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83
목 차
침묵하시는 것 같으실 때(시 83:1-2) 61
악한 나라의 도모(시 83:3-4) 66
주께서 예전에 행하신 것같이(시 83:5-9) 70
악인을 검불 같게 하소서(시83:10-15) 75
하나님의 심판과 선교(시 83:14-16) 80
지존하신 여호와(시 83:17-18) 84
침묵하시는 것 같으실 때
“(아삽의 시 곧 노래)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대저 주의 원수가 훤화하며 주를 한하는 자가 머리를 들었나이다”(시 83:1-2)
본문해설
이 시는 범주상으로 보면 탄원시입니다. 첫 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율법을 훼방하는 자들을 징벌하시고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높여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 시가 언제 쓰여 졌는지, 그리고 ‘주의 원수들과 악한 자들’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는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간절한 탄원을 토해놓기까지 사회 상황은 아주 깊은 침체 속에서 사람들이 서슴없이 하나님을 거스르고 악행을 저질러서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혼잡하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는 악이 가득한 세상에 살면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우러르고 앙망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침묵하지 마소서
시인은 먼저 하나님께 “침묵하지 말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같은 탄원을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침묵하지 마소서, 잠잠하지 마소서, 조용하지 마소서”라고 탄원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간절한 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침묵하신다, 조용히 있다”는 표현들이 인간의 행동양식을 가리키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지만, 듣는 자들이 마음의 귀를 닫고 있을 때는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고 또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지성이 열려있는 사람들에게는, 즉 믿음이 역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침묵
오늘 성경은 제일 먼저 “침묵하지 말아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침묵을 거론하며 시인이 “조용하지 말라”고 간절히 간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말씀하시는 행동의 침묵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말씀하시는 분이시지만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 데서 오는 침묵입니다. 시인이 오늘 침묵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의 침묵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편의 더 많은 경우에 침묵은 두 번째 의미로 사용됩니다. 세상에서 악과 죄가 계속 관영한데도 하나님이 역사와 현실에 간섭하지 않으시는 것을 침묵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침묵의 시간은 경건한 자들에게는 고통의 시기이며,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오만불손하게 득세하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사회의 현실을 보며 침묵하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였고 잠잠하지 말고 조용하지 말아달라고 간절히 매달렸던 것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침묵하지 말아달라는 것도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고 악인들이 득세하는 세상의 질서를 더 이상 보고만 계시지 말고 간섭해달라는 간절한 탄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과 구현
우리는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앙을 자신의 삶, 사회의 현실 속에 어떻게 실현하는지에 대한 이상을 보게 됩니다.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분투하며 사는 모든 열망과 태도는 그 사람 자신 안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크고 깊을 때 세상 나라에서도 그런 나라의 통치가 실제로 이루어져서 자신과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시인은 오늘 하나님 앞에 침묵하지 말아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자기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속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시인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고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올리셨던 심정과 유사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말씀과 은혜의 경험이야말로 세상을 개혁하고 세상을 하나님의 질서로 돌이키는 헌신의 가장 근본적인 동기가 됩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이 어찌 자기 밖에서 그분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살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만약 주기도문의 기도를 올리고 시인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백성들의 삶속에서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탄원할 수 있고, 그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난 그의 진심이자 간절함이라면 그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기도 드리는 이유
2절에서 시인은 왜 이런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는지 이유를 하나님께 설명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여기에서 ‘떠든다’라는 말은 주권을 잡았다는 의미입니다. 좌중에서 이와 같이 큰소리로 자유롭게 떠들 수 있다는 것은 권세를 잡았다는 뜻이며, 그들이 ‘주관자가 되었다, 주동하고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그렇지 않다면 감히 떠들지 못할 것이고 감히 소란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떠든다’라는 단어를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뒤에 ‘머리를 들었나이다’라는 단어와 ‘떠들며’가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원수’는 ‘주를 미워하는 자’, ‘떠들다’는 ‘머리를 들었다’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병행법의 구조를 보면 ‘떠들다’의 의미가 아주 분명해집니다.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라는 것은 공의가 사라지고 불법이 횡행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법이 강력하고 선한 통치가 나라에 가득할 때는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감히 머리를 들지 못합니다. 혹시 완전히 선한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고 여전히 악을 행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사회 속에서 법이 강력하고 선한 통치가 이루어지면 감히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거나 발설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회의 도덕은 무너졌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고 율법은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주님의 원수들은 떠들고 주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권세를 얻고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하고 탄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과 적용
지혜로운 사람은 불법이 난무하는 시대에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슬기롭게 시련을 이기고 다른 사람들의 악을 자신의 경건의 기회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당신의 나라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시인의 간절한 탄원은 오늘 우리의 마음을 울립니다. 정말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통치를 갈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마음 안에, 교회 안에, 가정 안에, 땅 안에 주님의 통치에 따라 굴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시인이 불법하고 악한 세대 가운데 원수들과 주를 미워하는 자들도 하나님이 다스려 주셔서 당신의 이름을 다시 드높여 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의 영광이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를 갈망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을 섬기는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악한 나라의 도모
“저희가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의 숨긴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시 83:3-4)
본문해설
3-4절에 나오는 박해는 아마도 개인적인 박해가 아니라 나라적인 박해, 다시 말해서 악한 나라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쳐서 멸망시키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왕을 해하려고 계획하는 것 같습니다. 3절에서 “주의 백성을 치려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볼 수 있지만, 달리 보면 주의 백성은 이스라엘을 가리키며, “하나님이 감추신 자”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이스라엘의 왕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숨겼다’고 하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의 의미에서 보면 ‘소중한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열방들이 이스라엘을 파멸하여 다시는 그 나라가 땅에 서지 못하게 하려고 시도할 때, 그들이 실제로 착수한 일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하며 간사하고 잔인한 꾀를 발하여 백성들을 핍박하는 것이었습니다.
변함없이 존재하는 보편교회
주께서 기름 부은 자를 파멸하고 공격하려고 의논하였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다시는 이스라엘이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자.” 그리고 “이스라엘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도 다른 나라로 하여금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그와 같이 이스라엘의 철저한 파멸, 이스라엘 백성의 철저한 멸망을 계획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향한, 육적인 이스라엘을 향한 이방들의 공격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구속사적으로 해석하면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가 끊임없이 박해와 핍박을 받았던 고난의 역사들에 대한 전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세상에 두셨고 일체의 핍박과 고통을 안 받게끔 보호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도리어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에는 끊임없는 박해와 고난과 시련 같은 것들이 언제나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리스도의 교회가 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역사적으로 터키 같은 지역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있었는데 모두 멸망하여 사라져 버리고 많은 교회당들은 모스크가 되어 버렸는데 멸망한 것이 아닙니까?” 북한에서 6.25 발발하기 전에 지어 놓은 교회당들이 그냥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멋있는 건물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교인들이 모였을 예배당을 위의 십자가만 댕강 잘라놓은 흔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를 농산물 저장 창고 같은 것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교회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눈에 보이는 개별적인 지역교회는 사라지기도 하고 박해를 받아서 문을 닫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닙니다. 진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연합입니다. 비록 지역교회가 박해를 받아서 파괴되고 문을 닫았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몸인 세계의 보편 교회는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박해를 받아도 영영 파멸되게끔 내버려 두시지는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몇 해 전에 북한 선교를 하고 있는 단체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매 주 북한에서 20만 명 정도가 주일예배를 드릴 것이다.”라고 추산한다고 합니다. 물론 잡히면 형벌을 받기 때문에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주일마다 모여서 조용히 눈을 감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20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추산합니다. 그렇게 박해를 받아 건물을 부서졌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의 몸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발각되면 죽임을 당하는데도, 특별히 여성들을 중심으로 얼마나 열심히 모이는지 지하교회가 3,000개 쯤 될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눈으로 보이는 껍데기뿐인 교회의 건물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영적인 나라인 이스라엘은 아주 굳게 서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원리입니다.
교회를 지키시고 붙드시는 하나님
역사이래로 수없이 많은 나라와 수없이 많은 정치 지도자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단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격하여 파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종종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하고, 교회건물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한 나라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죽이겠다는 법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영적인 모임까지 파멸하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시대에는 기독교를 박멸하고자 무력을 동원하고, 2세기에 와서는 수많은 사상의 천재들을 동원해서 기독교가 얼마나 허망한 종교인지를 밝히고자 사상적 박해를 시작하였지만, 오히려 기독교의 진리의 내용들을 더 풍성하게 하고 확실하게 만들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진리의 힘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결국 그리스도 가르침 앞에 로마가 모두 굴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끝없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지만 누구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파멸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키시고 붙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교회답게 하시기 위해서 진리와 성령으로 이끄시고 강하게 하십니다. 박해의 날에 원수들이 교회의 건물은 허물고 성도를 죽일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인 진정한 교회는 허물지 못할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커다란 의무는 온 세계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온전하게 되는 것, 이 일을 위하여 전도도 하고 치열한 성화의 삶을 살고 성도들이 모일 건물도 마련하고 교회조직도 정비하고 열심히 헌금해서 가난한 사람도 돕고 무지한 사람도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에 앞장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계획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전 세계의 보편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드러내고 고통을 받지 않도록, 모든 교회의 아픔과 고통을 우리의 것으로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주께서 예전에 행하신 것같이
“저희가 일심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언약하니
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라엘 인과 모압과 하갈 인이며
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거민이요 앗수르도 저희와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셀라) 주는 미디안 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시 83:5-9)
이스라엘의 대적자들
이스라엘을 해치려는 열방의 많은 나라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각각 나라는 다르고 임금도 같지 않아도 한 가지 뜻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해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이스라엘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이 기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이스라엘을 미워했습니까?
첫 번째는, 이스라엘의 적대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올 때 전쟁하여 굴복시켰던 가나안의 원주민들이었고, 가나안에 입성한 후에도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 끊임없이 전쟁을 벌어야 했던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들이 대적하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과는 다른 신앙을 가지고 다른 진리의 빛 아래서 그들이 섬기지 않는 다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방사람들에게는 없는 종교와 철학이 있었습니다. 삶의 방식과 사상이 현저히 달랐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이방민족들과 끊임없이 갈등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었고 동맹을 맺었습니다. 이것을 5절은 주님을 대적하여 동맹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종교는 다르고 나라도 같지 아니하였으나 하나님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점에서는 일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미워하고 멸망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6-8절에서 구체적으로 대적하는 나라의 이름들이 거론됩니다. “에돔의 장막과”, 이 사람들은 에서의 후손들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씨로부터 신앙을 버리고 언약백성의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에서 빠져나갔더니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악한 자들과 동맹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발과 암몬, 아말렉, 블레셋, 두로 그리고 앗수르”,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말렉은 가나안 원주민이었고 암몬은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남쪽에 있어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괴롭혔던 나라 사람들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신생국가로 끊임없이 남하하는 정책과 충돌을 일으켜서 결국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 같이
이러한 상황 가운데 시인은 9절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주님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행하신 것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 여기에서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라고 했는데 이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마도 사사기 7장에 나오는 기드온의 삼백용사가 미디안사람들을 무찌른 놀라운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비록 소수의 군인들이었지만 기발한 지략으로 미디안 사람들을 공격하여 그들이 스스로 도망가다 멸망하게 만들고 이 전쟁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니까 “미디안에게 행하신 것 같이”라고 할 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열국 열방의 백성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처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전쟁할 때, 이스라엘의 연약함이 마치 미디안의 거대한 군대에 맞서 겨우 삼백 명의 용사로 돌격하던 습격하던 기드온의 병사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수에 얽매이지 않는 위대한 전쟁의 지략과 헌신으로 무장된 기드온의 삼백용사와 같은 주의 전사들을 허락해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벌해 주소서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같이 저희에게도 행하소서”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은 사사기 4장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람들은 가나안의 지도자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나안 족속을 모두 멸하라는 명령을 온전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산 위로 도망하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전멸시키기를 포기합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격리되어서 생활하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산에서 천천히 내려오고 이스라엘 백성과 물건을 사고파는 상업적인 관계부터 시작해서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섞여 살면서 그들의 종교와 사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바알종교의 번영도 바로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완전한 순종과 무관하지가 않습니다. 세력을 키워서 이스라엘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키고 갈등하고 전쟁하게 되었을 때, 이때가 선지자가 드보라와 바락의 때였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셔서 강했던 가나안의 지도자 시스라와 야빈을 무참하게 죽이시는 것으로 역사를 끝내십니다. 시스라와 야빈을 하나님이 무참하게 징벌하신 것처럼 이렇게 대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그와 같이 행하사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지켜달라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오늘날 이 기도가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겠지만, 영적으로는 진정한 영적인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영적인 세력들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허물고자 하는 세상의 사악한 세력들에 대하여 적용시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각각 다른 풍조와 사상을 말하지만 어느 시대든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척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적하는 일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던 때가 많았습니다. 이때 세상의 대적은 크고 교회는 약하고 우리는 소수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때 이 기도는 매우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나라와 사상들이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공격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고 헌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통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얼마든지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행하신 것처럼, 소수의 용사들과 한 지도자를 통해 일격을 가하여 무너뜨린 것처럼,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사악한 야빈에게 하나님이 끔찍한 심판을 행하셔서 단번에 그들을 끊어버리신 것처럼, 하나님이 오늘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세상의 공격을 그렇게 허무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과 하늘에 있는 모든 주관자들에게 대한 것이라”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능해 행할 수 있도록 오늘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진리와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일전을 불사하는 충만한 교회가 될 때, 교회 안에 있는 사랑이 진정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이처럼 교회가 이런 영적인 진리와 능력으로 무장하여 세상의 모든 악한 연합을 파괴하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속성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헌신하여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교회의 영적인 번영과 부흥보다는 세속의 영광과 부흥을, 또 한편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진정한 영광보다는 세상의 영광을 생각하는지 보십시오. 더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교회의 영적인 부흥과 번영이나 이 세상을 꺾고 이기는 영적인 힘과 전쟁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도리어 자기의 평안과 만족과 행복과 영달을 구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들은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며 주님이 교회를 향해 가지고 계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성숙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늘 마음에 품으며 하나님 앞에 매일 간절한 제사를 올릴 때, 우리들의 기도는 헛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진정한 영적인 번영과 부흥을 위한 초석이 될 것입니다.
악인을 검불 같게 하소서
“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저희 귀인으로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저희 모든 방백으로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저희가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저희로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초개 같게 하소서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화염 같이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저희를 두렵게 하소서”(시 83:10-15)
본문해설
10-11절에서는 앞에 나온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혁혁한 승리를 거두어 적군들을 파멸시키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혹은 침략하는 외적들을 하나님이 심판하고 무찌르신 사실을 거론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시고 저주하셔서 그들을 파멸시키신 것처럼 주의 원수들이 곳곳에서 떠들고 주의 백성들을 치려하는 이때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역사를 일으켜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루실 때, 이방민족들을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역사적인 사실들을 낱낱이 거론하며 시인은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보호와 은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교훈하심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며 온전한 언약관계 속에 있지 못할 때, 선지자를 보내어 꾸짖기도 하시고 책망하기도 하시고 경고하십니다. 그러다 끝까지 말을 안 들으면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교훈의 수단인 이방민족을 들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전쟁만큼 인간의 마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6.25 겪으신 분들은 전쟁이 얼마나 비참하고 무서운지를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전쟁의 큰 공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망하실 때 이긴 전쟁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들이 얼마나 교만해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치실 때는 반드시 처음에 이스라엘이 커다란 해를 당하게 하신 이후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만드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섭리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기위해 이방민족을 들어서 그들을 치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방민족들을 기계처럼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름의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친 것이지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건설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때리시지만 그들을 공격하여 해를 가하였던 이방민족들의 죄를 정당하다고 보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도 보복하여 심판하십니다. 다만 그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사사기에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보면 4개의 사이클로 역사가 계속 돌아갑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번영이 있습니다. 그 다음 교만해서져서 타락합니다. 이어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면 결국 그들이 회개합니다. 이와 같이 4개의 사이클, 번영, 교만, 심판, 회개가 계속해서 순환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주실 때의 약속이었는데, 특히나 역대하 7장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지어서 헌납할 때 하나님이 약속하셨던 바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에서 떠나 겸비해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시고 그 땅을 고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언약적 보증이 있기 때문에 시인이 지금 하나님 앞에 이처럼 간구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목장인 이스라엘
악인이 이렇게 처처에서 머리를 들고 떠들고 주의 백성들을 저들이 치려할 때 이것이 순순하게 악인들의 잘못만이라고 시인이 생각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록 이스라엘이 잘못하여 원수에게 침략을 당하고 압제를 당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긍휼을 구하며 악인을 멸해주시고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달라는 간구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도모가 12절에 나오는데,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목장’이라는 표현도 나오고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표현도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어떤 특성과 당신이 기대하시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묘사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5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나의 포도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포도원을 만드셨다고 하셨습니까? 극상품의 포도를 얻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포도나무를 심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땅에 들여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럴 경우에는 열매를 맺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열매로 포도를 수확하고 포도주를 생산해서 농부에게 보람과 기쁨을 주는 것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거기에 심으셨으니, “열매를 맺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가 무엇이냐 하면 의와 공평의 열매, 다른 말로 공의를 사랑하고 인자를 소중히 여기는 사랑과 정의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 열매가 맺혀서 모든 이방백성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나라와 백성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스라엘 나라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다음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당신이 기르시는 양떼들이 모여 있는 목장으로 비유하십니다. 물론 양이라는 표현에도 열매의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보다는 양은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분의 보호를 받으며 그분께 순종하며 따라가야 할 이스라엘의 특성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모든 짐승들 중에 양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돌봄을 받으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가 들어와 그 관계가 깨지면서는 이런 특성들이 훨씬 더 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양과 목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소유하시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양들을 잘 길러서 그들을 번성하게 하고 양떼들을 사랑으로 돌보시는 것입니다. 이방민족들이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고 할 때, 그것은 목장을 자신의 탐욕을 만족시키는 물건으로 삼자라는 뜻입니다. 양떼들에게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목자가 돌보는 것이 아니라 탐욕으로 가득 찬 소유주가 자신의 욕망대로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 떨면서 시인은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침묵하지 말고 우리를 도와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을 검불 같게 하소서
그러면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무엇을 생각나게 만듭니까?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으니라” 겉으로는 번성하는 것 같고 큰 세력을 얻은 것 같아도 그것은 결국은 바람이 불면 모두 날아가 버리는 아무것도 아닌,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습니다. 그래서 검불이라고 표현합니다.
쌀을 깨끗하게 걸러내는 탈곡기를 기억하십니까? 그런 기계가 별로 없던 시절에 집에서 키질을 종종했습니다. 거기에 검불, 겨 같은 것이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키에다가 쌀알을 넣고 높이 던져서 떨어질 때, 바람이 불어서 무거운 낱알은 가까이 떨어지고 이어서 반 토막 난 쌀들이 떨어지고, 겨와 검불 같은 것들은 밖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신기하게 서너 번만 던지면 깨끗한 쌀알들이 남습니다. 그것을 다시 물에 집어넣고 조리질을 하면 이번에는 돌멩이들만 남게 됩니다. 그러면 쌀알이 수집되고 그것으로 밥을 해먹지 않습니까? 아직 키질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는 낱알을 잃지 않기 위해 검불이나 겨를 함께 보관하지만, 키질이 시작이 되면 검불도 날아가고 겨도 날아가고 마지막에는 낱알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박해하는 이방민족이 바로 그런 검불과 같이 되도록,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와 같이 되도록, 아무 의미도 없게끔 만들어 달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고통스럽게 하는 민족들을 심판해달라고 합니다. 우리들은 시인의 믿음을 깊이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깊이 잘못했을 때 때리시기도 하고 책망하시기도 하지만 그들을 악한 자들에게 넘겨주시는 법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소유이고 그분의 백성이라고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선교
“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화염 같이 주의 광풍으로 저희를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저희를 두렵게 하소서 여호와여 수치로 저희 얼굴에 가득케 하사
저희로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시 83:14-16)
산불과 화염 같은 심판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림을 가르는 불, 산에 붙는 불”이라는 묘사는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뒤에 나오는 광풍이나 폭풍도 역시 마찬가지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현대의 문명이 이토록 발달하고 과학의 진보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산에 일어나는 거대한 불길은 속수무책입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몇 개의 유명한 화재가 있습니다. 몽고초원에 몇 달 동안 계속되었던 불길, 다음에 인도네시아의 대 화재, 미국의 산불, 오스트리아의 산불입니다. 길게는 6개월이 되도록 불이 계속 번지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경우가 있습니다.
소방진압용 헬리콥터 같은 것들이 한 번에 몇 톤의 물을 떠서 퍼 올려서 산에다가 붓습니다. 그래서 산을 보면 곳곳에 농지도 없는데 호수를 만드는 이유는 바로 산불을 진압하기 위한 용도입니다. 그런데 워낙 엄청난 불길이 번져 가면 그것도 다 무용지물입니다. 결국 비가 오기를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산불이 워낙 거세면 가랑비정도 내리는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고, 폭우가 퍼부어서 불길을 끌 때까지 대책 없이 기다리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광풍과 폭풍 같은 심판
시인은 저항할 수 없는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해치고 악을 행하는 이방 민족들을 멸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광풍과 폭풍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위엄을 보여줍니다.
최근에 토네이도가 미국을 강타해서 90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중대 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우리나라는 찬 공기하고 더운 공기하고 만나는 토네이도가 불만한 조건이 없습니다. 굳이 찾으면 태백산맥인데 두 기단이 만날만한 넓은 평지가 없기 때문에 다행히 토네이도가 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용오름이라 해서 바다에서 구름이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은 장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의 토네이도와 비슷한 원리입니다. 바다에서 찬 공기와 더운 공기가 만나서 바람을 일으키면서 물을 끌어들입니다. 물이 올라갈 때 물에 있던 고기까지도 따라서 올라갑니다. 옛날 기록에도 보면 토네이도 비슷한 현상이 높이 몇 십km까지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 용오름이 바다에서 육지 가까운 곳으로 왔다가 소멸될 때는 하늘꼭대기로 올라갔던 생선이 막 쏟아졌습니다. 옛사람들의 기록에 보면 포항지방에 하늘에서 고기비가 쏟아졌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그러한 자연의 어마어마한 위력 앞에서 비로소 인간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시인은 “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광풍, 폭풍 같은 비유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자연계에 나타난 저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말해줍니다. 결국은 삼림을 가르는 불, 산에 붙은 불길, 치열한 바람과 폭풍에 맞서려고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하찮게 비웃음을 당하는 것처럼,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선교적인 통치 앞에서 인간이 아무 기력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위에 역사하셔서 그들을 치료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파멸하여 다시는 그 이름이 세상에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고 공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역사
시인은 구체적으로 그들의 패망을 하나님 앞에 이렇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를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해 주옵소서” ‘수치’는 곧 부끄러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교만하게 높아졌던 이방 백성들이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밥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멸하여 다시는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고 그 이름이 다시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기억되지 못하게 하려던 사람들의 얼굴에 교만이 가득하였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저항할 수 없는 권위로 이들을 심판하셔서 이들의 얼굴에 부끄러움과 수치를 가득하게 하시고, 이방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빌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요나 선지자의 사역의 무대가 되었던 니느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큰 나라,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에 선지자가 파송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큰 나라의 악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대하고 놀라운 심판을 행하겠다고 선지자를 통하여 외칠 때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자비를 구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달콤한 사랑으로 그들을 선교한 것이 아니라 두려운 심판을 선포하자, 그들은 마음을 낮추고 짐승들까지 금식하며 모든 사람들이 베옷을 입고 왕으로부터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간절히 찾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심판을 통한 하나님의 선교의 역사입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의 선교는 언제나 달콤한 사랑의 속삭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심판을 행하심으로 선교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물론 심판은 주님의 손에 맡겨져 있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행하실 일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오늘날 심판의 대행자처럼 행동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하나님이 그러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위대하고 놀라운 일들을 행하셔서 당신의 이름을 온 땅에 두루 펼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이런 거룩한 부흥과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이 모든 사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능력과 권능으로 심판을 행하시어, 친히 당신의 거룩한 영광을 온 땅에 두루 펼쳐 보여주시도록, 우리가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위해 기도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지존하신 여호와
“저희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케 하사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시 83:17-18)
본문해설
이 17-18절은 83편을 마무리하는 단락입니다. 13절부터는 하나님의 심판을 구하는 기도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수치’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는 이방의 원수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는 수치입니다. 수치는 하나님을 거슬러 교만하게 한 이방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응분의 대가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고 억압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을 부끄럽게 하기를 위해서 한마음, 한뜻으로 도모하고 대적하여 동맹했습니다. 이것이 에돔과 암몬과 아말렉과 블레셋과 앗수르 등 이방 민족들의 역사였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나라들 중에 아무 나라도 영원히 존재하는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들이 잠시 번성하는 것 같아서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고 억압했지만 결국은 파멸되고 멸망하였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기적,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들을 시인이 돌아보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할 때 악한 나라들이 그들을 치더라도 그들이 완전히 진멸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로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그들이 한때 번성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을 행하여 커다란 고통을 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방으로 하여금 커다란 수치를 당하게 하시고 결국은 마지막에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이 수치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은 잘못된 영광에 대한 대가였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그 나라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고 동맹을 맺어 공격할 때는 세상 나라들로부터 대단한 나라라고 인정과 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적하고 얻은 저들의 영광은 잠시 동안 이스라엘에게 치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일을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으실 때, 이스라엘은 다시 영광을 회복하게 되고 이방나라들은 그 대가로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커다란 수치를 당해서 그들만 놀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역사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번영하던 나라가 이스라엘을 핍박하고 멸망시킬 수 있었던 나라가 이렇게 망하게 되었는고?” 하며 다 같이 놀라게 만드십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악인은 벤 풀과 같이 마르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번영은 일시적이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번영만이 영원하며, 하나님 없는 번영은 결단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온 세계에 지존자
시인은 그들로 하여금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원한에 사무친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거기에는 시인이 고대하고 바라는 더 원대한 목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라고 이름 하신 주님만이 온 세계에 지존자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비밀에 쌓여있는 단어 중 하나가 ‘여호와’라는 단어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익숙하지만 사실을 ‘야훼’가 올바른 하나님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 하나는 그 단어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했던 출애굽기에서 나오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자기소개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야훼’라는 말은 ‘그가 존재하신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삼라만상은 스스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지탱해 주셔서 있습니다. 사물들은 어떻게 보면 있는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또 다른 이유에서 사실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고 나타난다는 의미에서는 있는 것이 틀림이 없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 보면 눈에는 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건 반드시 있으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모든 만물은 그분이 있게 하시고 붙들고 계시고 흘러가게 하심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결국은 그것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주었던 위대한 제국과 나라들, 영광과 위엄을 뽐내던 모든 이방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때는 하나님을 대적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멸망을 도모했던 그들이 이제 어떻게 됐습니까? 없어졌고 사라졌습니다. 그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니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이 당당한 나라들이 영원히 있는 나라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비해 이스라엘은 영원히 있는 나라였습니다. 이방나라들은 결국 있는 것같이 나타났다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역사 속에 사라졌으나 그것은 영적인 껍데기에 불과했습니다. 밀알의 껍질이 터지고 거기에서 싹이 나와 큰 나무로 성장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는 육적인 이스라엘의 껍데기를 찢고 하나님의 영광스런 나라가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것이 다름 아니라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를 붙들고 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은 온 세계에 유일한 지존자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이 우주적으로 성취되는 날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에서 완성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만이 온 세계의 지존자가 되신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이 사실이 이방에 알려지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번영과 이스라엘을 대적하던 악한 나라들의 멸망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때로는 박해와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결국은 당신의 충만한 영광과 은혜와 존귀를 온 땅과 온 민족 위에 두루 드러내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이름을 위해 우리가 매일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시편83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