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가 나를 저주할 때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 나를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그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나가서는 이를 광포하오며 나를 미워하는 자가 다 내게 대하여 수군거리고 나를 해하려고 꾀하며 이르기를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이제 저가 눕고 다시 일지 못하리라 하오며 나의 신뢰하는바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시 41:5-9).
여기서 시인은 최소한 자기가 이 인생의 깊은 시련 속에서 당하고 있는 고통을 네 가지로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바로 '악감'입니다. 그래서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싼 가운데 "저 인간이 병들었으니 저 인간이 언제나 죽고, 언제나 멸망할까?" 그러면서 악감을 하는 것이죠. 사람은 존재 자체가 소중한 것이지만, 미움은 이득과 상관없이 그 인간이 이 세상에서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미움의 감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당하게 된 이 모든 고통을 하나님 앞에 토해 놓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광포'라 그랬는데 이것은 자신의 명예를 깎아 내리는 그런 행위죠. 시인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다 나쁜 것은 아니었는데, 원수는 그 모든 악한 것을 악하게 해석을 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을 광포하고 또 선전하고 이렇게 해서 그래서 이 시인이 그동안 하나님과 모든 사람 앞에 쌓아왔던 아름다운 덕과 그리고 명예를 허물고 있는 것이죠. 몸이 상하는 것은 조금 상하는 것이지만, 사람의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할 정신적인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은 훨씬 더 큰 고통이겠죠. 이 시인이 바로 이런 것을 당하는 것이죠.
이 시를 아마도 왕이 된 후에 썼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어쨌든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다윗과 같은 임금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올바르게 행한 모든 임금들의 기준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들은 이 다윗의 길로 행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들은 다윗의 길로 행하지 않고,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사람의 어떤 아주 분명한 기준이 됩니다.
이 사람이, 그리고 백성을 좀 사랑했습니까? 권력 있는 자들을 규합하여 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억울하고 병들고 빚지고 원한이 맺힌 사울의 치하에서 짓밟힐 대로 짓밟힌 불쌍한 백성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는 일평생 백성들의 목자처럼 자신을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면서 이 백성들을 이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고통 받게 되자, 수많은 원수들이 이 사람에 대하여 거짓을 말하며, 이 사람의 모든 행한 것들을 악하게 말해서 그 명예를 깎아 내리며, 그 소문을 모든 사람들에게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시인을 보러 와서는 거짓을 말하고 중심에 간악을 쌓았다가 모든 사람들이 이를 광포해서 결국은 이 시인의 명예에 먹칠을 하고, 그리고 한 나라의 지도력을 잃어버리도록 그렇게 조작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게 시인이 당한 두 번째 고통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저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아파서 병이 걸려 누웠을 때에, "이제 저 인간 병에 걸렸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다시는 이 인간이 일어나지 말기를 우리는 바란다." 이러면서 결국은 저주를 퍼부었던 것입니다. 더 가슴 아픈 것은 항상 다윗 가까이에 있던, 자기가 신뢰하고 사랑하던, 함께 떡을 먹어 가족처럼 지내던 인간들이 이 틈을 타서 다윗을 배신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 의해 반역을 당할 때에, 그 때에 다윗과 함께 일생을 같이 하고 피붙이처럼 여기며 돌봐주던 사람들이 자기의 아들을 앞세워 반역을 일으켰던 그 때의 그 사건들을 회고하고 있다고 여겨져요. 자기 자식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식솔들처럼 그렇게 생사고락을 함께 하던 사랑하는 전우들이 자기를 향해 자기를 배신하고, 자기를 향해 발뒤꿈치를 들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러니 그가 악담을 당하고, 그 다음에 명예를 실추 당하고, 저주를 당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조차 자신을 향해 배신의 발뒤꿈치를 드는 이런 상황이 되어서 철저히 고립된 가운데 시인은 이제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는 그런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 세상에서 환영만 받고, 사랑만 받고, 존경만 받고, 대접만 받고, 이렇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이렇게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은 이 세상이 자신에게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혹시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고,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 그래도 그것을 당신 때문에 사랑하기를 원하시지, 당신과 상관없이 주님이 더 많이 그것들을 사랑하고 거기에 헌신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당신이 정말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이 세상에서 마음 둘 곳 없이 모든 삶의 상황에서 대적들에게 에워싸이고 그리고 자신은 아무 것도 없는 순간도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 밖에는 자신이 소망이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이런 사건을 통해 시인의 가슴 속에 확인시켜주는 것에요. 그래서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배신과 저주 속에서 자신의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주님을 의존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거죠.
그런 일을 당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덜 의지할 사람들의 마음과 심령을 깨끗이 고쳐서 당신을 향하게 하시고, 마지막 날에 비록 하나님은 이 시인을 징계하였으나, 하나님이 사랑하는 이 시인을 괴롭혔던 모든 악한 인간들의 행실에 대해서 하나님이 공정하게 갚으실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여 허물이 많아, 주님이 사람을 들어서 우리를 정결케 하실지라도 우리를 악담하고, 거짓을 선전하고, 그리고 저주하고, 그리고 우리가 신뢰하여서 우리와 가까웠지만, 배신을 했던 그 모든 인간들을 하나님께서는 정죄하실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이런 깊은 고난의 때에, 어디 한 곳도 의지할 곳이 없는 절대적인 고통과 괴로움의 때, 이때는 주님을 붙드는 이외의 다른 어는 곳에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하며 벙어리가 되고, 그리고 고요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귀머거리가 되고, 진실하게 자신을 살피며 눈먼 자가 되어서, 그래서 마음속으로 하나님 한 분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