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2
목 차
주의 판단과 의를 주소서(시 72:1) 1
국가의 가치(시 72:2-3) 1
왕의 할 일(시 72:4) 1
의로운 나라의 번영(시 72:5-7) 1
의로운 통치의 영광(시 73:8-10) 1
왕국에 영광이 가득 찰 때(시 72:10) 1
구원하시는 왕의 통치(시 72:12-14) 1
왕을 섬기는 백성들(시 72:15) 1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시 72:16) 1
복 받는 이름(시 72:17) 1
홀로 찬송 받으실 하나님(시 72:18-19) 1
시편72편 강해 1
주의 판단과 의를 주소서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시 72:1)
본문해설
시편의 문집 속에서는 솔로몬의 시가 몇 편 등장을 합니다. 그중에 한편인데 1절에서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절히 간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판단력이라고 했는데 사실은 판단입니다. 주의 판단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옵소서라고 고백을 합니다. 우선은 이 시가 솔로몬의 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이루어 놓은 큰 왕국을 이어받아 이스라엘이 전성기를 부가하던 때에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왕, 그리고 이후에 자기의 자식들도 자신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될 터인데 바로 그 왕이 될 아들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것이 판단과 의입니다. 이것은 판단은 지성에 속하는 것이고 의는 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라고 하는 이 단어도 의의 내적인 자질이 있고 그것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행위로서의 외부적인 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 지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아무튼 의는 의지와 밀접하게 관계가 됩니다. 왜냐하면 의의 내적인 자질이라고 하는 것은 내적으로도 하나님의 법도에 맞게 살고자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부합하여 살고자하는 그런 마음속에 있는 깊은 의지를 보여주기 때문이고 또 바깥으로 행동이 나왔을 때에는 그 의지를 행하고자 하는, 의지를 끊임없이 행하고자하는 바대로 실해을 해서 얻은 결과가 외부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의지와 관계가 된다는 말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개울에 물이 흘러가는데 어느 지점에 가면은 물이 휘돕니다. 그래서 소용돌이를 칩니다. 그런데서 미역을 감다가 사람들이 잘 빠져 죽습니다. 왜냐하면 물 자체가 사람들을 잡아당기는 힘이 있어서 그 지점에 들어가면 바닥까지 사람을 끌고가는 것입니다. 그런 소용돌이가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흐르는 물, 그리고 그 지형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가뭄이 져서 물이 하나도 없이 말라버렸습니다. 그래도 바로 그 지점에는 물을 휘돌게 하는 힘이 잠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분량만큼 물리 흘러가면 다른 곳에서는 안 그런데 그 지점 그 지형 그 물이 흐르게 하는 지점에서는 소용돌이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의의 내적인 자질은 바깥으로 나타나는 많은 행동들을 결정합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그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는 그 사람의 내면 안에 그런 의가 크게 자리 잡고 있는지 별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은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실제로 생겨나면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이 판명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는 의지와 아주 밀접하게 관계되는 것입니다. 판단은 지성에 속하고 의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에게 있는 그 두 가지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를 생각나게 해줍니다. 그래서 지성으로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의지로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행해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판단과 의를 간절히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닮은 그런 인간의 지성과 의지를 최대한 하나님 본받게 하셔서 그래서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아주 의미 깊은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판단은 나에게 주시고 의는 아들에게 주시라고 하는 이 기도의 제목은 그렇게 주목할 바가 아닙니다.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고 어떻게 나는 판단만하고 행하는 것은 우리 아들이 행하겠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하나의 문학적인 표현이고 우리에게, 우리 왕의 가문에게 당신의 뜻을 이어 왕의 가문을 이어가는 우리에게 주의 판단과 그리고 주의 의를 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이 시인은 주의 판단을 구합니다. 여기에서 주의 의라고 하는 것은 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판단하고 우리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판단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는 적이 많이 있지만 주님의 판단은 언제나 올바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판단은 완전한 판단입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왕이 되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바가 뭐냐고 물으실 때 지혜를 하나님 앞에 구했던 것도 이러한 시인의 신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판단한다고 할 때는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이 판단은 이 꽃이 무슨 꽃이냐 이런 종류의 자연적인 판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판단은 도덕적인 판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판단을 내릴 때에 실수가 없이 어떤 일들이 몰고 올 이후의 결과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그것을 선악 간에 판단을 내릴 수 있을 때에 왕이 나라를 덕스럽게 통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판단을 정확하게 내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도 쉽지 않을 때가 많지만 그러나 이런 판단을 내리는 것은 더더욱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계처럼 정확하게 어떤 상황이 벌어지면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 때문에 많은 죄악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일어나는 욕망에 방향이 우리가 판단하고자 하는 방향하고 같을 때에는 쉽게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결점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가장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잘못되기가 쉬운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더군다나 이것이 나라의 명운과 관련이 되었을 경우에는 한번 잘못 판단하는 것이 백성전체를 고통으로 몰아넣고 국가의 안위에 대해서 중대한 위협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가 될수록 판단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판단을 왕에게 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려 주님이 판단하신 것처럼 그렇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소서라고 하는데 이것은 어떤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주의 의라고 하는 것이 시편 38편을 비롯해서 다른 곳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의를 왕의 아들에게 준다는 뜻이기 때문에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왕의 아들이 의롭게 된다는 구원론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보지만 그러나 웬지 본문의 흐름을 비트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뭐냐면 주님의 판단을 왕에게 주시고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처럼 우리 왕들도 올바른 판단을 내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하나님을 섬기게 해주옵소서라는 것이고 주님이 의로우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주님의 법도를 따라 주님의 뜻을 봉행할 수 있는 그런 의를 우리 왕들에게 주셔서 우리의 통치하고 다스리는 이것이 주님의 판단에서 흘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다스리는 왕국은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왕국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도라고 생각을 해보면 저의 해석이 훨씬 더 원래 시인이 기록한 의도에 훨씬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선 이것을 우리 개인에게 적용한다면 예전에는 눈에 보이는 육적 이스라엘의 왕국 안에서 정말 왕이 이 나라를 다스렸지만 지금은 이제 그리스도가 왕이 되셔서 우리 모두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감히 이 세상의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 세상에 구현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단순한 우리의 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많은 이들을 주님의 왕국에 대적하는 반역자들로 생각을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도 하나님의 왕 되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왕적 통치에 부분적으로 참여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러면서 주님의 판단을 우리에게 주시고 주님의 의를 우리에게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교회와 관련해서 이 구절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신 것처럼 그런 주님의 통치를 가장 먼저 아름답게 구현해야 할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교회에 이런 판단력을 주시고 또 이런 의를 왕의 아들에게 하나님이 주실 때에 그 때 그 판단력과 의를 가지고 그 판단력과 의를 가장 잘 실현함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주님의 판단을 보여주어도 사람들이 그 판단을 따르지 않고 주님의 의를 보여주어도 사람들은 그 의를 실현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런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판단력을 몰라서 그렇지 그걸 알려주기만 하면 기꺼이 그렇게 따르고자하는 마음으로 가득한 성도들이 교회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어서 기꺼이 주님의 뜻에 복종하려고 하고 주님의 진리를 올바르게 배우고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는 마음의 우상들을 몰아냄으로 선명한 지성을 가지고 주님의 판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영광이고 교회의 지도자들도 이런 기도를 반복하며 참여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지는 것입니다.
국가의 가치
“저가 주의 백성을 의로 판단하며 주의 가난한 자를 공의로 판단하리니
의로 인하여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시 72:2-3)
어제는 시인이 왕에게 왕 자신과 그리고 또 이어지는 왕의 계승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판단력을 주시고 의를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제 설명을 드렸습니다. 오늘 읽은 2절과 3절의 본문은 이 시인이 왜 왕들에게 그 두 가지를 구했는지 그 이유가 등장합니다. 우선 주된 이유는 무엇이냐면 왕에게 하나님이 그런 판단력과 의를 주셔야지만 그 백성들을 올바로 다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국가를 만드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국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가운데 허용적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이스라엘이 여전히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당신이 직접 왕이 되어서 통치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이 세상에서 왕을 세워서 왕이 마치 그 나라의 소유자인 것처럼 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이 임금인 것처럼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은 하나님이 본래 원하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고 통치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나라를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고 지도자들을 세우셔서 당신을 돕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말할 수 없는 영광이었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행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나라와 똑같은 나라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 보면 내가 분노함으로 왕을 허락하였고 진노함으로 왕들을 폐하였노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나라를 세우실 때에 그 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정말 이 지상에 존재했던 나라가운데 백성들을 행복하게 했던 나라는 너무너무 소수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라가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국민들은 어마어마한 세금을 나라에 내고도 그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어서 그래서 역사적으로 아나키스트들 즉, 무정부주의자 국가라는 이런 체제 자체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판단력과 그리고 의를 간절히 구하면서 그래야지만 당신의 백성들을 의로 판단하고 가난한 자를 그런데 이것이 가난한 자가 아니라 히브리 성경에 보면 아니에이카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당신의 괴롭힘을 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통 받는 자들을 공의로 판단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국가의 가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국가의 가치가 뭐냐면 이 땅에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라고 보고 그리고 그들에게 올바른 의를 따라 판단하고 그래서 백성들이 의를 학습하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라 판단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국가의 단 하나의 가치라고 말할 순 없지만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의와 불의 선과 악 사이의 구분을 명백하게 해 주고 자신이 그 선을 따라 살려는 그것을 보여주고 또 그 백성들이 그런 선한 가치를 따라 의롭게 살 때에 그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돕고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 유일한 것이라고는 말할 순 없지만 가장 중요한 나라의 가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솔로몬이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모르지만 얼마나 왕직에 대해서 아주 명쾌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그가 타락하고 그리고 신앙으로부터 멀어졌던 것도 사실은 나라의 번영을 구가하고 이미 이루어진 그 번영들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신앙을 양보했기 때문에 발생한 타락이고 왕국의 부패였던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다윗은 그렇게 솔로몬처럼 세속적인 방법으로 연혼을 맺고 그렇게 해서 왕국을 보호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그의 통치 기간에 복을 주셨더니 그렇게 큰 판도의 나라를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가치자체가 이 세상에서 큰 나라가 되고 돈이 많은 부자 민족이 되어서 다른 나라보다 번영을 일구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가 아닙니다. 적어도 이스라엘나라의 가치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벨론의 가치였습니다. 예루살렘의 가치는 이스라엘의 가치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와 그 의를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나라와 역사를 움직이고 싶어 하시는 분인지를 보여주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나라가 잘 살고 부강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교지에 나가보면 나라가 잘 살아야지만 선교에도 보탬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나라가 이렇게 해외선교에 힘을 쓸 수 있게 된 것도 1980년대 중반이후 여행이 자유화되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런 일들이 가능해졌습니다. 나라가 잘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도 제목이 될 수는 없습니다. 번영하는 나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의로운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의로운 나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수 있는 올바른 나라가 되는 것은 번영하는 나라가 되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우리 개인에게 적용시켜도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번영의 삶을 사고 물질적으로 부요해지는 삶을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판단을 정확히 헤아리고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가득 있게 되는 것. 비록 내가 높은 지위와 큰 재산을 가지고 있어도 선한 의지가 매우 작다면 오히려 내가 가난뱅이로 살면서 선한 의지를 많이 가지고 있을 때 후자의 경우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더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지위에 따라서 우리를 높고 낮은 사람으로 대우하지 않으십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그가 지니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고 말씀드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기의 나라가 번영하는 나라가 되기보다는 의로운 나라가 되기를 바랐고 나라고 정의가 구부러졌기 때문에 고통 받는 백성은 없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경건한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연일 보도되고 있는 중국의 고속철 사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오고갑니다. 우리도 모두 경험한 것이지만 빨리 빨리 따라잡아서 선진국과 경쟁하려고 하다 보니까 한 쪽은 발전하고 한 쪽은 발전을 안 한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220 km/h로 달리는 열차가 400km/h 로 달릴 수 있을 때까지 47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중국은 불과 몇 년 만에 600km/h까지 달리는 기차를 만들겠다고 장담했습니다. 지금도 황해에 가서 고속철 지하철을 타면 시내를 통과하며 달리는 기차인데도 430km/h로 달립니다. 그것참, 사람들이 감탄을 합니다. 그런데 크게 사고가 나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인명을 잃었고 어느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앵커가 뉴스를 진행하다가 울먹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제발 똑바로 사고 원인을 조사해 달라고 한 광경이 두루두루 전 세계에 퍼 날라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사고가 나자마자 한 사람에게 8500만원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그 정도 돈이면 우리나라 가치로 따지자면 4억 이상 되는 가치일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더욱이 그런 열차를 탈 정도니까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겠지만 정말 변두리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의 돈입니다. 몇 년 전까지 농민이 1년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살고 마지막에 손에 쥐는 돈이 4000위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100만 원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니 8500만원은 100년을 농사를 지어야 될 돈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울부짖은 것입니다. 무엇이 급했는지 조사도 끝나기 전에 현장을 덮어버렸고 현장을 덮다가 살아 있는 어린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이런 의롭지 못한 처사에 대해서 백성들은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그런 공의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올바른 삶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 들어서 이렇게 이 세계가 하나님을 떠나 사람중심이 되는 세계가 되기에 이바지한 큰 공로가 있는 칸트의 글을 어제 잠깐 보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예를 들자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도망 나온 사람이 자기 집 뒤에 숨었다 할지라도 악한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가 여기 있느냐고 물어도 그렇다고 대답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보다는 인간 중심의 세상을 만들고 싶어 했던 사람들도 그렇게 올바름을 강조했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래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옵니다. 산들이 백성에게 평강을 주며 작은 산들도 그리 하리로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만약에 나라가 의롭지 않으면 온갖 재앙을 만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옛날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자연을 철저하게 의존하며 사는 시대였기 때문에 자연은 항상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스라엘 백성을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자연적인 재앙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만약에 나라가 의를 굳게 하고 그리고 불의가 성행되어서 고통 받는 자들을 고통 받게 내버려두고 그릇되게 사는 자들을 그릇되게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무용한 나라가 된다면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는 결국은 이 세상에 커다란 비극을 불러올 것이라는 재앙을 예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올바름을 따라서 사는 그 일은 국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언약 백성들에게는 더더욱 중요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의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정말 불의하고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기 때문에 의의 가치는 점점 더 큰 부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왕의 할 일
“저가 백성의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으리로다”(시 72:4)
앞에서 시인은 자신과 그리고 또 왕이 될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 주의 판단과 주의 의를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지성의 판단과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를 그렇게 하나님이 주시면 어디에다가 쓰겠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이제 4절에서 나옵니다. 그것이 크게 세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하며 압박하는 자를 꺾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 두 가지는 불쌍한 사람들을 건져주는 것을 가리키고 뒤에 한 가지는 악한 사람들을 징벌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둘 다 사랑과 정의를 세우는 일이 이게 바로 나라가 해야 할, 국가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제일먼저 “가난한 자를 신원하며” 했는데 여기서 “신원한다”고 하는 것은 원통한 마음이 없도록 풀어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라가 잘 살게 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잘 살게 되도 못사는 사람이 잘 살게 된 사회에서 자신이 못살게 된 것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승복할 수 없는 구조가 되면 그러면 사회는 매우 불안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장이다 아니면 번영이다 라는 이런 모든 것들이 정의라는 가치와 함께 가야지만 세상이 건전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예화) 꼭 우리를 스스로를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외국에서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들 혹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아주 분명한 존중의 태도를 보입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가진 자와 그 다음에 권력이 있는 자를 향한 저항의식이 가장 많은 나라 중에 하나가 아마 우리나라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은 저 사람이 나보다 돈을 많이 가졌다는 사실을 부인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이 세상에서 경쟁을 통해서 그가 부자가 되었는데 함께 경쟁한 그 과정에 대해서 승복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어떤 식으로 해줘도 승복을 안 하는 사람들이 물론 있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객관성을 잃어버린 저항말고 여기 객관적으로 도저히 이 게임이 공정한 게임이 아니였기 때문에 나는 승복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돈 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적대시 하는 감정, 반감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라가 성장하고 발전을 하는 것은 굉장히 좋은 것이지만 가난한 자들이 원한을 품는 나라가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잘 어루만지면서 경쟁은 공정하게 하고 공정한 경쟁을 해서 승자가 나오면 그 승자들은 패배한 사람들을 짓밟는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하고 이긴 사람들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는 이 기도에 부합되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영육 간에 모든 것들을 그렇게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벌되 자신을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남을 위해서 돈을 벌고, 공부해서 많은 지식이 생기면 이 지식을 가지고 남을 지배하라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많이 해서 이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용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룩하는 데에 이바지 하도록 쓰고 이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력도 주시고, 재물도 주시고, 건강도 주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아닙니까? 거기에 우리들이 이바지 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주셔서 당신을 섬기며 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의로운 나라의 번영
“저희가 해가 있을 동안에 주를 두려워하며 달이 있을 동안에 대대로 그리하리로다
저는 벤풀에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임하리니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시 72:5-7)
그렇게 그 나라의 가치가 하나님의 의와 그리고 하나님의 의 올바른 정의를 이루는데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올바르게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그러면 어떤 일들이 생겨나는가 이것을 5절부터 7절 사이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로운 나라의 번영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제일 먼저 백성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는 우리들을 종을 만드는 두려움이 있고 우리를 자유자로 만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종을 만드는 두려움은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그 공포 속에서 복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은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을 심각하게 파괴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올바른 두려움은 그 두려움 때문에 종이 되는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하게 되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종이 되는 두려움과 자유하는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차이일까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주 충만한 은혜가운데서 신앙생활 할 때에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벌주실지도 몰라 이런 종류의 두려움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데 그런데 나의 이러이러한 불순종이나 혹은 주의 깊지 않은 행동들로 인해서 우리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드리면 어떻게 하나 이런데서 오는 관계가 깨뜨려질지도 모른다라는데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이런 두려움은 사실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 관계가 깨어질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두려움이나 이런 것들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된다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해 있을 동안에 달 있을 동안에 대대로 이런 이야기는 무엇이냐면 예외 없이 언제나 그런 뜻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혹은 애비가 죽고 자식으로 대가 이어지고 그 자식이 죽고 다시 손자로 대가 이어져도 언제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전망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실현하는 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왕이 하나님의 판단과 그리고 의를 받아서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릴 때 첫 번째 효과는 백성들도 하나님을 함께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신앙의 실제를 입으로 가르쳐 주는 것은 쉽지만 실제를 보여주는 것은 부모의 삶입니다. 삶을 통해서 자녀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을 그렇게 두려워하고 사랑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자녀들에게 가르쳐주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신앙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나라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생활하며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믿음으로 살아갈 커다란 소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저는 벤 풀이 내리는 비같이 땅을 적시는 소낙비 같이 임하리니 여기서 저는 왕입니다. 왕이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이제 풀이 성경에서 벤 풀이라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의 근거가 잘리워져 버린 사람들을 가리킬 때에 벤 풀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아주 덧없고 허망한 것을 가리킬 때에도 벤 풀이라는 말을 사용을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잘 알지 않습니까 아침에 논둑에 나가서 풀을 막 벱니다. 왜냐하면 잡초가 많으면 어쨌든 땅의 지력을 자꾸 빨아들이니까 막 베어버립니다. 그 벤 것을 갖다가 꼴일 경우에야 그것을 베어서 다 묶어서 가지고 가서 짐승을 주지만 이것이 잡초여서 베어버린 경우는 신경 쓰지 않고 내버려둡니다. 그러면 막 길같이 시퍼렇게 자란 놈을 막 낫질을 해서 확 던져버리면 잘라놓은것이 산더미처럼 더미더미 쌓인 것이 보입니다.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내버려둡니다. 내버려두어도 됩니다. 그러면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저녁때가 되면 다 지푸라기처럼 말라버리고 그 다음날이면 그야말로 티끌 같은 지푸라기가 되어서 그런게 있는지 없는지도 보이지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오늘 여기에 뭐라고 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게 벤 풀 위에 내리는 비같이 어떻게 됩니까 풀을 잔뜩 베어놓았는데 비가 확 쏟아지고 나면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잘린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왕은 왕이 임하기만 하면 그 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다 덧없이 말하자면 썩어서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악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느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도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인들은 선정을 베풀고 하나님의 공의를 쫓아서 나라를 통치하시려고 하는 그런 왕국에서는 존속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왕이 부패하고 나라가 온통 타락했을 때에는 아주 거기에 깃들여서 기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번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벤 풀에 내리는 비같이 이것이 바로 뿌리가 잘린 악인들을 향한 급속한 멸망의 왕이 이바지하는 것을 보여준다면 뒤에 내리는 땅을 적시는 소낙비같이 라고 하는 이것은 번영을 가지고 오는 비입니다. 소낙비라는 표현을 썼지만은 아시다시피 팔레스타인에서는 강수량이 매우 적습니다. 매우 적어서 그래서 심지어 옛날에는 지붕을 개조해서 빗물이 쏟아지면 그 빗물을 받아서 땅속에 받아두었다가 그 물을 사용할 정도로 그렇게 물이 적은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때맞춰 내리는 이 비를 가지고 파종도 하고 또 농사도 짓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하나님께로부터 판단을 받아서 의롭게 나라를 다스릴 때에 한편으로는 악인들을 소멸하게 하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번영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로운 나라의 영광입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날에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달이 다할 때까지 이르리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되시라고 하는데 달은 아주 재미있는 물건입니다.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근동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달을 신비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달이 동그랗지 않습니까 보름달에 그런데 이제 찌그러지기 시작합니다. 누가 와서 베어 먹는 것처럼 다 베어 먹으면 그 다음에는 다시 또 동그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다시라는 히브리 단어가 새롭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달은 어떤 것입니까 다함이 없는 것입니다. 짤라지는 것 같다가는 다시 또 새로워지고 그다음에 짤라지는 것 같지만 다시 또 새로워지고 그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영원무궁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시인이 의인이 흥왕하여 평강의 풍성함이 번영하고도 만약에 평화롭지 못하다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옛날에 그 누굽니까 이라크 사태에 개입을 했지 않습니까 전쟁을 했지 않습니까 사담후세인입니다. 죽고 그 다음에 아들들도 다 죽었습니다. 죽은 다음에 미군들이 가서 뒤져보니까 아들집에서 1억 달러가 나왔습니다. 어마어마한 미국 돈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써보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그러니까 아무리 번영해도 평화가 없으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의인이 아주 흥왕하게 될 뿐만 아니라 평강의 풍성함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복이 평강이 아주 풍성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주시는 그 번영이 가득한 나라가 되는 것 그러면서도 평강을 누리는 것 이 평강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땅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을 바로 평강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라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 나라는 늘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들이 개입되기 때문에 완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타락한 부패성들이 남아서 완전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결국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율법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선한 뜻을 바라보면서 나라와 교회 모두 온전히 지기를 애쓰지만은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는 궁극적인 통치가 가져다줄 커다란 행복을 보여주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주님이 직접 다스리시지 않으시니까 은혜를 통해서 다스리시니까 우리들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각자가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의 통치에 복종하며 살아가게 될 때 그때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서 이 땅에서 주님의 통치를 나의 삶속에 교회 안에 나라 안에 구현해 나가길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통치에 역행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되는 것입니다.
의로운 통치의 영광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니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그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시 72:8-10)
사람이 보기에 복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기 때문에 오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함, 불순종하는 자들의 번영, 심지어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의 행복,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전체적으로는 이 모든 세상을 주관하며 섭리하고 계시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번영하게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이 직접 그들에게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살이를 볼 때 좁은 견해에서 바라보는 것과 넓은 견해에서 바라보는 것을 우리들은 항상 같이 가지고 있어야합니다. 악인도 허락하시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이 허용하시기 때문에 짓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좁은 견해에서 보면 악인의 번성은 하나님이 직접 주시는 번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아껴 쓰고 좀 영악하고 똑똑하면 돈도 잘 벌고 출세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듯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심지어는 신앙을 팔아서 번영하는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 주님이 복을 주셔서 번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간의 번영도 이렇게 두 가지가 있듯이 왕국의 번영도 그러합니다. 물론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있지만 평소에 외적의 침입에 철저하게 대비하는 나라가 외적의 침입을 덜 받는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왕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에 힘입어서 나라를 통치할 때 왕국에 어떠한 영광이 나타나는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첫 번째는 하나님이 광대한 땅을 통치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라는 구절은 왕국의 권한이 내륙에 뿐만 아니라 해양에까지 미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국권이 약해지게 되면 바다가 외적들의 손에 넘어가고 해적들이 출몰하게 됩니다. 이런 일은 우리 임진왜란 직전에도 있었던 일입니다. 나라가 여유가 있고 왕권이 강해야만 바다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다는 각종 장비와 배들을 띄워서 훈련된 군인들로 지키지 않으면 제압할 수 없습니다. 당시에는 비행기가 없었으므로 그것은 국권을 상징합니다. 내륙을 통치하는 왕권이 강력할 때 바다를 지배하는 영역 또한 넓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다에서 바다 끝까지 왕국의 권세가 미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나라가 강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하나 묘사하는 것은 “강이 땅 끝까지 미친다.”는 구절로 강물이 흐르는 순서를 따라서 보면 상류에서부터 흐르지만 바다 쪽에서 그 강을 보게 되면 마치 그 물이 스며들어서 저 내륙 쪽의 큰 강에서 하천으로, 하천에서 개울로, 개울에서 실개천으로, 실개천에서 더 작은 지류로 핏줄처럼 뻗어 나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 하나로 모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여러 개로 뻗어 나아가 그 모든 땅들의 핏줄 역할을 합니다. 나라가 있어도 저 산간지방이나 오지지방에 왕의 통치가 미치지 못하여 그들끼리 세금을 거둬서 살고, 거기서 또 다른 왕이 통치하게 된다면 그곳은 진정한 의미에서 왕권이 미치는 곳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왕권 자체를 하나님이 아주 강하게 해주셔서 왕으로 하여금 모든 것들을 완전히 다스릴 수 있도록 철저한 왕국의 통치 권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땅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자기 땅이 아닙니다. 땅이 있고, 거기에 경찰과 군인이 있고, 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생산을 하고, 생산을 해서 세금이 나오고, 또 왕이 명령을 내리면 집행하는 사람들이 있어 왕의 통치에 백성이 복종해야 진정한 왕국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내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지는 넓은 왕국을 허락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그저 창칼로 꼼짝 못하게 무릎을 꿇려야 정복이었지만, 이제 그런 의미의 정복은 사라졌습니다. 문화적으로 보면 과거 우리나라의 음악 수준이 서구에 미치지 못했을 때에는 젊은이들이 거의 미국의 음악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어떤 의미에서 보면 문화적으로 미국에 지배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빚이 많은 남미의 여러 나라들은 미국과 같은 나라에 대출을 많이 받아 더욱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나라의 장관을 세우는 일까지 전부 다 간섭을 받게 됩니다. 당장 빚을 회수하겠다고 하면 나라가 무너지므로 경제 개통의 장관들을 새울 때에 미국에 협조하는 사람들을 세우게 됩니다. 결국 점점 더 어려워지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나라가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하고 있어도 사실상 경제적으로 외국에 예속된 것입니다. 또 나라가 있기는 있는데 외적의 침입을 도저히 막을 수 없어 다른 나라에게 국방을 의지해야 한다면 마찬가지로 예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다른 나라들을 정복해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 변화된 정복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판단과 의를 구하면서 자신의 나라가 이렇게 되기를 사모했습니다. 그 당시 아주 외진 광야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라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고 나라가 불안정하거나 왕권이 확립되지 않아서 정부의 권한이 미치지 못한 지역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 거하는 자는 저의 앞에 굽히며” 라는 구절은 이제 그런 광야에 있는 작은 무리들까지도 굽히며 복종한다는 것으로 내치가 철저하게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예화) 전에 필리핀에 아웃리치를 갔는데 ‘민다나오’라는 꽤 큰 섬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외국 사람들도 잘 들어가려고 하지 않는 곳입니다. 이유는 그곳까지 국력이 미치지 않기 때문에 반군들이 오래전부터 지배해서 자기들끼리 불법정부를 세우고 세금을 거둬 운영하기 때문입니다.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해 싹 토벌을 해서 그곳을 국가의 권한에 복종시켜야 하는데 수시로 전투를 해도 이기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땅이 없도록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원수들이 있습니다. 나라로서 그 나라에 원수가 되는 나라가 있고, 왕국 안에 왕에 대해 반감을 품고 원수가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티끌을 핥을 것이며”라는 것은 그들이 티끌을 핥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티끌은 ‘아파르’라는 단어이며 이것은 구약성경에서 먼저 존재적으로 가장 비천한 것을 암시합니다. ‘내가 티끌같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은 ‘존재감이 거의 없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또한 티끌을 핥는 다는 의미는 첫째, 그것을 핥는 자와 티끌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먹을 것이 없어서 티끌을 핥을 정도로 비참하고 불행하게 된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이렇게 비참하게 굴복을 했으니 이제 이 왕의 권세가 그 나라에 가득해서 누구도 도전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화) 그래서 역사를 보면 왕들이 행복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북한도 지금 비슷한 형편으로 끊임없이 누구도 못 믿기 때문입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옛날에 금나라가 고난을 가지고 청국을 만들었습니다. 그 청국의 왕궁인 자금성은 바닥을 두께가 3-4미터정도 되는 돌로 깔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누군가가 성을 뚫고 잠입해서 황제를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황제는 왕비와 잠자리를 같이할 때도 돌연사 등등을 방지하기 위해 침실 창살 너머로 궁녀 세 명의 감시를 받아야 했습니다. 24시간 감시를 받았으니 행복했겠습니까?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감시하는 사람을 만들어 끊임없이 고발을 받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람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또 그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을 만들고······. 이렇게 두 겹 세 겹으로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게 했습니다. 죽여야 할 한 사람만 포함되어 있다면 억울한 사람 백 명을 죽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고, 억울한 사람 백 명을 안 죽이기 위해서 죽여야 할 사람이 풀려나면 이것이 왕에게는 재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폰티치아누스라는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데 그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왕궁에서 높은 벼슬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오르기가 어려운 일이며 또 그렇게 올라서 왕 가까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땅이나 캐어 먹고살면 누가 와서 죽일 일은 없지만 왕 곁에서 영광을 받던 사람은 왕의 마음이 변하면 한 번에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왕궁은 얼마나 위험한 곳입니까?
이런 원수들을 하나님이 정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나오는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는 바다를 제패해서 작은 섬들 까지 모두 다 세금을 낸다는 이야기이고 “스바와 시바 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는 왕국이 멀리까지 뻗어 있었던 솔로몬을 존경했다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는 이스라엘에서 애굽을 지나 아래쪽으로 많이 내려와야 했기에 솔로몬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곳을 직접 지배했던 것은 아니고 ‘어쩌면 그렇게 탁월한 판단력과 의로 통치를 해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을까? 정말 당신을 존경합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싶습니다.’라는 존경의 의미로서 예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왕국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예화) 오래전에 북한에 갔는데 수해를 당해서 남쪽에서 식량을 많이 도와 줬습니다. 그런데 북한에는 핵폭탄이 무서워서 남한 사람들이 조공을 바쳤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이렇게 어느 나라든지 자신의 나라가 강성해져서 조공과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는 것을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은 사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번영과 영광을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를 가지고 나라를 통치할 때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국민소득이 삼만 불이 되고 사만 불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항상 정치 지도자들이 올바른 하나님의 판단과 의에 입각한 통치로 나라에 구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이런 나라가 되도록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고 탈세를 해서 사회를 어지럽히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보내신 목적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왕국에 영광이 가득 찰 때
“다시스와 섬의 왕들이 공세를 바치며 스바와 시바왕들이 예물을 드리리로다”(시 72:10)
원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맨 처음에 선택 하셨을 때에는 가정을 선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가정이 바로 다름이 아닌 아브라함의 가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정을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그들로 큰 씨족을 만드시고 그 씨족들로 후일 나라를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라를 만드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나라들과 같은 나라를 만들고 싶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을 안주신 것이 바로 그 대표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모세라고 하는 지도자가 있었고 그리고 여호수아라는 지도자로 바통이 이어지고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다음에는 이제 사사들의 시대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사사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쇼페트라고 하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판단하는 자입니다. 그러니까 재판을 해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라고 판단을 해주는 자고 쇼페트라고 하는 단어에서 미슈파트라는 단어가 왔는데 이것이 바로 공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라에 지도자가 없이는 안 되니까 최소한의 지도자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있고 그리고 또 한편에는 제사장들이 있어서 죄인들을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도록 돕고 선지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그래서 주님의 뜻을 알려주면서 살도록 그리고 직접적인 왕으로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이 되시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나라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원했던 것인데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나라를 직접 통치하시려니 까 어떻게 되겠어요? 왕이 눈에 보이고 칼을 휘둘러도 말을 듣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니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신앙심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으로 다스려 지는 나라 그러니까 사사든지 아니면 선지자든지 아니면 제사장이든지 그런 것 하고는 상관이 없이 모두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향한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그것 이였어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중에 신앙이 부패해지니까 자신의 나라가 이렇게 약한 것은 이 세상나라에 있는 왕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국의 가치를 이 세상나라하고 똑같이 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하고 똑같은 가치를 둔다는 것은 이 세상 나라에서는 왕실이 얼마나 번영을 하냐? 나라가 얼마나 땅덩어리가 큰가? 그리고 무역을 해서 돈을 얼마나 많이 버나? 전쟁에 나갈 수 있는 병사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전쟁에 필요한 말과 무기는 얼마나 가지고 있는가? 이런 것에 의해서 나라의 강함과 약함이 측정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한번 가만히 돌아보세요. 이스라엘 나라는 고등학교 세계사에 두 줄밖에 안 나오는 그런 아주 조그만 나라입니다. 가서 보면 우리나라 땅덩어리의 절반밖에 안 되는 겁니다. 작년에 성지순례 갔다 왔지만 웃기죠. 뭐 우리가 호수라 그러는 것은 바다라 그러고 우리가 도랑이라고 하는 것은 강이라고 하고 우리가 보기에 뒷동산은 산이라고 하고 우리가 보기에 밭떼기만 한 것은 광야라고 부르고 평야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모든 것이 축소된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못하신 게 뭐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실 때 아예 처음부터 그 목표는 이 세상나라의 크기를 대결위한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뜻이었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실 게 아니라 중국이나 로마제국을 선택하셨어야죠. 그런데 하나님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목적 자체가 당신과 어떻게 그 백성들이 관계를 맺으시고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시는 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만약에 중국이나 로마를 택해서 하나님이 이런저런 일을 이루셨으면 사람들이 그게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나라가 워낙 크니까 참 잘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겠죠. 그래서 오히려 거꾸로 말해서 그렇게 미약한 나라였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그리스도 인들도 마찬가지예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난 다음에는 우리의 인생에 대한 견해가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는 인생에 대한 우리의 견해가 부자가 되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이러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됩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인 목표였었는데 이제는 바뀌어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보여주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그런 일들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고 그것은 반드시 큰 성공이나 어마어마한 번영 이런 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생각하는 그 자체가 이 세상의 가치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와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도 얻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는 그것보다도 오히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없어서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성취들을 신앙 안에서 해 낼 때 그것을 보면서 오히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 주님의 놀라운 은혜 이런 것들을 드러내고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 중에 한사람이 홍콩으로 사업 때문에 이주를 했는데 돌아와서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는데 그렇게 행복해 한데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한국학교에 다시 안 올 거라고 한데요 그래서 왜 그러냐 그러니까 거기서는 그렇게 선생님들이 인격적으로 대해준다는 겁니다. 여기서는 수업시간에 떠들면 분필을 집어던지고 심지어 우리 학교 다닐 때 분필통을 집어던지고 그랬습니다. 분필통을 집어던졌는데 나무통이었는데 떠드는 애한테 안 맞고 그 뒤에 있는 애 머리에 맞아가지고 혹이 이만큼 나와서 선생님이 쫒아 가서 미안하다고 그러고 이렇게 되는 현실을 보면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이 땅에 예수 믿는 젊은이들이 우리교회를 포함해서 물론 선생님 되는 것도 요새 힘들지만 젊은이 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젊은이들이 대거 교사로 지망을 해가지고 가서 성직을 수행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위해서 온전히 마음을 쏟아 붓고 그렇게 가르치면 정말 하나님께 얼마나 큰 영광을 돌릴까? 아이들의 마음이 물같이 녹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아이들이 부모에게 반항하고 선생님에게 반항하고 이런다는 이야기는 결국 뭘 보여 주냐면 그렇게 존경하며 따르고 싶다는 것을 역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헌신할 사람들이 너무너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교사뿐이겠습니까? 이 세상 너무 할 일이 많은 영역에서 모두 그런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왕이 하나님의 판단과 의로서 나라를 통치할 때 하나님이 이 세상 나라의 영광도 하나님이 아울러 주실 것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앞에 부복할 것이며 부복한다는 것은 신하가 왕에 대해 예를 갖출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럴 것이며 그담에 열방이 많은 나라들이 모두가 다 그를 섬길 것입니다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여기서 이야기 할 때 만왕이 그 앞에 부복하며 할 때의 때는 솔로몬의 시대는 주변에 어마어마한 왕국 이스라엘만 해도 큰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왕이라는 개념이 창세기에 보면 서른두 명의 왕들이 나오고 그러잖아요. 그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토인들 뭉쳐서 씨족마을 거느리고 있는 것 같은 작은 마을도 왕이라고 불렀으니까 그런 것들이 이스라엘 주위에 있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지고 나라가 허술해지면 벌떼처럼 모두 일어나서 대드는 겁니다. 공격을 하고 그리고 약탈해가고 조공도 안내고 그런데 나라가 강성하면 전부다 이스라엘 왕에게 와서 부복하고 경배하고 절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이런 왕들이 자신에게 와서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그런 것들을 염두에든 표현이라기보다는 요단강 건너편에도 족속들이 많이 있잖아요. 그리고 가나안 원주민들이 산지에 몰려 있다가 이스라엘이 약해지만 내려와서 약탈해가고 문제를 일으켰잖아요. 이런 모든 세력들이 이스라엘에 굴복한다. 그것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듯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했던 것처럼 나라도 꼭 같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올바르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나라가 될 때 하나님이 그런 것들이 부복시키셔서 그래서 섬김을 갖도록 만들어 주시는데 이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꿈꾸는 나라가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나라가 돈 많이 벌고 땅덩어리를 크게 차지하고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다음에 그 담에 작은 나라들을 압박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독단적으로 행동을 해서 주위의 나라를 도탄에 빠뜨리고 침략전쟁이나 일으키고 하는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몫이 아닙니다. 여러분 찬송가에 보면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양)
끝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다 외치며 사나니
미국이 멕시코와 전쟁을 하려고 할 때 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의 이유가 영토 분쟁이 있었는데 영토를 넓히기 위해서 아예 멕시코를 치자 침략전쟁 이였습니다. 교회가 결사적으로 반대 하였습니다. 그때 데모하면서 부른 노래가 바로 이 노래였습니다. 결국은 못했습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나라의 일원으로 살면서도 이 세상 나라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며 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정말 나라를 사랑하되 그렇게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에 부합하며 그 나라에 번영에 이바지하는 나라가 되었을 때 그때 기독교인들이 기쁘게 이 나라를 위해 일하고 섬기고 그리고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왕국에 가득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욕이나 하고 잔소리나 하고 마음속으로 비난이나 퍼붓고 저주나 하고 그런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자세가 아닙니다. 깊이 마음으로 끌어안고 나라가 올바로 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왕의 통치
“저는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에 건지며 도움이 없는 가난한 자도 건지며
저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저희 생명을 압박과 강포에서 구속하리니 저희 피가 그 목전에 귀하리로다“(시 72:12-14)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께서 판단력과 주의 의를 왕과 왕의 아들에게 주면 그 왕들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 그리고 주의 판단력과 의를 구하는 이유가 궁극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구절에는 ‘건진다’, 다시 말하면 ‘구원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이후 이 세상에 하나의 기관을 세우셨습니다. 그것이 가정입니다. 창조한 이후로 하나님이 가정을 세우셨고 그것이 곧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정과 교회는 적극적으로 세우셨던 것을 보면 타락하지 않았어도 교회는 존재했을 것입니다. 지금의 형태가 아니라 다른 형태로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소극적으로 허용하여 세우신 제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입니다. 국가와 교회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스려가는 두 개의 아주 중요한 기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국가로는 우리의 외적인 생활을 관장하게 하셨고 교회로는 우리의 내적이고 종교적인 생활을 관장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올바른 공의,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실현되게 하는 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이러한 공의의 시행을 보며 타락한 죄인들은 이웃에 대해서 함부로 죄를 지으려는 욕구를 억제하고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되는데 이렇게 국가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정의에 맞게끔 공정한 사회를 이루도록 만드는 것이 국가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낙원에서 쫓겨난 타락의 상태에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할 수 있는 몫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러한 국가의 공정한 통치 속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며 온 마음을 다해 복음을 전하고,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실한 사랑을 부어주어서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착하고 신실한 내적인 경건을 실재 나라가 이 백성들을 통치하는 법에 맞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라의 법을 지킨 결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지킨 결과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라를 온전히 다스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국가와 교회를 세워 놓으신 두 뜻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그 고유한 일에 충실해야지 교회로 하여금 국가의 권력을 업고 자신에게 좋은 어떤 일들을 도모하기 위해서 국가의 권력을 이용한다든지, 아니면 국가가 자기의 일을 잘 하기 위해서 교회와 결탁해 교회를 세력화해서 힘을 이용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는 이렇게 미묘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국가가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가는 어차피 타락한 죄인들에 의해서 타락한 죄인들을 위해서 다스리므로 흠결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공평과 정의를 백성들에게 가르쳐주고 공평과 정의에 따라서 백성들을 통치해야 될 국가가 현저하게 그 원리를 위반합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을 억울하게 박해하고 정의의 원리에 현저히 어긋나게 행동할 때 이 때는 국민은 그 국가에 복종할 의무가 없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역사에서 유명한 저항권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권에 굴복하고 하나님의 정의를 굽게 하는 통치를 실현하고자 만든 법에 복종하는 것은 현저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납니다. 이때 국민은 분연히 일어나 이러한 정권을 타도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러한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이러한 정의의 원리에 입각해 백성들을 다스리고 또 한편으로는 외적의 침입에서 국가를 보호하고 백성들이 최소한의 인간다운 생존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국가는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보다는 올바르게 살게 하는데 존립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국가의 통치에 복종하는 것을 통하여 선과 악이 무엇이고 그 선과 악에 대해서 당연한 귀결과 보상이 있고 갚음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잘못할수록 사회에는 부패와 더러움이 넘치게 됩니다. 이런 모든 나라들의 부패와 더러운 상황이 궁극적으로 올라가게 되면 그 시대의 왕 한사람의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왕 한사람이 정말 정의롭고 공정하게 하나님 앞에 깨끗한 세상을 만들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면 가능합니다. 어느 정도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국가가 못할 때 백성들은 국정권에 복종해야할 의무가 없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바로 이런 왕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판단과 의가 국가의 고유한 임무를 감당해 나가는데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사회건 간에 궁핍하고 도울 이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압제와 박해의 대상이었고 약탈과 수탈의 대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권력과 무력, 힘 같은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권력을 집행하는 나라의 행정부도 중요하지만 입법부는 공평과 정의가 실현되도록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법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입법부에 있는 사람들이 법을 온전히 만들지 않고 잘못 만드는 것은 커다란 불공평과 죄악을 온 나라에 허용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법은 길과 같아서 길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다녀도 소수가 다니고 또 다니는 사람이 가책을 느끼면서 다니지만 길을 만들어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로 왕래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법을 따라서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법이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원칙에서 어긋날 때 그 법은 사실상 백성들에게 복종을 강조할 수 없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은 소크라테스가 죽으면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진짜 그런 말을 했다고 믿는 철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후대에 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어서 집어넣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유신시대에 사회 교과서에 이런 일들을 잔뜩 집어넣는 일들을 저질렀습니다. 어느 철학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설령 그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무엇을 보여 주느냐하면 당시 그리스인들은 폴리스라고 하는 작은 국가를 이루었는데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폴리스는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수천만 명, 수억만 명의 국민들이 나라를 이루고 자유롭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폴리스에서 태어나 그곳의 시민이 되어서 한 씨족처럼 가족처럼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날 우리나라가 씨족 공동체를 이루며 살 때 가장 개념 없는 행동을 한 자기의 종씨에게 내리는 최고의 무거운 형벌이 ‘우리 마을을 떠나라.’였습니다. 이것은 거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봐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법을 만든다는 것은 커다란 죄를 짓는 것입니다.
더 큰 문제는 사법부입니다. 사법부는 입법부가 만들어 놓은 법에 따라서 사람을 심판하거나 법을 집행한 정부를 재판합니다. 이렇게 재판을 하는 사법부는 법을 집행하므로 공동체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법의 정신에 따라서 올바르게 사건을 판단하고 그 판결의 결과가 이 세상에 올바를 법을 세우는데 이바지 하도록 해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법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금권과 뇌물 같은 것들로 얼룩져서 재판을 굽게 하고 사실의 판단을 굽게 하여 정의와 공평에 어긋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보편화 될 때 이것은 세 부서가 짓는 죄 중에 가장 커다란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돈이 있으면 무죄이지만 돈이 없으면 죄가 있다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아냥거리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 그러합니다. 이런 현실들은 잘못된 것이고 자본주의의 논리가 법질서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현저히 국가의 목적을 위반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다시 말해서 불완전한 정부의 불공평과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야 할 신자의 의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는 주님의 권고, 그리고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라’는 신약의 명령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를 살아 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우리들은 진지하게 고민하고 성경의 가르침의 빛에 우리자신의 삶을 두어야 합니다.
어쨌든 이 왕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를 주의 판단과 의를 주셔야만 하나님의 종들인 왕이 궁핍하고 도움이 없는 자들을 건져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국가에서 정의를 베푸는 동기 자체가 백성들에 대한 긍휼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국가권력에 더 잘 복종하게하기 위해서 백성들에게 아주 엄격한 정의를 요구하고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형벌하는 것은 정의를 구현해가는 올바른 동기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 시편의 맥락으로 보면 나라를 통치하는 사람들의 마음, 왕의 마음 안에 긍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은 백성들을 향해 백성들의 비참한 형편을 보면서 불쌍히 여기는 슬픈 마음입니다. 이것이 정의를 수행하는 동기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수행하는 동기를 통제하고 이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의를 수행하되 동기가 서슬 시퍼런 통치를 통해서 왕권을 가진 자기를 두려워하게 하는 것이 목표가 돼서는 안 됩니다. 더욱이 자신은 정의로운 삶을 살지 않으면서 백성들에게 정의로운 삶을 강요하는 것들은 현저히 잘못된 것입니다. 더욱이 국가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자본을 증식하기 위해 혹은 손해 보지 않을 목적이 동기가 되어 가난한 자들을 억압하고 불공평한 것이 뻔한데도 그런 법을 만들거나 집행하거나 폐기하지 않고 유지하는 것은 아주 최악의 정치 형태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일반섭리 속에서도 반드시 국가 전체의 이익에 현저히 위배되는 불행한 일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왕은 하나님 앞에 판단력과 자비를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 안에는 원한을 품고 억울한 사람들이 없어야합니다. 사람이 다스리는 사회이기 때문에 완전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원한을 품고 억울하게 억눌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없는 사회가 되는 것이 이런 사람들을 남겨놓고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엄청난 부를 누리면서 사는 사회를 이루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은혜를 공급받습니다. 이것은 모순되고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세상을 이길 것인가?’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후에 불공평하고 현저히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서 일그러진 이 사회에 순응하고 적응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원하는 기독교인의 삶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이 개혁주의적인 원리를 따르는 성도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갈망하는 것과 함께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이 자원을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아야 이 세상에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를 구현해 나가도록 변화되는 데 이바지 할 수 있는가를 진지하고 깊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아주 깊은 엄숙함을 느껴야 합니다.
조국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큰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60~80년대까지 조국교회에 주셨던 큰 은혜들을 쓸모없는 일에 사용한 것입니다. 교회들이 베풀어 주신 은혜를 가지고 큰 교회를 짓고 수양관을 짓고 했습니다. 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자원들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헌신들을 현저히 굽게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은혜들을 가지고 정부가 올바른 법을 제정하지 않고 굽게 사용할 때 저항하고 또 한편으로는 국가가 그 일들을 감당하지 못할 때 긍휼히 여겨야하고 불쌍히 여겨야할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자비가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질서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하며 살아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미 있는 세상에 뜻 없이 무릎을 꿇고 쉽게쉽게 살아가는 방법을 선택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해서 그 은혜로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은 모두 자족주의적인 영성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는 자유하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하나님 앞에 자유와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가치를 느낀 사람들로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통치 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런 각도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많이 기도해야 하고 주님이 교회에 주신 은혜의 자원들을 이렇게 굽은 세상을 바로잡는 일에 쓰도록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왕을 섬기는 백성들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의 금을 저에게 드리며
사람들이 저를 위하여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하리로다“(시 72:15)
이 구절은 조금 어렵습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은 ‘저희가 생존하여 스바에 금을 저에게 드리고’ 그랬는데, 저가 누군지 불명확합니다. 그래서 만약에 ‘저희가’ 라는 거는 번역을 의역한 거고, 앞에 나오는 ‘저’가 왕이 라면 뒤에 나오는 ‘저’는 왕 자신이 되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되든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문맥에 잘 안 어울립니다. 그래서 이제 여기 ‘저’ 라고 단수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백성들을 통칭할 때 단수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흔하진 않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아마 이 번역자가 ‘저’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 전체를 하나의 단일 집단으로 보고 ‘그 백성이 살아서’라고 한 것입니다. 근데 이 번역이 어울리는 이유가 뭐냐면 앞에서 강한 자들에게 압제를 당해서 죽을 지경에 있는데 왕이 가서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위기에서 왕의 판단력과 의로운 통치로 말미암아 살아나서 그래서 스바의 금을 왕에게 드리며 이렇게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스바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나라인데 아마도 금이나 이런 보화들이 많이 나던 그런 장소 이었다고 믿어집니다. 근데 그런 것들을 스바 뿐만 아니라 욥기에 보면 오빌의 금이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그래서 우리로 말하자면 개성산삼 뭐 이런 것처럼 금이 어디서나 조금씩 나지만, 그러나 아주 양질의 금이 나는 그 산지의 금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금이 특별한 좋은 금이라고 하는 것을 장소하고 연관 지어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죽을 위기에 있는 백성들을 왕이 잘 건져내니까 그들이 열심히 사업을 하고 돈을 벌고 이렇게 부자가 되어서 그 금을 왕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이제 세금을 낸다든지 이렇게 나라에 바치는 것입니다.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나라가 어쨌든지 부강해지려면 백성들이 국가에 많이 헌신해야 합니다. 세금을 내는 것은 아주 성경적 입니다. 그래서 이런 세금을 포탈하고 부정직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그 대신 정부는 합리적으로 법을 만들어서 그래서 그 법을 온전히 집행하여 이렇게 정부의 세금을 바치는데 있어서 불공평한 사람이 없고 더욱이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올바르게 국가를 이끌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강해진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입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은 사회는 조금 뒤떨어져도 나라가 아주 강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서 사회학에서 ‘국가발전모델’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자면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이런 나라들을 강대국을 지향합니다. 그래서 함부로 넘보는 나라가 없게끔 그렇게 다스리는 것이지요. 미국 같은 나라가 아주 대표적인 국가발전 모델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정된 의료보험법이 미국에서 통과되기 전까지만 해도 2억 5천만 명 정도 되는 미국 사람들 중 의료보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사람이 4천 5백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 미국 가난한 사람은 한국 가난한 사람보다 더 비참하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대신 강대국이 됩니다. 국방비를 지출하는데 중국이 저렇게 군사력을 팽창한다고 미국에서 그렇게 욕을 하고 비난하는데 자기네는 중국의 거의 3배를 씁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쓰는 그 국방비가 일본, 한국, 중국, 러시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씁니다. 어쨌든 굉장합니다. 그러니까 강대국을 이루어나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또 이제 유럽이나 이런 나라들을 보면 나라가 그렇게 강해지는 것보다는 사회가 잘 살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국민들로부터 세금을 아주 많이 걷어서 소득이 높으면 10억 원을 벌면 5~6억 정도를 걷어갑니다. 더 걷어 갈 것입니다, 아마. 그래서 그것을 모두 골고루 복지에 사용을 해서 잘 살게 하는 것이지요.
오늘날 논쟁이 벌어지는 게 우리나라에서도 ‘국가발전모델’을 택할 것이냐, ‘사회발전모델’을 택할 것이냐 입니다. 저는 캐나다나 호주 같은 곳을 가면서 느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물론 이제 기후 문제도 있겠지마는 나라가 그렇게 가난하게 느껴집니다. 길도 다 낡았습니다. 근데 백성들은 부자입니다. 우리는 그러니까 미국식 모델을 따르는 것이지요.
어떤 쪽을 택하는 것을 우리들이 절대적으로 좋다 나쁘다 이야기 하거나 판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지만은 그러니 이제 둘 다 뭐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겠지마는 그러나 분명한 것 하나는 이제 좋은 것은 뭐냐 하면은 나라가 백성들의 민복을 위하여 힘쓰고, 정의와 공평을 확고하게 할 때에 그래서 백성들이 예측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살면서 산업을 하고 돈을 벌게 되면 그것이 국가가 먼저 해야 할 일이고, 그렇게 해서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백성들을 수탈하는 그런 나라의 체제가 되지 말고 백성들을 행복하게 하고 잘 산업을 하게 해서 그것을 거두어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는 이것을 위하여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왕에게 판단력과 하나님의 의, 이사야서 5장에 의하면_ 공평과 의(공의). 이것을 하나님께서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그렇게 국가를 다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국가가 정말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보면서 분통 터지는 게 너무 부정직합니다. 그리고 부패합니다. 근데 이것은 용납하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속에 살면서 그런 것들을 대충 야합하고 그러면서 자신도 그 속에서 이익을 얻고 그렇게 살아가면 나라가 희망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가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백성들이 이렇게 공평하고 안정된 가운데 생업에 종사하고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리고 백성들은 국가에 자기의 수입의 일부를 바쳐서 국가로 하여금 이러한 공평과 의를 모든 백성들에게 골고루 펼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은 너무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예화) 최근에 외국에서 선박사업을 해서 수조원의 돈을 번 사람이, 단 십 원도 세금을 내지 않았다고 해서 발칵 뒤집혀서 국세청에서 벼르고 도전을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지요. 교묘한 방법으로 탈세를 하는 것이지요. 한국의 기업이 없었고 한국에서 벌어들인 수입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에서 세금을 안낸다 말했습니다. 그러면 외국에 나가서 LPGA 같은데서 골프 해서 상금을 탄 사람들은 에누리 없이 한국에 와서 세금을 냅니다. 그러니까 어디서 사업을 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소련에 가서 돈을 벌어왔어도 반드시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냐면 ‘정말 그 나라와 그 국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많은 사람들이 나라에 세금을 내는 것을 강탈당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대신 정부가 합리적으로 올바르게 이런 세금의 정책들을 펼쳐야 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는 이제 이건 어떤 경우 입니까? 아주 기쁘게 나라에 헌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가 아주 공평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잘 해주고, 어떤 사람에게 잘못해주고 그럴 수가 없잖습니까. 그러니까 공평하고 정직하게 나라를 경영하고 그 안에서 백성들이 예측 가능한 행복한 삶을 살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서 나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안정된 삶이 가능하고 혜택을 입는다는 느낌이 들 때에 그때에 즐거운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는 것이지요.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항상 기도하고 종일 찬송 할 것입니다.’ ‘항상 기도한다.’ 라는 것은 왕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겠지요. 항상 그런 왕을 위해 기도할 것이며. 그러니까 정치 지도자가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너무너무 큽니다.
(예화) 그래서 이에이치카 라고 하는 역사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역사에는 무슨 법칙이 있는 게 아니라 역사의 전개는 한 지도자의 우연적인 성격적 특성과 관련된다. 그랬습니다. (옛날에는 무슨 법칙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히틀러 같은 경우 보십시오. 유대인에 대해서 그렇게 증오심을 품고 발작적인 성격을 가지고 전쟁을 일으키잖습니까. 그래서 전쟁에 위협이 되던 소련과 미국을 잠재우고 체코, 폴란드, 프랑스 등과 전쟁을 합니다. 그러니까 2차 대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렇게 보면 무슨 생각을 하게 되냐면, 무엇인가 나라가 올바르게 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미친 듯이 유대인을 600만 명이나 학살 하냐 하면은 우연적인 것입니다. 어렸을 때, 첫 사랑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말하자면 공장 같은 곳을 다녔는데, 성폭행을 당하고 아주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근데 그 사람이 사장이었는데 유대인이었습니다. 그 뒤로 이 어린 상처가 자라면서 폭력적인 성격으로 변해서 완전히 유대인을 말살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슨 법칙이 있는 게 아니라, 장구한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씨를 말려 죽여야 하겠다는 증오감이 우연적인 특성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 게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 지도자가 정말 올바르게 된다는 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동의하는 사람이든지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든지 간에 누군가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현실적인 것이잖습니까. 그렇지요? 대통령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이 통치자를 붙들어 주시도록.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일반은총의 차원에서 우리의 생활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좋은 지도자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종일을 찬송할 것입니다.’ 그랬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줍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왕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모든 왕의 선한 통치, 국가의 부강을 통해서 마지막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지요. 그래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치에 깊이 관여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절대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 교회가 개입하는 것은 바보 같은 행동 입니다. 어제 말씀드렸지만 성경과 교회가 가르치는 가르침을 위반하여 우리에게 강요하거나 현저하게 공평과 정의의 법칙을 위반하여 법을 제정하고 그리고 백성들을 억압할 경우에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저항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게 ‘저항권’입니다. ‘국민저항권’이지요. 그러한 것들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인 것입니다. 항상 유보해야 되는, 아무 때나 나서서 그러면 안 됩니다.
(예화) 이번에도 보면 그 무상급식 문제를 가지고 서울시에서 투표를 하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예배시간에 그 중에 하나를 교인들에게 하도록 설득을 하는 겁니다. 그건 바보짓 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해도 그것은 현저히 공평과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A는 잘못됐다, B는 잘못됐다 그러고 정부를 향해서 삿대질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국민 저항권에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가 슬플 정도로 그런 판단을 잘 못합니다. 정말 저항하고 분명히 일어서야 할 지점에서는 안하고, 야합하고, 나서서는 절대 안 되는 지점에서는 나서서 교인들의 마음을 찢어놓고 교회를 갈라놓습니다.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지요.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이런 생각 저런 생각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고 곤고한 그 사람들이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 신앙을 따라서 자신이 확신하는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좀 많은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요. 왕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판단력과 의를 구한 것은 그렇게 백성들을 건져내서 화합하는 국가가 되고, 그리고 그들이 영적인 생활에 충실해서 그래서 이 독특한 이스라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런 나라가 되고, 그래서 결국은 통치를 통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는 나라가 되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물론 대통령도, 국무총리도, 대법원장도, 심지어는 저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예수를 믿게 해달라는 기도도 필요하지요. 근데 국가에게 기대해야 하는 바는 그들이 모두 예수 믿는 것. 그것도 우리가 기도해야 할 바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국가로써 올바르게 나라를 정직과 공평으로 다스릴 수 있는 그런 용기와 지혜를 갖도록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번영을 주시는 하나님
“산 꼭대기의 땅에도 곡식이 풍성하고 그것의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리며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로다”(시 72:16)
어제가 백성들이 왕을 공경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16절에서는 왕이 그런 의로운 판단과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백성들을 다스릴 때 하나님이 어떻게 그 나라를 복 주시는지 산업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원래 어디든지 곡식을 많이 거두기 위해서 지형이 고르지 못한 곳에서는 땅의 소득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언덕은 물론 산꼭대기에도 작물을 심습니다. 산꼭대기에 있는 지형은 사실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그러한 논을 ‘천수답’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야말로 운명에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산 아래서부터 물을 길어날라서 산꼭대기에 있는 그 밭이나 논에 물을 댈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이 비를 제때 내려야만 모종을 내고 씨를 뿌리는 것이고, 또 뿌린 후에도 제때 비가 와야지만 자라는 것이니 추수할 때까지 온전히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면 ‘산꼭대기의 땅에도 화곡이 무성하다.’ 그렇다면 산 아래의 평평한 땅에는 어떻겠습니까? 상상할 필요도 없겠지요. 하늘만 바라보고 농사를 짓는 척박한 산꼭대기에도 곡식이 풍성하다면, 아래에 있는 평평한 땅에서의 농사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온 나라에 (??-중간에 동영상이 끊겨서 재생이 안됩니다..) 아무리 기가 막힌 아이디어로 나라를 다스린다 하여도 일단 나라에 백성들이 먹을 것이 풍성하지 않으면 사회는 각박하여지고 험한 범죄가 그치지 않는 것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식, 식량의 문제는 두말 할 필요 없이 너무도 중요한 생존의 문제입니다. 지금은 무역도 활발하고 농업도 대규모화되어서 이 나라의 양식이 없으면 여러 나라에서 사올 수 있도록 양식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옛날 사회에서는 자기네가 농사지어서 자기네가 먹을 뿐 국제 무역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인구가 13억이라는데 저 나라가 배불리 먹고 사는 게 전 세계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만약에 저 큰 나라가 굶주린다든지 어떤 문제가 생기면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이 생기겠느냐 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굶주림의 역사를 많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좋은 통치자를 세우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판단력과 의로움을 주셔서 나라를 통치하게 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 일반 섭리 속에서도 그 나라에 복을 주어 잘 먹고 잘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왕이 공평과 정직을 떠나 불의하게 폭압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왕이 공평과 정직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하나님은 그 나라에 더 큰 복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의 큰 번영을 일구었던 오현제의 시대를 생각하면서 그들이 공평과 정직으로 나라를 다스렸기 때문에 비록 일반 섭리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복 주신 것이라고 역사를 회고하는 이야기가 ‘신국론’에 나옵니다. 바로 그런 복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가 레바논 같이 흔들린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어 성경에서도 ‘레바논 같이 흔들린다.’ 라고 나오는데, 이 레바논은 땅의 이름이고 원래 히브리어로 레바논이라고 하는 것은 ‘하얀 산’ 이라는 뜻입니다. 산이 흔들릴 리는 없으니까 산지를 이야기하는 것일 텐데 아마도 이 레바논에서 나는 곡식 혹은 나무들이 열매를 풍성히 맺어서 바람에 풍성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산꼭대기에서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간신히 곡식이 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풍성한 소출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에 있는 자가 땅의 풀같이 왕성하리로다.’ 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그 성에 거하는 거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거민들이 성 밖에서 농사를 짓습니다. 그때에 성 밖의 곡식들이 자라기를 산꼭대기에서도 풍년을 거둘 정도로 무성히 자라고, 성 안에서는 사람들이 땅의 풀 같이 왕성하리라는 것입니다. 풀이라는 것은 이사야에서 나오는 것 같은 ‘하찌르’라는 단어인데 일년생 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흔한 풀이나 잔디, 잡초 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풀은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이것은 성안에 백성들이 사는데 왕이 하나님의 판단력과 의를 가지고 통치할 때 백성의 번성함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나라는 국가의 힘, 경제력이라고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짓느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에 경제력, 군사력 할 것 없이 모두 국민의 수에 의존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강대국은 얼마나 많은 군사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나라의 강성함의 정도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번성해서 자식들을 낳고 그들이 또 자식들을 낳으면서, 백성들이 눈에 띄도록 그 숫자가 늘어나는 것은 왕국의 커다란 명예였습니다. 그래서 임금들은 백성의 수가 많아지면 든든해지는 것입니다. 잠언을 보면 ‘왕의 영광은 그 백성들의 수에 있으며...’ 라고 나와 있습니다. 백성들의 수가 얼마나 많으냐가 왕의 영광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수가 많아지게 되면 다른 나라를 정복할 때 전쟁에서 싸울 수 있는 군인의 수 또한 많아지는 것입니다. 옛날처럼 사람과 사람이 맞부딪쳐 싸우는 경우에는 당연히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가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의 제국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제국을 형성하려면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16세기의 마추픽추의 유적에서 보는 것처럼 잉카 제국의 역사를 보면 한창 때에 이 페루 쪽으로 약 4000km 정도의 영토를 만들고 마추픽추는 그 많은 방사형의 도시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 나라의 인구가 80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지금도 8000만 명이라면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 당시에는 그 나라가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잉카제국도 마찬가지고 만주나 우리나라 그리고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 같은 나라들의 유적지를 보면 정말 굉장합니다.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어마어마한 제국의 도성을 건설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또한 그들의 사상도 굉장히 깊이가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이런 것들이 하루 아침에 역사 속에서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바로 질병입니다. 전염병 같은 것들이 도는 것입니다. 평민이고 왕족이고 할 것 없이 강력한 돌림병에 모두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외부의 침임의 흔적이 하나도 없는 아주 아름다운 유적은 그대로 남겨두고 사람만 죽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그러한 역사들을 많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때 하나님께서 그러한 재앙으로부터 막아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산의 축복을 주셔서 백성들이 계속 자손을 낳으면서 계속 번성해가는 것입니다. 마치 잡초와 풀이 웬만한 기후조건에서는 강한 생장력을 가지고 살아남는 것처럼 성의 거민들이 땅의 풀처럼 왕성하게 될 것이라고 시인이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그래서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라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하나님의 법에 어긋나게, 하나님이 주신 천부적인 인권을 약탈하고 현저하게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게 통치한다면 백성은 그 통치에 굴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이죠. 지금 리비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카다피 정권에 대한 반항은 정당한 것입니다. 카다피는 결국 쫓겨났고 세계적으로도 속속 반군정부를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성경적으로 봐도 옳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갈 힘을 정치권력화해서 무엇인가 이 세상살이에 있어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들은 성경적으로 올바른 국가관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와 국가는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국가가 올바르게 하지 못할 때 정치의 일환 혹은 교회를 정치·권력화 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적인 지적을 통해서 경고하고, 현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어긋나 통치하고자 할 때에는 저항을 해서 막아야합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이 정부가 악의 길로 갈 때에는 정복시켜서 새 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실 때 국가를 통해서 일반은총의 질서들을 규율하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나라의 어떠함, 정부의 도덕적이고 건강함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살기에 정부의 잘못된 정치로 인한 고통을 받지 않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또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이익을 보는 나라도 좋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가 박탈감을 느낀다면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정치 집단들이 뭉쳐서 권력이 부당하게 행사되고, 그것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정치적 이득을 얻는다면 그 모습들은 아주 추한 것입니다. 정부에서 그런 혜택을 준다고 해도 교회에서 거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과 정직으로 나라가 다스려지도록 의연하게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이바지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복 받는 이름
“그의 이름이 영구함이여 그의 이름이 해와 같이 장구하리로다
사람들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니 모든 민족이 다 그를 복되다 하리로다”(시 72:17)
역사를 보면 한때는 아주 강성한 국가였지만 이름 없이 사라져버린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잠깐 동안 나타났다가 큰 힘을 발휘하고 그래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깜짝 놀라게 했지만 불과 몇 백 년도 지나지 않아서 쓰러져간 그런 나라들 말입니다. 완전히 나라가 사라지지 않는다 할지라고 잠시 강한 나라로 떠올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국가가 존립하기는 하지만 현저히 힘을 잃어 버려서 자기의 나라로서의 명운을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 맡겨야 하는 그런 신세가 된 나라들도 많이 있습니다.
오늘 시인이 고백하고 있는 이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왕의 판단을 하나님이 주시고 또 공의를 하나님이 주셔서 다스리게 하는 그 나라는 하나님이 그들을 복주십니다. 그래서 왕들을 위하여 백성들은 기도하고 그를 공경하며 또 마땅히 바쳐야할 물질들을 나라에 바치고 나라는 산꼭대기 땅에도 화복이 풍성하여 열매가 두루두루 맺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 나라가 잠시 번성했다 사라지는 나라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세히 알려지는 영구한 나라 그리고 그 이름이 해같이 장구한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 날, 여러 해, 세대에서 세대를 지나도 태양은 변함없이 빛나는 것처럼 그 나라의 이름을 하나님이 그렇게 항구적으로 빛나도록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나라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질 때 어떤 이름으로 알려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라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이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움을 당한다더라. 그래서 남의 나라가 오히려 그 나라의 백성들을 구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 라고 하는 그런 평가를 받는 나라가 되어서는 진정으로 복된 나라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왕이 하나님의 판단력을 받아서 공의를 행하며 다스리는 그 나라는 어떤 모습이 될까? 사람들이 그 나라 안에서 복을 받는 나라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 복은 우리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삶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인 삶까지 모두 아우르는 그런 종류의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은 단순히 정신적인 복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복까지 모두 아울러서 그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누리게 되는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국가가 백성들에게 해주어야할 가장 중요한 의무는 공의와 선을 실행함으로써 거기에 사는 백성들을 복되게 하는 것. 이것이 국가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이 국가를 주신 것은 교회와 더불어 인간세상의 일반 은총적인 영역들을 잘 다스려서 그래서 그 안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심하고 경외하며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하시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라라는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제도가 인간의 육체와 같다면 교회의 제도는 그 육체 안에 깃든 영혼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둘이 함께 하나님의 법에 잘 맞는 나라가 될 때 그때 그 나라가 정말 하나님 앞에 좋은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는 아주 굳세게 하나님의 법에 합당한 확신을 가지고 이 모든 백성들의 삶을 규율 할 수 있는 제도와 그리고 법체계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든 인간들은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왕에게 판단력을 주시고 왕에게 공의를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올바르게 운영되어지는 그 나라를 하나님이 복주여서 그 안에 사는 모든 백성들을 복되게 하시고 그 나라와 관계를 맺는 모든 나라들을 복되게 하신다고 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 안에 사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그 나라와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나라들이 고백하기를 그 나라는 복이 되도다. 그 나라에 사는 백성들은 복이 있도다.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들은 복이 있도다. 라고 고백을 하게 되는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나라자체를 위해서도 우리들이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에 이르는 것은 교회에 소속된 하나님의 자녀로써 간구하여야 될 바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에 이를 뿐만 아니라 이르도록 기도하는 것은 교회의 한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할 바이지만 우리 국민으로서는 그들이 비록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할지라고 섬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그들을 움직이셔서 하나님의 법에 최대한 맞게끔 이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우고 재판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치지도자들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출석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를 지지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보면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서 오히려 더 큰 정치의 부정과 부패, 독재, 권력, 남용 이런 끔찍한 권모술수들이 행해졌습니다. 우리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치지도자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고 아주 탁월한 신앙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또 나라를 이끌어 갈수 있는 민주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여야 합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이론으로서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정치 지도자로써의 중요한 우리가 기도 해줘야할 중요한 기도의 제목일수 있지만 예수를 믿고도 부패한 지도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보면 우리는 그뿐 아니라 오히려 얼마나 올바른 정치가로써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법에 최대한 부합하는 그러한 자세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그 기준으로 우리들이 정치인들을 봐야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잘 출석하고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충성되다 고 인정을 받으면서 부정부패를 일삼고 독재를 일삼는 정치지도자 보다는 차라리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오히려 자연법에 맞게끔 나라를 다스려 백성들에게 정의롭고 올바른 삶을 살아 갈수 있도록 죄지은 자들은 합당하게 벌하고 사회를 공정하고 올바른 사회로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를 오히려 더 국가지도자에 적합한 사람이라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이 없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위험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이 높여주신 사람들 정치든지 경제든지 문화든지 예술이던지 어디에서든지 높여주신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이 사회와 국가를 향해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커다란 의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아무나 되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마리의 사슴이 이끄는 천 마리의 사자들보다는 한 마리의 사자가 이끄는 천 마리의 사슴들이 더 힘이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감당 해나가야 할 그 많은 일의 짐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사람의 비난과 예기치 못한 도전에도 맞설 수 있는 정신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기가 확신하는 올바른 가치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을 정도로 결단력이 있어야 하고 옳다고 믿는 그길로 걸어가기 위해서 지치지 않는 용기와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절대로 모든 사람이 다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진 않으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지도자들을 위해서 이 땅에 권력을 가진 자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교육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의롭게 나라를 다스리고 자신들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들이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두셔서 그들을 예수 잘 믿게 만드시고 그들로 하여금 복을 받게 해주십니다. 그러는 것만큼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살아서 일반 은총적인 질서에 있어서도 진보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실패한 나라에 공산주의가 득세했고 그리고 그 공산주의와의 투쟁 속에서 피나는 살육의 역사들이 뒤따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복음이 전파되는 그 나라에 사람들이 정말 빛과 소금이 되어서 교회가 번영할수록 교회의 번영이 이 땅의 나라들을 더 의롭게 하고 올바른 나라가 되게 하고 자비심이 있는 나라가 되게 하는데 이바지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그러면 이후에 교회는 부패해 버리거나 또 다른 사상에 의해서 파괴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교회는 세 가지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이 무엇이고 사상이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지식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던 인간들이 교회에 와서 예수를 믿고는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살아가는 성도들의 순결한 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의 부도덕한 삶을 꾸짖을 수 있어야 하고 교회는 가차 없이 그러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로의 잘못된 삶을 질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세상은 어떠하던지 여기에서는 진실이 울려 퍼지고 진리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서 부끄러운 자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상과 윤리사이를 이어 갈수 있는 원동력 영적인 힘 그 은혜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 안에 충만하게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역사적으로 교인들이 추구했던 은혜의 체험, 부흥의 경험 이 모든 것들이 자기만족적 영성으로 소비되거나 혹은 신비주의에 대한 추구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점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나 혼자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영적인 번영에 이바지해야 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이일에 기여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면 살아가는 사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소명인 것입니다.
홀로 찬송 받으실 하나님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찌어다 온 땅에 그 영광이 충만할찌어다
아멘 아멘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시 72::18-19)
72편을 끝맺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시인은 홀로 기사를 행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홀로 행하시는 기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왕에게 판단력을 주시고 또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셔서 대대로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는데 이때에 하나님이 나라를 복주셔서 만민의 생명을 구하고, 많은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복속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땅에 하나님이 번영을 주셔서 풍성한 곡식들이 맺게 하시는 그 영광, 그 나라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하셔서 모든 사람들에게 높이시는 열방의 영광,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왕들이 나라를 잘 다스린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 나라를 복 주실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또 잘 다스린 나라의 영광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인이 이 시편의 마지막을 하나님께 대한 찬송으로 끝맺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며”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온 땅의 하나님이시지마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하고 높이는 분으로서, 이 시인이 찬송 받아야 마땅할 하나님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온 땅의 하나님이시라는 놀라운 증거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서 당신의 그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나야 할 것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섬기는냐의 따라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런 분으로도 알고 저런 분으로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우리가 또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 하는 것은 그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올바로 믿는 태도가 이 세상의 구원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시인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하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찬송할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힘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찬송에 의해서 더 영화로워지시는 분이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일들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일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찬송하고 높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새 힘이 솟아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근심과 염려, 걱정과 많은 고생이 우리에게 있을 때에, 그때에 찬송은 우리로 하여금 그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만들어 주고 또 시련과 고난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송축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의지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주님을 찬송하고 그 이름을 송축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대한 의존을 버리고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할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의지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온 땅의 그 영광이 충만할찌어다 아멘 아멘.” 여기에서 ‘온 땅’ 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 담장을 넘어 열방과 만국위에 두루 두루 펼쳐져 그래서 모든 나라의 가득하게 될 때에 그 때에 그 영광이 충만한 것을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던 나라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믿음이 생겨나게 되면 세상이 바뀌게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사회주의 국가에서 기독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핍박을 하고 또 봉건적인 국가에서 기독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심하게 억압하고 핍박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상하게 이 복음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변하고 사회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질서들이 해체되는 것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을 물질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던 유물론사상을 포기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첩들을 두고 살던 이런 사회제도들이 타파된 것도 결국은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여성운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통해서 남자든 여자든 모두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이라는 사상이 전파되면서, 그러면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찬송만 부르고 예배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의 지평이 복음의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말씀에 의해 다스려지므로서 하나님의 이름은 거기에서 찬송을 받으시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아멘 아멘” 이라고 노래합니다. 히브리말로 ‘아멘’ 이라는 말은 반드시 그렇게 라는 뜻입니다. 혹은 굳건히 라는 뜻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노래한 후에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마쳤다라고 말합니다. 즉 이것은 두 개의 해석이 가능합니다. 72편 표제에는 솔로몬의 시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는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라고 되어 있으니 두 가지가 가능한데 하나는 다윗이 쓴 시를 솔로몬이 간직해왔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추측이 가능해지게 되고 실제로 솔로몬의 시라고 하는 이 말은 솔로몬에게 속한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그래서 그것은 자기가 직접 지었다는 것도 되고 혹은 그 시를 누가 썼던지 자기가 간직하고 있었다 하는 것도 됩니다. 그것이 한 가지 가능성이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아버지께로부터 늘 들은 구전적인 이야기를 솔로몬이 글로 옮긴 것이 그러니까 아버지께로부터 늘 배운 그 기도를 솔로몬이 자기심정에서 토해내어 글로 옮긴 것일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지간에 우리가 뭐가 맞다라고 절대적으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지마는 어쨌든 이 시에 다윗도 연관되고 솔로몬도 연관되었다 라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솔로몬의 시가 아니라 다윗의 시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며 “하나님이여 주의 판단력을 왕에게 주시고” 할 때 그것은 자신이고 “주의 의를 왕의 아들에게 주십시오” 이것은 솔로몬을 향한 기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저는 뭐 특별히 의견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심정적으로는 히브리 사람들이 구전문학에 워낙 능했던 사람들이니까 아버지가 들려준 기도를 토대로 솔로몬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기도를 자신의 기도로 평생 간직하며 살지 않았을까? 이렇게 추측을 해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렇게 해서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라는 내용을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이 72편의 이 내용은 사실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어느 특별한 왕들만이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가 아니라, 모든 시대의 왕들이 모든 시대의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올릴 기도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새의 아들 다윗의 기도가 필하다” 라고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이나 다윗이 직접 구전하거나 썼을 가능성도 있고, 후일에 이 시편을 편집하는 사람이 추가한 구절일수도 있습니다. 어쨌든지 이 기도가 어느 한시대의 국한된 기도가 아니라 대대로 물려가며 하나님 앞에 올려져야할, 왕과 나라와 그리고 백성들을 위한 기도라고 하는 사실에는 우리들이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주간 동안 이 72편을 살펴본바와 같이 우리들이 나라를 위해서, 통치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백성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72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