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에 단에 두루 다닐 수 있는 사람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 이다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리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이르리이다”(시 26:5-7).
어려움 속에서 시인이 하나님께 호소하면서 ‘나는 무죄합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사람이 누구관대 죄가 없겠으며 또 설령 자기가 죄 없다고 해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기도할 때 언제나 제가 죄인이오니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이렇게 기도해야 하죠. 그런데 이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나아가고 또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할 때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양심을 거스르는 의식 안에 있는 죄이다. 양심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문제가 된다. 자기가 잘 모르면 모른 다란 의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은혜의 지배 가운데 있으면 파악이 되는 죄가 있고 은혜의 지배아래에 있어도 결코 파괴되지 않는 죄가 있다. 후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문제가 덜 된다. 사람마다 암세포가 전혀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다 암세포를 조금씩 가지고 있는데, 100만개 이하면 그것이 큰 문제가 안 된다고 한다. 100만개 가 넘으면 모이고 하나의 세력을 형성한다. 지금 시인이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모친이 나를 죄 중에 잉태하였으며‘ 사실 원죄를 본 사람이었다. 여기에서 내가 뭐냐 하면 양심을 거슬러서 커다란 죄로 인해 내가 하나님 앞에 이렇게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란 고백이다. 그것이 고난과 시련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된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어려움이 오고 시련이 오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자신의 삶을 올 바를게 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은 그 기도가 아주 강력하고 열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큰 시련과 어려움이 왔을 때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갈 힘들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신앙의 삶은 하나로 묶여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렇게 살았어야 하고 그렇게 살려하면 기도의 힘이 필요하고 이렇게 휘돌면서 상승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다. 오늘 시인의 고백하는 것이 뭐냐면 ‘내가 자유롭게 하나님의 단을 두루 다니며 찬송을 올리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의 행복,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의 기쁨 이것이 참 행복이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생각하면 찾으려고 하면 실패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안에서 기쁨과 유익은 얻으려고 하면서 이렇게 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이런 생활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나는 나에게 허락된 이 진정한 복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다. 그 이외의 즐거움과 행복은 내 것이 아니며, 그것은 반드시 나에게 아주 커다란 불행과 고통을 가지고 올 것이다. 라고 하는 이 생각을 아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에게 아름답게 보이는것, 즐거움을 주는가에 자꾸 빠져들어 가게 된다. 예를 들어 담배를 배운 기억을 생각해 보세요. 처음에 사람들이 담배를 배울 때 어느 날 너무 담배를 피우고 싶어서 담배를 피운 사람은 없다. 연기를 몸속에 집어넣는 새로운 경험인데 그 눈물 나고 재채기 하는 것이 뭐가 즐거운가 하면 사람들을 보는 것이다. 담배피우는 모습이 너무 멋있는 거죠. 그러면서 해볼까 생각하고 피워본다. 재치기 눈물 나고 맛이 없다 그러면서 생각하죠. 사람들이 나를 보며 얼마나 멋있게 볼까? 그 자체가 항상 행복감을 주는 것은 아닌데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것을 배우는 고통들을 이겨내 나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들이 몸에 배어서 들어오게 되고 끊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거기에서 즐거움과 기쁨을 얻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과 단절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보면서 즐거울 것이다. 행복할 것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런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과 모든 것들이 모두 끌려가게 된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믿음 생활하려 하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마치 도살장 가는 소같이 교회나모면 아무 유익이 없죠. 자기가 거기에서 세상이 주는 즐거움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인생의 기쁨 그것을 깨 닫아야 한다. 그런데 기도 안 해요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마나는 즐거움이 없어요. 말씀 안 읽어요. 말씀의 은혜를 안 받으려 해요. 왜 나와 가지고 그냥 졸다가고 골 난사람처럼 등 기대고 배 뻗고 있다가 예배 땡 끝나면 휙 튀어나간다 이거죠 그러니까 말씀 속에서 주님의 성품을 깨닫고 은혜의 세계를 보는 자기모습은 보는 그래서 자기가 고쳐지는 기쁨이 없어요. 그러니까 계속 빠져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러는 동안에 반대로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그러면 하나님 등 뒤에서 사는 즐거움을 찾는 것이죠. 애들이 가족끼리 있기 싫어하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어울리고 대화하고 어디 가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공통적으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요. 즐거움을 주는 근원이 따로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를 즐겁게 하는 존재를 찾는 존재이기에 어디에 가든 가서 그 즐거움과 기쁨을 찾는 것이다. 아무데서도 그것을 찾을 수 없다. 인간이 힘이 하나도 없는 것이죠. 나중에는 심하면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게 되는 거죠. 기쁨이 하나도 없는 것이죠. 마치 물이 확 쏟아져 물을 빼내는 낮은 곳으로 흘러가듯이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자기에게 즐거움을 주는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맛 볼 수 있는 기쁨이란 것이 뭐겠어요. ‘성도의 교제와 베푸신 축복을’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행복이란 것이 그런 것들이다. 기도의 기쁨, 하나님의 말씀 깨닫는 행복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 성도들을 섬기고 그들에게 사랑을 받는 즐거움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보람, 함께 기도하고 마음을 합하여 이 세상에 주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 데 도구로 쓰이는 그런 보람 이런 것들이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이잖아요. 그런데 다 때려치우는 거죠. 기도 생활도 다 집어치우고 말씀에 관심이 아무것도 없죠. 밥 벌어먹고 사는데 정신없죠. 성도들과의 관계도 기본적으로 삶의 태도가 안 되어 있어서 막 부서뜨리며 생활하는 것이죠. 그렇게 사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성도의 교제와 생활이 행복할리 없죠. 그러면 하나님 앞에 맛보는 즐거움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자기는 뭐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하는데 아무 말로 만하면 뭐하냐.진짜 사랑이 느껴져야 줘 안 해요. 그럼 어떻게 될까 그동안 하나님 앞에 느끼는 즐거움이 아닌 다른 것에서 행복을 느끼려는 갈망이 확 생겨나면서 빠져나간다. 너무 단순한 원리다. 그러나 잘 모른다. 시인이 환란을 많이 당했는데 살아있었죠. ‘내가 무죄하오니’ 자기가 완벽하다란 것이 아니라 늘 죄가 있고 그렇지만 ‘나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살려고 애써왔습니다. 하나님 단에 즐거이 다니며 자유롭게 다니며 주님의 이름을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환란은 환란이 아니다.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있고 그 은혜 속에 있는 사랑은 환란과 시련과 고통 모두 훌륭하게 이기며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다. 다른 길이 있는 것처럼 자꾸 생각하고 게으름 피우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언제가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것이다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 신앙의 길은 정신 게기다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살면 결코 신앙을 통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길은 좁은 길이다. 말씀하셨다. 그리고 대중적이고 보편적인 길을 걸으려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좁은 길을 걸으려 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을 게기다 살고 주님이 다 끝났다 부르실 때 정말 그렇게 사모하는 맘으로 주님의 개기다 앞에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