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하는 자에게 친밀함을 보이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1-14).
앞부분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해 많이 노래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깨닫고 나니까 그다음에 비치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그런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죄가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깨닫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우리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 밖에 있는 법과 자신 안에 새겨진 양심의 법에 따라 말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참으로 죄인임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리게 하는 변화는 복음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복음입니다. 오늘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니 자신이 크나큰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호소하는데, 그것은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간구하고 있는 시인 자신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데,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 관계는 영원하니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가운데 그를 내버려둔다면 그는 삶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심은 사명 때문입니다. 때문에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시대, 이 장소, 이곳에 두셨는지의 의미를 깨닫고 거기서 주님께 하명 받은 일들을 이루는 것을 너무나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왜 자신을 이렇게 문제가 많은 가정 속에 두셨는지, 수많은 교회 중에 왜 하필 자신을 이 교회에 두셨는지를 생각하며 그 뜻을 받들어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는 자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 일이 크기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를 움직이는 대통령, 세기적인 선교사, 세기적인 목회자가 되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사명의 크기가 아니라 자기의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할 사람인 자신이 죄 가운데 있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게 되기에 시인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는 그가 행하고 있는 외적 행실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을 부릅니다. 이것 없이는 누구도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영성이 깊고 신앙이 온전하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 사람의 무엇을 보고 그리 말합니까? 남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의 죄가 발현될 때에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나, 온전한 신앙을 가진 자는 마음과 영혼의 작은 움직임만을 감지하고서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또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하나, 다른 사람들의 죄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그 사람이 죄의 피해자나 된 것처럼 생각하며 긍휼히 여깁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한 사람의 영성의 깊이를 이야기 해줍니다. 오늘 시인은 그런 경지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말하기를 ‘여호와 경외하는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유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진리를 잘 배우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인간의 영혼 안에서, 그리고 영혼 밖에서 그렇습니다. 먼저 영혼 안에서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는 지성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지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비치는 진리의 빛을 일방적으로 받는 부분이 있고(총명이라 함),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 위해 우리 스스로 그것을 찾아가는 기능이 있습니다(이성이라 함). 아무리 여러 가지 색깔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그것을 보여주나 보여주지 않으나 똑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또 눈을 뜨고 아무리 보려고 해도 빛이 없으면 깜깜하면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영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안에 어둠을 물러가게 한다면, 진리의 빛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변화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하게 되면 모든 지성들은 명정해지며, 이미 있는 진리들을 잘 볼 수 있는 눈들이 열리게 됩니다. 요즘 하나님의 말씀이 잘 안 들어온다는 식의 말은 현재 현저하게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떨어집니다. 예전에 꿀같이 달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집니다.
또 영혼 밖에서 그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면 그분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깨닫게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명정한 지성은 뜨거운 사랑 안에서 가장 잘 보존됩니다. 세상사랑은 뜨거울수록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들의 지식은 마음의 격정을 줄여야 얻을 수 있으나,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만 진리에 대한 명정한 지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진리의 비밀을 더 많이 보여주십니다.
둘째, 그 영혼이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평강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조바심내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과 같은 희노애락, 칠정의 수많은 변화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 끊임없이 춤을 추는 뜬 구름 같은 수많은 사물들을 있는 것으로 알고 붙들기 때문이 아닙니까? 성경은 이런 것들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있는 것 같으나 엄밀히 말하면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웃을 때 기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합니까? 그것을 잃어버릴 때 슬픔에 잠기지 않습니까? 따라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로 인해 우리의 삶이 흔들린다면 그 인생은 참으로 행복한 인생입니까? 우리가 소유해야 할 대상은 잃어버릴 염려도 없어야 하며, 언제나 소유할 수 있는 한 없이 것이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많은 사물들은 실제로 있는 것 같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을 다 바치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께 귀의하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자손의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자식의 복은 자식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그런 훌륭한 자가 아니라 돈도 많고, 지위도 높고, 질병도 없으며, 가족들과 화목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그런 복도 포함하기는 하나, 훨씬 더 영혼 쪽에 가까이 다가가 있습니다. 그 복의 핵심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모든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진리를 명정한 지성으로 더 많이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따라 사는 자는 굳이 자녀들의 복을 빌지 않더라도 그 자녀들은 그 부모를 모본 삼아 하나님 앞에 언약 백성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큰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복을 빌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부모 밑에 악한 자녀들이 태어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예화-박윤선 목사님의 아들 이야기)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잘 보여준다고 저절로 자식에게 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 잘 살면서도 그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사랑해줘야 합니다. 사랑은 부모의 신앙이 자식에게로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사명에 너무 열중하다 보면 그것을 잘 하지 못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신앙은 너무나 개개인적인 것이기에 이러한 경우를 벗어나는 사례도 참 많습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훌륭한 모본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대로 배우지 못하는 자녀들도 있고, 특별한 간구를 하거나 특별한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닌데, 신앙이 매우 훌륭한 자식들이 태어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너무나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본분은 어찌하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복을 시인은 한 마디로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언제나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그 친밀함, 곧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몫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십니다. 모든 인간의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니,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큽니까?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크게 회개합니까? 하나님처럼 되고자하는 교만을 꺾고, 하나님 앞에 서는 비결은 매일매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참회하는 것입니다. 터툴리안은 말합니다. “나는 참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쩌면 목회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양들을 보며 가슴을 졸이다가 죽어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디 간들 십자가가 없고 고난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의 죄 짐을 지고 갈 때에는 아무 상급이 없지만, 자신과 영혼들의 위해 인내로서 모든 고난을 이기면, 이 순례의 길이 끝날 때에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주님 앞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의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