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움이신 하나님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9-10).
시인이 이런 환란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것을 알고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두 가지 감정입니다. 첫 번째가 의존의 감정이고 두 번째가 사랑의 감정입니다.
첫 번째 의존의 감정은 여기에 보면 “하나님 앞에 주님이 나를 찾으라. 그래서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런데 내게서 주님 숨기지 마소서”
무슨 의미냐 하면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서 숨기시는 것 같은 것들을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는 환란과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경험하지 못할 때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구나.’ ‘정말 하나님이 나를 영영 떠나셨는가.’ 하는 이러한 것을 느끼는 거죠. 그것이 첫째이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위해서 진리를 탐구하는 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부족으로 그 하나님의 진리를 잘 깨달을 수 없을 때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숨기시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거죠. 우리가 환란이나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고 그 다음에 그 진리를 새롭게 발견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총이란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해주셔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오늘 성경 속에 나와 있는 이 시인의 고백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죠.
내가 환란과 시련을 당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에게 나를 도와주셔야할 의무가 있다고 하나님께 그렇게 부과할 수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지 않는 거죠. 그래서 모든 시련과 환란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실 때에도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렇게 하고, 또 우리가 진리의 세계에 대해서 뭔가 잘 알지 못할 때에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그것도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거예요.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우리 같은 사람을 향해 베푸시는 그 은총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격하고 기뻐하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인생의 시련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구원, 그리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그 모든 보호하심, 무지의 어두움 속에서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밝혀주시는 그 모든 깨달음의 은혜, 이 모든 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이러한 결과라는 것을 깊이 기억을 해야 해요. 그러면 그런 하나님이 베푸시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은총으로 다가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도 우리스스로 자랑할게 없고 또 우리가 알지 못하던 은혜의 세계에 대해서 보고 깊이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감히 하나님 앞에 자랑할게 못되는 거죠. 왜냐하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이죠.
이어서 두 번째로 10절에서 시인이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 하시리 이다.” 이 다윗은 가족관계에서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이야기는 별로 안나오는 데 아버지한테 거의 버림받다 싶이한 자식이었죠. 사무엘 선지자가 왕으로 기름 붇겠다고 왔을 때 아버지의 눈에는 이 아들이 있는 것으로 잘 생각이 안됐어요. 형들도 미워하고 결혼한 후에는 장인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었죠. 그런 그 가정에서의 깊은 상처 이런 것들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사건을 가져오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시인이 그런 인생을 살면서 마지막으로 깨달은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서의 사랑은 영원한 것도 없고 완전한 것도 없다.” 그 어린 다윗이 그 아버지의 사랑을 얼마나 갈망했겠어요. 그런데 결국은 아버지한테 버림을 받는 거죠. 그렇죠? 그러한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상처 속에 자라나면서 깨닫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완전한 사랑이 없구나. 그래서 결국은 내부모도 나를 버리는 구나.’ 그렇게 되면서 이 다윗이 이 신앙의 세계에 대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다윗이 3천년 전 사람이니까 만날 수는 없지만 저는 다윗의 행동이나 쓴 시들로 미루어 볼 때 이 사람은 아주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뿐만 아니라 탁월한 불굴의 지도력을 가진 그런 강인한 사람이었어요. 또 그의 살아온 인생역정이 그렇게 강해지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거죠. 부모와 형제들에게도 거의 버림을 받고 그러면서 왕이 되라는 분부를 받고 그리고 사울의 집요한 추격 속에서 그렇게 고통의 날들을 보내고 그리고 맨바닥에서 상처받고 병들고 억눌린 사람들을 모아서 나라를 세웠으니 얼마나 엄청난 고통과 시련과 도전 이런 것들이 많았겠어요. 불굴의 지도력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거죠. 이후의 생활환경도 마찬가지죠. 자식들이 그렇게 속 썩이고 시련과 환란의 연속이었죠. 그러면서도 이 사람이 아주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시를 그렇게 지었다는 것 자체가 그런 것을 보여 주는 거죠.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에 지성과 감성의 크기가 매우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이러한 시련과 이런 것들을 당하면서 똑같이 엄청난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무딘 사람에 있어서 (피부의 감각이나 이런 것들이 무딘 사람이 있지 않아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 않아요? 돌아가신 저희 아버지는 언젠가 제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시장에서 뭘 하시다가 왜 그러셨는지 생선을 자르시다가 칼로 손을 찍으셨어요. 손이 이렇게 덜렁덜렁해졌어요. 이 양반이 빨리 병원을 가야할 텐데 시장에서 소독약으로 깨끗이 씻고 당신이 실로 손을 꿰맸어요. 그래서 제가 ‘정말 어 후~ 나도 그처럼 독했으면 좋으련만.. 사람이 왜 이렇게 무를까?’ 어릴 때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꿰맨다고 됩니까? 실이 보통실로 하면 됩니까? 특수 실로 해야지 살도 안 벌어지고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벌어진 손가락을 하고 다니셨어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거 아니에요. 감성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사람은 뭐 엄청난 일이 일어나도 눈물 한 방울 안 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낙엽만 떨어져도 눈물이 나는 사람이 있거든요. 다윗은 말하자면 그런 감성의 크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 그 만나는 환란과 시련, 상처들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겠어요? 그런 사람이었거든요. 그런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그것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됐겠어요. 그런 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랑은 완전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예수 내 친구 나를 버리지 않네. 온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찬송)
그래서 이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사랑이 신뢰할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드는 것만큼 주님 품으로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그 안에서 자신의 외로움과 고통과 버림받은 이 모든 상처들을 주님의 품안에서 승화시키는 거죠.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늘 바치면서 살 수 있는 것이죠. 그랬을 때 많이 하나님 앞에 의지하고 주님을 바랄 수 있었던 것이죠. 그것이 바로 다윗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것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우리의 인생의 많은 사연이 있었고, 두 가지,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결국 환란과 시련이 많은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유일한 위로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