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4월 9일 새벽예배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까 가라사대 나는 네게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행 9:4-9).
이제 구체적으로 사울이 회심하게 된 경로가 나옵니다. 사울의 회심에 핵심은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리적으로 회심이라고 하는 것은 지난날 자신의 죄에 대해서 깊이 뉘우치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는 것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이 회심은 구원에 이르도록 회심하는 경우에는 그 회심이 한번밖에 없지만 구원받은 이후에 신자가 또 죄에 빠지잖아요. 그럴 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갱신되는 효과가 나타나요. 이것도 우리들이 넓은 의미에서 회심 속에 집어넣은 겁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회심은 한번밖에 없고 넓은 의미의 회심은 그 좁은 의미의 한번밖에 없는 회심이 새롭게 갱신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는 이야기죠.
그래서 여기 사도바울의 경우에는 첫 번째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죠. 이 회심에 핵심이 뭐냐 하면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그러면 자신에 죄에 대한 회개가 생겨나요.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나면 그 예수님이 우리사람들을 만나주실 때 성령님께서 제일먼저 예수님에 관해서 전달해주시는 메시지가 뭐예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거는 “너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저렇게 십자가에 죽으셨다”고 하는 거잖아요. 그것 없는 예수님과의 만남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당연히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인간이 제일 먼저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게 되고 그다음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고 그분을 믿는 신앙이 생겨나는 거죠. 이렇게 됨으로써 신자가 진실한 변화에 이르게 되는 것이고 사도바울이 그런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죠. 모든 죄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모두 격렬한 회심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이 회심은 이전에 살았던 죄에 대한 깊은 인식 속에서 회심의 경험이 생겨나는 거예요. 이 죄라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살고자 하는 인간 안에 있는 악한 경향성을 가리키는 것이거든요. 그런 악한 경향성들이 이속에서 생겨나게 되죠. 그것을 하나님 앞에 실토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아파하는 것이 회개에요.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 계속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려고 할 때 자신에게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것들이 이제 말하자면 믿음 속에 포함되는 거죠.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예수님이 사울을 만나서 제일먼저 하신 말씀이에요. “사울아! 사울아!” 그러고 예수님께서 빛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이 사울이 “주여! 뉘시니이까?” 하고 고백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주여!” 하고 부르는데 아마 이때에는 사울이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사실 “주여! 뉘시니이까?” 이야기 했을 때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있어요.
첫째는 그 시대에 자기보다 높은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었어요. 자기보다 지체가 높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주여” 라고 불렀단 말이죠. 또 하나의 가능성은 뭐냐 하면 이렇게 찾아와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몰랐을지라도 왜?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했다고 믿지를 않았으니까요. 그러면 또 하나의 가능성은 뭐냐 하면 이렇게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인식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구약에 보면 이런 하나님의 현현이 많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시는 장면이라든지 이렇게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부르실 때에 그때에 “주여” 하고 부르는 것 이것은 분명하게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죠. 그런데 문제는 “뉘시니이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자기 자신이 경험해본적도 없고 이렇게 자기를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이실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알지만 실제로 경험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뉘시니이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로 대등하게 궁금해서 “당신 누구요?”하고 묻는 것이 아니라 엎드러진 체 이미 그분이 무엇인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 커다란 경외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체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 나타난 이러한 놀라운 현상에 대해서 누구시냐고 묻는 장면이에요.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것이죠.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더 이상은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사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박해를 받으신 것은 사실이었지만 사울이 예수님을 박해했다는 이야기는 안나오거든요. 근데 이렇게 예수님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신 그 문맥이 어느 지점이었느냐 하면 바로 사울이 핍박하러 가는 지점이었거든요.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넣기 위해서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어요. 여기에서 우리들이 아주 놀라운 일치를 발견하게 되요. 그게 뭐냐 하면 지금 예수님께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그거는 결국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잡기위해서 다메섹으로 가는 이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죠. 물리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고 이 땅에는 교회들만 외롭게 남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예수님과 여기에 남아있는 교회 사이에는 영적인 연합이 있어서 그래서 이것이 바로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머리가 되심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래서 비록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금 교회가 당하고 있는 핍박을 예수님께서 함께 고통당하고 계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죠. 비유하자면 누군가 우리다리를 발로 차서 때리면 머리에 있는 입이 “왜 때려” 그러고 얘기하듯이 이모든 지체들이 하나하나 명칭은 있지만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이 모습이 결국은 또 이전에 살기가 등등해서 그렇게 스데반을 죽는 데까지 투표하고 이렇게 박해를 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향한 도전이었다는 것이 되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말씀을 하시는 거죠. 그때에 모든 사람들이 소리는 들었어요. 빛은 보지 못했지만 소리는 들었어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께는 사울이었어요. 사울을 거꾸러트려서 그를 완전히 새사람으로 만드시기 위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거죠. 여기에 나타난 이 빛이 물리적인 빛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보이진 않는 아주 신비한 영적인 빛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런 빛을 경험합니다. 결국은 이 사람이 눈이 멀고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뒤편에 보면 아나니아를 만나게 되잖아요. 그리고 안수 받는 장면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거꾸러트려서 그래서 그를 새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앞에서는 바꾸어놓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얼마든지 완악한 죄인도 바꾸어서 그래서 새롭게 해놓으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놀랍게 변화되는 것이죠. 이회심의 체험은 획일적일 수 없어요. 그러나 그 체험이 어떻게 다양하든지 간에 그 핵심에는 반드시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적 믿음이 있다는 거죠. 이 사건이 이제 사도바울이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모든 헌신적인 삶에 핵심이 됩니다. 사도바울이 은혜를 받으면 지금 말씀드린 이 사건이 그 사람 속에서 아주 놀랍게 역사하는 그래서 가슴을 뛰게 만들고 충만해지게 만들어서 더욱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