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는 내 영혼의 구원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방패와 손 방패를 잡으시고 일어나 나를 도우소서”(시 35:1-2).
하나님이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시기 전에 내가 하나님 편이 되어야죠. 그러니까 이런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이 위기 가운데 있고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에 나를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도 특별한 응답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거스르는 자들을 하나님이 대적하시죠. 그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품이에요.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거스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불변하시는 선이시라는 뜻입니다.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악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는 거스르는 자가 되시고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불의한 자들에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죠. 자비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악랄하게 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의 엄위를 보이시는 거에요. 이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하나님 보고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바꾸시오, 저렇게 바꾸시오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에요. 그런 기도는 백 날 해도 응답이 안됩니다. ‘당신이 의로운 분이시지만 불의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 이번만큼은 좀 그러지 마십시오.’ 그런 기도는 응답이 안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기도라는 것을 활용해서 밀어붙이면 하얀 하나님을 까맣게 만들 수도 있고 사랑의 타오르는 그 마음을 끌 수도 있고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것은 아주 불경스러운 상상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물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시편에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데 그 진노하시는 중에도 나에게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혹은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징계를 보이시는 중에도 제발 그러지 말아달라고 그렇게 애원을 하는 기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이렇게 반문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돌이키는 자의 기도에요. 예전엔 악인이었는데 지금은 그 길을 버리고 선하게 돌아가는 거에요. 그러니까 옛날의 잠시 전까지의 악을 기억하셔서 나에게 악을 갚아도 나는 할 말이 없는데 그러나 제발 그렇게 하지 말아달라고 비는 거에요.
에이브라함 링컨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강하고 많은 가는 문제가 안됩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편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대툥령 중에 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했어요. 그리고 신학적인 지식도 뛰어났어요. 그런데 그의 이야기가 핵심을 찌르는 거에요. 우리의 대적이 얼마나 강하냐 상황이 얼마나 나쁘냐 이것은 문제가 안된다, 왜? 어차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해결할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 보기에는 큰 문제, 작은 문제 이렇게 나뉘어 진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셔서 해결해주시려고 하면 큰 문제와 작은 문제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거에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냐 하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지 않은데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대적을 물리쳐 주시옵소서’. 자기가 대적인데, 자기가 대적인데 누구를 물리쳐 주느냐 이거죠. 그래서 이런 기도가 누구나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그리고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하나님 편에 서있을 때 그 때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거죠. ‘여호와는 내 편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그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에요. 사실은 하나님이 내 편이 되신 게 아니라 자기가 삶과 마음을 돌이켜서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께 붙어 있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만 그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렇지 않아요?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그래서 기도에 있어서 제일 불경스러운 것이 뭐냐 하면 자기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거에요. 그게 제일 불경스러운 거에요. 그래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그 다음에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의도와 목적 이런 것은 돌아보지 않고 무조건 자기의 기도에 하나님의 목을 맨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세게 기도해서 그것을 잡아당기면 하나님도 그것을 끌려온다고 생각을 하는 거에요. 가장 머저리 같은 생각이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겸손과 경외의 정신 가운데 행사될 때 그것이 참된 믿음이에요. 이것은 마치 우리들 마음 가운데서 뜨거운 열정이 일어나도 그 열정이 진리와 이성의 지배를 받는 열정일 때에 그것이 참된 의지가 되는 것이지 만약에 이런 것이 없이 이 속에서 열정이 일어난다고 하면 그것은 아주 동물적인 것이죠. 그래서 칼빈 선생 같은 분이 이런 것을 아주 분명하게 이야기 했죠. 그래서 마음속에서 뜨거운 열정이 확 하고 솟아나도 이것이 진리와 이성에 의해 통제를 받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건전한 의지가 되는 거에요. 이러한 통제를 안 받고 뜨거운 격렬한 감정이 막 학 하고 솟아날 때 이것은 이성이 없는 격정이에요. 이것은 굉장히 안 좋은 거에요. 그렇게 움직이는 거에요. 이것을 가리켜서 ‘파도스’ 라고 하는 거에요.
그와 마찬가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향한 지극한 겸손과 경외 가운데 행사되어질 때 그 믿음이 건전하고 경건한 믿음이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 관계, 태도 이런 것들은 돌아보지도 않고 마치 자기의 기도가 하나님 목에 줄을 맨 것처럼 잡아채면 하나님도 딸려 오신다고 생각하는 이런 불경스러운 생각들은 모두 다 신앙적인 것이 아니에요. 모든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죠. 그래서 처음부터 생각이나 관점이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돼요.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돼요. 그래서 사실 진정으로 돌아와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 하나님이 나를 향해 돌아오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시인이 ‘내 영혼에 대해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 라고 말합니다. 내 영혼에 대해 ‘나는 너의 구원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것은 말이죠. 나의 구원이라 이르소서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은 결국 뭘 보여주죠. 우리의 육체는 종종 다른 사람에 의해서도 구원을 받아요. 그 모든 것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시죠. 우리들이 돈이 없다 아니면 몸이 아프다 아니면 직장생활이 힘들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 어느 날 자고 일어나면 하늘에서 돈다발이 떨어지지 않거든요. 누군가가 선한 마음을 품고 우리를 도울 마음이 생기는 거죠. 그죠.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면 좋은 의사를 만나서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죠. 또 뭐 기도하다가 그냥 낫는 수도 있겠죠.
직장생활이 어려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상사를 발령 내서 좀 더 좋은 사람이 올 수도 있고. 옛날에 어느 목사님 그래요. 자기는 독일어를 너무 못해서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바꿔주셨다고. 그런데 그런 것들은 모두 일반적인 섭리를 통해서 오는 거죠. 그런데 내가 영혼의 깊은 침체를 느낀다든지 어떤 죄 때문에 깊이 괴로워한다든지 밑도 끝도 없는 깊은 심연에서 괴로워하고 방황한다든지 할 때에 그렇게 될 때에 사람이 건져주는 거 아니거든요. 사람이 충고하고 말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우리를 건져주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에 의한 직접적인 개입이 거기 있어야 돼요. 그래서 일으켜 세우시는 강한 변화가 그 안에 있어야 돼요. 그렇게 안하면 안돼요. 그러니까 영혼의 구원은 하나님이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돼요. 그래서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영혼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험했는가 그것에 의해서 영혼의 깊이가 좌우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좌우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기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무릎에 앉아서 살아가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의 기도가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내 편이시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이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려는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서 하나님 안에서 이해되고 발견되려는 사람, 그 사람들의 것이에요. 그리고 그렇게 해서만 하나님 앞에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하면서 매순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생활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