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탄원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 7:6-10).
무엇인가 악인에게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 탄원하는 시입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세 개의 동사로 압축이 되는데 ‘깨소서, 돌아오소서, 심판하소서’ 이 세가지 탄원형 동사를 중심으로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주무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마치 주무시고 계시는 것처럼 깨우는 탄원이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 하나님을 묘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즉 인간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도움이 있는데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을 때 그 때에 마치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처럼 인간 편에서 깨우는 듯 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을 하나님께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하나의 문학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이 시인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왜 그런지 역사해 주시지 않은 것 같은 현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시인을 도와주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시인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기는 하지만 시인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시인을 고통 중에 내버려 두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이든지간에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탄원하면서 ‘하나님이여 깨어나소서’하면서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가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굉장히 무례한 기도일 수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런 기도도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집중되어 있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사느냐 올바르게 살지 않느냐도 하나님보시기에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집중하는 삶을 사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전적으로 집중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중하는 가운데서 회개도 나오게 되고 간절한 탄원도 나오게 되고 그렇게 집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그런 마음의 상태로 돌아간 것입니다. 악인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깨어나셔서 당신의 삶에 간섭해 달라고 간절히 하나님 앞에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돌아오소서’하고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는 장면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일어났던 이스라엘 역사 속에 정말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 시인이 알고 잇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나타났던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 시인이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홍해도 가르고 건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따라오던 수많은 애굽의 대적들을 바다위에 잠그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전쟁도 이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만나도 내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날마다 보면서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문제는 나에게 얼마나 많은 대적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가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하는 것을 시인이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 분의 임재와 구원의 도움을 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인생의 문제가 굉장히 큰 것 같고 큰 것 같기 때문에 그 문제를 우리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럴 때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힘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큰일과 적은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큰일이나 작은 일이 문제가 없습니다. 개미에게 있어서 작은 밥알 하나는 자기들이 들기 쉬운 일이지만, 그러나 사과 하나를 드는 것은 개미에게 있어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밥알 한 알을 드는 일이나 쌀 한 톨을 드는 일이나 사과 한 개를 드는 일이나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면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께는 큰 일과 작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차피 하나님은 이 모든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능력을 가지신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그 분에게는 힘든 일도 없고 어려운 일도 없고 모든 일을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의 능력을 보이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보면 정말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미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라고 묵상하며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와 그 도움을 이 시인이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나와 동행하는 삶을 보여 주시옵소서 그러면 나를 비웃고 핍박하는 이 악인의 핍박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큰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인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가?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주님과 동행하고 있느냐 그것만이 문제입니다.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돌아와 달라’고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판단하소서’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고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데 하나님은 가야할 곳에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팔복을 가르치시는 가운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고,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면서 여덟 개의 복을 차례대로 죽 말씀하십니다. 여덟 개의 복을 차례대로 죽 말씀하시는데 그 복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천국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원래 그 땅이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무엇으로 배부르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의의 통치로 배부르게 해주십니다. 전부다 모든 복의 핵심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는 복을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복이 주어지면 거기에 하나님이 안 계셔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상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설교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돈이 생긴 사람이 예외 없이 불행해 집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올바른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 영혼이 올바름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있을 때에 인간의 육체가 무엇을 누려도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못 누려도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올바름에 대한 지혜가 없는데 물질적으로 넉넉해지면 결국 그 사람을 위해서는 너무나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올바르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파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시인이 하나님 앞에 ‘나를 판단 하소서’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깨어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하나님이 임재와 구원으로 나를 위해 역사하시지 않는 것,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 아니라 결국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나를 판단하시옵소서.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깨어나 주시고 나를 위해서 임재의 영광으로 나에게 돌아와 주시지 않을 그 무엇이 있는지 나를 보시고 그렇다면 나를 용서해주시고 깨끗케 해주셔서 다시 하나님이 깨어나시고 내게 돌아오실 수 잇도록 나를 바꿔 주십시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역사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역사해주시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깨어나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의 영광으로 돌아 오시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실 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즐겨 찾으시는 방문지로 사용 하십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이 너무 존경하고 너무나 사랑하는 어떤 분이 있다고 칩시다. 훌륭한 스승일 수도 있고 혹은 목회자라고 칩시다. 그런데 그 분이 어디를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가시고자 하는 곳을 여러분이 알고 있는데 이 분을 전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공경심도 없고, 오히려 모욕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곳인데 여러분들이 생각할 때 이렇게 존귀한 분이 거기를 가려고 하면 여러분들을 가시라고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선생님같이 존귀하신 분이 거기에 가실 곳이 아닙니다. 거기는 선생님을 무시하고 깔보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디든지 가실 수 있는데 당신을 찾는 마음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곳, 그래서 주님을 갈망하고 그리워하는 곳,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곳, 그런 곳에 가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판단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이기 때문에 우리에 대해서 공정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 심지어는 우리를 바라보는 생각이 내 생각과 하나님 생각이 틀려도 하나님 생각보다는 내 생각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회개가 어려운 것입니다. 회개의 기초는 하나님의 판단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마지막으로 하나님 앞에 소망하고 있는 바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을 가능성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잘못을 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 것이다’ 정직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직하다’라고 하는 것은 ‘잘 산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직하다라는 것은 잘못 살 때도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솔직한 것,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내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판단을 부정하거나 굳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여서 하나님의 판단에 자기 자신을 맞추려고 하는 것,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직한 삶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무리 잘 산다고 생각할지라도 주님이 말씀으로 ‘너는 틀렸다’하시면 하나님 앞에 ‘하나님 그렇습니다 하나님 저는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을 하면서 나 자신을 고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습니다. 다윗이 바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 했을 때에도 쉽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이를 길러보면 어떤 아이는 한차례만 때리면 무릎을 꿇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잘못했다고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비는 아이가 있는가하면, 어떤 아이는 몇 대를 때려도 어금니를 질끈 깨물고 무슨 반감을 품었는지 그냥 패라고 버티는 자식이 있습니다. 애는 매를 맞을 짓을 한 것보다도 부모에게 더 고통을 주는 것은 이 아이의 완고한 성향입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아이를 사랑하기 힘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정직한 사람, 내 자신의 잘못을 알면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때 언제나 돌이키는 사람,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여러분들의 문제를 해결 받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