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복수
“그러하오나 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시 41:10).
시편에 보면 복수에 대한 기도가 자주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주 격렬하게 나타나죠. 그래서 이제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해 주시도록 비는 기도와, "내게 힘을 주셔서 내가 저들을 복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는 기도입니다.
물론 이제 그 당시에는 아직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계시가 충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이해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전달된 것처럼 그렇게 풍성하게 전달된 것은 아니죠. 그런 점에서 이제 하나님의 본래의 마음은 그렇지 않지만, 계시의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볼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그 큰 사랑을 이스라엘 언약의 백성들에게 독점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 거죠. 물론 시편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만민들과 그리고 이 땅에 있는 많은 짐승과 그리고 식물들을 먹이고 기르신다는 신앙의 고백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이제 하나님의 자비와 큰 은혜, 이런 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점적인 것이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런 사랑을 아는 지식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시편에 이런 내용들이 등장을 하게 되는 거에요.
그 한 증거가 예수님이 오셨는데도, 예수님이 오시고 그렇게 예수님이 당신 자신의 삶으로, 십자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지만, 성령이 강림하셔서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올바로 깨닫기 전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그때까지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 이니이까?"하고 물어볼 정도로 그렇게 모든 생각이 이스라엘 중심적이었다는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의 이런 복수를 비는 기도들이 등장하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그런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시편에 나와 있는 이 원수를 저주하는 기도는 자기 개인의 원수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적하는 그런 원수들이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개인적인 행복을 위한 욕망이 아니라, 시인들이 하나님 편에 온전히 서서 하나님과 연대를 이루고 있는 언약 백성으로서 자기들을 공격하는 그 사람들의 그 본질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펼쳐지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나라에 대적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한 거에요. 그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자신 있게 이 원수들을 복수해 주도록 하나님께 빌 수 있었던 거죠. 그렇게 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방해받지 않고 나타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러면 결국 원수들의 멸망을 비는 그들의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 두 가지 이유로 해서 이 시편 안에는 원수들의 멸망을 비는 그리고 대적하는 자들의 저주를 비는 기도가 등장하는 거에요.
그러면서 이 시인도 똑같이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옵소서"라고 비는 거죠. 개인이 받는 그 큰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연합되어 있는 언약백성의 지체로서 당하는 공격이요, 고통이기 때문에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다." 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언약적인 연대에 의해서, 이렇게 하면서 이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복수를 비는 거에요. 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완벽하게 자신의 편이 되어주셔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와는 내 편이라, 여호와가 내 편이시니 누구를 두려워 하리니까?" 할 수 있는 담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내적인 담대한 선언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완전한 교통,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완전한 화목, 이것이 있을 때에만 이런 종류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거죠.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이시며 나의 구원이라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나 자신 사이에 거리끼는 것이 없어야 해요. 물론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매일 의지하면서 그렇게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런 사람이 필요한 거죠. 근데 시인이 41편에 보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그런 일로 인하여서 깊이 고통 받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도, 하나님 앞에 잘못했어도,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상대해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을 떠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어요? 긍휼이 필요한 거에요. 이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에요.
죄는 그 비참함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인데, 그 불쌍히 여겨야 할 이유가 어디에서 무엇이던지 간에, 그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하나님의 자녀가 처해 있는 그 깊은 고통의 상태 자체를 보시면서 불쌍히 여기시는 그 마음이 하나님의 긍휼이죠. 그래서 이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사랑은 긍휼과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그것이에요. 우리가 자녀들을 보다가도 항상 마음이 좋은 것은 아니잖아요. 저놈이 뭘 할까? 저건 옳지 않은 행동인데. 그것만 생각하죠. 그러나 자녀가 많이 고통을 받게 되요. 그러면, 그가 고통 받아서 괴로워하는 현재적인 상황 때문에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저질렀던 많은 잘못들이 생각이 나지 않고 그가 처한 비참한 상태가 더 많이 가슴에 다가오는 거에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성향이 없으면, 그런 감정이 생겨날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비유를 하자면, 사랑이라고 하는 이 다발에서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확 쏟아져 올라오는데, 그게 비참한 것과 연결되어서 나타날 때에는 긍휼로 나타나요. 완고한 인간과 관련지어서 나타날 때는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요. 그리고 도움이 필요한 인간들을 만날 때는 자비를 통해 나타나요. 그래서 사랑이라는 그 다발에서 사랑이라는 것이 프리즘을 통과하듯이 쏟아져 나오게 되면 그렇게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는 거에요. 시인이 그런 것을 경험한 거에요. 그래서 결국은 원수들을 보면, 하나님이 자신의 편이 되어주셔야 하고, 자기에게 한없는 능력을 주셔야 할, 그래서 저 원수들을 밟아 이겨야 되겠는데, 근데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않아요. 여전히 양심의 가책과 죄의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니"라고 노래할 수 없는 거에요. 그때 필요한 게 뭐죠? 하나님의 긍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를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키사 저 원수들에게 보복하게 하옵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켜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죠.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곤고함은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있는 거에요. 특히 하나님 중에서도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데 있는 것이에요. 누구도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건 불가능해요. 하나님의 속성의 나타남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게 곧 하나님을 아는 거에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죄인들을 어떻게 용서해 주시는지, 완고한 자들을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그리고 불쌍한 사람들을 어떻게 긍휼히 여기시는지, 불의한 자들을 어떻게 징벌하시는지, 그리고 고난 받는 자들을 어떻게 위로하시는지, 이런 것들을 많이 앎으로서 결국은 직접 보아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끔 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에요.
그래서 세상에는 끊임없는 시련과 고통이 있어요.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수도 자신의 고백록에서 말하기를 "짧은 인생길, 굽기도 하여라" 그런 말을 했어요. 수많은 사연, 인생의 시간의 길이를 보면, 정말 짧은 것 같지만 사연을 보면 한없이 길다는 느낌을 받는 거에요. 그런데 그런 수많은 사연을 안고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받는 유일한 위로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그분의 성품을 깊이 생각하는 거에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남처럼 느껴지는 외로운 때에도 쓰러지지 않고 이길 수 있는 거에요. 그게 바로 당신의 자녀인 나를 긍휼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사랑이에요. 세상의 친구들이 모두 버려도 그분은 언제든지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 이것을 꼭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해요.
시련과 고난이 많이 와요. 그때 우리는 하나님보다는 우리의 자신의 능력을 주목하죠. 우리의 자원으로는 이길 수 없는 환경이 우리를 누를 때, 우리는 낙망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요. 무엇 때문이죠? 우리 자신의 능력과 자원의 한계를 보니까,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전능하시도다." 당신이 말하시는 것을 모두 할 수 있는 위대한 힘을 가지고 계신 위대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는 거에요. 그러면 그 하나님 안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되는 거에요. 그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어디론가 숨을 수 없는 자신, 하나님 앞에서 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거에요. 그렇게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살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그렇게 살 수 없었는데, 하나님이 용서해 주셔서 주님 앞에 살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요. 결국은 하나님만을 붙들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거에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과 합일 될 때에, 그 때에 "저 원수들을 복수할 수 있도록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일으켜 주옵소서"라고 말할 수 있죠. 이게 바로 신앙생활이에요. 그리고 믿음인 것이에요.