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81
목 차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시 81:1-2) 1
신앙의 형식과 내용(시 81:3-4) 6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을 때(시 81:5-6) 11
건지시고 시험하신 하나님(시 81:7) 15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시 81:8-9) 19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시 81:10-11) 26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시 81:12) 32
이스라엘이 주의 도를 따를 때(시 81:13) 36
참된 만족이신 하나님(시 81:15-16) 41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
“(아삽의 시, 영장으로 깃딧에 맞춘 노래)
우리 능력 되신 하나님께 높이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께 즐거이 노래할지어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시 81:1-2)
본문해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한 감격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시편 81편 전체는 찬송시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5절까지는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찬송이 나오고 6절부터는 시인의 찬양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마치 판소리나 오페라의 형식으로 기록된 시입니다.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찬양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말씀을 하실 것이라는 감동으로 적어갔다고 보는 것이 적당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학적으로 하나의 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고 보지만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경우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첫 번째는 성경에서 이미 하셨던 말씀들, 그리고 시인이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이 주셨던 말씀들을 엮어서 자기고백 형태로 정리했을 수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모든 시가 그렇게 씌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다음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시인에게 직접 주신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범죄하고 51편에서 탁월한 참회의 시를 씁니다. 죄의식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다가 어느 시점에 “악을 행하는 자들은 다 물러가라 여호와께서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셨도다”라는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직접 말씀하시고 다윗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계시의 내용들을 하나님이 직접 불러주시는 것처럼 썼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5절까지의 시인의 찬송에 대한 반응으로 6절 이하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음성으로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나옵니다. 물론 도입부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혹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나님이 이르시되”와 같은 큰따옴표를 쓸 수도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따옴표자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들이 그냥 통째로 제시됩니다. 실제로 이렇게 풍부한 계시의 영 속에서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해주시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옮겨 적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금은 계시가 그쳤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가능했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할 지어다
이 정도로 각설하고, 1절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에 기쁘게 노래하며”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이 넘쳤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포함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능력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찬송했습니까? 다름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면서 그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전개된 것임을 생각하면서 기쁨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7절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의 역사들이 제시됩니다. 그래서 출애굽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복에 이르기까지, 소위 이스라엘 백성의 네 가지 사이클,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여 타락하고, 하나님이 징계하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축복하시고 하는 사이클이 반복됩니다. 7절 이하에서 하나님의 축복, 이스라엘 백성의 반역, 하나님의 징계, 이스라엘의 회개, 그리고 다시금 새로운 축복을 주시는 것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왔습니다.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의 힘을 주셔서 국가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능력이 공동체의 복수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능력’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능력이 되셔서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고난 중에서 하나님이 다시 구원을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찬송의 이유가 됩니다. 여기서 능력은 공동체에 대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쁨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을 한마디로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기쁘게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기쁨의 이유가 예전에는 세상 자랑과 나의 육신의 번영에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는 비결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 지어다” 이것이 묘한 대조를 이루는데, 능력이 되신 하나님과 야곱의 하나님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나라를 모든 역경 혹은 시련으로부터, 애매히 당하는 것이든지 혹은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당하는 것이든지,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기뻐하고 노래할 때 사용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고 있는 관계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소리칠 때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야곱’은 이스라엘의 애칭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애칭이고, 야곱은 분열되기 전의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애칭이고, 유다는 유다나라에 대한 애칭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언약j의 관계에 입각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호의입니다. 그런 친밀한 내적인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표현하는 말이 바로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시인이 이스라엘 구원역사를 생각하면서, 너무 쉽게 언약을 저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언제나 언약을 저버리지 않는 하나님의 우의(友誼) 혹은 언약적 사랑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해 즐겁게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 지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고 감격에서 터져 나오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교회 공동체의 최고의 기쁨
하나님의 백성들인 교회인 공동체가 무엇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아갈 때 공동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많은 시련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보면서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받으나, 하나님은 우리 편이고 우리는 선택된 백성들이라는 언약관계가 있으므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는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좋은 예가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성령이 강림하고 예루살렘의 공동체는 아주 열렬한 복음전파의 사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파하면서 새로 생겨난 기독교 신앙, 기독교 사상의 체계를 전했습니다. 그 심장부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핍박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풍전등화 같은 예루살렘 공동체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지극히 큰 능력으로 구원해주십니다. 핍박을 받고 폭행을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교회에 들어와 “우리가 이렇게 얻어맞았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 받는 것에 우리는 기쁘다”라는 간증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서슬이 시퍼런 핍박 속에서도 지체들을 건져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자신들이 특별한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인해서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디든지 성령의 역사와 함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늘 있었던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기록
시인은 구약시대에 이것을 맛보고 하나님을 향한 감격 속에서 살았습니다.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고쳐나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뻐하고 감격하며 살아가야합니다.
2절에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를 읊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구체적으로 읊기 위해서는 시를 지어야 될 것이니, 하나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양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악기로 연주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기쁨에 잠기게 만듭니다.
교회에서 음악은 음식하고 비슷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올바르게 잘 사용을 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거나 남용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고백록에서 이와 같은 고민을 피력을 합니다. “회심하고 얼마 안 되지 않을 때, 교회에서 들리는 찬양소리가 신기하게 자기 마음을 열어주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가락에만 빠져들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데 방해가 되게 했습니다.” 이미 1600년 전에 신앙의 선배가 그런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큽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향한 찬송을 기록으로 남기고, 하나님을 향한 즐거움과 기쁨을 구체적인 예배와 찬양의 형태로 하나님께 올림드림으로써, 이것이 일시적인 기쁨이나 감흥이 아니라 항구적인 영적인 자원이 되어서, 그렇게 입술로 고백하는 찬양의 내용이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과 신앙이 되도록 하나님을 향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신앙의 형식과 내용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시 81:3-4)
본문해설
이 시가 개인적으로 암송되기도 하였으나 이스라엘의 큰 축제일에 공동체적으로 암송되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장막절이나 유월절 같은 민족적인 큰 경축일에 공동체가 한 목소리로 낭송함으로 함께 기쁨에 참여했습니다. 여기서 초하루와 보름이라고 표현했는데, 예전 성경에는 어려운 한자말로 월삭과 월망, 그리고 절기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초하루는 월삭이라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는 아니지만 정기적인 제사일이었으며, 보름은 원래 월망이라고 해서 15일을 가리킵니다. 매달 15일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민수기 29장으로 보건대, 장막절인 7월 15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커다란 경배를 드리는데 그걸 두고 보름이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장막절이나 유월절과 같은 커다란 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악기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공동체적으로 찬양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율례요, 야곱의 하나님의 규례로다” 율례와 규례라는 단어들이 많이 나오는데 율례와 규례는 각각 다른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들은 율례는 제사를 지내는 법도와 관련된 율법의 규정들이고, 규례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일반적인 생활의 법도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확고한 근거를 가진 구별은 아닙니다. 그 구별이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어쨌든 거의 유사한 말의 반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율법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되도록 “이렇게 살아라”하는 규정들을 율례 혹은 규례라고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법이라는 큰 개념아래서 구체적인 삶과 하나님을 섬기는 지침들이 나오는 정도로 해석하면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을 수 있는 해석입니다. 즉, 율법을 구체화하는 세부항목입니다. 기쁨으로 악기를 연주하면서 월삭과 월망, 그리고 절기에 하나님 앞에 나팔을 불며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구체적으로 이루는 하나의 종교적 시행사항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
그러면 우리가 어떤 교훈들을 여기에서 얻을 수 있습니까? 신앙에 있어서 형식과 내용입니다. 다시 말해서 1절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만약 이스라엘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다면 과연 형식이 요구하는 바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충족시킬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삶에 있어서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향한 기쁨, 선택받은 백성으로 살아가는 행복이 그들의 마음에 넘쳐 날 때, 신앙의 형식들이 내용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행복이 없다면 형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물론 신앙의 형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참된 기쁨과 경외의 감정이 없다면, 아무리 형식이 있어도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바를 성취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도무지 채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무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형식자체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전달해 주시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습니까? 특히나 내용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경외의 정이 없었을 때 말입니다. 제가 전도사로 섬길 때, 영적인 침체에 빠졌던 교사 한사람이 주일인데 교회에 안 나왔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이들 가르치는 것은 물론이고 교회 자체를 못나왔냐?”고 물었더니, “인천에 놀러 갔었어요.”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그럴 사람이 아니어서, 설마 놀러갔던 게 아니고 인천 앞바다에 가서 하루종인 바다를 바라보고 상념에 잠기다가 집에 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랬냐?”고 물으니 “어차피 하나님은 내 예배를 안 받으시고 은혜도 안 주시는데 온들 안온들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미치지 못하는 예배를 드리는 것과 아예 예배를 안 드리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막보는 행동이다.” 보통 사람들끼리 “어째서 그랬니?”라고 책망하면 보통은 “죄송합니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랬다. 네가 어쩔래?”라고 하면 이것은 막보는 행동입니다. “너 같은 인간하고는 관계가 깨져도 하나도 두렵지 않고 무섭지도 않다.”라는 뜻입니다. 신실하지 못한 태도와 막보는 것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공개적인 도전이고 모욕입니다.
내용이 형식을 채울 수 없을 때는 거기에서 깊은 가책과 문제의식을 느끼며 “내가 왜 예배에 참여해서 은혜를 못 받을까? 나에게 무슨 결함이 있는 것일까?”라고 반성해야합니다. 예배가 마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은 감격 때문에 못 일어나고, 못 받은 사람은 가책 때문에 못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경외의 감정이 충만하지 못해서, 설령 초하루와 보름과 명절에 나팔을 불고 소고를 치는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의 기준을 못 채운다 할지라도 그것은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아 나는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 되었구나.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반성하면서 고민해야합니다.
하나님 앞에 그것이 거울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마음을 갖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고 성경구절을 본다면, 정말 많은 적용점들을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많은 신앙의 의무들은 일방적인 의무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우리의 수단이 됩니다. 일방적인 의무는 우리의 짐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따라가도록 만드는 훌륭한 은혜의 기회이자 은혜의 수단이 됩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기쁨과 경외의 감정이 모자라서 형식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형식을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예배시간에 은혜를 못 받아도 그 이유 때문에 예배에서 이탈해서 인천으로 구경하러 가서 주일을 범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공개적인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예배는 우리가 커다란 영적인 유익을 누리는 통로이기도 하지만 예배에 참여해서 주님 앞에 그렇게 경배 드리는 것 자체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무는 우리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며, 그렇게 하지 않을 때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미얀마에서 민주화 투사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아웅산 수치’ 여사는 혹독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녀에게 어떻게 독제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가 망명을 했었다면 지금보다 고난의 세월이 줄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가 망명을 했다면 영원히 미얀마로 돌아갈 수 없고 그렇게 되면 민주화의 꿈은 요원해질 것이기 때문에, 온갖 시련을 당하면서도 그냥 그 나라에 머무는 쪽을 택했다고 했습니다. 한때 꽃다웠던 여자가 이제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의무(Duty)라는 한 단어가 나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었다. 민주주의는 그냥 쟁취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묻고 그것을 요구할 때 그때 민주화는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의무였다. 의무라는 한 단어가 나를 고난 속에 살아있게 했다.”라고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과거에 청교도들이 이와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청교도들이 정말 사랑했던 단어 중 하나가 ‘의무’였습니다. 청교도 시대 때 나온 책들에서 보면 'duty'혹은 'duties'라는 제목이 붙은 책들이 많습니다. 매일 매일 삶에 있어서의 의무, 기도생활에 있어서의 의무, 설교를 해야 할 목회자들의 의무, 평신도들의 의무 등등 앞에 수많은 수식어가 달렸지만 ‘의무’는 그들이 즐겨 사용하던 단어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창조주이시며 우리의 구속주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손에 지은 바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구속받은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언약에 따르는 권리와 언약에 따르는 의무가 함께 주어졌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과 언약을 맺지 못한 사람과 우리를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표지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니 그 의무를 행하는 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을 올바르게 세우며 살아가는데 이 의미가 얼마나 커다란 도움이 되는가?’라고 우리는 반문할 때도 있습니다. 내용이 형식을 채울 수 없을 때 우리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처럼 느끼며 의무를 벗어던짐으로써 자유를 누리려고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자유케 하게 됩니다. 이것은 의무 탓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기쁨이 없음,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경외심이 없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그것들을 내 안에서 회복함으로 진정한 자유를 찾아가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이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시 81:5-6)
애굽을 치러 나가던 때
애굽 땅을 치러 나아가시던 때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려할 때, 바로가 쉽게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전무후무한 열 가지의 재앙을 애굽에 내리십니다. 피, 개구리, 이,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등으로 이어지는 열 가지 대 재앙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두려움으로 녹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게 됩니다. 바로는 엄청난 노동력을 잃기 싫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끝까지 붙잡고 싶었지만 백성들의 피해가 막심하여 놓아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위한 용사가 되었다”라고 묘사합니다. 그래서 마치 전쟁이 일어나서 자국의 포로들이 적국에게 붙잡혔을 때 아군이 응원군을 이끌고 공격을 해서 포로를 구출해 오듯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을 하시는 용사로 묘사합니다.
“치러 나아가시던 때”라는 것은 전쟁의 문맥입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이 커다란 이적을 일으키던 그때 “요셉의 족속 중에 이를 증거로 세우셨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증거로 세우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하여 가나안땅을 주겠다고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는데 백성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재앙은 내리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놓아주지 않는 바로와 애굽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약 430년 종살이의 작별을 고하고 이 심판 과정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앎, 새로운 지식을 갖게 되어 커다란 심령의 부흥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증거로 세우셨도다
“요셉의 족속”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애굽 땅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애칭입니다. 이것이 왜 애칭이 되었습니까? 요셉이 제일 먼저 애굽에 팔려가잖습니까? 그래서 그가 먼저 애굽에서 자리를 잡습니다. 결국 그가 국무총리가 되어서 자기 가족들을 모두 데려옵니다. 모두 70명, 요셉의 아이들까지 합하면 약 75명이 되는 사람들이 애굽에 살면서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애굽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사람들이 모두 요셉의 후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혈통적으로는 거기에 형들이 있었지만 그들이 결국 요셉의 그늘 아래로 들어와서 보호를 받으면서 커다란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얼마든지 “요셉의 족속”이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브라임이라는 표현과 같이 그렇게 흔한 표현은 아닙니다. 특별히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킬 때 “요셉의 족속”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또 요셉에게는 번영이 약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족속”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족속이라는 말은 안 나오지만 “요셉 중에 증거로 세우셨도다” 그래서 마치 몸의 일부를 가지고 전체를 가리키듯이, 요셉으로 이스라엘 전체를 제유법으로 표현했는데,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법입니다. “그들 중에 하나님이 증거로 세우셨도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스라엘을 위하시며 조상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사 그들을 권념하사 애굽에서 탈출시켜 가나안을 유업으로 주시겠다는 증거입니다.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거기에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 그러니까 거기서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내가 깨달았다는 뜻도 되겠지만, 또 한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애굽을 열 가지 재앙으로 치러 나아가실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을 깨달았다는 뜻도 됩니다.
전자로 보면 역사적인 기록에서 “자기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라는 것이 시인 자신의 깨달음이었다면 그것은 “이르시되”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시인 자신이 들은 바를 기록한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성경이 완성되기 전이니까 계시를 풍부하게 받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떤 말씀이 직접 듣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후자로 보면 시인이 직접 들은 말씀이라기보다는 이미 성경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한데모아 정리를 한 것입니다. “거기서 내가 알지 못하던 말씀을 들었나니”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놀라운 역사의 전개과정이 기록된 성경 속에서, 옛날에는 미처 깨닫지 못하던 말씀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혹은 과거에는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던 말씀을 하나님의 감동하셔서 그 진정성과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저는 두 번째 해석을 선호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하나님이 건져내실 때,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면서 주신 말씀들을 여기저기서 모아놓은 내용들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이 주신 말씀들을 성경을 통해서 다시금 알게 되었다 말하는 것이 적합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주님께서 해방시켜 주심
특별히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6절, 7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부르짖음’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의 백성의 경건하고 간절한 기도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친 백성, 이스라엘이 받는 고통으로 인한 울부짖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때로는 경건한 사람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너무 고통 받고 신음하면 하나님이 정의의 차원에서라도 간섭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6절에서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라는 말씀은 해방을 가리킵니다. 여기에 짐, 광주리는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혹독한 노역에 종사하면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는지를 보여 주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애굽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광주리를 들고 종살이를 했는데 그것을 벗기고 놓게 하였도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주시는 해방의 선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거운 돌짐, 흙짐을 졌습니다. 그리고 손에는 무거운 광주리를 들고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섬겼습니다. 겨우 먹고 사는 것 외에 아무런 미래나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오셔서 이들을 해방시켜 주시겠다고 선언하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놀랍고 커다란 희망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을 어떤 짐을 지고 계십니까? 그리고 어떤 광주리를 들고 계십니까? 하나님이짐을 벗기고 광주리를 놓는 해방을 허락하셔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 자유를 주시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언약 백성으로 승리하며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건지시고 시험하신 하나님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네게 응답하며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였도다”(시 81:7)
본문해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셨는지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순히 애굽에서 탈출시키신 것만이 아니라 이후에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정착하고 난 다음에 생활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많은 난관을 만납니다. 이 난관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건져주시는데, 하나님이 건저주시는 모든 과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어떤 태도를 가지고 믿음의 삶을 사느냐에 많이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행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매 건지셨고
첫째는 ‘네가 고난 중에 부르짖으매 내가 너를 건졌고’, 이것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나타나기까지 애굽에서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갈 때 그들의 울부짖음이 하늘에 상달된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르짖는다’는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건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찾으며 일제히 간구했다는 뜻이기보다는, 언약백성들은 언약의 하나님을 대부분 잊고 이었지만 그분은 그들을 기억하셨기 때문에 애굽에서 바로에게 압제를 당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고생스런 삶 자체가 부르짖음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부르짖음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야고보에서 믿음이 있다하면서 행위가 올바르지 않은 돈 많은 사람들이 포악한 삶을 살고 가난한 자들을 구박하고 일을 시키고 돈도 제대로 안 줄 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의 품삯이 소리를 지르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법도와 공의가 올바로 충족되지 않았을 때, 그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렛소리에 응답하며
둘째는 ‘우렛소리의 은밀한 곳에서 내게 응답하며’ 이것은 비,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과 불, 이어서 메뚜기가 나오고 어둠이 오고 마지막에 장자가 죽고 열 번의 재앙이 채워지게 됩니다. 이때 일곱 번째 재앙으로 우박이 내리는 것입니다. 결빙된 우박들이 떨어지면서 이파리에 구멍을 내서 식물에 치명타를 입힙니다. 열매고 꽃이고 할 것 없이 다 구멍을 뚫어놔서 모조리 파괴합니다.
우박과 불 재앙에 이르러서는 세 가지 현상이 함께 동반되는데, 우렛소리, 우박, 그리고 불입니다. 그래서 한꺼번에 세 가지가 같이 일어나는데 애굽 사람들이 우렛소리가 들릴 때, 당연히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우박과 불이 떨어지고 아마도 컴컴했을 것입니다. 짐승이나 작물은 말할 것도 없고 가재도구 같은 것들도 다 탔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공포를 불러일으켰을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내게 응답하였다.” 왜 응답이 됩니까? 그러한 재앙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큰 고난에서 건져주시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울부짖음에 응답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므리바 물에서 시험
셋째는 “므리바 물가에서 너를 시험하셨도다” 출애굽기 17장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에서 나와서 르비딤에 머뭅니다. 거기서 아주 중요한 사건을 만나는데, 물이 없어서 목마른 사건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왜 잘 있는 우리들을 이끌어내어서 여기에 끌고 와서 목말라 죽게 하느냐’며 원망합니다. 마치 모세를 돌로 쳐 죽일 것 같은 기세로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신앙이 없으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같은 것들에 대한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하나님께 매달리자 호렙 산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두고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시험하였다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궁핍가운데 있게 하심으로서 그들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건지시고 응답하시고 시험하신 모든 사건들을 종합해보면서 우리가 왜 시인이 찬송의 제목 속에 하나님의 행동을 나열하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반역하는 태도를 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실치 못해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대적하고 원망하고 도전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건지시고 응답하시고 도우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시험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불신앙과 불순종과 죄가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이겨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고난 중에 있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언제나 우리를 건져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시련과 결박 가운데 있을 때 주님께 간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애굽 온 땅에 재앙을 내려 이스라엘을 건지신 것처럼, 우리들을 지켜주시고 건지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결핍 속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들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시험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석에서 물을 낸 사건은 더욱 이것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상식을 초월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이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붙드신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깊이 의지하며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며 이방 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시 81:8-9)
본문해설
8절서부터 마지막까지 나오는 찬송은 시인이 직접 지었다기보다, 군데군데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말로 시의 형식을 빌려 기록한 것입니다. 6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직접 화법으로 나옵니다. 6절을 강해할 때 말씀을 드렸다시피, 이것은 시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정리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내려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개연성은 하나님이 시인에게 직접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진 말씀들을 군데군데 반복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오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 중 반복된 구절들이 여기에 대부분 등장합니다.
듣기를 원하노라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들으라, 증언하리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말 원하시는 것은 듣는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듣다’는 재밌게도 ‘샤마’([m'v)라는 동사인데 'into'라는 전치사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형식적으로 수박 겉핥기식으로 듣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관통해 들어가며 말씀 속을 듣는 겁니다. 그런 마음의 태도로 하나님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듣는 것과 순종하는 것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재물보다 낫다” 그것이 바로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들음이 없이 드리는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는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재물의 크기가 문제가 아니라 재물과 헌제자가 일치를 이룰 때, 제사는 하나님 앞에 받음직한 제사가 됩니다. 여기서 ‘들으라’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좋은 신앙은 잘 듣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교회에서 받아야 할 훈련이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속에서 진리를 받으려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네게 증언하리라” 여기서 증언은 ‘에다’라는 단어인데, 증언은 법정에서 하는 것입니다. 증언이 어떠함에 따라서 피고석에 있는 사람은 죽을 수도 있고 무죄로 방면 될 수도 있습니다. 증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 백성이여 들으라 내가 하는 얘기는 괜히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너희가 법정에 서 있을 때 내가 증언하는 것처럼 너희들에게 나오는 말이 너희를 판결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내용이라면, 뒤의 말씀은 들어야할 태도를 보여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사람마다 다 자기가 임금이고 자기가 철학자고 자기가 사상가입니다. 학식이 모자라면 사람이 엉성해서 그렇지, 강력하게 붙들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라는 집을 많이 지었어도 그것을 강력하게 못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엉성하게 지었는데도 굳세게 붙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더욱이 현명하고 판단력이 있으면 당신이 붙들고 있는 사상이 잘못된 것이라고 조목조목 지적해주면 인정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지력도 모자랍니다.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말도 안 되는 자기 사상을 굳게 붙들고 순교 신앙가지고 예수를 붙드는 교인처럼 삽니다. 그런 교인은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렇게 돌아앉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이여 내게 듣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재밌습니까?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이여”라고 말했습니까? 언약을 맺은 백성의 이름입니다. 언약을 맺은 백성의 특징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한다는 것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갈망입니다.
옛날에 할아버지가 쓰던 돋보기를 생각해보십시오. 초점이 모이면 영락없이 빛이 모이면서 종이가 타기 시작합니다. 추운 겨울에도 말입니다. 어마어마한 빛의 힘입니다. 어떤 태도로 듣느냐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희망이 있습니다. 아무리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세상에 완전하고 온전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흔들리지 않고 일평생 신앙의 길을 걸어갔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빨리 교정이 된 사람입니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가 이런 책을 썼습니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젊은 사람들은 아프기를 싫어합니다. 그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수백만부가 팔렸고 중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답니다. 젊은이들은 아프기를 싫어하고 조금만 흔들리면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무풍지대 속에서 부모가 베풀어 준 모든 은덕을 입으면서 곱게만 자라서, 아픔이나 두려움을 못 견딥니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흔들리는 것을 아예 참지 못합니다.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 빗나갔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을 착념하는 사람은 다시 돌아옵니다. 아침, 저녁으로 교정되면서 가는 겁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엇간 길로 쭉 나가면서 도대체 교정 받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엇간 길로 가게 됩니다. ‘듣기를 원하라’는 하나님의 충고가 얼마나 강력한 충고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신을 두지 말라
“너희 중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는 구절은 십계명에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를 더불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제1계명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도 이방신들을 섬기는 사람들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 우상문화에 접촉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보니 완전 이방 종교의 판치는 세상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장사를 하는 사람과 유목을 하는 사람보다도 하늘을 더 많이 의지하는 사람이 농부 아닙니까? 그들에게는 농사를 망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펄 벅 여사가 쓴 유명한 『대지』라는 소설에 보면 흉년이 거듭되자 급기야 흙을 빨아서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아이티 같은 곳에서는 진흙을 구워가지고 돈을 받고 판다고 합니다. 그걸 먹으면 속이 찬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흉년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비를 내려주시고 적당한 일기를 주고 하는 것들을 전부 신들이 주장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바알 종교, 아세라 종교 등 모든 가나안 땅의 종교들이 농사와 관련됩니다.
‘이방신을 둔다’는 것 자체가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위치, 즉 하나님과 동등하게 혹은 하나님 앞에 혹은 하나님 뒤에 두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만 의지하고 살도록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약속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다른 신을 두는 목적은 다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번영입니다. 신을 깊이 공경하는 속내를 살펴보면, 적극적은 마음은 신을 자신들을 복주고 농경사회에서 부강하게 해달라는 것이고 소극적인 마음은 그들이 벌을 내릴까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신들이 세상의 구역을 나누어서 각각 다스린다고 보았습니다. 여호와라는 신은 워낙 크셔서 온 세상도 그가 다스리기에는 너무 작습니다. 그는 온 우주를 통치하는 여호와입니다. 이런 신관이 그들에게는 잘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광야에서는 우리를 인도해주셨건만, 애굽에서 행하였던 모든 일들은 잊어버렸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사람들은 출애굽 세대가 아니라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세대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이적들을 보았으니,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가나안 땅에 있는 신들에게 밉보여서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 하면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혼합신앙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향한 경배
하나님은 한분만을 향한 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그것을 당신을 향한 경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두지 말지어다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지어다” 이것은 단순한 사상의 문제가 아니라 적극적인 경배의 문제입니다. 경배한다는 이야기는 순종하고 복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방신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강요하는 것들 중 단 하나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지 않고 하나님께 범죄 하지 않고 신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방신들에게 절하지 말지어다”라는 문제를 가지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질투란 무엇입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을 빼앗기는 상실감에서 오는 것이 질투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질투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서 우리를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 하나님에게 손해라도 되는가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아내나 남편,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거나 사라졌을 때 나 자신의 존재를 계속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족들이 죽으면 자살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부족한 분이라고 보면 안 됩니다. 이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신학용어로 ‘아코모다치오’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알아듣게끔 우리 수준에 맞추어 이야기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적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이 잘 못 알아듣겠으니까 하나님은 질투하신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서로 질투를 수없이 받지 않습니까? 이때는 일부다처제니 여자들이 시기하는 것을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야곱의 경우에도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부인 하나를 데리고 사는 게 이토록 힘든데 하물며 여러 명을 데리고 사는데, 남편의 말에 순복하며 따라오겠습니까? 그것이 쉽지 않으니까 끊임없는 질투 속에서 고통을 받는 겁니다. 서로 질투하는 것을 보는 남편, 질투하는 여자, 질투 당하는 여자 등 생각해 보십시오. 셋이 다 지옥일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옛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첩 가진 남자는 산에서 호랑이를 만나도 안 잡아먹는다. 호랑이가 사람을 물면 어디부터 먹는지 아십니까? 배부터 먹는답니다. 내장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남자를 꽉 깨물면 썩은 맛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질투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질투하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가슴에 팍 꽂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신을 섬길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면 이해가 팍 갑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우리보다 정말 유식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교정해서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슴에 확 꽂히는 한마디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질투는 항상 그 끝이 살인을 지향합니다. 그 존재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살인, 살육을 지향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가슴에 비수처럼 꽂힐 정도로 그렇게 적나라하고 파격적인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고하였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신을 두거나 이방신을 섬기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합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다” 구약시대처럼 이방신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말은 못하지만, 오늘날에도 교회에 점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굿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점을 보러 갔는데 점쟁이가 점통을 흔들더니 짜증을 내면서 “네년들 중에 예수 믿는 년 있지?” 그러더랍니다. “제가 다니긴 다니는데요.”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여기에 왜 와? 예수 믿는 것들은 절대로 우리 점괘대로 안살아. 팔자대로 안살아. 왜? 하나님이 그들의 팔자를 따로 정해주시니까”라고 책망하면서 예수 잘 믿으라고 했답니다. 그것이 회심의 도구가 된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처음 회심했을 때 전도사님 한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오래 동안 교회를 충직하게 잘 섬겼는데 증조할머니 때부터 예수를 믿었답니다. 그 집안에 아이가 생사고비에서 위태롭고 또 여러 우환이 겹치자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는데, 한창 굿을 하더니 내 힘으로 안 된다고 하면서 요새 새로 들어온 귀신이 예수가 꽤 세니까 거기로 한번 가보라고 하더랍니다. 아픈 애를 데리고 선교사한테 찾아간 것이 예수님을 믿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그렇게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고통당하는 우리가 너무나 불쌍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위로해 주십니다. “너희는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 이것을 사도바울이 탐심에 적용합니다. 1계명에서 마지막 계명까지, 마지막 계명은 다시 1계명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중에 하나를 범하면 모두를 범하는 것이고, 하나를 지켰다고 모두를 지킨 것은 아닙니다. 결국 매순간마다 주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걸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합니다.
애굽에서 인도하신 여호와
“나는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시 81:10-11)
출애굽,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이스라엘 역사에서 애굽에서 자기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은 최고의 찬송제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건져낸 것이 왜 이렇게 오랫동안 잊히지 않고 각인되는 사건이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다음의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기 전까지 그들에게 있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라고 해야 기껏해야 족장들과 함께하셨던 역사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 이르는 역사였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여주는 사건도 나타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가족의 역사 속에 머물러 있었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된 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지만 섭리의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점에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굽에서 신앙이 훌륭했던 사람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행하셨던 많은 사건들, 특히 바벨탑의 사건 혹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신 사건이 등등 이 사건들이 사실 그들에게는 너무나 먼 사건이어서 전설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들어온 지 430년을 마치는 날에 출애굽을 합니다. 그러면 20세를 한세대로 본다하더라도 약 40세대라 지나는 기나긴 세월이 지났을 때 애굽에서 혹독한 노예살이를 하면서 살았으니 그들의 신앙이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물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분을 향한 경배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충만한 하나님을 아는 빛 가운데서 살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시기 위해서 행하신 10대 재앙을 통해서 그들은 충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정적인 것은 9번째 재앙입니다. 애굽 사람들에게는 최고의 신이 태양신입니다. 10개의 재앙이 일어나는 모든 과정이 애굽에서 절대시하던 신들에 대한 관념을 겨냥합니다. 예를 들면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어두움, 장자 이렇게 나옵니다.
피 재앙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애굽 사람에게 경배의 대상은 나일 강이었습니다. 나일 강이 엄청난 생명력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홍수가 나면 상류에서 떠내려 온 기름진 흙이 있어 농사가 잘 됩니다. 최소한 기원전 3,000년 전에 원의 넓이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기하학도 아주 발달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물고기들이 살아서 물고기들을 잡아서 먹을 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신으로 여기게 됩니다. 다곤 신의 경우에는 곡식이 ‘다곤’이기 때문에 ‘낱알 곡식을 섬기는 토템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학자는 ‘다곤’이 ‘다그’에서 왔다고 보는데 ‘다그’(gD)는 히브리어로 ‘물고기’라는 뜻입니다. 확실히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런 의견이 있을 정도로 나일 강에 대한 숭배가 중요한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한 번에 피로 막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고기들이 몰사했습니다. 핏속에서 물고기들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어서 하나씩 하나씩 악질, 독종 같은 것들을 퍼트림으로 희생제사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태양이 빛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두려운 사건이었겠습니까?
출애굽, 이스라엘을 향한 놀라운 자비
두 번째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보여준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놀라운 자비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실 때 처음에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겪다가 그 다음에는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사람을 분리시켜 온 세상이 어두워 졌는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은 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능력을 구분해서 보여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놀라운 긍휼을 보여주십니다. 마지막에 장자의 죽음에서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지 않고 넘어가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음이 있고 나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놓임을 받게 되는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백성이라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출애굽 사건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커다란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이 식어도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해 내신 여호와라는 기억은 잊히지 않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광야의 40년의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 행하신 위대한 능력과 도우심 마지막에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가나안 정복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 이 모든 것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는 표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시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회상했습니다. 신명기에서 십계명을 주실 때 이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출애굽기에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는 근거가 되지만, 신명기에서는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이 십계명을 주시는 근거가 됩니다. 창조하신 것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되었다가 나중엔 구속하신 것이 십계명을 주신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놀라운 자비를 보여주십니다. “네 입을 크게 열어라 내가 채우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이 세상의 번영입니다. 세상에서의 번영과 행복을 위해서 이방신을 섬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입을 크게 열어라. 나를 향해 충분한 기대를 가져라. 그리고 나에게 부르짖듯 기도해라. 내가 그것을 채워주겠노라.”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의 측면에서만이 육체와 영혼, 전 존재가 나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너희는 나를 의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해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내가 주겠노라. 너희는 나를 신뢰하라. 내가 만복의 근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독점적인 관계 즉,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과만 관계를 맺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혹여 이방신이 존재한다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들입니다. 그들에게 바치는 곡식이나 포도주 같은 것도 하나님이 주신 땅의 소산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핵심적인 열쇠는 하나님 밖에서 행복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도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요인이 됩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불순종과 우상숭배를 가능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듣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사랑을 저버린 것입니다. 먼저 듣지 않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8절에 나오는 “내 백성이여 들으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와 정배치 됩니다. ‘듣는다’는 것은 히브리어 ‘샤마 베’라는 전치사가 따라오는데 'here into'입니다.
아랫사람에게 일을 시키다보면 일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윗사람의 마음을 알려고 합니다. 그래서 대화가 끝나면 내 마음이 그에게 전수가 되어 그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합니다. 그러니 전수된 마음은 전달된 말의 크기보다 훨씬 깊고 크고 때로는 간절하고 때로는 절실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통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순종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말을 조금밖에 안했는데도 가슴에 절절하게 느껴질 정도로 “진짜 저 사람이 저렇게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으면 참 좋겠다. 그리고 내가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나를 바쳐서 그 사람 마음먹은 대로 되게 하는 게 참 좋겠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상사와 부하의 마음이 통하면 그 사람과 함께 있느냐, 떨어져 있느냐, 사람이 미국에 있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서 “이거해. 이거해”라고 말해서 조직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훌륭한 리더십이 아니라, 그가 없어도 조직이 움직일 때 시공을 초월하는 진정한 리더십입니다.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이 보시면 그렇게 섬기는 것을 기뻐하시겠느냐?” 그것이 한 민족의, 한 집단의 정신으로 하나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왠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은 허전하고 불안한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뭔가를 자꾸 섞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자신의 재능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 등등을 혼합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약에서 ‘리브 패턴’이라고 칭하는데, ‘리브’(byrI)가 히브리말로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를 버렸도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절기를 안 지킨 적이 없고 희생제물을 바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나와 이방신을 함께 섬기는 것은 나를 버린 것이다.” 이런 식의 논쟁의 패턴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보려는 모든 시도들이 인간의 불행의 원인입니다. 큰 것이든지, 작은 것이든지. 좀 더 말씀드리고 싶지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원치 아니하였도다
다음으로 “원하지 아니하였도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랑은 끝임 없는 관계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얼마나 핵심을 찌르는 말씀입니까? “나 당신 사랑해.”와 “나 당신 통장을 사랑해.”는 다릅니다. “나 아빠 좋아.”와 “나 아빠의 유산을 좋아해.”는 다릅니다. 연로한 부모에게 자식들이 “우리 집에 와서 계세요.”말하는데, 부모를 모시는 공경의 마음보다 우리 집에서 돌아가셔야지 유산상속에 이로울까봐 그렇다면 그것이 어찌 효도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표현에 의하면 나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원한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 왜 나를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을 못합니다. 그것이 정답입니다. 아내가 “여보, 당신 왜 이렇게 사랑해?”라고 물을 때 “하루세끼 밥해주잖아.”라고 대답하면 아내가 아파서 밥을 못해 준다면 사랑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또는 “왜 이렇게 사랑해?” “예쁘잖아.” 그 미모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참 이상합니다. 젊었을 때 빼어나게 예쁜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더 흉하게 늙는 것 같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아름다움도 사그라들고 사랑의 근거가 사라지잖습니까?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풍년을 원하지 않았습니까? 원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원하지 않았습니까? 원했습니다. 어차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통해 얻든지 하나님을 통해 얻든지 이 세상의 성공과 부귀만 얻으면 충분하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곡을 찌르시면서 “이스라엘은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고 나를 싫어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타락하고 불순종하여 그 축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던 가슴 아픈 사연들을 다시 제시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믿음을 새롭게 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 촉구가 어찌 이스라엘에게만 필요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습니까?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대로 버려 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시 81:12)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반역을 회고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른 신들을 경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십계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십계명은 열 가지 계명으로 이루어지지만, 사실은 두 번째부터 열 번째까지의 계명에 순종 할 수 있는 모든 힘이 첫 번째 계명에 순종하는데서 나옵니다. 십계명은 탐심의 문제로 끝마치는데, 골로새서에는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합니다. 주기도문과 마찬가지로 십계명도 직선형 구조가 아니라 원형 구조여서 마치 목걸이처럼 계명들이 마지막 계명이 첫 번째 계명으로 돌아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받을 때 십계명이 두 번 주어집니다. 한번은 하나는 출애굽기에 나오고 그 다음에는 신명기서에 나오는데, 각각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기소개가 다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계명을 지켜야한다는 근거를 제시하지만, 이에 비해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구속해 내셨기 때문에 계명을 지켜야한다는 근거가 제시합니다. 그러니까 창조에서 구속으로 이행을 합니다. 창조에서 구속으로 이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도 순종의 근거가 되지만, 그보다도 더 직접적인 순종의 근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고 그들을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순종하며 살아야할 백성들
그래서 하나님이 “다른 신을 두지 말고 이방신에게 절하지 말라, 나는 능력으로 말하면 너희를 애굽에서 건져내신 여호와니 무엇이 필요하면 네 입을 크게 열어라. 그리하면 내가 채우리라.” 왜 이러한 말씀이 나오겠습니까? 이방신들을 섬기는 동기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이방신을 사랑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이방신을 진심으로 마음속으로 흠모하고 공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세속적인 성공의 의도를 가지고 이방신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방신이 너희에게 해주는 것을 내가 해 줄 테니까 입을 크게 열어라.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나에게 말해라. 그리고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순종하라. 내가 너희의 필요를 채워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방신들에게는 자기의 성공과 번영을 빌면서, ‘나 여호와에게 빌어라’고 말씀하실 때 거기에 순종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방신에게 빌 대는 그 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빌면 됩니다. 왜냐하면 미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빌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거룩함을 추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말씀에 순종해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온전히 순종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체의 삶을 하나님에 맞게끔 고쳐야 됩니다. 전체의 삶을 하나님에 맞도록 고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의 지표로 삼으면서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는 얼마나 쉽습니까? 세상 사랑과 하나님 사랑 둘 다 사랑인데, 어떤 것이 더 힘듭니까? 부패한 죄인들에게는 세상사랑은 별로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은 자신의 본성을 끊임없이 거슬러서 대항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에 대해서 ‘그들은 나를 원하지 아니 하였구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완악한대로 버려두심
“내가 그의 마음을 완악한대로 버려두어 그의 임의대로 행하게 하였도다” 구약에서나 신약에서 악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히브리어로 ‘하자크’(qzej;)라는 단어인데 아주 질기고 강한 것을 의미합니다. 고기의 힘줄 같은 것이 있으면 잘 안 씹혀지고 자르기도 어렵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아주 완악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북어를 상상해보십시오. 원래 명태는 부들부들한데, 그것이 북어가 되면 딱딱해지면 방망이로 때리면 나무 부러지듯이 바스라 집니다. 그런 상태를 여기서 완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쁜 방향으로 굳어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웬만해서는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감동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의해서 흔들리지도 않는 그런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서도 도저히 굴복되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항상 인간의 마음이 특히 신자의 마음이 완전히 완악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완전히 완악해지지 못하도록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억제하는 은혜입니다. 완전히 망가지지는 못하도록 하나님이 은혜로 보호해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판하실 때가 되면 거두어버리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끔 하나님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무지한 인간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최대의 심판입니다.
예를 들어, 짐을 하나 가득 실은 자동차가가 산에 올라가서 비탈진 길에 세웠다고 칩시다. 물론 사이드를 채웠지만 언제 풀어질지 몰라서 뒤에다가 돌멩이를 고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덜컥하고 브레이크가 풀렸습니다. 만일 고인 돌멩이가 있다면 딱 걸릴 텐데 누가 와서 돌멩이를 확 빼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짐이 무거우니 차가 그냥 밑으로 밀려내려 갑니다. 내려갈수록 가속도가 붙어서 집을 들이받고 판자를 부수고 결국 대형사고가 날 것입니다. 누가 차를 민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게에 의해서 아래로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체의 무게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욕망이고 죄에 대한 욕구와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완악한데로 내버려두어 임의대로 행하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대로 행하게 내버려두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서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훌륭한 명령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에 결국 광야에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고두고 교훈과 경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라’ 여호수아가 모세에 이어 지도자가 되었을 때, 가장 중시한 가르침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순종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장 안전한 삶을 사는 길은 우리의 마음을 들여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뜻을 좆아서 사는 것임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주의 도를 따를 때
“내 백성이 내 말을 들으라, 이스라엘아, 내 도를 따르라”(시 81:13)
본문해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음이 원하는 대로 하게끔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렇게 내버려 두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을 들으라” 그리고 “주님의 도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 단어에서 ‘듣다’라는 ‘샤마’([m'v;)인데, 사무엘이란 이름도 여기에서 나옵니다. 흔히 ‘들린다’와 ‘듣는다’는 다른 것으로, ‘들리는 것’은 수동적으로 그냥 들리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고, ‘듣는 것’은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집중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행동이나 삶이 좌우될 것을 기대하면서 청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사무엘이 사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더 낫다고 고백했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전달받기 원하는 의도를 가지고 듣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듣는 것입니다. “내 백성아 내 말을 들어라”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을 듣고 그분의 도를 따름으로써, 다른 모든 이방백성들과 구별되어야할 민족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가장 중요한 표지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말을 들어라”라는 표현과 “내 도를 따르라”는 표현은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도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고, 순종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복종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며 살기 위해 은혜가 필요함
우리가 무슨 일을 하던지, 마음을 다해 일하는 것과 의무 때문에 일하는 것은 커다란 차이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외적인 법도인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려했던 바이며, 모든 신자의 삶의 기쁨이 이에서 나옵니다. 물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를 싫어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도에 대해서 깨닫기 싫어하는 마음, 또 그것을 깨달았더라도 도를 따라 살기를 싫어하는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노릇입니다. 마음이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자 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습니다. 원래 덕이라는 말이 영혼의 힘입니다. 영혼이 힘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마치 물과 같아서 어느 쪽으로 흐르려고 하는 도덕적인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맞는 방향으로 흐르면, 그것이 선한 쪽으로 영혼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이것을 미덕이라고 부릅니다. 반대쪽으로 흐르면, 이것을 가리켜서 악덕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그것이 힘겹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도리에 순종하지 않고자 하는 강한 영혼의 반대편의 힘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거나 혹은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면서 사는 것은 순종보다 쉽습니다.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이 은혜가 필요하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당장은 쉬워보여도, 이것은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힘을 차곡차곡 축척시킵니다.
예를 들면, 댐이 터지거나 산이 무너지는 것도 힘이 축적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산속에 오래 산 사람들은 언제 산사태가 날지를 대충 안다고 합니다. 산사태가 나기 전에 밤새도록 산이 운다고 합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 비가 계속 와서 물이 어디론가 흘러야 되는데, 산이 이것을 가득 머금고 있습니다. 산이 물을 머금을 수 있는 한계치를 초과하면, 산은 더 이상 그것을 지탱하지 못합니다. 그 물줄기가 큰 힘을 만들어서 산을 확 벗겨져 버리는 것이 산사태입니다. 산 하나가 뿌리째 무너져 내리는 것이 아니라 모자가 벗겨지듯이 어느 한쪽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산사태라고 합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서도 그런 힘들이 깊이 축적이 되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은 어렵지만, 이 어려움이 내일에는 쉼을 가져다주고, 오늘 주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쉽지만, 이 쉬움은 내일에는 어려움을 가져다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마음과 영혼이 굽어질 때로 굽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는 매우 중대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물론 신약에서 훨씬 더 풍성하게 나타났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말을 듣고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 뒤에는 그렇게 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과 보증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는 성령의 감림을 통해서 아주 풍성하게 나타났습니다.
어제도,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그러나 그렇게 순종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도움을 주시는가?’ 그렇지만,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도우심은 신약시대에 풍성함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에게 고통을 주는 이방백성들에 대한 아주 절실한 탄원이 나옵니다. 대적들을 파멸을 구하는 복수와 저주의 간구.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심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구약시대 은혜를 많이 받긴 했지만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은 계시와 은혜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된다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계획 그리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거룩한 성령의 충만한 능력 같은 것들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구약시대에 비해서는 얼마나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을 가리켜,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도 세례요한 보다는 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천국은 하늘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강림을 통해 이루어지는 새로운 은혜의 시대를 가리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복음적인 생활이라는 것은 정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의 시대에 이루지는 일입니다.
속히 원수를 누르고
“내가 속히 그들의 원수를 누르고”라는 말씀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누른다’는 말이 압제한다는 의미입니다. ‘누른다, 혹은 압제한다’고 할 때 대표적인 그림이 애굽에서 바로에게 구박을 받고, 고통을 받던 때가 그려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원수를 내가 누를 것이고, 억압하고 압제할 것이다. 그리고 내손을 돌려 그들의 대적을 치리니,” 그것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여호와의 손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이켜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하면, 오히려 그들의 대적을 쳐서 복종시켜 이스라엘의 근심과 고통을 면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영혼의 깊은 어두움은 항상 환경의 깊은 어두움을 동반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곧이어 고난과 어려움들이 찾아오고, 하나님은 이것들을 이용해서 우리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렇게 다루어 오셨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기록된 부분은 두 가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기록한 성경말씀을 약간씩 바꾸어서 반복한 것이거나 또는 하나님이 시인에게 직접적으로 계시해주신 하나님의 음성.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원수들에게 징벌을 내리신다는 약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지, 그분의 도를 즐겁게 따르는지, 깊이 숙고하며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 의지하며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만족이신 하나님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는 그에게 복종하는 체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또 내가 기름진 밀을 그들에게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시 81:15-16)
여호와를 미워하는 이스라엘
여기서 16절은 최종적인 결론에 이릅니다. “여호와를 미워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적인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화법이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치러야할 대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부모나 처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면 하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나라 어법과 아주 비슷합니다. 첫째 아이가 태어나면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둘째 아이가 태어나면 온 가족의 시선이 둘째아이에게 쏠리게 됩니다. 이때 큰아이가 소외감을 느끼면서 ‘엄마는 나만 미워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미워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태껏 자기 혼자 독차지하던 사랑이 동생에게 옮겨가게 되어서 외롭다는 고백입니다. 똑같은 어법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을 진짜 미워한다기보다는 그분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을 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척할지라도 그들의 시대는 영원히 계속되리라” 여기서 그들의 시대는 앞에 나오는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여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을 완악한대로 버려두어 임의대로 행하게 두었다.”라는 말씀을 비추어보면, 아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을 말합니다. 그들이 불순종할 때 고난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그들의 시대라고 표현한 것이니, 결국 긍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부정적인 이야기입니다.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을 향한 저들의 반역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가 16절에 나옵니다. “또 내가 기름진 밀로 그들을 먹이며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불순종하던 길에서 돌이키면 하나님이 그들을 기름진 밀로 먹이고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만족하고 배부르게 하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순종을 담보로 하는 축복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계속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미워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기름진 밀로 먹이고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만족하고 배부르게 하신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대조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도 후자의 해석이 더 적합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자,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먹이셨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곡식이 모두 떨어졌을 때,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서 이스라엘 민족의 식량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아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도 만나가 내렸고 가나안에서 첫 번째 수확을 할 때까지 계속 내렸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사는 동안에 얼마나 모질게 하나님께 대적하고 악을 행했는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섬기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모독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런 때도 만나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불순종해도 만나를 먹고 불순종했고, 죄를 지어도 그것을 먹고 힘을 내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기보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인 신실하심을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순종해도 당신의 백성들을 먹이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폐기되지 않고 언제나 지극한 자비와 은총으로 공급해주셨습니다.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지만 이외에는 그들이 어떠한 불순종을 해도, 어떠한 반역을 해도, 언제나 만나를 내려서 그들의 육신의 양식을 채워주셨습니다. 그들이 먹어야 살고 살아있어야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수도 있으니까 비록 당신의 가슴이 아프시더라도 그들에게 계속 만나를 내려주셨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미루어 보더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훌륭한 대조를 이룹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꿀로 너를 만족하게 하리라” 반석은 히브리말로 ‘추르’(rWx)라는 단어인데 구원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실 때 ‘반석’도 구원의 개념과 연관되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기초라는 뜻도 되지만 구원을 의미합니다. 왜 반석이 구원과 연결되는 개념인가하면 팔레스타인에는 돌산들이 많습니다. 시내산 같은 경우가 대표적이지 않습니까? 바위로 이루어진 굴이 많아서 거기 숨으면 사람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찾는다고 할지라도 화살이 구멍으로 들어오지 못하니 안전한 피난처입니다. 그것이 바로 반석이란 단어가 주는 이미지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반석이라고 칭송하는 찬양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자”라는 고백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백성들의 참된 배부름과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잠시는 우리를 배부르게 하고 만족하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들은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참된 만족이 우리 하나님이신 줄 알고 그분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참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시편81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