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중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성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1-3).
본문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응답도 들리지 않음을 탄식하는 시인의 영혼과 마음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마음속에서 깊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서 혼자 극복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상태가 되었는데도 부르짖을 줄 모르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다울 때의 그 기도는 숨 쉬는 호흡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지 않을 때에는 영혼 깊은 속에서는 부르짖고 싶다 하더라도 실제로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는 무언가 막혀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 막힘의 정체에 대해 살펴봅시다. 시인은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 매우 긴급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겠다는 마음이 그의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원래 소원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면 그 기도는 마음을 녹이는 기도가 되어서, 화산이 폭발하여 나오듯 영혼 깊은 속에서 밖으로 분출하게 됩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하려고 하니까 기도가 잘되지 않는 것이지요. 무엇이 이를 방해하였을까요? 우리들도 종종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하게 되면 그렇게 품었던 열렬하고 경건한 마음은 사라지고, 기도를 시작하자마나 마음이 굳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과 영혼의 죄를 다루시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이 세상 자체에 대해 몰두하는 마음은 기도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의 틀들을 허물어뜨립니다. 사랑하는 것이 별로 없다하더라도 많은 염려와 근심 -물론 이것도 사랑의 또 다른 모습이지만 -이 있다면, 이도 역시 우리의 마음의 틀에 영향을 줍니다. 마음의 틀이라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사물들을 볼 때에 그것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지각하게 만드는 구조물입니다. 마음의 틀이 올곧고 하나님을 향하여 있으면, 사물들을 볼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성품, 거기서 비롯되는 인간인 나의 의무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시편의 말씀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마음의 틀이 하나님을 향해 있게 되니 시인은 산을 보더라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생각났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그 본문에서의 시인의 마음의 틀은 하나님을 향해 잘 유지되었기에 그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본문 속 시인의 마음의 틀은 죄로 인해 무너졌기에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 지킴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의 틀은 예배와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은혜로 수시로 씻어내지 않으면 올곧게 유지되기가 힘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틀이 휘어지게 되고, 기도를 실천함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없게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기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렇게 흐트러진 마음의 틀들은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쳐 죄와 정욕이 번성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시인은 죄를 지었기에 마음에 큰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구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다루시는 과정을 통해 흐트러진 마음의 틀들을 다시 구축하고자 하십니다.
모든 올곧음과 경건함 삶은 올바른 마음의 틀에서 나옵니다. 그러하기에 사단은 끊임없이 이 틀을 공격하여 허물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와 하나님에 대해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막고, 마음과 영혼에 죄가 쉽게 들어오도록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다시 세우고자 우리를 그러한 탄식 속에 두십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바이올린 연주자가 하루만 연습하지 않으면 바이올린이 이 사실을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연주자 자신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들이 안다고 말입니다. 마음의 틀을 하나님을 향해 올곧게 유지하며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의 기본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기초로 하여 사는 자만이 하늘을 가르는 성령의 강력한 감화하심 속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마음의 틀과는 상관없이 단번에 고상하고 높은 기도의 단계로 뛰어오르려고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비상한 헌신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좋은 신자가 되려는 토대 위에서 그 헌신의 삶을 살아야지 보편적 가치는 다 버리고 단번에 그런 신앙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닙니다.
다음으로 살펴볼 내용은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용서를 비는데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관련됩니다. 시인의 탄식 끝에는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되고 막히는 그 속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들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시기 속에서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는데, 그리고 나의 공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 알았는데, 내 속에 이러한 죄가 있으니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어도 주님이 들으시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전 삶으로 공을 들일 때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도가 우리 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물처럼 녹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자가 몇이나 될까요? 지극히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인 그 사람 중에서도 오래도록 그러한 기도를 유지하는 자는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러한 기도는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삶을 전방위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으면 그러한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고, 예수님처럼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기도 속에서 마음이 물같이 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온전한 목표의 합치가 있어야 기도가 온전히 모아집니다. 제가 태국 집회를 다녀오는 동안 이런 기도를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