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의지하는 자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1-4).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묶는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막연히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특성은 우리를 하나님께 묶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속박되는 것,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관계를 맺고 묶고 계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묶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거스르면 그렇게 하나님과 묶여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 묶임이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묶인 것을 우리가 즐거워하며 그분 안에서 살려고 할 때에만 불편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갈 길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묶여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갈 길을 정하시고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뜻대로 움직일 때 이 속박은 우리의 고통이 아니라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받기 원하시는 영광의 첫 번째 것입니다. 이 온 세계에서 영광 받으시기 전에 인간 자신의 의지하는 마음을 통해 이를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던 그때의 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갖고 계신 뜻을 열심히 찾아가고 받드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의 질서를 그려가기에, 하나님을 믿고 살아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위로와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참으로 안타까워하십니다. 오늘 시인이 말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안식과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죄는 우리를 점점 더 독립적이게 만들지만, 은혜는 점점 더 의존적인 인간이 되게 합니다. 사실 완전한 독립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떨어져 독립적이 된다고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 의존적, 자아 의존적이 된다는 것이기에 완전한 독립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의존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어느 정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랑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존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진 신앙의 많은 모습들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을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범죄 할 때조차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하나님과 독립적이 되고, 은혜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 의존적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의존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이는 의존하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가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닙니다.
시인은 또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인간은 인간에 합당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영광이 아니라 의존적인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가 존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광은 아름다운 외모와 높은 지위와 명예, 많은 물질 등을 꼽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당신 자신을 의존할 때에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영광을 주께서 좋게 바라보시는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 인간이 당신 자신을 의존하면서 가지게 되는 그 영광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하나님을 의존하여 그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이 나타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 영광을 상실하고 빼앗기게 되는 것을 수치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인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주님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이것은 진리가 시인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고 가르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함으로써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당신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호기심이나 만족을 채워 주시려고 그 진리를 여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진리를 아는 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합치하는 삶을 살며, 그 진리가 자신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진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는 것을 우리 삶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