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참음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야 5:10).
자 오늘 우리 그 저녁때는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새벽에는 시리즈 제목은 참 아라, 참 아라 입니다. 신약성경 야고보서 보겠습니다. 제 5장입니다. 신약성경 375쪽입니다. 375쪽 신양성경 야고보서 5장입니다. 오늘 설교 할 구절은 10절입니다. 그래서 7절부터 9절까지 제가 읽고 10절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 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기도 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 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에게 새로운 한 해를 살게 허락해 주시고 또 한 해를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시작하게 하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벽의 시간에도 우리들에게 은혜를 내려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 옵소서. 그래서 그 말씀으로 올 한해를 이기며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우리 앞에 있는 이 본문은 우리에게 그 참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배경이 어떻게 돼냐하면 당시에 초대교회가 있었는데 이 글을 쓴 야고보선생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마음 아픈 현상을 지적을 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 처음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들이 그 사회적인 지위와 그 다음에 물질의 소유에 따라서 법적으론 평등하지만 실제적으로는 불평등한 사회에 살고 있잖습니까? 옛날에는 노예제도도 있고 뭐 그랬니까 사람들이 뭐 더더욱 많이 그런 사람들 간에 계급 같은 것 들을 경험 했을 겁니다. 로마사람들이 있고 자유민이 있고 그 다음에 노예가 있고 또 자유민중에서도 돈이 많은 사람이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대부분 돈 많은 사람들이 거론이 된 겁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차림세나 모든게 틀리잖습니까. 들어오면.... 교회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고 아 이렇게 편한 자리 않으시라고 이렇게 하고 가난하고 그런 사람이 오면 아무데나 않으시던지 뭐 서 계시던지 문맥이 이랬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연스럽게 가난 한 자들 속에서 가운데 불평이 교회에서 생겨나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선생이 제일 먼저 교회를 향해서 책망하는 겁니다. 지도자들을 향해서 특별히 교회까지 그렇게 하면 쓰겠냐며 아주 강경한 어조로, 강경한 어조로 그 책망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 다음에 갑자기 어조를 뚝 떨어뜨려서 누그러뜨리면서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당하고 고통을 받은 지체들을 항해서 인제 야고보 선생이 권면을 하는 대목입니다. 그게 인제 제가 읽은 7절부터 이어지는데 오늘 설교 내용이 그 중 한 절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원망하지 말아라. 원망하지 말아라. 교회나 지도자나 그런 교회의 상황이나 원망하지 말아라. 그러면서 이제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근데 이것은 사실은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왜냐하면 이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업신여김을 받고 하는 그 일은 그 성경의 정신에도 어긋나는 거고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생각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어조이기는 하지마는 원망하지마라. 그러지 마라. 그러면서 타이르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타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아주 뼈가 있습니다. 원망하지 마라. 그래야지만이 너희들이 심판을 면할 수 있다. 무슨 말이냐면 이런 상황을 통해서 성도들이 불평하고 막 원망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러면 이게 왜 그러면 앞에서 야고보 선생이 그렇게 교회에서 잘 못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막 엄청 나게 거의 신자 취급도 안하다시피 그렇게 질타를 하면서 정작 고통을 받은 지체들에 대해서는 위로를 해야지 그들 에게도 원망하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심판 하신다. 그러면서 강하게 또 이쪽에 대해서도 경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근데 이것이 무엇과 관계가 있냐면 말이면 지금이게 이것이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야보고 선생이 이런 식으로 충고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근데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이렇게 충고를 한 겁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충고를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야고보 선생이 예를 드는 겁니다. 그러면서 참을 때, 참는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에서 그런 부당한 일을 당하면서 참는 다는 그것만을 예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음에는 더 커다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겁니다. 참음에는 더 커다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예화) 예를 한번 들어 봅시다. 여러분 그 목욕탕 같은데 가 보면은 여탕이야 그런 사람들이 그렇지 않겠지만 남탕에는 가끔 온몸에 문신을 한 사람들이 가끔 들어 옵니다. 여탕에도 계십니까? (웃음) 근데 그 전신에 문신을 한 사람도 들어오고 어떤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문신을 하고 들어오는데 대게 문신은 용 같은 것을 그렸습니다. 난 항산 궁금한 게 있었습니다. 저렇게 하다가 저거를 만약에 지우고 싶으면 어떻게 지우나 그 비누로 해도 안지 워 질 것 아닙니까? 살을 바늘로 찍고 그것을 타투라고 그럽니다. 바늘로 찍고 특수 잉크를 집어 넣는 겁니다. 그게 안 빠지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이태리 타울에다 비누 묻혀서 열심히 닦아도 그 문신은 안지워 집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의 몸에 그런 문신이 있는데 지워버리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의사를 찾아가서... 하여튼 지우는 방법이 마당이 생각이 안 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첫째 둘 중에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냥 산 다. 두 번째는 칼로 확 깍 아 버린다. 일번입니까? 이 번입니까? 일번? 이번?(웃음) 끝나고 오십시오.(웃음) 근데 등판에 다 새겨져 있는데 그 깍 아내면 어떻게 하라고 마치 회 뜬 광어 뼈다구같이 될 텐데... 그게 뭐냐하면 다른 사람의 몸과 자기 몸과 차이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자기 몸은 안하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몸에 어떤 잉크나 오물 같은 것이 묻어서 딱아 내는데 아무리 비누로 닦고 이태리타월로 문질러도 안지워 져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내버려둡니다. 그 다음날 다시 딱 고, 다시 닦고 그래서 일주일 동안 걸쳐서 닦아내지 아~ 이거 출근해야 하는데 안 지워지네 어떻하지 칼 가져와! 떠내지 않는단 말입니다. 회 뜨듯이 어떻게 하지 않는 단 말입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야고보 선생이 얼마나 교회의 화평을 도모하고 싶어 했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 사람들에 대해서 그렇게 강력하게 비난하고 비판하면서 고통당하는 지체들에 대해서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그러면서 신앙으로 이겨라. 그러면서 타이르면서 하나님이 너희들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다. 권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해나가다 보면 우리들이 보기에는 부당한 것 같지만 하나님이 여러 가지로 우리들이 좋아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우리들을 들어가게 하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딱 잘 라서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와 관련이 있는 겁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내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 모든 사물의 질서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생활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달라서 우리들이 원하는 사물의질서 속으로만 데려가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지 않은 사물의 질서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 안에 질서에 대해서는 우리자신이 매우 익숙합니다. 근데 우리 안에 있는 질서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참으로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질서일 수 있습니다. 근데 그것을 깨닫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겁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말씀 들였습니다만 사랑을 하면 눈에 콩껍풀 이 씌워서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그 자녀에게서 정확에게 단점을 발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자식들에게서 단점을 발견하는 것은 노력을 별로하지 않아도 됩니다. 자빠져있는 것도 뵈기 싫고 일어나서 게으름 떠는 것도 뵈기 싫고 모든지 다 사랑의 콩껍풀이 벗겨지고 미음이 생겨나게 되면 단점이 잘 보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안 보이는 겁니다. 근데 자기 자식보다도 자신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자기 자신의 단점을 정확하게 보고 더군다나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더군다나 그것을 마치 남인 것처럼 벗겨 버릴려고 하는 것은 오물이 붙었는데 그것을 칼로 깍 아 내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겁니다. 그러니까 안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이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자기 안에 있는 질서와 밖에 있는 사물의 질서가 자기 안에 있는 질서도 자기에게 익숙해져있고 자기 밖에 있는 사물의 질서도 자기에게 익숙해져있으면 그 익숙해진 사물의 질서를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깨닫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깨닫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보게 하시기 위해서 이 사람을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갈등을 일으키면서 자기가 반응을 할 것 아닙니까? 자기가 싫은 상황속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든 반응을 하게 될 게 아닙니까? 뭐 화가 확 난다던지, 아니면 뭐 비슷한 말이지만 핏대가 팍 난다든지, 아니면 사람을 향해 미워하는 마음이 생긴다던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생긴다던지 아니면 인생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다든지, 심하면 폭력을 한 다던지 아무튼 뭔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무슨 반응이 일어날 것 아닙니까? 무슨 반응이 날 것 아닙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자기안의 질서의 정체를 발견 하게 됩니다. 그때 생각 있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는 되는 겁니다. 아 ~ 내가 이런 사람이였나? 그게 발견하기 굉장히 어려운겁니다. 그런 것 들을 보게 해주십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 아닙니까? 목사님 그러시면 자기 안에 있는 잘못 된 질서를 발견 하려면 결국은 생고생을 해야만 발견하게 된다는건데 그러면 늘 설교말씀에 우리의 변화는 끝이 없다고 하는데 그럼 우리는 끝이 없이 생고생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신앙생활입니까? 그렇게 묻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들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서도 깨닫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보다 원하시는 방법은 말씀을 통해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빛이 되어서 한편으로는 사물들의 질서가 변하지 않아도 말씀의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면은 우리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말씀의 유익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 그 속에서 끈임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질서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질서의 차이가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한번 판단을 해 보십시오.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은 고난 자체가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난이 계기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되니까,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변화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상기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의 모든 그 경향이나 이런 것들을 바꾸어주는 역할을 하는 겁니다. 찬양을 부를 때도 그렀습니다. 어떤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던 찬양이 자기가 어떤 상황속에 들어가게 되면은 그렇게 그 찬양이 사랑이 되고 들으면 눈물이 나고 그렀습니다. 그런 겁니다. 그렇게 뭔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을 때에 유익이 오는 겁니다. 그냥 그런 것이 없이 생고생만 했다 그러면 이 속에서 마음이 아주 강팍하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 차는 겁니다. 그래서 고생을 많이 하면 할수록 사람이 모질어지고 강팍하고 완악해지는 겁니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는 작용이 없이 환난을 많이 당하기만 한 사람은 굉장히 성품이 모질고 악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생각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환난을 많이 만나고 고통을 받게 되면 처음에는 환난과 고통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고 힘이 듭니다. 그러다가 어느 한순간에 내가 다 잘못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달구시는구나 연단하시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깨뜨려집니다. 그때 많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거나 사물들의 질서는 평안합니다. 어디 크게 어려운 일이 일어나는게 없습니다. 근데 하나님의 말씀을 쭉 보니까 자기가 너무 추루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서 그냥 마음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가슴이 저리도록 회개하는 겁니다. 둘 사이에 고통이 차이가 있습니까? 둘 사이에 고통이 차이가 있습니까? 대부분 간증할 때는 후자는 별루 간증거리가 안됩니다. 대부분 평안 했으니까. 전자는 간증거리가 되긴 하지만은 마음의 느끼는 고통은 같은 겁니다. 그래서 복된 신앙생활은 끈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는 생활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환경은 아무 변화가 없어도 그 하나님의 말씀 그 앞에서 그 말씀을 통해 자기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발견하고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질서를 발견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를 돌이키고 회개하고 진실하게 뉘우치면서 이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정욕적인 사랑을 다 토하고 순결한 까리따스의 사랑을 깊이 소유한 이런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이나 저나 신자 된 많은 사람들이 항상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상황이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인격적으로 말씀으로만 하셔서 인간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혹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그 말씀이 그에게 깊이 스며들어가지지 않으면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원하지 않은 사물의 질서 속으로 데려 가십니다. 그렇게 해서 그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부디끼면서 자기에게는 결코 없는 것들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십니다.
예화) 이제 금속 성분이 담겨져 있는 돌맹이를 우리들이 광석이라고 합니다. 그 광석이 색깔이 여러가지 모양입니다. 검은색 회색 별으별 색의 광석이 다 있겠지 만은 그 광석이 덩어리로 있을 때에는 이런 색깔이어도 가루가 되었을 때에는 색깔이 틀린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긁어보는 것을 테스트 혹은 시금석이라고 합니다. 가느다란 줄같이 생긴 걸로 광석을 확 문지르면 그 홈 사이로 광석이 깍 이면서 가루가 들어갑니다. 그 광석 자체는 검은색인데 갈아서 놓고 보니까는 하얀색 가루가 그 조은석에 쭉 묻는 거예요 그러면 겉보기에는 검은 것 같아도 사실은 잘게 가루로 빠아 놓으면 그 원래의 본질의 색깔은 회색이라는 것이 발견하게 되는 거아닙니까? 그러니까 고통을 통해서 하니님이 우리를 시험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를 한번 갈아서 우리 자신의 정체가 무엇 인지를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겁니다.
이 참음은 더 큰 목적이 있기 때문에 참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더 큰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을 여러분 자신이 원하는 사물의 질서 속으로 데려 가시기만 하지 않고 때로는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전혀 원하지 않은 그런 사물들의 질서 속으로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의 잘못된 마음의 질서를 보게 하시고 그리고 마음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그런 마음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이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삶의 질서보다도 여러분들의 영혼 안에 마음 안에 있는 사물의 질서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본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변화된 본성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의 내면의 질서들이 하나님 앞에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하니님께서는 여러분들을 고치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위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인간이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근데 삶의 상황은 요동치면서 바뀌어 진 질서 속을 드나들어도 그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것은 그러한 환경에 의해서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도구일 뿐이고 그 자신이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그 자신을 변화시킬 때까지 기다려야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뭐냐 하면 참는 겁니다.
그래서 참고 싶을 때 까지 참는 것은 그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 참는 것은 자기가 참고 싶을 때가지만 참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도저히 참기 싫을 때, 참을 수 없을 때 까지도 깊이 인내하는 겁니다. 그러므로서 그 환경을 통해서 충분히 자신 안에 있는 잘못된 질서를 하나님께서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때까지 성도는 고통을 받는 겁니다. 고난 입니다. 근데 이 고통은 하나님의 크신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이 고통을 통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을 도저히 볼 수 없는데 이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시기 때문 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좋은 신자도 고난의 선물 없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는 사람 없고, 고난이 없이도 자기가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순간순간 경험하며 살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아주 성숙하게 되면 사물의 질서가 조금밖에 변하지 않아도 그 작게 변하는 사물의 질서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큰 마음을 읽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아파하는 겁니다. 고난이 그런 효과를 가져다 줍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이 어리면 막 환경이 엄청난 변화가 와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생겨야지만 겨우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데 신앙이 깊어지게 되면 아주 작은 변화만 일어나도 그 속에서 그 환경을 통해서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근데 그렇게 되기까지 성도는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근데 그 고난은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 고난의 불을 통해서 이 속에 있는 거짓된 신앙의 찌기들이 신앙의 연단 속에서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교회에 와서 이렇게 부당한 대접를 받으면서 이제 굉장이 많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걸 본겁니다. 그러니까 자극받지 않았을 때는 자기안에 있는지 몰랐는데 자기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생기고 나니까 이 속에서 그것이 불길이 되어 자기를 달구면서 여기에서 자기가 있는 줄도 몰랐던 거짓된 신앙의 찌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입장에서 고통이라는 측면서서 볼 때는 견디기 힘든 괴로움이지만 그러나 하나남의 섭리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단하신다는 말이 맞는 겁니다. 누구도 고난 없이 고난의 불 없이 헌신 할 수 없습니다.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 고난은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가지고 계신 말할 수 없는 관심, 그리고 나의 무능하고 부패함이 가득한 나를 순결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징이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말 할 수 없는 애정의 표현이다. 고난을 통해서 아 ~ 내가 아직까지 내가 하나님 관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구나 그래서 어떻게 하던지 내가 아프더라도 결국은 나를 당신이 원하시는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시는 구나~ 그러면은 오히려 그러한 고통 속에서 참으면서 그 안에서 오히려 아주 평안하고 모든 것이 잘되 갈 때는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없고 부패하기 짝이 없었던 사람이 오히려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속에 들어가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마음속에 막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들어가서 많이 아프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제가 주님의 사랑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을 위로 합니다. 정말 위로 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기뻐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애지중지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을 받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축복해주시는 겁니다. 축복은 두 가지종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영혼에게 직접 내리시는 축복. 또 하나는 일반 섭리를 통해서 내리는 축복. 사업이 잘 된다, 얘들이 건강하게 자란다, 뭐 아니면 무슨 내가 하는 사역이 잘 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일반섭리의 축복 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축복은 하나님이 직접 그 영혼을 만지시는 축복 입니다. 그 영혼의 축복은 모든 뛰어난 섭리의 축복보다도. 더 놀라운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로 고통을 통해서 여러분들을 직접 그 영혼을 그렇게 어루만져주시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이라는 것을 보여 주신는 겁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가 얘기 합니다. 고난 받은 선지자들로 본을 삼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선지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일생을 산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선자자들은 하나님의 의해서 나의 종 선자자라고 불리웠던 아주 친근하고 친밀한 사람들 이였습니다. 그런데 고난을 많이 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셔서 그들을 고난을 당하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욥이 고난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능력이 모자라셔서 어절 수 없이 욥으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능력이 많으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싫어하는 사물의 질서를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도 바꿀 수도 있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신비한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거 한 가지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선하신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참고 또 참고 또 참고 그래서 무엇을 생각 하냐하면 자기에게 고통을 준 상황, 고통을 주고 있는 사물들의 질서, 자기를 아프게 한 사람, 자기가 이렇게 고통 받는 원인,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다 버리십시오. 그리고 오직 나 자신의 생명을 포함해서 이 모든 사물의 질서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런 제 이, 제 삼의 원인들의 대한 관심을 다 버리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바라 봅니다. 하나님을 바랍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런 고난 속에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려 보십시오. 오히려 말이죠
하나님 제가 이제껏 왜 하나님은 나를 이렇게 대접하시나 나도 한 번 복을 주십시오 이렇게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여태까지는 내 밖에 있는 사물을 바꿔 달라고 기도했는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바꿔 달라고 우리들이 기도를 했는데 이제 그렇게 하지 말고 반대의 기도를 해보십시오. 하나님 저는 많이 고통스럽고 말할 수 없이 아픕니다. 그러나 이렇게 잘못된 내 안에 있는 질서를 가진 나를 보시면서 느끼시는 주님의 고통에는 비할 수 없을 것 입니다. 제가 하나님이 나에게 섭리 속에서 주신 이 모든 상황을 제가 감사 합니다. 하나님 이것을 통해서 나의 무엇을 바꾸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렇게 제가 바뀌길 원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 많은 고통들을 결국은 저의 유익을 위해 사용 하신게 아니겠습니까. 하고 그것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 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언제나 하나님앞에 진실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한순간에 고난을 물러나게 하진 않으시지만 그 고통 속에서 주께로 가까이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걸 발견 하게 됩니다. (한 시간 더하고 싶은데 출근해야죠ㅡ 그쵸)
그렇게 해서 깊이 깨트려지는 것이 무엇인지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옥합위에 그냥 있을 때에는 아무 향기도 나지 않습니다. 옥합이 깨트려 지니까 향기가 가득 차고 깨트려지니까 그것을 예수님께 부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생각하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아픕니다.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환경 속에서 고통을 받을 때 혹은 경제적인 이유로 혹은 인간관계로 그 아픔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한번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이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그러면 사물의 질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고 여러분의 영혼이 파괴되는 겁니다. 모두 놓아 주십시오. 그들은 모두 도구일 뿐이다. 그리고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 앞에 있는 나, 나 밖에 없다. 하나님 내게 무엇을 원 하십니까? 내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질서를 가지고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내가 원하는 사물의 질서 속에서 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는 내 마음의 질서를 가지고 내가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살면서 내가 더 정결한 사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 그래서 내가 깎여 지고 부서지면서 내안에 예수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제가 주님께 만족스런 사람이 되고싶 습니다. 그렇기 위해서 만족스럽지 않은 사물의 질서 속에서 제가 몇 일 더 연단을 받아야한다면 저에게 더 많은 시련을 주십시오. 그런거죠.
얘들이 잘못해서 야단을 칠 때도 엄마 내가 뭘 잘못 햇어요. 내가 잘못 했지만 이렇게 맞을 정도는 아닌데 왜 날 개패 듯 패. 이러면은 화가 더 납니다. 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이유를 대봐 왜 그랬어? 아무도 핑계 될 사람 없습니다. 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그러면 부모의 마음이 누그러집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변화됩니다. 그런데 참아야 됩니다. 참아야 합니다. 참고 또 참고 이를 악물고 견디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으로 용서하고 풀어주고 놓아주고 모두 그리고 아무것도 미워하거나 맻히는 사람들이 없이 하나님 한 분 앞에 서서 하나님 제가 정말 이 시련을 통해서 저도 모르는 제 안에 있는 것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정말 정결케 만들어주십시오. 제가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같이 기도 하겠습니다. 인제 같이 간절히 기도하시다가 각자 출근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7시 반에 만나는 겁니다. 이 시간에 기도 할 때에 하나님 제가 원하지 않는 사물의 질서 속에 있습니다. 이것이 제게 고통이 됩니다. 고통 속에서 때로는 하나님 원망하고 사람들을 원망하며 그렇게 추루하게 지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이 저를 그렇게 많이 바꾸시길 원하시는데 저는 환경만 바꾸려했고 사람들을 바꾸려했고 심지어 하나님의 태도를 바꾸려고 했습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에 저를 용서해 주시고 오늘이 시간에 제가 마음깊이 주님이 제게 주신 고통스러운 질서들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진흙과 같은 저를 빚어주시옵소서. 굳어진 저의 마음에 변화를 주셔서 그래서 이 고통의 도구가 저를 충분히 빚으시고 새롭게 하실 때 까지 참고 또 참고 주님을 생각 하며 선지자들의 고난을 기억하면서 참고 또 인내하여서 우리 안에 주님의 형상을 이루어가도록 하나님께서 도와달라고 그래서 이 사물의 질서를 하나님이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되돌려 놓으셔도 우리들이 그 안에서 충분히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사랑하는 자에게 연단을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기도하시다고 출근하시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