는 신뢰 속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의지하듯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이 영영히 많고 심한 고난 속에서 시인과 언약백성들을 내버려두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고 심한 고난 속에서 그들을 다시 살리시고 땅 깊은 곳에서 이끌어 올리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덕을 입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한 고난을 보이실 때 당신이 홀로 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셨지만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그 안에는 악역들이 등장하였을 것입니다. 시인은 고통을 받으며 얼마나 많이 괴로웠는지 ‘많고 심한 고난’이라고 이야기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인을 포함한 언약백성을 다시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두 가지인데, 한편으로는 죽음과 같은 상황 속에서 그들을 섭리로서 건져주심으로써 그들을 살려내셨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들의 영혼이 곤고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은혜를 부어 주심으로 그들을 다시 살려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매 순간 당신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그들을 끌어올리시고 크신 섭리 속에서 당신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음부’를 가리킵니다. 성경에 나오는 ‘스올’이라는 곳은 ‘샤알’(la'v;), ‘청구하다’라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지옥이라는 개념이 구약백성들에게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올은 인간이 죽은 다음에 가는 곳으로, 생기와 기쁨을 모두 박탈당한 음침하고 괴로운 곳,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장소가 땅 아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음부’라고 번역된 이 단어와 함께 ‘내려간다’는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땅, 깊은 곳이라는 것은 희망이 없는 절망의 상태, 아무 기쁨과 낙이 없는 좌절과 괴로움의 상태입니다. 시인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다시 이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거기서 우리를 다시 이끌어 올리실 것입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찬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의존하는 신앙
여기서 우리는 언약백성의 희망이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종종 신앙이 떨어지고 나면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혼동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지만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영원하지도 않고 신실하지도 않고 불변하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섭리 속에서 떠나가기도 합니다. 부여된 것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정성 때문에 우리 곁으로부터 사라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큰 은혜를 입고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입으며 아버지께 부르심을 받았을지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섭리 속에 주신 것들을 더 많이 의지하고 붙들다가 신앙의 커다란 손해를 입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섭리 속에서 움직이는 모든 질서들은 주님께 의존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만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으로 능히 할 수 있는 어려움을 만났을 때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떠났을 때도, 내가 믿고 신뢰하던 사람들이 나를 배반할 때도,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것 같았던 명예나 권력이 내게서 떠날 때도, 오랫동안 내가 붙잡고 있을 것 같았던 물질들이 내 손에서 흩어질 때도,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의존의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존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사람을 너무 믿고 신뢰했기 때문에 주님을 덜 의지했다면 사람으로부터 실망을 하고 배신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덜 의지했다면 그 물질을 주님이 주신 것이라고 할지라도 주님이 직접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게 하십니다.
시인은 큰 시련과 많은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깊은 어두움 속에서 건져내어 다시 살리시는 것과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다시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경험했고 또 경험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의존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 것 같고 이런 애매한 고난을 당할 이유가 없는 것 같을 때, 내가 선대한 사람들이 나를 배신하고 내가 공들여 행했던 일들이 수포가 되어서 돌아올 때, 우리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미워하는 대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을 깊이 돌아보면서 회개하고 뉘우치고,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있는 슬기가 필요합니다.
(찬양)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나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결론과 적용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쓰라리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때마다 당신께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적절히 이 세상과 사람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하게 하심으로써 주님이 섭리 속에서 우리에게 많은 복을 내려주셔도 우리로 하여금 조용히 하나님을 앙망하고 의지하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매순간 우리를 이끄시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연약할지라도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가진 것이 없고 재능이 없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순수한 언약백성의 마음속에서 주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의 손으로 지은 커다란 건물과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쌓아올린 공적의 허다한 것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대신, 참회하고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의 마음 안에서 받으시는 영광이 훨씬 더 크다고 생각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을 원하시기 때문에 당신을 의지하고 더 많이 사랑하면서 살도록 날마다 우리를 부르시고 이끄시고 도우십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로하소서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시 71:21)
본문해설
이 부분은 번역이 많이 잘못되지 않았지만 조금 다릅니다.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나의 명예를 더욱 크게 해주십시오.” 원래는 ‘겟올라트’(גְּדוּלָּה)라고 해서 ‘나의 위대함, 나의 큼’이라는 뜻입니다. “나의 큼을 더욱 크게 해주십시오.”입니다. 의역을 하면 “당신은 나의 명예를 더욱 증진시켜주시고 다시 한 번 나를 위로해주시옵소서.” 이렇게 됩니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받을 때
이 구절을 통해서 시인이 받고 있는 정신적인 수치감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원수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비방하며 모욕을 가할 때 이것은 밥을 못 먹거나 옷을 못 입는 종류의 물질적인 고생이 아니라 부끄러움과 수치가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줍니다.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는 왕이 되었을 때 처음부터 백성들의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큰 섭리가 있었지만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고 예루살렘에 법궤를 남겨둔 채 황망하게 망명의 길을 떠나야했던 때 그에게는 모욕과 부끄러움이 가득했습니다. 자기를 존경하고 사랑하던 많은 부하들이 등을 돌리고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가 하면, 많은 백성들이 다윗을 비난했습니다. 한때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과 신망을 받던 사람이 겪었을 수치와 마음의 고생을 어떻게 우리가 모두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은퇴했지만 이름만 대면 잘 아는 코미디언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만났는데 그분이 간증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기가 하늘을 치솟다가 어느 날 갑자기 팬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차갑게 대할 때 죽음 밖에는 아무것도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주님을 만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정신적인 수치와 부끄러움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커다란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면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었던 것은 “나를 원수들의 조롱과 악인들의 박해에서 건지시는 과정을 통해 나의 명예를 더욱 증진시켜주십시오. 모든 사람들 앞에서 나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영광으로 바꿔주십시오.” 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명예를 회복시키시는 하나님
시편을 읽을 때마다 항상 새겨 두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경건한 언약 백성들은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영광이 동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탐욕이 있고 하나님 밖에서 영광을 구해보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면, 자기의 이름을 내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이 충돌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하나님의 법도대로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곳에서 자기 혼자 영광을 받는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신앙 없는 사람이 목회자를 존중해주는 것을 본적 있습니다. 발톱의 때만큼도 알아주지 않다가 그가 깊이 회심하게 될 때 목회자를 정말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자신의 명예와 하나님의 영광이 떼어놓을 수 없이 연결되어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명예를 더욱 증진 시켜주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자신이 악인들에게 멸시거리가 되고 조롱거리가 된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명예를 다시 증진시켜주십시오.”라는 탄원은 단순히 자기를 높여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많은 악인들 가운데 하나님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태도가 바뀜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상관없이 나 자신을 위해 내가 알려지고 높여지고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겠습니까? 시인은 이런 관점에서 자기의 명예를 더욱 높여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시인은 “돌이키사 나를 위로하소서”라고 간구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시 한 번, 혹은 반복해서 나를 위로해주시옵소서.”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멀리 떠나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나를 명예롭게 하시고 영광스럽게 하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나를 명예롭게 하시고 다시 영광스럽게 해달라고 간절히 탄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들에게 위로가 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하지 않기 때문에 위로를 받지 못하고 사는 것이지 하나님을 앙망하면 그분은 어느 때든지 우리에게 위로를 베푸십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확인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위로를 베푸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시 당신의 사랑을 받게 하심으로 위로를 베푸십니다. 그뿐이겠습니까? 환경의 변화들 속에서 고통 받는 우리의 환경을 이끌어주시고 위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어루만져줍니다. 시인은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위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인간에게 자비를 구하고 도피처를 찾는 것은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부패하게 만들고 우리를 하나님의 품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고난과 시련을 받을 때 마지막 피난처인 당신께 피하고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힘입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시인에게 위로자가 되셨습니다. 고난과 시련에 에워싸였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시인에게 위로가 되었고,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은총의 표증들은 원수들은 부끄럽게 하고 시인을 영예롭게 하였습니다. 시인은 고난 중 자신의 위로가 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시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연주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연주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연주를 통해 인격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공명되게 하시고, 아름다운 행동, 덕스러운 실천이 삶속에서 가락처럼 울려 퍼지게 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좋은 연주자는 연주를 해야 할 때가 오면, 모든 현을 다시 조율하기 시작합니다. 늘어졌던 실들을 팽팽하게 당기고 너무 팽팽한 실들은 늘려주어서 현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도록 조율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연주하실 때 아름다운 곡조가 울려 퍼지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조율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조율하십니다. 때로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줄을 팽팽하게 하시고, 때로는 마음을 위로하심으로써 고난과 시련으로 팽팽해진 마음의 어떤 줄들을 늘려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을 다섯 손가락 삼아 연주하실 때 아름다운 소리가 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날마다 후패합니다. 어제도 장례를 다녀왔는데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그냥 살아있는 것뿐이지 우리의 내일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얼마나 인생을 길게 사는가가 삶의 보람일수는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날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연주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가락을 낼 수 있도록, 주님이 우리의 마음을 연주하실 때 그 가락이 다른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에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도 필요하기 때문에 그 한가운데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믿었던 사람들로부터의 배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의 실망, 당연히 그렇게 될 줄 알았던 환경으로부터 기대에 어긋나는 고통을 받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조율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이 자신의 아픔과 고통, 시련과 괴로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조율하신 다음, 나의 마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곡을 연주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당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우리의 마음을 연주 하십니다. 굽은 마음을 펴고 뒤틀린 마음을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심사가 꼬이고 마음이 어그러진 사람들의 마음에서 아름다운 가락이 연주되는 것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찬양)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를 바라볼찌라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불러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십니다. 우리의 명예와 영광은 주님의 그것과 결탁되어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 있을 때 주님이 모욕 받는 곳에서 우리의 이름이 높아지길 원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곳에서 우리는 높아지기를 원하고, 우리를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사모합니다. 시인을 본받아 여러분의 위로와 참된 사랑이 오직 주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깊이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삶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통해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붙들고 그분께만 위로와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1)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를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리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주여 내가 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구속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 71:22-23)
본문해설
하나님께 감사와 간구, 탄원을 모두 올린 후에 시인은 이 시 전체의 마지막을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앞 절에서는 우리에게 찬송의 제목을 가르쳐주고, 뒷 절에서는 찬송할 때 시인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
언제 우리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솟구치고 감격으로 떠오르게 됩니까? 다른 사람이 찬송을 부르도록 시킨다고 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은 아닙니다. 찬양하고 싶을 정도로 우리의 마음이 충분히 정돈되지 않아도 찬양함으로써 흩어졌던 마음을 집중시키고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정돈이 일어나게 하는 효과도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가 있습니다. 조금 더 고유한 의미에서 살펴본다면, 먼저 우리가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이 정돈되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심령에 가득 차게 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찬양과 경배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경험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또 비파로 주를 찬양하며 주의 성실을 찬양하겠습니다.” 시인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인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은혜를 구하고 자신을 건져주시기를 기도하는 간구와 회상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시인의 마음속에 깊이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성실은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토대로 일어나는 하나님의 속성의 또 다른 적용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진리에 합치하여 스스로 모순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어떤 때는 미덕이 되지만 어떤 때는 불결하고 더러운 악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진리를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고 계신다는 증거들이 마음속에 성령으로써 인 쳐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고집하며 살기에는 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신념을 견지하고 신념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등져야하고, 믿었던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기도 하고, 시련과 핍박에 직면해야하는 일도 있고,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생겨난 진리에 대한 확신에 부합하도록 일관성 있는 삶을 살게 될 때 그것은 아주 덕스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신앙의 지조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불굴의 확신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에서 이탈하게 되었을 때,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고 왜곡된 것이라면, 자신에게 충실한 것은 커다란 악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첫 번째가 자기부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우에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진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빛 아래에 있을 때는 자신과 합치하는 삶이 덕스러운 삶이지만 진리의 빛 바깥에 있을 때는 온갖 사욕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은 진리와의 정합성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와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고 그 진리에 모순되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에 언제나 합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성실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이 맺으신 피조물들, 특별히 인간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진리이고 진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피조물이 그분을 향해 가지고 있는 태도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일관되게 피조물에 대해서 같은 진실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언제나 똑같은 태도로 대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부모가 인격이 진중하고 성품이 진실하다면 자식들을 대할 때도 그렇게 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들의 삶이 일관성이 없어서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내일, 모레는 방탕하다가 글피는 다시 회개하고 말씀으로 돌아온다고 가정해 봅시다. 부모가 진실성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태도는 아주 뚜렷하게 변화할 것입니다. 진리 가운데 자식이 거하면 사랑하고 칭찬하고 좋은 것을 줄 것이고, 그것을 버리고 방탕한 길로 가면 회초리로 때리고 야단을 치고, 돌아오면 용서하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예뻐할 것입니다. 그 자식처럼 방탕한 인간의 입장에서 부모를 들여다보면 아주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오늘은 예뻐하고 내일은 때리고 모레는 용서하고 글피는 다시 사랑하고 그 다음날은 또 다시 두들겨 패니까 아주 변덕스러운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부모가 변덕을 부리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가 가지고 있는 일관된 진실성의 표지 때문입니다. 어떤 방향으로 내 자식을 이끌겠다는 것에서 분명한 선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치 햇빛이 언제나 우리를 비추는 것처럼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에게 좋게만 대해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의 진실성과 모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실 수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그 뒤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성실성입니다.
찬양할 이유
한 가지 예가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우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망한다고 외쳤습니다. 유다가 망한다고 외쳤으나 그들은 듣지 않았고, 선지자는 시위대의 뜰에 갇혀 죽을 고생을 당했습니다. 결국 그 예언은 이루어지고 이스라엘은 망했습니다. 예루살렘은 겁탈당한 부녀자처럼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혀 완전히 파멸된 성을 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노래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고 예루살렘이 다 파괴되었는데 무엇이 성실합니까? 오히려 역설적으로 산산이 무너진 예루살렘을 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은 성실하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백성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아직까지도 이들과 관계를 맺고 계신 것을 보면서 그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시인은 그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성실하심 때문에 시인의 가슴이 벅차오르며 하나님을 찬송할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언젠가 김영옥씨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중계방송을 보았습니다. 연주를 하는데 땀이 비 오듯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서 객석 여기저기에서 사람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참 많이 회개했습니다. 저렇게 작은 악기 하나에 어떤 진리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겠습니까? 물론 헤겔이 말한 것처럼 조화와 비율, 가락들 속에 진리에 대한 또 하나의 경험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 작은 악기 하나로 저렇게 땀을 흘리면서 연주하고, 저 많은 사람들은 언어가 아님에도 가락을 느끼면서 눈물을 흘리는데 나는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뛰어난 기량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활을 가지고 현을 오가면서 현란한 연주를 하는 탁월한 재능이 있어도 줄이 없는 바이올린을 가져다주면 소리를 내어 연주를 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삶의 환경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연주하실 수 있는 바이올린의 현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린 활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작정하신 거룩한 뜻이라는 악보로 연주될 때 거기에서 온갖 아름다운 가락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 활에 쓸리는 현은 아프겠지만 현의 마찰을 통해 아름다운 곡이 울려 퍼져 객석까지 들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다양한 환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을 보여주는 곡조를 연주하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에게서는 어디에서든지 이 곡조가 들립니다. 고난과 시련이 계속되는 환경 속에서 그 줄을 울리면서 들리는 가락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알게 됩니다. 또, 편안하고 좋은 환경에서는 그 줄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를 통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성품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의무가 무엇일까요?
(찬양)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할 이유가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지, 이유 없이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에 대한 앎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앎입니다. 그 속성이 어떻게 시행되는지 그 방식에 대한 앎이 우리의 마음에 울려 퍼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울려 퍼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처한 환경들을 모두 사용하셔서 당신의 속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마음 둘 곳 없는 요동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마음을 붙들고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수많은 악인들이 자신을 에워싸고 아마 많은 배신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시인이 요동쳤기 때문에 오히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성실함은 어제나 오늘이나 시종일관 똑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실함은 아침마다 새로운 성실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사랑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날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빛줄기 하나하나가 우리의 마음속에 커다란 지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이것들이 울려 퍼지면서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는 그분의 큰 뜻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던 때는 주의 성실하심에 대한 감격으로 가득 찼을 때였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 성실하심을 보이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성실하시지만, 성실한 성품에 어울리게 사는 사람들만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알아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난 악인들에게 하나님은 종잡을 수 없는 분으로 여겨집니다. 오늘은 사랑하고 내일은 때리시고 모레는 어루만지시고 글피는 용서해주시니까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결론과 적용
세상은 신실하지 않고 늘 요동칩니다. 그 속에서 고난도 슬픔도 이기면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관된 삶을 살려고 애쓸 때, 우리는 도처에서 신실하시고 성실하신 하나님의 증거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시련과 고난으로 세상이 나를 속일 때도, 오히려 그것을 통해 더욱 하나님은 성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신앙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내가 주를 찬양할 때(2)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 71:23)
본문해설
시인은 바로 앞 절에서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인하여 찬송하고 있습니다. 성실하심이 진실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성실하심과 진실함이 모두 진리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신의 내면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2절의 내용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유를 자신 밖에서 발견한 것이라면, 23절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자신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작용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시편을 깊이 이해하려면
시편을 읽을 때 염두에 둘 점은 이것입니다. 이 시는 이론서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의 고백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는 점입니다. 신앙의 경험이 깊어질수록 시편에 대한 이해도 함께 깊어집니다. 세 가지에 대한 이해를 통해 시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시편의 내용은 우리의 마음속에 밀착되어 다가오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야다 엘로힘’(יָדַע אֱלֹהִ֔ים), 혹은 ‘야다 야훼’(יָדַע יְהוָ֥ה)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호세아 선지자가 호세아 4장에서 기록했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하는도다”라는 고백입니다. ‘다트 엘로힘’(אֱלֹהִ֔ים דַּעַת),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구약적 명칭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두 가지를 내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 속성에 대한 앎이고, 또 하나는 이 속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시행방식에 대한 앎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것을 알고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나와 이웃의 삶과 관련을 맺어 실행되는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질도 아니고 한정되어 있는 영적 피조물도 아니십니다. 만지면 만져지고 눈으로 볼 수 있는 피조물이 아니십니다. 피조물을 보는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와 맺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알고, 그 속성이 어떻게 실행되는지를 배우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갑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깊을수록 시편에 대한 이해는 깊어집니다.
둘째는 인생을 살면서 인생 자체에 대한 경험이 깊어져야 시편에 대한 이해도 함께 깊어집니다. 시인은 단순히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찬송했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앎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지식과 아주 밀접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쓴맛, 단맛을 경험하고, 인생을 바라볼 수 있는 일반 은총에 대한 통찰이 깊어져가는 가운데, 하나님이 인생사 속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과 계획과 생명과 능력을 전달하시는지를 함께 배워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시편에 대한 이해도 깊어집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시편을 이해하는 깊이를 좌우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시인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속성은 그들에게만 우연히 보여주신 속성은 아닙니다. 시인들이 구체적인 삶 속에서 발견하고 체득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계시를 통해 이미 우리에게 계시된 내용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 저런 분이시다.” 이렇게 계시된 내용들은 은혜의 세계에 대한 이해의 깊어질수록 우리의 마음속에서 놀랍게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은 더욱 잘 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현재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그들의 수준에 맞는 만큼만 계시는 빛을 드러냅니다.
감화되어 부르는 찬양
많은 사람들은 시인이 “내가 주를 찬양할 때 내 입술이 기뻐 외치며”라고 고백하는 구절을 시적묘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은혜의 세계 속에서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악기를 잘 연주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의 마음에 충만하고,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역사하여 그 안에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정이 가득 찰 때, 건반을 두들기는 손가락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흔히 ‘신들렸다’고 말하는데, 신들린 듯이 연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저같이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필수적입니다. 어떤 때는 심혈을 기울여서 하루 종일 글을 써도 원고지 20장도 못 써내려갈 때가 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그 부분을 읽어도 큰 감흥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글이 쏟아집니다. 하루에 원고지 200매 이상도 써본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닷새 정도면 책 한권이 나오는데, 10년 후에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썼을까? 지금은 못 쓸 텐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작용에 감화를 입으면, 우리의 손인데도 우리 손 같지 않고 우리의 글인데도 우리 글 같지 않게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찬양을 할 때도 똑같은 경험을 합니다. 언제든지 노래하려고 마음먹으면 누구든지 노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성령의 은혜에 깊이 감화될 때는 못 올라가는 고음도 올라가고, 소리 자체가 속에서 울려 퍼져 휘돕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도 경험하는데 시인과 같이 깊은 은혜의 세계를 누렸던 사람들은 얼마나 더 많이 경험하겠습니까?
시인은 “내가 주님을 찬양할 때 내 입술이 기뻐 외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입술이 무엇을 기뻐하겠습니까? 기뻐하는 것은 입술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요 정신입니다. 마치 입술자체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 고백입니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데 경험이 있습니다. 1989년도에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고개 6개를 넘어 민간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수련회를 했습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완전히 고립되었고, 군에 헬기를 보내달라고 요청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형광등을 몇 개 켜놓고 진행했던 수련회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제가 설교자가 되도록 만든 첫 번째 계기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예배가 7시 반에 시작되었고 설교를 50분 정도 하고 마쳤습니다. 그런데 한시가 되어도 기도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찬양을 부르는데 마치 영화 ‘미션’에 나오는 장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한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상의 메아리 같았습니다. 그때 제가 가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깊이 만져주실 때 인간의 입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가락이 나올 수 있구나.’를 생각했습니다.
(찬양)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널리널리 울리리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찬양을 많이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상사병에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성경이 얼마나 보일까?” 그의 말씀에 따르면, 시편에 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흐느끼는 고백들이 단시 시적묘사가 아니라 그들의 영혼에 차오르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 속에 진실성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하고 찬양이 마음에 차오르는 중에 자신의 입술이 외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뒷 절을 보면 “주께서 구속하시는 내 영혼이 즐거워하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구속의 의미는 넓게 보면 죄 가운데서 건져내어 언약백성을 삼으시는 모든 것을 포함하지만, 가깝게 보면 구출입니다. 시편 71편의 문맥은 이러합니다. 시인은 원수와 악인에게 둘러싸여 고통 받고 있지만 힘이 없어서 이러한 시련과 난관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시인을 건져주십니다. 주님이 건져주셨을 때 이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영혼이 함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음악을 전공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평소에 훈련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찬양을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주님이 위기에서 건져주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경험한 백성들입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을 통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찬양이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찬양이 주는 유익
찬양은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진실하게 울려 퍼지면 그 찬양은 다시 우리의 마음으로 들아와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양할 때 그 찬양은 사람이 들으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자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러한 찬양의 내용 중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라고 할 때, “그래. 내가 너희들의 구원자였다는 것을 알려줘서 고맙다.” 이런 것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아니라 찬양이 하나님을 향해 올려질 때, 그 찬양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결과적 의미에서 찬양은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회상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회상하고 그것을 찬양에 담을 때 우리의 마음과 정신 전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전달받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삶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고백하게 되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이끌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눈물로 찬양한 사람이 눈물이 마르기전에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요? 주님의 성실하심에 대한 찬양이 가슴에 울려 퍼진 사람이 노래의 말마디가 마음속에 멈추기 전에 사람을 속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찬양은 우리가 늘 은혜의 정동 속에서 살게 하는 유익을 줍니다. 찬양을 통해 경건한 영향을 받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찬양의 간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의를 말하게 하소서
“나의 혀도 종일토록 주의 의를 작은 소리로 읊조리오리니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들이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시 71:24)
본문해설
시인은 자신을 괴롭히던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정리가 되고 난 다음에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노래하는 것으로 시편 71편을 끝맺고 있습니다.
내용을 살피기 전에 우리가 이 사실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시인에게 강력한 소망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악인들과 뒤틀린 질서 속에서 고난을 받고 있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것은 과정일 뿐, 하나님께서는 말할 수 없는 지혜 속에서 이 상황을 섭리하심으로 마지막에 당신이 살아계심을 보여주실 것이라는 강력한 소망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믿음을 기초로 이루어진 소망입니다.
믿음의 중요성
희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자기 암시적인 희망과 신앙적인 희망입니다. 자기 암시적인 희망은 스스로를 격려하며 잘 될 것이라고 타이르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약속의 계시를 붙든 소망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의 빛에 근거하여 가지고 있는 소망입니다. 시인은 시편 71편을 이러한 소망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희망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련과 환난을 당할 때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에 믿음 없이 나아간다면 그것은 우리를 시험 속에서 악에 빠지게 하는 발걸음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 시험에 빠지게 되면 악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삶의 근거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두고 보이는 상황을 외면하며 살 수는 없지만, 보이는 상황이 전부인 것처럼 거기에 매달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고 하나님께는 더더욱 영광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보이는 상황보다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약속의 말씀이 보이는 상황을 변화 시킬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커다란 적은 밖에 있는 원수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죄악에 기울지 않는데 마귀가 우리를 향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이 세상이 우리를 대항해서 어떤 나쁜 일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시련과 환난을 통해 더 많은 은혜를 경험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상황보다는 믿음이 지시하는 약속을 굳게 붙들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적은 우리 바깥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놓고 불신앙 하고 스스로 절망하고 포기해버리는 거기에 모든 죄와 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의
시인은 모든 상황이 다 정리된 후에 자기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심할 여지없이 분명한 어조로 노래합니다. “내가 종일토록 주님의 의를 말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라고 할 때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고 있는 ‘의’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삶’을 말합니다. 마음의 자질까지도 포함합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허공에 알린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율법을 통해서 알리셨기 때문에 율법에 부합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뜻을 알려주신 것으로는 넓은 의미에서의 율법이 있고, 좁은 의미로는 우리의 삶을 실제적으로 규율하기 위해 지키지 않으면 징벌을 받으리라는 심판의 보증과 함께 제시된 율법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에 부합하는 것이 의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은 무엇으로도 의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의를 성취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진노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를 채울 수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제사제도입니다. 스스로 타락했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의를 채울 수 있는 다른 길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속성과 관련한 ‘의’라고 말할 때는 뜻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우리에게 있어서 ‘의’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바깥에서 그런 기준을 받으실 수 없고 당신 자신이 기준이 되시는 분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하나님의 의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어떤 신학자는 하나님의 의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당신의 거룩함을 훼손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신의 거룩성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많이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나만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느끼며 살아갈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은 느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불의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를 언제 경험하는가 하면 나, 혹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서 살아갑니다. 그때 하나님이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많이 교훈하십니다. 그런데도 그 뜻을 어기면서 계속 불순종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질서를 올바르게 잡기 위해서 간섭하십니다.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징계와 심판을 받고, 잘못된 질서 때문에 괴로움과 수치를 당하던 사람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발현되기 때문에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의란 당신의 거룩성을 훼손하는 것들로부터 당신의 거룩함을 지키는 속성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정의에 100% 동의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정의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의에 대한 개념이 희박해질 것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뒤집으면 하나님의 의를 매일매일 발견하면서 살아가는 환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기 힘들 것이라는 논리와 유사한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면서 방종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의가 공존하는 것을 분명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차이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두려움 속에서 의를 지키지만, 하나님을 사랑할 때는 의를 따르면서 사는 것조차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기 때문에 의에 속해있는 하나님의 칼날을 우리가 못 느낄 뿐입니다.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속성 다발론’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하나하나 따로 떨어져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의 다발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할 수 있고, 다발이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 하나는 하나님의 단순성 속으로 그분의 모든 속성들을 수렴해서 하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 안에 모든 것이 있는 것입니다.
햇빛을 프리즘으로 통과시키면 일곱 가지 찬란한 무지개 빛이 나옵니다. 빨강은 주황과 다르고 노랑도 주황과 다릅니다. 초록은 노랑과 다르고 파랑은 초록과 다릅니다. 이런 식으로 보라색까지 펼쳐집니다. 프리즘을 지나서 빛을 보면 빛은 보이지 않습니다. 빛은 우리가 보는 대상이 아닙니다. 빛은 사물을 우리에게 보게 한다는 점에서 대상도 되고 대상이 아닌 것도 됩니다. 그런 점에서 빛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빛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광학에 대한 이해가 큰 도움이 됩니다. 의이든 사랑이든 무엇이든지 여러 가지 속성들은 프리즘을 통과한 빛일 뿐입니다. 프리즘은 바로 인간입니다. 죄짓고 비참하지만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합니다. 악을 행하지만 돌이키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 프리즘을 통하여 의라는 빛깔이 나옵니다. 고통을 당해서 비참해지고 의지할 것이 없는 사람들을 통해서는 긍휼이라는 속성의 빛이 계시됩니다. 불의한 사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계시됩니다. 그것을 더듬으면서 올라가면 파악할 수 없는 빛이 있는데 신학에서는 이것을 ‘단순성’이라고 부릅니다.
주의 의를 전함
시인이 “내가 종일 주의 의를 말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대항하는 악인들이 자기를 무수히 괴롭혔는데 시인은 마치 프리즘과 같이 그들을 통해 통과되는 찬란한 빛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신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살게 하고 싶으셨던 분명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선하고 의롭게 살든지, 악하고 죄를 짓든지, 주님을 반역하고 비굴하게 살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든지, 그들을 통해 눈부시게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서 그런 빛깔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발을 딛고 하나님의 속성을 전달해주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는 진공 중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에게도 아픈 것은 쓰라림으로 다가오고 괴로운 것은 가슴을 찌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도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많은 불의와 죄악들을 아무런 고통 없이 객관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 속에서 아파하고 때로는 그 속에서 복수를 꿈꾸고 때로는 그 속에서 괴로워하고 하나님 앞에 살려 달라고 몸부림을 치고 때로는 낙심하고 아파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는 찬란한 빛들을 시인에게 전달해 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평탄한 인생의 길을 걸을 때도 주님의 성품에 대해 많이 배웠지만, 시련의 폭풍을 지나면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버림받은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한없이 배웠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시고 처결하실 마지막 날이 이르게 되면 나는 하나님의 의를 말하겠습니다.” 여기에서 ‘말한다’는 것은 소리를 내어서 말한다는 것입니다. 목적 자체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의로운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악인들은 처결하시고 정리하셨고, 나는 악인들에 고통을 당하는 것 같았으나 구원받았다.” 이 사실을 교화적으로 말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지극한 두려움과 사랑 속에서 그분을 따르도록 만들어 주는 경건한 삶이 시인의 마지막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시편 속에서 언제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선교적 구도입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통해 그분의 성품을 알았다면 이것은 시인에게 의무를 부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모든 언약 공동체에 선포하여 그들도 이 지식의 빛 아래로 들어오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거나 성경, 혹은 하나님에 관해 새로운 성품의 지식을 알게 되면 그것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로서 내가 그것을 획득한 것이기 때문에 나의 피, 섬김을 통해 나와 함께 접붙여져 있는 지체들이 그것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은혜와 은사를 주신 목적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 보편교회 안에 공유되어야 하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그들도 공유하게 하여야 합니다. 선교는 선교사의 일이 아닙니다. 선교사가 있는 거기에 유기체적인 몸으로서 교회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나를 모해하려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수치와 무안은 신이 퍼부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날을 위해 그분은 섭리 속에서 모든 것을 참으시지만 어느 한순간 이 모든 것을 정리하고 마무리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정리해주심으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자산은 하나님 편에 서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올바르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잘하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는 것도 혼자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파도에 떠밀리는 가랑잎 같은 존재들이지만 주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을 때도 그것이 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지 말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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