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9일 새벽예배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베드로가 욥바에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행 9:39-43).
어제 말씀드린바와 같이 도르가라고도 불리는 이 다비다의 마음에 그런 사랑이 있으니까 그런 구제와 긍휼을 베풀게 되었던 것이죠. 이렇게 긍휼과 구제를 베풀게 된 것은 다비다 안에 있었던 하나님의 은혜가 시킨 것이다. 은혜의 열매가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그 은혜를 통해서 그 사람 자신이 고쳐지게 되는 거예요. 고쳐지면서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변해가는 거라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우리들이 인생을 이렇게 보면 우리가 어느 정도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느냐, 얼마나 많은 재물을 모으느냐, 또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으며 인정을 받느냐 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 안에 있는 사랑에만 달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잔인무도한 사람이면서도 높은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있고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인격이 아니면서도 박수갈채를 받는 사람들도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죠. 그렇지만 한사람의 삶의 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이세상의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결핍되어 있는 자원이 있어요. 그것은 사랑이에요. 그것은 누구든지 모두 다 필요로 해요. 그런데 그것을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 줄 수 있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사랑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태어나서 이 세상에 이제껏 살아오는 동안에 우리는 항상 사랑받는 것도 두려워하고 사랑을 아는 것도 무서워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이제껏 까지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우리들의 생애를 가만히 돌아보면 누군가가 사람들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사랑을 베풀고 이렇게 하면 사람들은 두려워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이제껏 까지 아무 이유도 없이 자기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거의 못 만났기 때문이죠. 심지어 부모도. 그래서 이 부모가 매우중요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랑의 기술, 아트를 거기에서 다 배워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인간이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가는 거예요. 그런 것들 속에서도 재대로 배우지 못하고 그런 사람의 모습이 결국은 망가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는 우리들이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면
다시 한번 이런 것들을 치유 받고 고쳐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겉모습만 교회에 다니는 것 가지고는 그것들이 그렇게 고쳐질 수 없어요. 진짜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어머니 같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루만지시는 그런 하나님의 고쳐주심에 자기를 내어드리는 상당한 시간들이 필요하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고통들이 뒤따르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잘 기억을 하세요.” 사랑을 잘 못 받으면서 살아온 고통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후에 올바로 사랑하기 위해서 고쳐지는 과정이 훨씬 더 많이 고통스러운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사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보다 더 큰 것은 올바로 사랑할 수 있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고쳐지는 것이 훨씬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점에서도 보면 하나님 없이는 어떻게 살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주님이 아니면 희망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그런 자신들을 돌아봐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는 비결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에 깊이 감화 되는 것이죠. 그러기 전까지는 사실 ‘사랑이 없다’ 하는 것은 ‘사랑이 많다’ 는 뜻이거든요.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 사랑이 많다는 것이에요. 사랑의 소극적인 측면은 자기를 위하려고 하는 것들을 부인하는 것이고 적극적인 측면은 자기를 걷어 내어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이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고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새롭게 발견하기 전까지는 결국은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사랑과 결별할 수 없는 거예요. 그 많은 은혜가 있어도 자기사랑과 결별할 수 없는 거예요. 문제는 정도의 문제가 되는 거예요. 얼마만큼 자기사랑을 걷어내느냐에 따라서, 그런 사랑이 거의 없을 때 인간이 굉장히 사악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것들을 많이 걷어내고 나면 비교적 그 인간이 미덕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앞에 자기가 비참한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참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에서 비롯되는 눈물이 있어요. 그리고 그 한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을 때 그때 그 사람이 진정한 인간의 완성으로 향하여 한걸음 옮겨놓는 것이에요. 이 도르가가 말하자면 그런 사람이었어요. 일생을 가난한자와 비참한 자들을 위해서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의 말을 하거나 성령의 능력으로 베드로처럼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그런 재능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아요. 그에게 주신 달란트라면 그저 고운 땀새로 그렇게 옷을 짓는 일이었는데 그것을 감당할 수 가 있었는데 그 일을 가지고 섬긴 것이에요. 그랬더니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에요. 그가 만든 옷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없었고 그 옷을 입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거듭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에게 주신 재능을 가지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섬기니까 그러니까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도르가를 통해서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 말이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올 때도 있어요. 거의 누군가의 매개체도 없이 직접,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인지를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다는 말이죠. 말씀을 통해서, 그런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에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것을 알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받아들여져 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그 받아들여짐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어떻게 사랑하고 받아들여 주시는 지를 경험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특별히 사랑을 베풀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이유가 그 때문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러잖아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되 특별히 믿음의 식구들에게 선을 행하라 이러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람들이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베푸는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의 성품을 배워가고 또 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일생을 사는 동안에 우리들이 많은 눈물을 흘리잖아요.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처한 고통이나 괴로움 시련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이 눈물을 흘린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반드시 순수한 삶을 산다는 보장은 없어요. 그러나 그가 만약에 하루에 두 번씩만 눈물을 흘릴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제가 교사리바이벌이라는 책 속에서 그 얘기를 했어요. “하루에 두 번씩 펑펑 울 수 있다면 한번은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 때문에 울고 또 한번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영혼들 때문에 울 수 있다면 그는 비록 약하나 반드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썼어요. 그러니까 이 도르가 속에 있는 사랑이 바로 그런 종류의 사랑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비록 비천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겨우 속옷이나 몇 개 만들어주고 겉옷이나 만들어주는 그런 바느질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많은 그곳에 있는 과부를 비롯한 여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고 하는 것을
이 도르가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알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 이 도르가의 삶이 작은 삶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도르가의 생애가 하찮은 생애라고 우리가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원하시는 거예요.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 자체는 은혜의 한 열매이기 때문에 우리마음에 있는 경향성 내지는 지향성이거든요. 우리 자신의 본성이 바꿔야지만 이것이 계속 사랑의 성향을 지니게 되는 거예요. 본성이 변해야지만 사랑의 성향을 지니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한 순간에 여러 가지 복잡한 동기가 작용을 하면서 충동적인 사랑의 감정이 생겨날 수 있어요.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의 감정이라기보다는 우발적으로 생겨나는 정적인 충동이에요.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예를 들면 이런 거죠. 평생 강도짓을 해서 먹고사는 사람이 어느 날 길거리를 지나가는데 “딸랑딸랑” 하고 자선냄비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거예요. 크리스마스였단 말이죠. 갑자기 이웃이 불쌍한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훔친 돈의 일부를 자선냄비에 넣고 목적지로 가는 거예요. 다시 또 돈을 훔치기 위해서.. 이런 것들은 뭐냐 하면 성향자체가 이웃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향자체가 이웃을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자기를 위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향인데 어느 한 순간에 여러 가지 주변의 환경과 여건에 의해서 자극이 되어서 충동이 된 거예요. 이것은 뭐냐 하면 지속되지 않아요. 인격의 특징이 아니라 이거죠. 그 사람의 인격의 특징은 훔치고 빼앗고 도적질하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 아파하는 그것이 그 사람의 성향이 아니란 말이죠. 성향이 아니어도 어느 한순간에 충동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어떤 사람들을 자극해서 충동을 받게 해가지고 어느 한순간에 하게 하는 그런 것은 권모술수이지 참된 사랑을 향한 초청이 아니에요. 정말 정직하게 우리들이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얘야, 너희는 나와 함께 이 죽어가는 세상을 사랑하자,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변해야 한다.”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의 삶을 보면서 우리들이 배워야할 모본도 발견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자신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닮아가는 본성적인 변화가 없이는 본성에 대한 신령한 변화가 없이는 우리들이 그렇게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변화되어야하는 거예요. 신령한 은혜가 계속되어야하는 거예요. 이 도르가는 주님을 깊이 사랑하던 사람이었죠. 그런 사랑의 혜택을 사람들이 받으면서 그 도르가를 높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도르가를 향해 애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통해서 높아진 것은 그 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었고 예수그리스도셨단 말이죠. 그것이 하나의 성향이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필요할 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가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죠. 어떤 강물이 막 흘러가다가 ‘땅이 좀 건조한데.. 물을 좀 줘.. 말어.. ’그러다가 결심을 하고 ‘좀 주자!’그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강물이 쭈욱 흘러가면 주위에 메마른 땅들이 수없이 그물을 빼앗아가는 거죠. 그것이 하나의 성질이고 지향성이에요.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성향이에요. 도르가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랬더니 어떤일이 일어났어요? 많은 사람들이 이 도르가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아파하는 거예요. 사실 이 사람들이 이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도르가가 죽은 후에 주님께 갔다는 사실과 또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도르가를 슬퍼하는 거죠.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어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들이 받은 어떤 혜택이라기보다는 그런 사랑을 베푸는 도르가의 삶을 통해서 이 사람들과 도르가 안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연합의 감정이 이루어진 거예요. 이거는 아주 굉장히 큰 거예요. 그래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자신의 인생론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죽음의 공포보다 더 위대한 것은, 더 힘이 있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다. 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헤엄을 칠 수 없는 어머니가 그 물에 뛰어드는 것은 바로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사랑의 감정이 행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랬어요. 사랑의 감정이 시킨 것이다.. 성경에도 보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이랬어요. 죽음의 공포도 이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에요. 이러한 사랑의 감정이 도르가와 도르가에게 긍휼을 입었던 사람들 사이에 연합을 이루게 된 것이에요. 그 연합을 통해서 도르가의 사랑이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도르가는 통로였을 뿐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들어온 거예요. 도르가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이 그렇게 슬퍼했던 것은 사실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 들어오는 그 아름다운 통로하나가 사라진 거예요. 하나님이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진 않았겠죠. 그렇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들어오는 훌륭한 통로하나가 끊어진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슬퍼한 거죠. 이런 사람이 바로 이 세상에선 아무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훌륭하게 보여준 사람이었어요. 도르가가 설교했다는 이야기도 안나오고 유능하게 복음을 전파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아요. 확실한 사실은 이 사람은 그리스도를 비추는 한 빛이었어요. 그래서 자신 안에 역사하는 신령한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을 통해서 주님이 누구인지를 훌륭하게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도 그런 말씀드렸죠. 아시시아(?) 성자 프란시스가 말하기를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십시오. 꼭 필요하면 말도 하십시오.” 온 마음으로 온 삶으로 보여준 거예요. 도르가의 마음속에 있는 이러한 사랑이 이들과의 연합을 가져오게 된 거예요. 구약에 보면 하나님 앞에 패역하게 살았던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 가끔 어떤 기록이 나오나하면 “아무아무개가 아끼는 자 없이 죽었더라.” 한사람이 죽었는데 아무도 애달파 하지 않아, 가족들은 애달파 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가족들조차도 애달파하지 않는 버려진 사람도 있어요. 그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왕의 지위를 누렸으면 뭘 해, 많은 자원들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자신을 만족하게 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인생의 참된 가치는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인생의 참된 가치는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주님이 주신 내적인 평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평강, 그리고 하늘과 이 땅의 자원,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을 가지고 흘러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 그래서 그 사람의 생애 전체가 이 사랑받지 못해서 구겨진 사람들을 펴고, 그 사랑이 없어서 서로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망가뜨려진 이세상의 구겨진 데를 다시 곱게 펴고 고치고 새롭게 하는 동안에 그 속에 이기심과 자기사랑으로 뒤범벅이 되어서 피터지게 싸우는 그런 경쟁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참사랑의 탁월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부른 찬송처럼 “광명한 해와 명랑한 저 달빛 다 아름답고 묘하지만 주 예수 빛은 더 찬란하여 참 비교할 수 없도다.” 그분의 탁월한 위대함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를 통해서 그렇게 되길 원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도 가만히 한번 생각해 보세요. 자, 오늘 주님이 이제 기쁘게도 정말 기쁘게도 우리에게 “얘야 오늘 아침이 너희들에게 이 땅에서 마지막 아침이다. 점심은 하늘나라에 와서 나와 함께 들자~!” 그러실 때에 여러분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아낄까요? 생각해보세요. 혹시 우리의 삶이 아끼는 자 없이 슬퍼하는 자 없이 죽는 삶은 아닐까요? 혹은 여러분을 낳아준 어머니나 아버지, 형제들은 목 놓아 울지만 다른 사람들은 여러분들을 향해서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는 의미 없는 존재가 아닐까요? 생각해 보세요. 정말 여러분들이 오늘 아침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으면 도르가의 죽음 앞에 모였던 많은 사람들처럼 흘러가는 인생길 동안 여러분들이 베풀었던 주님의 은덕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바라보며 여러분들과 이 세상에서 누렸던 비범한 사랑의 연합이 사라진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하나님, 다시 한번 이 사람을 이 세상에 살아있게 해 달라” 고 그렇게 기도하고 싶은 그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을 까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찬송) 주님의 사랑이 나의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참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하려고 자기 자신에 대해 배려를 많이 할 때에는 주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들지 않아, 이기적일 수록 우리 자신이 우리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불안해지게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자체가 우리는 우리자신을 지킬만한 자원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는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진짜 도르가처럼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사랑에 감화를 받아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가득해서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고 우리의 관심사가 이 세상에서 나의 삶의 양태를 높이고 그리고 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데 초점이 있지 않고 어떻게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이 모든 은혜의 자원들과 이 땅의 자원들을 가지고 그렇게 흘러가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때에 우리자신에게 진정한 만족이 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십호(??)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기 사랑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순종하게 될 때 우리 인간은 참으로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얽매이게 만드는 것이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비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사랑을 베풀잖아요.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내가 베푸는 사랑의 혜택을 다른 사람들이 누리기 때문에 그들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사랑을 베풀게 되면 그 사랑의 위대한 힘은 그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때 그 사람이 사랑을 받으면서 그 사랑을 받지 못해서 망가졌던 그의 삶에 변화가 오는 거예요. 그래서 고쳐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이런 얘기 한번 해볼게요. 땅이 있는데 말이죠. 거기에 조그만 식물하나가 심겨져 있어요. 물을 줘요. 그러면 나무가 잘 자랄 꺼아니에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거는 물론이고 메마른 땅에 규칙적으로 물을 부으면 토질 자체가 바뀌는 거예요. 다른 땅으로.. 그래서 리비아 같은데서 5600km 되는 대 수로를 판다는 거예요. 수로의 직경이 사람 키보다 더 큰 관으로 바닷물을 끓여가지고 증류해서 그 물을 흘려보내는 거예요. 이유가 뭐에요. 사막에 계속 물을 뿌리면 나중에 토질이 바뀌어서 식물을 심을 수 있는 옥토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문제는 바로 그거에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내가 사랑을 베풀면 일회용품처럼 사람이 혜택을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그런 사랑받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이 변화되어가고 그런 사랑을 받고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사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완성해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도 또한 주님의 그런 사랑의 한 통로가 되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세상을 고치고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그런 도구들로 살아갈 수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