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를 찾는 자의 기도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시 40:16).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다가 보니까 다른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 대한 기도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죠.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 온 이 앞의 기록들을 보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지 않습니까? 그런 속에서 자기의 죄도 또한 넘쳐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안팎으로 원수들에게 에워 쌓여 있는 모습이죠.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서 벗어난 신앙의 회복을 경험했던 거예요.
그러고 보니까 도처에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눈에 떠오르는 거죠. 그 많은 사람들이 각각 삶의 상황 그리고 모양은 달라도 자신과 같이 똑같이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주의 구원을 호소하고 부르짖는 것이 눈에 들어왔어요. 현재에도 있고 그리고 과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겠죠. 이 시인은 그런 모든 사람들과 공동체적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죠.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을 찾는 자들은 모두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해 주십시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의 기쁨,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부모에게 매우 집착하게 되죠. 그래서 부모에게 매우 집착해서 그 부모님,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데 어느 순간 엄마와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요. 그래서 서럽도록 울고 아이가 경우에 따라서는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그렇게 그 아이가 심하게 웁니다. 다른 때 같으면 과자를 준다든지, 장난감을 주면 그렇게 좋아하는데 엄마를 그렇게 찾아서 아이가 불안에 떨 때에는 그런 거 다른 사람이 줘봐야 다 팽개칩니다. 그 아이의 마음은 오직 지금 자기 눈앞에 사라진 엄마 한사람을 찾는 거예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 하나님이 주시는 건강, 하나님이 주시는 사회적인 지위 그런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에게 소원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는 거죠. 그러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다고 하고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로 만족을 하여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거죠.
시인은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마음이 절이도록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적이 있었고, 또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거예요.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들을 만나 주시는 것, 그래서 참으로 그들을 기뻐하게 해 주시고 즐거워하게 해 주시는 것, 그 이상의 가장 큰 선물이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빌며 아버지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러면서 한 가지 더 비는데 그게 뭐냐 하면 주님께 구원받기를 사모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는 광대하시다 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였어요. 같은 말의 반복이죠. 주님을 찾는 자들이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와 짝을 이루고 그리고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해 주소서 라고 하는 내용과 여호와는 광대하다 말하게 하소서 하고 짝을 이루고 있는 거죠.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광대하다라고 말하게 주시옵소서’ 그게 무슨 뜻일까? 이런 의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논리적으로 모든 해결의 길이 보이고 자기의 힘으로 그것을 넉넉히 해결할 수 있을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시인 자신의 경험을 보니까 속에 있는 근심 걱정 밖에 있는 수많은 원수들, 이 모든 것들의 협공을 받으면서 앞을 보고 옆을 보고 뒤를 돌아보아도 도저히 거기서 헤어 나올 수 있는 어떠한 길도 보이지 않고 그런데 하나님이 놀랍게 자기를 그 모든 고통에서 건져내시고 그것은 자신이 예상했던 바를 초월하는 것이었어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는 끝이 없고 주님의 능력은 무한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 하나님은 자신의 추측의 한계를 넘어서는 광대한 분이시다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은 참 크시고 위대한 분이시다 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대게 두 가지예요. 나의 지성을 넘어서고 그리고 나의 의지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자각함으로써, 하나님을 지각함으로써 그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시인이 고백하는 내용이 바로 그거거든요. 시인이 그것을 경험한 거예요. 도저히 안팎을 에워싼 원수들에 의해서 어떠한 해결의 가망성도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자기를 그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경험하게 되는 거죠.
그 왜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하고 난 다음에 평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잖아요. 그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그 하는 이야기 중의 반복되어서 나오는 게 뭐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애굽에서 건져내시되 어떻게 건져내시냐면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어 나름같이 우리를 건져주셨나이다. 사실이 그런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그 대게 새들이 자기 새끼를 이렇게 발톱으로, 발가락으로 끌어안고 솔개가 왜 병아리를 채 가듯이 그렇게 해서 자기 새끼를 옮긴답니다. 그런데 인제 독수리는 날개 중에서 안 움직이는 부분이 있잖아요. 이렇게 이렇게 하면 여기는 움직이지만 끝에는 안 움직이는데 그래서 이 날개위에 자기 새끼를 업어서 그래서 나른다고 해요. 그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면 다른 것들은 어느 주석가가 그것을 아주 상세하게 해석했어요. 이 솔개같이 닭을 채가듯이 자기 새끼를 발가락으로 붙들고 날아간다면 어미 새를 안 맞추고 새끼 새를 화살로 맞출 수 있죠. 이렇게 보이니까. 맞출 수 있잖아요. 그런데 이 독수리는 위에 새끼를 얹어서 어미를 맞추지 않고서는 도저히 그 새끼를 맞출 수가 없다는 거죠. 근데 그 어미가 여호와 하나님 이예요.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것이 말하자면 다른 원수들이 빼앗아 갈 수 없는 완전한 보호였고 인도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회화적인 표현이라는 거죠. 적어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그 어미 독수리를 맞추지 않고는 그 새끼 독수리를 날개에서 떨어뜨릴 수가 없는 거죠. 아래에서는 그 어미 날개에 가려서 그 새끼가 보이지 않는 거죠.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의 경험이었단 말 이예요. 그러니까 그건 뭘 보여줘요?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 그리고 하나님의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는 거죠. 그것이 바로 시인이 하나님 앞에 비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잘 들으세요. 우리들이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을 만날 때 두 가지가 작용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의 위기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그것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가 바르지 못하고 부실하면 인생의 어려움이 올 때 큰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고, 그리고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인제 어떤 경우가 그러냐면 대부분 하나님을 아주 떠났으면 어려움이 생겨도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버린 사람들의 특징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에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식은 사람의 특징이 독립적 이예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거죠. 근데 살아온 삶이 바르지 않으면서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그 어려움이 닥쳐서 그 어려움을 해결해 볼 요량으로 일시적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죠. 그러죠. 이런 것들은 아주 유아기적인 신앙의 특징이에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달리는 것이 고통과 어려움, 그것 이상이 아닌 사람들은 유아기적인 신앙이에요.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과 기쁨을 발견하고 거기에 지속적으로 끌려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그렇게 우리의 마음을 끌리게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끔 만들어 주는 것은 진리예요. 성경과 진리의 말씀만이 우리를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잡아 끌 수 있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끌리게 될 때 그때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 앞에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감격하게 되는 거죠. 근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할 때 위기가 오면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거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비록 살아온 삶이 하나님 앞에 많이 잘못되지 않았어도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그 순간에 요구되는 것이 뭐냐 하면 믿음이에요. 믿음 자체가 영혼의 작용이에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같은 목사님은 이 믿음을 그냥 사랑이라고 해석했어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다. 그게 곧 믿음의 작용이다. 믿음이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라고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러한 믿음, 그 순간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 전적인 믿음, 이런 것들이 없게 되면 크게 심령이 요동을 치면서 불안해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신자의 일생은 이렇게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고 주님께 붙어삶으로써 어떤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요동치지 않는 그런 견고함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시인이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자신이 하나님의 그런 광대하심을 경험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 그것은 마치 금속에 가해지는 불꽃과 같아서 그래서 찬란한 빛을 발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 밤중에 가끔 보면 불꽃놀이 하잖아요. 팡 쏘면 하늘꼭대기에 올라가서 거기서 빨간불, 파란불, 노란불 해서 찬란하게 불꽃이 일어나잖아요. 그것은 뭐로 만드는지 아세요? 모르죠? 그게 금속가루로 만드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 하면 쇳가루로, 다양한 종류의 쇠의 가루를 그 속에 집어넣어요. 그러면 이제 쏘아 올리잖아요. 쫙 하고 쏘아 올리면 어느 지점까지 올라가서 팍 하고 터지는 거예요. 그때 열이 가해지잖아요. 열이 가해지는 것에 따라서 이제 금속 가루의 종류별로 어떤 거는 파란색을 어떤 거는 빨간 빛을 어떤 거는 파란 빛을 내며 그거를 잘 배치하는 게 기술이라고 해요. 근데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시련, 그 고난 이런 것들은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쇳가루 같은 그 요소들을 거기에 열을 가해서 찬란한 불꽃처럼 그렇게 타오르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고난과 어려움과 역경 이런 것들이 불꽃 속에 있는 화약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것들이 탁 하고 터지면서 그 찬란한 불꽃이 하늘을 향해서 막 솟아오르게 되는 그게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우리의 믿음 생활인 것이에요.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주시고 오늘 이 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나아와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하나님 저희를 도와주시옵소서. 붙들어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의지하며 늘 이기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