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25일 새벽예배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0-15).
그렇게 해서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앞을 볼 수 없게 된 사울이 직가 라고 하는 거리로 들어오게 되죠.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서 모두 다 그렇게 앞을 못 보게 되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럼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죠.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겠죠. 그래서 바울이 워낙 죄인이었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거는 아니고 오히려 어떻게 봐야 돼야 하나면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눈이 멀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울은 하나님이 그 사울로 하여금 자기 교만을 꺾는 한 방법이었다.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타난 하나님을 본 것도 엄청난 사건이었는데 눈이 멀게 됨으로 말미암아 이제 자기가 정말 아무것도 아니고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거에요. 만약에 눈이 멀지 않았다면 이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빛으로 나타나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뵈었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 신학적인 편견이나 이런 것들이 워낙 강하니까 아마 그 경험을 부인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어쨌든 이제 사도바울이 이 경험을 통해서 눈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은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까지 내려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신만만하고 자기 의존적이던 모든 것들이 산산이 깨뜨려져 부서지게 되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사도바울이 일생동안 눈병에 시달리게 되요. 사람들이 그렇게 추측하는 거죠. 그래서 세 번이나 그것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그것이 아마도 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앞을 보지 못했던 그 질환이 계속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사단의 가시라고 저희가 표현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글도 쓸 수 없었어요. 로마서 같은 것도 도디오 라는 사람이 대필을 합니다. 사도바울이 불러주고 대필을 하죠. 그러니까 두고두고 그를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하시기위한 도구로 사용하신 거죠. 어쨌든 그런 추측들이 있어요. 그런데 이제 아나니아라 하는 이 여제자 이미 다메섹에 그리스도를 잘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또 이 사람은 단순히 신앙이 좋을 뿐만 아니라 아주 신령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어서 주님과 더불어 깊은 교제하는 그런 여제자였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울이라고 하는 자가 있는데 그에게 안수해서 눈을 뜨게 해라!.” 깜짝 놀랐죠. 이미 그 사람의 악명이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다메섹에까지 널리 퍼졌기 때문이죠. 예수님께서 완전히 역설적인 말씀을 하시죠. “그러나 그가 나의 이름을 이방과 임금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을 가장 박해하고 교회에 해를 입히던 사람을 들어서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위해 봉사하는 그러한 정말 헌신적인 주의 사자를 만들어 내셔요. 이것을 보면서 여러분은 실패한 베드로를 다시 불러내는 장면들이 연상되지 않아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철저히 부인한 배신자가 되었는데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그 사람을 불러서 그래서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는 거예요. 그것이 결국 뭘 보여주나 하면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중 누가 주님을 위해서 신실하게 살고 주님께 잘 헌신하며 살지라도 결국은 그렇게 주님께 봉사하며 헌신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자기 자신이 그 일을 한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일으켜 세워서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게 만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실패한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시고 그리고 주님을 오히려 대적하고 핍박하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희망을 주셔서 그들도 예수 안에서 새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거죠. 그래서 사울이 역시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사울은 은혜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어요. 자기 자신이 생각만 하면 자기는 하나님의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에요. 그래서 내 자신의 본모습은 주님을 핍박하고 교회를 박해해서 스데반 같은 선한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데 동참한 그런 비루하고 아주 더러운 인간이었지만 그러나 이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시는 도구가 되었는데 결국은 그렇게 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그래서 사도바울이 죽을 때까지 백발이 성성한 나이가 되서도 계속 감격하면서 하나님 앞에 다시 되새기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는데 그리스도께서 나 같이 핍박자요 포행자이던 이 더러운 인간을 부르셔서 주의 일꾼을 삼으셨다. 용서하시고 구원하셔서 주의 일꾼을 삼으셨다. 이것이 숨질 때까지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이에요. 거기에서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자기를 불러주신 주님의 은총만이 오늘날의 자기가 있게 했다는 사실 때문에 감격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바로 사울이 사도바울로서 살아갈 수 있었던 원인이고 소명의 핵심이에요. 그래서 처절하도록 그 신적인 강제력에 붙잡혀서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이러한 것을 깊이 본받으면서 우리도 사울 못지않은 그런 변화를 받아 주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도 그렇게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그 은혜를 간직하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