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82
목 차
신들의 모임 가운데 서신 하나님(시82:1-2) 45
하나님의 요구(시 82:3-4) 51
모든 나라가 주의 수요입니다(시 82:8) 57
신들의 모임 가운데 서신 하나님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낯 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셀라)”(시 82:1-2)
˚셀라˛의 의미
아삽이 누구인지 그리고 이 시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그러나 시가 암시하고 있는 내용은, 부조리하고 정의가 땅에 떨어진 사회에서 시인이 개탄스러운 기도를 하나님 앞에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셀라”라는 단어는 학자들이 붙인 음악적인 부호라고 생각됩니다. “셀라”라는 단어는 히브리 성경에는 잘 안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암시하는 듯한 것은 “셀라”에서 나오는 ㅅ(시옷) ㄹ(리을) 발음입니다. 모음은 히브리어에서 큰 의미가 없습니다. 모음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히브리어에서 모음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서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노정에서 벧엘에서 잠을 청할 때 잠간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사닥다리를 봅니다. 천사들이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는 걸 봤다고 했는데 사닥다리라는 단어가 구약성경 전체에서 딱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닥다리”라기보다는 하늘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커다란 왕의 길, 하이웨이, 대로’를 가리킵니다. 그것은 밑에서 위로 올라갑니다. 그 단어가 놀랍게도 ‘쑬람’(!L;s)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서 ㅅ(시옷) ㄹ(리을)이 나옵니다. 뒤에 하나는 ㅎ(히읗)발음이고 하나는 ㅁ(미음)발음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제 견해는 이 단어가 같은 어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셀라는 한음 높이라는 의미라고 사료됩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다가 음을 높여서 부르는, 한 키를 높여서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사람들이 곡조를 가지고 노래하였던 것이기 때문에 그 흔적을 여기에 남겨놓은 것이라 추정됩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셀라는 읽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셀라에 대한 설명입니다.
신들 가운데서 계신 하나님
이 시는 시작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가운데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재판하시느니라”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항상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이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우상을 섬겼던 이유는 그들이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삶에 아주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자신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신이다. 혹은 재앙을 내릴 수 있는 신이다.”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게 되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계명을 주시면서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것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모든 신들 중에서는 나를 으뜸으로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은 결론적으로 “너희의 의식 속에서 신은 오직 나 하나라는 생각을 확고히 하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신들의 존재가 마음속에서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께는 커다란 모욕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헛것이니라” 허무한 것, 헛된 것, 있는 것 같아서 손을 뻗어 보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 이런 것들이 우상의 본질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들 가운데 서셨다”라는 것은 신으로 불리는 것들이 있다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 가운데 서 계시고, 그것들은 하나님께 엎드려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서 재판하시느니라” 누구를 재판하신다는 뜻일까요? 신들을 재판할 뿐만 아니라 신들을 경배하거나, 혹은 신들 앞에 사는 모든 인간들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판하고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상의 본질은 인간의 욕망이 신들의 세계를 투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신들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이 땅의 모든 만물들의 주인이신데, 그분께 와서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우상에게 절하고 경배하면서 복을 비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재판하시는 이유
하나님은 당신 앞에 나아올 때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고치기를 원하십니다. 우상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기를 경배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상은 하나님처럼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상에게 재물을 드렸는데 바치는 이의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한 재물인지 묻지 않고 제사를 드리는데, “네가 과연 이 제사를 드리기에 합당한 삶을 이제껏 살아 왔느냐?” 따위는 묻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상은 자기에게 아부하는 자와 충심으로 자기를 경배하는 자 사이에 심각한 구별을 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헌제자에게 “과연 네가 이 제사를 드리기에 적합하냐? 네가 이제껏 살아온 삶이 하나님을 공경하고 이웃에게 공의를 행한 삶이 아니면 이 재물은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라고 쓸어버리는 하나님의 발언은 당시 고대 근동 신들에게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그런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신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들 자체가 하나님처럼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한 신들이 아니라 많은 인간들이 노예처럼 끊임없이 섬겨야만 먹고사는 부족한 것이 많은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그 신들을 경배하고 제사를 드릴 때, ‘네 마음을 다했느냐? 뜻을 다했느냐? 아니면 이게 정말 너의 삶과 일치하느냐?’는 질문을 하기에 이 신들은 너무 배고팠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식의 고도의 도덕적인 관념이 나올 수 없었습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고도의 도덕적인 관념은 하나님의 만족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자족하십니다. 누구에게 기댈 필요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것에서 고도의 도덕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당신을 경배하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지 당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무슨 손해가 나겠습니까? 하늘에 떠있는 달을 보고 개가 꼬리를 흔들며 짓든지 엎드려 마루 밑창에서 잠들든지 달에게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집요하게 당신을 경배하고 당신께 온전히 마음을 드리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렇게 살아야 인간이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건성으로 살아서는 하나님께 손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회개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한 회개를 요구하시는 이유는 철저한 회개만이 죄인을 고칠 수 있고 죄를 짓게 만든 내면의 무엇을 고쳐야만 새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신들 가운데 서셔서 그들 가운데서 재판하시는 이유입니다. 신들이 있다할지라도 신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는 없는 것과 같은 존재이고 하나님의 강력한 통치와 하나님의 재판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신들도 그렇게 통치해서 다스리시니 이 세계에 있는 인간들은 얼마나 잘 다스리시겠는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의로우심
2절에서 “너희가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낮보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하나님이 고도의 도덕성을 지니고 모든 신들 위에 계서서 신들도 심판하시고, 당신의 도덕률을 따라 살지 않는 인간을 재판하시는 분이시라면,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 악인의 낮보기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라고 시인이 푸념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하거나 속는 것입니다.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은 왜 이렇게 불의하고 악한지를 묻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우스운 질문입니다. 왜 이 세상이 선하고 의로워야 합니까? 그것은 누가 만든 법칙입니까? 만약 하나님도 없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통치도 없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인류의 마음속에 씻어낼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불공평을 판단하시며
아무튼 하나님이 지금 책망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이 아주 독특하게 당신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리고 이 세계를 인간의 손에 맡기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이 판단하고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도록 놓아두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간섭하시지만 또한 악인을 내버려 두셔서 그들의 판단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공평한 판단을 하며”라는 것은 나라의 근간을 세우는 것이 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재판이 불공평하게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법이 있어도 나라가 불공평하게 재판해서, 벌을 주어야 할 사람이 잘 살고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들이 벌을 받는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요즘 지하경제를 찾아내서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정부의 정책에 저는 박수를 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는 그런 면에 있어서 조금 극단적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하경제를 하려면 화폐를 없애자는 주의입니다. 길거리에서 고무줄 하나를 팔아도 어떻게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지를 투명하게 해서 모든 사람이 세금을 내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금을 낮춰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료 없이 현금으로 돈을 주고받는 것 자체가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거래가 되고 거래에서 이익이 발생하면 거기에 대해서 세금을 내게 하고 정당한 납세자들의 세금을 깎아 주는 것이 공평합니다. 그러나 누가 인정하겠습니까? 강남에서 일하는 변호사와 의사들같이 돈을 억수로 많이 버는 사람들이 동네에서 작은 구멍가게 하는 사람들만큼도 세금을 안내려고 할 때, 그렇게 불공정한 사회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만만한 게 봉급생활자이니, 유리알처럼 들여다보고 그것 벗겨먹느라고 정신없는 나라에서 살면서, 누가 이 나라가 공정한 나라이고 정직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게 되겠습니까? 그런 불공평한 일들이 사라져야 합니다.
얼마 전에 터키 선교하고 오신 분과 대화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터키가 굉장히 후진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교사님이 선교하다가 체포되어서, 기독교를 선교하는 것이 헌법에 위반 되는 것이냐를 놓고 법원에서 심의를 했는데 대법원의 최종판결이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판결의 내용이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선교를 하는 것을 범법행위가 아니다.”였답니다. 저는 ‘정말 대단한 나라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법이 살아있고 공평한 판단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있어서 이스라엘은 세계 모든 열방에 모범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이미 다 굽어버리고 짓밟혀 버렸는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을 언제까지 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악인의 낮보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악을 행한 사람들이 뻔뻔스럽게 고개를 들고 돌아다니는 인간들을 처벌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고통을 느끼거나 죄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없는, 그래서 사회가 악을 행하고도 떳떳하게 그 악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런 불법한 사회가 되었는데, 언제까지 내버려 두겠느냐?’라는 말씀입니다.
결론과 적용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할 사실은 하나님의 나라의 전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통치를 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통치가 이 세상에 펼쳐지도록 정의를 하수같이 공법을 물같이 흘려보내야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도를 따라 살아가려고 할 때 그 이유 때문에 억압을 받거나 손해를 보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살 때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세상이 되도록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요구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풀 지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 지니라 하시는 도다”(시 82:3-4)
공의를 베풀라
1-2절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의와 악에 대해 책망하시고 3절부터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그들이 잘못하고 있고 그들의 영적상태가 어떠하고 그들이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것과는 어떻게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지를 계속 진술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해 판단하며 곤란한 자와 빈궁한자에게 공의를 베풀 지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문자 그대로 재산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재산의 많고 적음은 지배 구조를 만들게 됩니다. 재산이 없으면 결국은 자신의 생계를 해결하고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서 재산이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거기서 물질적인 소득을 얻기 위해서 지배하고 복종하는 관계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고아의 경우에는 부모가 없으니까 더욱 심각해집니다. 고아들은 무엇인가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빌미 삼아서 아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더 심하면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하는 일들이 인류사회에 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원하시는 것은 당신의 사랑과 자비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그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사랑과 자비의 혜택이 인간의 탐욕과 지배욕에 의해서 단절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인류는 어차피 그렇게 행할 가능성이 현저히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 이스라엘만이라도 그 이상적인 사회를 먼저 실현해가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불러주신 겁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할 충분한 도덕적 이유를 가질 수 있도록 두 가지를 허락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그들을 구원해서 애굽의 압제에서 구하시고 가나안을 주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의존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사람들에게 은혜의 힘을 주신 것입니다.
공평히 판단하라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해 판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판단’은 재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 “너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재판할 때 그들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빈자나 고아라고 해서 그들을 비호하고 옹호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평등성에 맞추어서 가난한 자와 고아가 차별받지 않도록 그들을 올바르게 재판하라”는 뜻입니다.
기계적인 평등은 평등이 아닙니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들을 조사해보면 55%정도가 강남에서 공부한 학생들이랍니다. 그 외에 나머지는 지방에서 공부한 학생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충분한 경제적인 여건, 우수한 정보력, 사회적인 권력, 이런 것을 사용해서 아이들이 부모의 도움을 받으면서 우수한 교육과 정보에 입각해서 자신의 미래를 잘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돈 없고 가난한 아이들은 이런 정보를 접할 수도 없고 사교육을 그렇게 받을 수가 없기 때문에 공부를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러면서 가난이 대물림됩니다.
작년 10월에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서 ‘부자와 나머지 사람들’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걸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미국에서 부가 대물림 되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수밖에 없는 아주 철저한 지배구조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100m 달리기를 하는데 한 사람은 0m에서 시작하고, 한사람은 50m 앞에서 시작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100m의 줄이 똑같이 그어져있고 누구든지 먼저 들어오면 일등이라고 하는 것은, 외적으로 보면 공정한 게임 같지만 이미 출발지점 자체가 다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적인 능력이 뛰어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게 태어납니다. 이것은 본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본인들이 선택하지 않은 것조차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불평등입니다. 그 차이를 완전히 없앤다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더 나은 삶으로 상승할 기회를 주어서 그들도 부모의 지위고하나 자신의 처지와 신분에 따라 미래의 희망이 박탈당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평등입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런 것들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회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도 안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물론 교회가 은혜를 많이 받고 복음의 정신으로 무장했을 때는 지켜졌지만, 그 외의 시기에는 안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도 보면 부자가 오면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고개 숙이고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가난한자가 오면 서있든지 앉아있든지 네 마음대로 하라는 식으로 무시했습니다. 물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구박을 당한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일꾼들의 품삯을 제대로 주지 않기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중하기
이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무시입니다. 한 사람이 외적으로 어떤 지위에 있고, 자연적인 능력이나 재능이 있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고 안주고, 지위고하와 빈부귀천과 외모조건을 막론하고 비록 지금 감옥소에 갇혀서 사형수라 할지라도 그가 인간이라는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피조물로 대해주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깊이입니다.
하나님께 이런 마음이 있으셨기 때문에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꿈꾸고 있는 것은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 없을 수 없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과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구별이 없을 수 없고, 태어날 때부터 어떤 사람은 더 예쁘고 어떤 사람은 덜 예쁘게 태어난다고 차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어제는 심방을 가는데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대략 스물 대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자매가 복도통행에 지장이 될 정도로 배가 불룩 나와 있었습니다.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눈은 언제나 그런 사람들보다는 야리야리하고 얼굴이 예쁜 사람 서 있으면 느낌 자체가 다르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안 그런다고 말하지만, 비만인 사람과 날씬한 사람을 대할 때 똑같은 감정으로도 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입니다.
신앙은 우리를 끊임없이 교정해서 정말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그가 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지위나 외모나 습성, 심지어 그의 도덕적인 행동들까지도 우연적이 것으로 여기며, 그를 존귀하고 소중하게 볼 수 있게 만듭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자비를 베풀 때에 지위의 고하나 재능의 유무나 외모의 미추를 보시면서 우리를 선택하고 사랑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아는 음악 교수님이 독일로 유학시절에, 한밤중에 기숙사에 있다가 갑자기 기도를 하고 싶어서 예배실로 갔답니다. 불이 꺼진 컴컴한 복도를 지나가는데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괴기스런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이것이 비명소리도 아니고 신음소리도 아니고 무서운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막상 예배당에 올라와서 문을 열고 보니 한 학생이 피아노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뇌성소아마비였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데 사람이 있는 낮에 못 오고 아무도 없는 밤중에 와서 피아노 앞에 앉아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피아노 사방에 침이 다 튀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눈물을 흘리면서 찬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성악을 하는 사람들이 음 감각이 얼마나 더 뛰어났겠습니까? 그 소리가 더 흉측하게 들렸을 겁니다. 그 교수는 ‘내가 저런 심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 본 적이 있었는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보는 것, 그 자체가 신앙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삶속에서 실제로 그렇게 생각되도록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 우리는 확실히 회개해야 합니다.
율법을 따라 공정하게 심판하라
“곤란한 자와 빈궁한자에게 공의를 베풀어라” 그를 편벽되이 일방적으로 두둔하고 옹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기준으로 공정하도록 그렇게 처신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다 할지라도 고아라고 할지라도 책임질 일은 책임져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모든 기회와 자원들이 박탈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그들에게 잘못된 습관이나 덕스럽지 못한 어떤 성향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상당부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의 책임으로 공통으로 짊어져야할 짐이라고 여겼습니다. “가난한 자와 궁핍판자를 구원하여 악인들의 손에서 건질지니라”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언제든지 이용해서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요즘 들어 자주 나오는 얘기지만 “범죄자들이 노숙자들에게 접근해서 백만 만원, 이백 만원을 줄게.” 하면서 주민등록증 하고 도장만 잠깐 빌려서 대포차나 대포통장을 만들곤 합니다. 악한 자들은 궁핍한 자들의 무지를 노리고 그들을 갈취당하고 이용해먹기 때문에 사회의 법이 이것들을 막고 보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이 추상같은 아버지처럼 작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눈물 흘리는 어머니처럼 작용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기회가 주어지고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강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고 억압당하고 착취당하고 이용당하는 구조가 되지 않도록 만드는 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사랑은 정의의 완성
이런 모든 것들을 행하게 하는 원동력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사랑은 정의를 완성합니다.”라고 말했고 심지어는 이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당신의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하십시오. 그 후에는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게 전심으로 사랑한다면 정의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그 사랑은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원리에서 본다면, 우리도 이런 책망을 오늘날 받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사랑과 공의가 이 세상에 펼쳐지도록 하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 하는 삶을 살아야지,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런 악에 동참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나라가 주의 소유입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세상을 판단하소서 모든 열방이 주의 기업이 되겠음이니이다”(시 82:8)
본문해설
82편을 마무리하면서 하나님을 향한 탄원을 올리고 있습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면서도 하나님의 공의와 율법대로 살아가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꾸짖음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살아도 그들이 사람일 뿐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7절에서 못 박으면서 8절에서 이 기도를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십시오.” 하나님이 사람처럼 몸을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누워있다’, ‘일어났다’, ‘앉았다’ 이런 표현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해 성경에서 묘사를 할 때 소위 ‘아코모다치오’라고 해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의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나님에 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높이에서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사용하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을 하신 것처럼 묘사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이나 행동들을 인간에게 설득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이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일어나다’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쿰’(!Wq)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쿰’이라는 단어가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에도 사용됩니다. 그렇지만 뭔가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할 때에는 어떤 결단, 예전에 없었던 어떤 새로운 행동을 시작하는 것, 이런 의미가 그 속에 포함이 됩니다.
신약성경이지만 구약성경에 담긴 사상을 그대로 담고 있는 구절이 있는데,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납니다. 그리고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이제 돼지 치는 농부가 됩니다. 거기에서 비참하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에 돌아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 때에도 똑같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 ‘이제 내가 일어나.’라고 나옵니다.
구약성경에는 그런 표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십시오.”라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이 주무셨다거나 누웠다거나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 이제는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당신의 그 모종의 조치를 취해주십시오.”라는 탄원입니다. 그 조치가 “세상을 심판하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자와 고아, 곤란한자와 빈궁한자들을 구원하지 않는 것, 불공평한 판단을 하는 것, 이러한 잘못들은 세계 모든 나라에서 볼 수 있지만, 시인의 관심사는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불순종과 악들을 생각하면서 “심판해 주십시오.”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심판의 목적, 온전함의 회복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재판관들은 불공평한 판단을 하고, 악인이 도처에서 번영하고, 가난한 자와 고아를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곤란하고 빈궁한자 궁핍하고 가난한자들을 억압하는 사회적인 불의에 대해 심판해 달라는 것입니다. 심판은 이미 있는 하나님의 법의 잣대를 가지고 사람들을 측정하고 측정한 결과에 따라 상 줄 사람은 상을 주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하나님의 복수가 아닙니다. 인간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잘못된 일들을 하나님이 바라보시면서 마음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백성들을 향해 복수하심으로 속을 시원하게 하시는 그런 의미에서의 복수라고 보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회적인 악과 불평등, 사회적인 이 모든 잘못된 것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이 세워놓으신 이스라엘 백성의 질서가 흐트러진 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하나님께서 올바르게 돌려놓으시는 것이 바로 이 심판의 목적입니다. 복수에 의한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몸처럼 생각하며 다시 온전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목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몸에 어떤 상처가 나면 어떻게 해서든 상처를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을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그래서 종종 보면 발이나 손에 질병에 생겼는데 그냥 아예 그것을 잘라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경우에 만약 자르지 않으면 그 질병이 발을 타고 들어와서 나중에는 몸까지 위협해서 생명까지 앗아갈 정도가 되기 때문에 몸이 썩는다든지, 신경에 문제가 있다든지, 할 경우에는 손발을 잘라내서라도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에 어떤 질병이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다스리는 목적 자체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질병을 파괴함으로써 질병을 병적인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몸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의 몸에 어떤 병이 있다면 그것을 고칩니다. 고치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한도 안에서 고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병을 고칠 때에는 몸 전체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면서 고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몸을 이롭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되 목적 자체가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남아 있는 뿌리들을 제거하고 새 살이 돋게 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시는 목적에 합당하게 살게 하심으로써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나라로 다시 태어나도록 치료하듯이 고치고, 치료하듯이 변화시키고 어루만지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은 이 시편 82편 속에서 이스라엘의 건강을 구하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계승하는 우리도 동일하게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의 번영과 건강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교회가 이 나라에 신실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끼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세상이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나님 앞에 빌고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82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