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과 성도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3-15).
여기에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자기를 미워하는 이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정체와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써의 자기 자신의 정체의 차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사람과 성도의 정체성의 차이를 비교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 성도의 성경이 이야기 하는 성도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나그네예요. 나그네! 이 세상에서 사는 그 성도들은 그 정체가 나그네다. 인간 그 자체가 사실은 나그네거든요. 성도가 되기전에 세상 사람이 였을 때는 자가가 나그네라는 사실을 몰라요. 말로는 안믿는 사람들도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떤 떠돈다는 의미에서 나그네지 목적지가 분명하건 아니지요. 세상 사람들이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노래를 한다고 칩시다. 그 사람보고 그럼 그 나그네가 어디 가는 나그네요? 그럼 기껏해야 `조상들 있는 대로 돌아가는 나그네입니다`그렇게 밖에 얘기를 못한단 말이죠. 성경적으로 볼 때에는 성도의 정체는 나그네예요.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섞여서 이 세상이 자기의 본향인줄 알고 그렇게 살아 가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거야. 그 하나님은 영원에 속하신 분이에요. 그 하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돌아오면서 그러면서 자신이 이제 이 세상을 지나는 과객일 뿐 나그네일 뿐이다 하는 생각이 생겨 나는거죠. 그러니까 구원 받는 즉시 이성도의 마음에 본향이 생긴거예요. 그 본향이 영원한 나라예요.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해 가니까 가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을 하니까 얼마전까지 고향인지 알았던 이세상이 나그네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얘기죠. 그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이예요. 그러니까 그 나그네 길을 위해서 오늘 이 세상을 즐겁게 떠나고 더 많이 정주지 않고 그리고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길 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꿈을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예요. 하늘나라를 향하여 그것과 의미 있는 연결이 되는 그런 꿈들을 가지고 살아가요.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 의지하면서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 영원을 향해 걸어 가는거예요. 그게 신앙생활이에요. 여기에서 시인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압제 하는 세상사람들의 정체가 나오기 시작해요. 뭐라그러냐면 `아~ 이 세상 에서 저희에 분깃을 받은 사랍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그러면 그들은 뭐야? 영원을 향해서는 유업이 없는 사람들이에요.그들이 물려 받을 기업은 이 세상으로 충분 해요. 왜냐면 그사람 자신들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기업을 받는거예요. 영원한 나라 영원한 나라에서는 거업이 없는거에요. 그게 바로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에요. 근데 문제가 생기죠? 무슨 문제가 생겨요? 기업이 없으면 그걸 바라 보면서 애지중지 하고 살아야 하는데 하찮게 생각하면서 사는거에요. 자~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정신 없이 이러구 살았는데 어느날 누가 일어 주는데 여러분 조상들이 남겨 논 땅이 있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강남에 있는 노른자 땅이야. 그 주인 없던 땅인데 여러분이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 빌딩숲 가운데 기가막힌 땅이 하나 발견이 됐는데 여러분 땅이예요. 그러면 그 기업을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지 그까짓거 뭐 시내 한복 판에서 무슨 콩을 심을 것도 없고 아니 파를 심을 것도 없고 그까짓거 있어 봐야 심어도 공해 때문에 먹지도 못하는데 뭐 그렇게 생각하고 그 기업을 아주 하찮고 우습게 생각하겠어요? 아니면 매일매일 가서 그 땅을 보면서 야 이게 우리 땅이다 이제 전에는 우리가 가난뱅이 였는데, 애들 데여 와서 이거 봐라 여기다 빌딩을 지으면 서너개 설텐데 `이게 야 천억짜리 란다` 그러면서 가슴 부풀어 하고 일하다가도 그 땅을 생각하고 누가 뭐 나는 지금 가난하게 사는거 같은데 누가 큰 집에 산다고 의시 댈 때도 치~그까짓 아파트 한십억짜리 살면서 뭘 그러냐 난 강남 가면 땅이 천억짜리가 있다 그렇게 생각 하겠어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영원한 나라에서 받는 기업을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 하고 가슴 뿌듯해 하며 그 영원한 기업을 받기 위해서 살아야 하는거예요. 그게 성도가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란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 가는 유일한 이유라 이거죠. 근데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떠냐면 이세상에서 이미 유업을 다 받은사람 그래서 그들의 특징을 세가지로 이야기 하는데
첫째는 뭐냐면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그런 그런 뜻이예요. 그럼 그 욕망을 만족 시키시는 방식이 뭐냐면 영원하고 신려한 것들로 만족을 얻는게 아니라 제물로 배를 채우는 거예요. 그럼 이건 꼭 먹는 음식만 얘기 하는게 아니예요. 재물을 주고 살고 있는 제화나 서비스 그리고 재물 주고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즐거움들로 허기진 욕망을 채우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예요. 그걸 말하는거 거든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 배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이 배에 있다고 믿었어요. 창자에 우리로 말하면 가슴에 손을 언고 얘기 한다고 생각을 해봐라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겠죠. 그렇게 영혼의 자리가 있다고 믿었어요. 배를 채운다 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 가득 그 만족이 된다고 하는것이죠. 예수님이 말씀 하셨잖아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 그 배에서 넘쳐 나는건 영혼에서 깊은 곳에서 그 생수의 강과 같은 그런 성령의 은혜가 넘쳐 나는걸 아야기 하는것이죠. 그 무슨 영원을 생각하면서 영원으로부터 만족을 얻는 다든지 그런건 없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 가는거예요. 세상 사람들의 모습에예요. 그러면 그게 세상 사람들의 모습인데 그러면은 근데 그 제물이 누구의 재물이라 그랬냐면 주의 재물 이라고 그랬어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 에게 물려 준거예요.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이니까 . 근데 그 사람들이 불법으로 가지고 있는것이죠. 이세상에서의 경쟁을 통해 얻은거예요. 우리가 되찾아야되요. 되찾는데 어느날 나타나서 `우리 하나님꺼니까 도루 뇌나` 그럼 이 세상에서는 강도라고 그러지요. 그러니까 정정 당당하게 경쟁을 해서 그것을 뺏어야죠. 그래서 그들 에게 있으면 자기의 배를 불릴 그것을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거예요.
물질로 인해서 만족을 얻는 것을 그것이 몸에 베이게 되면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살 수가 없어요. 신자는 돈을 많이 벌어도 늘 물론 매 이야기 하지만은 돈을 많이 벌면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죠. 그건 죄를 짓는 게 아니예요. 괜찮아요 여유가 생기면은 자가용을 마련하고 더 여유가 생기면은 조금 더 나은 차를 타고 그럼 뭐 집도 마찬가지고 옷도 마찬 가지고 괜찮아요. 근데 그렇지만 이 세상에 있는 재물로써 자기의 깊은 내면이 만족 되느냐면 그건 아니거든요. 근데 그것으로써 만족을 얻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아는 것에 자기 자신이 이렇게 익숙해지게 되면 영원을 바라보고 살기가 어려워요. 그러니까 돈이 많이 있어도 그것은 쓸 때는 항상 이것을 소비 하는 것이 내 영혼에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런걸 생각을 하면서 가야 된다라고 하는거, 뭐 이렇게 가난한 것을 너무 이렇게 높은 덕목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은 아니예요. 그렇지만은 그렇게 익숙해지게 될 때에는 이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이 세상에 있는 재물로 자기의 배를 만족 시키는 것을 좋아란 나머지 영원을 위해 가지는 않는 것 이예요. 세상 사람들 이런 사람들아라 이거죠. 두 번째는 뭐냐면 자녀로 만족 하는 사람, 그러니까 자기 자녀로 만족 하는 사람, 근데 이게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사랑한 훌륭한 건데 이게 세상 사람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이예요. 그러니까 자녀를 너무 사랑하고 집착하고 나머지 이 세상 사람들은 영원을 바라 볼 틈이 없어요. 이것도 똑같이 그 산업을 자녀에게 물러주는 자 입니다. 열심히 벌어서 목표는 두 가지예요. 자기가 실컷 쓰고 그 다음에 자식들한테 물러 주는거 이게 바로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의 정체예요. 그러면 이 세상에선 나그네이고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의 정체는 어떻게 하겠어요. 그래서 제물로 배를 채우며 거기에서 만족을 얻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만족을 얻는 사람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은 이 세상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삶에 도움을 줘. 그러니까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 나라를 향하여 살아 가도록 만들어 줘요.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거 예요. 참 신기한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이 많고 잘나가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 하시고 내 마음에 충분한 은혜로 채워 주시면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그런 고백이 마음에 생겨나는 거예요. 그렇게 휠휠 날아가야 해요.
두 번째는 뭐겠어요? 자녀로 만족하지 않죠. 그래서 어떡해요? 이 세상에 있는 자기 자녀로 만족 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자녀가 되는거에요. 그런 사모함과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거예요. 물론 자기 자녀도 잘 키우지만 보다 긍극적으로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로 꽉 차는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영원들을 돌보고 영원들을 위해 헌신해요. 오늘도 계속 그 나한테 해드폰 으로 편지가 오는데 정말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감격적인 보고가 와요. 그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는거예요. 근데 그들이 가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서 이제 부르심을 받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들 조차 주님 만나고 변화 되고 새사람 되기를 너무나 원하는거죠. 그래서 마지막 하나님께 앞에 가는 그것이 신앙 생활이예요. 세 번째는 뭐죠? 유산을 자녀들한테 물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녀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예요. 그래서 이게 정말 변화 알지 못한 성도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 자체가 행복이예요. 근데 이제 변화 받은 성도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이예요. 영혼을 찾아서 가는거예요. 그래서 오늘 시인이 자기를 뭐라고 해요? `내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옵겠습니다. 내가 깰 때에는 주의 형상으로 내가 만족을 하겠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그 시인이 주님의 얼굴을 사모하는 거에요. 하나님이 얼굴이 빛을 비쳐 주신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그를 특별히 인정 하시고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이거든요.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동안에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예요. 깰 때 잠자는 것 같은 세상에서 깨어서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며 들어가는 그 때에는 주님의 영상을 보게 될텐데 `그것으로 내가 만족을 하겠습니다` 하는 고백이에요. 이게 성도의 삶이예요.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참 이상하지요?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과 경쟁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는 이 세상을 향해 가고 우리는 하늘 나라를 향해 가는데 그게 그렇게 이 세상 사람들은 보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박해와 고난이 있는거에요. 그런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우리들이 영원한나라 끝없이 있는 그 가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거에요. 이게 성도의삶이예요. 은혜를 받는 다른 것 자체가 영원에 대한 감각이 우리에게 밀려들어 오는거예요. 그래서 그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 때 우리들이 세상과 섞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죠. 은혜 없이는 그렇게 살아갈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