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73
목 차
경건한 자가 미끄러질 때(시 73:1-3) 1
고통이 없는 악인을 만날 때(시 73:4-5) 6
악인의 교만과 강포(시 73:6-7) 11
악인의 능욕과 압제(시 73:8-9) 16
하나님을 부인하는 악인들(시 73:10-11) 22
경건한 자의 낙담(1)(시 73:12) 27
경건한 자의 낙담(2)(시 73:13-14) 33
경건한 자의 낙담(3)(시 73:14) 39
경건한 자의 어리석은 후회(시 73:15) 46
성소에 들어갈 때(시 73:16-17) 51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은 것(시 73:17-19) 57
주께서 깨신 후에(시 73:20-21) 64
짐승 같은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시 73:22-23) 69
신실하신 하나님(시 73:23) 76
주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79
내 마음의 반석이신 하나님(시 73:26) 83
영원한 분깃이신 나의 하나님(시 73:26) 89
주를 멀리하는 자의 불행(시 73:27) 93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라(시 73:28) 99
시편73편 강해 1
시편73편 강해 1
시편73편 강해 1
시편73편 강해 1
시편73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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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73편 강해 1
시편73편 강해 1
경건한 자가 미끄러질 때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 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시 73:1-3)
본문해설
시편 150편 전체는 1권·2권·3권·4권·5권으로 되어있습니다. 시편 73편부터는 3권에 속합니다. 시를 쓸 때부터 그렇게 분류한 것은 아닙니다. 시가 써진 것이 모세부터니까 주전 1500년부터 시작해서 아마 주전 5-4세기경까지 써졌을 것으로 봅니다. 그 이후에 이것들을 하나하나 분류하고 편집한 결과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편집을 할 때 150편의 시편들을 내용상 분류했던 것 같습니다. 1권은 창세기에 어울리는 내용들을 모으고 2권은 출애굽기, 3권은 레위기, 이렇게 해서 민수기, 신명기에 비할 수 있는 시편을 모았던 것입니다. 1권을 보면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된 만물의 아름다움들이 주제를 이루고 있습니다. 2권에서는 해방, 광야생활, 그리고 하나님의 큰 능력으로 구원의 길을 여시는 광경이 주를 이룹니다. 3권에서는 어떤 주제를 이루고 있겠습니까? 레위기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제사, 성전, 하나님께 올라가는 예식 등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룹니다. 그리고 4권에서는 민수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4권은 불순종,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와 같은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마지막 5권은 신명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영광, 하나님의 권면 등의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시편 73편이 다루고 있는 것은 ‘신정론’입니다. ‘정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악이나 모순을 내버려두실까?’ 하는 문제입니다. 73편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신정론에 관한 중요한 언급을 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본문에서 시인은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인식, 둘째는 예상을 빗나간 상황을 보면서 실족할 뻔했던 자신의 경험, 그리고 셋째는 구체적으로 실족하게 된 동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하나님에 대한 인식
평소에 그가 가지고 있었던 확신은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시대를 살면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신앙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인생의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주어를 맨 앞에 놓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 얼마나 분명한가를 ‘참으로’라는 부사를 사용해서 더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언약신앙입니다. 그의 관심은 이스라엘에게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은 매우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고, 이러한 언약관계는 “하나님의 선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는 그런 종류의 선이다.”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셋째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계를 가지고 계시고 선을 행하시는 분이지만 그분은 공평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정결함으로부터 시작된다는 내면적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결한 자와 부정한 자를 하나님이 구별하셔서 그들을 다루시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확신, 이렇게 최소한 여섯 가지 정도를 1절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정도 되면 시인은 상당히 정확하게 하나님에 관한 지식, 특별히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시인이 충분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신앙을 가지고 일생을 살아 왔던 것 같습니다.
실족할 뻔했던 경험
어느 순간 이 사람이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되었습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라는 대목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실족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길을 걷다가 발걸음을 잘못 딛고 몸 전체가 쓰러지거나 벼랑에 떨어질 위기에 놓인 것을 실족이라고 합니다. 본문에 보면 완전히 실족한 것은 아니고 실족할 뻔했다고 합니다.
몸의 자세를 똑바로 하고 걸어 갈 때는 문제가 안 되지만 몸의 자세가 흐트러지면 큰 일이 생깁니다. 우리가 자세를 정확하게 하고 걸어갈 때는 걸음에 큰 힘이 들어간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못 딛고 쓰러지거나 넘어지면 중상을 입습니다. 큰 상처를 입거나 뇌진탕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엄청난 힘이 우리의 몸에 가격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걸어 갈 때는 큰 힘으로 걸어간다는 느낌이 안 들지만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계단에서 구르게 됩니다. 그러면 60-80㎏의 몸이 우리의 몸을 공격하는 것이 됩니다. 몸이 종잇장처럼 가볍다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계단을 헛디뎠을 때 60-80㎏되는 몸이 중력의 작용에 의해 강하게 우리를 쓰러뜨리거나 계단을 구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때 큰 힘이 작용을 합니다.
시인은 실족할 뻔했고 걸음이 거의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시편에는 미끄러질 뻔했다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미끄러진다는 것은 몇 가지 개념들을 보여줍니다. 우선 미끄러진다는 것은 안 좋은 곳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타락, 죄악, 환란, 시련 등을 이야기합니다. “미끄러져서 풍덩 빠지고 보니까 하나님의 복이더라.”, 혹은 “선으로 미끄러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선’, ‘하나님의 복’에는 미끄러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의지가 작용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이든, 사람의 의지이든 의지가 작용해야하기 때문에 미끄러진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미끄러진다는 것은 미끄러지는 것의 결과가 잘못된 것임을 보여주고 이것이 얼마나 신속하게 저항할 새 없이 일어나는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실족하게 된 동기
‘할뻔 하였으니’라고 했는데, 이것은 완전히 쓰러진 것은 아니지만 커다란 충격이 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라고 하는데 이 두 개가 거의 같은 말입니다. ‘오만하다’는 말은 시편 1편에 나오는 것처럼 ‘비웃는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오만하다’는 것은 교만함인데, 그 사상이 하나님을 부인하기 때문에 교만한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가 무슨 뜻이겠습니까?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하나님 없는 교만한 자의 형통을 투기하는 것입니다. ‘저 인간은 정말 샘이 난다. 저 인간은 왜 저렇게 잘 나갈까?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이 악하게 살아가는데 어떻게 저렇게 평안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때 미끄러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만 생각해보겠습니다. 침체에 빠지게 되면 기도를 해도 헤어 나올 수가 없고 마음을 스스로 새롭게 먹어도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악인에게 준 것 같은 형통을 주어도 헤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형통하지 않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악인이 저렇게 평안하고 오만한자가 잘 나갈 수 있는지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중요성
여기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지식의 중요성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에 대해서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있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신앙 전체가 흔들리는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새로운 지식을 부여받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시인이 실족할 뻔하고 걸음이 미끄러질 뻔한 것은 결국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와의 싸움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기독교신앙을 거절하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가 신정론 때문일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라면 책임을 져야하지 않는가?”라고 말하고, 어떤 철학자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지만, 만약에 신이 있다면 무슨 권리로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가? 자기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는 무슨 권리로 우리 개인의 삶에 이래라 저래라 의무를 부여할 수 있는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니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신은 죽었다. 신은 지구를 떠나라.”며 극단적으로 신을 부정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직하고 의롭고 완전하신 분이면서도 세상에 죄를 남겨두시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지만 하나님은 세상에 죄를 남겨두십니다. 때로는 악인이 형통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든지 하나님이 부도덕한 분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높으시고 도덕적이시며 하나님이 세상의 인간들을 얼마나 높이 대우해주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현존하는 악과 인간의 책임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없는 악인을 만날 때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시 73:4-5)
본문해설
경건한 시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자기가 생각하던 것과는 다른 현실들이 들어왔습니다.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악인의 형통함이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악인의 평안함이었습니다. 우리말로 한다면 ‘안녕’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악인이 분명한 자들이 평안하고 형통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저희들이 저렇게 평안하고 형통한 것 같지만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모두 자기의 죄 값을 치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마지막 죽음까지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시인은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라고 말합니다. 저희들이 죽을 때도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고통 없는 악인을 만날 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이 죽을 때가 되어서 힘이 모두 소진되어 죽는 것은 비참한 죽음입니다. 어느 의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죽을 나이가 된 사람에게 질병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의학적으로 아무 질병이 없이 기력이 다해서 죽는 것은 어느 순간 불현듯 찾아오는 게 아니라 아주 긴 시간이 걸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젊어서 녹용, 인삼으로 보약을 많이 지어먹은 사람들이 죽을 때 힘들게 죽는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죽을 나이가 되었고 기력은 남아있는데 심장쇼크로 죽는다든지 저녁에 인사하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죽었다든지 하는 일들은 오히려 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악인들이 그렇게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복된 죽음입니다. 그들은 모질게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러워 하다가 죽어야 전에 죄를 짓고 악을 행하면서도 평안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것일 텐데, 그리고 그렇게 되리라고 굳게 믿었는데 그 법이 통용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고난을 겪습니다. 특별히 의롭고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들은 수시로 고통을 당합니다. 그런데 악인에게는 그러한 고통이 없습니다. 그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주저앉을 정도로 낙심하게 만들었던 대목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세상과 구별된 채 경건한 환경 속에서 자랐던 시인에게는 도저히 용납하고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결국 주저앉아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까 ‘악인들이 형통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시인뿐만 아니라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종종 이렇게 풀리지 않는 모순들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부인하는데 앞장섰던 임마누엘 칸트 같은 사람도 결국은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겪는 악인의 형통함과 의인의 고통이라는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모순들을 극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 중 한 순간인 지상생애
시인은 어떤 생각이 잘못되었을까요? 제일 먼저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완전한 대가가 지상의 생애 안에서 모두 나타나야 한다고 보는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에 눈뜨면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하고 악하게 사는 것에 대한 귀결을 세상에서 받게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선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일들이 살아있는 지상생애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상생애라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인간을 바라보시는 영원 중 한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원하고 불멸하도록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고 인간의 육체는 필멸하게 되었습니다. 필멸하는 인간의 육체는 언젠가 부활의 영광을 덧입고 다시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 하나님의 생각 속에 인간창조의 대한 개념이 있을 때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구원받은 존재가 되어서 영생불사하게 되는 영원까지 볼 때, 인간이 유한한 몸을 입고 살아가는 것은 영원 중 한 시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본다면 이 시기 안에서 모든 일들이 다 갚아지고 이루어져야 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원한 심판, 영원한 하나님의 복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인은 대단히 좁은 시야를 가진 신앙인이었다고 보여집니다.
고통은 하나님의 징벌이 아님
시인은 악인들에게 “고통이 없고 고난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두 번째로 고통의 여부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여부, 혹은 징벌하시는 여부를 보여주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오류가 있었습니다.
악인에게 낙심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거둘 것이라”, 그러나 악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한 목표를 찾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수시로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악인이 악을 행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좌절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그렇게 부를 수 있겠지만 ‘좌절한다’, ‘낙심한다’는 것은 선한 일을 도모하다가 어려움을 만날 때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한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을 향해 살려고 하면 끊임없는 좌절과 낙심과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악인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악인은 파멸할지언정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난이 있고 고통이 있는 것 자체가 오히려 하나님이 선택한 자의 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난과 낙심, 좌절이 있다는 것은 선한목표를 찾아서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은 산자가 걸리는 것이지 죽은 자가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부패는 좋은 것에 기생하는 것이지 나쁜 것에 기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은 수시로 낙심하고 고통 하지만 악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타락한 세상의 필연적인 모순
세 번째로 타락한 세상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시인은 과소평가 했거나 잘 몰랐습니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인간은 부패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죄의 비참한 결과들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본질적으로 사단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을 보나 세계를 보나 영적으로 보나 하나님이 질서 있게 통치하는 것과는 모순된 것이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게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악인이 형통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고난이 없는 모순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타락하고 망가진 세상의 부조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고, 그는 유아기적인 판단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위에는 악하게 살면서도 고난이 없고, 고통 없는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악 된 세상을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다스리셔서 악과 악인의 평안이라는 모순된 현상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지혜로 다스리고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시인이 이러한 모순을 발견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과연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 하신다는 것과 저들이 잠시 형통한 것 같으나 사후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있어서 당신의 공의를 충족시키신다는 신정론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73편을 보듯이, 모순된 현실은 사람의 지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보다 높은 차원의 은혜의 세계, 하나님의 통치의 세계의 눈을 뜨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됩니다.
여전히 신비에 싸여있고, 우리가 해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육체의 생명과 영혼이 결탁되어있는 이 시간 속에서만 모든 문제들의 해결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기 때문에 모순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통치자로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경륜 속에서 정의와 공평에 맞게 이 세계를 통치하십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도 하나님의 정의를 피해갈 수 없고, 그분의 자비를 비껴갈 수 없도록 온전히 통치하십니다.
결론과 적용
믿음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다 해명할 수 없는 사실들 자체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고 믿음이며 바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사가 우리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서 모순처럼 보일 때가 바로 주님을 신실하게 의지하고 믿어야 할 시간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결국 사랑의 성향이고 의존의 성향입니다. 세상이 해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오히려 주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므로 하나님 한분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우리 인생의 처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고 공평하시다는 사실을 믿으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모순이란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지해야 할 분이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교만과 강포
“그러므로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
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시 73:6-7)
본문해설
시인은 계속해서 악인의 형통함이 어떠한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4절과 5절에서도 죽음과 고난에 관하여 악인의 형통함을 이야기 했듯이, 여기에서도 악인이 어떻게 형통한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먼저 그들의 형통함을 말하기 전에 그들의 마음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악인의 교만
가정 먼저, 교만입니다. “교만이 저희 목걸이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목걸이는 당시 부유한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장식품이지 가난한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장식품이 아니었습니다. 금붙이로 목걸이를 하고 다니면 “저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구나.”라는 것을 알리는 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교만의 표’라는 것입니다. 교만은 사람들을 향해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을 깔보거나 무시하는 일입니다. 그러한 태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지 않으려고 하는 무지, 혹은 의도적인 지식의 거부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들에게 자랑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낙심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자신은 교만하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뒷부분으로 가면 “아침마다 하나님이 나를 징책하신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교만해지고 높아지려고 하면 아침에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책망하시고 말씀을 묵상할 때 내 마음이 높아지는 것을 알라고 하시며 책망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깨뜨려지고 마음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책과 자기 깨어짐의 과정은 누구에게나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후에 하나님과의 평화와 은혜가 흘러들어온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나중 일이고, 깨어지고 책망을 받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교만이 저희의 목걸이가 된 것으로 인해 깊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악인의 강포
다음으로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라고 합니다. ‘강포’라는 말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지 않고 폭력과 억압으로 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저희의 옷이라고 표현합니다. 옷은 성경에서 수치를 가리고 언약백성으로서 자존감을 유지하게 하는 성도의 올바른 행실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강포가 저희의 옷이 되었다고 하니 그들은 본질적으로 언약백성의 삶을 저버린 사람들입니다. 수치스러워야하는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강포’라는 한 단어는 시인이 상정하고 있는 악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린 삶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인데, 그것을 무시한 채 얽매이지 않고 강포한 삶을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언약백성의 원리를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무법한 자의 삶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아노미아’(ἀνομία), ‘무법하다’라는 것은 율법, 사랑, 이 두 가지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적으로는 사랑을 버리고 외적인 삶으로는 율법의 기준을 버린 삶이 강포한 삶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손해를 입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율법과 상관없이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악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
그러면서도 악인은 계속해서 형통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희 눈이 솟아나며”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살이 쪘기 때문입니다. 아주 많이 살이 찌면 눈이 솟아납니다. 이것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비대하고 기름지고 살이 투실투실한 것은 부의 상징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배가 나온 것이 흉이 아니었습니다.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도 제가 직장 다닐 적에 만나면 항상 제 배를 만지면서 “얘야 너는 언제나 배가 나오냐?”고 하셨습니다. 요새는 배가 나왔는데 이제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안계십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고 외모를 화제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항상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나 외모 보다는 덕스러운 생활과 마음이 중요하다는 교육을 받았고 심지어 유행가도 그런 것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처럼 사기를 치거나 사람을 해롭게 해도 얼굴이 예쁘면 팬클럽이 생겨서 그 사람 용서해달라고 이성 없이 날뛰던 때는 없었습니다. 그때도 머리 벗어진 사람을 예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예민하게 보고 모욕을 준다든지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 때 배가 나온 것은 부유하다는 상징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그것을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배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당시에 배가 나온 사람은 극히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에 살이 쪘다는 것은 더더욱 흉이 될 수 없었습니다. 살이 쪄서 눈이 솟아나는 것은 부유함을 가리킵니다. 개기름이 흐르고 잘 먹어서 살이 찐 것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저희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지나며”라고 합니다. 악인이 ‘금년에는 이 정도 벌어야지.’ 생각했는데 한 해가 지나니까 자기가 벌려고 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을 번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아주 곤혹스러워합니다. 시인은 경건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실족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날 신실하다는 많은 기독교들이 이 수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하나님의 선하고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현실의 증거들이 항상 우리의 신앙을 격려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는 사건들을 보면서 그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근거를 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지한 일인지를 보게 됩니다.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신뢰하는 신앙
그러면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무엇이 되어야합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실제로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도덕적인 통치가 우리가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권선징악의 방식으로 뚜렷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시야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밖에는 보지 못하고, 때로는 그만큼도 보지도 못합니다. 시인이 악인의 형통을 보면서 괴로워할 때 악인이 형통하기 전에는 어떠했는지 형통한 후에 망하고 고통 받는 악인은 얼마나 되는지 조사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형통과 악의 일시적인 번영은 믿음을 시험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와 믿음이 얼마나 큰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달리 한 번에 모든 것을 보십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 형통한 시점보다 더 넓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심지어는 영원으로부터 영원까지 한 번에 사람들을 바라보시면서 당신의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살아야할지를 보여줍니다.
신앙은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없을 때조차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현실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그분을 깊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해명할 수 없는 현실이 하나님의 부재에 대한 명백한 증거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륜과 통치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크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중 모르는 것이 없어도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다 알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깊어지면 악인의 형통이나 악인의 행복이 신앙의 거침돌이 될 수 없습니다. 악인의 징벌과 선한 사람들의 형통함에서 나타나는 증거를 보면서 겨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동의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불행한 사람입니까?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주님을 깊이 신뢰하면서 의지하고 따라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내적으로 주님과 만나는 은혜의 감격,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는 종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이중의 인침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한 신뢰를 가지고 주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은혜가 떨어진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증거들을 수없이 발견하지만, 은혜가 충만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시는 확실한 증거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시는 것처럼 모든 성도들과 이 세상과 함께하시지만 그들이 주님을 모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아침에도 주님을 간절히 찾아야할 이유입니다.
악인의 능욕과 압제
“저희는 능욕하며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 가만히 말하며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는도다”(시 73:8-9)
악인의 능욕
본문은 하나님 없이 형통한 악인들의 악이 어떤 것인지를 앞 절에 이어 계속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저희는 능욕하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깔보고 모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가치판단의 기준이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지위고하, 물질의 많고 적음, 인정, 문화적인 관습의 차이, 심지어 종교 때문에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일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상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은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선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악인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보이는 사람 속에 나타난 형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멸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반 기독교적인 세력들이 사회에 많이 있습니다. 소위 ‘안티세력’이라 불리는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에 대해 한없는 모욕을 퍼붓고 구체적으로 대적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최선책은 한편으로는 우리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경건하게 사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을 매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최고의 대응입니다. 우리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두 손을 들어 축복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이것과 정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악인의 압제
두 번째로 “악하게 압제하여 말하며”라고 말합니다. 압제를 행하겠다고 위협하며 말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것을 “압제하여 말하며”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악을 가지고 위협하며 사람들을 누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의 또 다른 특징입니다.
악인의 공통된 특징은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것입니다. 악인에게서는 사람을 향한 사랑을 기대할 수 없고, 혹시나 악인에게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거나 인정하는 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수단으로써 그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행복에 이바지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사랑하는 것은 악인에게서 결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입니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을 바라보면서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악한 사람들의 특징을 기가 막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축복하고 그들이 잘 되기를 원하는 것, 그들이 행복할 때 자신도 행복하다는 마음을 갖는 것은 선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악인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자기중심적인 행복을 가지고 사람들의 효용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악인의 거만함
세 번째는 “거만히 말하며”라고 합니다. 또는 “높은 곳에서 말하며”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시편 1편에서 말하는 것처럼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은 사람을 뜻합니다. 높은데 앉아서 아래를 향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앉으실 자리를 가리킵니다. 모든 사람, 모든 세상의 일들을 자기 자신이 판단하고 가치를 매기는 종교적인 교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악인은 그러한 내면적인 특성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악한 행실 한두 가지 때문에 악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면 성도들도 악을 행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서 보는 악인에 대한 관점은 내면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사람됨을 보고, 밖으로 나오면서 그의 사람됨이 행위로 드러난 것을 관찰합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노아가 홍수를 앞두고 만든 배의 모양을 조선공학적으로 설명할 때 관점이 배안에서 배를 바라보는 관점이라고 평가를 합니다. 그래서 외관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오고 배의 규모와 길이, 넓이, 높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나오면서 관점이 바깥으로 이동합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악인’은 그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있다는 것에서 선한 사람과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사람,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않기로 선택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무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의 거부, 이것이 악인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그는 거칠 것이 없고, 높은데서 말하는 사람입니다.
악인의 대항함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는도다”라고 합니다. “저희 입은 하늘에 두고”, 히브리어 성경에는 “하늘을 대항하여”라고 나옵니다. “저희 입은 하늘을 대항하며 저희 혀는 땅을 두루 다니는도다”라고 할 때, “저희 입은 하늘을 대항하며”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 하나님께 대한 거부, 하나님께 대한 반항,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서 은근히 일어날 뿐 아니라 그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대적의 마음이 언뜻 언뜻 스쳐가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에 꽉 차서 그것이 언어를 통해 고백된 형태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의 심각성은 반대로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생각, 인상, 이런 것이 마음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스쳐지나가는 사람은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앎이 있고 그 뜻대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고백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입으로 주를 시인하면”이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것은 ‘호몰로게오(ὁμολογέω)’라는 단어인데 ‘고백’을 뜻합니다. 그 고백은 개인적으로 하는 고백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고백했다는 이유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까지 포함하여 누구든지 부끄러움이 없이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라고 하며 하나님의 존재를 무시하는 마음을 은근이 품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고백하고 그러한 고백에 대해 자기가 책임을 질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앙과 회의는 다릅니다. 회의는 믿으려고 하는데 잘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안 믿겠다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악한 것입니다.
악인의 사상
뿐만 아닙니다. “저희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라숀(לָשׁוֹן;)’이라는 단어인데 ‘혀’, 또는 ‘말’이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전자로 번역을 하면 그 사람이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악한 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언어’, 혹은 ‘말’로 번역을 한다면 이런 사람들의 사상이 두루두루 전파되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후자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뒤의 구절하고 어울립니다. ‘혀’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언어’라는 뜻과 관계가 있습니다. ‘라숀 이브리트’(לָשׁוֹן עִבְרִית)라고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11장에 보면 “온 땅에 구음이 하나이더니, 온 땅의 말이 하나이더니” 할 때도 ‘라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하나님 없이 형통한 악한 자가 자신의 전 존재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을 전파하고 그 사람이 보여준 행실과 말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두루두루 전파되어 그 영향력이 많은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사람의 의롭고 올바른 행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보다는 한 사람의 악하고 추악한 삶이 미치는 영향력이 훨씬 더 큽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젊은이들 중에는 개념이 없고 가치판단과 상관없이 막나가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런 혼란은 사회의 무질서에서 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아이들을 윤리적으로 교육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윤리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인데 이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서는 의무가 부과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가치관이 형성이 되어야만 의무에 대한 부담을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치 자체는 자신들의 풍요와 평안입니다. 거기에 이바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때 혼란들이 생겨납니다. 저는 정말 걱정스럽습니다. 현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공부를 열심히 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이 공부는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의미의 공부가 아닙니다. 교육을 통해 미래에 핸드폰을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어서 다른 나라에 팔아 돈을 많이 벌어서 우리나라가 풍족하도록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기도하면서 덜덜 떨고 박수치면서 교회가 시키는 대로 따라하는 것일 수 없습니다. 한사람이 신앙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렇게 살라고 할 때 그렇게 사는 것이 우리와 인류를 가장 행복하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에 대한 근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잘 믿어야 하고 그렇게 믿고 살아가야 할 당위성에 대해 사상적인 체계가 세워져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악인에게는 그런 기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만히 말하며 하늘을 대적하며 저희의 혀를 땅에 두루 다니며 말로 사상들을 전파하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악인들
“그러므로 그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도다“(시 73:10-11)
본문해설
본문에서 ‘그 백성’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그의 백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백성’이 앞에서 이야기한 악인들을 가리킨다기보다는 악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다수의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악인들의 삶을 통하여 언약백성들에게 실천적인 무신론이 광범위하게 유포된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인이 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언약백성들 안에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부인하며 살아가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들이 누룩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서 그런 삶의 태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부인함
“잔에 가득찬 물을 마셨다”고 되어 있는데 ‘잔’이라는 말이 히브리어 성경에는 안 나옵니다. “가득찬 물을 마셨다.”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많은 물을 마시는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입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적했고 그들의 말이 온 땅에 두루 다녀 전파될 정도였습니다. 얼마나 많이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고 다녔으면 목이 마를 정도가 되었겠습니까?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비유로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형통한 악인의 뒤를 따라서 사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것이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포될 때까지 얼마나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면서 떠들었을지 추측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인의 절제 없음을 보게 됩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절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에게는 절제가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욕망, 하고 싶은 말, 내뱉고 싶은 의사표현들, 밖으로 표출하고 싶은 행동들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것은 절제 없는 사람의 대표적인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무지
그러면서 그들이 하는 말은 주목할 만합니다.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지만 주님의 율법을 어기고 우리 마음대로 산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겠느냐?” 바로 이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악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무지, 혹은 하나님에 대한 바르지 못한 앎에 기초한 것입니다. 모든 선한 삶,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덕스러운 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기초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가 없어보여도 사실은 그 뿌리를 더듬어 가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관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아가는 행복 안에서 그것과 상관없어 보이는 모든 삶에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어찌 알랴?”고 말하는 이 사람들도 원래 이런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악인들은 악을 행하며 죄를 짓고,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형통을 위해 삶의 기준인 율법을 버렸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이 형통하고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할 의무의 짐들을 내려놓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개인적인 삶이란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노출되어 있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암시를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부인함
악인들은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도다”라고 합니다. 히브리어성경에 보면 “지극히 높으신 자와 함께하는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 “지극히 높으신 자 안에 있는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 혹은 “지극히 높으신 자에 의한 지식이 어디에 있느냐?”라고 나오는데 비슷한 말들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라는 말은 ‘엘욘’(@/yl][,)이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엘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무한한 존재의 질적인 차이를 나타내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지존자, 지극히 높으신 자’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아주 교묘한 말재간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지극히 높으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이 차이가 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 속에 계실 수 있는 분이 아니라 본질에 있어서 인간을 초월하시는 아주 탁월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악인들은 ‘엘욘’이라는 말을 장소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주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실 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불완전하고 능력이 모자라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 땅의 일을 모르신다는 사상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에 하나하나 간섭하셔서 악인에게는 형벌을 내리고 의로운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시는 실질적인 도덕적 통치를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역사 속에서 항상 이런 사상들이 이단의 모습으로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칼빈 시대에 ‘오시안더’(Andreas Osiander)라는 사람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물질세계가 하나님이라고 믿었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삶에 개입하고 간섭하는 분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루터 시대에 ‘소키누스’(Socinus, Faustus)라는 사람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에 의해서 기계적으로 만들어졌고 그 법칙에 따라 움직일 뿐, 하나님은 인간 사이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사상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사상들의 유혹은 항상 있어왔습니다. 18세기에는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 안에서 일어나는 법칙과 하나님이 세상에 간섭하시는 것 사이에 어떻게 조화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사람들이 이 세상은 기계론적인 우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종합해서 ‘이신론’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법칙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높은 곳에 초월적으로 계시고 도덕과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세상에 있는 것들을 움직이는데 사람들이 도덕을 올바로 지키고 살지 않을 때 하나님이 개입하고 간섭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끼리 그 문제들을 해결하며 살도록 세계를 경륜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언제나 이런 사람들이 있었고 이러한 사상은 항상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을 향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만큼 인간이 세계와 역사의 주최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을 어른이라고 인정은 하지만 실제 권한은 없는 늙은이나 허수아비 같은 입헌군주국의 의례적인 왕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시는데 과연 그분이 멀리 떨어진 낮고 낮은 땅에 관한 일을 아실 수 있겠냐는 고백을 낳았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악인들에게는 커다란 격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러저런 악을 행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알 수도 없거니와 혹시 아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겠느냐?”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앙의 중요성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신앙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에 대한 신앙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의 신앙의 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우리가 가져야할 자세는 이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일어나고,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는 것 같은 모순이 일어나지만 하나님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삶 안에 계시며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명할 수 있을 때나 해명할 수 없을 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거룩한 의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리면 하나님은 정확한 저울로 인간을 달아보시고 통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이 관점을 이생뿐 아니라 영원까지 확장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순간의 이익과 번영보다는 지극히 높으신 그분의 의지를 따라서 사는 신앙생활이 우리의 가장 큰 기업이라고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홀로 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사람들에게 밟히는 자 같아도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경건한 자의 낙담(1)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시 73:12)
본문해설
히브리어 성경이나 헬라어 성경에서 ‘볼지어다’라는 간투사가 도입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힌네’(hNEhi)라고 하는데, 이것은 괄목할만한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도입할 때 사용되는 특별한 간투사입니다. 시인이 ‘볼지어다’, ‘힌네’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뒤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중대한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렇게 자주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볼지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니”와 같은 메시아의 탄생에 관한 예언들에 사용됩니다.
경건한 자의 낙담
그러면 괄목할 만한 사실이 무엇일까요?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이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복수로 나옵니다. “이들은 악인들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뒤에 나옵니다. “저희는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 하도다”, ‘항상’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영원’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그들의 평안함이 얼마나 장구한지를 보여줍니다. 아마 잠깐 동안 평안하고 그 다음에 치열한 고통이 이어졌다면 경건한 시인이 이렇게 낙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악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사람들을 마음대로 압제하고 학대하는 포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잘못된 악행의 뿌리에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무지와 하나님을 부인하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쓰다가 연약해서 한순간 악에 떨어져 범죄한 사람들이 아니라 본래부터 뿌리까지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뼛속까지 악이 깊이 배어서 가책도 없이 마음속에 있는 악을 삶으로 배설하듯이 쏟아내는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사람들이 내적으로 평안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밖으로는 형통해서 재물이 점점 늘어납니다. 여기에서 경건한 시인은 깊이 낙담합니다.
교회 안에 갇혀있는 경건의 나약함
이것을 보면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 갇혀있는 것, 성전 안에 갇혀있는 경건이라는 것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를 봅니다. 시인은 처음부터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매일매일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인생은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믿었고, 하나님이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은 징벌하신다는 간단한 신앙의 공식만을 붙들고 살아왔습니다. 바깥 세상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포로시대의 지도자였던 에스라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에스라서를 한 번 보십시오. 9장에서 누군가가 에스라에게 소식을 전해줍니다.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을 했는데, 그들 중에 악이 만연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지 70년이 지난 때 귀환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포로귀환에 참여한 사람들은 강제적으로 차출된 사람들이 아니라 자원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70년 동안 살아왔던 삶의 본거지를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보지도 못했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미주거상태의 넓은 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이민족들이 자리를 차지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올라가면 많은 박해가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어떻게 땅을 찾을 것이며, 무슨 일을 해서 밥을 벌어먹고 살 것인지 많은 현실적인 난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올라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느헤미야서에 보면 “하나님의 감동을 입은 사람들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에스라에게 들려온 소문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죄악이 백성들 가운데 창궐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어기고 이방여자와 혼인하여 첩을 얻는 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백 가운데 만연해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에스라는 처음 듣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올라가서 문에 엎드려 하나님 앞에 울며 기도합니다. 유명한 에스라의 각성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지도자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기 위해 헌신했기 때문에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몰랐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도자로서 매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성전과 접촉되어있고 한편으로는 세속의 정신에 물들게 하는 당시의 현실을 이해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감화를 받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하는 일들은 너무 훌륭한 것이고 이것 없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세상을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깨닫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경건’이라는 것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했던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함
또 한 가지 지적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특별히 지도자는 한편으로는 교회를 잘 알고, 한편으로는 인간을 잘 알아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교리와 성경의 진리를 가르쳐서 올바른 삶을 살도록 내외적인 삶에서 격려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과 지도자들은 비둘기처럼 순결할 뿐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악과 사상적으로 교묘하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들을 집단으로 악한 길로 데려가고 있는 시대의 정신을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교회와 인간의 내면의 세계, 정확하게 말하면 용서받은 죄인들의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고, 한편으로는 세상의 정신을 분명하게 이해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무비판적으로 세상 속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고 있는 정신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사람들이 어떻게 악에 빠지게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일주일 동안 그런 세상에서 살다오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전 세계 최대의 마약 소비국이 미국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남미에서 생산된 어마어마한 양의 마약이 미국으로 들어와 유통이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약물을 복용합니다. 미국뿐이 아닙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이 약물에 오염되어있고 호주도 예외가 아닙니다. 여러 해 전, 호주의 집회에 갔을 때 공원을 산책하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쇠로 만든 박스가 있고 그 위에 안내문이 붙어있었습니다. “주사기를 사용한 후에는 아무데다 버리지 마시고 이 통에 넣어주십시오.” 아이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재사용해서 혈액으로 인한 여러 가지 감염을 막기 위해 주사기 수거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엄청난 마약 소비국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역사를 보면 미국에 마약이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한 시점이 있었습니다. 90년대 중반에 헉슬리라는 사상가가 나타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약물을 복용해서 행복과 희열을 느끼는 것이 사상적으로 정당하다는 이데올로기를 많은 젊은이들에게 전파합니다. 사상적으로 동의를 하고 여기에서 힘을 얻은 젊은이들이 마약을 하기 시작한 것이 미국에 약물이 확산되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 사람 말에 의하면 “이것이 왜 나쁜가? 이미 선과 악에 대한 가치기준이 다 사라졌고 남은 것은 인간뿐인데 이것을 통해 행복과 환희를 느낄 수 있다면 무슨 근거로 그것이 나쁘다고 막을 수 있는가?”라며 개인적인 환상주의와 개인적인 쾌락주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실제로 그 사람은 약물중독 상태에서 생을 살았고 자기가 죽을 때는 죽음의 괴로움을 맛보지 않기 위해 죽기 직전에 약물을 투여해달라는 유언까지 남기게 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매우 중요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둘기 같은 순결함과 함께 뱀 같은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점에서 에스라는 성경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지만 자신의 시대에 대해서는 모르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마 자신의 시대를 정확히 알았더라면 말씀의 지식이 풍부했던 에스라는 백성들의 부도덕과 타락이 만연하기 전에 예방할 수 있는 방책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빛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는 것과 함께 세상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세상을 생각할 수 있어야합니다. 정확하게 세상의 현실을 보고, 현실 뒤에 자리 잡고 있는 사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 사상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 비판하고, 그 사상을 따라 사는 삶 보다 성경의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 훨씬 행복하다는 것을 자신의 실존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시인은 낮은 수준의 경건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도덕적인 부패 때문에 낮은 수준의 경건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 세상 사람들의 번영과 형통, 하나님 없는 평안과 경건한 사람들이 얻는 평안을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현저히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한 번 크게 넘어지게 됩니다. 저는 이런 사람들을 교회의 신앙적인 분위기에 길들여진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람들의 한계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종종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건한 사람인데 사업을 하거나 세상을 살아가거나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아주 세속적인 사람들을 봅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신앙을 찾기는 하는데 뱀 같은 지혜가 부족해서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엊그제 전화가 왔습니다. 교인들이 아파트를 전도하고 나서 차량을 뒤로 빼다가 부딪힌 모양이었습니다. 흠집이 살짝 났고 가격이 많이 나올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못 봤기 때문에 그냥 가도되지만 뒤에다 내가 잘못했다고 써놓고 왔는데, 이 사람한테 연락이 오면 돈이 얼마나 들지 걱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그 진리를 따라 행동하겠다는 희생의 소명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낙태하지 맙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생명을 살해하는 것입니다.”라는 명제를 부르짖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은 낙태하지 않기 위해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하는데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소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정죄하듯이 “너 그렇게 하지 말라.”라고만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경건이 아닙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해주시는 것입니다. 남에게 안 주시는 많은 것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경건한 자의 낙담(2)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 73:13-14)
본문해설
사람들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며 실제로 그 마음을 자신의 삶으로 쏟아놓으면서 함부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심적으로 고통을 받지도 않았고 평안하고 점점 더 부유하게 되어 재물을 누리고 살아갔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보며 낙담했습니다.
시인의 경건생활
시인은 ‘그러면 나는 어떠한가?’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게 됩니다. 시인은 ‘우리가 무엇을 행한들 하나님이 알기나 하겠는가?’ 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를 하든, 제사를 드리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든 이것이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하거나 그릇된 삶을 살 때, 하나님 앞에 서면 그릇되고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 바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이전에 행했던 것들을 보여주시면서 “보아라. 이것이 너의 마음이니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게 됩니까? “제가 잘못했습니다. 내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되지.” 회개하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마음을 깨끗이 씻는 것입니다.
‘손을 씻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손’은 행실을 만들어 내는 도구를 나타내는 말로 제유법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곡식을 심거나 일 년 동안 수고를 해서 어떤 결과를 남기는 모든 삶을 가리켜서 ‘손의 수고’라고 말합니다. 밭에서 농작물을 수확했으면 손만 수고했겠습니까? 발도 수고했을 것 아닙니까? 발로 갔으니까 손으로 김도 매고 씨도 뿌리고 열매도 딸 수 있었을 것 아닙니까? 눈이 보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손의 수고’, 혹은 ‘손의 열매’라고 말합니다. 온갖 재료를 사용해서 그 재료가 궁극적으로 어떤 사물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우리 몸 전체가 참여는 작업이지만 마지막으로 빚어져 나오게 만드는 것은 손입니다.
도기그릇 같은 것이 대표적입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기를 만들 때 녹로에 진흙덩이를 올려놓고 손으로 열심히 빚었습니다. 밑에 나무로 된 원반이 있는데 그것을 발로 계속 차면 녹로가 계속 돌아갑니다. 도기는 손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손으로 빚으면 마지막에 그릇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사유가 종합되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손’이라고 하면 ‘수많은 물건을 낳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손’이 여성형으로 쓰입니다. 손이 수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마치 새끼를 낳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칼’도 여성명사입니다. 칼로 떡을 썰으면 떡이 새끼를 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 개념으로 여기에서 ‘손을 씻었다’는 것은 자기의 외적인 행실을 정결하게 하였다는 뜻입니다.
경건한 자의 낙담
시인은 ‘내가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외적인 행실을 정결하게 하면서 살았는데 정말 헛된 것이구나.’ 이런 낙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신데 왜 악을 행하실까? 왜 악을 허용하실까? 하나님은 정의로우시고 살아계신 분이신데 만약 하나님이 있다면 왜 이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할까?” 이런 것들을 우리는 신정론이라고 부릅니다. ‘신정론’은 영어로 ‘theodicy’라고 하는데 ‘theo’, ‘쎄오’(θεός)는 헬라어로 ‘하나님’을 가리키고, ‘dicy’는 ‘디케’(δίκη), ‘정의’라는 뜻입니다. 희랍신화에서 ‘디케’는 정의의 신입니다. ‘신정론(theodicy)’이란 하나님과 정의가 합쳐진 말입니다. 우리말로 쓸 때는 ‘신정론(神正論)’에 ‘바를 정’(正)자를 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세상은 정의롭지 못한가의 문제입니다. 시인은 신정론의 문제에 빠진 것입니다.
시인의 신앙의 한계
시인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 마음이 정결한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맞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 특별히 언약백성들을 사랑하시지만 그들 중에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복을 주십니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서 팔복을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팔복 중에서 첫 번째 복은 “천국이 저희의 것임이요”입니다. 이 복은 가장 포괄적인 복이지만 포괄적인 복중 가장 중심에 있는 복은 바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요.”입니다.
시인의 문제는 이 복을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의미로 해석한데 있습니다. 악한 자들을 보니까 너무 편안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평강을 누리고 있는지도 관찰한 것으로 보아 시인의 복에 대한 관념은 단지 물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신앙에는 결함이 있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누리는 평안이 모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까? 오히려 성경은 “마음으로 평안하다 평안하다 걱정할 것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악인의 특징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도 그러합니다. 부자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엄청난 곡식을 추수했는데 그것을 넣고 보관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창고를 짓기로 한 후에 “내 영혼아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돼지의 평안과 다를 바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행복한 짐승이 되기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세상 사람들을 보니 신앙이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 훼방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복을 받는 것처럼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신정론의 문제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마음을 정히 하고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헛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비었다, 공허하다,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올바르게 살려고 애를 쓰면서 끊임없이 욕망과 싸우고 노력했는데 이것이 다 공허한 것이구나.’라는 생각에 빠진 것입니다. ‘공허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 ‘가야할 목적이 없는 것이구나.’라는 깊은 낙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의 신앙의 깊은 한계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면 시인은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수준밖에 안되었던 것입니다.
두 가지 복
성경에는 대표적인 복이 두 가지가 등장합니다. 히브리어로 ‘아쉐르’(rve,a)라는 복과 ‘베라카’(hk;r;B)라는 복입니다. 이 두 가지 복은 칼로 자르듯이 나누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분은 됩니다. 아쉐르의 복은 오직 하나님의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복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고난과 시련이 다가올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얼마나 긍휼히 여기시는지가 마음에 밀려오는 것입니다. 감동을 느끼면서 어두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디로 가야될지 알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큰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성경을 폈습니다. 늘 읽던 성경말씀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강하게 다가오면서 내가 왜 이렇게 시험에 들고 미끄러졌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회개하게 하십니다. 그러고 마음에 평안이 밀려옵니다. 낙심이 되고 힘이 없었는데 교회에 와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확신을 주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받을 수 없는 복입니다. 후에는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받을 수 없습니다. 죽으면서도 조용히 하늘나라의 영광을 묵상하면서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복락을 사모하며 눈을 감습니다. 이런 것들은 성도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복, 하늘의 자원들입니다.
아쉐르의 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속주되신 아버지로서 주시는 복이라면, 베라카의 복은 창조주로서 인간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속주이신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과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서 주시는 두 가지 복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가 일반섭리의 복이고 또 하나가 영적인 복입니다. 이런 것들을 함께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시인의 복에 대한 오해
시인은 복을 일원론적으로 보았습니다. ‘악인은 저렇게 악을 행하면서도 마음이 평안한데 나는 마음이 평안하지 않다. 저 인간은 돈을 많이 벌고 재물이 점점 늘어나는데 나는 가난하게 산다. 저 사람은 복을 많이 받은 것이고 나는 복을 적게 받은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복을 외적이고 일반적인 복, 하나로 통틀어서 성도에게는 그것을 더 많이 주실 것이고 성도가 아닌 악한 자들에게는 그것을 조금 주시거나 주신 것도 박탈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개념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아주 많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말합니다. “실로 헛되도다”, “아, 공허하고 아무 목적이 없는 것이로구나.” 이런 뜻입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회개해서 깨끗하게 하고 자신의 손의 행실 중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을 거두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실을 하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이 결국은 목적이 없는 것이라는 허무한 마음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저는 시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을 씻어 정결하게 하고 손을 씻어 깨끗하게 하였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품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을 하면서 살 때, 목적하였던 바가 무엇인가? 그것의 마지막 결국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가?” 이 사람은 그것이 복이 되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의 관점에서 비춰보면 허망한 세속적 신앙을 가진 것입니다. 경건한 모습은 있었지만 세상에서 복을 바라보는 관점과 동일한 관점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수단과 방법으로 그 복을 누려보려고 하지만 시인은 하나님을 이용해서 그 복을 누려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시인은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성전주위를 맴돌면서 여전히 자기를 중심으로 삼고 하나님을 주변에 두며 살아가는 신앙을 보여준 것입니다.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
그런 신앙을 가지고는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시인이 자신의 경건한 삶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게 된 심정적인 깊은 확신과 변화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의문이 생깁니다.
경건한 자의 낙담(3)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시 73:14)
본문해설
지금 시인은 낙담하고 있습니다. 시인을 낙담하게 만든 첫 번째 이유는 악인의 번영이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과 번영,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마음의 평안함과 번영이었습니다. 두 번째 낙담의 요인은 “내가 내 마음을 정히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라며 자신의 경건한 도덕생활에 대해 회의를 느낀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앞에 있는 두 가지 낙담을 결합한 것과 같은 묘사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시기함
“우리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라는 구절에서 반문하고 싶습니다. 자신이 재앙을 당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평 없이 잘 살다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고등학교 때 자기보다 공부도 훨씬 못했고 얼굴도 못생겼었는데 좋은 신랑을 만나서 외제 승용차를 타고 기사를 거느리며 모임장소에 나온 것입니다. 그때 어떻겠습니까? 갑자기 강한 박탈감이 느껴지고 자신의 남편은 눈에 안차고 자기만 엄청나게 고생하는 것 같은 슬픈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재앙은 무슨 재앙입니까? 재앙을 만났다면 죽든지 어디가 부러지든지 무슨 일이 생겼을 텐데 그러면 어떻게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며 투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사랑”의 문제와 관련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하면서 시종일관 이야기했던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입니다. 사람이 투기하지 않으며 산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불가능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기를 비교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한 대상을 놓고 여러 사람이 같은 목적을 추구할 때 일어나는 갈등을 투기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라고 할 때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너희가 나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느냐?”라는 뜻으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하나님도 인간을 바라보고 우상도 인간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 균열이 생기면서 하나님이 질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투기한다’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하기위해 당신을 낮추어 인간의 눈높이에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것을 ‘아콤모다치오’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가장 쉽게 설복되고 가슴에 분명하게 다가옵니다.
한 남자를 두 여자가 좋아하거나 한 여자를 두 남자가 좋아한다고 생각해봅시다. 둘 사이에 흥정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이용하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다른 모든 것은 다 필요 없고 오직 한 사람이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실현 불가능하면 결국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특성입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절대적인 성격의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사람에게 사랑을 받을 때, 심지어 부모에게 자식이 사랑을 받을 때도 큰아이를 엄마가 예뻐하면 작은아이는 ‘엄마는 나만 미워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아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큰아이를 약간 더 사랑한 것뿐입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를 예뻐하면 ‘아빠는 나만 미워해.’라고 생각합니다.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사랑해도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아무리 많이 사랑해주셔도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분할하여 사랑하신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만 사랑하신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아가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투기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염두에 두고 보면 “재앙을 당하며”라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박탈감에서 나오는 상대적인 표현이지 진실은 아닙니다. 영혼의 시선이 하나님 한분께 고정되어 있는 것에서 이탈하기 시작하면, 생각도 미끄러지고 감정도 미끄러지고 의지도 미끄러져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이것은 간이 부은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하나님이 기껏 보호해주시고 여태까지 인도해 주셨더니 “종일 재앙을 당하며”라고 합니다.
여기서 충격적인 대조를 하고 싶습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진짜 재앙이 일어났습니다. 완전히 싹 쓸어버린 것입니다. 그때 그는 뭐라고 했습니까?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재앙을 당한 사람이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님의 자비는 아침마다 새롭다.”라며 찬송을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도시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주의 인자는 끝이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는 무한합니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롭습니다.”라고 감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이 보호해주시고 돌봐주셨는데도 “나는 재앙만 당합니다. 하나님은 왜 나만 미워하십니까?”라고 합니다. 이것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신앙의 문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한국 교회의 교인들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전 세계의 교인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누림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누림의 수단과 목적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하나님 이외에 사물들이 존재합니다. 세상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정확하게 둘로 나뉩니다. ‘레스 우텐디’(res utendi)라는 사용해야할 사물들과 ‘레스 프루엔디’(res fruendi)인 우리가 누리고 향유해야 할 사물들로 나뉘는 것입니다. 사용해야 하는 사물들의 목적은 그것을 이용해서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함에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계단을 걷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무릎에는 조금 무리가 가지만 계단을 만나면 “계단아 반갑다.” 하면서 올라가라고 합니다. 엊그제도 학교에서 7층까지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올라갔습니다. 어떤 사람이 7층으로 올라가는데 계단을 예쁘게 치장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앉아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지나쳐 올라갈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물질, 명예, 건강, 아름다움, 사랑하는 친구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이 모든 것들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레스 우텐디’, 사용해야 할 사물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궁극적으로 도달하게 하고자 하시는 곳에 가는데 사물들이 이바지해야 인생에 진정한 도움이 됩니다. 만약에 그것 자체와 사랑에 빠지고 거기에 매몰되면, 시련과 어려움이 왔을 때 시인처럼 하나님께 자신은 버림받았다는 반감을 경험하게 됩니다. 뿌리째 흔들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사물, 존재는 ‘레스’라고 합니다. 하나님 한분만이 누려야 할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왜 날 사랑해?”라고 물을 때 “너희 아버지가 돈이 많잖아.”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사기꾼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물질은 구별이 되는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에 “사람도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점차 깊어지면서 자신의 의견을 바꿉니다. 사람도 누림의 대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누림의 종류를 다시 나눕니다. 인간적인 사랑에 빠져서 누리는 것 말고 아가페의 사랑 안에서 성도들, 사랑하는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포함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그 안에 형제들 외에 누가 있습니까? 사람이 형제를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이 아니면 누가 계십니까?” 그는 인간의 영혼과 인간을 영적으로 진정으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요한1서와 같은 구절을 가지고 논증합니다. 이것이 맞습니다. 우리의 사귐과 교제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돕고,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소외되고 고통 받아 도움과 섬김이 필요한 지체들과 이웃의 얼굴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런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효과입니다.
징계,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
시인은 “나는 종일 재앙을 당하며”라고 자신도 감당 할 수 없는 말을 쏟아 놓고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이탈되면 하수도처럼 할 말 못할 말이 마구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는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사실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아침마다’는 복수이고 ‘징책’은 단수이므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을 하고 싶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침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예레미야 선지자도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와 자비를 경험했을 것이고, 이 시인도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은 항상 혼내시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살아서 되겠니? 똑바로 살아라. 너는 행동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마음이 순수하지 않구나.”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비춰줍니다. 히브리서 4장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이 드러나 보이게 만들어 줍니다. 말씀 속에서 시인은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 야단을 맞는데 그 징책 언제나 동일했습니다. 이것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시인이 낙담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시인은 근본적으로 복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복은 사람들이 중심이 됩니다. 그 사람이 부유하게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고 남들을 지배하고 약탈해서라도 자기가 쓸 자원을 모을 수 있다면 그것이 이 세상에서 행복이고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복은 ‘에쉐르’(rve,a)의 복입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관계의 복입니다.
악인이 엉망으로 살고 마음이 불결해도 하나님이 야단치지 않으신다는 것은 최고의 재앙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타락하고 마음에 하나님두기를 싫어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형벌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진노의 표현은 내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은 하나님이 그를 폐기하신 증거입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를 좋은 대들보로 쓰려고 한다면 끊임없이 가지를 잘라주고 소독할 것입니다. 그러나 땔감으로나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내버려둘 것입니다. 어차피 톱으로 켜서 토막 내 불속에 던져서 불을 일으키다가 타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시인이 아침마다 징책을 본 것은 그가 하나님이 버린 사생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친자녀라는 증거인 것입니다. 인간은 혼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책망 받지 않고 올바르게 될 가능성이 전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기 위한 목적으로서 때리고 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도 자신의 책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 중 하나가 징계이다.”라고 했습니다. 징계를 받는 것 자체가 하나님 자녀의 큰 특권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이 “아침마다 징책을 보았도다”라고 고백했던 것은 경건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깨닫고 아픔을 느끼는 모든 기쁨,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신앙의 즐거움들이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형통을 보고 투기하기 시작하니까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받을 복은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복이 아닙니다. 정말 본질적인 복은 이 세상이 알 수도 없고, 이 세상이 흉내 낼 수도 없고, 이 세상이 줄 수 없음은 물론, 이 세상이 투기할 수도 없는 종류의 복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한 자의 어리석은 후회
“내가 만일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이렇게 말하리라 하였더면
주의 아들들의 시대를 대하여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시 73:15)
본문해설
바로 앞 절에서 시인은 악인이 세상에서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과 비교하며 깊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악인은 악을 행하면서도 형통한데 자신은 매일 하나님 앞에 책망을 받으면서도 형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깊은 혼란을 느끼면서 생각합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하나님의 말씀에 책망을 받던 때, 언젠가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살걸.’ 하며 후회를 하였던 것입니다. 시인이 생각할 때 이것은 공평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강하고 고난과 재앙도 없고 죽을 때도 고통이 없는 형통한 삶을 보면서 시인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음에 회의가 들 때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했고 매일 하나님께 징책을 받았다.”라고 말하는데 그가 어떤 식으로 징책을 받았습니까? 매일 아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데 그 말씀이 자기를 아주 심하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용서를 빌고 손을 씻고 자신의 행동을 주의하는 삶을 계속 살아온 것입니다. 혼자 그렇게 살아왔을 때는 비교할 대상이 없었는데 악인들의 형통한 삶을 보면서 비교의식이 생기자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 악인이 이렇게 형통한 줄 알았다면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께 책망 받으면서 살지 말고 차라리 악인들처럼 살아갈걸.’ 그렇게 후회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궤휼’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의 잘못된 방법을 가리킵니다. ‘잘못된 방법을 행하면서 편하면서 살걸. 왜 그랬을까?’ 깊은 회의에 잠기게 된 것입니다.
시험이 우리를 공격할 때 우리의 팔, 다리나 가슴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우리의 정신을 공격합니다. 지성을 공격합니다. 이치가 이렇습니다. 비록 많은 지식이 없어도 성경의 진리를 꽉 붙들고 불타는 마음으로 그것을 믿으며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괜찮습니다. 잘 알지 못하지만 기독교의 기본 진리에 깊이 감동을 받으면서 성령 충만하게 살아가면 유혹이 오거나 도전이 와도 회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로 가슴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그런 것을 방어할 능력이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항상 뜨겁고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때도 있고, 덜 그런 때도 있고, 더 그런 때고 있고, 계속 변합니다. 지식 없이 열정만 있으면 바람이 불 때 날아갑니다. 바람이 아무 때나 부는 게 아니라 신앙이 떨어지고 성령의 은혜가 식었을 때 붑니다.
신앙의 지식이 견고하고 체계적인 것 자체가 견고함을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인은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썼지만 신앙의 중요한 도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 세상에는 악이 있지만 하나님은 악의 저자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라는 신정론에 대한 정리된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이 불어왔던 것입니다.
만약에 시인이 하나님 사랑하고 뜨거운 신앙을 가지고 있던 때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더라면 시험에 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 안에서 살려고 하는 나는 왜 하나님이 매일 야단을 치시고,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형통하고 번영하고 심지어 죽는 때도 고통 없이 평안한가?’를 궁금하게 생각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하나님이 나만 혼내시는구나.’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이 뜨겁게 살아있으면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도 모르는 것은 내버려두고 확실히 알 수 있는 것, ‘하나님이 날 사랑하시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행복하고 기쁘다.’는 마음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식었습니다. 그러면서 악인의 형통함과 자신이 하나님께 매일 꾸지람을 듣는 것, 두 가지가 대비되어 다가왔습니다. 이것이 시인의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이 아니라 회의입니다. 불신앙은 지성과 의지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고 확신하고, 믿어야할 증거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그것을 안 믿겠다고 거부하는 의지입니다. 그래서 불신앙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나 회의는 다릅니다. 회의는 지성 안에서 확실하게 정리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인가 저것인가 의지가 방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시인은 안 믿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여태까지 믿어왔던 것에 대해 지성이 정리가 되지 않아 한 곳으로 향하던 의지가 어느 순간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가 불러 일으켜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회의입니다. 회의는 불신앙과 같이 적극적인 죄는 아니지만 소극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죄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나? 회의가 드는데 어떻게 하나? 내가 안 믿겠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증거들이 나타나면서 내 마음에 회의가 생기는데 어떻게 하나.’
믿음과 지식의 중요성
시인은 두 가지 점에서 잘못하고 있었습니다. 첫째로 비록 지식이 충분하지 않아도 열렬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믿는 의지의 작용 안에서는 이런 회의가 들지 않습니다. 시인은 그러한 신앙의 활기를 유지하지 않았습니다. 존 오웬 목사는 시험에 대해서 정의하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상태에 있는 모든 것이 시험이다.”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뭐라고 증거 합니까?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 세상 어떤 인간과 피조물도 단연코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뜨겁게 받아들이고 믿는 곳에는 회의가 침투할 수 없습니다. 마음에 믿음의 끈이 상당히 느슨해졌을 때 그런 회의가 스며들어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소극적인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어떤 경우든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의무는 믿었으면 자기가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를 부지런히 탐구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안셀무스’(Anselmus, Cantaberiensis)라는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고 난 후에는 더 이상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믿고 나서도 왜 그것이 진리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바 내용의 확실함을 인식하고 믿는 내용을 친숙하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입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내용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믿었다고 하더라도 믿은 내용이 왜 진리인지를 알려고 할 때, 바로 거기에서 지적인 친밀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사실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감동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야할 아주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 점에서 시인은 그 의무를 게을리 한 것입니다. 시인은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주님께 붙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잘 훈련된 지성으로 하나님께 붙어있는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앙이 식고 어느 한 순간 바람이 ‘훅’ 하고 불 때 날아가 버리고 회의주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의 방황을 보면서 우리가 확고히 해야 할 바는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고민하며 깨닫게 된 것을 마음을 다해 숙고하고, 왜 그것을 받아들였는지 아는 지식 안에서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비록 많은 지식이 없으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기본적인 내용들을 ‘아멘’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게 하는 것이 ‘은혜’라면, 내가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를 깊이 숙고하며 신앙의 지적인 친밀성을 더하는 작업은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영적성장을 이야기 할 때, “저를 아는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갈 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은혜를 먼저 말합니다. 더욱 오늘날과 같이 과학적인 사고가 팽배해 있는 때는 신앙의 신비를 터득하지 않고는 올곧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밀려오는 세상의 사조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괴로워하면서 온전한 지식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산 같은 지식 물 같은 마음”이면 참 좋겠습니다. 지식은 산 같이 탄탄하고 마음은 하나님 앞에 물 같아서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그분께 매달리고 호소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라고 믿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
“내가 어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시 73:16-17)
본문해설
시인이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간단하지 않습니까? 시인은 경견하게 살기위해 애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썼는데 계속 말씀의 책망만 받고 세상 사람들의 번영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번영하고 고난이 없었습니다. 죽을 때는 그 죄 값을 모두 받고 비참하게 죽을 줄 알았는데, 죽을 때도 고난이 없고 오히려 평온했습니다. 이런 모순된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시인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인의 마음의 고통
시인은 “내게 심히 곤란하더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압박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시인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그럴 바에야 세상에 있는 사람들처럼 나도 내 방식대로 살아볼걸.’ 하고 후회하기도 했지만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믿음을 완전히 끊어 버릴 수는 없었습니다. 분명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확실한 것은 그렇다 해도 해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현실의 증거 사이에서 그는 무엇에 억눌려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런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이런 고뇌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때 시인은 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소의 두 가지 의미
성소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되는데 넓은 의미로는 당시에 있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성막은 약 18평 크기의 공간이 둘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12평의 큰 방을 지나면 6평의 작은 방이 있는데 12평짜리 방을 성소, 6평짜리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성소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성막 전체를, 좁은 의미에서 보면 지성소 앞에 있는 성소를 의미합니다.
이 시를 가리켜 ‘아삽의 시’라고 하는데 이것을 아삽이 지은 것인지, 혹은 누군가가 지은 시를 아삽이 맡아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미즈 모르 레 아삽’(מִזְמ֗וֹר לְאָ֫סָ֥ף)이라고 했는데 ‘레’(לְ)라는 말은 ‘누구에게 속하다’는 뜻입니다. 아삽이 이 시를 직접 지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고민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다면, 그 ‘성소’는 좁은 의미의 성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만이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이 제사장이 아닐 경우에는 저자가 성소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성소’는 넒은 의미의 성막 전체를 가리키는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 편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석의 차이는 크지 않을 것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음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합니다. 설득하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한번에 ‘아!’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까?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죄를 짓고 살아가는데도 번영하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아갑니다. ‘죽을 때는 비참하게 죽을까?’ 했더니 죽을 때도 평안합니다. 이것은 모순처럼 보이지만 전부 시간세계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때, 누구를 생각하게 됩니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간 안에만 계셔서 죽거나 소멸하시는 분이 아닌 영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아!’ 하고 깨닫고 불신앙이 주저앉는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아! 그렇구나.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살다가 시간이 끝나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데, 나는 인간의 모든 과정 중 현실만을 보았구나. 그것도 짧은 한 순간만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없다며 괴로워했구나.’를 깨달으며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
자신도 다 아는 특정한 죄 때문에 영적 침체가 일어난 경우에는 그것이 의식 속에 살아있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과정을 통하여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지에서 비롯된 경우에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무지의 어두움을 비추는 진리의 깨달음이 없으면 영혼의 침체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소에 들어설 때 그 빛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생생한 신앙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살다가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자꾸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는 것 중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영원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잠시 이 세상에 살다가 결별한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는 썩지 않는 보다 완전한 몸을 입어 영원을 잇대어 살게 된다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다가 교회에 옵니다.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의 의식이 제대로 되었다면 ‘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구나. 그분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을 때도 언제나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시고, 죽은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날 수 없구나.’라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신앙이란 항상 당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보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라틴어로 ‘꼬람데오’(Coram Deo)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이 하나님 앞에서 삽니다. 우리가 등을 돌린다고 하나님께 감출 수 있는 무엇이겠으며, 기둥 뒤에 숨는다고 하나님이 인식하지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서 당신을 숨기실 수 있겠지만 제가 하나님께 무엇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라고 말입니다.
모든 만물과 사람이 하나님께 노출되어 있고 우리가 의식하든 의지하지 못하든 하나님이 지켜보고 있다는 점에서 모든 만물이 다 주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꼬람데오’는 인식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모두 아실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서있다는 신전의식(神前意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서계시는 증거가 믿음 안에서 분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다는 증거를 찾기 힘든 때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꼬람데오’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영원을 잇대어 인생을 생각함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하는데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입니까? 저들의 결국, 종말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이 계신가, 하나님은 정말 올바른 분이신가, 이 세상을 당신의 의로 통치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얻지 못해서 고민했는데 그것은 죽음과 함께 그들의 모든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할 때 생겨난 고민이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아, 그렇구나. 죽음 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그분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시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에 잇대어 인생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역사에서 ‘임마누엘 칸트’라는 사람은 심각하게 기독교의 진리를 허물어 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옥이 있다 없다 말하기 이전에 지옥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진짜 있다고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직접 다스리고 통치한다는 사실을 부인했던 사람도 하나님의 사후의 심판이 없으면 이 세상이 불합리하고 도덕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 속에 남아있는 영원에 대한 훌륭한 증거입니다.
최근에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이라는 프랑스 철학자가 여러 권의 책을 냈습니다. 그의 생각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신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증명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신이 있다 치고 살자. 그것이 좋은 것이다.” 이것이 요즘 유행하는 견해입니다. 그때 인간의 가치 기준이나 모든 것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종교의 도움 없이 도덕이 올바르게 교육된 적이 없습니다. 사회 구석구석이 무섭게 망가져가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종교의 힘으로 세우려는 시도들은 싫기 때문에 그냥 그렇다고 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선 철학자들이 이미 다 해보았던 것입니다.
모순이 많아 보이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가장 훌륭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인생이 유한한 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에 이른다는 시각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악인의 형통함과 평안한 죽음, 악인의 모든 일들이 조금도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하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가 그를 알 때든지 모를 때든지 언제나 함께 계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며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이 살아계신 증거는 우리의 마음에 항상 있으나 성소에 들어갈 때 영원을 느꼈던 것처럼 교회는 우리에게 그러한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나 가르쳐주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설 때마다 ‘아, 그렇구나!’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게 하소서
이것이 교회에 들어설 때마다 깨달아져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을 향해 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은 것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께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 73:17-19)
본문해설
시인에게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왜 악인이 형통한지, 왜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게 살아보려고 하는 자신은 아침마다 말씀을 통해 야단치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때 섬광처럼 한줄기 빛이 시인의 마음을 스치며 깨닫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결국’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인생에는 종말이 있다는 것이 깨달아지고 하나님의 통치는 종말 이후에도 계속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영원의 빛 안에서 인생을 바라봄
우리의 모든 생각과 관심은 이생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태어나기 전에는 기억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죽음 이후는 우리가 아직 도달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관심사와 마음은 오직 현세에만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기 전부터 모든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향한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오는 동안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신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그럴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우리가 잠시 육신을 벗고 영혼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고 하지만, 그때에도 우리는 주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부활이후에는 온전한 몸을 입은 상태에서 주님의 통치를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죽음이 막고 있는 휘장을 걷어내고 죽음너머에 있는 우리 인생의 존재의 의미를 밝히는 것입니다. 죽음의 빛으로 비추어보기 전에는 우리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의 빛으로 우리의 삶을 비추어보는 것으로는 우리의 삶을 판단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죽음의 빛으로 우리를 비추어볼 때 삶을 훨씬 정확하게 판단하게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잔칫집보다는 초상집에 가서 배우는 것이 훨씬 더 많은 법입니다.
시인이 경건하고 하나님을 의지했지만 그는 죽음의 빛으로 자신의 인생과 악인들의 인생을 비춰볼 수 있는 지식을 갖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미끄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소에 갔습니다. 성소에 나아갈 때 예전처럼 행복하고 감격적이고 두려움과 기쁨이 섞인 종교적인 감정으로 간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소에 나오는 경건한 시인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마음에 예상치 못했던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셨습니다. 없던 것을 새로 보여 주셨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으로 그의 눈을 뜨게 함으로써 이미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만들어준 것입니다. 종말의 빛으로 자신의 인생과 세상 인간들의 인생을 비춰보게 만들어주셨던 것입니다.
죽음 후에 있는 하나님의 심판
그러면서 시인은 고백을 합니다. “주께서 저희를 참으로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저희’는 악인을 가리킵니다. 경건한 시인을 실족하게 만들었던 ‘형통한 악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습니다. 언제 그렇게 하셨습니까? 죽음과 함께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악인들에게 아무 문제도 없고 형통해서 시인의 마음에 큰 걸림이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시인이 성소에 들어설 때 우리의 인생은 시간 안에 있고,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에 종말이 있다는 것이 섬광처럼 다가왔습니다. 지금까지 평탄하게 걸어오던 풀밭 같은 길을 지나 죽음에 문 앞에 들어서자 그들은 미끄러지면서 파멸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미끄러져서 파멸에 던져지게 되는 것이 악인의 인생이라는 것을 시인은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왜 그렇게 어려운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구약에서는 천국과 지옥에 관한 교리가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습니다. 죽음 이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스올’이라는 음습하고 기분 나쁘고 생명의 기운이 박탈당한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개념들이 분명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깨닫기가 어려웠습니다.
두 번째는 경건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종말을 인식하며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현재의 일에 몰두하고 마음을 쏟느라 죽음너머에 있는 영원한 빛으로 우리의 인생을 보지 못합니다. 시인 역시 죽음 이후에 있는 명백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악인과 자신의 삶을 비춰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책이 한 권 나왔습니다. ‘롭 벨’(Rob Bell)이라는 목사의 『사랑이 이긴다』(Love Wins)라는 책입니다.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당신을 안 믿고 교회에 안다녔다는 이유로 형벌을 내리시고 지옥에 던져서 영원한 불길에 타오르게 만드신다는 이 지긋지긋한 교리가 사실이겠는가?” 하면서 논변을 펼칩니다. 이분은 제가 보기에 아주 수재입니다. 신학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학, 양자역학, 디자인, 역사부터 시작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지옥의 교리를 부인합니다. 그게 오늘날의 대세입니다. 지옥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 없습니까? 그런 인간적인 이론과 희망사항으로 잠재우기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관한 교리는 성경에서 너무나 분명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영원히 심판하실 수 있느냐?”는 질문에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증거는 너무 분명하고 우렁찹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불균등과 불평등, 그리고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지겨운 현실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심판의 교리를 깊이 깨달으며 각성을 하게 됩니다. 어떤 사물이 미끄러지면 결국에는 내던져지게 되는 것처럼 악인들은 파멸에 던져지게 됩니다. “저희가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 죽음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크게 놀라게 되었습니다.
징계,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
토기장이가 토기를 빚습니다. 찌그러지거나 원하는 모양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진흙을 넣는 곳에다가 던져 넣습니다. 그것이 거기에서 물과 섞여집니다. 그러면 나중에 그것을 밟아서 재사용합니다. 그러나 이미 초벌구이를 했는데 원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면 그런 경우에는 던져서 그릇자체를 깨트립니다. 그것은 재사용도 안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악인이 세상에서 형통하고 번영할 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책망과 징계를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만 미워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버려두어서 결국은 커다란 파멸에 이르는 것이 낫겠습니까? 아니면 잘못했을 때 애정을 가지고 꾸짖고 깨닫게 함으로써 올바른 길을 가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한 것이겠습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은 말합니다. “사생자에게는 징계가 없나니 하나님은 자기의 친아들을 징계하시느니라 징계가 당시에는 슬퍼보이나 연단을 한 후에는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고 합니다.
존 오웬 목사는 자기의 책속에서 징계를 받는 것을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으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 죄를 용서 받는 것, 은혜를 충만히 공급 받는 것과 함께 징계를 받는 것, 하나님께 혼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커다란 특권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는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조금도 시기하거나 질투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기업의 위대함과 풍성함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책망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찌르시고 때로는 우리로 하여금 징계를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고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웅변적인 증거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무서운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제일 무서운 심판입니다. 내버려두시는 것은 하나님이 심판하기로 작정하시고 버린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죄의 특성인 무모함과 맹렬함과 광기로 역사합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을 저버리고 끊임없는 타락과 방종에 자기 자신을 내어던지는 것입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말씀에 찔림을 받고 아파할 수 있는 것은 축복입니다. 종종 하나님께서는 섭리 속에서 우리가 세상에서 하려는 일이 안 풀리게 하시고 회초리를 대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이 아깝다거나 우리보다 악인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깊이 개입하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커다란 징벌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이 메마르면 굉장히 고통스럽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들리지 않고, 곤고해서 기도하러 나와도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는 상태가 은혜라고 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이 신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버리고 그 대가로 손에 넣은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소극적인 징계의 한 국면입니다. 모든 일들이 형통하게 돌아갈 때보다도 하나님을 멀리 떠나 경건의 의무를 게을리 하거나, 혹은 죄를 지어 영혼이 곤고할 때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
주만 바라볼지라
하나님의 위대하고 놀라운 사랑은 형통함과 더 많은 물질, 더 많은 번영을 얻음으로 마음속에 각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은혜에서 미끄러졌을 때, 죄짓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졌을 때, 곤고하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서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그분의 위대한 은혜가 우리의 마음속에 각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감격적인 사랑을 깨달은 곳에는 많은 물질이나 번영이 있지 않습니다. 죄인을 용납하시고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어주셔서 신앙으로 살게 하였던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의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는 하늘위에서 자신의 인생을 내려다보는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순간에 살고 있으나 영원을 잇대어 사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역경도 만날 때도 있고, 즐거울 때도 있고,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인간의 이성과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은 그런 설명을 초월합니다. 지금은 쓰라리고 이해가 안 되고 항의하고 싶을 수도 있지만 그분의 지혜로 이끄시는 길이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주님의 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계셔서 나와 함께 인생의 골목을 지나고 벌판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산을 넘지만, 동시에 하나님은 하늘높이 계서서 나도 함께 그 옆에서 내 인생을 남의 인생인 것처럼 내려다보는 조망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가장 가까이 계셔서 우리와 함께 웃고 함께 눈물 흘리시고 우리를 싸매시고 고치시는 분이시지만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며 실망하고 좌절하던 눈을 들어 온 땅에 가득하고 어떤 피조물이라도 벗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를 보게 됩니다. 아무데도 안 계신 것 같은 때에도 온 땅과 만물 안에 가득한 하나님의 위대한 임재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온 땅과 하늘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
벌레만도 못하고 티끌만도 못한, 가을에 떨어져 구르는 낙엽만도 못한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관계를 맺으시고 영원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깊이 감격하게 됩니다. 그래서 짧은 인생의 날 동안 형통한 어두움보다는 시련이 있지만 찬란한 진리의 빛 안에서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성소에 들어설 때 지혜의 섬광을 받으며 진리의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깨닫지 말고 항상 빛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깨신 후에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시 73:20-21)
무지에 가려졌을 때
시인은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괴로워했습니다. 무지는 두 가지를 낳습니다. 무지는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 생각 없이 막 살게 만들기도 하고, 올바로 살려고 할 때는 인간을 침체에 빠트리기도 합니다. 특히 무지로 말미암아 침체에 빠지게 될 때는 진흙탕에 빠진 차가 아무리 엔진을 힘차게 돌려도 헛바퀴가 도는 것처럼 바퀴가 겉도는 것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기도를 해도 안 됩니다. 노력을 해도 쉽지 않습니다. 해결책은 무지에서 벗어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시인이 그러했습니다. 기도를 안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책망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크게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깨닫기도 하지만 청교도들이 믿었던 바와 같이 자신보다 우월한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이런 종류의 질병을 치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땅에 목회자를 두신 이유입니다. 목회자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깨닫고 성도들이 스스로 탐구해서는 알 수 없는 은혜의 세계와 인간의 심령의 깊은 상태들을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어느 정도 말씀에 대한 관념을 갖게 만들어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부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말씀을 추구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가운데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자라나가게 됩니다. 체계적인 지식과 교리에 대한 이해, 역사에 대한 지식, 일반학문에 대한 이해, 하나님과의 만남의 진수인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함께 질서지어지면서 베드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듯이 깨달음
이 사람은 경건했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신앙의 지식으로는 악인의 형통함을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더욱 무지는 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불행한 상태와 악인의 형통한 상태를 상정하고 둘을 비교하면서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의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잘못된 사상에 감염되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 자신이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믿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 성도로서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기쁨,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사라져버렸습니다.
그가 성소에 들어갈 때 누가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진리의 조명을 받고 영혼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성소에 들어서는 순간, 그의 지성 속에 한줄기 섬광 같은 빛이 번쩍였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하나님 이외의 모든 사물들은 한시적인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머무는 세상 속에서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언젠가는 끝나는 때가 있으며, 끝난 후에는 영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영원이 하나님이고, 시간을 넘어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 면전에 선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깊이 경험하면서 시인은 마치 사람이 꿈을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하는 것처럼 새롭게 고백합니다. 꿈을 꾸고 있는 동안에는 꿈이 얼마나 생생한 현실로 다가옵니까? 우리는 꿈속에서 울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기뻐서 웃다가 잠에서 깨기도 합니다. 그러나 깨어나면 꿈입니다. 때로는 꿈속에서 꿈을 꾸기도 합니다. 저는 언젠가 꿈속에서 두 번의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꿈속에서 다시 꿈을 꾸었습니다. 두 번을 깼는데 여전히 꿈이었습니다. 세 번째 깨니까 진짜로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특이한 체험을 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꿈속에서 꿈을 꾼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꿈속에서 꿈을 꾸다가 깼는데 그것도 꿈이었습니다. ‘이것이 꿈이었구나.’ 하면서 깼는데 비로소 꿈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우리가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꿈을 꾸고 난 후에 꿈에서 자기를 통곡하게 만들었던 이유, 행복하게 웃게 만들었던 이유, 분노하고 좌절하게 만들었던 이유를 꿈속에서처럼 계속해서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꿈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생생하게 알았던 것이 비현실이며 꿈일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으며, 꿈을 깨고 난 후에는 그 현실이 꿈속의 실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죽음 후, 하나님 면전에 설 때에
“사람이 잠을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하는 것처럼 주께서 깨신 후에는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언제 주무셨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고 우리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잠드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많은 시인들이 “주여 언제까지 주무시나이까? 일어나 깨소서”라고 하는 탄원들이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인식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주무신다는 것이 아니라 인식론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느낄 수가 없는 처지에서 하나님께 깨어나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로 잠들어 있는 하나님을 깨운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가 생생히 보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탄원입니다.
‘주께서 깨신 후에’는 무슨 뜻입니까? 시인이 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대면하게 된 것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휘장을 걷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깨신 후에’는 모든 악한 자들과 선한 자들이 삶과 죽음 사이의 휘장을 걷고 주님의 임재 앞에 서게 되는 죽음 이후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같이 상황을 내버려두시다가 어느 순간 깨어나신 것처럼 모든 일들을 제대로 돌려놓으시는 때가 있는데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 해석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성소에 들어갔을 때 종말론적인 개념을 가지고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았다는 점을 보면, 전자의 해석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주께서 깨신 후에 저희 형상을 멸시하실 것입니다”라고 할 때 ‘저희 형상’이 무엇입니까? 악인들의 형상입니다. “하나님 없이 성공하고, 하나님 없이 평안한 악인들의 형상을 하나님이 멸시하실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지성을 내리친 충격
시인은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느꼈던 혼란과는 다른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악인에게 벌을 내리시고 선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는 권선징악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형통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찔리는 듯했고,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고민하던 것에 대한 올바른 설명을 찾게 되면서 하나님의 공정하심과 정의로우심을 의심하던 마음에 다시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던 마음에 금이 간 것이 첫 번째 혼란이었다면, 두 번째는 하나님을 향한 의심, 자기의 판단을 신뢰하는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지성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지성의 벼락을 맞기 전에는 소유하기 불가능한 신앙입니다. 시인은 지성에 내리치는 벼락을 경험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토막 난 것처럼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하여 달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이것을 “심장이 찔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커다란 고통이었는지를 보여주고, 잘못된 이해가 신앙에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장이 찔리면 곧바로 죽습니다. 그만큼 이것은 큰 고통이고 치명적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이 이처럼 혼란을 느끼는 상황에서 우리가 충고해준다면, 그리고 그를 위로해주고 싶다면 무엇을 해줄 수 있겠습니까? 맛있는 밥, 예쁜 옷, 훌륭한 선물, 그 어떤 것도 이 사람을 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광대하신 하나님을 매일매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짐승 같은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시 73:22-23)
본문해설
성소에 들어갈 때 시인은 깨달았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사람이 이 세상과 하직한 후에 하나님께서 영원에 대한 전망을 보이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생 안에서는 모순인 것이 인생 바깥에서는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한줄기 섬광과 같은 찬란한 빛이 시인의 심령 속에 들어왔고, 그 한줄기 찬란한 빛을 힘입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짐승 같은 모습을 스스로 깨달음
성경에서 ‘짐승’이라는 표현은 비이성적인 행동이나 생각을 은유적으로 대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신이 짐승과 같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닌 자신의 삶과 생활, 악인의 형통을 보며 낙심했던 태도가 얼마나 비이성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깊이 낙심했기 때문에 매일매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깨닫게 하시고 인도해 오신 모든 과정이 헛된 일이라고 여겼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왔던 날들을 후회하면서 ‘막 살아 버릴 걸.’ 하는 막말도 마음속으로 거침없이 토해놓았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행동들은 그야말로 이성 없는 짐승과 같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순간,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짐승과 같다는 사실을 깊이 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 토설하였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떠나 짐승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지식이 하나님 앞에서 그를 사람답게 살게 하지만 분명한 판단력을 잃어버릴 때 많은 지식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성결하게 사는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시인은 그렇게 살았던 자기 자신을 한 마디로 “짐승이오나”라고 표현했습니다. 어찌 이것이 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겠습니까? 일생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거기서 책망을 받으며 손을 씻어 하나님 앞에 정결하게 살아간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찬란한 진리의 빛이 비추어 우리를 깨어있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시인이 탄식했던 것처럼 “우리가 깨닫지 못한 짐승과 같습니다.”라고 고백하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 지식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편으로는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올바르게 아는 이성적인 지식이 필요하고, 또 한편으로는 언제나 심령의 상태가 깨어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에게서 비치는 찬란한 오성의 빛 안에 사는 것이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시인은 모든 것을 다 알았던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깨어있고 그분을 사랑할 때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 때문에 그분을 신뢰했습니다. 그랬기에 이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번영한들 어차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생은 악인들의 그것과 같지 않은데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이 식고 오성과 총명이 흐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했고 사랑으로 우리들을 깨우쳐 당신 앞에서 살게 하시려는 친절한 돌봄을 자신을 책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의 인격은 느껴지지 않고 아버지의 꾸지람만 느껴질 때 반발하는 아이들처럼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내가 주의 앞에 짐승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앞’은 히브리어로 ‘레파네익 아도나이’(לְפָנֶ֣יךָ אֲדֹנָ֑י)라는 예배에서 많이 사용되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나님 앞에서, 주의 낯에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드리는 예배에서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바로 그 빛 앞에서 그는 자신이 짐승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찬란한 진리의 빛을 자각한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인식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이기 때문에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게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진리의 빛 아래 살지 않는 한 자기를 사랑하되 육체만을 사랑 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입니다. 시인도 역시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생을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산 사람이었지만 총명의 빛이 떠나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는 지각의 빛도 현저히 사라졌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참되신 사랑, 참되신 은혜의 인격을 깨달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
시인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한 짐승과 같지만 내가 항상 주와 함께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이 구절은 얼핏 보면 “그래도 내가 항상 주님과 함께했기 때문에 그 공로로 주님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다.”라고 읽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사상은 오래된 사상입니다. 존 오웬 목사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은 동행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함께 한다’, 혹은 ‘동행 한다’라는 말은 경건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갔고, 하나님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해주셨던 여호수아는 결국 가나안을 정복했습니다. 다윗이 이후에 이어지는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임금들의 본보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토목공사를 해서 업적을 남겼거나 혹은 전쟁에서 승리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유다 역사 중 다윗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은 이 땅에 있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최고의 사랑의 표현이고 은혜의 표현입니다. 가슴시릴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놀라운 동행,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가장 커다란 은혜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함께한다.’, ‘동행 한다.’라는 표현은 동행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주체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께 주체성이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일을 하면 마땅히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기계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그가 매우 탁월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와 동행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것은 언제나 은사입니다. 선물로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의 자기 인식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이 극도의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해 주셨던 것을 간증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선물이지 인간의 공로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특징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해 주시고 내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동행은 구약성경에서 특별히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입니다. 평화도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가 죄가 없고 순결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용납하시고 당신의 지극히 큰 자비로써 하나님의 사랑으로 불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평화를 누리며 살아갈 때는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언제나 결함이 있고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행동조차도 그분에게는 불결하기 짝이 없는 더러움입니다. 그래서 항상 거기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가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해 주시는 자비하신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시인이 무지해서 짐승과 같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전에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로써 함께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동행할 수 있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고 부족한 지식의 빛 아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손에 붙잡힌 삶
그때는 주님이 시인의 오른손을 꼭 붙들고 계셨습니다. 성경에서 ‘오른손’은 힘의 상징이고 선택의 상징이자 은총의 상징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는 “주께서 나의 오른손을 붙드셨습니다.”라는 고백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오른손을 굳게 붙들어 올바른 힘을 행사하게 하고, 그의 오른손을 이끌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을 따라가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일을 행하는 동작의 주체인 오른손을 주님이 붙잡으심으로써 그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과 함께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을 선택하도록 그 길을 가도록 하나님이 날마다 붙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캄캄한 어둠속을 더듬으며 걷는 것과 같은 시기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주님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세상에서의 번영이 아닙니다.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오른손이 주님께 붙잡히는 것, 우리는 갈 길을 알지 못하나 주님의 손에 이끌리는 것, 어둠속에서도 우리는 알지 못하나 갈 길을 잘 아시는 주님의 손에 이끌리는 것, 그 이상의 축복이 없습니다.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때로는 믿음이 흔들려 의심하지 않았던 것을 의심하고 인생에 어두운 회의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그 때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강할 때도 있고 약할 때도 있습니다. 좋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우리의 가장 가까이 계셔서, 충만한 믿음으로 당신을 바라볼 때뿐 아니라 흔들릴 때조차도 우리의 오른손을 붙들어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우리를 붙잡은 그분의 손의 온기를 매일매일 느끼고 신뢰하며 걸음을 떼어 놓을 때 걸어온 길을 후회하는 법은 한 번도 없을 것입니다.
회의와 신앙의 어두운 시기를 지날 때마다 고통스럽고 혼자 버려진 것 같이 느껴지지만 우리가 계속 빛 가운데 살았더라면 미처 깨닫지 못했을 놀라운 진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야 할 길이 우리의 눈에 보일 때나 보이지 않을 때나 변함없이 그분을 의지하며 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있다고 그분의 손을 놓아서도 안 되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분의 인도를 의심해서도 안 됩니다. 언제나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걸어가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속일 때도 있고, 내가 의지하고 사랑하던 사람들이 나를 배신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신 첫 번째 분이시며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는 마지막 분이십니다.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시인이 짐승 같은 사람이었던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언제나 그러했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동안에는 주님이 나의 손을 붙들고 계신 것이 느껴졌습니다. 다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므로 생사 간에 우리가 의지하여야 할 유일한 분이며 내가 신뢰하여야 할 유일한 분, 주님을 놓지 말고 그분의 손에 꼭 붙들려 인생의 남은 날들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찬란한 지식의 빛, 어린아이 같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언제나 필요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시 73:23)
깨닫게 된 사실, 신실하신 하나님
시인은 앞 절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주시고 당신의 오른 손으로 붙드셨다는 고백을 합니다. 시인이 깨닫게 된 한 가지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일생동안 자신의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자신을 굳게 붙들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을 굳게 붙들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실 때 당신의 교훈으로 이끄십니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악인이 형통한 것을 보면서 걸려 넘어지고 방황했지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생긴 방황과 회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기 전까지는 자신이 그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악인의 형통함이 하나님의 의로우심보다 더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마음을 파고들었을 때 시인은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없고 하나님 앞에 짐승과 같은지를 깨달았습니다.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시인에게 깨닫게 하신 것은 자신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신실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자신과의 관계에 신실하신 분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교훈으로 인도하시는데 깨닫지 못할 때는 깨닫게 해주셔서 알지 못하던 진리에 눈을 뜨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은혜는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무지하고 어리석은 자를 깨닫게 하시고 깨우쳐주셔서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깨우침이 없다면 성도라 할지라도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을 텐데 하나님은 순간순간 깨닫게 하시고 이끌어주십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
시인이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교훈으로 자기를 인도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야하는 인생길에 대해 모두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붙들어 인도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주저앉았을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온 것을 후회하고 지나온 삶에 대해 보람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깨닫게 하실 때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하고 짐승 같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짧은 구간의 인생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생 저편에 이르기까지 광대하게 펼쳐져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 수 있게 만들어주신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했습니다. 비로소 시인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매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시인은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라고 고백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하나님이 버린 사람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는 언약의 자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인들이 번영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버림받은 것 같고 하나님께로부터 소외된 것 같았는데,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니 형통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닌, 던져져서 부서진 그릇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사람이고, 세상의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주님이 기억하고 계시며 영원을 잇대어 살도록 만들어 주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와 자비는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형통함과 부요함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과 은혜와 자비를 힘입어서 매일을 살아갈 때 비록 세상에서는 고난을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토록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송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해를 초월하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분복,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사는 복을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것은 영광으로 영접하신다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번성하는 반면, 자신은 하나님께 질책을 당하는 것 같고 악인이 누리는 것이 자기에게 없기 때문에 보기에는 악인이 더 영광을 누리는 것 같지만, 이것은 잠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신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고귀하고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인이 성소에 들어갈 때 악인들의 종말에 대해 눈뜨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모자라는 사람인지를 깊이 깨달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로 자기를 붙들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도 이런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공정하심이 의심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시인처럼 회의에 빠지기 보다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생각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수시로 변하고 요동치는 신실하지 못한 인간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향해 미쁘고 변함없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붙들면서 나아가게 될 때, 오히려 그 환경 속에서 주님의 필요와 자비와 은혜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매순간 붙들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 밖에 사모할 자 없나이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본문해설
시인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소에 들어갈 때 재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토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서 시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 것을 고백합니다. 성소에 들어 갈 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교훈으로 인도하시고 영광으로 영접할 것을 고백하며 자신이 사랑할 유일한 분이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통치
히브리서에서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이 부분을 “하늘에서는 누가 나를 위하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성경의 번역이 틀리지는 않았지만 지금 말씀드린 것이 정확한 뜻입니다. “하늘에서는 누가 나를 위하겠습니까?” 혹은 “누가 나를 위한 자입니까?” 이런 뜻입니다. 세상의 많은 것들이 나를 위하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소멸하는 것들이고 죽음 너머까지 함께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있는 것들은 있는 것 같지만 죽음의 빛으로 보면 사실은 없는 것들입니다.
시인이 성소에 들어갈 때 깨달은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존재 차이였습니다. 그것을 아주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는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했지만 믿음이 흔들리고 회의에 빠져있는 동안 시인은 이 사실을 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인생에 유일한 궁극자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의 삶은 존재의 질서가 올바른 생활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생활은 소멸하는 것과 영원히 계신 하나님 사이를 구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삶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자기를 위하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러한 판단이 이 땅에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할지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만약 시인이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 없이 형통한 자들의 결국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하였다면 절대로 하늘의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섬광 같은 하나님이 그의 마음에 깨달음의 빛을 주셨습니다. 휘장을 찢고 시간이라는 장막이 가리고 있는 현실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랬더니 눈앞에 있는 현실보다 더 영원하고 궁극적인 현실이 펼쳐지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번영하는 악인들은 소멸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영원히 계신 분이고, 하나님이 영원히 계시다면 그분은 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시며, 이 세상의 악인들이 잠시 번영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폐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세상에서 악과 선이 모두 징벌되거나 보상된다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실적인 이유가 악의 문제입니다.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거나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만 선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악과 죄의 문제, 선과 공평의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훼손했던 ‘임마누엘 칸트’라는 철학자도 “천국과 지옥이 있다 없다 말하기 이전에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인생의 공평의 문제를 죽은 이후의 심판과 상급까지 연결해야 금생에서의 선악의 모순들이 극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논리적으로 이것을 필요로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것이 있게 하셔서 이 세상에서의 선과 악의 모순을 종결하십니다.
깨닫게 하시는 진리의 빛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의 종결자적인 역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데 죽은 후에 일어날 현실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그것을 마음속에 현재적으로 각성시키는 하나님의 강력한 영적인 은혜의 역사가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보이는 세계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초자연적인 세계로부터 끊임없이 깨달음과 지혜의 빛을 받으며 영위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빛은 초자연적인 빛이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심령에 직통으로 주시는 빛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들을 일깨우시거나 새롭게 깨닫게 하시고 그것을 우리 마음속에 적용해 주시는 지식의 빛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된 계시와 그것을 사용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매일매일 현실로 다가옵니다. 우리 앞에 있는 재난문제, 우리 앞의 행복, 우리 앞의 현실 중 어느 것도 우리가 노력해야 겨우 마음속에 다가오는 것은 없습니다. 아픈 것은 아픈 것을 느끼려고 하지 않아도 아픕니다. 고통스러운 것은 고통스러운 것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아도 고통스럽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속한 신령한 사실들은 우리의 본성으로 자연스럽게 깨달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번쩍하고 마음속에 들어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실 때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깨닫게 되고, 하늘에 속한 것이지만 이 땅에 있는 것보다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시인은 이 사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것들 사이의 영원한 차이를 분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시고 하나님 외의 모든 사물들은 소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악인은 하나님 앞에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시인의 마음에 가득 찼던 하늘의 전망은 이 땅의 전망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백합니다. “이 땅에 사모할 자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땅에서는 주님밖에 사모할 자가 없습니다.” 성소에 들어가기 전까지 흔들렸던 고백이었습니다. “땅에서 주님만 사랑함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내가 과연 이 땅에서 주님만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며 살았으나 악인은 형통하고 나는 고통을 당하나이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한 결과입니까?” 시인은 주님께 이렇게 항의하고 대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이 악인이 심판을 당하는 것과 하나님이 항상 거기 계셔서 당신이 뜻대로 사는 성도들을 용납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면서 결국 땅에서 사모할 분이 주님뿐이며 내가 진정으로 욕망할 대상이 주님밖에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결론과 적용
역설적으로 우리의 인생 안에 있는 것들로만 인생을 보면, 인생의 실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의 실체를 또 다른 실체로 볼 때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잔칫집에 가서 즐거워하는 사람보다는 초상집에 가서 슬퍼하는 사람이 인생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듯, 이 땅의 삶과 사물들을 하늘의 빛으로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무엇을 사랑해야 할지를 올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에 있는 것들을 시간의 빛으로 보면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시간에 있는 것들을 영원의 빛으로 비추어 보면 하나님만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번성하는 악인으로 인해 자신의 신앙이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시간을 살아도 영원의 빛으로 살고, 매일매일 이 땅에 살면서 영원에 잇대어 살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반석이신 하나님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본문해설
시인은 인생의 유한함과 허무함을 직시하고 “나의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라고 고백합니다. 육체의 쇠잔함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늙거나 기력이 약해져서 한계를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가 쇠잔해진다’고 한 것이 둘 중 어느 것 때문에 쇠잔하게 된 것인지 단정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육체와 마음이 쇠잔해질 때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죽음을 직면하게 되었고 인생이 끝난 후에 있을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에 눈을 뜨면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쇠약함과 늙음으로 이어지는 개인적인 인생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쇠잔함은 나이가 들어서 육체에서 생명의 기운이 사라지는 때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이것입니다. 앞서 시인은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습니다. 자신의 불신앙 때문이기는 했지만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깊이 괴로워하게 되었고 그것이 적잖게 마음고생을 불러일으켰고 그 속에서 육체도 함께 쇠약해져 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원인을 배재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육체가 쇠잔해져가며 마음도 쇠잔하여 간다고 고백합니다. ‘마음’이라고 번역되어있는 단어는 ‘정신’이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지력’, ‘알력’, ‘신경’, 어떻게든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시인은 이러한 회의의 과정을 통해서 아주 처절하게 자기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은 자기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속에서 그의 정신은 쇠약해지게 되었습니다. 굳건하리라고 믿었던 자신의 신앙도 약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육체와 마음의 쇠잔함을 통해서 시인은 자신의 상태를 의지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만큼 자신을 의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을 의지한다고 말하지만 세상이 의지할만하다고 판단하는 자신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의지도 자신을 의지하는 것의 또 다른 형태일 뿐입니다. 마치 신자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사랑의 한 형태인 것과 같습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라는 고백은 결국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 육체를 신뢰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경험하였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를 신뢰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절실하게 체험한 것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고백을 하고나서 시인은 자기의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옮겼습니다.
반석의 의미
그리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반석’, 히브리말로 ‘추르’(rWx)라는 단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반석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 함의하는 의미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추르’라는 단어가 독특하게 구원과 연결이 됩니다. 이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강인한 기억을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둔 어떠한 사건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 사건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닌 모세의 반석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하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반석을 쳐서 물을 쏟아지게 하였습니다. 이 때 거대한 반석이 쪼개졌고 쪼개진 사이로 생수가 쏟아져 나와서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잊혀질 수 없는 구원사건이 되었습니다.
모세의 반석 사건이 함의하고 있는 바가 몇 가지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인간의 생각과 다른 방법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여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물을 얻으려면 축축하고 습기 있는 계곡을 팠어야하는데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반석을 통해 물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두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이 사건을 메시아적 사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신약의 백성들이 그 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반석이 쪼개져 생수가 쏟아지는 사건이 예표 한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찢으신 옥체를 통해 흘러나오는 보혈의 피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처럼 그것을 바라보는 예표적 사건으로 반석을 깨뜨려 물이 쏟아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이 사건이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는 ‘우리는 다함께’, ‘다함께’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어 그 피로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실 때 공동체적으로 그들을 구속하실 것을 반석사건을 통해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의 반석이십니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구원과 관련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구원과 관련되어 있고 공동체와 관련되어 있고 메시아와 관련된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십니다.”라고 할 때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인의 가슴에 큰 파도처럼 밀려오는 그림은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목말라 죽어가던 이스라엘 백성을 반석에서 살리신 것처럼 당신은 나를 죽을 위기에서 건져내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반석이 함의하고 있는 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독특한 구원사건과는 별개로 반석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사용한 예입니다. 반석은 넓고 평평하게 퍼져있는 바위를 뜻합니다. 반석에 대한 메타포(metaphor)는 신약까지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모두 가르치신 후에 결론처럼 말씀하신 데에 반석이 등장합니다. 나의 교훈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짓는 자과 같아서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지만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모레위에 집을 짓는 자와 같아서 비가 오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면 무너지게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반석이라는 그림을 구약 전반에서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 반석에 관한 비유는 예수님이 즉흥적으로 생각해내신 것이 아니라 구약에 이미 면면히 흐르고 있는 반석에 대한 메타포에서 가져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반석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 듣고 있던 유대인들은 반석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는 가운데 비유를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에서 반석은 ‘근거, 토대,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반석은 그런 것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큰 빌딩을 지을 때 무엇이 문제가 될까요? 60층, 70층, 혹은 100층짜리 빌딩을 올리면 빌딩 자체의 무게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그 자체가 누르는 힘이 어마하기 때문에 아무리 땅을 깊이 파고 건축을 해도 땅 자체가 건물을 탄탄하게 지탱해주지 않으면 통째로 기울게 됩니다. 한강변을 따라서 지어진 건물 가운데 가장 난공사 중 하나가 63빌딩을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강 한 가운데 있는 땅에 63빌딩을 지은 것입니다. 지형을 잘 보면 건물 가까이에 양쪽으로 물이 흐릅니다. 그것은 땅이 무르다는 것입니다. 무른 땅 위에 어마어마한 빌딩을 세울 때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럴 경우에는 예외 없이 파일을 박습니다. 그 파일은 전봇대처럼 생긴 것인데 그것을 수백 개, 혹은 수천 개를 박아서 타공을 하고 해머라는 기계로 두들겨서 계속 땅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사정없이 그것을 집어넣고 그 위에 다시 파일을 박아서 집어넣고 하면 더 이상 안 들어가는 때가 있습니다. 지질학적으로 조사를 해보면 몇 미터 위에 표토층이 있고 표토층 밑에 진흙층이 있고 진흙층 밑에 굵은 모레층이 나오고 모레층 아래 바위가 나옵니다. 계속 더 두드리면 바위에 박혀서 더 이상 안내려갑니다. 반석과 연결이 된 것입니다. 반석이 나올 때까지 파일을 박거나, 반석이 안 나오면 파일 자체를 깊이 박아서 그 자체가 바위의 힘을 발휘하도록 밑을 단단한 반석처럼 만든 다음에 그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예외 없이 그런 공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반석’이라는 말이 갖는 의미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근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반석이신 하나님
시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십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을 의지했지만 믿음도 확고한 근거, 기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며 뿌리 채 그 믿음이 흔들렸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십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은 나를 구원해주시는 구원자이십니다.”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만이 내 정신의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근거가 되시나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오늘날 우리는 사상과 생각의 근거가 없는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근거가 없습니다. 그 근거를 전부 다 부정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근거가 없고 삶이 한없이 가볍고 요동칩니다. 그리고 그것 자체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십니다.”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해주신 반석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믿음과 신앙과 삶을 흔들리지 않고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기반이 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신앙이 흔들리고 혼미하게 되었을 때 시인은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자신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가 되신다는 사실을 깊이 터득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은 하나님이 있어 든든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이 넘칠 때, 죄악의 물결이 창일할 때도 그분은 우리의 구원이 되십니다. 우리의 심령이 목말라 죽을 것 같은 때도 우리는 다른 곳에서 나오는 물로 목을 축이지 않습니다. 반석이신 그분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물로 우리의 목을 축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모든 근거가 되십니다. 하나님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반으로 지식의 체계를 구축하고, 하나님을 기반으로 우리 삶의 교훈들을 세워가고, 우리가 힘들고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아버지 앞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주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기반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영원한 분깃이신 하나님
시인은 “하나님이 영원한 분깃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 분깃은 다름이 아닌 제비를 뽑아서 할당된 몫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제비를 뽑아 기업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정복하면서 그 기업을 차지했습니다. 이것이 분깃의 개념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분깃이십니다”라고 이야기 할 때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웃었을 것입니다. 분깃은 대개 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분이기 때문에 나누어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영원한 분깃이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되시겠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행복의 근원이 되시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은 내 마음의 분깃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영원한 분깃이신 나의 하나님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시 73:26)
분깃의 의미
지난시간에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이시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분깃’이라는 말이 맨 처음 유래된 것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그에 앞서 하나님의 분부를 좇아 각 지파별로 자신들이 거하게 될 땅을 제비뽑게 됩니다. 뽑은 땅이 그들의 분깃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한 후에는 정복한 땅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추첨된 지파에게 그 땅을 주어서 누리게 한 것이 분깃의 민족적인 시초입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분깃이 없었습니다. 비록 애굽에서 매우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었지만 그들이 학대를 받았던 것도 자신의 분깃 없이 남의 분깃에서 살았기 때문에 노예생활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광야를 지나면서 여러 나라를 통과해야 했고, 그러면서 수많은 전쟁을 치르게 된 것도 자신들의 분깃에 위협을 느꼈던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경계했기 때문에 전쟁을 피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분깃에 대한 사상이 거의 한처럼 맺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분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또 내 마음에 영원한 분깃이십니다.”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의’라는 소유격은 있든지 없든지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분깃에 대한 사상을 가지고 비유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차지하게 된 그 땅은 그들의 영원한 분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표일 뿐이고, 실체는 신약의 백성들이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될 그리스도가 그들의 유업이었습니다. ‘엘머 마튼스’(Elmer Martens)라는 학자는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곧 신약의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을 누리는 삶은 신약시대 성도들이 그 안에서 누리게 될 안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전쟁과 여러 가지 투쟁과 갈등은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아직 구원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은 신자들의 모습이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그것을 완전히 완성하실 때 우리는 구원의 최종적인 극치를 보게 되고,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그리워하는 영화의 상태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보면 이것을 땅과 연결시키지 않아도 은혜로운 해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제비를 뽑아서 가나안 땅을 나눌 때 열두지파가 제비를 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한지파가 제비를 뽑았고 땅을 전혀 받지 못한 지파가 하나 있었는데, 그 지파가 바로 레위지파입니다. 기왕 있는 땅을 열하나로 나눌 것을 열둘로 나누면 될 텐데 굳이 레위지파에게 땅을 주지 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직접 그 지파의 기업이 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경작하는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종교를 경작해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사역을 위한 대가로 하나님이 열한 지파에게 십일조를 걷어 레위지파를 부양하게 하셨습니다. 십분의 일을 받게 되면 레위지파가 열한 몫이 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홉 몫이 됩니다. 그들은 오히려 다른 지파들 보다 더 나은 삶을 살면서 이 땅에 주어진 기업에서 자신들의 유업을 찾지 않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업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을 유업으로 갖느냐 하나님을 유업으로 갖느냐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은 자신들의 분깃이라고 믿었지만 레위사람들은 농사짓고 밭을 일구는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번영을 위해 온전한 마음으로 헌신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한 분깃이신 하나님
그렇게 볼 때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이십니다.”라고 말한 것은 레위지파의 고백을 하나님 앞에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지파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아 그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얻기 위해 경작하고 노동하면서 살지만, 나의 인생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있사옵나이다.” 하나님께 구별된 헌신과 완전한 의존의 정신이 그 안에 묻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분깃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죽음에 직면 했을 때, 죽음 후에 들어가게 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전망을 통해 본 현실이었습니다. ‘모든 것은 없어지고 전멸하게 된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영혼밖에 없다.’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하나님은 영원한 분깃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분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부모가 유산을 잘 물려줘도 3대를 가는 유산이 없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그것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업이었습니다. 시인은 잠시 회의에 빠져 있는 동안, 세상 사람들은 결코 가질 수도 없고 흉내 낼 수도 없는 기업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것과 이 기업을 인하여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성소에 들어 갈 때 악한 사람들의 결국을 깨닫고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상급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시간 속에 있는 것들에 의해 흔들리며 영원히 있는 것을 쉽게 잊었던 것을 회개했습니다. 악인의 번영은 시간 안에만 있을 뿐이지만 하나님은 시간과 영원에 걸쳐서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그 앞에서 깊이 통회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깨달은 내용이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이것이 어떻게 시인에게만 있는 일이겠습니까? 매일매일 우리의 마음의 눈을 닦아 깨끗이 하지 않으면 시간 안에서 영원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낙심하고 좌절하거나 영원히 있는 것보다 잠시 있는 것들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한 분깃으로 삼는 레위 자손들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뽑아낸 하나님의 백성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세상에 선전하기 위하여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신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으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의 불행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시 73:27)
본문해설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하나님을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시인은 시의 말미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예전에 하나님이 이 세상을 공의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했던 자신까지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망한다˙는 것의 의미
시인은 말합니다.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혹은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망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멸망한다’는 표현이 자주 나타납니다. 구약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망한다’는 표현은 건물이 파괴되거나 전쟁이 나서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고 자신 안에 생명의 기운이 있습니다. 물질의 경우, 골격이 서고 힘이 균형이 이루고 있는데, 이것들이 타격에 의해 무너지면서 본래의 존재를 상실하는 것을 ‘망한다’라고 말합니다. 집이나 성을 생각해보면 각기 질서를 갖추고 힘의 균형을 이루면서 건물, 성벽, 왕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타격을 받아서 무너져버리는 것이 바로 망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이런 건물이나 시설들이 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이 망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망한다’는 표현은 ‘죽는다’는 표현이 아닙니다. 인간이 망한다고 할 때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가치, 존엄, 어느 정도의 영광이 질서 잡혀 균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상태에서 무너지는 것을 말합니다. 무너지고 나면 그 사람의 본래의 영광도 잃어버리고 본래의 힘과 세력도 상실하고 자기가 파괴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존재감을 상실하는 것을 ‘망한다’고 표현합니다.
한나라의 임금이 나라를 통치하고 다스립니다. 왕궁에 살면서 모든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라를 통치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권좌에서 쫓겨납니다. 몸은 살아있지만 망한 것입니다. 원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위엄, 존재감, 그를 통해 구현되던 질서, 이런 것들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왕으로 있을 때는 한번 명령을 내리면 도시와 촌락, 먼 바다의 섬들까지도 자기의 통치에 복종했지만, 왕국이 망하고 나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몸은 터럭하나 상하지 않고 건강해도 본래 가지고 있었던 영광과 위엄, 가치, 존재감, 능력, 이런 것들을 상실한 것을 망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이유: 무지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혹은 “망합니다.”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라는 것을 포괄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떠나서 대적하는 많은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것은 자신의 경험을 반영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과연 이 세상을 공정하게 통치하실까?’ 하는 의심을 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다면 악인들의 번영과 의인의 고난은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그러면 차라리 나도 이 시대의 아들들처럼 막 살았으면 좋았을 뻔 했습니다. 내가 손을 씻고 매일 하나님 앞에 나를 정결케 하고 말씀에 의해 책망 받으며 산 것이 내게 무슨 행복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며 사는 생활 자체가 하나님을 멀리 떠난 생활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는 은유적으로 자신을 내포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멀리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과 후에 대조적으로 나타나는데 전 절에서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의 원인이 무지라고 본 것입니다. 자신이 무지의 피해자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무지는 자신이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지는 곧 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무지를 죄악처럼 미워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지식을 배반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호세아 6장을 보면 교만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올 것을 선지자가 예고하면서, 그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라고 말하는 시대가 올 것임을 예고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마음으로 일평생 사는 것이 신자의 의무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원해서, 혹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멀리 떠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시인은 지독한 회의의 과정을 통해서 이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눈에 보이는 인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영원한 사후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무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하게 되면서 그런 삶을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악을 행하고 죄를 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무지의 어둠 속에 갇혀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고 무지 가운데 행하며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거절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과 고통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사람은 없지만, 실제로 무지를 극복하는 지식을 통해 그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가장 옳지 않은 방식으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입니다.
음녀와 같이 주를 떠난 자의 멸망
하반 절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앞에서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라고 소극적으로 말해놓고 하반 절에서는 “음녀같이 주를 떠난자”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음녀’는 무엇입니까? 음탕한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남편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육욕을 좇아서 다른 남자를 탐하는 여자입니다. 이것은 순간순간의 의지적인 결정이지만 그러한 의지의 결정 밑바닥 속에는 음녀의 성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람기’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매순간 의지로 결단하고 악을 행하고 죄를 짓는 것이지만 그 속에는 한 남자에게 정착하지 못하는 음탕한 기질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음탕한 기질이 추호도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것이 강하고 깊은 성향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엄청난 의지를 발동해야지만 지을 수 있는 죄를 음녀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작은 의지로도 넉넉히 짓는 것입니다. 음녀는 경건하게 살고자 하지만 어느 순간 잠시 음탕한 유혹을 느끼는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닙니다. 뼛속까지 그런 기질이 배어있는 성향화 된 죄인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호세아의 아내 ‘고멜’입니다. 그는 남편과 혼인했습니다. 그런데 외간 남자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그를 데려옵니다. 다시 돌아올 때 그의 마음은 진실했을 것입니다. 고멜은 이미 오래전부터 신전의 창녀로 자신의 몸을 제의에 바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외간 남자와 몸을 섞으며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어느 정도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음탕한 성향이 죄책감으로 통제될 수 없을 정도로 기질화 되어있었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음녀같이 주를 떠났다”는 것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혼인관계로 묘사합니다. 이것이 나중에 신약에 와서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로 묘사됩니다. 그리스도를 교회의 남편이라고 보고,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보는 비유는 신약에서 새롭게 고안된 비유가 아닙니다. 구약에 이미 뿌리를 두고 있는 여호와와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을 혼인관계로 설명한 것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혼인 관계에 충실하지 않고 바람을 피웁니다. 그것을 가리켜 “음란하게 우상을 섬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기는 동기가 마치 한 여자가 남편을 배신하여 정절을 잃어버리고 음탕한 일을 하는 것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신에게 절하고 이방신을 공경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는데도 그렇게 했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간단합니다. 자기 번영과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땅으로부터 건져내어 가나안까지 데려오셨지만 가나안에 와보니 수많은 신들의 세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은 원시적인 신앙처럼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는 20세기에 새롭게 생겨난 사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겠지만 굳이 배타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서 가나안 신들에게 밉보일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한다면 우리의 행복과 번영에 차질이 올 것이다.’ 그러면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음란한 우상숭배였습니다. ‘음녀와 같이 주를 버린 자’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약을 깨뜨리고 죄를 짓고 세상에서 취해야 할 자신의 번영과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배반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주께서 다 멸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앞에서는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라는 미완결형을 사용하고, 뒤에서는 완결형을 사용합니다. 두 개를 대조하면서 하나님은 당신을 멀리 떠나고 음녀와 같이 언약을 파기하고 죄를 지은 사람들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일평생 악을 행하고 마지막 죽을 때도 꽃상여에 둘러싸여 평안한 얼굴을 한 사람들을 보면서 예전에는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악인이 저렇게 행복을 누리다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가?’라고 말했지만, 성소에 들어갈 때 일의 결국을 깨달은 다음 “음녀와 같이 주님을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그들의 사후에 심판이 행해졌다.”라는 사실을 완결형으로 표현하면서 그의 확신을 보여줍니다.
진리에 대한 굳은 믿음
결국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체험적으로 확고히 붙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많은 교리를 배우고 성경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신뢰하면서 실제적으로 헌신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지식이 조금 적어도 받은 지식들을 믿음으로 꽉 붙들고 거기에서 은혜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의 신앙이 훨씬 더 견고한 것입니다. 물론 주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견고하게 사는 사람이 더 많은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붙들고 산다면, 그의 삶의 질은 현저히 달라질 것입니다. 많은 지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진리를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 실제적인 믿음의 삶을 확신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확신과 신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신앙의 커다란 낭패를 보고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굳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배운 진리에 대한 깊은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그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굳게 믿으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네게 복이라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본문해설
73편 시편의 결론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 가까이함’이라고 하는 것이 히브리어로는 ‘하나님의 나아옴’입니다. 의미상으로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인지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시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다 해석이 가능합니다. 28절 시작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께 가까이함’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가까운 상태를 보여줍니다. 여기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시인은 회의의 과정, 영적이고 정신적이고 신앙적인 방황의 과정을 통해서 마지막으로 깨닫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상태에 있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복
앞에서 시인이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서 걸려 넘어지고 방황했던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악인의 번영을 보았습니다. 의로운 사람의 시련과 고난도 보았습니다. 둘을 대조해보았습니다. 악인은 죄를 짓고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도 계속해서 형통했습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징책을 받았습니다. 이 둘을 대조해보십시오. 악인은 마지막에 죽을 때에라도 비참하게 자신이 행한 모든 일에 대한 정당한 응보를 받을 줄 알았는데 마지막에도 평안히 죽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종일토록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결국 시인은 ‘나도 아무렇게나 살아버릴걸.’ 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형통함, 인간의 복된 누림, 이러한 것들이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행복을 기준으로 삼고 보니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의로우심이 설명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성소에 들어갈 때 깊이 깨달았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악인을 형통하게 하고 의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해서 그것이 불법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적극적인 면에서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기준점에서 놓쳤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시인은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께 징책을 당하였습니다. 달리 해석하면 하나님이 매일 아침마다 그를 꾸짖으시므로 그를 주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계셨습니다. 그는 종일 재앙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징계하셔서 정결한 자로 만드시고 당신을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재앙도 허락하셨습니다. 결국 시인이 받는 징책과 재앙, 그리고 의롭게 사는 가운데서 당하는 괴로움은 거꾸로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누리게 하시고 우리가 당신과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의도는 시인을 당신과 가까이 있게 하고, 더 온전하고 신실한 사람이 되어 당신과 함께 동행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버려졌습니다. 그들은 형통했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죽을 때도 평안했지만 죽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저희들에게 다윗과 같은 고난과 재앙은 없었지만 거기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형통하지 못한 것도 하나님이 그와 가까이 하시는 증거이지만, 악인에게는 형통한 것 자체가 하나님이 그를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리실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은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두심으로써 그들이 온갖 악에 빠지도록 허락하시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저희의 불의를 향하여 하늘로부터 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깨달은 또 하나의 성경적인 관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을 갖게 된다고 하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옮기는 것입니다. 만약이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너무나 불행한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은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복이 아니라 성도들만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를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준점이 다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 자녀로서의 삶입니다. 시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가장 복되신 분이고 그분과 가까이 하는 것이 가장 복된 상태인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이 누리는 행복의 원천이 삼위하나님 자신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감으로써 누리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복이고, 그분을 멀리 떠나서 누리는 복이야말로 우리를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궁극적으로는 우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떼어 놓는 불행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과 불행의 원천은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보고자 하는데 있습니다. 만약에 누구든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행복의 원인이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복에 대한 관점을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자기를 중심에 두고 예전에는 내 힘으로 행복해 보려고 했던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행복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써 그분 때문에 누리는 그 행복, 그 은혜, 그 복락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복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호와 안에 피난처를 둠
그러면서 시인은 두 가지 사실을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미래의 결단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나는 주 여호와 안에 나의 피난처를 둘 것입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훨씬 더 감동적입니다. 성지를 여행해보면 유난히 피난처로 삼을 만한 곳이 많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위틈입니다. 시내산을 보면 큰 산 전체가 바위덩어리입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바위가 깎이고 다듬어져서 생긴 곳입니다. 그곳에 몸을 숨기면 머리위에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한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은신처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피난처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 여호와 안에 나의 피난처를 둘 것입니다.”라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전에는 피난처를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았는데,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떠나보내고 나니 어디에도 피난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그 안에서 안식하는 신앙을 잃어버리고 나니, 회의와 낙심과 하나님에 대한 의심, 이 모든 것들에 노출되고 공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신앙을 모두 잃어버리고 “차라리 주의 아들의 시절을 향하여 나도 궤휼을 행하였으리이다.”라며 방황하고 흔들리는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시인은 하나님을 믿으며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피난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고 신실한 신앙을 가지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삶이 우리를 속이는 것 같고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는데 시련을 당할 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물론 훌륭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지금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재앙을 당하는 것 같고 원수들이 비웃어도 언젠가 큰 고통과 괴로움이 변하여 하나님 앞에 나를 복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되겠습니까? 이 “어떻게?”를 이해할 수 있다면 믿음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냥 그 사실을 알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모릅니다. 오늘 내가 믿음을 지키며 살려고 하는데 고난이 찾아옵니다. 상대적인 혹은 절대적인 십자가를 지고 괴로움을 당하는 이 상황이 어떻게 결론 날지 모릅니다. 그때 수많은 의심의 화살들이 날아오고 회의와 하나님을 향한 불신앙이 고개를 들고 대적처럼 엄습합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피난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손으로 덮으시네
시인은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라고 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였습니다. 악인이 형통할 때 분이 날만큼 시기하는 마음이 들고 고난을 당할 때 견딜 수 없는 의심이 밀려왔습니다. 그 때 시인은 하나님께 피하여야 했습니다. 시편 31편 저자는 “인생 앞에서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해둔 그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라고 고백합니다. 주께서 은밀한 장막에 감추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었습니다. 오히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경건하게 살아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억울함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맛볼 수 없었을 하나님과의 밀회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시인이 뼈저리게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고백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나는 주님께 피할 것입니다. 주께 피하는 사람들은 죽을 것 같아서 주님께 도망치지만, 시련이 아니었다면 누릴 수 없는 참된 행복을 그곳에서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 당신이 복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행사를 전파함
두 번째는 주의 행사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여기 ‘전파한다’고 되어있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아리다’ 혹은 ‘기록하다’ 혹은 ‘말하다’라고 되어있습니다. ‘싸파르’(rp's;)라는 단어인데, 수를 헤아리는데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주의 모든 행하신 일들’이 복수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을 내가 하나씩 하나씩 헤아릴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말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입니다. 세상에는 자신처럼 하나님을 전적으로 붙들고 의지하지 못하며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헤아리고, 알게 된 것을 사람들에게 설명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신뢰할 만한 분이며,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 외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행복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께 피하고, 그분이 행하신 크고 놀라운 일들을 헤아리면서 그분의 성품을 배우고, 하나님의 성품을 사람들에게 말하여 주님을 의뢰할만한 분으로 여기도록 하고, 그분을 가까이 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도가 세상에 살아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결론과 적용
73편을 끝내면서 우리는 다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밖에서는 어떠한 행복도 구하지 않고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든지 그것 자체에 탐닉하지 않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더듬어 올라가 그분을 더 사랑하고 그분께 더 가까이 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인생의 위기와 시련이 겹칠 때 우리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더 큰 행복을 맛보며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다른 방식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다른 것들은 이 세상이 앗아갈 수 있는 것들이지만 이것은 세상이 약탈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에 의존한 행복이 어찌 진정한 행복이겠습니까? 잃어버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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