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제사 2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
이제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제사 두 가지를 하나님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도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이용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게 될 때 우리에게 삶의 행복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은 그 결과일 뿐,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마음 없이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용되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없는 인간의 어떤 행동, 제사를 드리고 짐승을 잡고 절기를 지키고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든 행위가, 그 사람의 내면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없다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진정한 제사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 은혜에 대해서 감사로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이고 그리고 주님이 자신과 맺으신 그 언약 안에서 자신에서 베푸신 구원과 영혼의 은총, 자신의 삶 전체를 포괄하여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가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 가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이 신앙의 근본입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환란을 당하며 핍박을 받아 생명의 위험을 받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감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깊이 아는 데서 나오는 감사인 것입니다.
여기서 잠시 생각해봐야 할 것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복은 두 종류가 있는데 일반 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일반 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복을 인간들이 그리 오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친 광야에서 삼 백 여명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처음 만나를 받게 되었을 땐 얼마나 감사했었습니까? 그러나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맛없는 만나만 먹고 살아야 되는 것을 곧 불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많은 물질의 복에 대해서 영혼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복이 없이 그것을 오랫동안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이 감사는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는 그 큰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으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는 진리와 함께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그 참된 지식과 은혜 안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의 근본이고 하나님께 드릴 진정하고도 새로운 제사인 것입니다.
두 번째 제사는 ‘지극히 높은 자에게 그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서원이란 하나님께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 맹세는 큰 환란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구원 해주시고 그 환란에서 벗어나게 해주실 것을 바라며 서원을 하거나, 베푸신 은혜가 너무 커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새로운 방식의 제사는 삶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입니다. 정말 어렵고 곤고할 때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바라면서 드린 대표적 서원으로 야곱의 서원을 들 수 있습니다.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가는 길이 너무 막막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평안하게 집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고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여기는 바로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약속하는 것은 바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서 중심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분을 높이는 것이 없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이 그 예배를 따라가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에 나와서 찬송가 따라 부르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설교되면 앉아서 그저 듣고 예배가 끝나면 집으로 돌아 갈 수는 있지만 그 정신을 따라 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즉, 좁은 의미의 예배에서 찬송했던 것처럼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가 되고, 기도했던 것처럼 어려운 모든 일을 만나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말씀이 울려 퍼질 때에 잠자코 있었던 것처럼 성경을 읽을 때나 묵상할 때 들려올 때 들었던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런 예배의 정신으로 부복하며 전심으로 그렇게 살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는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욕보이고 예배 시간에서는 자신이 비천한 죄인이라 고백했지만 삶 속에서는 ’내가 뭘 그렇게 잘 못했나‘하는 뻗대는 마음이 있고 내적으로 어떤 복종도 없었기에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과 나의 삶은 별개의 것이 되어가는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고 생각하고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는 막돼먹은 망아지 같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미래의 불안이나 마음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것과도 같은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쓰레기와도 같은 것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불타는 사랑과 은혜가 쏟아지는 것도 교회요, 하나님의 분노가 불같이 쏟아지는 곳도 교회입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탄식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내 성전의 문을 닫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저희들이 모이는 대회와 그들의 절기가 이제 지겹고 싫다...”
(예화) 예수님을 믿고 얼마 안 된 젊은 시절 때 여의도에서 십만 명 정도가 모인 집회에 참석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교회버스가 와서 사람들을 싣고 가며 귀가를 돕는데 밤늦은 시간이며 가까운 버스 정류장도 없고 그 곳 지리에 어두운 제겐 이제 집에 갈 일이 막막했었습니다. 한 교회버스가 텅 비어서 나가기에 태워달라고 했는데도 자신의 성도가 아니라고 쳐다보지도 않고 홱 지나가버렸습니다. 믿음의 형제끼리 왜 그 작은 배려조차 없을까하는 생각에 같은 개신교임이 수치스러워졌습니다. 주위엔 어마어마하게 흩어진 쓰레기만 남아있었습니다. 상징적인 두 상황 속에서 삶이 그러한 사람들에게 이 어마어마한 대회에 모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예수를 믿을까, 이래서 교회가 엄청나게 욕을 먹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직장 신우회 때문에 직장에서 핍박을 받는다는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예수를 믿는 것으로 핍박을 할 수 있느냐며 정식으로 회사 측에 따졌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회사의 책임자가 “나는 너희가 예수를 믿든지 부처를 믿는지에 대해선 아무 관심도 없다. 그런데 왜 하필 점심시간에 예배드리고 모두 근무하는 시간인 한 시에 밥을 먹으러 가느냐?”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비상식적인 삶으로 인해 예배를 한 시간 드려 영광을 드리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상으로부터 욕을 먹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교회에 오면서도 그런 마음을 느꼈습니다. 교회입구에서부터 교회까지 길가로 차가 꽉 막혀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들어오기 불편할 정도로 교회 앞에 주차를 해놓은 그 사람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백 미터만 들어가면 주차장이 있는데 자신이 일분을 걷더라고 다른 사람들이 편안하게 드나들게 하는 것이 바로 덕의 근본이 아니겠습니까? 가끔 주일에도 교인들끼리 주차문제로 서로 말다툼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과 배려가 없는 사람의 마음 안에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공명의 마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 대한 예의와 자기 복종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의 예배가 화려하고 규모 있는 예배일수록 그 격차는 너무 현저해서 짓밟히는 하나님의 영광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짐승들의 목을 부러뜨리고 배를 갈라서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자신의 심령 속에 있는 짐승 같은 기질의 목을 꺾고 그 배를 가르고 죽여서 드리는 것이 진정한 제사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은 제사를 기뻐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이 제사를 기뻐하셨다면 내가 제사를 드렸을 것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넓은 의미의 예배인 삶과 좁은 의미의 경배가 일치를 이룰 때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마음깊이 우러나오는 통회의 기도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제 시간에 교회에 나오고 헌금도 준비하고 그리고 평일에 입지 않던 새로 산 좋은 옷도 입고 화장도 하고 단정하게 나왔어도 그 마음의 중심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면 그 모두 자신을 위한 보험이나 과시에 불과하며 이 좁은 의미의 예배는 아주 수치스러워지며 하나님께서 모욕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서원은 항상 자신에게 손해가 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 맹세할 때는 나름대로 감동이 있어 했겠지만 실제 삶에 이행하려하니 엄청난 손해가 뒤따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손해로 느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관계에 대해 충성스러운 헌신을 마다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부가 함께 사는데 내가 뼈가 부러지도록 번 이 돈을 저 아내와 자식을 위해 먹여 살려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미 자신의 가족에 대한 티끌만큼의 사랑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헌금에 대해서 크게 강조하진 않지만, 교회를 몇 번 이전하고 건축하면서 사람들이 약속헌금을 해놓고선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초신자도 아닌 교회의 직분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하고선 그것을 불이행한다는 것은 결국 그 삶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면서 드린 예배는 끊임없이 자기만족을 찾아다니는 쓰레기 같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화려한 건물에서 복잡한 절차를 거쳐서 웅장한 주악에 맞춰서 드린 예배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치며 자신의 문제를 아파하는 사람이 드리는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서원의 핵심은 회심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삶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같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주님이 생명을 버리고 언약을 따라 나를 구원해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진심으로 뉘우치고 회개하고 우리 삶을 드렸을 때 그것이 가장 큰 서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의 생명, 내가 지니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내게 베푸신 것이며 주님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때는 더 이상 손해를 본다거나 자신의 것이 박탈당한다는 느낌은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입은 무한한 구원의 은총에 감사하면서 내가 가는 길이 주님을 위한 길이면 고난과 시련, 멸시와 욕, 원하지 않는 질서 속에서 받는 고통, 이 모든 것을 달게 지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서 15절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말합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이는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이렇게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삶의 서원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환란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혹시 하나님께 나와서 다시 정신 차리고 예배생활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것처럼 보여도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는다면 결국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아첨에 불과합니다. 환란을 면해보고자 꼬리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중심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찾고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좋은 사람이라면, 비록 나를 이 세상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아와 같이 버려두실 때가 있고 하나님의 큰 경륜이 있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게 하고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시련과 핍박이 가득한 곳을 지나가게 하신다 할지라도, 자기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정한 공경과 사랑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을 영광으로 알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당하셨을 그 쓰라린 고통과 시련을 내가 대신 짊어지면서 살아가는 것, 그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 같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그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작 환란의 날에는 자기 방법을 의지하고 다른 나라의 군대를 의지하고 심지어는 이방의 신들의 도움을 구했습니다. 이게 하나님이 보시기엔 너무 슬픈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서 매를 맞는다고 해봅시다. 우리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고 삶이 고통 속으로 들어가고 우리의 마음에 끊임없이 고통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치신다고 생각해봅시다. 환란의 날에 우리가 티끌만이라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디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시게 하기 위한 부르심인데 그 속에서 누구를 찾아야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하지 않는 시련과 고통을 만나서 환란이 가까워온 것을 느낄 때 그 환란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가까이 하시고 다시 그 관계를 회복시키실 기회로 삼고자 하시는데 그 백성들은 환란이 다가와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방법을 의지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안겨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당신의 성품을 상기시키십니다. “환난 날에 너희가 나를 부르라 그러면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라.” 다시 말하면 환란 날에 그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건지는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때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깊이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더 높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이 세상의 만물과 상관없이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인 다는 것은 인간들이 제 멋대로 교만하던 마음을 버리고 분에 넘치는 자리에서 돌아와 각자 제 자리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이 높아지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하나님이 이 백성들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제사는 우리의 내면에서 시작되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언어로 흘러나오고 급기야는 우리의 삶으로 고백되어서 그 삶이 우리의 마음을 다시 쇄신시켜서 삶과 고백, 우리의 심령이 온전하게 일치를 이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요 삶인 것입니다. 따라서 좁은 의미의 예배를 제대로 드려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면 일주일의 삶을 잘 살다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살아선 안 됩니다. 또한 제대로 하나님 앞에 살고 싶다면 좁은 의미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제대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중심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