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2
목 차
주의 판단과 의를 주소서(시 72:1) 1
국가의 가치(시 72:2-3) 6
왕의 할 일(시 72:4) 11
의로운 나라의 번영(시 72:5-7) 13
의로운 통치의 영광(시 72:8-10) 18
왕국에 영광이 가득찰 때(시 72:11) 24
구원하시는 왕의 통치(시 72:12-14) 29
왕을 섬기는 백성들(시 72:15) 35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시 72:16) 41
복 받은 이름(시 72:17) 46
홀로 찬송 받으실 하나님(시 72:18-19) 51
시편72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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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판단과 의를 주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 72:1)
본문해설
시편의 문집 속에서는 솔로몬의 시가 몇 편 등장합니다. 72편은 그 중에 하나인데 1절에서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판단력’이라고 써있지만 사실은 ‘판단’입니다. 즉, “주의 판단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옵소서”라고 고백합니다. 먼저 이 시가 솔로몬의 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루어 놓은 큰 왕국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누리던 때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도 왕이고, 이후에 자기 자식들도 왕이 될 터인데 바로 왕이 될 아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것이 ‘판단’과 ‘의’입니다. ‘판단’은 지성에 속하는 것이고 ‘의’는 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주의 의를 주소서˛
‘의’라는 단어에는 내적인 자질도 있고 그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행위로서의 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에 있든 밖에 있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의지와 밀접하게 관계됩니다. 의의 내적인 자질이라는 것은 내적으로 하나님의 법도와 거룩하심에 맞도록 살고자 하는 마음속에 있는 깊은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고, 또 바깥으로 행동이 나왔을 때에는 그 의지를 끊임없이 행하고자 하는 바대로 실행해서 얻은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는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의지와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개울에 물이 흘러가다가 어느 지점에 가면 물이 휘돌아 소용돌이치는 곳이 있습니다. 그런데서 미역을 감다가 사람들이 빠져 죽습니다. 물 자체가 사람들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서 그 지점에 들어가면 바닥까지 사람을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소용돌이가 있는 곳은 흐르는 물과 지형과 관계가 있습니다. 가뭄이 들어 물이 하나도 없이 말라버렸다고 해도 그 지점에는 물을 휘돌게 하는 힘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 분량만큼 물이 흘러가면 다른 곳에서는 안 그렇지만 그 지점에서는 소용돌이가 생겨납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의의 내적인 자질은 바깥으로 나타나는 많은 행동들을 결정합니다. 아직 그 상황이 발생하기 전에는 그 사람의 내면 안에 의가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실제로 일어나면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 판명 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는 의지와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주의 판단을 주소서
‘판단’은 지성에 속하고 ‘의’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에게 있는 지성과 의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지성으로서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의지로서 가장 좋은 것을 우리에게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판단과 의를 간절히 구하는 것은 인간의 지성과 의지가 최대한 하나님을 본받아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미가 깊은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판단’은 나에게 주시고 ‘의’는 아들에게 주시라는 기도의 내용은 그렇게 주목할 바가 아닙니다. 문학적인 표현일 뿐입니다. 나는 판단만하고 행하는 것은 우리 아들이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이어 왕의 가문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주의 판단과 주의 의를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시인은 주의 판단을 구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의’라는 것은 완전함을 의미합니다. 주님도 판단하고 우리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많지만 주님의 판단은 언제나 올바르고 완전한 판단입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왕이 된 후 제사를 드리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 지혜를 구했던 것도 시인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판단’은 “이 꽃이 무슨 꽃인가?” 이런 종류의 자연적인 판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판단을 말합니다. 어떤 판단을 내릴 때 그 판단이 몰고 올 이후의 결과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실수 없이 선악 간에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 왕이 나라를 덕스럽게 통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정확하게 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많지만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기계처럼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많은 죄악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욕망의 방향이 우리가 판단하고자 하는 방향과 같을 때는 바르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고, 누구나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내리는 판단은 잘못되기가 쉬운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더군다나 나라의 명운과 관련된 경우에는 한번 잘못 판단하는 것이 백성 전체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국가의 안위에 중대한 위협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일수록 판단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의 판단을 왕에게 주시옵소서”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주님이 판단하신 것처럼 그렇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주의 의’라는 것이 38편을 비롯한 시편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의를 왕의 아들에게 준다는 뜻이기에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왕의 아들이 의롭게 된다는 구원론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합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본문의 흐름을 비트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저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주님의 판단을 왕에게 주시고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처럼 우리 왕들도 올바른 판단을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옵소서.”라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의 법도를 따라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는 의를 우리 왕들에게 주셔서 우리가 통치하고 다스리는 것이 주님의 판단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스리는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왕국이 되어야 한다는 기도라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해석이 시인이 원래 기록한 의도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우선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육적 이스라엘 왕국 안에서 왕이 나라를 다스렸지만 지금은 그리스도가 왕이 되셔서 우리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의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이 단순한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많은 이들을 주님의 왕국에 대적하는 반역자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왕 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통치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의 판단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교회와 관련해서 이 구절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신 것처럼 주님의 통치를 가장 먼저 아름답게 구현해야 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이런 판단력과 의를 주실 때에 판단력과 의를 잘 실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판단을 보여주어도 사람들이 그 판단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의를 보여주어도 사람들은 그 의를 실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판단력을 몰라서 그렇지 알려주기만 하면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한 성도들이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교회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어서 기꺼이 주님의 뜻에 복종하려고 하고 주님의 진리를 올바르게 배우고 사랑하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는 마음의 우상들을 몰아냄으로써 선명한 지성을 가지고 주님의 판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교회의 지도자들이 반복해서 참여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국가의 가치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시 72:2-3)
본문해설
1절에서는 시인이 왕에게 왕과 왕의 계승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판단력을 주시고 의를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2절과 3절은 시인이 왜 왕들을 위해 두 가지를 구했는지 그 이유가 등장합니다. 주된 이유는 하나님이 왕에게 그런 판단력과 의를 주셔야 백성들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를 세우신 이유
처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국가를 만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모든 국가를 기뻐하시지 않는 가운데 허용적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이스라엘은 여전히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은 당신이 직접 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처럼 왕을 세우고 왕이 그 나라의 소유주이거나 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원하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통치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고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당신을 돕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이었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의 나라와 똑같은 나라를 원했습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내가 분노함으로 왕을 허락하였고 진노함으로 왕들을 폐하였노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지상에 존재했던 나라 가운데 백성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했던 나라는 극히 소수입니다. 국민들은 어마어마한 세금을 나라에 내고도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역사적으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처럼 국가라는 체제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
시인은 하나님 앞에 판단력과 의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래야만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가난한 자’는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아니예이카’(וַעֲנִיֶּיךָ)라고 나오는데 그 뜻은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당신의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이 고통 받는 자들을 공의로 판단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국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국가의 가치는 이 땅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보고 그들을 올바른 의에 따라 판단하여 백성들이 의를 학습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국가의 단 하나의 가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와 불의, 선과 악 사이의 구분을 명백하게 해주고, 그 선을 따라 살려는 것을 보여주고, 백성들이 선한 가치를 따라 의롭게 살 때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돕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왕직에 대해 아주 명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가 타락하고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던 것도 사실은 나라의 번영을 구가하고 이미 이루어진 번영들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신앙을 양보했기 때문에 타락하였고, 왕국이 부패했던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은 솔로몬처럼 세속적인 방법으로 연혼을 맺어서 왕국을 보호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그의 통치 기간에 복을 주셨기 때문에 큰 세력을 가진 나라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큰 나라가 되고 돈이 많은 부자 민족이 되어서 다른 나라보다 번영을 일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가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가치는 하나님의 통치와 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있는 나라와 역사를 어떻게 움직이고 싶어 하시는지를 보여주어 그분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가치였습니다.
나라에 대한 기도제목
우리 중에 나라가 잘 살고 부강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교지에 나가보면 나라가 잘 살아야 선교에도 보탬이 됩니다. 우리나라가 해외선교에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1980년대 중반 이후 여행이 자유화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능했습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목이 될 수는 없습니다. 번영하는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로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의로운 나라, 올바른 나라가 되는 것은 번영하는 나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개인에게 적용시켜도 똑같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번영한 삶을 살고,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는 삶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판단을 정확히 헤아리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가득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선한 의지가 적다면 오히려 가난뱅이로 살면서 선한 의지를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에 더 큰 도움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나 누리고 있는 지위에 따라 우리를 높고 낮은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그가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기 나라가 번영하는 나라가 되기보다는 의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랐고, 나라의 정의가 구부러져서 고통 받는 백성이 없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이것이 경건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연일 보도되고 있는 중국의 고속철 사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갑니다. 우리도 모두 경험한 것이지만 빨리 빨리 따라잡아서 선진국과 경쟁하려고 하다 보니까 한 쪽은 발전하고 한 쪽은 발전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시속 220km로 달리는 열차가 시속 400km로 달릴 수 있을 때까지 4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중국은 불과 몇 년 만에 시속 600km까지 달리는 기차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지금도 상해에 가서 고속철 지하철을 타면 시내를 통과하며 달리는 기차인데도 시속 430km로 달립니다. 사람들이 감탄을 합니다. 그런데 크게 사고가 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어느 여자 앵커는 뉴스를 진행하다가 울먹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제발 똑바로 사고 원인을 조사해 달라고 했던 장면이 세계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사고가 나자마자 한 사람에게 50만 위안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그 정도의 돈이면 우리나라 가치로 따지면 8500만 원정도 되는 가치입니다. 그들은 그런 열차를 탈 정도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몇 년 전까지 농민이 1년 열심히 일해서 마지막에 손에 쥐는 돈이 4000위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70만 원 정도가 됩니다. 그러니 8500만원은 100년 이상 농사를 지어야 하는 돈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울부짖는 것입니다. 무엇이 급했는지 조사도 끝나기 전에 현장을 덮어버렸고 현장을 덮다가 살아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의롭지 못한 처사에 대해서 백성들은 분노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공의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올바른 삶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세계가 하나님을 떠나 사람 중심의 세계가 되도록 만든데 크게 이바지한 칸트의 글을 잠깐 보니까 그는 절대로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망 나온 사람이 자기 집 뒤에 숨었을 때 악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가 여기 있느냐고 물어도 바르게 대답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보다는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들도 올바름을 강조했다면 우리는 더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론과 적용
본문에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나라가 의롭지 않으면 온갖 재앙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자연을 철저하게 의존하며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자연은 항상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자연적인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나라가 의를 굽게 하고, 불의가 성행하여 고통 받는 자들이 고통 받도록 내버려두고, 그릇되게 사는 자들을 내버려 두는 무용한 나라가 된다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세상에 커다란 비극을 불러올 것이라는 재앙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름을 따라서 사는 일은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언약백성들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의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불의하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기 때문에 의의 가치는 점점 더 큰 무게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왕의 할 일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4)
본문해설
본문의 앞 구절에서 시인은 자신과 왕이 될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 주의 판단과 주의 의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지성의 판단과 하나님의 의를 주시면 어디에 쓰겠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4절에 나옵니다.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앞의 두 가지는 불쌍한 사람들을 건져주는 것을 가리키고, 뒤에 한 가지는 악한 사람들을 징벌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둘 다 사랑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며, 이게 바로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라 이런 뜻입니다.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제일 먼저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라고 했는데 여기서 ‘신원한다’는 것은 원통한 마음이 없도록 풀어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잘 살게 된 사회에서 못 사는 사람이 자신이 못 살게 된 것에 대해 객관적으로 승복할 수 없는 구조가 되면 사회는 불안해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장이다’ 아니면 ‘번영이다’라는 모든 것들이 정의라는 가치와 함께 가야 건전한 세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를 스스로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향해 분명한 존중의 태도를 보이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가 가진 자나 권력이 있는 자를 향한 저항의식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돈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경쟁을 통해 그가 부자가 되었는데 함께 경쟁하는 과정에 대해 승복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어떤 식으로라도 승복을 안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공정한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에 승복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을 향해 적대시 하는 감정이나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결론과 적용
나라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이지만 가난한 자들이 원한을 품는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잘 어루만지면서 경쟁은 공정하게 하고 공정한 경쟁으로 승자가 나오면, 승자들은 패배한 사람들을 짓밟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하고 이긴 사람들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에 부합하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영육 간의 모든 것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도 자신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남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합니다. 공부해서 많은 지식이 생기면 그 지식을 가지고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룩하는 데 이바지 하도록 쓰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력도 주시고, 재물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아닙니까? 이 일에 이바지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주셔서 당신을 섬기며 살게 해주십니다.
의로운 나라의 번영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시 72:5-7)
본문해설
나라의 가치는 하나님의 의와 올바른 정의를 이루는데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어떤 일들이 생기는지를 5절부터 7절 사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로운 나라의 번영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함
제일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이 두려움에는 우리들을 종으로 만드는 두려움이 있고 우리를 자유자로 만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종으로 만드는 두려움은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공포 속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형상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삶입니다. 올바른 두려움은 두려움 때문에 종이 되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하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종이 되는 두려움과 자유하게 하는 두려움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가 충만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할 때는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 두려움이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벌주실지도 몰라.’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데 나의 어떠한 불순종이나 주의 깊지 않은 행동들로 인해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드리면 어쩌나.’ 또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질지도 모른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 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여기에서 ‘해가 있을 동안에’, ‘달이 있을 동안에’라는 것은 ‘예외 없이 언제나’라는 뜻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혹은 애비가 죽고 자식에게 대가 이어지고, 그 자식이 죽고 다시 손자로 대가 이어져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백성으로서 그분을 경외하는 것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전망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실현하는 가치입니다.
왕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를 받아서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때 첫 번째 효과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함께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앙의 실제를 입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쉽지만 실제를 보여주는 것은 부모의 삶입니다. 삶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그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라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생활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커다란 소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두 번째 구절인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 여기에서 ‘저’는 ‘왕’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벤 풀’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것은 생명의 근거가 잘려져 버린 사람들을 가리킬 때 이렇게 부릅니다. 아주 덧없고 허망한 것을 가리킬 때에도 ‘벤 풀’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잘 알지 않습니까? 아침에 논둑에 나가서 풀을 벱니다. 잡초가 많으면 땅의 지력을 자꾸 빨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벤 것이 꼴이라면 묶어 가지고 가서 짐승에게 주지만, 잡초인 경우에는 베어버린 후에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시퍼렇게 자란 풀을 낫질을 해서 던져버리면 잘라 놓은 것이 산더미처럼 쌓이지만 신경도 쓰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고 저녁때가 되면 지푸라기처럼 다 말라버리고 그 다음날이면 티끌 같은 지푸라기가 되어서 무엇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게 됩니다.
더군다나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라고 했습니다. 풀을 잔뜩 베어놓았는데 비가 확 쏟아지고 나면 썩어버립니다. 뿌리가 잘린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왕이 임하기만 하면 그 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덧없이 썩어져서 사라져버립니다. 이것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악인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느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라도 악인들이 있습니다. 선정을 베풀고 하나님의 공의를 좇아서 나라를 통치하려고 하는 왕국에서는 악인들이 존속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왕이 부패하고 나라가 온통 타락했을 때는 악인들이 거기에 기생하고 번성하게 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소낙비’는 번영을 가지고 오는 비입니다. 팔레스타인은 강수량이 매우 적습니다. 심지어 옛날에는 지붕을 개조해서 빗물이 쏟아지면 그 빗물을 받아두었다가 그 물을 사용할 정도로 물이 적은 나라입니다. 그들은 때맞춰 내리는 비를 가지고 파종도 하고 농사도 짓습니다. 왕이 하나님께로부터 판단을 받아서 의롭게 나라를 다스릴 때는 악인들을 소멸하고, 또 한편으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번영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나라의 영광입니다.
의인의 흥왕함이 영원함
마지막으로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데쉬’(vd<jo)라고 불리는데 재미있는 물체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달을 신비롭게 생각했습니다. 달은 원래 둥글지만 보름이 지나면서 찌그러지기 시작합니다. 꼭 누가 와서 베어 먹는 것처럼 다 베어 먹으면 다시 또 동그래집니다. ‘하다쉬’(vd;j)라는 히브리 단어는 ‘새롭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달은 다함이 없습니다. 잘라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새로워지고 또 다시 잘라지는 것 같지만 새로워집니다. 즉, 영원무궁하다는 의미입니다.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번영해도 만약 평화롭지 못하다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예전에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죽고 그 아들들도 다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미군들이 가서 뒤져보니까 아들 집에서 1억 달러가 나왔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이 나왔지만 써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뭐합니까? 아무리 번영해도 평화가 없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의인이 아주 흥왕하게 될 뿐만 아니라 평강의 풍성함이 영원히 계속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이란 평강이 아주 풍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번영이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바로 평강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나라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결론과 적용
이 세상의 나라는 늘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이 개입되기 때문에 완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부패성이 남아서 완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율법, 주님이 주시는 선한 뜻을 바라보면서 나라와 교회, 모두 온전해지기를 애쓰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궁극적인 통치가 가져다줄 커다란 행복을 보여주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주님이 직접 다스리지 않으시고 은혜를 통해서 다스리시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각자가 하나님 은혜의 지배와 통치에 복종하며 살아가게 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 이 땅에 주님의 통치를 나의 삶속에, 교회 안에, 나라 안에 구현해 나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통치에 역행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됩니다.
의로운 통치의 영광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시72:8-10)
두 가지 번영
사람이 보기에 복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은 아닙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오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 불순종하는 자들의 번영,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된 자들의 행복,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적으로 모든 세상을 주관하고 섭리하고 계시지만 세상에서 사람들이 번영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볼 때 좁은 견해에서 바라보는 것과 넓은 견해에서 바라보는 것을 항상 같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악인도 허락하시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이 허용하시기 때문에 짓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견해에서 보면 악인의 번성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번성이 아닙니다.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아껴 쓰고 조금 영악하고 똑똑하면 돈도 잘 벌고 출세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심지어는 신앙을 팔아서 번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잘 믿고 그분과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복을 주셔서 번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번영에도 두 가지 경우가 있듯이 왕국의 번영도 그러합니다. 물론,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있지만 평소에 외적의 침입에 철저하게 대비하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덜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땅 끝까지 미치는 왕의 통치
본문은 왕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를 힘입어서 나라를 통치할 때 왕국에 어떠한 영광이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광대한 땅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라는 구절은 왕국의 권한이 내륙뿐만 아니라 해양에까지 미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국권이 약해지면 바다가 외적들의 손에 넘어가고 해적들이 출몰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임진왜란 직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나라가 여유가 있고 왕권이 강해야 바다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각종 장비와 배들을 띄워서 훈련된 군인들이 지키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으므로 그것은 국권을 상징했습니다. 내륙을 통치하는 왕권이 강력할 때 바다를 지배하는 영역 또한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왕국의 권세가 미친다는 것은 그만큼 나라가 강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강이 땅 끝까지 미친다.”라고 묘사합니다. 강물이 흐르는 순서를 따라서 보면, 상류에서부터 아래로 흐르지만, 바다에서부터 강을 보면 마치 그 물이 내륙의 큰 강에서 하천으로, 하천에서 개울로, 개울에서 실개천으로, 실개천에서 더 작은 지류로 핏줄처럼 뻗어 나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 하나로 모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여러 개로 뻗어나아 모든 땅들의 핏줄 역할을 합니다. 나라가 있어도 산간지방이나 오지에 왕의 통치가 미치지 못해서 그들끼리 세금을 거둬서 살고, 그곳을 또 다른 왕이 통치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왕권이 미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왕으로 하여금 모든 것들을 온전히 다스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철저한 왕국의 통치 권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땅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기 땅이 아닙니다. 땅이 있고, 거기에 경찰과 군인이 있고, 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생산을 하고, 생산을 해서 세금이 나오고, 왕이 명령을 내리면 집행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왕의 통치에 백성이 복종해야 진정한 왕국입니다. 이렇게 내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넓은 왕국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그저 창칼로 꼼짝 못하게 무릎을 꿇려야 정복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의미의 정복은 사라졌습니다. 과거 우리나라의 음악 수준이 서구에 미치지 못했을 때는 젊은이들이 거의 미국 음악을 들으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문화적으로 미국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빚이 많은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미국에 대출을 많이 받아서 더욱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의 장관을 세우는 일까지 전부 다 간섭을 받게 됩니다. 당장 빚을 회수하겠다고 하면 나라가 무너지므로 경제 계통의 장관들을 새울 때 미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하고 있어도 사실상 경제적으로는 외국에 예속된 것입니다. 또 나라가 있기는 있는데 외적의 침입을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다른 나라에 국방을 의지해야 한다면, 이것도 마찬가지로 예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해가는 것이 오늘날 변화된 정복의 개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판단과 의를 구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이렇게 되기를 사모했습니다. 그 당시 외진 광야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고, 나라가 불안정하거나 왕권이 확립되지 않아서 정부의 권한이 미치지 못한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라는 구절은 광야에 있는 작은 무리들까지도 굽히며 복종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내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필리핀에는 ‘민다나오’라는 꽤 큰 섬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외국 사람들도 잘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곳까지 국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반군들이 오래전부터 지배해서 자기들끼리 불법정부를 세우고 세금을 거둬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고 토벌해서 국가의 권한에 복종시켜야 하는데 수시로 전투를 해도 이기지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땅이 없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나라의 원수들을 굴복시키심
어느 나라든지 원수들이 있습니다. 그 나라에 원수가 되는 나라가 있고, 왕에 대해 반감을 품고 원수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티끌을 핥을 것이며”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티끌을 핥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티끌’은 히브리어로 ‘아파르’(rp;[)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것은 존재적으로 가장 비천한 것을 암시합니다. “내가 티끌같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다.”라는 뜻입니다. 티끌을 핥는 다는 의미는 그것을 핥는 자와 티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먹을 것이 없어서 티끌을 핥을 정도로 비참하고 불행하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원수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굴복을 했으니 왕의 권세가 나라에 가득해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역사를 보면 왕들이 행복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북한도 비슷한 형편입니다. 그들은 누구도 믿지 못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옛날에 금나라가 청국(淸國)을 세웠습니다. 청국의 왕궁인 자금성은 두께가 3-4미터정도 되는 돌로 바닥을 깔았습니다. 누군가가 성을 뚫고 잠입해서 황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황제는 왕비와 잠자리를 같이할 때도 돌연사 등을 방지하기 위해 침실 창살 너머로 궁녀 세 명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24시간 감시를 받았으니 행복했겠습니까? 불안감을 가지고 감시하는 사람을 만들어 끊임없이 고발을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람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또 그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만들어서 두 겹 세 겹으로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게 했습니다. 죽여야 할 한 사람만 포함되어 있다면 억울한 사람 백 명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었고, 억울한 사람 백 명을 안 죽이기 위해서 죽여야 할 사람이 풀려나면 이것은 왕에게 재앙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죽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폰티치아누스라는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궁에서 높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르기가 어려운 일이며, 또 그렇게 올라서 왕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땅이나 캐먹고 살면, 누가 와서 죽일 일은 없지만 왕 곁에서 영광을 받던 사람은 왕의 마음이 변하면 한 번에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왕궁은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이런 원수들을 하나님이 정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존경을 받음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이것은 바다를 제패해서 작은 섬들까지 모두 다 세금을 낸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 이 구절은 왕국이 멀리까지 뻗어 있던 솔로몬을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이스라엘에서 애굽을 지나 아래쪽으로 많이 내려와야 했기에 솔로몬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곳을 직접 지배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그렇게 탁월한 판단력과 의로 통치를 해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을까? 정말 당신을 존경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습니다.”라는 존경의 의미로 예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왕국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북한에 갔다 온 적이 있었는데 북한이 수해를 당해서 남한에서 식량원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핵폭탄이 무서워서 남한 사람들이 조공을 바쳤다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자신의 나라가 강성해져서 조공과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기를 사모합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나 하나님은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할 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라를 위해 국민소득이 삼만 불이 되고 사만 불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정치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에 입각한 올바른 통치로 나라가 구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기도제목입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나라가 되도록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고 탈세를 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국에 영광이 가득찰 때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시 72:11)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맨 처음 선택하셨을 때는 한 가정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그들로 큰 씨족을 만드시고 후일 그 씨족으로 나라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만드신 것은 사실이지만 세상에 있는 나라들과 같은 나라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을 안 주신 것이 대표적인 이유입니다. 모세라는 지도자가 있었고 여호수아라는 지도자에게 바통이 이어지고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다음에는 사사들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사’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쇼페트’(fp,v,)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판단하는 자’입니다. 재판을 해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라는 판단을 해주는 자입니다. ‘쇼페트’라는 단어에서 ‘미쉬파트’(fP;v]m)라는 단어가 왔는데 ‘공의’를 뜻합니다. 하나님이 나라에 지도자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최소한으로 지도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있고, 한편에는 제사장들이 있어서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선지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주님의 뜻을 알려주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으로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분은 당신 한분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나라입니다. 이것은 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실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왕이 눈에 보이고 칼을 휘둘러도 말을 듣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신앙으로 다스려지는 나라였습니다. 사사나 선지자나 제사장과는 상관없이 모두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언약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후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부패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이렇게 약한 것은 세상나라처럼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왕국의 가치를 세상나라와 똑같이 둔 것입니다. 왕실이 얼마나 번영한가? 나라가 얼마나 큰가? 무역을 해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버는가?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병사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전쟁에 필요한 말과 무기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세상에서는 이런 것에 의해 나라의 강함과 약함이 측정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만히 돌아보십시오. 이스라엘은 고등학교 세계사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아주 작은 나라입니다. 크기로는 우리나라 땅의 절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작년에 성지순례를 갔다 왔는데 우리가 호수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은 바다라고 부르고, 우리가 도랑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강이라고 부르고, 뒷동산처럼 보이는 것을 산이라고 하고, 밭떼기만 한 것을 광야나 평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축소된 작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못하시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부터 갖고 계셨던 목표는 세상나라와 크기에 있어서 견줄 만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뜻을 갖고 계셨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실 것이 아니라 중국이나 로마제국을 선택하셨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 자체가 당신이 백성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으시고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시는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중국이나 로마를 택해서 하나님이 이런저런 일을 이루셨다면 사람들은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나라가 워낙 크니까 참 잘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미약한 나라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난 다음에는 인생에 대한 견해가 바뀌어야 합니다. 전에는 부자가 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였는데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고, 그것은 반드시 큰 성공이나 어마어마한 번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도 얻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것보다 오히려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이는 얻을 수 없는 성취를 신앙 안에서 해낼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중 한사람이 사업 때문에 홍콩으로 이주를 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그렇게 행복해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한국학교로 안 올 거라고 한답니다. 그곳에서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젊은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대거 교사가 되어서 성직을 수행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위해 온전히 마음을 쏟아 붓고 가르치면 얼마나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아이들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선생님에게 반항한다는 이야기는 역으로 존경하며 따르고 싶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할 사람들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교사뿐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은 영역에서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로서 나라를 통치할 때 하나님이 세상 나라의 영광도 아울러 주실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왕국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찰 때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부복한다’는 것은 신하가 왕에게 예를 갖출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 “열방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라고 노래합니다. 솔로몬의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나라였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서른두 명의 왕들이 나옵니다. 씨족마을 같이 작은 마을을 다스리는 우두머리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나라들이 이스라엘 주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나라가 허술해지면 벌떼처럼 일어나서 대들었습니다. 공격을 하고 약탈해가고 조공도 안 바치다가 이스라엘 나라가 강성해지면 전부다 왕에게 와서 부복하고 경배하고 절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 왕들이 자신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 주변의 많은 족속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산지에 몰려 있다가 이스라엘이 약해지만 내려와서 약탈하고 문제들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 모든 세력들이 이스라엘에 굴복한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주님을 사랑하는 나라가 될 때 하나님이 그들이 부복시키셔서 이스라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시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역할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이 꿈꾸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돈 많이 벌고 땅을 넓게 차지하고 강력한 군대를 거느려서 작은 나라들을 압박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독단적으로 주위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침략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를 꿈꾸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몫이 아닙니다.
끝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다 외치며 사나니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할 때였습니다. 영토 분쟁이 있었는데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멕시코를 치기 위한 침략전쟁이었습니다. 교회가 결사적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때 데모하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이 찬양이었습니다. 결국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나라의 일원으로 살면서도 세상나라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며 사는 모습입니다. 나라를 사랑하되 이 나라가 하나님 나라에 부합하고 하나님 나라의 번영에 이바지할 때 그리스도인들이 기쁘게 나라를 위해 일하고 섬기면서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왕국에 가득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욕이나 하고 잔소리나 하고 마음으로 비난이나 퍼붓고 저주나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마음으로 깊이 끌어안고 나라가 올바르게 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왕의 통치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시 72:12-14)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교회와 국가
시편 72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판단력과 의를 통하여 왕과 왕의 아들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지, 그리고 주의 판단력과 의를 구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먼저 이 구절에는 ‘건진다’, 다시 말하면 ‘구원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후 이 세상에 하나의 기관을 세우셨는데 그것이 바로 가정입니다. 창조 이후에 하나님은 가정을 세우셨고 그것이 곧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를 적극적으로 세우셨던 것을 보면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교회는 존재했을 것입니다. 다만 지금의 형태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소극적으로 허용하여 세우신 제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와 교회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려가는 두 개의 아주 중요한 기구입니다. 하나님은 국가로는 우리의 외적인 생활을 관장하게 하셨고 교회로는 우리의 내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을 관장하게 하셨습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의 율법의 대리자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올바른 공의,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의의 시행을 보며 타락한 죄인들은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죄를 지으려는 욕구를 억제하고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정의에 맞게 올바르고 공정한 사회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국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타락의 상태를 벗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국가의 공정한 통치 속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온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을 부어주어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착하고 신실한 내적인 경건이 실제 나라가 이 백성들을 통치하는 법에 적용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법을 지킨 결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지킨 결과가 됩니다. 나라를 온전히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이 국가와 교회를 세워 놓으신 두 뜻입니다. 때문에 국가와 교회는 스스로가 가진 고유한 일에 충실해야지 교회가 자신에게 좋은 어떤 일들을 도모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을 이용한다든지, 아니면 국가가 자기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교회와 결탁해 교회를 세력화해서 그 힘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교회와 국가는 미묘한 관계에 있습니다.
국가의 의무와 목적
그러면 국가가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국가는 어차피 타락한 죄인들에 의해 타락한 죄인들을 다스리므로 흠결(欠缺)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백성들에게 공평과 정의를 가르쳐주고 그에 따라 백성들을 통치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백성들은 국가가 억울하게 박해하고 정의의 원리에 현저히 어긋나게 행동할 때는 그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유명한 저항권입니다.
그래서 잘못된 정권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굽게 하는 통치를 실현하고자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때 국민은 분연히 일어나 이러한 정권을 타도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국가는 정의의 원리에 입각해 백성들을 다스리고 또 한편으로는 외적의 침입에서 국가를 보호하고 백성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국가는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보다는 올바르게 살게 하는데 존립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국가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을 통하여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고 그 선과 악에 대해서 당연한 귀결과 보상이 있고 갚음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잘못할수록 사회에는 부패와 더러움이 넘치게 됩니다. 모든 나라들의 부패와 더러운 상황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왕 한사람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왕 한사람이 하나님 앞에 정말 정의롭고 공정하게 깨끗한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국가가 하지 못한다면 백성들은 국권에 복종해야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 시인은 바로 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판단과 의가 국가의 고유한 임무를 감당해 나가는데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회건 궁핍하고 도울 이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압제와 박해의 대상이었고 약탈과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권력이나 무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을 집행하는 나라의 행정부도 중요하지만 입법부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법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입법부에 있는 사람들이 법을 온전히 만들지 않고 잘못 만드는 것은 커다란 불공평과 죄악을 온 나라에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법은 길과 같아서 길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다녀도 소수가 다니고 또 다니는 사람이 가책을 느끼면서 다니지만 길을 만들어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왕래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법을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법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원칙에서 어긋날 때 그 법은 백성들에게 복종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죽으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그런 말을 했다고 믿는 철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당시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는 작은 국가를 이루었는데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폴리스는 지금처럼 수천만 명, 수억만 명의 국민들이 나라를 이루고 자유롭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폴리스에서 태어나 그곳 시민이 되어 한 씨족처럼 가족처럼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도 우리나라가 씨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 가장 악한 일을 행한 종씨에게 내리는 최고의 무거운 형벌이 우리 마을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법을 만든다는 것은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법부입니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거나 법을 집행한 정부를 재판합니다. 이렇게 재판을 하는 사법부 또한 법을 집행하므로 공동체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의 정신에 따라서 올바르게 사건을 판단하고 그 판결의 결과가 이 세상에 올바른 법을 세우는데 이바지하도록 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금권과 뇌물 같은 것들로 얼룩져서 재판을 굽게 하고 사실의 판단을 굽게 하여 정의와 공평에 어긋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보편화될 때 이것은 세 부서가 짓는 죄 중에 가장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돈이 있으면 무죄이지만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이런 현실들은 잘못된 것이고 자본주의의 논리가 법질서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현저히 국가의 목적을 위반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다시 말해서 불완전한 정부의 불공평과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할 신자의 의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주님의 권고, 그리고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라.”는 신약의 명령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우리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경의 가르침의 빛에 우리자신의 삶을 두도록 해야 합니다.
왕에게는 긍휼한 마음을
왕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의 판단과 의를 주셔야만 하나님의 종들인 왕이 궁핍하고 도움이 없는 자들을 건져 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국가에서 정의를 베푸는 동기 자체가 백성들에 대한 긍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가권력에 더 잘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아주 엄격한 정의를 요구하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형벌하는 것은 정의를 구현하는 올바른 동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시편의 맥락으로 보아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마음, 왕의 마음 안에 긍휼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은 백성들을 향해 백성들의 비참한 형편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슬픈 마음입니다. 이것은 정의를 수행하는 동기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수행하는 동기를 통제하고 이끌게 됩니다.
그래서 정의를 수행하되 동기가 서슬 퍼런 통치를 통해서 자신의 왕권을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자신은 정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정의로운 삶을 강요하는 것들은 현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국가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자본을 증식하기 위해, 혹은 손해 보지 않을 목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불공평함에도 그런 법을 만들고 집행하며 유지하는 것은 최악의 정치 형태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일반섭리 속에서도 반드시 국가 전체의 이익에 현저히 위배되는 불행한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 왕은 하나님 앞에 판단력과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국가 안에는 원한을 품고 억울한 사람들이 없어야 합니다. 물론 사람이 다스리는 사회이기 때문에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원한을 품고 억울하게 억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 이런 사람들을 남겨놓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누리면서 사는 사회를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은혜 받은 성도들의 삶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이것은 모순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세상을 이길 것인가?”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 불공평하고 현저히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서 일그러진 사회에 순응하고 적응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더욱 개혁주의적인 원리를 따르는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것과 함께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이 자원을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구현해 나가도록 변화되는데 이바지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고 깊게 고민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에 아주 깊은 엄숙함을 느껴야 합니다.
조국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큰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60~80년대까지 조국교회에 주셨던 큰 은혜들을 쓸모없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그 당시 교회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가지고 큰 규모의 교회와 수양관을 지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들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헌신들을 현저히 굽게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들을 가지고 올바른 법을 제정하지 않고 굽게 사용하는 정부에게 저항하고, 한편으로는 국가가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겨야할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하며 살아야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미 있는 세상에 뜻 없이 무릎을 꿇고 쉽게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서 그 은혜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모두 자족주의적인 영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는 자유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가치를 느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의 통치 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하고 주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굽은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쓰도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왕을 섬기는 백성들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시 72:15)
본문해설
이 구절은 조금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고”에서 ‘저’가 누군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저희가’라는 말이 번역을 의역한 것이고, 앞에 나오는 ‘저’가 왕을 뜻한다면 뒤에 나오는 ‘저’는 왕 자신이나 하나님을 의미할 텐데 이것은 문맥상 어울리지 않습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백성들을 통칭할 때 단수로 받을 수가 있는데 여기서의 ‘저’가 바로 백성들 전체를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보고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문맥상 압제를 당하여 죽을 지경에 있는 백성들을 왕이 가서 구해주고 그들이 왕의 판단력과 의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살아나 스바의 금을 왕에게 드리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스바’는 당시의 나라 이름인데 아마도 금과 같은 보화들이 많이 나던 장소라고 보여집니다. 욥기에서도 ‘오빌의 금’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쉽게 말하면 우리나라의 개성인삼처럼 양질의 금이 나는 산지의 이름을 붙여 표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죽을 위기에 있는 백성들을 왕이 구하자 그들은 열심히 사업을 하고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 왕에게 금을 바칩니다. 우리로 말하며 나라의 부강을 위해 세금을 내거나 나라에 돈을 바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국가에 많이 헌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는 것은 아주 성경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세금을 포탈하고 부정직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대신 정부는 합리적으로 법을 만들고 법을 온전히 집행하여 정부의 세금을 바치는데 있어서 불공평한 사람이 없게 하고 더욱이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국가를 올바르게 이끌어가야 합니다.
공평과 의로 다스리는 나라
‘강한 나라’라는 것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집니다. 첫 번째는 사회는 조금 뒤떨어져도 강한 나라를 말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회학에서는 ‘국가발전모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이 그렇습니다. 이런 나라들은 강대국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넘보는 나라가 없도록 다스립니다. 미국 같은 나라가 아주 대표적인 국가발전 모델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정된 의료보험법이 미국에서 통과되기 전까지만 해도 2억 5천만 명 정도 되는 미국 사람들 중 의료보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사람이 4천 5백만 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가난한 사람은 한국의 가난한 사람보다 더 비참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대신 나라는 강대국입니다. 중국이 군사력을 팽창하는 것에 대해 미국이 비난하는데 미국은 중국의 3배에 가까운 국방비를 지출합니다. 미국에서 지출하는 국방비가 일본, 한국, 중국, 러시아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습니다. 굉장히 많은 돈을 쓰기 때문에 강대국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나라가 강해지는 것 보다는 사회가 잘살게 되기를 원하는 국가들입니다. 이를 ‘사회발전모델’이라하는데 유럽이 그렇습니다. 이런 나라들은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아주 많이 걷습니다. 예를 들어 10억 원을 벌면 5-6억 이상을 걷어갑니다. 그것을 복지에 골고루 사용해서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국가발전모델’을 택할 것이냐, ‘사회발전모델’을 택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곳을 가면 길도 낡고 나라가 가난하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부자입니다. 우리는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 것입니다. 둘 중 어떤 쪽이 절대적으로 좋다 나쁘다고 이야기하거나 판단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나라가 백성들의 민복을 위하여 힘쓰고, 정의와 공평을 확고하게 하여서 백성들이 좋은 환경에서 산업 활동을 할 수 있게 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생긴 이익으로 국민들이 세금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나라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수탈하는 체제가 되지 않고 나라가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고 산업이 잘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님이 왕에게 주시는 판단력과 의입니다. 이사야서 5장에 의하면 공평과 공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부정직하고 부패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정부패에 대충 야합하고 그 속에서 자신도 이익을 얻으며 살아간다면 나라에 희망이 없습니다. 나라는 백성들이 공평하고 안정된 가운데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백성들은 국가에 자기의 수입 일부분을 바쳐서 국가로 하여금 공평과 의를 모든 백성에게 골고루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최근에 외국에서 선박사업을 해서 수조원의 돈을 번 사람이 단 십 원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고 해서 국세청에서 조사를 한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교묘한 방법으로 탈세를 하는 것으로 분명히 잘못된 방법입니다. 그 사업가는 기업이 한국에 있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 세금을 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스포츠 선수들도 외국에 나가서 상금을 타면 에누리 없이 한국에 세금을 냅니다. 문제는 어디서 사업을 했느냐가 아니라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에 세금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보면서 나라와 국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을 강탈당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대신 정부는 합리적이고 올바른 세금 정책을 펼쳐야 합니다. 반면 아주 기쁜 마음으로 나라에 헌신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아주 공평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잘 해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잘못해줘서는 안 됩니다. 공평하고 정직하게 나라를 경영하고 그 안에서 백성들이 예측 가능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나라로 말미암아 안정된 삶이 가능하고 혜택을 입는다는 느낌이 들 때 백성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도자를 위해 기도함
두 번째로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에서 ‘항상 기도한다’라는 것은 정치 지도자가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항상 그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역사에 어떤 법칙이 있다고 믿어왔는데 ‘E. H. 카’라는 역사가는 “역사에 어떤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전개는 한 지도자의 우연적인 성격적 특성과 관련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히틀러 같은 경우,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과 발작적인 성격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전쟁에 위협이 되던 소련과 미국을 잠재우고 체코, 폴란드, 프랑스 등과 전쟁을 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나라가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하게 된 것은 우연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그는 아주 가난하여 공장을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사장에게 성폭행을 당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후로 히틀러가 자라면서 폭력적인 성격으로 변해 유대인을 완전히 말살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법칙이나 장구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말려 죽여야겠다는 증오감과 우연적 특성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 지도자가 올바르게 된다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현실적으로 내가 동의하는 사람이든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든 누군가는 나라를 다스리게 됩니다. 대통령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자를 붙들어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좋은 지도자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나라
마지막 세 번째로 “종일 찬송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왕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왕의 선한 통치, 국가의 부강을 통해 마지막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욱이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개입하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을 위반하여 우리에게 강요하거나 현저하게 공평과 정의의 법칙을 위반하여 법을 제정하고 백성들을 억압할 경우에 대비해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저항할 수 있도록 주신 권세가 있는데 바로 ‘국민저항권’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입니다. 그러나 항상 유보해야 하고 아무 때나 나서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최근에도 서울시에서 무상급식 문제로 투표를 하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예배시간에 그 중 하나를 교인들에게 선택하도록 설득을 하였습니다. 그건 바보짓입니다. 그 문제는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도 그것은 현저히 공평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A는 잘못됐다. B는 잘못됐다.”라고 하며 정부를 향해 삿대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 저항권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프리만치 교회가 그런 판단을 잘 못합니다. 저항하고 분명히 일어서야 할 지점에서는 하지 않고 나서서는 안 되는 지점에서는 나서서 교인들의 마음을 찢어놓고 교회를 갈라놓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고, 곤고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신앙을 따라 자신이 확신하는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좀 더 많은 생각을 해야 됩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 판단력과 의를 간절히 기도하며 구한 것은 백성들을 건져내서 화합하는 국가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생활에 충실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독특한 나라, 이스라엘이 되고 통치를 통해 백성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는 나라가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물론,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대법원장도 심지어는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수를 믿게 해달라는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들이 모두 예수를 믿는 것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라를 정직과 공평으로 다스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해야 합니다.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시 72:16)
본문해설
지난 내용이 백성들이 왕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라면, 이번에 살펴 볼 16절은 왕이 의로운 판단과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릴 때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 나라에 복을 주시는지 즉, 산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곡식을 허락하심
지형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는 땅의 소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언덕은 물론 산꼭대기에도 작물을 심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지형은 하늘에 운명을 맡기며 농사를 짓습니다. 예로부터 우리도 그러한 논을 ‘천수답’(天水畓)이라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산 아래서부터 물을 길어 날라서 산꼭대기에 있는 밭이나 논에 물을 댈 사람이 아무도 없고, 하늘이 비를 제때 내려주어야만 모종을 내고 씨를 뿌릴 수 있고, 또 뿌린 후에도 제때 비가 와야만 자랄 수 있으니 추수할 때까지 온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지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무성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산 아래의 평평한 땅은 어떻겠습니까?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 척박한 산꼭대기에도 곡식이 풍성하다면, 아래에 있는 평평한 땅에서의 농사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온 나라에 곡식이 풍성한 것입니다. 임금이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로 나라를 다스린다 하더라도 일단 백성들의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으면 사회는 각박하여지고 험한 범죄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곡식, 식량은 두말할 필요 없이 너무나도 중요한 생존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무역도 활발하고 농업도 대규모화 되어서 나라에 양식이 없으면 여러 나라에서 사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회에서는 자기네가 농사를 지어서 자기네가 먹을 뿐, 국제 무역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인구가 13억이나 되니 중국이 배불리 먹고 살면 그것이 곧 전 세계의 행복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저 큰 나라가 굶주린다든지 문제가 생기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 생기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굶주림의 역사를 많이 가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통치자를 세우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판단력과 의로움으로 나라를 통치하게 하셔 일반 섭리 가운데서 나라에 복을 주어 잘 먹고 잘 살도록 하십니다. 세상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왕이 공평과 정직을 떠나 불의하고 폭압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왕이 공평과 정직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하나님은 그 나라에 더 큰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국론』에 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의 큰 번영을 일구었던 오현제(五賢帝) 시대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공평과 정직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일반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신 것이라고 역사를 회고합니다. 바로 그런 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레바논 같이 흔들린다”라고 나옵니다. ‘레바논’은 땅의 이름입니다. 히브리어로 ‘레바논’이라고 하는 것은 ‘하얀 산’이라는 뜻인데 산이 흔들릴 리는 없으니까 여기서는 산지를 이야기하는 것일 것입니다. 아마도 레바논에서 나는 곡식, 혹은 나무들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어서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산꼭대기에서도 그렇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간신히 곡식이 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풍성한 소출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번성함을 허락하심
마지막으로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것은 그 성에 거하는 거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거민들은 성 밖에서 농사를 짓는데 성 밖의 곡식들이 자라기를 산꼭대기에서도 풍년을 거둘 정도로 무성히 자라고, 성 안에서는 사람들이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풀’이라는 것은 이사야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하찌르’(ryxij;)라는 단어인데 일년생 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흔한 풀이나 잔디, 잡초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풀은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왕이 하나님의 판단력과 의를 가지고 통치할 때 성 안에 사는 백성들에게 번성함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국가의 힘, 경제력이라고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경제력, 군사력 할 것 없이 모두 국민의 수에 의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강성함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번성해서 자식들을 낳고 그들이 또 자식들을 낳으면서, 백성들의 수가 눈에 띄도록 늘어나는 것은 왕국의 커다란 명예였습니다. 임금들은 백성의 수가 많아지면 든든했습니다. 잠언을 보면 “왕의 영광은 그 백성들의 수에 있으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백성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가 왕의 영광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게 되면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군인의 수 또한 많아지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쳐 싸우는 경우에는 당연히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가 승패를 좌우하게 됩니다.
제국을 형성하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16세기의 마추픽추의 유적에서 보는 것처럼 잉카 제국의 역사를 보면 한창 때 페루 쪽으로 약 4000km 정도의 영토를 만들었습니다. 마추픽추는 많은 방사형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나라의 인구가 80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8000만 명이라면 작은 나라가 아니니 그 나라가 당시에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잉카제국도 마찬가지고 만주나 우리나라,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의 유적지를 보면 어마어마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어마어마한 도성을 건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들의 사상도 굉장히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데 신기한 것은 이 모든 것들이 질병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전염병과 같은 질병이 돌 때 평민이고 왕족이고 할 것 없이 강력한 돌림병에 모두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외부의 침임의 흔적이 하나도 없이 아름다운 유적은 그대로 남겨두고 사람만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러한 역사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때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막아주십니다. 오히려 다산의 축복을 주셔서 백성들이 자손을 낳으면서 번성하게 하십니다. 마치 잡초나 풀이 강한 생명력으로 웬만한 기후조건에서는 살아남는 것처럼, 성의 거민들이 땅의 풀처럼 왕성하게 될 것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게,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인권을 약탈하고 현저하게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게 통치한다면 백성은 그 통치에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리비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카다피 정권에 대한 반항은 정당한 것입니다. 카다피는 결국 쫓겨났고 세계적으로도 속속 반군정부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성경적으로 봐도 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힘을 정치권력화 해서 세상살이에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들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국가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국가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오히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국가가 올바르게 하지 못할 때 선지자적인 지적을 통해서 경고하고, 현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게 통치하고자 할 때는 저항을 해서 막아야합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정부가 악의 길로 갈 때에는 정복시켜서 새 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 국가를 통해서 일반은총의 질서들을 규율하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나라의 어떠함, 정부의 도덕적이고 건강함과 같은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살기에 정부의 잘못된 정치로 인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익을 보는 나라도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가 박탈감을 느낀다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치 집단이 뭉쳐서 권력을 부당하게 행사하고 그것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이득을 얻는다면 그 모습은 아주 추한 것입니다. 정부에서 그런 혜택을 준다고 해도 교회에서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직으로 나라가 다스려지도록 의연하게 살아갈 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바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 받는 이름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
본문해설
역사를 살펴보면 한때는 아주 강성한 국가였다가 한순간 이름 없이 사라져버린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잠깐 나타나 큰 힘을 발휘하여 주변 국가들을 정복함으로 깜짝 놀라게 했다가 불과 몇 백 년도 지나지 않아서 쓰러져간 나라들 말입니다. 나라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잠시 강한 나라로 떠올랐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저히 힘을 잃어 나라로서의 명운을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 맡겨야 하는 신세가 된 나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시인이 본문에서 고백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판단과 공의로 왕이 나라를 다스릴 때 하나님께서는 복을 내려주십니다. 백성들은 왕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그를 공경하며 마땅히 바쳐야할 물질들을 나라에 바칩니다. 산꼭대기 땅에도 화복이 풍성하여 열매가 두루두루 맺힙니다. 이런 나라는 잠시 번성했다 사라지는 나라가 아니고 그 이름이 세세토록 알려지는 영구하고 장구한 나라입니다. 여러 날, 여러 해, 세대에서 세대를 지나도 태양은 변함없이 빛나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나라의 이름을 항구적으로 빛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복을 받는 나라
나라의 세상에 알려질 때 어떤 이름으로 알려지느냐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움을 당한 다더라. 그래서 다른 나라가 오히려 그 나라 백성들을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 평가를 받는 나라는 진정으로 복된 나라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하나님의 판단력으로 공의를 행하며 다스리는 나라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백성들이 그 나라 안에서 복을 받는 나라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복은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인 삶까지 모두 아우르는 종류의 복을 가리킵니다.
국가가 백성들에게 해주어야할 가장 중요한 의무는 공의와 선을 실행함으로써 거기에 사는 백성들을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주신 것은 교회와 더불어 인간세상의 일반 은총적인 영역들을 잘 다스려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심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제도가 인간의 육체와 같다면 교회의 제도는 육체 안에 깃든 영혼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함께 하나님의 법에 잘 맞는 나라가 될 때 그 나라가 정말 하나님 앞에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아주 굳세게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 확신을 가지고 모든 백성들의 삶을 규율할 수 있는 제도와 법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안에서 모든 인간들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나라입니다.
왕이 하나님이 주신 판단력과 공의로 나라를 다스려서 그 나라가 하나님을 섬기고 올바르게 운영되어 하나님이 복 주시고 그 나라와 관계를 맺는 모든 나라들을 복되게 하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안에 사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그 나라는 복 되도다.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복이 있도다.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들은 복이 있도다.”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지도자를 위한 기도
우리는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라 자체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도록 기도하는 것이 교회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바이지만 그들이 비록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들을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법에 맞게끔 이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워 재판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지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사를 보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정치 지도자들이 오히려 더 큰 정치의 부정과 부패, 독재, 권력, 남용과 같은 권모술수들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아주 탁월한 신앙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나라를 이끌어 갈수 있는 민주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여야 합니다. 교회의 일원으로서 정치지도자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우리가 기도해야할 중요한 제목일 수는 있지만 예수를 믿고도 부패한 지도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면 그뿐 아니라 올바른 정치가로써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법에 최대한 부합하는 자세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정치인을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충성되다고 인정을 받으면서 부정부패를 일삼고 독재를 일삼는 정치지도자 보다는 차라리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자연법에 맞게끔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에게 정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아 갈수 있도록, 죄지은 자들은 합당하게 벌하고 사회를 공정하고 올바르게 이끌어가는 양심적인 지도자들이 국가지도자에 더 적합하다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 없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위험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정치, 경지, 문화, 예술 어느 분야에서든지 하나님이 높여주신 사람은 이 사회와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커다란 의무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는 아무나 할 수 없고 또 아무나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사슴이 이끄는 천 마리의 사자들보다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천 마리의 사슴들이 더 힘이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감당 해나가야 할 많은 일의 짐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의 비난과 예기치 못한 도전에도 맞설 수 있는 정신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확신하는 올바른 가치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을 정도로 결단력이 있어야 하고 옳다고 믿는 그길로 걸어가기 위해서 지치지 않는 용기와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절대로 모든 사람이 다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지도자들과 이 땅에 경제, 문화, 예술, 교육 등 모든 면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의롭게 나라를 다스리고 자신들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들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한 교회의 역할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두셔서 그들을 예수 잘 믿게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해주십니다. 그런 만큼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 일반 은총적인 질서에 있어서도 진보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실패한 나라에 공산주의가 득세했고 그 공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피나는 살육의 역사들이 뒤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되는 나라의 사람들이 정말 빛과 소금이 되어 교회가 번영하게 하고, 교회가 번영할수록 이 땅의 나라들이 더 의롭고 올바르고 자비심 있는 나라가 되게 하는데 이바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후에 교회는 부패해 버리거나 또 다른 사상에 의해서 파괴됩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고 기독교 사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지식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던 인간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고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성도들의 순결한 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부도덕한 삶을 꾸짖을 수 있어야 하고 교회는 가차 없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잘못된 삶을 질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이 어떠하든지 여기에서는 진실이 울려 퍼지고 진리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서 부끄러운 자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사상과 윤리사이를 이어갈 수 있는 원동력인 영적인 힘과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 안에 충만하게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교인들이 추구했던 은혜의 체험, 부흥의 경험, 이 모든 것들이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소비되거나 신비주의를 향한 추구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나 혼자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번영에 이바지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에 기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것입니다.
홀로 찬송 받으실 하나님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시 72::18-19)
홀로 행하시는 기사
시편 72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홀로 행하시는 기사라는 것은 대대로 나라를 다스릴 때 하나님이 왕에게는 판단력을, 왕의 아들에게는 주의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만민의 생명을 구하고,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속되며, 땅에는 번영을 주셔서 풍성한 곡식을 맺는 영광과 모든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시는 열방의 영광을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뜻입니다.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나라에 복을 주실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잘 다스린 나라의 영광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시편의 마지막을 하나님께 대한 찬송으로 끝맺는 것입니다.
백성들과의 관계에서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온 땅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시지만 특별히 당신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때문에 시인이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 받아야 마땅할 하나님이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의 하나님이시라는 놀라운 증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심으로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신다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기는지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아는가 하는 것이 어떤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태도가 이 세상의 구원을 좌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할 의무
시인은 이스라엘을 향해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라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송 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찬송에 의해 더 영화로워 지시는 분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 당신이 이미 알고 있는 모든 일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의 이름을 높일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새 힘이 솟아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근심과 염려, 걱정, 고생이 있을 때 드리는 찬송은 우리로 하여금 그 현실에서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주고, 시련과 고난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송축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하고 그 이름을 송축하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의존은 버리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의 삶을 살아갑니다.
열방 가운데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
이어서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온 땅’이라는 것은 이스라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담장을 넘어 열방과 만국위에 두루 펼쳐져서 모든 나라에 가득하게 될 때 충만한 영광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나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생겨나면 세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회주의 국가, 봉건적인 국가에서 기독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핍박하고 억압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상하게도 복음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되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질서들이 해체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을 물질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적 사상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축첩제도가 타파된 것도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여성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 남자든 여자든 모두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상이 전해지게 되어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찬송과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 뿐 만 아니라 삶 전체의 지평이 복음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말씀에 의해 다스려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찬송 받으시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
시인은 “아멘 아멘”이라고 노래합니다. 히브리어로 ‘아멘’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혹은 ‘굳건히’라는 뜻입니다. 아멘을 노래한 후에는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두 개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한 가지는 72편의 표제가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윗이 쓴 시를 솔로몬이 간직했다는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솔로몬의 시’라는 말은 솔로몬에게 속한시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 그것은 자기가 직접 지었다는 말도 되고, 혹은 누군가가 쓴 시를 자기가 간직하고 있었다는 말도 됩니다. 두 번째 추측은 솔로몬이 아버지께로부터 늘 들어왔던 구전적인 이야기를 솔로몬이 글로 옮겼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배웠던 기도를 솔로몬이 자기의 심정으로 토해내어 글로 옮긴 것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추측 중 어떤 것이 맞다고 절대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지만 솔로몬과 다윗 모두 이 시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솔로몬의 시가 아니라 다윗의 시라고 이야기 하며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할 때 그것은 다윗 자신이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십시오” 이것은 솔로몬을 향한 기도가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특별한 의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 히브리 사람들이 구전문학에 워낙 능했던 사람들이니 아버지가 들려준 기도를 토대로 솔로몬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평생 간직하며 살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을 합니다.
대대로 올려져야 할 기도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시편 72편의 내용이 어느 특정한 시기에 어느 특별한 왕들만이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왕들이 모든 시대의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올릴 기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라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이나 다윗이 직접 구전하거나 썼을 가능성도 있고, 후일에 시편을 편집하는 사람이 추가한 구절일수도 있습니다. 이 기도가 어느 한 시대에 국한된 기도가 아니라 대대로 하나님 앞에 올려져야 할, 왕과 나라와 백성들을 위한 기도라는 사실에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72편을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들은 나라를 위해서, 통치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72편 강해 1
시편72편 강해 1
시편72편 강해 1
시편72편 강해 1
시편72편 강해 1
시편72편 강해 1
시편72편 강해 1
시편72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