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자를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심
‘내 생명을 찾는 자로 부끄러워 수치를 당케 하시며 나를 상해 하려 자로 물러가 낭패케 하소서 저희로 바람 앞에 겨와 같게 하시고 여호와의 사자로 몰아내소서’ (시 35:4-5)
왕이 되려 했던 계획이 다윗에게 있었습니까? 그에게는 왕이 되려는 계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셔서 왕삼으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거죠. 이게 진정으로 사람이 높임을 받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계획에 있어 줄달음질을 치고 그래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높이시는 그것을 통해서 정말 높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적인 높임이라 하는 것이죠.
그러면 다윗은 왜 그렇게 하나님이 높이시고 싶어 하는 사람이 되었느냐 라고 하는 거죠. 그것이 그의 외모였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그의 지위였습니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이 낮출 수 있는 사람을 무한대로 낮출 수 있고 또 당신이 높이 실수 있는 사람을 무한대로 높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사람의 높은 지위나 많은 재산, 세상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점, 그런 것 들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이시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다윗을 높이 실 때 사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한나라의 왕이였습니다. 하나님이 버리시자 그는 미친 사람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실 때 짐승들을 치는 목자에 불과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외적인 장점에 의해서 이 사람을 높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오히려 이렇게 외적인 장점이나 이점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매우 악한 것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 일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를 높이 시기로 작정 하신 것이죠. 그래서 그를 지극히 높은 사울은 버려 낮추시고 지극히 낮은 다윗은 높여 하나님께 영광을 받고 싶어 하셨던 거죠. 높은 지위에 있다든지 명성을 얻게 된다든지 하면 하나님 앞에 책임이 더 커지는 거죠. 왜냐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 많은 영광을 나타내 실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에 영광을 가릴 수도 있는 거죠. 그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를 높이기 시작 하니까 수많은 대적들이 그를 끌어내려고 공격을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만약에 이 다윗이 이세의 집안에서 이름 없는 목동의 삶이나 살았다면 누가 그를 원수처럼 여겼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높이시니까 근거 없는 모함과 시기 그리고 까닭이 없는 미움들을 사람들로부터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수없이 공격을 당하며 괴롭힘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셨지만 칼을 주셨습니까? 창을 주셨습니까? 하나님이 높여 주셨지만 그에게는 그런 것 들이 무기가 아니 였어요. 그래서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리고 만약에 그렇게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마음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신앙으로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이 이세의 집안에서 짐승이나 치는 이 다윗을 하나님이 일꾼으로 세우시고 싶으셨던 그 이유에 명백히 반하는 것이였던 것이죠. 무슨 뜻인지 아세요? 다시 말씀 드리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이점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맨 처음에 짐승이나 치는 목자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시게 만들었던 그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 버린 결과 가 됐다 이거죠. 그러니까 다윗에게 있어서는 이런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은 심어지는 인생을 살면서 겪었던 그 수많은 신하들의 배신 이런 것들이 이 다윗을 처음 하나님이 불려 주셨던 그 마음에 머물도록 도와주는 도구였다라고 하는 거죠. 인간의 마음은 너나 나나 할거 없이 모두 기름집니다. 기름집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에 하나님 고통 없이 순풍의 돛을 한 1년이나 2년만 달아줘 보십시오 미끄러지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보면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결단 하고 나와서 매달리고 눈물을 흘리고 신앙의 구두끈을 다시 매고 이런 일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그런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들이 풀리고 순풍에 돛단 것 처럼 이렇게 진행 될때에 인생이 나아 갈때에 그때에 신앙에서 미끄러지는 사람을 많이 만나잖아요. 그래서 그 대적자들이 끊임없이 다윗에 생명을 노리는 거죠. 죽이고 싶어 하는 거죠. 그가 무엇을 잘못 했지요? 하나님이 세우신 것 이외에 아무런 잘못 한 것이 없는데 원수들은 생명을 노리는 거죠.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가장 의지하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마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들은 하나님 앞에 버림 받은자 처럼 그렇게 하나님이 내동댕이 치는 것같은 때를 만나기도 해요. 그게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 이예요.
이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 만리 교회에 빠져서 방종한 삶을 살다가, 지식적으로 정말 몇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천재 였습니다. 정말 천재였고, 정말 엄청난 천재였습니다. 몇세기에 한명 나올까 말까한 그런 탁월한 천재였습니다. 저는 누구의 책을 읽으면서도 이 사람이 천재라 느낌을 받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제가 원래 교만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래서 그분의 책을 두 세권 읽는 사이에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어요. 아~그래서 이 사람은 천재다. 그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요. 정말 천재다 이 인류 사이에 몇 명 안되는 천재다. 근데 그렇게 학문을 많이 알고 사물의 이치와 철학에 대해서 달통한 사람이 였는데 나중에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중요한 계기가 이 시편이예요. 그래서 뭘보고 이 시편에서 돌아오게 됐냐면 자기가 그렇게 일평생 찾았던 지혜는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하게는 만들어 줬는데 어떻게 진리를 찾아 가야 할지는 안가르쳐 줬는데 이 시편 속에서 발견 하게 되는 거야. 이게 뭐냐면 사랑과 참회에 눈물이예요. 사랑과 참회의 눈물 자신들은 막연하게 생각하는 그 진리 움직이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감정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어떤 천체처럼 그것을 찾아 가는 것이 진리를 찾아 가는 것이라고 생각 했는데 이 시편을 보면서 그런 생각들이 깨뜨려져 지는거죠. 그게 뭐냐면 너무 그 진리를 사랑 하는 거 그리고 그 진리에 사랑을 받는거 그리고 자신의 삶이 그 진리에서 이탈 했을 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그 진리로 돌아가는 것 그럼 그 진리는 그를 용서해 주는 것 그래서 그 진리의 사랑과 글휼을 받는거 여기서 충격을 받은거예요. 아~이게 진리를 찾아 가는 삶이구나 그래서 그 사람에 이 신앙과 철학함에 있어서 최고의 스승이 이 다윗이 였어요.
그러니까 그게 그 하나님을 찾아가는 그 구도자의 눈에도 그렇게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면서 그분께로만 나가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다고 한다면 그러면 진리 자체 이신 하나님이 보실 때 당신에 합치고 당신에게 나오기 위해서 사랑으로 그 길을 걷고 그 길에서 멀어 질 수밖에 없었을 때에는 참회에 눈물을 흘리며 다시 그 길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겠느냐는 말이죠. 얼마나 아름답겠냔 말이죠. 인간은 자기를 온전히 사랑 하는 사람을 모두 기뻐 하지 않아요. 사람이 애처롭게 매달릴 때 그 사람이 항상 감동을 받나요? 아니죠? 사랑이 남아 있을 동안에는 감동을 받아요. 근데 이미 사랑이 떠나고 마음이 식어지고 너면 귀찮고 추해 보이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변하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아무리 쓰레기 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감동을 받으시는 거에요. 그래서 진리를 찾아 가는 구도의 길은 사랑을 찾아 가는 구도의 길과 일치 하는거에요. 그리고 자신의 삶을 창조의 목적에 부합시키며 살아 가는 그 겸손의 길과 하나예요. 틀리지 않아요.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끊임 없이 내가 가지고 있는 인생의 목표 내가 가야 할 인생의 길 나의 야망 나의 행복 이런 것에 하나님이 초점을 맞추시는 신앙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알고 있는거 그래서 나를 끊임 없이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 하신 목적에 그분이 그 나의 인생을 향하며 가지고 계신 계획에 한하여 끊임 없이 나를 맞추면서 그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 그것이 바로 신앙 이예요. 그것이 바로 신앙 이예요. 그것이 믿음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시인이 담대하게 자신의 생명을 노리는 자를 낭패케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거에요. 그러면서 그는 또 하나의 기도를 드리게 되요. 저희를 바람에 나는 겨와 같게 해주소서. 전 얼마 인생을 살지도 않았는데도 정말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야. 당시에는 아주 왕성한거 같고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진거 같고 힘이 있는 것 같은데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에요.
겨가 뭔지 아세요? 연세를 드신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지금은 집에서 쌀을 조리질 하는 사람은 없지요? 안하죠? 예전에는 조리질을 했어요. 그리고 쌀을 하면 왜이렇게 서커먼 물이 많이 나오는 지 그래서 쌀을 놓고 이렇게 이렇게 조리질을 해요. 그래서 돌맹이는 쌀보다 무거우니까 이렇게 이렇게 쌀을 흔들면 쌀이 물위로 떠오를 때 슬쩍슬쩍 건져내는 거에요. 마지막에 안건져 내고 남은건 돌맹이죠. 그것도 조리도 싸리 나무 같은 걸로 엮은 걸로 조리질 하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쌀을 먹다가 보면 반토막난 쌀 거기에 무슨 겨 이런것들이 들어 가잖아요. 그런것들을 키질 하잖아요. 쌀을 높이 던지면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등을 데도 이렇게 서서 같은 방향으로 서서 휘~ 던지면 바람이불면서 이게 가벼운 것들은 다 날려 보내고 쌀만 떨어지잖아요. 그걸 몇 번을 까부르고 나면은 쌀이 깨끗해 지는거에요. 그대신 돌맹이도 같이 남잖아요. 돌맹이는 더 무거우니까 그러니까 조리질은 무거운 거를 걸러 내는 거고 키질은 가벼운 거를 털러내는 거고 그런데 바람에 날리는 겨라는 것이 바로 그렇게 키질을 할때 날아가는 겨라는 것이죠. 이렇게 키질을 하면 키가 크니까 훅~던지고 내릴 때 거기서 바람이 일어요. 주위에 바람이 안불어도 쉬~하고 바람이 불면서 그것들이 날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키질을 하고 나면 그 앞에는 겨들이 잔뜩 쌓이잖아요. 그게 바로 바람에 나르는 겨예요. 가치가 없고 어떻게 다른 환경이 되면 사라져 버리는 그런 존재가 바로 악인의 존재에요. 악인의 존재 그래서 그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것 그래서 훌훌 털어 버리고 날려버려요. 그것이 바로 악인의 바로 의인은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을 의지 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렇지 않아요. 왜냐면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삶이 하나님의 자녀 이면서도 악하게 살고 하나님을 떠난다 그러면 그는 더더욱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 인생에 가장 큰 힘 그리고 가치,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능력과 도움,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산 매 순간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 하면서 사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우리에게 그 우리의 마음을 잡아 당기고 끊임없는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와 생명을 가지고 이런 것 들의 진리를 올바로 만들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두셨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거에요.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에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 생활이예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 버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하는것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